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화학으로 세상을 읽는다 - 소소한 일상에서 만물의 본질이 보이는 난생처음 화학책 나는 세상을 읽는다
크리스 우드포드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21년 6월
평점 :
품절


1. 세상 모든 것의 재료 - #원자 #금속


어떠한 예외도 없이 지구상 모든 것은 미세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100여 종의 성분으로 만들어진다. 이것을 생명의 레고 블록으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탄소, 수소, 질소, 산소만 있어도 생물 대부분과 엄청나게 많은 무생물을 지을 원재료를 갖춘 셈이다. 물질과 물질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안에 있는 원자들만이 아니다. 원자들이 결합 방식에 따라서도 물질이 갈린다. 대표적인 예가 지구에서 가장 풍부하고 가장 필수적인 물질, 바로 물이다. 원자가 (금과 은 같은) 화학원소의 기본 단위인 것처럼 분자는 보다 복잡한 물질의 기본 구성요소다. 둘 이상의 원자를 붙이면 분자가 된다. 이제 원자 쪼개기는 전혀 새롭지 않은 일이 됐다. 러더퍼드 ‘입자가속기’의 현대판 후손들이 원자를 입자들로, 그 입자들을 더 작은 입자들로 쪼개왔다. 오늘날은 원자에 수십 개의 하위 입자가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아원자 입자들은 이제 구닥다리가 된 양성자와 중성자부터 비교적 최근에 인지된 힉스입자Higgs boson까지를 아우른다. 9, 14)


철의 내부 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은 똑같은 크기의 구슬 수백 수천 개가 빼곡히 들어찬 상자의 뚜껑을 여는 것과 비슷하다. 각각의 구슬은 각각의 철원자에 해당한다. 이 원자들이 나란히 줄지어 그리고 층층이 쌓여 있다. 철은 망치로 두들겨 더 나은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원자의 층층들이 서로를 행복하게 미끄러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유리와 달리 철은 원자들이 위치 이동을 꺼리지 않기 때문에 모양을 잡을 때 구부러진다. 반면 유리는 원자들이 전체 구조를 허물지 않고는 새 장소로 이동하지 못해 산산이 부서진다. 또한 철은 전기를 잘 유도한다. 원자들이 밀집한 구조에서는 각 원자의 외곽을 도는 전자들이 서로 맞물려 전체 구조를 아우르며 앞뒤로 출렁이는 일종의 흐릿한 바다를 형성해서 전기를 이편에서 저편으로 운반하기 때문이다. 열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철을 타고 흐른다. 철을 충분히 가열하면 벌겋게 달아오른다. 원자들이 열에너지를 흡수해서 (붉은)빛의 형태로 내놓기 때문이다. 16)


쇳덩어리는 철원자로 돼 있지만 플라스틱 덩어리는 플라스틱 원자로 돼 있지 않다. 플라스틱은 대개 폴리머(polymer, 다량체)라고 부르는 고분자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폴리머는 대개 탄소, 수소, 산소, 질소를 기반으로 한다. 폴리머는 모노머(monomer, 단량체)라고 부르는 단순한 분자를 긴 사슬처럼 끝없이 중첩시켜 만든 것이다. 플라스틱은 수명은 억세게 길지만 부드럽고 유연하다. 폴리머 사슬이 꽤 약한 결합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자유전자의 바다가 출렁이며 전기와 열을 전달하는 금속과 달리, 플라스틱의 전자는 모두 원자 안에 안전하게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열과 전기가 플라스틱 물질은 쉽사리 통과하지 못한다. 하지만 플라스틱이 다 그런 건 아니다. 나일론의 가까운 친척인 인조섬유 케블라Kevlar는 같은 무게일 때 강철보다 무려 다섯 배나 강하다. 케블라 섬유를 30겹 맞대면 1,500km/h 이상의 속도로 날아오는 총알도 막을 수 있는 두툼한 방탄 이불이 만들어진다. 18-9)


2. 스파이더맨의 정체 - #접착 #마찰


자석이 냉장고에 붙어 있다. 자성이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금속과 금속을 꽉 들러붙게 하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접착제는 보이지 않는다. 접착제가 있든 없든 모든 종류의 끈적거림과 미끄러움에는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 뭔가가 다른 뭔가에 달라붙을 때는 반드시 그것들을 한데 붙드는 힘이 있다. 그것들이 달라붙지 않거나 미끄러질 때도 대개는 같은 힘이 있다. 다만 둘을 묶기에는 힘이 모자랐을 뿐이다. 눈에 띄게 아름답지만 다소 무거운 벽지를 붙이는데, 벽지가 붙어 있지 않고 자꾸 다시 떨어진다고 치자. 무슨 연유일까? 겉보기에는 단순히 중력(벽지를 벽에서 벗겨지게 하는 벽지의 무게)과 풀(벽지를 벽에 붙여두는 힘) 사이의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보기보다 복잡하다. 실제로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접착성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첫째, 풀이 벽지에 붙어 있어야 한다. 둘째, 풀의 반대편이 벽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흔히 간과되는 세 번째는 풀도 스스로 뭉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


