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3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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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을 다 읽었지만 불행히도 무엇을 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렇게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 하는 경외감은 오래 기억해두고 싶다. 전체적인 느낌은 <이방인>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방인>보다 더 심했다고 본다. 어렸을 때 TV에서 안개가 자욱한 파리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 이해는 가지 않으면서도 희미한 안개를 따라 끝까지 채널을 돌리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대사도 거의 없고 주인공끼리 가끔가다 던지는 한마디의 의미도 모르겠고 방금 헤어진 것 같은데 다시 만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가 헤어지고 끝난 것인지 다시 만남을 암시하며 끝난 것인지 내가 눈으로 보면서도 알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설음이, 이 맑은 가을날 생생하게 재현 되었달까.

 

  그동안 살면서 골키퍼가 공을 막지 못하고 공이 골인되는 것을 목격하는 심정이 어떠할지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같은 운동장에 있지만 골키퍼가 다른 선수들보다 고독하고 불안하겠다는 생각은 그러니까 4년에 한 번 씩은 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연장전을 마치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페널티킥까지 가는 상황에선 늘 골키퍼가 키커보다 더 유리하다고 여겨왔다. 막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막는 것이 기적에 가까우므로 막지 못했다고 욕을 얻어먹지는 않을 것이기에. 다시 말해 넣지 못한 죄보다 막지 못한 죄가 덜하다고,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페널티킥을 성공하지 못한 키커는 돌릴 수 없는 역적으로 남기 십상이라 사실 골키퍼의 불안 같은 건 키커의 좌절과 비할 바가 아니라고까지 여겨왔던 것 같다. 물론, 내가 골키퍼가 아닌 관객의 입장이니 그랬을 것이다. 이 오랜 고정관념을 책 한권이 깨트려 주는 시간이었다.

 

  이 작품에서 블로흐는 과거 꽤 유명한 골키퍼였기에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운동장과 골대와 공과 선수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품 서두에 이렇게 써 있는데 결국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는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까봐 불안하고 또 불안한 사람일 것이다. 골키퍼에게 있어 골인은 자기 존재 소멸의 순간을 상징하지 않을까. 세상이 나 하나의 고통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나라는 존재가 운동장에 없는 투명인간이 된 느낌일지 모른다. 어떨 땐 내 앞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내가 보고 겪은 일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 엄청난 잘못이나 실수를 저질렀을 때 정말로 내가 한 일이 맞는가? 싶을 때도 있다. 끔찍한 사건 현장을 목격했을 땐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던가? 싶기도 할 것이다. 이미 일어난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일치시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인간은 이렇듯 자기 눈앞의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부정하는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사실을 외면한 채 또 다른 현실을 만들며 살아가는 것일까.

 

  블로흐는 해고당한 기념으로 거리를 배회한다. 우연히 만난 여자와 일탈을 감행하지만 여자는 블로흐의 현실을 일깨운 이유로 그의 손에 죽게 된다. 블로흐가 여자를 죽인 이후 돌아다니는 곳은 극장, 카페, 우체국, 기차처럼 시간이 되면 문을 닫는 곳이고 자신의 집이 아닌 여관에서 잠을 잔다. 늘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목적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이 하루하루 정처 없이 되는대로 돌아다닌다. 자신이 거기 왜 서 있는지도 모르고 상대와 왜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서 있고 떠든다. 가끔씩 순경이나 세관직원이 감시와 관찰의 직무를 수행할 때나 긴장하고 정신을 차리려 하지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인식조차도 무의미하게 보인다. 세상엔 그런 그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그가 그런 줄 아무도 모른다.

 

블로흐는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곧 걷기 시작했다. 잠시 서 있다가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속도를 내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멈춰서, 방향을 바꿔 일정한 걸음걸이로 달리다가, 발걸음을 돌리고, 다시 또 돌리고, 멈췄다가, 이제는 뒤로 달리다가, 다시 뒤로 돌아, 앞으로 달리다가, 다시 또 뒤로 돌아, 뒤로 가다가, 다시 앞으로 달리는 자세를 하고, 몇 걸음 걷다가 빠른 달리기로 바꾸었다가, 감자기 멈춰 서서, 갓돌에 앉았다가, 갑자기 계속해서 달렸다.    - p93

 

