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그림들 -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
조상인 지음 / 눌와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남은 자는 슬프지만, 살아남은 그림은 위대하다. 화가는 갔지만 그림은 살아남아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화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책이 있다. <살아남은 그림들>(눌와, 2020). 기자 출신 미술평론가 조상인이 쓴 한국 근현대미술가론즘 되는 책이다. (부제가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

 

비슷한 책은 많다. 이미 1세대 미술평론가들이 <한국의 근현대미술가들>이라는 책을 꽤 많이 냈다. 최근에 읽은 정하윤의 <커튼콜 한국현대미술>도 비슷한 책이다. 보통 평론가가 10명에서 30명 정도 작가를 선정해서 그림과 작가의 생애를 나열식(연대순)으로 쓴 책들이라 보면 된다.

 

본 책도 비슷하다. 한국 작가론에 관계된 책을 읽다 보면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헌데 이 책은 특이하게도 제목이 <살아남은 그림들>이다. 미술사를 공부해 보니 그림이 살아 남기 정말 힘들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림이 100년 넘게 보전되고 관리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림을 죽을 때까지 그리다가 작가가 죽으면, 그 그림은 어떻게 될까? 작업실이 크고 집이 부자이면 대체로 그 그림은 가족이 소유하며 보존하게 된다. 집이 없는 가난한 화가라면? 그림은 모두 없어진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도 죽어서 그림이 남아 있지 않으면 잊혀진 존재가 된다.

 

비운의 화가 나혜석은 남아 있는 작품들이 거의 없다. 월북한 화가들은 말해서 뭘할까. 그래서 살아남은 그림은 명작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림이 남아 있어야 보여지고 연구될 수 있기 때문. 월북작가(1953년 포로교환 때 북을 택함) 이쾌대는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1988년 해금 조치가 된 후 1991년에야 겨우 이름이 알려졌다.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72×60cm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렸을 때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가 열려 잊혔던 그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p47)

 

1991년과 2015년 전시를 채운 이쾌대의 그림들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53년 월북한 작가들은 모두 한국 공안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쾌대의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인 유갑봉 여사는 53년까지 남편이 그렸던 그림들을 모두 다락방에 꽁꽁 감췄다. 아들도 몰랐단다.

 

여사는 혹여라도 남편의 그림을 뺏앗길까 누구에게도 다락방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해방고지>를 포함한 일련의 그림들은 모조리 그 다락방에서 나왔다.“ (p51) 우리가 각종 책과 전이에서 이쾌대의 자화상과 엄청난 대작 그림들을 볼 수 있었던 건 바로 유갑봉 여사가 이쾌대 작가의 그림을 지켰기에 가능했다.

 

화가 곽인식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이우환 작가는 알아도 곽인식 작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왜냐하면 곽인식은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서 활동하던 작가였기 때문(일본 물파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작가가 곽인식. 물파주의의 철학적 기조를 형성한 이가 이우환이다). 그런 그가 1982년 갤러리 현대에서의 개인전을 발판으로 귀국했다.

 

1985년 한국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곽인식은 1988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그림들은 어떻게 됐을까? 2019탄생 100주년 기념-곽인식전은 화가의 아들 곽경직이 아버지의 유작들을 지킬 수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재료가 다양하고 보관이 쉽지 않은 100여 점이 전시됐고 뒤이어 고향인 대구미술관으로 순회전이 이어졌다. (p341)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배운성전은 배운성이 파리에서 전쟁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못한 그림들로 채워진 전시였다. 전창곤 대전 프랑스문화원장이 유학생 시절 파리의 골동품상에서 뭉치째 나온 배운성의 그림 48점을 발견하고 구매했기 때문이다. 눈도 밝았고 운도 따랐다는 게 전언이다.

 

이렇듯 화가들은 갔지만 그림들은 살아남아 한국 현대미술의 보고(寶庫)가 됐다. 이 책에 소개된 37명의 화가들은 한국 근현대미술계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다. 모두 미술사적으로 최초라는 업적을 쌓았고, 미술계로부터 인정을 받은 걸출한 화가들이다.

 

그럼에도 모르는 화가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변월룡(1916~1990).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탄생 100주년을 기리며 덕수궁관에서 개최가 대규모 전시가 국내 최초의 회고전이었다.“ (p196) 변월용은 남한이 몰랐고 북한이 지워버린 화가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변월룡의 국적은 소련.