보다 면밀히 살펴보면 앞의 세 가지 접착성은 사실상 두 종류다. 자기들끼리 달라붙느냐, 다른 것들에 달라붙느냐. 이 두 가지 유형의 힘을 응집력cohesion과 접착력adhesion이라고 한다. 풀이 정말로 효과적으로 기능하려면 강력한 응집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중간에서 쪼개지지 않는다. 접착력과 응집력이 나란히 작용하는 가장 친숙하고 가장 주목할 만한 예가 바로 물이다. 진정한 응집력의 대명사인 물 분자들은 심지어 근처에 움켜잡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있을 때도 자기들끼리 똘똘 뭉친다. 이것이 비가 방울방울 후두둑 떨어지는 이유다. 일반적으로 물은 접착력보다는 응집력이 훨씬 강하다. 이것이 빗방울이 퍼지거나 흩어지지 않고 잎사귀 위에 진주처럼 영롱하게 맺힐 수 있는 이유다. 물은 끼리끼리 뭉치는 데는 명수지만 다른 것에 달라붙는 데는 영 젬병이다. 그래서 물을 제대로 퍼지게 하고 물건을 완전히 적시기 위해서는 세제(계면활성제)를 사용해야 한다. 22)


모든 물질은 원자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억하겠지만 원자들은 우리가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부르는 더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양성자는 미소량의 양전하를, 전자는 미소량의 음전하를 가진다. 원자 내부에는 같은 수의 양성자와 전자가 있어 서로를 상쇄하기 때문에 원자 자체는 전하를 띠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원자가 같지는 않다. 어떤 원자는 다른 원자보다 탐욕스럽다. 두 가지 물질을 밀착시켜 반복적으로 문지르면 이쪽 원자들이 저쪽 원자들로부터 전자를 ‘강도질해 온다.’ 이것이 스웨터에 풍선을 비볐을 때 생기는 일이다. 강도(스웨터)는 전자가 늘어 음전하를 띠게 되고, 불쌍한 피해자(풍선)는 전자를 잃어 양전하를 띠게 된다. 그러면 둘은 자석의 양극과 음극처럼 서로 끌어당긴다. 이것이 스웨터에 풍선이 달라붙는 이유다. 0.1g의 굵은 물방울 하나에만 해도 약 30억조 개의 분자가 들어 있다. 이것이 정전기처럼 일견 보잘것없는 힘을 이용해 초강력 접착제를 만들 수 있는 이유다. 24)


우리가 서둘러 걸을 때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마찰이다. 마찰이 없다면 걷기는 불가능하다. 발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냥 미끄러져 발라당 넘어지게 된다. 운전도 불가능하다. 정지마찰traction 없이는 자동차 바퀴가 헛돌기만 할 뿐 전진하지 못한다. 마찰은 발이나 바퀴가 새로운 위치로, 앞으로 약간 이동할 만큼만 바닥에 붙어 있게 하는 일종의 일시적 접착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거동의 핵심이다. 마찰은 정전기 접착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두 개의 면이 접해서 이쪽 원자들이 저쪽 원자들과 타격 가능 거리(약 원자 다섯 개 길이)에 들어오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두 표면이 잠시나마 붙어 있다. 그런데 마찰이 접착제와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면서 어째서 영구적 접착성은 없는 걸까? 모두 규모의 문제다. 차가 주차돼 있을 때 고무 타이어와 노면 사이의 마찰력은 중력(자동차 무게)이나 바람 등 차에 자연적으로 미치는 힘을 이길 만큼 크다. 그래서 주차한 차는 길에 딱 붙어 있다. 26)


3. 유리가 맑고 투명한 이유 - #유리 #결정구조


금속은 밀집 결정구조지만 원자들이 어느 정도는 이동이 가능하다. 금속을 망치로 때려서 모양을 잡는 것은 원자들의 행과 열을 후려쳐서 새로운 위치로 밀어내는 것이다. 원자들이 움직이기 때문에 망치 타격이 공급하는 에너지를 쉽게 흡수한다. 반면 유리는 유난스럽다. 유리는 열린 비정형구조라서 원자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지 않고 보다 느슨하게 무작위로 연결돼 있다. 유리는 총을 맞으면 원자들이 재빨리 대오를 정비할 방법이 없고 총알의 에너지를 흡수하거나 소멸시킬 도리도 없기 때문에 전체 구조가 붕괴한다. 이것이 유리가 약간의 압박에도 쉽게 금이 가는 이유다. 요리 좀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유리컵을 박살내기 위해 반드시 내리치거나 총을 쏠 필요는 없다. 뜨거운 유리컵을 차가운 물에 넣으면 유리가 짝! 갈라진다. 아주 깔끔하게. 왜 그럴까? 역시나 문제는 유리의 비정형구조는 신속한 재배열로 에너지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때의 에너지는 열이다. 35)


