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따리의 책을 싸들고 귀가하면서 이동중에 읽은 책은 조선희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의 <클래식중독>(마음산책, 2009).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마음산책, 2009) 2판의 러시아어 표기 감수를 맡은 덕분에 출판사에서 증정본으로 보내온 것으로, 실상은 내가 먼저 부탁한 책이다(검색해보니 '조선희'란 저자가 여럿이군). 한국영화(사)를 더듬는 김에 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한국영상자료원, 2008)와 이효인의 <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개마고원, 2003)도 조만간 챙겨두어야겠다(그러고 보니 이효인 교수도 영상자료원장을 지냈군).

 

제목만 갖고는 무슨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부제가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이다. 씨네21의 첫 편집장을 역임한 저자가 3년간 영상자료원장으로 지내면서 거둔 소출 가운데 하나. 한국 영화감독론과 작품론도 겸하고 있는 책인데, 이런 유형으론 오래전에 읽은 이효인의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열린책들, 1994)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고전영화' 감독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동시대 감독이었던 이장호, 장선우 감독 이야기를 내가 먼저 읽은 탓이겠다.   

첫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이가 '잊혀진 천재' 이장호 감독인데, 그의 문제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오랜만에 상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학 1학년때 변두리 상영관에서 <바보선언> 등과 함께 보았던 영화로 나대로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가운데 하나. 책에 대한 독후감은 다른 꼭지들도 읽은 후에 고려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얼마전 한겨레에 실린 저자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0. 10) “개봉은 잠깐…아카이브는 영원하죠” 

조선희(49)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최근 3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하루도 에누리 없이 꼬박 3년이다. 그의 재임 기간이 새삼 관심을 끄는 건, 이명박 정부의 ‘전 정권 인사 일괄 퇴출 방침’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으로 3년 동안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라는 조씨를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고대 출신이라서 살려준 것이라는 둥, 여자 티오(할당 인원)라는 둥 턱도 없는 해석들이 많았다”며 “나는 고대 인맥에 구명운동을 한 적이 없으며, 이 정부 들어 양성평등 개념이 크게 후퇴했으니 여자 티오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라서’라는 해석도 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개인적인 판단이었는데, 아무리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영상자료원이 영화진흥위원회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관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업무 성과로만 본다면 그는 연임도 가능했다. 취임 당시 4년째 동결됐던 예산을 2배 이상 늘렸으며, 고전 영화를 대대적으로 발굴·복원했고, 복원한 영화들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3년 연속 진출시켰다. 100여편에 불과했던 독립영화 필름을 1600여편으로 늘려놓았고, 디지털 아카이빙을 시작했다. 각종 회고전과 특별전, 기획전으로 자료원 지하 1층 극장은 아연 활기가 넘쳤고, 인터넷으로 고전 영화를 볼 수 있는 온라인 브이오디(VOD) 서비스는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조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성과를 중시하고 또 즐긴다. 자료원 직원들은 조 원장 재임 시절을 “피곤했지만 행복하게 일했다. 무엇보다 성과가 있어서 신이 났다”고 회고한다. 자료원의 존재감이 가장 높게 부각된 시기라는 평이 다수다.

조씨는 “개봉은 잠깐이고 아카이브는 영원하다”는 말로 자료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최근 한국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열광이 있지만, 그마저도 개봉 1년만 지나면 차갑게 식어버리는 현상, 옛날 영화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으로 관심이 없는 분위기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했다.

퇴임에 맞춰 출간한 <클래식 중독>(마음산책)은 고전 영화의 향기에 취했던 지난 3년의 갈무리다. 그의 개인적 경험과 비평, 감독과의 대화, 스타들의 사생활 등으로 엮은 ‘살아 있는 한국영화사’다. <한겨레> 문화부 기자와 <씨네 21> 편집장, 한국영상자료원장을 거치며 길어올린 인간 조선희의 개인 아카이브를 구경하노라면, 거장 감독을 중심으로 분류한 한국 영화의 근현대사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게 된다.

