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필모가 적은 관계로(신인급 이니까 당연?) 많은 지면이 필요치 않아 다행이다. 혹시 배우 지망생이 있다면 김다미 연기를 잘 참고해 보면 좋을 듯싶다. 드라마나 영화를 하드캐리하는 배우, 그 배우가 신인급이라면 이런 글은 ‘진작에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시작한다. 서론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김다미는 이미 영화 <마녀>로 괴물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물론 그녀의 데뷔작이 <마녀>는 아니다. 제대로 된 상업영화(독립영화 제외) 데뷔작은 2018년 사회 고발성 영화인 <나를 기억해>.
이 영화에서 김다미는 한서린의 고교 시절인 유민아 역을 맡았다. 마리오네뜨 피해자로 성인이 되어서는 개명을 한 인물. 김다미는 소심하면서도 풋풋한 여고생 역을 완벽히 연기하여 이미 연기파 배우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후 영화 <마녀>의 구자윤 역으로 유민아 역을 아주 가뿐히 지웠다. 소심한 범죄 피해자 역에서 액션 배우로 변신을 했는데, 일반 고교생과 초능력을 갖고 살상을 일삼는 마녀를 완벽하게 넘나들며 영화를 ’하드 캐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상업 영화 2작품으로 이런 평가를 받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보통 대부분의 배우들은 여기서 한 번 주춤한다. 이전 캐릭터가 너무 강하여 뭘 해도 구자윤 역을 탈피하기가 힘들어서다. 엔간한 신인급 배우들이 격는 통과의례랄까.
그런데 김다미는 이런 침체기가 없다. 영화가 아닌 드라마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어 또 한번 완벽하게 그 캐릭터를 입는데 성공한다. 소위 탑 배우들이 하는 행보를 신인급이 보여주고 있다. 정말 놀라운 캐릭터 변신이다.
곰곰 생각해 보았다. 도대체 김다미의 매력이 뭔지. 소위 이전 캐릭터들을 지워나가는 배우가 있다. 연기파 배우들로 회자되는 우리나라 대표 배우들을 생각하면 된다. 유재명, 이병헌, 윤여정, 송강호, 김윤석, 오정세, 이정재 등이 떠오른다.
이들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은 뭘까?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한바, 결론은 배우의 ’딕션‘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딕션은 배우의 목소리 색깔과 톤 그리고 발음을 종합한, 그 캐릭터를 입체화 시켜주는 이미지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캐릭터에 맞는 목소리를 낼 줄 알면 표현력과 해석력(편집력)은 반복을 통해 따라올 수 있는 부수적이 능력이라 생각한다. 배우가 캐릭터의 목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현실의 캐릭터처럼 보일 수 있다. 이게 TV나 영화 연기의 본질이지 않을까.
연극이 아니라 카메라 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게 ’현실‘을 훔쳐보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실생활에서 ’살아 있는 누군가‘를 진짜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는 것이 핵심. 나는 이것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 ’딕션‘이라고 생각한다. 위에 열거된 배우들은 배역의 목소리를 만들어 낼 줄 아는 배우들이다.
이 능력, 결코 쉽지 않다. 연기 내공이 쌓여야 가능하다. 이병헌의 초기작 <달콤한 인생>을 보면 김영철과 황정민에 비해 캐릭터의 목소리를 완성도 있게 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다. 이병헌의 최근 작(미스터 션샤인 참고)들을 보면서 이런 느낌은 강해졌다.
이병헌 뿐이겠는가. 표현력 좋은 배우들도 배역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여 실패하는 배우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남궁민이나 장동건이 아닐까. (이들은 배역이 바뀌어도 언제나 목소리가 같다.) 자신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배역은 분명히 있다. 이 이미지를 통해 연출가는 배역을 캐스팅하니까.
하지만 전혀 그 캐릭터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우가 그 역을 해 내면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며 명품 배우 반열에 오른다. 이건 당연하지 않을까. 20대 배우가 분장을 통해 70대 할머니처럼 보일 수는 있겠으나 연륜이 쌓인 목소리는 낼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이걸 해낸다? 명품 배우가 되는 거지. 배역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뒤집어쓸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다.
그런 면에서 김다미의 딕션은 매우 놀랍다. <나를 기억해>의 유민아는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을 반영하듯 김다미 본인의 목소리에서 더 힘을 뺀다.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리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마녀>에서 구자윤은 여고생일 때와 마녀일 때의 딕션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일상에서 여고생이 내뱉는 목소리와 마녀로 각성한 이후 내뱉는 목소리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거. 기차 안 씬에서 고민시와 주고받는 말과 최우식과 싸우면서 ‘여전히 느리네’, ‘넌 나하고 레벨이 달라’라고 웃으면서 하는 말은 배우의 딕션이 왜 중요한지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귀여운 마스크에 반전이 있는 딕션은 이후 이클에서 이서로 캐스팅되는 주요 동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클의 조이서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캐릭터다. 오수아와 다른 캐릭터를 대하는 말투와 새로이를 대하는 말투는 그 온도차가 크다. (내레이션 역시 그렇다.)
