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주문해서 받은 책 가운데 하나는 알리 라탄시의 <인종주의는 본성인가>(한겨레출판, 2011)이다. '한겨레지식문고'의 한 권인데,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처럼 '가장 짧은 입문서(A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의 '인종주의'를 옮긴 것이다. 국역본 부제는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 안 그래도 며칠전에 소개한 <사르키 바트만>(문학동네, 2011)도 인종주의 관련서로 분류할 수 있겠다. <인종주의는 본성인가>에 실린 '더 읽을 거리'를 참고하여 같이 읽을 만한 책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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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박경태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8,900원 → 8,010원(10%할인) / 마일리지 44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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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는 본성인가- 인종, 인종주의, 인종주의자에 대한 오랜 역사
알리 라탄시 지음, 구정은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10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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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르키 바트만- 19세기 인종주의가 발명한 신화
레이철 홈스 지음, 이석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12,000원 → 11,400원(5%할인) / 마일리지 36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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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짓된 진실-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08년 2월
19,000원 → 17,100원(10%할인) / 마일리지 9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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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TAS 2011-10-21 01:35   좋아요 0 | URL
그리핀의 '블랙 라이크 미' 가 문득 떠오르는 포스팅입니다.^^

로쟈 2011-10-22 09:17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생각나네요...
 

"다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산을 처음 학계에 알린 최익한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에 주목하게 된 책이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서해문집, 2011)이다. 월북 지식인이기에 국내에서는 거의 잊혀진 그를 재발견한 송찬섭 교수에 따르면 최익한은 “한문과 사회과학의 소양을 겸비한 근대의 최고 지식인”이었다. 거기에 <실학파와 정다산>은 현존 실학 연구의 최고 저작이라 한다. 다산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필독해볼 만하다.  

 

경향신문(11. 10. 15) “다산을 세상에 알린 근대 지식인 ‘학계에서 소외된’ 최익한 재평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저작 500여권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였다. 1936년 신조선사는 당시 한반도에 불어닥친 국학열(熱)을 업고 여유당전서 출간에 들어간다. 앞서 고종 광무연간에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간행되긴 했지만 <경세유표> <마과회통> <논어고금주> 등 다산 저작 전부가 한데 묶인 것은 처음이다. 여유당전서 편찬은 식민지시대 출판계의 최대 사건이었다. 다산의 수고(手稿) 500여권을 한데 모은 여유당전서 편찬에는 당대 최고 국학자 정인보와 민세 안재홍이 교정위원으로 참여했다.

그 즈음 최익한(1897~?)은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여유당전서에 대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글은 65회까지 이어졌고 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완독한 최초의 학자”(다산연구가 정해렴)가 되었다. 

최익한의 다산 연구는 1948년 월북 이후 본격화됐다. 북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국학 연구에 몰두한 최익한은 1955년 여유당전서 독서를 바탕으로 <실학파와 정다산>이라는 저작을 출간했다. 다산과 실학에 대한 최초의 본격 연구서였다.

다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산을 처음 학계에 알린 최익한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최익한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가 최익환과 헷갈려 적었다. 백남운, 이청원, 인정식 등 월북 학자 계보에서도 최익한은 빠져 있다.

송찬섭 한국방송통신대 교수(55·한국사·사진)는 “최익한의 중요 저작이 북에서 발간된 데다 대학에 몸담지 않아 제자가 없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송 교수가 최익한 전집을 내겠다고 결심한 배경에는 ‘학계에서 소외된’ 최익한을 재평가하겠다는 뜻이 크게 작용했다.

송 교수가 최익한을 ‘발굴’한 것은 20여년 전이었다. 그는 경남 산청의 한 유학자 서재에서 <실학파와 정다산>을 발견한 뒤 1989년 이를 국내 한 출판사에 건넸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당국의 북한 서적 검열에 걸려 회수당했다. 그러나 최익한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갔다. 송 교수는 역사학회지에 최익한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며 그를 알리기에 나섰다.

