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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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결혼했던 1988년 그해, 남편이 내 이름을 부를 순 있어도 내가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감히 아내가 남편의 이름을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게 시집 식구들의 의견이었다. 우리 부부는 동갑이니 남편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남편의 이름에 ‘씨’자를 붙여 불렀고 남편은 나의 이름에 ‘씨’자를 붙이지 않고 이름만 불렀는데도, 내가 부른 남편의 호칭만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여성의 낮은 위치를 뼈저리게 자각한 사건이었다.

 

 

이렇게 호칭 문제를 경험한 터라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처음 만났을 때 무척 반가웠다.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자기만의 방과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울프 저, <자기만의 방>, 그리고 우리는 남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쁜 원칙과 싸운다고 말하는 프리단 저, <여성의 신비> 등을 읽으며 세상의 불합리와 불공정을 배웠다.

 

 

그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흐르자, 아내가 남편의 이름을 불러도 괜찮은 시대가 되었다. 시동생이 결혼하여 새로 생긴 동서가 그걸 증명했다. 세월은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그렇게 높여 놨다. 이제 페미니즘이란 말은 진부하다. 그래서 누구나 페미니즘에 대한 모든 책들이 새롭지 않은 뻔한 주장을 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도 그랬다.

 

 

그러다가 정희진 저,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다. 그러나 이 책은 진부하지 않고 새롭다 못해 충격적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기존의 인식의 틀을 뿌리 뽑고 새로운 인식의 틀을 만들어서 세상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을 전부 지워 버리고 새로운 내용으로 사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떤 독자에겐 마음 불편한 책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남자에게 대항하여 싸우자고 소리치지 않으며, 여자의 힘을 기르자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남자든 여자든 우리가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 주기 위해 세상의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할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졌던 생각들이 맞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를 갖게끔 해 줘서 좋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권력을 드러낸다

 

 

우선 저자는 머리말에서 ‘물음’에 대해 말한다.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방식을 반영한다는 것.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는 것.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16쪽)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니. 그렇다면 평상시 하는 말에도 주의가 필요하겠다. 나의 말에 어떤 편견과 선입감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검토해야겠다.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을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려면 우리의 노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여성은 남성의 시각을 이어받는다

 

 

저자는 우에노 치즈코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여성주의 사유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여성의 역사가 출발하다 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여진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 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들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214쪽)

 

 

 

 

남성에 의해 쓰인 여성의 역사에서 여성의 모습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 모두가 갖고 있는 시각은 남성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시각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불과함을 말하고 있다. 보부아르의 표현을 빌리면,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다는 것이겠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도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대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다

 

 

저자는 ‘동성애 혐오 문화’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자신이 동성애를 허용하자고 주장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누가 동성애를 ‘허용’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말한다. 여성이나 흑인, 장애인 모두 누군가 ‘찬성’하지 않아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동성애자 역시 누군가의 ‘동의’와 ‘허락’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자임을 알리겠다는 위협이 한 사람의 인권을 몰수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퍼져 있는 동성애 혐오 문화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제의 가해자는 사회 구성원 모두라고 볼 수 있다.(111쪽)

 

 

 

 

‘소수자’에 대해선 이렇게 언급한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면에선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는 것,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고.

 

 

이 밖에도 성판매 여성, 군사주의와 남성성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며, 성비 불균형으로 인한 여아 낙태의 문제, 정신대 문제, 가정폭력 문제 등이 ‘인권’의 문제임을 지적한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을 규율하고 있는 외모 ‧ 학벌 ‧ 나이 ‧ 서울 중심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 사안도 인권 침해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제도나 원칙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알랭 드 보통이 <불안>이란 저서에서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해 쓴 것, “어릴 때 우리 모두 가졌던 환상, 즉 우리가 살아가는 제도가 날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을 머리에서 씻어내야 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라는 글이 생각났다. 여기서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환상’이란 일시적으로 임시변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제도를, 얼마든지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제도를 마치 늘 존재해 왔고 또 늘 존재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대부분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게 어디 ‘제도’뿐이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원칙들을 일말의 의심 없이 꼭 지켜야 마땅한 옳은 것들로 수용하여 고정관념의 노예로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비해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요즘도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여자가 뭐 하러 밤늦게 싸돌아 다니냐?”라는 말로써 여성이 여성을 비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세상이다. 또 신문을 통해 한국인이 이주 노동자를 무시하는 모습도 볼 수 있는 세상이다. ‘사람을 존중하는 세상’에 살기 위해서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한, 이 책은 아직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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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2-16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크 언니,
누구나 어떤 면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문구에 열렬히 공감해요.
제가 생각했으나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그대로 페이퍼화시킨 듯한 글이예요.

