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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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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가단 ?

이 책을 덮고 자꾸 떠나지 않던 생각이 하나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평가단이다’, 라는 자각이었다. 의미가 있었다면 이 책은 나로 하여금 ‘평가단’으로서 서평을 작성해야 한다는 책임과 역할을 환기시켜 주었달까. 즉, 나는 이 책을 러셀을 만나보기 위해 집어든 것이 아니라 평가단 임무수행을 위해 펼쳐든 것이었고 그것은 러셀을 만나고 싶었느냐와 그리하여 만났느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러셀을 만났는지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의무감 때문에 나는 며칠 이 책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7기와 8기의 소설평가단을 하면서 해당책의 서평에 부정적인 평가를 한 책은 딱 두 권이다. 한 권은 출판사의 마케팅 방향과 책 내용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고 한 권은 홍보와 달리 세간의 화려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단점때문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번 모두 나름의 내 논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평가단으로서 부정적인 평가는 주로 책에 대한 반론으로 귀결된다. 논리의 이면에는 근거나 자료를 제시하여 비록 주관속에서라도 객관을 유지하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근거나 자료가 없다면 결론을 유추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기라도 해야 한다. 내 맘에 들면 좋은 책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책이라 말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지만 후자를 말할 땐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보다 논리적으로 정리해야 설득력이 생길 터이다. 그런데 이 책은 바로 그 평가라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 평가가 함정이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평가만 하지 않는다면 글로써 서평이라는 기록을 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미소지으며 책꽂이 한 켠에 꽂아 두어도 좋을 책이었다.

나는 ‘평가단’과 일반 ‘서평자’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지난 두 번의 평가단을 수행하면서 지금에서야 얻은 결론이다. 우선 평가단은 (평가를 하고 싶다는)자발적인 신청에 의해 (평가의 자격을 얻어)선정된 사람들이다. 선정의 기준은 평가단을 선정하는 사람들의 몫이지만 대개 이들은 텍스트의 분석 및 이해력, 문장력이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른바 책좀 읽고 글좀 쓰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아마도 그렇게 책좀 읽고 글좀 써왔다고 보여지는 사람들이기에 신간의 평가를 맡기는 것일 터이다. 만약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수행단을 ‘평가단’에서 그냥 ‘서평단’으로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서평단’으로 칭해준다면 나는 평가를 하고서도 평가한 것에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와 굳이 평가라는 미션에 예민한 이유는 두말없이 내가 ‘평가단’이기 때문이다. 사실 7기와 8기 때는 평가단이라는 미션보다는 성실한(?) 서평자로서 한 권의 책을 통한 서평 한 편에 완성도를 높이는 쪽으로 글을 써왔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게 서평이 작품화(?) 되면서 작위적인 문장이 늘고 책을 말하기 보다는 서평자체, 문장과 논리의 완성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과다필력의 부작용으로 ‘평가’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어찌보면 나 자신과 내 글만을 위한 서평여행이었다. 솔직히 글은 얼마든지 써도 정작 평가는 하고 싶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내가 무어라고’ 하는 생각도 있었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그럼 여기서 평가라고 했다고 모두 부정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누군가 반론을 한다고 치자. 평가에는 물론 호평도 포함되지만 평가를 하고 그것의 결과를 적을 때는 반드시 호평인지 혹평인지, 아님 모르겠다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평가하고 싶지 않다던지 하는 위치를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중요한 임무를 방기한 채 한 권의 책을 내 입장에서 다시 적어보려만 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평가를 한다고 자각한 채 평가를 내려본 적은 거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내겐 이 사실이 땅을 칠만큼 중요했다. 러셀이 이 책을 통해 가르쳐 준 것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자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를 스스로 밝히는 것이었다. 평가의 오류를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이유는 이 책을 말할 때 나는 좋은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인데 내가 평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입장이라면 이 책은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만 싶었지 말하거나 그 결과를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읽는 것까지는 긍정할 수 있으나 어떻게 읽었는지 적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처음으로 깨우쳤다. 이것은 중요하다. 내가 평가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면 이 책을 선택하려는 사람에게 이 책의 좋은 점만 말해 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내 맘에 안들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몇가지 이 책의 좋은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내 서평을 우연히 읽었다면 그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내 평가는 누군가의 우연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러니까, 까놓고 이야기하면 이 책은 어쩌다가 평가단에게 평가 받아야 할 불운을 안고 가는 경우인 듯하다. 이 책은 스페셜하게도 러셀의 책에서 베스트만 발췌한 명언집이다. 가만보면 콜렉션의 소장 유무는 평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미 확실하고도 훌륭한 평가를 받은 사람에 한해 행해지는 작업이고 콜렉션 자체가 마케팅을 소구하는 작품이니 책의 구성이나 편집이 허술하다고 하는 것은 넌센스일지 모른다. 단지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러셀의 책을 단 한권이라도 독파를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인데 (이렇듯 평가자격이 없는데도 불구)그렇더라도 나는 이 책에 딴지를 걸 수 있는 자격을 이미 얻었다. (조용필 베스트, 조수미 베스트를 받았는데 조용필, 조수미를 모른다고 베스트에 딴지를 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니 나에게 이 책이 안좋았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오로지 평가의무에만 귀속되는 일일뿐이라는 것이 나로서는 영 기분좋지가 않은 책인 것이다. 한마디로 심사위원 자격도 안되면서 (심사위원이니까)점수 매기는 부끄럽고 속터지는 기분이다. 그러므로 이번 책에 대한 서평은 평가를 위한 평가임을 먼저 밝혀둔다.

이 책은 러셀의 책?

먼저, 나는 이 책을 통해 러셀을 만나지는 못했다. 스쳐 지나갔다고 해야 맞을 듯 하다. 가장 큰 원인은 러셀을 알기에 이 책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알았다고 여기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어떤 이는 그런대로 도움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런데 과연 어떤 부분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 질문한다면 무어라 답할지 궁금하다. 이 책의 편집자가 원하는 방향대로 ‘러셀을 더 알고 싶다’ 정도의 대답이 나온다면 다행이지 싶다.

중요한건 <버트런드 러셀의 베스트>가 러셀이 죽고 나서 편집자의 임의에 의해 모아진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베스트를 택하는데 있어 러셀은 검수를 했다. 최종원고를 검토하고 몇주 뒤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말이다. 70여 년에 걸쳐 집필한 자신의 책중에(이 책에서 발췌한 책은 40여 권이라지만)특정한 문장을 발췌하여 여섯 개의 하부 주제(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과 결혼, 윤리)아래 위치시키는 일(의 교정)을 98세에 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베스트 선정으로 새로운 책이 탄생하는 것을 그가 원하였는지, 구성과 방향이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편집자의 작업에 최종동의를 한 것이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러셀은 더 이상 원고를 수정한 적이 없다. 가수로 치면 칠십 주년 기념 골든 베스트 앨범작업(의 프로듀싱)을 막 마치고 얼마 후 사망한 것과 같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소장가치가 있으며 유작으로서 러셀의 일생과 학자로서의 업적을 정리하는데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할 터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책이 의도한 의미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는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바로 그 베스트로 선정된 본문의 무책임함이었다. 손가락으로 일일이 세어보니 한 개의 세부주제 하에 최소 서른 개에서 오십여 개의 발췌문이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윤리’의 장에는 가장 많은 육십 여개의 문단이 구성되었다. 나는 한 개의 장에서 약 열 번 이상은 독서의 흐름이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전후 맥락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선택된 문장이 구성상 서론인지 결론인지, 어떤 주장의 반론인지 동감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략 다섯 줄에서 열줄 정도 되는 한 개의 문단을 뚫어져라 정독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더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이 문단이 노벨상 수상 연설문에 속한 것인지 철학책에 있는 것인지 그게 다였다. (제목옆에 출간연도라도 표기했다면 시대를 가늠해보기라도 했을텐데, 이건 인용문의 기본적 태도가 아니다. 러셀이 평생동안 한말일까? 살면서 한번도 변하지 않은 생각일까?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이 길었던 만큼 어느 시기, 어떤 시국에 출간된 책인지 정도는 인지하면서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한 일 아닐까? 맨 뒷편에 참고문헌처럼 연도를 표시해 준 것은 확인하고 싶으면 앞뒤 넘겨가면서 보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 그런데 나중엔 책의 제목도 큰 의미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인 문체의 톤이 풍자의 뉘앙스를 가진 사설조였기에 러셀이 논리를 주장하는 방식, 결론을 맺는 습관정도에만 익숙해졌을 뿐이다. 선정된 글의 순서에 어떠한 의도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고 특별히 그 부분을 싹뚝 잘라내어 이곳에 같다 붙인 이유도 와닿지 않았고 나중엔 크게 구분된 상위주제가 변별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특히 마지막 장 ‘윤리’에 해당되는 발췌문은 내용상 ‘종교’와 큰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였다.

이것은 완성본 없는 싯구절의 향연이 아니다. 무차별하게 배치되어 있던 이 랜덤의 규칙안에서 나는 꼼짝없이 숨막히는 시간을 보냈다. 전체적으로 사색을 방해하는 구조, 생각의 확산을 저지하는 구성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발췌문의 앞뒤를 장식하던 ‘편집자의 여는 글’과 ‘해설자의 닫는 글’도 내용상 열고 닫는 의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하나로 합쳐도 더 깔끔하고 잘 정리되어 보였을 것이다. 아니면 열고 닫는 글을 이 책의 가이드라고 보고 발췌된 문단을 다시 소주제로 나누어 편집자가 중간의 대화를 이끌어가는 방식으로 일관된 사유를 유도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한편의 시를 조각조각 분해해 해석하며 평을 덧붙이는 방식의 평론도 하나의 대안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 다듬은 것처럼 보이도록 앞뒤에 프레임을 배치시켜놓고 완전 발췌문은 산발적인 자유 랜덤플레이로 방치한 것이 아닐지. 비편집자인 출판의 문외한인 나로서도 이 책은 아직 원고단계였다는 생각,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기왕에 러셀이 말하려 했던 모든 것을 친절하게 여섯 개의 주제로 나누었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전달하려 했다면 좀 더 독자를 배려해야 하지 않았을까.(나처럼 러셀의 책을 한권도 제대로 안 읽어본 사람에게도) 아주 최상의 재료들을 일렬로 나열해 놓고 아직 요리를 하지 않은 상태라는 느낌을 받은 건 나만의 결론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끝내 러셀을 만나보지 못하고 볼듯 말듯 잠시 스쳐지나간 쪽에 속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스침의 느낌이 좋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이 책은 러셀과 그의 다른 책을 말하지 않고서는 독립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기 힘든 책이다. 아쉽게도 단일본으로서는 책의 의미를 가치있게 백프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뜻에 다름아니다. 이번 러셀 베스트가 책으로서 가치에 부합하여야 하는가는 이미 이 책의 원고가 러셀의 본문이기에 중요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러셀은 이미 충분히 가치있는 저자이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러셀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러셀의 책으로서 가치를 전달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러셀을 말하는 방법적인 문제이니 결국 책이 구성되는 근본적인 부분을 건드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러셀을 말하려다 말 못하거나 안하느니 못한 상황이 된 것 같다. 그러니 이 책은 러셀이 집필한 내용만으로 책을 만들었으나 러셀의 책은 아닌 것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쉽다. 나는 러셀의 모든 작품이 이런 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 한 권만을 본다면 러셀의 논리는 심오하다기 보다는 퍽이나 유머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구성하는 발췌문들은 러셀이 말하는 ‘상당히 교육받은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 (의도적으로)여성노동자를 포함한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로만 선정된 듯하다. 나는 원래 어려우라고 하면 누구보다 어렵게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진지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당신들을 위해 쉽게 쓰는 것이다, 라는 러셀의 지적우월감은 이글로만 러셀을 만나는 입장에선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기껏 대중적인 글을 발췌하여 대중을 설득하려했던 그의 노력을 알리고자 했건만 정작 대중인 내가 잘난척 하는 태도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나는 책을 읽으며 나같은 사람이 이 책의 주요타겟군이라고 느꼈으니 말이다. 기왕이면 (편집자의 판단에)어렵다고 생각되는 글도 발췌하여 비교해볼 수 있었으면 어떨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문제이니 롤러코스터를 타듯 현격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러셀을 더 존경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교육’을 말하는 러셀은 세익스피어를 조각조각 암기하게 하는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이 그의 이름만 들어도 현학적이고 따분하게 생각하게 되고 결국 학교교육이 세익스피어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한다는 따끔한 질타를 하고 있다. 꼭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러셀의 조각조각을 확인했더니 우리네 지식인과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무지막지한 착각을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같이 단 오분이라도 러셀과 만나서 눈맞춤이라도 하고 싶은, 그리하여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앞으로의 더 깊은 성찰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여간 실망스러운게 아니다. 대체 어느 문장을 보고 러셀의 이전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러셀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만남이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런데 이미 러셀을 독파하고 그의 뜻을 충분히 학습한 사람들은 과연 이 책이 필요할까? (필요보다는 기념이 가깝지 않을런지)

그래도 러셀처럼 !

하지만, 이 책이 가진 가치성과 필요성에 대한 치명적인 단점을 제외하면(?) 그 스쳐가는 느낌속에서도 공감과 끄덕임이 없지는 않았다. 가장 공감한 글은 ‘종교’를 말하는 부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합리적이고 납득할 만한 근거가 없을 경우 어떠한 것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러셀은 열다섯 살 이후로 기독교를 믿지 않아왔고 ‘무엇 때문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지를 알리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했다. 내 보기에 러셀은 평생을 자신의 이유를 말하는데 소진했다는 생각이다. 기독교를 믿지 않게 된 이유는 곧 종교에 대한 신랄한 반론을 뜻했다. 나 역시 종교는 ‘절대성’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성’의 문제라는 생각을 가진지 오래다. 종교가 필요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종교를 선택하면 된다는 주의다. (그러므로 종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종교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종교가 가진 아이러니다. 종교마저 절대적이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 삶에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종교의 절대성을 냉철하게 해체시키고 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서구세계에서의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가 개념을 정의한 문장중에 가장 반가웠던 건 ‘신념’을 말할 때였다. 러셀은 ‘신념’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정의했다. 어느 누구도 증거가 있는 것을 ‘신념’이라고 부르지 않으므로 신념이 해롭다는 것. 너무나 맞는 말이라 흠칫하면서도 짜릿했다. 이 연장선상에서 ‘신의 존재를 입증할 증거가 전혀 없을 때 사람들은 신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중거가 없으니 믿게된다는 논리가 신선했고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꿰뚫고 직시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러셀은 종교적 신앙에의 열망을 ‘두려움’이라는 인간본성으로 이해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낙관적인 신념을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두려움에 호소하여 두려움을 인간운용의 방편으로 삼은 종교는 결국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러셀은 신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이루는 것은 바로 ‘과학적 진실성’이었고 사고의 기초를 관찰과 추론에 두는 습성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가 이성의 힘을 신뢰한 철학자였다는 것은 이 책을 이루는 수많은 발췌문의 반복되는 논리형식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는 있었다. 이성理性은 ‘reason’이다. ‘reason’은 ‘이유’나 ‘근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러셀은 이성적인 사람이므로 ‘이유와 근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발췌문은 독특한 주장을 한 후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말하고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문제를 매듭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예리함에 추가된 것이 있다면 어른된 이성을 꼬집는 아이의 감수성이다.