 

변월룡, <진달래>, 1954, 캔버스에 유채, 78×59cm 


죽을 때까지 한국적 향수를 간직했던 변월룡은 평생 그림에 한글로 서명을 적더니 비석에도 한글로 이름을 새겼다. 한국 미술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이런 화가를 발굴한 사람이 미술평론가 김영대이다. 국립 러시아미술관 복도에 걸린 그림에서 한국인의 피를 느꼈다고. 그렇게 변월룡은 김영대 평론가의 노력으로 한국 현대미술사로 편입되었다.

 

<살아남은 그림들>은 소주제를 잡아 작가들을 분류하고 연대순으로 나열한 작가론이다. 2년 이상 신문에 연재한 조상인의 예()’이 수정 증보되어 단행본으로 간행된 책. 그래서 그런지 화가와 그림 소개가 전형성을 띠고 있다. 대표작 그림에 저자의 그림평과 해석, 작가 소개 그리고 작품의 영향 및 의의 등의 서술 형식을 보인다.

 

도판 그림이 좀 아쉽지만 내용도 충실하고 작가들의 몰랐던 관계도 알 수 있어 유익한 책이다. 이쾌대의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했던 이가 물방울 작가 김창렬이었고, 이 이력 때문에 김창렬은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더욱이 김창렬은 소학교 시절 딱 1번을 제외하고 1등을 놓친적이 없다고.

 

최영림은 월남하는 도중에 이중섭에게 신세를 졌고, 이중섭은 부산에서 박고석에게 신세를 졌다. 도상봉은 원래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정치적 실력을 다질 예정이었지만 교양수업으로 듣던 서양미술사에 빠져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변관식은 서화미술회에서 스승인 안중식을 만났고 이당 김은호와 동문이 되었다. 이응노는 김규진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무보수로 허드렛일을 해주면 주변을 멤돌았다고. 문하생이 된 이응노는 대나무에 탁월하고 죽순처럼 빠르게 배운다 하여 스승 김규진에게 죽사라는 호를 받았다. 1933년부터 고암이라는 호를 쓰기 전까지 그는 죽사였다. (p304)

 

화가와 그림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도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 선수의 앞가슴 일장기를 지워버린 이가 청전 이상범이었다. (p236) “당신의 이름을 내게 주세요. 그러면 평생 그 이름으로, 그 이름을 위해서 살겠어요.” 이렇게 말한 여자의 이름은 변동림이고, 받은 이름이 향안’. 아호를 내 준 이가 김환기다. (p102)

 

이 책에 수록된 그림은 총 155. 도판 전문 용지가 아니라 인쇄가 좀 아쉽지만 37인의 대표작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저자 조상인이 본 그림의 느낌과 내가 그보고 느낀 지점이 무엇인지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책을 읽는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내게 제일 좋은 그림이 뭔지 나름 생각해 보는 사치는 보너스. 나는 변월용의 <진달래>가 잊히지 않는다. ()

 


[덧]

1. 37인 중에서 저자 조상인이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작가는 유영국. 무려 16페이지를 할당하고 있다. 다른 작가들은 9~14페이지 정도.

2.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회화

 -배운성의 <가족도>. 당시의 옷차림과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아 지정. p88

 -김환의의 <론도>. 실험적인 추상미술로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등록. p106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6-02-08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한 자가 오래 가는 것이 아니고 오래 가는 자가 강한 것이다.˝ 짝패의 이범수 대사가 그림에도 딱 들어맞네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열린책들 세계문학 46
존 르 카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르 카레 소설은 헌책방에서 발견하는 즉시 한 권씩 구매했다. 그 결과 번역본을 거의 다 갖추게 됐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너무도 재밌게 봐서 원작 소설을 찾아 보고 르 카레 전집을 구입하기 소망했다. 그리고 영화를 본 지 약 8년 만에 번역본을 거의 다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르 카레 전집을 생각나는 대로 읽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에이전트 러너>를 읽은 게 약 2년 전이다. 6 작품을 읽었다. 로버트 러들럼과는 결이 다른 재미다. 독서토론 때문에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열린책들, 2010)를 다시 읽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옛날에 읽었던 세부적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거다. 역시 리뷰를 써 놓지 않으면 금방 잊혀진다.

 

주인공 이름과 결말은 생각이 났어도 플롯 구조는 정말 처음 보는 것처럼 재밌었다. 그리고 처음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엄청나게 정교한 플롯 구조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스파이 소설은 그레이엄 그린의 말마따나 첩보 소설 장르에서 독보적이다. 로버트 러들럼의 작품보다 좀 더 고급지다고 해야 할까.

