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출간도서 중 개인적으로 의미심장하게 생각하는 것은 천병희 선생의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숲, 2008)이다. 이미 10년전에 단국대출판부판으로 나온 바 있으니 개정판이라고 할 수 있고, 당분간은 '결정판'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된다(이번에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도 같이 나왔다). 출간작업을 맡았던 편집장의 소감을 스크랩해놓는다(역자 인터뷰 기사는 http://www.donga.com/fbin/output?f=M_s&n=200810180145&main=1 참조).

 

세계일보(08. 10. 18) [편집장과 한권의책]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기원전 497/6∼406/5)는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로, 그가 쓴 비극 123편 중 전해오는 것은 7편, 그 중 최고의 비극으로 평가되는 ‘오이디푸스 왕(王)’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는 이를 격찬하여 비극의 전형(典型)이라고 하였다.

국내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중역본이 나와 있고 ‘오이디푸스 왕’을 읽은 독자들도 많고 다양하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전해지는 전 작품을 접한 독자는 몇이나 될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의 첫 번째 독자로서 ‘오이디푸스 왕’만 읽고 소포클레스를 놓아주기엔 그의 모든 작품이 한마디로 ‘주옥(珠玉) 같구나’하는 감탄 때문이다.

서양에서 줄곧 교재로 사용되었기에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2500년을 살아남는 7편이다. 십수 년 전부터 그리스 비극을 원전 번역해오던 천병희 선생은 33편의 그리스 비극 전집을 목표로, 지금까지 발표한 번역들을 시대와 언어의 변화에 맞게 재번역하며 기존의 오류들을 바로잡았고,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번역하느라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그리스 문학의 원전 번역에 각고의 세월을 바친 노 교수의 쉼 없는 열정으로 우리도 곧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의 전집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을 갖게 된다.

그리스 비극이 완성되던 기원전 5세기는 그리스 역사의 황금시대일 뿐 아니라 서양인들이 끊임없이 그 시대의 삶의 방식 등을 당대에 재현하고자 했을 만큼 모델이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황금시대를 살면서도 그들이 인간의 고통을 직시하고 이해하고 비극에 담아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자유의 이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기원전 5세기 아테네답게 자유인의 비극, 당한 자로서의 고통이 아니라 행한 자의 고통과 비극 속에서 그들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혹자는 정신의 크기라고 말하고, 혹자는 인간의 숭고(崇高)라고 말한다.

그리스 비극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기도 하거니와 고전 속에서 어떤 광맥을 찾든 그건 독자의 몫이다. 어느 누구도 ‘이것 캐시오! 저것 캐시오!’ 할 수는 없다. 읽다 보면 광맥과 만난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서양 고전을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은 원전 번역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강규순 도서출판 숲 편집장)

08. 10. 18.

P.S. 예전 번역본으로 읽은 <오이디푸스왕>은 한두 군데 오역과 매끄럽지 않은 대사들이 흠이었는데, 새 번역본은 그런 흠들이 다 가려졌을 것으로 믿는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도 만끽할 겸 올 겨울에 한번 숙독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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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10-20 09:25   좋아요 0 | URL
하...반가운 소식이네요. 곧 에우리피데스도 나오겠군요.
책 표지가 세련되 진것과 가독성을 높이는 편집 외에 또 다른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숲과 이제이북스는 열심인 것 같습니다. 끊이지 않고 팔리기야 하겠지만 또 많이 팔리지는 않을 듯...

로쟈 2008-10-20 18:47   좋아요 0 | URL
스테디셀러라면 된다면 번역도 계속 이어질 텐데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몇달 전 한 대학저널과 가진 인터뷰기사가 뒤늦게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기자가 '로쟈'에 대해서 잘 아는 편이 아니고 짤막한 인터뷰여서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 있지는 않다. 번역문화에 대한 몇 가지 질문에 답한 탓에 부제는 '블로거 ‘로쟈’, 번역 문화를 비판하다'라고 붙여졌다. 창고에 넣어둔다...

서울대저널 제90호(08. 03) [캠퍼스라이프]“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있다!

