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줄'을 오랜만에 적어둔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쟈의 한 단어'라고 해야겠다. 최근 번역돼 나온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발견한 '한 단어'이다. '인식비판적 서설'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벤야민 선집 6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외>(길, 2008)에도 '인식비판적 서론'이라고 포함돼 있다. 각주에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최성만/김유동 옮김으로 2008년 중반에 한길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출간은 좀 미뤄지는 듯한데, 이 '서론'은 최성만 교수가 맡은 부분이고 한길사의 양해를 얻어 수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벤야민이 이 서설/서론에서 제사(에피그라프)로 끌어오고 있는 것은 괴테의 '색채론 역사의 자료'('색채론의 역사에 관한 자료')이다('자료'이니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역본 <색채론>에는 빠져 있을 듯하다). 두 번역본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일단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 단어이다. 두 번역을 차례로 옮겨본다.

"지식에는 속이 없고, 반성에는 겉이 없어서 지식에서든 반성에서든 전체는 엮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어떻게든 일종의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학문을 필히 예술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체성을 보편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예술이 언제나 전적으로 개개의 예술작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듯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도 역시 매번 전적으로 각기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입증되어야 한다."(새물결, 11쪽)

"전체라는 것은 지식에서든 성찰에서든 조립될 수 없는데, 그것은 지식에서는 내부가, 성찰에서는 외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학문에서 모종의 전체성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 학문을 예술로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우리는 그 학문을 어떤 일반적인 것,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고, 예술이 각각의 개별 예술작품에서 재현되듯이 학문 역시 각각의 개별 대상에서 그때그때 온전히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길, 145쪽)

말하자면, 이 대목은 벤야민 번역이 아니라 괴테 번역이고, 비교해서 읽어보다가 발견하게 된 건, 의아하게 생각한 건 강조한 두 단어의 차이다. 다른 부분들에서의 차이야 번역 문체상의 차이로 넘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단어를 '전체성'과 '학문'으로 다르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3자 대조를 위해서 영역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Neither in knowledge nor in reflection can anything whole be put together, since in the former the internal is missing and in the latter the external; and so we must necessarily think of science as art if we expect to drive any kind of wholeness from it. Nor should we look for this in the general, the excessive, but, since art is always wholly represented in every individual work of art, so science ought to reveal itself completely in every individual object treated.(Verso판, 27쪽)

문제의 단어는 this(이것을)로 번역돼 있다. 짐작대로 지시대명사다(그건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의 두 역자는 이 '이것'을 서로 다르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상 무엇이어야 할까? 괴테가 이 대목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체성'이므로 '찾으려는' 것 역시 '전체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대목의 번역은 어느 한쪽이 수정되어야 한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의역/직역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과제'를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08. 11. 07.

P.S. 참고로, 차봉희 편역,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에도 '인식비평 서론'이 번역돼 있는데, 같은 대목이 이렇게 옮겨져 있다. "지식은 성찰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것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내적인 것이, 후자에서는 외적인 것이 빠져 있으므로, 어떤 유형으로든지간에 우리가 학문에서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학문을 필연적으로 예술로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전체적인 것 안에서 추구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이 늘 개개 예술 작품 속에서 구현되듯이, 학문도 역시 모든 개개의 분야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180쪽) 여기서도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번역어로 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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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1-07 13:22   좋아요 0 | URL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Da im Wissen sowohl als in der Reflexion kein Ganzes zusammengebracht werden kann, weil jenem das Innre, dieser das Äußere fehlt, so müssen wir uns die Wissenschaft notwendig als Kunst denken, wenn wir von ihr irgend eine Art von Ganzheit erwarten. Und zwar haben wir diese nicht im Allgemeinen, im Überschwänglichen zu suchen, sondern, wie die unst sich immer ganz in jedem einzelnen Kunstwerk darstellt, so sollte die Wissenschaft sich als jedesmal ganz in jedem einzelnen Behandelten erweisen.

