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와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이 최근에 출간됐지만, 리뷰기사는 아주 드물게 뜨고 있다. 이번주 대학신문의 서평란에 실린 '조르지오 아감벤의 신간을 읽는다'를 옮겨놓는다. 그 드문 서평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대학신문(09. 11. 21)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정치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긴급조치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무화시키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한갓 생존에 지나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가?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사진)은 우리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있던 이 궁극적인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감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면서 정치적 사유의 기존 개념들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독창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푸코, 데리다, 낭시, 바디우, 네그리를 비롯해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방대한 사유의 교류와 깊이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예외상태』(2003)는 「호모 사케르」 연작 중 Ⅱ-1권에 해당한다. Ⅰ권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에서는 삶을 포획하는 권력 장치가 감옥에서 수용소로 이행하면서 ‘호모 사케르’와 같은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 주권의 본질임을 밝혔다면, 『예외상태』에서는 법과 폭력의 관계 속에서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는 ‘예외상태’라는 장치야말로 국가주권과 법치의 통치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대외전쟁이나 내전 같은 비상시국에서의 긴급조치나 계엄령처럼, 예외상태란 정상시에 작동하던 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살아있는 자들을 아노미적 공간 속에 놓으면서 동시에 법의 힘에 포획시키는 주권권력의 정치적 장치다. 법 안에 법의 공백을 놓는 예외상태의 역설적 구조에 포획된 생명은 법질서 바깥으로 배제된 채로 법의 힘 안에 포섭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주권권력은 벌거벗은 생명과의 이런 배제적 포함 관계 속에서 삶을 통치하는 생명정치를 실행한다. 문제는 이런 예외상태가 더 이상 잠정적인 예외조치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국가든 부시 정권의 민주주의 국가든 예외상태는 사실상 모든 국민국가의 정상적인 통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분석이다. 예외와 정상규칙의 식별불가능성은 아노미를 창출해 법질서를 확정하려던 예외상태의 기능을 멈추게 하고, 결국 최종적인 법질서의 작동을 무화시켜 순수한 폭력의 아노미 지대로 들어서게 한다. 국가의 법이 폭력으로부터 삶을 보호한다는 것은 허구인 셈이다. 아감벤은 마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 듯, 삶을 헐벗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기계 장치(예외상태)가 작동 정지되는 곳에서 오히려 ‘진정한 예외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전회(轉回)의 가능성을 본다.  

진정한 예외상태란 법이 삶 자체와 구별되지 않고, 법과 삶의 배제적 포함 관계 자체가 무화되며, 거꾸로 법이 단지 삶의 사용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되는 상태, 즉 법 바깥으로의 자발적인 내버려짐과 더불어 삶이 자기 고유의 잠재성을 회복하는 상태다. 이는 법을 정립하거나 보존하려는 목적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수단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법과 삶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 ‘목적 없는 수단’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 전체를 압축해 놓은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 『목적 없는 수단』(1996)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예외상태』 보다 훨씬 이전에, 『호모 사케르』Ⅰ권(1995)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이 저서는 현재 진행형인 「호모 사케르」 연작의 주제들과 공명하면서 그 전체적인 기획을 예견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도래할 공동체를 위한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난민’, ‘수용소’, ‘인민’, ‘경찰’, ‘스펙터클 사회’ 등은 국가-국민-영토의 삼위일체에 근거하는 국가주권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래할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요소들이다. 국민국가체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무국적 비시민들의 전세계적인 양산이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용소의 확산은 결국 안정적인 예외상태의 실현 지대를 확장시킬 뿐이다. 특히 국가형태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스펙터클 국가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소통 가능성으로서의 언어활동 자체가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를 산출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생명과 정치적 실존, 소통 불가능한 것과 소통 가능한 것, 규칙과 예외, 난민과 시민이 더 이상 식별불가능하게 되는 어두운 지대의 확장 속에서, 아감벤은 국가주권으로 표시되는 어떤 역사적 시대의 마감을 예감하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비국가적 정치의 가능성을 본다. ‘자연스런 몸짓’, ‘순수한 언어활동’, ‘삶-의-형태’. 이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인 ‘목적 없는 수단’의 요소들로서 회복돼야 할 것들이다.  

