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판결문은 ‘자주 경비‘가 주최 측이 경비 계획을세우고 당일 경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일뿐, 이로 인해 경찰의 혼잡 경비에 관한책임이 경감되거나 면제되는 건 아니라고 명시했다. "경찰에게는 참석자의 생명, 신체 등의 안전을 확보해야 할 주의의무가 있고, (・・・) 주최자 측의 자주 경비에만 맡길 게 아니라, 스스로도 적정한 계획을 책정해야 할 주의 의무가 있었다."
관련 문헌에 따르면 혼잡 경비는 계획 단계에서 80%, 경비원 등에게 계획을 주지시키는 단계에서 90%가 완료된다. 당일대응이 좌우하는 부분은 나머지 10%에불과하다. 판결문은 피고들이 사고 발생을 사전에 예견할 수 있었으며, "사전 준비 단계에서 혼잡 경비 계획 책정이 준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압사사고 발생의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형사재판에선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책임이다. - P17

그로부터 3개월 뒤, 한국에서 이태원참사가 발생했다. 아카시시 육교 사고로어머니 시라이 도미코 씨(75)를 잃은 시라이 요시미치 씨는 "한국 이태원 압사사고의 원인과 배경이 아카시시 육교사고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사고‘가아니라 ‘사건‘ 입니다. 경찰이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도, 폭주족이나 마약 단속으로 실적을 쌓으려 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혼잡한 장소에간 사람이 나쁘다‘라는 사람도 있지만, 큰착각입니다.  - P18

20년 넘는 싸움을 해오는 과정에서유족들에게 가장 위로가 된 것은 다른 유족들과의 만남과 연대였다. 1956년 일본니가타현 야히코 신사에서 124명이 사망한 압사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18세딸을 잃은 할머니는 사고 50년이 되도록딸의 온기를 손이 기억한다고 미키 씨에게 들려주었다. "우리 때의 교훈이 활용되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그 유족의 사과가 아카시시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 P19

 한국의 이태원 참사에 대해 후쿠다 이사는 "누가 책임을 지는지 불명확한 채 시민분들이 희생되는 것 이상으로 괴로운 일은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게 행정이니까,
저희도 사고로 반성했듯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마쓰오카 부장은 말했다. "(이태원 사고 골목에)불법 건축물이 방치되었다는 보도를 봤는데, 그런 것은 시 쪽에서 지도해야 하지않을까요? 관계자분들이 잘 검증하셔서, 재발 방지에 힘써주시기 바랍니다." - P21

이태원 참사 같은 압사 사고의 경우에도사고조사위원회를 꾸리는 편이 좋을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특히 압사 사고의 경우 더욱더 경찰로부터도, 주최 측으로부터도 독립된 사고조사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P23

EU는 특정 조건 아래에서만 간접 배출량을 포함하겠다고 했지만, 재생에너지 비중이 세계적으로 한참 낮은 한국으로서는 날벼락이다. 특정 조건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CBAM이 앞으로 한국의 전력산업에도영향을 끼치리라는 점이다. 전기료 인상같은 이슈가 불거질 수밖에 크다. - P29

문제는 한국의 배출권 시장이 지나치게 ‘기업 프렌들리‘하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기업에 공짜로 탄소배출권을 나눠주고 있다. ‘무상할당‘이다. 2015~2017년배출권 거래제 1차 계획기간(2015~2017년)에는 100% 무상할당, 2차 때 (2018∼2020년)는 97%, 3차 때 (2021~2025년)는90%를 무상할당했다. - P30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기후위기는 유럽에 기회다. IT 등 신산업에서 미국과 아시아에 뒤지고 있는 유럽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무기가 재생에너지와 탄소배출저감기술 같은 기후위기 대응 분야다. - P31

