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권력, 영광
팀 앨버타 지음, 이은진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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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대체 뭐가 문제일까 


1부 나라


1장 신의 선택을 받은 나라?: 미국의 영광과 진실 


"미시간주 브라이턴은 버블 속의 버블이다. 브라이턴이 속한 리빙스턴 카운티는 미시간주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공화당 투표율이 높게 나오는 선거구다. 이곳에서 가장 큰 교회인 코너스톤은 주변 지역의 축소판이다." "코로나 19가 퍼지고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벌어지고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코너스톤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나는 교회 사람들이 하늘이라도 무너진 것처럼 수선을 떨며 페이스북에 올린 조잡하고 히스테릭한 게시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코너스톤을 오래 다닌 일부 교인들이 트위터에서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특별히 걱정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면, 재미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경고였다는 사실을, 깜빡이는 선홍색 불빛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였어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뭐가 문제일까요?〉 와이넌스는 잠시 생각했다. 〈미국이요.〉 그가 대답했다. 〈그들 중 너무 많은 이들이 미국을 숭배하죠.〉"(36, 42-3)


# 버블 속의 버블. 동질적인 큰 집단에 속한 작은 집단으로서 특정한 동질적 특성을 더 집약적으로 공유하는 소집단을 일컫는 비유적 표현


"지난 10년간 공화당을 취재하며 의회와 선거 유세 현장을 뛰어다닌 나는 후보자의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들이 어떤 성경 구절을 인용할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잠언 13장 4절: 〈게으른 사람은 아무리 바라는 것이 있어도 얻지 못하지만, 부지런한 사람의 마음은 바라는 것을 넉넉하게 얻는다〉),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기 위해(시편 139편 13절: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문화 전쟁에 신자들을 동원하기 위해(이사야 5장 20절: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성경 구절을 이용했다. 이 모든 예시, 그리고 유권자들이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듣게 되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구약 성경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하고 대통령으로 재임한 4년 동안, 공화당이 구약 성경의 언어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은 점점 문제가 되었다."(43-4)


"수십 년 동안 종교적 우파는 공직자들에게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해 왔고, 특히 42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을 괴롭히는 데서 큰 기쁨을 느꼈다. 경건한 성품이 국가를 운영하는 데 꼭 필요한 요건이라고 주장해 왔던 그들이 트럼프의 죄를 못 본 척하는 건 지속 가능한 접근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전략을 짰다. 트럼프의 단점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2016년 6월, 뉴욕시 메리어트마르퀴스 호텔에 500명이 넘는 저명한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결함이 있는 인물을 사용하는 오랜 전통을 잇는 새로운 인물로 트럼프를 소개했다. 이 전략은 아주 명확했다. 성경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는 위대한 지도자들의 예시가 가득하므로 트럼프를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을 위한 불완전한 도구로 제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들에게 트럼프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산 위에 세운 빛나는 도시'를 위해 싸우도록 임명된,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구였다."(45-6)


2장 트럼프와 종교적 우파: 불신의 동맹 


"굿윌교회의 존 토레스 목사가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언급했을 때, 처음에는 개인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교인들 개개인이 토레스에게 전화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거나 면담을 요청했다. 대화는 비슷한 패턴을 따랐다. 교인들은 토레스에게 조지 플로이드의 이력에 관해 아는지 물었다. 플로이드가 마약 중독자이고 범죄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다그쳤다. 토레스는 그것은 사건의 본질과 관련이 없다고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죄를 짓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국가에 의한 살인의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 교인들은 토레스를 심문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인종차별 국가라고 생각하냐고, 법 집행기관을 왜 옹호하지 않냐고, 뉴스에 나오는 폭동과 약탈을 왜 비난하지 않냐고 물었다. 교인들은 토레스에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며 복음주의장로교(EPC) 교단에 토레스의 해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69-70)


"장로들이 토레스를 해임하지 않자 화가 난 이들은 게릴라식 전략을 사용했다. 토레스의 권위를 떨어뜨리기 위해 몇 달 동안 흠집 내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들은 교회 네트워크를 이용해 대선 결과에 반발하는 1월 6일 워싱턴 D.C. 폭동을 조직하며 공개적으로 토레스를 괴롭혔다. 토레스의 잘못을 적은 전단을 인쇄해 교회에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남자 두 명이 주일 아침에 교인들이 다 보는 앞에서 토레스 목사에게 다가가 그에게 소리치고 삿대질을 하며 회개하라고 요구했다." "토레스는 좌절했다. 이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다수가 아니었다. 겨우 스무 명 정도로, 매주 예배에 참석하는 수백 명 중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이 사람들은 부활절 또는 크리스마스이브에나 교회를 찾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중 한 명은 교회 직원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교리 교육을 맡고 있었다. 수년간 함께 기도하고, 함께 웃고,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 중 일부가 교회를 전쟁터로 만들고 있었다."(71-2)


"백인 복음주의자인 샌더스는 혼란에 빠진 교회들 대부분이 오래된 백인 복음주의 교회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들은 수십 년 동안 〈교회를 위한 아마겟돈, 우리를 공격하는 적들〉이라는 수사에 매몰되어 온 교회들이었다. 1970년대 중반에 신앙을 갖게 된 샌더스는 기독교에 대한 위협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에 대한 인식이 그동안 크게 바뀌었다고 말했다. 한때는 적대적인 외국 세력이 세계에 전파된 거룩한 빛을 소멸시키기 위해 미국을 표적으로 삼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1980년대에 모럴머조리티가 힘을 얻으면서 이야기는 바뀌기 시작했다. 종교적 주요 인사들은 미국 신자들이 기꺼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해 싸워야만 그리스도의 왕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남게 되었을 때, 복음주의자들은 남아 있는 유일한 적이 내부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무서운 사실은 적을 교회 안에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토레스가 말했다."(81)


3장 제리 팔웰과 도덕적 다수: 종교의 정치적 야망 


"역사가들과 종교학자들은 오랫동안 미국 역사를 '대각성'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 왔다. 첫 번째 대각성은 1730년대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났다. 두 세기 전 귀족적인 로마 가톨릭교회를 불안하게 했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메아리 속에서, 개척지 설교자들은 일반 사람들도 부흥 운동에 쉽게 참여할 수 있게 만들었고, 개인이 거룩하게 살고 구원을 받는 것에 새로이 초점을 맞췄다. 1790년대에 일어난 두 번째 대각성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데 중점을 두어 새로운 기독교 조직과 협회들을 수없이 탄생시켰고, 이들이 젊은 미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종교 활동에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세 번째 대각성은 신학적으로 볼 때 가장 영향력이 적다고 여겨지지만, 19세기 후반에 선교 활동과 도덕적 행동주의를 강조했다. 세 번째 대각성은 '금주 운동'과 빈곤 및 기타 사회 병폐를 해결할 치료제로 기독교를 제시한 소위 '사회 복음 운동'을 일으켰다."(96)


"1971년 리버티대학교가 개교할 즈음에는 근본주의가 부흥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이는 팔웰과 그의 동료들이 수많은 미국 가정의 거실, 주방, 차고, 자동차 안에 들어가게 해 준 대중 매체 덕분이었다. 하지만 근본주의의 성격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때 세상일에 완전히 무심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설교자들이 이제는 문명의 붕괴를 경고하는 예레미야식 설교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미국의 종말이 임박했다며 두려워하는 나이 든 보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특히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팔웰은 이러한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더 빠른 변화를 원했다. 그의 적대감은 전형적인 당파적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나라가 공화당을 외면한 상황이었으니 1976년 선거 결과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지미 카터가 승리했다. 하지만 문화 전쟁이 시작되면서 팔웰은 민주당의 정책과 행동이 미국의 도덕적 가치에 어긋난다고 공격할 기회를 감지했다."(97-9)


"1978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은 카터의 민주당을 상대로 여러 번 큰 역전승을 거두었으며, 그중 세 번은 풀뿌리 낙태 반대 운동 덕분이었다." "공화당 주류파가 선호하던 조지 H. W. 부시는 종교적 우파와 전략적으로 거리를 두었지만, 로널드 레이건은 새로 결집한 기독교 유권자들을 선거 전략의 구심점으로 삼고, 부시가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낙태 문제에 관여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이 확정되자, 레이건은 로버트 빌링스를 대선 캠페인 종교 자문으로 임명함으로써 팔웰에게 보답했다. 공화당 정치에 새로운 기준이 세워졌다. 공화당의 현대사를 이끌어 온 교육받고, 부유하며, 사회적으로 온건하고, 문화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갑자기 예고 없이 더 이상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 앞으로 공화당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낙태 문제를 경제 문제만큼 중요하게 다루어야 했다." "모럴머조리티는 공화당을 장악했다. 그러나 팔웰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는 미국을 원했다."(107-8)


4장 위선의 끝: 은폐된 진실, 도덕적 붕괴 


"1980년대에 청소년이었던 러셀 무어는 종교적 우파의 열정이 교회 공동체에 암처럼 퍼지면서 도덕적 기회주의, 정치적 위선, 인종적 적대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때 성숙한 신자로 여겨 존경했던 사람들이 영적으로 텅 비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믿는 신은 그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무어는 갑자기 아버지의 조용한 신앙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짐 크로 법 시대에 미시시피에서 목사의 아들로 자란 게리 무어는 교회 안에서 괴로운 일들을 목격해 왔다. 남침례교의 역사는 미국의 원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1845년에 전국 침례교회 내에서 노예제 폐지 움직임이 일어나자 이에 놀란 '노예를 소유한 백인들'이 결성한 것이 바로 남침례교다. 그래서 남침례교는 인간을 매매하고 소유하는 것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는 상징이 되었다. 남북전쟁에서 패배한 후에도 남침례교의 세계관은 거의 변하지 않았고, 한 세기 동안 의도적으로 그리고 자랑스럽게 분리 정책을 유지했다."(141-2)


"1988년에 남침례교 윤리및종교자유위원회(ERLC)를 공식적으로 인수한 리처드 랜드는 보수 신학과 보수 정치 이념을 결합하고자 누구보다 열심히 움직였다. 정당 소속을 남침례교 신자 수백만 명의 영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고, 제리 팔웰 시니어와 그가 이끄는 모럴머조리티와 거리낌 없이 동맹을 맺었다." "1980년대 이전까지 〈전도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종말론에 초점을 맞추거나, 결혼과 육아 이야기를 꺼내면서 교회가 가족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실용적인 조언을 하는 방법이었죠.〉 무어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공화당에 투표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어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치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고요.〉" "무어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격 외적인 대의명분에 교회의 미래를 저당 잡혔다고 생각했다. 그 대가로 얻은 것은 교인 수 감소와 교회의 신뢰성 및 영향력 하락뿐이었다."(145-7)


"무어는 복음주의자들, 특히 남침례교 사람들이 어떻게 트럼프를 후보로 받아들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1998년 빌 클린턴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불륜 사건에 대응하여 유명한 결의안을 통과시킨 교단이 바로 남침례교였으니까 말이다." "2016년 당시 남침례교 신자들은 트럼프를 누가 뭐라고 비판하든 그건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기들 헌금으로 월급을 받는 교단 지도자가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는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무어는 남침례교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2016년 10월, 〈워싱턴 포스트〉에서 트럼프가 기혼 여성에게 자기랑 잠자리를 하자고 압박하면서 자신은 유명인이라 성폭행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자랑하는 오래된 녹음 파일을 공개했을 때, 무어는 복음주의 지지자 중 누구라도 트럼프와 함께 탄 배에서 내릴지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모두 방어 태세를 취했다."(151-2)


5장 포위된 신념: 정치적 기회주의의 그림자 


"로버트 제프리스는 남침례교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영향력 있는 댈러스제일침례교회의 담임 목사이다. 트럼프는 사람들이 뜨겁든지 차갑든지 명확한 태도를 보이기를 바랐다. 그것이 제프리스가 트럼프에 관해 알게 된 첫 번째 사실이었다. 뜨겁게 열광하는 충성스러운 지지자와 치를 떨며 혐오하는 단호한 반대자 모두 트럼프에게는 유용한 존재였다. 트럼프가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 하루는 그를 지지했다가 다음 날은 반대하는 사람들, 애매한 도덕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트럼프와 가까이 지내고, 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존경과 신뢰를 얻으려면, 항상 뜨거운 태도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제프리스는 그렇게 했다. 2016년 선거 기간에 트럼프가 한 포르노 배우에게 입막음 대가로 돈을 준 일을 웃어넘겼고, 2020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트럼프가 〈도둑맞은 선거〉라며 사람들을 선동할 때도 눈감아 주었다."(164-5)


"2016년, 제프리스는 내셔널퍼블릭라디오(NPR)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액세스 할리우드〉 촬영 중 녹음된 트럼프의 음성 파일이 막 공개되었을 때였다. 트럼프의 인격은 공격받고 있었고, 선거 운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러셀 무어 같은 저명한 복음주의자들은 정치 지도자에게 성격적 기준을 요구해 온 사람들이 어떻게 지금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는지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NPR 진행자는 제프리스에게 이에 대한 답변을 요청했다. 〈저는 온유하고 온화한 지도자를 원하지 않습니다.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내미는 사람을 원하지 않아요.〉 제프리스는 진행자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는 이 나라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거칠고 가장 강한 SOB(son of a bitch, 여기서는 강하고 단호한 리더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를 원합니다.〉 한때 유권자들에게 〈정신적 혼란〉을 준다며 동료 복음주의자들의 일관성 없는 태도에 대해 불평했던 사람이 이제는 포뮬러 원의 속도로 급격히 방향을 전환하고 있었다."(173-4)


"2011년, 공공종교연구소는 종교가 있는 모든 미국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사생활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한 정치인이 공직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백인 복음주의자 중 30퍼센트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는 조사 대상 그룹 중 가장 낮은 비율이었다." "2016년, 연구소는 이전과 같은 질문을 포함한 새로운 설문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백인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72퍼센트가 사생활에서 부도덕한 행동을 한 정치인도 공직에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답했다."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변화는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구가 전보다 증가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공포가 그들의 생각을 바꿔 놓고 있었다." "그들이 사랑하는 무언가가 곧 사라질 참이었고, 그것을 되찾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상황이 그러하니 오래된 규칙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절박한 시기에는 (설사 좀 수치스럽더라도) 절박한 조치가 필요했다."(176-7)


6장 박해 콤플렉스: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 


"호주 출신의 신학자 존 딕슨은 현재 미국 교회가 〈불량배 증후군〉을 앓고 있다고 말했다. 너무 많은 기독교인이 거만하게 행동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괴롭히고, 늘 화를 내고 불안해하면서 못된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정말 자신감이 있다면, 굳이 힘을 과시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라고 딕슨은 말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괴롭히는 교회는 불안한 교회예요.〉" "로럴 벙커의 메시지도 교회에 대한 세상의 신뢰가 사라지고 있다는 딕슨의 이론과 맞닿아 있었다. 벙커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은혜로 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다고 강조했다. 승리하고 있을 때는 은혜를 베풀기가 쉽지만, 패배하고 있을 때는 그러기가 훨씬 더 어렵다고도 말했다." "다음 세대의 잠재적인 신자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벙커는 경고했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돈보다, 사회적 지위보다, 정치적 당파보다, 나라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지 말입니다.〉"(195, 200-2)


"예수는 제자들이 잘못했을 때나 인간적인 악함을 보일 때마다 그들을 꾸짖으셨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고, 그들의 허영심과 편견과 선입견을 질책하셨다. 그들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셨다. 이것이 제자 훈련이다. 여기서 'discipline'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빈센트 버코트는 미국 복음주의에 관해 두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너무 많은 미국 기독교인이 제자 훈련이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의 결과로 너무 많은 미국 기독교인이 자신을 '미국'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나라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숭배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합니다〉라고 버코트는 말했다. 〈나라를 사랑하면서도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을 이해시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얻는다고 해서 내가 무언가를 잃는 건 아닙니다.〉"(205-7)


"딕슨은 미국 복음주의가 혼란에서 깨어나려면 먼저 박해받고 있다는 피해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복음주의자들을 움직이는 건 대부분 나라를 잃는다는 두려움, 권력을 잃는다는 두려움입니다.〉 딕슨은 이렇게 덧붙였다. 〈전혀 건강하지 못한 거죠.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의 만찬에 초대받은 열성적인 손님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있는 것이 기쁘고,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 기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존중하고 늘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우리 집이 아니니까요.〉 미국 복음주의자가 겸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계 최강국의 시민이라는 자부심만으로도 이미 문제를 일으키기에 충분한데, 여기에 천국에서 누릴 독점적 특권에 대한 확신이 더해지면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겸손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점, 즉 번영과 세속적 지위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212-4)


7장 기만의 먹이사슬: 거짓 정보의 확산과 팽창 


"플러드게이트 예배당에 처음 들어섰을 때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기는 많이 보였다. 무대 뒤 스크린에도 국기가 있었고, 나누어 주는 책자에도 국기가 있었다. 심지어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을 딱 한 명 보았는데 마스크에도 국기가 인쇄되어 있었다. 2021년 5월이었고, 플러드게이트교회에서는 팬데믹 폐쇄, 마스크 착용, 백신 의무화에 반대하는 단체 스탠드업미시간의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 후 세 시간 동안 교회는 원형 경기장으로 변했다. 스탠드업미시간의 전무 이사는 주 정부를 장악한 〈사악한〉 민주당을 비난했고, 민주당의 엘리트 집단이 사탄 숭배 의식으로 아이들의 인육을 먹는다는 큐어넌의 주장이 〈일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으며, 기독교인들은 〈너무 착하다〉면서 청중에게 〈불에는 불로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이런 극단적인 정치적 발언과 행동이 플러드게이트교회(그리고 담임목사인 빌 볼린)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라는 점이 명백해졌다."(219-22)


"볼린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출마할 때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마이크 펜스와 주변에 있는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받아 대통령 재임 중에 거듭났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1월 6일 워싱턴 폭동 당시에 트럼프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사람(마이크 펜스)이 위험에 처했을 때 트럼프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문제가 안 되는 거냐고 나는 볼린에게 물었다. 〈네.〉 그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내용은 책에 싣지 않는 게 좋겠네요.〉 트럼프의 회심 경험(한때는 그가 어둠에 속한 사람이라 확신했다가 빛의 자녀가 되었다고 믿는 것)은 변화를 특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트럼프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더 큰 사회적 현상을 보여 준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국가의 운명에 대해 숙명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잘못된 행동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잘못된 행동이 정말로 옳다고 믿는 경향이 생기기도 한다."(225-6)


"플러드게이트 교회로 둥지를 옮긴 호프너 부부(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는 정치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하는 일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세속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손에 나라가 망하기 직전인데, 교회가 중립을 지킬 여유 따위는 없었다. 토니 데펠리스는 트럼프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는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와 전통을 따르지 못하게 하려는 악마의 음모에 의해 2020년 대선이 조작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여러 주에서 지난 선거 결과를 무효화할 것이고, 바이든의 첫 임기가 끝나기 전에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바이든이 정정당당하게 승리했다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런 확신을 갖게 된 근거가 대체 뭐냐고 캐물었다. 이런 압박에도 토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토니는 2천 년 전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다고 확신하는 것만큼,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했다고 확신한다고 했다."(233)