국가주권과 법에 의해 정해진 목적(내용, 코드, 문법)을 실현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어떤 목적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용’을 주장할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몸짓과 언어활동은 ‘공통적인 것’으로서 소통가능성 그 자체이기에 장차 도래할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정해진 동일성과 정체성이 없는 순수 잠재성의 존재다. ‘삶-의-형태’는 자신의 형태와 분리될 수 없는 삶으로서 벌거벗은 생명이 아닌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순수 수단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삶의 역량을 완성하고 소통하는 데 도달하는 삶.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충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국가주권을 구성하는 폭력과 법의 연결을 해체하고 국가주권이 분리시킨 다양한 형태의 벌거벗은 생명들을 다시 묶어 ‘삶-의-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래할 정치 역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인류의 잠재적인 역량을 목적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국가와 비국가(인류) 간의 투쟁이 된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으로부터 행복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해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시작돼야 할 곳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기계와 맞서고 있는 바로 우리의 용산, 거기가 아닐까.(김재희_대진대 학술연구교수)  

09. 11. 22. 

P.S. 마지막 멘트와 관련하여 '작가선언 69'에서 엮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가 근간 예정이라는 것도 적어둔다. 표지는 아래 두 가지 시안 가운데 하나로 결졍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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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벌거벗은 생명 VS 목적 없는 수단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23 20:45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란 부제대로 책은 저자가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철학적 구상의 노트이면서 독자에겐 아감벤의 전체적인 철학적 기획을 일별하게 해주는 조감도이다. 병렬적인 구성이긴 하나 '기 드보르를 추모하며'란 헌사가 시사해주듯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같은 글이 큰
  2.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06 08:00 
    '작가선언 6ㆍ9'에서 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이 출간됐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 근간예정이란 소식은 아감벤에 관한 페이퍼 말미에 적어둔 적이 있다. 표지는 검은색과 노란색, 두 가지 시안 가운데 노란색이 선택된 듯하다(나도 바라던 바다). 예상보다 두툼한 책이 출간됐는데, 2009년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상처이자 사건으로 용산참사에 대한 기억과 분노가 책으로 엮어진 것을 다행
 
 
펠릭스 2009-11-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노랑바탕이 더,,,

로쟈 2009-11-23 21:5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긴 한데, 첫번째 표지가 낫겠다는 분들이 더 많은 듯해요...

펠릭스 2009-11-23 22:09   좋아요 0 | URL
예,,첫 번째는 검정 상복을 입은 여자분의 심장을 드려다 보이는 상징성있어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이주엔 페미니즘 비평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이후, 2009)도 출간된 김에 여성의 삶과 현실을 다룬 책을 더 꼽아본다. 신시아 코번의 <여성, 총 앞에 서다>(삼인, 2009). '전쟁과 폭력에 도전하는 여성반전평화운동'이란 부제가 책의 주제를 말해준다. 원제는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9. 11. 21) 폭력과 전쟁에 맞서는 여성, 희망 앞에 서다

서문에 앞서 '감사의 글'이 실렸는데 그게 좀 길다. 21쪽 분량. 여기엔 저자가 책을 쓰기 위해 직접 인터뷰한 12개국 250여 여성운동가와 단체의 이름과 사연이 빼곡하다. 유럽의 선진국부터 미국, 콜롬비아, 팔레스타인, 시에라리온 등 세계 각지에서 '전쟁과 군대'라는 성역에 도전하는 여성들의 이름이다. 책의 원 제목은 'From where We stand'. 그 제목처럼 이 책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전투적인 또는 선지자적인 여성의 목소리로 씨줄과 날줄을 이룬 포연 자욱한 세계 지도처럼 읽힌다.

