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의미 - The Meaning of Art
허버트 리드 지음, 임산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에코리브르, 2006)를 다시 읽었다. 10여 년 전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접한 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꺼내 들었는데,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새로웠다. 전에는 문예출판사 번역본으로 읽었으나 가독성이 더 좋다는 소문에 에코리브르판으로 재독을 시도했다. 결국 정독과 원문 비교를 거치며 도합 네 번을 읽은 셈이다.

 

​처음 얼마간은 문예본보다 확실히 술술 읽히는 듯했다. 하지만 재독, 삼독을 거듭할수록 1부와 3부의 번역이 엉망이라는 사실이 눈에 걸렸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영문 원문(The Meaning of Art)을 쉽게 다운받아 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원문과 대조해 본 1부와 3부의 번역 상태는 가히 처참했다. 기본적인 영어 문장 구조조차 잘못 짚은 오역이 심각한 수준으로 산재해 있었다.

 

​처음 가볍게 읽을 때는 오역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1부에서 리드가 논하는 예술과 미(美)의 관계가 앞뒤가 맞지 않고 자꾸 꼬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구절구절 원문과 비교해 보고 챗GPT 등 번역 AI까지 동원해 검증해 보니, 번역자가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오독하여 발생한 오류들이 너무나 도드라졌다.

 

​개개의 세부적인 오역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진 않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1부를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매끄럽지 않은 구절이 수두룩한데, 이는 단순히 한국어 문맥의 어색함을 넘어 순전히 오역 때문에 논리가 깨진 탓이다. 그나마 2부는 사정이 좀 낫다. 어쨌든 잘못 옮겨진 영어 문장들 속에서 행간을 읽어내고 진짜 의미를 추라하려면 독자 입장에서 꽤나 고역스러운 수고를 들여야만 한다.

 

​만약 번역이 제대로만 정교하게 다듬어졌다면 참으로 쉽고 매력적인 한국어판이 되었을 것이다. 미학의 고전으로서 두고두고 길게 회자되는 명저가 되지 않았을까. 뭐, 원래 원작 자체가 서양 미학사의 명저이긴 하지만 말이다. 미학 개론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이처럼 엄격한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도 간결하게 스케치하여, 입문자에게 미학이 다루는 주제와 범위를 직관적이고 쉽게 일깨워주는 책도 드물다.

 

​이 책이 지닌 진짜 가치는 완독 후에 증명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앞의 그림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이전에 미술을 감상하면서 무엇을 놓치고 지나쳤는지를 명확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숱한 오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유익한 책이다. 사실 오역이 적고 읽을 만한 2부의 미술사 스케치만 제대로 섭취해도 이미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예술과 미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림을 읽어내는 기본 개념적 도구들을 소개하며, 2부에서는 동서양 미술사를 개괄적으로 스케치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 이르러 예술이 지닌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지를 개진한다. 비록 구성상 완전히 엄밀하고 체계적인 논문 형식은 아닐지라도, 리드가 이 책 전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그러나 분명하게 감잡을 수 있다.

 

​이 책을 핵심만 간략히 요약하자면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美)과 동의어가 아니며,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감정의 조형)과 내용(정신의 표현)이 정교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1부에서 논한다. 그리고 이 틀을 바탕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짚어낸다. 리드가 스케치하는 미술사는 결국 조형적 형식과 인간 정신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밝히는 과정이다.

 

​헌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내용보다 ‘형식’에 있다. 이 '형식'이라는 키워드는 책 전체를 관통하며 계속 등장한다. 리드가 정의하는 예술의 본질이란 바로 '지각하는 이에게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창조된 유쾌한 형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감정과 직관을 가시적인 시각적 형태로 조직화(조형)하는 존재다.

