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의 추월차선 - 하마터면 지나칠 뻔했다 연봉 1억 일자리
이승재 지음 / 좋은땅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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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실업률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더군다나 청년 취업은 그야말로 빙하기. 2년 전인가, 청년 실업을 다룬 '청년 빙하기'라는 다큐를 방영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취업문이 좁아진 상황이다.

 

 

정규직은 거의 없고 월 50만원도 줄까말까한 인턴직에 수 십대 일의 경쟁률은 이제 통상적인 말이 되었다. 서울 소재 명문대, 특히 인문 사회계 졸업생들에게 취업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더 어려운 현실이 된지 오래. 문송해서 죄송하다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청년 취업난은 심각하다.

 

 

 

민간 기업 공채의 시대가 작년에 막을 내리고 이제 수시 전형의 시대가 됐다나. 남아 있는 공채는 공기업 내지 공무원 시험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모 공기업 40명 모집에 수 백대 일의 경쟁률은 기본. 서울 소재 명문대 졸업생도 인터 자리 하나 차지하기 위해 수 백통의 이력서를 쓰는 상황. 인문사회 계열 전공자의 현실이다.

 

 

더군다나 지방대 인문사회 계열 전공자들은 말해서 뭘할까. 그래서 그들은 물류센터 알바나 편의점 알바를 전전한다. 이마저도 4:1의 경쟁률을 훌쩍 넘어버린다. 청년빙하기가 훨씬 더 단단해진 느낌. 암울하다 못해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눈을 돌려 취업에 성공한 지방대 출신들이 있다. 바로 중동에 있는 두바이다. 왜 중동 두바이일까? 두바이 취업문이 열린 건 전적으로 박근헤 대통령이 한 마디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은 중동 지역에 우리 청년들을 취업시키면 좋겠다는 발언을 한다.

 

 

이에 정부는 부랴부랴 시책을 내고 한국산업인력공단으로 하여금 두바이에 인력을 파견하라고 시달한다. 이에 공단은 그 책임자로 한 명을 두바이에 파견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이 책 <취업의 추월차선>(좋은땅, 2021)의 저자이다. 저자는 20156, 두바이에 첫발을 내디딘 후 1년도 되지 않아 6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을 두바이 현지 기업에 취업시켰다.

 

 

참고로 이전부터 KOTRA는 두바이 지역에서 한국 청년들의 취업을 담당해 왔었다. 이곳에서는 연평균 10여 명의 한국 청년들을 두바이 한국기업에 취업을 시켜 왔는데, 저자는 두바이에 도착한 지 1년여 만에 코트라 실적의 5배를 달성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1년 임기로 부임했는데, 2년을 더 연장했고, 3년 동안 약 200여명 이상의 한국 청년들을 두바이에 취업시켰다.

 

 

놀라운 점은 취업에 성공한 이들이 거의 모두 지방대 출신들이라는 사실이고, 이들의 초봉이 무려 4천 만원이 넘는다는 점이다. 체류지도 모두 제공된다니, 혹해서 나도 가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원 나이가 30대 중반까지라니, 입맛만 다셨다. 진짜 한국에서 인턴 자리 하나에 목을 매는 것보다 두바이에 취업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인다. 아니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두바이에서는 호텔, 디자인, 병원 간호사, 항공사 직원, 두바이 현지 한국기업 사무직 등을 선발하는데, 모두 책의 저자가 발로 뛰어 개척한 일자리들이다. 쉽게 말해서 저자는 두바이 현지 산업계와 한국 청년들을 매칭시켜주는 일종의 헤드헌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맨땅에서 저자가 고군분투로 일궈낸 소중한 일자리들이다.

 

 

한국에서 도저히 취업이 안 돼 두바이로 시선을 돌린 지방대 문송인들은 현재 안정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두바이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항공사 승무원으로만 근무하는 게 아니라 호텔, 디자인, 두바이 한국기업 등에 두루 이직이 가능하다. 더군다나 두바이를 발판으로 영미 쪽이나 유럽의 다국적 회사로 이직할 기회도 충분히 열려 있기도 하다.

 

 

학벌이나 어학 점수도 별로 중요치 않다. 두바이에서는 한국의 이미지가 좋아 한국 청년들이면 어느 나라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영어 구사 능력만 되면 면접 인터뷰만으로 취업에 성공할 수 있다. 참고로 두바이는 아랍지역에 속해있지만 오랜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기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생활 수준이나 인프라도 우리나라보다 잘 돼 있다.

 

 

취업의 빙하기’, ‘취업대란’, ‘이태백’, 꿈포세대등은 어제 오늘의 말이 아니다. 한국은 이미 좋은 일자리가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아주 적은 일자리를 갖고 수 백대 일의 경쟁은 하지 말자. 수 백통의 이력서와 자소서만으로도 자존감이 바닥을 친지 오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지 말고 눈을 조금만 돌려 보자. 그러면 취업의 추월차선이 보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몰라서 취업을 못했다면, 이제는 한 번 문을 두드려보자. 인턴의 반복보다야 훨씬 좋지 않을까 한다. 저자의 도움으로 두바이 취업에 성공한 성공담을 들어보면, 이게 헛된 꿈을 잡는 허황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부다비에서부터 두바이, 라스 알카이마까지 다양한 직종의 회사를 방문하고 청년들의 취업 및 이직 고민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 작가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 책을 통해 뛰어난 실력을 갖췄지만 그만큼 인정받기 힘든 한국 사회에 지친 구직자들이 다양한 기회가 있는 두바이에서 멋진 꿈을 펼치고 큰 꿈을 꿀 수 있는 도약의 발판이 되길 바랍니다. <유은O, 미국 뉴욕 Monteflore Medical Center>

 

 

해외취업이 험난해 보이겠지만 막상 도전해 보면 재미있고 가슴 뛰는 일입니다. 작가님에게 낯선 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듯이 해외에서의 커리어를 고민하시는 분들에게 이 책이 큰 힘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김태O, 삼성전자 두바이>

 

 

해외취업 및 이직을 고민하며 누군가의 조언을 덛고 싶다면 더없이 추천해 주고 싶은 책입니다. 기회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책이 넓은 세상에서 여러분의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진O, 국내복귀자/핀란드 외국계 기업>

 

 

두바이 6년 차 취업자로서 이 책보다 더 두바이에 대해 잘 알려준 책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취업의 추월차선은 두바이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두바이로 와서 취업의 추월차선을 타시기 바랍니다. <양영O, Emirates Airline>

 

 

이 책에는 저자를 통해 취업에 성공한 많은 청년들의 생생한 후기가 담겨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초봉 4천의 정규직 일자리가 있는 곳이 있다. 경력을 쌓아 3년을 넘기면 거의 7천대 이상을 보장받는 곳. 그곳이 두바이다. 이런 생생한 정보와 가이드가 한 권에 담겨 있다. 자신이 해외 취업에 관심이 없는 취준생이라도 거들떠 볼 만한 책임은 분명하다.

 

 

왜냐구? 자명하지. 국내 인턴 일자리에 쏟는 노력만으로도 취업 기회가 훨씬 넓어지니까. 그 기회를 잡는 건 이 책을 읽는 사람의 특권이지 않을까. 내가 봐도 막 가고 싶은 곳인데, 취업 준비생은 더 가고 싶겠단 생각이 들어 리뷰로 남겨 놓는다. 그제 막 나온 신간이란다.

 

 


[]

1. 이 글은 원래 아직도 인턴직에 목을 매고 있는 안타까운 한 후배 때문에 쓴 리뷰다. 헌데 후배와 같은 청년들이 너무 많은 거 같아 많이 안타깝다. 모쪼록 여러 가지 알아보고 준비를 잘 해 좋은 소식을 바라마지 않는다.