 

정교한 플롯 구조로 내게 각인 된 작품이 하나 있다. 스탠리 포틴저의 스릴러 소설인 <4의 절차>. 아주 세밀한 플롯 구조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던 작품이다. 르 카레의 <추나돌스>는 여기에 버금가는 엄청난 플롯 전개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플롯 구조 자체만으로 미학적 완성도를 자랑한다.

 

주인공 리머스(영국 첩보원)가 계속 진실을 은폐하고 관리관과 미리 약속된 공작이 진실인냥 그 역할을 다하다가 갑자기 상대(문트)에게 휘말려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는, 즉 고통스럽게 작전의 전모를 실토하면서 자신은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 모든 퍼즐이 완성되면서 영국 첩보부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이 구조, 그러니까 주인공 리머스가 관리관과 미리 짜고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루트 이외에 관리관은 리머스가 결국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게 하는(결국 자신의 의지로) 루트를 조지 스마일리와 조심스럽게 구축한 거다. 리머스가 끝까지 자신의 임무를 철저히 완수하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이야기의 전모(全貌)는 이렇다. 영국 첩보부는 피들러(문트의 부하)가 문트를 의심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문트가 영국을 위해 일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의심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관리관과 스마일리는 리머스라는 충실한 장기말을 통해 이 위험한 작전을 성공시킨 것. 성공의 전제는 리머스가 끝까지 문트는 동독을 배신할 이가 없다는 거였다.

 

실제로 리머스는 작전의 본질을 몰랐다. 몰라야 했다. 그래야 성공하니까. 사문회의 마지막 변론이 끝나자 리머스는 알았다. 자기가 철저히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리즈(리머스의 연인) 역시 철저히 이용당했다. 리머스와 리즈에게 피들러는 충실했고, 문트가 이중 스파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피들러는 리머스를 보호하고 리즈를 영국에 돌려보내 줄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국 첩보부의 목적은 피들러의 제거였고, 아울러 리즈의 희생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리머스의 선택이었다. 장벽에서 리머스는 스마일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동독 지역에 떨어져 죽어 있는 리즈의 시신을 택하였고 결국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알았다. 영국에 충성한 대가가 배신이었고, 돌아가느니 차라리 사랑(죽음)을 택하겠다고.

 

이 비극적 결말은 스파이 소설의 전형적 결말을 전복시킨다. 전통적인 스파이 소설은 작전을 성공시킨 주인공이 조용히 사라지거나 은둔하는데, 본 작품은 스파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그걸 찾았다는 데 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랑일지라도.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문학적 메시지를 강렬히 전달한다.

 

리머스는 리즈가 자기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명확히 깨달았다. “그것은 하찮은 것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었다. 평범한 생활이 가치가 있다는 믿음. 빵 부스러기를 종이 봉지에 넣고 해변으로 걸어가 갈매기들에게 던져 주는 소박함. 하찮은 것에 대한 관심은 리머스가 이제껏 가질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갈매기에게 던져 줄 빵이든 사랑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그는 돌아가서 그것을 찾을 것이다.” (p106)

 

아울러 르 카레가 보여주는 문장들은 군더더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힘이 있다. 이는 개인이 사상(이데올로기)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관념을 이야기로 보여주는 데에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데올로기(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이 통렬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손님들로 붐비는 식당에 폭탄을 던져도 좋다는 건가요? 그게 당신들이 막무가내로 활동해도 좋다는 근거가 될 수 있느냔 말입니다.” 리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우리라면 그게 통합니다.” 피들러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가게 해 준다면 나는 식당에 폭탄을 던지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겁니다. 대차대조표는 나중에 만들면 되니까. 많은 여자와 아이들이 희생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진보가 이루어 졌다고.” (p144)

 

도대체 뭘 불평하고 있는 거지?” 리머스가 (리즈에게) 거칠게 물었다. “대중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다고 말하지. 사회주의의 현실은 밤낮으로 싸우는 것이다. 그 무자비한 전투. 그게 공산당이 말하는 거잖아? 적어도 당신은 살아남았어.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인명의 고귀함을 역설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 (p245)

 