 

​요컨대 1부와 2부를 통틀어 리드가 피력하는 '예술의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감정을 전달하는 유기적 형식의 창조이고, 둘째, 인간 정신의 직관적 인식이며, 셋째, 인간적 유대 및 자아의 확장이다. 결국 리드가 동서양의 방대한 예술사를 통틀어 밝히고자 했던 핵심은 '예술의 의미'가 지닌 시대적·지역적 상대성이었다. 시각적 형식과 이를 받치는 인간의 정신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간이라는 양식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부는 1부와 2부에서 다룬 예술과 미의 관계, 그리고 수많은 미술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압축적인 비평을 바탕으로 리드가 제시하는 일종의 최종 결론이다. 그 결론이 바로 '예술의 기능'이다. 리드에 따르면 예술의 진정한 기능이란 개인적 차원의 심리적 기능과 사회적 차원의 사회적 기능을 긴밀하게 매개하고 연결하는 시도에 있다.

 

​전자가 무의식의 억압을 정화하고 파편화된 자아를 통합하는 일이라면, 후자는 타자와의 깊은 공감을 형성하고 공동체의 영적 유대를 회복하는 일이다. 리드는 이를 통해 예술이야말로 한 문명이 얼마나 건전한가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논의라 선뜻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예술의 역할을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확장성을 잇는 매개체로 바라본 그의 시각만큼은 매우 탁월하고 훌륭하다.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운 번역 탓에 평가가 좀 박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번역만 제대로 매끄럽게 다듬어졌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훨씬 더 많이, 더 널리 읽혔을 것이라 확신한다. 번역의 아쉬움을 뚫고 들어갈 가치가 있을 만큼, 텍스트 자체가 품은 묵직한 진가와 울림은 여전히 눈부신 좋은 책임에 틀림없으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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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헌책방이나 서점에서 발견하는 족족 한 권씩 그러모으게 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을 상당수 소장하게 되었다. 영화나 여타 매체에서 느낄 수 없는 고유의 쓸쓸하고 안개 낀 듯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그 매력의 뿌리를 찾아보고 싶었다. 이번에 독서모임을 계기로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이번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다. 예전에 읽었을 때의 감상과는 전혀 다른 깊이가 느껴진 것이다. 역시 서평을 남겨 놓지 않으면 그 당시의 미세한 감흥은 금방 잊혀지고 만다.

 

​주인공 '기 로랑'이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기본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베르그손의 철학적 프레임으로 다시 읽어본 소설의 구조는 정말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웠다.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제2장과 제3장을 곁들여 읽으니, 이 소설이 단순한 기억상실증 환자의 추적극을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엄청난 철학적 탐구라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운동적 기억과 순수 기억, 그리고 시간의 흔적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 제2장에서 기억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뇌에 습관이나 행동으로 각인된 '운동적 기억(mémoire-habitude)'과, 과거 그 자체를 온전히 담고 있으며 이미지 형태로 떠오르는 '순수 기억(mémoire pure)'이다. 주인공 기 로랑은 과거를 잃어버렸지만 일상적인 행동이나 언어, 타인을 대하는 방식 같은 운동적 기억은 여전히 유지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담긴 '순수 기억'이다. 그는 탐정 사무소의 흗어진 단서들, 낡은 사진, 낯선 이들의 증언 등 외부의 '물질'을 매개로 과거의 이미지들을 하나씩 되살려낸다. 자신이 '페드로 맥케부아'였는지, 아니면 지미 페드로와 함께 살던 인물이었는지 추적하는 과정은, 베르그손이 말한 '물질을 통해 잠재된 순수 기억을 현실화(actualisation)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낡은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기 로랑의 뇌리에서 꿈틀거리는 아련한 환영들은 잊혀진 시간의 실타래가 풀어지는 순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지각과 기억의 원뿔구조, 시간에 내던져진 존재

 

 

​베르그손은 제3장에서 '뒤집힌 원뿔형(Cone) 모델'을 통해 과거 전체가 현재의 지각 표면과 어떻게 만나는지 설명한다. 거꾸로 선 원뿔의 뾰족한 끝은 현재의 행동 지점이고, 넓은 밑면은 과거의 전체 기억 저장소다. 기 로랑은 현재라는 뾰족한 칼날 위에 서서, 과거라는 거대한 깔때기 속을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그는 파리의 어두운 거리와 잊혀진 상점들, 그리고 데니즈와의 추억이 서린 보라빛 밤을 헤맨다. 이 여정은 단순히 팩트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순수 기억이 만나는 접점을 찾아 자신이라는 존재의 깊이를 복원하려는 서글픈 시도다. 소설 속 파리의 안개 낀 거리는 바로 베르그손이 말한, 현재와 과거가 모호하게 얽혀드는 시간의 지층 그 자체다. 그는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자신의 파편화된 과거 속에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기억의 실체를 감각한다.