물질의 투명성과 불투명성은 빛이 그것을 통과하려 할 때 그것이 빛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달려 있다. 금속은 광자photon라고 부르는 빛 입자뿐 아니라 엑스선처럼 빛과 비슷한 것까지 모두 쭉쭉 흡수한다. 금속의 원자들은 자유전자들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이것이 광자를 쉽게 흡수했다가 쉽게 분출한다. 광자를 공처럼 잡아서 왔던 방향으로 다시 던져버린다. 알루미늄과 은처럼 반짝이는 금속은 모든 종류의 광자(온갖 색의 빛)를 몽땅 잡아서 다시 던진다. 유리의 전자들은 괴상한 비정형구조의 원자들을 흐트러지지 않게 붙들고 있느라 바빠서 가시광선의 광자들을 금속처럼 착착 포착하지 못한다. 그래서 광자들 대부분 유리의 한편으로 들어와 반대편으로 빠져나가고, 유리 원자들은 그걸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자외선은 얘기가 다르다. 자외선의 광자는 가시광선의 광자보다 에너지가 넘쳐서 유리가 흡수하기에 좋다. 이것이 유리가 순수한 자외선 속에서 불투명해 보이는 이유다. 37)


열은 적외선 복사infrared radiation 형태로 허공을 돌진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의 광대한 진공 공간도 그렇게 가로지른다. 열은 일정한 속도(초속 30만 km)로 질주한다는 점에서 빛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열(적외선)과 가시광선의 실질적 차이는 열을 전달하는 파동이 살짝 더 길다는 것뿐이다. 무지개(가시광선)의 빨강(바깥쪽)에서 파랑(안쪽)까지의 스펙트럼을 생각해보자. 적외선은 빨간색 바로 너머에,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색들 바로 밖에 있다. 열이 빛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인다면 열이 유리창을 곧장 통과하는 것이 하등 신기할 게 없다. 빛이 갈 수 있는 곳은 열도 따라간다. 이걸 막을 해법은 간단하다. 유리에 금속이나 (이산화티타늄 같은) 금속산화물을 얇게 입혀서 부분적 거울로 만드는 것이다. 원자 몇 개 두께의 초박막 코팅은 빛은 투과시키고 열은 차단한다. 타는 듯이 더운 여름날에는 이 보이지 않는 코팅이 바깥의 열을 반사해서 집 안을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유지해준다. 38-9)


4. 모든 물질은 늙는다 - #탄성 #부식


‘엘라스틱’은 물질의 성질이지 물질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탄성은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탄성이란 원상회복이 가능한 신축성을 말한다. 고무줄을 잡아당겼다가 놓으면 원래 크기(길이)와 모양으로 돌아간다. 어느 집이든 고무줄과 고무장갑, 탄성 붕대와 탄성 반창고, 늘어나는 팔찌와 시곗줄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엘라스틱’이란 물질은 없다. 다만 신축성 있는 소재가 있을 뿐이다. 더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거의 모든 것에 신축성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도 바람에 최대 1m 폭으로 흔들린다. 마천루처럼 세상 뻣뻣해 보이는 것조차 신축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지않았다간 빌딩이 뚝 부러진다.) 탄성 있는 물질, 이른바 ‘엘라스틱’의 제대로 된 명칭은 엘라스토머(elastomer, 탄성중합체)다. 그중에서도 천연 엘라스토머인 고무가 대표적이다. 엘라스토머는 커다란 분자들이 엉켜 있는 고분자 물질로, 잡아당기면 고분자들이 쭉 펴지며 길어지고, 손을 놓은 순간 튕겨오르며 다시 뒤엉킨다. 45-6)


‘엘라스틱’이 ‘탄성재료’의 대체어로 쓰이듯 ‘플라스틱’은 ‘소성재료plastic material’의 대체어로 쓰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폐가 있다. 우리는 플라스틱을 막연히 세숫대야와 칫솔을 만드는 데 쓰는 형형색색의 물질로 생각하지만, 과학적으로 소성은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소성은 외부에서 힘을 받아 형태가 바뀐 뒤 그 힘이 없어져도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이다. 따라서 소성재료는 우리 주위의 플라스틱이 아니라 그 플라스틱의 원료를 말한다. 외력으로 변형된 투명 플라스틱 조각을 편광현미경으로 관찰하면, 광탄성photoelasticity이라는 현상이 만든 놀라운 무지개 패턴을 볼 수 있다. 소성재료는 탄성재료와 달리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소성재료에 계속 힘을 가하면 변형되다가 결국은 뚝 부러지고 만다. 또한 플라스틱은 비틀거나 부러뜨리면 불쾌한 냄새가 난다. 변형에 따른 열로 인해 내부의 플라스틱 폴리머에서 기체가 방출돼서 그렇다. 46)