우리의 도덕 체계는 금기로 가득 차 있다. 가장 존엄한 사항들과 관련해서도 갖가지 금기가 있다. 오늘날 죄악으로 분명히 인정되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범하지 않은 죄가 있다. 성서에 이르기를 “네 이웃의 소를 탐내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웃의 소를 탐낸 적이 없다. 241p

나는 이 문장의 마지막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웃다가 결국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러셀에 의하면 법률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도덕적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문장을 보면 꼭 나는 도둑질 하지 않았으니 죄인이 아니라는 사기꾼이 생각난다. 그리고 남의 것을 욕심내어 본 적이 없다는 자신의 철학을 성서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을 들어 재치있게 비유한 그의 감수성이 순진한 남자아이의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유일하게 나를 웃게 한 글이고 그로써 이 책에 가졌던 반감이 누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이 책은 많은 걸 감안해야 하는 책이다. 가장 아쉬운 건 러셀의 ‘논리적 사유’를 만나는데 이해가 아닌 감상의 차원에 그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러셀이 이런 말도 했다는 자료나 증거, 인용의 문장으로서는 충분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통해 그나마 전체 내용이 궁금해진건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의 마음을 말하다. 1960>정도 였다. 발췌문은 에세이와 인문서적이 섞여있었지만 대부분 에세이로 느껴졌던 영향이 컸다. 마지막으로 러셀이 자신의 주장과 의견을 피력하는 글이 아닌, 세상을 향해 떠오르는 생각을 편안하게 읊조린다는 생각이 들었던 글을 옮겨 적어본다. 일백년 가까이 살았던 한 철학자가 노년에 말하는 행복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고요한 울림을 전해준다. 그 치열했던 인생속에서 탄생한 마지막 통찰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었다는 점이 숙연해진다. 어쩐지 ‘나는 이웃의 소를 탐한 적이 없다’는 말과도 통한다고 느껴진다. 나도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있게 이웃의 소를 탐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러셀의 모두를 혹은 일부라도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말한 행복만은 오래 기억하고 싶다. 그가 행복을 말하는 방법, 그리고 행복의 본질 그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결국 그 역시 모두가 행복하고 똑똑하게 살아보자고 그 많던 고민을 해온 것이 아니겠는가.

이따금 나는 환상 속에서 모든 인간이 행복하고 원기왕성하고 똑똑하며 억압하는 자도 억압받는 자도 없는 세상을 본다. 모든 사람들이 공동의 이익이 서로 경쟁하는 개별적 이익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의 지력과 상상력을 통해 실현가능한 위대한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하는 세상. 인류는 한 가족이기에 모두가 행복을 맞거나 모두가 불행을 맞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다수 대중의 고통에 기생해서 소수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시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런 시대를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행복을 시샘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해야만 한다. <버트런드 러셀이 자신의 마음을 말하다. 1960> 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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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5-03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단과 평가단이 다를 수 있다는 걸 님에게서 처음으로 자각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제가 평가단이 되보기는 알라딘에선 두번짼데, 다른데서는 많이 해봤죠.
하면서 느낀 건 확실히 서평에 대해 쓰는 건 좀 족쇄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무리, 육감과 호기심에 웬만한 걸 걸러내더라도 실망스러운 책은 있기마련이죠.
아님 적어도 내 취향엔 맞지 않는. 그럴 때도 쓰는 게 젤 난감해요.
속편하게 내돈 내고 내가 사서 보는 게 젤 좋긴한데, 아시겠지만 책값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그럴 때 평가단은 정말 좋은 빌미가 되기도하죠.

좋은 책인데 내 취향이 아니라면 모를까 이런 책은 좀 문제가 있어 보여요.
그래도 문제가 있는 책은 평가단의 이름으로 과감하게 얘기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문제는 알라딘인데, 좀 성의있게 책을 들이댔으면 좋겠습니다.
미리 읽고 싶은 책 올려달라고 하고, 어떤 사람이 이책 원했다고 선정 이유 밝히는 거 좀 거시기해요.
마치 모든 평가단이 원하는 것처럼.
첫 도서 기대치에 못 미쳤는데, 다음 도서는 또 어떨지, 걱정반 기대반입니다.
제발 알라딘이 한사람님 말을 잘 들어줬으면 하는데...에효~

감은빛 2011-05-04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서 보니, 이 책에 대한 평가가 전반적으로 좋지 않군요.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하게 됩니다.
'평가단'이란 역할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네요.

네오 2011-05-04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번의 러셀책이 그렇군요~ 리뷰작성시 참고하겠습니다~

穀雨(곡우) 2011-05-04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시원하게 긁어 주신 글이네요. 누군가의 모음은 때론 명분에 급급하다는 생각이 강해
흐름을 방해하고 얄궂은 공허만 모락모락 자라더군요.
이러한 사실은 이 책이 반드시 나쁘다는 부정의 시선보다 확실한 독자층을 휘어 잡는
안전판을 거머쥔, 쉽게 갈 길을 골라 잡은 왜곡의 결과가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쉬워요. 무엇인가를 잔뜩 기대하고 열었건만 텅빈바람만 잔뜩 훅하고 불어
오는 느낌처럼 말이지요..ㅎㅎㅎ
여튼 평소 한사람님의 문체와는 다름음 행간에서 엿보고 갑니다.

cyrus 2011-05-0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에 러셀의 신간인줄 알고 바로 동네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고 있는 중인데,,
저 역시 이 책이 러셀의 글을 발췌한 책이라서 약간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발췌한 내용중에도 참 좋은 글들도
있었지만,, 발췌한 문장으로 인해서 읽는 독자들마다 서로 다른 해석과 공감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해보기도 했어요, 간혹 어떤 문장은 앞뒤 내용이 없으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었구요,, 역시 텍스트는
전체를 읽어보는 것도 좋은거 같아요. ^^

가연 2011-05-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 책이 십자포화를 맞고 침몰해가는구먼요ㅜㅠ 음... 왠지 출판사에서도 이런 리뷰를 볼 것 같아서.. 다음엔 이 부분을 좀 고쳐주세요, 라고 일부러 페이지까지 콕 집어 언급까지 한 제가 할 말은 아닐 것 같지만 쓰신 분들이 대개 부정적 평들이 많아서 묘한 미소가 자꾸만 입가에 걸리네요. 뭐랄까, 나라도 좋게 써줄걸 하는 죄책감?ㅠㅠㅠ그러나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확실히 평가단으로서 서평자와는 달라야 한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뭐, 아직 남은 분들이 많으실테니.. 그 분들의 생각이 어떨지도 궁금하네요. 하지만.. 평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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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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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노예의 초상

지난 며칠간, 어느 재일 지식인이 한 평생 갇혀있던 언어의 ‘감옥’안에서 나는 독서라는 ‘해방’감을 한껏 맛보았다. 누군가의 처절한 감옥이 감옥안을 투시하는 사람에게는 극도의 자유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책이 가진 관전효과일까. 나처럼 책이라는 감옥에 스스로 갇히는 사람들에겐 커다란 행운일 것이다. 읽는 내내 내가 감당한 쾌감은 절대 반론할 수 없는 논리의 짜릿함이었고 나는 이처럼 치밀한 논리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 눈물날만큼 위대해보였다. 책을 덮고 서서히 차오르던 건 켜켜이 쌓여진 이성으로 허물어지던 감동이었다. 이 정도의 사유가 보장만 된다면 기꺼이 어떠한 감옥에라도 갇히고 싶을 정도였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얼마나 생각했으면, 얼마나 고민했으면 이런 결론이 나올까 싶어 짐짓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내가 끄덕인 건 결론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단계의 완벽함이었다. 매순간 논리의 파편들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구조와 본질을 띤 미세한 칼날의 흔적과 같았다. 이 책은 반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낱낱이 증명하는 무혈투쟁, 비폭력의 사설집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난민으로 살아가야 했던 고독한 학자의 평론, 아름다운 저항문학이다.

서경식.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한국에 제일 먼저 소개된『나의 서양미술 순례』(2002, 창비) 였던 듯하다. 서슬퍼런 군사정권하에서 서승, 서준식이라는 두 양심수 형제를 둔 지식인 동생. 어렴풋하게 기억나는 건 불행했던 가족사를 지니고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작가 정도로 생각했다. 미술작품으로 이루어진 에세이였고 주로 절망의 기호들을 내면으로 승화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이 책을 덮고 나서 제일먼저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다시 찾아보았다. 에필로그에 이런 글이 있다.

“지나간 20년의 세월에 배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희망이라는 것의 공허함일지도 모르겠는데, 뒤집어 생각하면 그것은 도리어 쉽게 절망하는 것의 어리석음이라 할 수도 있다. 그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 뿐이다.”

지난 20년은 형들이 체포되어 출옥하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책에는 그의 가족사가 사실위주의 객관적인 신문기사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내 기억으로 형님들의 억울한 투옥과 이어지는 부모님의 사망은 거의 서교수의 사유가 시작되는 뼛속 상처의 시원이었던 것으로 느꼈었다. 알려졌듯이 그의 형님들은 아직 생존해 계시고 평화, 인권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들 형제보다 인생을 많이 살진 않았지만 서교수 입장에서 본다면 차라리 가족이 아닌 내가 긴 세월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철없는 생각도 해본다. 이 번 책의 제목엔 ‘감옥’이라는 단어가 그의 인생을 표상하는 듯 세월의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연 나는 형님들이 실제 머물렀던 서울의 '감옥'도 중첩되어 퍼뜩 (서교수 입장에서)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노예시리즈를 떠올렸다. 서교수가 <빈사의 노예 L’Esclave Mourant>(1513~15) 같은 작품을 보고 형님들을 연상했다면 나는 같은 이미지에서 서교수의 초상을 발견하게 된다. 돌 안에 갇혀있는 듯이 보이는 죽어가는 노예가 꼭 아직도 식민지에서 해방되지 못한 재일조선인으로 보였달까. 사실 직접적인 이미지는 '죽어간다'보다 '잠들어 있다'에 가깝지만  잠든 채로 그 상황을 유지할수 밖에 없어 어떠한 외부적 조건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게 느껴진다는 점이 노예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노예라 칭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운 형상이다. 공교롭게도 미켈란젤로는 ‘나의 조각은 돌 속에 이미 들어있는 형상을 해방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돌로 노예를 조각하는 미켈란젤로는 해방감을 느꼈겠지만 그 해방감으로 탄생한 노예는 어떨까. 노예가 처절하고 고통받을수록 절대 노예를 벗어나지 못할수록 관람자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터이다. 잔인한 현실이다. 돌 속에서조차 돌로서 돌만큼 해방되지 못한 서교수의 상처가 미안하게도 아름다워 보였던건 해방되고자 하는 염원의 에너지 때문이었을까. 돌을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던 그 염원이 지독히도 숭고해 그것은 흡사 영혼의 그림자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필사의 몸부림이 자신이 표현하는 가장 매혹적인 자태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필,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이다. 꼭 평면적인 초상畵의 영혼이 가두어 두기엔 너무 생생하고 절절하여 스스로 입체적인 인물상으로 주형된 느낌이다. 그러니 사람이 비춰진 초상(肖像)이 아니라 사람을 초월한 초상(超像)이다. 하지만 우린 이미 오래전에 재일조선인이라는 개념을 초상(初喪)치른 것이라면?  아마도 우리가 초상(初喪)을 치루었기에 그의 초상(肖像)은 초상(超像)으로 더욱 완벽해진 것이리라. 우리는 이제라도 그의 초상을 가만히 앉아서 고정된 자세로 관조할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한 바퀴 돌아 구석구석 관찰해야 하지 않을까. 그를 옥죄고 한평생 가두어버린 쇠사슬의 차가움을 온도로 체험하고 그 표면의 단단함을 직접 어루만져 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빈사의 노예 , 1513-15>                                 <반항하는 노예, 1513>


그런데 내게는 ‘재일조선인’이라는 신분이 생소했다. 아니 서경식 교수와 같은 분을 언급할 때 거의 쓰지 않는 단어에 가까웠다. 어렸을 땐 재일 ‘동포’라는 단어를 자주 접했고 성인이 되고 나서는 재일, 재미 ‘교포’라는 단어에 더 익숙해진 듯하다. 언어라는 게 세월에 따라 시대상을 반영하기 마련인데 ‘동포’는 70년대에 그리운 식민지 시대 형제 자매를 연상케 하고 ‘교포’는 어쩐지 80년대 이민간 이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생각해보았는데 요즘은 방송에서도 ‘교포’라는 민족적 뉘앙스보다는 ‘해외파’라는 선진국 꼬리표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아이돌 그룹이 생기면서 더 심해졌다) 교포 2세니 3세니 하는 세대구분이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같은 신분이지만 ‘교포’라고 하면 타국에서 고생하며 자수성가해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같고 ‘해외파’라 부르고 나면 어쩐지 유학이나 오랜 외국생활로 사고가 세련된 이미지를 부여받는다. 그런데 여기에 나이와 세대의 개념이 추가되면 교포는 우리가 자주 듣는 유명연예인과 몰래 결혼한 그 재미, 재일 ‘교포’로서 성공한 사업가나 국제 변호사 정도의 재력가를 연상하게 된다. 즉, ‘교포’는 더 이상 젊은 세대가 아닌 것이다. 정리하면 ‘동포’는 할아버지 세대, ‘교포’는 아버지 세대, 그리고 자식은 ‘해외파’로 이어지는 기분이다. ‘재일조선인’ 이라는 신분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시대와 사회적 변화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좋을 대로 우리 편한 대로 그들을 언어의 감옥에 가두어 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서교수가 고수, 주장하는 재일조선인의 ‘조선’은 지금의 나로선 너무 먼 시대이자 많이도 당황스런 언어이다. 솔직히 일제시대로 돌아간 느낌, 썩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독일가서 독일인과 대화할 때 굳이 나치시대를 화제로 삼아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대화의 매너가 아니듯 알고는 있지만 부러 꺼내어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서로가 주입할 필요가 없는,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교포한분이 줄곧 ‘조선’의 이야기만 들려주는 기분이랄까. 서교수는 이렇듯 한국땅에 살고 있는 나같은 한국인과 일본땅에 살고 있는 자신같은 한국인과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을 회피하지 말고 신랄하게 바로볼 것을 끈질기에 호소한다. 바로 서교수는 아직 재일조선인 2세로서 자신이 태어난 1951년에 별수 없이 재일조선인이 되어버린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머물러 계신 분이다. 세월은 60년이 흘렀고 식민지라는 치욕과 불행도 추억이나 망각의 선로를 향한 것으로 보였지만 그것은 우리의 착시, 착각에 불과했다고 강조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너무 많이 달려왔기에 그와의 거리는 꼭 세월과 비례했지만 재일조선인이라는 섬에 고립된 그는 몇 십년 째 외치고 있었다. 누가 들어주지 않거나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 해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그나마 글재라도 있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말하고 써야한다고. 그것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가장 의미있는 일이라고.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 자신이 걸어온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묵묵히 이행할뿐이라고.


한 점 부끄럼 없는 언어

이 책은 서교수가 일본에서 나고 자라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했던 언어로부터의 ‘폭력’과 그로인해 갇혀있던 언어의 ‘감옥’에 대해 제일먼저 말하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하는 일본의 해석에 숨은 식민주의적 권력관계를 예로 들며 독자로 하여금 민족감정을 자극한다. 윤동주 시인의 저항정신을 높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실존과 사랑을 주장하며 그들이 교과서에까지 <서시> 전문을 싣는 의도를 알고 있느냐 질문한다. 서시를 번역된 시로 읽으며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자는 것을 재일조선인의 자의식으로 여길만큼 윤동주를 읽었다는 서교수는 최초번역이 훗날 (일본의 입맛에 맞게)다르게 번역된 사실에 고통스러워 했다. 감쪽같이 묻혀지는 진실을 확인한 그에게 시 한구절의 의도된 오역은 식민지 종주국으로서의 계속되는 만행이었다. 그것은 ‘일본어를 모어로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밖에 없는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상징하는 단서이며 곧 ‘모어의 폭력’이라 말한다. 모어로부터 생기는 의심과 위화감이 곧 감옥인 것이다.