2. 이 책의 저자가 아직도 두바이 취업 상담을 하고 있는 듯하다. 리뷰를 읽고 궁금증이 든 취준생들은 seouldubai@naver.com 또는 andy@hrdkorea.or.kr로 문의하면 좀 더 생생하고 전문적인 가이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산업인력공단 홈페이지에도 두바이 취업자들 브이로그가 올라와 있다니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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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1-04-12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서 취업이 인되면 외국이라도 나가야 겠지요.우리나라 대학생들의 경우 지방대학을 막론하고 취업 스펙을 잘 쌓었다고 하는데 일본의 경우 대기업에서도 일본 대학생들에 비해 외국어 능력,성실,도전정신들이 월등해서 인사팀에서도 70%가까이 한국 대학생들의 입사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순교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김은국 지음 / 을유문화사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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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부모님은 광신도인가?’ 이 책을 덮고 처음 들었던 생각이다. 소위 부모님은 장로교의 장로와 권사였기에.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의 강력한 영향 하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회에 다녔고 학부 2학년 때까지 기독교 동아리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부터 교회에 다니기 싫었지만 부모님과 싸우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다녔다. 언제나 내 이력의 종교 공란에 항상 기독교라고 써 넣었다. 그러나 항상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도대체 믿음이 뭐지?’라는 거. 여기에 그럴듯한 대답을 성경에서 찾은 듯한데, 그 의미가 알쏭달쏭 하기만 했다. 성경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세월이 가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교회와 멀어져 갔다. 부모님 때문에 교회에 참석하긴 했지만, 찬송도 부르지 않고 기도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간히 대형 교회 목사들이 뉴스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신은 없다고. 여신도를 성희롱하고 교회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 사건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파하는 그네들의 설교는 가증스러웠다. 목사들은 아마도 알았을 것이다. 신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성도들에게 내세의 희망을 주면서 자신은 그 대가로 성도의 돈을 착복하는, 뭐 그런 구조라 확신했다.



하지만 내면에는 이런 확신에 반하는 다른 생각이 고개를 쳐들곤 한다. 그것은 몇몇 신비주의적 체험이다. 초중고 시절 부모님은 기독교적 체험을 했다. 환상을 보고 방언을 했다. 지금도 어머니는 혼자 기도하실 때면 늘 방언으로 기도하신다. 정말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도 아닌 생판 처음 들어보는 언어. 그리고 무당의 칼춤과 악령이 들린 사람들의 체험을 보면서 신이 정말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작가 김승옥이 절필을 한 이유가 그의 책 <내가 만난 하나님>에 수록되어 있다. 읽어 보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을 만나 절필하는 상황과 너무 유사한 것을 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거듭 생각을 수정하곤 한다.



<순교자>는 내가 항상 생각하고 있던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다. 이 책의 주제라 할 수 있는 내용이 책의 후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정확히 279쪽부터 283쪽까지 주인공 이 대위와 신 목사의 대화 내용은 한마디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북한 빨갱이들에 의해 목사 12명이 총살당했고, 이 가운데 2명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 현장에 있었던 신 목사의 신은 없다는 자기 고백은 사실 꽤 충격적이었다. 절망에 빠진 백성에게 줄 수 있는 건 내세의 희망뿐이라는 그의 사명은 신은 없다는 절망감에서 출발한 일종의 자기 사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믿음은 무엇이고, ‘신은 존재하는 가라는 형이상학적 물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기독교는 오직 체험에 의해서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종교인 듯해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인 이 대위, 박 대위, 장 대령 그리고 신 목사를 비롯한 12명의 순교자들은 내가 볼 때 전부 기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 신자들처럼 보인다. 인간으로서 극한의 절망감을 보인 사람들은 이 대위나 신 목사처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지극히 보편적인 논리적 귀결이다. 체험이 없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 작품에서 이 대위는 신 목사에게 묻는다.당신과 이 땅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당신의 하느님은 어디 계십니까?” 신 목사는 바로 답하지 못한다. 그리고 끝내 내 고통을 구원해 줄 신을 만나지 못한다.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저 사람들에 대해 하느님은 그 어떤 징표도 보여주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그럴 것이다. 정금보다 더 단단한 믿음의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하느님이 예비하신 절망의 고난이라고. 욥의 고난은 그래서 소설 속에 자주 인용되나 보다. 하지만 무고한 수십 만 명의 전쟁 희생자들에 대해 하느님의 예비한 길은 도대체 무엇일까. 여기에 이르면 진짜 신 목사의 신은 없다는 자기 고백이 묵과할 수 없는 절망감으로 다가온다.



키에르케고르는 오래 전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죄이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그는 신 앞에 선 단독자였다. (욥도 단독자였다!) 체험 없이 신 앞에 설 수 없다면 나는 모든 신자가 절망을 겪을 때 신 목사가 한 고백과 같은 고백을 할 것이라 확신한다. 신은 없다고. 이 고백은 암암리에 대형 교회 목사들의 행태에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 듯하여 씁쓸하다. 적어도 지금 우리 사회의 목사들은 신 목사처럼 절망에 싸인 신도들에게 욥의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먹고 살 만해져서 그럴까. 교회의 목사들은 돈을 받고 교회를 사교의 장으로 내어 주고, 신도들은 자신들의 바라는 거래를 위해 교회를 이용할 뿐이다.



신이 부재하는 곳에 믿음이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일까?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 소설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 것은 작가가 이에 대해 답을 신 목사의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신을 찾아 헤매었소. 그러나 내가 찾아낸 것은 괴로움과 죽음, 냉혹한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뿐이었소. (중략) 날 좀 도와주시오. 내가 내 백성을, 불쌍하고 고통 받는 내 교인들을, 전쟁과 굶주림과 추위와 질병 그리고 삶의 피곤 앞에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시오. 고통이 그들의 희망과 믿음을 움켜쥐고는 그들을 절망의 바다로 떠내려 보내고 있소. 우린 그들에게 빛을 보여 주고 그들을 기다리는 영광과 환영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의 영원한 왕국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확신을 줘야 합니다.”(283)



신은 없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 신자들을 위해 천국의 확신을 주는 것. 그것이 비록 고통 받는 인간이 내린 확신에 찬 믿음이었지만, 이것이 바로 신이 부재한 때에 목사들이 가져야할 믿음이 아닐지.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부터 나온 이 신에 대한 거짓 확신. 나는 이걸 인간에 대한 실존적 믿음이라고 명명해 본다. 신이 부재한 곳에서 싹튼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평안을 위한 믿음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의 신 -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의 비참, 살육, 굶주린 백성들, 그리고 그 많은 전쟁이며 끔찍한 일들과는 애당초 아무 상관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280).”라는 이 대위의 말 때문이다. 죽음 너머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야 믿음은 비로소 인간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인 실존적 옷을 입을 수 있다.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아닌 이성적 인간이라면 누구나 신 목사와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 대위, 이 대위, 장 대령과 같은 이성적 인간은 애초에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신에 대한 믿음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는 부질없다. 하지만 신 목사는 인간이 처한 끊임없는 고통으로 인해 신을 부정한다. 그래서 신 목사는 이성적인 인간이다. ‘이성적 인간은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지언정 신을 사랑할 수는 없다. 신 목사가 그의 이상(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신 목사는 스피노자가 지향했던 믿음에 근접한 것 같다.



스피노자는 지독한 이성주의자였다. 스피노자가 개진한 모든 주장의 기반은 이성이었다. 스피노자의 사상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 자신이 추구하던 이성에 기반한 사상이 그의 삶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스피노자는 기독교적인 신으로부터 위안을 얻거나 윤리적인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방법만 달랐지 신 목사는 스피노자에 근접한 믿음을 가졌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스피노자는 신을 사랑했지만, 신 목사는 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도 그 자신의 이성을 실현하는 집념과 믿음을 보였다.



