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잎새 외 하서명작선 23
0. 헨리 지음, 이가형 옮김 / (주)하서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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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잎새’를 읽고 -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


“창 밖을 좀 볼래. 벽 위에 남아 있는 마지막 담쟁이 나뭇잎새를 좀 봐. 바람이 불어도 펄럭이거나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 저게 바로 버만씨가 남긴 걸작품이지. 마지막 잎새가 떨어진 그날 밤 버만씨가 저기에다 저걸 그린 거야.”


이것은 <마지막 잎새>의 마지막 글이다. 독자가 예상 못한 극적 결말의 소설 기법이 감동과 재미를 주며 소설은 끝난다.


예술가촌의 삼층 벽돌건물의 꼭대기에 존시와 수는 그들의 아틀리에를 갖고 있다. 그런데 존시는 심한 폐렴에 걸려 환자가 되고 만다. 창 밖으로 보이는, 담쟁이 덩굴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세고 있었던 그녀는 담쟁이 잎이 모두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존시는 수에게, 담쟁이 나뭇잎이 사흘 전에는 거의 백 장이나 되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다섯 장뿐이라고 하면서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면 나도 가게 될 거야.”라며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채찍질하듯 매서운 빗발과 격렬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는데도 여전히 벽돌담 위에 담쟁이 나뭇잎새 하나가 또렷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일층에 살고 있는 화가인 버만 노인이 벽에 그린 그림이었다. 이 노인은 수로부터 존시가 삶을 포기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녀를 가여운 아가씨라 여기며, 어떠한 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을 ‘마지막 잎새’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 덕분에 존시는 “내가 얼마나 나쁜 애였나를 보여 주려고 무언가가 저 마지막 잎새를 저기에 남아 있게 한 것 같아”하고는 살기로 마음먹고 병을 이겨 낸다. 하지만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밤새도록 벽에 잎새를 그리느라 노인은 급성 폐렴에 걸려 죽는다.


나는 이 작품을 여러 번 읽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랐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땐 버만 노인의 아름다운 이웃사랑에 주목하였다. 그 다음에 읽었을 땐 마음을 담은 작은 정성이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큰 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그런데 최근에 읽었을 땐 존시를 통해서 본, 삶과 죽음을 좌우하는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에 주목하게 되었다.


만약 노인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래서 그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고 말았다면 존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그녀는 자신의 마음가짐대로 죽었을 것이다. 마음가짐의 힘은 이렇게 신비롭다. 작품 속 의사는, “그 아가씬 살아날 가망성이 거의 없어요. 희망이라고는 열에 하나밖에 안 된단 말이오.” 그러고 나서 “그 실낱 같은 희망도 본인이 살고 싶다는 의지를 보일 때만 기대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그렇듯이 장의사 쪽에 줄을 설 생각만 해선 어떤 약을 처방해도 소용없지.”라고 말한다. 소설에서가 아닌 현실에서도 의사들은 암에 걸린 환자의 보호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의 의지입니다. 병을 이겨 내겠다는 의지가 병을 낫게 합니다.”라고.


마음가짐의 힘이 얼마나 신비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이야기(구미래 엮음, <행복의 문을 여는 이야기> 중에서)를 하나 알고 있다.


부잣집의 한 노파가 매일 지성으로 절을 찾아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 “제 나이가 다 찼으니 언제라도 데려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이 광경을 매일 지켜보던 동자승이 짓궂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날도 노파는 불공을 드리고 마지막 끝맺음을 하였다. “제 나이가 다 찼으니 언제라도 데려가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그때 부처님 뒤에 숨어 있던 동자승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위엄 있게 말했다. “그렇게 소원이니. 내 오늘 데려가마.” 이 말을 들은 노파는 그 자리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마음의 영역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학창시절이었다. 중학교 체육시간에 ‘철봉 매달리기’라는 것을 하였다. 철봉에 턱걸이한 자세로 최대한 오랫동안 매달리는 운동이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으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았다. 삼십 초 동안 매달려 있어야 만점을 받는 것이었는데 겨우 몇 초 동안 매달리고는 몸이 곧 땅으로 떨어지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것으로 시험을 보는 날엔 만점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삼십 초 동안이나 철봉에 매달려 있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점수를 잘 받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강하게 작용했던 결과다. 아마 철봉 밑에 사람을 해치려고 으르렁거리는 짐승들이 있다면 인간은 초인의 힘을 발휘하리라.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이 일상 생활이 되어 버린 내 인생은 지겹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노동 자체에서 행복하고, 노동의 결실에서 행복하고, 그리고 노동한 뒤의 휴식에서 또 한번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렇듯 똑같은 조건에서도 각기 다른 얼굴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가짐의 차이일 것이다.