엘라스틱(탄성재료)이 갑자기 또는 서서히 플라스틱하게 변하는 고약한 버릇은 다분히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고무는 계속 늘어나다가 탄성한도elastic limit를 넘어버리면 외부의 힘이 없어져도 본래 모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변형된 상태로 남는다. 이걸 소성

변형plastic deformation이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금속도 엘라스틱하다. 금속에 탄성이 없다면 주행의 여파로 자동차 차체와 엔진과 그 안을 채운 너트들과 볼트들에 결국 영구적 변형이 일어날 수 있다. 탄성재료는 한계를 넘어서면 갑자기 끊어진다. 하지만 서서히 망가질 때도 있다. 왜 그럴까? 우리가 고무줄을 당겼다가 놓을 때마다 에너지를 받아 늘어났던 분자들이 모두 정확히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정확히 같은 에너지를 다시 내놓지는 않는다. 고무줄을 몇 번 빠르게 당겼다가 입술에 대보면 고무줄이 좀 뜨뜻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고무줄에 투입한 에너지의 일부가 열로 낭비된 것이다. 이렇게 날아간 에너지는 되찾을 수 없다. 47-8)


직물은 왜 색이 빠질까? 색이 바래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는 염색을 했기 때문이고, 기본적으로 염료는 직물 섬유에 주입된 화학약품이다. 볕을 쬐면 색이 바래는 주된 이유는 햇빛에 있는 자외선 때문이다. (맞다. 우리 얼굴을 태우는 바로 그 고에너지, 고주파 광선을 말한다.) 자외선이 염료 분자들을 때리면 광퇴화photo-degradation가 일어난다. 즉 분자들이 다른 형태로 재배열되는 바람에 전과 같은 방식으로 빛을 반사하지 않게 된다. 플라스틱이 누렇게 되는 것은 내부의 분자들에 변형이 와서 빛의 일부만 보내고 나머지는 흡수하기 때문이다. 보내주는 빛이 빨강과 녹색 계열이라서 오래된 플라스틱은 우리가 아는 누런색을 띠게 된다. 부작용도 있다. 변색과 함께 플라스틱 구조도 취약해져서 갈라지고 부서질 가능성이 대폭 높아진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사실 광퇴화는 플라스틱을 환경에서 분해하는 유용한 방법이다. 광퇴화 같은 자연 효과의 도움이 없으면 플라스틱은 영원히 우리 주위에 뭉개고 있어야 한다. 51-2)


5. 배수구와 만년필의 공통점 - #물 #열


물의 비열용량specific heat capacity은 엄청나다. 물은 다른 물질에 비해 1kg(약 1ℓ)의 온도를 1°C 올리는 데 많은 에너지(4,200J)를 요한다. 물 분자는 매우 가벼운 원자들(수소는 원자 중 가장 가볍고 산소는 여덟 번째로 가볍다)로 이루어져 있고, 따라서 물 1kg에는 동량의 다른 물질보다 더 많은 분자가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분자는 진동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면서 일정량의 열을 흡수한다. 다시 말해 물이 열을 흡수하는 힘의 원천은 압도적인 분자 수에 있다. 주전자에 물 1ℓ를 채우고, (만약 가능하다면) 철 덩어리로 주전자 모형을 만든다. 이제 두 주전자를 레인지에 올리고 동일한 시간 동안 가열해 각각 동일한 양의 에너지를 흡수하게 한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른다. 그럼 철 덩어리는 어떻게 될까?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엄청나게 뜨거워진다. 철의 온도는 700°C까지 무시무시하게 상승한다. 물의 온도를 높이는 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든다는 사실이 물을 완벽한 열 운반체로 만든다. 59)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는 집을 덥힐 수 없다. 요점은 열에너지와 온도의 차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뜨거운 것에 열에너지도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물체의 온도(얼마나 뜨거운가)와 그것이 얼마의 열에너지를 함유하는가의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이것이 차가운 빙상이 엄청난 열을 함유한 이유다. 모든 것은 물이 가진 높은 비열용량으로 귀결된다. 물에 빽빽이 들어찬 분자들 덕분에 물은 놀라운 열 유지 능력을 가진다. 철의 비열용량은 물의 약 9분의 1이다. 다시 말해 철이나 강철 1kg의 온도가 10℃ 내려갈 때 내놓는 열에너지는 물 1ℓ(즉 1kg)가 같은 정도로 식을 때 발산하는 열에너지의 9분의 1에 불과하다. 중앙난방시스템의 물은 보일러에서 흘러나와 각 방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보일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계속 식어간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열을 발산한다. 거기다 물은 매우 유동적인 액체라서 신속히 회수돼 열을 다시 공급받아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60-1)