한때 나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미국이나 영국의 식민지였다면 지금처럼 영어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물론, 우리 언어를 고수하려는 불굴의 정신으로 영어가 기대만큼 지배어가 되지는 않았겠지만) 내 아버진 중학교시절 배운 일본어 덕에 훗날 일본인을 상대로 하는 직업에 종사하셨다. 부모님 모두 부산에서 오래 사셨는데 어린 시절엔 일상 대화속에 태반이 일본단어(벤또, 코프, 오까네, 라이방등등)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사용한 단어가 사투리가 아니라 일본어를 남도식으로 발음한 단어였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된 단어도(예를 들면 오봉-쟁반) 있다. 지금도 건축이나 인테리어, 영화나 광고, 출판 편집 현장에는 작업용어로 영어가 변형된 일본단어가 습관처럼 쓰이고 있고 무의식적인 식민지 잔재는 거의 내 세대까지 이어져 온 것 같다. 만약 이 모든 단어들이 오리지날 영어였다면 하는 (비굴한)생각, 나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재일교포보다는 재미교포가 더 부러웠고 (외국어를 습득한 교포로서)일본어에 대한 경쟁력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아왔다. 만약 미국의 식민지가 되어 서교수 가족이 재미조선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지만 세계어를 모어로 두었기에 모어가 일본어인 아픔에는 미치지 못하지 않았을까. 이런 단순 도식적인 발상에 머물렀던 나는 그가 예로든 세 명의 유대계 지식인의 불행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모어인 독일어로 시를 썼던 파울 첼란 ,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장 아메리와 프리모 레비는 모두 언어의 균열을 극복하지 못하고 궁극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표적 언어감옥 수감자였다. 모어가 어떤 나라의 언어이건 자신의 모어가 자신들을 지배한 옛 침략자의 언어였고 원래 모어였어야 할 언어를 태어나기 전부터 박탈당했다는 의식은 특히나 글이 자신의 대리인인 작가들에게 뼛속 응어리와도 같은 치명적인 폭력이었다. 모어를 완벽하고도 아름답게 구사할 줄 안다는 재능이 자신에게 형벌이 되는 사람들이다. 서교수는 ‘모어의 권리’가 ‘모국어의 권리’와 양립하는 새로운 다언어, 다문화 공동체와 같은 창의적인 언어개방 형태를 이상적으로 제시했는데 나같이 국어 내셔널리즘(국어사용=국민)에 익숙한 독자에겐 일종의 충격에 가까웠다. 올바른 국어사용을 국민교육의 절대가치 정도로 교육받아온 모국어 경력을 떠올리면 상당히 자유로운 발상이었다. 서교수가 제시하지 않았으면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문제였다, 고 해야 맞다. 서교수에게 자신의 의식을 형성한 일본어가 가장 의식적인 벽이 되었던 지난 세월동안 우리가 한 것은 당신들도 한국인이라면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본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국민 자격검증 같은 일종의 무언의 폭압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동안 단일 민족, 단일 언어, 같은 이념이라는 국민적 감옥에 오랜 세월 갇혀 있었던 것은 우리가 아닐까.

또 하나 외양적으로 보면 재일조선인은 분단이라는 한국의 특수상황과는 멀리 떨어져있어 우리가 느끼는 안보, 평화의 실질적 부담감에서 자유로와 보인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도 덜할 것 같다. 그런데 재일조선인의 뇌리에 내면화된 분단이란 국토의 분할이라는 형식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파고 들어가 보면 그들의 자기해방에는 반드시 본국의 통일과 민주화라는 과제가 하나의 몸뚱아리처럼 결속되어 있다. 재일조선인은 이미 ‘재일’이라는 외국인 신분과 ‘조선’이라는 전쟁이전 국적이라는 두 가지 불이익을 타고난 존재이다. 서교수의 형님들은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사건’ 주모자로 몰려 20여년 간 옥살이를 했다. 언뜻보면 서교수 가족이 어쩌다가 특별한 사건에 연루된 예외적 상황으로 보이지만 당시 재일조선인은 옥살이만 하지 않았을 뿐 대부분 일본의 동화압력에 따른 일본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의 군사정권에는 불복종한 이중의 저항자들이었다. 서교수 가족의 불행은 1965년 한일수교 후 한국정부가 재일조선인을 한국 국민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후에 일어났다. 서교수는 이때 ‘조선적’과 ‘한국적’중 하나를 택해야 했고 한국을 오가기 위해서는 ‘한국적’을 얻어야 왕래가 가능했다. 한국전쟁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서교수 가족에게는 북한에 가족을 둔 지인들도 있었고 다행히 북한으로 귀환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았을 것이다. 당시 ‘조선적’이라 함은 조선의 북 또는 남에 대한 국가적 귀속이 아니라 조선민족 전체에 대한 민족적 귀속을 의미했다. 그런데 1965년 한일조약을 계기로 재일조선인은 강제로 분단을 맞은 것이고 ‘한국적’으로 편입하지 못한 나머지 ‘조선족’은 사실상의 난민으로 방치된 것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나는 조선의 스트라이커’라고 말했던 정대세 선수의 부모님도 당시 ‘조선족’에서 ‘한국적’으로 바꾼 경우이며 그래서 정대세 선수의 국적은 ‘대한민국’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서교수의 작은 아버지는 (식민지 시대)일본국적 소유자였지만 해방 후 다시 일본으로 역귀환하려 했을 때 입국을 거부당하고 수용소로 이송된 후 한국으로 강제송환 당했다. 연합군은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해 조선인의 이동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아버지는 전쟁 후 목숨을 걸고 일본에 밀입국에 오랜 세월 불법체류자인, 무국적자로 살다가 결국 자살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사회에 살면서 실은 조국의 분단상황으로 인한 실질적 피해는 더욱 극명하게 미치는 경우였다. 전쟁과 분리되어 있었던 이들에게 국적 선택은 강요된 억압이자 이차적인 민족 분열이었다. 그러니까 일본사회에선 (귀화하지 않으면)재일한국인이라 멸시 당하고 한국사회로부터는 (국민 자격검증에 의해)무언의 차별을 당하고 (원래 하나의 조선이었던)북한과는 생이별을 하게 된 경우인 것이다. 오늘날 땅따먹기처럼 시행된 한국의 군사분계선이 내게 가지는 의미는 오로지 전쟁발발의 최후 평화선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분단이 가져온 재일사회의 파장은 실은 분단에 놓인 한국사회가 감당하는 표면적 고통보다 더 오래된 암울한 상처였다.

그가 자신들의 환부를 예로 들어 논리를 완성해 나가는 모습은 시종일관 엄숙하고 차분하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로서의 언어경험을 섬세하게 서술해 나가는 어떤 증언의 현장에 동참한 느낌이랄까. 증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덕택에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지만 증언에 귀 기울이지 않는 단절의 세상에 절망하며 자살을 선택한 프리모 레비의 고통은 어쩐지 서교수가 감당하는 언어 감옥살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먹먹한 기분이 든다. 강제 수용자 생존자로서 증언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은 증언을 들어주고 증언으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그의 증언이 뼈아프게 들리는 것은 바로 서교수의 자기 生의 증언이 재일조선인의 지겹고도 진부한 피해의식이라 여길지 모르는 한국청취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어로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그가, 그것이 모국어를 습득하는 자신의 목표이자 소원이라는 그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미 한국어로 문학작품을 집필하지 않아도 모국어인 한국어를 모어가 한국어인 우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지.


감옥에서 탈출한 진실

언어가 ‘의식’의 감옥이었다면 식민지는 ‘신분’의 감옥이었다. 언어의 감옥에서 심리적 분열증이 발생했다면 식민지의 감옥에서는 물리적 희생이 파생된 것이었다. 서교수는 한일간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양국간의 화해도 연출된 폭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화해를 하려면 먼저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보아야 하는데 일본은 ‘이해하지 않으려는’ 다수자를 변호하면서 소수자에게만 ‘이해를 받기 위해’ 노력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아시아 국가들의 사죄와 보상을 오랜 세월 묵살해온 일본은 늘상 ‘도의적’ 책임은 있지만 ‘법적’인 책임은 없으므로 자신들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논리이다. 침략전쟁이라는 의미를 불문율로 부치고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이라는 자기만족적 미학에 빠져 강렬한 자기애를 실현하고 있는 일본지식인, 리버럴파를 자국의 국가범죄와 공범관계를 맺은 이기적 주체라 비난한다. 논리적 질문에는 ‘답하기 어렵다’는 답으로 구체적인 답을 회피하고 책임소재 문제에는 불가피했던 당시 정황을 물고 늘어지며 미국과 책임을 나누려는 비겁한 태도를 보이거나 혹은 미국등의 열강에 책임을 지우려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덕지게 사과를 요구하는 피해자측을 오히려 화해를 방해하는 평화반대주의자로 몰아 세운다. 서교수가 보기에 문제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의 불신에 있다는 박유하의 가짜 화해론이야말로 일본 리버럴파가 대환영하는 화해 컨텐츠라는 것이다. 서교수는 언뜻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일본 학자들의 논리를 샅샅이 해체하고 분석하여 문장단위로 깔끔하게 반박하는 논조를 펼치셨다. 적확한 근거와 심리적 배경, 의미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매 순간 일본의 허점과 정곡을 찔렀다. 서교수의 냉철하고도 예리한 비판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들이고 당장이라도 좇아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그중에 숙연해지기까지 했던 사유의 결정은 베트남 국민에 대한 죄책감을 말하는 부분이었다. 서교수는 베트남전에 용병으로 참전했던 한국군의 잔인성을 잊지 않았다. 우리에겐 늘 희생의 대명사로 각인된 베트남 파병(한국)군인이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교수는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과 같은 세대로서 자신이 베트남 파병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았고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한국에 살지도 않았지만 한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 2세로서 베트남 국민에게 책임이 있다는 점을 재차 부연했다. 베트남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같은 건 한번도 해보지 않은 나였기에 멍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서교수는 (베트남에 사죄하지 않는) 한국정부가 발행한 여권으로 한국민이 행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는 한국적 보유자이므로 죄의 여부와 상관없이 책임은 존재한다는 논리였다. 서교수가 책임을 느끼는 건 아마도 ‘사죄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상처에서 기인한 본연의 자기반성이었을 터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인들은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죄는 없지만 일본인으로서 집단적 책임은 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그러한 책임을 한번도 느껴보지도 가져보지도 못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서교수의 통찰은 한국민이 하지도 않는 부분에까지 뻗어 있었다. 어찌보면 ‘사죄하지 않는 심리’가 ‘사죄 안 받아도 상관없는’ 심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에 결국 우리는 일본 리버럴파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타국에는 우리의 잘못을 사죄하지 않으면서 일본에는 끝까지 사죄를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서교수는 말한다. 일본 리버럴파는 1990년대 이후 이어진 증언의 시대를 묵살하였고 1989년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이후 자신들의 책임을 인정하고 국가적 사죄와 보상을 통해 한국과 창조적인 관계를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매번 유보, 실기하여 사상적으로 퇴폐에 이르렀다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식민지 극복보다는 보다 글로벌한 동아시아의 새로운 체제를 위해 평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논리로 과거를 봉인한 채 화해만을 기념하려 든다고. 서교수는 이러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에 빠진 그들이 국가로부터 은혜를 받아 온갖 혜택을 누리면서 정작 국민이나 민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국가와 민족을 뛰어넘으라고 발언하는 것과 같다며 이 역시 이념주입의 폭력이라 주장한다. 마치 사죄만을 요구하는 상대를 과거에 묶여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옹졸한 국민으로 치부하며 지금부터라도 잘 지내보자 하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가만 보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 같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지나간 일은 전세대의 일이고 우리 세대는 더 중요한 세계화를 향해야 한다는 논리는 일본 리버럴파가 아닌 한국의 보수, 진보 모두에 해당되는 암묵적 합의 아니었을까. 리버럴파에 부합하여 일본에서 열렬히 환영받았다는 박유하는 바로 화해없는 화해극의 시나리오와 주연, 연출까지 맡은 한국의 젊은 세대를 표상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사죄도 없었으니 용서 안해도 된다는 심리는 서로가 편한 구석이 있다. 서교수가 염려한 것은 궁극에 서로 아무일도 없었던 것으로 여기자는 국익우선주의는 아닐까 싶다. 서교수는 ‘역사적인 유래가 저항의 소중한 무기’라고 말한다. 식민지와 세계전쟁이라는 역사가 낳은 재일조선인은 특별히 반항적이라서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분단을 극복하는 것 자체가 저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장에 실린 서교수와의 대담내용은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져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통일이 분단과 식민주의를 극복하는 길이라는 결론과 통일의 방법, 형태의 시나리오는 어쩌면 남일처럼 생각되는 너무나 먼 비현실의 이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식민주의와 냉전체제를 거치면서 분단이 양산한 디아스포라’라는 존재들을 모두 다 포함한 온전한 통일이 가능만 하다면 그리고 그 실현주체가 한국민이라고 한다면 분명 인류 역사적인 사건임은 틀림없다. ‘인류역사가 나아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서 다원주의를 채용하여 다중국적, 참정권을 인정하는 나라. 동아시아를 향해 한반도를 개방하는 해방의 통일.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책을 집필한 서교수의 입장에서는 가장 완성된 결론이라는 것에 이견은 없다.

3.11 일본 지진후 나는 과거 역사적 감정보다는 자발적으로 인류애적인 온정을 발휘하는 네티즌과 그에 호들갑을 떨며 기부액수를 이슈화하는 방송 언론이 탐탁치 않았다. 한창 기부가 유행처럼 번져갈 때 행여 (불행에 빠진)일본에 대한 비난을 했다간 몰매라도 맞을 기세였다. 우리가 분명 인류애를 발휘해 일본의 고통을 모른척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도 만족할만한 발전이었지만 과열된 여론과 인류애 호소에의 무조건식 확산은 또 언제든 반대의 이슈만 있으면 마찬가지의 비난여론으로 뒤집힐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이 많아서였다. 연이어 보도된 독도문제만 보아도 여론은 지금의 우호적 현상에 '찬물' 을 끼얹는 분위기라 일관했다. 내 생각에 일본은 원래부터 '찬물'이었다. 문제는 찬물의 온도를 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우리네 변덕 아니었을까. 일본은 한국의 기부라는 뜨거운 주관앞에서도 줄곧 찬물다운 객관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언제나 배울만한(?)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엊그제 기사를 보니 계속되는 여진과 원전사태가 아직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본은 벌써 피해지역의 발전계획을 내놓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이다. 복구, 재생, 부흥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미래발전계획이 당연히 일본 자국의 몫이듯이 독도를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도 자신들의 책임이라 여길 터이다 . 일본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그들은 매사에 매순간 상대에게 습관적으로 실례했고 미안하다 노래를 한다. 병적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악으로 여기며 어릴 때부터 피해주지 않는 인간형을 학습하게 된다. 나는 이것이 전국의 나무 잘라 종이 만드는 회사가 자연환경은 보호해야 한다는 광고를 몇 십년 반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생각한다. 아시아 지역의 민족에게 그 누구보다도 큰 피해를 준 일본이 일상에서는 절대 피해주지 않는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대략 이해가 가는 생존전략이라는 생각이다. 일본에 가면 매번 뜻밖에도 친절하고 이렇게도 매너좋은 사람들, 우리보다 조용조용하고 길가에는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는 이토록 깨끗한 나라가, 모르는 사람에게도 밥 먹듯이 사과하는 이 나라의 국민이 과연?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된다. 지난 시절 일본을 드나들며 나는 (한국사람만 아니라면)배려하는 일본, 깨끗한 일본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지진만 아니라면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사는 건 자유고 선택은 개인의 문제이다.  하지만 주거환경으로서 일본을 선택하려 했던 한국인인 내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과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는 것,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무엇을 했으며 그것은 어떤 의미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가 모르는척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는 모르는 일로 하고 싶기에 자신들의 다음 세대엔 가르쳐 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사실과 다르게 가르쳐 주고 있기까지 하다. 이 책은 그들이 왜 우리를 모른 척 하는지, 왜 모르는 것으로 하고 싶은지, 왜 모르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소상히 알려준다. 그런 것들이 일본을 택하는데 상관이 없었던(상관하고 싶지 않았던) 내 자신을 가만히 원점으로 돌려 놓는다.