저자 신시아 코번은 페미니스트 작가이자 런던 시티대학에서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 또 국제적인 여성평화단체 '위민 인 블랙'의 활동가로, 지난 10여년 동안 무력분쟁과 평화정착 과정에서 나타나는 젠더(gender) 문제에 관한 글을 써 왔다. 저자는 군사화와 전쟁을 접한 다양한 여성들의 사례를 종합해 한 가지 공통점을 추출하는데, 그것은 여성들이 단순히 '평화를 지향하는' 것을 넘어서 군사주의와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집단적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논지에 따르면 전쟁은 비정상적 상태나 딴 세상의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한 부분이자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한 요소다. 자연히 전쟁은 일상과 연관되고, 젠더와 섹슈얼리티 체계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여성들의 평화운동은 단순히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체제와 은밀히 내통하고 있는 모든 차별적 구조와 권력관계에 저항하는 일이다. 저자는 여성들의 평화운동을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남성=폭력, 여성=평화'라는 어정쩡한 생물학적 대립 구도는, 그래서 이 책에선 넘어서야 할 고정관념이다. 저자는 각국의 여성 평화운동가들이 처한 정치적 맥락과 '위치성'에 주목한다. 민족주의나 군대에 대한 관점도 각국 여성들의 사회적 위치와 복잡한 경험에 따라 다르게 표출되는데, 저자는 "여성의 평화로운 본성" 따위를 운운하는 것보다 그 개별성을 존중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나라마다 폭력과 전쟁에 맞서는 방법은 다르지만, 이 책에 담긴 여성들의 저항은 진지하고 강인하다. 특히 이 저항은 기존 좌파의 가부장적 반전평화운동이 가진 폭력적 위계와 천편일률적 저항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답답한 '붉은색'을 대신할 다층적이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핑크빛' 반전평화운동 시대의 도래"를 이 책 속에서 목격할 수 있다.(유상호기자)   

09. 11. 21. 

 

P.S. 이란 여성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 마르얌 포야의 <이란의 여성, 노동자, 이슬람주의>(책갈피, 2009)도 새로 나온 책이다. 마땅한 리뷰기사가 뜨지 않아서 출판사의 책소개를 일부 옮겨놓는다.  

이 책은 이란 여성들의 처지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이란 출신의 여성이다. 가장 서구화된 시기였던 팔레비 샤의 이란도 경험했고, 1979년 혁명도 경험했다. 그 이후 이란을 떠나 현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지은이는 이란을 수차례 방문해 현지를 직접 조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특히 많은 이란의 여성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이란 여성들의 처지를 자세히 조사하고 생생히 묘사했는데 이것은 지은이가 이란 출신의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이 책은 여성의 처지를 단순히 묘사만 하거나 이슬람 종교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란 사회 전반에서 일어난 변화들 즉, 경제·사회·정치의 변화와 이데올로기의 영향, 그리고 여성들이 어떻게 평등을 위해 저항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또 왜 여성들 중 일부는 억압적인 이슬람 국가를 지지했는지, 이슬람 국가 이후 여성 고용이 왜 별로 줄지 않았는지, 팔레비 정부와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땠는지 등을 살펴봄으로써 여성뿐만 아니라 이란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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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세알 2009-11-21 12:43   좋아요 0 | URL
옛날에 이란인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요 한참 아들부시놈이 이라크 침공한다고 야단일때 그녀는 '이왕이면 이란까지 폭격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펄쩍 뛰면서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했지만 '페르세 폴리스'같은 영화도 보고 이란정세를 좀 알게 되면서는 함부로 이야기는 못하겠더라구요. 그녀는 남자친구도 있는 이란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꾸 핑계를 만들면서 영국에서의 체류를 연장하고 있었거든요.

로쟈 2009-11-22 10:58   좋아요 0 | URL
이란 현대사에 관한 책도 최근에 나왔는데, 이란 여성의 시각에서는 사뭇 다른 관점에서 쓰여질 수도 있을 듯해요. 이 책을 그래서 따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서 신형철 평론가의 '시 읽어주는 남자'를 옮겨놓는다. 지난달 말의 용산 사건에 대한 선고 공판에 대한 절망을 오든의 시와 함께 적고 있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는 결미의 말은 오래 음미되어야 할 듯싶다. 불행하지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한겨레21(09. 11. 20) 숨이 끊기기 전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10월28일, 그러니까 용산 재판 선고공판에서 피고인들에게 중형이 구형된 날에, 나는 김훈의 신작 <공무도하>(문학동네 펴냄)를 읽고 있었다. 당대를 다루는 소설이었지만 김훈은 여전했다. 지상에서의 삶은 문명이나 이념 따위와 무관하게 약육강식의 원리로 이루어지고, 인간의 시간은 역사나 진보 따위와는 무관하게 자연사(自然史)로 흐른다는 특유의 생각이 페이지마다 단호하게 관철되고 있었다. 그 단호함은 ‘팩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주장하거나 설득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10월28일, 그러니까 대한민국 사법부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관철한 그날에, 김훈의 말들은 내게 거의 진리로 보였다.  

