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고교 독서평설>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세계화시대 언어의 운명과 관련한 몇 가지 이슈를 짚어본 것이다. 타이틀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며 글의 일부 내용은 '거꾸로 바벨탑 이야기'(http://blog.aladin.co.kr/mramor/2341396)에서 따왔다. 알고 보면, 두 글은 거의 같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고교 독서평설(08년 11월호) 세계 공통 언어, 과연 필요한가?

바벨탑 이후 - 지구상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자. “처음 세상에는 하나의 언어만 있었고, 단어도 몇 개 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동쪽으로 이동하다가 바빌로니아의 어느 평야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이름을 떨치기 위해 하늘까지 닿을 탑을 쌓기 시작했다. 잘 아는 대로 이때 여호와가 등장한다. 여호와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서 분노했다. “저들은 한 민족이며 하나의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저들이 이런 일을 시작하였으니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가서 저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여호와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자,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해서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 이것이 언어의 기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으로는 언어 다양성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다.

“지구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언어들이 생겨났을까?”라는 의문에 나름대로 답해 주는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바벨탑 이전과 그 이후로 구분될 수 있다. 적어도 언어에 관한 한 말이다. ‘바벨탑 이전’이란 모든 인류가 단 하나의 언어, 하나의 ‘보편 언어’를 통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바벨탑 이후’란 인간의 오만에 대한 신의 징벌이 있은 뒤, 너무도 많은 언어들이 생겨나서 서로 소통할 수 없게 된 시대를 뜻한다. 물론 언어의 다양성은 어느 한순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진 언어적 변화의 산물이다. 그 결과 인류는 불행해졌을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오해와 반목이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른바 ‘바벨탑 이후’에 인간의 언어는 분화에 분화를 거듭하였고, 현재 지구상에는 최소로 잡아도 5,000개가량의 언어가 제1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여러 언어가 공용되는 것을 ‘다언어적 상황’이라고 한다면, 현재의 지구 공동체 또는 지구촌은 그러한 상황의 전형적인 사례다. 아니, 인류가 살아온 세계는 언제나 ‘다언어적 세계’였다. 우리가 여기서 갖게 되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에서 ‘보편성’을 추구하는 세계시민주의, 혹은 세계주의의 이상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먼저 고민했던 폴란드의 한 안과 의사의 이야기는 참고할 만하다.

세계어 - 에스페란토의 탄생
폴란드의 옛 도시 비알리스토크에 자멘호프(1859~1917)라는 유태계 안과 의사가 살았다. 그가 태어난 비알리스토크에는 러시아 인, 폴란드 인, 게르만 인 그리고 히브리 인의 4개 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기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멘호프는 이러한 다언어적 상황이 인간을 서로 분리시키고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한 형제라고 믿은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창안해 냈다. 그것이 1887년에 나온 에스페란토다.

사실 그가 살았던 19세기는 국민 국가의 정치적·문화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세계시민의식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세계 공통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새로운 인공 언어를 창안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는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경우로, 유럽 전역에서 폭발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았다. 에스페란토 잡지가 창간되고 많은 문학 작품이 에스페란토로 번역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한국 근대 시사(詩史)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김억(1896~?)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1921)가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서양 시들을 다시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고 하니, 에스페란토 열풍에서 비껴 나 있지 않다(참고로, 국내에도 에스페란토 사전이 발간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제79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이상주의자였던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의 활용이 각 지역과 국가에 속한 개인들의 세계시민적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키고,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에스페란토의 말뜻 자체가 ‘희망을 가진 자’인 것은 그의 이러한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그 자신은 1914년 제10회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 참석을 위해 파리로 향하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목격하였고, 전 유럽이 전쟁의 도가니로 변화하는 광경에 큰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상처로 인하여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1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이러한 생애는 이상으로서의 세계어가 놓여 있는 오늘날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자멘호프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입어 1905년 프랑스에서 제1차 세계 에스페란토 대회가 개최되었고, 또 1908년에는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가 결성되면서 세계적인 보급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200만 명이 에스페란토로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에스페란토는 아직 세계 공통 언어로서의 위상을 얻기에 역부족이며, 공식적으로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도 못하다. 사실, 에스페란토 자체가 각 국가어로부터 거리를 둔 중립적인 언어를 표방했지만, 가장 주요한 어원은 라틴 어, 에스파냐 어, 프랑스 어, 독일어 그리고 영어 등이고, 그런 탓에 동아시아의 아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아이들보다 배우는 데 시간이 두 배 정도 더 소요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 까닭에 자멘호프의 기대와 달리 오늘날 현실적으로 세계어에 근접해 있는 언어는 ‘국제어’라 불리기도 하는 패권 국가들의 언어다.



영어의 힘 - 소수 언어의 종말이 다가온다
현재 지구상에는 약 5,000개의 언어가 남아 있다고 했지만, 이 숫자는 이미 상당수가 사라지고 남은 언어의 숫자다. 언어학자들의 전망에 따르면, 앞으로 21세기에만 이 중 절반가량의 언어가 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평균 2주에 1개꼴로 언어가 사라지는 셈이 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00년 이내에 200개 정도의 언어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이 200이란 숫자가 국가의 수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앞으로 국가어 외의 소수 언어는 대부분 소실될 것이라는 게 언어학자들의 예측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국가어들의 운명 또한 장담할 수 없다. 현재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세계화 추세가 강화될수록,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통될 수 있는 세계어나 국제어에 대한 요구도 점차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장 유력한 세계어의 후보가 현재로선 단연 영어다. 이미 현실에서 많은 나라가 영어를 국가어로 채택하였고, 또 전 세계적으로는 제2언어, 제3언어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능통한 영어 사용자가 세계적으로 18억 명에 이르며, 영어 학습자 수가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오고 있다. 이만하면 영어와 함께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은 일로 비친다.