2부 권력


8장 공포 전술: 유권자 동원을 위한 선동 


"채드 코넬리와 데이비드 바턴은 그동안 수백 개의 교회에서 연설하며 수만 명의 기독교 유권자들과 교류했다. 코넬리가 청중에게 촉구하는 행동은 간단했다. 〈우리는 교회 사람 모두가 유권자 등록을 하고, 모두가 성격적 가치를 위해 투표하게 해야 합니다.〉" "바턴은 미국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의 사상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상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독립 혁명 시기에 설교자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했다. 그 시대 설교자들은 설교와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를 통해 영국에 대항하는 반란의 기초를 다졌다. 바턴은 오래전에 잊힌 여러 성직자의 작품을 인용하면서 전쟁부터 복지, 의료, 과세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미국인이 직면한 모든 문제가 미국의 역사가 시작되던 초창기에 강단에서 다루었던 설교 주제라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려는 요점은 성경이 단순히 영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미국의 자치 제도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알려 주는 통치 지침서라는 것이었다."(248-9)


"지난 몇 년간, 정치와 종교의 결합에 관해 질문하며 거의 모든 복음주의자가 〈소금과 빛〉을 언급하며 에둘러 답했다. 문제는 성경 학자들이 예수가 정확히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수는 분명히 세상에서 구별되는 존재가 되라고, 세상에 맛을 더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라고 격려하시고자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코넬리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세속적인 미국 정치 무대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위해 싸움으로써 구별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설교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의 성전에서 유권자 등록 운동이나 이런저런 선거 운동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끄러운 경사면'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유권자 등록 운동을 통해 정치에 뛰어든 교회가 어느 날 주일 아침 미시간주 브라이턴의 플러드게이트교회처럼 '헤드라인 뉴스'가 주일 예배를 도배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256-8)


# 미끄러운 경사면. 어떤 행동이나 결정이 점차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


"승패에 대한 집착은 많은 것을 드러낸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공화당의 정치적 입장을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시하도록 압박을 받고 있었다. 우리 뒷편 예배당에서는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을 더 똑똑하고 더 힘 있는 시민으로 기르기 위해 설계된 한 시간짜리 강의가 막 끝난 참이었다. 이제 그들은 바턴이 제공한 정보를 가지고 코넬리의 지시에 따라 미국 정치 전장의 참호로 돌격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은 없었다. 어떻게 올바르게 승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도 없었다. 존 딕슨이 설명한 〈잘 잃는 법〉에 대한 교훈도 없었다. 이것은 당연히 의도된 것이다. 코넬리와 바턴 같은 사람들에게 지는 것은 선택지에 없었다. 코넬리는 언젠가 내게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 적에게 어떤 양보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달갑지 않은 동맹이라도 맺어야 했다. 비열한 전술이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는 첫 번째 단계는 기독교적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270-1)


9장 혐오의 길: 거짓이 낳은 킹메이커 


"1989년, 한 해 전 공화당 예비 선거에 참여했다가 떨어진 텔레복음 전도자 로버트슨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리드를 한쪽 구석으로 데려갔다. 로버트슨은 리드에게 공화당의 영적 퇴보가 걱정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제리 팔웰을 좋아하지 않았고, 사실 몇십 년 동안 그와 라이벌 관계였다. 그러나 로버트슨은 팔웰이 모럴머조리티를 통해 쌓아 올린 영향력을 존중했다. 이제 팔웰은 그 조직을 해체하고 있었고, 레이건의 종교적 우파 동맹들은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부시 대통령은 복음주의자들을 소외시킬 가능성이 커 보였다. 로버트슨은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10년 동안 복음주의 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럴머조리티보다 더 많은 자금을 모을 수 있고 더 정교한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조직을 새로 출범시킬 기회를 감지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연합이 탄생했다. 설립은 로버트슨이 했지만, 실제 지휘는 로버트슨이 아니라 리드가 맡았다."(274-5)


"리드는 공화당에 이 유권자들이 필요한 것이지, 유권자들에게 공화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92년 빌 클린턴의 당선을 거론하며 공화당이 얼마나 목적이 없고 영적으로 공허한지를 설명한 리드는 믿음이 없는 정당을 구원할 이는 진정한 신자들뿐이라고 주장했다. 1994년, 뉴트 깅그리치의 지휘 아래 공화당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하원에서 다수당이 되자, 이제 공화당 내 온건파가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강요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되었다." "거의 30년이 지난 후, 그의 경력을 되짚으며 함께 앉아 있자니 리드가 미소를 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느 정당이 선거에서 이기든 복음주의자들은 이제 미국 정치의 주변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 미국'을 위한 캠페인은 신앙인으로서 그들의 정체성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리드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애쓰는 것이 권력을 손에 쥐는 것보다 더 짜릿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276-7)


"폴라 화이트가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누구보다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과정을 이해하려면,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과정을 살펴보아야 한다. 두 사람 다 자신의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정규 교육(화이트는 신학, 트럼프는 법학이나 행정학)을 받지 못했다. 둘 다 여러 번 결혼 생활에 실패했고 불륜 스캔들에 휘말렸다. 둘 다 법적·윤리적·재정적 부정행위로 인해 회복이 안 될 정도로 평판이 땅에 떨어질 뻔했지만, 어떻게든 더 추앙받는 위치로 다시 부상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재능과 그 말을 내뱉을 수 있는 뻔뻔함을 겸비한 무법자이자 양심 없는 사기꾼이었다. 트럼프는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미국에 대한 향수(鄕愁)를 파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이트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을 팔고 있었다. 바로 번영의 복음이다. 화이트가 설교하는 번영의 복음은 사람이 더 큰 믿음을 보일수록 하나님은 그에게 물질적 편안함을 더 많이 제공하신다는 것이다."(284-5)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경제적·문화적 불안정성 때문에 두려워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리드 같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드 같은 부류는 사람들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었다. 리드는 정치 전략가다. 정치 전략가의 임무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선거를 승리로 이끄는 데 가장 쓸모 있는 도구가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리드는 오래전에 깨달았다. 그래서 내슈빌에서 리드는 굶주린 정치적 열성분자들을 무대 위에 올려 기독교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리드는 사흘 동안 신자들 수천 명이 모여서 자녀들이 조종당하고 있다, 공동체가 침략당하고 있다, 총이 압수될 것이다, 의학적 치료가 의심스럽다, 신문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선출직 공무원들이 악랄하다, 정부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다, 공공 생활에서 신앙이 금지되고 있다, 지도자가 자기들 대신 부당하게 박해받고 있다, 나라가 곧 망할 위기다 같은 말을 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291)


10장 세뇌된 신앙: 솔깃한 권력의 유혹 


"2010년에 처음으로 연방 하원위원에 출마한 애덤 킨징거는 이후 10년 동안, 과도하게 소란스럽고 자멸적인 행동을 일삼는 공화당 하원의원들 사이에서 똑똑하고 이성적인 의원으로 입지를 다졌다. 입법 과정에서 타협안을 도출하고 의회 교착 상태를 타개하는 데 도움을 주어 〈온건파〉라는 꼬리표를 얻었지만, 낙태권과 오바마케어, 세금 인상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반대했다." "특히 국가 안보와 정치 윤리에 관해서는 절대주의자를 자처했다. 그래서 그가 2016년 대선에서 공화당 의원 중 최초로 트럼프에게 투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크게 놀랍지 않았다. 킨징거는 〈나는 공화당원이기 전에 미국인입니다〉라고 말하며 힐러리 클린턴에게도 투표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그 순간부터 킨징거는 공화당 내에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가 유권자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도, 트럼프의 정책에 90퍼센트 이상 찬성표를 던졌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지지자 아니면 모두 트럼프의 적이었다."(310-1)


"순진한 신자들을 먹잇감으로 삼는 관행은 모럴머조리티와 그 후속 단체들의 핵심 사업 모델이었다.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친애하는 애국자 여러분, 우리는 지금 붕괴하기 일보 직전입니다. 세속적인 인본주의자들, 사악한 낙태 찬성론자들, 트랜스젠터 옹호자들에게 곧 점령당할 위기입니다. 어쩌고저쩌고 ···.〉 토머스가 설명을 이어 갔다. 〈항상 똑같아요. '기부하시면, 저희가 같은 금액을 추가로 기부하겠습니다!'(이 약속은 거짓말에 불과했다.)〉" "토머스는 나에게 조금씩 선을 넘어갔다고 말했다. 모럴머조리티가 성공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옳다고 스스로 믿게 되었다.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모은 돈은 프로젝트가 하나님에게 축복받고 있다는 증거가 되었고, 따라서 더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더 많은 돈을 모으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이것이 모럴머조리티가 '기독교 미국'이라는 건물을 세운 발판이다. 토머스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일단 깨닫고 나니, 외면할 수 없었다."(316-8)


11장 분노 사업: 광기의 교회가 파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렉 록은 테네시주에 있는 작은 교회의 목사였다. 그런데 2016년에 대형 마트 타깃 매장 앞에서 화장실과 성 정체성에 관한 이 회사의 정책을 비난하는 동영상을 찍어 입소문을 탔다. 그 동영상은 1,800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했고, 덕분에 록에게는 특이한 복음주의자로서 확실한 브랜드가 생겼다." "록은 현대 기독교 역사의 복음 전도 활동보다는 중세 시대의 정복 정신에 더 가까운, 매우 다른 성향의 십자군을 이끌고 있었다. 그 일요일 아침, 글로벌비전성경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기뻐하며 록 목사는 기독교인들이 이제 더는 밀려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속주의자들이 교회와 전쟁을 벌이길 원한다면,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록 목사는 우렁차게 외쳤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 봤습니다. 우리가 이기는 쪽입니다. 좌파는 이기지 못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기지 못합니다! 낸시 펠로시는 이기지 못합니다! 악마는 이기지 못합니다!〉"(331, 334-5)


# 타깃은 고객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따라 화장실을 선택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록은 민주당원을 〈하나님을 부정하는 악마〉라고 부르며 〈이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민주당에 투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이 수집한 돌격 소총을 자랑하며 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흉내 냈고, 기독교인들이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무력으로〉 미국을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록은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을 직접 겨누며 경고했다. 〈당신들은 아직 진짜 반란을 본 적이 없다!〉" "록은 집회에서 자신이 한 말 중 일부를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호전적이고 잔인한 발언들 대부분은 그냥 퍼포먼스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확신에 차서 나에게 말했다. 록은 화끈한 발언 뒤에는 다 전략이 있다고 내개 전화로 설명했다. 많은 소란을 일으켜서 외부 사람들을 대거 글로벌비전성경교회로 끌어들인 후, 몰래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회심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동의를 구하는 그의 눈짓과 턱짓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했다."(343-4)


"미국 교회의 극단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에 〈하나님은 유대인, 게이, 죽은 군인을 미워하신다〉라고 쓴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며 악명을 떨친 캔자스주 웨스트보로침례교회를 떠올려 보라. 하지만 록은 트럼프 시대의 독특한 현상을 체현하고 있다. 글로벌비전성경교회를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예배가 끝난 후 찾아온 예상치 못한 무덤덤함이었다. 록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는 내가 미국 곳곳을 다니면서 다른 목사들에게서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분위기는 차치하고, 내용만 보자면 지루할 정도로 익숙하고 예측 가능했다." "정치와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서도 비주류와 주류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선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십 년 전이었다면, 글로벌비전성경교회는 이단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록은 페이스북 팔로워 220만 명에게 설교하고, 백악관에서 프랭클린 그레이엄과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다."(346-7)


12장 시민종교로 변신한 트럼피즘: 민주주의의 파괴자 


"종교와 정치는 원래 천적이다. 둘 다 대중에게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두 영역 사이의 긴장은 건강하고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면, 억압으로 이어져 비참한 죽음과 고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역사는 보여 준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목격한 광경은 수 세기 동안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볼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날 때 종교적 신념이라는 미명 아래 전체주의가 서서히 퍼져 나간다고 보았다. 첫째는 지도자들이 보편적인 인간성보다 민족적 또는 문화적 정체성의 우월함을 주장할 때다. 둘째는 특정 정체성의 정화를 강조할 때다(이는 필연적으로 민족 청소로 이어진다). 셋째는 집단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할 때다." "볼프는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정체성을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한다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정치적 정체성을 통해 빠져나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357)


"호보룬은 세속 종교의 틀 안에서도 하나는 '정치 종교'이고 하나는 '시민 종교'라는 점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전자는 국가가 강제하는 종교이고, 후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종교다." "〈정치 종교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히틀러리즘, 나치즘, 공산주의가 바로 그 예입니다. 그것들은 정치적 종교였습니다. 훨씬 더 폭력적이었죠. 푸티니즘도 그렇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푸티니즘은 러시아인들에게 강제력을 가진 정치 종교가 되었습니다.〉 〈트럼피즘은 여전히 시민 종교입니다. 시민 종교의 한 형태를 취하고 있죠. 아직 정치 종교는 아닙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도 호보룬은 1월 6일의 아수라장이 벌어지기 훨씬 전부터 이 모든 장치도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했다. 푸티니즘의 정치 신학이 이제 푸틴 개인을 넘어선 것처럼, 트럼피즘도 종교 이념으로서 트럼프가 퇴임한 후에도 지속될 방식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361-2)


13장 극단의 주류화: 사라진 문지기 


"트럼프의 심복인 로저 스톤의 제자였던 잭 포소비에크는 2016년 이른바 '#피자게이트'를 옹호하며 극우 진영에서 명성을 얻었다. 포소비에크는 피자게이트 음모론에 그냥 가볍게 동참한 정도가 아니었다. 직접 그 식당을 찾아가 몰래 실시간 스트리밍 방송을 진행했고, 나중에 인포위즈의 알렉스 존스 채널에서 〈어린아이들〉이 너무 많아 의심스러웠다면서 〈악마의 작품〉, 〈비밀의 문〉 등의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활동 중에 포소비에크는 마스트리아노라는 동맹을 찾았다. 펜실베이니아주 상원의원인 마스트리아노는 바이든의 당선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며 자신과 동료 의원들이 주의 선거인단 투표를 트럼프에게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일 년 후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즈버그에서 주지사 선거 운동을 시작할 때, 전통 의상을 입은 한 목사가 뿔 나팔을 불어 마스트리아노의 출마를 알렸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미국에 두 번째 내전이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그 내전은 영적 전쟁이었다."(371-2)


"정치를 이해한다는 것, 적어도 마스트리아노와 같은 극단적인 인물이 공화당 내에서 이렇게 큰 영향력을 얻게 된 이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제 극단주의자들이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때 극단적인 인물들이 권력을 얻지 못하게 막아 주던 전설적인 문지기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우리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짓던 상상 속의 불문율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비단 미국 정치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 기독교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종말론적 정치 설교를 하는 모든 목사가 자신이 설교한 내용을 진짜로 믿는 진정한 신봉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이가 진정한 신봉자였다. 2021년 민주당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그들이 2022년 중간 선거 캠페인을 현대판 십자군 전쟁처럼 여길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들에게 이 선거는 단순히 공화당과 민주당의 싸움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의 대결이었다."(375-6)


"왜 마스트리아노는 공화당이 〈권력을 움켜쥐게〉 해 달라고 기도할까? 왜 앨버트 몰러는 〈투표가 신앙인의 중요한 책무〉라고 강조할까? 리드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정치인, 목사 할 것 없이 왜 모든 연사가 민주당이 앞으로 2년 더 〈권력을 잡는〉 것이 두렵다고 말할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아피에미〉(aphieimi)는 '분리하다, 버리다, 홀로 두다, 놓다'를 의미한다. 간단히 말해,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는 놓지를 못한다. 그들은 국가 정체성에서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고,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기독교 민족주의〉에 점점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 지킬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목표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 즉 종교적 보복주의다. 의도가 아무리 〈고귀하다〉 하더라도, 결국 나라를 향한 사랑과 패권에 대한 욕망 간의 경계는 흐려질 수밖에 없다."(381-2)


14장 트럼프 경제: 집착과 기생의 모델 


"〈미국재각성투어〉 입장권은 우파 복음주의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티켓이었다. 투어를 기획한 마이클 플린과 클레이 클라크는 함께 무대에 올라 세계주의자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무기 삼아 봉쇄를 강요하고 세계 인구를 통제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들이 지목한 주동자는 세계경제포럼의 수장 클라우스 슈바프였다. 두 사람은 슈바프가 세속적이고 전제적인 단일 세계 정부를 만들기 위해 〈위대한 리셋〉을 추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에 대항할 〈위대한 재각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때 중동에서 대테러 전략을 감독하는 존경받는 군사 지휘관이었던 플린은 음모론에 빠지면서 한순간에 조롱거리가 되었다. 플린은 빌 게이츠가 순진한 백신 접종자들 피부밑에 추적 장치를 심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오클라호마에 기반을 둔 사업가 클라크는 박해받는 순교자를 자처하며 동정과 지지를 얻는 플린에게서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고 이 시장의 규모를 대폭 확장했다."(393-5)


# 위대한 리셋. 슈바프는 코로나19 팬더믹 이후 경제적 불평등, 환경 문제, 기술 발전으로 인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세계 경제와 사회 구조를 재편하자고 제안했다.


"기독교 작가이자 출판업자인 스티븐 스트랭은 행사장 텐트 안에서 주변 환경에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나는 스트랭에게 행사장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어느 그룹에나 괴짜들은 있기 마련이죠.〉 그가 대답했다. 〈물론, 저는 여기에 있는 것 중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 나라가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는 똑같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2017년 스트랭은 《하나님과 도널드 트럼프》라는 책에서 트럼프를 넓은 마음을 가진 가정적인 사람으로 그렸다. 책은 엄청나게 팔렸고, 스트랭은 딜레마에 빠졌다. 그가 트럼프를 항상 존경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트럼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불완전한 도구라는 주장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상, 이제 그에게는 그 이야기를 발전시킬 동기가 생겼다. 대통령의 무수한 결점들은 '하나님의 불완전한 도구'라는 원래의 전제를 강화할 뿐이었다. 트럼프에게 어떤 악재가 닥치든, 스트랭에게는 이 이야기를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397-9)


"스트랭 같은 사람들, 그리고 전국을 돌며 정치적으로 소극적인 교인들을 신앙이 거짓될 사람들로 묘사한 채드 코넬리 같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의 경건함을 재는 기준은 내면의 노력과 자기 성찰이 아니라 외적인 싸움과 자기 과시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니 온갖 음흉한 동맹과 도덕적 타협이 이해가 되었다. 정치적 영향력을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행위는 예수를 믿는 신앙에서 벗어난 행위가 아니라 신앙을 증명하는 행위였던 셈이다." "트럼프가 건전한 정책을 추진한 점을 칭찬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가장 강력한 비판자들조차 그가 대통령으로서 내린 특정 결정들을 칭찬했다. 하지만 스트랭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정책 결정을 초자연적인 것과 연결 지었다. 스트랭은 특정 목적을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스트랭은 어떤 사람이 중시하는 가치들이 그리스도가 보인 본과 반대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사람과 그의 정치 운동을 말 그대로 '기독교화' 했다."(411-2)


3부 영광


15장 정체성 혼동: 실패한 실험의 재연 


"생명의말씀 교회를 이끄는 브라이언 잔드 목사는 2004년 10월, 딕 체니 부통령이 참석하는 집회에서 개회 기도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이를 수락했다. 행사 당일, 거의 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잔드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그는 온통 빨강, 하양, 파랑 물결 속에 미국 국기를 들고 있는 교인들을 보았고, 교인들은 교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겠다고 맹세한 목사가 공화당에 종교적 권위를 빌려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군중은 완전히 열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잔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브라이언, 브라이언, 왜 나를 정치화하고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순간, 잔드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동안 알고 있던 세계를 완전히 떠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교회 내 파벌과 인맥이 함께 교회를 떠났다.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공표하고 몇 년 만에 교회는 1,500명 이상의 교인을 잃었다."(422-4)


"성경에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자랑하라는 경고가 반복해서 나온다. 성경의 특정 문맥에서는 '영광'(glory)이라는 단어가 모호하게 다가올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히브리어 '카보드'(kavod)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무게, 중요성, 중후함을 의미하며, 상당한 가치를 지닌 것을 나타낸다. 기독교인이 대형 교회나 출판 제국처럼 상당한 가치를 지닌 업적을 이루면, 스스로 영광을 누리고 싶은 충동이 강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충동이 든다면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 이 역학 관계는 지극히 이분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스스로 영광을 누리거나 둘 중 하나다. 둘 다 할 수는 없다. 잔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라고 예수는 물으셨다."(429)


16장 원칙보다 권력: 승리가 곧 미덕? 