10월28일의 선고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올해 봄에 출간된 <오든 시선집>(봉준수 편역, 나남 펴냄)의 한 페이지를 펼친다. “소위 세상의 주인이라는 민중,/ 모두가 똑같이 존중받는다지만/ 그들의 운명은 다른 사람들의 손안에 있었다. 도움을 바라지도/ 받지도 못했던 약자들,/ 적들은 바라던 것을 이미 해버렸으니/ 못된 인간들이 원했던 것은 민중들의 수모, 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아킬레스의 방패’에서) 오든의 문장 중에서는 다소 투박한 편에 속하는 것이지만 마지막 대목 때문에 옮겨 적었다.

10월28일에 일어난 일이 그와 같다. 피고인들은 자부심을 잃어 숨이 끊기기도 전에 이미 인간으로서 죽었다. 무죄 선고까지를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최소한, 어째서 그런 참혹한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약자의 입장에서 ‘이해’해주는 판결이기를,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을 ‘인간’으로 복권해주는 판결이기를 기대했다. 부당한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길 수밖에 없게 하고 다시 그 법으로 처벌하는 이 해괴한 악순환 속에서 재판부가 고뇌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했다. 고뇌는커녕,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책임을 전가하고 재판을 방해했다’며 도리어 준엄하게 꾸짖고 있었다.

화가 나기 이전에 뭔가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현행법을 수호해야 하는 법관으로서는 달리 어찌할 여지가 크지는 않다 하더라도, 법은 무정하나 법관은 무정하지 않을 테니, 최소한 고뇌는 했어야 하지 않는가. 어떻게 저토록 무정한가. 그들은 그저 재판기계인가. “소녀들은 겁탈당하고, 두 소년이 다른 한 소년을 찌르는 것은/ 누더기 소년에겐 자명한 세상의 이치, 그는 약속이/ 지켜지거나 딴 사람이 운다고 따라 우는 세상은/ 들어본 적이 없는 까닭이라.”(같은 시) 오든의 말대로 이것이 ‘자명한 세상의 이치’인가. ‘소년’의 울음을 함께 울어주지도 못한다면 도대체 법은 왜 있어야 하나.

정의로운 법과 선량한 법관들을 모독할 생각은 없지만, 삶의 터전을 빼앗긴 가난한 자들의 저항을 쓰레기 분리수거나 해충 박멸 정도의 문제로 간주하는 것도 분명 대한민국의 법이라면, 그 법에는 영혼이 없을 것이고 그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도 영혼은 없을 것이다. 오든의 유명한 시 ‘법은 사랑처럼’은 이렇게 끝난다. “사랑처럼 어디에 왜 있는지 모르고/ 사랑처럼 강요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으며/ 사랑처럼 가끔 울게 되고/ 사랑처럼 대개는 못 지키는 것.”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법은 사랑의 논리화가 아니라 폭력의 합리화에 가깝다. 이제 문학은 법과도 싸워야 한다.(신형철 문학평론가)  

09.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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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들의 국격과 용산 묵시록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12 18:28 
    이번주에 읽은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대표적 MB용어가 된 '국격'이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라는 걸 알게 해준 칼럼과 '용산' 이후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인지 질문하는 칼럼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
 
 
2009-11-20 1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2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na35 2009-11-20 17:06   좋아요 0 | URL
본문과 상관없는 댓글이라 죄송한데요. 이상수 기자님(오랑캐로 사는 즐거움)의 블로그 주소를 아시면 좀 달아주십사 합니다. 한겨레21에 글 쓰실때부터 팬이었는데 블로그가 있는지 미처 몰랐네요.(예전 글쓰신거 읽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가지 더. 저는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판)를 읽다가 번역이 너무 엉망이라 완전히 손을 떼고 도킨스에 대한 의욕마저 상실했었는데요. 로쟈님 글에 여러차례 소개는 되는데 번역에 대한 말씀은 없으시더라구요. 읽는데 문제 없으셨나요?