문제 삼으신 곳은 독일어에서도 역시 지시대명사 "diese"로 언급되고 있는 부분인데요, 예를 들어 이 부분이 첫 문장에서처럼 "jenem(Wissen)"과 "dieser(Reflexion)"로ㅡ두 명사의 위치와 성이ㅡ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문맥이었다면 그것이 "전체성(Ganzheit)"을 가리키는 것인지 "학문(Wissenschaft)"를 가리키는 것인지 좀 더 확연히 드러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두 단어 모두 여성 명사라 "diese"가 지시하는 것을 명사의 성으로 따져보려는 노력도 무위로 돌아가는군요.^^;

다만 1) 문법적인 관점에서 "diese"가 그 이전 문장 안에서 가장 나중에 등장했던 단어를 받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이 가리키는 말은 "전체성(Ganzheit)" 또는 "모종의 전체성(eine Art von Ganzheit)"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2) 내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학문 역시 예술의 방식을 따라 일반적인 것(das Allgemeine)과 과도한 것(das Überschwängliche) 안에서가 아니라 개별적인(einzelnen) 것 안에서 전체성을 찾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역시나 "diese"는 "전체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두 번째 번역에서 "학문"으로 옮겨진 목적어를 '전체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한다면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어그러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축자적인 면을 고려하는 적확한 번역을 생각할 때는 두 번째 번역이 수정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로쟈 2008-11-07 23:26   좋아요 0 | URL
네, 짐작대로군요. 러시아어에서도 '전체성'과 '학문'이 모두 여성명사입니다.^^;

2009-03-03 0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3-03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랑구 2009-03-10 01:35   좋아요 0 | URL
로자님, 아직 책을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 권 부쳐드리고 싶습니다.
주소 좀 가르쳐 주세요. 학문과 전체성 얘기의 힌트에 감사하는 마음에서요.
그리고 지난 번 글은 꼭 '비밀 댓글'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네요.
체크하는 난이 있기에 어리버리 체크하는 바람에..

최근에 제가 학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아감벤(남겨진 시간), 바디우(사도 바울), 랑시에르(미학안의..), 지젝(죽은 신..)의 글들을 죽 읽고 있는데 재미있네요. 벤야민이 간섭되고 있는 글들이고요. 그들이 서로 비슷한 측면을 공유하면서도 미세한 차이들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에게도 와 닿아야하는데, 그 점은 계속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서양 사상가들을 허겁지겁 따라가기에 바쁜 우리, 그런 우리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로쟈님도 그런 쪽으로 생각을 좀 해보시길 권합니다.

아 참, 기술복제도 최근에 로쟈님 지적을 숙고하면서 좀 손질을 봤습니다. 그에 대해서도 감사^^ 그 때 제가 반응을 했었죠. 여하튼...

로쟈 2009-03-10 06:20   좋아요 0 | URL
아, 책은 바로 구입했습니다.^^ 내달에나 읽어볼 듯합니다. 여러 철학자들의 벤야민 커넥션에 대해선 좋은 글을 써주시기를!^^
 

아침에 주간지를 읽느라고 신문은 챙겨보지 못했는데, 경향신문에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도서출판b, 2008)의 저자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책에 대한 소개는 며칠 전에 스크랩해놓았고(http://blog.aladin.co.kr/mramor/2378599), 내친 김에 인터뷰 기사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8. 11. 03) "고착화된 시스템에 우리 문학 갇혀 있다”

“황석영 작가의 최근작들은 수준 미달인데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이름값 덕에 무조건 높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문학평론가 조영일씨(35·사진)가 최근 펴낸 첫 비평집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도서출판b)에서 작가 황석영씨를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그동안 인터넷 공간을 통해 발표해온 글들을 모은 이 책에는 우리 문학을 향한 쓴소리로 가득하다.



조씨는 2006년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롯해 <세계 공화국으로>, <역사와 반복> 등 가라타니 고진(67)의 저서를 꾸준히 번역해 소개해온 ‘가라타니 전문가’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4년 겨울 ‘문학동네’에 게재된 자신의 강연문 <근대문학의 종언>을 통해 한국문학의 급격한 영향력 상실을 지적했고, ‘한국문학의 위기’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본의 문학비평가. 조영일씨는 이번 비평집 제목에 가라타니의 이름을 빌렸지만, 자신의 잣대로 국내의 작가와 비평가를 포함해 한국문단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근대문학의 종언> 후 4년이 지났지만 이 시대의 한국문학은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단지 회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가라타니 고진에 천착하는 이유도 한국에 가라타니 고진만한 비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책 제목에 그의 이름을 내세운 것도 폐쇄적인 한국문단에 이질적 요소를 집어넣어 그것을 깨보자는 의도입니다.”