이번 독서로 '논리적 사유'가 얼마나 아름다운 능력인지 알게 되었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고 그것에 대한 반론에 논리적으로 근거를 제시하고 상대측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와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과 더 치열한 싸움은 아닐까. 상대 논리의 헛점을 공격하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빈틈없는 자기논리의 정당화, 완성화를 통해 폭력이 아닌 평화를 소원하는 방법이 아닐까. 자기주장을 힘이 아닌 논리로 전파하는 건 꼭 일본이 우리에게 행사한 폭력의 역사에 보란듯이 항거하는 윤리적인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가해자를 최대한 배려하는 일본지식인으로서의 최선일 것이다. 서교수는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거나 간과되어도 평화적인 토론과 설득의 기본정신만은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멈추지 않을 듯하다. 시 한줄, 기사 한 단락, 논문 한 구절도 폭력을 용인하지 않은 그의 '이성'과 오독과 반론을 용기있게 제시하는 그의 '감성'이 새삼 뭉클해진다. 한 가지 잊지말고 새겨야 할 것은 그 모든 이성과 감성은 어느 재일조선인의 감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왔다 갔다 다만 모두이거나 또는 아무도 아닌 경계의 섬에 갇혀있던 시간의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이제 차디찬 쇠사슬의 감옥을 뚫고 출옥한 진실앞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열쇠는 우리 몫이다. 기존의 감옥에 갇힐 것인지 새로운 문을 열고 세상을 볼 것인지 그것은 우리의 선택인 듯하다. 다시금 두 손에 쥔 열쇠가 뜨겁다. 그가 차가운 쇳덩어리만 건네준 것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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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4-3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쪽으로 옮기고 첫 서평이네요. 만족하시나 봅니다.
저는 이제 겨우 조금 보기 시작했어요.
두권 다 만화책이라 금방 또는 부담없이 읽을 것 같아 여유 부리고 있습니다.
사실 만화책 별로라 마음이 안 가는 것도 쫌 있구요.
한권은 그래도 볼만은 한데, 한권은 어린아이 학습만화 같아서 심드렁합니다.ㅋ
활자도 작고.ㅜ
비 오고, 황사낀 주말이지만 잘 지내시길...!^^

가연 2011-05-0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한권씩은 꼭 별로인 책이 온다니 걱정되는데요ㅠ 앞으로도 그 러셀의 책과 비슷한 책으로 머리를 싸매야 된다는 건가요!! 그나저나 이 '언어의 감옥에서'는 논리가 아름답다, 는 생각이 들 정도였기에 덕분에 저자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지더군요. 저는 서경식 교수를 한겨레에서 연재하는 칼럼에서 알게되어서..

June* 2011-05-07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 한사람님이 인문을 읽고 서평을 내놓는 심정만큼이나
 한사람님의 서평을 읽고 싶은데 .. . 관심분야도 아니고 어려운 것 투성이라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괴로워요 엉엉.
 
 
<한밤의 궁전>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한밤의 궁전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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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솔직히 나는 이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언젠가 아이와 함께 해리포터 시리즈와 나니아 연대기, 황금나침반 등의 영화를 보러갔다가 생애 최초로 극장에서 졸았던 기억이 있다. 한마디로 늙은 것이다. 어드벤쳐, 환타지, 거기다가 스릴러까지 가미한 복합적인 영상이 내게 제공하는 것은 대개 피곤함으로 종결되는 특수효과만 남길 뿐이었다. 꿈이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난 늙지 않고 꿈이 사라지지 않았던 시절에도 이런 식(?)엔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으니 훗날에도 선택을 할 계기가 없었다. 책과 영화는 분명 다른 분야지만 사람은 자신이 싫은 속성에 있어서는 그것을 세목화하지 않고 일괄처리 하는 무책임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가끔 평가단 미션으로 상기 장르의 소설을 받았을 때 나는 당혹스럽다. 적잖이 인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고 서평에 객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꽤 의미있는 시간동안 거실 한 켠에 방치했다. 비교적 어려운 숙제를 먼저하고 남은 시간 편하게 노는 편(?)인 내게 있어 읽지 못하고 놓아두어야 하는 책은 무언의 존재로서 막강한 스트레스이다. 하지만 그 스트레스를 이길 수 있었던 건 분명 기간 내 이 책이 집어 들고 싶을 때가 오리라는 믿음에서였다. 환타지-스릴러를 써먹을 시간이 도래(?)하면 내 그때 주저없이 이 책을 읽어 주리라, 뭐 이런 같잖은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책을 덜커덕 잡아버렸고 일요일 저녁 무렵 책을 덮었다. 훌륭한 전략이었고 나는 마치 거대한 미션이라도 수행한 듯 보람마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현실을 ‘잊겠다’는 명확한 목표의식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현실을 잊으려고 소설을 차용했고 작품은 그런대로 목적에 부합하는 유용성을 지닌 것이었다. 한마디로 무언가 잊어야 할 현실이 있다면 이 책을 집어드시라. 주말에 나는 뜻하지 않은 문자 한통을 받았다. 살면서 그런 일방적인 문자는 처음 받아보았다. 나는 성격상 일이 커질수록 놀라지 않는 냉정함을 生의 전략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혹자들은 천성이 차가워 인간성이 그리된 줄 오해를 하는데 그만큼 큰일을 많이 겪으면서 살아왔다가 더 맞지 싶다. 그 크고 작은 일 속에는 늘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 상처를 주는 한 사람 때문에 온갖 종류의 나머지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그 상처를 제공하는 사람이 소속된 집단과 바닥이 싫어지는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은 맞는 말이다. 절은 잘못이 없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중이 떠나야 할 곳이 그 중에게는 生의 마지막 장소일 수가 있다. 그럴 땐 떠난다는 의지보다는 떠밀린다는 서글픔이 앞서기 마련이다. 내겐 이 서평바닥이 내 추락한 인생의 마지막 보루였다.(는 생각이다) 비겁하지만 바깥 세상 사람들이 싫어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인데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도 바깥 세상과 다를 바는 없었다. 차라리 바깥세상은 얼굴을 보고 술 한잔 걸치면 쉽게 해결되는 심플한 구석이라도 있다. 이곳은 억측과 오해, 음해와 소문이라는 음성적 메시지가 난립하는 바깥 세상의 안쪽, 안방과도 같은 안전지대였다.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사람들이 책 안 읽고 글 안 쓰는 사람들 보다 무언가 생각이 더 많고 생각이 많은 만큼 말과 언행도 옳바르리라 우린 그렇게 배웠고 나 역시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 그런데 지난 일년 동안 나는 그 믿음에 대한 배신감을 버텨내느라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고 해야 맞다. 물론 이 복잡한 세상에 나만이 고상하고 나만이 정의롭고 나만이 결백하다고 주장한다면 위선가득한 자기오만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 무슨 말을 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은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이유를 알면 알수록 꼭 그들에게 지는 것 같아 울기도 분하여 구멍난 뼛속만 시릴 뿐이다. 아무 대응을 하지 않는 나를 향해, 불필요한 논쟁을 그만하자는 내 의지에 전달된 한통의 문자는 당신을 이제부터 ‘모르는’ 사람으로 한다는 선언이었다.  

나는 졸지에 그가 알았던 사람에서 지우개처럼 지워져 투명인간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능히 이 바닥에서 그렇게 할 파워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문자는 상당부분 자신의 파워를 의식한 내용이었고 한밤중 벼락같은 전송은 파워를 행사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역으로 내가 그들에게 존재감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내가 십년만 젊었어도 나는 그런 일에 체계적인 대응을 했을 터이다. 나는 오랜 세월 말과 글로 밥 벌어 먹고 살았기에 그런 유형의 사람을 그 지위에서 논리적으로 끌어 내리고 톡톡히 댓가를 치르게 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별의 별 유형의 사람들을 겪은 내가)지난 시절 치밀한 심리적 보복에 대한 기획과 실행은 거의 내 전공분야이자 생존전략과도 같았다. 나는 (팔자가 사나와 늘 시기와 질투에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특히 내가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음해나 모략같은 일은 성격상 가만있지를 못하는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렇게 파헤쳐서 내게 돌아온 것은 대개 인간관계가 단절되거나 물리적, 사회적인 손실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장이 클수록 후련하고 시원하다는 보상은 있을지언정 상대는 파멸하거나 나또한 (피해로 비롯된)가해자로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죄다 까발리고 싶다는 것도 그리하여 내가 더 옳다는 이해를 받고 싶은 것도 모두 욕심이다. 복수도 결국 고집스런 욕망에 불과해 이루어지고 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추한)자괴감에 스스로 추락하게 마련이다. 결국 양쪽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몸소 체험하고 그 흉터를 잘 간직하고 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고 보니 개인적인 불의는 때로 참아도 될 경우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달까. 그이가 안쓰럽고 내 상처가 두려워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잘못한 것은 딱 하나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이것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지만, 너는 모른다는 것. 사람들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히 웃고 적절히 칭찬하며 적잖이 솔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적당한 위선도 의무적인 공감과 타성젖은 연대속에서 이해로 발전하므로 절대 오해의 대상이 될 리는 없는 것이다. 어떤 집단에서 창조하는 헤게모니는 집단에 충성할수록 오해의 방패막이 된다. 그런데 나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혼자 우아하게 책 좀 읽고 글 좀 쓰다가 자기 내키는 대로 (자기 식으로)타자와 교류하지 않았으니(심지어 거절까지 하나니) 그것이 잘난 척 하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속된 말로 재수없는 자, 지못미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나 같은 은폐성향의 블로거들은 이웃과 교류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을 터인데 왜 나만이 구설수에 올라있는가. 혹시 (믿고 싶지 않지만)그것은 (같은 서평자로서)지난 일 년 동안 내가 이룬 성취에 있었던 것일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한 번의 성취에 흥분하거나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아 나는 늘 숨어지낸 편에 속했다. 나는 남의 서평을 잘 읽지 않지만(나는 내가 타자의 글을 읽기 힘든 심정을 알기 때문에 내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십분 이해한다) 어쩌다 감동적인 글을 만나면 나 혼자 그 친구의 사연에 눈물 흘릴 때도 있고 우연히 훌륭한 글을 만나면 찾아가 덥썩 손이라도 잡고 싶다. 얼마전 나이는 어리지만 나보다 서평을 먼저 쓰기 시작했고 내가 서평의 멘토로 삼은 어느 후배는 서평은 오래 쓸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서평계를 떠났다. 꽃은 곧 질 것이고 나는 ‘요란한 비’ 소식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짜피 서평으로 무엇을 이루려 한 것이 아니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서평을 연습삼았던 나이니 무언가 결단을 내릴 시점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잊어야 할 무엇을 말하느라 서두가 또 길어졌다. 나는 잠시 나를 잊고 야속한 세상을 잊고 싶었다. 왜 언제나 세상은 이렇게 나에게 가혹한 것인지. 그렇게 대책없던 내게 이 책은 무사히 대책으로 역할을 마쳤다.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이야기가 분명한 소설이다. 줄거리가 간단하고 익숙하기에 내용은 친근하다.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감춰진 미스터리를 다루었다고 해서 ‘안개 3부작’으로 불린다는 기사가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고 뚜렷한 미스터리였음이다. 환타지 서사를 이끄는 상투적인 표현들만 분량 조절했다면 훨씬 흥미로왔을 것 같다. 구구절절 자세하게 서술된 상황묘사는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은 불러일으켰지만 엄밀히 말하면 문학적 상상력과는 별개로 영상적 테크닉으로 느껴졌다. 일일이 화면을 설명하는 느낌이 들었달까. 지난 시절 나는 광고쪽 일을 이삼년 한 적이 있다. 나와 일했던 감독은 콘티를 미친듯이 환타스틱하게 설명하는 재주를 가져 그분이 설명을 하면 마치 대단히 박진감넘치고 영상미 풍부한 한편의 광고가 연상되는 효과를 가져왔다.(그래서 몇 번 속은 적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그저 파란 하늘에 하얀 눈이 내릴 뿐인 영상이었는데 특수효과와 함께 줄줄이 부연되는 서사의 스펙터클함은 그가 둘러대는 이야기의 힘에 있었다. 필력(筆力) 못지않은 화력(話力)이다. 줄거리 자체는 간단하고 짧은 분량이지만 그가 말하고 나면 꼭 방대한 대하극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작가가 그랬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거짓말이 참 능수능란했다. 다만 그것이 좀 빤하고 놀랍지 않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야기의 흡입력은 상당한 작품이었다. 물 흐르듯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장점도 이야기의 거침없음의 연장선상에 있을 듯하다. 페이지가 잘 넘어갔기에 나는 이야기를 중단하고 싶지 않았고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었던 것이니까. 잘은 모르지만 이런 장르에 있어 흡입력은 작품의 중요한 장점이라는 생각이다. 아마도 '애드거 알란 포와 보르헤스, 스티븐 킹이 뒤섞인 듯 하다'는 언론평은 그러한 마법같은 이야기의 연출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특히나 소설 초반부엔 마치 영화의 시작 5분처럼 앞으로의 이야기에 기대를 갖게 하는데 충분했다. 영국군 장교 피크 중위가 목숨을 무릅쓰고 쌍둥이 아기를 데리고 도망친다는 설정과 기다란 검정망토에 터번을 두른 정체불명의 추적자가 끝까지 아이들을 찾아 나서겠다는 선언은 출생의 비밀과 복수코드의 드라마에 익숙한 우리로선 늘 공식과도 같은 스타트였다. 열여섯이 되면 법정 후견 기한이 만료되므로 보육원을 떠나야 하는 쌍둥이 아이의 운명과 그를 보육원에 맡긴 할머니의 비밀스런 사연, 아이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낯선 이름등은 감추어진 비밀을 위해 잘 짜여진 밑재료로 느껴졌다. 특이했던건 서사의 뼈대에 모티브로 작용한 내용이 인도와 영국간의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기담이었다는 것인데 스페인 출신 작가이면서 인도의 민간설화를 오늘날의 문학적 주제와 접목했다는 점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인도를 아직 여행해 본적은 없지만 앞으로도 인도를 여행가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었던 나에게 캘커타라는 미스테리한 도시를 문학으로나마 체험하게 하였으니 그것도 뜻깊었다.