‘로쟈’라는 필명은 낯설다. 혹자는 ‘로쟈 룩셈부르크’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한겨레21>에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쓰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블로거 ‘로쟈’를 아냐고 물으면 이내 곧 ‘아!’하고 무릎을 치곤 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을 따 필명을 ‘로쟈’로 지었다는 그는 바로 노어노문학과 강사 이현우 씨였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두꺼운 책이 뭔가 있어 보여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는 그에게 서평을 올리게 된 연유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소탈하게 “자연발생적”이라고 답했다. 온라인 서점 등장 초기에 리뷰에 대해 제공된 마일리지를 적립할 겸 쓰기 시작한 서평이 모여 블로그가 됐다는 것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방문자 수가 늘어나 개인적이기보다는 공적 공간이 되어 조금은 의식하고 있다”는 그는 주로 인문 분야에 대한 서평이나 시사에 대한 정보나 이슈 등으로 그의 블로그를 채우고 있다.

최근 로쟈 씨의 블로그를 살펴보면 번역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띈다. 처음에 “비싼 돈 주고 산 책의 번역이 엉터리일 때 책값이 아까워서” 번역에 대한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그는 역시 ‘오역(誤譯)’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책이라는 것이 일종의 ‘정신적 먹거리’이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책들과 그 번역물들이 외국산 음식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몸이 유해 물질이 일부 들어와도 바로 죽지는 않듯, 독서생활도 적당히 오역이 섞여 있고 날림 번역된 책들을 소화시켰다”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오역에 대한 비판이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몰리는 현실을 비판했다.

특이하게도 그는 ‘이론수입상’이나 ‘기지촌 지식인’ 등의 문제가 “아직 외국의 이론이 덜 수입되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많은 학문의 내용이 결국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것인 만큼 보다 제대로 연구되고, 자생적 결과물을 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이론과 내용이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연과학에서는 ‘최초’가 중요하지만, 인문학은 그렇지 않다. 이미 새로운 건 없다”며 인문학의 내용이 대학에 갇히지 않고 사회에 널리 공유되는 ‘학문의 민주화’를 강조했다.

“10년 쯤 전에는 학생들에게 할 충고가 있었지만, 다시 10년이 또 지나니 다시 대학의 신입생이라는 백지상태가 된 기분”이라는 로쟈 씨.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공적인 행위에 참여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쟈의 서재에서 삶의 ‘가치’를 음미해보는 건 어떨까.(조홍진기자) 

08.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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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8-10-18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공식적으로(?) 얼굴사진을 찍으셨군요!

로쟈 2008-10-18 22:58   좋아요 0 | URL
이미 시사IN 인터뷰때 팔린 쪽이어서요...^^;

merci 2008-10-19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 뒤에 계속 블로그를 들락거리고 있었는데 제가 쓴 글을 이렇게 한참 뒤에 보게 되니 민망하네요 -_-;; ㅎㅎ 음.. 제가 '로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사실이죠. ㅠ_ㅠ

로쟈 2008-10-19 08:41   좋아요 0 | URL
기억엔 작년쯤에 가졌던 인터뷰 같은데, 기사는 지난달치로 돼 있어서 의외입니다. 착오가 있는 거죠?..

merci 2008-10-19 17:33   좋아요 0 | URL
올해 겨울이었습니다.ㅎ 3월호에 썼던 것인데 지금 서버가 불안정해서 9월로 종종 표기되더라구요.

로쟈 2008-10-19 18:2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겨울이었죠...

람혼 2008-10-19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처음 로쟈님을 알게 된 '늦깎이' 블로거로서, 저도 로쟈님을 더욱 알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로쟈 2008-10-19 08:39   좋아요 0 | URL
제가 베일을 둘러치고 있나 보네요...^^

람혼 2008-10-22 01:49   좋아요 0 | URL
특별히 베일을 치고 계시다는 '은밀한' 느낌은 없지만, 언젠가 한 번은 꼭 차 한 잔 나누면서 담소도 나누고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루쉰P 2008-10-19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어떤 분이신줄 실제 사진을 처음 봤네요.^^ 이제 얼굴이 알려지셔서 어떻해요. 로쟈님의 신비주의가 사라질까 걱정이 되네요.^^ ㅋㅋㅋ 사진 너무 잘보고 갑니다.