같은 책 말미에 그는 “기관장 일괄 퇴출 정책은 가까스로 구축한 합리적인 시스템(산하기관장 공모제와 임기제)을 한방에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더 문제”라며 “권력으로 못하는 게 없으면 그것이 파시즘”이라고 썼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침묵할 수 없었다”고 조씨는 덧붙였다. 말이 나온 김에, 퇴임 직전까지 유 장관이 주재하는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그에게 이명박 정부 내부의 풍경을 물었다. 그러나 조씨는 “간첩 짓을 하기는 싫다”며 입을 닫았다.

깃드는 곳마다 족적을 남기는 그의 비결은 단순히 일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의리와 성과를 존중하는 (어찌 보면 보수적인) 태도에 있는 것일까. 다음 인생 행로가 세번째 소설 집필이든, “재밌는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든 그는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말리라.(이재성 기자) 

09. 10. 27.  

P.S. 기사 말미에도 언급이 있지만, 조선희 씨는 소설을 쓰기 위해 19년간의 기자생활을 그만 둔 이력이 있다(<클래식중독>을 읽으면서 언젠가 주워들은 기억을 상기하게 됐지만 소설가 김형경 씨가 저자의 여고 동창이다). <클래식중독>을 읽으며 저자의 두 소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생각의나무, 2002)과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 2006)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로선 '재밌는 사업'보다 '세번째 소설'이 더 기대되는 건 물론이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10-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를 부탁해(영화), 엄마를 부탁해(소설), 아가씨를 부탁해(드라마),,,
부탁하지 못한 제 성격은 능력없는 욕심쟁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로쟈 2009-10-29 15:12   좋아요 0 | URL
아가씨를 부탁해도 있나 보군요.^^
 
액체근대란 무엇인가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근대>(강, 2009)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니 책의 역자가 필자이므로 '역자 후기'라고 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 바우만은 리차드 세넷과 함께 개인적으론 '올해의 발견'이라고 꼽을 만한 사회학자이지만 아직 <액체근대>는 완독하지 못했다. 정독할 시간이 얼른 생기면 좋겠다(바우만의 <유동적 사랑>도 새물결의 근간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데, 이 또한 빨리 출간됐으면 싶고).  

  

교수신문(09. 10. 26) 사회관계와 힘에 관한 엄중하고도 온기있는 통찰  

이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때로 숱한 생각과 느낌을 비워낸 것 같은 순간을 맞이하는 행운이 있었다. 책 내용이 무한질주 궤도에 불가피하게 오른 액체근대 세상을 다루니만큼, 멈춰 서서 과연 그러한가를 짚어볼 순간을 만들어준다는 뜻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액체근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쇼핑목록을 들고 운동기구, 자동차, 주말여행, 더 나아가 교양, 친분,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무언가 구매하고 있어야 제대로 하루를 산다고 느낄 지경이다.

오늘을 사는 개인들의 하루 일과들은 일견 연관성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중에는 나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고독한 숙제처럼 비쳐지는 것들도 있다. 연구 작업과 일상의 숙제들이 보편적으로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 둘이 동시에 흔쾌하고도 희망에 찬 일정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측면에서인지, 별개의 것처럼 따로 돌아가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 점검하는 계기를 준다는 점에서 『액체근대』가 해독해낸 세상을 접해볼 필요가 있겠다.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액체근대』에는 현대인의 삶에 속속들이 스며들게 된 근대의 속성,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버리는’ 근대의 징후가 어느 정도까지 관철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회 비평이 담겨있다. 집단적 유대와 결속으로 관계를 만들고 노동에 신성한 의미를 부여하며 공간확장과 그를 통한 정치사회적 우위를 다투는 고전적 근대, 고체근대 혹은 무거운 근대는 종말을 고했다. 고체근대를 연 주체라 할 근대시민은 이제, 그 도착과 실현이 불확실한 근대적 이상을 이정표삼아 무한질주를 해야 하는, 고군분투하는 개인으로 탈바꿈했다.