로쟈 2009-11-22 10:53   좋아요 0 | URL
지금은 기자를 안 하시죠. 블로그는 따로 알지 못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는 제가 90년대에 읽었는데, 두산동아에서 나온 걸로 읽고, 개정된 부분만 을유문화사본으로 읽어서 전체적인 번역에 대해선 알지 못합니다. 30주년 기념판을 이후에 사두긴 했지만요. 저보단 다른 전공자분들의 서평이 나오면 좋을 텐데, 다들 이런 일엔 관심이 없으신 듯해요...

nana35 2009-11-22 15:57   좋아요 0 | URL
네 기자 그만두신건 알고 있었습니다. 로쟈님이 올려주신 어유야담 번역관련 글에 이상수님이 직접 블로그 언급을 하셨길래 혹시 아시나 싶어서요. 찾아보긴 하는데 아직 발견을 못했거든요. 감사합니다.

로쟈 2009-11-22 16:22   좋아요 0 | URL
아, 그건 한겨레 기자시절의 블로그이므로 지금은 폐쇄됐을 거예요...

sophie 2009-11-21 04:06   좋아요 0 | URL
누군가 꼭 해야할 얘기를 하고 있네요. 오든의 시가 궁금해서 전문을 찾아봤어요. 사랑에 비유한 마지막 부분도 좋지만 나머지 부분도 좋더군요. Law like Love가 원제인 것 같아요.아킬레스의 방패.. 기억해 둬야겠네요. 비단 용산문제만이 아니겠지요. 충분히 공감가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9-11-22 10:55   좋아요 0 | URL
안경환 전 인권위원장의 <법은 사랑처럼>이란 에세이집도 있습니다. 법조인들은 오든을 잘 읽질 않거나 읽어도 무덤덤한 듯해요...
 

다윈과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무슨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최근에 나온 <다윈 평전>(뿌리와이파리, 2009)과 <다락방의 미친 여자>(이후, 2009)의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같이 묶게 됐다. <다윈>이 1295쪽이고, <다락방>이 1076쪽이다. 액면가로는 각각 5만원과 4만8천원. 두 권 다 두 명의 저자가 썼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인데, <다윈 평전>을 쓴 에이드리언 데스먼드와 제임스 무어는 당연히 내겐 생소한 이름들이지만,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공저자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페미니즘 문학을 다루는 모든 이론서에서 언급되는 저명한 학자들이다(물론 더 유명한 건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저서명이다). 아무려나 같은 시기에 나온 두 묵직한 저작을 기념하여 간단한 책소개를 옮겨놓는다. <다윈 평전>의 경우엔 소개기사이고,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출판사의 소개글이다.  

경향신문(09. 11. 20) 다윈은 20년 동안 진화론을 숨겼다

“악마의 사제가 아니면 누가, 이런 꼴사납고 소모적이며 실수를 연발하는, 저속하고 끔찍할 정도로 잔혹한 자연의 소행들에 대한 책을 쓸 수 있겠는가.”(<종의 기원> 집필을 시작할 무렵인 1856년에 찰스 다윈이 쓴 글, <다윈 평전>에서 인용)

2009년은 진화론으로 인류의 생명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찰스 다윈(1809~82)의 탄생 200주년이다. 또 오는 22일은 자연선택설이라는 진화론의 핵심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이 첫 출간된 지 150주년 되는 날이다. 한국엔 24일이 출간일로 알려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종의 기원>을 펴낸 출판업자 머레이는 판매를 시작한 22일 모든 책이 팔렸다는 기록을 남겼기 때문에 영국에선 22일이 <종의 기원> 출간일로 공인받고 있다.

국내 출판계는 ‘다윈의 해’를 맞아 다윈과 진화론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한 책들을 쏟아냈다.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 YES24에 따르면 올해 다윈 혹은 진화론을 키워드로 발간된 신간들은 어린이·청소년 대상을 제외하고도 20종이 넘는다. 판매량도 과거에 비해 대폭 늘었다. 다윈과 진화론, 다윈 이론의 현대적 변용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여러 개의 창이 마련된 셈이다.