파이프 안을 쉽게 흘러다니는 물의 특성도 열을 붙들고 늘어지는 특성만큼이나 중요하다. 만약 물이 더 걸쭉한(점성이 더 강한) 액체라면, 그래서 줄줄 흐르지 않고 진득하게 흐른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물을 많이 사용하지 못했을 거다. 물이 시럽의 속도로 움직이면 샤워하고 변기물을 내리고 설거지하고 옷을 세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상상해보라. 시럽 같은 물로 구동되는 중앙난방은 작동은 하겠지만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찐득한 물도 방에서 방으로 흐르며 같은 방식으로 식겠지만, 잽싸게 보일러로 돌아가 잃은 열을 신속히 보충하지 못한다. 배관은 물의 속성, 그중에서도 압력과 중력에 밀려 줄줄 흐르는 속성에 의지한다. 이 때문에 도시의 급수장과 저수탑은 열이면 열 언덕 꼭대기에 세워진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수도를 틀 때 물이 콸콸 쏟아지는 것은 물탱크가 높은 곳(주로 위층이나 옥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배관 설비는 첨단 기술 없이도 놀랄 만큼 효과적이다. 61-2)


6. 빨래의 과학 - #오염 #용해


옷은 동시에 양방향에서 더러워진다. 바깥쪽에서(예를 들어 케첩이 묻었을 때), 그리고 안쪽에서(땀을 비롯한 각종 체액의 분비). 왜 옷은 때가 탈까? 우리가 입고, 신고, 걸치는 것들은 우리의 체온 유지를 위해 설계됐기 때문이다. 집을 벽돌로 짓는다면, 옷은 모와 면(천연섬유), 폴리에스테르와 나일론(합성섬유)을 꼬고, 짜고, 떠서 만든 실과 직물로 짓는다. 새끼양의 양털은 약 5,000만 개의 섬유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양모 스웨터 한 벌에는 족히 수백만 개의 섬유가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 스웨터는 원산지가 양의 등이든 유전이든(합성섬유는 석유로 만든다) 같은 방식으로 작용하고 같은 목적을 수행한다. 즉 촘촘히 얽힌 섬유들이 공기를 가둬서 우리의 체열을 유지한다. 하지만 수많은 미세 섬유가 너무 빡빡하게 엉켜 있으면 먼지를 빨아들이는 부작용이 난다. 뭔가가 달라붙을 표면적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데다, 섬유가 워낙 작아서 때와 땀이 원자 단위로 자연스럽게 달라붙는다. 70)


물 분자는 수소원자 두 개가 산소원자 하나에 붙어서 삼각형을 이루는데 수소 끝은 약한 양전하를 띠고, 산소 끝은 약한 음전하를 띤다. 물 분자는 이렇게 자석처럼 두 개의 상반된 ‘극’을 가진 까닭에 극성 분자polar molecule라고 불린다. 그리고 정말 자석처럼, 때 같은 것에 달라붙어서 때를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 그렇지만 물이 모든 것에 달라붙지는 않는다. 첫째, 물 분자는 자기들끼리 더 잘 달라붙는다. 이것이 물이 방울지고, 연못 수면에 소금쟁이가 떠 있을 막을 형성하는 이유다. 물이 뭔가를 제대로 적시려면 물의 이 표면장력surface tension부터 깨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극성 분자는 다른 극성 분자에게 달라붙어 그것을 있던 곳에서 떼어낸다. 이 말은 물이 소금(역시 극성 분자) 같은 물질을 쉽게 용해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껌, 접착제, 잉크, 또는 극성 분자를 끌어당길 음극과 양극이 없는 (탄소기반) 유기화학물질로 이루어진 옷 얼룩에는 통하지 않는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비누와 세제다. 70-1)


대부분은 물을 증발하는 방법으로 옷을 말린다. 다시 말해 액체 상태의 물을 수증기로 바꾼다. 그러나 물이 수증기로 변할 때 무조건 열이 필요한 건 아니다. 냄비에 물을 끓여 증기를 만들 때 우리는 꾸준한 열에너지 공급으로 물 분자들의 활동성을 키워 그것들이 액체 상태에서 벗어나 증기가 되게 한다. 이때는 열이 증발의 동력이다. 이와 달리 추운 데서 옷을 말릴 때는 지나가는 공기에 의지한다. 공기가 불어서 물 분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준다. 따라서 이때는 꾸준히 부는 건조한 바람이 마법의 요소다. 여기서 ‘건조’가 중요한 단어다. 빨래에서 물기가 얼마나 빨리 없어질지(또는 없어지기는 할지)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이 바로 습기(주변 공기에 이미 잠복해 있는 수증기의 양)이기 때문이다. 열대우림 한가운데 사는 사람은 빨래를 밖에 널어봤자 아무 소용없다. 물이 젖은 빨래를 떠나 젖은 대기로 들어갈 가능성은 낮다. 습도가 낮으면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빨래가 밖에서 잘 마른다. 75)