정교한 플롯 구조, 캐릭터를 통한 신랄한 이데올로기 비판, 그리고 수미쌍관된 배경(소설의 처음과 끝이 장벽이다!). 소설 구성의 3요소가 스파이 소설 장르에서 이처럼 잘 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장르 소설을 넘어 세계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볍지 않고 신중하게 사건이 전개되다가 사문회 이후 숨막히게 치달리는 플롯 구조는 독자들에게 첩보 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과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벽에서 허물어지는 두 주인공을 보면서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이야기는 좋은 소설이 갖추어야 할 미덕의 전형이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6-01-23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60년대의 스파이소설은 이언 플레밍과 존르 카레가 쌍벽을 이루고 있지요.상업적 성공은 영화를 통해 전세계적으로 흥행한 007시리즈가 더 유명하지만 문학적 성취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이 휠씬 위인것 같습니다.이는 국내에서 조차 007소설을 읽는이도 출간하는 곳도 없지만 르 까레 소설은 지금도 꾸준히 출간되고 읽히는 것에서 잘 알수 있는것 같아요.

yamoo 2026-01-23 10:59   좋아요 1 | URL
대중적 장르적 소설은 이언 플레밍이 가장 유명했죠. 그러다가 80년대 냉정시대를 맞이하여 첩보소설의 열풍이 불었습니다. 잭 히긴스와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첩보소설들의 인기는 대단했지요. 모두 영화와 됐고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르 카레와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도 인기있었죠. 그레이엄 그린, 서머셋 몸 등도 첩보서설을 썼지만 히긴스와 포사이에 비해서 서스펜스가 많이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순수문학에서 보여주는 호흡의 길이가 장르 소설에서 보여주는 빠른 전개를 보여주지 못했던 듯합니다. 그런데 르 카레는 이들의 특징을 모두 흡수해서 작품활동을 한 듯보여요. 그래서 지금 재평가를 받아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닌가 합니다..ㅎㅎ

카스피 2026-01-23 13:27   좋아요 2 | URL
죽은자에서 걸려온 전화를 읽어 보셨나요.제 기억에 아마 최초의 르 카레 스파이 소설이고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의 전작에 해당 할 겁니다.오래전 르 카레가 국내에서 인지도가 거의 없을 적에 사자로부터의 전화라고 국내 초역본(7~80년대 번역)을 본 기억이 나는데 나중에서야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의 전작(실제 추운나라에서 온 등장인물과 이야기들이 죽은자에서 걸려온 전화와 연결되어 있음)이란것을 알았지요.
르 카레 스파이 소설의 모든 토대를 다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요.

yamoo 2026-01-23 13:56   좋아요 0 | URL
당연히 읽었습니다. 데뷔작도 훌륭했지만, 추나돌스가 훨씬 완성도가 높고 재밌더군요. 팅커 테일러도 좋았지만 지금까지 읽었던 6권 중 단연 으뜸은 추나돌스라고 생각합니다..ㅎㅎ

그레이스 2026-01-23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는 안읽어 봤는데,,, 플롯을 칭찬하시니 ...^^

yamoo 2026-01-23 14:51   좋아요 1 | URL
오오~~ 이 유명한 작품을 아직 안 읽어 보셨군요! 강추드립니다! 정말 플롯이 정교하고 재밌습니다!!
 
색의 비밀 -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
미셸 파스투로 지음, 전창림 옮김 / 미술문화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색채는 물리계에서 실재하지 않는다. 색채는 태양광선의 파장이 사람의 눈에 의해 인지된 우연의 산물이다. (어떻게 보면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고마운 선물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색체는 실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현상들 중 하나이기에, ‘잠정적 실체라는 특성을 띠고 있다. 이 기묘한 특성으로 인해 색채는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로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는 색채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심리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곧 색채는 인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하나의 상징화된 통로였다. 그래서 색채는 이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상징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 신화, 예술, 의식 등에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역할을 해 왔다.”

 

2011.8.30. 나는 알라딘 페이퍼에 색체, 그 빛깔의 유혹이라는 글을 게재한 바 있다. 위 인용은 당시 발행한 글의 일부를 가져온 것. 이걸 재인용한 이유는 이후 색채에 관계된 다양한 책들을 봤지만, 색채의 특성을 잠정적 실체라고 당시에 표현한 것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지 못해서다. (내가 명명한 조어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기특하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무엇보다 색채는 인간의 정서를 표출하는 하나의 상징화된 통로였다. 그래서 색채는 이성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상징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종교, 신화, 예술, 의식 등에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역할을 해 왔다.”는 부분. 이에 부합하는 걸출한 색채에 관한 책을 만났기에, 전에 써둔 페이퍼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던 거.

 

<색의 비밀>(미술문화, 2003)은 색에 관계된 문화사 책 가운데 아주 유용하고 걸출한 책이다. 무척 쉽게 서술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화권에서 색(Color)이 종교, 예술, 의식, 생활, 스포츠 등 중요한 상징적 메타포로서 그 사회적 의미를 어떻게 확장해 왔는지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 색에 대해서 우리가 몰랐던 내용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지는 책이다.

