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 이야기 - 인류 최초로 바다의 시공간을 밝혀낸 도전의 역사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김진준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1. 상상의 선 


"프톨레마이오스는 적도를 위도가 0도인 선으로 잡았다. 임의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자연 속에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적도를 알아냈던 조상들의 선례를 따른 것이었다. 적도에서는 태양과 달과 행성들이 머리 위로 수직에 가깝게 지나간다. 역시 유명한 위도선인 북회귀선과 남회귀선도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졌다. 연중 태양이 움직이는 범위에서 각각 북쪽과 남쪽의 한계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초자오선, 즉 경도가 0도인 선은 프톨레마이오스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북서쪽의 포처니트 제도(지금의 카나리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지나가는 경도선을 선택했다. 그 이후에 지도를 만든 사람들은 본초자오선을 아조레스 제도나 케이프베르데 제도,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페테르스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 등지로 옮기다가 결국 런던으로 낙착을 보았다. 본초자오선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바로 그것이 위도와 경도의 본질적 차이점이다."(19)


2. 위험한 바다 


"용기와 탐욕을 겸비하고 바다로 나갔던 15~17세기의 선장들은 모항으로부터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추측 항법을 사용했다. 선장은 바다 위에 측정기를 던져놓고 이 임시 이정표로부터 얼마나 빨리 멀어지는지를 관찰했다. 이 조잡한 속도계의 측정값을 항해일지에 기록하고, 별이나 나침반으로 확인한 진행 방향과 모래시계나 회중시계로 잰 특정 거리의 통과 시간 따위를 함께 적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목적지를 놓치는 일도 흔했다. 추측 항법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 같은 개인적인 고통이 전부는 아니었다. 경도를 모른다는 이유로 세계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경제적 재앙을 감수해야 했다. 대양을 오가는 배들은 안전한 항해가 보장되는 소수의 비좁은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위도만 가지고 항행해야 했으므로 몇몇 항로에 포경선, 상선, 전함, 해적선 등이 한꺼번에 몰려 붐비다가 서로 싸워 차례로 희생 당했다."(29-30)


# 측정기 : 줄이 풀리는 정도에 따라 배의 속도 및 항주 거리를 재는 장치


3. 우주의 시계 속에서 표류하다 


"일찍이 1514년에 이미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베르너가 달의 운행을 이용하여 배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을 착안했다. 달이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거리는 대략 달의 지름과 비슷하다. 달은 밤마다 이렇게 장중한 걸음걸이로 붙박이별 사이를 산책한다. 낮에는 (매달 보름 동안은 낮에도 달이 떠 있으므로) 태양 쪽으로 다가가거나 멀어진다. 베르너는 천문학자들이 달의 운행 경로 주위에 흩어진 항성들의 위치를 천체도에 표시하고 달이 각각의 항성을 스쳐 지나가는 시각을─앞으로 몇 년에 걸쳐 매달 달이 뜨는 밤마다─예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낮 동안에 이동하는 해와 달의 상대적 위치도 예측해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월거 이용법'의 주된 문제점은 그 모든 과정을 좌우하는 항성들의 위치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어느 날 밤이나 낮에 달이 어디쯤 있을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천문학자는 아무도 없었다. 달의 운행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아직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39)


4. 병속의 시간 


"시계 예찬론자들은 좋은 시계만 있으면 경도 문제를 거뜬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때는 뱃사람들이 물통이나 소고기처럼 모항의 시간을 배에 싣고 출항할 수 있을 터였다. 1530년부터 플랑드르의 천문학자 젬마 프리시우스는 기계적인 시계가 바다에서 경도를 찾는 한 방법이라면서 환영했다. 그러나 프리시우스가 내세운 두 가지 조건─즉 지극히 정확한 출항 시각에 시계를 맞춰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항해 중에 시계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때문에 당시로서는 사실상 사용이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16세기 초의 시계로는 어림없었다. 정확하지도 않았거니와 바다에서의 혹심한 온도 변화를 견뎌낼 재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가 부족하나마 상당한 발전을 보인 것은 영국의 항해가 토머스 블런드빌이 대양 항해에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정확한 시계를 이용해보자고 제안했던 1622년에 이르러서였다. 여러 결점에도 불구하고 장차 시계가 더욱 완벽해졌을 때의 가능성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51-2)


5. 교감의 가루약 


"17세기 말엽, 바다에서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엉뚱한 주장 가운데서도 가장 기상천외한 이론은 '교감의 가루약'이라는 엉터리 치료제를 근거로 삼았다. 딕비의 가루약을 경도 문제에 써먹는다는 발상은 비록 황당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먼저 상처 입은 개를 출항하는 배에 태운다. 그리고 믿을 만한 사람을 물에 남겨 날마다 정오에 그 개의 붕대를 교감의 가루약 용액에 집어넣게 한다. 그러면 개는 어쩔 수 없이 깽깽거리며 울부짖기 마련이고, 선장은 그 소리를 듣고 시간을 가늠한다. 개의 울부짖음은 곧 태양이 런던 자오선 상공에 도달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때 선장은 그 시각과 배가 있는 지점의 현지 시각을 비교하여 경도를 산출하면 된다. 물론 이 가루약이 수천수만 해리나 떨어진 바다 위까지 효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 또한 그러면서도─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몇 달이 지나도록 이 소중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야 한다는 것이 것이 희망 사항이었다."(57-8)


6. 경도상 


"1714년 7월 9일 앤 여왕 치하에서 발포된 경도법에는 거액의 상금이 책정되었다. 경도법이 발효되기 전에도 경도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은 흔해빠질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1714년 이후 해결책의 잠재적 가치가 급격히 커지자 해결책의 숫자도 급증했다. 머지않아 경도 심사국은 소문을 듣고 상금을 타기 위해 몰려드는 무수한 사기꾼이나 선의의 참가자들에게 포위되다시피 했다." "경도법이 등장한 후 '경도를 찾는다'는 말은 곧 불가능한 도전을 뜻하게 되었다. 걸핏하면 경도가 화젯거리─그리고 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그 시대의 문학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자면 『걸리버 여행기』에서 닥터 레뮤얼 걸리버는 불멸의 스트럴드브러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라는 말을 듣고 여러 혜성들이 돌아오거나 거센 강이 얕은 시냇물로 변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경도가 발견되고 영구기관과 만병통치약 등 위대한 발명품이 속속 완성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떠올렸다."(72)


# 스트럴드브러그 : 늙기만 하고 죽지 않는 희귀한 존재


7. 톱니바퀴 만들기 


8. 바다로 간 메뚜기 


"'경도 사나이' 존 해리슨이 동생 제임스 해리슨과 함께 1735년에 제작한 첫 해상 시계 H-1은 모든 면에서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였다. 이 시계가 등장했을 때 세상은 이미 기다림에 지쳐 있었다. H-1은 본래의 목적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지만 워낙 뛰어난 탓에 사람들은 오히려 당황했다." "1737년 6월 30일에는 경도 심사국 의원들이 사상 처음으로─심사국 창립 후 23년 만에─회의를 열었는데, 바로 해리슨의 굉장한 기계 때문이었다." "심사 자리에는 해리슨의 탁월한 작품이 있었고, 더욱이 그곳에 모인 전문인 및 정치가들도 해리슨이 국왕과 조국을 위해 이룩한 업적을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였다. H-1이─경도법에 명시된 2만 파운드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도 제도로 가는 시험을 요구할 권리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러나 해리슨은 지나친 완벽주의자였다. H-1에 대해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의견을 꺼낸 사람은 당사자인 해리슨뿐이었다."(95, 99-100)


9. 하늘의 시곗바늘 


"해리슨이 차례차례 해상 시계를 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과학자들도 마침내 하늘의 시계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이론과 기구와 정보를 두루 갖추게 되었다." "이제 '해들리 사분의' 덕분에 두 천체의 고도와 그 사이의 거리를 직접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설령 배가 심하게 흔들리더라도 관측자의 시야에 들어온 두 천체의 상대적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해들리 사분의에는 어둠이나 안개 때문에 진짜 수평선이 안 보이게 되었을 때 요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인위적인 수평선이 덤으로 붙어 있었다. 이 사분의는 곧 망원경을 부착하고 측정각을 넓혀 더욱 정확하게 만든 육분의sextant라는 기구로 발전했다. 그렇게 개량한 부분 때문에 이 기구만 있으면 낮 동안에 끊임없이 달라지는 달과 태양 사이의 거리를, 어두워진 뒤에는 달과 별 사이의 거리를 각각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상세한 성도星圖와 믿을 만한 기구를 갖춘 유능한 항해가라면, 이제 갑판 위에 서서 얼마든지 월거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106-9)


10. 다이아몬드 시계 


"1753년 워십풀 시계조합의 존 제프리스는 해리슨이 개인적으로 사용할 회중시계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해리슨이 요구한 설계대로 제작한 것이 분명하다. 제프리가 만든 이 시계에도 작은 이중 금속띠가 들어가 날이 덥든 춥든 정확한 시간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계는 대단히 정확했다. 해리슨 자신도 이 시계에 마음을 빼앗겨 더 작은 해상 시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해리슨이 1759년에 완성한 H-4는─이 시계로 결국 경도상을 받았다─앞서 만들어진 H-1, H-2, H-3보다 오히려 제프리스 시계를 더 많이 닮았다. 큼직한 황동 시계의 혈통에서 막내로 태어났으면서도 H-4는 마치 모자에서 끄집어낸 토끼처럼 놀라운 물건이었다. 지름이 5인치나 되므로 회중시계라고 하기에는 큰 편이지만 해상 시계로서는 아주 꼬맹이었으며 무게도 겨우 3파운드였다. 해리슨도 이 시계를 사랑했다. 곧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듯 이 시계는 그야말로 우아함과 정밀성의 진수였다."(122-3)


11. 물과 불의 시련 


"영웅을 찬양하는 이야기에는 야유할 악당도 필요한 법이다. 이 책에서 네빌 매스켈린 목사가 그런 사람인데, 역사는 그를 '뱃사람들의 천문학자'로 기억한다.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선택했다가 곧 신봉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그 방법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해리슨의 시계는 경도에 얽힌 복잡한 문제들을 그 안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사용자는 수학이나 천문학에 통달할 필요도 없고 시계를 작동시키는 데 경험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었다. 과학자나 천측 항법가들의 눈에는 이 해상 시계에 불길한 무엇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뭔가 재빠르고 붙잡을 수 없는 것. 더 옛날이었다면 해리슨은 이런 마술 상자를 해결책으로 내놓았다는 이유로 꼼짝없이 마법사로 몰렸을 것이다. 해리슨이 이런 입장에 놓인 까닭은 스스로 정해놓은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의 적들이 강력히 불신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공적을 세우고도 기대했던 찬사는커녕 수많은 시련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116-7, 128)


12. 두 개의 초상화 


"1764년 여름에 힘겨웠던 두 번째 시험이 끝난 후, 경도 심사국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몇 달을 그냥 보냈다. 위원들은 수학자들이 H-4의 시간 기록을 계산한 후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포츠머스 및 바베이도스의 경도값과 비교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심사 자료에는 모든 내용이 포함되어야 했다. 이윽고 최종적인 보고를 들은 위원들은 위의 시계가 충분히 정확하게 시간을 표시했음을 만장일치로 인정했다.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도 해리슨은 작은 승리밖에 얻지 못했다." "1765년 1월에 신임 왕실 천문학자의 이름이 발표되었는데, 다름 아닌 영원한 숙적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심사국 회의에서 매스켈린은 월거 이용법을 찬양하는 기나긴 원고를 낭독했다. 이 사건은 월거 이용법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에 불과했다. 해리슨의 크로노미터는 비록 신속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 반면, 하늘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었다."(146-8)


13. 제임스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 


14. 천재성의 대량 생산 


"켄들과 머지는 살아생전에 각기 해상 시계 세 개를 제작했고, 해리슨도 고작 다섯 개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시계공 존 아널드는 품질 좋은 해상 시계를 무려 수백 개나 완성시켰다." "존 아널드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토머스 언쇼였다. 그는 해리슨의 복잡성과 아널드의 생산성을 응축시켜 완벽에 가까운 크로노미터를 만들어냈다. 윤활유가 필요 없는 계시 장치를 고안하여 마침내 해리슨의 위대한 아이디어 하나를 소형화했다는 사실도 빠뜨릴 수 없다." "아널드와 언쇼 이외에도 점점 더 많은 제작자들이 나타난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판매했으며 군함이나 상선은 물론이고 놀잇배에서도 크노로미터를 사용했다. 그리하여 1737년 전 세계에 하나뿐이던 해상 시계가가 1815년에는 5000여 개로 늘어났다." "해리슨이 제시한 경도 해결책의 실용성이 확실히 입증되자 한때 치열했던 경쟁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크로노미터는 곧 당연히 항해에 갖춰야 하는 필수품으로 여겨졌다."(172, 175, 179-80)


15. 자오선의 뜨락에서


"런던 중심부로부터 7마일 떨어진 그리니치 천문대 자리에 본초자오선을 설정한 사람은 제5대 왕실 천문학자 네빌 매스켈린이었다. 경도를 찾는 방법 중에서 시계 이용법이 월거 이용법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 후에는 그리니치의 중요성이 다소 줄어들었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뱃사람들은 크로노미터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아직도 이따금씩 월거 측정을 해야 했다. 그리고 『항해력』의 해당 페이지를 펼쳐놓은 후, 출발 지점이나 목표 지점이 어디이든 간에 자연히 그리니치를 기준으로 경도를 계산했다." "(매스켈린의 온갖 훼방에 시달리면서도) 존 해리슨은 자신의 해상 시계들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의 바다에 도전했다. 그리고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제4의 차원─즉 시간─을 이용하여 삼차원적 공간인 지구의 각 지점을 하나로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의 위치를 알아냄으로써 별들을 쓸모없게 만들고 그 엄청난 비밀을 회중시계 속에 가둬놓았다."(182-3,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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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비스마르크 - 살림지식총서 361 살림지식총서 361
김장수 지음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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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활동


1847년 5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Ⅳ)는, 철도 건설에 필요한 재원으로서 공채를 발행하기 위해 프로이센 통합지방의회(Der Vereinigte Landtag)를 개원한다는 칙령을 발표했고 그에 따른 선거가 각 지방에서 실시되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브라우휘트쉬(Brauchitsch)라는 의원이 지병으로 의원 활동을 포기함에 따라 그는 1847년 5월 8일 통합지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독일 역사상 최초의 실제적 대의회였던 통합지방의회는 온건적 성향의 자유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므로 왕권 및 귀족 계층의 이익을 대변했던 우익 세력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다. 의회에 진출한 비스마르크는 보수적 성향을 보였는데 그의 그러한 성향은 5월 17일 통합지방의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확인된다. 여기서 그는 일부 의원들이 제기한 헌법 제정의 필요성을 반박했고 그것은 지방의회 의원들의 강한 반발을 야기했다. 9)