 공모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과실이모여 참사가 발생했다는 ‘공동정범‘ 논리를 구성했다. 연루된 기관 및 인원을 보면경찰 수사에 일정 부분 성과가 있었다고볼 수 있다.
다만 수사 내용을 뜯어보면 ‘용두사미‘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수본이 검찰에송치한 주요 피의자들과 송치 예정인 피의자들은 모두 용산 지역단위 기관 실무진들이다.  - P33

이재명 대표나 윤석열 대통령이나 내가 하나 딱 질색인 건 둘 다 공통적으로반문투의 말이 많다는 것이다.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봤어요?" 이런 식의 발언들. 정치가는 공직을 받은 대신 성실하게 설명할 책임을가진 사람들이다. 질문과 반문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하는 거다. - P43

전세자금 대출은 그동안 서민금융 상품이라는 이유로 DSR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전세자금 대출이 DSR 적용에포함되면 소득에 따라 대출 규모가 결정된다. 소득이 적은 취약계층이 전세자금대출을 받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전세 수요가 줄어들면 부동산 시장 역시 하방 압력이 강하게 작동한다. 가계부채에 민감한 통화 당국은 전세 제도로 인한 부동산 금융의 거품을 줄이고 싶어 하지만, 반대로 집값 폭락을 막고 금융을통해 서민 주거복지를 실현시키고 싶어하는 정치권은 전세를 최대한 활용하려한다. 이 딜레마 속에서 전세 사기는 ‘강고한 전세 수요‘를 바탕으로 피해 규모를키워왔다. - P51

강제매각도 수월치 않고 전면 금지도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택할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엄격한 사용 조건이 붙은 타협안이 될 가능성이 크다. 틱톡이 미국인 사용자의 정보를 공유하고 보관하는 방식과 관련해 미국 정부가 좀 더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틱톡이 이를 받아들이는 식이다.  - P61

나는 고양이들의 감정과 의사 표현을알아들을 때보다 그렇지 못할 때가 훨씬더 많다. 그들도 아마 그럴 것이다.우리가 서로의 언어를 겨우 몇 개밖에헤아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래서각자의 말로 소리치고 울어봤자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면 우리는어떻게 하는가? 서로 빤히 쳐다본다.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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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과학사 연구서에 따르면, 이미 이때 천연가스를 연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연료로 사용한 석탄과 증기기관이 제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런데 산업혁명보다 2,000여 년 이전에 파촉 지역에서는 석탄보다도 고급 에너지원인 천연가스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산업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한 점이 근현대 중국의 불행이었다.

전국시대와 후한시대 혹은 위진남북조시대의 도량형이 조금씩 달랐지만, 그런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면죽현과 낙현의 단위 면적당 쌀 생산량은 전국시대 평균의 20~30배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파촉에는 매우 비옥한 땅이 많았다. 그리고 지도 16-7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러한 무논과 비옥한 땅은 성도 북쪽에 몰려 있었다. 이 지역은 익주, 즉 촉나라의 경제적 핵심 지역이었을 것이다.

전국시대 진나라 때부터 이미 국가에서 성도의 비단 생산을 감독했을 정도였다. 한나라 시대에도 성도의 비단은 ‘촉금 蜀錦
’이라고 불리며 유명했고, 이 때문에 성도는 비단의 도시, 즉 ‘금성 錦城’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오나라는 3주, 38개 군급, 262개의 현급 행정구역이 있었다. 그와 달리 『삼국회요』에서는 4주 43군 331현, 혹은 4주 47개 군급, 339개 현급의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말한다.