신 목사의 이 스피노자에 근접한 믿음, 신념 그리고 집념. 신이 없다고 선언한 이 가련한 목사가 보여주는 이 확고한 믿음. 나는 이 땅의 모든 신자와 목사들이 반드시 이 작품을 읽고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충분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없다는 확신 속에서도 불구하고 신 목사가 택한 삶의 태도는 순교자의 삶이었다. 이 대위의 서울행을 거부하면서 평양에 남아 지친 영혼들과 부상자들을 돌봤던 그의 인간적 삶은 순교자의 표상과 일치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의 타이틀 순교자는 빨갱이에 의해 총살당한 12명의 목사가 아니라 바로 신 목사를 향한 작가의 헌사로 읽혔다.



순교자적 삶. 모든 사명감을 가진 종교인들의 지향점이지 않을까. 비록 고통적인 삶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의 믿음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끝내 죽음에 이르는 삶.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기독교 소설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순교는 더더욱 아니다. 작가는 신이 부재함을 깨닫고 목사 자신의 신념을 위해 외형적인 순교자적 삶을 택한 목사의 삶이 과연 순교자로 판단할 수 있는지 독자에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강력하고도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작가의 이 물음에 위에서처럼 스피노자적 믿음에 근접한 순교자의 삶이라고 이미 화답했다.)



이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심대하다. 1950년의 소설 속 전쟁 상황과 현재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의 부재를 공유하고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1950년 평양의 열정적 신앙이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아프고 낮은 자들을 위로하는 교회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교회는 대형화 되었고 목사는 돈줄을 쥐고 성도들에게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신이 되었다. 교회는 법 위에 있으려고 하고 목사들은 성도들 위해 군림하며 세속의 정치에 빌붙어 더 많은 권력을 축적하려고 노력한다. 목사 세계에서는 성폭력과 성희롱이 일상화 된지 오래고, 대형 교회의 세습은 점점 규정화 되고 있다. 죽음 너머 신이 없다는 것을 멋지게 서로 증명하고 있는 목사들. 그들이 세상 속에서 외치는 믿음은 공허하며 그들의 설교는 우리들 삶의 실존적 피폐함을 전혀 위로할 수 없다.



우리는 위로 받고 싶어 한다. 경쟁이 갈수록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사실 우리에게 신이 존재 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교에 귀의하고 싶은 게 아니라 종교로부터 만이라도 위로 받고 싶어 신도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러면 적어도 교회에는 신 목사와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신이 없는 사회에서, 스피노자적 믿음을 소유한 목사가 우리를 위로할 때 그 위로는 실존적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성에 기반한 그의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 어찌 보면 우리가 종교에서 바라는 진정한 치유의 힘이지 않을까. 이 책은 신 없는이후의 사회에 믿음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멋진 책이었다.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부()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신 목사와 같은 목사를 우리 사회가 갖게 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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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0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너무 오랜만입니다!!^-^

겨울호랑이 2020-01-20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오랫만에 오셔서 반갑습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0-01-21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어요? ^^

hnine 2020-01-21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yamoo님.

Vita 2020-01-27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돌아오신 건가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도이 노부히로 감독, 이토 아츠시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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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치러졌다. 불수능이라고 아우성이지만 등급컷은 작년보다 더 오른단다. 언론에서도 고교 과정에 배우지 않은 이론들이 국어영역 비문학에 대거 출제됐다고 호들갑이다. 경제학에서 ‘오버슈팅 이론’이 출제되어 7년차 한국은행원도 6문제 중 2문제를 틀렸다고.

 

 

사실 수능에서 고교 과정을 벗어나는 수준의 지문들이 출제되어 온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학평이나 평가원에서 연중 몇 차례 실시하는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 역시 대개가 대학 학부 교양서나 교과서에서 출제되고 있다고 한다.

 

 

학원을 운영하는 한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역대 수능에서 수험생들을 소위 멘붕에 빠뜨리게 했던 지문들은 모두가 대학 학부 수준에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론들이라고. 그레고리력을 다룬 지문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출제된 지문 그리고 채권과 이자율의 관계를 다룬 지문들이 소위 역대급 난도를 자랑했다나 뭐라나.

 

 

어느 정도 어렵길래 ‘역대급’운운 하나해서 살펴보니, 말문이 막힐 정도였다. 이걸 정말 시간 내에 풀라는 문제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도 고교생 대부분은 고교 수업 과정 중에 들어보지도 못한 이론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리 대학수학 능력을 측정하는 적성시험일지라도 이건 해도 너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수능 만점자들이 복수로 나온다는 사실에 이르면 저절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올해도 여전히 만점자가 여럿 나오겠지. 신문에 보니, 가채점 결과 만점자가 9명에 이른다니, 열심히 공부한 일반 고교생들이 자괴감이 들만도 하겠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올해 수능에서도 어김없이 수험 무용담의 신화는 반복되겠지. ‘만년 꼴지가 1년 만에 명문대에 입성하다’, ‘학원과 과외 수업도 듣지 않고 만점을 받은 아무개’, ‘지체부자유로 당당히 일류대에 합격한 아무개’ 등등. 수능 성적표가 배부되는 날 이런 기사는 우리 모두가 심심찮게 보아온 언론의 헤드라인 뉴스다.

 

 

일본에서도 이런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나 보다. 포항 지진 여파로 수능이 일주일로 연기된 바로 그 시점에서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수능 시즌을 맞아 수험생을 응원한다는 취지로 케이블 TV 영화 채널에서 방영해 준 영화였다. 타이틀은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 전교 꼴찌의 문제 소녀가 약 1년 반 만에 명문 게이오대 정책학부에 합격한다는 내용의 영화다.

 

 

이게 실화라는 게 꽤 놀랍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것보다 더한 무용담을 접해 봤기에 내겐 좀 약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감상평을 찾아보면 본 사람들의 인생영화라는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수험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학교 담임 선생에게 ‘쓰레기’라고 불려지고, 저 쓰레기가 게이오대에 붙으면 내가 발가벗고 물구나무 서 있겠다는 약속을 반 학생들에게 공공연하게 할 정도면 소위 ‘구제불능’의 문제아란 소리다.

 

 

하지만 그거 아시는가? 문제아 중 일부는 천재라는 사실을. 문제아 중에 과학자나 불세출의 배우 또는 스포츠 스타가 탄생하는 걸 우리가 숱하게 목도했었다. 태도가 불량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쓰레기는 아닌 거다.

 

 

그래도 우리는 어느 정도 95%의 확률로 확신할 수 있다. 반 꼴등의 저 아이가 연대에 갈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이건 우리가 체험적으로 그리고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실이다. 왜? 중학교 수준의 영어나 수학도 안 되는 저 아이가 나보다 좋은 대학에 간다는 건 있을 수도 없으니까.

 

 

다시 영화 얘길 해 보자. <불량소녀>의 주인공 사야카(아리무라 카스미 역)는 놀기 좋아하는 4차원 고교 2년생. 초등학교 때 친구를 못 사귀어 왕따를 당한 경험으로 인해 중학교 이후 친구가 인생의 제1의 목표가 됐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친구로 대해 준 3명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게 인생의 낙. 성적은 꼴찌라도 매일이 행복한 소녀.

 

 

고교 2학년 여름방학. 이제 슬슬 대학을 정해야 하는 시기. 사야카는 어머니의 권유로 문제아들을 대학에 보내주는 학원에 등록한다. 거기서 사야카의 실력이 드러난다.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의 테스트를 모두 0점으로 돌파한다. 놀라운 건 모든 문제의 답을 채웠다는 거. 물론 오답으로.

 

 

근데 그 오답을 쓴 이유가 기발하다. strong의 뜻을 ‘이야기가 길다’로 알고, story가 long하다고 설명한다. 성덕태자를 불쌍하다고 하면서 뚱뚱한 여자라서 이런 이름을 지었다는 게 불쌍하다고(‘쇼토쿠’를 '세이토쿠타코'로 읽음. 일본어 한자 태(太)는 의미가 뚱뚱하다).

 

 

학원 선생 츠보타(이토 아츠시 역)는 이런 기상천외한 답을 말하는 사야카에게 ‘발상이 천재급’이라고 칭찬한다. 일본이 4개의 큰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모르고, 4방위 표시 기호도 모르는 이 ‘비리갸루’ 사야카에게 학원 선생은 가능성을 본다.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는 것으로 그 가능성을 가늠하고 사야카에게 장난반 진심반으로 게이오대를 추천한다.