3월혁명 전후의 활동


오토(Otto) 대제 이후 약 천 년 동안 유지해 오던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10월 14일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멸망했다. 이후 제국의 영토는 나폴레옹의 보호국이 된 라인연방(Rheinbundstaaten), 호헨촐레른(Hohenzollern) 가의 프로이센, 그리고 합스부르크(Habsburg) 가의 오스트리아로 분할되었다. 1815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등장한 독일 연방은, 35개의 대소 국가와 4개의 자유시(Freistadt)로 구성된 엉성한 정치 체제였다. 그런 와중에 라인연방에서 시작된 독일의 산업 발전은 국내의 상공 시민들을 고무시켰고 그것은 자본주의적 산업 발전을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통합 시장의 형성 요구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프로이센의 경제인들은 1819년 북부 독일의 여러 국가들과 관세동맹(zollverein)을 체결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전 독일국가가 참여한 관세동맹이 1844년에 결성됨으로써 정치적 통일에 앞서 경제적 통일이 이룩될 수 있었다.10)


1848년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성 파울 교회(St. Paul- kirche)에서 국민의회가 개최되었다. 국민의회의 최대 과제는 독일 연방을 하나의 통합 국가로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별 영방 국가들을 그대로 둔 채 강력한 중앙 권력을 창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의회의 이러한 무력함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문제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두 공국은 오랫동안 덴마크 국왕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그중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혁명을 계기로 이 지방의 독일계 주민이 덴마크의 지배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국민의회의 요청으로 파견된 프로이센군이 사태를 진압했으나, 러시아, 영국, 프랑스의 압력으로 프로이센은 덴마크와 휴전 조약을 체결했고 국민의회는 이 조약을 추후 비준했다. 이로써 두 공국의 독일계 주민은 국민의회로부터 배반당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대다수 독일인 역시 그러한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다. 12-3)


1851년 5월 15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 연방의회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 자신이 후에 인정했듯이 대사직은 한 국가의 외교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직이었다. 이 당시 오스트리아 정치가들은,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고 비스마르크 역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1858년 3월 비스마르크는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후계자였던 빌헬름 왕자에게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정리한 문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서 그는 베를린 정부가 빈 정부를 의식하지 말고 자기중심적인 정책, 즉 독자적인 정책을 펼쳐야만 독일권에서 프로이센의 위상을 증대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이면에는 프로이센의 국익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빈 정부는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비스마르크를 해임시키려 했고, 그러한 시도는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15-6)


1859년 1월 23일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임명되었다. 3월 말 임지에 도착한 비스마르크는 러시아 외교 정책의 근간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펼쳤고 거기서 자신의 관점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도 인지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사로서의 임기를 끝낸 비스마르크는 1862년 1월 22일부터 프랑스 주재 프로이센 공사로 근무했다. 그 기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이 시기에 그는 나폴레옹 3세(Napoleon Ⅲ)의 보나파르트 정책(Bonapartism)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여기서 그는 외교적 업적을 통해 국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보나파르트 정책의 운영 과정을 세밀히 관찰해 그것을 향후 자신의 정책에도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보나파르트 정책의 핵심 구도는 1860년대 초 군제 개혁(heeresreform) 과정에서 야기된 의회와의 충돌 및 1870년대 의회 내 반대 세력과의 대립이라는 내정 문제를 외교적 업적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 등에서 확인된다. 16-7)


현실정치가로서의 행보


1859년 호헨촐레른 가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빌헬름 1세(Wilhelm Ⅰ)는, 섭정 지위에 있을 때 전쟁장관(kriegminister)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던 론(Roon)과 몰트케(Moltke)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증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병력 증강안에 대해 자유주의자들 역시 원칙적으로 견해를 같이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비역 및 후비역 축소가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의 전통을 계승하고 군제 개혁가 등의 이상이었던 '무장화된 시민', 즉 시민과 군대가 결속되었던 전통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이러한 우려에 대해 빌헬름 1세는 엄격한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만이 대내외 문제에 대처할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했다. 이제 군제 개혁은 단순한 군사적ㆍ기술적 범위를 넘어 '시민의 군대인가, 국왕의 군대인가'라는 제도 이념적인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게 되었다. 빌헬름 1세는 군제 개혁을 국왕의 통수권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18-9)


국왕과 의회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가운데 1862년 9월 24일 비스마르크는 임시 수상(interimistische ernennung zum preussischen ministerpräsidenten)으로 임명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2년 9월 30일 의회에서 "독일권이 주목하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권력이다. (중략) 오늘의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것이 1848년과 1849년의 잘못이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와 철(blut und eisen)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라는 것을 언급했던 것이다. 하원의 반대로 차기 연도 예산이 확정되지 못한 상황에서 비스마르크는 상하 양원의 불일치로 예산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헌법 규정이 없음을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하루라도 국가 통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점이론(Lückentheorie)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헌법적인 교착 상태가 초래될 경우 오직 국왕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입장도 밝혔다. 이후 그는 긴급권을 발동하여 예산 승인 없이 국가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


빈 정부가 독일 통합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비스마르크는 군사력 강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외교적인 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1865년 10월 나폴레옹 3세를 비밀리에 만나 형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의 중립을 약속받았고, 1866년 4월 8일에는 이탈리아 왕국과 3개월간의 한시적 군사 동맹 체제를 체결하여 오스트리아가 패배할 경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Venezia) 합병도 인정한다는 약속을 했다. 물론 러시아와의 친선 관계는 그가 1859년부터 약 3년간 페테르부르크에서 대사로 근무할 때 이미 구축된 상태였다. 1866년 6월 21일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군을 홀슈타인으로 출격시켜 형제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의 주력군은 프로이센의 후장총과 몰트케가 이용한 철도라는 획기적 이동 수단 때문에 패배했다. 이후로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배제되었다. 21-2)


독일 연방이 붕괴된 이후 독일권은 마인(Main) 강을 경계로 남북 두 개의 블록으로 나뉘었다. 비스마르크는 1866년 10월부터 마인 강 이북의 영방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연방 조직을 형성했다. 그것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작센, 하노버, 쿠어헤센, 그리고 나사우 등을 포함한 총 22개 영방으로 구성된 북독일 연방(Norddeutscher Bund)을 발족시켰다. 북독일 연방은 단순한 국가 연맹이었던 독일 연방과는 달리 중앙 권력을 갖춘 연방 국가의 성격을 가졌다. 마인 강 이남 지역에서 비스마르크는 남부 독일 국가들, 특히 바이에른, 바덴(Baden),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 그리고 헤센-다름슈타트(Hessen -Darmstadt) 등과 비밀 공수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3세의 야심에 대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1867년에 개편된 관세동맹을 통해 이들 국가들을 북독일 연방에 결속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내용적으로 보다 확대된 북독일 연방 및 프로이센이 군림하는 전 독일적 연방 국가의 원형이 창출되었다. 22-3)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독일 통합에 대해 부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현을 저지하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부 독일 국가들과 비밀리에 체결한 공수동맹(Schutzund Trutzbündnis)에 따라 이들 국가들로부터 군사적인 지원을 받았다. 아울러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중립도 약속받았다. 또한 그는 몰트케 장군에게 전쟁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고 그 결과 독일 연합군은 병력, 장비, 훈련 등에서 프랑스군을 압도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지 2개월도 안된 1870년 9월 4일, 나폴레옹 3세는 8만 6천 명의 프랑스군과 함께 스당(Sedan)에서 항복하고 강화를 제의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던 비스마르크는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1871년 1월 29일 파리를 함락시켰다. 같은 해 5월 10일 비스마르크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와 엘자스-로트링겐의 할양 및 50억 프랑의 배상금 지불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23-4)


내정에 대한 관심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Versailles)에서 탄생한 독일제국은 4왕국, 18공국, 3자유시 등 25개의 국가와 2제국령(엘자스-로트링겐)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방 체제는 이전의 독일 연방처럼 여러 국가의 집합체도 아니면서 완전한 중앙집권 국가라고도 볼 수 없는 모호한 정치 체제였다. 왜냐하면 바이에른, 작센, 뷔르템베르크, 바덴 등이 이전의 칭호 및 지위를 유지하면서 상원에 해당되는 연방의회(Bundesrat)에서도 압도적 의석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제국헌법에 의하면, 연방의회는 각국의 대표와 황제가 지명하는 60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입법권과 군사 및 외교상의 대권 등을 가져 그 권한이 막강했다. 그러나 의원들 중 17명은 황제가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연방의회의 권한은 실질적으로 황제권에 예속되었다. 이 당시 독일제국의 재상은 프로이센 수상도 겸임했다. 또한 그는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행정적 책임을 졌기 때문에 황제와 더불어 국정을 실질적으로 운영해 나갈 수 있었다. 25-6)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의 협력으로 군사예산 문제를 해결했지만 제국 창건 이후부터 급격히 성장한 반대파의 세력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여야만 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으로 부각된 것은 가톨릭계의 중앙당(Zentrumspartei)으로, 그 구성원들은 비스마르크의 통일 작업에 불신을 제기해 온 인물들이었다. 1870년 12월 라이헨스페르거(Reichensperger)의 주도로 창당된 이 당의 강령은, 국가로부터 교회의 제 권리를 지키고 각 영방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연방 체제의 도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되어 바이에른을 비롯한 남부 독일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 당의 핵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 및 가톨릭 주민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던 비스마르크는 로마교회에 굴복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의 행보를 인용하여 '카노사(canossa)에는 결코 가지 않겠다'고 장담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양보 정책을 펼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6-7)


1873년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경제 불황은 주가의 대폭락과 수많은 기업의 도산 및 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을 야기했다. 국민자유당의 지원하에 자유주의적 제 개혁을 시행함으로써 독일 경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구가했지만 장기간의 공황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이상은 이제 어려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국민자유당을 대신하여 보수당과 중앙당으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따라서 그는 지금까지 견지한 경제 정책의 근간을 포기하는 대신 새로운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즉, 그는 보호관세 제도를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부담금 역시 증액시켰던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이러한 정책적 변화는 자신과 국민자유당 사이의 균열을 가져왔지만 보수당과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점차 제국의 새로운 적으로 부상하고 있던 사회주의 추종 세력과의 대립에서 우위를 지켜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27-8)


비스마르크는 1878년 10월 21일 새로이 구성된 제국의회에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Gesetz gegen die gemeingefährlichen Bestrebungen der Sozialdemokratie)을 통과시켜 사회민주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가진 단체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그러한 활동은 형법적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당원들은 경찰의 감시까지 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은 2년간 한시적으로 시행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890년까지 갱신ㆍ유지되었다. 1881년 11월 비스마르크는 제국의회에서 사회 입법의 취지를 담은 황제 교서를 낭독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에서의 보호 및 부양 정책도 실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약 10년간 베를린 정부는 광범위한 사회복지 제도를 도입하는 데 적극성을 보였다. 자유주의 세력은 양분되었는데, 사회민주주의 탄압법 및 노동자 보호 입법에 반대했던 좌파와 달리, 우파 정치가들로 구성된 국민자유당은 사회 입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이다. 28-9)


실용적 외교 정책


1870년대 초부터 향후 약 20년 동안 비스마르크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시기를 '비스마르크 시대(Ära von Bismarck)'라고도 한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외교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현실정치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 통합 이후에는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신생국가 독일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43) 그러면서 비스마르크가 항상 고려했던 것이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복수전(revanchekrieg)이었다. 여기서 그는 프랑스가 독자적으로 독일을 공격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동맹국을 필요로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킬 경우 프랑스의 복수전은 실현될 수 없다는 확신하에 프랑스의 고립화를 독일 외교 정책의 가장 주요한 과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그는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수 있는 러시아를 프랑스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30)


1873년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결성했던 삼제동맹은 붕괴될 위험이 컸다. 왜냐하면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가 발칸 반도에서 충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러시아는 1887년 이 동맹 체제로부터 탈퇴했다. 여기서 비스마르크가 우려해 온 러시아와 프랑스의 접근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막기 위해 1887년 6월 18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j Ⅱ)와 '재보장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을 체결했는데, 거기에는 독일과 러시아 중 어느 한 국가가 제삼국과 전쟁을 할 경우 다른 국가는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보장조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상호 방위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조약은 독일의 우방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알 수 없게끔 비밀 조약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가 수상직에서 물러나면서 그의 복잡하고 위험한 동맹 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33-4)


실각의 과정


빌헬름 1세의 치세 말기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에 첫 번째 논쟁이 펼쳐졌다. 논쟁의 시발점은 유태인 및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졌던 슈퇴커(Stoeker)가 1878년 기독사회당(Christlich-Soziale Partei)을 창당한 것에서 찾아진다. 슈퇴커는 창당 이후부터 자신의 정당을 통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태인과 사회주의자들은 이질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배척당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사회적 안정과 평화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왕자 사이의 갈등을 유발시킨 주된 요인은 바로 이러한 슈퇴커의 조직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해 빌헬름이 공식적으로 동조했다는 것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그가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신민 간의 갈등을 유발시킬 수 있는 슈퇴커의 주장에 대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에 왕자가 동조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으려고 했다. 35-6)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갈등은 사회 정책에서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1889년 5월부터 루르(Ruhr) 지방과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에서 15만 명에 달하는 광부들이 파업을 전개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고용주들을 옹호한 반면, 황제는 순진하게도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당시 황제는 자신이 "가난한 계층의 황제(roi des gueux)"가 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비스마르크는 인기에 영합하는 빌헬름 2세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서도 양인은 견해를 달리했다. 빌헬름 2세는 탄압 위주의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을 전면적으로 개정하려고 했지만, 비스마르크는 의회에서 기존의 탄압법을 큰 수정 없이 그대로 연장시키려고 했다. 1890년 1월 25일 야당과 보수주의자들은 제국의회에서 비스마르크가 상정한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의 연장을 거부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로 하여금 사회민주주의 탄압법에 대한 황제의 관점을 명확히 파악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38)


빌헬름 2세는 1890년 3월 20일 비스마르크의 사직청원을 수용했다. 외양상 황제는 아쉬운 마음으로 비스마르크를 떠나보냈고, 악화된 건강 상태와 그에 따른 그의 청원이 해임의 주된 이유인 것처럼 행동했다. 1890년 3월 29일 비스마르크는 베를린의 레어테르(Lehrter) 역에서 프리드리히스루로 떠났다.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비스마르크의 해임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는데, 그의 해임으로 인해 유럽의 평화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외교 정책에서 힘의 행보를 항상 올바르게 판단했고,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정확히 인지했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서 그는 이러한 통찰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종종 부각되었던 중용 유지가 국내 정치에서는 거의 드러나지 못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국내의 정치 세력을 외교 정책에서의 힘의 게임과 동일시했기 때문에 국내 정치적인 상황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41-2)


은퇴 이후의 활동


빌헬름 2세는 「제국신문」에 정부 및 의회가 만장일치로 정한 비스마르크의 추도 기간 및 자신의 추도문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황제 시기에 이룩했던 업적들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저해하는 요소가 있을 경우 무력과 피를 통해 그것들을 제거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그런데 황제의 이러한 발언이 비스마르크를 잘못 이해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 같다. 또한 비스마르크를 칭송하는 문구들로 장식된 조형물들이 독일 전역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치가들 역시 빌헬름 2세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은 그들이 펼쳤던 정책에서도 확인되었다. 그들은 무력이란 방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아가디르(Agadir)로 군함 '판터(Panther)'를 출항시킨 것 자체가 바로 '비스마르크식 정치'라 생각했던 것이다.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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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전복자들 - 근대 과학혁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박재용 지음 / 사월의책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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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 


1장 그리스 자연철학 


# 이원론(현상계와 구분되는 본질적인 세계가 있다) : 아낙시만드로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 일원론(우리가 감각하는 현상계가 실재 세계이다) : 탈레스, 아낙시메네스, 헤라클레이토스, 데모크리토스, 엠페도클레스 


