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열 두 편의 단편이 희한하게도 술술 읽혔다. 몇 년 전에 읽다가 만 책이어서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많았다. 다만 그땐 왜 읽다가 그만두었는지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어떤 필요에 의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만 읽었을 것이다. 얄미운 고양이 독서를 해놓고선 이 책을 다 읽은 척, 작가를 아는 척 했던 것도 같다. 이런 책은 다시 집어 들기가 참 싫은데 그래서 더 용기를 내보았다.

 

   순서대로 소설을 읽었고 책을 덮고 난지 며칠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이번엔 소설의 해석이나 감상보다는 작가의 삶을 그려보게 되었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이 소설들을 쓸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이야기는 무엇을 상징하고 작가에겐 어떤 의미였을지. 내게 열 두 편의 소설은 같은 이야기로 들렸고 주인공도 한사람으로 보였다. 그 한사람은 자기 인생에 있어 지나가버린 어느 한 시기를 몹시도 안타까워하고 남몰래 후회하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지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시절을 아름답게 살지 못한 회한은 왜 꼭 아름다움이 사라진 후 찾아오는 것일까. 누구보다 담담한 척해도 나는 그 무심함의 지나침이 바로 간절함의 다른 표현임을 알 것 같았다.

 

   알려졌듯이 레이먼드 카버는 주로 부부를 등장시켜 일상의 한 단면을 현미경처럼 관찰하고 시시콜콜하게 포착해낸다. 이들 부부는 한때 죽도록 사랑했고 그 죽을 만큼으로 미래를 약속한 채 달려왔지만 현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거나 되고 있는 중이다. 작가는 실제로 일찍이 알코올 중독과 가정불화로 별거와 이혼을 해 본 사람이고 치료차 입원도 했던 경력이 있다. 그리고 뒤늦게 단칼에 금주결심도 한 바 있다. 그래서였을까. 알코올 중독인 화자가 현재 별거중이거나 이혼한 상태에서 아내와의 재회를 기다리거나 더 확실한 이별을 예감하는 이야기는 원인과 배경만 달라졌지 비슷한 구도로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화자들은 공교롭게도 툭하면 ‘더 이상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대신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낸들 알겠는가’ 하고 태연스레 반문한다. 내 삶의 문제이니 ‘그들이 뭘 찾을 수 있었겠는가’ 돌아보고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할 수 있었겠’느냐 자조를 일삼는다. 그렇지 않고 ‘괜찮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어쩌겠는가’하면서 지속적으로 생 앞의 무력함을 호소한다. 결국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제와 괜찮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게 남은 생을 대하는 자세가 아닌가,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첫 번째 이야기 <깃털들>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문제의 깃털을 선물한 ‘올라’였다. 나와 직장동료인 버드의 부인 올라는 센스가 결여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호감의 민폐형 인물이다.(물론 내 기준에서) 이해는 하지만 두 번은 만나고 싶지 않은 올라가 어리숙한 척하며 할 말은 다하는 사람임을 나는 아직 아이가 없는 프랜에게 자식자랑을 하던 - ‘정말 똑똑해요.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안다니까요. 무슨 말을 하면 그걸 다 알아들어요. 그렇지, 해럴드? 한번 아기를 낳아보세요, 프랜. 금방 알게 될 거예요.’ - 장면에서 깊이 공감했다. 가끔 (현실에서도)못생기고 뚱뚱하고 총명하지도 않은 것 같은 여성이 자신의 유일한 경쟁력이 결혼과 출산이라는 자부심으로 아직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여성을 향해 우월감의 수사를 잔뜩 늘어놓을 때가 있다. 그런 유형은 내 앞에서 그렇게 잘난 척을 하면서 너는 왜 아직도 남자가 없으며 결혼해서 아이도 없느냐는 핵심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전달하고 싶어 한다. 또 그런 유형은 외모적으로 평균치가 되지 못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나는 이 정도 밖에 되지 못한다는 자기비하와 지나친 배려를 통해 상대방을 더욱 숨막히게 하곤 한다. 사실 이 작품은 어떤 일이 있고 난 후 천천히 시작되는 변화와 그것을 감지하며 그것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사후평가가 굉장한 쓸쓸함으로 남겨지는 글임에도 나는 그저 올라의 역겨운 치열과 그녀를 닮은 못생긴 아이의 얼굴만 강렬하게 남았다. 소설에서 강한 캐릭터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게 한 작품이다. 

