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내가 들이마시는 시대의 공기는 몹시 탁해졌고 또 희박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편,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을 정말로 좌절하게 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어느 다른 시대의, 혹은 어느 다른 나라의 어설픈 복사본이거나 덜떨어진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그저 혼란스럽고 바보 같을 것임이 자명해 보인다. 스페인 국경의 음독자살 같은 멋진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처럼 죽거나, 혹은 개같이 살아남거나.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처한 가장 큰 곤경이다. 절망조차 우습다는 것. 그것은 지금 여기 일말의 인간적 존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김사과, <불가능한 비극>, 한겨레 2014/1/19
어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빵가게 님의 서재 글에서 본 김사과 작가의 글이다. 처음 볼 때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잘 드러낸 글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글이었다. 곰곰 되씹어 보니 막 화가 나는 거다. 왜 그런지 그 이유나 밝혀 보고자 한다.
그 이전에, 나는 김사과가 누군인지 전혀 몰랐다. 한국 소설을 안 읽은 지, 약 10여 년이 돼간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문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
보니 꽤 인지도 있는 작가 같다. 데뷔한지 10년이나 흘렀다는데, 난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편혜영이나 장강명 정도는 아는데 말이다. --;;
요즘 김사과 작가의 에세이집도 핫 한가 보다. 알라딘 서재에서 종종 출몰하는 걸 보면. 헌데 유명 작가 타이틀을 빼고 보면, 저 위의 글은 네이트나 다음 뉴스의 댓글만도 못하다는 인상이 짙다. 비판적 논조가 알맹이 없는 이미지의 수사로만 채워져 있기에 그렇다.
작가가 말한 글의 논조를 차근히 따라가면서 이 글이 왜 허무맹랑한 헛소리인지 비판해 보도록 하겠다.
글의 전반부가 좀 심하다. 김 작가는 말한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라고. 이것이 작가가 ‘들이마시는 시대의 공기가 몹시 탁해졌고, 또 희박해졌다’는 근거다.
‘사람들이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게 시대의 공기가 탁해진 것이가? 항상 현상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살아야하는 이유라도 있어야 된단 말이가?
또 ‘사람들이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는 게 그리도 혼탁한 시대의 표상인가? 도대체 미래를 왜 기다리는가? 메시아의 재림으로 휴거를 바란다면 모르겠다. 이건 정말 개소리같다.
사람은 현재를 사는 동물이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고, 결코 알 수 없다. 내가 사는 순간 순간이 미래를 결정할 뿐이다.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 현재를 향유하면서 살 수 있다.
결정된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무슨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김 작가의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은 이를 결정적으로 드러내 준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는, 작가가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
되고 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
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작가가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독자를 바보로 아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이건 김 작가가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돈이 자본주의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은 언제고 터질 수 있는 뇌관을 안고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스 사태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고기가 물을 보지 못하듯이.
이런 상황이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가 현실감각이 없다는 걸 나타내주는 지표가 아닐까. 현실을 비판하는 글로는 함량미달인 듯하다.
가장 심각한 내용은 뒤에 나온다.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면 나는 절망스럽지 않다는 거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시대의 괴로움’이 어떻게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귀신 싯나락 까먹는 소리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젊은 층이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란 이런 것일 거다. 학자금 대출 받아 학교를 다니고, 대출 이자를 상환하기 위해 학업보다는 아르바이트 전선에서 상환금을 벌어야 한다. 학점은 좋을 리 없고, 인턴 자리조차 잡기 힘들다.
쪽방 고시원에서 4-5년을 살고, 어렵게 졸업해도 실업자 신세가 될 뿐이다. 사랑과 연애는 사치일 뿐이고, 오로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임시직을 전전해야 한다. 오포를 지나 칠포 시대. 그냥 괴롭고 힘든 시대일 뿐이다.
근데, 이 생활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라고? 뭐, 스스로 자기 삶을 정리한다면야 ‘일급의 비극’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불행한 상황이 ‘감동적인’과 ‘우아한’이라는 형용이 가당키나 하냔 말이다. ‘감동’과 ‘우아’는 이런 상황에 쓰라고 있는 단어가 아니다.
모순 형용을 아무데나 갖다 붙이면 그것이 문체의 미학인가? 삶을 제대로 담을 수 없는 문장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괴롭고 팍팍한 일상에 눌린 시대의 삶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라니 정말 조소를 금할 수 없다.
일발 물러나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라고 해도 그렇다.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전제되어야 할 듯하다.
장마로 물이 불어 한 아이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이를 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다. 둘 모두 허우적거리는 걸 보고, 참다못한 다른 행인이 뛰어든다. 모두 살려달라고 외친다.