저는 현 제도가 이점이 있어서 지켜지는 것이기에 가능하면 지켜야 하지만
경직된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현재 제도나 나의 의견이나 틀릴 수 있다는 융통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경직된 저의 태도, 이미 욱한 감정 상태를 보면서 한숨을 쉬곤 해요. 흔히 타인의 경직된 태도를 비판하지만, 그에 앞서 내가 균형을 잡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데,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균형이 아닌가 싶어지더라구요. ^^

페크(pek0501) 2011-12-16 21:40   좋아요 0 | URL
아, 첫손님! 마녀고양이님 고맙습니다.^^

마음의 균형 잡기,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다가도 막상 어떤 화나는 일에 처하면 이성을 잃어 마음의 균형을 잃을 수 있죠. 그런데 균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난 뒤에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었는지를 올바르게 판단하는 일이 아닐까 해요. 실수는 누구나 하는데, 그것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사람과 성찰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는 크다는 것이죠. 마고님은 성찰하실 줄 아셔서, 제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이런 말도 위의 리뷰글에서처럼 저의 권력을 드러내는 것인지 걱정?이 되는군요. (지가 뭔데 괜찮다고 그래,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있을까 봐서요.) 농담임.ㅋㅋ 정말 말조심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오늘 날씨 무척 추워요. 하필 오늘 선배님집에 놀러갔다가 오는 길에 진짜 `겨울`을 만났어요. 겨울의 동반자, 감기 조심해요, 우리.

노이에자이트 2011-12-1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지금은 부부 간에 어떻게 호칭을 정했는지 궁금합니다.이곳 호남지방에선 중장년 이상의 남자는 아내에게 누구누구 엄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죠.물론 누구누구는 아들이나 딸이름이죠.

페크(pek0501) 2011-12-18 01:18   좋아요 0 | URL
님의 질문에 생각해 보니, 지금도 그대로 부르고 있군요. 저는 씨자를 붙여서 남편을 부르고 남편은 그냥 제 이름을 불러요. ㅋㅋ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 말처럼 저도 이 사회에서 길들여져서 남편 이름을 감히? 못 부른 것이죠. 이렇게 어떤 문화를 수용해 버려서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는 것이죠. ㅋㅋ 어른들 앞에서만 서로 아무개 엄마, 아무개 아빠라고 불러요.

마태우스 2011-12-17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 제 인생에서 두번째로 많은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한줄 한줄이 다 예술이죠. 근데 이 책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성매매 문제를 읽다가 "이게 참 쉬운 문제가 아니구나" 했었어요. 정희진님이 책을 좀 많이 썼으면 좋겠는데 너무 뜨문뜨문 쓰시더군요. 그나저나 님 <제2의 성> 읽으셨군요. 그거 읽은 분 찾기가 참 어려운데...사실 전 정말 의지, 끈기, 인내 이런 걸 다 동원해서 읽었어요. 빨간펜으로 줄만 빡빡 쳤다는...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랍긴 한데요, 읽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여자였다면 좀 더 쉽게 읽었을까요? 암튼 님이 그 책을 읽으신 걸 안 게 반갑네요.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릴게요

페크(pek0501) 2011-12-18 01:13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런데 지도편달 부탁이라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큭. 마태우스님의 겸손? 배울 사람은 저인 것 같은데염.ㅋㅋ

성매매 문제, 저도 혼란스러웠어요. 그래서 이 리뷰에선 성판매 여성(밑에서 네 번째 문단에)이라고만 썼어요. 성매매 자체가 인권 침해인지, 아니면 그것의 금지가 생존권 침해인지..., 또 우리가 바라는 것과 성매매 여성들이 바라는 것이 다를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등 어려운 문제예요.

<제2의 성>, 다 읽으셨다니 저도 반갑네요. 초보 시절에 500쪽이 넘는 상하 권 두 권을 꼭 읽어야 페미니즘을 알게 되는 줄 알고 읽었어요.ㅋㅋ 저도 줄 치며 읽는 버릇 있어요. 읽었더니 이렇게 써 먹을 일이 있을 줄이야...
아, 그런데 님에게 첫 번째로 영향을 끼친 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

2011-12-26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7 1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7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27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5-04-27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안해는 저에게 존댓말을 하고 저는 안해에게 존댓말을 합니다. 제 딸에게도 존댓말을 할 예정인데,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습니다.

왜 pek0501 님은 배우자에게 상호 존댓말을 써 줄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나요? 그리고 저는 선생님이라는 직종만으로도 연하인 사람 모두에게 존댓말을 사용합니다.

2015-04-28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 - 나오키상 수상작가 무코다 구니코의 유쾌한 인간관찰기
무코다 구니코 지음, 곽미경 옮김 / 강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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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자기 내면으로의 여행’이며 ‘자신과의 대화’라고 한다. 그 이유를 이 책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 알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 독서가 작가의 글을 읽으며 동시에 독자인 ‘나’를 읽는 행위임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 드라마 작가로 알려져 있는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 38편이 담겨 있는 책이다. ‘유쾌한 인간관찰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인간이 가진 불편한 진실에 주목했다.