오나라의 호수는 후한시대의 27.4%, 인구는 29.5%(242년) 혹은 28.3%(280년)에 불과했다. 이는 오나라 지배층의 절반 이상이 대토지를 소유한 강동의 토호 세력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호구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구 파악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수많은 산지 때문이었다. 광활한 황회해평원(화북평원)과 달리 장강 유역에는 산이 많았다. 관청의 수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망갈 수 있는 산간 지역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오나라의 행정력이 산지 곳곳에까지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촉군은 한족(중국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월지月氏와 강거康居, 파촉의 이민족인 종수
??, 남만을 평정한 후 데려온 청강靑羌
등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혼성부대였다. 여기에 전한시대부터 용맹을 떨쳤던 부릉군 출신 3,000명의 쇠뇌부대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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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란 진단명이 처음 등장한 20세기 중반에도 아치는 여전히 수용된 채 삶의 황금기를 흘려보냈다. 자폐증이란 진단명으로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지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의 삶을 통제했던 관료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미 편리한 진단명이 있었다. 1970년대 들어 계몽적인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임상적 "백치"라는 꼬리표가 "MR", 즉 "정신지체"라는 꼬리표로 바뀌었을 뿐이다.

20세기 전반 70년간 실제로든 겉보기로든 지능이란 영역에서 장애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한 대책은 기관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안 보이는 곳에 치워진" 사람들의 문제는 다양했다. 뇌전증, 뇌성마비, 지적장애가 있었고, 진단명이 확립된 후로는 자폐증도 더해졌다.

학대, 방치, 무관심, 박탈. 입소자가 이런 일을 겪도록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시설들은 분명 이런 모습을 띠었다. 높은 담장 뒤에서 흘려보낸 기나긴 시간 동안 아치 캐스토는 한때 지녔던 빈약한 언어조차 잃어버렸다. 성장하지 못했으며, 점점 내면 깊숙한 곳으로 끌려들어갔다.

수십 년간 의사들이 수용시설을 권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장애 어린이에게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부모가 겪는 수많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줄 수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문제 역시 너무나 생생하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24시간 동안 잠시도 쉬지 않고 중증 자폐인 자녀를 돌보는 일은 종종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1960년대에 자폐 어린이를 돕는다며 온갖 희한한 방법을 추구했던 연구자들이 끊임없이 주장했던 한 가지 분명한 진실이 있다. 사실상 어떤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강화와 처벌. 두 가지 요소 사이의 도덕적 균형은 20년간 로바스의 자폐 어린이 연구가 끊임없이 논란에 휩싸인 이유였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사용하면서 종종 잘못 이해되었던 ‘강화와 처벌’ 이란 용어는 사실 래트, 마우스, 비둘기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유래했으며, 임상 및 분석 목적으로 사용된 특정 방법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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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방의 토착 세력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파촉의 토착 세력들도 자신들의 경제력을 축내고 물자를 다른 곳으로 가져가는 ‘강탈’ 행위를 싫어했다. 『화양국지』를 보면 파촉의 토착민들이 유비 사후 정치를 주도한 승상 제갈량과 제갈량의 후계자인 장완, 비위, 강유 가운데 유독 강유를 싫어했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그보다 유비의 장점은 말수가 적었고, 아랫사람들을 잘 대해주었으며,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간관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장점을 갖춘 셈이다. 『논어 論語』에서는 말을 적게 할 것을 거듭 강조했다. 그래야 실수가 적고, 적을 덜 만들며, 남에게 호감을 준다. 그래서 그럴까? 호협 豪俠
, 지금으로 말하면 깡패 혹은 동네 건달들과도 잘 사귀었고, 건달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반면 북조 계열인 수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오대십국 가운데 북쪽의 정통 왕조인 오대를 계승한 송나라(북송)는 정신적 고향인 중원을 장악했기 때문에 정통성의 기준을 혈통보다 중원의 장악에 두었다.

남송시대에도 속지주의보다 속인주의를 정통성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다시 위나라보다 촉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이러한 시대적 저류는 주자학의 아버지 주희가 쓴 『통감강목 通鑑綱目
』에 반영되었다

위나라가 망하게 된 계기는 조예가 죽기 전에 어린 아들 조방을 보좌할 후견인을 잘못 정한 데 있었다. 조예는 본래 조조의 아들이었던 연왕 燕王 조우 曹宇
와 조휴의 아들 조조 曹肇
, 조진의 아들 조상에게 조방을 보좌하게 하고 사마의를 바깥으로 내보내 관중에 주둔하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병이 들어 정신이 혼미해져 측근인 유방
劉放과 손자 孫資
의 말을 듣고 조우와 조조를 내치고 조상과 사마의에게 공동으로 조방을 돕도록 했다