“바다보다 더 장대한 것은 하늘, 하늘보다 더 장대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한 V. 위고의 말이 생각난다. 한 생명의 얻고 잃음의 큰 문제도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고 할 때, 마음가짐의 신비한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일이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잎새를 보며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죽음과 삶을 오갔던 존시의 모습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에 따라 천국에서 살 수도 있고, 지옥에서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위안이 되지 않을까. 인생의 행복과 불행이 우리의 재산에 따라 혹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좌우되기보다 마음가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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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칠근 2009-11-22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돌지 않는 풍차... 그림이 시원합니다.

페크(pek0501) 2009-11-22 16: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예전엔 며칠에 한 번씩 배경사진을 바꾸곤 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게 없어 그냥 풍차 있는 풍경으로 고정하게 됐어요. 이 그림, 정말 맘에 들어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 - 개정판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이태주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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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을 읽고 - 진실은 왜 멀리 있을까



노인이 된 리어 왕은 세 명의 딸들에게 ‘자신을 누가 가장 극진히 사랑하는지’를 말해 달라고 하면서, 세 딸의 말을 들어보고 큰 재산을 주겠노라고 한다. 이에 첫째 딸 고네릴과 둘째 딸 리건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셋째 딸 코델리아는 아무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리어 왕은 아무 할 말이 없다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다시 말해 보라고 한다. 코델리아는 마지못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언니들이 정말 아버님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어째서 남편을 얻었단 말입니까? 저도 만약 결혼을 한다면, 아마도 저의 배우자인 주인께서 제 애정과 관심과 의무의 반은 빼앗아 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저는 절대로 언니들같이 결혼하지 않을 겁니다. 아버님께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이 대답에 리어 왕(아버지)은 그것이 진심이냐고 격노하면서 셋째 딸과의 인연을 끊는다. 이 말을,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늘어놓은 첫째 딸과 둘째 딸에게 재산을 나눠 준다. 그러나 이 두 딸은 효도는커녕 아버지를 학대하기에 이른다. 결국 불효하는 두 딸로 인해 리어 왕은 불행한 파국을 맞는다. 너무 솔직했던 셋째 딸의 말에서 진심을 읽지 못한 대가는 그렇게 혹독했다.


리어 왕은 어째서 딸들로부터 사랑의 표현을 듣고 싶어 했을까, 왜 진실을 몰랐을까, 그리고 솔직한 것은 나쁜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여기서 인간의 특성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인간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 둘째, 인간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싶을 만큼 외롭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 셋째, 같은 말인데도 인간은 해석의 차이를 발생시킨다는 것. 넷째,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있는데, 솔직함이 지나쳐서 아버지를 분노케 할 만큼 셋째 딸은 어리석었고, 딸의 진심을 모르는 아버지 역시 어리석었다.


이 작품은 리어 왕의 충신인 글로스터 백작의 비극도 함께 전개되는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백작은 서자인 에드먼드에게 속아 장남인 에드거를 불행 속으로 빠뜨리고, 자신도 에드먼드에게 배반당하고 눈알을 뽑히고 만다. 이 역시 진실을 몰랐던 대가였다.


진실은 왜 알 수 없을까. 리어 왕뿐만이 아니라 실지로 우리도 무엇의 진실(진심)을 제대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텍쥐페리 저, <어린 왕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보이지.” 이 말은 겉만 보지 말고 그 속도 헤아려서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가득 차 있어서 마음으로 보는 것 또한 소용없는 게 아닐까. 차라리 수전 손택(소설가, 평론가)의 말에 믿음이 간다. “이해라는 것은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라는 말.


나 역시 나의 진실이 왜곡되는 일을 경험하곤 하였다. 나는 ‘A’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B’라고 알아듣는 것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말을 그렇게 왜곡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 내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던 그것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거짓임이 밝혀질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진실은 없는 거라고 여겨졌다. 우리가 지금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 중에서 반 정도는 진실이 아닐지 모른다. 진실은 우리가 쉽게 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저 산 너머에 핀 꽃과 같은 것이라서.


