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 때문에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을 영역본과 같이 좀 보다가 관련자료를 검색해봤다. 동아일보의 기획기사 중 한 꼭지가 <진리와 방법>을 다루고 있고, 교수신문에도 국역본의 역자 중 한 사람인 임호일 교수의 소개가 실려 있다. 현재 나와 있는 국역본은 전체의 1/3 정도인데, 이르면 연내에 나머지 부분도 출간예정이라고 한다(늦어도 내년까지는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기사들을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동아일보(08. 03. 26) [인문과 자연의 경계를 넘어 30선]<18>진리와 방법

《“해석학적 현상에서는 진리의 경험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진리의 경험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사유 방식이기도 하다.”》

‘진리와 방법’은 철학자 가다머(1900∼2002)의 주저(主著)일 뿐 아니라 해석학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가다머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에 걸쳐 집필한 이 역작은 해석학을 독일 철학계의 중심적인 논제로 대두시킨 계기가 되었다. 워낙 오래된 저서인 만큼 비판과 지적도 따랐지만 아직껏 이 책을 능가하는 해석학 저서는 나온 것이 없다는 게 철학계의 평가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선 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9세기 중반 자연주의적 과학주의적 정신의 득세로, 철학의 고유한 연구 대상이었던 인간 정신은 자연과학의 부속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해석학은 철학의 문제 영역인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의 일종이 아니라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을 염두에 두었지만 출판사 발행인이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낯설게 여겨서 제목을 바꾼 것. 그러나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은 적절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란 자연과학의 객관적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다머의 의도는 과학주의·객관주의의 방법론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경험 세계를 찾아, 여기에서도 진리가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경험’이 중요하다. 경험이란 자연과학에는 없고 정신과학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변화를 끌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가다머는 정신과학의 진리의 ‘경험’을 찾아내 고유한 정당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상이한 세 영역의 연구를 이행했지만 이 영역들은 철학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있었다. 세 영역이란 예술과 역사, 언어의 철학적 분석을 말한다. 2000년 국내에 번역된 ‘진리와 방법Ⅰ’은 예술 경험의 진리 문제를 탐색한다. 이론을 세우는 게 아니라 경험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예술에 대한 논의는 정신과학에 속한다. 해석학에 따르면 예술은 개인의 사사로운 영감에서 발동한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 ‘경험’, 즉 예술작품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진리를 경험한다는 것은 자연과학적 방법론에 맞서는 예술의 철학적 의미를 형성한다.

가다머는 이렇게 예술 경험에 대한 이해 지평뿐 아니라 예술작품의 존재론과 그 해석학적 의미를 물음으로써 예술 경험의 자기정체성을, 나아가 정신과학의 독자성을 규명한다. 가다머는 고대 그리스철학부터 딜타이, 칸트, 후설, 하이데거 등 철학사를 훑으면서 예술의 고유한 인식 방법과 진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텍스트다. 고려대 이길우(철학) 교수, 강원대 이선관(철학) 교수, 동국대 임호일(독문학) 교수, 강원대 한동원(철학) 교수가 이 책의 번역에 함께했다. 역사와 철학에 대해 논의한 ‘진리와 방법Ⅱ’도 번역 중이며 이르면 연내 출간될 예정이다.(김지영 기자)

교수신문(01. 05. 28) 가다머를 통해 본 인문학의 이해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기술(과학)문명의 범람으로 익사 직전의 위기에 처한 인문학이 우리의 현실에서 왜 중요하며, 왜 필요하고, 인문학이 왜 복권되어야 하는가를 웅변해 준다. 인간의 삶은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사물이 서로 지배관계가 아닌 공존관계를 이룰 때 진정한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술문명은 지배욕구를 은폐하고 있다. 달리 말해 기술문명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을 대상화시켜 점령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반기를 드는 것이 인문학, 즉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면 ‘철학적 해석학’이다.