손권이 말년에 군사적인 측면에서 고생한 것은 그의 무능 때문이라기보다 훌륭한 장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175~210년)는 손권이 29세인 210년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삼분지계의 계책을 내놓은 모사이자 장군인 노숙(172~217년)은 손권의 나이 36세인 217년 46세로 타계했다. 형주를 점령한 여몽(178~219년)은 손권의 나이 38세인 219년 42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숙을 명장이라고 평가하지 않지만, 형주의 분할을 두고 관우와 대치한 용기와 관우가 노숙의 군대를 쉽게 이기지 못한 것을 보면 군사적 재능이 있었다. 노숙을 제외한다고 해도 주유와 여몽이 너무 일찍 죽었다. 손권에게는 큰 손실이었다.

손권은 초기에는 정치를 잘했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실수를 거듭했다. 가장 중요한 실수는 태자 손화孫和와 동생 손패孫覇의 후계자 다툼을 수수방관한 것이다. 15-10의 계보에서 볼 수 있듯 본래 태자는 손등孫登이었으나 241년에 병들어 죽고 만다. 그러자 손화가 242년 태자가 되었다. 손화와 손패가 파당을 만들어 정쟁을 벌이자 손권은 손화를 태자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손패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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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유비에게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러운 신하였지만 유비가 싫어하는 직언도 마다 않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황제나 왕, 상관들은 충성스러운 신하나 부하를 원하지만 자기에게 대놓고 간언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조자룡은 바로 그런 사람, 직설적이고 신랄한 직언을 아끼지 않은 충직한 사람이었다.

소설에서는 관우 및 장비의 살해와 관련된 주연, 반장, 마충, 부사인, 미방, 범강, 장달을 모두 죽였다(주연의 죽음은 84회에 나온다). 특히 관우의 아들인 관흥과 장비의 아들인 장포가 배신자인 부사인과 미방, 범강과 장달을 직접 죽여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고 원혼을 달랬다. 그러나 『삼국지』에 따르면 반장은 234년, 주연은 249년에 죽었다. 참고로 이릉 전투는 221년에 있었으니 반장과 주연은 이릉 전투 이후에도 살 만큼 살다 죽었음을 알 수 있다. 마충·부사인·미방·범강·장달이 언제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이릉 전투에서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비와 제갈량뿐만 아니라 약간의 군사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촉한군의 군사 배치가 잘못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유비의 무식이나 노망 때문이 아니었다. 지형상의 한계 때문이었다.
요약하면 촉한군은 길게 늘어선 군영 때문에 8만 대군의 병력을 집중하여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장강 지형도를 보면 그런 군영들이 고립된 지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군영을 목책으로 만들어 화공에 취약했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육손은 당연히 화공법으로 촉한의 군영을 동시에 공격했다.

한 학자는 이릉 전투가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먼저 개와 고양이처럼 촉나라와 오나라가 싸우고 반목했지만 위나라의 강대함과 대비되는 촉나라의 쇠약, 오나라의 고립 때문에 두 나라는 감정을 버리고 도리어 연합해 위나라에 대항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두 번째로 오나라는 형주 방어에 성공하고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을 통해 촉나라가 형주를 침입할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위나라와의 싸움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나라와 촉나라의 연합은 위나라와의 세력균형을 이루게 하여 삼국정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하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거는 지도자라니. 복수를 ‘사랑’하는 중국인들이 반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이에 착안한 삼국지의 작가들은 상상의 나래를 펴서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복수를 감행했던 이유를 형제애에서 찾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의형제였기에 피가 섞인 형제와 다름없다고. 게다가 의형제를 당연시하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이들의 상상력은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소설의 작가나 청중 혹은 독자들은 세 사람이 의형제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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