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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탄생 - 로마 공화정의 몰락
에드워드 와츠 지음, 신기섭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1월
평점 :
서문 18
1장 독재 내 자유 24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여 권력을 쥔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로마 세계를 구했고, 나아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제기하는 위험 곧 외국에 통제될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로마 세계를 구해내고 (정치적) 자유libertas를 회복했다고 여겼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지지자들 관점에서 자유란, 아우구스가 제공하는 정치적 안정이 있을 때만 이룰 수 있는, 내부적 불안정과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유 상태를 뜻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자유는 또한 로마의 재산권이 여전히 유효함을 뜻했다. 이를 통해 일부 로마 주민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열어줬다. 그리고 날로 부패하고 국정 관리 실패에다 내전까지 유발한 원로원 엘리트들은 도시와 제국의 통제력을 빼앗겼다. 기원전 20년대의 많은 로마인들은 불안이 지속되는 한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아우구스투스의 관점에 동의했다. 그들은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는 일인이 통제하는 정치 형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됐다."(26)
2장 새로운 세계 질서 32
"공화국은 로마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보상을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로마 이전이나 이후 사회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재력이 중요했지만,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재력은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의 로마인들은 개인의 가치를 재력보다는 개인이 맡은 관직, 쌓아온 명성 그리고 자기 선조가 이룬 성과에 필적하는지 여부 등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로마 군대와 정치 생활에서 이룬 활동의 산물이었다. 공공에 대한 봉사는 명예로 보상을 받았고, 기원전 2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화국이 이런 교환 관계의 양 측면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공화국은 개인이 어떤 봉사를 할지 지시했고 그가 어떤 종류의 보상을 받을지도 결정했으며, 공화국이 홀로 통제하는 사회적 화폐 형태로 보상했다." "그리고 파브리키우스가 피로스에게 상기시켰듯이, 로마의 이런 독특한 형태의 화폐는 금이나 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로마에 봉사함으로써 얻는 것이었다."(41)
"공화국이 정치적 합의 도출을 고취시키고 로마 시민이 중시하는 보상을 독점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공화정이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속하는 정치 체제라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다. 로마 공화국의 결정과 보상은 주인 한 명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공동체의 정서와 결정을 반영했다. 이런 관점은 기원전 280년대에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었다. 로마는 한 세기에 걸친 정치적 변천의 마지막에 막 도착한 상태였고, 역사가들은 이를 '계급 갈등'으로 부르게 된다. 계급 갈등은 파트리키particii(이하 귀족)과 플레브스plebs(이하 평민)가 정부 체제에 합의하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들이 합의한 정부 체제는 귀족들의 사회·정치적 특권을 일부 유지하면서 평민들도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원전 280년대에 확립된 이 체제는 정치적 타협을 촉진하고 지속 가능한 합의를 구축하고 공화정의 공동 지배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로마인들이 함께 누린 자유의 수호를 목표로 설계되었다."(41-2)
"평민회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급격한 개혁을 강제할 잠재력이 있었던 반면, 원로원은 로마 공화국이 취한 대부분의 정책과 법률의 출발점이었다. 대중의 권력과 원로원의 기대치는 공직자들 사이에 타협과 협력의 문화가 생기게 했고, 이는 기원전 3세기 내내 로마를 지배했다. 집정관과 호민관들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취임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 모두를 (또는 대다수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재임 기간의 성공 비결은 동료가 원하는 것들, 민회가 기꺼이 승인할 것들, 원로원이 재가할 것들을 재빨리 이해하는 데 달려 있었다. 그 뒤로는 제각기 제기된 의제들과 자신의 생각 사이의 균형을 맞춰 최대한 많은 집단을 만족시킬 정책과 행동 과제를 제시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모두가 어느 정도 얻는 것이 최선이었다. 정치적 갈등은 없었고 〈법률 제정으로 해소시킬 의견 차이와 대결만 있었고 법률은 상호 존중과 모두의 양보를 통해 제정됐다.〉"(46-7)
"한니발과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로마 공화국은 한해에 4개 군단만 전투에 투입했고 경제는 저개발 상태였으며 농업은 소규모 경작에 크게 의존했었다. 그리고 공화국은 스페인, 그리스, 아프리카의 정치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놨다. 이 전쟁은 로마 군인들이 지중해 전역에서 전투를 벌이게 만들었고,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벌인 전쟁은 로마로 하여금 다른 정치 체제와의 관계와 로마의 정부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몰아갔다. 로마 군대는 아드리아해 동부 해변, 갈리아, 스페인, 시칠리아, 아프리카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로마 지휘관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스페인 내 부족들,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맹,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과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 군대 지휘 권한을 지닌 정무관의 수가 늘면서, 무장한 군단 숫자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로마는 전쟁 승리를 위해 만들어 낸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하거나 제거할 수 없었다."(63-4)