"2022년, 조지아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는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거가 되었다. 허셜 워커 공화당 후보를 향한 낙태 폭로 기사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점은 그 기사가 선거의 판도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한때 아버지의 선거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아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아버지를 비난하는 일까지 있었지만, 워커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기독교 유권자들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워커가 같은 여성에게 두 번이나 낙태를 강요했다는 폭로도, 카메라 앞에서 워커가 수술비를 댔다고 밝힌 또 다른 전 여자친구의 고발도 후보직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중요한 것은 워커가 공화당 후보라는 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권력을 되찾는 것이었다. 〈승리가 미덕입니다.〉 보수적인 기독교 라디오 진행자 데이나 로쉬가 토크쇼에서 한 말이다. 〈허셜 워커가 멸종 위기에 처한 독수리 새끼들을 낙태시키려고 돈을 댔어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하길 원합니다.〉"(438-9)


"수백만 명의 복음주의자들이 낙태를 도덕적 잔학 행위로 여기고, 오직 낙태 정책 하나만 보고 투표하는 단일 유권자가 되었다. 두 세대에 걸쳐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기 위해 싸워 온 복음주의자들은 낙태라는 재앙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기울인 노력과 타협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라며 2022년 6월에 나온 돕스 판결을 환영했다. 일부는 정치적 성향을 자제하라고 설교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돕스 판결은 낙태라는 재앙을 종식하지 못했다. 선거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낙태에 반대하는 대법관을 임명해 법을 바꾸더라도, 낙태 문제에 회의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한다. 정치적 권력을 직접 사용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복음주의 운동의 노력은 성공했음에도 실패할 운명이었다. 이제 공화당 지지자들이 20년 전의 민주당 지지자들보다 더 높은 비율로 진보적인 낙태 법을 지지하고 있다."(454-5)


17장 침묵은 죄인가: 선동가들의 위험한 게임 


"찰리 커크는 트럼프가 처음 부상할 때부터 〈논쟁으로 진보를 깨부수는〉 것이 어떻게 돈이 되는지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는 청년 운동 조직인 터닝포인트유에스에이를 허름한 신생 단체에서 업계 거물로 성장시켰다." "커크는 하나님이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의 승리를 보류하신 이유는 그들의 의지를 시험하시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우리는 더 열심히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커크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성경의 전통과 우리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이해하고, 우리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스스로 배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정치인들과 유권자들만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좌파를 물리치려면, 너무 오랫동안 뒤로 물러나 있던 사람들, 즉 그들의 목사들이 전투를 이끌어야 한다고 커크는 설명했다.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는 목사는 좋게 봐줘 봤자 나약한 인간이고 엄밀히 말하면 배신자라고 했다."(461-3)


"미국 복음주의는 정치와 사업 분야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엘리트 사회, 학계, 지식인 그룹에서 배척당하는 듯해 오랫동안 불만을 느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갈망이 커지면, 사회 주요 영역에 침투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대변하고 신념을 지지해 주는 인물들, 비유하자면 자신들을 위해 테이블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는 인물들을 영웅처럼 떠받들기 쉽다. 간단히 말해,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지적으로도 고상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주는 인물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다. 에릭 메택서스는 교회를 좀먹는 이 소외감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있었고, 이 감정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윌리엄 윌버포스에 관한 책을 썼고, 그 후 히틀러에 반대하다 순교한 독일 선교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전기를 집필한 메택서스는 이제 트럼프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싸움에 모든 것이 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466-7)


"마이크 펜스는 특정 공화당원들과 달리, 국가를 분열시키지 않고 은혜와 인간미를 가지고 전통적 가치를 수호할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이런 점이 언제나 그의 강점이었다. 펜스는 보수적인 라디오 토크쇼를 진행할 때만 해도 자신이 〈디카페인 러시 림보〉로 알려져 있었음을 청중에게 상기시켰다. 이 말에 일부 청중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이 말은 예비 후보로서 그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행사가 끝난 후, 나는 참석자들에게 계속 같은 말을 들었다. 현재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펜스가 충분히 강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좋은 사람들한테 실망하는 것도 이제 지쳤어요. 부시 부자도 좋았고, 밋 롬니도 좋았죠. 그런데 그게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나요?〉 〈우리를 위해 싸워 준 사람은 트럼프뿐이에요. 민주당이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선량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만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어요. 솔직히 저는 '디카페인'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진짜가 필요해요.〉 제리 버드가 말했다."(482-3)


# 디카페인 러시 림보. 자신이 러시 림보와 같은 보수 성향을 지녔지만, 덜 자극적이고 부드럽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18장 기독교와 사회: 격랑 속 새로운 연대 


"2015년, 〈내셔널 리뷰〉에 기고한 칼럼에서 트럼프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이후, 데이비드 프렌치는 기독교 우파의 핵심 표적이 되었다. 아마도 그의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방 법원에서 주요 보수 단체를 대변했던 유능한 변호사로서 프렌치는 오랫동안 진보 좌파에 맞서는 강경한 인물로 여겨져 왔다." "익명 뒤에 숨은 계정들만 프렌치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스토킹하는 수천 명의 트위터 사용자를 차단하려고 애쓰던 중 프렌치는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그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었다. 교인들은 프렌치 가족이 예배당에 들어올 때마다 수군거렸고 일부는 보란 듯이 등을 돌리기도 했다. 2018년 어느 일요일 아침, 갈등이 극에 달했다. 평소에 친구로 여겼던 퇴역 군인 출신의 같은 교회 장로가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 안에서 데이비드와 낸시에게 다가와 데이비드가 쓴 칼럼에 대해 따졌다. 〈그가 우리를 위해 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여전히 우리 대통령에게 반대할 수 있습니까?〉"(490-2)


"기독교 청중을 먹잇감으로 삼아 사건을 과장하는 콘텐츠가 팟캐스트, 블로그, 소셜 미디어 플랫폼, 온라인 포럼 하위 그룹을 통해 확산되면서, 신자들이 소비하는 내용을 교회 지도자들이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1970년대나 1980년대 목사들은 위협을 명확히 지적하고 신자들에게 멀리하라고 경고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교인들은 목회자들이 들어 본 적도 없는 정보원에서 정보를 흡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목회자들 사이에 체념이 생겼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음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많은 교회 지도자가 외부 소음을 차단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해 버렸다." "무어는 말했다. 〈이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얼마 전에 방문한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자녀들이 저를 찾아와 말합니다. 자기 부모가 복음주의자인데 온종일 폭스뉴스, 뉴스맥스, 원아메리카뉴스를 몰아 보며 완전히 미쳐 가고 있다고요. 그리고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를 다시 되돌릴 수 있냐고요.〉"(496)


"무어는 많은 목사가 시대의 도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며 걱정했다. 그들은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신학교나 성경 대학을 다녔고, 일부는 신학이나 상담학 같은 고급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교회 안에서 당파 간의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고, 교인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적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훈련받은 적도 없었다. 그들은 연습 한번 해 본 적 없는 게임에 내던져졌고 무참히 지고 있었다. 이런 실패감을 맛보면 누구보다 재능 있고 자신감 있는 설교자라도 절망에 빠질 수 있다. 나는 코너스톤교회의 크리스 와이넌스, 굿윌교회의 존 토레스 등 여러 사례에서 이를 직접 목격했다. 무어는 곤경에 처한 목사들을 보고 엄청난 긴박감을 느꼈다. 이 목사들은 최후의 보루였다. 그들은 대개 지역 사회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파괴하려는 세력 사이에 서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속하게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501-2)


19장 회복은 가능한가: 무너진 신뢰, 실낱같은 희망 


"신앙에 기반을 둔 조직들은 도둑질과 사기, 괴롭힘과 협박, 권력 남용과 정의 실현 거부 같은 문제가 세속 기관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다.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거나 거의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비신자들의 공동체보다 더 안전하고, 더 선하고, 더 도덕적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신앙 공동체들은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을 잘못 적용해서 그 '때문에' 상황이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투명성을 요구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책임감을 지적하면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자비를 강조하다 보면 잘못을 집어내는 일이 불필요해 보이기도 한다. 〈교회를 운영할 때 가장 어려운 점 중 하나는 교회가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이라는 점입니다〉라고 커틀러는 말했다. 〈교회는 신뢰를 기반으로 세워진 곳이에요. 그래서 굳이 위험 신호를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습니다.〉"(522-3)


20장 복음주의 산업 복합체: 양을 착취하는 늑대 


"래리 나사르 판결이 있고 4년이 흐르는 사이 레이첼 덴홀랜더를 바라보는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시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제 그들의 눈에 비친 덴홀랜더는 에스더가 아니라 이세벨이었다. 덴홀랜더는 교회 내부, 특히 남침례교 안에서 급증하는 성 학대 스캔들에 주목하고 법률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힘이 세고 조직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가장 확고한 단체에 맞서 싸웠다. 덴홀랜더는 생존자들과 협력하여 매우 정교하게 은폐된 증거를 찾아냈다. 또한, 대형 교회에 들어가 망가진 시스템을 개혁하고 투명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고자 체계적인 대응책을 마련했다. 덴홀랜더는 비밀리에 정보원을 확보하고 정보와 증거를 수집하여 복음주의계 거물급 인사들을 무너뜨렸다." "〈법이 대중의 인식과 이야기를 따라잡을 때 변화는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대중의 인식을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저널리즘입니다.〉 덴홀랜더의 말이었다."(549-50)


# 나사르 판결. 미국 체조 대표팀 주치의였던 나사르는 부상 치료를 명분 삼아 수백 명의 선수를 성추행했다. 덴홀랜더가 실명으로 학대 사실을 공개한 이후 학대 생존자 155명이 추가로 피해자 진술을 했고, 나사르는 2018년에 175년 형을 선고받았다.


"덴홀랜더가 남침례교와 협력한 이유는 교회를 정화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였지, 그들의 잘못을 폭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덴홀랜더는 생존자들을 옹호하는 일에 집중했지, 조직의 잘못을 폭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 잘못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동료 복음주의자들과 달리 덴홀랜더는 세상이 이를 외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교회는 면죄부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오히려 철저하게 조사 받고, 겸손하게 낮아지고, 굴욕을 당해야 마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신부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은 덴홀랜더가 나사르에게 설파했던 죄책감의 무게를 경험하고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제니퍼 라일이 2019년 남침례교 집행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과정은 절대 아름답지 않았지만 덴홀랜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당황한 해적들이 애너하임에서 항의하며 목소리를 높일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561-2)


21장 리버티의 새벽: 갈림길에 선 두 번째 기회 


"2024년 대선 캠페인이 시작되기 한 달 전,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영적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4월 중순에 린치버그를 방문했다. 타이밍이 아주 절묘했다. 리버티에 도착하기 불과 24시간 전, 디샌티스는 플로리다주에서 이른바 '심장박동 법안'에 서명하여 임신 6주 이후 낙태를 사실상 금지했다. 트럼프는 2022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자 낙태 반대 동맹에게 책임을 돌리며 그들을 소외시켰다. 만약 낙태가 실제로 트럼프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 디샌티스는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플로리다 주지사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대학에서 30분간 연설하면서 예수를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부실하고 수준 낮은 연설도 충격적이었지만, 연설에 대한 반응은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많은 학생이 연설 내내 기립하여 환호했다. 디샌티스가 연설을 마치자 열광적인 환호와 박수는 쿵쾅거리며 〈미국! 미국! 미국!〉을 외치는 함성으로 바뀌었다."(612-4)


"모두가 그렇게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대니얼 호스테터는 연설 전에 디샌티스와 잠깐 대화를 나누고 앞줄에서 연설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완전히 낙담한 표정이었다." "호스테터는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상대측의 공격을 물리치고 재선에 성공했다. '깨어있는' 척한다는 비난과 공격은 이전 선거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편, 여동생이 다니는 애즈버리대학교에서 일어난 부흥은 호스테터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리버티 학생들을 각성시켰다. 물론, 캠퍼스에는 여전히 MAGA 모자를 쓰고 수업에 들어오고 기숙사 방에서 〈렛츠 고 브랜든〉 깃발을 휘날리는 강경파들도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 소수에 불과한 듯 보였다. 호스테터는 리버티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학교가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것 좀 보라는 듯 호스테터가 손을 뻗어 (열광적인 환호가 메아리치던) 텅 빈 경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614-6)


에필로그: 교회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와이넌스는 양심상 문제 많은 현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 승패가 갈리는 이분법적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그는 더 많은 교인을 소외시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으려고 절박하게 기도했다. 그렇게 한동안 고군분투하던 와이넌스는 마침내 돌파구를 찾았다. 그가 〈밀지 말고, 당기세요〉라고 명명한 이 전략은 일종의 정교한 심리 기법이었다. 와이넌스는 비성경적인 욕망을 재고하도록 교인들을 압박하면서도 그것이 교인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신념이라고 믿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경건한 성품에 관해 설교한 후, 어떤 교인이 다가와 특정 정치인이나 대중문화 인물에게 충성하는 태도를 재고해 보아야겠다고 고백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척했다. 분별력과 영적 원리에 관해 설교한 후, 어떤 교인이 그동안 철석같이 믿던 음모론을 의심하기 시작하거나 소셜 미디어에서 접한 정보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면 당황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코너스톤의 상황은 안정되어 갔다."(627)


"거짓말과 기만으로 1월 6일 국회의사당 폭동을 촉발해 불명예를 안게 된 미주리주 상원의원 조시 홀리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이 미국의 기독교 유산을 파괴하려는 과정에서 이미 오래전에 규칙을 어겼다고 보고 있다. 불에는 불로 맞서야 한다. 기준 준수는 뒤로 미뤄야 한다. 승자 독식 사고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보수 활동가 마이클 앤턴은 2016년에 쓴 〈93편 항공기 선거〉라는 글에서 좌파가 미국이라는 비행기를 납치했다면서, 보수주의자들이 좌파를 저지하기 위해 조종실로 돌진해 결국 비행기가 추락하더라도, 그것이 미국을 구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 글은 그리스도나 기독교, 심지어 신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박한 파멸을 막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설사 그런 행위 자체가 또 다른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정당하다는 안톤의 주장은 현대 종교적 우파의 사고방식을 반영한다."(635)


"2023년 봄, 트럼프가 여러 건의 형사 사건으로 기소될 예정이고, 그중 첫 번째 사건으로 체포될 것이라는 소식이 발표된 후, 종교적 우파는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졌다. 마리스트칼리지 조사에 따르면 백인 복음주의자의 81퍼센트가 트럼프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으며, 67퍼센트가 다가오는 공화당 대선 예비 선거에서 트럼프를 지지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복음주의자들 다수가 새로운 공화당 후보를 찾는 쪽을 선호한다고 신호를 보내던 그해 초의 피로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트럼프는 포르노 스타에게 지급한 입막음용 돈과 관련된 사업 기록 조작, 국가 안보 기밀을 플로리다 저택으로 불법 반출한 혐의, 2020년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던 시도 등으로 기소되었고, 강간 및 명예훼손에 대한 민사 소송도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트럼프가 여러 가지 형사 문제로 점점 더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수록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지지는 더욱 굳건해졌다."(637-8)


"문화 전쟁이 기독교인들에게 수렁이 되고 마는 이유가 있다. 올바른 정치인을 선출하고 올바른 법을 제정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승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이넌스는 부유하고 보수적인 백인 공화당원 회중을 유혹하는 유한한 세계관을 해체하고, 그들에게 무한한 세계관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주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와이넌스가 고개를 숙이고 기도했다. 〈그리고 주님, 우리가 충실한 존재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이 돌이켜 치유받게 해 주십시오.〉 회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축도를 기다렸다. 와이넌스는 설교 첫머리에 읽은 구절로 돌아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말을 암송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멘."(6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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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역사 - 알지 못하거나 알기를 거부해온 격동의 인류사
피터 버크 지음, 이정민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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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사회의 무지


1장 무지란 무엇인가?


# 무지의 여러 분류들

1. How에 대한 무지 : 런던(의 여러 모습)에 대해서 안다.

2. What에 대한 무지 : 런던이라는 도시를 안다.

3. 의식적 무지 : 시칠리아 주민들이 마피아를 전혀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

4. 무의식적 무지 :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인지하지 못한다.

5. 자발적(고의적) 무지 : 타조가 모래밭에 머리를 박고 있다.

6. 비자발적 무지 : 기독교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이교도를 비난할 수 없다.

7. 능동적 무지 : 새로운 이주민들이 원주민의 존재와 영토 소유권을 무시한다.

8. 수동적 무지 : 특정 분야나 행동에 필요한 지식을 활용하지 못한다.


