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5회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5회를 발췌해놓는다. <실재계 사막으로의 초대>를 읽기 전에 이번 회까지는 '실재계'란 말에 대해 먼저 살펴보았다. 이제 겨우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305쪽) 여기서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Desire is nothing personal)’란 말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나의 욕망’이란 말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칭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욕망을 어디에 두었더라?”거나 “너, 내 욕망 가져갔니?”라고 말할 수 없다. 욕망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정도면 ‘괴물’이라 부름직하지 않을까.

이 ‘괴물’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것이 <HOW TO READ 라캉>의 4장 ‘실재의 수수께끼’다. 라캉의 ‘라멜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장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라멜라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분대상(partial object)’이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엄마의 ‘신체’ 없이도 엄마의 젖가슴을 대신하며 존속하는 젖꼭지 말이다. 지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예로 든다. 고양이가 사라졌는데도 남아있던 미소가 생각나시는가? 우리의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나는 미소 없는 고양이를 본 적은 있어. 하지만 고양이 없는 미소라니!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운데!”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이런 ‘고집’, ‘리비도의 맹목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고집’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명이 ‘죽음충동’이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자생물학의 ‘불멸의 이중나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유기체에 주어진 자연적 한계를 벗어나, 심지어 유기체의 죽음까지 초월하여 존속하는 기괴한 고집” 같은 것이다. 그런 죽음충동과 부분대상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다. 알다시피 이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신는 마술 구두는 소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든다. “그 구두는 모든 인간적 제한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존속하는 소녀의 무조건적 충동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불쌍한 소녀가 구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다리를 잘라내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참고삼아 말하면,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의 성인용 버전은 잘만 킹의 성애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 시리즈다. <X-파일>에서 멀더 요원으로 등장하는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의 우편함으로 오는 여성들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 열정, 음모, 배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이 시리즈에서 ‘빨간 구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은유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

혹은 마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주 낯익지만 갑자기 아주 낯선 것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 ‘안’과 ‘밖’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장난스럽게 ‘괴물(thing)’이라 불렀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실재(the real)를 가리킨다는 게 이글턴의 설명이다. 라캉이 만년에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1979)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만족했을는지도 모른다. 지젝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괴한 외계 생명체는 라캉의 라멜라와 닮았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라캉이 이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라캉의 라멜라와 ‘에일리언’에 대해선 기회가 닿을 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보다 더 쉬운 경로로 실재(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지젝이 드는 건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이다. 주인공 떠돌이가 실수로 호각을 삼키고,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 소리가 나는 코믹한 장면이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유령 같은 소리, 신체 없는 자율 기관으로서의 소리,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기생충이나 낯선 침입자 같은 소리 말이다.”(<HOW TO READ 라캉>, 111-112쪽)

공갈 젖꼭지부터 체셔 고양이의 미소, 빨간 구두, 뱃속에서 나는 호각소리까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일종의 ‘신체 없는 자율 기관’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돼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즉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사실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되지 않는 외재적 사물”은 실재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다. 하지만 지젝은 방향을 전환하여 실재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란 ‘실체적 사물(the substantial Thing)’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곧 상징계의 간극이 불러낸 효과라는 것이다. 라캉-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상응한다. 아인슈타인이 휘어진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그러한 공간의 휘어짐이 물질의 효과라고 보았다. 즉 물질이 원인이고 공간의 휘어짐이 그 결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반면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을 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그 휘어짐의 효과다.”  

(...) 

10. 0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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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08-24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대자의 초상...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자꾸 이렇게 보여주시면... ㅜ_ㅜ

로쟈 2010-08-25 21:51   좋아요 0 | URL
한번만 더 보여드리면 넘어가시겠네요.^^

lo초우ve 2010-08-2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좌우지간....
책 한권 읽는데 일주일에서 열흘이나 걸리는구만... ㅡ,.ㅡ;;
암튼...
로쟈님때문에 부지런히 아주 열심히 읽어야 소개해주신 책들을 볼 수 있는뎅...
보고싶은 욕심은 많은데 진도가 안늘어서리.....
아이겅 미치고 환장할 노릇....
휴~~~~~~~~~~~~~ ㅡ,.ㅡ;;
그래도 천천히.. 천천히라고??
이런 된장~!! ㅡ,.ㅡ;;
아휴~~~~~ 천천히는 무슨....
부지런히 읽어야징..ㅋㅋ

로쟈 2010-08-25 21:51   좋아요 0 | URL
두꺼운 책은 일주일도 더 걸리죠.^^;