이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는 김 작가. 자기는 뛰어들어 구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뛰어들면 죽을 확률이 90% 이상이다) 어쩌면 좋냐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리고 쓴다.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라고. 자신은 안전하니까.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작가가 이게 아니라는 거다. 저런 상황은 감수할 수 있는데, 가장 절망스러운 것이 삼류 막장 드라마 같은 시대의 괴로움이란다. 막장 드라마가 뭔가? ‘콩가루 집안’, ‘불륜’ 뭐 이런 걸 전면에 내놓는 드라마 아닌가.
소위 ‘삼류 막장’ 드라마의 결말은 뻔하다. 대체로 권선징악이다. 드라마 내내 비윤리적이고 속물적인 악의 화신이 승승장구하다가 결말에 가서 착하고 바보같은 주인공에게 모든 것을 잃는 다는 그런 조악한 내용이다. 중요한 건 결말이 해피엔딩이라는 거. 다시 김 작가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
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그저 혼란스럽고 바보 같을 것임이 자명해 보인다.
그러니까 김 작가가 ‘삼류 막장 드라마’를 언급한 것은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그저 혼란스럽고 바보같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막장 드라마가 혼란스럽고 바보같은 이유는 드라마 작가의 의도적 대립에 있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악이 승승장구하도록 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착한 주인공의 느낌, 즉 ‘혼란스럽고 바보같다’는 느낌을 강요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결말의 해피엔딩이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니까. 혼란과 바보 같음은 결말을 예비하기 위한 전제(前提)밖에 되지 않는다.
현실의 괴로움은 결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불안’이 현 시대적 괴로움의 표상이다. 우리가 도착할 결말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이자 ‘자본주의 시스템의 불안’이지, 막장 드라마의 마지막회가 전하는 해피엔딩이 전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정말 어처구니없는 논증이 등장하는데, 위 주장의 근거이다.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
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을 정말로 좌절하게 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보다
는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는 것이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이 텅 비어 있기 때문이라니. 고통의 내용이 텅 비어 있어 사람들이 좌절한다? 그냥 소설을 쓰는 게 낫겠다. 아니 그냥 시를 쓰시라 권해드린다.
서민들을 좌절로 몰아넣는 것은 자본가가 모든 잉여가치를 독점하기 때문이다. 임대료의 지속적인 상승, 노동의 경직성과 연간 2000시간이 넘는 노동 강도 그리고 형편없는 교육 경쟁력. 이런 지표들은 새로운 계급사회를 고착화하고 있는 증거들이다. 이로부터 새로운 ‘자본의 노예층’이 탄생하고 있다.
예전에 한국 경제를 지지했던 중상층이 서민층으로 떨어지고 이제는 상류 자본가를 위한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이 진행 상황이 고통인 거다. 고통의 내용이 텅 비었다? 이 무슨 개가 짓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스페인 국경의 음독자살 같은 멋진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개처럼 죽거나
, 혹은 개같이 살아남거나.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어
쩌면 이게 우리가 처한 가장 큰 곤경이다. 절망조차 우습다는 것. 그것은 지금
기 일말의 인간적 존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
아, 정말 안타깝다. 이 작가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어떤 환상같은 걸 갖고 사나보다. 스페인 국경의 음독자살이 ‘멋진 일’이란다. 사실 스페인 국경에서 왜 음독자살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사연은 있겠다싶다.
하지만 핵심은 독을 먹고 자살하는 거다. 그 끔찍한 상황적 죽음이 ‘멋진 일’이라니,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개처럼 죽는 상황은 치욕이고 음독자살은 멋진 일이라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가 과연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식인지 묻고 싶다.
개처럼 죽거나, 혹은 개같이 살아남거나. 삶에도 죽음에도 치욕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이 논증은 스페인 국경의 음독자살을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양도논법적 사고의 전형이다. 개처럼 살거나 혹은 개같이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쉽게 말해서 죽을 수 없어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거다.
그리고 치욕을 피할 길이 없는 삶은 있어도 치욕을 피할 길 없는 죽음은 없어 보인다. 왜냐? 죽으면 끝나버리니까. 조선시대처럼 부관참시를 당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피해는 논외로 하자. 이건 작가의 논증을 일단 넘은 거니까.
그런데, 아무리 삼독, 사독 해 보아도 우리나라가 아직 저 정도는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 작가가 말하는 사회는 북한이다. 북한에 딱 어울리는 실상이다. 탈출이냐 아니면 인간의 존엄도 없는 치욕을 견디며 개같이 살아남느냐 하는 이분법적 고민 말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이 뭐가 다르냐고 한다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물론 작금의 대한민국은 ‘헬조선’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일말의 인간적 존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납득할 수 없다. 일말의 인간적 존엄이라도 남아 있기에 이런 불만도 털어 놓는 것이 아닐까. 아주 약간이지만 정권 교체의 가능성도 남아 있긴 하니까.
작가라면, 언론에 이런 글 함부로 쓰지 말자. 공허한 말장난이나 수사학적 기교는 작품에서 좀 보여주길 당부 드린다. 혹 쓰시려면 현실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해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문체의 수사학을 보여주시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