 

멋진 남자가 많을 것 같다는 단순한 인상으로 게이오를 선택한 사야카는 이후 누구나 예상가능한 시나리오로 명문 게이오에 합격한다. 중간 중간 가족사에 대한 짠한 얘기가 나오긴 하는데, 이는 모두 아는 것처럼 성공 신화에 곧잘 등장하는 약방의 감초같은 야그다.

 

 

어쨌거나 비루갸루 사야카는 명문대생이 된다. 이 뻔한 무용담이 재밌냐고? 물론 난 기대를 하나도 하지 않고 우연히 봤다. 근데, 감독이 진짜 영화를 기막히게 연출했다. 뻔하디 뻔한 야그를 아주 재미있게 본 것이다. 그것도 2번씩이나 봤다. 이런 영화를 흡입력 있게 만들기는 좀처럼 쉽지 않은데, 도이 노부히로 감독은 매우 수완이 좋은 감독인 듯하다.

 

 

소재는 B급이지만 영화 자체는 무척 몰입해서 볼 수 있다. 근데, 이런 무용담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난 영화를 보고 낄낄거린 후에 이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 거다. 왜 우린 이런 무용담을 미덕으로 삼아 노오력을 강요받아야 하는 걸까? 과연 노력한다고 사야카 같은 학생이 탄생하기는 하는 걸까?

 

 

물론 앞에서 살짝 얘기했다시피 난 이 실화가 별루였다. 왜냐하면 고3시절 <아! 서울대학>이라는 대학합격 수기 책에 안호상이라는 인물의 무용담을 이미 봤기에 그렇다. 이 사람은 내가 여태껏 본 수험 무용담에 있어서 최고봉에 있는 두 명 중 한명이다. (다른 한 사람은 사법시험을 최단기간에 합격한 김선수; 300명 미만 뽑을 당시 김선수 씨는 18개월만에 합격했다)

 

 

이 사람은 학창 시절 내내 불량배였다.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성적은 전교 뒤에서 3등. 학력 수준은 초등수준. 고교 중퇴자가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알파벳부터 시작해서 검정고시를 통과해 학력고사에 이르기까지 안호상 씨가 보여준 무용담은 인간승리 그 자체였다.

 

 

갸루 사야카보다 안호상이 훨씬 대단한 것은 그가 모든 걸 혼자 해냈다는 데 있다. 어느 누구도 조언해주거나 공부를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사야카의 성공은 그녀의 성공을 응원해주는 가족과 츠보타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누구보다 사야카의 가능성을 알아본 츠보타 선생이 없었다면 단연코 사야카의 성공은 있을 수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한 것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런 도움 없이 스스로 모든 역경을 이긴 게 무용담으로써는 훨씬 가치가 높지 않을까. 그래서 사야카의 입시 성공을 담은 영화가 약간 별루였다. 츠보타가 없었다면 게이오 합격은 없었기에.

 

 

이를 뒤집어 말하면 이렇다.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알고 응원해주면, 낙오자가 되는 학생들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거. 이 영화의 방점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가능성만을 가지고서도 그 학생을 믿고 응원을 보내줄 수 있는 학교 문화가 절실하다는 말이다. 이게 공교육이 목표로 해야 하는 제1의 원칙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무용담이 회자되고 권할만한 덕목으로 통용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난 적어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회 구조 하에서는 끊임없이 경쟁을 이어 나가야 하는 삶을 강요받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는 채용 시험(공무원 공채 시험 포함)으로 승진 시험으로 그리고 자격증 시험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 시험들의 본질은 선발 인원 안에 내가 들어가야 성공이다. 남을 제칠 수 없다면 내가 실패하는 구조다. 모든 수험생을 단일한 시험으로 선발하는 방식은 응시자들을 등수로 줄을 세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능과 고시로 대변되는 지필시험이 공정할 수 있는 시험이긴 하지만 사회의 건전성 면에서 보면 권할만한 선발 제도는 아니다.

 

 

수험 무용담 뒤에 숨어 있는 주입식 교육의 획일화는 현대 사회가 탈피해야 하는 근대의 마지막 부산물이기에. 수많은 시간을 암기와 문제 풀이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살릴 수 있는 시험이 진정한 교육제도일 거다. 배우는 게 재미있고 내가 성장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시험, 개인에게 특화된 시험이 건전한 사회로 가는 교육의 시발점이자 목표일 것이다.

 

 

수험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지만, 가능성만을 보고 학생을 응원하는 사회는 이보다 나은 사회인 것만은 분명하다. <불량소녀>가 현 입시 시스템 자체에서 그나마 희망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츠보타와 같은 선생이 불량한 사야카와 같은 학생에게서도 가능성을 읽어 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는 획일화 된 시험 점수로 서열화하는 입시 제도의 한계와 희망을 동시에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우리 누구도 현행 수능 제도가 우리 개인의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교육과 입시는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단 번에 바꿀 수도 또 바뀌어 질 수도 없을 거다. 그 과도기적 모델이 필요한데, 이 영화가 그 지점을 충분히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획일화된 교육제도에서는 누구나 경쟁에 밀려 실패자로 전락할 수 있으니까. 실패자로 낙인찍지 말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여 그 학생을 응원해 주는 문화가 정착하면 좋을 듯하다.

 

 

수능이 끝났다. 시험을 잘 본 학생보다 망친 학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이들 수험생과 부모님들에게 이 영화를 함께 보길 추천드린다. 좋지 않은 교육 제도 속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일선 학교 선생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츠보타 선생이 될지 니시무라 선생(사야카의 학교 담임)이 될지 자신은 알 테니까~^^

 

 

수험 성공 무용담이 회자되는 사회보다는 학생 개개인의 가능성을 열열히 응원해 주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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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7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amoo님 그간 격조했어요^^ 반갑습니다

yamoo 2017-11-29 18:08   좋아요 0 | URL
쇼 님 반갑습니다. 제가 넘 게을러서욤..ㅎ 17년을 욜심히 마무리해야 겠습니다. 알라딘 서재에도 밀린 것들도 좀 쓰고..^^;;

stella.K 2017-11-2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제 개천에서 용 안 난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주 없지는 않나 보네요.
근데 야무님 글 읽으니 수능은 좀 미친 것 같습니다.
그런 문제가 나오면 3년 동안 죽어라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는 건지?
그래놓고 해마다 수능날 거의 비슷한 뉴스 멘트하잖아요. ㅉ

영화 개봉 때 못 본 것 같은데 저런 영화가 있었군요.

yamoo 2017-11-29 18:11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못 보셨다면, 한 번 보셔도 무방할 거에요..뻔한 소재를 참 흡입력 있게 연출했더라구요.

수능은 미친 시험이 맞아요. 적성시험을 표방했으면 적성시험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냥 학력고사와 적성시험의 어중간한 포지션으로 전락한거 같아요. 뭐, 자격고사 시험으로 바뀌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만..^^;;

cyrus 2017-11-2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경험에 따르면 학업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학업 성적이 좋은 사람들보다 사회 생활을 잘하고,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편이에요.

yamoo 2017-11-29 18:13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런 경향이 많은 거 같아요. 거기다가 즐겁게들 일하는 듯해요. 학업 성적이 좋다는 건, 암기를 잘한다는 건데, 암기를 요하지 않는 분야는 많거든요. 적성에 맞는 직업을 택하는 게 갑인 건 분명해 보입니다. 문제는 자기 적성이 뭔지 고교 졸업까지 잘 모른다는 것이죠..ㅎ
근데 정부는 고교학점 선택제를 실행한다니, 참으로 웃기는 노릇입니다.ㅎ

카스피 2017-11-30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량소녀가 실화이긴 한데 사야카가 합격한 게이오대가 우리가 익히아는 그 명문 게이오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yamoo 2017-12-07 20:46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카스피 님!^^

헐~ 그런가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명문 게이오가 아니라구요?! 영화에서는 명문 게이오라고 나와서요. 실화로 바탕으로 한 거라고...헐~ 아니라면 반전인데요!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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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에 나타난 인간관의 재검토 :

인간의 본성은 과연 악한가

 

 

 

들어가며

 

 

2000년 무렵, 나는 당시 일본 아니메에 빠져있었다. <신세기 에반겔리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회자되는 작품을 추천받았다. 추천작은 <무한의 리바이어스>. 26부작을 단 이틀에 다 해치워버렸다. 그리고 애니 리뷰 사이트에 ‘15소년 표류기의 우주버전’이라는 타이틀로 리뷰를 썼다. 얼마 안가 누군가의 댓글이 달렸는데, 이랬다.