3장 제국과 불평등 68
"로마의 도덕이 어떤 변천을 거쳤건, 분명한 것은 2세기 전반기에 지중해를 간접 통제한 로마 체제의 실패가 공화정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거의 끝없이 이어진 전쟁 기간은 인구와 경제 측면에서 심대한 결과를 초래했고, 이 둘이 결합하면서 로마 정치 생활을 오래 지비해온 협력과 합의의 정치를 산산이 부수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직후의 출생 증가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숨진 20만 명 정도를 단순히 대체하는 정도였다. 이 때 태어난 이탈리아인들은 성인이 되자 많은 경제적 기회와 농업에서의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탈리아 인구 증가를 공화국이 보유한 땅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농촌 인구가 계속 늘면서 많은 로마 젊은이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 새로운 출발을 결심했던 듯하다. 로마의 인구는 한니발과의 전쟁이 끝났을 때 20만 명에서 기원전 130년대 중반에는 약 50만 명 수준까지 늘었다. 늘어난 로마 인구 대부분은 이주민들이었다."(78-81)
"한니발 침공 초기에는 전쟁이 로마 공화국을 사실상 파산으로 몰아갔지만, 두 가지 사건 전개 덕분에 기원전 180년대에 이르면 로마가 거의 상시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데도 중기적인 국가 재정이 예측 가능해졌다. 카르타고와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약속한 로마에 대한 전쟁 배상금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을 무찌르고 가져온 노획물에 맞먹는 규모의 재정 수입을 일정 기간 꾸준히 제공했다. 로마가 스페인, 마케도니아, 아프리카를 잇따라 속주로 삼은 뒤 이들 지역에서 거둔 세금은, (카르타고 등에서 받기로) 정한 전쟁 배상금 총액을 대체하고도 남는 규모였다."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자, 군사 정복과 금융의 꾸준한 고도화가 결합한 효과로 초갑부층 계급이 로마인 사이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엘리트 사이의 정치적 경쟁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자질과 명예, 가문의 혈통이 재산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파브리키우스 시대가 저물어 갔다."(82, 86)
"고대 작가들은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3세를 정복한 장군들이나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를 무찌른 장군들이 이런 사치를 로마에 들어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사실은, 로마 경제의 급속한 고도화가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이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큰 부자가 되게 해줬다. 예를 들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동시대 최고의 부자인 동시에 기원전 188년 로마가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할 당시에 생존할 로마인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던 크라수스는 한때 스키피오의 재산보다 거의 40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했다. 두 사람의 재산은 상대적인 규모만큼이나 그 성격도 달랐다. 스키피오의 재산은 대부분 카르타고와 스페인에서 탈취한 귀중품 실물 자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 크라수스의 재산은 대부분 금고에 보관된 실물이 아니라 서류상으로 존재했고, 이 때문에 훨씬 빠르게 불릴 수 있었다."(88)
"이탈리아 인구 증가는 기원전 2세기 많은 로마인의 경제적 전망을 자신의 부모 세대보다 암울하게 만들었다. 작은 집에서 대가족과 함께 작은 땅을 경작해야 했던 많은 이탈리아 시골 사람들은 겨우 먹고 살았다. 이들은 수확기에 부유층의 올리브 농장과 포도밭에서 일하는 계절 노동자 신세였다. 이들은 또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으려고 로마와 기타 도시로 이주해 부두 노동자와 장인으로 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부모 세대보다 더 열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당시 가장 부유한 로마인들이 누린, 전에 없는 부유함에 비해 그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가난한지 실상을 목격했다. 새로운 경제는 소수의 승자들에게 큰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새로운 빈곤층의 좌절감과 일부 옛 지배 계층의 권력 상실에 대한 우려는 격렬한 포퓰리즘이 일어날 여건을 조성했다. 기원전 140년대 말에 활동한 정치인 세대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상에 주목했고, 기성세대와 달리 고위 공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이 불안을 악용했다."(89-90)
4장 좌절의 정치 94
"티베리우스는 로마 유력 정치인들의 경쟁 무대에서 평민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축에 드는 가문 출신이다. 기원전 137년에 그는 원로원 의원 자격이 부여되는 공직 중 가장 낮은 검찰관에 뽑혔다.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스페인의 북부 도시 누만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티베리우스는 보좌 역할을 맡으면서 자기 가문이 그 지역 지도자들과 맺은 인맥이 아프리카에서 거둔 성과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만키누스의 군사적 무능이 아프리카에서 그가 보좌한 처남 스키피오의 천재성만큼이나 엄청난 것으로 확인됐다." "양측이 합의한 조약에 따라 살아남은 로마군 수천 명은 철수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확보했던 모든 약탈물은 누만티아 손에 넘겨졌다. 로마로 돌아온 티베리우스는 처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포함한 몇몇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이 맺은 조약을 로마의 '재앙이자 수치'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104)
