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홍원표 역. 인간사랑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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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먼 지니어스- 유럽의 세 번째 르네상스, 두 번째 과학혁명, 그리고 20세기
피터 왓슨 지음, 박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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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
로렌초 키에자 지음, 이성민 옮김 / 난장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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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불행한 이에게- 카프카의 편지 1900~192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서용좌 옮김 / 솔출판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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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서- 노벨상을 수상한 위대한 천재 과학자 에릭 캔델의 삶을 통해 보는 뇌와 기억의 과학
에릭 R. 캔델 지음, 전대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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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전설적인 저작 - 경원시할 것이 아니라 이용해야!




후기 벤야민의 주저가 미완의 단편들 모음, 벤야민이 '현대의 원사'라고 칭한 "파사주" 프로젝트(우리말 번역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면, 완결된 형태로 출간된 초기/중기 벤야민의 주저이자 그의 전 사상의 핵심 모티프들이 응축된 책은 "독일비애극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이 드디어 벤야민 전공자 두 사람의 공역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인문학의 담론을 아우르는 전문적인 독자들이라면 지난 해 말 새물결에서 나온 판본과 비교해서 비평을 해주면 좋을 것이다.

역자들은 이 책을 번역할 때 저자 벤야민이 초판본에서 고집했고 주어캄프 전집판에서도 유지된 책의 독특한 구성을 충실하게 따르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내막을 이해하기 위해 역자의 해제가 꽤 도움이 된다.

독일비애극의 원천(한길사, 2009년 2월)에서 알레고리에 대한 중요한 구절들 몇 개 인용하고자 한다.

[낭만주의에서 상징과 알레고리]

상징에서는 몰락이 이상화되는 가운데 자연의 변용된 얼굴이 구원의 빛 속에서 순간적으로 계시된다. 반면 알레고리 속에는 역사의 죽어가는 얼굴표정(facies hippocratica)이 굳어진 원초적 풍경으로서 관찰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역사란 그것이 처음부터 지녔던 시대에 맞지 않는 것, 고통스러운 것, 실패한 것 모두를 두고 볼 때 하나의 얼굴에서, 아니 사자(死者)의 얼굴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법이다. 그리고 표현의 모든 ‘상징적’ 자유, 형상의 모든 고전적 조화, 모든 인간적인 것이 그러한 사자의 얼굴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이렇듯 자연적으로 몰락한 형상 속에는 인간존재의 자연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전기적 역사성이 의미심장하게 수수께끼적인 물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세속적 전개를 세상의 수난사(Leidensgeschichte)로 보는 바로크적, 알레고리적 관찰의 핵심이다. 역사는 그것이 몰락하는 단계들에서만 의미를 띤다. 의미가 많은 그만큼 죽음에의 몰락이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신체와 의미 사이에 들쭉날쭉한 경계선을 가장 깊숙이 파내기 때문이다. 

 

[폐허]

비애극에서 역사가 무대 속으로 이동해간다면, 이때 역사는 문자로서 그렇게 된다. 자연의 얼굴 위에 ‘역사’는 무상(無常)함의 기호문자로 씌어져 있다. 무대 위에 비애극이 연출하는 자연-사(Natur-Geschichte)의 알레고리적 모습은 현실에서 폐허(Ruine, 잔해)의 형태로 주어져 있다. 폐허와 함께 역사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무대 속으로 이동해간다. 게다가 역사는 이러한 모습을 띠면서 어떤 영원한 생명의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저지할 수 없는 몰락의 과정으로 부각된다. 이로써 알레고리는 아름다움을 넘어서 자신을 드러낸다. 사물의 세계에서 폐허가 의미하는 것을 알레고리는 사상의 세계에서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크는 폐허를 숭배했다.
 


[알레고리적 해석의 이율배반] 

 알레고리적 직관의 영역에서 이미지는 파편이고 룬(Rune)문자이다. 그 이미지의 상징적 아름다움은 신학의 빛이 그 위에 닿을 때 증발해버린다. 총체성의 거짓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 든 형상(Eidos)은 꺼져버리고, 비유는 시들며, 우주는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건조한 수수께끼문자들이고, 그 속에 혼란된 상태에 있는 사색자가 아직은 포착할 수 있는 통찰이 들어 있다. 감각적인 신체, 아름다운 신체에서 부자유, 미완성, 굴절을 보는 것은 의고전주의가 본질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것들을 바로크의 알레고리가 자신의 광적인 현란함 속에 감춘 채, 이전에 예상치 못했던 강세를 주며 표현한다. 예술의 문제성에 대한 근본적인 예감 ― 그러한 문제와 씨름하는 일을 “여분의 시간”에 할당한 것은 신분상의 겉치레 때문만이 아니라 종교적 의혹 때문이었다 ― 이 르네상스적 예술의 자만성에 대한 반격으로 등장한다. (...)