 

저자 미셀파스투로는 <파랑의 역사>로 널리 알려진 문장학과 상징학의 거두이다. <악마의 무늬 스트라이프>, <사과의 상징적 역사>, <문장학 개론> 등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들이 다수이기에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서양 상징사의 대가. 본 책은 대가가 풀어 설명해 주는 색에 대한 상징과 의미의 역사적 스케치이다. (스케치일 수밖에 없는 게 설명이 너무 간략해서)

 

이 책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이 무척 많은데, 일단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보색 관계는 출현한 지 얼마 안 됐다는 거. 보통 미술 시간에 빨강색의 보색은 청록색(또는 녹색)이라 배우고, 노랑색의 보색은 보라색이라고 배우지만 중세 시대 빨강의 보색은 흰색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옛날의 색채 계단은 스펙트럼의 순서대로가 아니라(뉴턴의 실험이 행해진 것은 17세기 후반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양단에 백과 흑이 오는 배열이었다(적색이 한가운데 있을 것이다). (p187]

 

“18세기까지 녹색이 빨강의 반대 색으로 생각되었던 적은 전혀 없었다. 빨강에는 흰색(원시시대 이래)과 파랑(12~13세기 이후)이라는 두 개의 반대색이 있다. 서구 세계에서 최초로 녹색을 빨강의 반대색으로 여기게 만든 것은 1750~1850년 사이에 출현한 원색과 보색에 관한 색채 이론이었다. 이 이론에 의해 빨강이 원색의 지위를 차지하고 색상환에서 녹색이 빨강의 보색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p99)

 

색은 역사적이고도 문화적인 그 시대의 산물이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색의 의미는 과거와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현재 녹색은 교통표지판이나 병원(또는 약국) 그리고 기분을 차분하게 하는 벽지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린에 대한 이미지는 현재 매우 우호적이어서 그린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의례 평화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옛날에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중세부터 이미 녹색은 악마의 색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색을 피했다. 그러나 녹색은 오히려 행운도 상징한다. 녹색은 양면성 즉 행운과 불행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녹색은 요행수가 작용하는 상황이나 의식과 연결된다. 적어도 16세기부터 도박판은 녹색이며,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장도 그렇다. (탁구대, 축구장을 생각해 보라!)” (pp32-33)

 

재미있는 내용도 있다. 색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색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면 가장 좋아하는 색으로 파란색이 나온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색 선호도 조사에서 서유럽, 미국, 캐나다에서도 항상 50%에 가까운 사람들이 파랑을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니 좋아하는 색은 다수가 좋아하는 색인 듯하다.

 

하지만 가장 혐오스러운 색에 대해서는 각자가 다르지 않을까? 어떤 이는 검정색이라고 할 수 있고 , 어떤 이는 베이색이라고(특히 내 어머니)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자는 오늘날 이 질문의 답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대체로 황색과 녹색, 갈색의 중간쯤 되는 색이다. 이 색을 옛날에는 거의 똥색이라고 불렀고 최근에는 카키’, 현재는 겨자색이라고 부른다.” (p44)

 

웨딩드레스 이야기도 나온다. 개인적으로 하얀 웨딩드레스가 언제부터 출현했는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비교적 최근까지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리는 것은 젊은 여성들에게 결혼 전의 행실이 순결했음을 선언하는 수단이었다. (중략) 그러나 유럽의 젊은 여성이 옛날부터 항상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것은 아니다. 이 유행은 18세기 말 이후에야 출현한 현상으로, 이것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세기에 이르러 개혁적인 프로테스탄트와 반개혁적인 가톨릭의 두 고전적 가치체계가 결합하여 이른바 부르주아적 가치관이 탄생했을 때부터였다.” (p171)

 

식품과 색의 관계에 대해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식품산업에서 사용하지 않는 색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연 식품과 식습관을 통해서 노랑, 녹색, 하양, 빨강 등의 색을 식품에 사용해 왔다. 검정색 계열에 속하는 식물은 드물기는 해도 존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파랑색 계열의 식물은 전혀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파랑은 일반적으로 의약품(정신안정제나 수면제)”에 한정되어 있지, 식품산업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pp178-179)

 

책의 부제는 색의 상징성과 사회적 의미이다. 미셸 파스투로가 다채롭게 풀어내는 색에 대한 상징과 사회적 의미는 실로 재미있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면이 다분하다. 사전 형식을 취하는 책이어서 그런지 내게는 윤덕노의 <음식 잡학 사전>처럼 나만 몰래 보고 싶은 책이다. '색(컬러)'에 관계된 책을 많이 읽어 왔지만, 색에 대해서 파스투로만큼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저자는 거의 못 본듯싶다.