그는 우리 문학이 제도화되면서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며 고착화된 문학 시스템을 우려했다. “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유력 문예지와 출판사 위주로 편성된 시스템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문화운동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젊은 작가나 비평가들이 더 딱합니다. 새로운 문학을 말하면서 기존 시스템에 속할 생각만 하고 시스템 내부에 들어가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해요.”



인터넷을 통해 자유롭게 쓰고 싶은 글을 써왔기 때문일까. 그는 문단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한국문학의 르네상스’를 말하는 작가 황석영씨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 ‘국민작가’라는 월계관 뒤에 숨어 입담으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객지>, <한씨연대기> 등 초기 작품은 굉장히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오랜 외국 생활 뒤에 쓴 <오래된 정원> 이후의 작품들은 솔직히 수준 미달인데, ‘황석영’이라는 이름의 후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신작 <바리데기>가 작품으로선 실패인데, 문단의 찬사를 받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에겐 성역이 없다. 비평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에 대해서도 ‘비평의 노년’이라며 “한국문학의 위기에 대해 객관적 평가 없이 낙관론에 젖어 있다”고 비판했다. “비평가 백낙청 선생은 문단의 어른이십니다. 어른이니까 자꾸 과거를 돌아보고 자기가 쌓아올린 것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현재를 바라보려 합니다. 일부 신세대 유명 작가들을 ‘한국문학의 보람’이라 칭하시는데, 보람은 어떤 일을 한 뒤에 회고를 하는 것이죠. 앞을 보지 않고 현실에 자족함이 안타깝습니다.”

그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우리 문단의 시스템 문제를 해결할 방안도 제시했다. “최근 조경란씨 소설과 관련, 표절 의혹을 덮고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문단 내부의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발언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젊은 사람들이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새로운 문예지와 동인지의 등장이 필요해요. 그런데 젊은 작가들은 신춘문예 등단의 출세코스를 밟으려고만 하니….”

그는 동인지를 낼 계획이라고 했다. 현재 운영 중인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에 연재한 글들을 모아 올해 말 무크지 형태로 낸다. “계속 인터넷 글쓰기를 통해 비평작업을 하겠습니다. 제 문제제기에 대해 문단이 귀 닫지 않기를 바랍니다.”(이영경기자)

08. 11. 03.

P.S. 황석영의 <바리데기>에 대한 저자의 비판에는 십분 동의한다(많은 비평가들이 그럴 테지만 그들은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 한편, 카페 '비평고원'에는 나도 발을 담그고 있는데, 요즘은 좀 뜸하게 활동했다. 흠, 이러다가 자아 비판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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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8-11-0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바리데기를 읽고 대체 뭐에 그토록 감동을 받았는지 의아했죠. 하지만 제가 제대로 못느끼는거라고 셀프플레임을 해버렸는데. 다른 시각이 있고,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조차 없는 문단이란. 자아비판, 섬짓한데요^^

로쟈 2008-11-05 07:03   좋아요 0 | URL
저는 용두사미가 돼버린 소설로 읽었습니다. 기획은 거창하지만 마무리가 따르지 않는. 자아비판은 서재에서도 해야 하는데, 당체 글을 제대로 쓸 만한 짬을 못 내고 있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1-04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서점에서 선 채로 통독했는데 되게 재밌어요.일본에선 윤흥길의 <장마>가 황석영의 소설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요.황석영 씨는 자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나카카미 겐지를 우익이라고 혹평했다는 이야기도 있고...그리고 문지나 창비에서는 가라타니 번역서가 한권도 없다는 것도 지적했어요.

로쟈 2008-11-05 07:01   좋아요 0 | URL
반 이상은 가페 비평고원에서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나의왼발 2008-11-05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리도 죽고 철학도 죽고 신학도 죽고 예술도 죽고 문학도 죽고 인간도 죽고 역사도 죽고 정치도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고... 죽음의 시대

로쟈 2008-11-06 23:31   좋아요 0 | URL
'종언'은 죽음처럼 부정적인 것만 아니어서 '완성'이란 의미도 갖습니다. 정년퇴임 같은 것이죠...

쉽싸리 2008-11-07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리데기가 그렇군요.비판적인 얘기를 들은게 없어서. 찾아보면 있었겠지만,,
바리데기 읽으면서 결말이 허무하다. 그냥 다 아우르려하는구나 정도 생각이 들었던것 같네요.