2010-08-25 15: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5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10-08-26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한 100회정도분량으로 길고 굵게 해주시길 기대해 봅니다..그래서 단행본으로 나올수 있다면 더 좋겠네요 ^^

로쟈 2010-08-27 13:05   좋아요 0 | URL
네, 무사히 완결되면 단행본은 내년 상반기쯤 나올 거예요.^^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 대담이 내일 저녁 청어람 아카데미 지하소강당에서 열린다(http://blog.aladin.co.kr/mramor/3933690 참조). <유토피아 이야기>의 번역자이자 <메트로폴리탄 게릴라>의 저자 박홍규 교수와 대담을 나누게 됐는데, 조연 역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제는 '우리시대의 유토피아를 찾아서'이다. 겸사겸사 멈퍼드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현재 구할 수 있는 멈퍼드(멈포드)의 책은 세 권밖에 되지 않아서, 박홍규 교수의 저서도 몇 권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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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장 정리 일이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데, 잠시 틈을 내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어제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노마드북스, 2010)와 같이 구입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역사서 <아주 평범한 사람들>(책과함께, 2010)을 다룬 기사다. 같이 묶은 데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브라우닝의 책은 '홀로코스트' 연구서이고 이 분야의 '학장'이라고 할 라울 힐베르크에게 헌정된 책이다.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8)의 저자 힐베르크 말이다. 소개는 이렇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1992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으며(1998년 재판), 한국어판을 포함하여 현재까지 11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사회 하층 계급의 평범한 중년 남성들로 구성된 나치의 한 예비경찰부대가 수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또한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한 사례를 심층 연구한 이 책은 라울 힐베르크의 선구적 업적인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의 뒤를 잇는 홀로코스트 연구의 또 다른 기념비적 저서로 평가받는다."  

경향신문(10. 08. 21) 특수 상황선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연쇄살인범이 잡히면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악마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류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극도로 유대인을 증오했거나 잔악한 사람들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즉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1992년 처음 발표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원제 Ordinary Men)은 이런 질문을 물고 늘어져 강력한 가설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목에 등장한 ‘평범’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게 만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주창했듯, 사악함이나 세뇌효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등 심리적 요인이 잔혹한 행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학살 책임자나 피해자보다는 학살을 직접 수행한 말단의 당사자를 집중 추적한 연구서로 최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뒤 요나 골드하겐이라는 학자가 같은 자료로 브라우닝과 정반대의 결론, 즉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 책을 출간하면서 꽤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브라우닝은 개정판(98년) 후기에서 골드하겐의 공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양자 사이의 논쟁의 뼈대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아주 평범한 학살 집행자들’은 나치 독일 당시의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43년 폴란드에 투입돼 유대인 3만8000여명을 학살하고, 4만4200여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명실상부한 ‘죽음의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중년 남성 500여명으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 구성원은 대부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철저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은 정예부대는커녕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검찰이 1960년대에 전직 101예비경찰대대원 125명을 취조한 기록을 분석,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전문가’가 돼 갔는지 규명했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 작전에 나서기 직전 101예비경찰대대의 지휘관은 임무를 설명하면서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다. 500여명 가운데 12~1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유대인 1500여명의 머리통을 총탄으로 차례차례 날려버리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물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몇명 죽이고 나서는 빠져나온 부대원도 생겼다. 20% 정도가 열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놀랍지 않은가. 10명 가운데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니와 범죄자도, 적군도 아닌 민간인을 시체더미로 만드는 데 나선 것이다. 학살 작업을 거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들도 첫날의 경험을 한 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역겨움을 호소했다. 부대로 돌아와 독한 술에 만취했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말한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대부분은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학살을 즐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요소는 ‘동조(同調)’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체면을 중시했고, ‘최고위층의 명령’이라는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

브라우닝은 “학살을 저지른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결코 사면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브라우닝의 결론은 평범한 사람도-나를 포함해서-특수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우닝도 “잔혹성은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뿌리를 볼 때 사회적”이라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 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우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지그문트 바우만)라는 명제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해가 홀로코스트 학살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었으니까.(김재중기자) 

10. 08. 21.  