불편한 진실 첫 번째.




길을 걷다보면 맞은편에서 부모형제가 걸어오고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어쩐 일인지 너무 당황스러워 갈팡질팡하며 어디다 시선을 둘지 모르고 만다.


아, 하고 무심코 손을 들어 알은체하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알아봤다는 걸 상대가 눈치 채지 않도록 모른 체한다. 서로 스쳐 지나가기 직전에 그제야 알아본 듯이 좀 무뚝뚝하게 말을 건다.


- ‘아는 얼굴’, 22쪽.





이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 자신의 경험을 딴 사람이 글로 옮겨 놓은 듯해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이십대에 있었던 일이다. 혼자 가는 길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났는데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고 싶었다. 그런 기분에 대해 그 누구하고도 얘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가 이 글을 읽고 나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음을 알았을 정도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작가의 능력에 감탄했다. 이런 걸 끄집어내어 글로 쓸 수 있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친숙하고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밖에서 우연히 보게 되면 반가워서 달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피하고 싶은 당혹감은 왜 일어날까. 어색함과 쑥스러움 때문일까.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일까. 상대가 부끄러워할 것 같아서일까.


불편한 진실 두 번째.




(태풍 오는 날에) 손전등을 비춰가며 화장실에 가고,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드는 것은 어린 마음에도 이상하리만치 흥분되는 일이었다. 형제간 싸움도, 부부 싸움도 태풍이 부는 밤만큼은 휴전이었다. 엄마와 할머니 사이의 약간 서먹한 기운도 수그러들었다. 그렇게 온 식구가 하나로 뭉쳤다. 나는 그런 게 너무 기뻤다.


이제나저제나 몹시도 긴장하며 기다렸던 태풍이 빗나가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있을까.


어른들의 말투나 몸짓에서도 (태풍이 빗나간 것에 대해) 분명 아쉬움 같은 게 느껴졌는데, 겉으로는 그런 걸 요만큼도 내색하지 않는 게 조금 얄미웠다.



- ‘태풍 오는 날’, 74쪽~75쪽.




인간 안에는 분명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걱정하던 태풍이 무사히 지난 간 것에 안심하기보다 어떤 아쉬움 같은 게 남아 있는 이 경우도 그렇다. 이제 더 이상 긴장감을 느낄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일까, 가족애가 오가는 시간이 끝났음에 대한 아쉬움일까.


불편한 진실 세 번째.




식사 시간에 온 손님은 반드시 밥을 먹고 왔다고 한다.


“뭐, 괜찮지 않은가요. 초밥 먹을 배는 따로 있다지 않아요.”

“정말 먹고 왔다니까요. 조금도 들어갈 배가 없어요.”

“아휴, 그러지 마시고 조금만 드셔보세요.”

“그럴까요? 그럼……”


아침을 어중간하게 먹어서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는 손님에게는 “그냥 맛이라도 ……”라고 권하면 대부분은 접시를 깨끗이 비운다. 하지만 먹고 왔다는 말을 해놓고 도중에 노선을 변경하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끝까지 젓가락도 대지 않고 돌아가는 손님도 있다.


- ‘뻔한 인사말’, 86쪽~87쪽.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는 것을 보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사람은 다 같은 모양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밥 먹고 왔다는 말을 한 것까진 괜찮다. 그런데 만약 한 젓가락쯤 먹고 싶은 상황이 되어서도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젓가락을 대지 않아야 한다면, 그런 인간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다음과 같이 작가의 유머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주는 글도 있다.




(안경테가 망가져서) 노안경을 손보려면 (잘 보이지 않아) 또 하나의 노안경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손전등으로 손전등을 찾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만 있어도 그걸로 충분하다.


깨끗하게 해놓지 않으면 혼이 날 것 같아 나는 비누를 씻기 위한 비누를 찾았다. 물론 비누를 깨끗이 하려면 더러워진 그 비누를 쓰면 된다는 걸 곧바로 깨닫고 혼자서 웃고 말았지만.


- ‘혼자서 웃고 말았다’, 78쪽~82쪽.





작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해 주는 글도 있다.




시대극을 볼 때 가장 마음 아픈 건 애송이나 하급관리가 죽는 장면이다. 악당 두목을 따른 죄밖에 없건만, 버러지같이 무참히 죽는다.


나 같은 인간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순간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배우들이 과격한 난투 끝에 숨이 가빠졌는지 참았던 숨을 후우 하고 내쉬거나, 거친 숨결 때문에 배가 불룩거리는 걸 보았을 때이다. 엄격한 연출가는 이런 장면을 NG로 판단해 다시 찍자고 하는데, 제발 그대로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 아아, 다행이다. 정말 죽은 게 아니야. 이제 저 사람들은 1만 엔이든 1만 3천 엔이든 일당을 받고 돌아간다. 이렇게 안심하는 마음 약한 관객도 있는 것이다.