"하지만 이 조약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원로원 엘리트들의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후대의 한 저자는 〈시민의 다수를 이루는 병사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티베리우스에게 몰려와서, 모든 책임은 장군(만키누스)에게 있으며 티베리우스의 노력 덕분에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라고 썼다." "스키피오가 기원전 134년 전쟁에 나설 시점이 되면, 그의 세계는 티베리우스를 친구와 가족을 구한 인물이라며 몰려온 보통 사람들의 세계와 더없이 간극이 큰 세계였다. 티베리우스는 더는 기득권층의 황태자가 아니라 스키피오와 그의 동맹 세력에게 부당하게 명성을 훼손당했다고 믿는 분열의 인물이 됐다." "하지만 그가 스키피오와 갈라졌으니 집정관이 될 체제 내 통로가 막혔다. 그가 엘리트 집단 안에서 명성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 시민들에게서 얻은 인기를 활용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스키피오가 134년 전쟁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 후,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다."(104-5)
자신의 제안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국가가 보통의 로마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막은 소수의 지배 집단을 향한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그는 추종자들의 폭력을 적극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도시의 모든 사람을 겨냥함으로써 로마 전체로 번진 물리적 폭력의 위험이 실제 폭동보다 더 큰 공포를 부르게 만들었다. 티베리우스 추종자들의 변덕은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그 후 운명이 극적으로 개입했다. 페르가뭄의 왕 아탈루스 3세가 숨지면서 왕국과 국고를 '로마 사람들'에게 남겼다. 티베리우스는 유언이 수혜자를 로마 사람들로 명시했기 때문에 원로원이 아닌 평민회가 유산 분배를 맡아 아탈루스가 로마에 남긴 영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에는 대중의 목소리와 투표 행사가 원로원과 지배 계층의 왜곡된 힘을 극복할 때만 로마인의 진정한 자유가 달성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새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110-2)
"아피아노스는 티베리우스가 수행한 호민관직의 가장 파괴적인 측면을 예리하게 인식했다. 티베리우스는 토지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개인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은 정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도구로 위협과 협박의 사용을 일상화했다. 아피아노스는 티베리우스의 제안이 훌륭하다는 데 동의했지만, 일반적인 정치 수단 대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을 부르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공화정은 불공정할지언정 모든 지배 계층이 인정한, 일련의 정치적 규범들에 따라 타협하고 경쟁하는 원칙 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그들은 공화국이 제공하는 보상을 놓고 경쟁할 기회를 얻는 대가로 순순히 공화정의 규칙에 얽매였다. 아피아노스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애도한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애도했다고 썼다. 또 그들은 티베리우스의 살해로 〈공화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력과 폭력의 지배만 남았다〉라는 사실이 드러난 그 순간에 대해서도 애도했다고 덧붙였다."(116)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가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에 당선되고 그다음 해에 재선되자, 더욱 큰 불확실성이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을 사로잡았다. 가이우스는 자신의 형이 시도한 토지 개혁 프로그램과 그의 폭력적인 죽음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호민관직을 시작했다. 가이우스는 그라쿠스라는 성씨를 쓸 뿐 아니라 선거 출마 전에 10년 동안 그라쿠스의 토지위원회에서 일한 인물이었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가 꿈에 나타난 뒤 호민관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고인이 된 형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이 덕분에 그는 형을 지지했던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지만, 한때 티베리우스에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로부터는 배척당했다. 호민관 당선 뒤 가이우스는 형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입법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국가가 감당할 역할의 미래상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생각은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그런데, 가이우스는 이 원칙을 훨씬 더 넓게 확장했다."(118)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가 나스키아가 이끄는 무리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함께 숨진 로마인은 약 300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원로원이 한 명의 로마 시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맞서는 데 집정관이 공화국의 자원을 쓰게 해주면서 수천 명이 가이우스와 함께 숨졌다. 정치적 폭력이 로마 정치의 변두리에서 원로원이 승인하는 도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로써 어떤 로마인들의 눈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공화국의 폭력에 희생됨으로써 개혁가를 막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기꺼이 사용하는 정치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이제는 아무리 사소한 폭력 사건이라도 공화정을 위협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처럼 협박을 이용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폭력과 협박이 정치 도구가 된 이상, 그 어떤 소동도 과잉 대응의 구실을 제공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티베리우스가 만든 이 새로운 세상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121-2)