구체제로부터 해방된 개인은 그 모든 과거의 속박과 억압이 무너져 내리면, 과거보다는 훨씬 진보되고 향상된 새 삶이 보장될 것이라 예상했다. 참정권이 각자의 손에 쥐어졌고, 자유경쟁의 원리에 따라 삶의 복지와 안녕을 스스로 일굴 수 있는 세상. 그런데 실감은 더 잘 살게 된 것 같지 않고 문전박대당하는 일은 더 뼈저리다. 이윽고 구시대의 견고했던 신분제와 지배이념이 근대의 힘에 의해 녹아버리던 그 과정을 찬찬히 거슬러 살펴본 결과 그 거스를 수 없는 액화의 힘이 그들의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다른 것들마저 함께 휩쓸어갔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이 삶의 실현을 위한 절박한 쇼핑에 나서는 액체근대 세상에서, 그 쇼핑이 절박한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상품화된 것들이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경신되고 그만큼 기회가 무궁무진해지는 만큼이나 개인의 자원이 더욱 더 한정된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자원 중에서 으뜸은 시간이겠다. 고전적 근대, 무거운 근대 세상을 지배한 것이 방대한 규모와 육중함을 자랑하는 생산설비, 공간적 지리적 확장을 통한 시장개척이었다면 그와는 대조적으로 가벼운 근대, 액체화된 근대 세상에서는 지리적 영토적 고려로부터 자유롭게 움직이는 자본과 인력에 가장 큰 힘이 실리게 된다. 

액체근대 세상의 공간은 과거 그 안에 거주하는 거주민과의 견고한 결속이 녹아버리고, 수많은 일회적이고 비전통적인 공간들을 양산해냈다. 여기서 저자는 인류학적 통찰을 빌어 동질성을 기반으로 한 집단이 여타집단을 동화시키거나 퇴출시키는 전략이 액체근대의 주요한 공간지배 전략임을 설명하고 있다. 게다가 교통수송의 발전과 일일지구촌 생활을 특징으로 하는 액체 근대의 시간확보의 노력은 가히 전대미문의 범위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현대적 공간, 지하철 역사, 공항 대합실, 자본의 위용을 과시하는 고층건물들이 자아내는 공동화된 도심의 공간들, 이들은 모두 액체근대가 벌이고 있는 시간확보의 질주가 파생시킨 非공간들 혹은 빈 공간들이다. 이 공간들을 함께 묶어주는 공통점은 그것이 지극히 일회적이며, 그 안에 잠시 또는 특정기간 거주하는 거주민들과의 어떠한 지속적 유대나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간은 오히려 그 안에서 자본과 노동력의 화합을 조율해내야 하는 비용과 부담을 물린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인 고려대상이 된다. 값싼 노동력과 자본에 우호적인 시장을 창출해줄 국가권력이 있는 곳이라면 자본은 어디든지 이동할 만반의 태세가 돼 있다. 문제는 그를 위한 이동을 할 때 누가 더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무거운 근대 세상의 전통적 관계와 힘을 녹이고 폐기해 이윤 창출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맹 질주에는 종래의 종신계약이나 평생직장, 혹은 노사간의 인간적 유대와 상호의존 등은 지극히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된다.

담장쌓는 공동체에 대한 비판
바우만이 일컫는 액체근대는 19세기 계몽주의 근대, 무거운 근대, 고체 근대에서 비롯된 근대의 ‘녹이는 힘’이 점차로 삶의 온갖 영역과 요소를 파고들어 모든 영속적이고 지속하는 힘과 관계를 녹여버린 결과, 모든 사회관계가 일회성과 결속탈피를 특징으로 한다. 다른 대상과 결속할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있는 상황에서 이전 대상과의 우직한 연대나 신뢰는 현실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부르는 현실이라는 말이겠다.