2장 무지에 관한 철학자들의 견해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인식론적 전환을 불러일으켰다.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지식을 습득하고 해당 지식의 신뢰성 여부를 판단하는지를 다룬다. 반면에 무지의 인식론은 우리가 어떻게, 왜 무지에 머물러 있는지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자들, 특히 피론을 필두로 한 회의주의학파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소크라테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가 대상이 동일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동일한 인상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같은 물체라도 서로 다른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보인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회의주의자들은 (회의懐疑, skepsis의 본뜻인) '조사照查, investigation'를 믿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믿음이나 확신을 두고, 이를 뒷받침하거나 위배하는 사례를 분석하며 지식을 얻을 때까지 판단을 유보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회의주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확신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 그것조차 확신하지 않는 반사적反射的 회의주의다."(36-7)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회의론자이자 16세기 고대 회의주의 부흥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미셸 드 몽테뉴는 보르도 시장 시절 가톨릭과 개신교 간 전쟁을 몸소 겪었다. 몽테뉴는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데카르트는 저서 《방법서설》(1637)에서 몽테뉴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그에게 답하는 방식을 통해 의심에서 확신으로 나아가는 이른바 방법론적 무지를 구현했다." "17세기 회의주의는 외양과 현실 간 격차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바로크 시대 세계관의 핵심이었다." "18세기 대표 철학자인 조지 버클리나 데이비드 흄은 둘 다 지식이라는 주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던 17세기의 전통을 이어 갔다." "카를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노동자 계급의 허위의식 등 지식 습득을 방해하는 사회적 장애물에 대해 논의했고, 프로이트는 지식에 무의식적 거부 반응을 보이는 심리적 장애물이 있다고 주장했다."(37-9)


3장 집단의 무지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상류층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 계급이 통제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층민에게 정보를 아예 주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를 주는 방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할 수 있도록 '환상에 불과한 행복'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지적, 도덕적, 정치적 헤게모니' 개념을 제시한 그람시는 지배 계급이 단지 힘만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힘과 설득, 강요, 동의를 결합해 통치한다고 보았는데, 설득은 일부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 피지배 계급 또는 하위 계급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의 눈으로 사회를 보는 법을 배운다. 이후 미셸 푸코는 이들의 지식을 가리켜 '예속된 지식savoirs assujettis'이라 했다. 이들에 따르면 하위 계급은 자신들만의 표본이 없기 때문에 지배 집단의 표본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43-5)


"인식론의 사회적 전환에 큰 자극을 준 것은 철학 외부에서 부상한 페미니즘이었다. 남성은 '내가 모르는 것은 지식이 아니다'라는 원칙에 따라 여성의 지식과 신뢰성을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해 왔다. 고대 로마에서 근대 초기 유럽에 이르기까지 신뢰할 수 없는 지식을 가리켜 '노파의 이야기aniles fabulae'라고 치부했을 정도다." "18세기 여성의 무지를 논한 저서는 '소피아'라는 필명으로 출판된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은 여성》(1739)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가 있다. 소피아는 여성 무지의 책임이 '미신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지 않은 남성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시민정부의 헌법 자체가 여성의 이해력 증진을 차단한다는 점에서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이며 '오늘날의 여성은 무지로 인해 어리석거나 사악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이 '순수라는 허울뿐인 명분 아래 계속 무지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46, 49)


"19세기와 20세기 여성 학자와 과학자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남성이 여성의 성과를 끈질기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성과 여성의 공동 작업에서 그와 같은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성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한 불운한 여성 과학자에는 메리 애닝, 리제 마이트너, 로절린드 프랭클린 등이 있다. 메리 애닝은 지금도 주로 화석 수집가이나 중개인으로 소개된다. 이 때문에 19세기 전반기에 도싯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해 고생물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묻히기 일쑤다. 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는 1930년대에 오토 한과 함께 핵분열을 발견했지만, 이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주인공은 남성 동료인 오토 한뿐이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DNA의 암흑 여인'으로 불린다. DNA를 발견해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이 그녀의 지분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과학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용 기억상실' 중 하나에 해당한다."(50-1)


4장 무지의 연구 


"우리는 보통 초기 역사 시대를 무지의 시대로 여긴다. 하지만 모든 시대가 무지의 시대라고 해야 겸손할 뿐 아니라 정확할 것이다. 바로 다음의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지난 두 세기 동안 눈부시게 성장한 집단 지식이 대다수 개인의 지식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인류 전체를 놓고 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개인은 자신의 조상보다 조금 더 알 뿐이다. 둘째, 새로운 지식이 확산되면 다른 지식은 사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중국어 등 세계적 언어를 지식으로 습득하는 것이 증가함에 따라 다른 언어의 소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또한 개념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될 때는 (전환 과정에서 과거의 지식 일부가 손실되는) '쿤 손실'이 발생한다." "셋째, 최근에 정보의 양이 급속하게 늘기는 했지만, 이는 엄연히 지식의 증가와는 다르다. 지식 증가는 정보와 달리 검증, 소화, 분류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57-8)


"의학자, 철학자, 심리학자들은 초기 무지 연구에 기여했지만 각자 몸담은 분야가 달라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후 무지에 관한 책과 논문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사회학자들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제 '아그노톨로지Agnotology'는 여러 학문을 아우르는 분야로 자리매김했다." "무지 연구에 대한 관심이 지난 40여 년 동안 특히 왕성하게 일어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그 중 하나는 연구 그 자체의 발달이다. 특정 문제를 연구할 때 그것을 뒤집거나 반대로 돌려 상반된 측면을 살펴봄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제 기억을 연구하는 학생들은 망각으로 눈을 돌렸고, 언어를 연구하는 학생들은 침묵을 연구하고 있다. 성공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학자들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도 연구한다. 또한 지식 사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데 힘입어 학자들 사이에 지식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고, 그에 따라 무지 연구도 뒤따르게 된 것이다."(64-5)


5장 무지의 역사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바로 '없음'을 어떻게 연구하느냐 하는 점이다." "다소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은 무지의 개념을 시대별로 살펴보는 것이다. 해당 사례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이자 학자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의 〈자신의 무지와 다른 많은 이의 무지에 관하여〉라는 편지가 자주 언급되어 왔다. 페트라르카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자신은 '모른다는 점을 안다'고 하면서, 그가 무지하다고 주장하는 네 명의 젊은 베네치아인에 맞서 자신을 변호했다." "무지의 역사를 알기 위해 최근에는 그림자를 보고 누군가를 추적하는 것과 같은 간접적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후향적 방식'으로, 지식의 증가에서 무지의 점진적 감소로 초점을 옮기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셜록 홈즈가 하는 것처럼 이른바 '설득력 있는 부재'를 연구하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무지를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비교를 통해 중대한 부재를 드러낼 수 있다."(71-2)


# 셜록 홈즈는 경주마 실종 사건을 조사하던 중 경비견이 그날 밤에 짖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래서 경비견과 친밀한 사람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넬 치얼라인은 서구인들이 근대 초기 레반트(동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특히 아랍의 위대한 역사학자 이븐 할둔의 저서를 비롯한 일부 도서가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특정 정보 역시 도서관 소장 도서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관행은 '빈 역사'라고 부르며, 기록 보관소에 특정 자료가 없는 것을 중요한 현상으로 본다." "세 번째 방식은 기존의 승리주의 서사를 뒤집어 무지의 감소 대신 무지의 증가, 혹은 무지의 폭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에서는 언어의 소멸, 책의 소각, 도서관 파괴, 발견의 집단적 망각, 지식인의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승자보다는 패자, 성공보다는 실패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의 가치는 전통적인 이야기의 편향성, 즉 역사학자들이 흔히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방식만 활용할 경우)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찬가지로 편향적일 수 있다."(72-3)


6장 종교의 무지 


"무지는 종교의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는데, 부정신학否定神學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부정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어떤 것이 아닌지'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으며(예를 들면 '신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함으로써 '신이 무한한 존재'임을 설파한다), 무지를 통해 신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종교 지도자들은 종종 야훼, 하나님, 알라의 의도를 안다고 자신하지만, 종교는 인간의 무지로 인해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다른 종교인들의 믿음을 자신과 다른 지식으로 여기기보다 지식의 부재라 단정 짓고, 무지를 비난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유럽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 환경에서 전도해야 했지만, 본국의 동료들에 비해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그들이 개종시키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선교사들이 쓴 글을 보면 신도들을 무지하다고 여긴 경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개종한 이들 스스로도 그 같은 견해를 받아들였다."(77, 83)


"개인 차원이든 집단 차원이든 타 종교에 대한 무지는 숨기거나 위장하는 행위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강제 개종이 이루어졌을 때 더욱 그렇다. 신대륙에 끌려와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은 서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토착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 종교에 박해가 이루어지는 한 위장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공개적으로는 어떤 종교를 지지하면서 실제로는 그와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다." "이슬람교의 시아파가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시행해온 위장을 아랍어로 '타키야taqiyya'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두려움'이나 '신중함'의 뜻도 담겨 있다."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이 가톨릭교, 루터파, 칼뱅파 지역으로 분열되면서 '그릇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위장이라는 관행을 따랐다. 이 위장은 당시 장 칼뱅 등이 니코데미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니코데미즘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바리새인 니코데모가 남몰래 밤을 틈타 그리스도를 만나러 간 것에서 유래했다."(93-5)


"'불가지론자agnostic'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영적 지식gnosis의 부족을 의미한다. 기록상 최초의 불가지론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크세노파네스로, 그는 '어떤 사람도 신에 관한 분명한 진실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른바 '독실한 불가지론'은 유대교와 기독교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숨어 있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구약성서(이사야 45장 15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유대인 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적 속성을 제외한 채 창조주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신론자야말로 논의에 포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18세기 이신론자들이 믿었던 신은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자체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마치 시계 장인이 만든 시계가 스스로 작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여기서 한 가지 교훈을 이끌어냈다. '신을 살피려고 들지 말라. 인간의 적절한 연구 대상은 인간이다.'"(95-7)


7장 과학의 무지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과학을 점차 커지는 구체球體로 상상했다. 표면에 추가되는 모든 것은 주변의 무지와 더 광범위하게 접촉한다는 개념이었다. 특정한 문제가 해결될 때마다 또 다른 문제가 모습을 드러낸다. 과학자들의 시선은 항상 미래를 향하고 있다." "일단 안개가 걷히면 과학자들은 선택적 무지를 실천한다. 특정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일부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선택을 무지의 관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선택이 잘못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과학자들은 미국 철학자 존 듀이가 말한 '진정한 무지'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무지는 겸손, 호기심, 열린 마음을 동반할 가능성이 높아 유익하다. '예상치 못한 무지'는 연구 과정에서 일어나는 뜻하지 않은 발견을 뜻한다. 무지는 놀라움으로 이어지는데, 놀라움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게끔 만들어 예상치 못한 새로운 지식의 창을 열어 준다."(104-5)


"무지의 주요 유형 중 하나는 알고 싶지 않은 데서 비롯된 의도적 무지다. 이는 특정 아이디어, 특히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반감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칼 포퍼가 말한 적극적 무지와도 연관된다." "이 같은 의도적인 맹목 사례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다윈의 진화론, 파스퇴르의 미생물 발견, 멘델의 유전 법칙, 막스 플랑크의 양자론 등에 대한 저항이 있다. 플랑크가 '과학은 장례식을 한 번 치를 때마다 진보한다'는 쓴소리를 남긴 것은 양자론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반감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의 뜻은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자들을 설득해 깨닫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마침내 죽고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것이다. 기성세대 중에는 자신의 전문적 자본을 투자한 이론을 포기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많다.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이해되지만,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107-8)


8장 지리학의 무지 


"영국의 지리학자 브라이언 할리는 지도의 '침묵'(그가 공백보다 선호한 용어) 연구에서 지도가 지리적 지식을 널리 확산시키던 시기에 일부 국가의 왕들이 자국의 자원이 다른 나라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자국 지도를 비밀에 부친 사실에 주목했다. 16세기에 포르투갈 역시 인도, 중국, 아프리카, 브라질에 무역 기지를 세우고 제국을 건설하면서도 지도를 포함한 자국 정보는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1504년 마누엘 1세는 지도 제작자들이 콩고 너머의 서아프리카 해안을 지도에 표시하지 못하게 하고, 기존 지도까지 검열하도록 했다."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 제국에 대한 지식을 철저히 통제해 항해사 수업을 담당하는 학자들은 외국인들에게 지식을 전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16세기 후반 모스크바 대공국에 살던 네덜란드 상인은 그 지역의 지도를 구할 수 없었는데, 지도를 유출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기 때문이다. 이 같은 비밀주의는 유럽 정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146-7)


"환경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급격히 확산되었다. 생물 다양성의 감소는 이제 대중이 주목하는 사안이다. 2014년 엘리자베스 콜버트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출간해 최근의 생물 다양성 감소를 지구 역사상 발생한 다섯 번의 대멸종 이후 여섯 번째 대멸종으로 보았다." "기후 변화에 대한 지식은 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스웨덴 물리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1896년에 이미 지구 온난화를 예측했다(독자 여러분의 짐작대로 당시 선배 학자들은 그의 예측을 무시하고 넘어갔다). 1938년 영국 공학자 가이 캘런더는 지난 반세기 동안 온난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자연적인 주기로 일어난 게 아니라 화석 연료를 태워 생긴 온실 효과 때문이라 알고 있었다. 나쁜 소식이 대개 그렇듯 과학자들의 이 같은 발견은 (꽤 오랫동안) 거의 무시되거나 깡그리 부정당했다."(155-6)


2부 무지의 결과


9장 전쟁의 무지 


"전쟁에서 군사 작전은 다른 무엇보다 무지와 지식 간의 싸움이다. 아군의 계획을 적군이 모르게 철저히 관리하는 한편, 적군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웰링턴 공작이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전쟁의 모든 기술은 언덕 저편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있다. 그리고 그에 실패할 때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전쟁은 적의 움직임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한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는 양쪽 진영 모두 무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그나마 정보를 좀 더 확보해 중대한 실수를 적게 한 쪽이 승자로 등극한다." "무지 중에서도 지휘관의 무지는 문제가 된다. 일반 병사들은 보통 자신들이 다음으로 공격하고 후퇴할 시간과 장소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지식의 공백은 소문으로 채워진다.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 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참호 안에 나돌았던 가짜 뉴스를 주제로 선구적인 연구 논문을 집필했다."(160-2)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무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깁슨은 베트남전을 다룬 책에서 지식의 부재가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공백이 있는가 하면 다양한 이유로 전쟁을 얕잡아 보거나 무시한 데  따른 공백도 있다는 것이다. '군부대는 효율성으로 평가받는데, 민간 사상자에 신경 쓰는 것은 여기에 방해만 되기 때문에 군 관료들은 ··· 민간 사상자 수를 집계하는 데 무관심했다'고 깁슨은 설명했다." "침략자들이 군사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최대 약점은 외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국가의 언어, 관습, (열대 기후를 포함한) 지형에 대부분 무지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대한 무지는 미국인 대다수가 이른바 베트남의 같은 편과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공산주의는 물론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외부 개입이 혁명에 찬물을 끼얹기는커녕 불을 더욱 지핀다'는 정보의 속뜻은 무시했다."(173-5)


10장 비즈니스의 무지 


"비즈니스에서 특정 무지는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득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매에서는 입찰자들이 서로 얼마까지 부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판매자가 이득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거래 당사자들의 '대칭적 무지'는 거래 이윤으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왔다. 하지만 더 흔한 것은 '비대칭적 무지'다. 이와 관련해 미국 경제학자 조지 애컬로프가 제시한 '레몬 시장의 법칙'은 유명하다. 이 법칙에 따르면 중고차 시장에서는 불량 중고차(레몬)가 좋은 중고차를 몰아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경제학자 케네스 애로는 정보를 사고파는 문제를 분석함으로써 이름을 알렸다. 애로의 역설은 자신이 구매하려는 상품에 대해 미리 알고 싶어 하는 고객의 욕구와 돈을 받기 전 정보를 완전히 누설하지 않으려는 판매자의 욕구가 상충하는 점을 지적한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핵심은 상대적 무지다. 모든 참가자가 어느 정도 무지하지만, 그나마 덜 무지한 참가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183-4)


# 레몬 시장의 법칙 : 판매자는 자신이 파는 중고차의 좋지 않은 상태를 잘 알고 있지만 밝히지 않고, 구매자는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차를 사게 된다. 이처럼 정보의 불균형으로 인한 무지를 비대칭적 무지라 한다.


"위장 혹은 특정인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숨기는 '전략적 무지'에 의존하는 불법 비즈니스에는 알코올, 마약, 위조품 같은 금지 물품, 물품의 운송(밀수)과 판매(암시장)뿐 아니라 성매매, 청부살인 같은 불법 행위도 포함된다." "여기서 무지한 자는 세관/과세 공무원, 경찰이다. 실제로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정부 고위직을 포함해 많지만, 정확히 언제 어디서 일어나는지 아는 이들은 적다. 어떤 경우에든 무지 자체는 아니더라도 위장된 무지는 유지되어야 한다." "1958~1962년 대기근이 발생한 중국에서는 비공식 배급 시스템이 생겨나거나 훨씬 중요해졌다. 당원들은 끝도 없이 교활한 방법으로 국가를 속였고, 물물 교환과 위조 허가증 사용을 포함한 병행 경제parallel economy가 발전했다. 생산자 집단에서 배급을 더 많이 받기 위해 노동자 수를 부풀림에 따라 '죽은 영혼의 거래'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스템은 회색, 비공식, 병행(평행) 대안, 그림자 경제로 다양하게 알려져 있다."(200-2)


11장 정치의 무지 


"독재자가 국민들의 무지를 조장한다면 민주주의 세력은 불안해지게 된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문명화된 국가가 무지하면서도 자유로운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는 자신이 수백만 유권자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굳이 정보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합리적 무지'라는 새로운 용어로 설명했다. 하지만 2016년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한 수많은 유권자의 무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린다 알코프는 그들의 무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의 무지는) 지식 부족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지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공동의 노력, 의식적인 선택, 일련의 선택에 따른 결과이다. 특정 뉴스 기사나 뉴스 소스를 회피하고, 특정 대학 과정을 멀리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날 뉴스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바로 그 예다.〉"(215-8)


"18세기 후반 독일어권 대학에 행정학이 개설되었다. 당시에 국가에 대한 지식을 독일어로 '통계학Statistik'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단어 '통계학Statistics'이 유래했다. 이 같은 단어의 의미 변화는 정부가 공장과 학교, 빈곤과 위생을 조사하는 데 점점 관심이 많아졌음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정보는 19세기부터 막대 그래프, 그래프, 원형 차트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무지에 대한 지식의 승리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모든 승리가 그렇듯 이 과정에서 얻은 것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정보가 지나치게 많아 다 소화하기 불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국가 차원의 조사와 지도 작성처럼 지식의 추가가 분명한 행위도 오히려 무지를 조장할 수 있다. 특히 제임스 스콧이 '빈약한 단순화'라고 표현한 지도와 통계표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때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지도와 통계는 현실을 단순화하거나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에 무지하게 만든다."(234-5)


12장 놀라움과 재앙 


"역사적으로 위험 징후를 무시하다가 자연재해를 입은 사례는 너무도 많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어 발생한 뉴올리언스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재난 연구에서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대응 실패가 드러났다. 관리청은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 임시 거처로 이동식 주택과 텐트를 제공했지만, 호텔에 수용하는 것은 꺼렸다. 의료 시스템은 재난에 대비하지 못했다. 허리케인이 매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탓에 대비 부실 문제가 늘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부분인 빈곤층은 가진 게 적고 홍수에 더 취약한 저지대에 살았기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이른바 무지의 사회적 분배를 드러냈다. 도시 취약 지대에 사는 빈곤층은 홍수가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안전하고 비싼 지역에 거주하는 공무원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안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안전까지 위협해 가며 현장 지식을 무시했다."(247-8)


13장 비밀과 거짓말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문과 구두 소통은 당연히 신문보다 신뢰도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지만, 소련에서는 오랫동안 그 반대였다. 또한 소련의 지도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거나(교회 등) 대중에게 숨기고자 하는 것(강제 수용소 등)들을 누락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었다.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새로운 과학 도시 나우코그라드도 지도에서 누락되었는데, 이 중 일부는 시베리아에 위치해 있었으며 강제 수용소 죄수들에 의해 건설됐다. 핵물리학자이자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1968년 소련 내부에서 쓴 글에 따르면, 소련은 여행이나 정보 교환의 자유 없이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시민들에게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사하로프와 같은 반체제 인사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은 해외에서 출판한 책이나 비밀리에 직접 손으로 만든 출판물인 사미즈다트samizdat(러시아어 '스스로'와 '출판'의 합성어)를 통해 정보를 유포하는 것이 전부였다."(270)