하지만 그 ‘회귀’는 바벨탑을 쌓은 인간에 대한 신의 분노와 징벌만큼이나 폭력적인 과정을 수반한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중세 때만 하더라도 앵글로-색슨의 한 부족어였던 영어가 어떻게 세계적인 언어로 성장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학자 앤드류 달비가 <언어의 종말>에서 지적한 내용에 따르면, 영어와 과거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 어의 확산 과정에는 세 가지 유사점이 있다. 이 두 언어의 ‘제국주의’는, 첫째로 식민화의 결과로 비롯되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걸친 방대한 식민지를 경영했고, 영어는 식민지 이주자들의 유일한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공통 언어, 곧 모국어를 달리하는 사람들이 상호 이해를 위해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뜻함)였다.

둘째로 제국과 속국 사이의 관계가 불러온 결과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제국의 속국에서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자기 발전과 부(富)를 얻는 최선의 경로는 영어를 아는 것이었다. 고위 관리가 되거나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었고, 모든 고등 교육은 영어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인도처럼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만 한정된 사례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영어는 여러 사회적 특권에 대한 진입 장벽으로 간주된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영어 실력은 제도화된 문화 자본이며, 이를 갖지 못한 집단으로부터 능력과 성공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강력한 문화 재생산의 기제(機制,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의 작용이나 원리)다.” ‘세계어’이기 이전에 영어는 ‘제국의 언어’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러한 언어 제국주의의 발생은 원거리 교

역, 특히 해상 교역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영어로 이루어지는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영어와 영어의 친척어인 피진어(pidgin, 비즈니스의 중국식 발음으로, 주로 상거래에 사용되며 문법이 간략화되고 어휘가 극도로 제한된 영어를 말함)는 점점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사정은 ‘세계는 평평하다’고도 말해지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영어는 무엇보다도 비즈니스 언어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의 언어가 몇몇 언어로, 특히 영어로 집중되는 현실의 뒷면에서는, 소수 언어들의 소실과 언어 다양성의 상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지적한 대로다. 그리고 앞으로 ‘언어 전쟁’, 개별 국가어와 영어와의 전쟁 또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어가 사라지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 10년 전인 1998년 영어 공용화 논란이 벌어지던 당시 한 언론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어 공용화에 찬성하는 의견이 45%였고, 이듬해 교육 방송(EBS)에서 찬반 토론이 벌어진 뒤의 여론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62%까지 증가했다. 그렇다면 어림잡아도 한국 국민의 절반가량은 영어 공용화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공용어’란 말 그대로 공공 생활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가리킨다. 영어 공용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쪽에서는 영어가 이미 국제어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언어 사용자들이 영어를 선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주장한다. 

그런데 처음 공용어론을 제기한 소설가 복거일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영어 공용화는 예비적인 단계일 뿐이고, 아예 모국어를 영어로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한 나라의 경제력이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한다. 지구 제국이 형성되리라는 기대는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적 논리일 뿐이며, 이에 따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행위라는 것이다. 더불어 영어 공용화가 그 자체로 국민의 영어 실력을 향상시켜 주지는 않으므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은 공용화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질적인 개선이라는 의견도 제시한다. 실제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고 있는 인도의 경우에도 영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인구는 2%에 지나지 않으므로, 공용화 자체가 궁극적인 해법인가는 미지수다.



이중 언어 -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사회
영어 공용화에 반대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지금 같은 전 지구화 시대에 모국어와 국제어의 이중 언어 사용이 대세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단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국민 국가 형성의 주된 바탕이었고, 이에 따라 민족(또는 국민)을 언어 공동체로 규정해 오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 아래에서는 이러한 단일 언어적 상황보다는 이중 언어적 상황이 보다 표준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이렇듯 변화된 언어 현실에 적응하면서도 언어적 다양성을 보존하는 일을 앞으로의 지향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벨탑 이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 바벨탑 이전으로 회귀해야 한다. 이는 개별적인 자연어를 보존하면서, 동시에 세계어를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으로 풀어서 말할 수도 있겠다.

소수 언어들이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국가어마저도 존립을 위협받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어적 다양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한 다양성이 ‘세계’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탑의 신화를 다시 상기하자면, 인류가 하나의 무리를 지어 살다가 사방으로 흩어져 살게 된 것은 언어적 혼잡성·다양성이라는 신의 징벌 이후다. 곧 세계는 그러한 혼잡성·다양성으로 구성되며, 결국 그것의 산물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세계주의는 이러한 혼잡성·다양성 자체를 보존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는 각기 다른 언어로 달리 전승되고 보존되어 온 지식을 보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하다. 각 언어는 세계를 보고 인식하고 구분 짓는 각기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것이 그려 내는 현실 세계의 지도도 다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각각의 언어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서 각기 다른 통찰력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한 언어의 소실은 곧 인간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의 상실을 뜻한다. 게다가 보다 중요하게는 다른 언어와의 상호 작용만이 우리 각자의 언어를 더욱 유연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준다. 영어만 하더라도 새로운 단어와 리듬과 생각들을 다른 언어들에서 얻음으로써 활력을 얻고 번영을 누려 왔다. 세계어는 그 세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언어들과 공존 가능하며 또 그래야만 한다.

08. 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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