 

 

​실종된 정체성, 그리움이 남긴 미학적 카타르시스

 

 

​이 소설의 비극적이면서도 아련한 결말은 기존 탐정/추리 소설의 전형적 구도를 전복시킨다. 보통의 추리물은 모든 단서가 조합되어 단 하나의 완벽한 진실로 귀결되지만, 모디아노의 세계는 다르다. 기 로랑이 자신의 이름이 '페드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도달하고, 그가 살았던 옛 집과 흔적들을 찾아내지만, 그것이 완전한 과거의 복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기억을 찾으면 찾을수록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깨닫는다.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가 어린 시절의 우는 아이를 떠올리며 던지는 독백은 이 소설의 문학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우리들의 삶은 이 아이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쉽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는 깨달았다. 삶이란 베르그손의 말처럼 연속적인 흐름(지속, Durée)이며, 우리가 고정된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이 헛헛한 그리움과 아쉬움이야말로 모디아노 문학의 정수다.

 

​앙리 베르그손의 치밀한 기억 이론과 파트릭 모디아노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이 멜랑콜리는 독자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안개 속을 헤매듯 신중하게 서사가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삶의 허무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일깨우는 구조는 참으로 독보적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이 헛되고도 고귀한 방황이야말로 좋은 소설이 가져야 할 최고 수준의 미덕이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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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9-18 16: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괴테가 한 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yamoo 2026-09-21 12:35   좋아요 0 | URL
괴테의 말이 인상깊네요. 저는 괴테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몰랐는데, 좋습니다요!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26-09-19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아. 역시 야무 님의 범우주적 교양 글은 일품이네요.
맞아요. 읽고 나서 바로 서평을 써야 내용이 오래 남습니다. 신기하더라고요. 서평 안 쓰면 1년 지나면 내용을 전혀 몰겠어요. 서평을 써야 몇 년 지나도 서평 글 읽으면 세세하게 내용이 다 기억 나더라고요. 서평은 써야 합니다.

yamoo 2026-09-21 12:36   좋아요 1 | URL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곰발님 아니십니까!! 너무 뜸하시네요..얼른 복귀하시기 바랍니다~~

맞아요. 서평을 안쓰면 그냥 잊혀져요...아주 큰 문제입니다요!!ㅎ

고양이라디오 2026-09-29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서 서평에 기록을 남겨야겠습니다!

저는 이 책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읽었었는데 별 재미를 못 느겼었습니다. 야무님의 글을 보니 제가 느끼지 못한 부분들이 있을 거 같아서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yamoo 2026-10-01 13:22   좋아요 1 | URL
정말 리뷰 안 남기면 읽은 책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하나두 기억이 안나요...ㅎㅎ

재미보다는 의미에 방점이 찍히는 작품이죠. 사람과의 기억을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찾는...분위기와 감성으로 읽는 작품 같습니다..^^
 
문화로 읽는 세계사 - 문화의 눈으로 역사의 진실을 읽는다, 개정증보판
주경철 지음 / 사계절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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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 교수의 《문화로 읽는 세계사》(사계절, 2015)는 거대 서사와 연대기 중심의 건조한 역사 서술에서 탈피하여, 구체적인 인간의 행위와 문화적 매개체를 통해 인류사의 발자취를 입체적으로 조명한 저작이다. 본 글에서는 책이 제기하는 주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현장의 목격, 인물의 재평가, 현재적 시사점, 그리고 기존 인식의 전도라는 네 가지 관점에서 그 세계사적 의미를 읽어보고자 한다.


 

​1. 인본주의의 이행기적 역동성: 피렌체 광장에서의 인간적 가치 분출

​

역사적 시공간의 이동을 상정할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은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반에 이르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광장이다. 저자가 묘사하는 이 시기는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해체되고, 신의 피조물로서 지닌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내재적 가치에 눈을 뜨던 격정적인 패러다임 전환기이다.