 

 

“<15소년 표류기> 보다는 <파리대왕>에 가깝고, 타니구치 고로우 감독이 아마도 <파리대왕>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기획한 거 같다.”

 

 

그 즉시 <파리대왕>을 구해 읽어 보았다. 당시에는 청목사 본으로 읽었는데, 정말 <무한의 리바이어스>와 상당히 흡사해서 놀랐더랬다. 주로 애니와 소설의 인물 분석에 초점을 맞춰 본 기억이 있다. 애니가 소설과 다른 점이라면 소녀들이 약간 등장한다는 정도.

 

 

지난 주 월요일. 간만에 독서모임 카페를 방문했는데, 7월 2일 주제도서가 <파리대왕>(민음사, 2007)이었다. 이미 읽은 작품이었기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세세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읽을 겸 민음사 본을 펴들었다.

 

 

그때가 저녁 7시 무렵쯤이었는데, 다음날 잠들기 전까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번역이 안 좋아 투덜거리면서도, 몰입할 수밖에 없는 마력이 있었다. 세계문학을 이리도 재미있게 읽은 건, 페데리코 안다시의 <해부학자>이후 첨이었고, 민음사 시리즈로도 첨이었다.

 

 

그리고는 소담출판사 본과 문예출판사 본을 모두 구입하여 다시 비교해 보면서 읽었다. 역시 소문대로 문예본의 번역이 가장 좋았고, 소담본이 그냥 읽을 만한 수준. 민음사 본이 완전 최악이었다. <파리대왕>에 대한 번역 불만은 다음 기회에 페이퍼를 통해 들여다 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도합 3번을 읽으니,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하여 알라딘 리뷰를 싹 훑어보았다. 논문도 몇 편 읽어 보았다. 헌데 그 내용이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이성 vs 본능’, ‘소라, 안경, 짐승 등에 대한 상징성’, ‘랠프와 잭의 갈등’ 등의 주제가 ‘인간의 야만적 본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내가 리뷰를 쓴다고 해서 앞서 논의된 글들과 다를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리뷰쓰기를 포기했다. 헌데 토론에 참석하려고 보니,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이 와중에 리뷰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그 단초는 작가 골딩이 제시해 주었다. ‘악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골딩은 “악은 환경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다”고 봤다. 이 리뷰는 이에 대한 반론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핵전쟁이 발발한 시기에 한 무리의 아이를 태운 비행기가 바다 한 가운데의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만 4세에서 12세 사이의 소년들로, 랠프라는 아이가 대장이 되어 무리를 이끌지만, 잭이라는 아이는 이에 반발하여 랠프의 무리를 이탈한다. 이후 다수의 아이들을 자기편으로 모은 잭은 자기와는 생각이 다른 랠프의 무리를 하나씩 굴복시키고, 급기야 혼자만 남은 랠프를 죽이기 위해 섬의 숲을 태운다. 랠프가 잭의 무리에 의해 거의 죽게 되기 직전, 거대한 연기를 본 해군에 의해 아이들 모두가 구조된다. (더 자세한 줄거리는 ‘파리대왕’으로 검색만하면 쉽게 찾을 수 있기에,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괴물(짐승)과 파리대왕의 실체

 

 

이 작품에서 괴물(짐승)은 끊임없이 회자된다. 급기야 죽은 낙하산 병사를 괴물의 실체로 오인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잭은 랠프의 무리로부터 떨어져나가게 된다. 랠프보다 더 어린 꼬마들은 유령 꿈을 꾸고, 괴물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침묵하는 자연의 괴괴함에 이 괴물에 대한 소문은 아이들의 불안 심리를 가중시킨다.

 

 

이때마다 사이먼은 '괴물은 우리(사람) 자체가 아닐까' 라는 내적 독백에 가까운 말을 우물거린다. 그러다가 사이먼은 잭 일행이 멧돼지를 잡아 그 머리를 베어 꼬챙이에 꼽아 놓은 곳에 이른다. 돼지머리에 달라붙은 수많은 파리떼가 곧 파리대왕이었다. 파리대왕은 이를 응시하고 있는 사이먼에게 말을 건다.

 

 

"나 같은 짐승을 너희들이 사냥을 해서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 가소로운 일이야!"하고 그 돼지머리는 말하였다. 그러자 순간 숲과 흐릿하게 식별할 수 있는 장소들이 웃음소리를 흉내 내듯 하면서 메아리쳤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거야." 웃음소리가 다시 떨리며 메아리쳤다. (p214)

 

 

이처럼 작가는 파리대왕을 대신에 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나 같은 짐승'이란 인간 본성에 내재하고 있는 악이자 광기이다. 알려진 것처럼 이 소설의 모티프는 1858년에 발표된 밸런타인의 소설 <산호섬>이다. 이는 본문 p49에도 등장한다. <산호섬>은 밸런타인 당대의 낙천적인 시대상을 대변하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인간은 섬의 원주민들까지도 교화할 수 있는 선천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마디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거다.

 

 

헌데 <파리대왕>은 <산호섬>과 거기에 나타나 있는 낙천적 인간관을 완전히 뒤집는다. 이 완벽한 원초적 상태에서 사회에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보여주는 파괴적 행위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성악설을 뒷받침한다. 골딩에 따르면 <파리대왕>의 주제를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의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했는데, 파리대왕을 대신해 사이먼에게 속삭이고 있는 위의 인용구가 이를 집약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하겠다.

 

 

 

 

과연 인간은 악한 존재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통적으로 이 작품은 인간 본성에 대한 주제로 많이 읽혀 왔다. 랠프는 이성을 기반으로 한 인간 본성의 선한 쪽, 잭은 본능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악한 본성 쪽으로 정리하여, 야만적인 본능이 선한 본성을 누른다는 도식으로 많이 논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몇 편의 논문 제목만 검색해도 이를 알 수 있을 정도.

 

골딩 자신도 위에서 살펴봤다시피 이 작품을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나내려는' 의도에서 작품을 구상했다. 골딩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골딩은 인간 개개인이 악하다고 본 듯하다. 그래서 밸런타인의 <산호섬>을 패러디하여(<산호섬>의 주인공도 랠프와 잭이다) 그와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소설을 세상에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매우 감명 깊게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책의 주제가 '성악설에 기반한 작품'이라는 거(악은 인간의 내면에 있다)에 반론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 본성에 대한 논쟁은 성선설과 성악설로 양분된다. 전자는 맹자로, 후자는 순자로 대변된다. 문제는 이 도식이 칼로 무베듯 양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건 가능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아기는 선악을 알지 못한다. 이 아기는 자라면서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결정된 것은 없고, 환경에 따른 이 아이의 반응으로 선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악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이도 반반씩 섞여 있는 존재로 성장하게 되지, 완벽히 악한 인간이란 없고, 완벽히 선한 인간도 없다.