"데미우르고스는 선하고 지혜로운 존재이기에 가능한 한 이데아를 닮은 완벽한 우주를 만들고자 합니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창조는 불가능했고 변화무쌍하고 불완전한 현상계가 만들어지게 되었죠. 재료 즉 '질료'(코라, khôra)의 한계 때문이라 합니다. 여기서 질료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는 아니고, 공간 그 자체 혹은 받아들임(receptacle)이라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의 창조가 불완전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필연'(anánkê)이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이성적이고 목적론적인 활동 외에도 무작위적이고 비이성적인 힘, 즉 필연이 창조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필연은 논리적 필연성과 같은 의미보다는 강제성이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깝습니다. 이 필연은 우주의 질서에 저항하는 비합리적인 요소로, 플라톤이 완벽한 질서와 불완전한 현실 사이의 긴장 관계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죠. 이 필연이 창조의 결과를 왜곡시키고 불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38)


2장 아리스토텔레스가 본 세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주는 하나이자 둘이었습니다. 달보다 위쪽에 있는 천상계(celestial world)와 그 아래쪽의 지상계-월하계(terrestrial world)로 나뉘었지요. 그에 따르면 지상계는 물, 불, 흙, 공기라는 네 원소로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본이 되는 원소가 네 가지나 된다는 것은 각각의 원소가 어딘가 부족한 불완전한 요소라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불완전한 속성을 가진 원소로 구성된 지상계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천상계는 완전한 원소인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에테르는 지상의 4원소가 가진 모든 속성을 스스로 가진 존재로 완전한 질료입니다. 따라서 이런 질료에 의해 구성된 천상계는 완전한 모습을 가집니다. 에테르(Aither)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의 핵심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테르를 '제5원소' 또는 '첫 번째 물질'(Prime Matter)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에테르가 지상계를 구성하는 4원소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가진 실체임을 의미합니다."(67-8)


"『천체에 관하여』(De Caelo) 제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천체의 운동은 균일하고 끊임없는 원운동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물질(에테르)의 본성이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첫 번째 천체'란 항성천구, 즉 우주의 가장 바깥 경계를 이루는 천구를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항성천구의 원운동이 다른 모든 천체의 운동을 규정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천체들은 모두 항성천구에 고정되어 함께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천체의 일차적 운동은 모두 완전한 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들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부차적 운동'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이는 기본적인 원운동에 추가되는 보조적인 운동으로, 행성마다 고유한 속도와 방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차적 운동 역시 근본적으로는 원운동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합니다."(69)


"하지만 불완전한 원소로 이루어진 지상계에서는 원운동이 불가합니다. 물과 흙의 속성을 많이 가진 물질은 아래로 내려가는 낙하 운동을 하고, 불과 공기의 속성을 가진 물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합니다. 이런 수직운동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죠."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지구가 중심에 위치하고, 그 주위를 여러 천체가 감싸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중심에서 정지해 있는 것이 바로 지구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구는 물로 둘러싸여 있고, 물은 공기로, 공기는 불로, 그리고 이들은 같은 방식으로 천체들에 둘러싸여 있다.〉 (『천체론』, 제2권, 제4장) 이는 지구중심적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구성하는 것은 무거운 원소인 땅(흙)입니다. 지구 주위에는 물, 공기, 불이 층을 이루며 둘러싸고 있습니다. 물은 땅 바로 위에, 공기는 물 위에, 불은 공기 위에 위치합니다. 지상계를 넘어서면 천상계가 시작됩니다."(71-2)


# 『천체에 관하여』(De Caelo)가 원제목이며, 간단히 『천체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창조주는 관조의 신이었습니다. 올림포스의 신들은 그저 미신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의 창조주는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전 우주의 운동의 제1원인이자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동자는 완벽히 아름답고 불가분하며 완벽한 '관조'만을 '관조'하는 자라고 하지요. 즉 이 세상이 자신이 창조한 원리대로 움직이도록 하되, 개입하지는 않는 자입니다. 그러니 '기적'은 당치도 않는 행위지요. 창조자가 스스로 정한 원칙을 깨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원격으로 작용합니다. 제우스가 올림포스 산에서 벼락을 내리치듯이 말이지요. 그로서는 접촉 원리를 벗어난 일이 실제 세상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주장은 훗날 중세에서 르네승스로 넘어가는 시기 유럽에서 대학과 수도원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80)


# 접촉 원리 : 지상계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힘은 접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는 원리.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3장 지구중심설 대 태양중심설 


"문명세계 최초로 지구중심설(geocentrism)을 부정한 이들은 피타고라스학파입니다. 이들은 거의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볼 만한 생각을 가진 최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우주의 중심에 거대한 불타는 구, 이른바 '헤스티아의 불'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스티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정과 화덕의 불을 관장하는 여신으로, 불의 수호자이자 가정의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였죠. 그들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한 불에 헤스티아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그들이 이 불을 단순한 물리적 실체 이상의 것, 즉 우주 만물을 품고 길러내는 근원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겼음을 시사합니다." "사실 피타고라스학파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천체들의 역행운동처럼 당대의 천문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문제를 해결하고, 그들이 맹신했던 기하학적 원리와 수의 조화를 우주에 투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짐작합니다."(98-100)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말 그대로 천문학자로서, 피타고라스학파의 신비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과학적 견지에서 지구중심설 대신 태양중심설을 주장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른 천문학자들과 자연철학자들 대다수는 반대합니다. 반대의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 위에 있는 우리는 왜 그 힘(원심력)을 느낄 수 없는가라는 점입니다(지구 공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지구가 공전하거나 자전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원심력이 중력에 비해 워낙 작아서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별의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주시차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입니다. 별이 너무 멀어서 시차 자체가 너무 작아 볼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이고,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아리스타르코스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지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요."(101-5)


# 별의 연주시차(年周視差) :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는 반년마다 반대쪽 끝에 도달한다. 두 지점에서 별을 보았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각도의 차이를 연주시차라고 한다.


"히파르코스는 기원전 2세기경에 로도스 섬에 천문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주로 활동한 그리스 천문학자로, 천체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천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별의 위치와 밝기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삼각법과 구면삼각법을 활용하여 천체의 운동을 정밀하게 계산하는 등 고대 천문학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여러 업적은 당시 지중해 사람들에게 대단히 인상적이었지요. 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쓴 『알마게스트』('천문학 집대성') 내용의 거의 삼분의 일 정도가 히파르코스가 발견하고 정리한 내용들로 채워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우주의 중심에 대한 히파르코스의 입장이 대단히 아리송합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제자로 알려졌지만 딱히 태양중심설을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구중심설을 확고하게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스승의 주장이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에게 외면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해 볼 뿐입니다)."(110, 113)


"프톨레마이오스는 역행운동과 같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주전원(周轉圓, epicycle), 이심(離心, eccentric point) 등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각 행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한 큰 원(주원)을 따라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원 위의 한 점을 중심으로 하는 작은 원(주전원)을 따라 공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전원의 중심이 주원을 따라 움직이는 거죠. 이심은 행성 궤도(주원)의 중심이 지구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는 행성의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걸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문제는 이렇게 해도 행성 궤도의 실제 관측결과와 잘 맞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다시 대심(對心, Equant)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대심은 이심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장소인데, 행성의 주전원이 이 점을 중심으로 놓았을 때 일정한 속도로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한 거죠. 그의 우주 모델은 매우 복잡하지만, 당시 이론 중에서는 관측 결과와 가장 닮았기에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116-8)


제2부 소멸, 복권, 균열 


4장 헬레니즘 시대 


"헤르메스주의(Hermeticism)는 그리스에서 상업, 여행, 전령의 신이자 정보와 의미를 관장하던 신인 헤르메스가 이집트의 신 토트(Thoth)와 동일시되면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토스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탄생시킨 데서 비롯됩니다. 점성술, 연금술, 마법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진 이 반신적 인물에 대한 종교철학적 숭배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던 거죠." "특히 그노시스주의는 헤르메스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영지주의'(靈智主義)라고 번역되는 이 사상은 기원후 1~2세기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유행한 종교 사상입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여 이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겁니다. 헤르메스주의는 인간을 신적 본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연의 신비를 깨우치고 이를 자신의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미시적 우주(microcosmos)로 여깁니다."(126-8)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수용 발전시켰는데, 그에 따르면 우주는 원자(atom)와 공허(void)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물질 입자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자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것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해 모든 사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고 보았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운동에 대해 특히 주목했는데, 그는 원자들이 자유 낙하하듯 수직으로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아래는 우주의 중심을 뜻합니다. 이때 원자들은 모두 동일한 속도로 평행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에 중요 개념을 하나 추가하는데, 바로 '클리나멘'(clinamen, 라틴어로 기울어짐, 편향, 휘어짐)입니다. 이는 원자가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미세하게 궤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원자 충돌은 상당히 우연한 경향이 있어 결정론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129-30)


#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 무수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일종의 다중우주론도 제시했다.


"'판단중지'(에포케, epoche)로 잘 알려진 피론주의는 기원전 4~3세기경 엘리스의 피론(Pyrrhon)에 의해 체계화된 회의주의 철학입니다. 피론은 감각과 이성으로는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꿀이 어떤 이에게는 달게 느껴지지만 다른 이에게는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감각은 주관적이며 상황 의존적이라는 것이죠. 또한 이성으로도 사물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같은 대상에 대해 철학자들 사이에서조차 상반된 주장이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리라고 여기는 것들도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게 피론의 생각입니다." "피론은 여기서 더 나아가 판단중지 즉 '에포케'야말로 인간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지름길이라 역설했습니다. 피론에게 에포케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평온한 삶을 위한 실천적 방법이었던 거죠.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을 유보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적 믿음에서 벗어나 진정한 마음의 평화인 아타락시아(ataraxia)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적 윤리관이었습니다."(133-4)


5장 이슬람으로 간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수학은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등의 업적으로 대표됩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기하학의 체계를 세웠고, 아르키메데스는 원주율 계산과 적분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아폴로니우스는 원뿔 곡선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인도 수학자들은 십진법과 0의 개념을 발전시켰고, 음수를 도입했으며, 방정식 해법에서도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이 두 전통을 수용하고 종합하여 새로운 발전을 이룹니다." "이슬람 학자들은 관측천문학 분야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천체 관측을 위한 다양한 기기를 발명하고 개선했을 뿐만 아니라, 정밀한 관측 기록을 남기고 새로운 천문 현상을 발견합니다." "이슬람 천문학자들은 관측 결과와 프톨레마이오스 이론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적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지구중심설을 유지한 상태로는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죠."(147, 150-1)


"아리스토텔레스는 투사체가 계속 움직이는 이유를 주변 공기의 작용으로 설명했지만, 이븐 시나(Ibn Sina)는 이러한 설명이 논리적으로 모순된다고 봅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 공기는 투사체를 앞으로 밀어주는 동시에 저항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븐 시나는 같은 매질이 이렇게 상반된 작용을 동시에 한다는 것이 모순된다고 봅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대로라면 투사체의 속도는 급격히 감소해야 하는데, 실제 관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이븐 바자(Ibn Bajjah)는 물체의 낙하 운동을 연구하여, 운동의 속도와 시간, 거리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분석합니다. 그는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가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정 속도 낙하 이론과 대비되는 중요한 관찰입니다. 이븐 바자는 비록 정확한 수학적 공식을 도출하지는 못했지만, 낙하 거리가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분석을 시도합니다."(153, 156)


"플라톤과 유클리드가 주장한 '방출설'은 눈에서 광선이 나와 물체에 닿아 시각이 형성된다고 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의 '형상'이 매질을 통해 눈으로 전달된다고 주장합니다. 알 하이삼은 이러한 기존 이론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눈으로 들어와 시각을 일으킨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여러 가지 관찰과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합니다." "알 하이삼의 광선유입설은 빛을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로 보고, 눈을 빛을 수용하는 정교한 광학 기관으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는 이후 렌즈와 망원경 발명 등 광학 기술 발전의 토대가 됩니다. 그의 책 『광학 서설』은 13세기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 전해졌고, 로저 베이컨, 비텔로, 케플러 등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당시에는 『광학 서설』이 일종의 교과서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이 책은 원근법 연구에도 영향을 주어 르네상스 미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157-9)


6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복권에서 균열까지 


"12세기부터 아랍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들어오면서 유럽 지성계는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특히 대학들부터 먼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수업의 중심으로 삼았죠." "왜 대학들은 교회와 여러 번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와 수업의 중심으로 삼게 된 걸까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논리학,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를 모두 다루면서도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또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쉽게 말해서 강의용 교재로는 그만이었죠. 특히 『논리학』이 그러합니다. 대학 교육에 딱 맞았습니다. 이런 이유에다 시간이 지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대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융합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고 신학의 주류가 되면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필수가 된 점도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우는 건 신학 연구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었죠."(178-80)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업의 중심이 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먼저, 학문이 더 세속적으로 변합니다. 이전 수도원 학교나 초기 대학에서는 대부분 신학이 중심이자 대부분이었죠. 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도 커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강조하고, 논리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요. 이런 태도 때문에 대학에서도 계시나 권위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철학도 독립했지요. 원래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불리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들어오면서 철학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자리 잡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육 방식도 바뀝니다. 이전에는 성경과 교부들의 책을 암기하고 반복하는 방식과 강의가 주된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글에 대한 주석을 학습하는 것이 추가되었죠. 하지만 이제 책을 같이 읽고 해석하는 강독과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 그리고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가 주된 교육 방법이 됩니다."(180-1)


"르네상스가 본격화하면서 일어난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는 중세의 전성기 혹은 번역 르네상스 시기 이래로 유럽 지성계를 지배하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먼저 그리스어 원전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학자들은 중세 시대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원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이는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죠. 인문주의 운동의 확산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4세기 페트라르카를 시작으로, 15세기의 로렌초 발라, 그리고 16세기 초의 에라스무스는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수사학적 분석을 강조했습니다." "16세기 들어 항해술, 광산업, 농업 등 실제 경험에 기초한 지식이 중요해지면서, 순수하게 이론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죠. 17세기에 이르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등장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과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제시가 이루어집니다."(184-5)


제3부 과학혁명 


7장 새로운 철학, 새로운 방법론 


"프랜시스 베이컨이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설명하기보다는 선험적 관념에 끼워 맞추는 오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는 중세 스콜라철학이 빠졌던 함정이기도 했습니다. 경험과 실험보다는 권위자의 텍스트에 의존하고, 자연의 모습보다는 신의 섭리를 입증하는 데 골몰했던 것입니다. 반면 베이컨은 물체나 생명체의 작동 방식을 꼼꼼히 관찰하고 실험하며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귀납적으로 도출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자연의 '목적'이 아니라 '기제'(mechanism)를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근대 실험과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이컨의 『노붐 오르가눔』(Novum Organum)은 제목부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일종의 도발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작들을 『오르가논』이라 부르는데, 여기에 '새로운'이란 뜻의 '노붐'을 붙인 거죠. 베이컨은 이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고와 연역법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206-7)