 

​당시 피렌체는 페스트가 남긴 파멸적 상흔 위에서 고전 고대의 텍스트를 재발견하고, 브루넬레스키의 돔으로 대변되는 기술적·예술적 성취를 이룩하던 문명사적 용광로였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억압 하에 은폐되어 있던 인간의 신체, 감각, 그리고 현세적 아름다움이 예술과 학문을 통해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인류 지성사의 가장 역동적인 국면을 체험하는 것과 같다. 광장이라는 공적 영역에서 사상가와 예술가들이 신학적 교리가 아닌 '인간의 조건(Human Condition)'을 두고 전개한 치열한 담론 형성의 공기를 공유하는 것은, 현대 시민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인본주의적 사유의 시원을 추적하는 작업으로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2. 근대적 탐욕과 타자화의 메커니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비판적 재평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대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에 따라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가장 시급하게 재평가되어야 할 대상이다. 전통적인 역사 서술과 영웅주의적 서사는 그를 미지의 세계를 개척한 불굴의 개척자이자 '신대륙의 발견자'로 신화화해 왔다. 그러나 텍스트가 지시하는 역사적 실체 속의 콜럼버스는 문명사적 영웅주의와 거리가 멀다.

 

​현대적 관점에서 콜럼버스는 초기 근대 자본주의가 잉태한 무제한적 탐욕과 타자(Other)에 대한 구조적 약탈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인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환대적 태도를 황금 획득과 노예화의 기회로 치환하였으며, 이는 아메리카 대륙의 고유 문명 파괴와 대량 학살이라는 인종적·문화적 홀로코스트의 서막을 열었다. 그의 항해가 지닌 지구적 연결망 형성의 파급력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제는 유럽 중심주의적 '발견'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문명 간의 비대칭적 충돌과 대량 희생의 관점에서 그를 재위치시켜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이야말로 탈식민주의적 지구촌 공동체의 윤리를 정립하는 시발점이 된다.

 


​3. 위기 상황에서의 사회적 아노미와 연대의 정당성: 페스트 대유행의 역사적 거울


​과거의 역사가 현재를 비추는 인식론적 거울이라는 명제를 수용할 때, 현대 사회가 직면한 복합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주목해야 할 사건은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페스트) 대유행'이다. 최근 인류가 경험한 전 지구적 팬데믹 상황은 중세 말기의 대재앙이 유발한 사회적 거동과 구조적으로 결을 같이 한다.

 

​당시 페스트의 창궐은 단순한 병리학적 재난을 넘어 사회적 신뢰 체계의 붕괴와 극단적인 타자 혐오를 양산했다. 불확실성과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군중은 이성적 대응 대신 마녀사냥을 자행하거나 특정 소수자 집단을 대재앙의 속죄양으로 삼아 학살하는 야만성을 표출했다. 이는 위기 국면에서 인간 공동체가 얼마나 쉽게 아노미 상태에 빠지고 타자를 악마화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실증이다. 현재의 글로벌 사회 역시 기후 위기, 경제적 양극화, 자원 고립주의 속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와 혐오의 정치가 재차 부상하고 있다. 페스트 잔혹사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 통제와 배제라는 원시적 메커니즘으로 회귀하는 대신, 과학적 이성과 상호 신뢰에 기반한 '지구적 연대'만이 공동체의 파멸을 막는 유일한 기제라는 점이다.

 


​4. 진보 서사의 이면에 감추어진 야만성: 설탕의 자본화와 고정관념의 해체


​제도권 교육과 대중 매체를 통해 내면화된 역사적 고정관념 중 하나는 16~17세기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시대의 도래가 인류 문명을 풍요롭게 만든 단선적 진보의 과정이었다는 인식이다. 새로운 작물 교환과 식문화의 확산이 인류의 삶을 다변화했다는 긍정적 서사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저작을 통해 균열을 일으키는 지점은 '설탕'이라는 일상적 기호품의 확산 이면에 은폐된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가시화이다.

