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관련 학술교양서 두 권을 챙겨놓고 싶다. 이영석 교수의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2009)와 유명숙 교수의 <역사로서의 영문학>(창비,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 <영국, 제국의 초상>에 대한 저자 자신의 소개와 <역사로서의 영문학>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9. 10. 24) 근대 英사회상으로 24일의 한국 조명 

‘영국, 제국의 초상’(푸른역사 펴냄)은 빅토리아시대 후기 영국 사회의 다양한 내면 풍경을 그림처럼 섬세하게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사회구조나 계급관계 같은 거시적 측면보다는 민주주의, 경제 불황, 빈곤, 인종, 여성 문제, 교육, 신앙, 과학 지식 등 미시적인 주제들을 당대 문필가들의 논설을 중심으로 탐색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세계를 내 나름의 시각으로 재현해 독자 앞에 펼치고 싶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풍경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왜 필요한지 되묻는 사람들, 대불황의 원인을 찾는 문필가와 이스트 엔드 빈민가에서 그 시대의 불행을 고민하는 박애주의자며 유대인 이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밖에도 집안의 천사 역할을 과감히 벗어던진 신여성과 당대 교육현실에 실망하고 불평하는 지식인들도 등장한다.  

영국의 근대화는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조건이 충분히 성숙한 가운데서 전개되지 않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전통의 지배가 여전히 강력한 사회에서 자본주의 및 그와 관련된 여러 경제적 변화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비유하면 영국의 근대는 조산에 따른 미숙아의 이미지와 같다. 이 경우 전통은 오히려 근대화의 토양이 되었으며 적대적 관계가 아닌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전통과 혁신, 지속과 변화의 야릇한 공존은 영국 근대사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빅토리아 시대 후기는 매우 중요하다. 이 시기에 영국 근대사의 이러한 특징이 커다란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다. 농업 불황기 전통적 지배세력의 급속한 몰락은 그 붕괴 과정의 물살 표면에 떠오른 포말이었다. 전통의 급속한 변화 또는 조락은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두드러진 현상이었고, 궁극적으로 전통에 기반을 두고 발전해온 영국 제국에 동요를 가져왔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나는 19세기 말 영국 사회의 내면풍경에 직접 다가서기보다는 당대의 대표적인 평론지 논설에서 논란이 된 주제들을 통해 그 풍경을 탐색하는, 다소 우회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 책에서 재현한 사회적 풍경들을 감상하다보면, 독자들은 어느덧 그 풍경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정치적 논란과 불황, 빈곤과 이민자들, 여성 문제에서 시험에 관한 논쟁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도 매우 낯익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집필과정에서 오늘의 시각을 의도적으로 투영하지는 않았는데도 이 같은 인상을 주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는 아마도 다른 사람의 삶의 세계에서 공감 영역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우리의 삶의 경험을 더 넓혀가고자 하는 인문학 특유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이영석 광주대 교수)   

 

교수신문(09. 10. 19) 이글턴의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답습했는가

유명숙 교수의 『역사로서의 영문학』은 출간되자마자 일간지, 인터넷에 소개되고 학계의 중요한 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신간학술도서로서 누리는 이 예외적인 지위는 창비, 서울대 교수라는 프리미엄만은 아닐 것이다. 허나, 바짝 긴장을 하고 들여다본 이 책은 며칠간 정독을 하고 요약을 해도 난공불락이었다. 저자가 간간히 개탄하는, 1960년 대 이후 영문학에 불어닥친 ‘탈문학’이 가져다준 ‘꼼꼼한 읽기 버리기’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나는 영락없는 꼼꼼히 읽기주의자인 근대적 산물이다. 비록 나의 학문이 얕다하더라도, 그리고 서로의 전공영역이 장르나 시대에서 약간 비껴가지만, ‘글의 보편성’과 동시대 학자로서의 ‘학문적 시대감각’이라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프리미엄을 걷어내고 이 곤혹스러움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서평의 주요한 얼개가 되리라 생각한다. 

저자는, 테리 이글턴의 ‘탈문학’을, 립 밴 윙클이 1960년대 잠이 들어 1980년대 깨어났다면 느꼈을, ‘영문학에서의 상전벽해’로 보고 있다. (영)문학과에서 탈문학이 제기되는 아이러니를, 평생 긍정적 의미로 써온 단어들인 인본주의, 보편성, 진리 객관성이 부정적 함의를 띠는 것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글턴은 경험주의적 전통이 강하고 이론이 약한 영국에서 프랑스 이론의 주자인 알뛰쎄르나 푸꼬의 이론을 받아들여 근대에 제도화된 ‘영문학’이 正典과 비정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 등으로 나누어 서양근대담론체제를 유지해온 이데올로기로 본다.

‘탈문학’과 서양근대담론체제
필자를 포함해 영문학 연구자들의 머리와 가슴을 가마솥 뚜껑처럼 눌렀던 이글턴을 저자는 작심하고 비판한다.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저자에게 있어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란 ‘난 그렇게 자라 이렇게 성공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글턴을 이겨내고 드디어 학자로서 자립하게 됐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자 서평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이글턴의 무엇을 넘어서고 무엇을 답습했는가. 