5장 국외자의 부상 126
"마리우스는 조상 가운데 원로원 의원이 한 명도 없는 로마 기사 계급 출신자 곧 '노부스 호모'였다. 그는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피보호인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기원전 119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것도 그들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기원전 109년에 이르자 시대 분위기와 태도가 바뀌었다. 100년대 초 마리우스가 이제는 평판이 추락한 L.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와 공개적으로 맞서면서, 이 사태는 마리우스가 활용할 수 있는 뜻밖의 정치적 행운처럼 보였다. 로마는 반체제 열풍에 휩싸였고, 거의 15년 동안 집정관 다수를 차지했던 메텔루스 가문만큼 부패하고 무능한 로마 기득권층을 대표할 이들이라곤 없었다." "마리우스는 로마인들이 얼마 전까지 공공 생활을 지배하던 유서 깊은 가문들에 실망하고 이제 새로운 정치 방향을 갈망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에서 변화의 후보로 자리매김하는 행운을 누렸다. 마리우스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지지자들을 흥분시킨 만큼 반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132-5)
"마리우스는 대규모 신병 모집 허가를 요청했고, 원로원은 기꺼이 승인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여기 참여할 의지가 있는 병사들을 찾지 못할 것으로 확신했다. 로마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한 세대 전에 제기했던 문제 곧 군 복무에 필요한 최소 재산 기준을 충족시키는 시민이 감소하는 데 대한 해법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미리 문제를 감지한 마리우스는 전례를 깼다. 다른 지휘관들이 무시했던 로마인 계층에서 신병을 모집해 군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마리우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에는 로마 빈민층이 있었다. 그들은 마리우스에게서 군사 분야의 천재성을 봤고, 그 아래 들어가 복무하면 쉽게 승리하고 전리품도 상당히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 세대 전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그랬듯이, 마리우스도 공화정의 규범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우선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토지 없는 이들을 입대시키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최근 선례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135-6)
"정당성을 잃은 기득권층은 단기적으로는 마리우스에게 도움이 됐지만, 공화정에는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타협을 권하고 정치적 합의를 창출하던 정치 체제는 이제 그 체제를 이끌던 인물들과 함께 불신을 받았다. 사투르니누스와 같은 정치인들은 이런 구조적 약점을 이용했고, 마리우스는 보기 드문 공직 경력을 이미 확보한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새롭고 폭력적인 동맹 세력에 협력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기원전 130년대와 120년대에는 드물던 정치 폭력이 이제는 로마의 정치 과정에서 거의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도구가 됐다. 이 현상은 사투르니누스가 마리우스 휘하의 참전 군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법을 통과시키려 할 때 군인들이 로마에 머물면서 무언의 위협을 가하며 시작됐다. 기원전 110년대가 깊어가면서 협박이 노골적인 폭력으로 바뀌는 일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특정 법안에 대한 투표에 폭력이 스며들었고, 기원전 101년에 이르면 정무관 선거에서 살인 공격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147-8)
6장 공화국 균열 152
"술라는 떠오르는 별이었지만 아직 로마 정치의 상층부를 뚫지 못했다. 그가 집정관에 오를 시간은 부족했고, 이제 이탈리아가 전쟁에 휩싸이면서 로마는 얼마 전 로마를 구한 믿음직하고 경험 많은 지도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으로 고위 지휘관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술라에게 문이 열렸다." "기원전 89년 폼페이를 장기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술라가 통솔하는 군대가 전임 집정관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를 죽이는 일이 터졌다. 술라는 이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처벌하는 대신 진짜 적들과 더 열심히 싸워 속죄하라고 말했다. 동맹시 전쟁은 심각한 위기였고, 적군과의 교전이 임박해 있었으며, 술라 입장에서는 어떤 군대이든, 심지어 불충스런 군대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장기 전략도 작용했다. 술라는 법과 관습에 따르자면 엄하게 처벌해야 할 군대를 사면했다. 이 군인들은 술라에게 목숨을 빚졌으며, 언젠가는 이 빚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음을 술라는 아주 잘 알았다."(162-3)
"원로원은 기원전 88년 담당 집정관 선거 전에 이미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새로 당선되는 집정관 중 한 명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 지휘권이 술라에게 넘어갔을 때, 그는 행운이 또다시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술라는 이미 부자이자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아시아 전쟁의 지휘권은 다른 로마인이 거의 가져본 적 없는 부와 권력을 약속했다. 그리고 술라의 병사들에게도 이 작전은 로마의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견디게 해줄 수입원이 될 것이다. 술라의 정치적 경쟁자들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광분한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사병 집단은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선사했다. 그 뒤 술라는 로마의 역사를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그는 병사들에게 자신이 내리는 명령에 계속 따르겠다고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군사작전을 놓칠까〉 두려워한 병사들은 〈술라가 원하는 바를 대담하게 입에 담으면서 술라에게 자신들을 로마로 이끌라고 요구했다.〉"(166-8)