로쟈 2008-10-19 08:38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면 사진이야 다 뜹니다. 어느 책 제목을 빌자면 '개인의 죽음(The End of Privacy)'이 대세인 시대인지라...

무스탕 2008-10-1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동안 로쟈님께서 저 이미지의 수염 덥수룩한 그런 외모이신줄 알았어요..;;
훨씬 이쁘십니다 ^^

로쟈 2008-10-19 18:25   좋아요 0 | URL
딸아이가 지젝 사진을 보고 아빠냐고 물어보긴 했습니다. 곧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파란여우 2008-10-19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이 좀 헬쓱해지셨습니다. 미모는 여전하시지만^^

로쟈 2008-10-19 18:25   좋아요 0 | URL
얼굴만 살이 안 찌는 편이어서요...^^;

바라 2008-10-19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오재미동에서 데리다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나네요.. 올려주신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8-10-20 18:47   좋아요 0 | URL
아, 벌써 몇년 전이군요!^^;

영이 2008-10-20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년 간 이 곳을 종종 들러 보았지만 사진은 처음 뵙습니다.
쓰시는 글에서 느껴지던 이미지와 비슷하세요^^
정말 반갑습니다^^

로쟈 2008-10-20 18:48   좋아요 0 | URL
댓글도 처음이신 듯한데요.^^

순오기 2008-10-20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시로 들락거리는 저는 예전에도 로쟈님의 사진과 실명이 공개된 걸 봤어요~ 그래서 더 반가운 얼굴이고요.^^

로쟈 2008-10-20 18: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드팀전 2008-10-20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사진을 보니 예전의 어떤 분이 남겼던 스캔들적인 촌평이 떠오르는군요...
박지원을 닮았다는

제 결론은 별로 안닮았어요.

로쟈 2008-10-20 18:4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2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본 사진에선 강의하고 있는 모습이었어요.박지원 씨보단 눈이 더 크네요. 안경 벗은 사진은 없나요?

로쟈 2008-10-20 18:50   좋아요 0 | URL
관상도 보시나요?^^ 대충 사람꼴이면 되지 않나요?^^;

Koni 2008-10-20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로쟈님 얼굴을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로쟈 2008-10-21 08:29   좋아요 0 | URL
성자는 아니죠?^^;

마노아 2008-10-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사진을 클릭하니 엄청 커져요! 잡티 없는 얼굴의 면모를 확인했습니다. 눈매가 깊으시네요. 안경 탓일까요, 분위기 탓일까요? ^^
 

바슐라르의 과학철학서 얘기가 나온 김에 지난달에 있었던 유럽입자물리연구소의 거대강입자충돌기(예전엔 그냥 '입자가속기'라고 불린 듯한데) 실험과 관련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이후 소식을 접하지 못했는데 실험 자체가 연기된 듯싶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투여된 장치인 만큼 그 실험결과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지난 9월 초 완공된 거대 강입자충돌기(오른쪽)와 건설 전 조감도. 현재 LHC는 연결 장치의 문제로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는 내년 봄 재가동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제공.