- ‘베다’, 220쪽~221쪽.





이처럼 작가들의 훌륭한 점의 하나는 우리들이 무심한 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을 잘 포착해서 글감으로 만드는 그 ‘찾음’의 능력일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책세상 출판)>에서 인용한 다음의 글도 그것을 말하고 있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오래 전부터 그것은 거기에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뿐.”(얀 스카첼)  
 

나는 <영장류 인간과(科) 동물도감>이 배달되던 날, 책을 펼치자마자 그날로 다 읽어 버렸다. 부담 없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읽은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 출판)>와 비교한다면, 조지 오웰의 에세이가 세계의 ‘무거운’ 진실을 전하는 글이라면,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는 개인의 ‘가벼운’ 진실을 전하는 글이다.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매력이 있다.     


독자에 따라서는 정치적 목적을 중시하는 조지 오웰의 글에 더 가치의 무게를 둘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이란 그런 무거움만으로 채워져 있지도 않고 또 무거움만으로 채워져서도 안 된다는 생각에서 이 ‘가벼운’ 내용의 책은 읽을 만하다. 코믹한 영화를 보듯 웃음 짓게 만드는 유쾌함과 봄 소풍을 가는 발걸음 같은 경쾌함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더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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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8-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과 같은 이의 글만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도 일종의 허영심이겠죠.평이하고 잔잔한 글도 좋은데 말이죠.하긴 조지 오웰의 글도 늘 심각한 주제만 다룬 것만은 아닌데요.

페크(pek0501) 2011-08-19 11:5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나 좋을 대로'와 같은 가벼운 에세이도 있어요. ㅋ

평이하고 잔잔한 글의 매력을 아신다니 반갑습니다.
 
토니오 크뢰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5
토마스 만 지음, 강두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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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 나와 닮은 사람의 슬픈 이야기


‘토니오 크뢰거’를 읽은 글쟁이들은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니’, ‘아니 이건 나잖아’하는 생각으로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이 작품은 한 예술가의 내면세계를 자세히 보여 주는 성장소설로, 글을 쓰는 ‘토니오 크뢰거’가 그 주인공이다.


이문열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내가 누구인지를 인식하게 해 준 소중한 소설이다”라고 했으며 “그는 참으로 가슴 아프게 나와 나의 동족들을 보여 주고 정의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독서목록에 의하면 이 작품을 처음 읽은 때는 1998년 6월이었다. 문학에 한참 빠져 살며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을 때였다.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금방 매료되어 ‘아니 이런 작품이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오다니!’하면서 단숨에 읽었었다. 그 뒤에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에 여러 번 읽어서 다섯 번 이상 읽은 것 같은데, 읽을 때마다 주인공에게서 나를 보는 게 경이로웠다.


이 소설을 여러 번 읽은 이유는 주인공 토니오에게서 나를 보는 경이로움 때문이었다. 주인공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읽는 즐거움 때문이었다.


사랑엔 여러 법칙이 있다. 그 중 슬픈 법칙은 둘 중에서 상대를 더 사랑하는 자가 괴로움을 더 많이 느낀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하는 말에 민감하고,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잘 받으며, 상대가 조금만 자신에게 소홀히 해도 심각해진다. 이것은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이 상대를 더 사랑하기에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와도 같은 것이다. 이 소설 속 주인공 토니오도 친구를 사랑하면서 그런 경험을 하였다.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는 패자이며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가혹한 교훈을 열네 살 된 토니오의 영혼은 이미 인생으로부터 배우고 있었다.” - 본문에서.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사랑을 받는 데에 있지 않고 사랑하는 데에 있다. 그것이 고통을 수반한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일은 달콤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비해 사랑을 받는 일은 그저 인간이 가진 허영심을 충족시켜 주는 즐거움을 줄 뿐이다. 사랑에 빠진 토니오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사랑을 받는 것은 허영심을 위한 메스꺼운 만족감에 불과하다. 행복이란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사랑하는 대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는 기회를 노리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본문에서.


사람들은 왜 글을 쓸까. 글 쓰는 일이 무조건 좋기 때문일 것이다.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글을 쓰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글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글을 쓰며 사는 일이 세상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될 때가 있으리라. 가령 여름날 땡볕 속 아파트 공사장에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들을 볼 때나, 겨울날 매서운 추위 속 재래식 시장에서 찬 생선을 손질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글 쓰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리라. 난 편안히 앉아서 ‘쓰지 않아도 될 글’이나 쓰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토니오는) 시를 쓴다는 것은 방종한 것이며 원래 옳지 못한 것이라고 자신도 느끼고 있어서, 이런 행위를 기이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독특해서 사람들과 마찰이 생기는 일이 잦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저항정신을 갖고 사는 외로운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토니오도 그런 사람이어서 다음과 같이 마음속으로 생각한다.


