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강정과 김경주 두 시인이 각각 새로운 시집을 출간했기 때문이다. 강정 시인의 세번째 시집 <키스>(문학과지성사, 2008)와 김경주 시인의 두번째 시집 <기담>(문학과지성사, 2008)이 그 시집들이다. 최근시의 한 경향을 확인해볼 수 있다.

강정(37·사진 왼쪽) 김경주(32·오른쪽)

한겨레(08. 10. 31) '시인의 실험실’에서 발사된 4차원 언어

“시인은 그의 이미지들의 새로움으로 하여 언제나 언어의 원천이 된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에 나오는 이 말은 시와 시인이 ‘새로운 언어’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인은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이다. 그는 말하자면 고전음악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였던 베토벤과 비슷한 운명을 부여받는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언어의 궁극에 이르고자 하는데, 그 궁극은 일종의 임계 지점 또는 비등점과도 같아서 언제든 다음 차원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경계가 되기도 한다.

최근 간행된 두 권의 시집에서 언어의 완성자이자 개척자로서 시와 시인의 속성을 만나 보자.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제353권과 354권으로 연이어 나온 강정(37·사진 왼쪽)씨의 <키스>와 김경주(32·오른쪽)씨의 <기담>이 그것이다.

“오래전 한 편의 시가 끝나고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이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민둥산의 태양을 끌어내렸다”(<사후(死後)의 바람> 앞부분)

“이 오래된 바람의 내력엔 서로 피를 나눠 먹던 종족의 역사가 흐른다/(…)// 또 다른 궤를 그리며 땅속에 덮이는 하늘/ 맨발로 뛰쳐나가 생의 지도를 다시 찍으니/ 펄럭이는 파도 끝 자락에 마지막 시가 불붙는다”(<사후의 바람> 뒷부분)

<키스>는 <처형극장>과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에 이은 강정씨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 시집을 열고 닫는 것은 제목이 같은 두 편의 <사후의 바람>이다. 인용한 시들 중 ‘한 편의 시’가 나오는 것이 시집 맨 앞에 실린 작품이고 ‘마지막 시’가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앞의 작품이 명백한 종말의 분위기를 풍긴다면, 뒤의 작품은 종말을 딛고 선 모종의 갱신을 꿈꾼다. 종말과 갱신의 지표로 나란히 ‘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키스>는 제목에서 짐작되다시피 사랑의 노래를 담은 시집이다. 시인은 사랑이 초래하는 혁명과도 같은 새로움을 시집 전편에 걸쳐 강조한다. 하나의 시가 종말을 고하고 또다른 시가 탄생하듯이, 사랑은 하나의 세계를 여의고 새로운 세계를 일구는 행위가 된다.

“나와 당신 사이에/ 나와 당신과 무관한/ 또 다른 인격이 형성된다/ 사랑이란 하나의 소실점 속에 전 생애를 태워/ 한꺼번에 사라지는 일/ 이 우주에 더 이상 밀월은 없다”(<불탄 방-너의 사진> 부분)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에 이은 김경주씨의 두 번째 시집 <기담(奇談)>은 제목처럼 기이한 이야기들의 집적과도 같다. 시집은 전체 3막에 ‘연출의 변’과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구운몽(口雲夢)’ 등 희곡적 구성이 도드라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낯선 것은 관습과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빚어지는 언어의 충격적 변신이다.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 라미가 을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 아슬이 나무의 우유 방울을 약속했고 동화는 저녁에 읽지 않기로 는의 손목을 잘랐다 라미는 투명을 흔들던 기괴한 한(寒)이 되었고”(<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베리에게> 부분)

인용한 시는 사물들의 이름을 서로 바꿔 부르는 페터 빅셀의 소설 <책상은 책상이다>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빅셀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기담>의 시인 역시 남들과 다른 새로운 언어를 모색한다. 아니, 시인이 새로운 언어를 시도한다기보다는 언어가 시인을 부려서 (인간에 얽매이지 않은) 독자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래는 언어가 인간들을 향해 하는 말이다.

“‘나는 내 세계의 바깥에 너희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은 나를 가지고 춤을 추고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너희들의 세계는 내가 보는 너희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 우리는 모두 인형들이고 너희들이 들고 있는 인형 역시 나일 것이지만 너희들이라는 인형을 들고 있는 유령 역시 바로 나이지’”(<제1막 인형의 미로> 부분)

새로운 언어의 개척자라는 측면에서 김경주씨는 강정씨보다 더 극단적이고 근본적이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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