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줄'을 오랜만에 적어둔다. 아니 정확하게는 '로쟈의 한 단어'라고 해야겠다. 최근 번역돼 나온 <독일 비애극의 원천>(새물결, 2008)의 첫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발견한 '한 단어'이다. '인식비판적 서설'로 시작하는데, 이 대목은 벤야민 선집 6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외>(길, 2008)에도 '인식비판적 서론'이라고 포함돼 있다. 각주에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최성만/김유동 옮김으로 2008년 중반에 한길사에서 출간될 예정이다."라고 돼 있다. 출간은 좀 미뤄지는 듯한데, 이 '서론'은 최성만 교수가 맡은 부분이고 한길사의 양해를 얻어 수록한다고 밝히고 있다.
벤야민이 이 서설/서론에서 제사(에피그라프)로 끌어오고 있는 것은 괴테의 '색채론 역사의 자료'('색채론의 역사에 관한 자료')이다('자료'이니까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국역본 <색채론>에는 빠져 있을 듯하다). 두 번역본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일단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건 한 단어이다. 두 번역을 차례로 옮겨본다.
"지식에는 속이 없고, 반성에는 겉이 없어서 지식에서든 반성에서든 전체는 엮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에서 어떻게든 일종의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학문을 필히 예술로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전체성을 보편적인 것이나 초월적인 것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예술이 언제나 전적으로 개개의 예술작품에서 스스로를 나타내듯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학문도 역시 매번 전적으로 각기 개별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바에서 입증되어야 한다."(새물결, 11쪽)
"전체라는 것은 지식에서든 성찰에서든 조립될 수 없는데, 그것은 지식에서는 내부가, 성찰에서는 외부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학문에서 모종의 전체성과 같은 것을 기대한다면 그 학문을 예술로서 사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도 우리는 그 학문을 어떤 일반적인 것, 과도하게 넘쳐나는 것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되고, 예술이 각각의 개별 예술작품에서 재현되듯이 학문 역시 각각의 개별 대상에서 그때그때 온전히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길, 145쪽)
말하자면, 이 대목은 벤야민 번역이 아니라 괴테 번역이고, 비교해서 읽어보다가 발견하게 된 건, 의아하게 생각한 건 강조한 두 단어의 차이다. 다른 부분들에서의 차이야 번역 문체상의 차이로 넘어갈 수 있지만 똑같은 단어를 '전체성'과 '학문'으로 다르게 옮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제3자 대조를 위해서 영역본을 찾아보니 이렇게 돼 있다.
Neither in knowledge nor in reflection can anything whole be put together, since in the former the internal is missing and in the latter the external; and so we must necessarily think of science as art if we expect to drive any kind of wholeness from it. Nor should we look for this in the general, the excessive, but, since art is always wholly represented in every individual work of art, so science ought to reveal itself completely in every individual object treated.(Verso판, 27쪽)
문제의 단어는 this(이것을)로 번역돼 있다. 짐작대로 지시대명사다(그건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역본의 두 역자는 이 '이것'을 서로 다르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문맥상 무엇이어야 할까? 괴테가 이 대목에서 '기대하는' 것이 '전체성'이므로 '찾으려는' 것 역시 '전체성'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무려나 이 대목의 번역은 어느 한쪽이 수정되어야 한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의역/직역과도 무관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과제'를 실행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08. 11. 07.
P.S. 참고로, 차봉희 편역, <현대사회와 예술>(문학과지성사, 1980)에도 '인식비평 서론'이 번역돼 있는데, 같은 대목이 이렇게 옮겨져 있다. "지식은 성찰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것이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전자에서는 내적인 것이, 후자에서는 외적인 것이 빠져 있으므로, 어떤 유형으로든지간에 우리가 학문에서 전체성을 기대한다면, 학문을 필연적으로 예술로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은 일반적인 것이나 전체적인 것 안에서 추구될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이 늘 개개 예술 작품 속에서 구현되듯이, 학문도 역시 모든 개개의 분야에서 증명되어야 할 것이다."(180쪽) 여기서도 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학문'을 번역어로 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