 

   <체프의 집>에서 인상적인 대화는 내가 다른 누군가가 될 수는 없다는 화자의 항변같은 대답이다. 별거중인 아내에게 답하긴 했지만 결국 헤어짐을 받아들여야하며 더 이상 같이 살수는 없는 이 상황에 처한 자신에게 답하는 말이기도 했다. 웨스는 여름 한동안 남의 집에 머물며 아내와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를 불태워보았지만 결국 그 집은 주인의 상황에 때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하는 집이었다. 아무리 지금이 행복하다고 해도 과거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 작가는 아마 술을 끊기 위해 마음으로는 어떤 결심도 하였겠지만 제대로 실천한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 당시 (작가가)술을 끊으려 했던 이유가 아마도 같이 사는 사랑하는 대상과의 갈등과 함께 문제가 발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즉, 누군가를 위해서 누구 때문에 끊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그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대한 리뷰는 故 박완서 작가의 수필에서 만난 적이 있다. 작가가 이미 아들을 사고로 먼저 보낸 어머니였기에 아마도 그 심정을 더 공감하는 것으로 보였는데 줄거리 말미에 ‘삶이란 존엄한 것인지, 치사한 것인지 이 나이에도 잘 모르겠다’ 하셨다. 왜냐하면 아들을 잃고도 빵집아저씨와 밤새 대화를 나누며 빵을 먹는 모습을 보니 부부의 삶은 계속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고, 고통스럽긴 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게도 퉁명스러워만 보이던 빵집주인 - 평생 빵이나 만들면서 살 사람 같은 - 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밤새 굽는 빵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책이 아닐까 싶었다.

 

   또 하나 이 소설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 즉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한 입장과 그 건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입장이 마지막에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무 일 없는 일상과 무슨 일이 터진 일상의 합이 결국 한 사람 인생의 총합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모두 오늘 하루가 어제와 같고 내일은 오늘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아침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어느 날 갑자기 중단되었다가 거짓말처럼 다시 운행되기도 한다. 멈추었다 다시 움직이는 때가 언제이고 무슨 이유때문인지를 몰라서 그렇지 이 원칙은 일상을 운행하는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사실을 사실 중단되기 직전까지 우린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한 번도 불행을 겪어보지 않은 자가 곧 다가올 불행을 두려워하는 다음의 예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 어떤 쓰라린 경험도 없었다. 운이 다하면,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면, 한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 p102

 

   배경이 집이고 관계가 부부이니 인물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이 집을 방문해 현관을 통과하고 문을 열고 등장하는 모습도 빈번하다. 늘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이지만 작가는 그곳을 불길함을 제공하는 상황으로 이용하고 섬세한 디테일은 초단위로 이루어진다. 소파, TV, 냉장고, 전화, 책상과 같은 소품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보여주고 각종 음료수 및 음식을 놓고 대화가 이어진다. 대단한 사건이나 특별한 갈등이 아니라 단지 어제도 하던 일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할 줄 알았던 일, 그 자리에 같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존>은 바로 냉장고가 고장 난 일이 어떻게 일상을 무너뜨리고 관계를 보존하지 못하게 하는지 서늘하게 보여준다. 일마치고 돌아온 저녁 왜 갑자기 냉장고의 프레온 가스가 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운전 중 중고차 바닥에서 새어나온 일산화탄소에 질식해 사망한 아빠가 떠오르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단지 음식물을 보존하는 기능이 잠시 고장 난 것일 뿐인데 그날 저녁의 풍경은 앞으로 더 크고 많은 것이 보존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나 역시 언젠가 세탁기가 고장나고 TV가 고장 난 적이 있다. 한 겨울 세탁기 AS는 그날 일과 중 가장 큰 스트레스였고 TV는 결국 새 제품으로 구입하게 되었는데 며칠 괜히 불안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집안 가전제품이 우리 일상을 아무 일없게 무사히 가동시키는 핵심 장치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칸막이 객실>은 목적지가 분명하고 만나는 사람이 확실함에도 왜 인간은 불안과 두려움에 직면하는지 이동 중인 화자를 통해 주도면밀하게 보여준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 외려 스스르 ‘잠속으로 빨려들어’ 자신도 모르게 잠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얼마나 무수히 잠 못드는 밤을 지내고 난 뒤 깨달았을까. 사실 우리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 어떻게 편히 잠들 수 있단 말인가. 어떨 땐 앞일을 모른다는 것이 커다란 축복일 때가 있다는 것, 그건 아마도 어떤 일을 겪고 난 후 그 일을 겪기 전을 떠올리며 비로소 깨우친 인생의 진리는 아닐까 싶다.