P.S. 기사 말미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이 언급되는데, 바우만의 <모더니티와 홀로코스트>도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 번역중이란 얘기를 언제 들은 것도 같은데 정확하진 않다. 덧붙여, 츠베탕 토도로프의 <극한에 직면하기> 같은 책도 소개되면 좋겠다. 몇년 전 프리모 레비를 읽을 때 들춰본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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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1 1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2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 4회

어제와 오늘 사이에 하루가 지나갔을 뿐이지만 체감 시간으론 몇 년이 흐른 듯하다. 이사준비로 어젯밤 늦게까지 땀을 빼고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던 게(포장이사이니 힘이 들 건 별로 없었지만) 이유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공간이 달라졌다는 점(2004년에 러시아에 체류한 걸 고려하면 5년만이다!). 다시 '정상적인' 일상의 리듬과 감각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듯하다. 그때까지는 '1박2일'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기분으로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따라 읽는다. 엊저녁에 교정을 봤건만 '토끼굴'에 굴러떨어진 것처럼 새삼스럽다. 전문은 연재코너에서 읽으실 수 있고 여기에 옮겨놓는 건 그 일부이다.   

“토끼굴은 일정한 직선 방향으로 터널처럼 뻗어 있다가, 갑자기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앨리스는 너무 깊어 보이는 곳으로 떨어지기 전에 멈춰야지 하는 생각을 할 틈조차 없었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자, 이제 네오와 함께 모피어스를 따라 굴러 떨어진 ‘토끼굴’이다. 이런 경우엔 보통 인원 점검을 다시 하지만, 그럴 형편은 아니어서 대신에 ‘RSI’에 대한 복습만 간단히 하도록 한다. 실재계-상징계-상상계 얘기다. 교재는 다시 <HOW TO READ 라캉>이다. 상징계에 대한 지젝의 설명을 따라가 본다. 멕시코에선 TV 드라마를 가공할 만한 속도로 찍는다고 한다. 매일 25분짜리 에피소드를 찍어대는데 배우들에겐 미리 대본을 받아보고 연습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당일 아침에 그날 찍을 대본을 나눠준다는 홍상수 감독보다 더 심한 경우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래도 찍을 건 찍는다. 어떻게? 멕시코 방식은 이어폰을 활용한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연출자의 지시에 따라 배우가 즉석에서 연기하는 것이다. “자 이제 뺨을 한 대 갈기고 그를 증오한다고 말을 해. 그리고 껴안아!” 지젝이 보기엔 바로 이런 것이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the big Other)’이다.  

이 대타자는 상징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말하는 존재로서 우리가 타인과 대화할 때, 우리의 발화 행위는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전제에 의존한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문법 규칙을 공유해야 하고 동일한 생활 세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박쥐와 소통하기 어려운 것은 박쥐와 우리 사이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상징적 차원 혹은 상징적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스스로를 재볼 수 있는 일종의 척도다. 대타자가 단일한 대행자(agent)로 인격화되거나 사물화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세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면서 언제나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혹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신이 인격화의 예라면, 내게 명령을 내리고 나의 삶을 바치도록 만드는 자유니 공산주의니 민족이니 하는 대의(Cause)는 사물화의 예이다. 요컨대 우리의 현실을 관장하고 조정하며 인도하는 ‘신’, 자유’, '공산주의’, ‘민족’ 등등이 모두 대타자에 속한다. 우리가 ‘소타자(small other)’라면 이 소타자(개인)들의 의사소통에는 항상 대타자가 끼어든다. 말이 좀 어려운가? 이럴 땐 지젝식 EDPS를 활용하자.  



한 가난한 농부가 난파를 당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됐는데, 알고 보니 신디 크로퍼드와 단둘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한때 세계 3대 모델로 불리기도 했던 미녀다. 그렇다고 굳이 신디 크로퍼드를 고집할 이유는 없으며 각자가 알아서 다른 미녀로 대체해도 좋다. 하여간에 둘이 섹스를 한 후에 신디가 농부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대답은 물론 “그레이트!” 하지만 자신의 만족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가지 사소한 부탁을 들어달라고 농부는 말한다. 바지를 입고 얼굴엔 콧수염을 그려서 자기 친구처럼 분장해달라는 것이다. 자신이 변태가 아니라고 겨우겨우 안심시킨 농부는 신디가 그의 원대로 분장을 하자 그녀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쿡 찌르고 씩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내가 말이야 방금 전에 신디 크로퍼드와 섹스했다!” 