한겨레21(08. 10. 17)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

지난 9월 초 과학계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서 막 가동을 시작한 ‘거대 강입자충돌기’(LHC·Large Hadron Collider)에 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14년 동안 순제작비만 55억달러가 소요된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인 LHC는 이전까지 가장 큰 가속기였던 미국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의 ‘테바트론’(Tevatron)보다 7배나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둘레 길이만도 27km에 달하는 거대한 장치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높은 에너지를 가진 양성자를 서로 충돌시킬 때의 반응을 ‘관찰’함으로써 1964년 영국의 물리학자 피터 힉스가 예측했던 ‘힉스 입자’(Higgs boson)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LHC의 실험 소식은 ‘빅뱅 실험’이니 ‘우주 탄생 순간의 재현’이니 하는 수식어들과 함께 대중 매체에서도 높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LHC 가동에 관한 언론 보도들은 이번 실험이 갖는 과학적 의미에 대한 소개와 전례없는 규모의 실험에 대한 호기심만이 가득 차 있을 뿐, 그러한 대규모 과학의 배경이 되는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설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SSC. 미국 주도 패권주의 과학의 실패
사실 1960년대에 완성된 테바트론을 넘어서는 거대 입자가속기를 만들자는 계획은 LHC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에 이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테바트론의 20배에 달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대 입자가속기인 ‘초전도 슈퍼콜라이더’(SSC·Superconducting Supercollider)의 건설을 추진한 적이 있다. 1983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약한 핵력을 매개하는 입자인 W입자와 Z입자의 발견 사실을 공표하자 미국 내에서는 소련과 유럽에 맞서 미국이 고에너지 물리학의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주장이 부각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제안된 SSC는 그러한 패권주의적 발상의 산물이었다. SSC는 완성될 경우 둘레 길이가 87km에 달하는 거대 장치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이 계획을 승인한 1987년에는 건설에 44억달러가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노벨상 수상자인 리언 레이더먼과 스티븐 와인버그를 포함한 저명한 과학자들은 SSC를 통한 빅뱅 직후 초기 원시 우주 상태의 재현을 ‘신의 음성’에 비유하거나 입자가속기를 성당에 비유하는 식의 종교적 수사를 동원해가며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캠페인에 나섰다. 특히 레이더먼은 힉스 입자를 ‘신의 입자’(God particle)라고 부르면서 SSC의 건설이 곧 신성(神性)에 이르는 첩경이라는 식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SSC는 이내 불운한 종말을 맞았다. 애초 44억달러였던 예상 건설비는 눈덩어리처럼 불어나 공사가 시작될 즈음인 1990년에는 79억달러로 상향조정됐고, 1993년 일반회계국 조사에서 또다시 110억달러로 뛰어오르자 미국 의회는 1993년 결국 프로젝트를 백지화했다. SSC가 실패를 맛본 데는 규모와 체제 경쟁에 집착하는 냉전적 사고방식과 미국 중심의 국가주의적 태도가 크게 작용했다. 계획 초기에 SSC를 국제적인 과학 프로젝트로 만들 것을 주장했던 일본 물리학자들은 “SSC는 미국의 시설”이라는 면박을 들어야 했는데, 미국의 이러한 오만함은 이후 예산 부족에 허덕인 SSC를 구해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SSC보다 조금 늦게 시작한 LHC 역시 추진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LHC가 처음 제안된 것은 1981년으로 SSC보다 오히려 앞서지만,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LHC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시작된 것은 한참 뒤인 1988년부터였다. 당시에는 규모가 훨씬 큰 SSC 계획이 미국에서 추진 중이었기 때문에, LHC 건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LHC가 SSC가 잘 안 될 때를 대비한 일종의 ‘보험’으로서, 또 여러 가지 종류의 실험을 할 수 있는 다용도 충돌기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폈다. 1991년 11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는 LHC가 “고에너지 물리학의 발전과 연구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기계”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LHC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완공 예정 2002년으로부터 6년 더 걸려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모이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이사회에서 LHC 건설 계획안이 승인되는 과정은 험난했다. 1993년에 1차로 계획안이 제출됐지만, 예산 증가에 비판적인 일부 회원국들은 비용의 추가적인 감축을 요구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은 LHC가 위치해 더 많은 혜택을 보게 될 스위스와 프랑스가 추가로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할 것을 요구하면서, 제안된 예산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94년에 유럽입자물리연구소는 LHC에 설치될 전자석의 3분의 1 정도를 일단 제외해 건설 비용을 절감한 뒤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면 빠진 전자석을 채워넣는 임시변통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이사회의 최종 승인을 얻었다. 이러한 상황은 1995년 비회원국인 일본이 상당한 액수를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러시아·인도·캐나다·미국 등과의 협상이 긍정적으로 진행되면서 조금씩 호전됐다. 예산이 웬만큼 확보되면서 1996년에는 LHC 전체를 한번에 건설하는 쪽으로 수정 계획안이 다시 제출됐다.

그러나 LHC의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동·서독 통일에 수반된 엄청난 비용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독일이 국제적 과학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예산을 대폭 삭감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 들어가는 예산을 감축하기 위해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던 영국도 여기 가세했다. 결국 연구소는 1997년 이사회의 동의를 얻어 차관을 들여와 부족한 공사비를 메우는 길을 택했다. 적자 운영은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LHC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LHC는 애초 2002년 완공 예정이었으나 예산 문제로 여러 차례 연기돼 결국 올해 들어서야 완성이 됐다.