 

 

대다수의 논문과 리뷰들의 작품 분석에 따르면, 랠프는 이성에 기반한 선한 쪽으로, 잭은 본능에 기반한 악한 쪽으로 양분한다.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무인도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폭력과 광기에 휩싸여 악한 인간으로 타락한다. 선한 본성은 약해지거나 악에 종속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본성은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연 이런 단순한 이분법적 도식으로 이 소설의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랠프가 이성을 대변한다고 보지도 않고, 잭이 본능을 대변한다고 파악되지도 않는다. 랠프와 잭 모두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이성과 본능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인물로 파악된다. 단지 랠프가 규칙과 질서를 우선시한 반면 잭은 직관을 우선시했다는 차이밖에 없다. 악한 것은 없다. 극한 상황적 두려움에 대한 인간의 대응 방식의 차이이지, 악이나 선이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그대로 발현된다는 논리는 상황 자체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 귀결이다.

 

 

물론 이 섬에서는 두 차례의 살인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멧돼지 사냥이 인간 사냥으로 확대된 모습처럼 보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광기와 본능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광기는 본능이 아니다(물론 이에 대한 논증도 필요하지만). 본능을 넘어선 도착에 가깝다. 그러면 광기는 악인가? 악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에 이르면, 처음의 단순한 도식이었던 ‘잭은 악, 랠프는 선’을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나오며

 

 

<파리대왕>을 다시 읽으면서, 한 가지 새로운 변화(전에는 랠프가 무척 불쌍하다고 생각)는 내가 잭에게 무척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잭은 매우 직관적 사고를 하는 타입이다. 거기에 권력욕도 있다. 자신의 주도로 멧돼지를 사냥하여 그 고기를 모두에게 제공하고 싶다는 열망을 간직하고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는 잭의 리더십이 절차를 중시하는 랠프의 리더십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무인도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는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알 수 없어, 순간순간 위기에 맞게 임기응변을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하여 살상과 광기에 휩싸이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상황에 대응하는 잭의 방식은 동물적 감각을 중시하는 현대 기업인들과 매우 비슷한 면이 많다. 작금의 시대는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이기에, 직관에 기반한 삶의 방식이 무척 요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광기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랠프의 방식보다 훨씬 더 나은 방식일 수 있다. 무엇보다 잭은 현재를 즐기는 재미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까지 하니까! (잭이 지향하는 삶의 방식은 광기어린 행위에 가려져서 그렇지 무척 긍정적인 요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잭이 광기에 휩쓸려 돼지를 죽이고 랠프까지 죽이려고 한 것은 외부의 두려운 환경을 극복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본래부터 갖고 있는 악한 본성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상황의 산물이지 본성적 존재가 결코 아님을 상개해 보라!) 그런고로 이 소설의 인물 잭은 재평가 되어야만 하고, 인간의 악한 본성이 인간 내면에서 발현한다는 식의 성악설적 입장 역시 재고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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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7-07-0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인 것 같습니다. 획일적인 사고는 위험한듯 보이네요.

yamoo 2017-07-07 22:26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할 거리를 아주 많이 던져주는 작품인 것은 분명합니다. 정치학 서적으로도 읽을 수 있고, 모험 소설로도 읽을 수 있으며,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우화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요.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열린 작품 같아 좋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대왕 진짜 기똥차게 재미있었습니다. 엄두 두 척 !

yamoo 2017-07-07 22:29   좋아요 0 | URL
진짜 기똥차게 재밌더라구요. 생각할 거리두 많고...많이 알려진 문학 작품 치고는 번역된 판이 별로 없어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서울대 동서고전 200권에 빠져 있는지라, 각종 고전을 소개하는 해제집에 상당수 책이 파리대왕을 언급조차 안하더라구요. 고전해제집 10에 8은 파리대왕이 없었습니다~ 개츠비, 호밀밭 등은 무자게 맘이 소개되고 번역판들이 넘치는데 말이죠...좀 요상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ㅎ

곰곰생각하는발 2017-07-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오늘 읽은 글 가운데 반팔 와이셔츠 패션은 똥이다, 복식 문화에 반팔 와이셔츠가 없으며, 최악의 패션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패션 칼럼리스트 글을 읽었는데 재미있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원래 양복을 입으려면 한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를 입는다고 하네요. 그게 비즈니스 예의라고 말이죠..

yamoo 2017-07-07 22:42   좋아요 0 | URL
음....그니깐 유럽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런 경향이 강한 듯합니다. 남성 패션이 발달한 유럽은 대체로 해양성 기후거나 지중해성 기후가 강해 우리나라처럼 덥고 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네들은 긴팔 셔츠를 여름에 접어서 입죠. 그런게 관행으로 굳어서 반팔 셔츠는 에티켓에 어긋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헌데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죠. 우리나라 더위는 동남아의 여름만큼 덥고 습합니다.35도를 넘는데, 습도가 높으면 긴팔 셔츠를 입는 게 완전 곤욕이죠. 거기에 재킷을 걸친다? 더위에 약산 사람들은 거이 미쳐버릴 거에요. 더위에 강한 사람도 땀으로 범벅이가 될테고...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반팔셔츠를 입지 않고 여름을 나긴 매우 힘들겁니다. 패션은 그 나라의 문화적 환경을 도외시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맞게 입어야죠. 이런 직장인들의 애환을 덜고자 오래 전에 엑스팀에서 ‘패션정글‘이라는 가이드 프로도 만든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여름에 반팔 셔츠, 입을 수 있습니다! 단, 타이는 매지 않는 게 좋아요. 타이를 매고 입으려면 반드시 안감이 없는 얇은 여름용 재킷을 입는 게 좋습니다. 소위 남방이라고 부르는 얇은 소재로 나온 재킷이 있는데, 그런 걸 입으면 되죠.
말씀하신 그 패션 칼럼리스트가 말하는 최악의 패션이라는 건 타이를 맨 상태에서 반팔 셔츠만 입고 돌아다닌 케이스인거 같습니다. 타이를 매지 않으면야 그리 꼴풀견은 아니고, 봐줄 만한 정도입니다.

아, 근데....와이셔츠라는 단어 대신 그냥 셔츠 또는 드레스 셔츠를 애용해 주세요. 패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와이셔츠라는 단어에 경기를 일으키는 듯합니다..ㅎㅎ

oren 2017-07-06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읽고 제가 독후감을 쓴 날이 1984.9.21.(금)이었네요. 지금 다시 그걸 읽어 봐도 도대체 무슨 소린지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데, 어쨌든 장황하게 소설 내용을 잔뜩 분석해 놓은 걸 보면(무려 11쪽!) 꽤나 감명깊게 읽은 책이었음은 분명한 듯합니다. 제 독후감의 마지막 구절이 자못 거창해서 조금 우습기도 하구요. 언제 기회가 되면 yamoo 님의 독후감을 염두에 두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봐야겠습니다.
* * *
…… 언젠가는 닥쳐올 우주 시대가 벌써 1954년에 한 예리한 작가에 의해 파헤쳐져 있다. 인간의 예지는 놀랄 만하다. 한 위대한 작품을 대할 때 보통의 사람들은 작가가 의도하고 추구하는 목적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냥 주마간산격으로 보고 만다. 그러나 예지의 스펙트럼을 통해 보면 무수한 언어의 이합집산들의 자태가 얼마나 조화롭고 질서정연하고 창조적인 현란한 파노라마인지 알게 될 것이다.(섬 전체가 타버리는 걸 ‘지구의 몰락‘으로, 사이먼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으로, 해군장교의 등장을 ‘우주인의 출현‘으로 보고 이런 글을 썼던 듯해요...)

yamoo 2017-07-07 22:47   좋아요 1 | URL
우와! 오렌 님은 아주 젊은 시절부터 세계문학을 탐독하셨었군요! 책을 아주 좋아하셨고 많이 읽으신 듯합니다. 좋은 책으로만요~ㅎ

그 시절 파리대왕을 읽고 쓰신 내용....엄청나네요! 젊은 시절 책을 읽고 그런 정도로 생각을 펼칠 수 있다는 거....아무나 하지 못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감수성과 독서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절대 저런 생각은 나올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오렌 님의 과겅 얘기가 참으로 놀랍고 흥미롭네요. 지금 다시 이 작품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무척 궁금합니다.다시 읽을시면 굉장한 독후감이 나올 듯합니다!