저자가 보기에, 이글턴은 정치성을 앞세우고 역사적 읽기는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프랑스 혁명기 이후 탈역사적인 상상력과 상징의 자율성을 특징으로 하는 낭만주의 담론이 낭만기의 인식소(episteme)로 작동했다고 본다. 혁명에 대한 반동으로 규정한 낭만적 환멸이 낭만주의 담론의 기반을 만들어 탈정치적인 근대 영문학이라는 제도가 성립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유명숙 교수의 비판은 탁월하다. 저자는 낭만(주의)기의 시와 낭만주의 담론은 다르다고 본다. 낭만기의 시는 워즈워스나 블레이크와 같은, 19세기를 전후로 한 프랑스 혁명기인 낭만기에 활동한 시인들의 작품 중 정전으로 진입한 저작을 의미한다. 낭만주의 담론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낭만주의 시를 국민문학 정전으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그 논거가 되는 일련의 가정들로 정치와 예술의 이항대립이 핵심이며 파시즘적 요소가 농후한 담론이다.  

그래서 저자는 본격적인 근대체제로 가는 격변기로 낭만기를 다시 읽고자 한다. 유 교수의 논의의 방점은,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담론이 거의 100년이나 앞선 과거로 돌아와서 낭만기를 심미적이고 유기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전후의 사상사적인 쟁투가 결국 19세기 말의 낭만주의 담론을 낳게 되는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는 데 있다.

낭만주의 담론의 역사적 과정 추적
거칠게 요약하자면,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에드먼드 버크를 두령으로 하는 자유주의와 루소적 감성주의의 쟁투이며, 루소적 체제 순응으로 타협하지 못하고 니체적 ‘비판적’ 역사관을 지닌 감성주의 좌파 자꼬뱅의 극단성이 감성주의적 양육세대인 워즈워스와 블레이크를 환멸케 한 원인이라고 본다. 낭만적 환멸이란 혁명의 실패에 대한 절망적 현실인식 속에서 ‘주어진 의미체계’를 ‘나’의 일부로 맞대면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의 모표를 꽂고 런던 거리를 활보하곤 했던 블레이크가 현실에 등을 돌리고 개인적인 신화체계를 구축했다는 식의 반전은 낭만적 환멸의 성격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다. 즉, 낭만기를 지배한 것은 정치와 예술의 이항대립을 내장한 낭만주의 담론이 아니라 혁명과 반혁명의 이분법적 틀이며, 낭만기는 탈정치화가 아닌, 정치적 과잉의 시대였다고 본다. 

이러한 감성주의적 극단성은 자연 공리주의적 개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극단적 효용성을 주장하는 공리주의는 식민지 경영으로 인한 유례없는 부의 유입과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을 진보와 비진보의 담론으로 전환시켜 자유주의의 급진파를 설득해 참정권 및 개혁에 나선다. 이런 공리주의의 폐해를 인식한 J. S. 밀이 상상력을 중요시해 물질적 진보의 대립항으로 탈정치화된 예술과 문학이 존립근거를 얻게 되고 이것이 낭만주의 담론 구성의 핵심이 된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그렇다면 유명숙 교수는 이글턴의 무엇을 답습하고 있는가. 우선 저자는 ‘문학은 이데올로기’라는 이글턴의 명제에 충실할 뿐 아니라 프랑스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도 이념적 쟁투로 보는 철저한 사회적 구성주의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글턴의 관점 그대로 18세기를 이상화한다.  

18세기는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시기이며 개인에서 공동체로 가는 혁명을 낙관하던 시대다. 이 낙관의 시대를 과격 자꼬뱅이 반동을 불러옴으로써 파괴시켰기 때문에 역사의 원죄를 그들에게 돌린다. 이것은 아렌트나 헌트 같은 자유주의적 정치사상가의 저작을 인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유명숙 교수가 자본의 가장 악랄한 마지막 원시적 축적기라 할 수 있는 18세기를 이상화하는 것은 21세기에 와서도 시민적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낙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기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모든 장마다 되풀이되는 똑같은 소리다. 논의와 서술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장마다 이글턴적인, 난해하나 상투적인 문장들이 비슷비슷하게 널려있다. 약간 과장하면 1장에서 7장까지 똑같은 내용의 반복이다. 다만 주인공이 탈문학, 프랑스 이론, 낭만주의 담론, 감성주의 등으로 달라지느냐, 아니면 정보가 좀 더 추가되느냐 마느냐일 뿐이다. 더구나 논의의 전개를 좀 즐길만하면 이글턴이 역사성을 지니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고 논의는 중도에 짤린다. 이것은 유명숙 교수가 아직도 강박적으로 이글턴에 묶여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책의 퇴고과정을 철저히 거치지 않았거나.

강박 또는 집요한 문제의식
하지만 이 책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와 집요한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데서 한편의 학문적 성장소설을 넘어, 앞으로 저자가‘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뉴턴’이 될 가능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다른 한편으로 지식인에게는,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더욱 매혹적으로 되는 ‘낭만적 환멸’이 아니라 ‘역사로서의 영문학’이 표제가 된 것은 그만큼 영문학이라는 분과학문의 담당자로서 느끼는 고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김봉률 동국대·영문학)  

0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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