최익한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한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고향 경북 울진에서 한학을 공부한 그는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6년간 복역했다. 여유당전서를 소개할 무렵에는 정약용 연구에 몰두하며 국학 연구에 적극 참여했다. 그가 해방 전후에 남긴 저작은 <실학파와 정다산> <조선사회정책사> <조선봉건말기의 선진학자들> <강감찬장군> 등이 있다.

송 교수는 최익한을 “한문과 사회과학의 소양을 겸비한 근대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평가했다. 최익한 전집의 제1권으로 나온 <실학파와 정다산>의 경우 조선 후기의 정치사와 경제사를 바탕으로 실학파의 사상과 학설을 체계적으로 풀어냈다. 한국 실학의 명칭, 개념은 이 책에서 유래했으며 정약용을 “실학 집대성자”라고 지칭한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송 교수는 “<실학파와 정다산>은 조선의 사회·정치·경제는 물론 서학·대외관계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며 현존 실학 연구의 최고 저작으로 꼽았다. 또 <조선사회정책사>는 조선의 구휼·진휼정책을 근대의 ‘복지’ 개념을 적용시켜 분석한 “국내 최초의 사회복지학 저서”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최익한의 단행본 저서뿐 아니라 ‘여유당전서를 독함’ 등 신문 기고문, 논문 등도 모아 7~8권의 전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익한 연구는 “한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학제 간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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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매경이코노미(1628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요하네스 발라허의 <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대림북스, 2011)을 거리로 삼았다. 독어 원제는 '더 가치 있는 행복'이란 뜻인 듯싶다. '윤리경제학'에 대응하여 '경제윤리학'의 자리와 의의에 대해서 짚어주는 책으로 읽었다.  

  

매경이코노미(11. 10. 26) 소득이 더 많으면 더 행복하다고?

한 가지 실험에서 시작해보자. 당신이라면 다음 두 가지 세계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두 세계가 가격과 구매력에서 조건은 동일하다. 첫 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 소득은 5000만원인 반면 사회 전체의 연평균 소득은 2500만원이다. 두 번째 세계에서 당신의 연간 소득은 1억원인 반면에, 사회 전체의 연평균 소득은 2억원이다. 독일의 경제윤리학자 요하네스 발라허가 <경제학이 깔고 앉은 행복>의 머리말에서 들고 있는 선택지에다 단위만 유로에서 원화로 바꿨다. 절대소득은 두 번째가 더 높지만, 평균소득과 비교한 상대소득은 첫 번째가 더 높다는 게 핵심적인 차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실험에서 피설문자의 절반 가까이가 첫 번째 세계를 선택했다고 한다. 절대소득보다는 자신의 소득이 차지하는 상대적인 위치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또 한 가지 실험이 있다. 역시 두 가지 세계가 있다. 첫 번째 세계에서는 당신에게 2주의 연차휴가가 주어지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균 연차휴가는 1주일이다. 두 번째 세계에서 당신에 4주의 연차휴가가 주어지는데 다른 사람들의 평균은 8주다. 이번에도 두 번째 세계가 절대 휴가일은 더 많지만 평균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다. 이 실험에서는 피실험자의 절대 다수가 두 번째 세계를 선택했다. 휴가일이 다른 사람들의 절반밖에 안 되더라도 첫 번째 세계보다는 더 많은 여가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정리하면 소득의 경우에는 남들과의 비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가에서는 상대적 비교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저자는 이 두 실험결과를 통해서 ‘더 높은 소득은 곧 더 큰 행복’이라는 일반적 공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가 행복에 관한 그런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행복이나 사회 전체의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그의 제안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경제와 윤리의 결합이다. 경제와 윤리를 서로 별개 영역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더 오래된 이야기’로 넘어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경제(economy)라는 말은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에서 온 것이며 ‘오이코노미아(oikonomia)’는 가계를 꾸려나가는 일을 뜻했다. 그런데 이 가계경영으로서의 경제는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엔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그것은 시민의 성공적인 삶, 흔히 행복이라 불리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위한 수단이었다.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 또한 윤리철학자로서 <도덕감정론>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까 경제와 윤리는 애초에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런 분리가 비롯된 것은 사상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칸트부터이다. 칸트는 행복을 윤리학의 핵심 범주로 다루지 않았다.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을 터이므로 행복에 대한 보편적 진술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러한 판단을 계승해 경제학의 신고전학파는 행복이나 이익에 대한 개개인의 생각을 비교하는 게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린다. 행복 대신 이윤만이 경제학의 관심사가 된 배경이자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탄생하게 된 맥락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가진 수단을 이용하여 최대의 이익을 창출해내는 ‘경제적 인간’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행복 추구’는 ‘이익의 극대화’와는 별개의 문제로 간주됐다. 아니 소득이 올라가면 행복은 당연히 보장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소득과 행복 사이의 긍정적 상관성은 1만 달러 정도가 한계치인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서는 나라들의 경우엔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소득의 한계효용 체감’ 현상이다. 이 단계에서는 소득보다도 건강과 교육수준, 민주적 참정권, 안정된 직업과 사회적 기회 보장, 투명성 등이 삶에 대한 만족도와 행복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변화된 상황에서도 국민소득만을 행복의 지표로 내세운다면 좀 멋쩍은 일이다