액체근대 세상은 결국 근대의 심화, 더 나아가 근대의 편향일로라 부름직하다. 그의 질문의 요체는 이러하다. 액체근대 세상에서 ‘견고한 모든 것들을 녹이는’ 힘이 양날의 칼이라면, 그 칼끝이 과연 어디를 겨냥해왔고 어떻게 고쳐 잡아야 하는가라는 반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해방을 향해 일치단결했던 민주주의의 발전적 동력이 그 또한 액화돼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지는 않은가, 대문자 역사가 장담해왔던 진보에도 기실 수많은 갈래길이 있어서 힘을 쥔 자의 진보와 그렇지 못한 자의 진보가 그 내용을 달리할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조정할 의사일정을 각 집단들이 활발히 내어놓고 있는가, 동질적인 역사적 경험과 언어로 결속한 민족공동체의 의식이 여타집단을 뱉어내고 차단하는 단절의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면 이를 감시하는 공공영역과 그 속에서의 논의가 지속적으로 생성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하나의 학제를 뛰어넘는 포괄적 영역에 걸쳐 수행될 수 있겠다. 

액체근대의 으뜸가는 속성이 시간에 대한 자본의 지배권이라는 그의 진단을 돌이켜보자면, 근대의 액화라는 지구촌의 대세가 타고 흐를 물길이 향후 어떠한 굴곡을 지어낼 지에 대한 논의와 조정 역시 조급한 결론을 최대한 지양하고 충분한 시간과 검증노력이 곁들여진 시간과의 끈기 있는 승부라 여겨진다. 바우만의 『액체근대』가 각 연구영역에서 독창적이고도 파생적 질문들을 배양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이에 근거한다.(이일수 용인대·영문학)  

09. 10. 26.  

P.S. '액체근대' 혹은 '유동적 근대'란 다르게 말하면 '가벼운 근대'이기도 하다. 바우만의 책에는 '무거운 근대로부터 가벼운 근대로'란 절제목도 포함돼 있는데, 자연스레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떠올리게 된다(소설의 1부 제목이 '가벼움과 무거움'이다). 개인적으론 이번주에 강의를 해야 하는 작품이기도 하고, 실제로 바우만의 책에도 쿤데라가 두 차례 언급된다. 내달에는 이 두 책을 소재로 무거움과 가벼움을 주제로 한 글을 하나 써봐야겠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7:19 
    (책) 지그문트 바우만, : 혼자 떨어져 쇼핑하는 개인으로 축소된 시민 — via 로쟈
 
 
돈케빈 2009-10-27 03:08   좋아요 0 | URL
출간 예정인 <유동적 사랑>은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과 함께 읽으면 좋겠는걸요?

펠릭스 2009-10-27 10:18   좋아요 0 | URL
'무거움과 가벼움에 관한 철학(베르트랑 베르줄리)'도 생각나는데요.
 

밀린 원고를 하나 보내고 다른 일을 또 시작하기 전에 잠시 허리를 펴고 보니 오늘이 10.26이다. 서거 30주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날 아침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비상'이 걸려서 못 나오셨고, TV에서는 며칠 동안 장송곡만 나왔다). 이미 '박정희와 그의 유산'(http://blog.aladin.co.kr/trackback/mramor/3161998)이란 페이퍼를 지난주에 걸어두기도 했으므로 그냥 관련서 몇 권의 리스트만 올려놓도록 한다.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박정희 한국의 탄생
조우석 지음 / 살림 / 2009년 10월
16,000원 → 14,400원(10%할인) / 마일리지 8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0월 26일에 저장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이병완 / 나남출판 / 2009년 9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120원(1%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0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0월 26일에 저장

박정희와 친일파의 유령들
한상범 지음 / 삼인 / 2006년 2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9년 10월 26일에 저장

알몸 박정희- 개정판
최상천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2009년 10월 26일에 저장
절판


12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10-26 20:44   좋아요 0 | URL
권총을 심장위에 올리고 선 사내는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기 위한 조교입니다. 예비고사 마지막 해 였습니다. 기억도 희미하지만 갑자기 정규방송이 꺼지고 온통 까만 TV화면에 무슨 장송곡이 지루하게 흘러 나왔습니다. 그 다음 해 5월엔 도시의 중심에서 연기가 솟고 빈솥에 콩튀긴 소리처럼 총소리가 연발 했습니다.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생물학적인 원리죠. 우리가 태어나기 전 시대의 기억과 앞으로 올 기억의 실존감이 '딸과 아빠'와 '죽고 죽임'이 되어 어두운 지하실에서 찢기고 쓸어지는 기억으로 계속될 것임에 희망은 달뒤로 숨고, 절망은 해을 쫒지만 기억만이 강물처럼 흐릅니다.