태초의 비밀·신의 마음… 수사들의 향연
SSC의 ‘실패’와 LHC의 ‘성공’은 거대한 실험 장치의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대과학 분야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SSC는 냉전기의 체제 대결 의식에 뿌리를 둔 거대과학 프로젝트가 변화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비해 LHC는 일견 성공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자금 압박과 프로젝트의 의미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계속해서 위기의식을 조성했음에도 국제적 공조와 여러 임시변통 수단을 동원해 어렵게나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LHC는 탈냉전 시기에 거대과학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한 방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LHC의 ‘성공’은 다른 점에서는 더 큰 물음을 낳고 있다. 과연 LHC가 추구하는 목표들이 그것의 실현 가능성 여부와 무관하게 그토록 엄청난 지출을 정당화할 만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고에너지 물리학자들은 태초의 비밀을 밝혀낸다느니, ‘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느니 하는 수사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연구를 정당화해왔지만, 갈수록 엄청난 비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연구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번 LHC의 가동은 “우리에게는 어떠한 물리학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숙고가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웅변해주고 있다.(김명진 성공회대 강사)

08. 10. 18.

P.S. 내친 김에 한겨레의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 꼭지인데, 정재승 교수의 연재를 김명남 번역가가 이어받은 듯하다. 앞에서도 언급된 '힉스 입자'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정확히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책을 소개해준다.

한겨레(08. 10. 18) 도대체 ‘힉스 입자’가 뭐길래

지난주는 노벨상 수상자가 줄줄이 발표되는 이른바 노벨상 주간이었다. 평소에는 그에 앞서 발표되는 기상천외한 ‘이그노벨상’에 더 흥미를 쏟는 나지만, 올해만은 본상에 관심이 갔다. 일본 출신의 과학자들이 네 명이나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심정인 것은 아니다. 물리학상의 세 수상자들은 줄기차게 0순위 후보로 거론되었던 사람들이고, 올해 드디어 수상을 하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올해는 유럽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가 가동을 시작한 해로서 입자물리학 분야의 전기가 될지도 모르는 시기인데, 수상자들은 현 시점에서 입자물리학의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는 표준모형을 완성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표준모형은 더는 쪼갤 수 없는 17개의 기본 입자들로 자연의 모든 물질과 힘을 설명한다. 여기에 쿼크 6개도 포함되는데, 이번 수상자 중 마스카와 도시히데와 고바야시 마코토는 마지막으로 발견된 한 쌍의 쿼크를 예측했다. 한편 난부 요이치로는 표준모형을 뛰어넘는 끈 이론에서까지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노벨상의 대상이 된 연구는 자발적 대칭성 깨짐이라는 현상을 발견함으로써 표준모형의 기틀을 다진 업적이다.

그런데 표준모형이라는 퍼즐은 마지막 한 조각, 곧 열여덟 번째 입자가 아직 맞춰지지 않았다. 힉스 입자라는 조각이다. 9월10일에 역사적인 가동을 시작한 (비록 이후 고장이 나 두 달여간 중단된다고 하지만) 거대강입자가속기는 여러 과제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이 힉스 입자 확인에 초점을 맞춘다.

대체 힉스 입자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수천명의 과학자들이 수조원의 돈을 써서 둘레 27킬로미터의 가속기를 지어서 확인해야 할 정도인가? 거기에 정말로 물리학의 미래가 달렸을까? 이런 궁금증들이 떠오를 때 <신의 입자를 찾아서>를 펼쳐야 한다. 고등과학원 연구원인 물리학자 저자가 표준모형에서 정점을 이룬 현대물리학의 발자취와 전망을 풀어냈다. 5장을 읽으면 힉스 입자가 왜 ‘신의 입자’라고 불리는지, 어째서 그것에 표준모형의 명운이 걸렸는지 알 수 있다. 거대강입자가속기의 실험 결과에 따라 어떤 식으로 물리학의 행보가 나아갈지도 짐작해볼 수 있다.