  나는 이 문장이 곧 이 소설의 줄거리라 보았다. 이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는 중요치 않고 오직 그 이후 같은 패턴으로 불안을 표현하며 산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것. 나는 저 행위가 축구선수, 골키퍼의 행위를 상징한다고 본다. 블로흐는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경기를 관람할 때, 공격하는 시점에서 처음부터 공격수는 쳐다보지 않고 그가 향하는 골문에 선 골키퍼를 주목해 본 적이 있는지’ 정중히 물어본다. 물론, 관객입장이었던 내가 주목해 본적이 없다고 답하긴 미안하다. 주목하는 경우는 바로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일 때, 그러니까 골키퍼가 가장 고통스럽고 극도로 불안을 느낄 때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블로흐는 자신이 방황이라고도 생각지 않는 방황을 반복 하다가 소설의 마지막에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것으로 자신의 현실과 마주하며 끝이 난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은 골키퍼의 두 손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키커를 바라보며 블로흐는 한줄기 지푸라기로 문을 막으려는 골키퍼가 된다. 한마디로 내 이런 절박한 심정을 당신도 좀 느껴보시란 말이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었던 블로흐의 직업이 골키퍼였다는 사실을, 한방 먹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블로흐가 해고를 당하긴 한 것일까. 책을 덮으면서 강하게 떠오른 의문은 이 모든 것이 블로흐라는 현실부정형의 인물이 생각하는 일종의 망상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현장감독의 눈짓하나를 해고로 해석하는 주인공이 시발점이다. 그가 문제에 부딪혀서 그것을 처리하고 헤쳐 나가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즉흥적, 직관적, 충동적이다. 무의식이 무장 해제된 사람처럼 제정신인 경우가 드물다. 타자의 언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인식하지도 해결하려들지도 않는다. 일어난 상황과 자신이 보는 것들을 스스로에게 질문할 뿐 절대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소극적인 시도는 하지만 인식과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이어서 나는 블로흐가 어쩌면 ‘사건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과거 어떤 사람과 있었던 일 자체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사건 자체에 대한 해석을 내 마음대로 부여하고 오랜 세월 그 의미를 사실과 다르게 인식하려 부단히 노력했더니 정말로 없는 사람, 일어나지 않는 일로 느껴져 스스로 놀란 적이 있다. 그런 일이 없었다고 강하게 믿어보면 또 그렇게 믿어지는 것이 인간의 강하디 강한 나약함은 아닐까. 있는 사실도 없다고 믿으면 없어지고 없는 사실도 있다고 믿으면 있어지는 게 인간이 저지르는 대표적 망상행위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블로흐는 골키퍼 일 때 공이 들어간 적이 없다고 믿고 경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저 당당한 키커의 힘찬 발길질을 한번 견뎌보고 싶다.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로서 그 불안한 순간을 끝내 이겨내고 싶다. 뒤로는 골대를 두고 앞으로는 공을 두고서 기껏해야 골이 들어가는 일 밖에 더한 일이 있겠는가. 내가 매번 골을 막으면 키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골이 하나도 없는 경기를 관람하는 관객은 얼마나 재미가 없겠는가. 골키퍼는 분명 다른 선수들보다 골을 더 잘 막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왕관을 쓰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하듯, 공을 막으려는 자 골인의 아픔을 견뎌야 하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가끔은 온 세상 사람들이 나를 향해 공을 던지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 사람들이 하필 골키퍼 나 하나 맞으라고 공을 던지는 건 아닐 것이다. 설령 공에 몇 번 맞았다 하더라도 그건 다음 공을 잡기 위한 내 노력이자 하필 골키퍼를 택하였기에 정당한 내 몫일 것이다. 공이 라인 위로 굴러 오는 것을 목격하는 골키퍼가 되고 싶진 않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이 굴러왔기에 그 공을 잡을 수 있었는지, 그렇기에 앞으로 또 얼마나한 공을 잡을 수 있을지를 떠올리고 싶다. 공은 잡을 수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니까. 가끔 들어가는 공 때문에 골키퍼를 그만두는 건 이미 골키퍼가 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은 아닐까, 싶다.

 

  모든 페널티킥 앞에선 세상 모든 골키퍼를 응원한다. 그건 어쩌면 세상 모든 현실을 막아내고 그러면서도 뚫린 채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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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00: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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