"정부가 대중을 무지하게 만드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대형 재난을 은폐하는 것이다. 1943년 벵골 대기근 당시 정부는 '기근'이라는 용어 사용을 금지했다. 또 다른 악명 높은 사례는 1932~1933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대기근인 홀로도모르Holodomor 사건으로, 당시와 이후 소련 정부의 입장은 기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1989년 6월 4일 사건'이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알려진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규제해 6월 4일에는 인터넷에서 '오늘' 또는 '그해' 등 민감한 단어를 사용하는 게 금지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성인일 때 목격하고 이제 노인이 된 사람들은 개인적인 견해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무지를 가장한 정권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은 알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지식을 지우려고 노력한다. 프로이트식으로 표현한다면, 공식적인 억압은 비공식적인 진실 억제에 의해 강화된다."(273, 276)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조차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된 경우가 많다. 탈진실 시대에 관한 책은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이 단어는 그보다 12년 전인 199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스핀 닥터spin doctor'(주로 정치인이나 공인들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대중의 인식을 조작하기 위해 고용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라는 문구는 1940년대 〈뉴욕타임스〉에서 사용되었다. 가짜 뉴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프랑스어 '포스 누벨fausses nouvelles'은 영어의 '페이크 뉴스'와 같은 전통적인 표현이다. 또 하나의 전통적인 용어는 '카나르canard'(허위 보도 또는 유언비어를 뜻한다)로, 이는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가 당시 파리의 언론계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사용했다. 노련한 기자가 신참 기자에게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독자들에게 뉴스를 팔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를 우리는 카나르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미디어는 고의적인 허위 정보뿐만 아니라 무지 또는 부주의의 결과인 오보도 퍼뜨린다."(298-9)


14장 불확실한 미래 


"불확실성은 미래에 대한 무지로 설명할 수 있다. 비즈니스, 정치, 전쟁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중요한 결정들은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근거해 내려졌다.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예상과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결과는 의도한 것과 정반대의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물론 과거의 트렌드를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때의 추정은 우리가 항상 하는 행동을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트렌드가 항상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다. 나심 탈레브가 '블랙 스완'이라고 이름 붙인 대공황이나 베를린 장벽 붕괴와 같이 극단적인 충격을 주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 스튜어트 파이어스타인이 말했듯이 예측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예측이 얼마나 자주 틀리는가이다. 실제로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확신할 수 없다는 것뿐이므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것을 예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302, 308-9)


"한 세기 전 미국의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측정이 가능한 리스크와 측정이 불가능한 불확실성을 구분했다. 나이트는 경제 행위자들의 '실질적 전지전능'을 가정하는 것을 비판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의 요소를 강조했다. 몇 년 후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불확실하며, 20년 후의 구리 가격과 이자율, 새로운 발명품의 구식화 등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문제들에 예측 가능한 확률을 도출할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다. 우리는 그저 모를 뿐이다〉라고 했다. 불확실성과 무지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비슷한 강조는 요제프 슘페터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변화를 무시하는가 하면 경제 행위자들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행동한다고 가정한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완전경쟁(수많은 수요자와 공급자가 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똑같은 품질의 상품을 주어진 가격으로 자유롭게 사고파는 상태)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전제이기 때문이다."(312)


15장 과거에 대한 무지 


"역사가들이 여전히 편향bias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관점의 문제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는 1920년대 사회학자 칼 만하임과 1980년대 페미니스트들이 논의한 것처럼, 적어도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자 라 모트 르 베이예는 만약 우리가 카르타고의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만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포에니 전쟁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물었다. 카이사르가 아닌 베르킨게토릭스가 자신의 회고록을 썼다면,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베이예는 역사가의 작업을 요리사에 비유해 '역사는 부엌의 음식처럼 취급된다. ··· 모든 국가, 종교, 종파가 동일한 날것의 사실을 취하고 ··· 자기 입맛에 따라 양념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베이예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역사서를 읽은 것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 국가와 집단에서 말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가 특정 역사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편견prejudice 때문이었다."(321)


"장기적으로 볼 때 근본적인 의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적 무지'의 발견, 특히 역사가 대부분 엘리트에 의해, 엘리트를 위해, 엘리트에 관한 내용으로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1820년대에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예멜리안 푸가초프가 이끈 농민 반란의 역사를 연구할 때, 차르 니콜라이 1세는 푸시킨에게 〈푸가초프 같은 자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말했다." "1960년대에 에드워드 톰슨과 에릭 홉스봄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제로 쓴 책들은(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홉스봄의 《원초적 반란자들》) 지도자들보다는 피지배층인 일반 대중의 삶과 고통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도 중점을 두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는 노동계급 남성들로 시작되었지만, 거기에는 곧 여성의 역사도 포함되게 되었다. 새로운 지식은 과거의 무지를 더욱 확실히 깨닫도록 해주었다. 노동 계급, 농민, 여성에 대한 무지뿐 아니라 최근에는 환경에 대한 무지로까지 인식이 확장되었다."(323-5)


맺으며_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무지


"이 책은 수세기에 걸쳐 새로운 지식의 부상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무지의 부상을 수반했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집단으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개인으로 본다면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알지 못한다." "요컨대 우리는 지식과 무지를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생각해야 하며, 일반 지식이나 통념이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리엄 솔로몬이 말했듯이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무지를 가능케 한다.' C. S. 루이스의 말을 빌린다면 〈모든 새로운 학습으로 그에 따른 새로운 무지를 위한 공간이 만들어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개인, 문화, 시대의 무지를 언급하기 전에 항상 두 번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무지하다. 다만 무지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지식을 가진 자들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335,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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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부패한 중국은 왜 성장하는가 - 부패의 역설이 완성한 중국의 도금 시대
위엔위엔 앙 지음, 양영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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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부패는 무조건 나쁘다는 착각


일반 통념에 의하면 부패는 경제 성장을 저해한다. 국가 간 회귀 분석은 부패와 빈곤 사이에 강력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개발 기구나 많은 학계에서는 부패를 근절하는 것이야말로 경제 발전의 선결 조건이라고 한다. 최근 몇 년간 부패는 대중의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고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볼 수 있듯이 권위주의 체제를 전복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은 부패의 역설을 보여 준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1978년 개방 이래 중국은 “역사적으로 가장 빠르고 지속적으로 경제 규모를 확대해 왔다.” 광범위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경제 성장은 왜 빠르게, 오랜 기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은 중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예외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국과 가장 유사한 것은 19세기 말의 미국이다. 이 시기의 미국은 맹렬한 성장과 눈에 띄는 불평등, 그리고 재력가들과 결탁한 부패 정치인들로 특징지어진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1978년 이후 중국의 ‘도금 시대’가 건설되는 과정이다. 12-3)


# 부패의 두 가지 분류

1. 교환(뇌물) 대 절도(갈취)로 분류한 부패

2. 엘리트(인허가료) 대 비엘리트(급행료)와 관련된 부패


# 부패의 네가지 유형

1. 바늘도둑은 절도, 공공 자원의 잘못된 사용 또는 일선 관료의 갈취를 의미한다.

2. 소도둑은 공공 재원을 통제하는 정치 엘리트가 공공 재원을 횡령하거나 유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3. 급행료는 업계 종사자나 시민들이 장애물을 우회하거나 시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관료에게 주는 뇌물이다.

4. 인허가료는 높은 수준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비즈니스 행위자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고위 관료에게 시간 단축에 그치지 않고 배타적이고 수익성이 높은 특권을 받기 위해 주는 뇌물을 의미한다.


중국에서 두드러진 부패 유형은 바늘도둑과 소도둑이 아니라 인허가료 부패다. 왜 중국에서는 명백한 도둑질보다 인허가료가 부패의 중요한 유형이 되었는가? 시장 개방 이후 중국의 정치 시스템은 엘리트와 비엘리트 모두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서 창조된 부를 향유하는 이익 공유의 논리를 따랐다. 전체 중국 관료주의는 발전 독려에 대해 인센티브가 있었다. 정치 엘리트는 경력이나 금전적 차원 등 모든 측면에서 발전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려는 인센티브가 있다. 지방 리더에게 보다 더 확실한 인센티브는 금전적 인센티브다. 지방 경제가 번영하면 할수록 지방 리더의 수익은 더 많아진다. 하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익 공유는 수당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들의 공식적 월급은 한없이 낮은 수준이지만 보너스, 선물, 무료 식사, 보조금 등 다양한 부가 혜택들을 통해 보충된다. 부가 혜택은 수익을 발생시키는 인센티브로도 작용하고 관료들이 바늘도둑 같은 작은 규모의 부패에 의존하는 것을 막는 기능도 한다. 21-2)


왜 중국에서는 이익 공유가 자리를 잡았으나 다른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못했을까? 나는 덩샤오핑의 역사적인 결정, 공산당의 일당 독재를 유지함과 동시에 공산당 관료들에게 자본주의적 성장의 이익을 나누어 준 시장 개방을 주목한다. 지대rents, 租같은 중국의 부패는 그들의 노력과 참여를 보상해 준다. 이것은 소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소련의 급격한 정치, 경제적 변화(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당원들이 전체적으로 당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유명한 강도질 비유를 한다면, 이익 공유제는 중국 관료를 ‘정주형 강도stationary bandits’로 만들었다. 따라서 중국 관료는 전체적인 후생을 높이려고 했는데 이로부터 일정 비율의 이익을 안정적으로 떼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패가 공산당 관료에게 열정적으로 시장 개혁을 도입할 유인을 제공한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강도질하고 도망가는 것을 반복하는 ‘떠돌이 강도roving bandits’와는 다르다. 22-3)


또한 중국에서는 약탈적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이 선거를 통한 것이 아니라 지역 간 경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프로젝트나 투자자들을 유치하려는 극심한 경쟁에 직면한 지방 리더들은 하위 공무원들에게 ‘약탈하는 손’으로 작용하는 것을 자제했다.(경제학에는 여러 유형의 손이 등장한다. 정부의 역할을 규정할 때 크게 도움의 손helping hands과 약탈의 손grabbing hands으로 구분한다.) 그런 노력들은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 열정 수준까지 승화된다. 후베이의 사례를 보면 “투자자는 하느님이다. 투자자를 데려오는 사람은 영웅이다. 관료들은 공복이다.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는 자들은 죄인이다”라는 구호가 등장했을 정도였다. 이게 전부는 아니다. 계약 체결은 강력한 성장 촉진제였다. 리더들은 ‘우대 정책’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리더들은 경쟁에서 앞서 나가기 위해 자기 지방의 위치와 그 전략적 중요성, 상업적 이점, 브랜드 등을 통해 경쟁력을 보여 주어야 했고 발전 전략을 개선해야 했다. 23-4)


2장 독이 되는 부패 약이 되는 부패


나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공산주의 이후의 사회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오랫동안 ‘경제적 자유화가 왜 중국에는 활기찬 자본주의적 성장을 불러왔으나 소비에트공화국에는 몰락을, 러시아에는 경기 침체를 가져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품어 왔다. 중국과 러시아 모두 체제가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하는 시기에 폭발적인 부패의 성장을 경험했다. 왜 두 나라의 경제적 결과는 이토록 다른가? 대중적으로 설득력 있는 하나의 설명은, 러시아의 부패가 중국의 것보다 ‘더 파괴적’이었다는 것이다. 소도둑, 급행료, 바늘도둑 같은 유형의 부패는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고 공공 재산을 낭비하게 만든다. UCI 부패 지수 방식으로 수집된 증거들은 다음 사실을 보여 준다. 러시아는 급격한 정치적 자유화로 인해 모든 형태의 부패가 봉인 해제된 반면 중국은 성장을 저해하는 부패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했음을 말이다. 중국에서는 경찰관들과 하위 공무원에 대한 규율이 좀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41, 43)


중국과 인도를 비교하면 급행료(행정적 장벽 또는 지연을 넘기 위한 뇌물)와 인허가료(프로젝트에 특별한 접근을 위한 뇌물)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도에서는 장애물을 넘어서기 위해 뇌물을 제공하고 중국에서는 수익성이 좋은 사업 계약을 따내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다. 인도의 뇌물이 윤활유라면 중국의 뇌물은 슬러지에 가깝다. 발전 지향적인 중국 전제 정치에서 권력은 개별적 지도자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손쉽게 규제를 해제하거나 문호를 개방할 수 있는 권력을 지녔다. 반면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근거한 인도의 분절적인 민주주의 정치 체제는 많은 당국자들에게 결정을 막을 권한을 부여하지만 계약을 확대하거나 요구 사항을 일방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권한은 주지 못한다. 한 마디로 인허가료는 중국이라는 자본주의 기계에 연료를 공급했고, 사업 계약을 위해 인허가료를 지불한 자본가를 부자로 만들었으며, 빠른 성장을 이룩한 공산당 간부에게 두둑한 보상을 주었다. 44-6)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무언가 공통점이 있다. 부패의 지배적인 유형이 바로 인허가료라는 점이다.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중국은 4가지 부패 영역 모두에서 그 정도가 미국보다 심하다. 그렇지만 인허가료만 보면 그 차이가 적다. 중국은 확실히 뇌물의 통로가 되는 광범위한 네트워크 형성 분야에서 지배적이다. 그러나 회전문 인사와 로비를 통한 규제 포획을 보면 미국이 더 크다. 이는 미국 자본주의, 민주주의에서 인허가료가 제도화된 것을 의미한다. 이미 몇몇 미국 학자들은 이 점을 지적했다. 레시그는 미국 의회를 예로 들며 “우리는 제도 내의 그 어떤 구성원도 부패하지 않았지만 제도 자체가 부패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요약하자면 미국에서는 인허가료가 기본적으로 제도화된 것이다. 중국의 인허가료는 여전히 개인적인 관계, 뇌물, 불법적인 행위와 얽히고설켰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인허가료는 낙후된 인허가료라고 표현할 수 있다. 47-8)


3장 중국의 부패는 어떻게 진화했는가


나는 중국 부패의 현 상태를 불러온 요인으로 2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1993년 중국 지도부의 중앙 집중적 계획에서 ‘사회주의 시장 경제’로 이행하는 기념비적 결정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는 국가가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시장 경제를 말한다. 공산당 간부들은 민간사업과 새로운 산업에 대해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여전히 핵심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이 권한은 그들에게 거대한 개발도상국 시장에서 상당한 권력을 부여했으며, 민간 자본가들은 공산당 간부들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을 경주했다. 둘째, 중앙 정부가 1998년부터 시작한, 광범위한 행정 개혁을 통한 개혁이 있다. 이러한 개혁은 국가의 공공 금융 감시 능력을 제고했고 거래를 수반하지 않는 뇌물을 억제했다. 중국의 정실 자본주의 발호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두 번째 과정은 대체로 간과되었다. 즉, 부패는 중국이 명령 경제에서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데 있어서 추동자이자 산물이었다. 55-6)


1993년 이후 정립된 사회주의 시장 경제란 무엇인가? 서구의 관찰자들은 이 구호를 의례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는 단어는 ‘시장 경제’를 이룩하려는 목표를 위한 수식어이다. 사회주의 시장 경제 건설은 중앙 계획 경제를 시장 구조로 대체하고 경제 부문에서 국유화 부분을 극적으로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징은 국가가 정한 생산 할당량과 가격 통제를 1993년 이후 폐기 처분했다. “정통 계획 시스템은 거의 소리 없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 사라졌다”고 배리 노튼Barry Naughton은 이야기한다. 이것은 국유 기업의 규모 축소와 1990년대 개혁의 거대한 물결을 동반했으며 “조대방소抓大放小(큰 것은 잡고 작은 것은 놓아준다. 대형 국유 기업은 집중적으로, 소형 국유 기업은 느슨하게 관리해서 활성화한다는 의미)”로 알려졌다. 1980년대에 유행한 국가와 민간 기업의 혼합체인 향진 기업과 집체 기업 역시 일제히 사유화의 길을 걸었다. 59-60)


1993년 이후의 개혁이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을 감소시키지는 않았다. 개혁은 역할을 바꾸었을 뿐이다. 1980년대 동안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계획과 명령이었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얼마의 가격에 생산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1993년 중앙 계획이 해체되고 당-국가 공무원은 새로운 역할을 떠맡았다. 새로운 산업 육성, 투자 촉진, 시장에서 자금 융통, 도시 계획, 파괴와 건설 등을 정말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수행해야 했다. 월더에 의하면 이러한 역할은 공산당 간부들에게 “소련에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던” 새로운 권력의 원천을 제공했다. 따라서 중앙에 의해 진행된 개혁들이 국가의 역량을 증대시키고 교환 없는 형태의 부패를 억제했어도, 새로운 형태의 부패가 번창했다. 새로운 형태의 부패는 정치적 내부자들의 국가 자산 갈취, 밀수꾼과 폭력배와의 결탁, 정부 직책 판매, 그리고 무엇보다 광범위한 뇌물의 네트워크 형성 등을 포함한다. 62)


지방 정부는 비록 토지를 매각할 수는 없지만 일정 기간 동안 토지를 사용할 권리를 ‘토지출양금土地出让金’이라는 명목으로 팔고 전액 지방 정부의 금고에 귀속시켰다. 토지와 관련된 수입 증가는 전국적으로 1999년 510억 위안에서 2012년 3조 2000억 위안으로 추정된다. 이런 배경은 부동산 시장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수익성이 나도록 만들었다. 거대한 신흥 시장, 경제에서 확장적인 정부의 역할, 수조 위안에 달하는 불법 자금을 배경으로 권세가를 형성하는 개인들 간의 광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됐다. 정치인들은 그들 사이, 가족과 민간 기업가들 사이에 상호 의존하는 밀접한 관계를 만들었다. 월더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그 결과는 ‘초-후견주의super-clientelism’였다. 이는 과거 수십 년간 상상할 수 없었던 ‘훨씬 더 강력하고, 부유하고, 수단이 좋은 당 엘리트’의 출현으로 귀결됐으며, 권력과 부의 그물이 최상층부에서 최하층부 수준까지 내려오는 위계적 질서를 만들어 냈다. 63, 65)


4장 중국식 관료주의가 이익을 공유하는 방법


중국의 중앙 정부는 국가 비전과 광범위한 정책을 내놓지만 지방 정부는 경제적, 사회적 발전 계획에서 엄청난 정도의 자치를 행사한다. 엘리트 관원은 중국의 독재적인 위계 구조에서 분명 강력한 인물들이지만 행정부의 나머지 99퍼센트 집단은 통치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며 일선에서 정책을 집행한다. 게다가 개혁 시기의 일반 경찰관, 사무원, 검사원 그리고 학교 선생들은 단순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잠재적인 사업가 소질을 가진 직원들이었다. 경제가 도약하는 초기에 지방 정부는 공무원들의 사적인 네트워크를 통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일선 관료는 ‘약탈하는 손’이 되든지 또는 ‘도움의 손’이 되든지 다 될 수 있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수수료나 벌금을 부과하거나 과도한 검사로 기업을 괴롭혀 기업가들의 성장을 저해할 수도 있다. 또는 기업가들을 서로 연결하거나, 각종 편의와 맞춤식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회의를 조직하는 등으로 경제를 부양할 수 있었다. 86)