"데카르트는 자연을 하나의 기계로 봅니다. 〈이 우주 즉 물질적 실체를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다〉는 그의 말은 당시 떠오르던 기계론적 세계관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체계적인 방법론을 개발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가 창안한 해석기하학입니다. 해석기하학은 기하학적 문제를 대수학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하나의 연구 방향을 제시합니다. 자연을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갈릴레오, 뉴턴 등 동시대 과학자들의 연구와 맥을 같이 합니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우주관과 일정 부분 연관성을 가집니다. 수학에서는 데카르트의 해석기하학이 주목할 만한 발전을 가져옵니다. 기하학과 대수학을 연결함으로써 그는 새로운 수학적 도구를 만들어내고, 이는 후에 미적분학 발전의 한 토대가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좌표계도 데카르트가 제안한 것입니다."(214-6)


"스피노자에 따르면,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이 실체가 바로 신 또는 자연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정신과 물질을 별개의 실체로 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의 서로 다른 속성으로 파악합니다." "그의 일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의 통일성과 법칙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과학자들이 자연현상 이면의 보편적 원리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세계관에 따르면 모든 사건은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연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는 자연현상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적 접근방식과 맥을 같이 합니다." "스피노자의 합리주의적 윤리학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자연의 필연적 질서를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스피노자의 사상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계승이자 독자적인 발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216-7)


8장 천문학 혁명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성과 비일관성에 불만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해결하려고 새로운 체계를 고안합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를 완전히 뜯어고치지는 않습니다. 천구도 그대로 있고, 행성과 지구가 천구에 고정되어 도는 것도 그대로입니다. 단 하나 태양과 지구의 위치만 바뀌었습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것은 결국 '기하학적으로 우아한 우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지상 명제 '원으로 현상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던 것뿐이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양과 지구를 맞바꾸는 것만으로 행성 궤도를 완전히 원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애초에 행성들이 원 궤도를 돌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는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체계에 있던 이심과 주전원 개념을 그대로 도입합니다. 모두 원운동을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복잡함을 비판한 그였지만, 코페르니쿠스 체계 역시 여전히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221-2)


"1587년 튀코 브라헤는 『새로운 천문학 입문』을 펴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를 중심에 두고 다른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독특한 우주 모델을 제안했습니다. 이 모델은 당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과 전통적인 지구중심설 사이의 타협안으로 여겨졌으며, 관측 데이터와도 잘 맞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별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주관에 또 하나의 깊고 굵은 상처를 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우주에는 어떠한 새로운 천체도 생길 수 없고, 존재하는 무엇도 사라지지 않아야 하는데, 그는 단 하나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별이 생겼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게 14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기록해서 내밀었지요. 마찬가지로 혜성의 발견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커다란 구멍을 냅니다. 혜성이 행성들 사이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발견은 천구(Celestial spheres)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행성들의 역행도 견디기 힘든데 그보다 더 괴상한 궤도를 도는 녀석이 우주에 있었던 거죠."(224-6)


"요하네스 케플러는 태양중심설의 지지자였습니다. 애초에 튀코의 모델이든 프톨레마이오스의 모델이든 지구중심설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지요. 태양을 중심으로 튀코의 관측 자료를 원운동 궤도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겨우 관측 결과와 가장 유사한 모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지만 케플러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지요. 평균적으로 '2분'의 범위 내에 일치하는 모델이기는 했습니다만 특정 지점에서 8분의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8분의 오차. 원을 360등분한 것 중의 하나가 1도이고 그 1도를 다시 60등분한 것 중에 8에 해당하는 오차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믿음과 관측 결과가 다를 때 무엇을 따를 것인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케플러는 관측 결과를 따랐지요. 자신이 온전히 믿고 있던 우아한 기하학의 우주, 그 근본이 되는 원 궤도를 스스로 부정하고 타원 궤도를 도입합니다. 케플러의 제1법칙입니다. '행성은 태양을 그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 궤도를 돈다.'"(229-30)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금의 쌍안경보다 못한 망원경으로 금성의 위상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관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하늘을 봤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서는 금성은 항상 태양의 앞쪽에서 지구 주위를 돕니다. 그럴 경우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의 모습은 항상 반달보다 더 얇은 모습일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금성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지구에서 봤을 때 태양 뒤쪽에 있는 금성이 보름달 모양으로 동그란 걸 볼 수 있습니다. 지동설의 결정적 증거지요." "그에 비해 목성의 위성 네 개를 발견한 것은 일종의 우연과 목적의식이 겹친 일일 것입니다. 지동설을 확고히 하기 위해 금성의 위상변화와 함께 역행운동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찰하기 좋은 행성이 목성과 화성이지요. 그가 목성의 위성을 발견한 것은 아마 목성의 역행 운동을 관찰하기 위해 매일 그 주변을 살피다 일어난 일이겠지요."(237-9)


9장 역학 혁명 


"갈릴레오는 최초로 '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오의 관성은 지금 우리가 배우는 관성과는 좀 달랐습니다. 갈릴레오에게 관성운동이란 등속 원운동입니다. 즉 움직이는 물체는 외부의 작용이 없으면 계속 등속 원운동을 한다는 뜻이지요. 갈릴레오에게는 (직선운동이 아니라) 등속 원운동이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천체가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비단 아리스토텔레스만의 주장이 아니었죠. 플라톤도 그렇게 말했고, 히파르코스도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지 않는다고 한 이가 없을 정도지요. 그러니 갈릴레오에게도 하늘의 천체가 원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운동이 천체에 내재된 속성이라는 점도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요. 따라서 갈릴레오에게는 하늘의 기본적 속성인 원운동이 지상에서도 구현된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255-6)


"그런데 사고실험이라든가 포물선에서 설명하는 것은 모두 직선인데 무슨 원운동이냐는 의문을 가질 법합니다. 갈릴레오에게 직선은 원의 근사적 표현일 뿐입니다. 갈릴레오가 생각할 때 이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지구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큰 구(sphere)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는 태양중심설의 중요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문제제기이지요. 만약 지구가 태양 주위를 원 궤도로 돈다면 왜 우리는 원심력을 느끼지 못하느냐는 첫 번째 문제와, 왜 지구가 원 궤도를 도는데 우리는 지구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느냐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겁니다.(첫 번째 문제는 8장에서 다룬 연주시차입니다.) 하늘의 천체처럼 그리고 지구처럼 우리도 모두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한 번 시작된 원운동을 계속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처럼 고대 때부터 이어진 태양중심설에 대한 지구중심론자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하나를 무력화시킨 것입니다."(257-8)


"상대성 원리의 개념을 처음 떠올린 사람도 갈릴레오입니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저서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대한 대화』에서 '절대적인 운동'이라는 개념을 버리고, 모든 운동을 '상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구라는 절대적인 운동의 기준에 따른 우리 일상의 직관과는 다르지만, 우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갈릴레오는 배 안에서의 물체의 운동에 대한 사고실험을 통해, 배가 정지해 있을 때나 등속으로 움직일 때나 물체의 운동은 차이가 없음을 보여 주었지요. 즉 배 안에서 공을 떨어뜨리면 배의 운동 상태와 무관하게 공은 배 안의 똑같은 지점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고실험들은 운동의 상대성이라는 혁명적 개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레오는 이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할 수 있었지요. 지구가 움직인다 하더라도 지구상에서의 물체의 운동은 지구가 정지해 있다고 가정했을 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266-7)


10장 뉴턴 


"뉴턴은 케플러의 법칙이 암시하는 바를 물리학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행성이 타원 궤도를 따라 운동하고 태양에 가까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 행성이 태양으로부터 끌어당기는 힘을 받기 때문이라고 보았죠. 뉴턴은 이 힘을 만유인력, 즉 질량을 가진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이라고 가정했습니다. 다음으로 갈릴레오가 중력을 지구 중심을 향한 힘으로 본 반면, 뉴턴은 중력을 모든 질량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일반화했죠." "뉴턴은 미적분학을 사용하여 만유인력에 의한 물체의 운동 방정식을 유도했죠. 이 방정식으로부터 그는 케플러의 세 법칙을 모두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혜성의 운동, 조석 현상 등 다양한 천문 현상을 만유인력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이전까지의 행성 운동 이론을 종합하고 극복한, 보편적인 역학 법칙을 확립했습니다. 또한 만유인력 이론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자유낙하운동이나 경사면 운동, 포물선 운동에도 적용됩니다."(275-6)


"뉴턴은 데카르트의 관성 직선운동 개념을 받아들여 이를 운동 제1법칙으로 정립했습니다. 관성의 법칙인 뉴턴 제1법칙에 따르면, 물체는 외부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등속 직선운동을 유지합니다. 다음으로, 뉴턴은 갈릴레오의 낙하 운동 연구를 발전시켜 가속도의 법칙인 운동 제2법칙을 도출했습니다. 그는 물체의 가속도가 힘에 비례하고 질량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정식화했죠. 이는 힘과 운동의 관게를 정량적으로 규명한 획기적 성과입니다. 또한 뉴턴은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운동 제3법칙을 통해, 물체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역학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는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을 밝혔죠. 이는 데카르트와 하위헌스의 충돌 연구를 일반화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뉴턴은 자신의 운동 법칙을 바탕으로 이전까지 개별적으로 연구되던 역학의 여러 분야를 하나의 통합된 체계 속에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280-1)


"뉴턴의 역학 이론은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절대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며, 외부의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절대 공간은 그 안에 존재하는 물체와 무관하게 항상 동일하고 부동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시간을 사건들의 연속 순서로 이해했습니다. 그에게 시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공간 역시 라이프니츠에게는 관계적 개념입니다. 그는 공간이 물체들 사이의 상대적 위치 관계로 정의된다고 보았습니다." "라이프니츠의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고실험이 있습니다. 우주에 단 하나의 물체만 있다면 그 물체의 위치나 운동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위치와 운동은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9세기 말 에른스트 마흐의 사상에서 시작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이어집니다."(290-2)


11장 데모크리토스의 후예들 


"진공은 예로부터 불신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은 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부정하여 물질과 물질 사이에 진공을 두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신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진공이었지요. 그들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보다 더 많은 진공으로 에워싸인 곳입니다." "토리첼리는 수은이 담긴 유리관의 모양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실험을 하지요. 여러 다양한 실험을 통해 토리첼리는 관 속의 수은이 밑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은 그릇의 수은을 누르고 있는 공기의 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더불어 유리관의 위쪽 수은이 빠져나간 곳은 진공이 되었다는 것도 알았지요. 그러나 토리첼리는 갈릴레오의 예상만큼 명민했기에 자신이 한 실험이 미칠 파장도 예상했습니다. 그는 아주 친한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입을 다뭅니다. 일찍이 조르다노 브루노가, 그리고 스승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교황청과 싸워 어떠한 결과를 얻었는지 알고 있던 그였으니까요."(296-8)


"갈릴레오의 진공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사람은 아일랜드 백작의 아들 보일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첼리가 자신의 발견을 숨긴 것과 달리 보일은 적극적이었습니다. 물론 로마로부터의 거리도 멀고 종교도 다르니 별다른 두려움도 없었겠지요. 그는 새로운 진공펌프를 이용해 진공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고부동하게 입증합니다. 그는 나아가 진공 상태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못하지만 빛은 진공을 뚫고 진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하지요. 이제 진공은 더 이상 불신자의 단어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보일은 연금술(Alchymist)의 전통과 결별하고 회의하는 과학으로서의 화학(Chymist)을 선언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도, 파라켈수스가 제안한 3요소(유황, 수은, 소금)도 거부합니다. 그는 세상 만물이 더 이상 다른 물질로 분해되지 않는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혼합물과 달리 화합물은 원소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299-300)


"19세기 후반, 열역학의 발전과 함께 원자론을 둘러싼 논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열역학과 원자론을 결합하여 통계역학을 정립했습니다. 볼츠만의 접근은 물질이 원자나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원자론적 가정을 전제로 합니다. 아직 물리학자들에게 원자론이 수용되기 전이었기에 당시로은 대담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 분자 운동론을 발전시키면서 열역학 법칙을 통계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기체를 수많은 분자의 집합으로 보고, 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해 온도, 압력, 엔트로피 등 열역학적 물리량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볼츠만의 스승이었던 에른스트 마흐는 원자론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마흐는 과학적 지식이란 오로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어야 한다는 실증주의 철학을 견지했습니다. 그에게 원자와 분자는 직접 관찰할 수 없는 존재였기에 과학 이론의 기초가 될 수 없었습니다."(313-4)


12장 생물학 혁명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첫 번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에 나타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박물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집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적 유산이 재발견되고, 신대륙 탐험을 통해 신기한 동식물들이 속속 유입되면서 이를 연구할 필요가 생긴 거죠." "16~17세기를 거치며 방대한 자료가 축적되면서 점차 분류의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기 박물학의 발전은 전통적인 종 개념에도 변화를 가져왔죠. 신대륙의 생물들은 기존의 분류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예를 들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주머니쥐나 아르마딜로는 유럽의 분류 체계에 맞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화석 연구는 멸종한 생물들의 존재를 알려줍니다. 조르주 퀴비에가 발견한 매머드나 마스토돈 화석은 현존하지 않는 생물의 증거였습니다. 이는 곧 종이 불변하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했죠."(319-21)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 의학의 오류를 하나둘씩 발견해 나갑니다. 가령 갈레노스는 심장에 구멍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베살리우스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혀냅니다. 개, 원숭이 등의 동물 해부를 통해 축적한 지식을 인체에 그대로 적용한 갈레노스의 한계를 정확히 지적한 거죠. 1543년, 베살리우스는 이런 연구를 바탕으로 『인체 구조에 관하여』를 출간합니다." "갈레노스는 혈액순환에 대해 간에서 만들어진 혈액이 온몸으로 퍼져 조직에 흡수된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는 이에 의문을 품습니다. 그가 보기에 갈레노스의 이론대로라면 매일 만들어야 할 혈액량이 너무 많았던 거죠. 하비는 동물 해부 실험을 통해 혈액순환의 실마리를 풀어갑니다. 개구리, 뱀, 물고기 등 다양한 동물의 심장을 관찰했는데, 심장이 규칙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혈액을 내보내고 받아들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1628년 하비는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를 출간합니다."(322-5)


"과학혁명 시기 새로 등장한 도구 중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망원경과 현미경이라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미경이 생물학 연구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건 1660년대입니다. 영국의 로버트 훅이 복합 현미경을 개발하면서부터죠. 훅은 코르크 조직을 관찰하다 벌집 모양의 작은 방들을 발견했는데, 이를 '셀'(cell)이라 명명합니다." "네덜란드의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은 매우 정교한 단렌즈 현미경을 제작했는데, 무려 300배에 이르는 배율을 자랑했죠. 1674년, 레이우엔훅은 연못물과 침 등에서 작은 '애니멀큘레스'(animalcules)가 꿈틀거리는 것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죠. 하지만 관찰을 거듭하며 미생물이 엄연한 생명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훅의 세포 발견은 생명의 기본 단위가 무엇인지를 밝혀줬고, 레이우엔훅의 미생물 발견은 자연발생설을 무너뜨리는 강력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현미경에 의한 생물학 혁명의 시작에 불과합니다."(326-7)


맺는 글: 과학혁명과 근대 과학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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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역사 - 우리의 생각,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게 된 경로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 지음, 홍정인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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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내가 〈아이디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바는 생각이고 그것은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생각은 경험을 능가하며 단순한 예측보다 탁월하다. 아이디어는 평범한 생각과 다르지만, 이는 그것이 그저 새로운 것이어서만이 아니라 예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을 보는 일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는 아이디어는 환영이나 영감의 형태를 띨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정신적 '환각'이나 머릿속의 음악(가사가 없거나 가사가 붙기 전까지의 음악)과는 다르다. 아이디어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모델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부제에는 〈우리의 생각(What We Think)〉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과거에 시작된 아이디어 중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각되는 것만을 가리킨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거나 우리 시대에 새로 등장한 문제에 대처하도록 우리가 물려받은 정신적 무기고라는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지혜 또는 우몽의 배경을 이룬다."(8-9)