로쟈 2008-11-07 23:29   좋아요 0 | URL
기대만큼의 작품들을 쓰고 있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세계화시대 언어의 운명과 관련한 몇 가지 이슈를 짚어본 것이다. 타이틀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며 글의 일부 내용은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http://blog.aladin.co.kr/mramor/2341396)에서 따왔다. 알고 보면, 두 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1월호) 세계 공통 언어, 과연 필요한가?

바벨탑 이후 - 지구상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처음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의 어느 평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기 시작했다. 잘 아는 대로 이때 여호와가 등장한다. 여호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서 분노했다.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것이 언어의 기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언어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답해 주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바벨탑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적어도 언어에 관한 한 말이다. ‘바벨탑 이전’이란 모든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보편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바벨탑 이후’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 있은 뒤, 너무도 많은 언어들이 생겨나서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된 시대를 뜻한다. 물론 언어의 다양성은 어느 한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언어적 변화의 산물이다. 그 결과 인류는 불행해졌을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해와 반목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바벨탑 이후’에 인간의 언어는 분화에 분화를 거듭하였고, 현재 지구상에는 최소로 잡아도 5,000개가량의 언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여러 언어가 공용되는 것을 ‘다언어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지구 공동체 또는 지구촌은 그러한 상황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니, 인류가 살아온 세계는 언제나 ‘다언어적 세계’였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세계시민주의, 혹은 세계주의의 이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먼저 고민했던 폴란드의 한 안과 의사의 이야기는 참고할 만하다.

세계어 -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의 옛 도시 비알리스토크에 자멘호프(1859~1917)라는 유태계 안과 의사가 살았다. 그가 태어난 비알리스토크에는 러시아 인, 폴란드 인, 게르만 인 그리고 히브리 인의 4개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멘호프는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이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고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믿은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 냈다. 그것이 1887년에 나온 에스페란토다.

사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국민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세계시민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세계 공통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인공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경우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에스페란토 잡지가 창간되고 많은 문학 작품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한국 근대 시사(詩史)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김억(1896~?)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서양 시들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하니, 에스페란토 열풍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참고로, 국내에도 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상주의자였던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의 활용이 각 지역과 국가에 속한 개인들의 세계시민적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에스페란토의 말뜻 자체가 ‘희망을 가진 자’인 것은 그의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14년 제10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참석을 위해 파리로 향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전 유럽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화하는 광경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상처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1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이상으로서의 세계어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멘호프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었고, 또 1908년에는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가 결성되면서 세계적인 보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200만 명이 에스페란토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는 아직 세계 공통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기에 역부족이며, 공식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도 못하다. 사실, 에스페란토 자체가 각 국가어로부터 거리를 둔 중립적인 언어를 표방했지만,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 어, 에스파냐 어, 프랑스 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 등이고, 그런 탓에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아이들보다 배우는 데 시간이 두 배 정도 더 소요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 까닭에 자멘호프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 현실적으로 세계어에 근접해 있는 언어는 ‘국제어’라 불리기도 하는 패권 국가들의 언어다.



영어의 힘 - 소수 언어의 종말이 다가온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5,000개의 언어가 남아 있다고 했지만, 이 숫자는 이미 상당수가 사라지고 남은 언어의 숫자다. 언어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 21세기에만 이 중 절반가량의 언어가 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평균 2주에 1개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200개 정도의 언어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 200이란 숫자가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는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게 언어학자들의 예측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국가어들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세계화 추세가 강화될수록,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나 국제어에 대한 요구도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유력한 세계어의 후보가 현재로선 단연 영어다. 이미 현실에서 많은 나라가 영어를 국가어로 채택하였고,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능통한 영어 사용자가 세계적으로 18억 명에 이르며, 영어 학습자 수가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만하면 영어와 함께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로 비친다.

하지만 그 ‘회귀’는 바벨탑을 쌓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만큼이나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가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학자 앤드류 달비가 <언어의 종말>에서 지적한 내용에 따르면, 영어와 과거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 어의 확산 과정에는 세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 두 언어의 ‘제국주의’는, 첫째로 식민화의 결과로 비롯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공통 언어, 곧 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 이해를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함)였다.