중국의 공공 피고용인들은 ‘쌍궤雙軌(두 가지 노선이나 방법)’ 방식으로 보상을 받았다. 다양한 수당, 특혜와 결합한 공식적 급여가 바로 그것이다. 중국에서 수당과 특혜는 2가지 소득 원천에 연동되었다. 그 2가지는 지방 정부의 세수, 개별 공무원이 징수하는 수수료와 벌금이다. 가상의 간부(간부는 공산주의 용어로 관료를 의미한다) 리Li씨를 생각해 보자. 리 씨는 ‘옥玉’이라는 이름의 현县에서 건설부 직원으로 일한다. 리 씨는 국가적으로 표준적인 공식 급여를 받는다. 여기에 그는 옥현의 예산으로부터 수당을 받는다. 이 수당은 옥현이 거둔 세금과 유보된 이익에서 지급된다. 세 번째 수당이 또 있다. 그것은 리 씨가 속한 부서인 건설부가 수수료, 벌금, 사용료, 보조 서비스로 받은 이익 중 일부인 것이다. 세금이 아닌 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각 부서들은 부서원의 혜택(연장 근로, 집단 여행, 무료 식사, 선물 카드 등)을 책임진다. 중국의 개혁 시기에는 이러한 이익 공유 관행이 전체 공공 행정 기관에서 벌어졌다. 89)


중국의 일선 관료들이 비즈니스에서 ‘도움’과 ‘약탈’ 모두를 통해서 수입을 얻는 행위는 집단 행동 문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 이 관료들은 약탈(수수료, 벌금, 개별 부서의 수입)만 하면 되는데 굳이 전체 지역에 혜택을 주는 비즈니스 친화적인 노력도 하는가?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지역 리더들이 부하 직원들의 비즈니스 이익 침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들의 경력과 축재가 지역의 번영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도적으로 통제할 유인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다 흥미롭고 잘 드러나지 않으면서 자발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일선 관료들이 장기 이익을 위해서 약탈적 행위를 스스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최빈국들에서는 경제 발전의 성과가 관료 집단의 노력과 괴리되어 있고 근시안적이다. 중국이 특이한 것은 일선 관료들조차 개인적인 금전적 이해가 경제 발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따라서 당장의 갈취를 억제함으로써 장기적인 이익을 누릴 줄 안다는 것이다. 90-1)


당근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적절한 채찍과 결합되었을 때만 그러하다. 국가 전체와 개별 지방 수준에서 통제와 처벌의 기제가 필요하다. 1998년 주룽지 총리는 현대적 공공 행정을 만들기 위해 전면적인 절차상 개혁을 진행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1년 재정부가 주도하고 중용한 국고단일계좌Treasury Single Account, TSA 제도이다. 이 개혁은 처음에는 중앙 정부 수준에서 시작되었고 하위 지방 정부로 확대되었다. 국고 시스템은 전체 공공 부문의 계좌를 관리하며 공금의 예금과 지출을 감시한다. 이전에는 공공 기관의 계좌는 행정 조직, 지역, 부서에 따라 매우 분산된 상태였다. 2001년 이전에는 개별적 공공 기관이 그들의 재량으로 ‘임시 계좌’를 만들어 운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재정부 개혁은 임시 계좌를 불법화했고 현존하는 모든 계좌를 병합해 추적이 쉽도록 만들었다. 최근에는 광범위하게 확산된 디지털 결제가 관료 체제의 재정적 투명성을 더욱 높였다. 102-3)


5장 부패와 경제 성장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


분명히 부패 유형에서 인허가료가 지배적일 때 그것은 어떤 민간 회사를 부유하게 만들고 주식 시장 상장도 가능하게 하며 《포브스》 선정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게 할 수 있다. 건설과 투자를 고취시키며 이것들은 GDP 성장으로 기록된다. 그러나 인허가료는 자본주의의 스테로이드처럼 작용한다. 이것은 성장을 자극하지만 자원의 잘못된 배분에 의한 왜곡과 체계적인 위험을 키우고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인허가료라는 연료를 공급받은 자본주의는 사회 내, 그리고 기업 내의 불평등(정치적 연줄의 유무에 따라)을 악화시킨다. 정실 관계자들은 그들의 경쟁자보다 정부 계약을 쉽게 따내고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인허가료는 경제 개혁을 가로막고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강력한 기득권을 만들어 낸다. 인허가료는 성장을 촉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위험과 왜곡이 전체 중국 시민에 영향을 주지만 그 효과는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 133-6)


페이는 이런 시스템을 “자본가가 정치인으로부터 값어치 있는 지대를 획득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과정은 “중국 공산당의 몰락”으로 연결된다. 나는 페이가 본 정실 자본주의 문제점에 완벽히 동의한다. 그러한 문제점에는 “소수가 부를 축재하는 것과 높은 수준의 불평등성”이 있다. 그러나 그의 묘사는 동전의 다른 한 면을 간과한다. 부패 관료가 종종 유능하고 개발을 촉진한다는 사실을 놓치는 것이다. 보시라이(충칭)와 지젠예(난징)의 사례로부터 우리는 가장 유능한 리더들이 성장을 촉진하는 전략을, 단지 불도저식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고 텅 빈 ‘유령 도시’만을 건설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대신에 보시라이와 지젠예 모두 그들의 지역을 전략적으로 배치했고 브랜드화했다. 이들과 결탁한 부유한 정실들은 정치 엘리트들의 개인적인 부와 사치스러운 소비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할 뿐 아니라, 정치 엘리트들이 개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그래서 정치적 성과를 내도록 도와준다. 136-7)


6장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과 중국의 미래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이전의 운동과 5가지 주목할 점에서 달랐다. 첫째, 매우 장기적이며 현재도 진행 중이다. 오히려 이번 운동은 ‘캠페인이 아니며 중국의 뉴 노멀’이 되었다. 둘째, 엄청난 수의 관료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2012~2017년 사이에 규율 당국은 대중으로부터 총 1200만 건의 제보와 보고를 받았으며, 270만 개의 단서를 토대로 150만 건을 조사했고 150만 명을 처벌했다. 셋째, 시진핑은 지위가 높든 낮든(그의 유명한 표현에 의하면 ‘호랑이와 파리’) 부패한 관료를 숙청할 것을 맹세했다. 숙청 대상에는 몇몇 ‘초거대 호랑이’가 포함되었다. 넷째, 반부패 운동은 당과 국가 기관을 넘어서 군부, 국유 기업, 금융 조직, 그리고 최근에는 국가 미디어와 대학교까지 확대되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중요 사항은 최근의 반부패 운동은 여러 관료를 체포하는 것 외에 관료 체제의 규범을 똑바로 하는 데에도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모순적인 정책 수단(지속적인 캠페인)을 발명한 것이다. 143-5)


반부패 운동이 중국의 경제 성장을 저해할 것인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단기적 효과와 장기적 효과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단기적으로 기회주의적 자본가가 더 이상 법을 우회하거나 특권을 얻기 위해 후견인에 의존하지 않으면, 그들은 비즈니스 활동을 줄일 것이다. 따라서 낮은 성장으로 귀결된다. 대단히 엄격한 조사는 정부 관료를 불안하게 하고 위험 회피적으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새로운 계획을 승인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지부동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15년에 지방 관료들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NDRC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450억 위안 규모의 투자 프로젝트를 질질 끌었던 적이 있다. 끝으로, 관료들에 대한 엄중 단속 과정에 연루될 것을 두려워한 기업들은 해외로 도피하게 된다. 2014년에 4250억 달러 규모의 자본 도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당이 정실주의를 뿌리 뽑겠다고 결심한 이상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조정 과정이다. 160)


시진핑의 반부패 운동은 아직 기대한 장기적 편익을 거두고 있지는 않다. 또는 2가지 이유로 더 나쁜 미래 전망이 있을 수 있다. 첫째, 그의 운동은 부패한 관료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정치적 통제를 더 강화하는 수단으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시진핑은 관료들이 당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충성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둘째, 시진핑은 관료 체제를 속박함과 동시에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옥죄었다. 시진핑은 권력을 잡자마자 당-국가와 사회 두 영역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다. 최고 지도자가 그의 부하 직원들에게 과감함과 규율을 잘 지킬 것 모두를 촉구한 것인데 이는 비현실적인 요구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문제(복지부동의 자세) 출현의 이유다. 복지부동은 ‘란정懒政’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공무원의 게으름을 의미한다. 시진핑 시대는 모든 상명하복 해법(엄중한 단속)이 새로운 문제를 낳고(복지부동), 체제는 이 문제를 더욱 상명하복적인 해법(복지부동을 처벌)으로 풀려고 한다는 역설을 가져온다. 160-2)


7장 중국과 미국의 도금 시대로 살펴본 부패의 역설


도금 사회는 정실 자본주의의 시기다. 또한 이 시기는 비상한 성장과 변화의 시기였다. 수백만의 미국인이 농촌에서 공장으로 이주했고, 수많은 이의 삶의 수준이 올라갔으며, 새로운 산업이 발흥했다. 자본 시장은 확대되었고, 철도는 장거리 상업을 가능하게 했으며 J. P. 모건이나 존 D. 록펠러 같은 초거대 거물들이 등장했다. 이 시기의 만연한 부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영국을 따라잡아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오늘날 중국은 동일하지는 않지만 미국의 도금 시대와 비슷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기 개혁주의자들은 섬세한 정치적 단결을 했고 마오의 파괴적인 통치의 폐허에서 중국을 재건했다. 이것은 미국이 내전으로 인한 대대적인 파괴 후에 국가를 재건한 것과 마찬가지다. 중국의 시장 개혁은 미국이 19세기에 경험한 것처럼 심한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8억 5000만 명의 빈곤층을 구제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지배적인 유형의 부패는 인허가료(자본가가 권력자들로부터 특권을 구입)다. 166)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금권 정치는 점차 복잡해지는 금융 시스템으로 전이되었고, 이 금융 시스템은 레버리지에 의해 뒤틀리고 전문적인 세부 사항에 의해 복잡해져 이제는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게 되었다. 그렇다면 공산당 지배하에 있는 중국의 인허가료는 언젠가 워싱턴의 K-스트리트(미국의 로비집단)처럼 제도적이고 합법적인 스타일로 바뀔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부패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공식적인 대의제 정치의 타락이다. 미국 헌법 수정 제1조는 ‘정부에 억울한 사연을 청원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신성하게 받든다. 레시그의 말에 의하면 이 권리는 정치적 기구가 ‘체계적으로 잘못된 영향력에 굴복할 때’ 변질된다. 당의 지도부와 시진핑 개인을 향한 권력 집중화는 중국 엘리트의 부패를 고도의 개인적이면서도 쌍방 관계 문제로 만들었다. 6장에서 보았듯이 그의 반부패 운동하에서 후견인은 중국 정치인의 흥망을 결정하는 데 성과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75-6)


서구 사회의 발흥은 결코 좋은 제도와 ‘혁신적 문화’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패, 착취, 불평등과 함께해 왔다. 서구 역사에 대해 나쁜 점까지 모두 살피려는 솔직한 평가는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적, 정치적 현대화의 과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부패는 부유하거나 현대적인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반드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부패는 비인격적인 교환과 복잡한 것을 향해 진화한다. 중국은 비슷한 구조적 변화의 과정을 매우 짧고 압축적인 시간 내에 겪었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책은 부패가 경제 성장에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과도한 단순화를 반대한다. 모든 부패가 나쁜 것은 맞지만 그 피해는 부패 유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부패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할 때 우리는 연간 GDP 성장 너머의 것을 봐야 하며 부패가 가져오는 간접적이고 왜곡된 결과를 조사해야 한다. 부패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할 때 우리는 연간 GDP 성장 너머의 것을 봐야 한다. 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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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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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론 


"과거제도 성립 전까지 중국은 귀족주의의 전성시대로 불리며 지방의 유력 귀족들이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떨쳤기 때문에 아무리 제왕 권력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그들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방의 주州를 단위로 하여 그곳에 이른바 귀족 연합 정권이라 할 만한 지방정부를 형성했다." "귀족들의 이와 같은 오만 방자한 태도를 참지 못한 천자가 수나라 문제文帝(재위 581~604)였다. 그는 지방정부에 대한 귀족의 세습적인 우선권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으며, 지방관아의 고급 관리는 모두 중앙정부에서 임명하여 파견하는 식으로 제도를 고쳤다. 그러자면 중앙정부가 항상 다수의 관리 예비군을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관리 유자격자를 배출하기 위해서 과거제를 수립한 것이다." "중국의 관리 등용 시험에는 여러 종류의 과목이 있었으므로 '과목에 따른 선거', 그것을 줄여 '과거'라는 단어가 당 대唐代에 성립했다. 송 대宋代에 이르러 과목이 진사 하나로 좁혀졌으나 여전히 과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13-4)


시험 공부 


"학문은 가급적 일찍 시작하는 편이 좋다는 게 상식이었다. 그래서 남자아이에게는 다섯 살 무렵부터 슬슬 가정교육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나이를 따질 때 태어나면 바로 한 살로 치기 때문에 다섯 살은 겨우 만 세 살 남짓에 해당한다. 아이의 가정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은 주로 어머니였는데, 혹여 다른 누가 됐든 여유가 생기는 사람이 맡았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일찌감치 환경에 따른 격차가 나타났다. 이때 글자를 익히고 천자문과 『몽구』를 배운다." "여덟 살(만 여섯 살)이 정식으로 학문을 시작하는 나이로 인식되어 이때부터 이른바 초등교육이 시작되었다. 물론 이는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중류 이상의 가정에서만 서당, 보통 여학閭學·사학社學·학관學館 등으로 불리는 곳에 아이를 입학시켰다. 가장 중요한 학과목은 사서로, 대부분 그 가운데 『논어』부터 시작한다. 공부 방식은 책을 펼친 다음 처음부터 끝까지 통째로 암기시켰다. 암기가 학문의 거의 전부이다."(22-4)


# 『몽구蒙求』 : 당 나라 때 이한이 지은 아동용 교재. 중국 역대의 뛰어난 인물과 행적을 4자 1구로 하여 두 구를 합쳐서 여덟 자 한 문장으로 운을 붙인 형식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고전 교육을 웬만큼 마치는 게 보통인데, 그렇다면 대체 그 사이에 어느 정도 분량의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학문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사서오경으로서 책 본문의 글자 수를 세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서 가운데 『대학』과 『중용』은 『예기』와 중복되기 때문에 뺐지만 전부 합해 43만여 자에 달하는,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숫자다. 보통 이 경전들의 본문은 암송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 하니, 엄청난 양이다. 하루에 200자씩 외운다면 딱 6년쯤 걸린다. 일단 암송이 끝나면 그 몇 배에 이르는 주석을 읽고, 본문의 일부가 시험문제로 나왔을 때를 대비하여 해답 작성법을 배운다. 그 외에도 반드시 읽어 두어야만 하는 경전, 역사서, 문학서들이 있다. 문학서는 단순히 읽기만 해서는 소용이 없고, 그것을 교본 삼아 스스로 시나 문장을 짓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진지하게 이런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머리가 웬만큼 좋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도중에 질려버릴 것이다."(26-8)


현시(縣試) : 학교시(學校試) 1 


"학교시는 본래의 의미로 따지면 과거 안에는 들어가지 않는 시험이지만, 명 대부터 과거에 앞서 치르는 예비시험의 성격으로 새롭게 추가되었다. 명 대부터 과거를 보려는 사람은 반드시 국립학교의 학생, 즉 생원生員이어야 한다는 자격 요건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응시자는 먼저 국립학교의 입학시험부터 치러야 했다. 이 입학시험이 바로 학교시다." "학교시는 3단계로 나눠져 있는데, 첫 번째 단계가 현에서 치러진 현시縣試, 두 번째 단계가 부에서 치러진 부시府試, 세 번째 단계가 본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원시院試다. 동시에 응시하는 수험생은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동생童生이라 불렀다. 응시 자격에는 다소 제한이 있었다. 즉 부계 조상 3대 안에 천한 직업, 이를테면 창관娼館·기루妓樓 등의 경영에 종사한 적이 없어야만 한다. 그 밖의 부분에서는 농農·공工·상商을 따지지 않았다. 또 조부가 사士, 즉 관리라 하더라도 수험생에게 별다른 특전은 없었다. 요컨대 모두에게 사민평등의 기회를 주었다."(30-2)


"현시는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목적은 과다한 수험생을 어느 정도 떨어뜨려서 입학 정원에 가까운 숫자까지 추려내는 데 있다. 극히 대체적인 표준으로 말하자면 현시에서는 입학 정원의 약 4배가량을 선발해 놓고, 다음 부시에서 그 숫자의 절반으로 추린 다음, 마지막 원시에서 또다시 절반으로 추려 입학 정원 숫자에 딱 맞아떨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의 10배 이상이 몰리는 곳이 있는가 하면, 거의 무시험에 가까운 곳조차 생겨났다. 각 현학縣學의 입학 정원은 그 지방의 문화 수준과 인구수를 감안해서 정했는데, 많은 곳은 25명이고, 3~4명인 학교도 있었다. 문화적으로 앞선 지역에서는 응시자 숫자가 많은 데다 학력 수준이 높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던 반면, 시골에서는 비교적 입학 자체는 쉬웠다. 하지만 이후 계속해서 어려운 시험을 앞두고 있으므로 연속되는 시험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처음부터 어려운 경쟁을 이겨낸 사람만이 도중에 낙오를 면할 수 있다."(44-5)


부시(府試) : 학교시 2 


"부시는 부의 장관인 지부知府가 책임자로서 현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치르는 시험이며, 이 시험을 통해 대략 절반 정도가 떨어진다. 사실 앞선 현시는 이 부시에 맞춰 일정이 조정되며 그에 따라 모든 현에서 같은 날 일제히 치러진다. 이는 현시의 날짜를 서로 다르게 할 경우 본적지를 위조하여 한 사람이 이중으로 시험을 치르는 부정행위를 할 수 있기에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다. 부성府城, 즉 부의 관청이 설치된 곳은 상당히 번화한 대도시로, 그곳에는 시험을 위해 시원試院이라 불리는 대규모 상설 건물이 들어서 있다. 현시에 합격한 동생은 각 현에서 증명서를 받아 들고 이곳 부성으로 속속 모여든다." "부시는 현시 합격자에 대한 재심사의 의미가 강하다. 바꾸어 말하면 다음의 원시院試에 응시하기에 충분한 학력이 있는지를 더욱 꼼꼼하게 확인하기 위함이다. 시험문제는 공통적으로 똑같이 출제하지 않고 각 현에 따라 다른 문제를 내기도 했으며, 따라서 합격자도 각 현별로 정했다."(46-7)