캘커타(Calcutta)는 영국 식민지 시대 수도였던 도시이다. 이번에 이 소설로 캘커타가 궁금해 여기저기 기웃거려보니 1995년에 전통명칭인 콜카타(Kolkata)로 개명했다고 한다. 십오년 이상 나는 콜카타를 캘커타로 알고 지냈던 것이다. 콜카타 주민들에게 후글리강은 신성한 존재라는데 소설에선 후글리 강 근처에 차우바 소사이어티의 아지트 ‘한밤의 궁전’이 위치하고 있었다. 여행정보 사이트를 돌아다녀 보면 콜커타는 완전 영국풍의 거리 박물관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지트로서 폐허가 된 '한밤의 궁전'은 어쩐지 빅토리아 풍의 건물을 상징한다고 느껴졌달까. 소설속 후글리 강 건너편 지터스 게이트 역에선 고아 3백 명을 싣고 가던 뭄바이 행 열차가 터널 속에 갇힌 채 전소되는 비극의 사건이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과거 역사적인 사실과 지역 민간설화의 결합은 인도라는 이국적인 장소와 잘 어우러지며 신비스런 풍광을 잘 부각할 수 있는 치밀한 전략이었다. 또 하나, ‘시바’는 인도의 3대신(브라흐마, 시바, 비슈누) 중 하나인 창조와 파괴의 신이라 알려져 있다. 나는 신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의 모든 철학만큼이나 심오하고 모든 종교만큼 경외스러운 곳이 인도라고 생각해왔다. 바로 이 책에서 벤과 쌍둥이 남매인 쉬어는 차우바 소사이어티에 입단하기 위한 통과의례로 자신의 개인적 비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고백하며 아버지가 남긴 책, ‘시바의 눈물’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가 인도신에서 차용하여 가공한 소설적 주제는 ‘과거의 속죄’로서의 시바의 부활이었다. 애초부터 저주받은 도시였던 캘커타(검은 도시)에 등장한 검은 망토의 사나이는 실은 멀리 떨어진 외계에서 날아온 비현실적인 인물이 아니라 속세에서 무엇이든 어떻게든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을 한 현세 인간들의 반영인 것이다. 작가는 반전이라면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바의 인간화를 통해 과거(죄)나 미래(벌)보다는 외려 현실을 더 소중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깨우침을 주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야기야 어떻든 간에 과거에 저질러진 악이 자신들의 미래를 파멸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 현실에 당면한 환영을 이겨내어야 하는 강렬한 동기가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현실은 차우바 소사이어티의 구성원들이 검은 망토의 불사신을 극복하려는 과정에 있었다. 진실을 찾는 것이 곧 불사신을 이기는 일이었고 그것은 마치 검은 도시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먼저간 고아들의 영혼을 달래는 일로까지 느껴졌다. 그러므로 아이들이야 말로 ‘시바의 눈물’을 자아내는 직접적인 영웅이 될 수 있도록 작가는 그 타당한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벤과 쉬어, 이언을 비롯한 친구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극박한 상황에서 지켜내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기상황에서 선보인 약속과 희생에의 의지, 믿음과 희망에 대한 선량한 교훈들, 환타지라는 형식 내부에 이런 가치들을 보석처럼 상자에 담아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일곱 빛깔의 상자만큼이나 아이들의 캐릭터가 그다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는 것인데 막간에 소개된 멤버의 특징들을 제외하곤 그들이 헤쳐 나가는 국면은 양적, 질적으로 분별하기 어려웠다. 영화였어도 구성멤버들 중 한 두 명은 사족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진실의 실마리를 쥐고 있던 쌍둥이 남매의 할머니 야르야미의 대사는 다소 작위적인 면이 있었고 지나치게 선생님같은 강요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세대라 그만큼 장광설에 눈치가 빠르다는 生의 이력 때문에.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서사적 이미지, 불의 화력(話力)만큼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두렵고도 끔찍스럽게 느낀 인상적인 내러티브로 남았다. 불길에 휩싸인 채 달려가는 기차와 화마에 가득 찬 열차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절규소리, 화염이 삼키고 난 후의 끔찍한 잔해들, 이어지는 불꽃속에서 피어난 망토의 사나이, 불사신의 이글거리는 분노의 눈빛등은 이 소설을 한 마리 불새의 스토리로 인식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인도하면 이국적인 색채가 자랑이자 특색인데 이 작품은 대체로 검붉은 바탕위에 세워진 회색빛의 궁전과 그 궁전을 타고 올라가는 오렌지빛 불꽃 정도로 시각적인 연상을 강렬하게 고정화하였다. 나는 물 이상으로 불을 무서워하는 성향이라 이 기억은 꽤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화마의 이야기 속에 어른된 나를 위로하고 깨우쳐주는 할머니의 잠언도 나는 기억한다. 할머니는 두어 차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이 보고 들어온 평생의 모든 진실을 고해성사하듯 나지막히 들려준다. 고백이라고 느껴진 할머니의 잠언들은 대체로 평범했고 특이할만한 건 없었다. 세상의 진리라는 건 늘 그렇듯 놀랄만한 사실은 없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시점이 진실에 회의를 느끼던 찰나였기 때문인지 내게만은 유독 사무치게 들려왔다.

사실 진실은 믿기가 어려운 법이란다. 거짓말처럼 강렬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도 없고 말이야. 거짓은 크면 클수록 더 매력적인 법이거든. 그것이 인생의 법칙이란다. 그 가운데서 제대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적으로 너희들 자신의 판단에 달려있단다.      139p

눈물이 핑돌았다. 내겐 할머니가 이 작품의 ‘빛의 공주’였다. 돌이켜보면 거짓말은 언제나 진실보다 참 매력적인 것이 틀림없다. ‘가장 불길한 그림자는 자신의 머릿속에 깃든 기억’이며 그것은 곧 ’파괴와 복수의 천사’에 다름 아니라는 할머니의 충고는 꼭 나 들으라고 하는 말씀만 같았다. 불새라는 지옥의 무기를 가지고 분노에 사로잡힌 자신의 영혼을 암흑의 정령으로 부활시킨 자와할의 모습은 흡사 내가 끝까지 주저하고 망설이던 내 이면의 거울일지도 몰랐다.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동물이 뱀이라는 말씀처럼 뱀의 사악함과 교활함에 지배당해 나라고 ‘인간들이 마음속에 심어놓은 분노와 증오의 두려움에 스스로 먹혀 버리고 만 영혼’이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자와할로 살지 않기로 마음먹은 내 자신이 생각나 그렇게 결심하기 까지 괴로웠던 시간들이 떠올라 나는 새삼 가슴을 쓸어내리며 참았던 눈물을 삼킬 수 있었다. 그 순간 눈감은 내 눈앞으로 ‘소년들 위로 하늘에서 수없이 많은 작고 흰 눈물이 비처럼’ 내리던 ‘하얀 눈물’을 나는 볼 수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책 한권으로 분노와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존재였다.

캘커타라는 도시를 몰랐다. 당연히 미스터리와 신화를 몰랐다. 환타지는 허무맹랑해 이미 어른이 된 내가 만나보기엔 너무 멀었던 장르이다. 그래도 나는 대책없던 순간 내 앞에 놓여있던 이 책을 대책삼아 또 한순간을 넘겨본다. 모든 것은 지나가고 지나가면 상처도 그리울 때가 있는 법. 실패나 실수도 추억이 될수 있는 것.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고 해놓고선 나는 그 이야기의 종류를 내 마음대로 정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독서의 효과를 강조했으면서도 다만 내가 좋아하는 책들에게만 해당된다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생각외로 책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고 나니 목숨을 걸어 우정을 나눈 이 책의 주인공들 처럼 유치한 조직이라도 대단한듯 결성했던 그 시절 친구들이 그립다. 나름대로 우리가 찾았던 것도 그 당시 우리가 몰랐던 진실은 맞는 것 같다. 그래서 (진실을)몰랐던 우리가 조금이라도 알려고 몸부림 치던 모든 시간들이 이토록 그립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되면 이미 알게된 진실만으로도 벅차기에 더 이상 무언가를 찾고 싶지 않을 것이기에. 어쩌다 더 찾아낸 오늘의 진실은 아마도 어제보다 더 외면하고픈 날카로운 아픔일 것이기에.

어른이 된다는 건, 어린 시절에 믿어 왔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음을 깨닫고, 대신 믿지 않으려 거부해 왔던 모든 것들이 진실임을 발견하게 되는 거다.  30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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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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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그동안 나는 이 작가의 단편들을 다른 문학상 수상집이나 특별기획된 소설집에서만 만나왔다. 기억나는 것은 이름만큼이나 고요하고 숨막힐듯한 막막함이었달까. 굳이 육체적인 느낌을 떠올려보면 기온은 그다지 낮지 않지만 습도가 많고 기압이 낮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축축한 서늘함이라 말하고 싶다. 굳이 또 분류하라 말한다면 이 느낌은 불쾌한 감각의 기억편에 속할 것이다. 느리고 더디지만 분명 두려워지는 심리적 공포를 유발하는 계획된 이야기들. 이 느낌이 내겐 어떤 편견으로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분명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만난 그녀는 굳이 ‘죽음’을 천천히 읊조리는 작가였고 절대 이 설정된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표제작이 된 ‘간과 쓸개’는 작년에 만난 <2010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서 그들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어느 봄날 홍대 책거리 행사에서 만난 어떤 노인을 보고 이 소설을 쓰게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책들이 쌓여있는 전시대로 힘없이 걸어와 한마디 말도 없이 90도로 허리가 꺽여진 채 매대로 고꾸라졌고 놀란 그녀에게 '힘이 없어서 이렇게 쓰러질 때가 종종있다'고 죄송하다고 맥없이 말하며 천천히 돌아갔다고 한다. 갑자기 쓰러진 노인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가는 바짝 다가온 누구에게나 드리울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또렷이 목격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번 소설집에 모아놓은 단편들 역시 하나같이 서서히 정해진 그곳을 향해 모두들 죽어가고 있기로 책을 덮고 나서 길고 큰 숨이라도 쉬어야 일어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성란 작가는 이 분위기를 김숨이 발견한 깊고 어두운 ‘저수지’라 말했다. 어떤 평론가는 죽음을 연습하는 ‘예행연습’의 과정이 김숨의 소설작업이라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죽음이 두렵다. 나이 들면서 더욱 실감하는 것이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렵고 언제 죽을지 안다 해도 두렵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온갖 종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겪고 나서도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마지막에 대한 서글픔도 포함한다. 그 슬픔엔 그 길을 철저하게 혼자서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가장 클 것이다. 천둥 번개가 몰아쳐 당장 사람이라도 잡아갈듯 무서운 밤에도 의심없이 잠들 수 있는 건 다음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내일아침 급작스레 심장마비라도 걸려 운명을 달리 할지 몰라도 어제까지는 별일 없이 일어났기에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 관성같은 습관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내가 미처 거짓말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 나를 거짓말처럼 데려간다. 그리곤 나는 사라진다. 아니 내가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거짓말처럼 진실인 사실 하나 때문에 결국 고개를 숙이게 되는 존재들이 아닐까. 죽음을 예견하고 죽음을 알아간다는 건 고개를 들기보다 숙여야 할 일일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숙이고 보면 그전엔 몰랐던 것들이 보이고, 다른 것들이 들리고, 알 수 없는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감은 예민해지고 인식은 빨라진다. 신체기관의 성장이나 발달과는 상관없이 퇴화하면서 더 촉발되는 이 감각의 효과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을 생성한다. 그것은 무릇 혐오나 구토의 현장을 고발하듯 스스로를 있는 힘껏 자극함으로써 生을 유지하려는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숨은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죽어감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하였다. 말한다고 다 알아듣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죽어감을 끝까지 설명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숨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부고직전의 유서와도 같은 이들의 중얼거림은 그래도 아직은 나 살아있다는 투정이었을까. 자세히, 천천히 귀담아 듣지 않으면 쉽게도 놓쳐버리는 나지막한 음률, 숨쉬고 내쉬는 호흡과도 같은 죽음으로의 발걸음, 그것에 동참하는 길은 추적추적 빗물에 잠긴 운동화를 질질 끌고 따라가는 힘겨운 길이었다.

일상을 필사(必死)하라

우연의 일치인지 김숨의 소설에는 간이나 폐, 위, 쓸개등의 장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말기병 환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병에 걸렸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분명한 건 병자로서의 현재 삶은 누추하고 빈곤하며 내일의 희망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한 인물들이라는 것. 인간의 주요장기가 파손된 결과로 그들이 피로와 호흡과 소화, 분해등의 신체적 결손을 자기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난한 처지에 병까지 걸린 가족 구성원의 불행을 나머지 가족들마저 외면하고 일상으로 편입시킬 때 환자의 외로움은 보다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주로 상처한 노인이나 사별한 미망인, 독신자등으로 대변되는 그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법은 ‘필사(必死)’의 관찰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것만이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전략이라 주장하는 듯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 ‘필사(必死)의 존재’지만 죽기 전까지는 죽을 힘을 다해 ‘필사(必死)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런데 이 전략은 하성란 작가가 언급했듯이 작가의 쉽지 않았던 관찰 결과로 느껴져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기에 그녀는 사실 젊지 않은가.

<간과 쓸개>에는 예순 일곱의 간암환자가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자신의 일상을 서늘하게 고백하는 글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소유해온 땅이 있었지만 자식들의 무언의 성화에 못이겨 땅을 처분하고 그들에게 지분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그런데 땅을 팔고 돌아와 누은 노인은 자신이 30년 동안 허울만 좋은 소유주였지 그 땅에 정작 고추하나 심어보지 않았다는 헛헛함에 잠못이룬다. 그 땅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서울의 병원에 정기검진을 오가며 자식들에게 느낀 서운함과 중첩되고 이제 땅마저 없어진 자신의 육신마저 자신의 것인지를 생각게 하지 않았을까. 노인은 몇십년 된 단층 양옥 자신의 집에 있는 수도 계량기 통에서 죽지 않은 귀뚜라미를 발견하며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다고 느끼고 식당에서 ‘노르스름한 튀김반죽을 뒤집어쓰고 안간힘으로 뒤채던 미꾸라지’를 보고 필사의 생명을 관찰한다. 누님이 가져오신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는 풍천장어’나 친구들이 키워보라고 하던 ‘뿌리가 잘리고 가지마저 잘려진 나무에 악착같이 매달려 살아있는 표고버섯’ 모두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골목’ 신세인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 노인은 우연히 들른 식당 거울속 늙은 남자가 죽은 사람이라도 바라보듯 아무런 감흥없이, 그저 빤히 응시한 사람이 자신인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 가는 여행에 자신이 승선했음을 감지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던 병석의 누님은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을 인체의 활동에 사용치 못하고 죽음의 액체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노인의 어린 시절 공포로 저장해놓은 검은 저수지의 두려운 기억은 누님의 쓸개즙과 정확히 같은 감각으로 부활되며 노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노인은 어린 시절 저수지와 누님의 쓸개즙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죽음이 다가와 그것을 알면서도 부패해 가는 육신과 그로인해 악취가 난무해진 현장에 대처할 수 없는,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만 하는 필사(必死)의 체액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살면서 한번도 불만을 드러내 본적도 그것을 들킨 적도 없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방법은 입을 틀어 막고 숨죽여 울음을 삼키는 것 외엔 없었을까. 거울을 보며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점이나 주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끔 앞으로 아무리 많은 날을 살아도 오늘이, 오늘의 내가 앞으로 보다는 가장 젊어서 빛나는 날이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못할 것임을 당연히 알고서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노인이 발견한 거울속의 자신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늙어간다는 것이 무작정 서러워지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도 곧 흐드러지고 말 추적한 봄날이 미리 서러운 애석한 심정일 것이다. 작가는 어느 봄날 90도로 허리가 꺽이면서 쓰러지던 노인에게서 그 애석한 서글픔을 발견하지 않았을지.