진실은 잘 알 수 없는 것이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뒤늦게 발견되는 것’이라는 게 이 작품의 메시지다. 이 책처럼 명작이란 오래 전에 씌어졌다고 하더라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유용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카알라일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위대하게 평가 받았던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현재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그 사실은 실제로 진실이 아닐 확률이 많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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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의 구절>

아비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들은 장님이 된다는데, 아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자식들은 친절하다네. 운명의 여신은 매춘부라서 가난한 사람에게 문을 잠그네.(본문 중에서)


<내가 쓴 구절>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이 확실한 진실임을 확신하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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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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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고 - 이혼율이 높을 이유를 제시하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남녀차별이 예전만큼 심하진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하게 남녀평등이 이뤄진 건 아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여전히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문제로 대립하게 된다면 강자와 약자로서가 아닌, 옳은 자와 옳지 않은 자의 대결로써 해결해야 한다. 이때 물론 옳은 자가 승리해야 좋은 세상일 것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이 살기엔 얼마나 잘못된 세상인가를 말해 주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여자들(혜완, 경혜, 영선)은 남자들에 비해 약자이며, 그런 약자가 보는 세상은 공정하지 못하고 모순투성이다. 이로 인해 그녀들의 결혼생활은 불행하다. 세 여자의 삶 중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혜완의 삶이다.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구분할 수 있다는 건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증거




“그까짓 한심한 책들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버려두고 (직장에) 나가려는 니 저의가 대체 뭐야?”

“아이를 키워 놓고 (직장에) 나가란 말이야. 그땐 내가 말리지 않을게.”

“직장과 가정 둘 중에서 택하란 말이야. 난 그꼴 못봐.” <본문 중에서>




위의 글은 회사를 다니던 혜완(아내)이 회식자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돌아온 날 밤에, 화가 난 남편이 혜완에게 퍼부은 말이다. 우리는 이것만 읽어도 남자의 말인지, 여자의 말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부부가 주고받는 말 중에서 남편의 말인지 아내의 말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남녀평등이 이뤄지지 않은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직장과 가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남편의 말에 혜완은, 왜 직장은 여자만 포기해야 하는지에 분노하고 억울해 한다. 어느 아내든 남편에게 육아를 위해 직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육아는 엄연히 여자의 몫이라는 건 이 사회의 고정관념이다.


흔히 남편들은 부부싸움 중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당신이 참고 살면 안돼?”라고. 그러면 아내들은 말할 것이다. “당신이 참으면 되잖아. 왜 꼭 여자가 참아야 하는데?”라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참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왜 한 쪽이 참아야만 평화롭게 유지되는 가정을 가져야 하지?’ ‘누구를 위한 가정이길래?’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을 짓밟고 이루는 평화가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느 한 쪽의 희생을 담보로 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공평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똑같은 비중으로 양보하고, 동등하게 희생하고, 균등하게 참아야 하는 것, 그래서 함께 힘들고 함께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자들은 말이야 이 사회에서 멸시당해도 싸다구...... 자기들과 같은 성을 낳아서 좀더 권리를 회복시켜줄 생각은 안하고 남자를 낳아서 다른 여자들을 구박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 아니니? 딸을 낳는다고 구박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구박을 하는 사람의 부당함과 싸워야지 아부를 하다니...... <본문 중에서>




이것은 남아선호사상을 가지고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 여자들을 탓하는 대목이다. 어쩌면 이런 여자들은 남존여비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탓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항변할 게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여자로서 받은 설움을 딸이 고스란히 받게 될까 봐 딸보다는 아들을 낳고 싶었다, 라고.