원시(院試) : 학교시 3 


"청 대 중국 본토의 각 성에는 최고 행정관인 총독總督과 순무巡撫가 파견되었는데, 그 외에 학정이 고위 관리로서 임명되었다. 학정이란 제독학정提督學政의 약칭이며, 이는 교육행정장관이라는 의미다. 학정의 관위는 통상적으로 총독이나 순무보다 낮지만 그 임명을 받은 사람은 결코 총독이나 순무 아래에 속하지 않고, 그들과 대등한 권한을 가졌다. 학정은 3년 임기로 천자가 직접 각 성에 부임시킨 관리로서, 총독이나 순무가 천자의 직속 관리이듯이 학정도 천자 직속이기 때문이다." "원시는 부내의 학교에 입학하여 생원이 되기 위한 최종 시험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성적 결과에 따라 입학 여부가 결정된다. 한 사람의 학정이 하나의 성 안에 보통 10여 개에 이르는 부를 순시하면서 실시하는 시험이므로 날짜를 정확하게 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학정 쪽에서 계획을 세워 미리 부에 도착할 날짜를 알려주면 부에서는 그에 따라 원시를 준비하고, 그에 맞춰 부시를, 부시에 맞춰 현시 날짜를 정하는 것이다."(48-50)


세시(歲試) : 학교시 4 


"본래 학교에 오랫동안 재학하여 몇 차례 학력 시험을 치르면 그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사람은 학교에서 나와 곧바로 관리가 되는 길도 열려 있었다. 과거는 그런 학교에서 양성된 인재를 등요하기 위해 특별한 시험을 치러 관리의 자격을 부여하는 제도였다. 그리고 그 시험관은 임시로 임명된 위원이 맡았다. 그러나 후세에 이 두 가지가 혼합되면서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고 또한 과거를 보기 위해서는 학교의 생원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그저 과거의 전 단계로서 학교에 들어가는 입학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그 희망자가 많았기 때문에 입학시험이 점점 어려워지자 그것은 마치 과거의 예비시험처럼 되어버렸다. 그러나 원래의 제도는  제도로서 그대로 계속 유지되었다. 학교의 교육적 입장에서 실시하는 세시歲試라는 학력 시험이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학교시의 본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학력 시험에 지나지 않은 탓에 점점 무시되기에 이르렀다."(60-1)


"생원은 더 이상 동생童生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사이다. 아직 관리는 아니지만 관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생원이 되었다고 해서 과거 시험에 쉽사리 통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집안이라면 과거에서 낙방해도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공부를 계속해 나갈 수 있겠지만, 중류 가정은 그렇게 언제까지나 빈둥거리는 생활이 경제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다행히 생원쯤 되면 꼭 관리가 아니더라도 관리와 유사한 부업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관리의 사설 비서인 막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원은 연줄을 찾아 가능하면 앞으로 출세할 것 같은 위세 있는 행정장관 밑에서 막우로 일하려 했다. 수당은 장관의 쌈짓돈에서 나오기 때문에 고액 연봉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다가 이 부업이 본업으로 굳어지면서 더 이상 과거를 볼 의지를 상실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희망을 버린 사람을 일컬어 '진취進取를 포기했다'라고 한다."(67-9)


과시(科試) : 과거시(科擧試) 1 


"송 대宋代 이후 과거는 3단계의 형식을 취했는데, 우선 지방에서 향시鄕試(해시解試)를 실시하여 그 합격자를 중앙에 보내고, 중앙정부에서는 회시會試(공거貢擧)를 실시한 다음, 이어서 천자가 직접 주관하는 전시殿試에서 최종적으로 합격자를 결정하는 것이 표면상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후대로 오면서 점점 이 3단계의 본시험에 딸린 소시험이 추가되어 청 대에 이르면 엄청나게 복잡한 시험이 되어버렸다. 먼저 첫 번째 향시의 예비시험이라는 의미를 지닌 과시科試가 있다." "과시는 향시를 보려는 생원만을 대상으로 하여, 과연 그들이 향시에 응시할 만한 충분한 학력을 갖추었는지를 시험하고, 동시에 그 응시 숫자를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실시한다. 그런데 생원 쪽에서는 세시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여겨 경원시하지만 과시는 응시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으므로 장려나 강제를 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서로 앞다투어 시험을 보고자 몰려들었다. 참으로 이해타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70-1)


향시(鄕試) : 과거시 2 


"향시는 각 성의 성도省都에 성내省內 거자擧子들을 모아 실시한다. 향시는 시험 날짜가 정해져 있으므로 전국에서 동시에 치러지는데, 시험관은 중앙에서 파견되기 때문에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들이 시험 날짜에 제때 도착하지 못해도 문제지만, 너무 빨리 도착해도 그들에게 청탁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생길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중앙에서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두 사람의 고관考官을 출발시킨다." "시험장은 공원貢院이라고 하며 각 성의 성도에 상설 건물이 있다. 과시 때까지는 수험생들이 대청, 곧 건물 안의 넓은 마루에 늘어놓은 책상 앞에 앉아서 시험을 쳤다. 그러나 공원은 딱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독방인 호사號舍가 벌집처럼 수천, 수만 개가 모인 곳이다." "거자들이 전부 각자 자신의 호사에 자리를 잡으면 총감독관인 감림관은 대문에 자물쇠를 채우고 봉인한다. 이때 이후로는 무슨 일이 발생한다고 해도 시험이 끝날 때까지 대문은 열리지 않는다."(74-7, 89)


"거자가 제출한 답안은 검은 붓글씨로 적혀 있기 때문에 묵권墨券이라 불린다. 시험장에서 거자가 사용하는 먹은 반드시 검은색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이외의 색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답안지는 그대로 심사원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필적 등으로 판단해 특정 인물을 알아낸 뒤 그를 합격시키고 유리하게 채점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답안을 전부 일일이 옮겨 적은 뒤 그 옮겨 적은 것을 심사원에게 보내는 것이다." "교정이 끝나면 두 개를 합쳐 보관 담당에게 보내며, 보관 담당관은 그 가운데 원본인 묵권을 따로 보관하고 필사본인 주권만 심사원인 고관에게 보낸다." "문장도 내용도 매우 훌륭함을 의미하는 '필의정잠' 등으로 채점된 답안에는 추천을 뜻하는 '천薦'이라는 글자를 기록하여 정·부고관에게 보낸다. 정고관과 부고관, 즉 주임과 부주임인 고관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추천을 받은 천권薦券만 공동으로 채점한다. 정·부고관 두 사람은 반드시 검은색 붓만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103-4)


"사제 관계란 예전에는 직접 학문을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지만, 과거가 유행하고부터 오로지 시험관만을 스승으로 모시는 것으로 변하였다. 반면에, 학문을 손수 가르쳐준 선생은 단순히 수업을 해주는 스승이라고 해서 그다지 중시하지 않게 되었다. 수업을 해주는 스승에게는 꼬박꼬박 수업료를 납부하기 때문에 이미 금전으로 거래가 끝났다고 보는, 지극히 냉정한 구분 방식이다. 그러나 시험관은 누구를 합격시키든 자유이지만 특별히 자신의 재능과 학문을 알아주어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아주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특히 지기知己의 은혜를 느끼는 것이다. 시험관은 그저 한 번 답안을 심사해주었을 뿐이지만, 평생 은혜를 잊지 않고 서로 도와가며 관료 사회의 험난한 파도를 헤쳐 나가자고 맹세하는 것이다. 이는 천자 쪽에서 보면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 즉 당파를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 때문에 몇 번이고 금지령을 내렸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112)


거인복시(擧人覆試) : 과거시 3 


"향시가 치러진 이듬해 3월에는 전국의 거인들을 북경으로 모아 회시會試를 치른다. 장소는 북경의 공원貢院으로, 이곳은 전년도의 신입 거인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합격했던 거인들도 운집하여 그 수가 1만 몇 천 명에 이르므로 미처 다 수용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청 대에는 회시 직전에 거인복시라는 또 한 번의 시험을 마련하여 지원자를 떨궈내고 여기서 합격한 사람에게만 회시를 볼 수 있도록 했다. 날짜는 회시 한 달 전인 2월 15일로 정해져 있다." "시험 당일, 출제는 사서 1문제, 시 짓기 1문제로 정해져 있다. 시험은 그날 안에 종료되지만, 열권대신은 4일 동안 답안을 심사하도록 명 받는다. 열권대신이 성적을 5등급으로 나누어 명부를 작성한 뒤 천자에게 바치면, 천자는 그것을 다른 조사관에게 교부한다. 조사관은 이 답안과 거인이 향시 때 작성했던 답안을 비교하여 필적이 동일한지를 조사하고, 이와 동시에 열권대신의 채점이 타당한지도 함께 심의하여 의견이 일치하면 성적을 발표한다."(126-7)


회시(會試) : 과거시 4 


"회시는 향시가 치러진 이듬해, 즉 축丑, 진辰, 미未, 술戌 해의 춘삼월에 북경 공원에서 전국의 거인들 가운데 거인복시에 합격한 이들을 모아서 치르는 대규모 시험이다. 회시는 공거貢擧라고도 칭하는데, 역사적으로 봐도 이 시험이야말로 과거의 본체를 이루는 것이다. 앞선 향시는 이른바 예비시험이고, 다음에 치러지는 전시殿試는 재시험의 의미밖에 없다. 당 대唐代에는 이 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진사進士가 되었다." "어쨌든 다행히 회시에 합격하면 이제는 다음 번 전시에도 합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전시에서는 원칙적으로 낙제자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회시의 답안지는 모두 천자가 별도로 임명한 재조사관인 복감대신覆勘大臣에게 전달된다. 한편 회시 합격자는 예부에 가서 자필 이력서를 제출하는데, 재조사관은 답안지와 이력서를 대조하여 필적이 동일한지를 확인한다. 이상이 없으면 그 내용을 천자에게 보고하며, 이때서야 비로소 회시 성적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129, 138)


회시복시(會試覆試) : 과거시 5 


"청 대 초기까지는 회시에 합격한 사람이 곧바로 전시를 볼 수 있었으나 18세기 건륭 시대(1736~1795)에 들어 또 하나의 작은 시험이 이 사이에 추가되었다. 이를 회시복시會試覆試라고 한다. 이 시험의 취지는, 전시는 천자가 직접 실시하는 중요한 시험인 데다 낙제를 배출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전시에 앞서 회시의 복시, 즉 재시험을 실시하여 사실상 전시의 예비시험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험을 치르는 목적은 첫째, 수험자가 전시를 보기에 충분한 학력을 갖추었는지를 확인하고, 둘째, 전시는 궁궐 안에서 치러지므로 이 시험을 미리 같은 장소에서 실시하여 수험자로 하여금 시험장 분위기를 익히도록 함으로써 본시험 때 실수하지 않도록 훈련시키며, 그리고 셋째, 전시에 대리 시험을 치르는 등의 부정행위가 발생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본인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회시복시 때 상당수의 합격자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수험자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한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다."(141, 145)


전시(殿試) : 과거시 6 


"송 대宋代 이후 천자의 독재 권력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당대의 공거는 예부라는 부서에서 실시했고 천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공거를 통해 어찌 됐든 시험관과 시험 합격자 사이에 스승과 제자라는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그것이 결국 우두머리와 하수인 같은 관계로 발전했다. 그 결과 정치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이런 집단의 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되는 폐해가 발생했으며, 나아가 이른바 붕당 싸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단 이 같은 사적인 당파 결합이 이루어지면 천자의 권력으로도 도저히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로까지 치달아버린다. 그래서 송의 초대 천자인 태조(재위 960~976)는 공거 뒤에 또 한 차례의 시험을 추가했다. 태조는 스스로 시험관이 되어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은혜를 베푸는 형식으로 합격자들을 모두 자신의 제자로 삼고 직접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관료의 대단결을 꾀하려 했다. 이 시험이 전시의 기원으로, 역대 천자들에게 대대로 이어져 청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147-8)


"천자의 결정으로 가장 우수한 10명의 성적 순위가 정해지면 그 이튿날에 이를 포함하여 전체 수험자의 성적 발표가 이루어졌다." "제1갑의 세 명 가운데 1등은 장원壯元,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고 부른다. 이 세 사람은 천자로부터 진사급제進士及第라는 학위를 받으므로 대단한 명예로 여긴다. 특히 장원은 인생에서 최대 최고의 영광을 얻은 것으로, 장원급제자는 소설 주인공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제1갑의 세 명만은 순천부윤順天府尹(부윤은 오늘날 시장에 해당하는 정3품의 벼슬이며, 순천은 북경을 가리킨다)과 동행하여 의종들을 따라 부府로 가서 급제 축하연에 참가한다. 이 축하연에서는 장원이 주빈이므로 남향 상석에 앉고 방안이 그 왼쪽, 탐화가 오른쪽에 앉는다. 순천부윤은 손님을 대접하는 주인의 역할을 맡아 말석에 앉아서 대접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일개 서생에 불과하던 무명의 청년이 이제는 완전히 딴판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 것이다."(166, 169-71)


조고(朝考) : 과거시의 연장선 


"전시와 회시 중에 회시 성적이 그나마 믿을 만하다고는 하지만, 천자가 몸소 주관하는 전시 성적을 무시하고 회시 성적을 끄집어내 그것으로써 새로운 진사들의 임관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청조의 옹정제는 전시를 치른 뒤에 다시 또 하나의 시험을 추가했다. 마치 지붕 위에 또 지붕을 얹는 격이지만, 이를 통해 다소나마 전시의 불합리한 점을 시정하고자 했다. 이에 전시의 재시험 같은 형태로 조고朝考라는 시험이 실시된다." "한림원은 문재가 뛰어난 사람들의 보고寶庫라 일컬어졌으며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공부나 실무 수습 과정을 거치게 한 다음 필요할 때마다 중앙관청이나 지방 요직에 임명하여 실제 정치를 맡겼기 때문에, 이른바 고급 관료 예비군이 모여 있는 기관이었다." "조고는 이른바 한림원에 잔류시킬 사람을 정하는 시험이며, 그런 까닭에 한림원 관리가 책임자가 되어 실시한다. 조고는 일종의 취직 시험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낙제자를 탈락시키는 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199-200)


무과거(武科擧) : 과거의 별과(別科) 


"문과거文科擧와 별도로 무과거, 줄여서 무과武科 혹은 무거武擧라는 시험이 존재했다. 하지만 정부나 세간에서 무과거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낮았고, 그 합격자에 대한 예우나 합격한 뒤의 대우도 거의 주목할 만한 점이 없는 수준이었다." "무진사들은 그 성적에 따라 각각 무직武職에 임명되지만, 세간에서도 또 군대 내에서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정치와 달리 시험에 운 좋게 급제를 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전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문진사는 이래저래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가운데 유명한 정치가나 학자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무진사로서 실제로 전공을 세운 사람은 거의 없다. 군대에서 세력을 장악하는 길은 누가 뭐래도 병졸부터 시작하여 갖은 고초를 겪고 실전에서 공을 세워 장군에 오르는 것이다. 결국 무진사는 후방 내지의 평온한 장소에서 부대장으로 근무하면서 정년까지 평범하고 무사하게 지내면 되는 자리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떠받들어주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202, 209)


제과(制科) : 과거보다도 수준이 높은 시험제도 


"과거는 밑에서부터 한 단계씩 정해진 순서에 따라 수많은 시험을 통과해 나가야 하는 제도로서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수준이 높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출제 범위나 채점 방식이 대체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때는 매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오히려 떨어질 위험성도 있다. 또 그런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일수록 과거와 같은 시험제도를 경멸하여 보이콧할 수도 있다. 이 같은 과거의 약점은 예전부터 지적되었다. 이 때문에 역대 정부는 과거와 병행하되 일반적 과거 시험의 그물로는 건져낼 수 없는 대어를 다른 시험을 통해 얻고자 시도했다. 그것이 제과制科, 즉 천자의 조칙(詔)을 통해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시험이다." "그 중에서도 박학홍사博學鴻詞, 즉 뛰어난 대학자를 구하는 제과는 청조 초기에 가끔 시행되었다." "청조로서는 딱히 청조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은, 중립적 입장의 노학자들을 끌어들여 아군으로 만드는 것이 중국을 통치하는 데 가장 효과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210-2)


맺음말 : 과거에 대한 평가 


"역사상 나타난 모든 제도에는 영고성쇠가 있으며, 이는 개인의 생애와도 다를 바 없다. 맨 처음에는 정부 측에 필요한 인원은 많은데 인물이 부족했다. 그래서 과거를 활성화하여 진사를 다수 채용했으나, 그러는 사이에 이번에는 진사의 수가 너무 늘어나서 할당해주어야 할 관직의 수가 모자랐다. 그렇다고 진사 합격자의 수를 줄일 수도 없었으므로 기존에 하던 대로 진사를 배출했다. 결국 이로 인해 진사들의 취직난이 발생함으로써 과거가 오히려 정부에 무거운 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 측에서도 과거제도에 대해 재검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북송 중기 신종(재위 1067~1085) 시대에 왕안석이 재상이 되었을 무렵이 바로 그 시기에 해당한다. 왕안석은 관리를 채용할 때 그저 시험을 실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더 훌륭한 인재를 양성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근본적인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새롭게 학교 건설에 나섰다."(224-5)


"북송이 망한 뒤에도 이 학교제도는 거의 그대로 남송에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그 졸업생은 과거 출신자와 동일한 자격으로 관직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왕안석은 궁극적으로 과거를 폐지하고 대학 졸업생만으로 관리를 채용하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비록 이 이상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과거제도 이외에 학교제도를 병행해서 실시했다는 사실은 송 대 사회의 선진성을 보여준다. 이같이 학교제도가 모처럼 마련되어 있었음에도 과거제도를 대체하지 못했던 까닭은 무엇보다 경제적인 사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교육은 원래 돈이 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송 대에 접어들면 태학은 규모 면에서 북송에 비해 훨씬 축소되었다. 정부는 대개 교육처럼 바로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일에는 돈을 들이려 하지 않는 법이다. 이후 학교제도는 오히려 과거제도 속에 흡수되어 학교시는 과거의 예비시험으로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그 결과 실제로는 학교가 없어지고 과거만으로 환원되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25-6)


"명·청 시대에도 과거제도가 그 나름의 효과를 발휘했던 적은 있다. 그것은 모두 개국 초기였다. 그런데 건륭 이후의 시대가 되면 조정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관료 예비군을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더 이상의 사람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단지 당시까지의 관례에 따라 과거를 실시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을 시행하면, 응시하러 오는 거자들은 모두 사탕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관직을 얻기 위해 서로 다투는 무리(엽관자獵官者)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사실 수험자 쪽에서도 평화로운 시기가 오래 지속됨에 따라 일반적으로 학력도 높아져서 성적이 평준화되었기 때문에 시험관 쪽이 우수한 인재를 취사선택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시험을 시행하는 쪽에서는 어떻게 인재를 발탁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다수를 떨어뜨릴까에 대한 방법을 더 많이 생각했고, 그리하여 여러 가지 번잡한 형식을 만들어냄에 따라 결국에는 과거의 진정한 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다."(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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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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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서론: 지구적 갈등의 정치사회학