다윈 관련 책의 결정판은 최근 출간된 <다윈 평전>(뿌리와이파리·사진)이다. 1350여쪽에 이르는 이 책은 영국의 과학사가 에이드리언 데스먼드와 제임스 무어가 공동 집필했다. 탄생에서 죽음까지 다윈의 삶을 시간 순서로 조명한 평전은 ‘고뇌하는 진화론자의 초상’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젊은 시절 성직자가 되려 했으나 유물론자가 돼버린 다윈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윈은 서른살 무렵 창조설을 깡그리 뒤엎는 진화의 비밀을 깨우쳤지만 비밀 공책에 적어뒀을 뿐 20년 동안 묻어뒀다. 실제로 다윈은 과학계의 주류가 활동하는 런던을 피해 시골에 칩거했음에도, 자신이 발견한 진화론의 함의들을 고심한 탓에 평생을 편두통과 구토에 시달려야 했고 두려움 때문에 몸져 눕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윈은 ‘종이 영구불변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지인에게 털어놓으면서 “이것은 살인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데스먼드·무어의 <다윈 평전>과 함께 다윈 전기의 쌍벽을 이루는 것이 자넷 브라운의 책이다. 브라운은 비글호를 타고 다윈이 세계일주를 하는 시기를 앞뒤로 나눠 2권으로 다윈 전기를 묶었는데,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하고 사회에 발표하는 후반부 책이 김영사에서 12월 중 나올 예정이다. 브라운의 다윈 전기는 천재적인 자연사학자로서의 면모보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산물로써의 다윈, 즉 혁명을 바라던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윈의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데스먼드·무어의 <다윈 평전>과 차별성을 보인다. 최근 출간된 <다윈은 세상에서 무엇을 보았을까?>(피터 매시니스|부키) 역시 다윈 자체보다는 <종의 기원>이 발간되던 1859년 언저리의 사회상과 과학·기술적 발견들을 조명하고 있어 다윈을 이해하기 위한 간접 자료로 가치가 있다. 



지난 1월 출간된 <다윈 이후: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말하다>(사이언스 북스)는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다윈주의의 쌍벽을 이루며 논쟁을 벌인 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으로 주목받는다. 굴드는 77년 처음 출간된 이 책에서 다윈의 사상이 어떻게 왜곡·확산됐으며,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하고 진화론을 남용해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불러온 생물학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국내 저자의 책으로는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를 비롯한 19명의 연구자가 철학·법학·심리학·정치학·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다윈 사상이 끼친 영향을 고찰한 <21세기 다윈 혁명>(사이언스 북스)이 호평을 받고 있다. 최 교수는 젊은 연구자들과 함께 ‘다윈포럼’을 만들어 활동 중인데 <종의 기원> <인간의 유래>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등 다윈의 대표 저서도 새롭게 번역하고 있다.

생물학자이자 과학도서 평론가인 김명남씨는 “일반인들은 진화론을 이미 완성된 이론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유전학 발전에 따라 진화론도 생동감 있게 발전하면서 경제학·심리학 등 영향력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고 밝혔다.(김재중기자) 

  

|페미니즘 비평의 기념비적 연구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인디애나 대학에서 우연히 만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초안이 될 여성 문학에 대한 강의를 구상할 때까지만 해도 여성 작가들을 다루는 문학 수업은 대학 내에서 완전히 낯선 주제였다. 청교도적이면서 남성적인 학풍이 지배하던 대학에서 두 저자는 제인 오스틴, 살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그리고 조지 엘리엇 등 19세기를 수놓았던 여성 작가들을 강의실로 불러낸다. 그리고 이들 여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금과 탈출의 이미지, 거식증이나 광장공포증, 폐소공포증 같은 질병의 은유들에 주목한다.  

19세기 여성 작가들의 이러한 분열적인 이미지들이 남성 문학과는 매우 다르게 형성돼 온 여성 문학 전통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여성 작가들이 직면했던 당대의 현실과 문학적 풍토를 두루 고찰하는 가운데 문학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열어젖힌다. 그 연구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페미니즘 인식의 지평을 영문학, 더 나아가 인문학에 성공적으로 주입시킨 페미니즘 비평사의 산증인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넘어서|
두 사람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출간할 무렵, 페미니즘 비평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산드라 길버트가 서문에서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자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지고 반짝였다."고 표현한 그 순간, 즉 문학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수전 구바와 함께 흥분했던 그 순간은 페미니즘 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19세기 여성 문학가들이 남긴 광범위한 유산을 여성 작가들의 미학적 반항성이라는 주제로 훌륭하게 갈무리하고 있는 이 책은 케이트 밀렛의 『성性 정치학』과 함께 페미니즘의 정치적 열망을 문학 비평으로까지 성공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영미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넘어서야 할 거대한 산이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출간된 지 3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에도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작이다. 또한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환상적인 어조로 밀도 있게 다루는 두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원서로 700쪽, 번역서로 1,000쪽에 이르는 이 책이 결코 두껍게 느껴지지 않는다. 번역 과정에서 옮긴이의 꼼꼼한 주석을 추가했으며, 2000년 개정판 서문을 통해 두 저자가 자신들의 작업 과정을 흥미롭게 펼쳐 보이고 있다.  