제1장 물질에서 나온 정신: 아이디어의 주요 원천


"인간 사유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용어는 아마도 '상상력'─판타지아, 혁신성, 창조성, 오래된 생각을 새롭게 다듬는 능력, 새로운 생각을 발생시키는 능력, 영감과 황홀경의 모든 결실─일 것이다. 상상력은 크고 거창한 단어이지만, 이는 결국 우리가 쉽게 이해하는 한 가지 현실에 해당한다. 상상력이란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극도로 상상력이 풍부하게 만들까? 나는 상상력의 구성요소로 세 가지 능력을 제시한다. 첫번째는 기억력이다. 기억력은 우리가 발명을 위해 사용하는 정신 능력 중 하나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만들 때 언제나 이전에 생각했거나 만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대부분 기억이 그대로 유지되기를, 그러니까 기억이 정확하고 실제 과거에 충실하며 미래를 위한 토대로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상력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나쁜 기억력이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 같다."(40-2)


"인간의 비효율적인 기억력은 기억력과 상상력의 차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차이는 어떤 경우든 그리 크지 않다.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기억력도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감각할 수 없는 것을 보는 능력이다. 앞서 정의된 것처럼 상상력이 실제로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을 보는 힘이라면, 기억력은 거기에 더는 있지 않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기억력은 특수한 형태의 상상력이다. 기억력은 사실과 사건의 표상을 형성함으로써 작동한다. 이것은 상상력이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삶은 상식(common sense)을 왜곡한다. 현실에서 기억과 상상은 융합한다. 그런데 기억은 허위일 때 상상력과 가장 가깝다. 기억의 창조적인 힘은 회상을 왜곡하는 데 있다. 거짓 기억은 현실을 환상으로, 경험을 추측으로 재구성한다. 우리는 오래된 일을 잘못 기억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셈이다. 우리는 과거를 결코 일어나지 않은 일과 뒤섞고 난도질한다. 그렇지 않다면 삶은 견딜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51-2)


"상상력은 예측력 이상의 능력이다. 상상력은, 부분적으로는, 예측력의 과잉으로 빚어진 결과다. 일단 우리가 적이나 먹잇감, 문제, 결과 따위를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개연성이 더 적은 대상,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았거나 눈에 보이지 않거나 형이상학적이거나 불가능한 어떤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새로운 종, 과거에 먹어보지 않은 음식,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음악, 환상적인 이야기, 새로운 색깔, 괴물, 요정, 무한대보다도 거대한 어떤 수, 신 등을 말이다. 우리는 심지어 '무(無)'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는 아마도 상상력이 이루어낸 가장 대담한 도약이었을 것이다." "상상력은 예측력과 기억력이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상상력은 진화의 일반적인 결과물들과 달리 생존 요구를 넘어서고 우리에게 어떤 경쟁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문화는 상상력에 보상을 제공하고 그 지위를 드높임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한다."(62-3)


"기억력·예측력과 더불어 언어는 상상력의 마지막 재료다. 내가 여기서 '언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상징체계다. 언어는 몸짓과 발화의 합의된 패턴이나 기호의 체계다. 이 몸짓과 발화는 실제 대상과 명백한 유사성을 반드시 띠지는 않는다." "현재 우리가 가진 증거에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우리의 아이디어를 표현하기 위해 단어를 고안한 경우가 그 반대 경우보다 더 많다." "당연히 일단 우리가 상징의 레퍼토리를 갖게 되면 상징이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자유롭고 풍성하다. 그리고 상징이 많을수록 결과도 더욱 풍부해진다. 언어(또는 모든 상징체계)와 상상력은 서로에게 양분을 제공한다." "언어가 사용하는 기호는 대부분 임의적이고 실제 대상과 유사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해를 빚을 가능성은 증가한다. 오해는 유익할 수 있다. 흔히 새로운 아이디어는 오래된 아이디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언어는 성공적인 의사소통 못지않게 왜곡과 재앙을 통해 아이디어의 형성과 혁신의 흐름에 이바지한다."(64-8)


제2장 생각을 채집하다: 농경 이전의 사고


"유물론은 세계를 보는 가장 오래된 방식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호미닌 조상들은 필시 유물론자였다.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은 물리적인 것이었다. 망막에 맺힌 인상들이 그들이 가진 최초의 생각들이었다. 그들의 감정은 사지의 떨림과 장기의 동요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표면은 안에 있는 것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5세기 말 압데라의 데모크리토스가 말했듯 〈진실은 심층에 있다.〉 경험들을 비교하고 그로부터 추론을 끌어내는 데 관심이 있는 생물체는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과 상충된다는 것, 감각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식을 축적한다는 것, 우리는 결코 가상(假像, semblance)의 끝에 도달했다고 가정할 수 없음을 알아챌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꼭 감각만을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아이디어는 만능키 아이디어였다. 그것은 정신 세계로 가는 열쇠였다. 이 아이디어는 무한한 사변의 파노라마를 열어젖혔다. 나중에는 종교와 철학이 이 사상의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106-8)


"똑같이 오래되었고 광범위한 인류학 문헌에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이디어는 모든 사물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아이디어다. 이 개념은 가령 '무엇이 하늘을 푸르게 만들고, 물을 습하게 만드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따라 나온다. 푸름은 하늘의 본질적 속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늘은 색깔이 바뀐다고 해서 하늘이기를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습함은 어떨까? 이것은 다른 문제 같다. 마른 물은 물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습함은 물의 본질적 속성이다. 어쩌면 모든 속성의 기저에 단일한 실체가 자리해 있어 이 의견상의 충돌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그러한 질문을 계속 한다면 당신은 관련된 대상의 본성에 관한 심층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는 셈이다. 우리가 만일 인류학적 증거에 기댈 수 있다면, 가장 오래된 대답 중 하나는 보이지 않고 보편적인 동일한 힘이 모든 것의 본성을 설명하고 모든 활동이 실행되게 한다는 것이었다."(116)


"자연을 무척 친밀하게 알고 있었던 초기 인간들은 자연에서는 모든 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이든 체계적인 것은 어느 일부분을 통제함으로써 조작이 가능하다. 이렇듯 자연을 조작하려는 노력 중에서도 주술은 가장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방법이다." "주술과 과학은 같은 선상에 있다. 양자 모두 자연을 지성으로 지배해 인간의 통제하에 두려고 한다. 주술 아이디어는 두 가지의 뚜렷하게 다른 생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는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정신으로는 그려낼 수 있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끌어낼 수 있다. 둘째, 정신은 이러한 원인을 불러내어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접근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을 장악할 힘을 획득한다. 주술은 진정 강력하다. 지금도 주술은 자연의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인간에게만큼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모든 사회에서 되풀이해 나타난다. 숱한 실망들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었다."(118-9)


"일단 코스모스적 질서에 대한 감각이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에 관한 초기 개념에 영감을 주었다고 잠정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 자연은 언뜻 카오스 즉 무질서한 상태로 보이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면 그 아래나 내부에는 세계를 지탱하는 질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 질서가 보편적이라는 추론에 도달하려면 커다란 정신적 도약이 필요하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는 너무나 오래된 것이어서 생성 연대를 추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단 이 아이디어가 생기자 우주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바뀌었다. 질서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된 정신들은 세계 전체를 단일한 체계 안에 그려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치에서 질서는 각기 다른 사람에게 각기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사회를 규제하기 위한─사람들의 행동을 어떤 모범이나 양식에 맞추기 위한─모든 노력에서 질서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아주 먼 고대에도 사회적 규범이 있었음이 확인된다."(137-9)


제3장 정착된 정신: ‘문명화된’ 사고


"농경 사회는 기근이 반복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풍요로운 일상이 배경을 이루었다. 농사는 도시를 가능하게 했다. 농사는 모든 전문화된 경제 활동의 형태를 고루 갖출 만큼 큰 정착지에 식량을 조달했다. 도시에서 기술은 더욱 정교해지고 향상되었다. 〈사회적 본능은 자연이 모든 사람에게 심어준 것이지만 가장 큰 은인은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언했다. 도시는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이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고안한 수단 중 가장 급진적인 수단이다. 인간은 세상의 풍경을 속속들이 재상상한 새로운 거주지로 뒤덮었다. 그것은 오로지 인간만이 고안할 수 있는 목적을 위해 세심히 조성한 새 환경이었다." "기원전 제3천년기 메소포타미아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지혜에 따르면 카오스란 〈벽돌이 하나도 놓이지 않고 (···) 도시가 하나도 건설되지 않은〉 때였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인구의 90퍼센트가 도시에서 살았다."(167-8)


"낭만과는 거리가 멀게도 문자는 일상적인 발명품이었다. 거의 모든 문명에서 지금까지 문자와 관련해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물은 이론의 여지 없이 상인들이 사용한 꼬리표나 물표이거나, 세금 또는 공물 징수원이 종류와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한 자료였다." "위대한 문학이나 중요한 역사 기록처럼 소중한 내용은 직접 외워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시인의 걸작이나 현자의 지혜는 일반적으로 구술로 전해졌고 수 세기가 지나서야 예찬자들이 이를 문자로 받아적었다. 그전까지 문자로 옮겨 적는 행위는 그 자체로 신성 모독으로 비쳤다." "전문가들은 문자를 국가의 필요에 맞게 조정했고 이어 법을 성문화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최초의 법규는 아마도 사례들로부터 추출한 일반론, 즉 모든 종류의 사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변형된 계율들이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나 법을 신의 의지와 동일시하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중반 중국과 그리스에 세속적 법률 이론이 등장할 때까지 이 추세는 계속되었다."(184-7)


"우리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아이디어가 현대적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디어는 어느 시대에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평등한 시대는 결코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대부분의 문화는 오늘날의 악덕을 고발하기 위해 '참으로 좋았던 과거의 한때'라는 신화를 만들어낸다. 고대 이집트의 속담은 그러한 시절을 〈신들의 뒤를 이었던 시대〉라고 불렀다. 〈지혜의 책들이 그들의 피라미드였던 시대, 여기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이가 있는가?〉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서사시인 기원전 제2천년기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는 운하, 감독관, 거짓말, 질병, 노년 등이 존재하기 전의 시대를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긴 시로 알려진 기원전 4세기 또는 5세기의 『마하바라타』에는 같은 주제의 고대 인도 전통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축복받은 세계,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지 않은 세계였다."(188-90)


"유한 계급은 법을 고안하고 국가를 규정했으며 새로운 통치 개념을 발명하고 여성과 커플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의무를 배정했다. 그들은 이제 당장에는 급하지 않은 생각, 이를테면 오늘날 우리가 철학적 또는 종교적 사색으로 분류할 만한 것에 시간을 쓸 수 있었다. 개개인들을 코스모스에 관한 사색으로 이끈 이들 세 가지 아이디어는 운명이라는 아이디어, 불멸성의 아이디어, 그리고 영원한 보상과 처벌이라는 아이디어였다." "운명, 불멸성, 영원한 처벌 모두 사회적 유용성을 위해 떠올린 아이디어로 보인다. 똑같이 위대하지만 언뜻 유용성은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세계는 환상이라는 아이디어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은 창조적인 힘이라는 아이디어다. 후자는 사유에 대해 사상가들이 품은 자기 본위의 존경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 시기의 전문 지식인들은 여러 가지 철학적 또는 원시 철학적 문제들을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아니면 적어도 이 문제들을 최초로 기록했다)."(197, 204, 207)


제4장 위대한 현자들: 이름을 남긴 최초의 사상가들


"지금의 우리에게 종교처럼 보이는 것(오늘날 이해하는 방식대로의 종교)이 당시의 현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수 있다. 종교와 주술을 구분하는 선은 이따금 과학과 주술을 가르는 선처럼 흐릿하다. 이 시기의 전설은 종교 창시자들을 마법으로 보이는 것들과 연결시킨다." "전통적인 주술에 진 빚이 얼마나 많든 새로운 종교들은 인간이 자연이나 모든 신적인 것과 맺은 관계를 조정할 진정으로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 모든 새로운 종교들은 형식적 의례와 더불어 도덕적 실천을 옹호했다. 단순히 유일신이나 여러 신에게 정해진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추종자들의 윤리를 바꾸라고 요구했다. 자연을 달래는 의식을 거행하기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발전을 위한 여정을 밟아나감으로써 추종자들의 마음을 얻었다. 현세에서든, 죽어서든, 시간의 끝에서 이루어질 변화에 의해서든, 선의 완성 또는 〈악으로부터의 구제〉를 약속했다. 이 새로운 종교들은 단순히 생존의 종교가 아닌 구원의 종교였다."(222, 228)


"모든 것이 환상이라는 개념의 주창자들은 통념적인 지혜와 겨루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주장을 얼마나 열렬히 내세웠는지가 이를 예증한다. 기원전 4세기 중반 중국에서 장자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뒤 혹시 자신이 실제로는 사람이 된 꿈을 꾸는 나비인 것은 아닌지 궁금히 여겼다. 장자보다 조금 앞선 플라톤은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들을 보고 비슷한 의심을 품었다." "우리가 아는 한 피타고라스는 수가 실재한다고 말한 최초의 사상가다. 분명 수는 우리가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이다. 꽃 두 송이, 파리 세 마리.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수는 그것이 열거하는 사물들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수는 그저 형용사가 아닌 명사다. 피타고라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수는 아키텍처이고 코스모스는 이에 따라 건설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이를 〈만물은 수〉라고 표현했다. 만일 당신이 수가 실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초감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는 셈이다."(246, 251-2)


"기원전 제1천년기 이전에는 아무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없었다. 과학은 종교적이었으며 의학은 주술적이었다. 기원전 제1천년기 사상가들은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과학과 이성으로 저글링 묘기를 했다. 이때 발생한 충돌에서 우리는 오늘날 교조적 과학─반대자들은 이것을 '과학주의'라고 부른다─과 영적 사유방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화 전쟁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자연적 원인은 지식인의 담론에서 주술을 다양한 수위에서 자연의 영역으로부터 쫓아냈다. 그러나 과학은 자연을 완전히 탈신성화할 수는 없었다. 영혼과 악령이 물러나자, 현자들의 정신에서 자연은 대체로 신의 손에 남겨졌다. 중국에서 황제들은 여전히 우주의 조화를 유지하기 위한 의례를 거행했다. 서양 사람들은 여전히 자연재해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고난의 원인을 죄악에 돌렸다. 과학은 결코 종교와 완벽하게 분리된 적이 없다."(258-60)


"현자들의 노력이 과학과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면 그 노력의 또다른 가닥은 윤리와 정치에 관한 생각을 고무했다. 진실과 허위의 구분에 무관심한 정신은 선과 악의 구분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고자 한다면, 또는 악을 억제하고 싶다면, 한 가지 확실한 수단은 국가다." "모든 정치 사상은 도덕적·철학적 가정에 의해 형성된다. 사상가가 인간의 조건에 관해 얼마나 낙관적이었는지 또는 비관적이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정치 스펙트럼에서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낙관론자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해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기를 원한다. 인간은 구제 불능이며 사악하거나 오염되었다고 생각하는 비관론자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제약적이고 억압적인 제도를 선호한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자유를 강조하고 인간의 선함을 풀어내려 한다. 보수주의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인간의 사악함을 억누르려 한다."(269-72)