 

“‘빨강, 파랑, 검정, 하양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즉시 이러한 색을 가진 사물을 보여 줄 것이다. 그러나 색을 나타내고 있는 그 단어들의 더 깊은 의미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색채론>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파스투로는 이 책을 통해 아주 성공적으로 해 냈다. 책을 즐겨 읽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런 책을 만나는 건 축복이다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 행운을 이 페이퍼를 읽고 있는 여러분에게 드린다. ()

 

 

[]

색은 문화적 소산으로 사람이 지각하지 않으면, 즉 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특히 뇌, 기억이나 인식 능력 혹은 상상력으로 해독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된다. 보이지 않는 색은 존재하지 않는 색이다.” 이 책 61페이지에 나온 대목이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2011.8.30.자 발행한 페이퍼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12-15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2-15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입] Yusuke Kobayashi - How A Realist Hero Rebuilt The Kingdom: Part 1 (현실주의 용사의 왕국 재건기: 파트 1) (2021)(한글무자막)(Blu-ray + DVD)
Various Artists / Funimation Prod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에 줄창 넷플릭스로 애니를 보고 있다. 재미 없는 것도 많지만 내 취향이라고 넷플에서 추천해 주는 작품들은 의외로 재밌는 작품들이 많다. 제목과 포스터는 정말 '이게 재미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게 하지만, 막상 보기 시작하면 꽤 재밌다. (넷플의 추천 마법은 정말 신기하다.)


그렇게 보게 된 작품이 <나 혼자만 레벨 업> 이틀만에 다 볼 정도로 몰입도가 장난아니었다. 그리고 넷플이 계속 추천해 준 작품이 <무직전생>. 역시 제목과 포스터는 정말 재미없게 보였지만 일단 보니 시간이 순삭이었다. 


이세계 애니가 내 취향이 아닌 듯했는데, 막상 보니 의외로 좋았다. 전생해서 주인공이 막강한 능력을 가져 적(마물)을 퇴치한다는 유치한 줄거리이지만, 이 뻔한 줄거리를 강력한 연출력으로 볼 거리를 제공하는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현실주의용사의 왕국재건기> 역시 이세계물 장르이다. 하지만 여타 이세계 판타지물과 현저히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게 바로 처세와 정치의 대표 고전인 <군주론>과 <손자병법>을 애니에서 만나볼 수가 있다는 거.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이세계 왕으로 불려온 주인공이  (현실의) <군주론>과 <손자병법>의 핵심 내용을 통해 쓰러져가는 이세계 왕국을 재건한다는 스토리다. 이세계 판타지물에서는 정말 드문 정치 이야기. 정말 참신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플롯의 짜임도 좋고 연출력도 괜찮다. 다만 음악과 캐릭터가 좀 약한 편이다. 하지만 매 에피소드의 내용이 <군주론>과 <손자병법>에서 따온거라 주제 집약도가 매우 좋다. 


'용병은 그 나라를 결국에는 파멸로 이끈다'라거나, '군주의 잔인함은 상황에 따라 나라에 좋은 덕목이 될 수 있다'는 <군주론>의 내용을 에피소드 내용에 잘 적용하여 작품성을 보장하고 있다. 심지어 12화의 타이틀은 <손자병법>에 나온 "적을 포위할 땐 반드시 퇴로를 열어줘라"이다. (11화 역시 '이도대강)


이세계 판타지물에서 현실정치학의 보고인 <군주론>과 <손자병법>의 핵심을 볼 줄을 미쳐 몰랐다. 이 두 책의 내용을 애니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작품. 그만큼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주인공이 이세계로 소환될 때 있었던 곳이 도서관이고, 주인공이 없어져 마지막에 땅에 떨어진 책이 <군주론>이다. 이 작품이 뭘 노리고 있는지 처음부터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군주론>의 21세기 아니메판. 넷플 시청자면 강추할 만한 작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12-03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이 만화(현실주의용사의 왕국재건기)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나는데 일본의 무수한 이세게물 만화대비 어떻게 보면 참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 매우 이채롭단 생각을 했지요.하지만 역시 만화는 만화라고 느낀것이 이세계 왕이 느닷없이 왕자라를 양보하는 대목으 현실 세계에선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지요.
아무튼 연재가 계속 진행 중인지 완결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애니로도 나왔다고 하니 한번 시청해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yamoo 2025-12-03 17:53   좋아요 0 | URL
매우 이색적인 만화입니다. 왕자리를 양보하는 건 뭐...그럴 수 있겠지요. 만화니까. 이세계인데 뭘 못하겠습니까...ㅎㅎ
근데 정치학 경제학 처세술 등 학문적 배경이 작품의 근간이 되어서 그런지 내용이 예사롭지 않더군요. 경제학적 기본 이론도 상당히 나옵니다. 이세계 애니 중 이런 애니가 있다는게 좀 신기하다랄까요. 재미도 있어요..ㅎㅎ

