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교수신문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 번역자의 번역기를 옮겨놓았는데, '번역을 말한다' 코너가 계속 연재되는 모양이다. 이번주에는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한길사, 2007)이 다루어졌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810). 필자는 책의 번역자인 이영석 교수이다.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이 연재는 아마도 계속 옮겨놓을 듯싶다).
교수신문(08. 09. 16) 역사적 지층의 의미를 찾아서
윌리엄 호스킨스의 『잉글랜드 풍경의 형성』은 영국사학계에서 역사지리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호스킨스는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적 형성물이라는 전제 아래 잉글랜드의 구릉과 평야, 경지와 목초지, 촌락과 도시 등을 탐사한다. 이 책의 개요는 1970년대 중엽 BBC 텔레비전에 방영돼 사람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존 해리슨의 『영국 민중사(The Common People of Great Britain)』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발췌한 호스킨스의 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 후에도 영국사회사를 다룬 책들에서 간혹 그 책을 인용한 구절을 발견하곤 했다. 1990년대 중엽 런던의 한 헌책방에서 펭귄판 책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서가에 꽂아놓았을 뿐 눈여겨보지 않았다.
1990년대 말 근대 영국 사회경제사를 다룬 연구서를 내놓은 후, 나는 자신의 역사 연구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아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탓이 아니었나 싶다. 우선 무엇보다도 무미건조한 사회사 서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역사서술의 문학성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곳저곳에 눈길을 돌리며 암중모색하던 내게 호스킨스의 책은 한 줄기 섬광처럼 감동으로 다가왔고 새로운 지적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2003년 영국에 체류하면서 이 책을 본격적으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 해 내내 나는 호스킨스의 체취에 깊이 빠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료에서 문제를 찾고 그 문제를 수수께끼처럼 풀어나가는 그의 지혜와 잉글랜드 자연풍경 하나하나에 기울이는 깊은 애정과, 그리고 특히 그의 뛰어난 문학적 상상력에 사로잡혔다. 미들랜즈 동부의 시골길을 걷다가, 책에서 읽은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호스킨스의 책은 농촌 풍경에 남아 있는 ‘역사적 지층’의 의미와 비밀을 해독하려는 시도다. 여기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하나의 풍경이 역사적 시간을 중층적으로 담고 있다는 점이다. 비유하면 풍경은 ‘거듭 새긴 양피지’(palimpsest)와 같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는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자취와 그들이 그린 흔적이 남아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들 선대의 자취를 반쯤 지우고 그 위에 자신들의 삶의 흔적을 덧칠한다. 호스킨스는 바로 이 거듭 새긴 양피지에서 과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뒤쫓는다. 현재의 촌락과 발굴된 촌락터를 답사하면서 그곳에서 옛날 켈트인들의 정착과 후대 앵글로색슨인들의 이동과 중세 농민의 생활과 그리고 상승하는 부농의 새로운 모습을 그림처럼 되살린다. 말하자면 낯익은 풍경에 대한 해독을 넘어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것이다.
호스킨스는 자연 모두가 사람의 활동과 관련되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미미한 경관과 풍경 속에도 인간의 삶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풍경이라는 창을 통해 인간의 삶의 모습을 되살린다. 그렇다면 2차 대전 직후 호스킨스를 비롯한 일단의 역사가들이 풍경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움직임은 자연 자체의 위기를 목격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다.
2차 대전의 폐허와, 그리고 냉전기에 군사기지와 군비행장을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구릉과 경지와 산림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잉글랜드 지방 곳곳을 답사했다. 물론 역사적 풍경을 탐사하는 작업은 호스킨스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 새롭게 대두한 지명 연구와 고고학과 그리고 무수한 아마추어 지방사가들의 작업에 힘입어 호스킨스와 그의 동료들은 잉글랜드의 역사 속에서 풍경을 재구성하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다. 사실 호스킨스의 책은 시론적인 것이며, 그의 책이 나온 뒤에 각 지방별로 풍경의 변화를 탐사하는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2005년판 서문에서 키스 토머스는 호스킨스의 책이야말로 20세기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한다. 사실 호스킨스가 이 책을 펴낸 1950년대 중엽만 하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음에 묻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나직한 목소리는 한 세대가 지난 후 환경과 생태에 대한 우려와 관심이 증폭되면서 설득력을 얻게 됐다.
호스킨스의 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높은 호응과 관심을 얻고 있다. 특히 근래 영국의 환경과 생태는 1950년대 냉전기의 변화보다도 더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오늘날 호스킨스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는 것 또한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국 경제의 호황과 더불어 곳곳에서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고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호스킨스가 살아 있다면, 그는 냉전기의 폐해보다도 현재의 변화가 더 심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005년 판 서문을 쓴 키스 토머스도 두 세대 전 호스킨스가 느꼈던 것보다 더 심한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암암리에 내비친다. 돌이켜보면, 근대의 지적 전통에서 자연은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유기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에 의해 개조되고 변형되는 수동적 존재로만 여겨졌다.
그리하여 자연은 언제나 사람들의 삶에 걸맞게 변형된 ‘인간화된 자연’이었다. 그 전형이 풍경이다. 이제 자연은 더 이상 자신의 인간화를 감내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세계 곳곳에서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다. 이제는 풍경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한 호스킨스의 작업을 넘어서 인간화된 자연이 과연 앞으로 지속 가능한지 심각하게 되묻지 않으면 안된다.
호스킨스의 책은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과 환경만을 뒤쫓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심을 내면화하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잃어버린 자연을 일부나마 다시 되살리며 남아 있는 자연이 우리의 삶과 공존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번역할 때 한 가지 궁금증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동안 우리의 풍경은 어떻게 변했는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또 무엇을 얻었는가. 지난 반세기에 걸쳐 산업화라는 이름 아래 급속하게 뒤바뀐 우리 풍경에 관해 과연 호스킨스의 작업과 같은 그런 연구와 탐사가 가능할 것인가.(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08. 09. 16.
P.S. 생소한 책이지만 리뷰를 읽다 보니 또 관심을 갖게 된다. 역자의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풍경>(푸른역사, 2003)이 이 책의 번역과정에서 얻은 소출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