여기서 “언제나 증인으로 현존하는 이 제삼자는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의 가능성을 배반한다.”(<HOW TO READ 라캉>, 21쪽) 즉 “방해받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인 쾌락”이란 건 없다. 그런 건 거짓말이다. 아무리 최소한이라도 섹스는 언제나 ‘전시적’이며 다른 사람의 응시에 의존한다. 남이 봐줘야 하며 알아줘야 한다(그래서 비디오로 찍어두기도 한다). 제삼자가 개입하지 않는 섹스가 ‘상상적 섹스’라면 농부가 자신의 만족감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원했던 건 그 ‘상상적 섹스’를 ‘상징적 섹스’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 친구라는 제삼자가 필요했다. 이 ‘제삼자’를 가리키는 말이 바로 ‘대타자’이다. 그렇다면 바야흐로 대타자는 무소부재하며 전지전능한가? 그렇지는 않다. 대타자는 무인도에 난파당한 농부가 신디의 분장을 통해 불러낸 친구처럼 ‘주관적 전제(subjective presupposition)’ 혹은 ‘주관적 가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비실체적이며 말 그대로 가상적(virtual)이다. 그렇다면 지젝의 이런 주장이 이해가 될 것이다.  

“대타자는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행위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대타자의 위상은 공산주의나 민족 같은 이데올로기적 대의의 위상과 같다. 그것은 자신이 대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개인들의 실체적 토대이며, 개인들의 존재적 기반이며, 삶의 의미 전체를 제공하는 참조점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존재하는 것은 개인들과 그들의 행위뿐이다. 그래서 이 실체는 개인들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한에서만 현실적으로 작동한다.”

간단히 말해서, 대타자라는 비실체적 ‘실체’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개인들이 존재할 때만 힘을 갖는다. 대타자가 규칙 같은 것이라면, 그것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규칙을 지키는 이들이 존재해야만 한다. 가령 체스 경기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체스 경기자가 있어야 하며, 축구의 규칙이 의미를 가지려면 손을 사용하지 않고 공을 다루려는 축구 선수들이 있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체스 경기자와 축구 선수들만으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게임이 게임으로서 성립하려면 거기엔 규칙(대타자)이 적용돼야 하고 작동해야 한다. 이 규칙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우리는 지난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 오래 전에 쓰인 서평이긴 하지만 라캉-지젝의 ‘실재’ 개념을 능숙하게 정리한 문학평론가 테리 이글턴의 글을 잠시 따라가 본다. <반대자의 초상>(이매진, 2010)에 수록돼 있는 “즐거운 시간 되세요!”라는 서평이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영원히 괴물을 품고 사는 존재이며, 우리 존재의 핵심에는 잔인할 정도로 낯선 무언가가 있다고 보았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이지만 우리에게 전혀 무관심한 그것,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일컬은 이것은 우리에게 목적이라는 환상을 부여하지만, 그 자체로는 목적도 감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 쇼펜하우어에 깊은 관심을 가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 괴물성의 비형이상학적 양상으로 제시한다.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우리를 조종한다.”(305쪽)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점은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이질적인 부분’ 혹은 ‘괴물성’이라는 데 있다. 적어도 프로이트는 그렇게 보았다. 그리고 라캉은 한 공포영화에서 착상을 얻어 이것을 ‘괴물(Thing)’이라고 불렀다. 다음 회에는 이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참고로, <반대자의 초상> 역주에서 라캉이 착상을 얻은 영화가 존 카펜터의 <괴물>이라고 해놓았는데, 착오다. 라캉이 본 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1982)이 아니라 하워드 혹스의 <괴물>(1951)이다(라캉은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나도 하워드 혹스의 영화는 보지 못했고, 카펜터의 영화만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한 대중연예지가 ‘역대 최고의 SF영화 톱 25’를 뽑았을 때 10위에 선정된 수작이다. 그럼 1위에 오른 작품은? 바로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 

10.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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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0 0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20 07: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8-2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대타자의 개념을 완전 잘못 이해하고 있었어요.. 정말 이해하기 쉽고 명확합니다.