 

​유럽 부르주아 계급이 향유하던 달콤한 설탕과 차 문화의 이면에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짐승처럼 포획되어 카리브해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강제 이주당한 노예들의 참혹한 잔혹사가 존재한다. 그들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소모품처럼 대체되었다. 우리가 근대 문명의 세련성과 우아함의 징표로 간주해 온 일상적 문화 양식이, 실제로는 철저하게 구조화된 비인간적 폭력과 착취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상층 기표였다는 사실은 깊은 인식적 충격을 부여한다. 역사는 결코 수렴적인 발전의 궤적만을 그리지 않으며, 특정 주체의 풍요는 대개 타자의 철저한 소외와 야만을 자양분 삼아 발현된다는 서늘한 진실을 대면할 때, 역사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의 지평은 비로소 확장된다. (끝)


[덧]  주 교수의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학과지성사, 1999)의 새로운 버전 같은 책이다. 매우 쉽고 그가 읽은 여러 텍스트를 리뷰 형식이 아니라 문화적 세계사라는 통사적 구조로 정리한 면이 매우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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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 고흐의 불꽃같은 열망과 고독한 내면의 기록, 출간 25주년 기념 개정판 ㅣ 불멸의 화가 고흐의 편지들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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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은 현대인에게 하나의 신화이자, 가슴 아픈 예술적 순교자의 대명사다. 그러나 우리가 박물관의 두꺼운 유리 너머로, 혹은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경매 뉴스 속에서 만나는 고흐는 어딘가 박제된 영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 2001)는 그 화려하고도 비극적인 신화의 꺼풀을 벗겨내고, 오직 예술만을 위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통째로 소모했던 한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이다. 책에 수록된 총 88점의 생생한 도판들은 그가 동생 테오와 가족들에게 보낸 절절한 편지 글과 어우러져, 활자 너머의 감동을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증명해 낸다. 이 책을 읽으며 특히 깊게 다가온 것은 고흐가 가졌던 예술적 신념의 굳건함, 그리고 파리를 거쳐 남프랑스의 '아를 시절' 이후 그가 보여준 유화 작품들의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이다. 고흐의 편지 속에 담긴 예술에 대한 고뇌와 열정을 네 가지 로 정리해 따라가 본다.


 

​카메라의 정확성을 넘어선 ‘진실한 거짓말’


​고흐는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아카데미즘이나 사진 예술의 기계적 정확성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관을 이렇게 피력한다.

 

​세레에게 내 그림 속 인물이 훌륭하게 표현된 걸로 보인다면 내가 절망할 것이라고 전해라. 나는 인물이 아카데미식으로 정확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밭갈이하는 농부의 사진을 찍는다면, 사진 속의 농부는 더 이상 받을 같고 있지 않을 게 분명하다 미켈란젤로의 인물은 어떠냐? 다리는 길쭉하고 엉덩이도 펑퍼짐하지만 아주 근사하지 않니. 세레에게 전해다오. 밀레와 레르미트야말로 진정한 예술가라고. 그건 그들이 전조하고 분석적인 방식으로 대상을 검토한 후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고, 대상에서 받은 느낌에 따라 그렸기 때문이다. 125p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하고 전환해서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다. (중략) 정확성을 배우고 싶다. 그걸 거짓말이라 부르겠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그 거짓말은 있는 그대로의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 이다. 농부의 삶이나 대중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상류사회' 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길게 봤을 때 이국적인 하렘 풍경이나 추기경의 성찬식을 그린 화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될 것이다. 126p

 

​그에게 예술이란 융통성 없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대상으로부터 받은 내면의 인상을 강렬하게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고흐가 말한 '진실한 거짓말'은 사물의 외형이 아닌 사물의 본질과 생명력을 담아내기 위한 숭고한 왜곡이었다. 그는 당대 상류사회의 화려한 취향에 영합하기보다, 거칠고 투박한 농민의 삶을 그리는 것이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고 더 높은 위치에 오를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신념이 초기작에서 가장 뜨겁게 분출된 작품이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비록 주변의 비판이 있었을지언정, 고흐에게 이 작품은 철저한 관찰과 고뇌의 산물이었다.