둘째로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불러온 결과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富)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 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 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인도처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만 한정된 사례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영어는 여러 사회적 특권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간주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며, 이를 갖지 못한 집단으로부터 능력과 성공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 재생산의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다.” ‘세계어’이기 이전에 영어는 ‘제국의 언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언어 제국주의의 발생은 원거리 교

역, 특히 해상 교역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pidgin, 비즈니스의 중국식 발음으로, 주로 상거래에 사용되며 문법이 간략화되고 어휘가 극도로 제한된 영어를 말함)는 점점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은 ‘세계는 평평하다’고도 말해지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는 무엇보다도 비즈니스 언어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언어가 몇몇 언어로, 특히 영어로 집중되는 현실의 뒷면에서는, 소수 언어들의 소실과 언어 다양성의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그리고 앞으로 ‘언어 전쟁’, 개별 국가어와 영어와의 전쟁 또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10년 전인 1998년 영어 공용화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 한 언론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의견이 45%였고, 이듬해 교육 방송(EBS)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진 뒤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62%까지 증가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한국 국민의 절반가량은 영어 공용화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용어’란 말 그대로 공공 생활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킨다. 영어 공용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쪽에서는 영어가 이미 국제어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언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처음 공용어론을 제기한 소설가 복거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영어 공용화는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고, 아예 모국어를 영어로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력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지구 제국이 형성되리라는 기대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적 논리일 뿐이며, 이에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더불어 영어 공용화가 그 자체로 국민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질적인 개선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실제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에도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2%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용화 자체가 궁극적인 해법인가는 미지수다.



이중 언어 -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사회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지금 같은 전 지구화 시대에 모국어와 국제어의 이중 언어 사용이 대세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단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국민 국가 형성의 주된 바탕이었고, 이에 따라 민족(또는 국민)을 언어 공동체로 규정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단일 언어적 상황보다는 이중 언어적 상황이 보다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렇듯 변화된 언어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언어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을 앞으로의 지향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벨탑 이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해야 한다. 이는 개별적인 자연어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어를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서 말할 수도 있겠다.

소수 언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국가어마저도 존립을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적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한 다양성이 ‘세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의 신화를 다시 상기하자면, 인류가 하나의 무리를 지어 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언어적 혼잡성·다양성이라는 신의 징벌 이후다. 곧 세계는 그러한 혼잡성·다양성으로 구성되며, 결국 그것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세계주의는 이러한 혼잡성·다양성 자체를 보존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는 각기 다른 언어로 달리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지식을 보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인식하고 구분 짓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 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을 뜻한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 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음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누려 왔다. 세계어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언어들과 공존 가능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08.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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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자주 눈에 띈다 싶었지만 '대박'이 난 줄은 모르고 있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뉴런, 2008) 시리즈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껏해야 나의 관심은 저명한 문학비평가 'I. A. 리처즈'의 이름을 이제 사람들은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저자로 기억하겠구나 정도였는데, 한겨레21의 '베스트셀러 워스트리더' 꼭지를 읽어보니 '장난'이 아니다. 오죽하면,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일 것인가! 알고보면, 원제가 <그림으로 보는 영어>이고 한번 나왔던 책이 다시 나온 것이다. 아마도 올해의 가장 '기이한'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싶다(출판사회학의 연구대상이다)...

한겨레21(08. 10. 31) ‘무시무시한’ 영어 욕망

신기한 물건 하나가 등장했다. 원래 있던 겉표지를 어디에 두고 온 듯한 노란색·파란색·초록색의 단순명료한 디자인, 한글 제목은 귀퉁이에 둔 과감함, 우유 한 갑 무게도 안 되는 가벼운 종이, 듣기용 MP3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1만원이 안 되는 가격…. 가벼운 책이 무겁게 베스트셀러를 가격했다. <잉글리시 리스타트>(I. A. 리처즈·크리스틴 깁슨 공저, 뉴런 펴냄)가 터졌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BASIC’편은 발간(7월2일) 한 달 만인 8월2일 인터넷서점 ‘예스24’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9월4일에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도 올랐다. ‘어학’ 부문이 아니다. 종합베스트셀러다. 이후 연속 7주 종합 1위를 지키고 있다. 10월 둘쨋주 교보문고에는 ‘ADVANCED1(스피킹편)’이 종합 2위, ‘ADVANCED2(리딩편)’가 종합 6위에 올라 있다. 편집부에서 전하는 판매부수는 30만 부(인쇄는 35만 부). 첫 쇄는 3천 부를 찍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베스트셀러’였던 것이다.