입자물리학을 깊이 알고자 한다면 분량에 아쉬움이 있는 이 책보다 다른 책을 집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가장 최근에 씌어졌다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땅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의 시각이 담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련 주제의 책을 이미 여럿 읽은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어봄 직한 이유는 그것이다. 정부는 5년 노벨상 계획이 어쩌고 하며 옆집의 노벨상을 부러워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1949년에 첫 물리학상 수상자를 냈고 54년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 첫 수상자를 배출했던 오랜 저력의 일본 기초과학을 단기적 대책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절감하게 된다.(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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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인상적으로 읽은 기사는 경향신문의 '책읽는 경향' 코너였다. 바슐라르의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하는 것이었는데, '한국 지식사회의 편식증'을 꼬집고 있어서 눈길이 갔던 것. 오랜만에 바슐라르 과학철학의 의의를 상기시켜주는 글이기도 해서 옮겨놓는다. 사실 <새로운 과학정신>은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다.  

 

경향신문(08. 10. 17) [책읽는 경향]경기·인천에서-새로운 과학정신

한국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과학적 세계관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의 지식 사회는 편식증에 지독히 걸려 있다. 편식증의 핵심은, 문과형 지식에만 근거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아집이다. 그들에게 바슐라르하면 물, 불, 촛불, 꿈, 상상력과 같은 단어들이 주로 연상될 것이다. 기하학, 유기화학, 진화생물학 같은 학문에 등장하는 언어들이 바슐라르를 이해하는 데 어떤 의미가 있을지, 그들은 생각해볼 겨를이 없다.

바슐라르, 조르쥬 캉길옘, 미셸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사상적 계보는 바슐라르의 또 다른 차원 때문에 형성됐다. 과학사와 과학철학이 이런 계보를 가능하게 한 학문적 기둥이 됐다. <새로운 과학정신>(인간사랑)에서 독자들은 그의 전복적인 사고를 만날 수 있다. 비유클리드 기하학, 비뉴턴 역학, 비아르키메데스 측정학, 비맥스웰 물리학, 비피타고라스 논리학, 비데카르트적 인식론 등 기존의 과학적 세계를 뒤집어보려는 그의 독창적인 사유가 이 작은 책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전복적인 사고를 이해할 때, 바슐라르의 문학적 세계도 더욱 명료하게 밝혀진다.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한국의 지식 문화에서 바슐라르는 허공을 맴돈다.

계량적 업적과 성과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그를 흉내내다가는 숨도 쉬지 못하고 바로 매장된다. 바슐라르는 단호히 말한다. “새로운 과학 정신이 가능하려면,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이 부러운가. 선결 과제가 무엇인지 이 책은 말하고 있다.(이종찬 아주대 의대 교수)

08. 10. 18.

P.S. 바슐라의 과학철학서로 <새로운 과학정신>과 함께 나왔던 책은 <부정의 철학>(인간사랑, 1991)이다. 개인적으론 복학한 이후에 야심을 갖고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권 다 나로선 읽을 수 없는 책이었다. 독해력/이해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번역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결론을 보진 못했는데, 언제 시간이 나면 확인해봐야겠다. 짐작으론 기사의 필자도 국역본으로 읽지는 않았을 성싶다. 바슐라르의 또다른 과학철학서로는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민음사, 1998)이 이후에 더 출간됐다. 서두에서의 흥미로운 구절을 자주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입자설과 파동설에 관한 것이었다).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바슐라르, 조르쥬 캉길옘, 미셸 푸코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사상적 계보"를 다룬 책은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다. 이들 대부분이 품절/절판된 상태인데, <부정의 철학>만이 아직 구입가능한 것으로 돼 있어서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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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출간소식을 전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349160) 랑시에르의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길, 2008) 리뷰기사를 한번 더 옮겨놓는다. 마침 책의 영역본을 한참 찾다가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충분히 예상했던 기사이다). 책은 끝내 찾지 못했고 낮에 인터넷에 떠 있는 걸로 보았던(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것도 다시 찾지 못했다(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게다가 러시아어본도(보통 인터넷에 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의 경우는 일부만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만이 올라와 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국역본을 좀더 꼼꼼하게 읽기 위해서 찾은 것인데, 여하튼 낭패다(국역본만으로는 모호하거나 해독되지 않는 대목이 적지 않다). 주말 북리뷰들이 올라오는 걸 보고 나대로의 서평을 쓸 것인지 판단해봐야겠다... 

