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산을 처음 학계에 알린 최익한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말에 주목하게 된 책이 최익한의 <실학파와 정다산>(서해문집, 2011)이다. 월북 지식인이기에 국내에서는 거의 잊혀진 그를 재발견한 송찬섭 교수에 따르면 최익한은 “한문과 사회과학의 소양을 겸비한 근대의 최고 지식인”이었다. 거기에 <실학파와 정다산>은 현존 실학 연구의 최고 저작이라 한다. 다산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필독해볼 만하다.  

 

경향신문(11. 10. 15) “다산을 세상에 알린 근대 지식인 ‘학계에서 소외된’ 최익한 재평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저작 500여권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은 사후 100년이 지나서였다. 1936년 신조선사는 당시 한반도에 불어닥친 국학열(熱)을 업고 여유당전서 출간에 들어간다. 앞서 고종 광무연간에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간행되긴 했지만 <경세유표> <마과회통> <논어고금주> 등 다산 저작 전부가 한데 묶인 것은 처음이다. 여유당전서 편찬은 식민지시대 출판계의 최대 사건이었다. 다산의 수고(手稿) 500여권을 한데 모은 여유당전서 편찬에는 당대 최고 국학자 정인보와 민세 안재홍이 교정위원으로 참여했다.

그 즈음 최익한(1897~?)은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독(讀)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여유당전서에 대한 최초의 논설이었다. 글은 65회까지 이어졌고 최익한은 “여유당전서를 완독한 최초의 학자”(다산연구가 정해렴)가 되었다. 

최익한의 다산 연구는 1948년 월북 이후 본격화됐다. 북에서 정치적으로 소외되면서 국학 연구에 몰두한 최익한은 1955년 여유당전서 독서를 바탕으로 <실학파와 정다산>이라는 저작을 출간했다. 다산과 실학에 대한 최초의 본격 연구서였다.

다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다산을 처음 학계에 알린 최익한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 최익한을 소개하면서 독립운동가 최익환과 헷갈려 적었다. 백남운, 이청원, 인정식 등 월북 학자 계보에서도 최익한은 빠져 있다.

송찬섭 한국방송통신대 교수(55·한국사·사진)는 “최익한의 중요 저작이 북에서 발간된 데다 대학에 몸담지 않아 제자가 없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송 교수가 최익한 전집을 내겠다고 결심한 배경에는 ‘학계에서 소외된’ 최익한을 재평가하겠다는 뜻이 크게 작용했다.

송 교수가 최익한을 ‘발굴’한 것은 20여년 전이었다. 그는 경남 산청의 한 유학자 서재에서 <실학파와 정다산>을 발견한 뒤 1989년 이를 국내 한 출판사에 건넸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당국의 북한 서적 검열에 걸려 회수당했다. 그러나 최익한에 대한 관심은 더 깊어갔다. 송 교수는 역사학회지에 최익한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며 그를 알리기에 나섰다.

최익한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한학자이자 문화사학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고향 경북 울진에서 한학을 공부한 그는 사회주의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1928년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6년간 복역했다. 여유당전서를 소개할 무렵에는 정약용 연구에 몰두하며 국학 연구에 적극 참여했다. 그가 해방 전후에 남긴 저작은 <실학파와 정다산> <조선사회정책사> <조선봉건말기의 선진학자들> <강감찬장군> 등이 있다.

송 교수는 최익한을 “한문과 사회과학의 소양을 겸비한 근대의 최고 지식인”이라고 평가했다. 최익한 전집의 제1권으로 나온 <실학파와 정다산>의 경우 조선 후기의 정치사와 경제사를 바탕으로 실학파의 사상과 학설을 체계적으로 풀어냈다. 한국 실학의 명칭, 개념은 이 책에서 유래했으며 정약용을 “실학 집대성자”라고 지칭한 것도 이 책이 처음이다.

송 교수는 “<실학파와 정다산>은 조선의 사회·정치·경제는 물론 서학·대외관계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쓰여졌다”며 현존 실학 연구의 최고 저작으로 꼽았다. 또 <조선사회정책사>는 조선의 구휼·진휼정책을 근대의 ‘복지’ 개념을 적용시켜 분석한 “국내 최초의 사회복지학 저서”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최익한의 단행본 저서뿐 아니라 ‘여유당전서를 독함’ 등 신문 기고문, 논문 등도 모아 7~8권의 전집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러나 최익한 연구는 “한 사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면서 학제 간 공동 연구를 제안했다.(조운찬 선임기자) 

11.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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