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쇼펜하우어가 ‘의지’라고 부른 것을 프로이트는 ‘욕망’이라고 불렀다. 반복하자면, “욕망은 의미에 무심하고 매우 비인간적인 과정이며,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달콤하게 우리를 조종한다.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 욕망은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고통이며, 우리가 비자발적으로 쓸려가는 도착이자 강제적 매개다. 우리는 출생과 더불어 욕망 속으로 내던져진다.”(테리 이글턴, <반대자의 초상>, 305쪽) 여기서 ‘욕망은 사적인 것이 아니다(Desire is nothing personal)’란 말은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나의 욕망’이란 말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비인간적이면서 동시에 비인칭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욕망을 어디에 두었더라?”거나 “너, 내 욕망 가져갔니?”라고 말할 수 없다. 욕망이 관심을 두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그 정도면 ‘괴물’이라 부름직하지 않을까.
이 ‘괴물’과 관련하여 참고할 수 있는 것이 <HOW TO READ 라캉>의 4장 ‘실재의 수수께끼’다. 라캉의 ‘라멜라’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 장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라멜라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부분대상(partial object)’이다. “신체 없이도 존속하는 신비로운 자동성을 지닌 기이한 기관”이 부분대상이다. 젖먹이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공갈 젖꼭지’ 같은 걸 떠올리면 되겠다. 엄마의 ‘신체’ 없이도 엄마의 젖가슴을 대신하며 존속하는 젖꼭지 말이다. 지젝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예로 든다. 고양이가 사라졌는데도 남아 있던 미소가 생각나시는가? 우리의 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저런, 나는 미소 없는 고양이를 본 적은 있어. 하지만 고양이 없는 미소라니! 이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흥미로운데!”
라캉의 라멜라는 존재하지는(exist) 않지만 고집스럽게 존속하는(insist) 어떤 것이다. 이런 ‘고집’, ‘리비도의 맹목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고집’에 대한 프로이트의 명명이 ‘죽음충동’이다. “생명의 기괴한 과잉, 삶과 죽음, 생식과 부패의 (생물학적) 순환 너머에서 지속되는 ‘죽지 않는’ 존속에 붙여진 이름”이다(분자생물학의 ‘불멸의 이중나선’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경험을 반복함으로써 유기체에 주어진 자연적 한계를 벗어나, 심지어 유기체의 죽음까지 초월하여 존속하는 기괴한 고집” 같은 것이다. 그런 죽음충동과 부분대상의 관계를 잘 설명해주는 사례가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다. 알다시피 이 동화에서 주인공 소녀가 신는 마술 구두는 소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강제로 춤을 추도록 만든다. “그 구두는 모든 인간적 제한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존속하는 소녀의 무조건적 충동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불쌍한 소녀가 구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다리를 잘라내는 것뿐이다.” 쇼펜하우어와 프로이트가 말년에 모두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인생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겠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46829117584236.jpg)
참고삼아 말하면,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의 성인용 버전은 잘만 킹의 성애영화 <레드 슈 다이어리> 시리즈다. <X-파일>에서 멀더 요원으로 등장하는 배우 데이비드 듀코브니가 자신의 우편함으로 도착하는 여성들의 편지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랑, 열정, 음모, 배신에 대한 에피소드를 따라가는 이 시리즈에서 ‘빨간 구두’는 말 그대로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의 은유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프로이트는 우리를 인간 주체로 만드는 것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이 이질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마치 치명적 세균같이 우리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개념이 그렇듯이,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에게 가깝다.”
혹은 마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섬뜩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 아주 낯익지만 갑자기 아주 낯선 것으로 돌변할 때가 있다. ‘안’과 ‘밖’이 뒤바뀌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하워드 혹스의 영화에서 힌트를 얻어 장난스럽게 ‘괴물(thing)’이라 불렀다는 것이고, 그것이 다름 아닌 실재(the real)를 가리킨다는 게 이글턴의 설명이다. 라캉이 만년에 리들리 스콧의 영화 <에일리언>(1979)을 볼 수 있었다면 더욱 만족했을는지도 모른다. 지젝에 따르면 “이 영화의 기괴한 외계 생명체는 라캉의 라멜라와 닮았는데, 이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라캉이 이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에일리언> 시리즈에 대해선 지젝도 인용하고 있는 스티븐 멀할(Stephen Mulhall)의 <영화에 대하여>(동문선, 2003)의 분석이 예리하며 자세하다. 단, 번역본은 별로 신뢰할 만하지 않다. 참고로, 멀할은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한울, 2007)의 저자이기도 한데, 그 책에선 저자명이 ‘스테판 뮬홀’로 표기됐다. <HOW TO READ 라캉>에서는 ‘멀홀’로 읽어주고 있고. 어느 쪽이건 이럴 때 독자에게 필요한 건 정확한 표기가 아니라 통일된 표기다).