로쟈 2010-08-20 23:29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입니다. 제 역할은 가이드라서요.^^
 

오랜만에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어제 보낸 원고인데,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 <차 한 잔> 읽기이다. 분량상 한번 더 다루어야 할 듯하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269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펭귄판 『가든파티』의 서문에서 로나 세이지는 맨스필드를 가리켜 “배제, 불안, 이동, 단속성을 글로 피력했던 대단한 모더니즘 작가”(one of the great modernist writers of displacement, restlessness, mobility, impermanence)였다고 평했다. 그녀를 특징짓는 명사들은 모두 이동성의 범주에 속한다. 가난한 축에 속했다면 ‘자주 이사를 다닌 모더니즘 작가’로 불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러한 특징은 맨스필드 자신이 뉴질랜드 태생이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활동한 작가였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맨스필드가 작품 속에 그렇게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중의 하나가 ‘계급의식’이다. 맨스필드의 문학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가든파티」를 비롯한 몇몇 작품에서는 두드러지는 주제다. 나로선 특히 「차 한 잔」 같은 작품으로 맨스필드를 기억하게 된 까닭에 더 강조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선 주인공은 결혼 2년차의 로즈머리 펠이다. 귀여운 아들이 하나 있고, 남편은 그녀를 끔찍이 사랑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부부가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 쇼핑을 하고 싶을 때는 평범한 사람들이 동네가게 가듯이 파리로 훌쩍 떠나버리는 식이다. 꽃을 사고 싶으면 고급 꽃가게에 들러서 이것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라일락은 싫다고 말하면 점원은 지당하다는 듯이 굽실거리며 라일락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운다. 그리고는 가냘픈 여점원이 커다란 흰 종이 봉지를 한 아름 안고서 비틀거리며 차를 타는 곳까지 그녀의 뒤를 따른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오후 로즈머리 펠은 자주 들르는 골동품 가게에 들렀다가 주인이 소개하는 아주 고가의 조그마한 상자를 본다. 탐나는 물건이었지만 주인에게 보관해달라고만 하고 길을 나선다. 그때 그녀는 잠시 이상한 통증을 느낀다.  

누구나 살다보면 두려울 때가 있게 마련이다. 숨은 곳에서 어떤 사람이 뛰쳐나와 밖을 내다볼 때 그건 참말로 끔찍하기만 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인 유혹에 넘어가면 안 된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특제 차라도 한 잔 마시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여위고 시꺼멓고 희미한 모습으로 보이는 한 젊은 여자가 - 어디에서 왔을까? - 로즈마리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렇게 문득 로즈머리의 공간으로 ‘침범’해온 가여운 여인이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렇게 부탁한다. “사-사모님, 차 한 잔 값만 주시겠어요?” 그녀는 차 한 잔 값도 갖고 있지 않은 무일푼이었다. “참 희한하군요!”(How extraordinary!)라는 것이 로즈머리의 인상이다. 사실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건, 그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그녀에겐 예사롭지 않은 일이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더 희한한 일을 고안해낸다. 마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 불쑥 튀어나온 듯한 이 만남이 그녀에겐 예사롭지 않은 사건, ‘모험’(adventure)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면 어떨까? 자기가 늘 책에서나 읽고 무대에서나 구경하던 그러한 사건들을 몸소 실연해본다면 어떻게 될까? 스릴 만점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앞으로 나서면서 옆에 있는 희미한 모습의 여자에게 집에 가서 차나 한 잔 들자고 말했다. 바로 그때 훗날 친구들이 깜짝 놀라도록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하고 말하는 듯한 자신의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뒷부분은 원문과 같이 음미해보자. 

It would be thrilling. And she heard herself saying afterwards to the amazement of her friends: "I simply took her home with me," as she stepped forward and said to that dim person beside her: "Come home to tea with me."

멀찍이서 이 장면을 봤다면,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불쌍한 여인에게 부유한 젊은 부인이 뜻밖의 적선을 베푸는 것으로 볼 만한 대목이다.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 마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이방인과 과부와 고아)에게 ‘환대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로즈머리의 시점에서 기술되는 이 장면의 핵심은 그러한 윤리와 무관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Come home to tea with me"가 아니라 "I simply took her home with me"이다. 나중에 친구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뭐.”라고 말함으로써 그들을 놀래게 만들 자신의 모습에 도취돼 있을 따름이다.