“나는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유별나 만사에 충돌하고 선생님들과는 사이가 나쁘며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 너(한스 한젠)처럼 그렇게 눈동자가 파랗고, 또 너처럼 단정하고 누구하고나 잘 어울려 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은 정신과 언어의 위대한 힘에 매료된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능가하는 다른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그(토니오)는 이 지상에서 가장 숭고하게 여겨지는 힘, 그것에 봉사하는 것이 자기의 천직이라고 느낀 힘, 그에게 고귀함과 영예를 약속한 힘, 즉 무의적이며 말없는 인생 위에 미소 지으며 군림하는 정신과 언어의 힘에 송두리째 몸을 바쳤다.” - 본문에서.


“그 힘(정신과 언어의 힘)은 그의 시선을 예리하게 했고 인간의 가슴을 부풀게 하는 허황한 언어의 정체를 간파하게 했으며 인간의 영혼과 그 자신의 영혼을 해명하게 해 주고 그에게 투시력을 부여해 세계의 내면과 또 언어와 행위의 배후에 있는 일체의 궁극적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그가 본 것은 희극과 비참 - 그야말로 인생의 희극과 비참이었다." - 본문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잘 안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들은 결코 글을 쓰지 않을 것이며,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글을 쓴다는 것을. 그래서 우울한 그림자를 달고 사는 이들은 자신은 글을 쓰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글을 쓰지 않기를 바라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토니오도 자신이 사랑하는 한스 한젠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다.


“한스 한젠, 너는 그 옛날 정원 문간에서 나에게 약속한 대로 ‘돈 카를로스’를 읽었느냐? 부디 읽지 말아다오! 이제 너에게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겠다. 고독 때문에 우는 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음울한 시를 들여다보면서 그 맑은 눈동자를 흐리게 하거나 꿈꾸듯 몽롱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도 너와 같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 본문에서. (난 이 글이 제일 슬프게 느껴진다.)


토니오는 여자로서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친구로서는 한스 한젠을 좋아한다. 그는 잉에보르크 홀름을 아내로 삼고 한스 한젠 같은 아들을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식의 저주와 창조의 고뇌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평범성 속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그러나 그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어느 종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길을 잃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올바른 길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는 없다.” - 본문에서.


그러므로 이 ‘길을 잘못 든 세속인’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한다.


“저는 두 세계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에서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살기가 좀 힘듭니다. 당신들 예술가는 저를 세속인이라고 부르고 또 세속인은 세속인대로 저를 체포하려고 합니다.” - 본문에서.


평범한(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 속에 낄 수 없어서 필연적으로 고독한 사람들. 지금 이 시간에도 토니오와 닮은 이런 사람들은 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지 않아도 사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그 무엇을, 글로 쓰는 세계에 침잠해 있을 것이다.


그런 고독한 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갖게 만든다, 이 소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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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2-24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란... 예사 사람들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영혼이 아닐까 합니다. 예사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툭 부딪치고,
예사 사람들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꽥! 소리쳐서,
혼자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가끔은 혼자서 빙긋이 웃기도 하는... 상처받기도 쉽지만 상처주기도 잘하는 그런 영혼...

페크(pek0501) 2010-02-24 16:27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고수께서 하수의 방에 들르셨네요. 영광입니다. ㅋㅋ

작가란 그래서 외로운 존재이지요. 남들이 그냥 지나칠 일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일기 일쑤... 마찰 있기 일수...그런데 그렇게 예민하지 않고 둔하면 글을 쓸 수 없겠지요. 다른 예술가들도 마찬가지, 평범하다면 예술이 되겠습니까. 유별나도 예술가들을 사랑합니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이니까요.

옹달샘 2010-02-24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릴 적부터 작가를 꿈꾸어 왔지만 진정한 작가정신을 가진 분들을 보면 더럭 겁이 납니다. 저는 발끝도 따라 갈 수 없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지요. 감동을 주는 글을 창작해 내는 작가들이 유별나다고 해도 좋습니다. 창작품을 남겨주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 유익을 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작가들을 만나는 것보다 작품으로만 만나는게 좋다는 생각이 드는건 왜일까요?

페크(pek0501) 2010-02-26 11:24   좋아요 0 | URL
저도 비문학적인 데가 많은 사람이라서 그들의 모습과 똑같이 않아요. 하지만 또 비문학적인 사람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문학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돼요. 그래서 이 세계 저 세계, 어느 세계에서도 섞이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되는 느낌이 들지요. 이 소설의 토니오처럼요.