11.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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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내 2011-10-18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한하게도 이번에 주류 시장주의 경제학계에서 노벨상이 나왔더군요.....
한 쪽에서는 反 월가 시위하고 있는데요...^^;

로쟈 2011-10-19 22:31   좋아요 0 | URL
비주류 학자가 수상했다면 그게 희한한 일이겠죠.^^;

헌내 2011-10-21 09:39   좋아요 0 | URL
엇, 크루그먼이나 스티글리츠는 나름(?) 비주류 아닐까요? ㅋ~

로쟈 2011-10-22 09:08   좋아요 0 | URL
'나름'으론 그럴 수 있겠죠.^^
 

유럽 식민주의의 만행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 출간됐다. 레이첼 홈스의 <사르키 바트만>(문학동네, 2011). 19세기초 유럽 백인에게 잡혀와 런던의 쇼무대에 서고, 나중에는 파리 자연사박물관의 연구대상이 된 아프리카 여성 사르키 바트만의 얘기다. 학교 현장에서도 많이 읽혔으면 싶다...  

  

경향신문(11. 10. 15) ‘아프리카 여인’을 발가벗긴 근대유럽의 오만과 편견

‘호텐토트의 비너스’가 영국 런던의 피카딜리 쇼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10년이었다. 140㎝ 정도의 작은 키, 숯처럼 반들반들한 검은 피부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먼 곳을 바라보는 불가사의한 표정과 보조개가 깊이 팬 하트형 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단박에 집중시켰다. 관객들의 시선은 얇은 실크 너머로 비치는 크고 탱탱한 젖꼭지에 쏠렸다. 더욱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그녀의 하반신이었다. 런던의 관객들은 거대한 소음순과 준봉처럼 솟아오른 엉덩이에 완전히 흥분했다.

저자 레이철 홈스는 남아공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여성 저널리스트다. 그는 “19세기 유럽 인종주의의 희생양”이었던 남아프리카 여인 사르키 바트만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해내면서 근대 유럽인들의 오만과 편견을 발가벗긴다.

평범한 호텐토트족 여성이었던 바트만은 10대 후반에 강가에서 약혼식 축제를 벌이다가 백인에게 납치당한다. 피카딜리 무대에 선 그녀는 아프리카 현악기 람키를 연주하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야 했다. 짐승 같은 눈빛을 번뜩이는 남자들 앞에서 성큼성큼 뛰어다니다가 몸을 부르르 떠는 원주민 춤을 춰야 했다. 쇼는 일주일에 엿새, 하루에 4시간씩 펼쳐졌다. 입장료는 2실링이었다. 백인 공연기획자들은 그녀를 팔아 돈을 챙겼고, 영국 언론들은 “특이한 몸매의 비너스”를 경쟁적으로 대서특필하면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부채질했다. 유럽인들은 그녀의 몸매를 “불량한 진화의 증표”로 여겼다. 그들은 그렇게 “동물이 멈추고 인간이 시작되는 지점의 증표”를 뜨거운 호기심으로 훔쳐봤다.