transient-guest 2017-07-07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전까지 이 작품은 15소년 표류기의 어른 버전정도로 생각했어요. 근데 SF가이드 총서를 보고서 SF소설로 분류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읽은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다시 봐야할 것 같네요. 근데 갖고 있는건 민음사 본...-_-:

yamoo 2017-07-07 22:50   좋아요 1 | URL
충분히 sf소설로도 분류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15소년표류기 정도로 생각했다가 오지게 뒤통수 맞았습니다.ㅎㅎ 특히 결말 부분이 후두부를 강타했습니다. 여러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게 이 책의 장점인 듯해요. 사람마다 주안점을 두는 곳이 달라 토론을 하면 매우 재밌습니다. 다시 읽으시면 다른 많은 것을 덤으로 얻으실 수 있을 거랴 사료됩니다!ㅎ

stella.K 2017-07-07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왓, 좋은 리븁니다.
청소년 시절 도전했다 포기했는데, 보려면 문예출판사 걸로 봐야겠군요.
전 지금까지 영화만 두 번 봤는데 영화도 좋더라구요.
마지막 엔딩 장면이 되게 인상 깊었는데...
랠픈가? 막 쫓기다 숲을 벗어났는데 어떤 어떤 아저씨가 그러잖아요,
너희들 여기서 뭐하냐고. 그때 이야기의 마법에서 깨어나기도 하죠.

저도 잭과 랠프를 보면서 인간의 야만성과 문화성 또는
권력욕과 이타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골딩이 뛰어난 건, 그걸 성인으로 상정하지 않고 아이들에게서 보여줬다는 거죠.
놀이라는 형태로. 사실 아이는 무조건 착할 거란 생각을 하잖아요. 크면서 악해지고.이걸 여지없이 깨줬다는 것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훌륭한 이야기도 출판을 못해 애를 먹었다고 하더군요.

인간은 본성이 아닌 상황의 산물이라!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yamoo 2017-07-07 22:55   좋아요 1 | URL
저는 책을 보고나서, 무인도의 정경이 너무 궁금해서 영화를 찾아봤습니다. 근데 저는 영화가 책보다 무지 재미없더라구요. 설정 자체가 많이 다르고 플롯이 뚝뚝 끊이는 느낌이라 겨우겨우 봤네요.

인간은 상황의 산물이라 생각해서 그래요. 인간이 처한 상황을 제거하고 인간의 본성을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인거 같아요. 외부 상황과 단절된 인간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 지 의문입니다.

혹시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문예본으로 꼭 읽독해보시길 강추드립니다. 하루 이틀이면 충분히 다 읽지 않을까 합니다. 무지 재밌거든요~ㅎ

cyrus 2017-07-07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한의 리바이어스>, 한 번 봐야겠군요. 책도 그렇고 만화 역시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요. ^^

yamoo 2017-07-07 22:57   좋아요 1 | URL
꼭 한 번 보시길 강추드립니다. 네, 이번 여름에 이 작품을 떼는 것으로...^^;;

수다맨 2017-07-10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본 번역은 다시 들여다보아도 한숨만 나오더군요. 윌리엄 골딩의 문체가 설혹 의고체擬古體에 가까울지라도 한국인의 눈높이에 어느 정도는 맞게끔 번역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대왕˝보다는 훨씬 낫기는 하지만 유종호의 또 다른 번역본인 ˝제인 에어˝도 한자투나 예스러운 말이 많아서 보기가 좀 그렇더군요.

yamoo 2017-07-10 20:04   좋아요 2 | URL
처음에 책을 펼처서 읽어 가는데, 정말 환상적인 줄거리가 아니면 읽기 힙들었을 거예요. 앞부분 읽을 때 그냥 책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 <제인에어> 번역본도 악명이 높더라구요~
이제 유종호가 번역한 작품들은 기피해야 겠습니다~ㅎ

한국인의 눈높이에 맞게끔 번역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참으로 드분 거 같습니다. 명작들이 한국어 번역본으로 태어나면 망작이 되는 듯합니다.

행운과 행복 2017-07-22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만 번역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아니군요ㅎㅎ
바위를 굴려 떨어뜨려서 돼지를 죽인건 로저니까..만약 그러한 일이 없었더라면 혹은 로저라는 인물이 없었더라면, 잭이 랠프를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싶네요..실지로 돼지가 죽기 전에, 잭과 랠프가 창으로 싸울 때는 칼싸움을 하는 것처럼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니까요..
정말 무서운건 로저가 아닐까 싶네요

yamoo 2017-09-16 14:47   좋아요 2 | URL
네, 아마 민음사판을 읽으시는 모든 분드이 직간접적으로 느기는 불만이 아닐가 합니다만^^

로저...그쵸 뇌가 없는 행동대장...가장 무서운 존재라 아니랄 수 없어요^^
 
교사와 책 미래의 힘 - 내일의 교사를 위한 오늘의 독서백편
박인기.우한용 지음 / 솔출판사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책에 관한 책을 줄창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 종지부는 아마도 다치바나 다카시의 저작들 이었을 거다.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의 끝판왕을 만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책에 관한 책을 소개한 책들은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대부분의 책들이 다카시의 책에 비해 지루하고, 어느 순간 저자들이 소개해 주는 책들이 익숙한 책이 되었기에 그렇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에 관한 책들’은 거의가 저자의 ‘독서에세이’나 리뷰집 또는 해제집의 수준을 넘는 게 별로 없어 보이기에. 다 거기서 거긴 것처럼 보인다. 대개가 고전류의 해제집 아니면 리뷰집 성격이 짙은 책들이다. 저자의 쌈박하고 진솔한 독후감을 만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책만 해도 30여 권이 넘는데, 대개가 비슷비슷하다.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휴머니스트, 2006),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고전의 향연>(한겨레, 2007) 등은 해제집 성격이 강한 책들이다. 그나마 <책탐>(나무수, 2009), <탐독>(아고라, 2016),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 등이 그나마 심도 있는 독서편력기 쯤 된다.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지와사랑, 2011) 정도면 아주 밀도 있는 리뷰집이랄 수 있다.

 

 

 

 

 

 

헌데 이런 책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아주 유명한 책들 소개나 리뷰가 대다수라는 점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의 형제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리나> 등. 고전류가 대부분이다. 물론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한국출판마케팅, 2011)와 같은 책에는 우리나라 작가들과 지명도가 조금 떨어지는 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스무살을 울린 책>(작가정신, 2002)과 같은 유명인의 진솔한 글은 만나 볼 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이젤 워버턴의 <한 권으로 읽는 철학의 고전 27>과 같은 책을 좋아하지만, 좋은 감상문을 모은 책은 나름의 읽는 가치가 있다.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는 책들을 어떤 이는 아주 감명 깊게 읽었고, 그 책이 그의 삶 속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보는 것은 기대 이상의 뭔가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책을 다시 꺼내어 읽어 보게 한다.

 

 

 

며칠 전, 책을 소개하는 책을 한 권 읽었다. 사실 이 책은 찾아서 읽은 책이 아니다. 도서관 신간 코너에 하도 자주 눈에 밟혀 빌려 읽게 된 책이다. <교사와 책>(솔, 2009)은 ‘내일의 교사를 위한 오늘의 독서백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책 배판도 대학 교재마냥 크고 멋대가리 없는 표지에 읽고 싶은 마음이 그리 드는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몇 권(특히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자게서)에 대한 교수들의 진지한 리뷰를 보면서 읽을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빌린 다음날 다 해치워버렸다. 이 책은 교사들을 위해 쓴 책 안내서인데, 집필자들이 모두 현직의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이다. 모두 익히 아는 책들이지만 교육학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해석해 내는 리뷰들은 소개된 책들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실 여기 소개되어 있는 책 가운데 <딥스>, <만행>,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습관의 심리학>, <설득의 심리학> 등은 명저 산책이나 명저 해제집에 좀처럼 보기 드문 책들이다. <딥스>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계서 부류에 속하는 책들이기도 하기에. 더군다나 알라딘 회원 중고책 가격으로는 거의 최하가격에 책정된 책들이다. 그냥 눈에 밟히는, 인기는 좀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그런 책들로 전락한 부류.