한겨레(08. 10. 18) 정치가 종말을 고했다고요?

‘불화’ 개념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68·사진)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가 양창렬(파리1대학 박사과정)씨의 번역으로 나왔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감성의 분할>에 이은 랑시에르 저서의 세 번째 번역본이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원본은 두 번에 걸쳐 출간됐는데, 초판본과 재판본의 차이가 크다. 1986~1988년 사이에 쓴 논문 세 편을 묶은 초판본(1990)은 1980년대 이전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사유가 압축돼 있다. 랑시에르는 1990년대에 쓴 논문 네 편을 덧붙여 1998년에 증보판을 다시 펴냈다. 특히 이 증보판에는 그의 대표작인 <불화>(1996)에서 전개한 사유가 ‘정치에 대한 10가지 테제’라는 이름으로 요약돼 실렸다. 이로써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는 랑시에르의 첫 번째 정치철학 저서로 태어나 그의 사유를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저작이 됐다. 한국어판은 1998년의 증보판을 옮긴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정치적 정황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론이 패퇴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선언되던 때였다. 이 시기에 유행한 정치철학적 담론으로 랑시에르는 크게 두 가지를 거론한다.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귀환)’가 그것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테제로 대표되는 ‘정치의 종언’은 계급투쟁으로서의 정치가 종말을 고했다고 선언했다. 다른 한편에선 ‘진정한 정치로 회귀할 때가 됐다’라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철학적 선언이 떠돌았다.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갈등·조정으로서의 근대 정치를 뛰어넘어 고대 그리스의 ‘순수 정치’로 회귀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랑시에르는 언뜻 대립되는 이 두 담론이 실은 해방의 정치를 제거하는 똑같은 기능을 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이 두 담론 사이에서 제3의 길을 모색하면서 ‘정치’를 다시 사유하려고 한다. 그 사유가 응집된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이며, 이 책은 그 개념을 설명하는 여정들의 묶음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구사하는 전략이 ‘치안’과 ‘정치’의 구분이다. 여기서 치안과 정치는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랑시에르는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이르는 것을 두고 치안(police)이라고 지칭한다. 치안이란 간단히 말하면, 국가를 경영하는 기술이다. 치안은 통치 과정이다. 인간들을 공동체(국가)로 결집시켜 동의를 조직하고, 그들 각자에게 자리와 기능을 분배해 위계를 유지시키는 것이 치안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정치가 전형적인 치안에 해당한다. 랑시에르는 이 치안에 정치를 맞세운다. 정치란 평등 과정이며 해방 행위다. 그것은 치안의 질서를 가로질러 그 위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분배의 질서를 해체하는 작업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이란 바로 이 치안과 정치가 맞부딪치는 지점을 가리킨다. 치안과 정치가 부딪쳐 형성되는 선이 곧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 테두리, 경계인 셈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의 이 관계를 ‘도로’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냥 지나 가시오! 여기에 아무것도 볼 것 없어!” 치안은 통행 공간이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주체들(인민·노동자·시민)의 시위 공간으로 바꿈으로써 성립한다. 정치의 출현과 함께 치안 질서는 순간적으로 와해되고 새로운 공간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때 치안과 정치가 충돌하는 지점을 두고 그는 ‘정치적인 것’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정치와 치안의 관계는 랑시에르가 <감성의 분할>에서 상술한 ‘감각적인 것의 나눔’(감성의 분할)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치안은 ‘여기엔 아무것도 볼 것이 없어!’라고 말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감각·지각하는 일에서 어떤 특정한 질서를 고집한다. 반면에 정치는 여기에 볼 것이 있고, 할 것이 있고, 명명할 것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감각·지각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하던 시기에 그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데모스(인민)는 기존 지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인민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정치 주제가 됨으로써 보이고 들리고 말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정치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써 듣게 만드는” 행위다. 그런 해방 과정으로서의 정치는 종말이 없다. 공동체는 체제를 지키기 위해 치안을 불러들이지 않을 수 없고, 그 치안의 질서는 어떤 식으로든 배제와 차별과 위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이 치안에 대한 항구적인 불화의 과정이다. 그 치안과 정치 사이에서 ‘정치적인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낸다고 랑시에르는 말한다.(고명섭 기자)