<감자먹는 사람들>, 캔버스에 유채, 82cm x 114cm

 

​지난번 네 편지를 읽으니 세라가 <감자 먹는 사람들>의 구성에서 결함을 발견했다고 하지. 나도 그런 결점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한 램프불빛 아래에서 그 시골농가를 바라보느라 무수히 많은 밤을 지샌 후에, 그리고 사람의 두상을 40여 차례 그려본 후에 얻은 인상을 내 나름의 관점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126p

 

​움직이도 있는 농부의 동작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현대 인물화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현대예술의 진수이고, 그리스에서도, 르네상스 시기에도, 옛 네덜란드 화파도 하지 않은 것이다. 127p

 

​그는 단순한 미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인간의 숭고한 움직임과 그들의 영혼을 포착하고자 했다. 르네상스나 그리스 예술도 도달하지 못한 '현대 예술의 진수'를 그는 이미 어두컴컴한 네덜란드의 시골 농가에서 홀로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프랑스의 빛과 고독, 그리고 들라크루아의 구원의 색채

 

​초기의 어둡고 흙빛 가득한 화풍은 그가 파리를 거쳐 남프랑스로 향하면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 책에서도 고흐의 삶과 예술의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아를 시절의 유화 작품들이 단연 눈길을 사로잡는다. 아를 이후의 유화들을 보고 있으면, 그 이전의 고뇌가 어떻게 빛과 색채로 승화되었는지가 온몸으로 전해져 확실히 가슴을 뛰게 만든다.

 

​파리에 온 지 1년 6개월어 지나자 이 도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났다. 파리에서 고흐는 자화상, 정물화, 몽마르트로 풍경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130p

 

​파리의 번잡함과 피로를 뒤로하고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마치 눈이 먼 사람이 처음 빛을 본 것처럼 캔버스를 강렬한 색채로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눈부신 예술적 성취 뒤에는 눈물겨운 육체적, 경제적 궁핍이 도사리고 있었다.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온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135p

 

​굶주림마저도 그림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했던 고흐는, 밥을 먹는 대신 물감을 사고 모델을 구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가 예술적 자양분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당대의 문학과 선배 화가의 정신이었다.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 리슈팽, 도데, 위즈만 등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소설은 정말 훌륭하다. 그런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 137p

 

​그는 시대를 읽는 눈을 잃지 않으려 치열하게 독서했으며, 1887년 여름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삶을 대하는 자신의 뜨거운 태도를 전하기도 했다.

 

​글을 쓰고 싶다면 행동을 해라.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니 네 스스로 퇴보하길 바라지 않는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 많이 즐기고 많은 재미를 느껴라.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에서 요구하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명심해라. 네 건강을 돌보고 힘을 기르고 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공부다. 141p (1887 여름 여동생에게 보애는 편지)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이라는 그의 통찰은 아를에서 고스란히 실현된다. 아를 시절 고흐는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8호에서 30호까지 다양하다. 이 시기 그의 작업 방식은 철저히 주관적인 감정의 해방을 향해 있었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고 색칠하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72p

 

​요즘 작업하는 방식은 인상파 화가들보다는 들라크루아의 생각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즉,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복제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더 임의적으로 쓰고 있다. 187p

 

책의 곳곳에서 고흐가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이론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 부분이 또렷이 보인다. 눈앞의 대상을 정확히 복제하는 인상파의 광학적 탐구를 넘어,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임의적이고 주관적으로 변형해 사용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색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187p)고 말할 정도로 색채의 마술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래를 내다본 확신과 가치의 증명

 

​비록 당대에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비참한 가난 속에서 허덕였지만, 고흐는 결코 절망 속에만 주저앉아 있던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다. 편지 곳곳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를 확신하고, 후대에 반드시 재평가받을 것이라는 단단한 자부심과 기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랑글루아 다리>, 캔버스에 유채, 49.5cm x 64.5cm

 

​이번에 부치는 짐 속에는 거친 캔버스에 그린 분홍색 과일나무 그림이 있고, 폭이 넓은 하얀 과일나무 그림, 그리고 다리 그림이 있다. 그걸 보관해 두면 나중에 가격이 오를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수준의 그림이 50점 정도된다면, 별로 운이 없었던 우리의 과거를 보상받을 수 있겠지. 그러니 이 그림 세 점을 네 집에 두고 팔지 말아라. 시간이 지나면 이 그림들은 각각 600프랑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157-159p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205p

