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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상
하루에 열 시간씩 독서하며 지내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하루 종일 책을 들고 살았다. 토요일 밤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독서를 한 적도 있다. 책을 숭배했고 사랑했다. 그땐 젊었으므로 안구 건조증 증상이 없었고 체력이 약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젊음은 재능보다 더 좋은 무기였다.
그러나 젊음은 한때인 것. 내 나이 어느 지점에서 젊음이 끝났을까. 어느덧 젊음은 사라졌고 이젠 예전처럼 마음껏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안구 건조증 증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체력이 약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이란 게 책상 앞에서만 살 수 없도록 독서 이외에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만약 ‘글을 쓸 수 있는 무인도에서 살기’와 ‘책을 읽을 수 있는 무인도에서 살기’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양껏 글을 쓸 수 있는 무인도와 양껏 책을 읽을 수 있는 무인도를 상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둘 다 좋아하지만 쓰기보다 읽기를 조금 더 좋아한다. 예를 들어 글쓰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독서를 좋아하는 마음을 100프로로 잡는다면 쓰기를 49프로 좋아하고 읽기를 51프로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책이 재미있어서 글을 쓰고 싶은 건지 글을 쓰고 싶어 책이 재밌는 건지 헷갈리곤 한다.
한편으로는 글을 잘 쓰고 싶다. 그저 좋아서 글을 쓸 뿐이고 이왕에 할 거면 잘해서 만족감을 느끼고 싶어서일 뿐이며 명성을 떨치고 싶은 건 아니다. 거창한 야망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요즘 발레를 배우러 다니는데 발레를 배우는 시간에 잘하고 싶어 노력할 뿐 발레리나가 되겠단 야망이 없는 것처럼.
input이 없으면 output도 없다. 즉 책을 읽지 않으면 글을 잘 쓸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세운 계획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30분간 독서를 하고 밤에 잠자기 전 30분간 독서를 하기로 한 것. 이렇게 하면 최소한 하루에 한 시간의 독서를 하게 되니 한 달이면 30시간 동안 독서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만 실천해도 한 달 동안 책을 서너 권 이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틈나는 대로 독서를 할 것이니 아마 한 달에 대여섯 권을 읽을 수 있으리라. 또 오디오북으로 듣는 독서까지 하고 있으니 대여섯 권 이상을 읽게 되리라.
오디오북이 있어 참 편리하다. 나처럼 안구 건조증 증상이 있는 사람에겐 누군가가 읽어 줘서 책 내용을 들을 수 있다는 건 환영할 일이다. 나중에 늙어서 기운이 빠져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을 때 그래도 누워서 오디오북으로 책 내용을 들을 수는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다.
먼 훗날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좋아하는 독서와 글쓰기를 실컷 할 수 있어 좋았다, 하고 생각할 것 같고 그것으로 잘 살았다고 여길 듯하다.
2. 유토피아
라파엘은 자신이 다녀 온 각각의 나라에 속한 관습과 제도를 마치 거기에서 평생 살다 온 사람처럼 줄줄이 다 꿰고 있었으며, 그가 다녀 본 나라에서 자행되는 잘못된 관행을 아주 사려 깊게 지적해 나갔다. 그런 라파엘을 존경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페터가 말했다. “라파엘 씨, 당신 같은 분이면 그 어떤 왕이라도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 분명한데도, 어째서 어느 한 왕을 섬겨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 것인지, 저로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라고. 그리고 자기 처지도 더 나아지고 행복해지려면 오직 그 길뿐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라파엘은, 내 마음이 그토록 싫어하는 그런 삶이 어떻게 나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서 내가 눈여겨 본 대목을 옮겨 본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내가 주목한 점은 왕을 섬겨 나랏일을 돌보며 사는 일이 누구에겐 행복한 삶이고 다른 누구에겐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삶이 행복한지는 저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당신은 옷을 사러 다니는 게 즐겁지만 어떤 이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골라 사는 게 즐겁다. 당신은 여럿이 만나 얘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지만 어떤 이는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당신은 재산을 많이 가지고 사는 게 행복의 조건이지만 어떤 이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의 조건이다. 또 건강만 하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하는, 불치병을 앓는 사람도 있다. 연령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인간의 마음은 천차만별로 달라져서 행복의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 행복할 것 같은 사람도 각기 불행의 요인이 있을지 모른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더라도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로 마음고생을 하는 이가 있다. 자기 생활에 만족하면서도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려 괴로운 이가 있다. 부와 권력을 가졌어도 자식이 속을 썩여 마음이 편치 않은 이도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남에게 섣불리 조언할 일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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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모든 동물은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아주 풍부해, 필요할 때 얼마든지 구할 수 있기에 결핍이나 결여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탐욕을 부리거나 남의 것을 약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만,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그런 것을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허영심과 오만으로 탐욕을 부추깁니다. 하지만 유토피아의 제도 속에는 그런 종류의 악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124쪽)
- 토머스 모어. <유토피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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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연휴를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