7. 스웨터는 왜 따뜻할까? - #발열 #통기성


우리는 어떤 경로로 열을 잃을까? 몸의 심부에서 피부조직과 옷까지는 직접 전도로, 피부에서는 증발로, 옷의 표면에서는 대류와 복사로 열을 잃는다. 운동할 때는 체열의 약 절반이 땀의 증발로 잃고, 10%는 복사로 날아가고, 3분의 1 조금 넘게는 전도와 대류로 사라진다. 하지만 모든 것은 날씨에 달려 있다. 쌀쌀하고 바람 부는 날, 또는 달리거나 자전거를 탈 때 차가운 공기가 계속 몸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대류 작용으로 체열을 절반까지 빼앗아가기 때문에 바람막이용 겉옷을 입는 게 최선의 방어다. 반대로 덥고 습한 날에는 주변 공기가 이미 포화상태여서 증발로 열을 잃을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시원함을 유지하려면 부채질을 해서 일부러 대류를 일으켜야 한다. 춥고 건조하고 바람이 없는 날에는 복사가 체열 손실의 주범이다. 따라서 옷을 겹겹이 입는 것이 몸의 심부에서 옷의 겉면으로 열전도가 일어나 열이 밖으로 복사되는 것을 줄이는 최선의 전략이다. 80-1)


통기성과 방수성은 모순처럼 들린다. 어떻게 천이 밖에서 물이 스미는 건 막으면서 내부의 땀은 밖으로 내보낸단 말인가? 모든 것은 비의 물방울과 땀이 기화한 증기의 과학적 차이로 설명된다. 빗방울의 물 분자들은 수십억조 개가 뭉쳐 있는 데 반해, 수증기 분자들은 서로 분리돼 자유롭게 떠다닌다. 다시 말해 빗방울은 물 분자보다 비교가 불허하게 크다. 고어텍스 같은 통기성 방수 직물은 이 차이를 이용한다. 고어W.L. Gore & Associates사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고어텍스는 미세 기공이 무수히 뚫린 얇은 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멍은 물 분자보다 700배 커서 습기는 쉽게 빠져나가는 반면 빗방울보다 2만 배 작아서 비는 안으로 스며들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소재가 방수성과 통기성이라는 상반된 성질을 동시에 갖게 됐다. 정말 더워서 땀이 많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수증기의 일부는 미처 빠져나가기 전에 식어서 응축되고, 그렇게 형성된 물방울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84)


양말과 셔츠부터 드레스와 코트까지 모든 의류에는 공통점이 있다. 날실과 씨실의 패턴. 이는 금속 막대 같은 고체의 내부조직, 즉 원자들이 가로세로로 정렬한 양상과 비슷하다. 다만 금속 막대는 모든 방향에서 동일하게 강한 반면(이를 전문용어로 등방성isotropic이라고 한다) 직물은 특정 방향이 다른 방향보다 더 강하다(이를 비등방성anisotropic이라고 한다). 즉 날실이나 씨실과 평행한 방향보다 대각선 방향으로 더 많이 늘어난다. 대각선 방향의 저항이 훨씬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단사들은 날실과 씨실이 대각선이 되도록 직물을 45도 돌려놓고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옷이 해지기 시작하면 끝장은 순식간이다. 청바지 무릎의 작은 마모가 금세 뻥 뚫린 구멍이 된다. 왜 그럴까? 직물에 결함이 생기면 나머지 실들이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전보다 커져서 견디다 못한 실들이 차례차례 뜯겨나가기 때문이다. 구멍이 번질수록 남은 섬유에 미치는 인장력이 세져 구멍이 더 퍼져나갈 가능성도 커진다. 86-7)


8. 휘발유부터 전기차까지 - #에너지 #배터리


자동차 운전의 진정한 단점은 어디른 가든 쇳덩이를 차고 다니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휘발유 자동차는 우리가 피할 길 없는 비효율을 기본으로 깔고 간다. 하지만 이건 새 발의 피다. 실질적인 비효율성은 따로 있다. 자동차의 근본적인 문제는 휘발유에 갇혀 있는 에너지의 단 15%만이 실제로 도로를 달리는 데 쓰인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실린더의 열 손실, 기어의 마찰, 엔진이 내는 소리, 차의 전기 설비로 가는 동력 등 다양한 경로로 낭비된다. 만약 자동차가 100% 효율적이라서 휘발유에 내장된 에너지가 남김없이 도로를 내달리는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면 동량의 연료로 적어도 5~10배는 더 멀리 갈 수 있을 거다. 차에 사람을 많이 태울수록 차량의 무게 대비 실제로 운반할 유효 하중이 커지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이 높아진다. 이것이 트럭, 버스, 열차 같은 차량이 훨씬 크고 무거운 디젤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데도 효율성 높은 운송 수단에 속하는 이유다. 92-3)