 

​스스로 자신의 그림이 훗날 높은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 확신하는 대목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낸 헌신적인 지원이 결코 헛된 소모가 아니며, 자신들이 흘린 피와 눈물이 언젠가는 세상에 의해 '보상받을 것'임을 굳게 믿었다. 각각 600프랑의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라던 그의 소박한 소망은, 오늘날 수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로 바뀌어 실현되었다. 세상을 앞서간 천재의 고독한 확신이 얼마나 정확했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프고도 위대한 대목이다.

 

 

​영혼을 담은 초상화, 그리고 단 하나의 기적

 

​고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예술의 종착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 즉 모델의 내면을 관통하는 '영혼의 재현'이었다.

 

​“모델의 마음, 모델의 영혼을 담고 있는 초상화야말로 정말 그려야 할 그림이다.” 196p

 

​그는 인물의 겉모습을 치장하는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고뇌하고 슬퍼하며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영혼을 화폭에 담길 원했다. 그가 그린 수많은 자화상과 우체부 조셉 룰랭 등의 초상화에서 우리가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 그림들이 모델의 영혼과 고흐 자신의 영혼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교감한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위대한 영혼을 가졌던 화가에게 세상은 너무나 인색했다. 그의 치열했던 평생의 삶 동안, 세상이 그에게 허락한 상업적 성공은 단 한 번뿐이었다.

 

​브뤼셀의 20인전에 전시되었던 <붉은 포도밭>이 팔렸다. 안나 보흐라는 사람이 400프랑에 이 작품을 샀다. 이것은 그의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 작품이다.

 

​평생 수백 점의 눈부신 유화를 남겼고, 오늘날 인류의 문화유산이 된 그 수많은 걸작 중에서 생전에 단 한 점만이, 그것도 단돈 400프랑에 팔렸다는 사실은 잔인하도록 비극적이다. 하지만 안나 보흐가 산 그 한 점의 유화 <붉은 포도밭>은, 고흐가 그토록 갈망했던 '세상과의 소통'이 마침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외로운 신호탄이기도 했다.

 

 

​맺음말: 편지 끝에 남은 영원한 빛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덮으며, 책 속에 실린 88점의 도판들이 마음속에서 다시금 강렬한 잔상으로 소용돌이친다. 특히 아를 시절 이후, 그가 온 정신을 쏟아부어 완성해 낸 유화들의 격정적인 붓 터치와 임의적이고도 강렬한 색채는 왜 그가 "색에 대해 집착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웅변한다.

 

​그는 미치광이도, 대책 없는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다. 누구보다 철저하게 시대를 고민했고, 들라크루아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했던 확신에 찬 선구자였다. 비록 그의 삶은 굶주림과 고독, 그리고 단 한 점의 판매라는 초라한 기록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가 남긴 '진실한 거짓말'은 세기를 넘어 우리에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실로 다가온다. 그의 편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태워 세상을 밝힌 한 화가가 후대의 우리에게 보내는, 가장 뜨겁고도 아름다운 초대장이다. (끝)


* 읽은 판본은 2001년 예담에서 나온 신성림 번역본이다. 최근에 24년판인 위즈덤하우스본도 입수했는데, 읽은 건 2001년판 예담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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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병자들 -상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61
헤르만 브로흐 지음, 김경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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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안온한 휴식보다는 지적인 투쟁에 가깝다. 특히 베르그손의 ‘지속’이나 ‘기억’의 문제를 조형적 언어로 고민하는 나에게, 헤르만 브로흐의 <몽유병자들>(2010, 열린책들)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거대한 철학적 텍스트로 다가온다. 밀란 쿤데라가 이 작가를 그토록 상찬했던 이유는 분명하다. 브로흐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인식론적 차원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삼부작은 분명 읽기 녹록지 않은 ‘고역’의 시간을 요구하지만, 그 시간을 견뎌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지적 황홀경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



​1. 낭만과 허무, 그리고 가치 붕괴의 ‘마티에르’


​이 소설은 1888년의 낭만주의, 1903년의 무정부주의, 1918년의 즉물주의라는 세 단계를 통해 유럽 정신사의 궤멸 과정을 추적한다. 작가는 인물들을 ‘몽유병자’로 명명한다. 이는 과거의 가치가 붕괴된 폐허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발을 내딛는 현대인의 초상이다.