감은빛 2025-12-05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스쳐 지나가며 이 글을 얼핏 보고 넷플릭스에서 한번 찾아보았지요.
야무님 추천이시니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편당 분량이 짧아서 한 서너편을 죽 봤는데, 확실히 만화라 유치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독특한 만화이기는 하더라구요.
뒤쪽에 전쟁하는 내용도 나오는 것 같던데 나중에 시간나면 더 봐야겠어요.

yamoo 2025-12-08 11:38   좋아요 0 | URL
2기로 끝났는데, 하렘적 요소도 있긴 하지만 기본 스토리는 왕국의 재건이라 정치와 경제 쪽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전쟁의 전략과 전술 내용도 흥미진진하고요. 어쨌거나 이세계 애니 장르 중 특이하고 재미있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확실히 성인도 즐길 수 있는 무거운 주제를 재밌게 잘도 풀어낸 작품^^
 
최초의 현대 화가들 -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다카시나 슈지 지음, 권영주 옮김 / 아트북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근래에 현대미술과 관련된 책들을 잡다하게 읽고 있다. 그냥 손에 걸리는 대로 읽는 편인데 개중에는 좋은 책도 있고 아쉬운 책도 있다. 물론 설치미술이나 행위예술 또는 비디오아트와 관련된 분야가 포함되어 있고, 이 분야가 현대미술에서 그 위세를 불려 가서 그런지 몰라도 최근에 외국에서 출간된 책 중 이쪽 분량이 상당히 늘고 있다.

 

나는 여전히 회화나 조각 이외에는 불편한 시각이 많아 실험성이 짙은 설치미술, 행위미술, 비디오아트 등이 포함된 책은(그것도 많이!) 아직은 별로라는 느낌이 강하다. 뭐 어째겠는가, 내 취향이 그런데. 이렇게 읽어 가는 와중에 만난 책이 <최초의 현대화가들>(아트북스, 2005)이다. 일본 작가가 쓴 현대미술가론쯤 된다. 최근에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다.

 

저자는 다키시나 슈지. 1932년 생. 일본 국립서양미술관 관장을 역임한 현대미술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동경대 졸업 후 프랑스 파리1대학과 루브르 미술관에서 서양 근대미술사를 전공했다니, 믿고 볼 수 있는 서양미술 전문가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쓴 책을 신뢰하는 편인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전문가의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평이하지만 수준 높은 '작가론'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화가를 선별하고 정리한 저자의 시각이. 누구나 알 만한 작가와 생소한(?) 작가의 비율이 5:5 정도라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모르는 작가는 건너뛰고 아는 작가만 읽어도 좋다. 나중에 생소한 작가 순으로 읽어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잘 다루지 않는 움베르토 보초니, 에밀 놀데, 쿠르트 슈비터스, 프랑시스 피카비아 등의 대표작을 잘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 반갑고 귀한 책이다.

 

예술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도 작품이 출발점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작품은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예술가는 작품으로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 송이의 들꽃에 우주의 신비가 숨어 있듯이, 한 점의 작품에 예술가의 내면세계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단 한 점의 작품으로 예술가의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머리말중에서

 

이 책의 집필 의도를 가장 잘 나타낸 부분이다. 화가의 대표작 한 점을 매우 심도 있게 분석하여, 왜 최초의 현대 화가로 자리매김 되었는지 논평하는 책이다. 그런데 쉽다. 우리나라 평론가 그 누구도 본 책의 저자처럼 쉽고도 간결하게 작가의 대표작으로부터 작가의 전모를 잘 드러내는 글을 본 적이 없다. 그랬다면 책을 읽고 그 누가 연상됐겠지.