‘영어 교재’가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것은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정찬용 지음, 사회평론 펴냄)의 2000년 2~4월 총 9주, <해커스 토익>의 2006년 7월 첫째·둘쨋주 총 2주가 있었다.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가 ‘학습법’에 관한 것이라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한다. <해커스 토익>의 베스트셀러 등극이 대학 여름방학 초기 거의 모든 대학생들이 토익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머리를 동여맸음을 보여준다면,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한국 일반인들이 영어 공부를 하려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이미지보기

책을 펴낸 뉴런은 ‘전략적’으로 가볍게 만들었다. 홍은숙 대표는 영어 원제인 ‘그림으로 보는 영어’(English through Pictures)를, 타깃을 명확히 가다듬으면서 ‘리스타트’로 바꾸었다. 1997년 <그림으로 보는 영어>(창문사)로 국내에서 한 번 나왔다가 사라진 타이틀이 일신한 것이다. 그리고 카페를 통해 학습그룹을 조직했다. 카페 가입자는 현재 6만4천 명을 헤아린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앞부분 ‘학습법’과 ‘소감’을 덧붙인 글을 제외하고는 시작되는 첫 장부터 해답까지 모두 영어와 그림으로 돼 있다. ‘I’와 ‘YOU’로 시작한다. 단어 아래 철사로 만들어진 단순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고 상대방을 가리킨다. 장이 끝나면 연습문제가 있다. 책을 딱 반으로 나눠서 뒷부분은 연습문제로 이뤄진 ‘워크북’이다. 한 출판사 편집자는 “일반인이 몽땅 영어로 된 한 권의 책을 읽어내려간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한 경험일 것”이라고 말했다.

책 표지엔 제목보다 크게 ‘영어 한 달만 다시 해봐’라고 쓰여 있다. 능률영어사 대표인 이찬승씨는 “영어 공부에 손을 놓았던 일반인들이 책을 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영어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도 없던 사람들이 요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영어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능률영어사 홈페이지에는 65살 할머니가 한국방송통신대에서 영어를 배우는 사연을 적어놓기도 하고, ‘발음을 배우고 싶다’고 문의를 해오기도 하는데, “옛날에 없던 분위기”다. 이명박 정권의 ‘영어 몰입’도 한몫했고, 해외여행이 많아지는 환경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 폭발은 일반인들에게 ‘영어에 대한 욕구’가 무시무시하게 잠재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어 학습 시장은 점점 분화돼왔다. 쓰기, 말하기, 읽기, 단어, 문법 등. 이런 조류는 영어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이들을 위한 시장이다. 일반인들을 위한 학습서 시장이 존재해오긴 했지만 미미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이런 조류를 역행한다.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어 교재 시장의 여집합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공략했다. 그 부분은 ‘영어 공부 하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방대한 시장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베스트셀러의 여건 또한 완성된다. 베스트셀러의 기본 조건은 ‘누구나 집어든다’이다. 그런 면에서 <잉글리시 리스타트>는 ‘본격’ 영어 교재를 표방하긴 하지만 <영어 공부 절대로 하지 마라>의 ‘일반인이 보는 영어책’이라는 욕구와 비슷하다. <잉글리시 리스타트>의 키워드는 ‘제너럴’이다. 영어책을 겨냥하고 있지만 핵심은 ‘누구나’다. 아주 특수한 분야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키워드는 ‘일반인 독자’인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영어 학습은 효과가 있을까. 이찬승씨는 지금 아무런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에 등극하고 사람들을 자극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 검증된 건 없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수천 시간이 필요하다. 머리에 들어가고 나오는 과정까지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책은 어쨌든 책이다. 책은 단순 지식이지 사용과는 관련이 없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영어교재’이다. 머리말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는 문구도 나온다. 출판사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원서에 나온 말을 옮겼다고 한다. 10월23일 현재 미국 ‘아마존닷컴’의 이 책 순위는 ‘26만2788’. 2005년판인데 ‘템포러리 아웃오브 스톡’(일시 품절)이다. 원서의 출판연도는 1945년, 성경 이후로 가장 오래된 영어교재인지도 모르겠다.(구둘래 기자)

08. 11. 02.

P.S. 이미 적은 대로 <잉글리시 리스타트>에 대한 나의 반응은 'I. A. 리처즈'(보통 그렇게 읽었다)가 이런 책도 썼나 하는 것이었다('썼다'기보다는 '만들었다'는 게 맞겠지만). 이 저명한 신비평가의 책으로 현재 구할 수 있는 건 <문학비평의 원리>(동인, 2005)와 <수사학의 철학>(고려대출판부, 2001)이 있다. 모두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문학비평의 원리>는 예전에 <문예비평의 원리>(현암사, 1981)로 출간된 적이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것도 이 현암사판이다.