 

    <비타민>에선 어쩌다 복합비타민 방문 판매 일을 하게 된 아내가 등장한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배신당하고 아내는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며 ‘어른이 돼서 비타민이나 팔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남편에게 넋두리한다. 결말에 이르러 남편은 골치가 아프므로 비타민이 아닌 아스피린을 찾으며 늘 필요하지 않지만 가끔 필요한 인생의 무엇을 환기시키며 피식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인생은 이처럼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자리를 바꾸어가며 정답을 찾으려는 우리에게 사는데 정답은 없다고 끊임없이 경고한다. <조심>에서는 별거중인 남편을 찾아온 아내가 정작 하려고 했던 중요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못하고 남편의 귀지만 파다가 돌아간다. 이때 작가는 어쨌거나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하고 안 되면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보는 것이 인생이라 말한다.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은 작가의 자전소설 느낌이 많이 드는데 왜 술 마시는 버릇이 들었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독백이 잊혀지질 않는다. <조심>에서도 알코올 중독자가 남편인데 이들은 절대 혼자서 병을 치료할 수는 없어보였다. 그리고 여자 친구나 아내가 자신들을 예전처럼 돌보아주지 않는 것을 다시 알코올 의존에의 이유로 치환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 중 만난 굴뚝 청소부 J.P의 아내가 외모도 건실한 여장부처럼 묘사되었고 다른 중독자의 아내들도 무척 현명하고 능력 있는 고학력자로 보인다. 이들은 <열>에서처럼 자신의 전공이나 사랑을 이유로 집을 나가거나 혼자인 남편을 - 혼자두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 방치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떠나가는 쪽이 아내이고 버려지는 쪽이 언제나 작가와 같은 남자 쪽이다. 그들 화자들은 누구를 탓하느냐 하면서도 마지막엔 ‘자기 자신을, 자신의 부주의함을, 자신의 확신을 탓’하기도 한다. 즉, 버려질 만 했다는 자책과 반성인 것이다. 허나 이런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다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제 앞으로는 두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각자 상대방 없이 할 수밖에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순간 그 무엇보다도 슬픈 일처럼 그에게 느껴졌다.      - p284

 

   상대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 과거의 연을 좇아가던 한 시기,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난 것이라 인지한 바로 그 순간의 슬픔과 충격이 작가에겐 한 평생 짐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의 여주인공이 총구를 겨냥해야 했던 주인공은 바로 작가 자신은 아니었을까. 끝내 총을 쏘지 못하고 대합실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여자가 목격한 장면은 늙어서도 티격태격하는 老커플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시간이 되어 기차는 도착했고 이곳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그 기차에 올라탔건만 승객들은 도통 심드렁하다. 원래부터 남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객들은 살아오는 동안 그보다 더 희한한 일들도 봐왔다. 잘 알다시피 세상은 별의별 종류의 일들로 가득하다.    - p241

 

   ‘기차가 움직이면 저마다 기차가 서기전에 빠져들었던 생각, 자신들의 문제로 돌아'갈 뿐이라는 작가의 결론이 나는 아무리 심각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니 특별할 것 없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가정을 파괴하는 알코올 중독자가 살짝 경마도박꾼으로 바뀌어 등장한 <굴레>에선 추락중인 가장이 아파트를 떠나면서 ‘낡은 검은 가죽의 말굴레’를 두고 간다. 굴레를 두고 간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엔 이사를 핑계삼아 굴레를 버리기 적당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아니 이사를 가게해서라도 굴레를 잊어버리게......

 

   마지막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대성당>은 어쩌면 작가의 이루지 못한 소원처럼 느껴져 여운이 길었다. 맹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감각하나를 잃어버린 사람과 정상인과의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소통이라는 것이 꼭 정상적인 사람들끼리의 축복된 전유물은 아니라는 의미도 있다. 요즘 같으면 서로 테이프에 녹음한 소식을 주고받는 일일랑 무슨 전쟁세대의 낭만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작가는 작품 말미에 도저히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자의 남편이 맹인과 짜릿한 공감을 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남편이 살면서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던 맹인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이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아, 젊은 양반? 그러기에 삶이란 신비롭다니까.      - p351

  나는 그 순간 맹인이 작가라 확신했고 남편은 살면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자신과 소통하지 못한 세상 모든 이의 표상이라 믿었다. 그리고 남편이라는 모든 독자들이 그에게 ‘It's really something’, 이거 정말 뭔가가 있다고 말해주길 간절히 바랐다고 느꼈다. 열 두 편의 이야기 중 가장 해피엔딩이면서 또 가장 울림이 크고 넓었던 이유는 마지막 대사가 마치 어느 대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소설은 지으려고 꾸미려고 노력해서 나오는 이야기 같진 않다. 인생이라는 게 대단히 뭔가가 있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닐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인생이라는 이것이 정말 뭔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정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은 별의 별 종류의 일로 가득하지만 사람들은 오늘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또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듯이’ 내일을 기다린다. 결코 아무 일 없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을 리 없겠지만 저마다 자기 삶의 무게를 견뎌내며 종착역을 향해 달려간다. 몇 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없으므로 주어진 일을 닥쳐온 이별을 버려야 할 굴레를 내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다 받아들이고 나서 정말 뭔가가 가득하다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다행인건 누구에게도 그 순간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마 작가는 너무 오래전에 그것을 알아버렸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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