 

그도 그런 것이 이런 방식의 작가론은 쓰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 한 점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세계와 작가가 지향했던 바를 간결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내공이 깊어야 하기에 그렇다. 폴 세잔의 대표작 하면, 누구나 사과를 떠올린다. ‘세잔의 사과라고 회자될 만큼 미술사에서 세잔의 사과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세잔의 대표작은 <대수욕도>이다. 208×249cm의 대작이다. “이 작품이야말로 진짜 나 자신의 그림이 될 테지.”라고 말할 정도로 고심해서 그리려고 하던 나 자신(세잔)의 그림’. 지금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899년부터 1906까지 무려 7년이라는 세월을, 이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화가의 대표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그 대표작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 좋다. 그림을 좋아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가장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림을 보는 방식인데, 이걸 가르쳐 주는 책이 별로 없다.

 

그림을 보는 방식과 그림이 왜 좋은지 그리고 왜 작가가 이 그림을 그렸는지 알려면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혼자 미술책을 보며 그림 보는 방식을 스스로 깨치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매우 답답하고 지쳐간다. 헌데 이 책은 그런 고민을 한 방에 날려주는 아주 고마운 책이다.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면 왜 고마운지 단박에 알게 된다.)

   

그에게(브란쿠시에게) <공간속의 새>는 단순히 조형적인 아름다움만을 노린 작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새의 비상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브란쿠시는 이 작품에서 다름 아니라 새의 존재와 본질을 하나로 종합하는 일을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p113)

 

책의 부제는 대표작으로 본 12인의 예술가’. 12명의 예술가를 선별해서 대표작 12점만을 소개했으면 우리나라 저자들의 책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12명의 대표작 12점과 그 작품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전 작품들, 그리고 연관된 다른 작가의 작품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 본작이 탄생했는지 그림의 이력을 볼 수 있다는 거.

 

본 책에 수록된 12점의 대표작들은 화가들이 없던 걸 그린 게 아니었다. 이전 선배 대가들의 작품에서 어떤 구성과 부분을 차용하여 자신만의 색깔로 변형해 표현한 결과물이었다. 세잔에게 있어서는 푸생의 <플로라의 승리>, 피카소에게 있어서는 오귀스트 프레오가 그리고 조르조 데 키리고에게는 뵈클린이 있었다. (물론 클레나 슈비터스는 이와는 좀 달랐다.)

 

그래서 미술에 관심이 있지만 그림은 잘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지침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볼 때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 할지 알 수 있다는 말씀. 그만큼 유익하고 쉽고 알찬 책이다. 아주 좋은 책인데 한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어 아쉽게 별 하나를 뺐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강추할 수 있는 책이다.  ()

 

 

* 104p 피카소 <게르니카>를 논한 부분 ; 피카소에게 이와 같은 화면 구성의 힌트를 준 것은 역시 죄 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의 학살을 테마로 한 로마파의 거장 오귀스트 프레오의 부조 <학살>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프레오를 로마파라고 했는데, 찾아보니 프레오는 낭만주의 조각가로 나온다. 도대체 로마파는 어디 유파인지 모르겠다.

 

<<덧>>

사실 이런 책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왔다! 12인의 현대화가가 누구인지 직접 책을 읽고 확인하시길!

1. 이 책에 수록된 쿠르트 슈비터스를 보고 그의 독일어 작품집을 구매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영향을 깊게 받아 나의 조형 언어를 형상화하게 됐다.

2. 에밀 놀데는 내가 그리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지만 지크프리드 렌츠의 <독일어 시간>의 모티브 화가라 해서 다시 한번 보게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5-11-29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짝짝짝. 반가운 리뷰입니다.
˝무엇보다 그림을 보는 방식을 배울 수 있어 좋다.˝ - 이 점이 맘에 듭니다. 적은 작품을 가지고 논한다면 깊이 있는 분석을 담아 설명하는 책이겠군요. 반드시 구매하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읽은 이런 종류의 책과 얼마나 다른지 잘 살펴보겠습니다. 그림에 관심이 있어 화집을 많이 갖고 있어요. 감솨^^

yamoo 2025-12-01 10:10   좋아요 1 | URL
출간된지 오래된 책이긴 하지만 현대회화 작가론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쉽고 유익한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자평하고 있습니다. 다카시나 슈지는 서양미술 전문가이지만 현학적인 설명을 전혀 하지 않고 일반일들도 쉽게 그림을 보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끔 친절히 설명해 준는 게 장점입니다. 우리나라 현대미술 전문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를 보고 주고 있는 사람...이런 류의 책들이 많이 나오면 좋은데, 거의 없는 게 이분야의 실상이라...이 책의 장점이 두드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