08. 10. 17.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대우학술총서번역 105)

P.S. "민주주의가 고대 그리스에서 성립하던 시기에 그 사회의 하층민이었던 데모스(인민)는 기존 지배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존재였다. 인민의 말은 말이 아니라 소음이었다."라는 구절 때문에 상기하게 되는 책은 요즘 잔뜩 벼르고 있는 모시스 핀리(Moses Finley)의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민음사, 1998)이다. 핀리는 '모제스 핀레이'라고도 표기됐는데(덕분에 알라딘에서는 따로 검색된다), 이 책 외에도 <고대 세계의 정치>(동문선, 2003), <서양 고대경제>(민음사, 1993), 그리고 편저로 <그리스의 역사가들>(대원사, 1991), <고대 노예제>(탐구당, 1983) 등이 더 소개돼 있는 고대 그리스 경제사의 권위자이다.

나는 <고대 세계의 정치>에 반해서 나머지 책들에 대해서도 눈독을 들이게 됐다. 그리고 제일 먼저 고른 것이 <고대 노예제도와 모던 이데올로기>인 것('모던 이데올로기'는 뭔가? 본문에도 그냥 '근대 이데올로기'라고 돼 있건만).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경제적 토대로서의 노예제는, 그간에 모든 노예제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다는 이유로 너무 간과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요컨대, 노예제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다). 핀리를 읽으려는 것은 그런 생각을 좀 보강하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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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10-1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활발한 서평을 쓰시네요^^ 너무 부러워요. 제가 오늘 헌책방에서 일을 하다가 페르디난트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란 책 한국번역본을 발견했어요. 완전 황금을 깬거죠. 리영희 교수님이 '대화'라는 책에서 추천하신 도서로 알고 있어서 꼭 읽고 싶었거든요. 역시나 저의 뜬금없는 댓글이지만 제가 여유분을 더 사놔서 혹시나 이 책이 필요하시면 얘기해 주세요^^ 제가 무료로 보내드릴께요. 노이에자이트께도 똑같은 말 써 놨어요. 주변에 이런 책에 관심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부담 갖지 마시고 혹시나 필요하시면 얘기해주세요. 물론 로쟈님은 이 책이 있으실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요^^

로쟈 2008-10-18 00: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고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에 들어있던 것 아닌가요? 황성모 교수의 번역으로 기억되는데요... 당장은 안 가고 있지만(아마도 박스에^^;) 덕분에 읽고픈 생각도 드네요. 고전은 나이 들어 읽게 되는 책들인가 봅니다(젊을 땐 고리타분하게만 보이더니)...

들사람 2009-01-16 22:36   좋아요 0 | URL
리영희 교수님 <대화>(p.523)읽다가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책 한 권 보내주실 수 있나요? 아직 여분이 남아있으면 좋겠네요. 연락은 이리로 부탁드립니다. sohngs@gmail.com

루쉰P 2008-10-1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바로 그 책입니다. 1985년 판이에요^^ 제가 그걸 오늘 헌책방에서 발견을 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을 하시네요. 역시나 대단하세요. 근데 제가 욕심이 나서 이 책을 무려 6권이나 구입을 했거든요. 그래서 사자님하고 노이에자이트님, 소조님하고 로쟈님께 혹시나 필요하신지 물어보고 있어요^^ ㅋㅋㅋ 저는 책을 발견한게 너무 좋아서 지금 이 사이트, 저 사이트 들어가서 계속 자랑하고 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8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퇴니스 이야기하시네요.하하하...정말 기쁘신가봐요.

루쉰P 2008-10-18 23:06   좋아요 0 | URL
^^ 이거 왠지 죄송스럽네요. 너무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이죠. 근데 확실히 고수들만 계셔서 다들 이 책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전 이제는 자랑은 그만하고 독서를 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또 토요일이라서 밤을 세워가며 퇴니스를 읽어 볼 결심입니다. 흐흐흐 *-* 아 너무 흥분했나봐요. 뒷골이 댕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