작가들을 직접 보면 실망이 될 때가 정말 있어요. ㅋ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


동창생 모임에 참석을 잘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고정관념이다. 한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진부하다. 나의 답은 이렇다. ‘동창생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유능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유능한 사람들은 아무리 바빠도 일 처리를 다 하고 바쁜 티를 내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기 때문이다. ‘나 바빠서 그 모임에 못 나갈 것 같아’라고 말하며 바쁜 티를 내는 사람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해 모임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들이다. 내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에코’이다. 이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을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 움베르토 에코(1932년 이탈리아에서 출생)는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이자 저명한 기호학자이면서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이다. 그리고 지독한 ‘공부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의 천재’로 알려져 있다. 이런 대학자가 유머 있는 가벼운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이 될까? 이런 궁금증이 이 책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진짜 힘 있는 사람은 걸려 오는 전화를 일일이 받지 않는다. 늘 회의 중이라서 전화를 직접 받을 수 없는 자, 그가 바로 힘 있는 자이다. (203쪽)


이렇듯 휴대폰을 권력의 상징으로 과시하는 자는 오히려 자기가 말단 사원의 한심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만인 앞에서 고백하는 셈이다. (203쪽)


이것은 “긴급한 업무 때문에 자기들에게 전화가 끊임없이 걸려 온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자들”, 이를 테면 아무데서나 휴대전화로 큰 소리를 내며 통화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일침을 가한 것이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


집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책이 많이 있는 걸 본 방문자는 이렇게 묻기 일쑤다.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나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아 대답하기 곤란할 때가 있었는데, 그는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의 세 가지의 대답을 소개해 놓았다.


질문 : 와 책이 굉장히 많군요! 이 많은 걸 다 읽으셨어요?

대답 1 : 아니요. 저 가운데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어요. 이미 읽은 책을 무엇 하러 여기에 놔 두겠어요?

대답 2 : 저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었지요. 여기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말입니다.

대답 3 : 지금부터 다음 달까지 읽어야 할 것들입니다. 다른 책들은 대학의 연구실에 놓아두지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밝혀 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누구나 많은 책들을 마주하게 되면 ‘지식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무심결에 그런 질문으로 자기 자신의 고뇌와 회한을 표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253쪽)


책을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며 사는 나로서도 서점에 있는 많은 책들을 접할 때면 마음이 편하질 않곤 했다. 세상엔 이렇게 책들이 많은데 그것에 비해 난 조금밖에 읽지 못한 것에 대한 찜찜함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내 마음을 에코는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지식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는 것.


영화가 늑장을 부린다면 그건 포르노 영화가 맞다


‘포르노 영화를 식별하는 방법’의 소개는 참 신선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영화가 포르노 영화일까, 아닐까를 구분하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단다.


“만일 배우들이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여러분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늑장을 부린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포르노 영화이다.” (174쪽)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오로지 그런 장면들(입에 담기 어려운 천한 장면들)만 본다면 아무도 견뎌 내지 못할 것이다. 쓸데없는 공백 시간이 필요한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174쪽).”는 것이다.


얼마나 그럴 듯한가. 이 책엔 유쾌하게 또는 통쾌하게 웃음 짓게 만드는 글로 가득 차 있다. 책 속의 ‘차례’에 있는 제목들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도둑맞은 운전 면허증을 재발급하는 방법 / 진실을,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방법 / 반박을 반박하는 방법 / <맞습니다>라는 말로 대답하지 않는 방법 / 축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법...


앞으로 누군가가 묻는 말에 개성 없이 ‘맞습니다’로 대답하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참고할 말은 이렇다. 괄호 안은 대답이다.


경찰입니다! 로시 씨이십니까? (카를라, 짐 꾸려!)

아니, 자기 팬티 안 입었잖아! (그걸 이제 알아차렸어?)

보아하니, 당신 10억 리라짜리 부도 수표에 서명을 하고 나를 보증인으로 내세운 거 아니야? (당신의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벌써 탑승이 끝났나요? (저기 하늘에 작은 점 보이시지요?)

뭐라고? 너희들 지금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군.) (112쪽)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는 싶은 사람은, “오늘 날씨는 비가 내리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101쪽).”라고 말하면 된다는 것.


“당신은 얼마나 자주 일광욕을 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재밌는 답변을 하고 싶은 사람은 “햇볕에 노출될 때마다(106쪽)”라고 대답하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떤 책을 읽든 독자는 저자에게서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은 배우게 된다. 이 책을 쓴 저자에게서 내가 배운 것은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한 말을 통해서 보여 주는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이다. 내가 ‘비스듬히’라고 표현한 이 말은 세상을 정면에서만 보지 않기를 의미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의 한 쪽의 시각만으로 보는 데에 길들여져 있다. 하나의 컵을 예로 든다면 머릿속에서 컵을 상상할 때 습관적으로 정면으로 본 컵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컵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볼 수 있다. 컵을 위에서 볼 때와 아래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고 또 오른쪽에서 볼 때와 왼쪽에서 볼 때의 모습이 다르다. 여러 각도를 달리해서 얼마든지 다양하게 컵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 여러 모습의 총합이 바로 ‘컵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예로 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경우 미국의 시각에서 보자면 ‘테러와의 전쟁’이지만 이슬람세계의 시각에서 보면 ‘문명충돌’일 뿐이다. 제삼의 시각으로 보면 또 달라진다. 그러므로 한 쪽의 시각으로만 보는 건 제대로 보는 게 아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제대로 보려면 여러 각도에서 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각도에서 보는 게 옳은가 하는 점이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봄으로써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켜야 하는 점이다. 그것은 저자와 같이 ‘세상을 비스듬히 보기’를 통해서 가능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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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0-02-0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고 나서