소리없이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은 <북쪽 방房>에서도 살아났다. 32년 8개월을 중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인 평교사로 정년퇴직한 곽노는 간이 아니라 폐의 기능이 무너져 기침을 달고 사는 칠십 줄의 노인이었다. 곽노는 눈에 안보이는 ‘지구와 우주의 이치’ 보다는 눈에 보이는 ‘광물과 광석의 실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물욕과 노욕에 물들어 있다고 보는 아내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이중성이 싫어 필사로 육신의 부동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곽노는 점점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육신때문인지 건넛집 창문으로 들어가는 장롱도 관으로 보이고 북쪽 방 아래 가발공장에서 들려오는 미싱소리와 담벼락에 던져지는 쇠공 소리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서둘러 종용하는 외부공격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곽노는 자신이 유배된 북쪽 방은 철광석을 닮았고 자신의 육신은 철광석에 함유된 철 성분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황홀했던 건 ‘시간의 흔적인 선線들이 구현해 내고 있는 질서’라 기억하며 광물의 집합체인 한 덩이의 퇴적함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곽노가 퇴적암의 횡적인 표층을 질서의 극치로 여겼기에 급작스런 마그마로 생성된 암석은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혐오는 곧 무질서를 의미한다. 일상의 무질서, 그 혐오의 절정에 곽노는 담벼락을 향한 쇠공 던지는 소리를 우족사러간 아내의 해체로 앙갚음하며 일상에 부동하려했던 자신의 환상을 쇠공던지는 사람, 혹은 쇠공의 탓을 한다. 곽노가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식은 억지로 형성된 우발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연스레 굳어지는 시간의 퇴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종교였고 죽음을 준비하는 예행이었던 것. 숨쉬기 지독히도 힘들면 그저 숨을 덜 쉬면 되지 하는 곽노의 경지가 쓸쓸하게도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서늘함을 유발하던 가발과 우족, 쇠공 등의 장치가 곽노의 일상을 지배하던 소품이라고 하기엔 참 비일상적으로 낯설었다. ‘곽노’를 발음하면 ‘광노’가 된다. ‘곽노’가 미치거나(狂) 빛나는(光)노인이 아니고 식물도 동물도 아닌 광물을 사랑하는 노인(鑛老)이라는 것에 혹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대로 죽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방식은 아닐까.

‘곽노’가 유배된 북쪽 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목표를 가졌다면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에서 엄마는 버스 정류장 간이 매표소에서 죽기를 바랐다.(아니 끝까지 살기를 바랐다) 쉰 아홉이 될 때까지 엄마에게 매표소는 요람이자 침대이자 관구였다. 흡사 동물원의 우리라도 되는 듯 엄마의 다리는 홍학의 모가지처럼 말라갔고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매표소에서 길러 길바닥으로 내보내었다. 엄마는 도시전체가 홍수에 잠겨도 상가주민들의 철거 시위에도 사흘밤낮을 견디며 매표소를 떠나지 않았다.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중병에 걸린(듯한) 엄마는 매표소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것만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라 여겨온 듯하다. 하지만 엄마의 필사적 매표소 사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매표소만을 딸에게 남기며 죽어버린다. 사막여우처럼 지독해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나’는 성악의 꿈을 접고 동생들에게 떠밀려 매표소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매표소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날 동물원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동생들을 찾아 헤매다가 진짜 동물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자청한다. 아프리카 코끼리를 기르고 싶어 했지만 매표소 안에서 번식력이 왕성하던 햄스터와 수명이 긴 자라로 만족해야 했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매표소로 돌아가 걸음만이라도 코끼리처럼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이 처량하고 서글펐던 가장 큰 이유는 한 평 남짓한 매표소라는 공간에서는 아무리 生과 死를 다해도 꿈은 가질 수 없어 포기하고 접어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매표소를 지키려던 모성의 괴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린 한 인간의 마지막은 목메이는 빈곤의 현실을 상기하도록 침묵으로 시위하는 듯했다. 이제 삶이 동물원 우리 속에 머무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나’는 지금 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 말한다. 왜 울어야 하는지의 이유보다 어짜피 울 것이기에 언제인지가 더 중요한 ‘나’의 독백은 역으로 ‘울지 않았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매표소, 나의 꿈을 접게 한 매표소, 동생들의 목구멍이 달려있는 매표소에서의 시간만이 내가 울고 싶어도 울지 않도록 해주는 시간이라 실은 울지 않으려 울음을 참았던 시간만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라 외치는 나. 그건 엄마가 죽어나간 매표소이기에 똑같이 죽어야 하는 곳이 아닌 엄마의 죽음을 갚기 위해서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햄스터처럼 자라처럼 살아내어야 하는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나’는 사막여우를 보며 지금은 울 시간이지만 돌아가선 사막여우처럼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매표소에서 신문이나 껌이라도 사들고 집으로 오고 싶은 이야기, 휘영청 밝은 달을 친구삼아 오늘도 잘 견뎌내었다 자위하며 발걸음을 내딛고픈 이야기였다.

일상을 지켜내라

<모일, 저녁>
은 2009 현대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작품이다. 그때 현대문학상 수상자는 하성란이었지만 ‘알파의 시간’이 꽤 어려워 나는 김숨의 작품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 읽고는 식욕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작품이다. 아마 독자들도 시점이 점심이건 저녁이건 같았으리라 위로해본다. 주인공은 부모님이 삼십년 째 거주하고 있는 신탄진 빌라에 모일, 저녁에 들렀고 아버지는 전어를, 엄마는 기타 반찬을 준비하는 동안(겨우 두어 시간 정도)에 그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 일상을 바라보며 남일 이야기 하듯 부모님과 현재 처한 상황을 피비린내 나도록 냉정하게 묘사한다. 끝에 남는 잔상은 살기위해 뱀장어를 매일밤 백마리나 잡아대는 아버지의 몸부림, 그 얼굴위로 피어오른 연탄연기..참 매캐하고 그로테스크한 90년대 컬트 영화였다고나 할까. 이 작품이 <알파의 시간>을 넘지 못한 건 피비린내의 수위조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우려. 하지만 언젠가는 뛰어넘을 것으로 보이는 범상치 않는 서사의 흐름.”

꼭 일년 전에 나는 <모일, 저녁>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소설집 속의 이 작품은 아홉편들 중 가장 얌전해보였다고 할까. 다시 읽어본 이야기속에는 뱀장어 잡는 일을 하는 예순 세 살의 아버지, 연탄불에 전어를 굽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많이도 서럽다고 느껴졌다. 화자인 ‘나’는 삼십년 째 한 곳에 뿌리박힌 듯 살고 있는 아버지, 평생 죽을 때까지 은행 빚을 갚는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가 모월 모일의 저녁에 담배와 소주를 사러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오늘밤 뱀장어라도 한 마리 더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종결한다.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이 끔찍하다기 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나 먹어대든지 사람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고 중얼거린다. 아버지가 느낀 무서움은 지하에 오래전부터 늙은 채로 거기 살았던 할머니가 전어 굽는 냄새를 맡고는 올라와 밥상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두려움과 일치했다. 전어 대가리만 빼놓고 새까맣게 타버린 전어지만 어찌나 먹고 싶어 하든지 ‘나’는 그 살고자하는 인간들의 욕심과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다. 매일밤 백마리의 뱀장어를 죽여야 하루 일당이라도 떨어지는 아버지의 노동은 물리적으로 감각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작가의 계산된 행위였을까.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을 사법고시만 십오년 째 준비하며 폐인이 되가고 있는 삼촌에게 전수하려는 의지를 가족에게 내비친다. 아무리 고시 준비생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뱀장어 잡는 법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 법. 특별할 것 없는 빈곤층의 어느 저녁을 스페셜하게 데워낸 작가의 글쓰는 체온이 구워지는 전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무덤덤하게 늘 일상화된, 일상에 전어 굽는 냄새처럼 피할 수 없도록 스며든 슬픔일랑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혹시 때가 되면 말없이 사라져야 했던 아버지의 칼같은 일상의 법칙, 지긋지긋하고 끔찍해도 변함없이 일상을 처리하며 살아온 관성의 이력이 그들의 오늘을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닐까.

피할 수 없이 반복되는 각박한 일상에 스며든 슬픔은 <럭키슈퍼>에서도 기세등등했다. <모일, 저녁>의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일 뱀장어를 잡는 행위는 <럭키슈퍼>에서 엄마가 매일 두부나 콩나물을 팔고 받아낸 동전을 세는 행위와 같았다. 엄마는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슈퍼를 열어 유통기한이 넘은 각종 식품들을 팔고 있다. 말이 슈퍼이지 실상은 두평 남짓한 구멍가게이고 길 건너 ‘서울슈퍼’가 생긴 이후에는 노가다나 파출부, 건달들만 간간히 들러 물건을 사가는 실정이다. <모일, 저녁>에서 오랜만에 들른 딸에게 전어를 구웠다면 <럭키슈퍼>에선 서울슈퍼에 손님을 뺏기지 않기 위해 떼어 놓은 생태가 있었다. 그런데 생태는 날이 저물어 아가미에 거품처럼 벌레가 꼬여들고 생태를 사간 이웃들은 양심도 없다며 반품, 환불을 요구한다. 엄마는 생태들에 들러붙어 악다구니를 써대는 기생충을 박박 씻어 찌개를 만들고 온 가족은 할 수 없이 엄마의 눈치를 보며 찌개를 먹게 된다. 이 모든 일상이 가게에 딸린 방에서 혼자 잠이 드는 예비 고등학생 ‘나’에게는 큰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도 아닌 매일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가게가 몰락의 기로에서 추락이 확실해지자 엄마는 기한 지난 식품처럼 아빠의 유통기한을 새로 써서 어떻게든 아빠를 팔아보겠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실직으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빠의 이마위에 날짜를 새로 적겠다는 엄마의 바늘이 머리를 콕콕 찌르듯 예리한 자상을 남기며 작품은 한치의 여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방법은 일상을 바늘처럼 정확하게 지켜내는 것이었을까.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도 하루 종일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지켜야 하는 가게의 진리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럭키 금성’이나 ‘럭키 서울’에 익숙한 내 세대에게 ‘럭키슈퍼’는 지금의 이마트보다 더 다정하고 알싸한 이름이다. 한창 가게이름들에 외래어가 접목되던 그 시기에 대형상가과 대규모 상인에 눌려 (올림픽 유치를 이유로)잘 지내고 있던 노점상들이 강제 철거된 그 시절 이야기가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서울엔 알고 보면 그렇게 럭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었다.

일상을 뒤틀어라

<흑문조>
에서 화자는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허름한 집을 마련한다. 부모님의 간이나 폐, 심장이라도 내다 판 심정으로 마련한 집이지만 집은 화목하고 따스한 기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자가 말하는 집은 한마디로 ‘흑문조를 기르기에 좋은 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멘트의 독성’과 ‘찌든 곰팡내’, ‘칠흑같은 어둠’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지하실엔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계단을 사이에 둔 옆집 남자는 끊임없이 계단을 허물자고 요청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보일러 기계가 말썽나 기술자들을 불렀고 그들은 터진 보일러 배관을 찾느라 집안 구석구석에 구멍을 파 놓게 되었다는 것. 구멍천지가 된 집안에는 지하에 있던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어렵게 수리를 마치고 나서 화자는 흑문조의 꿈을 꾸게 된다. 흑문조의 범상치 않은 불길한 예견때문인지 화자는 흑문조를 알아보러 외출을 하지만 돌아와 보니 계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어 그제서야 부모님에게 진 빚을 떠올리며 흑문조를 잊게 된다. 화자는 누추하고 더러운 집안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상을 다리를 잃고 허공을 맴도는 흑문조의 흉조로 감지하고 새가 예견했을지 모를 일상에 죽음같은 공포를 느낀다. 지하실에 벌레가 있고 보일러가 고장나고 옆집과의 트러블 같은 해프닝은 별스러울 것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김숨은 삶이 어떻게 물질적 환경에 지배당하며 뒤틀린 일상을 잉태해내는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생명을 위협하는지 필사의 감각으로 화자를 해명하는듯 해보였다. 그럼 우린 흑문조 같은 헛된 불길에 휩쓸려 계단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길조를 떠올려야 할까. 흑문조가 사라지면서 남겨진 건 여실히 존재하는 부모님에게 빌린 돈이었다. 흑문조를 맨 처음 누설한 건 손님의 한마디였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불길은 결국 자기예언의 다른 버전에 불과했다. 흑문조는 실은 스스로 길러오던 화자의 마음속 새였던 것은 아닐까. 다리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흑문조를 집으로 데리고와 기를 것이 아니라 흑문조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새를 본래 좋아하지 않아서 인지 새를 통해 흉조와 길조를 예견하는 풍습을 존중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흑문조와 화자의 불안을 미세하게 중첩시킨 문장의 날개짓은 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이야기였다는 생각이다. 하얗게 안보이는 불안을 까맣게 보이는 현상으로 그려낸 흑문조는 흡사 김숨의 소설속 불사조는 아니었을지.

<흑문조>처럼 불길한 불청객은 <육肉의 시간>에선 미이라로 등장했다. 아이가 없던 마흔줄의 부부에게 낯선 여자의 방문은 일상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원흉이었지만 여자는 또 다른 여자로부터 동요하지 않으려 자신을 정렬시켜 나간다. 유난히도 질서와 평온을 가정의 제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화자에게 여자가 내뿜는 기운은 흡사 <흑문조>가 제공하던 불길한 예감과 동일해 보였다. 마침 고대 이집트 유물전시로 바쁜 박물관 연구원 남편은 ‘발굴’이나 ‘전시’에만 가치를 둘뿐 화자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 고대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여자는 ‘그자들이 심장과 간과 폐를 가져갔다’ 말하고 온종일 찰흙을 치대어 그림자 같은 형상을 주조하는데 골몰한다. 여자가 형상의 구멍에 숨을 불어넣던 것이 흥미로왔는데 쓸모는 없었지만 그 숨을 통해 입체적으로 부풀려지는 동적 활력이 무섭게 느껴졌다. 쓸모없는 것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가 내겐 작가가 하잘것 없는 일상에 문장의 힘을 실어넣는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창틀에 세워진 형상들은 흡사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마용을 연상케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있지만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생생한 외양으로 여자를 엄호하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소금을 국자로 퍼먹고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는 채로 그들 부부와 동거했다. (믿었던)남편은 급기야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여자와 (기다렸다는 듯이)육체적 관계를 시도하고 관계 후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사라진다. 지난 30여년 동안 종교처럼 매달려 왔다는 발굴관계자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화자는 여자를 통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낀 것일까. 중요한건 남편과 그들의 욕망이 사라졌다고 여자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여자의 육체만은 더 분명한 진실인듯 화자의 눈앞에 변함이 없었던 것. 작가가 말한 <육肉의 시간>이란 지금까지였던 걸까. 지금부터인 걸까.

어느날 갑자기 <흑문조>가 날아든 일상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는 육체로 방문한 여자는 일상에서의 잠재된 불안과 소통되지 않는 현재시간에 대한 불만을 그 기저로 탄생한 환영은 아니었을까. 불임으로 예상되는 아내, 미이라같은 유물에 몰두하는 남편, 이들에게 있어 육체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마흔줄에 들어선 이들에게 아이라는 내세의 희망은 실현가능성 없는 미이라 같은 현상이지만 만약 육체가 부패하지 않고 미이라처럼 보존되는 것이라면 얼마든 시도해볼 만한 이벤트는 아니었을까. 가정의 질서를 위해 아내는 이 모든 환영을 참아내며 남편의 씨받이로서 미이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육肉의 시간>은 (미이라같은)육체를 인식하고 (미이라와의)육체적 행위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아니었을지. 심장과 폐와 간이라는 육체의 주요장기는  없었지만 절대 썩지 않아 영구보존할 수 있는 욕망의 창고처럼. 그것은 혹 뼈와 살이, 피와 핏줄이 마구 뒤틀려 해체된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던 우리 육체적 욕망의 미이라는 아니었을까.