작품으로 배역을 확대해도 그렇다. 조이서 역의 김다미 딕션과 국연수 역의 김다미 딕션을 들어보면 조이서 역 딕션이 시종일관 톤을 강하게 구사함을 알 수 있다. 표정 연기도 잘하지만 김다미는 작품의 캐릭터가 지향하는 딕션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캐릭터를 지우는 연기가 가능해지는 듯하다.
사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이클 원작의 조이서는 차가운 도시녀에 가까운 캐릭터다. 장근수로부터 ‘천사같은 미모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드라마의 조이서는 원작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권나라와 비교되는 위치라 미스캐스팅이라는 지적이 빗발쳤다.
<그해 우리는>의 국연수 마스크에 헤어(은색으로 탈색)라면 좀더 수긍이 갔을 거다. 처음엔 너무도 어울리지 않은 단발이라 권나라에 비해 훨씬 못나 보인 게 사실이다. 하지만 회차를 거듭하면서 그 못나 보였던 조이서가(죄송하다, 순간 신봉선을 본듯하기도 했다) 사랑스러워졌다. 나중에는 권나라보다 훨씬 이뻐 보였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김다미가 딕션으로 새로운 캐릭터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기에 그렇다. 원작과 다른 자신만의 매력이 가미된 캐릭터를 드러내 보였다는 점이다. 10화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조이서만 보였다.
물론 이러한 경험은 2018년 영화 <행복한 남자>에서 이미 경험했다. 여주인공인 자코벤 사로몬을 연기한 카트리네 그레이스-로젠탈은 정말 여배우 치고 외모가 형편없었다. 처음에 ‘어떻게 저렇게 볼품없는 여자가 주연이지?’라는 생각 때문에 영화에 몰입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영화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여주인공의 미모에 반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연기의 힘이다.
김다미는 인터뷰에서 항상 자신만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한다.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고. 자신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여기에 걸맞게 그녀는 배우에 적합한 마스크를 갖고 있다. 헤어스타일에 따라 이미지가 확확 바뀌는 마스크.
(배우 김다미를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정말 천의 얼굴이다. 이클에서 보면 신봉선의 얼굴이 보였다가 심상정의 얼굴이 보이는가 하면 김연아의 얼굴도 보인다. 이게 한 사람의 얼굴이라니. 입체적 캐릭터라서 얼굴의 변화로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마스크가 연출된 듯. 원작은 시종일관 은색의 긴 머리다.
이클을 보다가 <그해 우리는>의 국연수를 보면 조이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풋풋하고 청순하며 약간 백치미 있는 마스크로 변한다. 김다미는 강한 캐릭터를 구축할 때와 멜로적 캐릭터를 소화할 때 내보이는 마스크가 어떤 것인지 잘 아는 듯하다.
그래서 그녀는 작품을 선택하고 해당 캐릭터를 받을 시, 그 캐릭터에 어울리는 마스크를 만들고 딕션을 완성하여 캐릭터를 입체화시키는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이것이 전작의 캐릭터를 지우는 능력의 요체가 아닐까. 자신의 장점을 부각할 줄 아는 영리한 배우다.
귀여운 외모(마스크의 스펙트럼이 넓은)에 차분하고 나른하며 약간 혀짧은 목소리는 치명적인 매력의 근간(이 목소리 발음을 싫어하는 분들도 있다)이라 생각된다. 이 목소리의 근간에 배역에 어울리는 딕션을 완성하여 내면으로부터 캐릭터를 뽑아 올리는 김다미. 다양한 얼굴과 좋은 목소리를 가진 이 배우, 알면 알수록 덕질을 안할 수가 없다.
영화 <대홍수>와 드라마 <나인>에서 어떤 연기를 펼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김다미를 보면서 여배우는 비주얼보다는 매력이 훨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비주얼이 조금 떨어져도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매력이 있다면 비주얼을 압살하고도 남음을, 김다미를 통해 깨닫는다. <끝>
[덧] 1. 김다미는 신인급 배우로 분류된다. 출연한 작품도 얼마 없다. 영화 4편, 드라마 2편. 배우 신혜선과 비교하면 그 출연작이 현저히 적다. 그럼에도 영화와 드라마 속에서 보여지는 캐릭터 창출 능력은 압도적이다. 헌데 평론가가 김다미를 평한 글이 거의 없는 형편. 기사 또한 영화 <마녀>나 드라마 이클이나 그우 방영 전후 가십성 기사나 캐스팅 기사가 전부다. 신인급 배우라서 그런가? 어쨌든 배우에 대한 이런 글이 없어 남겨 놓는다.
2. 김다미가 첩보 액션 활극물의 프런트 우먼역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니키타와 같은 배역을 맡으면 어떨지.
3. 이클에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씬이 있다. 구청장 아내역을 맡은 차청화 배우(난 이 배우도 엄청 좋아함)가 조이서를 찾아가 이서가 올린 동영상을 문제 삼으며 이서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다. 이때 뺨을 맞은 이서가 자기가 동영상을 올린 건 팩트를 말함이라고 하고, 자기 뺨을 어루만지며 ‘볼이 좀 따갑네’ 독백하며 키득키득 웃는 장면은 압권. 진짜 소시오패스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