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면에 실린 기사를 옮겨놓는다('로쟈의 인문학서재' 대신에 3주에 한번씩 출판면을 쓰게 됐다). 최근에 나온 앤드류 달비의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2008)에 대한 리뷰인데(표기법상으론 '앤드루 달비'인 모양이다), '언어전쟁' '언어 제국주의' '영어 공용화론' 등의 쟁점들과 연관지어 다뤄보려고 했으나 시간과 분량의 제약상 마음뿐이었다. 책상에 잔뜩 쌓아놓은 관련서들만 미진한 독서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한겨레21(08. 10. 13)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잘 아는 대로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하늘에까지 닿을 탑을 쌓고자 했지만 이에 분노한 여호와께서 세상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일은 무산됐다. 그렇게 ‘보편 언어’를 상실한 인류의 언어는 이후에 분화를 거듭했다. 가령 원시 인도-유럽어만 하더라도 사템어와 켄툼어로 분화되며, 켄툼어에 속하는 게르만어는 다시 서게르만어, 동게르만어, 북게르만어 등으로 분화됐다. 그리고 북게르만어는 스웨덴어,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페어로어, 아이슬란드어, 그리고 사어(死語)가 된 노른어 등으로 또다시 나뉘었다. 언어의 다양성은 이러한 분화과정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 분화는 무한정 계속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반대다. <언어의 종말>(작가정신 펴냄)의 저자 앤드루 달비에 따르면, 언어 분화의 역과정, 곧 언어의 통합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인류의 언어가 처해 있는 위험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통계를 보면, 현재 전세계에서 1언어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는 약 5천 개이며 이 중 21세기에만 2500개 가량의 언어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평균 2주에 1개꼴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전세계적으로 200개 정도의 언어만 남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200이란 수는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 곧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들은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단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은 국민이라고 여겨지며, 국민은 국가를 구성해야 한다.”는 언어 민족주의 명제가 이러한 통합과 소실 과정의 중요한 배후다.

그런데 언어의 운명이 이렇듯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면 국가어들의 운명조차 자신할 수 없는 것 아닐까? 정치적․경제적 세계화에 따라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 혹은 국제어에 대한 요구가 점차 강화되는 것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현실에서 영어는 많은 나라에서 국가어로,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돼가고 있다. 따라서 소수 언어 대부분이 사라진 이후에 벌어질 ‘언어전쟁’은 개별 국가어들과 영어와의 전쟁이 될 것이고 어쩌면 영어만이 사용되는 시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언어 제국주의, 보다 구체적으로 '어 제국주의 시대'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는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을까? 앤드루 달비는 영어와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의 확산과정에 세 가지 경로의 유사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 번째 경로는 식민화이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공통언어)였다. 두 번째 경로는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초래한 것으로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세번째 경로는 원거리 교역, 특히 해상교역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상거래 과정에서 생겨난 간략화된 영어)가 점점 확산돼갔다.

그리하여 현재 영어 사용자는 ‘유창한’ 사용자를 기준으로 전세계적으로 7억 명에 이르며, ‘충분한 정도로 구사하는’ 영어 사용자는 18억 명을 넘어선다. 게다가 인도를 포함해 약 70개국에서 국가어 혹은 공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영어학습자 수가 세계인구의 약 3분의 1에 육박하리라는 통계도 나온다. 그리고 이런 영어 집중화의 이면이 소수 언어의 소실과 언어적 다양성의 상실이다. 이것은 어떤 문제점을 낳는가?

언어학자로서 저자가 우려하는 것은 세계의 각 언어로 전승되고 보존되어온 지식을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번역할 때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직접 건너갈 수 없으며 항상 현실 세계를 거쳐서 가야만 한다. 이때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나누고 구분하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즉, 각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주며 우리에겐 그러한 대안적인 세계관이 필요하다.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이다. 게다가 더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어옴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구가해왔다. 하지만 영어 제국주의와 함께 전체 언어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든다면 영어의 창조성과 유연성 또한 시들어버릴 것이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를 우리는 어쩌면 거꾸로 읽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는 신의 저주는 오히려 축복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언어적 혼잡성과 다양성 덕분에 인류는 바벨탑보다 더 높은 성공의 탑을 쌓아온 것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전세는 역전돼가고 있다. “처음에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라고 바벨탑 이야기는 시작한다. 종말의 이야기는 이러할 것이다. “종말에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서로 알아듣지 못했다.”

08. 10. 08.

P.S. 주제에 대한 관심 때문에 부랴부랴 훑어본 책이지만 <언어의 종말>은 내용에 비해 너무 두껍다는 인상을 준다.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책들에 견주어도 그렇다. 게다가 뭔가 '한방'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내내 갖게 한다. 가령, 영어와 라틴어의 확산과정 사이의 세 가지 유사성을 지적한 대목에서 두 번째 경로를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초래한 것'이라고 나는 적었지만, 실제 책에는 달랑 '정부와 정부가 초래한 것'이라고만 돼 있다. 국내에는 지방대 도서관 두 곳에만 소장돼 있어서 미처 원문을 확인하지 못했는데, 설사 원문이 그렇게 돼 있더라도 너무 모호하고 뭉툭하다. 생각해보니 그런 모호함/뭉툭함이 책을 두루 관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놀란 것이 있다면 이 주제분야의 책으로 국내에 소개된 몇몇 저자들이 서로에 대해 전혀 참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앤드류 달비를 비롯하여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제이북스, 2003)의 공저자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수잔 로메인은 얼마전 방한한 바 있다), 그리고 <언어전쟁>(한국문화사, 2001)과 <언어와 식민주의>(유로서적, 2004)의 저자 루이-장 칼베,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돌베개, 2005)에 '영어 제국주의의 어제와 오늘'을 싣고 있는 로버트 필립슨 등은 서로 교차 참조할 법하지만, 서로에 대한 아무런 인용도 하고 있지 않았다(참고문헌에 나타나질 않는다). 마치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탓에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이 분야가 원래 그런 것인지, 단지 부분적인 우연일 뿐인지 의아하게 여겨졌다. 덧붙여, 참고문헌을 훑어보다가 관심을 갖게 됐는데, 로버트 필립슨의 <언어 제국주의>(1992) 같은 책은 다소 오래됐더라도 소개가 되면 좋겠다. 루이-장 칼베의 <세계 언어의 생태학>(2006) 같은 신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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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0-08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들, 거꾸로 읽는 바벨탑의 종말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가슴에 깊이 와 닿습니다. 하나라도 더 많은 언어를 배우고 또 익히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 듯한 기분입니다. 하나의 언어, 하나의 세계가 도래할 때 오히려 더욱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며 서로 소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점은 실로 '슬픈' 아이러니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성경 속 바베탑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하나의 언어가 도래한 '끔찍한' 상황에 대한 일종의 전복과 위반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8-10-09 22:59   좋아요 0 | URL
그게 참 많이 줄어들어도 5천개라고 하니 말이 통하는 게 오히려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요...

딸기 2008-10-0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꾸란에서는 알라가 사람들이 서로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라는 뜻으로 일부러 언어를 다르게 했다고 돼 있다더군요.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로쟈 2008-10-09 23:00   좋아요 0 | URL
<언어전쟁>은 꾸란 얘기도 좀 나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