제5장 신앙을 생각하다: 종교적인 시대의 아이디어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한 도구상자는 신학과 교회학만으로 불완전하다. 믿는 자에게 유익하며 세계가 나아지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윤리 체계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에 가장 급진적으로 이바지한 성 바울의 아이디어는 가장 영감이 넘치면서 가장 문제적인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성 바울은 신은 구원을 내릴 때 구원을 받는 자의 공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성 바울은 「에베소서」에 이렇게 썼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 바울이 거듭 단언하듯 구원받은 자의 공적 때문이 아니었다. 이 교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면─교회는 이 입장을 항상 공식적으로 옹호했다─우리가 행한 선은 신이 베푼 호의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인간의 자유가 설 자리가 거의 또는 아예 없다는 아이디어─에서 암울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아이디어는 해방감을 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라고 느낀다."(302-3)


"이슬람교는 도덕적 사상의 거의 모든 측면에서 기독교보다 단순하고 현실적인 교리를 내놓았다. 이슬람은 직역하면 '순종' 또는 '복종'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은혜에 응답하라고 개개인에게 요청한 반면 무함마드는 더 직설적으로 신의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예언자이자 통치자였던 무함마드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한 청사진 역시 제시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세속적 영역과 정신적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과 달리 무슬림들은 두 영역의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교는 예배의 방식인 동시에 삶의 방식이었다. 칼리프─직역하면 무함마드의 '계승자'라는 뜻이다─는 이 모든 영역을 관장했다." "그러나 무함마드가 남긴 율법은 어떻게 보아도 포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8세기와 9세기 스승들이 창설한 율법학파는 이 빈틈을 메우고자 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생전에 남긴 가르침들을 수집해 일반적인 명제들을 수립했다. 어떤 경우에는 이성이나 상식 또는 관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312-3)


"이슬람교는 점차 수백 갈래의 분파 및 하위 분파로 나뉘었다. 다양한 칼리프 선출 방식들은 양립할 수 없었고, 칼리프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 사이에서 이슬람교는 갈수록 더 큰 균열을 겪었다. 무함마드의 사후 한 세대 이내에 생긴 갈등의 골은 이후 절대 메워지지 않았다. 분열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분파는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이슬람 지역에서 통치자나 국가가 칼리프 또는 칼리프에 준하는 지위의 권위를 가로챘다. 그들이 자기 잇속을 차리느라, 또는 최근 들어 〈현대화〉나 〈서구화 추세〉를 명목으로 샤리아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을 때마다 혁명가들은─갈수록 더 자주─무함마드의 망토를 깃발 삼고 무함마드의 책을 무기 삼아 통치자들을 〈변절자〉라고 부르며 비판을 제기했다. 무함마드는 삶의 모든 측면을 관장하는 보편적 행동 수칙인 '샤리아'를 제시했다. 그러나 오늘날 샤리아를 재해석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무슬림들도 이 일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좀처럼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314)


"15세기 초, 장 제르송(Jean Gerson)은 세속 정부와 교회 정부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후 서양 세계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기원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국가는 죄악 때문에 발생했다. 에덴동산의 바깥에서는 부정한 행위의 제한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공동으로 자원을 모으고 서로의 자유를 구속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고 합리적이었다. 시민들의 합의는 국가의 유일한 정당한 토대다. 신이 내려준 교회와 달리, 국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물로서 역사적 계약에 의해 만들어지고 암묵적 갱신에 의해 유지된다. 군주정의 경우, 통치자의 권력은 신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사람들이 왕에게 운영을 맡기는 것이 골자를 이루는 계약에 따른 것이다. 국가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문제는 사회계약론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국가에 계약적 토대가 있다는 아이디어는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했다."(342-3)


제6장 미래로의 회귀: 흑사병과 추위를 통과한 생각


"생물군의 변화는 우리가 사는 행성의 표면을 농업의 발명 이래 그 어떤 혁신보다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농사는 우리가 '부자연 선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도입해 진화에 수정을 가했다. 하지만 16세기에 시작된 변화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동안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진화의 패턴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전 세계를 떠도는 유럽의 식민지 개발자들과 탐험가들을 따라 생물군도 대양을 건넜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동식물을 이동시켜서 새로운 가축 종을 만들거나 새로운 토양에서 식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혁명적인 변화는 이 책이 주장하는 바에 부합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다시 상상했고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수많은 씨앗, 세균, 곤충, 포식자, 사람들이 귀여워해 몰래 들여간 동물 등도 사람들의 옷깃과 주머니, 선박의 창고나 밑바닥을 통해─말하자면 디즈니의 〈놀라운 여행〉을 거쳐─새로운 환경으로 건너가 변화를 빚어냈다."(359-61)


"탐험은 유럽의 영향을 세계 전역으로 투사했다. 아울러 탐험가들이 개척한 경로를 따라 전 세계적인 생태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러므로 콜럼버스가 세계를 상상한 방식─그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기술로 다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세계가 작다고 생각했다─은 이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알려진 세계의 크기는 탐험가들을 주저하게 했다. 콜럼버스는 작은 세계를 상상함으로써 지구 일주를 시도하도록 자극했다.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는 어떻게 잘못된 아이디어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생산적인 예였다." "(프톨레마이오스 같은) 텍스트적 권위에 대한 콜럼버스의 무관심은 사실상 그를 과학혁명의 전령으로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근대 과학자들처럼 문자로 기록된 권위보다는 관찰된 증거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을 유도한 또다른 요소는 콜롬버스의 영향으로 탐험 지역이 확대되며 축적된 지식의 형태로 나타났다."(375-8)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시대의 새로운 정치사상은 과학과 비슷한 궤적을 밟았다. 고대에 대한 경의로 시작해 새로운 발견의 영향에 적응하다 결국 혁명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을 돌아보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새로운 문제에 대응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주권 국가와 전례 없는 제국의 부상은 새로운 패턴을 구상하도록 강요했다." "사람들은 흔히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는 모어의 판타지와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고 여긴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가 오히려 더 창의적인 상상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서양에서 통치에 관해 등장한 기존의 모든 사상─국가의 목적은 시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라는─을 비난했다." "이후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의 주장으로부터 두 가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국가는 도덕 법칙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해 봉사한다는 현실정치주의고, 둘째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며 국가의 존속이나 공공의 안전을 위해서는 과한 조치도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394-8)


"16세기에 유럽 밖 제국의 건설이 낳은 또다른 결과는 정치사상을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더욱 폭넓은 성찰로 되돌려놓았다는 데 있었다. 16세기 중반에 스페인의 도덕 개혁가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는 〈인류에 속한 민족들은 모두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너무나 자명한 말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근대의 가장 새롭고 강력한 아이디어 중 하나인 인류의 통일성을 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 이유는 거의 모든 문화에서 거의 모든 시기에 이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원전 제1천년기의 현자들은 인류의 통일성에 관해 자세히 논했고 기독교는 우리가 혈통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종교의 정설로 삼았지만, 인간과 이른바 '인간 이하(subhuman)'의 경계선이 어디라고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세 생물학은 〈존재의 사슬〉을 상상했다. 이 상상 속에서 인간과 야수 사이에는 괴물들에게 할당된 〈유사 인간(similitudines hominis)〉 범주가 있었다."(415-6)


제7장 전 지구적 계몽: 연합된 세계의 연합된 사상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당시 프랑스의 계몽주의 지식인들, 곧 필로조프들(philosophes)에게 세속의 성서나 다름없었다. 이 책의 부제 〈이성에 입각한 과학·예술·상업 사전〉은 아마도 출판 역사상 책의 성공에 가장 크게 일조한 부제일 것이다. '사전'이라는 단어는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지식이라는 개념을 상기시킨다. 아울러 언급된 세 주제는 추상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을 모두 하나의 저작에서 아우른다는 것을 알려준다. 디드로는 이 책의 취지를 〈인간에서 출발해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것은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인류로부터 상찬을 받아 마땅한 지식을 집대성하려는〉 노력이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계몽주의의 심장부를 차지했다. 기계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코스모스의 메타포였다. 『백과전서』의 저자들은 기계의 우월성이나 우주의 기계적 본성에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아울러 이성과 과학은 동맹 관계에 있다는 확신을 공유했다."(431-3)


"18세기 내내 해방 옹호론자와 억압 옹호론자 사이에서 논쟁이 활발했다. 볼테르는 조직화된 종교에 염증을 느꼈고 그 철학적 대안으로서 유학(儒學)에 매력을 느꼈다. 아울러 우주는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며 관찰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중국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볼테르가 보기에 중국 국가체제의 절대 권력은 선을 위한 강제력이었다."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공포를 통치 원리로 삼는 전제국가〉라고 비난했다. 사실 한 가지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를 갈랐다. 몽테스키외는 법치를 옹호하고 헌법적 안전장치가 통치자에게 재약을 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볼테르는 국민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고 강하고 분별 있는 정부를 선호했다." "몽테스키외는 이렇게 썼다. 〈아시아가 약하고 유럽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럽은 자유롭고 아시아는 예속적이다.〉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는 서양의 정치 문헌에서 권력 남용을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451-2)


"18세기에 만일 국가가 이를 보장하기만 하면 평등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합리적인 개념이었다. 국가는 언제나 중대한 불평등과 맞선다. 그렇다면 모든 불평등과 맞서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이것은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자유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강요된 평등은 횡포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이 기능은 다른 모든 기능보다 중요하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생각한 사람은 장 자크 루소였다." "루소는 계몽주의의 가장 신성한 원칙 중 하나와 절연했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은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다〉는 원칙이었다. 루소는 사유재산과 국가를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의 본성적이고 원시적인 선한 상태를 옹호했을 뿐 달리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루소는 감정과 직관의 가치를 중시하며 어떤 면에서 이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긴 낭만주의자들의 포스트 계몽주의 시대적 감성을 선취했다. 루소는 프랑스혁명의 주도자들과 폭도에게 탁월한 영웅이었다."(458-60)


"확실한 사실은 계몽주의 운동은 인민 주권과 민중의 지혜라는 측면에서, 유럽에서는 실패했지만 미국에서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민주주의 무르익는 동안 유럽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를 매도했다. 신중한 사상가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난한 체제를 추천하기 망설였다. 루소는 민주주의를 혐오했다. 에드먼드 버크─18세기 후반 잉글랜드에서 정치적 도덕성을 외쳤다─는 민주정 체제를 〈세계에서 가장 뻔뻔스러운〉 체제라고 일컬었다. 한때는 민주주의를 옹호한 이마누엘 칸트조차 1795년에 민주주의를 다수의 횡포라고 부르며 기존의 견해를 철회했다." "반면 미국에서 민주주의는 〈쑥쑥 자랐다〉.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오래된 지배층의 의무는 이에 적절히 부응해 〈민주주의를 지도하고, 민주주의의 신념을 되살리고, 민주주의의 풍습을 정제하고, 민주주의의 움직임을 규제하는 것〉,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않고 길들이는 것이었다."(468-9)


"18세기 유럽은 이른바 〈이성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실패─전쟁, 억압적 정권, 시대 자체에 대한 실망─는 이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직관은 최소한 이성과 동등했다. 느낌은 생각만큼 중요했다." "과학과 낭만성의 융합은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 알렉산더 폰 훔볼트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1802년 침보라소산에 오르던 훔볼트는 고산병 증상이 나타나 추위로 몸이 뒤틀리며 코와 입술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그는 돌아가야 했다. 훔볼트가 겪은 고통과 좌절의 이야기는 유럽의 낭만주의 작가들이 두고두고 기리는 바로 그 주제가 되었다.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내성적인 독일 시인 노발리스는 1800년에 낭만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징 중 하나인 〈파란 꽃(blaue Blume)〉을 창조했고, 절대 꺾이지 않을 이 아련한 꽃은 이후 낭만주의적 갈망을 상징해왔다. 낭만주의의 핵심에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충족될 수 없는 갈망─에 대한 숭배가 자리해 있다."(479-82)


제8장 진보의 전환기: 19세기의 확실성


"벤담의 〈공리주의〉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리였다. 벤담은 일종의 행복의 미적분학을 개발했다. 벤담은 사회적 〈효용〉을 개인의 자유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었다. 하지만 벤담의 철학은 급진적이었다. 유구한 전통이나 권위, 과거의 성공 기록을 참조하거나 존중하지 않으면서 사회 제도를 평가할 새로운 방식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이 신조는 의도적으로 신을 배제했고 유물론적이었다. 벤담이 제시한 행복의 기준은 쾌락이었고 악의 기준은 고통이었다." "벤담은 낭만주의에서 손을 뗀 영국 지배층의 가장 유창한 웅변가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낭만적 열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밀은 처음에는 공리주의를 수정하다가 이후 전면적으로 거부했고, 마침내 자유를 모든 가치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었다. 밀은 벤담의 최대 다수를 개인이라는 보편적 범주로 대체했다. 밀은 개인의 자유는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다."(499-502)


"마르크스는 국가의 〈소멸〉을 목격하기를 소망했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인에게 국가는 진보를 유지할 최고의 수단이었다. 어느 정도는 아이디어의 영역 바깥에 있는 것들이 국가에 힘을 실어주었다. 물질적인 우발 사건들이 국가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인구 성장은 군대와 경찰력의 증강을 가져왔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은 명령을 신속하게 전달하고 무자비하게 실행했다. 세금과 통계 자료, 지식이 누적되었다. 형벌 수단이 증가했다. 폭력은 갈수록 국가의 특권(궁극적으로는 거의 독점적 특권)이 되었고 국가는 개인이나 전통적인 제도, 협회, 지역의 권력 구조보다 더 많은 무기를 보유했고 더 많은 자금을 썼다. 국가는 다른 19세기 권위의 원천─부족이나 혈족 등의 혈연 집단, 교회 그리고 세속 권력에 대한 여타 신정 정치적 대안들, 귀족계층, 사업 연합체, 지방 및 지역의 자주 독립주의, 깡패들의 두목이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마피아, 프리메이슨 단체 등─과 맞서는 거의 모든 대결에서 승리했다."(512)


"그러나 19세기에는 개인 숭배가 문화 전체를 재편성했다(초인 숭배의 위험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에 잘 드러나 있다). 영국 남학생들은 웰링턴 공을 모방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인의 롤모델이 되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 이름에서 울려 나오는 영웅주의의 메아리가 경외심을 자극했다. 아메리카대륙에서도 조지 워싱턴과 시몬 볼리바르의 인간적 결점은 영웅적 신화에 가려졌다. 헤겔의 영웅 숭배는 피로 물든 폭군들을 향했다. 영웅들은 집단─정당, 민족, 운동─에 봉사했다. 오로지 성자들만이 세계 전체를 위한 덕을 구현한다. 대중의 판단에서 영웅이 성자를 대체하자 세계는 나빠졌다. 민주주의 체제 국가들은 위인이 사회를 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도자에게 어느 때보다 큰 권력을 맡겼고 20세기의 수많은 사례에서 그랬듯이 대중선동가와 독재자들에게 스스로 투항했다."(518-9)


