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이 작년인가 영어교육에 대해 칼럼을 썼나 보다. 정희진 좋아하는 누군가가 얘기해서 칼럼을 읽어 봤는데, 뭐 뻔한 내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 잘해서 대통령까지 한 사람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언급했었는데, 최규하가 영어 하나 잘해서 대통이 됐을까. 당시 상황상(권력 구조 승계 구조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중론인데, 영어 하나로 대통령이 된 사람으로 언급하다니, 침소봉대가 아닐까.
진짜 영어 하나 기깔나게 잘해서 고위 인사가 된 사람이 있다. 이승만. 이승만은 배재고보 다닐때부터 영어를 기가막히게 잘했다. 20살 무렵부터 독립운동을 했었는데, 그게 우리말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알리는 뭐 그런 거였다. 그래서 임정 연통부에서 활동한 거. 이승만 정도 되면 그래도 영어 하나 잘해서 대통 됐다고 할 수 있겠다. 뭐, 장면도 추가.
영어 잘하면 출세길이 열렸던 지난 시절. 영어 잘해서 대통령과 수상이 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후진국이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뭐 요즘은 이상하게도 법조인들이 다 해먹는 세상이 돼서 ‘미국 따라가는 국가가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변호사 출신 대통령만 3명 이상이고, 법조인으로 확대하면 훨씬 더 많다.
어쨌거나 내가 하려는 얘기는 영어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영어와 수학 과목은 정말 절대적이다. 이 두 과목을 잘하면 일류대는 따 놓은 당상이다. 그중에서 영어는 졸업 후 취업 너머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과목이다. 진짜 무소불휘하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학이야 혼자 잘하면 장땡이지만 영어는 문화의 한 부분이기에(혼자 하기 쉽지 않다) 사회 계층을 나누는 하나의 문화자본이 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 20세 후반 청년들이 토익, 토플, 텝스에서 좋은 점수를 갖지 못하면 아예 취업 기회가 없다. 원래 좁은 취업길도 원천 봉쇄된다. 그만큼 외국어 중에서 영어란 놈은 하나의 언어 이상이다. 일본어를 못해도, 스페인어를 못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외국어는 필요에 의해서 배우는 기능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해서 자격증을 따는 것처럼.
일본어나 독일어 못한다고 해서 자살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면 전체 수능 성적이 낮아져 자살 충동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은 줄로 안다. 기준 점수의 공인 영어 성적이 없으면 공무원도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이건 정말 아니다. 왜 영어만 공인 영어 점수를 요구하나? 일본어나 스페인어는 왜 안되나? 그러니 영어는 하나의 과목이 아닌 거고, 일반적인 외국어도 아닌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 된 거다.
공인 외국어 성적 얘기를 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실시하는 공인 영어 시험은 토익, 토플, 텝스, 지텔프 등이 가장 대중적이다. 이 시험은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영어 과목을 대체하는 공인 시험들이다. 나는 학부 4학년 때 토플 시험을 친 이후 오랫동안 공인 영어 시험 성적이 없었다. 딱히 필요하지 않아 응시할 필요가 없었는데, 나를 아는 지인들은 영어 점수 하나 없는 루저라고 놀리기 일수였다.
개나 소나 토익 900점 시대. 진짜 물어 보면 죄다 토익 900은 기본이라기에 2010년 쯔음 한 번 응시해 보았는데, 600점을 간신히 넘긴 정도. 200문항에 맞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절대 기준 점수를 획득할 수 없을 정도로 쉽지 않았다. 900점은 시험을 계속 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내는 것이 자기 점수라고.
공인 영어 점수가 필요하지 않아 내 토익 점수는 620점으로 박제됐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미는 쪽팔린 점수였는데, 이를 안 것도 시험을 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험 삼아 응시해 본 토익이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집에서 툭하면 이 점수를 들먹거리는 거다. ‘영어도 못하는 넘’이라고. 평생 공인 영어 시험 성적이 없을 이상한 사람 취급해서 할 수 없이 공인영어 시험공부란 걸 대학 졸업 이후 처음 했다.
이게 2019년 무렵이다. 코로나 터지기 직전. 토익시험 공부가 너무 짜증이 나서 단기간에 공부하여 기준 점수 이상(토익 800점 정도) 넘을 수 있는 시험을 탐색하던 중 지텔프라는 셤을 알게 됐다. 교재를 사서 2개월 간 정말 빡세게 공부했다. 영어만 공부한 건 대학 졸업 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1개월 빡세게 공부하니 61점이 나왔다. 근데 토익 700점과 같은 점수는 65점이라네?! 그래서 또 1개월을 빡세게 공부했다. 그리고 나온 최종 점수 76점(토익 800점 이상).
그리고 더 이상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다. 지텔프 76점 확보 이후 집에서 영어 못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거다. 공인 영어 점수 없는 이상한 사람 취급도 안 했다. 어쨌든 난 뭘 해도 영어 기준 점수 이상을 확보한 사람이라는 거. 각종 시험 응시 자격을 충족(지텔프 65점)하고도 남았다. 뭐 나하고 하등 관계가 없는 듯한 시험의 자격 요건 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꽤 좋았다.
이 빡세게 공부한 시간에 독해력 향상을 위해 다시 본 책이 김영로의 <영어순해>였다. 엔날 학부 1학년 때 입학과 동시에 사 두었던 빨간색 고려원판 <영어순해>. 강의 테잎도 있었는데, 이사 다니면서 없어졌다. 김영로가 편저한 이 전설의 영어 독해책이 여전히 알라딘에서 판매하는 거다! 표지만 산뜻하게 바뀌어서 말이다. 이 책은 김정기의 <거로 보카>와 더불어 대학가의 필독서 중 필독서였다.
(바로 아래 책이 고려원에서 나온 전설의 빨간 영어순해 책!)

당시 이 <영어순해> 책을 다시 보면서 새삼 느꼈지만, 영어에서 어려운 문장들은 죄다 모아 놓은 독해책이었다. 그 옛날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독해보다 훨씬 어려운 내용이 즐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지나 뉴스위크지에서 어려운 부분만 발췌하여 실어 놨으니 당연히 어렵겠지. 이런 책을 십수 번 보느니, 챕터북을 보는 게 훨씬 이롭다는 걸 나는 이전에 이미 알았지만 공인 시험 성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거.
알라딘에서 우연히 <영어순해> 책을 본 순간 안 좋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면서 옛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이 책이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영어에 얽힌 여러 기억들이 교차해서 페이퍼로 남겨 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