기술문명에 대한 저항의 잠재력
가다머는 무엇보다도 전통을 중요시한다. 가다머에게는 전통이 곧 인문학의 출발점이요, ‘진리의 生起’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천이다. 그가 의미하는 전통이란 철학분야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고대철학과 칸트 및 헤겔로 대변되는 근대철학이다. 그밖에도 그는 신화와 예술작품도 이 전통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확장 일로를 걷고 있는 과학의 지배요구에 대한 저항의 잠재력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전통의 이해’를 전통에 무조건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행위로 파악하거나, 전통의 단순한 습득 및 이해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인간의 이해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이해는 반드시 대화와 질문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한 인간의 이해를 통해 우리의 지평을 넓히듯이, 전통의 이해를 통해 ‘새로운 빛’을 보게 된다. 가다머는 특히 예술작품과의 만남에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예술작품은 친숙함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알 수 없는 일은, 이 친숙함은 동시에 충격과 익숙한 것의 붕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해석학을 출발점으로 삼는 가다머의 해석학은 바로 이 전통과 현재의 매개를 제일 과제로 삼는다. 여기서 매개란 곧 대화를 의미하며, 이 대화는 이해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가다머의 이해는 결코 어떤 대상을 제것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지니지 않는다. 이해에는 자기 비판이 선행되며, “이해하는 사람은 결코 우월한 지위를 고집하지 않고, 자신의 불확실한 진리가 검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선입견’이 이해를 촉진
가다머는 “모든 이해는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자리매김 되어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해는 이해하는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그가 대상화를 거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항상 역사의 한 가운데 있으며, “매 순간마다 과거로부터 우리에게로 오는 것, 즉 전수되는 것과 더불어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듯 이해에서 자신의 고유한 역사성을 함께 성찰하는 의식을 가다머는 ‘영향사적 의식’이라고 부른다.

가다머가 전통을 중요시하고, 계몽주의 이래로 박탈당했던 선입견의 권리회복을 역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 의하면 이해는 선입견을 근거로 해서 작용한다. 여기서 선입견이란 이해하는 사람, 즉 해석자에게 축적된 모든 정신적 자산 일체를 뜻하며, 이러한 선입견이 ‘선이해’, 즉 ‘현재의 견해’로 작용하면서 이해를 촉진시킨다. 이 정신적 자산, 즉 ‘기대의 지평을 형성하는 전래된 견해들’이 없는 한 그 어떤 이해과정도 작동할 수가 없게 된다. 가다머는 계몽주의자들이 ‘고유한 반성적 노력의 결과’로 인정한 ‘판단’을 개인적이라고 폄하하는 반면에, 선입견에게는 ‘비개인적’, 또는 ‘선개인적’이라는 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선입견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가다머는 개인적 또는 주관적 인식을 경계하는 한편, 공동체적 계기들을 중시한다. 그가 공동체적 계기들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체적 계기들을 전통 속에서, 예술작품의 ‘세계’ 속에서 또는 ‘생활세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들은 역사적 변화와 더불어 그 존재를 증대시켜 왔으며, 개인을 그 속에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개인으로부터 분리되어 대상화될 수 없다. 그 때문에 가다머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기와의 만남을 통해 진리를 인식한다.

‘방법’으로 파악될 수 없는 ‘진리’
가다머에 의하면 사물을 대상화시키는 진리는 ‘방법’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다. 진리는 계획적이고 통제성을 띤 방법과는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진리는 ‘현재의 것과 역사적인 것의 존재가 표현되고 이해’되는, 즉 ‘삶의 실행’과 연관된 생기이다. 다시 말해 진리는 이 양 존재가 만나는 사건이다. 생기로서의 이러한 진리는 사유의 발전과정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사유의 변화와 무관한 그 어떤 존재’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다머가 그의 해석학에서 언급하는 ‘이해의 역사성’도 바로 이 사유의 변화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가다머의 이해는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의 그것과는 달리 역사적 지평과 현재의 ‘지평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진리생기의 한 중요한 계기이다.(임호일 동국대 독문학)

08. 09. 15.



 

 

 

P.S. 중고생을 위한 책으로 <가다머가 들려주는 선입견 이야기>(자음과모음) 같은 책도 나와 있지만 가다머에 관한 본격적인 소개서나 연구서는 아주 빈약한 편이다. <진리와 방법> 국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리처드 팔머의 <해석학이란 무엇인가>(문예출판사)가 (철학적) 해석학에 대한 표준적인 입문서 역할을 했었다. 아마도 조지아 윈키의 <가다머>(민음사)가 거의 유일한 소개서였던 듯싶고, <한스-게오르그 가다머>(한양대출판부, 2001)를 보탤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다(관련서로 가장 인상적인 책은 짱 롱시의 <도와 로고스>(강, 1997)였다). 최근에 나온 책으론 정연재의 <윤리학과 해석학>(아카넷, 2008)이 있는데, '그리스 철학의 수용과 재해석의 관점에서 본 가다머 철학'가 부제이며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에 토대를 둔 것이다.

한편, 작년 여름 <진리와 방법>을 펴들었다가 맛보기로 쓴 페이퍼로 '파도타기와 공잡기'(http://blog.aladin.co.kr/mramor/1364280)도 참조. '가다머 읽기'를 더 길게 쓰고도 싶지만, 요즘은 파도탈 시간도, 공잡을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군. 날씨는 여름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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