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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
민혜 지음 / 해드림출판사 / 2020년 7월
평점 :
총 56편의 수필이 실린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는 흥미 있는 주제로 흥미 있게 전개되는 글이 많이 실려 있는 게 강점이라 할 만하다.
『그들을 한 형제로 불러주겠다.』로 시작하는 ‘대화와 수다 그리고 위트’는 대화와 수다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형뻘인 ‘대화’는 진중한 데가 있는 반면 아우인 ‘수다’는 체면 분수 내던지고 촐랑대길 좋아한다고나 할까. 대화는 나름의 목적과 주제를 갖추려 하지만 수다는 그저 나오는 대로 방향 없이 흘러가는 자유분방의 기질을 지닌 녀석이다.』 또 위트와 유머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위트와 유머는 자칫 지루하거나 무미하게 흐를 수 있는 대화를 구제하고 경망으로 흐를 수다를 견제한다. 낼랜 잽을 날리며 정곡을 찔러대면서도 웃음 한방 피식 터뜨리게 하는 것으로 일단은 전의戰意를 무력화 시킨다.』 이 같이 묘사하는 저자의 탁월한 능력에 나는 반해 버렸다.
‘너에게 보낸다’는 생기를 찾아 줄 이성 친구를 사귀어 보라고 지인에게 권하며, 인간이 지녀야 할 모럴 중에는 윤리 도덕의 엄숙함만 있고 생기나 활력에 대한 의무 사항은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읽으면서 우리도 생각해 볼 만한 점이라고 여겼다.
예리한 관찰력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예외적 인간’은 옷차림을 보면 미적 감각이 없으나 날카로운 지성과 유머러스한 재담으로 수강생들을 웃게 만드는 매력적인 한 교수님을 상상케 하여 한 번 보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고독이나 한 잔’에서는 고독에 대해 사유한다. 고독이란 정체된 듯싶으면서도 실은 보이지 않게 꿈틀거리는 생물이라며, 어느 날은 쌉쌀하면서도 달착지근하여 그대로 머물고 싶어지는가 하면, 어느 날은 날감자 맛처럼 아리고 땡감처럼 떫어 심신을 오그라지게도 한다고 표현한다.
‘미드나잇 블루’는 남편과 사별한 뒤 모든 걸 홀로 감당해야 하는 자의 쓸쓸하고 위태로운 삶을 조명한다. 혼자 산다는 건 한밤중에 갑자기 심장이 멎을 것 같은데 자식과 연락이 닿질 않아 고독사를 할 수도 있는 극한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는 일이라고. 이 부분을 읽는데 내 마음이 짠했다.
‘십만 원’은 같은 성당을 다니며 알게 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지인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지인을 만나면 20만 원을 주려고 준비하다가 먼 길을 오가는 데 드는 교통비와 식사비 등을 합하면 얼추 30만 원이 들 것 같아 그 20만 원에서 10만 원을 덜어 내어 10만 원이 든 봉투를 준비해 지인을 찾아간다. 그의 집을 나설 무렵 식탁 위에 그 돈 봉투를 놓고 나왔는데 상대편 지인도 필자의 백팩 속으로 뭔가를 넣었다. 그걸 필자는 그와 헤어진 뒤 버스 안에서 확인하는데 어이없게도 1만 원권 열 장이었다. 둘 다 서로에게 십만 원을 주려고 준비했던 것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20만 원을 줘도 되는 것을, 하고 독자인 나도 안타까움을 느꼈으니 필자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간다. 마음을 참 훈훈하게 만드는 글이다.
일찍이 피천득 작가는 ‘수필’이란 제목으로 수필을 써서 남겼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피천득 저, ‘수필’ 중에서.)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쓰는 게 수필이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필이 만만하게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가고 싶은 대로 쓴다는 건 글쓴이가 어떤 길로 가야 좋은 글이 되는지를 알 만큼 역량을 갖춘 사람이어야 함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겠다. 연주자로 말하면 악보를 보지 않고 암보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처럼 많이 연습하여 익숙해져서 능수능란함이 저절로 발휘되는 그런 사람이어야 가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으리라.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피천득 저, ‘수필’ 중에서.) 수필은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문학이라고 한다. 냉수를 마시듯 차를 벌컥벌컥 마시는 사람은 없다. 차는 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천천히 마신다. 차를 마실 때와 같은 느낌이 나는 게 수필에 필요하다는 말이겠다.
<떠난 그대 서랍을 열고>는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킨다. 하나 더 보탠다면 솔직함과 관찰력을 잘 버무려 톡 쏘는 맛을 낸다는 점이다. 매우 솔직하고 끼가 많은, 내가 잘 아는 한 사람을 보는 친숙함마저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끼’에서 읽은 이런 글은 인상 깊다. 『개인적으로 나는 끼가 없는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황진이적인 끼를 일컬음이다.』
잘 읽히지만 빨리 읽고 지나칠 수 없는 문장으로 가득 찬 수필집을 오랜만에 만났다. 어떤 글을 쓰든지 ‘소재와 주제가 무엇이냐.’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일 터, 이를 새삼 깨닫게 한 수필집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은 수필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끌어 모은 듯해 내게 수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특히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글쓴이의 심성, 인품, 가치관, 끼 등을 헤아릴 수 있었는데, 그렇듯 가감 없이 보여 준 점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왜냐하면 글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할뿐더러, 그 점이 내게 어떤 용기와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맨 앞에 있는 ‘작가의 말’에서 뽑은 다음 글로 이 리뷰를 마무리한다. 『“내 마음속 소망의 독자여, 벗이여, 제 책을 열면 제 심장에 쓰인 것을 볼 수 있어요. 저와 함께 웃고 울지 않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