|차 례|

1부 페미니스트 시학을 향하여
1장 여왕의 거울-여성의 창조성, 남성이 갖는 여성의 이미지와 문화적 부권의 메타포
2장 전염된 문장-여성 작가가 된다는 것의 불안
3장 동굴의 우화

2부 허구의 집안에서-제인 오스틴의 가능성의 거주인들
4장 산문 속에서 입 다물기-오스틴의 초기 작품에 나타난 젠더와 장르
5장 제인 오스틴 뒤에 숨겨진 이야기-그리고 그것의 내밀한 중개인들

3부 우리는 어떻게 타락했는가?-밀턴의 딸들
6장 밀턴의 악령-가부장적인 시와 여성 독자들
7장 공포의 쌍둥이-메리 셸리의 괴물 같은 이브
8장 반대로 바라보기-에밀리 브론테의 지옥의 바이블

4부 샬롯 브론테의 기괴한 자아
9장 내밀한 내면의 상처-『교수』의 학생
10장 자아와 영혼의 대화-평범한 제인의 여정
11장 굶주림의 기원
12장 루시 스노우의 매장된 삶

5부 조지 엘리엇의 소설에 나타난 감금과 의식
13장 상실감이 빚은 예민함-조지 엘리엇의 숨겨진 비전
14장 파괴의 천사, 조지 엘리엇

6부 고통의 힘
15장 체념의 미학
16장 하얀 여자-에밀리 디킨슨의 진주 실  

09.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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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찰스 다윈을 만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04 10:35 
    이번주 출간도서 가운데 분량으로 가장 압도적인 책은 재닌 브라운의 <찰스 다윈 평전>(김영사, 2010)이다. 탄생 200주년이었던 작년에 이미 예고된 책인데, 출간이 약간 늦어졌다(하긴 <종의 기원> 새 번역본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에이드리언 데스먼드 등이 쓴 <다윈 평전>(뿌리와이파리, 2009)과 다윈에 관한 전기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라 한다(사실 2000쪽이 넘는 분량 자체가 독자를 압
 
 
펠릭스 2009-11-20 06:27   좋아요 0 | URL
'종의 기원'에서의 '선택'(and'변이')과 '소크라테스'의 '선택(참,거짓)'은 육체와 정신 진화(다양화)의 원동력같지만 '다윈'이 진화의 실례로 왜 동물만 예로 들었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20 09:27   좋아요 0 | URL
<인간의 유래>는 따로 쓰니까요...

펠릭스 2009-11-20 13:42   좋아요 0 | URL
예,,'종의 기원'발표 12년후에 썼군요. 그리고 보면 '다윈'은
대단한 확신과 용기있는 학자군요. '소크라테스'도 그렇구요.
현대의 일부 지식인들은 권력의 지짓대를 역할을 하는데요.

수유 2009-11-20 08:49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미친여자 1076쪽.. 그래도 사야겠죠. 읽어야 띄엄띄엄.

로쟈 2009-11-20 09:26   좋아요 0 | URL
각 부별로 따로 읽으면 되니까요...

무해한모리군 2009-11-20 09:21   좋아요 0 | URL
다락방의 미친여자의 쪽수는 저를 좌절시키지만..
도전!!!

로쟈 2009-11-20 09:27   좋아요 0 | URL
좌절까지는 아니고, 들고 다니기 불편한 거죠.^^
 

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서평위원 칼럼을 옮겨놓는다. 칼럼을 읽고서, 니체의 초인을 '나눔에의 의지를 가진 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자'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빈번한 오해의 대상이 된 '힘에의 의지'보다 '나눔에의 의지'는 훨씬 더 명쾌하며 의미심장하지 않은지?.. 