"술라가 무엇을 성취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로마를 점령한 뒤 술라는 집정관직을 유지했고, 원로원으로 하여금 그의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회복시키고 술피키우스가 제정한 법률을 무효화시키게 만든 뒤 원래 계획대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다. 하지만 로마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공화정이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아봤다. 한때 로마 군대는 지휘관이 전쟁 승리로 명예와 관직을 얻기 위해 빌려 쓰는 공익 사업체와 비슷했지만, 술라는 이런 군대가 개별 지휘관의 내부 정치 투쟁을 위한 개인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물론 선동가로부터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의 이런 합리화도 로마 군인들이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지휘관의 자존심을 위해 다른 로마인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 교훈은 술라의 라이벌들에게도 주목 받았다. 술라가 동방으로 떠나자마자, 이탈리아는 다시 폭발했다."(170-1)
7장 잔해 속에서의 재건 182
"동맹시 전쟁과 이를 잇는 기원전 80년대 내전의 엄청난 파괴와 폭력 이후 술라가 공화정을 변형 재건하기로 결심하면서 로마가 영구적인 독재 체제로 전락하는 사태는 피했다. 하지만 로마가 제대로 작동하던 과거의 공화정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확대된 원로원, 거세된 호민관, 원로원 배심원제를 도입한 술라의 공화정은 사실 그 이전의 정치 체제와 급격하게 결별한 체제였으며, 널리 퍼진 살인과 절도를 기반으로 한 체제였다." "술라는 자신의 죄책감을 공유할 의도로 사람들을 골랐다. 그는 이들에게 공적 명예를 부여하고 공적 진출을 후원했으며, 자신이 처벌 대상자로 공표한 이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도록 장려했다." "술라 밑에서 복무한 수만 명의 퇴역 군인을 몰수한 땅에 정착시켰고, 그들 중 다수를 재건된 로마 원로원에 진출시켰다. 술라는 죄를 지은 자들이 너무 많고 힘도 강력해서 청렴한 사람들은 감히 대결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정착시켰다."(182-3)
"이렇게 몰수한 재산으로 조성된 대규모 토지 중 일부에서 노예 노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술라가 내전에서 승리한 뒤 이탈리아에서 노예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기원전 9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동맹시 전쟁이 끝난 시점에 로마 시민권을 얻었어야 할 자유 이탈리아인 일부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노예로 삼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기원전 70년대에 이르면, 많은 농업 부문 노예들이 캄파니아 등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비옥한 땅에서 일했다. 많은 경우는 술라한테서 재산과 시민권을 박탈당한 이탈리아 가문 출신자들이 이들과 함께 일했다. 술라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이탈리아를 위해 이탈리아인과 로마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사회 협약을 파괴했다. 땅을 유지하게 된 이탈리아 농부들조차 이웃에 있는 술라 지지자들의 더 크고 효율적인 농장과 경제적으로 경쟁하느라 고생했다."(184-5)
8장 이류들의 공화국 208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호민관의 다른 고위직 출마 자격을 회복시켰기 때문에, 가장 진취적인 호민관들은 이제 술피키우스를 본받아서 더 힘 있는 인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영향력을 키웠다. 67년에 호민관들이 추진한 가장 중차대한 사업 중 하나는 지중해 전역에서 3년 동안 해적과 맞서 싸울 특별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다. 가비니우스가 만든 관련 법률은 이 임무를 맡을 지휘관을 전직 집정관 중에서 선발한다고만 명시했지만, 이 자리가 폼페이우스를 위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새 지휘권 장악을 걱정했지만, 그가 지휘한 해적 소탕 작전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로마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폼페이우스의 특별 지휘권은 3년 동안 유지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했던 시간은 3개월 정도였다. 이로 인해 기원전 66년 초에 폼페이우스에게 또 다른 특별 지휘권을 주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추진하려고 했다."(210-2)
"이를 계기로 로마는 전례가 없는 정복 작전에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3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미트리다테스를 공격하며 아르메니아까지 쫓아갔다. 또 소아시아 상당 부분과 시리아 전역을 정복했고, 지중해 동부의 나머지 지역 대부분을 매년 조공을 바치는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들을 상대할 때 보여줬던 정치적 기술을 이번 정복에서도 발휘했다. 폼페이우스는 새로 로마에 속하게 된 지역의 지방 정치를 아주 능숙하게 통제해, 그가 제정한 지역 법령은 거의 300년이나 효력을 유지했다. 그는 군대 동원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두면 그 지역의 왕들과 도시에 호의적인 동맹 관계를 제안했다. 이는 그들이 특히 폼페이우스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대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제 북쪽의 아르메니아에서 남쪽의 유대까지 이어지는 우호 군주의 세력군을 확보했다.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동부를 새로 구축하는 동안, 로마에 있던 이들은 그의 공백을 메우려고 서로 다퉜다."(214-5)