리처즈의 책으론 고전인 <시와 과학>(을유문화사, 1947)이 고 이양하 선생의 번역으로 나온 적도 있다(저자가 'I. A. 리차아드'로 표기됐다). 그리고 또 하나 C. K. 오그든과의 공저 <의미의 의미>(현암사, 1987; 한신문화사, 1990)도 예전엔 많이 읽히던 책이다. 물론 독자는 주로 어문학 전공자들이었지만...

영미비평사 3 - 뉴 크리티시즘 : 복합성의 시학

미국의 신비평(뉴크리티시즘) 얘기가 나온 김에 정평있던 연구서도 적어두도록 한다. 영문학자 이상섭 교수의 <복합성의 시학: 뉴크리티시즘 연구>(민음사, 1987)가 그것인데, 나중에 <영미비평사3 - 뉴크리티시즘: 복합성의 시학>(민음사, 1996)이라고 재출간됐다. 하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듯하다. 현역에서 은퇴한 책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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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03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저자가 문학비평가로군요.몰랐네요.

로쟈 2008-11-03 22:22   좋아요 0 | URL
네, 나름 저명한 비평가이면서 대학 영문학과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틀을 마련한 사람이죠...
 

오랜만에 한국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강정과 김경주 두 시인이 각각 새로운 시집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강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키스>(문학과지성사, 2008)와 김경주 시인의 두번째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이 그 시집들이다. 최근시의 한 경향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강정(37·사진 왼쪽) 김경주(32·오른쪽)

한겨레(08. 10. 31) '시인의 실험실’에서 발사된 4차원 언어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 나오는 이 말은 시와 시인이 ‘새로운 언어’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인은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이다. 그는 말하자면 고전음악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였던 베토벤과 비슷한 운명을 부여받는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언어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데, 그 궁극은 일종의 임계 지점 또는 비등점과도 같아서 언제든 다음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간행된 두 권의 시집에서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로서 시와 시인의 속성을 만나 보자.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제353권과 354권으로 연이어 나온 강정(37·사진 왼쪽)씨의 <키스>와 김경주(32·오른쪽)씨의 <기담>이 그것이다.

“오래전 한 편의 시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사후(死後)의 바람> 앞부분)

“이 오래된 바람의 내력엔 서로 피를 나눠 먹던 종족의 역사가 흐른다/(…)// 또 다른 궤를 그리며 땅속에 덮이는 하늘/ 맨발로 뛰쳐나가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니/ 펄럭이는 파도 끝 자락에 마지막 시가 불붙는다”(<사후의 바람> 뒷부분)

<키스>는 <처형극장>과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에 이은 강정씨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을 열고 닫는 것은 제목이 같은 두 편의 <사후의 바람>이다. 인용한 시들 중 ‘한 편의 시’가 나오는 것이 시집 맨 앞에 실린 작품이고 ‘마지막 시’가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명백한 종말의 분위기를 풍긴다면, 뒤의 작품은 종말을 딛고 선 모종의 갱신을 꿈꾼다. 종말과 갱신의 지표로 나란히 ‘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키스>는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사랑의 노래를 담은 시집이다. 시인은 사랑이 초래하는 혁명과도 같은 새로움을 시집 전편에 걸쳐 강조한다. 하나의 시가 종말을 고하고 또다른 시가 탄생하듯이, 사랑은 하나의 세계를 여의고 새로운 세계를 일구는 행위가 된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불탄 방-너의 사진> 부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이은 김경주씨의 두 번째 시집 <기담(奇談)>은 제목처럼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적과도 같다. 시집은 전체 3막에 ‘연출의 변’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구운몽(口雲夢)’ 등 희곡적 구성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것은 관습과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빚어지는 언어의 충격적 변신이다.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 라미가 을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 아슬이 나무의 우유 방울을 약속했고 동화는 저녁에 읽지 않기로 는의 손목을 잘랐다 라미는 투명을 흔들던 기괴한 한(寒)이 되었고”(<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베리에게> 부분)

인용한 시는 사물들의 이름을 서로 바꿔 부르는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빅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기담>의 시인 역시 남들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모색한다. 아니, 시인이 새로운 언어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시인을 부려서 (인간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는 언어가 인간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제1막 인형의 미로> 부분)

새로운 언어의 개척자라는 측면에서 김경주씨는 강정씨보다 더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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