이 글을 일주일 전에 써 놓고 이제야 글을 올렸다. 대충 써 놓은 초고이므로 다시 한 번 읽고 수정해서 올려야 하는데 늑장을 부린 것이다. 이유는 게을러서다. 좋게 말하면 느긋해서다.

글을 쓰면서 간혹 내 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관적인 생각에 치우쳐 억지를 부리며 글을 썼을 때가 그렇다. 사실 그런 글은 문제가 있는 글로 잘 쓴 글이라고 할 수 없으나, 알면서도 부족한 대로 글을 올린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하지만 내일 쓰는 글은 오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글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닌, 흐르는 물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사람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미완성’의 인생을 사는 것이므로.”

사실, 옛날에 찍은 사진 속의 자신이 촌스럽고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세련되지 못한 내 글에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래서 점점 글쓰기가 부담스러워진다.

이런 어려운 작업을 하는,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우정과 사랑을 보낸다.



중전 2010-02-24 22:55   좋아요 0 | URL
제 주관적인 생각
'선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물론 예외도 있지만)
글은 그때, 그 순간의 생각의 모습이지요.
큰 줄기는 변하지 않지만 세세한 지류는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며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건 읽는 사람의 몫이겠지요.

페크(pek0501) 2010-02-09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남길 지인들에게

저를 잘 아는 분은 댓글을 남길 때 굳이 로그인 하지 않고 댓글을 써도 됩니다. 댓글을 쓴 뒤에 이름 쓰는 칸에 이름 적고 비밀번호는 아무거나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숫자 적으면 됩니다. 비밀번호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본인이 댓글을 삭제하고 싶을 때 그 비밀번호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삭제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요. 저는 누가 들어오는지 모르니까 댓글을 남겨 주시면 무척 반가울 것입니다. (참고사항 : 남기지 않아도 됨)

옹달샘 2010-02-24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 유머감각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말도 있지만 쓸데없는 말, 피곤하게 만드는 말, 상처주는 말,짜증스런 말을 자주 하거나 듣고 살잖아요.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유쾌해지는 말을 하면서 살면 세상살기가 한결더 즐거울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0-02-26 11:19   좋아요 0 | URL
예 맞아요. 특히 불행하거나 우울한 일이 있을 때 유머감각으로 기분전환이 될 수 있으니까요.
 
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형지에서’를 읽고 - 확신의 위험성을 보여 준 인물


소설 <유형지에서>에는 두 유형의 인물이 나온다. 한 사람은 잘못된 생각을 가졌으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굳게 믿는 사람(장교)이고, 한 사람은 무엇이 잘못된 일인지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탐험가)이다. 내가 주목한 것은 전자이다.


장교는 판사로서 유형지에 임명되어 왔으며 사형 집행을 담당하기도 한다. 그는 탐험가에게 사형 집행의 기계를 보여 주며 이것의 우수성을 과시하고자 한다. 이것은 뾰족한 바늘이 죄수의 몸을 찌르게 되어 있는 사형 집행기다. 죄수는 이 기계 안에서 12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되는데, 바로 이 잔인한 사형 방식을 찬미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장교인 것이다.


죄수는 근무를 태만히 했다는 죄로 이곳에 끌려와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보초를 서는 새벽 두시에 잠이 들었다는 것과, 이를 본 상관이 자신의 승마용 채찍으로 얼굴을 후려갈기자 상관에게 잘못을 빌기는커녕 오히려 대들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 죄수에게 변호할 기회는 절대 주어지지 않으며 장교의 독단적인 판결로 사형이 집행된다.


장교는 말한다. “저는 판사로서 하나의 원칙을 세워 놓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범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범죄는 단지 범죄일 뿐이라는 장교의 이런 고정관념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장교는 작은 실수를 저지른 죄수가 사형을 당하는 게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조차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죄수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지 않는 불공평함에 대해서도, 사형 방식의 잔인함에 대해서도 나쁘다는 것을 판단할 줄 모른다.