휘발유 자동차를 비효율적으로 만드는 것 중 하나가 도시 주행에 따르는 스톱스타트 운전 행태다. 뭐라도 하려면 에너지가 든다. 고장 난 차를 밀어봤다면 자동차의 관성(inertia,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 상태 또는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깨는 것만도 얼마나 등골 빠지게 힘든지 알 것이다. 무게 1.5톤(1,500kg), 주행 속도 65km/h의 자동차는 상당한 운동에너지를 보유한다. 계산해보면 약 240kJ(킬로줄, kilojoule)인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올라가기에 충분한 에너지양이다.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다. 축구공을 따라 도로에 튀어나오는 아이들이나 교통안전 수칙을 모르는 고양이를 피해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이 240kJ의 에너지는 허공으로 사라진다. 브레이크 패드가 브레이크 디스크와 만나 자동차가 정지할 때 운동에너지는 타이어의 끼익 하는 비명과 풀썩 피어오르는 연기로 사라진다. 주행 중에 이렇게 끔찍히 소모적인 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95-6)


모터로 구동되는 전기차는 그런 면에서 크게 유리하다. 극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전기모터는 원통형 자석 안을 빙빙 도는 구리 코일이다. 코일은 구리선을 촘촘히 감은 것이다. 구리선에 전기를 주입하면 임시 자기장이 발생해 자석의 자성을 밀어낸다. 이 때문에 구리심이 뱅뱅 도는데, 이 현상을 이용해 진공청소기부터 고속열차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에도 동력을 공급할 수 있다. 전기모터의 위대한 점은 이 과정을 역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터는 발전기가 된다. 전기차가 주행할 때는 배터리가 전선을 통해 동력을 모터에 주입해서 바퀴를 회전시킨다. 그러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전류가 끊기지만 자동차의 모멘텀이 바퀴를 계속 돌린다. 이때 모터도 계속 회전하기 때문에 전기가 발생하고, 이 전기가 다시 배터리에 저장되면서 자동차가 감속한다. 전기차는 브레이크를 잡을 때 에너지를 홀랑 날리는 대신 일부를 다시 잡아서 배터리를 재충전한다. 이를  회생 제동regenerative braking이라고 한다. 96)


9. 디지털이 세상을 바꾸다 - #디지털 #비트


휴대폰에서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지털 기기의 핵심은 (연속적으로 변하는) 아날로그 신호를 (0 또는 1로 표현하는) 디지털 신호로, 다시 반대로 변환하는 기술에 있다. 이 과정을 샘플링이라고 한다. 정보 뭉치를 작은 덩어리들로 나누고, 각각의 덩어리를 측정하고, 그 측정값을 숫자로 바꾸고, 그 숫자들을 모두 줄줄이 엮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법으로 <모나리자>를 예컨대 1,000개의 행과 1,000개의 열로 또는 100만 개의 사각형으로 나누고, 각 사각형의 평균 색상과 밝기를 측정해서 (둘 다에 숫자를 부여한 후) 그 측정값들을 상하좌우로 차례대로 배열한다. 즉 한 장의 사진을 200만 개 숫자로 구성된 하나의 패턴으로 (또는 200만 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하나의 숫자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이미지를 컴퓨터에 저장하거나 휴대폰으로 보내기가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이렇게 아날로그 사진을 온-오프 이진법 숫자(비트)의 격자 패턴으로 만드는 포맷(저장방식)을 전문용어로 비트맵bit map이라고 한다. 104)


구식(아날로그) 카메라에는 렌즈와 셔터가 있다. 이것이 짧게 여닫히면서 밀폐된 카메라 내부로 빛이 들어와 은 기반 화학물질로 코팅된 플라스틱 필름이 빛에 ‘노출’된다. 빛은 이 물질을 미세한 은조각들로 바꾸고 조각들이 한데 뭉친다. 그래서 피사체의 밝은 부분은 필름에 어둡게, 어두운 부분은 밝게 맺힌다. 다시 말해 사진은 명암이 반전된 상태로 시작한다. 이 원본 필름을 우리는 ‘네거티브’라고 한다. 네거티브 필름을 인화하면 피사체의 명암이 다시 반전되고, 따라서 ‘포지티브’ 필름에는 피사체가 원래대로 나온다. 디지털카메라는 전하결합소자charge-coupled device, CCD라는 빛에 민감한 칩을 이용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플라스틱 필름이 빛에 노출돼 물체의 연속적 아날로그 표현을 만드는 것과 달리, CCD는 픽셀(pixel, 화소)이라 불리는 수백만 개의 감광 ‘칸’으로 나뉘어 있고 각 칸이 떨어지는 빛을 측정해서 숫자를 생성하는 방식으로 아날로그 이미지를 디지털 사진으로 자동 변환한다.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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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역사 -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역사도서관 교양 19
호르스트 푸어만 지음, 차용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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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교황이라는 칭호 자체는 정작 그 소유자의 위상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지만, 그가 신의 대리자라는 주장을 정당화했다. 그 결과 12세기 이후로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로서 신과 인간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로 여겨졌으며, 오늘날까지도 매년 발행되는 『교황청 연감』에도 '베네딕토 16세, 로마의 주교,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천명되어 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보다는 더 고귀한' 존재라는 말로써 교황의 위상을 자리매김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주신 하늘나라의 열쇠 덕택에 교황은 하늘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의 교황은 매고 푸는 권한의 소유자 혹은 베드로와 같은 천국의 문지기라기보다는 윤리와 신앙의 재판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교리적으로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 직분을 수행하고 하느님을 대리하는 통치자'이며, 이것이 교황 본연의 임무이다. 이는 불변의 원칙으로 남아 있다."(6-7)