이런 남아선호와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여자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사회에 적응하며 살든지 아니면 그런 부당함과 싸워 나가며 살든지…. 그런데 이 시대 여자들은 이런 부당함에 맞춰 사는 건 이제 불가능해 보인다.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판단할 줄 알 만큼, 이미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로서 받는 불이익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예전에 비해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마 이혼율은 점점 높아질 것이다. 난 이 소설에서 앞으로 이혼율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한 가지를 알아내었다. 남녀의 인지의 차이, 그것이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즘, 결혼한 뒤 남과 여, 이 두 개의 다른 성은 한 세계 속에 살면서 서로의 인지의 차이를 확인할 터이다.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마땅히 여자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아내는 시대가 변했다며 집안일과 육아를 나눠서 남자도 여자와 똑같이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래서 부부싸움이 잦아지고, 둘의 관계가 악화되고, 급기야 회복할 수 없는 사이가 되면 그땐 이혼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은 출간된 지 오래되었으나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다. 특히 결혼을 앞 둔 연인에게 이 책을 꼭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결혼한 뒤 남편으로서의 할 일과 아내로서의 할 일에 대해 서로 의논해서 미리 정하고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문제 말고도 결혼생활에서 또다른 문제들이 생기겠지만 이 문제만이라도 해결을 하고 결혼식을 올린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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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 관련한 다른 책들의 구절


“우리들의 결혼은 다만 놀이방에 지나지 않았어요. 여기에서 나는 당신의 장난감 인형 아내였을 뿐이에요.”(아내가 남편에게 한 말) - 입센 저, <인형의 집> 중에서.


“여자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지는 것이다.” - 보부아르 저, <제2의 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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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기호학 - 개정판
박정순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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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매체의 기호학’을 읽고 - 당연하게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다


재미가 있는 책을 읽을 것인가, 지식과 정보가 있는 책을 읽을 것인가, 이 두 가지로 나눠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단순한 재미만으론 뭔가 부족함을 느꼈다. 한 권의 책값을 지불했으면 그것이 아깝지 않은, 유익한 가치를 얻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전문서적이다. 전문서적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선 그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이 책도 그렇다.


전문가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인 사람’ 또는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의 시대는 다방면의 지식과 정보를 통합한 사고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문서적은 전공자들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생각이다.


대중매체에 대해 다양하고도 유연한 시각을 가지고 싶거나 또는 기호학에 입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대중매체의 기호학>을 권한다. 기호학은 미디어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 커뮤니케이션 현상을 분석하기 위한 유용한 도구가 된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이 책은 기호학적 이론들을 논의하기 위한 이론서가 아니라 단지 다양한 기호학적 접근 방법의 개념적 기초라고 할 수 있는 기호학적 아이디어들을 가능하면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기호학의 기초 개념을 말하고 기호학이 무엇인지를 기초적인 차원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기호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소쉬르와 퍼스, 또 지적 사조에 큰 영향을 미친 야콥슨,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등의 학자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기호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대신 의미해 주는 어떤 물리적 실체를 말한다. 예를 들어, 장미꽃은 평상시에는 그냥 하나의 꽃일 따름이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사랑하는 이에게 갖다 바쳤을 때는 기호가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장미를 사랑의 표시로 대신 사용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장미를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p102>


이처럼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기호’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장미꽃을 받아 든 사람은 그것을 선물한 사람의 의도를 해석하게 되는데, 이때 발생하는 현상을 의미작용이라고 한다. 이 기호의 의미작용에 관한 학문이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다.



1980년의 ‘5ㆍ18 광주사건’에 대한 기호표현의 변화를 추적하여 보면, ‘광주소요’, ‘광주난동’(당시) → ‘광주사태’(5공화국 시절) → ‘광주항쟁’, ‘광주의거’(1988년 6공화국 이후) → ‘광주 민주화 운동’(1994년 이후)으로 나타난다. 광주사건에 대한 기호표현의 변화는 정치적 지배 집단과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적 변화와 그 궤적을 같이한다.<p199>


흔히 남성교수는 ‘교수’로, 여성교수는 ‘여교수’로 표현됨을 목격한다. 이것은 남성이 교수라는 직업을 지니는 것은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며, 여성이 이와 같은 직업을 갖는 것은 특별한 것임을 함축의미하는 것으로 직업이라는 것 자체가 남성의 것이라는 성 역할 구분의 이데올로기(또는 신화)가 숨겨져 있다.<p202>


우리가 사용하는 말 하나 하나를 분석하면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다. 광주사건이 어떻게 지칭되느냐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당시의 평가를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사회분위기를 알 수 있다. 또 ‘여교수’, ‘여류작가’라는 말의 사용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남성 중심의 사회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와 환유의 개념을 알고 이를 분석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호를 통해 지시하는 대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분석, 더 나아가서는 우리 생각의 심층과 사고방식에 대한 분석이 된다.<p206>