로쟈 2009-10-26 22:38   좋아요 0 | URL
내년은 그렇게 5.18 30주년이 되겠네요...
 

일제가 1930년대에 중국 동북 지역에 세운 만주국에 대한 책들이 가끔씩 눈에 띈다. 작년에 나온 <주권과 순수성>(나남, 2008)의 부제가 '만주국과 동아시아적 근대'여서 새삼 만주국이란 존재에 대해 상기하게끔 됐는데, 그렇다고 관심분야는 아니어서 읽어볼 형편은 되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어문학사, 2009)은 만약 이 주제에 관심을 갖는다면 가장 먼저 읽어볼 만한 입문서 역할을 해줄 듯싶다. 마침 이번주 시사IN에 서평기사가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타이틀만 보고도 필자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시사IN(09. 10. 23) 미스터리 만주국?

만주(滿洲)를 아십니까? 아마도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졌던 이 땅에 피울음 있다’로 시작하는 <광야에서>라는 노래를 기억하실 겁니다. 생각해보면, 대학 시절 이 노래를 뜨겁게 불렀던 나조차 그때 우리가 왜 한국의 민주주의를 희구하면서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이라는 가사에 전율했는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내게 최초의 만주 이미지는 이육사와 윤동주에게서 왔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이 불붙으면서 이른바 중국의 ‘동북 공정’ 문제가 동아시아 역내의 주요한 분쟁 의제가 되면서 다시금 만주 이미지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주 문제는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 <1Q84>에도 등장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문학청년 덴고의 아버지는 일제 말기 만주에 농업 이민을 갔다가 패전 후 완전히 삶이 뿌리 뽑혀 귀향한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오늘날에도 만주라는 표현을 쓰는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입니다. 중국은 청나라 시대부터 그것을 ‘동북(東北)지역’이라 불렀고, 이는 국경 개념이 희미했던 변경(邊境)을 명백한 중국의 관할로 확정하고자 하는 의욕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만주에 대해 떠드는 것은 최근에 읽은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어문학사) 때문입니다. 한국 근대문학을 연구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만주는 미스터리였습니다. 조선인에게 만주는 국외 무장 항일투쟁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에게 역시 반제국주의 투쟁의 중심 장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일본 대아시아 정책의 최전선이자, 소비에트 남하를 막는 ‘반혁명의 전초기지’였고, 태평양전쟁 이후로는 후방 기지 성격을 띠는 중층적 공간이었습니다.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를 지낸 푸이(왼쪽 세 번째)와 그의 가족. 

만주는 일제 말기 총력전 체제의 희생양
일제 말기 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나는 만주라는 공간에 대해 실감할 수 없었고, 그래서 수 년 동안 이 시기 전문가인 김재용 교수(원광대)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막연하나마 만주의 이미지를 그려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 말기 문인들의 만주체험>(역락)을 김재용 교수의 지도 아래 편집하기도 했지만, 역시 내게 만주는 실감이 없는 한 개념일 뿐이었죠.

그러다가 최근 번역된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을 읽고 보니, 지난 수년간 피상적이던 만주인식의 한계를 넘어 분명한 실체를 얻은 것 같았습니다. 저자인 오카베 마키오의 만주 연구는 일본 지식인들이 견지하는 매우 끈질기면서도 무서운 학문적 태도를 느끼게 합니다. 어떤 직업적 안정 없이도 수십 년에 걸쳐 만주국에 대한 무서울 정도의 집념을 발휘하는 것은 존경스러울 정도지요. 마치 일본에는 임종국 선생이 여러 명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은 1932년 만주에 성립되었던 ‘만주국’을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것은 일본의 파시즘이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반혁명으로 성립되었으며, 만주 역시 조선과 함께 일제 말기 총력전 체제의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점입니다. 만주국이 중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말은 조선의 근대화가 그렇듯 날조된 거짓말이라는 것이지요.(이명원_문학평론가) 

09. 10. 24.  