"여러 뛰어난 기량을 지닌 새 인물들도 등장했다. 그들 중 키케로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두 사람은 나름의 공적 인물상을 신중히 구축했다. 키케로는 장황하고 자화자찬을 일삼지만 종종 아주 설득력 있는 연설에 능한 기사 가문 출신자다." "카이사르는 많은 면에서 키케로와 정반대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신화 속 영웅) 아이네아스의 아들이자 여신 베누스의 손자인 이울루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도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그의 짧고 힘 있는 문장과 정확한 단어 사용은 키케로가 선호한, 길고 복잡한 구성과는 확실히 대비됐다. 키케로는 한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조차 화를 내게 만드는 독특한 소질이 있었던 반면, 카이사르의 인간성은 동료들과 지속적인 우정을 쌓을 뿐 아니라 심하게 대립하는 경쟁자들까지도 의기투합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카이사르의 가장 큰 재능은 로마 대중의 인기를 얻고 유지하는 놀라운 능력에 있었다."(215-6)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젊은 카토)는 완전히 다른 대중적 이미지, 즉 자신의 조상처럼 견고한 미덕을 지닌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비치는 행동을 기회주의적으로 드러내는 행태는, 카토가 군 호민관과 검찰관을 거쳐 기원전 64년 말에 원로원 의원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의 경력을 규정지었다." "카토는 원로원에 진출해서도 부패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순수한 공화정의 자유 수호자라는 공적 정체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 미덕 수호와 동의어나 다름 없는 가문 출신인 데다가, 소박함을 정기적으로 과시했고, 타락한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정직성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공공 행사를 신중하게 골랐다. 카토는 카이사르처럼 포퓰리스트가 아니었고 키케로처럼 화려한 웅변가도 아니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도덕적 권위는 키케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같은 인물들의 재능과 재주, 업적으로도 무력화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219-22)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정치적 승리를 얻었다. 키케로는 아주 강력한 연설을 이 사건 와중에 선보였고 로마에서 가장 권위 있는 칭호들 중 하나를 얻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 5명을 재판 없이 처형한 키케로의 결단은 곧바로 역풍을 맞았다. 그리고 미래의 영향력에 영원한 족쇄가 될 정치적 약점도 남겼다. 카토는 카닐리나의 음모 사건을 거치면서 키케로와는 또 다른 기화와 한계에 직면했다." "기원전 62년 1월에 이르면 그는 공화정을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책이라면 무엇이든 원칙에 입각해 반대하는 로마의 대표적 목소리로 스스로 규정했다. 실로 카토가 어떤 정책에 반대하면, 그 정책이 로마를 온전히 보전하는 데 위협이 된다고 비판하는 행동으로 해석될 정도였다. 카토의 비판은 매우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국가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진짜 문제들에 직면한 로마 시민들의 현실 세계에서 추상적인 원칙에 대한 카토의 확고한 헌신은 한계 또한 분명했다."(228-9)
9장 휘청거리며 독재를 향해 234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서 처음 발의한 주요 법안은 혼잡한 수도 로마에서 일부 인구를 이주시키고,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던 퇴역 군인 일부에게 정착지를 제공하며, 이탈리아 특정 지역을 경작지로 되돌리는 걸 〈겨냥한〉 토지법이었다." "이 법은 다루기 아주 힘들어 보였던 정치 문제에 합당한 해법을 제시했다. 카이사르는 법 시행을 강제할 영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았지만, 누구도 이 법에 대해 타당성 있는 반대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법을 설계했다. 게다가 이 법안이 원로원에서 최대한 투명하게 논의되도록 했다. 그는 법안 전문을 큰 소리로 읽은 뒤, 원로원 의원을 한 명씩 호명해 비판할 거리나 반대하는 조항이 있는지 물었다. 카토와 그의 동료들은 상당히 분해했지만, 누구도 법안에서 잘못을 찾지 못했다. 역사가 디오는,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강하게 압박하는 법인데도, 카이사르가 아주 정교하게 법안을 만들어 혹평할 거리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특히 분개했다〉라고 썼다."(245-6)
"카이사르는 단 몇 달 만에 기원전 60년대 후반 로마 정치 생활을 지체시킨 원로원의 교착 상태를 돌파했다. 이를 통해 그는 많은 성과를 이뤘다. 그는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전쟁을 치른 군인들과 땅이 없는 로마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또 동방 전반에 걸친 로마의 피보호 왕국들의 정치적 재편과 함께 폼페이우스의 소아시아와 시리아 영토 병합을 합법화했다. 그는 크라수스의 동맹 세력인 기사 계급을 위해 아시아 조세 징수 계약 재협상도 성사시켰다. 가장 중요하게는,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상당한 재량권도 발휘할 갈리아 지역 지휘권을 챙김으로써 자신의 경력에서 화려한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카이사르는 막강한 개인적 인맥, 능숙한 정치적 책략, 방해나 저지 시도를 폭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위협을 적절히 섞어서 이 모두를 이뤘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떠날 무렵 로마에서 다시 정치적 혼란이 시작됐다. 이번 혼란은 카이사르가 보여준 전례와 그가 집정관 시절 저지른 몇 가지 오판 중 하나가 원인이었다."(250)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지휘권이라는 집단의 문제를 자기 개인 문제로 만든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로마 정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증거다. 광범한 정치적 합의 도출을 위해 협력하는 엘리트 집단이 통치하던 로마 공화정이 이제 강력한 개인 두 명이 정치 역할을 형성하는 체제로 바뀌었다고 인식한 이가 폼페이우스만은 아니었다." "기원전 50년의 마지막 원로원 회의는 공화국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개인적 갈등을 막을 능력이 없음을 보여줬다. 원로원은 세 가지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폼페이우스에게만 군대 해산을 요구하는 안은 부결됐다. 카이사르에게만 지휘권 포기를 요구하는 안은 가결됐다. 쿠리오가 그해에 앞서 제기한 요구를 반영해 두 사람 모두에게 군대 해산을 요구하는 안도 370 대 22로 승인됐다.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두 사람이 분쟁에서 물러나기를 바랐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군대 통제에 나섬으로써 타협의 희망을 꺾었다."(259-61)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원치 않는 전쟁을 폼페이우스가 준비하는 동안 끌려 다녔다. 