 

 

 

 

헌데, 교수들의 글을 통해 소개되는 이 밋밋한(?) 책들은 교육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책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군!’하는 놀라움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는데, 이 책들에 대한 리뷰를 읽으면서 드는 단 하나의 생각이었다. 특히 <만행>이 백미였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정작 손님인 나는 이 땅을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 땅에 너무 익숙해져서 싫증을 내고 폄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걸핏하면 그들은 ‘한국은 더 이상 안 돼’, ‘한국은 가능성이 없어’ 하는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아니 이 한국이란 나라가 얼마나 위대한 나라인데, 그리고 지금껏 그들이 흘려온 피와 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데, 그것을 그렇게 한꺼번에 헐값에 도매금으로 평가절하 할 수 있을까.(p58)”

 

 

현각의 <만행>(열림원, 1999)에서 이 책의 리뷰자 박찬구 교수(서울대 윤리교육)가 인용한 부분이다. 그리고 박 교수는 “교육은 진리 추구의 보편성에 헌신하는 일이다. 진리추구 자체가 교육적 속성을 지닌다. 교육을 모색하는 우리는 진리 추구의 역정에 서 있는 것이다. 다만 깨닫지 못할 뿐이다. (p59)"라고 마무리한다.

 

 

사실 <만행>은 출간된 1-2년간 에세이 베스트 목록 10위 안에 드는 인기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출간된 지 오래 지나자 베스트셀러들의 최후처럼 헌책방에서도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이미 수명이 다 했다고 여겨지는 책이다. 읽은 사람들은 다 읽었으니. 하지만 박찬구 교수에 의해 새롭게 소개되는 <만행>은 교육학적으로 읽어 봄직한 책이었다. 고교 <윤리와 사상> 교과서에도 ‘세계 윤리’단원에 현각의 이 책이 인용되어 있다지 않는가. 리뷰어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나게 하는 리뷰라 아니할 수 없다.

 

 

<현대의 과학철학>(서광사, 1990) 역시 이 책의 리뷰를 통해서 가치를 새롭게 되새겨 볼 수 있었다. 사실 노석구 교수(경인교육대 과학교육)가 쓴 이 책의 리뷰는 내가 쓰고 싶었던 리뷰였다. 오래 전부터 차머스의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쌈박하게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과학철학 분야를 이 책처럼 알기 쉽게, 그것도 전문가가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내용으로 정리하기에는 보통 힘든 게 아니기에.

 

 

노 교수는 이 책의 핵심을 아주 간결하게 잘 정리하면서, 책의 핵심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 주고 있다.

 

 “여기까지만 읽더라도(귀납주의에 대한 설명과 비판) 독자는 아마 현대사회가 맹목적으로 또는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확정짓는 ‘과학적’이란 도대체 어떤 지식이고 어떤 방법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밀려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앨런 차머스는 ‘과학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장려하는 방식으로 이 책을 서술하고 있다. (p152)"

 

 

우리가 인문서나 과학서 또는 칼럼이나 여타 잡다한 글을 읽을 때 ‘과학적’ 또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말을 수없이 접해 왔을 거다. 그런데 이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을 듯하다.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봐야 할 개념이다. 차머스의 이 책은 이 고민에 대한 답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과학적’이라는 말의 오용 여부를 가릴 수 있는 식견이 생긴다.

 

 

물론 과학철학이라는 학문 분과가 쉬운 분야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의 책은 읽는 사람만 읽는다. 하지만 “저자는 풍부하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독자가 과학철학의 핵심 개념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도록 이끌어 주며 흥미를 잃지 않도록 격려해 준다. 귀납주의부터 반증주의, 쿤의 패러다임을 거쳐 합리주의와 상대주의, 객관주의, 파이어벤트의 아나키즘적 인식론 그리고 마지막 비대표적 실재론까지를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충분히 도전해 볼만한 책이다(p153)"

 

 

노 교수의 리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이 교사들을 위한 책이기에 차머스의 서문에서 교육학적 가치를 이끌어 낸다.

 

“차머스는 이 책의 목적이 ‘교육적인 것에 있다’고 서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중략)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교사들은 이 책을 통해 어떤 교육적 전망을 가질 수 있을까. 특정 과학지식을 전달하거나 무비판적으로 확산시키는 대열에 편승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의심과 탐구의 자세를 심어주는 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미래의 교육 리더들이 학생들이 과학탐구를 지도함에 있어 학생들로 하여금 ‘혼란에서 출발하여 고양된 혼란’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 격려하는 데에 소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p153)"

 

 

물론 노 교수의 결론 부분이 원론적인 느낌이 들게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을 교육학적 가치를 지닌 책으로 소개하는 글은 노 교수의 이 리뷰에서 처음 본다. 나는 이 시도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의 독자는 넓어질수록 좋으니까. 과학철학 입문서를 교육학도가 읽고 거기서 교육적 가치를 이끌어 내는 것은 후학들이 몫일 것이다. 그 단초를 잘 제공해 주는 것이 책 읽는 기성세대들의 일이 아닐까.

 

 

이 책에 수록된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사이언스북스, 2000), <습관의 심리학>(갤리온, 2007), <설득의 심리학>(21세기북스, 2005), <창의성의 즐거움>(북로드, 2003) 등은 명저의 반열에 드는 책이 아니다. 베스트셀러류에 가깝다. 하지만 교수들이 여기서 건져 올리는 교육학적 가치는 경청할만하다. 리뷰로써 교육학도에게까지 가치 있는 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순전히 리뷰어의 역량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책에는 명저라고 회자되는 유명 책들도 많이 소개돼 있다.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 박은식의 <한국통사>,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 한스 요아킴 슈퇴르니히의 <세계철학사> 등.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이들 명저 리뷰에서도 잘 드러난다. 전혀 교육학과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책에서도 리뷰어들은 교육적 가치를 훌륭하게 잘 건져 올리고 있으니까.

 

 

여러 교수들이 전공별로 자신만의 책을 추천해서인지 리뷰가 간결하면서도 밀도 있는 편이다. 한 책의 리뷰 당 분량이 4쪽에서 5쪽 정도이지만 책의 핵심을 잘 짚고, 이로부터 교육학적 가치를 잘 도출해 내고 있다. 쉽고 명료한 진술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읽은 리뷰집 중 리뷰어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 책이다. 천편일률적인 책 소개나 리뷰집에 싫증이 났던 분이라면 일독할 것을 추천드린다. 물론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금상첨화랄 수 있겠다.

 

 

 

 

[덧]

1. 경청할만한 교육학적 가치가 다루는 모든 책에서 훌륭하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리뷰자에 따라서 다소 억지스러운 논리도 보이고 원론적인 내용도 보인다. 여러 필진들이 모여 집필된 책이기에 개인차가 많이 나는 것이 이런 류의 책들이 가진 맹점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상당히 괜찮은 편이고, 교육학적 목적에서 책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시도 자체가 참신하여, 좋은 리뷰를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일독했으면 하는 책이다.

2. 교수들의 내공을 느껴볼 수 있는 리뷰가 꽤 많다. 주례사 리뷰가 거의 없어 리뷰 읽는 맛이 그만이다~ (몇 편이 있긴 한데, 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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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6-11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오늘의 당선작으로 적극 밀겠습니다..

yamoo 2017-06-11 22:46   좋아요 0 | URL
곰발 님이 밀면 안된다믄서요~~~ㅋㅋ

어쨌거나 감사합니다요~~~ㅎ

cyrus 2017-06-12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그런 책을 색다른 관점으로 소개한 리뷰를 좋아합니다. 저도 그런 리뷰를 쓰고 싶습니다. ^^

yamoo 2017-06-13 20: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