일상을 반복하라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의문의 대상, 환상의 객체로서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일상을 조여드는 작품도 있었다. <룸미러>에서 ‘아이들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는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 거 라더군‘의 한마디와 조우하며 작가는 계속되는 일상의 불안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실제로 작품 초반부엔 그저 큰 뜻없이 지나간 한마디였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한마디는 훗날을 예언하는 어떤 정령처럼 다가왔다. 마치 헤어지자 헤어지자 반복하면 정말 이별하듯 그들은 오늘 만들어진 말로써 내일을 견디는 존재들이었다.

<룸미러>에서 1998년형 베르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가족의 목적지는 친척의 장례식장이다. 이들 부부는 뒷좌석에 곤히 잠든 아이들이 절대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운전중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깨어나면 어쩌려고‘ 이다. 잠든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수없이 해본 내 경험상 아이가 깨어나는 것이 이토록 조심해야 하는 일인가 싶어 짜증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아이가 깨어난다는 것은 일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쯤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아이가 잠든 시간이 가장 평화롭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국 이들은 아이를 위해 아이가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 안전추구의 심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평화를 방해받는 것이 죽도록 싫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들에겐 왜 아이한테 신경을 써야하는 상태가 필요이상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과민한 사건일까. 사실 아이가 깨지 않는 시간동안은 아이가 깨어 있을때보다 더 불안한 상황이 많았는데 이들은 아이가 깨면 마치 불안이 더 확장되어 자신이 감당할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소설을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 작품을 외아들이면서 소심한 성격의 한 가장이 운전이라는 반복된 일상을 최대한 자기 방식으로 방어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도중 도로에서 돼지나 새의 심리적, 우발적인 공격을 당하고 곧바로 <룸미러>에 비친 아이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룸미러는 특정한 공간안에서 내재된 온갖 종류의 불안을, 그 불안의 뒷모습을 나타내는 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부분적인 거울인 것이다. 룸미러는 반드시 사각지대가 있다. 이들의 불안이 절정에 이를 때 차는 기름이 떨어지고 때마침 늘어선 행렬은 멈추게 된다. 잠든 아이를 놓아두고 이들은 벌어진 광경을 확인하러 각자 길을 떠난다.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들은 끝내 말해주지 않으며 끝까지 아이들이 깰 뻔한 걱정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무슨 광경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혹시 그 광경으로 인해 아니면 자신들을 기다리다 지쳐 아이들이 깨어났을지의 여부만이 여전히 의미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서웠다. 우리가 두렵다고 생각하는 현상이나 실체는 사실 두려웠다는 기억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깨어나면 안된다‘는 두려움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자‘는 당연하고도 기계적인 메시지 같아 마치 그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실천하는 듯이 느껴지는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처럼 자랄까봐 두렵다는 남편의 고백은 어느정도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는 아이들이 깨어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벌레가 두렵기 때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이 두렵듯이. 본능적인 두려움이 어떻게 일상을 지배하는지 이 작품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서사를 이끌었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도 불안해 보이는 부부는 여전했다. 마흔 넘어 일자리를 구하려는 아내와 통조림 회사에 다니는 남편에게 이웃은 소통불가한 존재들로 위치했다. 집주인은 아들의 뇌수술을 빌미로 전세금을 올려 달라 요구하고 302호 여자는 치킨을 가로챈 데다가 202호 남자는 암에 걸려 곧 죽을 거라고 한다. 전세금을 친정에 부탁할까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늘 주무시고 계신다. 아내는 어느날 옥상에 자라를 버린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내친김에 욕실에 자라를 키우기 시작한다. 이 모든 아내의 일상에 남편은 오로지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거라’는 선문답으로 대화를 마무리 한다. 남편은 촛불집회로 인산인해를 이룬 시내 광경을 매일밤 뉴스로 확인하며 맥주를 마시고 아내는 같은 뉴스에서 꼭꼭 닫혀있는 빌딩, 불이 꺼진 창문, 봉쇄된 입구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시커멓게 서있는 빌딩처럼 영 소통불가한 이웃이었지만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이웃남자는 ‘오늘밤 그곳으로 갔’을 거라는 답을 한다. 그곳은 대체 어디이며 남편은 정말 그곳에 간 것일까. 부부의 서로 다른 관심사가 조형해낸 일상의 불안은 비밀스런 이웃에 의해 그 비밀이 와해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애초부터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고 몰랐기 때문에 비밀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욕실의 자라처럼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비밀스런 경향이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전세사는 고단한 맞벌이 부부의 건강치 못한 일상의 풍경을 살짜기 시국의 뉴스로 탓을 하며 비밀아닌 비밀을 은밀히 전달하는 수사를 선보였다. 남편이 간 곳이 그곳인지의 여부보다는 이웃마저 그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불안의 공감대, 공감의 노출, 그 사실이 더 중요해보였다. 혹시 현대인에게 이웃이란 각자의 불안을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비밀을 생성하는 공동작업의 동반자는 아닐까. 이 작품에선 비밀도 이웃간 일종의 균형장치로 이해되었다. <룸미러>와 함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 현실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식은 역으로 불안을 규격화, 정형화하여 정해진 불안으로 얼마간의 안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숨이 조제한 말들은 마치 불안하라, 불안하라 주문하듯 들렸고 역으로 그 주문 때문에 다소나마 불안을 잊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숨은 별스럽지 않은 인생 다반사의 풍경을 점점 긴장스럽게 절정의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꼭 저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예감과 불안을 선사하는 탁월한 긴장유발자.



- 문장 웹진 <흑문조> -


   여자가 숨을 불어 넣던 구멍들을 따라 균열이 부챗살처럼 번져 나갔다. 249p


아홉편의 작품들은 질병의 축제이자 축제로 생겨난 일상의 환부로 가득했다. 쉽지 않았다.  아플 것은 알았지만 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서평이 줄거리 중심이 되었다. 그만큼 모든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하고 놓칠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난과 질병, 죽음, 생계의 고통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현실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현실에 짓눌려 현실을 현실에서 현실처럼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쩐지 현실적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현실인걸까. 김숨의 소설은 희망을 쉽게 발견하기는 어렵다. 외려 발견하려 할수록 저수지 밑으로 침잠하는 성격을 가졌다. 작가가 그러했듯 그냥 소설을 가만히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결론보다는 인식자체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그 저수지를 향해 미약하나마 가녀린 숨을 불어 넣다보면 어느새 미세한 균열의 파동이 감지된다. 고요하게 떠오르는 낯설은 존재,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지의 기대, 예민한 촉수로만 느껴지는 감각의 실체, 그것은 분명 내가 살아있기에 반응하는 삶의 자각은 아닐까. 어떤 자각을 하였을지는 김숨의 숨을 통해 부풀려진 우리 감각의 정도에 있을 듯하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한마리의 새처럼 뜬금없이 거실에 뛰어든 한마리의 귀뚜라미처럼 누군가 옥상에 두고간 한마리의 자라처럼 파다닥 꿈틀거리는 긴장의 호흡일지 모른다. 숨막히는 현실과 숨쉴틈 없는 일상에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조금은 적나라한 우리 생명의 실상일지 모른다. 모든 죽어가는 생명에도 꿈틀거리는 마지막 의지는 살아있듯 현실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이 아닐까. 문득 살아 숨쉬는 이 시간에 감사하고 싶다. 그녀가 소설에 숨을 불어 넣으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이토록 힘겹게 숨쉬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더불어 우리 역시 그녀처럼 우리 삶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숨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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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4-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궁금증에 대한 질문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오 2011-04-09 08:04   좋아요 0 | URL
거기 네오 맞아요^^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죽음을 말하는 숫자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웃기지 않았다. 그러나 울 수도 없었다. 세상엔 웃을 일도 울 일도 많지만 이번 일은 남들이 아닌 꼭 내 일 같았기 때문이다. 바다건너 중년 미국남자의 일이라고 하기엔 많은 상황이 지금의 나와 기분나쁘게도 일치했다. 그래서 처음엔 ‘가장 웃긴 올해의 책’이라는 타임지의 메인카피에 낚였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현재 우리네 삶을 보여주는’이라는 앞의 수식 때문에 멈칫거렸다.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니 웃긴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웃긴 이야기라고 꼭 웃으라는 법은 없으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웃기지만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므로 슬플 수 있으니 이런 이야기에 연민을 느낄 수 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가 아닐 경우에 해당되었고 누군가 콕 집어 나들으라고 한 이야기 같다면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론 피를 흘리는 것이 또 우리들 속내인 것이다. 이번 소설의 가장 큰 악덕은 바로 속으로 멍들도록 적나라하게 현실적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야기는 고래심줄만큼 질기고 이불속 진드기만큼 끈덕지다는 것이 역으로 미덕이 되는 소설이었다. 산다는 건 이렇게도 낱낱이 적어놓고 보면 영화보다 더 기가막힌 것일까. 이 소설의 99%는 그 기가 막힌 生의 딱 일주일간의 이야기다. 기자출신의 독설적, 독단적, 독보적, 마침내 독창적인 글빨에 시종일관 기가 짓눌려 독서를 했다. 나는 정말 이 책을, 이 작가를 견뎌내느라 고군분투했음이다. 흡사 이 작품의 주인공이 견뎌내던 악몽의 일주일과도 같이.

주인공은 사십대 중반의 전직 신문사 경제기자이다. 기자 경력만 (하필, 젠장)18년이라 들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해고를 당했단다. 그래서 더는 할부금을 낼 수가 없게 되었단다. 알다시피 한정된 월급으로 도시를 살다보면 나는 ‘각종 대금을 지불해 내려 이 곳에 왔던가’하는 생각이 월급날, 그날 하루 떨어지는 낙엽마냥 도처에 정처없이 굴러다닌다. 신용카드 대금,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각종 세금, 휴대폰을 비롯한 각종 공과금, 아이들 학원및 병원비, 기타 책값등의 문화생활비, 의류및 잡화 지출비 등등 그것들을 빠짐없이 내면서도 그 나머지로 식비까지 충당해야 하는 우리 인생이 어김없이 날아드는 월말 고지서만큼이나 지긋지긋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다람쥐 쳇바퀴도는 생활에서 딱 한 달만 월급이 끊겨버리면 우린 마트에서 카트밀며 일주일치 먹거리를 살 수가 없고 그때 그때 한 개씩 우유를 사먹으러 세븐 일레븐에 갈 수 밖에 없으며 월급이 세 달이상 밀리면 세븐 일레븐이나 나인 일레븐이나 숫자상으로 큰 차이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그건 전직이 신문기자였건 신문팔이였건 신문배달이었건 월급으로 할부금을 조달하는 신세라면 다 똑같다고 말이다. 경제도 싫고 기자는 더 싫지만 그 둘을 합쳐놓으니 손해보는 일은 절대 안하고 살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또 (계산적인 시장분석에 의해)아내는 얼마나 예쁘고 글래머러스 했던가. 이들의 토끼같은 두 아들은 얼마나 귀여울 것인가.(우리 소설같았으면 아들 하나, 딸 하나로 완벽성을 강조했겠지만) 절대 저임금 노동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집 앞의 공립학교에는 애가타서 보낼 수가 없는 아이들인 것이다. 하루종일 TV로 사시는 노망기가 있는 아버지만 제외하면(아버지가 노망인 이유는 소설의 결말에 반전제시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잡지에서 등장할 것같은 빅토리아 풍의 미국 이층집에서 닛산 알티마가(짜증나게 이 책은 줄곧 올티마라고 번역했다. 설마, 기아 옵티마의 오타인줄 알았다. 그래서 닛산이 싸구려라고 조롱하는 것에 자주 마음이 상했다. 닛산은 그들의 리스트에라도 등장하지...닛산이하는 그럼 쓰레기란 말인가) 아닌 BMW 5 시리즈쯤은 거뜬히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인 것이다.(자가용과 옷차림을 제 2의 신분과시용으로 생각하는 우리네 정서에서 보아도 닛산은 쫌 그랬다. 우리도 맥시마 사느니 차라리 SM 7도 아닌 SM 5 사겠다. 몇 십 킬로 떨어진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차량이라면 렉서스 이상은 되줘야 하는 거 아닌지.) 암튼, 이 마흔 여섯의 펜대 굴려 먹고 살아오신 아저씨가 알티마가 아닌 맥시마를 끌고 두 아들이 아침에 시리얼에 부어먹을 우유를 사러 세븐 일레븐에 가는 장면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기실 세븐 일레븐(7/11)으로 가는 길은 주인공 맷에게 있어 뉴욕의 테러 나인 일레븐(9/11)에 버금가는 인생의 테러, 테러의 일상, 그것의 시작이었다.

미국을 보고하는 방법

작가는 소설구성상 처음과 마지막을 ‘세븐 일레븐’으로 배치했다. ‘또 다른 7/11’이 그 시작이라면 ‘세븐 일레븐 이후’가 그 마지막이었다. 미국에서 9/11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도 9/11은 엊그제 터진 일본의 쓰나미만큼이나 충격과 공포의 상처이다. 작가는 미국사회에서 9/11 테러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24시간 편의점인 7/11에서의 ‘개인적인 추락’과 중첩시키며 누구에게다 다가오는 삶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밀어 부쳤다. 그때 상상할 수 없었던 뉴욕의 빌딩이 무너졌다면 오늘 예기치 않았던 맷의 슬리퍼도 미끄러졌다고. 맷의 어머니는 임종하기 전에 ‘네 생각엔 7/11이 또 일어날 것 같니’라며 9/11을 우리 일상속에 체화된 세븐 일레븐으로 치환해놓고 돌아가셨다. 말도 안되는 걱정거리를 염려하며 삶을 마감한 어머니에게 9/11은 살아생전 어떤 의미였을까. 맷은 지구온난화,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총기사고나 묻지마 범죄같이 하루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극적인 죽음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머닌 임종의 순간까지도 7/11으로 변신한 9/11 테러를 언급하며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아들의 목소리를 끝내 확인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후대에게는 절대 9/11 테러에 준하는 끔찍한 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라지면서 남겨지길 바라는 눈 감기전 최종 마지막 희망이 세븐 일레븐이라는 착각으로 튀어 나와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하루 종일 오픈중인 세븐 일레븐이 도시 삶의 공포 아이콘이라는 착각은 정말 착각에 불과했을까. 이 작품을 덮고 나니 편리하라고 24시간 내내 열려있는 세븐 일레븐이 꼭 24시간 노출되어 있는 원자력 발전소와 같이 느껴졌다. 그건 꼭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이 작품의 묘한 매력과도 같은 어머니의 농담같은 유언이었다. 그건 어쩌면 어머니의 아들인 맷이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소설의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닐까. 그건 대략 십 오년전 쯤 ‘요새는 7을 일레븐으로 읽느냐’고 물어보신 내 어머니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씀은 아닐까. 엊그제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만 보아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건 오늘날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 삶이라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구라도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만약 꼭 한번 마주쳐야 한다면 그건 나와 내 가족이고 싶지는 않은 보통 사람들의 이기, 암묵적인 희망, 그래서 말 안해도 알만한 소심한 비겁인 것이다.