기원전 49년 담당 집정관 당선자들은 갈리아와 일리리쿰에서 카이사르의 후임자를 임명하라고 원로원을 압박했다. 카이사르에게 충성하는 호민관들이 카이사르의 군대 지휘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려 하자, 원로원은 긴급 포고령을 통과시켰다. 호민관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카이사르에게로 도망쳤다. 이렇듯, 공화정을 마비시킨 카토 주도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카이사르가 깨뜨리면서 시작된 10년은 두 지도자가 내전으로 치닫는 동안 공화국이 저항하지도 못할 만큼 허약해진 채 끝을 맺게 됐다. 이제 로마의 정치 생활은 로마의 자원을 완전히 장악해 명예와 권력을 다투는 개인들의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술라 이후 처음으로 이 투쟁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이어질 싸움임이 분명했다. 패자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호할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행진이 시작됐다."(261)
10장 카이사르 공화국의 탄생과 멸망 264
"폼페이우스는 죽고, 카토와의 대결을 준비하던 기원전 47년 카이사르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10년 넘게 싸워온 병사 등 최정예 병사들이 제대하겠다며 카이사르가 약속한 보너스 지급을 요구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을 직접 찾아가 창피를 줌으로써 반성하게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본인을 병사들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들었다. 과거의 지휘관들은 공공 재산으로 병사에게 보상하느라 공화국에 의존했다. 술라가 몰수한 재산조차 실제로 추종자들에게 분배하기 전에 공적 통제를 거쳤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공공 재원과 자신의 사재를 활용해 땅을 분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계획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양측 모두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군대는 이제 그가 살아 남아서 약속한 보상책을 시행할 권한을 유지해야 했다. 그들은 공화정과 공화정을 이끄는 개인을 동시에 섬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로마를 책임질 때만 로마가 안정되는 여건을 조성했다."(276-7)
"기원전 44년이 되자, 공화정이 공로를 인정하고 명예를 높여주는 매개체였던 공직에 대한 카이사르의 통제가 거의 완성됐다. 그는 집정관을 임명할 뿐 아니라 다른 하위 공직 선거 결과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한까지 장악함으로써 하급 공직자도 사실상 임명했다. 그 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준비하면서 향후 몇 년 동안 정무관을 맡을 인물 명단을 만들었다. 이 명단에는 43년도 정무관 전원과 42년도 집정관과 호민관이 있었다. 물론 카이사르는 계속 독재관직을 유지했다. 또 자신의 부관으로 40년대 초에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나 44년 초부터 43년까지 부관이었던 레피두스를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로마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레피두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통치를 위해 떠나자마자, 새로운 부관으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라는 열여덟 살 청년을 임명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 청년이 자라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될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278-9)
11장 옥타비아누스의 공화국 290
"기원전 44년 3월 15일의 사건은 카이사르가 죽는 순간까지 브루투스, 카시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료 공모자들의 계획대로 정확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그 뒤에 무엇을 할지 전혀 몰랐다. 원로원은 박수가 터져나온 게 아니라 공포로 텅 비었다. 홀로 살아남은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동맹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도 살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택으로 도망쳤다. 암살 공모자들은 되찾았다고 느낀 자유를 상징하기 위해 창을 들고 모자를 쓴 채 도시에 등장했지만, 로마가 자신들을 해방자로 축하하기는커녕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 순간 브루투스, 카시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료 공모자들은 카이사르가 수도의 안정을 회복함으로써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동료 시민들이 카이사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들이 전혀 몰랐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폭군으로 여겨 죽인 인물이 내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제국이 혼란에 다시 빠지는 걸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290)
"옥타비아누스가 4월 11일께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도시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하면 입지를 가장 잘 다질지 이미 냉정한 계산을 끝낸 뒤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카이사르의 이름이 가진 힘을 봤고, 죽은 독재관의 유산에 흔들림 없이 헌신하면 어떤 반향을 얻을지도 확인했다. 안토니우스나 레피두스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암살자들과 타협했다는 오점이 없었다. 그리고 과격한 아마티우스와 달리, 카이사르의 유산을 주장할 정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를 살해한 자들을 너무 과격하게 뒤쫓거나 반대로 너무 타협적으로 용서해서는 안됐다. 옥타비아누스는 또한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로마 정치인들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데서 오는, 뚜렷한 이점도 잘 알았다. 노련한 정치인들 중 그 누구도 이 청년이 이례적으로 조숙한 정치 감각을 지녔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299-300)