즉 이것은 ‘인정미담’이 아니라 ‘모험담’이다. 이 장면에서 그녀에겐 아무런 타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 옆에는 단지 ‘희미한 사람’(dim person)이 서 있을 뿐이다(‘희미한 모습의 여자’만큼의 구체성도 갖고 있지 않다). 로즈머리 자신이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기하고 있지만, 이 장면을 카메라로 옮긴다면 ‘희미한 사람’은 초점에서 벗어나게 하거나 희미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순서상 “그냥 집으로 데리고 왔지 뭐.”라고 말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나와 함께 집에 가서 차를 마셔요”라고 말했다는 식으로 옮기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자기 차를 같이 타고 가서 차를 마시자는 로즈머리의 뜻밖의 제안에 대해서 여자가 못 미더워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심지어 로즈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사모님, 사모님은 저를 경찰서에 데려가는 건 아니시겠죠?”라고 물어볼 정도다. 하지만 배고픈 사람들은 말을 잘 듣는 법이다. 결국 로즈머리는 낯선 여인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빌로드 손잡이를 손으로 잡으면서 그녀는 일종의 승리감을 느꼈다. 사로잡다시피 한 조그마한 포로를 바라보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야 당신을 붙들었군요.’” 물론 친절한 의도에서 하는 말이었고, 그녀는 많은 걸 입증해주려고 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놀라운 일도 가끔씩 일어나는 법이고, 부자들도 인정은 있으며, 여자들은 모두 자매지간이라는 사실 등등. 로즈머리는 그녀 쪽으로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겁먹지 말아요. 도대체 나하고 같이 가는 게 어때서 그래요? 우리는 여자들이에요. 내가 좀더 잘 산다면 당신도 당연히 기대는 해야…….”  
그러나 바로 그때, 이 말을 끝맺지 못해 쩔쩔매고 있을 때 다행히 차가 멎었다.  

로즈머리는 “우리는 여자들이에요.”(We're both women)라면서 ‘연대감’을 표시하지만, 그것은 기만적인 감정이다. 이 장면에서도 그녀는 그렇게 ‘관대하게’ 말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도취돼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우리는 같은 여자’라는 전제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을 그녀가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곧이어 나오지만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 방에서 벽장을 다 열어젖히고 상자란 상자를 모조리 끌러 보여주고 있는 부잣집의 어린 소녀와 같았다.”  

관대하고 자비로운 부잣집 여성으로서 낯선 타인에게 예기치 않은 환대를 베푸는 역을 ‘연기’하고 있는 로즈머리는 ‘손님’을 이제 자신의 침실로까지 안내한다. 그리고 벽난로 앞에 의자에 앉으라고까지 권한다. 과연 이 ‘어린 소녀’ 로즈머리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까? 그녀와 ‘손님’은 차 한 잔을 같이 마실 수 있을까? 이미 어느 정도는 예견할 수 있지만, 나머지 이야기는 한숨 돌린 후에 마저 하기로 한다. ‘차 한 잔’ 마시는 데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군... 

10. 08. 17.  

P.S. 맨스필드는 생전에 세 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는데, <독일 하숙집에서>(1911), <행복>(1920), <가든파티>(1922)가 그것이다. <행복>과 <가든파티>는 표제작이고 타이틀엔 'and Other Stories'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녀가 1923년에 세상을 떠난 뒤에 나온 것이 <비둘기집>(1923)인데, <차 한 잔>은 바로 이 유고 작품집에 실려 있다. 그런 때문인지 국내에 번역된 작품집엔 대개 빠져 있다. 범우사판과 시사영어사판(대역본)이 내가 구할 수 있는 판본이었다. 다양한 번역으로 소개돼 있지 않아 아쉽다. 30여 편이면 전집 분량인데, 아직 작품전집이 소개되지 않은 것도 아쉽고.   

거기에 덧붙여 유감스러운 것은 맨스필드에 관한 전기가 한 편도 소개되지 않은 점이다. 물론 지명도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같이 교우했던 버지니아 울프나 D. H. 로렌스와 비교할 때 아쉬운 대목이다. 영어권에는 4-5종의 전기가 나와 있는 듯싶다. 맨스필드와 버지니아 울프를 비교한 연구서 등 몇 권도 개인적으론 관심이 가지만, 이 또한 한정이 없어서 <차 한 잔>을 음미한 후에 나는 일단 맨스필드를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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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를 만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31 21:55 
    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을 옮겨놓는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차 한 잔> 읽기의 계속인데, 한 차례 더 다뤄야 마무리가 된다. 이후에 예정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읽기로 넘어갈 계획이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7666 에서 읽어보실 수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젊고 부유한 귀부인 로즈머리가 길에서 차 한 잔 값을 구걸하는 한 여인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대목에서
 
 
2010-08-17 2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7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8-1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막판에 남편이 그 부랑여인에게 한 말 때문에 로즈마리가 그녀를 서둘러 내보내는 장면이 압권이지요.그래도 로즈마리는 구김살없는 부잣집 사모님이라는 생각이에요.

로쟈 2010-08-18 17:54   좋아요 0 | URL
네, '순수한' 가식을 보여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