​내가 캔버스 위에 색면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아비투스’를 탐구하듯, 브로흐는 인물들의 내면을 겹겹이 쌓아 올린다. 파르크니우가 낡은 제복의 권위에 매달리고, 에슈가 혼란스러운 세계에서 질서를 갈구하는 모습은 마치 마티에르가 두껍게 올라간 유화처럼 묵직한 질감을 형성한다. 때로 묘사가 지리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것은 삶의 본질적인 중량감을 재현하기 위한 작가의 치열한 붓질이다. 서사의 속도감에 길들여진 독자라면 고통스럽겠지만, 그 느린 호흡 속에 담긴 사유의 밀도를 느끼기 시작하면 이 지루함은 어느새 숭고함으로 변모한다.



​2. 소설의 지평을 확장하는 ‘가치 붕괴’의 철학적 변주


​ 3권 후반부에서 서사를 멈추고 직접 등판하는 ‘가치 붕괴’라는 논문조의 삽입절들은 이 소설의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지점이다. 나는 예술가가 자신의 사상을 조형적 서사로 완벽히 녹여내지 못하고 직접 설명하는 것을 경계해왔으나, 브로흐의 시도는 차원이 다르다. 그는 소설이라는 그릇 안에 철학적 논리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던져 넣는다.


​전 지구적 가치가 파편화되고 각자의 논리만이 득세하는 시대를 향한 그의 분석은 서늘할 정도로 명확하다. 이는 내가 현대미술의 복잡한 층위 속에서 철학적 근거를 찾으려 애쓰는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브로흐는 말한다. 가치가 붕괴된 시대에 인간은 각자의 논리 속에 갇힌 ‘몽유병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이 지독한 통찰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며, 오히려 자본과 텍스트가 뒤섞인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렬한 울림을 준다.



​3. 고통스러운 독서 뒤에 찾아오는 쓸쓸한 아름다움


​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한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윌리엄 트레버가 보여주는 단정한 쓸쓸함과는 또 다른,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뒤의 적막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브로흐는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잔해를 하나하나 수집하여 소설이라는 거대한 박물관을 지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마치 거대한 추상화를 완성하기 위해 수천 번의 붓질을 반복하는 고독한 작업과 같다. 재미라는 얄팍한 기준으로는 이 책을 온전히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현대미술의 난해함을 지루함으로 치부해버리는 것과 같다.


<몽유병자들>은 지독한 인내를 요구하지만, 그 끝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위대한 서사를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은 내 서재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손이 잘 닿는 곳에 머물며 나의 예술적 사유를 끊임없이 자극하는 스승으로 남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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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6-05-15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정말요? 거의 찬사에 가까운데요? 이러면 괜히 흔들립니다. 저도 그러는 줄 알고. 저한텐 거의 고문에 가까울 수도 있는데. 😂 저는 이제 외국문학은 거의 못 읽게된 것 같아요. 얼마전 뤼팽 선집 한 권 읽어보려고 했는데 재미가 없으니. ㅠ 마침 스티븐 킹의 책을 읽어야해서 다행이라고 해얄지. ㅋ 암튼 지루하고 어려운 소설도 잘 읽으시니 부럽습니다.

yamoo 2026-05-15 12:53   좋아요 1 | URL
와우! 스텔라님이시다!!ㅎㅎ 잘 지내시나요?
찬사긴 한데...이거 잡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와요. 안 읽으시는게 좋습니다..ㅎㅎ
제가 위에도 썼다시피 전 철학텍스트로 대했어요. 철학텍스트로 읽으면 읽을만합니다..ㅎㅎ 끝까지 읽으면 왜 밀란쿤데라가 상찬했는지 이해가 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