거꾸로 대중매체가 생산하는 다양한 콘텐츠에서 은유와 환유가 어떤 식으로 활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어떤 식으로 조작되고, 다시 그것이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도 해 준다.<p206>


예를 들면 우리가 신문을 가리켜 ‘독재정권의 시녀’라는 표현을 썼다면 우리는 은유를 사용한 것인데, ‘시녀는 절대 군주에 무기력하고 신문은 독재정권에 무기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서<p207>’ 만든 은유가 된다는 것.


또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가족의 수를 말할 때 ‘입이 여섯이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가족을 '입'으로 환유함으로써 식생활 비용을 축내는 존재로 본다고 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환유적 의미작용은 은유적 의미작용과 마찬가지로 환유되는 것(의미화되는 것)에 대한 기호 사용자의 인식을 모양 짓는다.<p216>’


기호학이 구조주의의 형태를 갖는 것은 ‘기호학의 기본 전제가 구조주의적이기 때문<p310>’이다. 기호학은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우리의 문화가 갖고 있는 관념과 언어적 구조를 통해서 바깥 세계를 인식한다<p311>'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관성과는 무관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리는 사회화를 통해 성장한다. 사회화란 개인이 자기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규범을 내면화해 가는 과정인데, 이 사회화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게 대중매체일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 등의 대중매체가 전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정서나 사고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친다. 설사 대중매체를 외면하고 사는 사람일지라도 그런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현실에서 대중매체의 영향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대중매체에 무력하게 세뇌 당하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당연하게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그 이면의 의미를 읽어내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시각이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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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유형지에서 (외)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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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변신'을 읽고 -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는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어느새 거대한 벌레로 변신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그레고르는 상과대학을 나와 군대생활을 마쳤고, 아버지가 5년 전 파산한 이후 세일즈맨이 되어 성실하게 일하며 부모와 17살의 누이동생을 부양하며 살고 있었다. 이렇게 평범하게 살던 그에게 이런 기이한 변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가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하자 가족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를 대신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다. 아버지는 은행의 말단 수위로 취직하고,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고, 여동생은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한다. 그리고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한 방에 세 명의 하숙생을 받게 되어 그로 인해 그레고르의 방은 짐으로 가득 찬 창고처럼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불행하게도 벌레로서 마음껏 기어 다닐 수 있는 공간조차 없게 된다.


벌레란 어떠한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은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가족은 한때 가족이었던 그에게 식성에 맞지도 않은 음식만 그의 방에 가져다 주고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이제 그는 그들에게 가족이 아닌 것이다. 가족 모두 그를 점점 소외시키고 짐스러워함으로써 그레고르의 외로움은 깊어만 간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벌레 같은 존재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우리에게 잘 보여 준다.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에 대해서 가족은 처음엔 무척 놀라고, 그 다음엔 가엽게 여기고, 무서워하고, 분노하고, 화내고, 나중엔 귀찮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되며, 그로부터 점차 식욕을 잃고 비실대다 시체가 되어 하녀에게 발견된다. 결말에는 벌레가 죽은 뒤 가족은 소풍을 갈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귀찮은 존재가 죽었으므로 예전의 삶의 즐거움을 되찾은 것이다. 이것이 ‘인간’임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여기서 벌레라는 설정이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독자라면 벌레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병에 걸려 누워서만 지내는 환자로 변했다고 가정하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혹은 각자의 삶에서 소외된 적 있는 자신의 모습을 벌레의 처지에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비인간적인 면을 다룬 이 소설의 핵심은 물질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버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인간이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은 어떻게 변화하고, 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변화할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벌레로 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변신이 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대응하는 방식일 것이다.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르는 자신이 인간이었던 사실을 점점 잊게 되고 진짜 벌레로서의 삶에 적응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가족이 그를 가족이 아닌 벌레로서만 취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레고르는 몸은 벌레일망정 가족과 함께하고 싶어 하나 가족은 그를 벌레로만 인식하고 소외시켜 버린다. 그가 가장 사랑한 누이동생마저 처음엔 벌레가 된 그를 잘 돌봐 주다가 나중엔 마음이 변하여 그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어머니 역시 모성을 가지고 늘 그를 걱정하지만 그레고르를 쫓아내자는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레고르가 변신한 벌레는 일상적 세계(가정과 사회)에서의 소외됨을 상징한다. 누구든지 한번쯤은 소외감이 느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사소한 일로 이런 경험은 가능하다. 예를 들면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외국 얘기가 나왔는데 나만 외국 여행을 한 적이 없어서 친구들의 화제에 끼지 못한다거나, 친구들의 직업은 모두 화려해 보이는데 나만 무직자임을 자각할 때 마치 이 소설 속의 그레고르처럼 소외감과 고독을 느낄 것이다.