"헤겔은 〈민족(Volk)〉을 하나의 이상으로 보았다. 헤겔에게 그것은 초월적이고 변하지 않는 실재였다. 일부 민족주의 옹호자들은 역사와 과학에 의해 민족주의의 정당성이 인정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민족주의는 흔히 신비주의적이거나 낭만적인 언어로 표현되었다." "민족주의는 일관된 정치적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낭만적인 갈망의 상태였기 때문에 음악으로 가장 잘 표현되었다. 체코의 음악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나 잔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는 어떤 민족주의 문학 작품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민족주의는 〈사고가 아닌 감각〉이라는 가치에 속한다고 선포했다. 주세페 마치니─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운 공화주의자─에게 민족은 개개인에게 잠재적인 도덕적 완벽성을 마련해준다고 말하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시몬 볼리바르는 침보라소산에서 〈나를 사로잡은 콜롬비아의 신〉이 〈이상하고 탁월한 불〉을 피운 순간 〈섬망〉을 경험했다고 전해진다."(536-8)


제9장 카오스의 역습: 확실성을 풀어헤치다


"앙리 베르그손은 자신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우주를 움직이는 힘에 이름을 붙였다. 베르그손은 그것을 엘랑 비탈(élan vital, '생의 약진')이라고 불렀다. 엘랑 비탈은 자연을 진화론에서처럼 내부에서 지휘하지 않았고 신처럼 외부에서 지휘하지도 않았다. 엘랑 비탈은 물질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역량을 지닌 정신적인 힘이었다. 일부 낭만주의자나 주술사가 추구하는 '세계영혼'과 엘랑 비탈이 어떻게 다른지도 분명하지 않다. 이것은 아마 베르그손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베르그손이 엘랑 비탈을 떠올린 것은 우리에게는 과학이 예측하는 것과 다른 미래를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베르그손은 과학을 공격하는 비합리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객관적 실재들을 정신적 구성물로 제시하고, 생각하지 않는 창조물에 목적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과학적 결정론이 인간을 제약하거나 방해한다고, 심지어 위협한다고까지 느낀 사람들은 베르그손의 생각을 환영했다."(585-6)


"아인슈타인의 우주에서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속임수였다. 질량과 에너지는 서로 전환이 가능했다. 평행선들은 서로 만났다. 뉴턴 이래 지배적이었던 질서 개념들은 우리를 호도하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상식적인 지각은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토끼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자극을 받아 수행된 실험들은 하나같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타당성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더욱이 상대성 이론은 새로운 역설들을 드러내는 데 일조했다. 아인슈타인이 코스모스의 큰 그림을 다시 상상하는 동안 다른 과학자들은 코스모스를 구성하는 세밀한 부분들에 집중했다. 사실 물리학자들은 그전부터 빛의 이중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빛은 파동일까 입자일까? 모든 증거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빛은 파동인 동시에 입자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새로운 담론은 정합성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쫓아냈다."(593-4)


"프로이트는 20세기의 모델이자 멘토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과학적 통설을 (인류학자) 보애스보다도 더 세차게 뒤엎었다. 프로이트의 발견 혹은 주장은 사회들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개개인의 자아에 관한 이해에 이의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기는 상당수가 무의식적이라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책임, 정체성, 성격, 양심, 사고 방식 등에 관한 전통적 가정들을 모조리 부정했다." "프로이트의 〈과학〉은 잘 작동하는 듯했으나 가장 엄격한 검증을 통과하는 데는 실패했다. 칼 포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고 물었고 심리분석 협회는 이 질문에 크게 출렁였다. 그들은 마치 종교 분파나 비주류 정치 운동 세력처럼 굴며 서로의 오류를 지적하고 반대자들을 협회에서 추방했다. 여하튼 프로이트가 문화의 영향을 과소평가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문화는 심리 형성에 영향을 주며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의 경험은 문화로 인해 다양한 색채를 띤다."(603-4)


"20세기의 화가들은 자신들이 직접 본 것보다는 과학과 철학이 묘사한 것을 그리는 경향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두드러졌다. 이 시기의 혁신적인 예술작품은 과학과 철학이 불러일으킨 동요와 충격을 표현했다. 1907년 큐비즘은 산산이 조각난 거울에 비친 것 같은 파편화된 세계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큐비즘 운동을 창시한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브라크는 원자론이 시사한 광경─어딘가 서로 잘 맞지 않는 파편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세계─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1911년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더퍼드가 원자에 관해 설명한 글을 읽고 〈두려운 힘을 느꼈다. 마치 세계의 종말이 다가온 듯했다. 모든 것이 힘이나 확실성을 잃고 투명해졌다〉고 말했다. 이러한 효과들은 새로운 양식의 출현에 반영되었다. 이 새로운 양식은 실제 대상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을 억눌렀다. 칸딘스키가 시작한 이 완전한 〈추상〉 미술 사조는 대상을 알아볼 수 없게 묘사하거나, 아예 묘사하지 않았다."(610-1)


제10장 불확실성의 시대: 20세기의 망설임들


"19세기 말을 향해 갈 즈음 모든 측정 가능한 변화의 그래프는 지면을 벗어났다. 토템 연구자 알렉산더 골든와이저는 문화적 변화는 비활성 국면 사이에서 〈솟구치듯 출현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진화는 길게 이어지는 평형상태 사이에서 〈단속적으로〉 일어난다고 생각한 것과 대체로 비슷했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모순이 겹겹이 쌓였다. 전자를 관찰한 사람들은 아원자 입자들이 각자 보유한 에너지양과 어긋나 보이는 위치로 이동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자들은 다시 그들의 선배인 연금술사들과 동등한 위치로 되돌아갔다." "과학은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진리성을 보장받기 위해 선망하는 객관성의 잣대다. 20세기의 철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언어학자, 심지어 일부 문학과 신학 연구자들까지도 주체로서의 지위를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과학자라 부르며 객관성을 가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인 기획으로 판명되었다."(626-8)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원래 오래된 철학인 실존주의가 다시금 유행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소외(alienation)〉를 가장 큰 사회 문제로 파악했다. 경제적 경쟁 관계나 근시안적 유물론은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부단히 움직이는 뿌리 없는 개인들을 남겼다." "사르트르는 말했다. 〈인간은 어떤 상태일 뿐이다.〉 아니면 〈인간은 자기 스스로 만든 어떤 것일 수밖에 없다. (···) 인간은 자기 자신을 미래로 내던지는 존재이자, 미래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며 그러한 스스로를 의식하는 존재다〉. 〈그 결과 인간은 쓸쓸하고 그 어디에도 매달릴 곳이 없다. (···) 존재가 진정으로 본질에 선행한다면 인간은 어떤 고정된 (···) 인간의 본성을 지시함으로써 설명할 수 없다. 다시 말해 결정론은 없다. 인간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유다.〉 실존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기 관조라는 방어벽 안에 가둘 수 있었다. 자기 관조는 추악한 세계에 대한 혐오 속에서 찾은 안전한 공간이었다."(635-6)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언어론적 전회(轉回)〉로 그치지 않았다. 언어 문제들은 불확실성과 결합해 지식의 접근성─과 심지어 실재성─에 대한 불신감을 조성했다. 전쟁, 학살, 스탈린주의, 히로시마, 근대 건축 운동이 만들어낸 싸구려 유토피아, 전후 유럽인이 살고 있는 과도한 계획 사회의 음울함 같은 고통스러운 사건들과 새로운 기회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소외된 사람들은 문화를 되찾아야 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하는 전자 기반 오락 기술이 그들을 도왔다. 이러한 배경에 미루어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부분적으로 세대적인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베이비붐 세대는 실패한 부모 세대와 절연하고 탈식민주의와 다문화와 다원주의의 시대에 어울리는 감수성을 껴안았다. 북적이는 세계와 지구촌에서 삶의 접촉들과 연약함은 다양한 관점을 갖기를 권장 또는 요구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맥락이 부과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문화적으로 조작된 공식이었다."(641-2)


"카오스 이론은 분석의 한 층위를 드러냈다. 이 층위에서 원인과 결과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델은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듯했다. 이것을 임계 질량에 적용하면 지푸라기 하나가 낙타의 등을 무너지게 할 수 있었고, 작은 먼지 알갱이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상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갑작스러운 변동이 시장을 교란하고, 생태계를 망가뜨리며, 정치적 안정을 뒤엎고, 문명을 산산이 부수고, 우주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을 무효화하고, 진자의 진동과 중력의 작용을 말한 뉴턴 시대 이래 이어져온 전통 과학의 성소를 침범할 수 있었다. 20세기 말의 희생자들에게 카오스에 의한 비틀림은 복잡성의 작용으로 보였다. 그러니까 체계는 다종다양하고 상호연결된 부분에 더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어느 깊은 수준에서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변화로 인해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더 증가했다. 역설적으로 카오스 이론은 더 깊고 높은 수준의 정합성을 탐색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었다."(652-3)


"조심성, 회의주의, 자기 회의, 머뭇거림 같은 것은 우리가 진리로 오를 때 내딛곤 하는 발판이다. 내가 불안해지는 때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확신에 차 있을 때다. 그릇된 확실성은 불확실성보다 훨씬 더 나쁘다. 하지만 후자는 전자를 야기한다. 20세기 사회·정치 사상에서는 새로운 교조주의(dogmatism)들이 과학의 새로운 결정론들을 보완했다. 변화가 좋은 것인지 모른다. 변화는 항상 위험하다. 불확실성에 대한 반작용으로 유권자는 대중 선동가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해결책에 쉽게 현혹된다. 종교는 교조주의와 근본주의로 변질된다. 사람들은 변화의 원인으로 짐작되는 대상, 특히─전형적으로─이민자들과 국제기구를 공격한다. 자원 고갈이 두려워지면 큰 희생을 요구하는 잔혹한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반응들은 변화의 형태이되 하나같이 극단적이고 일반적으로 폭력적이며 언제나 위험한 형태의 변화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이유에서, 익숙한 삶의 방식을 붙들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변화를 택한다."(682)


"반(反)다원주의는 여전히 흔하다. 21세기 초 몇 년간 일부 서양 국가에서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문화 통합〉 정책들이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들 국가에서는 유구한 역사의 공동체들이 세계화를 비롯한 여러 거대한 종합적 흐름에 맞서 자신들의 문화를 방어하는 태세를 취했다. 어디에서나 나와 다른 문화를 가진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고 설득하기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세르비아, 수단, 인도네시아는 폭력적으로 분리되었다.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는 평화롭게 결별했고, 영국의 스코틀랜드나 스페인의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동거의 조건을 재협상했다. 하지만 다원주의의 아이디어는 여전하다. 다원주의는 다양성이 있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현실적인 미래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유일하게 전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이 진정으로 고르게 누릴 수 있는 이득을 제공한다. 역설적이지만 다원주의는 어쩌면 우리를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신조다."(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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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노동자가 만난 과학 - 자본으로부터 과학 되찾기
박재용 지음 / 빨간소금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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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부 제국주의와 과학


1. 약탈적 과학: ‘발견’과 ‘발명’이라는 거짓말


피나텍스(Piñatex)는 스페인 출신 디자이너 카르멘 히요사(Carmen Hijosa)가 2013년 개발한 것으로,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를 부직포 형태로 만든 뒤 특수 처리를 통해 가죽과 비슷한 질감과 내구성을 갖게 했다. 히요사는 이 기술에 대한 특허권을 얻고 아나나스아남(Ananas Anam)이란 회사를 세워 피나텍스를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다. 필리핀 선주민들은 이미 몇백 년 전부터 파인애플 잎에서 추출한 섬유로 피나 직물(piña cloth)을 만들어 왔다. 선주민들이 피나 직물을 만드는 과정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을 정도다. 히요사는 필리핀에서 가죽 산업 컨설턴트로 일하면서 선주민들의 이 방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은 아나나스아남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에 돌아간다. 주로 서구의 대기업들이 세계 각 지역의 선주민들이 오랜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지역 생물에 대한 지식과 유전자원(genetic resources)을 도용해서 독점적 수익을 올리는 것을 ‘생물해적(Biopiracy) 행위’라 부른다. 8-9)


19세기에는 식물학자, 동물학자, 인류학자 등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식물도 연구하고 동물도 연구했다. 또한 인종에 대해서 살피고 해류나 기상을 관측했다. 이런 과학자들을 박물학자라고 불렀다. 이런 박물학자들의 노력으로 박물학은 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 기상학, 해양학 등 세부 학문으로 정립되고 발전했다. 그런데 과연 박물학자들의 성과는 오로지 그들의 노력으로만 이루어졌을까? 물론 그 노력을 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선주민들에게 힘입은 바가 컸다. 그러나 박물학자와 함께 탐험한 이들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저 고용된 사람, 일행일 뿐이었다. 서양 박물학자들의 ‘발견’은 자기네만의 ‘최초’인 경우가 꽤 많다. 오히려 ‘재발견’, ‘서양에서의 첫 발견’ 정도가 적당하다.  이렇게 현지인들의 지식과 도움으로 확보한 식민지에 관한 연구는 영국 제국의 과학 네트워크를 통해 중앙화되었다. 제국들이 식민지로부터 수집한 정보는 서구 과학계에 공유되며 서양의 과학이 되었다. 12-4)


189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에 고무 플랜테이션(Plantation)이 급속히 늘어났다. 플랜테이션이 들어선 장소는 이전에 선주민의 거주지, 농경지, 열대우림이었다. 집이며 논이며,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 다양성을 자랑하던 열대우림이 사라졌다. 손수 지은 집에 살며 가족이 먹을 쌀을 재배하고, 과일과 꿀을 채취하고, 대나무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현지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무 플랜테이션의 노동자가 되었다. 자신의 땅에 유배당한 사람들이 되어 버렸다. 현지인들은 새롭게 임금노동에 의지했지만, 긴 노동시간, 낮은 임금, 위험한 작업환경으로 생활이 쉽지 않았다. 남녀 구분 없이 플랜테이션에서 일했고, 아이들도 동원되었다. 산업혁명 초기에 영국에서 성행한 아동노동이 19세기 식민지에서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들로는 부족해 노동력을 외부에서 들여와야 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에 화교와 인도인 비율이 높은 원인 중 하나다. 15)


2. 의학과 제국주의: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약자들


생체 실험의 대상이 된 이들은 주로 제3세계 사람들과 서구 사회 소수자들이었다. 특히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식민지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구 결과들은 식민지 사람들의 삶을 낫게 만들었을까? 그런 측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선진국 사람들이었고,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은 여전히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소외열대질환(Neglected Tropical Disease)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열대지방에서 주로 발생하는 20개 질병을 소외열대질환으로 통칭한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말라리아는 2022년 세계적으로 2억5,000만 건 정도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약 61만 명이 사망했다. 전체 감염자의 94%, 사망자의 95%가 아프리카에서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말라리아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모잠비크에서 발생한다. 5세 미만의 아이들이 전체 사망자의 78%를 차지한다. 22-4)


특히 아프리카의 상황이 이렇게 나빠진 데는 제국주의 시절 서양의 책임이 크고 그 가운데 당시 의학의 책임이 상당하다. 물론 제국주의 침략 이전이라고 이런 열대 질환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 지배 과정에서 양상이 바뀌었다. 대규모로 농장을 만들고 삼림을 벌채하고 광산을 개발하면서, 말라리아모기 등 질병 매개체의 서식지가 확대되었다. 강제 노동과 대규모 이주 등으로 질병이 더 쉽게 퍼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고, 선주민들의 공동체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전통적 방식의 질병 억제 방법이 함께 무너졌다. 이렇게 식민지 경제체제에서 급격한 도시화는 위생 문제를 악화시켰다. 그리고 제국주의는 식민지 자원을 대규모로 착취했다. 식민지 선주민들은 더 빈곤해지고 이에 따라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게다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민지 시대 의료 체계는 주로 본국에서 간 사람과 일부 식민지 엘리트를 위한 것이었지, 대다수 현지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현지인들은 생체 실험 대상으로만 취급되었다. 24)