P.S. 그러고 보니 '북만주 벌판'은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무대이기도 했다. 우리에겐 역사적 공간이면서 판타지적 공간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실체가 잘 잡히지 않기 때문이겠다. 관련 연구서뿐만 아니라 교양서들도 더 나옴 직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09-10-25 15:16   좋아요 0 | URL
2000년 들어서 만주국이나 만주철도에 대한 책들이 국내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어서 고무적입니다.그런데 이명원 씨가 '만주는 중국인에게 반제투쟁의 중심장소'라고 한 것은 오류 같습니다.아무래도 사실상 식민지였기 때문에 중국의 다른 지역보다 억압이 심했지요.왜 만주에서 투쟁이 약했는지를 파고든 책이 이정식<만주혁명운동과 통일전선>입니다.어쨌든 이런 책이 계속 번역되는 건 좋은 현상입니다.

로쟈 2009-10-25 22:21   좋아요 0 | URL
아직 국내의 연구역량은 부족한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10-26 16:09   좋아요 0 | URL
일본쪽에 비하면 아직 부족합니다.하지만 만주를 배경으로 한 문학연구는 상당히 축적이 되었지요.역사학에서도 한석정 등이 있습니다.관동군의 반게릴라 전술을 연구한 윤휘탁도 있구요.만주군벌 장학량을 연구한 이도 있지요.아편정책을 연구한 김에 만주마적에 대해서도 학술적인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관동군과 합작한 친일마적도 있었고 심지어 일본인 마적두목도 있었으니까요.

게슴츠레 2009-10-26 22:01   좋아요 0 | URL
만주와 관련해서 궁금한 게 흔히 관동군이 군사력으로 압도해 건설한 나라라고 하지만, 마냥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꺼림찍한 부분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노이에자이트 님이 말씀하신 '친일마적'이 그 요소 중 하나이지요. 물론 일본의 군사행위를 침략으로 간주하고 대항했던 마적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마적들의 협력이 없었더라면 관동군은 만주국 건국을 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지않은 군사적 부담과 비용을 안았어야 했겠지요. 협력의 이유도 단순히 매수나 협박 뿐만이 아니라 청조 복벽주의자같은 이들도 있었던 걸로 아는데 마적들이 각자 어떤 이유에서 만주국에 참여했는지 규명하는 연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더군요. 이를 통해 만주국 기획 이데올로기의 '허상'적 측면뿐만이 아니라 '이상'적 차원이 잘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로쟈 2009-10-26 22:35   좋아요 0 | URL
연구자들에겐 아직 광활한 지역이 미지의 영토로 남아 있군요.^^

게슴츠레 2009-10-26 15:0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는 한석정 씨의 책이 이 쪽에 발을 들이기 좋은 것 같더군요. 로쟈님이 지적하신대로 만주국에 대한 양가적인 시선(괴뢰국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한 발걸음)을 언급하시고 만주국을 폄하하지도 낭만화하지도 않은 채로 접근해 가시더군요. 그렇다고 만주국을 하나의 케이스 스터디로 국한시키지도 않고 '근대 국민 국가'라는 묵직한 화두에 접근하는 발판으로 삼습니다.

로쟈 2009-10-26 22:35   좋아요 0 | URL
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영국 관련 학술교양서 두 권을 챙겨놓고 싶다. 이영석 교수의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2009)와 유명숙 교수의 <역사로서의 영문학>(창비,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영국, 제국의 초상>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소개와 <역사로서의 영문학>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9. 10. 24) 근대 英사회상으로 24일의 한국 조명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펴냄)은 빅토리아시대 후기 영국 사회의 다양한 내면 풍경을 그림처럼 섬세하게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회구조나 계급관계 같은 거시적 측면보다는 민주주의, 경제 불황, 빈곤, 인종, 여성 문제, 교육, 신앙, 과학 지식 등 미시적인 주제들을 당대 문필가들의 논설을 중심으로 탐색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세계를 내 나름의 시각으로 재현해 독자 앞에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되묻는 사람들, 대불황의 원인을 찾는 문필가와 이스트 엔드 빈민가에서 그 시대의 불행을 고민하는 박애주의자며 유대인 이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밖에도 집안의 천사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진 신여성과 당대 교육현실에 실망하고 불평하는 지식인들도 등장한다.  