 

교수신문(09. 11. 16) ‘자발적 가난’의 지혜

자신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낙타에서 사자로 변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낙타는 수동적인 인간,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상징한다. 기존의 공동체가 부여한 규범이나 가치를 하나의 숙명이나 본성인 것처럼 등에 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낙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는 사자가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사자 등에 올라탈 수 있겠는가. 사자의 등에 타려면 우리는 사자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자의 시신 위에 우리는 걸터앉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자는 부정의 전사이자 동시에 자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자는 최종적으로 어린아이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어린아이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위베먼쉬(ubermensch), 즉 초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자가 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의 등에는 많은 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얹혀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짐들을 지다보니, 이제 우리는 그것이 짐인지 아니면 나의 몸의 일부인지 헛갈릴 정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짐들로는 니체는 국가, 종교, 자본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사자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의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 용기’가, 내세를 약속하는 종교의 유혹에 대해서는 ‘삶을 긍정하는 유쾌함’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재산축적을 명령하는 자본에 대해서는 ‘자발적 가난의 행복’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많은 독자들은 ‘자발적 가난’이 ‘행복’일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가난을 뜻하는 한자, ‘貧’이란 글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 빈이란 글자는 나눔을 상징하는 ‘分’이란 글자와 조개 화폐를 상징하는 ‘貝’라는 글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져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도래하는 상태가 바로 가난이라는 것이다. 淸貧, 즉 맑은 가난이란 말이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바로 여기에 행복의 비밀이 있다. 자신이 애써 수확한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을 때, 우리는 축적의 행복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재산을 가지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체제를 말한다. 항상 자본주의는 자본의 양이 자유의 양이라고 사탕발림하며 우리를 미혹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빈주머니에 손을 찔러보며 우리는 무엇인지 모를 부자유와 우울함을 느끼곤 한다.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결국 자본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소비의 자유, 소비할 때 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덧없는 자유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의 자유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달콤한 쾌락은 주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우리에게 심한 금단증상을 제공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인 가난은 가장 자본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의지이자, 동시에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사 이래 동서양의 많은 철인들은 한결같이 ‘자발적 가난’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통찰하고 있었다. 슈마허(E. F. Schumacher)는 『자발적 가난』이란 책으로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노래했던 많은 철인들의 이야기를 수록하려고 한다. 원제가 더 의미심장하다. ‘작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가 원제이기 때문이다.

청빈한 삶을 영위하던 서양의 은둔자들,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던 동양의 선사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했던 현대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정신들은 직접 노동하며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 그래서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삶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혹시라도 자본이란 마약에 아직도 취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은 진정한 행복을 약속하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친구에게 나누어주는 어린아이의 미소, 니체가 그렇게도 요구했던 초인의 미소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셈이다.(강신주 서평위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09.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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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5:46 
    나눔의 의지와 자발적 가난 — via 로쟈
 
 
펠릭스 2009-11-16 20:12   좋아요 0 | URL
'빈농(貧農)'의 나눔은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없는듯 합니다. 가난뒤에 어떤 부(富)를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16 21:04   좋아요 0 | URL
타의에 의한, 타율에 의한 가난은 짐이고 구속이죠. 그건 부정적인 것이구요, 다만 뒤집어서 부에 대한 강박을 짐처럼 이고 다닌다면 그 또한 낙타의 삶이라고 해야겠어요...

2009-11-16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11-17 09:30   좋아요 0 | URL
오호 로쟈님 글을 읽으니 갑자기 폴리네시아 원주민이 생각나네요.자발적 가난(청빈)과는 좀 다른 개념인데... 이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온가족이 정말 밤잠 안자고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합니다.그래서 대규모의 부를 축적하면 갑자기 온 마을 사람들한테 그 부를 정말 무상으로 배분한다고 하는군요.그 뒤에 남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민들이 바치는 대인이라는 칭송뿐이라고 하더군요.일종의 명예인데 사람들은 그 명예를 부러워하며 너도 나도 부를 축적하고,대인이라고 명예를 받은이도 그 명예를 지키기위해 또 부를 축적하며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워 준다고 합니다.
뭐 사회적 부의 재분배 시스템인데,결국 나눔은 이타적 생각이지만 마음속에 이런 명예욕에 관한 이기적 생각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로쟈 2009-11-17 12:22   좋아요 0 | URL
그런 '이기심'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