3. 과학과 제국주의: 자연선택은 적자생존이 아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은 아프리카, 중동과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고 제국주의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이때 인종론은 유럽의 백인이 아시아인과 흑인을 지배하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의 하나가 되었다. 더 진화한 이들이 덜 진화한 이들을 가르치고 교화해야 한다고 말이다.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인종론은 과학적 정당성이 하나도 없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피부색이 까만 사람들 사이의 연관성보다 지역적 연관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물론 19세기에도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처럼 인종 간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가 있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19세기의 인종론은 이제 과학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러나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하게 남아 있다. 가령 미국에서 흑인은 백인보다 훨씬 높은 비율로 체포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주장한다. “인종은 없다. 인종차별만 있을 뿐이다.” 28-9)


허버트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는 용어를 쓸 때의 의미는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진화’는 다윈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다윈의 진화란 ‘진보’나 ‘발전’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이 없는 자연 현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펜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진화는 곧 진보이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스펜서로서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그는 제국주의와 식민지 확대 정책, 전쟁과 군국주의에 반대했다. 군사적 사회에서 산업적 사회로의 진화가 발전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회진화론’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그 뒤 다른 식으로 쓰였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사회학자 벤저민 키드(Benjamin Kidd)는 《사회 진화(Social Evolution)》에서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정당화했다. 열등한 인종에 대한 우월한 인종의 지배가 진보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유럽의 식민 지배를 ‘문명화의 사명(Civilizing mission)’이라고까지 이야기했다. 31-2)


2부 현대 자본주의와 과학


4. 현대 자본주의와 거대과학: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거대과학


맨해튼 프로젝트는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바로 거대과학(Big Science)의 출현이다. 거대과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분야는 우주 탐사도 입자물리학도 핵융합도 아닌 군사다. 어떤 이들은 군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한 기술이 다른 부문에 활용되면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이야기한다. 이를 ‘스핀오프(spin-off)’ 기술이라 하는데, 군사용 연구를 정당화할 때 자주 인용된다. 스핀오프 기술이 꽤 있다. 대표적인 예가 흔히 ‘GPS’라 부르는 위성항법시스템이다. GPS는 위성항법시스템 중 미국국방부가 개발해 관리하는 범지구위치결정시스템(Global Positioning System)의 약칭이다. 그런데 현재 위성항법시스템은 미국의 GPS 하나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글로나스, 유럽연합의 갈릴레오, 중국의 베이더우 등 지구 전체를 담당하는 4개의 위성항법시스템이 있다. 이유는 단 하나, 원래 군사용이기 때문이고 최초 개발국인 미국이 GPS 운영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37-8, 40, 42)


이미 개발된 군사 기술을 민간에 적용하는 것이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다. 스핀오프 기술을 예로 들면서 군사 기술 개발에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붓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스핀오프는 예외적인 사례일 뿐이다. 대부분의 군사 기술은 민간에 적용되기 어렵거나 적용 과정에서 막대한 추가 비용 및 시간이 소모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비스와 제품은 항상 가성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은 성능과 효과가 우선이고, 비싼 가격이나 다른 문제점은 쉽게 감내한다. 무엇보다 스핀오프 기술에 대한 강조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라는 윤리적 문제를 외면한다. 앞서 말했듯이 정부는 나중에 다른 용도로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군사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기술 개발에 막대한 국가 예산을 투입한다. 이는 더 시급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을 군대를 위해 전용하는 행위다.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 기술이나 난치병 치료법 개발, 환경 보존 등에 투여할 예산을 빼앗는 셈이다. 42-3)


5 의학과 보편적 건강권: 사람이 특허보다 중요하다


국경없는의사회는 1999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상금이 시작이었다. 마침, 아벤티스가 수면병 치료제 생산을 중단한 시점이었다. 기존 다국적 제약 회사를 통해서는 개발도상국에서 발생하는 질병의 새로운 치료제 개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국경없는의사회는 노벨상 상금을 종잣돈으로 비영리 연구개발 조직인 소외질환의약품개발이니셔티브(DNDi)를 결성했다. 목표는 소외열대질환에 대한 치료제를 개발하고 기존 치료제를 개선하는 것, 개발한 치료제를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 그리고 개발도상국의 연구개발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DNDi는 상업적 이익을 배제하고 공공성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비영리 모델을 채택했다. 그리고 현장의 이해관계자들과의 협력에 주력하고 현지의 필요성을 기반으로 환자 중심의 연구를 주요 지침으로 삼았다. 이를 통해 DNDi는 수면병, 리슈마니아증, 샤가스병, 말라리아, 소아 에이즈 등 다양한 소외 질환 치료제 개발에 성공했다. 58-9)


의약품 특허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권과 건강권이 시장 논리와 사적 이윤 추구에 종속된다는 점에 있다. 제약 회사들은 신약 개발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이를 회수하기 위해 특허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의 시작은 공공 연구 기관들의 기초연구다. 수십 년간의 공공 투자로 개발된 기술이 민간 기업의 특허권으로 독점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제약 회사들의 연구개발비는 항상 과대 계상되는 경향이 있다. 마케팅 비용이나 임원 보상이 연구개발비보다 더 큰 경우도 많다. 근본적으로 의약품을 하나의 ‘상품’으로만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공적 자금이 투입된 연구 성과는 공공재로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제약회사가 가격을 맘대로 정할 수 없도록 규제해야 한다. 약값이 인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대한 특허권 행사를 제한하고 강제실시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의약품을 인류 공통의 자산으로 관리해야 한다. 62)


6. 특허와 자본: 신자유주의에 포섭되는 과학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힘과 가속도의 법칙은 과학 혁명의 완성이자 근대 물리학의 시작이지만, 그의 말처럼 혼자 이룬 것이 아니다. 당시 과학자들은 누가 먼저 발견했느냐를 두고 피 터지게 싸웠지만, 자신이 이룬 결과물을 이용해 다른 이가 실험하고 응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아니 관대했다기보다 너무 당연해서 시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당시 과학자들이 품이 넓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과학은 돈이 되지 않았다. 지금은 과학 연구를 토대로 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이 기술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18세기만 하더라도 과학과 기술, 과학과 공학은 완전히 남남이었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방적기와 방직기 기술, 증기기관의 개선 등은 당시 과학과는 상관없이 오직 기술자들이 맨땅에 헤딩하듯이 만들어 냈다. 64)


20세기 중반 이후 과학과 기술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이것이 과학인지 기술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자 특허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조 공정이나 화학 공정 관련 기술, 기계장치 등이 주된 특허 대상이었지만, 20세기 중후반이 되자 유전자조작 기술, 회로 설계, 생물학적 처리 방법, 소프트웨어, 인공지능 알고리즘 등 대상이 다양해졌다. 물질특허와 유전자특허, 그리고 천연물질특허로 특허 대상이 확대되었다. 현대 화학 산업에서 물질특허는 대단히 중요하다. 반도체 공정에 사용되는 감광제, 디스플레이용 발광 물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많은 제품이 물질특허의 보호 대상이다. 제약 산업의 경우, 세팔로스포린 같은 항생제나 발사르탄 같은 혈압 약은 물질특허 덕분에 강력한 시장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제약 회사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이라고 해서, 원래의 제품에 대한 사소한 변형을 특허로 등록해 특허를 연장하고 있다. 65-6)


어떤 표준을 구현하는 데 필수적인 특허를 표준필수특허라 한다. 표준필수특허는 기술의 공공재적 성격을 무시한다. 특히 통신이나 인터넷과 같은 기반 기술들은 현대 사회의 필수 인프라로, 누구나 자유롭게 접근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고 표준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소수 대기업이 표준필수특허를 독점하면서 이러한 필수 기술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다음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글로벌 불평등을 심화한다. 선진국 대기업이 대부분의 핵심 특허를 보유하고 있어서 개발도상국은 계속 높은 특허 사용료를 내야 한다. 이는 기술 종속을 심화하고 국가 간 경제적 격차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는다. 마지막으로, 표준필수특허는 공공성을 해친다. 표준필수특허 대부분에는 공공기관의 기여가 핵심적이다. 지금의 특허 제도는 발명가도, 소비자도 보호하지 못한 채 자본의 이윤 추구 수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제 특허 문제는 기업을 넘어 과학과 기술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69-71)


3부 민중의 과학


7. 과학기술의 이데올로기: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과학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근대 이래로 계속되었다. 이런 낙관적 전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특히 핵폭탄의 개발은 과학기술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을지를 보여 줬다. 이런 걱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통한 문제 해결이라는 믿음은 여전했다. 오히려 과학기술이 만든 문제를 또다시 과학기술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커졌다. 예를 들어 환경오염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많은 사람이 기술 발전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기술 중심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흐린다. 기후 위기는 과도한 생산과 소비, 화석연료 중심의 산업구조가 근본 원인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런 과학만능주의가 종종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기술적 해결책을 내세워 현재의 여론을 잠재우면서 실질적인 변화를 회피하는 것이다. 과학만능주의는 현재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 76-8)


기술결정론은 기술의 발전이 사회 변화를 일방적으로 결정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기술이 발전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높아진 생산력은 생산양식을 바꾸는데, 이런 경제 영역의 변화가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주장이다. 기술결정론이 특히 문제가 되는 분야는 노동이다. 산업혁명 시기를 보면 이런 측면이 잘 드러난다. 당시 방직공과 수공업자의 일자리는 기계의 도입으로 사라졌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물류 창고의 자동화를 두고 기업들은 ‘스마트 물류’나 ‘디지털 혁신’이라 부른다. 물류 자동화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물류량과 빨라지는 배송 속도에 대응하기 위한 기술적 혁신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과정을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런 기술 도입 과정에서 효율성만을 강조할 뿐 노동자의 건강이나 작업장의 민주성 같은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변화를 기술 발전의 필연적 결과인 것처럼 포장한다는 사실이다. 79-80)


8 과학과 커먼즈: ‘과학의 로빈 후드’ 혹은 ‘과학의 해적 여왕’


데이터는 다른 정보들처럼 일종의 권력이다. ‘정보 비대칭’은 기회의 비대칭으로 이어지고, 이는 권력이 된다. 정부와 대기업은 데이터 개방을 이야기하지만, 공개되는 데이터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기업들은 더 노골적이다. 이들은 해당 사이트에서만이 아니라 사용자의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추적하고 데이터화한다. 이렇게 수집한 데이터를 기업은 알고리즘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더 정교한 행동 조작과 이윤의 도구로 활용한다. 플랫폼 회사들이 제공하는 ‘약관’에 따르면, 이런 데이터를 기업들끼리 서로 유상으로 혹은 무상으로 제공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공개를 넘어 데이터를 통한 권력관계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시민은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권력기관이나 기업이 보유한 데이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디지털 시대, 민주주의의 재구성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89)


이제 오픈 데이터 운동은 데이터 최소화의 원칙, 동의와 통제권 중시, 차등적 접근, 알고리즘 투명성을 주요하게 강조한다. 첫째, ‘데이터 최소화’에 대해 살펴보자. 데이터 최소화가 필요한 이유는 데이터를 많이 모을수록 해킹이나 유출 시 피해가 커지기 때문이다. 둘째, ‘동의와 통제권’ 중시는 데이터를 모으는 쪽, 그러니까 주로 정부 기관이나 기업과 제공하는 쪽의 불평등한 관계를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 셋째, ‘차등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는 프라이버시와 공익의 균형을 잡기 위해서다. 모든 데이터를 완전히 공개하면 프라이버시가 침해되며, 완전히 막으면 공익적 활용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의료나 범죄 통계 등 민감한 개인 정보를 다룰 때 주요하게 나타난다. 넷째, ‘알고리즘 투명성’ 문제를 살펴보자. 알고리즘 투명성이란 알고리즘이 특정 집단을 차별하지 않는지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존의 채용 알고리즘이 여성을 차별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네 가지 원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91-2)


9 민중의 과학: 무엇을, 왜,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


‘적정기술’이란 말을 들으면 대개 손 펌프나 정수기, 태양광 조리기 같은 간단한 기계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적정기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값싼 기술’을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은 아니었다. 1973년 영국의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서 ‘중간기술’ 개념을 제시했다.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은 서구의 거대 기술을 도입하느라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도입된 기술은 현지의 필요와 조건에 맞지 않았고, 소수 엘리트만 이용할 수 있었다. 슈마허는 이런 상황에서 현지의 자원과 기술력으로 만들 수 있으면서 전통적인 방식보다 생산성이 높은 ‘중간’ 정도의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슈마허는 기술의 수준 문제만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 기술이 자본 집중과 중앙 집중을 낳으며 이는 결국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여겨,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기술을 제안했다. 103-4) 


빈곤이나 불평등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제 일부 활동가들은 적정기술을 사회운동과 결합하고자 한다. 인도의 나브다냐(Navdanya) 운동은 유전자조작 종자에 맞서 토종 종자를 지키는 운동을 하면서, 동시에 농민들의 자립적 기술 개발을 돕는다. 결국 우리가 다시 해야 할 질문은 ‘누구를 위한 기술인가?’이다. 적정기술 운동이 처음 제기했던 문제의식, 즉 기술이 소수가 아닌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이는 값싼 기술을 보급하거나 첨단 장비를 갖춘 공간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 기술의 생산과 활용 과정 전반에 대한 민주화가 필요하다. 기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넘어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사용할 것인지를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한다. 적정기술의 미래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더 확장하고 심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105-6)


10 소수자와 과학: 인공지능의 편향된 공부법


한국에서 전동휠체어가 급속히 확산한 결정적인 계기는 2003년 국민건강보험 급여 품목이 되면서부터다. 이에 더해 정부 지원 정책이 확대되면서 보급 속도가 빨라졌다. 휠체어가 계단을 이동할 수 있도록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면 어떨까? 실제로 그런 기술을 개발하는 곳이 있다. 그러면 이동 문제가 해결될까? 이런 기술의 개발은 한편으로는 환영해야 한다. 계단을 오를 수 있는 전동휠체어가 삶의 질을 바꿀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기술로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은 사회적 문제를 개인에게 돌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기술의 도입보다 저상버스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고, 지하철마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모든 건물에 경사로를 설치하고, 장애인 전용 콜택시를 늘리는 것이 장애인에게 훨씬 더 필요하다. 이것은 사회의 의무다. 사회가 해야 할 몫을 장애인 개인에게 맡기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기술 개발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기술 개발을 핑계로 지금 해야 할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112-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 발전의 방향이다. 지금의 과학기술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에너지 소비는 늘어난다. 인공지능 서버를 돌리는 데 드는 전력량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고, 메타버스나 가상현실 기술이 상용화되면 전력 소비는 폭증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술 발전을 불가피한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기술의 발전 방향이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기술 발전의 방향은 사회적 요구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배터리 효율을 높이기 위해 투자하는 것처럼, 사회가 요구한다면 기업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에너지 소비 구조 자체를 바꾸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결단의 문제다. 11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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