저자는 당시의 언론이 붙여준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수식어에 영국인들의 집단적이고 변태적인 관음증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자면 “비너스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성욕과 동일한 의미로 오랫동안 사용”됐으며, “호텐토트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것, 성적으로 변태적이며 과도한 것”으로 인식됐다. 그래서 호텐토트와 비너스를 합친 조어는 “대단한 파급력”을 발휘했다. 그것은 “퇴폐와 욕망, 금기와 허락, 야수적 육욕과 초월적 여신의 결합”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쇼의 인기는 식었다. 흥행업자는 1814년 그녀를 배에 태워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는 여흥과 오락의 본거지였던 팔레루아얄 무대에 섰다. “낮 12시부터 저녁 6시까지 쇼를 하고, 날이 저물면 레스토랑이나 선술집, 북적대는 카페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계속했다. 그녀는 결국 절망에 빠져 코냑에 중독됐고 병을 얻었다. 흥행업자는 병든 그녀를 파리의 자연사박물관에 팔아넘겼다. 이제 그녀는 “특이한 몸매”를 “과학적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교수들 앞에서 특별 공개”해야 했다. 그녀는 옷을 벗지 않겠다고 저항했으나 허사였다.

그녀를 발가벗긴 당사자는 프랑스의 유명한 고생물학자 조르주 퀴비에였다. 1815년 혹독한 겨울, 스물다섯살의 그녀가 마침내 세상을 떠나자 퀴비에는 톱으로 두개골을 잘라 뇌를 적출했다. 음순과 클리토리스, 질을 잘라내 유리병에 담았다. 나머지 몸뚱이에는 밀납을 발라 미라로 만들었다.

런던은 그녀를 변태적 성욕으로 유린했고, 자유·평등·박애의 도시로 자부했던 파리는 과학이라는 명분으로 그녀를 도살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그녀는 식민주의가 낳은 소외와 비인간화의 상징, 착취당하는 모든 흑인여성의 고통과 절망에 대한 현재적 상징, 인종주의가 남긴 심리적·문화적·정서적 상처의 상징”이라고 강조한다.

만신창이가 된 사르키의 육신이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192년이 흐른 뒤였다. 넬슨 만델라는 프랑스 정부에 사르키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청하면서 “용서할 수 있지만 잊지는 않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남아공 현지에서 그 귀환의 현장을 입술을 깨물며 지켜봤던 이 책의 번역자 이석호(아프리카문화연구소 소장)는 “사르키는 지금 이 순간, 내 안에, 내 앞에, 내 곁에 무한복제로 되살아나는 도플갱어”라고 울부짖는다. “찢어진 내 자아의 다른 얼굴이고, 남자라는 이름의 제국이 거느리고 있는 최후의 식민지이며, 초라한 제국이 그 적멸을 늦추기 위해 휘두르는 채찍과 뭇매를 묵묵히 견디는 육체”라고 절규한다. 사르키 바트만의 생애를 10년 넘게 탐구해온 그의 번역은 생생하고 유려하다.(문학수 선임기자) 

11.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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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시내 2011-10-19 04:22   좋아요 0 | URL
샤르키 바트만, MBC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서 처음 알게 된 이야기였죠. 인권과 평등을 외치는 서구 지식인들의 추악한 진면목을 마주하며 충격을 받았었지요. 씁쓸하고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지금도 그같은 유린이 잔재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네요.

보스코프스키 2011-10-19 21:45   좋아요 0 | URL
EBS의 지식채널에서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사한 사건으로는 조지프 매릭 - 영화 <<<디 엘리펀트 맨>>>으로도 유명한 - 도 있긴 하죠...
 

