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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ㅣ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고향을 떠난 딸. 루시가 입원한 병실에 갑자기 루시의 엄마는 나타난다. 살며시 딸의 발을 쥐고 어릴 적 부르던 애칭으로 그녀를 호명하며. 그렇게 과거가 루시 앞에 불쑥 찾아왔다. 그리움과 고통을 함께 쥐고서.
루시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고향을 떠났고 부모가 반기지 않는 남자(독일인)와 결혼했으며 오랫동안 고향을, 가족을 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과거는- 고향은, 가족은 - "머리 위에 떠 있는 하나의 구조물"처럼 언제나 존재했다. "출신이랄 게 없다"고 소개되는 루시는 일리노이주 앰개시 출신으로서 "스타일이 없다"고 평가되는 차림새로 뉴욕에 살며 누구에게도 설명하기 힘든 어린 시절의 빈곤함을 감춘 적 없지만 마치 감춘 것처럼(설명되지 않으므로) 지내는데, 그건 참으로 외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53쪽)
대학시절 루시의 룸메이트는 엄마를 유독 싫어했으면서도 엄마가 보내준 치즈를 버리지 못하고 두었다가 오랜 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치즈를 치워 달라고 루시에게 부탁한다. 엄마란 그런 존재다. 당신의 사랑을 바라지 않는다고 외쳐 놓고도 당신으로부터 도착한 사랑을 차마 내 손으로 버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존재.
루시의 엄마에 대한 감정은 어떨까. 사랑한다는 말을 결코 하지 못하는 엄마. 지독한 가난(지독한 추위!), 주변의 멸시(쓰레기라는 말), 학대(트럭에 갇혀 있던 기억과 체벌). 그럼에도 이런 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이게 다일까? 책을 끝까지 읽으면 그게 아님을 알게 된다. 엄마가 대화를 단절하고 눈을 감았을 때, 루시는 "오래전의 그 익숙하고 어두운 무엇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97쪽) 엄마는 그 시절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해, 루시가 겪어야만 했던 일들에 관해 눈을 감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엄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증으로 입원한 루시의 곁에 있기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엄마라면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거니까"(80쪽) 라고 말한다.
지금은 내 인생도 완전히 달라졌기에,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어쩌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햇살이 내리쬐는 보도를 걷거나 바람에 휘는 나무 우듬지를 볼 때, 또는 이스트 강 위로 나지막이 걸린 11월의 하늘을 바라볼 때, 내 마음이 갑자기 어둠에 대한 앎으로 가득차는 순간들이 - 예기치 않게 - 찾아오기도 한다. 그 앎이 너무 깊어 나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고, 그러면 나는 가장 가까운 옷가게로 들어가 낯선 사람과 새로 들어온 스웨터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 21쪽
이 소설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루시는 계속해서 '나는 그렇게 기억한다', '내 기억은 그렇다', '내가 잘못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는 등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자신의 기억에 기반해 재구성 된 것임을 강조한다. 엄마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지만, 엄마의 기억은 루시가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해 있다. "나도 엄마가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었는지 모른다."(130쪽)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쓰는 이야기는 오로지 나의 것일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를 보호하려 하거나"(세라 페인이 하지 말라고 한 지점)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지"(루시가 세라 페인의 글을 읽으며 느낀 지점) 않는다면. 쓰게 되는 이야기는 "오직 하나"이고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것"(169쪽)이다.
결국 듬성듬성한 기억들을 그러모아 완성하게 되는 것은 '자기 서사'다. 자기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과거- 유년의 시절을 빈 구멍으로 남겨둘 수 없다. 엄마의 방문은 루시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꺼내보게 해주었고, "어둠에 대한 앎"을 그저 옷가게에 들어가 회피하지 않은 채 꺼내어 글로 쓸 수 있게 해준 게 아닐까. 그렇게 자기 서사를 기반으로 '냉혹해진' 그녀는 작가로 성장한다.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 일리노이 주 앰개시 -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5쪽)
이 소설은 계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니, 계급은 하나의 잣대일 뿐 자신의 우월성을 체감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저속한 심리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옷차림을 평가하고 어떤 집에 살았는지 궁금해 하는 루시의 전연인(예술가), 도시 출신의 지방 출신에 대한 혐오감을 은연중 드러내 버린 이웃(제러미), 고양이를 보고 놀란 세라 페인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심리분석가, 세라 페인의 강연을 듣고 '무대에 능하다'며 은연중 깔보는 남자, 이웃들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루시의 엄마 등, 이 책에는 그 저속한 심리를 드러내는 예가 많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루시는 이러한 저속함에서 자유로운가? 그녀는 가난한 부모와 형제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에이즈로 고통받는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어떨까? 인디언(아메리카원주민)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111쪽)
우리는 생각한다. 늘 생각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얕보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 자신을 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를. (138쪽)
이 소설은 루시의 9주간의 입원생활을 먼 훗날 회상하는 형식으로 쓰였다. 큰 줄기는 입원 생활 동안 엄마와 나눈 이야기이고, 중간 중간 과거의 기억과 퇴원 이후의 루시의 삶과 생각이 조금씩 담겨 있다. 그래서 루시의 성장소설로 느껴지기도 한다. 성장은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니까. 어릴 적부터 쭉, 부유한 백인 가족보다는 블랙 호크(인디언)에게, 유대인이 아니면서도 수용소에 학살 당한 유대인에게 감정 이입을 했던 루시는, 마침내 참전으로 인한 PTSD를 겪었던 아버지를 수용하고(이해X, 수용O)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움켜잡고" 두번째 인생을 살게 된다. 그녀의 선언이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