영국의 근대화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서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전통의 지배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에서 자본주의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경제적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비유하면 영국의 근대는 조산에 따른 미숙아의 이미지와 같다. 이 경우 전통은 오히려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으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전통과 혁신, 지속과 변화의 야릇한 공존은 영국 근대사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빅토리아 시대 후기는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영국 근대사의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농업 불황기 전통적 지배세력의 급속한 몰락은 그 붕괴 과정의 물살 표면에 떠오른 포말이었다. 전통의 급속한 변화 또는 조락은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궁극적으로 전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온 영국 제국에 동요를 가져왔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내면풍경에 직접 다가서기보다는 당대의 대표적인 평론지 논설에서 논란이 된 주제들을 통해 그 풍경을 탐색하는, 다소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 책에서 재현한 사회적 풍경들을 감상하다보면, 독자들은 어느덧 그 풍경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정치적 논란과 불황, 빈곤과 이민자들, 여성 문제에서 시험에 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집필과정에서 오늘의 시각을 의도적으로 투영하지는 않았는데도 이 같은 인상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다른 사람의 삶의 세계에서 공감 영역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경험을 더 넓혀가고자 하는 인문학 특유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이영석 광주대 교수)   

 

교수신문(09. 10. 19) 이글턴의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답습했는가

유명숙 교수의 『역사로서의 영문학』은 출간되자마자 일간지, 인터넷에 소개되고 학계의 중요한 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간학술도서로서 누리는 이 예외적인 지위는 창비, 서울대 교수라는 프리미엄만은 아닐 것이다. 허나, 바짝 긴장을 하고 들여다본 이 책은 며칠간 정독을 하고 요약을 해도 난공불락이었다. 저자가 간간히 개탄하는, 1960년 대 이후 영문학에 불어닥친 ‘탈문학’이 가져다준 ‘꼼꼼한 읽기 버리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영락없는 꼼꼼히 읽기주의자인 근대적 산물이다. 비록 나의 학문이 얕다하더라도, 그리고 서로의 전공영역이 장르나 시대에서 약간 비껴가지만, ‘글의 보편성’과 동시대 학자로서의 ‘학문적 시대감각’이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프리미엄을 걷어내고 이 곤혹스러움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서평의 주요한 얼개가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테리 이글턴의 ‘탈문학’을, 립 밴 윙클이 1960년대 잠이 들어 1980년대 깨어났다면 느꼈을, ‘영문학에서의 상전벽해’로 보고 있다. (영)문학과에서 탈문학이 제기되는 아이러니를, 평생 긍정적 의미로 써온 단어들인 인본주의, 보편성, 진리 객관성이 부정적 함의를 띠는 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글턴은 경험주의적 전통이 강하고 이론이 약한 영국에서 프랑스 이론의 주자인 알뛰쎄르나 푸꼬의 이론을 받아들여 근대에 제도화된 ‘영문학’이 正典과 비정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등으로 나누어 서양근대담론체제를 유지해온 이데올로기로 본다.

‘탈문학’과 서양근대담론체제
필자를 포함해 영문학 연구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마솥 뚜껑처럼 눌렀던 이글턴을 저자는 작심하고 비판한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저자에게 있어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난 그렇게 자라 이렇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글턴을 이겨내고 드디어 학자로서 자립하게 됐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자 서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글턴의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답습했는가. 