라캉의 라멜라와 ‘에일리언’에 대해선 기회가 닿을 때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보다 더 쉬운 경로로 실재(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한다. 지젝이 드는 건 채플린의 영화 <시티 라이트>이다. 주인공 떠돌이가 실수로 호각을 삼키고, 딸꾹질을 할 때마다 뱃속에서 호각 소리가 나는 코믹한 장면이다. 떠돌이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자신의 신체 ‘안’에서 나는 소리를 감추려고 애쓴다. 지젝은 이것이 ‘부끄러움’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http://blog.ala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start.gif) |
|
|
|
내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내 몸속의 과잉(excess)에 직면할 때다. 이 장면에서 부끄러움의 원천이 소리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 몸속에서 울려 나오는 유령 같은 소리, 신체 없는 자율 기관으로서의 소리, 내 몸 깊숙이 자리 잡고 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기생충이나 낯선 침입자 같은 소리 말이다.(<HOW TO READ 라캉>, 111~112쪽)
|
|
|
|
![](http://blog.aladdin.co.kr/fckeditor/editor/Images/quote_end.gif) |
공갈 젖꼭지부터 체셔 고양이의 미소, 빨간 구두, 뱃속에서 나는 호각 소리까지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일종의 ‘신체 없는 자율 기관’이라는 점이다. 그것을 ‘탈실체화(de-substantialized)’돼 있다고 말한다. 실체와 무관하다는 뜻이다. 즉 “실재란 상징적 네트워크로의 포획에 저항하는 외재적 사물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이다.” 사실 “상징적 네트워크에 포획되지 않는 외재적 사물”은 실재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다. 하지만 지젝은 방향을 전환하여 실재를 “상징적 네트워크 자체 내부의 틈”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실재란 ‘실체적 사물(the substantial Thing)’이 아니라 상징적 네트워크, 곧 상징계의 간극이 불러낸 효과라는 것이다. 라캉-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의 전환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일반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에 상응한다. 아인슈타인이 휘어진 공간이란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그러한 공간의 휘어짐이 물질의 효과라고 보았다. 즉 물질이 원인이고 공간의 휘어짐이 그 결과다. 그러한 관점에서 기술되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이다. 반면에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이 원인과 결과가 전도된다. “물질의 현존은 공간을 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그 휘어짐의 효과다.”
프로이트 또한 처음에는 외상을 “외부로부터 우리의 심리적 삶에 침입하여 균형을 깨뜨리고, 우리의 경험을 조직하는 상징적 좌표를 교란시키는 어떤 것”으로 파악했다. ‘외재적 사물’로 간주한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아인슈타인의 전환과 마찬가지로 외상적 사건, 기원적 사건이 뜻하는 바는 ‘상징적 곤경’(혹은 ‘상징화의 곤경’, ‘상징계의 곤경’)이며, 외상적 사건은 바로 이 의미 세계 내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다시 불려 나온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적대(social antagonism)라는 실재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적 적대란 계급 적대, 계급투쟁을 말한다. 그것이 사회의 ‘실재’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이렇듯 사회에 내재한 적대를 특정한 집단에 덮어씌운다. ‘구체화’하고 ‘사물화’한다. 곧 반유대주의에서는 “유대인성을 외부에서 사회적 몸체에 침입하여 균형을 파괴하는 것으로 취급한다.” 유대인을 사회적 적대를 야기하는 낯선 침입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인과관계가 전도되었다. 유대인이라는 ‘외재적 사물’ 때문에 사회적 적대가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내재적․구조적 적대라는 곤경이 반유대주의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것이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를 읽기 위해 필요한, ‘실재계’에 대한 대강의 사전 이해다. RSI(실재계-상징계-상상계)라고 부르지만, 라캉의 이론적 관심의 변천사를 반영하자면 ‘상상계-상징계-실재계’가 된다. 지젝은 라캉의 세 범주 가운데 ‘실재계’를 핵심적인 탐구 주제로 삼았다. 지젝이 말하는 라캉은, 이글턴의 정리를 빌면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하는 실재계란 그저 외상적이거나 불가해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고 외설적이며 공허하고 무의미하며, 어머어마한 쾌락의 원천이기도 하다고 일깨워주는 인물”이다(이 실재를 다루는 라캉은 구조주의자 라캉과는 또 다른 라캉이어서 아예 ‘라캉 contra 라캉’이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라캉과 대립하는 라캉’이다). 이러한 지식을 배경으로 삼아서 다음 회부터는 ‘실재계에 대한 열정’을 다루기로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