국제원조 문제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 출간됐다. 윌리엄 이스털리의 <세계의 절반 구하기>(미지북스, 2011). 기사에 나오는 대로 제프리 삭스의 <빈곤의 종말>( 21세기북스, 2006)과 같이 읽어볼 만하겠다..   

연힙뉴스(11. 10. 16) 책상머리 원조 보단 발로 뛰는 원조 하라

"백인의 짐을 져라 / (중략) / 반은 악마, 반은 어린애 같은 / 당신들의 새 백성을 위해 / 무거운 갑옷을 입고 가라"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의 시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은 극렬한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그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다. 그는 "반은 악마"나 다름없는 야만적인 식민지인들을 돕는 것이 백인의 의무라고 말하는 이 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헌정해 미국의 필리핀 식민 지배를 찬양하기도 했다.

윌리엄 R. 이스털리 미국 뉴욕대 교수는 키플링의 시 제목을 그대로 빌린 책 '세계의 절반 구하기'(미지북스 펴냄. 원제 'The white man's burden')에서 오늘날 서구의 국제원조 방식이 20세기 제국주의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꼬집는다.

 

제프리 삭스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유명한 저서 '빈곤의 종말'에서 세계의 빈민들이 부실한 보건과 교육, 인프라 등이 서로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빈곤의 덫'에 걸려있다고 진단하며 이 빈곤의 덫을 제거하는 것이 보기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전세계 부자 국가들이 외국 원조를 대폭 끌어올리자는 것이 그가 제시한 해법이었다.

그러나 이스털리는 이 책에서 빈곤의 원인과 해법에 대한 삭스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빈곤의 덫'이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신화이며, 이른바 '빅 푸시(Big push)'로 불리는 대규모 원조가 가난한 나라들을 성장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빅 푸시의 예상과는 반대로, 통계상 원조를 많이 받는 국가들은 원조를 적게 받는 국가들보다 도약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90쪽) 

무엇이 문제일까. 서구가 지난 50년간 대외 원조로 2조 3천억 달러를 지출했지만 여전히 수백만 명의 빈곤국가 아이들이 12센트에 불과한 말라리아 예방약과 4달러짜리 모기장을 제공받지 못해 목숨을 잃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구 국제원조가 '계획가'들의 거대한 '계획'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다. "대외 원조에서 계획가들은 선한 의도를 표방하지만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중략) 계획가들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17쪽) 더욱이 그는 서구의 민주주의나 시장경제가 아무리 좋다한들 그것을 전혀 다른 사회에 하향식으로 부과하려는 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계획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을까.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을 새삼 되새기며 굶주리고 있는 세계의 절반을 모른 척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스털리는 '계획가' 대신 '탐색가'적인 시각으로 국제 원조에 나서야한다고 제안한다. 계획가들과 달리 탐색가들은 밑바닥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발견하고 수혜자들의 만족도까지 파악한다. 요컨대 계획가들의 원조는 책상머리에서 나온 '하향식'이고, 탐색가들의 원조는 발로 뛰는 '상향식'이다. 그러니까 이스털리의 견해대로라면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난 구제는 나랏님'은' 못한다"는 식이다.

이 책에는 이런 탐색가의 원조가 성과를 거둔 여러 사례들이 제시된다. 탐색가들의 원조에 힘입어 비서구 지역의 빈곤 국가들이 스스로를 도운 사례들이다. 그는 "비서구 지역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동안, 계획가들의 지구적 사회 공학은 빈민 구제에 실패해왔고, 이는 계속 실패할 것"이라며 "계획가들은 지난 60년 역사로도 충분할 것이다. 지금은 탐색가들에게 기회를 줄 차례"라고 말했다.(고미혜기자) 

11. 10. 16.  

P.S. 인도주의 내지 인도적 개입문제를 다룬 책들도 몇 권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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