저자가 보기에, 이글턴은 정치성을 앞세우고 역사적 읽기는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프랑스 혁명기 이후 탈역사적인 상상력과 상징의 자율성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담론이 낭만기의 인식소(episteme)로 작동했다고 본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한 낭만적 환멸이 낭만주의 담론의 기반을 만들어 탈정치적인 근대 영문학이라는 제도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유명숙 교수의 비판은 탁월하다. 저자는 낭만(주의)기의 시와 낭만주의 담론은 다르다고 본다. 낭만기의 시는 워즈워스나 블레이크와 같은, 19세기를 전후로 한 프랑스 혁명기인 낭만기에 활동한 시인들의 작품 중 정전으로 진입한 저작을 의미한다. 낭만주의 담론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낭만주의 시를 국민문학 정전으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그 논거가 되는 일련의 가정들로 정치와 예술의 이항대립이 핵심이며 파시즘적 요소가 농후한 담론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격적인 근대체제로 가는 격변기로 낭만기를 다시 읽고자 한다. 유 교수의 논의의 방점은,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담론이 거의 100년이나 앞선 과거로 돌아와서 낭만기를 심미적이고 유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상사적인 쟁투가 결국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담론을 낳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다.

낭만주의 담론의 역사적 과정 추적
거칠게 요약하자면,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에드먼드 버크를 두령으로 하는 자유주의와 루소적 감성주의의 쟁투이며, 루소적 체제 순응으로 타협하지 못하고 니체적 ‘비판적’ 역사관을 지닌 감성주의 좌파 자꼬뱅의 극단성이 감성주의적 양육세대인 워즈워스와 블레이크를 환멸케 한 원인이라고 본다. 낭만적 환멸이란 혁명의 실패에 대한 절망적 현실인식 속에서 ‘주어진 의미체계’를 ‘나’의 일부로 맞대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모표를 꽂고 런던 거리를 활보하곤 했던 블레이크가 현실에 등을 돌리고 개인적인 신화체계를 구축했다는 식의 반전은 낭만적 환멸의 성격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다. 즉, 낭만기를 지배한 것은 정치와 예술의 이항대립을 내장한 낭만주의 담론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이분법적 틀이며, 낭만기는 탈정치화가 아닌, 정치적 과잉의 시대였다고 본다. 

이러한 감성주의적 극단성은 자연 공리주의적 개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극단적 효용성을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유례없는 부의 유입과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을 진보와 비진보의 담론으로 전환시켜 자유주의의 급진파를 설득해 참정권 및 개혁에 나선다. 이런 공리주의의 폐해를 인식한 J. S. 밀이 상상력을 중요시해 물질적 진보의 대립항으로 탈정치화된 예술과 문학이 존립근거를 얻게 되고 이것이 낭만주의 담론 구성의 핵심이 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유명숙 교수는 이글턴의 무엇을 답습하고 있는가. 우선 저자는 ‘문학은 이데올로기’라는 이글턴의 명제에 충실할 뿐 아니라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도 이념적 쟁투로 보는 철저한 사회적 구성주의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글턴의 관점 그대로 18세기를 이상화한다.  

18세기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시기이며 개인에서 공동체로 가는 혁명을 낙관하던 시대다. 이 낙관의 시대를 과격 자꼬뱅이 반동을 불러옴으로써 파괴시켰기 때문에 역사의 원죄를 그들에게 돌린다. 이것은 아렌트나 헌트 같은 자유주의적 정치사상가의 저작을 인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유명숙 교수가 자본의 가장 악랄한 마지막 원시적 축적기라 할 수 있는 18세기를 이상화하는 것은 21세기에 와서도 시민적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낙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기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모든 장마다 되풀이되는 똑같은 소리다. 논의와 서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장마다 이글턴적인, 난해하나 상투적인 문장들이 비슷비슷하게 널려있다. 약간 과장하면 1장에서 7장까지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다만 주인공이 탈문학, 프랑스 이론, 낭만주의 담론, 감성주의 등으로 달라지느냐, 아니면 정보가 좀 더 추가되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더구나 논의의 전개를 좀 즐길만하면 이글턴이 역사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고 논의는 중도에 짤린다. 이것은 유명숙 교수가 아직도 강박적으로 이글턴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책의 퇴고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았거나.

강박 또는 집요한 문제의식
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와 집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데서 한편의 학문적 성장소설을 넘어, 앞으로 저자가‘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뉴턴’이 될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 지식인에게는,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더욱 매혹적으로 되는 ‘낭만적 환멸’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영문학’이 표제가 된 것은 그만큼 영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담당자로서 느끼는 고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김봉률 동국대·영문학)  

09. 10. 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