두 개별 국가 간의 경쟁에 초점을 맞추거나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통치 기구의 규범과 질서를 어떻게 형성하고 재구성하는지에 집중하는 연구들은 국가가 권력, 세계 지배 혹은 글로벌 거버넌스를 추구하는 자율적 행위자라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설은 ‘국가의 복귀Bringing the State Back In’ 학파가 국가 자율성이라는 베버주의적 개념을 복원한 이후로 통용되었다. 베버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자율성을 가진 외교 정책 엘리트들의 국익에 대한 정의와 엘리트 네트워크 속에서 내생적으로 발전된 정책 지향성은 국제정치를 분석하는 토대를 이룬다. 외교 정책 엘리트는 군사 및 정보 분야 외교 관료, 싱크탱크의 학자들, 외교 정책에 관심을 갖는 선출직 관료로 구성된다. 이는 국제무대에서의 국가 행위가 ‘위신 감정’과 세계에서의 ‘권력 지위’ 추구에 의해 추동된다는 베버의 가정에 따른 것이다. 이 관점은 국가의 외교 정책을 초국적 기업의 경제적 요구의 단순한 반영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 대한 대응이다. 12)


국가주의적 관점과 경제학적 관점을 넘어, 국가 간 경쟁과 기업 조직 간의 경쟁 혹은 초국적 연결을 세계질서와 갈등의 형성에 있어 상호작용하는 두 개의 자율적 영역으로 보는 더 섬세한 국제정치 이론들이 있다. 이러한 이론들의 통찰에 기반해 나는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과 기업 사이의 자본 간 관계를 연결시켜 1990년대와 2000년대 미국과 중국의 공생관계 및 2010년대 그 공생관계가 경쟁으로 변화한 원인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리고 지구정치경제의 거시적인 구조 변화를 배경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의 기업 및 국가 간의 중간 수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두 경제 대국을 합칠 때 GDP에서는 세계 전체의 거의 40퍼센트, 국방비에서는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중 관계의 변화는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이며, 21세기 미래의 세계질서 혹은 혼돈을 결정짓는다. 이 책은 변화하는 미중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자 지구적인 정치 권력의 지형이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예측이다. 12-3)


2장 공생


미국 시장은 1980년대 내내 중국의 초기 수출 부문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중국 경제를 수출 주도 성장으로 전환시키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가 성공하려면 미국 시장이 낮은 관세로 중국산 제품 수출에 개방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중국 경제가 수출 주도 성장으로 가는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을 그 당시 1979년 미국과 중국의 공식 수교 이후 시행되어왔던 중국 제품에 대한 미국 시장의 개방은 제동이 걸려 있는 상황이었다. 1993년 빌 클린턴이 10년 만에 민주당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탈냉전 시기 새 정부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은 자유무역에 우호적이지 않은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중국에 우호적이지 않은 인권 옹호자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중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중국의 인권 개선과 연결시키려 했다. 이와 관련해 클린턴 정부가 시도한 특정 정책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의 국제무역 체제 속에서 최혜국MFN 지위와 중국의 인권 향상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19-20)


중국의 MFN 지위 갱신과 인권 문제를 연계시키는 클린턴의 입장은 1989년 톈안먼 사건 진압 이후 외교 기관의 인권 이상주의자들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입장은 무엇보다 민주당의 대선 승리에 필수적인 지지자들이었던 노동조합의 경제적 우려에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의 노조들은 중국의 무노조, 저임금 노동과 경쟁이 심화되는 것을 우려해왔다. 따라서 중국의 MFN 지위와 인권 조건을 연계시키겠다는 공약은 미국과 중국 간 무역 자유화에 대한 보호주의적 반대 입장을 살짝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의 MFN 지위의 연례적인 무조건 갱신이 종료되면서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과 관련된 미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은 크게 늘어났다. 연례 검토의 실제 결과와 상관없이 MFN 지위를 인권 조건과 연계시키는 것은 미중 무역의 성장과 미국 기업 공급망의 중국 내 확장에 효과적으로 제동을 걸었다. 수출 주도형 성장으로 전환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큰 걸림돌에 부딪혔다. 21)


1994년 초반, 노동조합과 기업의 이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이 1993년에 설정된 인권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MFN 지위 갱신에 대해 심의했다. 이와 동시에 백악관에 신설된 국가경제위원회NEC의 힘이 커지면서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월가의 목소리가 상당히 커졌다. 월가의 베테랑 은행가이자 골드만삭스의 공동 회장인 로버트 루빈이 국가경제위원회 초대 의장이었다.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무역 정책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외교 정책 엘리트들 대신 대중국 무역을 확대하려는 연합 세력을 구축한 기업의 목소리가 강력해졌다. 결국 기업과 월가의 힘이 우세했다. 1994년 5월 26일 클린턴은 중국의 MFN 지위를 갱신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후 정당화로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의 자유무역이 중국의 민간 기업과 중산층에 힘을 실어줄 수 있고, 이는 결국 정치적 자유화의 추진으로 이어진다는 ‘건설적 관여’ 이론을 내세웠다. 26-7, 32)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권 문제를 분리하는 데 찬성하는 많은 기업을 효과적인 연합으로 이끈 가장 중요한 하나의 힘은 중국 국가 그 자체였다. 중국 국가는 이러한 기업들을 대리 로비스트로 적극적으로 모집하고 조정했다. 『런민일보』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하기 위해 초청된 미국 기업 대표단 수는 1993년과 1994년에 정점을 찍었다. 이 방문 여행에서 다수의 미국 기업 임원들은 중국 정부와 대규모 주문 및 계약을 포함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중국 당국은 이러한 거래를 이 미국 손님들이 1994년 중국의 MFN 지위 갱신을 위해 로비해달라는 것과 명시적으로 연결시키곤 했다. 이런 사례를 살펴보면 기존에 중국에 진출하지 않고 미중 무역과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던 미국 기업들이 왜 공격적으로 로비에 나섰는지를 알 수 있다. 인권 연계 조치 해제를 위한 로비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던 기업 중에는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개별 우대 정책의 혜택을 받는 곳이 많았다. 28-9)


중국의 MFN 지위와 인권 문제 연계 조치를 해제시킨 것은 미중 무역 자유화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클린턴이 중국의 MFN 지위를 무조건 승인해 기존 정책을 번복함으로써 2000년에 행정부가 중국에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1998년 ‘최혜국 대우MFN, Most Favored Nation’라는 용어는 ‘정상무역관계NTR, Normal Trade Relation’로 대체되었다). 이로 인해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에 있어 마지막 주요 걸림돌이 사라졌다. 2000년에 미국과 중국 간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을 때, 수년 동안 이어진 미중 무역 자유화로 인해 기업 부문에서는 이미 중국과의 무역 속에서 자생적인 기득권자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은 자발적으로 무역 자유화를 위한 추가 로비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생겨난 미국과 중국의 경제 공생 및 미국의 기업 이익은 여전히 중국을 주요 지정학적 경쟁자로 전망하는 워싱턴의 외교 군사 기관의 경향을 제어하는 역할을 했다. 32)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이르러 냉전 이후의 세계질서는 소련의 붕괴로 만들어진 진공 상태 속에서 (예를 들어 코소보 전쟁과 같이) 여러 지역에서 빈번하게 지정학적 위기가 발생하고 있었고, (1994년 멕시코의 페소화 위기에서 1997~1998년의 아시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규제받지 않는 세계 자유시장의 금융위기들에 직면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이는 모두 미국에 계속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안겨줬고 이러한 개입들로 인해 미국은 점점 더 비용이 많이 드는 지구 제국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차이메리카Chimerica' 체제 속에서 중국의 저가 제품 수출과 미국 국채에 대한 투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미국 제국 건설의 중요한 경제적, 재정적 토대가 되었다. 2000년대 미국이 중앙아시아와 중동에 전념하던 시기에도 중국은 북핵 위기 등 아시아 지역의 지정학적 위기를 억제하는 데 미국을 도왔다. 차이메리카의 전성기에 중국은 미국의 지구 제국에 없어서는 안 될 조력자가 되었다. 33)


3장 자본 간 경쟁


1990년대 중국의 자유시장 개혁은 자본 축적의 법칙이 현재 대부분의 경제활동을 추동한다는 면에서 중국을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체제는 미국이 구상했던 자본주의로 수렴되지 않았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된 지 30년이 지난 지금, 국가는 국유 기업SOE의 형태로 경제 전반을 통제하고 있다. 중국의 국유 부문은 중국 공산당의 여러 파벌의 봉건 영지가 되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중국 호황의 시기에 정치 엘리트 가문들은 서로 국유 부문을 분할해 가지고 있었고, 이는 이들 간의 세력균형을 만들어내 당-국가의 ‘집단지도 체제’를 안정화시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시기에 중국의 수출 주도형 호황이 주춤하자 중국 정부는 부채 기반의 고정 자산 투자로 공격적인 경기부양책을 실행해 그에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더 이상 그 거품을 따라잡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중국의 미상환 부채는 GDP의 330퍼센트 이상으로 올라갔다. 35-7)


부채로 이뤄진 경기 회복의 결과로 만들어진 과다한 생산 능력과 불필요한 인프라 시설은 수익성이 없었다. 경기 침체와 더불어 외환보유고의 확대 없이 지방 정부의 부채 형태로 이뤄진 유동성 급증은 자본 이탈 압력을 발생시켰다. 그 결과 2015~2016년에 주식시장 붕괴와 인민폐의 급격한 평가절하가 일어났으며, 2016년에 자본 통제를 강화하고 나서야 경제가 안정되었다. 은행 시스템은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신규 대출을 투입했다. 이처럼 규모가 더 큰 반복적인 대출이 급증하면서 부채는 더 늘어났다. 성장 둔화와 부채 악화로 인해 당-국가 엘리트들은 민간 부문과 외국 기업에 대한 압박의 속도를 높였으며, 고속 성장의 종식으로 당-국가의 정당성이 위협받자 당-국가 엘리트들 간의 갈등도 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당-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 체제’라는 협치의 방식에서 전제적 통치 방식으로 전환하며 의사결정 권한의 집중을 위한 일련의 시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39)


시진핑 체제에서 중국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의 외교 정책 엘리트들의 중국관은 더 완고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의 최종적인 쇠퇴가 왔다고 베이징 당국이 판단하면서 중국은 광범위한 지정학적 문제에서 더 대담하게 대립적인 입장을 채택했다. 미국이 중동의 전쟁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2010년대에 워싱턴 당국은 오바마의 ‘아시아로의 회귀’ 정책에 따라 지정학적 경쟁자로서 중국을 견제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국 경제의 국가주의적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중국에서 미국 기업의 이익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중국 진출에 앞다퉈 나섰던 기업들은 대부분 엄청난 이득을 거뒀지만, 약속했던 것과는 달리 제한적인 시장 접근 및 기술 이전에 대한 압력 등은 이후 많은 미국 기업이 중국에서 맞닥뜨려야 할 일의 전조였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대중국 정책을 더 대립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40-1)


2001년 중국의 WTO 가입 이후, 미국 경제에 미친 ‘차이나 쇼크’는 즉각적이면서도 거대했다. 1999년과 2001년 사이에 중국으로부터의 수입품이 밀려들어오면서 미국에서 200만 개 이상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 충격으로 인해 2000년대에 반중 무역연합은 활기를 되찾았다. 새로운 반중 무역연합의 목적은 의회와 백악관이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해 중국 수입품의 유입을 막기 위한 교정 조치를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연합의 중추는 노동조합이었다. 그리고 중국으로의 해외 진출 역량은 좀 떨어지고 중국산 수입품으로 인해 자국 시장이 잠식당하고 있는 미국 제조업체들이 이 연합의 또 다른 만만찮은 세력이었다. 이들이 실패한─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9년 8월에서 2020년 1월까지의 잠깐 동안을 제외하고는─이유 중 하나는 중국으로 제조 부문을 아웃소싱해 낮은 중국 환율 덕에 이득을 보고 있는 미국 기업들로 구성된 대항 로비 연합이 이들의 로비 노력을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50-1)


환율 조작을 둘러싼 로비활동은 미국 기업들 간의 분열을 보여주지만, 중국의 시장 접근 및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로비활동은 다양한 부문의 미국 기업들 사이에 의견 일치가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시장 접근, 지식재산권, 심지어 환율 조작 문제는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미국 및 기타 외국 기업에 대한 베이징 당국의 일반적인 적대감이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1월 19개 로비 단체가 백악관에 서한을 보내 “미국의 기업과 지식재산권을 희생시켜 자국의 기업을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만들어내는 중국의 체계적인 노력”에 대해 “미국 회사들에 즉각적인 위험을 초래한다”고 불만을 표하며, 미국이 중국에 더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중국에 반대하는 기업 반란’이 부상한 것은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을 제외하고 미국과 대부분의 아시아 태평양 국가를 포함하는 자유무역 지대를 설립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추진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53-4)


미국 기업들이 중국의 이익을 위한 로비활동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면서, 2010년 이후 매파적 입장의 지정학적 주장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국가 안보에 치중하는 매파들이 견제받지 않고 정책 결정을 주도하게 되자, 워싱턴 당국은 특정 미국 기업의 이익에 피해를 주는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중국과의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당위를 내세워 정책을 채택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 중 하나는 중국의 군사 및 안보 기구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중국의 민영 첨단 기술 대기업인 화웨이에 대한 미국의 정책 변화다. 화웨이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은 전적으로 국가 안보만을 고려한 것이었다. 화웨이의 글로벌 확장에 장비, 부품, 기술을 판매한 많은 미국 첨단 기업의 이해관계가 훼손됐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이 진전돼 확고히 시행될 수 있다는 점은 미중 관계의 구조적 조건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56-7)


4장 세력권


2000년대에 세계적으로 상품 수요가 폭발하는 가운데, 중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많은 대출을 통해 해당 국가의 원자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에너지와 원자재 수출국에 많은 대출이 이뤄졌으며, 명시된 양의 상품으로 상환받았다. 이러한 유형의 대출로 가장 잘 알려진 사례는 2007년에서 2014년에 걸쳐 중국이 베네수엘라에 6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원유로 돌려받은 것이다. 2010년 이후에는 인프라 시설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하는 쪽으로 더 많은 대출이 이뤄져 인프라 건설에서 중국의 과잉생산 능력을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이 자본 수출의 대부분은 2013년부터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라는 명목으로 이뤄졌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자본 수출 공세는 과잉생산 능력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 기업들에게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줬다. 예를 들어 많은 제철소나 건설기계 제조업이 과잉생산과 과도한 부채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이 해외 수출은 그 기업들에게 생명줄이 되어줬다. 61-2)


중국의 다른 개발도상국으로의 자본 수출은 중국 국내 정치경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만, 중국의 진출이 미친 영향은 다양하다. 중국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상품 수출을 위한 새롭고 확대되는 시장 및 자본의 원천으로서 기회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개발도상국에게 종속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독립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많은 정부는 원자재 수출에 대한 의존을 줄여나가며 산업화를 달성하는 것을 장기간의 우선적인 목표로 삼았다. 개발도상국은 (국내 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외국 제품의 수입을 억제하는) 수입 대체 산업화 혹은 (세계 시장에서의 판매를 위해 자국의 공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판촉하는) 수출 지향적 산업화를 통해 이를 달성하려 했다. 중국의 부상은 많은 개발도상국의 그런 노력을 가로막았다. 원자재 수출국의 수익 증가는 채굴 산업과 농업 기업의 확장으로 이어졌고, 이 국가들의 경제에서 원자재 수출 비중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발전 정책은 무력화되었다. 64)


중국 차관으로 인한 무역적자 외에도 부채 주도 인프라 건설 호황의 지속 가능성은 또 다른 우려 사항이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중국의 인프라 건설 관련 대출은 2009~2010년 중국 국유 은행들이 지방 정부와 국유 기업에 고정 자산 투자를 밀어붙일 수 있도록 자금 지원을 하기 위해 대출의 수문을 열었던 국내 경기부양책의 외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투자의 대부분은 산업 부문의 과잉생산 능력을 야기했고 수익성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출은 지속 가능하지 않았으며, 지방 정부와 국유 기업 사이에 부채의 시한폭탄이 되었다. 중국 정부가 대출 상환 연기, 탕감, 재정 투입 등을 통해 채무불이행 위기에 처한 국유 부문 채무자들을 구제함으로써 국내의 부채 위기는 방지할 수 있었지만, 이 해결책은 개발도상국의 해외 채무자들에게는 실행 불가능한 것이었다. 채무불이행 리스크를 고려해 다수의 중국 해외 차관에는 담보물에 대한 조건이 포함되어 있어서 채무불이행 시 중국이 전략 시설을 장악할 수 있었다. 66)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냉전의 종식으로 인해 중국은 아시아의 현 정부들과 함께 근대 이전의 중국 중심 질서를 닮은 새로운 중국 중심 질서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시아 지역에서 부국이든 빈국이든 모두 점점 더 중국 중심의 생산 네트워크로 통합되고 중국의 투자와 대출에 의존하게 되면서 중국이 경제 관계를 축소하겠다는 위협을 외교 무기로 사용하고 있음을 목도하는 중이다. 그러나 중국의 자본 수출 성장세는 2016년부터 크게 감소했다. 광범위한 세력권을 보유한 주요 자본 수출국이 되려는 중국의 야심찬 시도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금융적인 것만큼이나 지정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도, 네팔, 스리랑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투자와 차관을 받는 개발도상국들은 항상 미국과 다른 강대국들에게도 의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은 중국의 영향력 확장을 가로막았다. 중국이 이 난관을 극복하려면 세계 금융 및 지정학적 질서에서 미국의 지배력을 극복해야만 한다. 68, 70)


5장 결론: 돌아온 제국 간 경쟁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자본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베버주의적 관점에서 정의한) 국가의 지정학적 이해관계는 미중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모두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이 결합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자본 간 경쟁으로 이어졌다. 이 자본 간 경쟁은 중국을 지정학적 상대로 상정하려는 워싱턴 당국의 경향을 촉발시켰으며, 차이메리카 체제를 무너뜨리고 아시아와 그 외 지역에서 미중 경쟁관계를 야기했다. 이러한 미중 경쟁의 격화는 레닌이 이전에 논의했던 20세기 초 영국과 독일 간의 갈등과 유사하다. 주목할 점은 영향력을 가진 중국의 관방 학자 다수가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의 외교 정책 어젠다를 불과 한 세기 전 독일의 입장과 공개적으로 비교했다는 것이다. 21세기가 다른 점은 이제 미국과 중국, 그리고 두 나라의 동맹국들이 전쟁을 통한 보복이 아니라 영향력을 위해 경쟁할 수 있고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다양한 글로벌 통치 기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79-81)


더욱이 일찍이 홉슨이 지적한 것처럼,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국내 노동계급의 더 높은 소득과 그에 따른 구매력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면 해외의 이익을 찾아 자본을 수출해야 하며, 이 자본 수출은 국내 경제에서의 과잉생산 능력을 흡수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국내 재분배에서 진전을 보이면 자본을 수출할 필요가 줄어들고, 따라서 자신들의 세력권을 개척하고 다른 강대국과 충돌할 이유도 줄어든다. 중국의 맥락에서 중국이 가계소득과 가계소비를 부양해 경제의 균형을 재조정하려는 베이징 당국의 시도가 성공하게 되면, 중국 정치경제의 과잉생산 능력, 수익성 위기, 부채 문제는 완화될 것이다. 자본 간 제로섬 경쟁을 심화하는 대신 재분배를 통해 이윤을 회복하는 것은 국가 간 갈등으로 악화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 미국에서 재분배 개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추구를 통해 자본을 수출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해법이다.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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