이곳의 사형 집행기는 구사령관이 발명한 것인데, 이 기계의 제작과정에 참여한 장교는 이것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구사령관이 죽고 새로 부임한 신임 사령관이 이 사형 집행기를 없애고 싶어 하자, 이를 막기 위해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기계 장치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탐험가에겐 그럴 만한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 부탁을 탐험가가 거절하자 장교는 죄수를 석방하고는 자신이 직접 기계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장교를 지탱해 주던 그 신념이, 그렇게 옳다고 믿었던 자신의 재판 과정이, 그리고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그 기계 장치가 이제 아무에게도 존중 받지 못하고 쓰레기 취급을 당할 처지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기계는 고장이 났는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이상하게 작동하여 장교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게 하더니, 결국 장교를 고통스럽게 죽게 한다.


장교는 자신의 죽음을 용기 있게 선택할 만큼, 자신의 신념에 대한 실천력이 훌륭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는 존경의 대상이 아닌, 비난의 대상이다. 그가 가진 신념은 그릇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은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독일을 지배하던 히틀러는 국민들에게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하면서 다른 민족들을 잔인하게 박해하는 일을 국민들로 하여금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의 잘못된 판단은 다수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그의 독재가 가능할 수 있었다. 히틀러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도 오판했던 것이다.


이처럼 한 사람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의 오판이 생기는 일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어 참으로 위험하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 전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저널리스트의 한 편의 글이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얼마든지 다수의 ‘잘못된 생각’을 양산해 낼 수 있다.


사실 옳게 판단하는 일이 늘 쉽지만은 않다. 이 소설에서처럼 죄수에게 긴 시간의 고통을 주는 처형제도는 비난할 일이라고 쉽게 판단할 수 있지만, 잘 판단하기 어려운 일도 있다. 예를 들면 사형제도 폐지 문제만 해도 그렇다. 범죄억제의 효과를 중요시한다면 사형제도를 실시해야겠지만, 인간의 생명권을 중요시한다면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게 옳기 때문이다. 또 주택가에 CCTV를 설치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찬반의 의견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범죄가 감소한다는 이유로 CCTV를 설치하는 것에 찬성할 수도 있지만 사생활이 노출된다는 이유로 반대할 수도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누구나 자신이 여러 번의 착오를 경험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도 자신의 현재의 생각은 늘 옳다고 여기기 쉽다. 이럴 때 우리의 모습은 이 소설 속 장교의 어리석은 모습과 닮아 있을 것이다.


수전 손택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저서에서 “문학의 지혜란 뚜렷한 견해를 가지는 것과 상반된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견해에 대해 확신하는 자세보다는 차라리 견해가 뚜렷하지 못해 어떤 것이 나은지 고민하는 자세가 오히려 신중할 수 있다는 수전 손택의 말에 동의한다. 고민한다는 것은 내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일 테니까.



소설 속 장교처럼 확신의 위험성은 우리에게도 흔히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할 때 옳은 판단의 중요성을 새삼 인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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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3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신념이 틀릴 수도 있지만 자기 신념이 없다면 일에 부딪혔을 때마다 흔들리겠지요.그런 이유로 옳건 그르건 자기 신념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저는 높은 점수를 줍니다.위 글을 읽어보니 객관적 시각의 밝은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 최선의 신념을 갖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글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09-12-3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 왔군요, 반갑습니다. 맞아요, 객관적 시각. 그러니까 내 생각도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고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열린 마음도 필요하죠. 다음에 들어오면 제가 쓴 <확신이 어리석은 이유>라는 칼럼을 읽어보시길... 새해 행운 가득하세요.

페크(pek0501) 2009-12-3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일주일만에 들어와 글 한 편 올렸는데, 오늘은 두 번이나 들어왔네요. 오늘밤 12시가 되면 2010년이 시작됩니다. 한 해를 이렇게 또 보내는구나, 하는 생각 듭니다. 이제 나이가 드는 것에도 무감각해질 정도로 무뎌지고, 한 편으론 나이 드는 게 좋기까지 합니다. 이게 좋은 현상인지 어떤 건지 잘 모르겠군요. 조금씩 진화해 가는 즐거움으로 살고 싶은데... 진화하는 삶인지, 퇴화하는 삶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블로그가 생겼다는 것, 수십 편의 글을 썼다는 것, 그리고 한 일간지로부터 칼럼 연재의 제의를 받았다는 것으로 조금씩 진화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려 합니다. 내년엔 어떤 일이 생길지...

pek0501 2010-01-06 20:1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나이가 들어서 좋은 점은?........자유가 확보된다는 것이죠. 아이가 초등학생땐 엄마를 찾더니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찾질 않습니다. 예전엔 외출시 아이가 학교에서 오기 전에 귀가했어야 했다면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그래서 예전보다 편한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만큼 아이의 중학생 생활이 바쁘다는 얘기이고, 자기의 세계가 생겼다는 것이겠죠. '아이의 성장'은 곧 '엄마의 자유'입니다. 육아로부터의 해방을 생각할 때 늙어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