벌레로 변신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면서는 그런 진지한 사색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일상 생활을 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윤택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또 하루라도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에 타격이 오기에, 한가롭게 생각할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았던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인지에 대한 고민은 빠져 있었던 것.


이처럼 벌레로 변신하기 이전엔 노동이 그레고르를 자신으로부터 소외시켰다면, 변신한 이후엔 자신의 경제적 무능함이 그를 인간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결국 가족이라는 것도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초를 두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영향을 받는 관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즉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을 인간학이라고도 한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돈을 못 버는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면 이렇게 구박을 받아도 마땅한가,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혜택을) 받아야만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물질만 중요시하여 인간의 정신이 황폐해진다면 너무 몰인정하고 살벌한 세상이지 않은가, 만일 가족 중 누군가가 벌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면 어떤 태도를 갖는 게 바람직한가, 인간의 운명이란 원래 모순과 불안과 허무 등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일까 등등….


밀란 쿤데라(‘소설의 기술’의 저자)에 의하면, “역사가는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소설은 실제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존이란 실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인간의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소설가들은 인간의 이러저러한 가능성들을 찾아냄으로써 실존의 지도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알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연인들은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 연애기간이 길어지면 싸울 일이 생기는데, 싸움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상대방의 밑바닥까지 본 느낌을 가져야 비로소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한다. 관계가 좋은 상태에선 상대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고 인간의 실존은 극단적 상황에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쓴 카프카는 그런 극단적 상황을 만들어 인간의 실존을 보여 주려고 인간을 벌레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먼 얘기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독자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다. “소설 속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것처럼 어느 날 나의 부모님이 치매에 걸린 환자로 변신한다면, 나의 실존은 어떤 모습으로 표출될까?”


인간은 자기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각에 비추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대인 관계에서 우리가 상대방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가 하는 문제는 서로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까. 누구든,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은 늘 변화가능성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를 알려면 우선 ‘인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적인 삶은 무엇인가’에 대해 철학적 사색의 기회를 갖고 싶은 독자에게 ‘변신’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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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IC 2009-06-06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몇번을 다시 봐도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명작입니다.
늘 잊지 않고자 노력하지만, 쉽게 잊혀지는 것이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글 정말정말 잘 읽고 갑니다.

페크(pek0501) 2009-06-07 13: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책을 읽은 뒤에 그 내용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리뷰를 써서 좋은 점은 책의 내용을 훤히 꿰뜷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권을 읽고도 마치 두 권을 읽은 것처럼 좋은 공부가 됩니다. 좋은 글이라 하시니 고맙습니다.

옹달샘 2009-10-2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창시절 변신을 읽고 많은 것을 느꼈었어요. 이 글을 읽으니 그 때의 감동이 밀려오는군요. 정확한 분석과 사색이 담긴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글 읽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페크(pek0501) 2009-10-26 12:30   좋아요 0 | URL
옹달샘님, 고맙습니다. 오늘 본 동화, 가능성 많은 작품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행복한 작업, 많이 즐기며 하세요.

2010-02-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2-07 13:00   좋아요 0 | URL
반가워. 다음부턴 로그인 하지 않고 댓글 남겨도 돼. 그냥 이름 쓰는 칸엔 이름 적고 비밀번호는 아무거나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숫자 적으면 돼. 비밀번호를 쓰는 이유는 나중에라도 본인이 댓글을 삭제하고 싶을 때 그 비밀번호를 써야 되기 때문이야. 아무나 삭제하게 만들면 안 되잖아. 내가 쓴 글 중 책 리뷰만 읽으라고 말하고 싶네. 공부에 도움이 될 듯 싶어서.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