맷은 아내 리사를 보았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우리를 파멸시킬 가능성을 보았고 우리 각자의 7/11에 이끌렸는지 모른다’는 기억을 통해 7/11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물질적 ‘욕망의 습관’이라는 꽤 효율적, 경제적 암시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성을 내포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었는지 깨닫는다. 숫자로 표식화된 7/11의 다층적 의미는 주로 도표와 그래프, 통계수치라는 데이터를 가지고 기사를 써온 맷에게 가장 분명한 생활의 단서이자 인생의 증표를 다양하게 프리젠테이션한다고 생각되었다. 맷이 보여주는 프리젠테이션은 정상적인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 될 대로 되란 심정의 사람들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신이 가진 절망의 패에 불을 붙이고자 찾게 되는 심야의 장소 세븐 일레븐이 내포한 ‘위험경고장’이거나 ‘안전독촉장’의 사회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그건 무심코 들르는 편의점에서의 총기살인 사건만큼이나 내 피부에 와 닿는 공포는 아니지만 문제는 우린 바로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편의점에 들른다는 ‘습관성’과 ‘불규칙성’에 있다. 이 철저한 자본주의 도시에서 바쁘게 살다보면 꼭 한번은 세븐 일레븐에 들어갈 일이 있듯이 만의 하나 운 없게도 총기살인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365일 영업중인 광고문구인 것이다. 작가는 9/11이 주는 기호적 상징과 도처에 퍼져있는 세븐 일레븐이 제공하는 일상적 의미의 공통점을 무의식적인 공포, 무방비 상태에서의 죽음, 무자비한 파산과 연결지으며 미국에서 미국을 견디는 방법을 차분히 보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맷은 이 ‘7/11’이라는 공포의 기억을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과연 빠져 나오긴 했을까. 이 작품의 제목이 ‘고군분투 생활기’임을 감안하면 잘 헤쳐 나왔다는 생각도 들지만 정작 맷의 고군분투하는 생활은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일 듯 한데 그렇담 아직 공포의 터널은 진행중이라는 말일까.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무엇이든 처음 시작이 두려워 그렇지 막상 시작하고 나면 또 그렇게 두려울 것도 없이 적응되고 마는 것이 인생의 오래된 관성법칙 아니던가. 가만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알고 처절하게 느껴보았기 때문에 다음을 시작할 수 있는 무던함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소설 초미에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만을 두려워할 뿐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는 맷의 의미심장한 회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두렵다고 생각되는 것, 내게 두려움을 주었던 그 기억이 두려운 것이지 두려움의 실체가 두려운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움의 실체는 바로 겪어내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사실 두려움 속에 던져진다는 것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두려움의 본질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맷의 이야기는 사실 두려움의 실체를 겪어내기 이전의 불안과 공포에 초점을 둔 이야기였기에 책을 덮어 낸 지금 맷이나 우리나 그다지 두렵지 않다는 것, 그것 또한 이 소설이 이룩한 성취가 아닐까.

이 작품이 나름의 희망을 암시하는 건 바로 그 두려움이라는 소설적 서사가 겨냥하는 정확한 좌표지점에 있었다. 실은 망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99이고 막상 망하고 난 후 겪어내는 그것은 두려움 그 후의 평화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두려움의 본질과 맞장 뜰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작가는 맷이 파산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일주일간의 상황과 심리상태를 지겹도록 시시각각 중계하면서 같은 고통에 동참한 독자들로 하여금 진한 인삼엑기스와도 같은 동질감과 함께 사후 평화를 유도한다. 불행도 (누구나에게 공평하게)내 일이니 당연 평화 역시 남의 것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건 ‘망해도 견뎌볼 만하다’, ‘망하고 나니 더 자유롭다’, ‘망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미국 언론인 출신 작가의 자기 실태보고서였기에 더더욱 리얼하고 애틋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기 위해 굳이 망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망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적 지위의 추락, 경제적 파산등 표준적인 표현도 있으련만 나는 굳이 ‘망했다’고 짧게 말하고 굵게 적고 싶다. 처절하게 망해본 적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각설하고 ‘망했다’고 말한다. 수식하고 설명하는 건 기회의 문제인데 그건 그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미국을 견디는 방법

결국, 이 소설은 해고당한 전직 신문기자가 맥시마의 밀린 할부금 3만 달러를 갚기 위해(주택 담보 대출로 차를 샀으므로 집을 잃지 않기 위해) 일주일 동안 동분서주하게 세븐 일레븐을 맴돌다 지치는 이야기였다. 어이없지만 미치도록 슬픈 사실이었다.(차종이 BMW만 되었어도...) 꼭 무리한 대출로 집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아파트의 소유주가 되었으나 이자에 못이겨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내가 아는 이웃들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어떻게 마련한 생애 첫 집인가. 맷에게 그 집은 지난 몇 년 동안 부와 안정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던 집이었다. 집을 잃는다는 것은 허울좋은 중산층의 위세뿐인 그 허울을 벗어던지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 지위의 추락이자 개인적 자존심의 박탈이다. 불행은 꼭 한꺼번에 팩키지로 청구된다고 그와중에 아내는 왕년의 남자친구 척과 외도중이시다. 대출회사는 늘 그렇듯 이쪽에선 죽어도 연락이 되지 않고 사립학교는 더 이상 보낼 처지가 되지 않고 아내는 이층에서 컴퓨터만 끼고 살아간다. 이럴 때 등장하는 하필 대학시절 맛본 적 있는 마리화나의 유혹은 어쩐지 통속적이고 진부하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투자정보를 시 형태로 제공하는 웹사이트, 남들이 시도한 적 없는 금융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사업을 말아먹은 맷의 낭만성을 고려해보면 마리화나야 말로 막다른 절벽에서 마주친 일생 일대의 행운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공감줄 수 있는 시구절로 주식시장의 등락을 말하고 투자소식을 전한다면 세상이 좀 따스해지는 거 아닐까 싶어서이다. 물론, 세상 따스하자고 내놓은 발상이 아님을 잘 알지만 도표와 그래프에 지친 그 옛날 문학청년이 시인의 감성으로 경제기사를 쓰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자신이 진단한 것처럼 실없는 오만으로 보이진 않았다. 맷은 나름의 비즈니스 모델로 ‘시인’의 ‘시적 감수성’을 차별화전략으로 내세웠지만 세상은 그러한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시인’의 경제적 전망만을 평가했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늘 분석해오던 많고 많았던 그 뻔한 경제기사처럼.

이에 반해 맷은 시를 통해 세계금융에 대한 분석과 그 체제하에 놓여있는 인간들에게 멋진 시를 쓰는 것으로 아쉬운 낭만을 대신했다. ‘세계금융의 위기는 우리 금융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자본을 창출하고 투자하는데 별다른 규제가 없었던 우리 시스템 전체에 결함이 있는 것이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바로 우리들 인간성 자체까지 흠이 있다는 것’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을 시적자아를 빌어 토로한다. 어느 신문사, 어느 은행의 사장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 말이 하고 싶어 시인이 되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세상에선 아무것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없으며 우린 단지 그것들을 잠깐 빌려 쓰는 것(아버지와 아내마저도) 존재일 뿐이라는 맷의 고백은 그것이 경제기사가 아니라 비경제적 시였기로 흠칫했던 대목이었다. 이 책에선 시말고도 동화같은 순수성을 행복의 모티브로 삼아온 맷의 애틋한 유년기도 있었다. 의외로 나는 맷의 동화가 시작되고 완성되는 이야기에 눈물이 날만큼 뭉클했다. 맷은 하층 노동계급 신분으로서 목재소의 작업복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 작은 레고 조각으로 만든 오두막집의 꿈을 키워온 아들이었다. 맷이 꿈꾼 통나무집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가족들과 살면서 행복을 키우는 장소였을 터이다. 이 꿈은 자신의 아들에게도 이어져 닌넨도 위가 아닌 집 앞 뜰에 지어진 나무놀이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와 바람난 럼버랜드의 왕자, 바로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진 목재소 주인 척을 통해 그들의 꿈이 형상화된다. 척에게 아내와의 외도를 비난하고 싶었던 맷은 척이 싣고 온 나무들로 노망든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자신마저 합세해 ‘2번 국경요새’를 완성하게 된다. 시작부터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무언가를 완성하고 나면 그 과정은 정말 소설같지 않은가. 작가는 묻는다. 맷은 왜 실직을 당하기 전까지 마음만 있었지 아이들에게 나무놀이집을 지어주지 못했던 것일까. 왜 하필 다 망해서 경찰서로 끌려가기 직전에 나무놀이집을 완성할 수 밖에 없었을까. 맷의 아버진 치매가 걸려도 자신이 행복을 위해 묵묵히 해온 그 작업의 과정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들을 잊고 손자를 잊고 자신마저 잊었지만 나무집을 만드는 법을 잊지 않은 아버지의 망치질은 이 작품이 울려주는 깊은 종소리는 아니었을까.

내가 이 작품에서 희미하게 엿본 미국의 희망이라는 건 바로 그들이 한나절 땀흘려 가꾼 나무놀이집이 아닐까 싶었다. 맷은 우연히(어쩌면 필연적으로) 다시 경험한 마리화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달간만 장사를 해서 밀린 대출금을 갚고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수 있을 정도만 되면 그만두리란 야무진 계획을 세운다. 세븐 일레븐에서 우연히 조우한 제이미와 마약파는 변호사 데이브의 꾀임에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건 맷이 이미 마리화나의 위력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하필 머리좋은 협잡꾼 데이브와 차종이 닛산 맥시마로 같다는 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르는 도덕성, 경제적 능력이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암시로 느껴졌다. 맷은 위드랜드 마리화나 공화국, 시체들을 보관해 놓은 영화세트장 같은 수경재배실에 넋을 잃고 마리화나를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시작한다. 이는 꼭 아내가 쇼핑강박증에 걸려 물건을 사재기하는 심리와 다를 게 없는 어리석은 탈출방안이었다. 맷은 기자시절 취재차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병원관계자)리사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불법과 대치하는 중산층으로(그래야 불법을 비난할 수 있으니까) 살아왔다. 맷이 마약을 인정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과 아내, 자신들로 태어난 아들까지 전 가족 모두를 부정하는 결과였다는 점에서 맷의 선택은 예정된 파국을 불러오는 비극의 단서라 생각할 만했다. 그런데 작가는 파국을 목전에 두고 그 마지막 시점에 나무집을 지었다. 오늘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 손자, 그리고 적수인 아내의 남자, 거기다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까지 합세해 비록 내일이면 팔리고 말, 게임이나 할 아이들이 절대 놀아보지 않을 집 앞에다가 말이다. 지어놓고 보니 누가 뭐래도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집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래서 마리화나와 맞바꾼 통나무집은 다행히도 계속해서 미국의 영원한 동화같은 꿈으로 남을 수 있었다. 울어야 할까. 어쩔 수 없이 웃어드려야 할 그러다보면 서로 마주하고 웃을 수도 있지 싶은, 이 책은 시인이 쓴 금융문학이 맞기는 했던 것 아닐지.

행복을 말하는 숫자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아들을 위한 소설이었다. 소설에서 자동차 세일즈를 하던 아내 리사의 아버지, 두 번째 가정으로서 그녀가 열두살 때 심장마비로 죽은 부성의 부재를 노망든 자신의 아버지가 멋지게 부활시키며 반전의 홈런을 선사했다. 맷은 망하고 나서야 중산층 시절 원망과 분노와 가식적인 평화로 행복한 척 해왔던 자신의 부부관계를 반성하고 다시 아내를 바라본다. 이때 추락과 동시에 동반상승되던 행복주의 가치는 이미 미국의 것만은 아니었다. 차 없이 버스로 출근했지만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버스 안에서 한 쪽 장갑을 잃어버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의 미소는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맷은 위선적인 중산층 쓰레기의 손에 남들을 자기기준으로만 평가하고 비웃던 같잖은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턱없이 낮은 연봉의 회사에 재취직해 차근차근 재기의 기회를 준비한다. 비록 나무놀이집은 내 집 앞의 뜰이 아니라 삼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 보이는 건너편 잔디위에 놓여 있지만 맷은 미국인이므로 한 번 더 해볼 자격이 있지 않은가. 파산하면서 부채에서 벗어나자 행복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 맷의 마지막은 많이도 쓸쓸했다. 자신을 위한 위로처럼 보이는 독백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맷이 다시 재기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1년? 3년? 아니면, 5년...?

돈이 있어 보았다. 집도 있어 보았다. 그때 행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 여유로운 편에 속했던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남의 집, 남의 차, 남의 옷들만 보였는지 모르겠다. 정원이 많은 유치원은 위생상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좀 더 멀어도 소수정예의 값비싼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었다. 우리 생활 패턴상 중형차가 필요없었지만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이웃들의 차에 빠지지 않으려 무슨 경쟁하듯 차종을 바꾸었다. 같은 라인에 사는 아줌마들은 이사를 오면 약속이나 한듯 제일먼저 전세이냐 자가이냐를 스스럼없이 물어보았다. 간절히 여행을 원한 것도 아니면서 아이 친구가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하니 우린 그럼 일본에 다녀오자며 명절연휴를 꼬박 일본에서 지내고 돌아왔다. 입학하고 아이 첫 생일이라 이벤트 회사에 맡기자는 학부모들 틈에 끼어 연회장을 빌려 무슨 칠순잔치 하듯 생일축하 쇼를 연출했다. 별 고민없이 매사가 그런 식이었고 그것에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시사매거진에나 나올 법한 일을 눈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치루어 내었다. 이 책의 맷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문제없이 잘나가고 있을 때(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망상적인 자기유혹에 어이없게도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시로 경제기사를 쓰겠다는 자기 성공에 대한 고집같은, 여지껏 살면서 운빨은 괜찮은 것 같은 자기 우월, 예를 들면 어떤 막연한 장소에 근사한 술집을 차려놓고 갑자기 자기인생의 낭만을 찾아보겠다는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줄 묘안으로 여겨지는. 나 역시 그 유혹에 빠져들어 맷처럼 호되게 실패를 맛보았고 파산직전에 또 그 이상의 유혹에 빠져들 뻔 했지만 운좋게도 아직 마리화나같이 치명적인 한방은 만나지 못한 실정이다. 매일 저녁 한강변 아파트 탑층에서 한강다리 너머 타오르던 노을을 만끽하다 갑자기 줄어든 모든 환경은 꼭 한강에서 투신하는 느낌의 인생의 추락이었달까. 돈이 없고 나니 비로소 나는 돈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나처럼 경제적으로 큰 실패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어느 정도 답이 되줄 수 있을 것 같다. 혹 답은 못되어도 하루 이틀 유익한 벗은 되 줄 것 같다. 장갑을 잃어버린 아이에게도 호주머니가 있듯 찾아보면 불행속에도 행복은 있는 거라고. 이 인분의 아이스크림으로 각자 배를 채울 순 없겠지만 한 개의 아이스크림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 행복이야말로 더 달콤하지 않겠느냐고. 행복은 그렇게 모두 갖추어지고 모두 완성되어야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부족해도 서로가 갖추어 가며 완성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혹시 당신도 더 큰 집 더 큰 가구를 좇아 오늘도 더 큰 거짓으로 행복을 연출하고 돌아왔다면 빨리 그 거짓을 내려놓으라고. 지금부터라도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집을 찾아 첫걸음을 내 딛으라고.

그래, 할 수 없이 7/11이 9/11의 다른 버전이 아니고 행복을 편리하게 구입하는 행복편의점이 되도록 마음을 바꾸어야겠다. 일곱 시에 일어나 열한시가 될 때까지 하루 종일 행복하라는 숫자로 내 맘대로 변환해야겠다. 원칙도 기준도 없지만 이 책을 읽었기에 떠오른 생각,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좋겠다.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오고 미국에 테러가 닥쳐와도 우리 행복의 숫자만큼은 이견이 없었음 좋겠다. 아쉽지만 그것만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 하며 당신에게 건낼 수 있는 최선인듯 하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다짐할 수 있는 기회인 듯 하다. 세븐 일레븐, 시인이든 기자이든 한번 망해본 동병상련의 마음이야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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