모든 인물, 모든 사물, 모든 관계는 임의의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속세에 혹독하면서도 정당한 판결을 내린다. 즉 속세는 세부내용이 그렇게 엄격하게 중요하지 않은 세계로 특징지어진다. 하지만 분명해지는 점, 특히 알레고리적 문서해석에 익숙한 사람에게 분명해지는 점은 다음과 같다. 즉 의미작용을 일으키는 저 소품들은 모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는 속성 때문에 범속한 사물들에 비교될 수 없게 보이게끔 하는 어떤 권위와 한 층 높은 차원으로 자신을 상승시키고, 심지어 성화(聖化)시킬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속세는 알레고리적으로 바라볼 때 그 위계가 상승하면서 폄하된다. 내용에서의 이러한 종교적 변증법에 대해 관습과 표현의 변증법이 형식면에서 상응한다. 왜냐하면 알레고리는 관습과 표현 둘 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둘은 원래부터 상충한다. 그렇지만 바로크의 이론이 본래 역사를 어떤 창조된 사건으로 파악했던 것처럼, 특히 알레고리는 모든 문자가 그렇듯이 관습으로 여겨지면서도 성서처럼 창조된 것으로 여겨진다. 17세기의 알레고리는 표현의 관습이 아니라 관습의 표현이다. 그에 따라 그것은 권위의 표현이며, 그 원천의 위엄을 두고 볼 때 비밀스럽고, 그 효력의 범위를 두고 볼 때 공적(公的)이다. 

 [“신비한 균형”]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밭에 씨앗을 뿌렸고 슬픔에 잠겨 나왔다.” 알레고리는 보람 없이 나온다. 알레고리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심연으로서 품고 있던 악 그 자체는 알레고리 속에서만 존재하고, 오로지 알레고리일 뿐이며, 자체와는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즉 그 악은 바로 그것이 표상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폭군과 모사꾼들이 체현하는 절대적 악덕들은 알레고리들이다. 그 악덕들은 실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자신이 내세우는 것을 단지 멜랑콜리의 주관적 시선 앞에서만 가질 뿐이다.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 따르면 알레고리는 공해해진 사물에 대한 자의성의 지배를 특징으로 한다. 인간의 원죄 이후 사물들은 자신의 의미를 자신 속에서 드러내지 못한 채 침묵하게 되고, 외부로부터 주관적으로 투사된 의미에 의해 고통 받는다. 벤야민은 사물을 원래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만드는 알레고리의 배후에 알레고리 작가의 자의적 주관성이 숨어있다고 본다. 신학의 힘을 빌려 알레고리적인 관심의 배후에 있는 주관성을 비판적으로 구제하는 것이 이 책의 근본 관심사 중의 하나이다. 벤야민에게서 주관성의 구제란 신의 세계 속에서 주관성이 자신의 공허함을 바라보게 되는 것, 즉 신의 세계 속에서 주관성의 자기계몽을 말한다. ([이상 참고] 김유동, 성좌: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원천』의 서술구조. 실린 곳: 『독일어문화권연구』(서울대학교 독일어문화권연구소 편), 제 14집, 2004. 김유동 교수는 두 역자 중 한 명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폴 드 만(Paul de Man)의 해체론적 읽기에서 "읽기의 알레고리"는 벤야민의 이 알레고리 개념에서 차용해 온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신학적 사유의 맥락은 빼고 껍데기만 가져왔고, 결국 해체론으로 각색해서 이용한 셈이다.)

이 책은 그의 지적 동반자이자 후배인 아도르노를 비롯해 현대의 많은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어왔고 현대 서구 사상사에 끼친 영향은 심대하다.
그만큼 언어, 역사, 예술, 문학, 신학, 인간학 등 다양한 분야가 중첩된 통합적 모티프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저자의 변증법적 사유의 긴장이 인식비판적 서론에서 비애극에 대한 서술의 끝까지 관통하고 있고, 그의 언어와 문장들 곳곳에서 저자의 그런 사유의 긴장과 힘이 전달되어 온다. 그 점에서 글들이 난해한 만큼 지극히 미학적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시대 우리 문화와 관련하여 '지금 여기서', 어떤 유용한 것을 거기서 끄집어낼 것인가이다.
근대 서양 인문학에서 역사철학적 진폭과 언어철학적 깊이에서 이 책을 능가할 책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게 비의적이고 전설적인 저작으로 알려진 이 책은 그렇지만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내포하는 의미에서 경원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적극적인 이용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자들이 이 책의 언어와 내용이라는 이중적 난해성과 씨름하며 공들여 오늘날의 우리말로 옮겨놓았다.
이제 이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일 것이다.  

http://book.daum.net/detail/review/read.do?bookid=KOR9788935657476&seq=746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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