"삼두정치 체제는 기원전 33년 말에 만료됐지만, 현실적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한 정상적인 공화정 질서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자신만이 클레오파트라로부터 로마의 자유와 제국 통제권을 지킬 수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안토니우스에 대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삼두정치가 끝났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아무 직책도 없었고 이집트 여왕에 맞서는 전쟁을 이끌 법적 권한도 없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관련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이탈리아 전체가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나에게 지도자dux가 되기를 요구했다··· 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디니아와 함께 갈리아와 스페인의 속주도 똑같이 맹세했다〉라고 선언했다." "과거의 로마 공화정에서는 원로원이 로마의 적을 집단적으로 결정했고, 적들이 모두를 위협했기 때문에 적이 누구인지 모두가 공유했다. 이제 이탈리아 전체는 선택의 여지 없이 옥타비아누스를 따라야 했다."(318-21)
12장 아우구스투스의 자유를 선택함 326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제국은 한 세기가 넘게 지속된 공화정의 기능 장애에서 비롯됐다. 실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 말기에 충족시켜 주지 못한 로마 시민의 많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공화정을 대체할 제국 체제를 신중히 설계했다. 로마인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자신들의 독재자로 인식했을 때 암묵적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지도를 따르고,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군대에 대한 안정적 급여 지급과 군 동원 해제 조치, 정치적 안정, 적으로부터의 보호, 정기적인 식량과 식수 공급, 아름다운 도시들, 상대적 번영을 제공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기 몇 년 전부터 로마인들이 이런 거래를 할 준비가 됐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충성 서약은 그들이 분쟁 시기에 옥타비아누스 개인에게 충성할 의지가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패하고 이집트를 합병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들과의 이 거래를 영구화할 로마 국가 재구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326-7)
"점차 신의 영감을 받은 통치자가 평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이념이 옥타비아누스 지배 체제의 근본으로 자리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들이 안전, 평화, 번영, 오락을 누리게 해 줄 독재 체제 아래서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약속했다. 법치도 회복됐다. 옥타비아누스는 사면을 요청하는 모든 시민을 사면했고, 카리나스처럼 과거 정권 아래서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해 줬으며, 아그리파처럼 사회적 지위는 낮지만 재능을 인정받을 만한 이들을 도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과정 내내 새로운 제도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이 모든 혜택을 보장한 장본인은 바로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특정 개인이 아니라 원로원과 국민들을 위해 바쳐온 희생과 기도, 제사를 그를 위해 거행함으로써, 그가 새로운 질서의 중심에 있다는 걸 의례로써 인정하기를 기대했다. 페르가뭄 같은 속주의 도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옥타비아누스를 신성한 인물로 숭배할 신성한 구역을 새로 헌정했다."(329-30)
"옥타비아누스는 엘리트 계층에게는 공직을 통해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공직 취임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공식 권력 행사의 기본 원칙은 자신의 말처럼 〈공화정을 나 개인의 권력에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지배로 바꾸는〉 것이었고, 이제 그 자신은 〈비록 과거의 정무직 동료들보다 공식 권력은 더 많지 않지만 영향력auctoritas만큼은 그들 모두를 앞서게〉 될 터였다." "이제 엘리트들이 탐하는 집정관, 법무관, 그리고 기타 원로원의 공직을 얻는 길이 다시 열렸고, 세계 최대 제국의 일상 통치 책임을 엘리트들에게 넘기는 것도 가능해졌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면, 원로원 또는 국민들이 선택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승인한 정무관들과 옥타비아누스가 그 공로를 공동으로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원로원의 무능한 행정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이와 함께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개입해 자신의 개인적 권위와 재산을 동원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330-1)
"기원전 23년에 옥타비아누스가 두 자리의 집정관직 중 하나를 독점하는 게 분명히 문제가 되자 추가 조정이 이뤄졌다. 옥타비아누스는 7월에 집정관직을 사임하면서 다시는 집정관을 맡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이는 아마도 암살 음모에 대한 대응 또는 위중한 질병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그의 권력이 재정립됐다. 그는 원로원에서 동의안의 첫 번째 절차를 개시할 권한과 어떤 법률안도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또한 분쟁이 생겼을 때 모든 속주의 총독을 지휘하는, 강화된 최고사령관imperium maius도 받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호민관의 권력tribunicia potestas도 확보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호민관에게 부여되던 정치적 권한과 개인적 신성 불가침의 권리다. 호민관 권력 부여는, 옥타비아누스가 귀족의 실제 직책인 집정관을 포기하고 대신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호민관의 상징적 지위를 받는 거래를 상징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됐다.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것이다."(3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