제1부 교황권의 모습


"'거룩한 아버지' 혹은 '교황 성하'. 도대체 무슨 뜻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모든 교황은 공식적인 직무를 시작함과 동시에 개인적으로도 거룩해진다고 주장하면서, 교황직은 이 직책의 수행자를 더 선한 존재로 만들며, 교황 자신도 이를 인식할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세속 왕권은 좋은 사람도 나쁘게 만든다. 중세의 교회법 학자들은 이러한 사고를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어떤 학자는 교황이 거룩함을 전달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보았고, 또 다른 학자는 교황권은 사도 베드로의 공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즉 개인적으로 거룩함이 없거나 심지어 윤리적인 결점이 있더라도 베드로의 공덕이 이를 만회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천사교황(papa angelicus)이라는 말이 있듯이, 교황이 개인적으로 천사와 같은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은 늘 있어 왔다. 하지만 맡은 일에서 연유하는 거룩함과 살아온 삶 자체의 거룩함, 이 둘을 동시에 겸비하는 것은 사실 이상적인 목표였다."(33-5)


"교황과 관련된 의식은, 교황직의 거룩함이 임종과 더불어 종식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교황의 시신 앞에서 교황 궁무처장이 교황의 본명을 부르면서,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묻는다. 〈알비노, 아직도 잠을 자느냐?〉(Albino, dormisne?) 여기서 알비노는 1978년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의 세속 이름 알비노 루치아노를 말한다. 결국 교황에 대한 경의는 교황의 개인적인 업적이 아니라 교황직의 거룩함에 대해서 표해지는 것이기에, 공경에서 불경(不敬)으로의 태도 변화는 너무나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그 결과 교황궁과 교황의 시신은 역사적으로도 약탈자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최근에 '망치 소리가 사라지면, 교황의 직무와 연관된 거룩함도 조용히 종식될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이는 어떤 인간도 교황처럼 높이 공경받지는 않지만, 교황처럼 죽음과 더불어 깊이 추락하는 경우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교황은 사라지지만, 교회는 존속한다."(39-41)


"교황권은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다. 신의 독생자는 벳새다 출신의 어부 시몬 베드로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하고 인류의 영적 구원을 주관하는 로마 주교로 임명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를 말이다." "교부(教父) 키푸리아누스는 『마태오의 복음서』가 전하는 말이 단지 베드로에게만 전달된 것으로 보지 않고, '베드로를 통해서' 매고 푸는 권한이 모든 사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사도들은 이 권능을 주교들에게 다시 양도했다고 적고 있다. 즉, 구원의 확신은 단지 로마의 주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주교들에게 있었다. 결국 베드로는 '동등자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에 불과한 사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교단 지상주의' 이념은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rimat) 주장에 항상 장애물이 되어왔다. 그때마다 로마 교황권은 정교한 신학적 교리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옹호되어 왔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인정받아 온 교황의 수위권을 무기로 주교단 지상주의에 대응했다."(56-8)


"주교단 지상주의보다 한층 더 강하게, 또 다른 관점이 교황이 주장한 '완전한 최고 권력'에 맞섰다. 바로 공의회주의였다. 처음 1,000년 간 여덟 번의 세계 공의회가 개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4세기와 5세기에 거행되었던 처음 네 번의 공의회는 초현실적인 권위를 누렸다. 개최 장소만 보더라도 대부분이 오늘날의 터키에 해당하는 옛 로마 제국의 동부 지역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에베소, 칼케돈에서 열렸다. 이는 그것이 처음에는 로마의 황제가, 후대에는 동로마의 황제가 소집한 국가적인 모임이라는 의미이며, 특히 교리 문제를 논의했으며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 참석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도직에 근거해서 스스로의 책임 아래 회의에 임했다. 황제가 인준한 공의회 결정 사항은 제국 법령으로 공포되었다. 후대에 와서 결정 사항의 효력이 발생하는 데 교황의 관여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서기 1000년 이전에 개최된 모든 세계 공의회도 마치 '교황의 권위에 의해서 축성된 것'처럼 '포장'되었다."(61-2)


제2부 교황들의 역사


서기 1000년까지 


"초기 교황 시대를 거친 후, 서기 800년 성탄절에 레오 3세(795~816)가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황 이념의 정치적 외연을 더욱 확장했다. 그러나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이 유럽의 미래에 지니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교회 운영에서 교황권의 미약한 위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로마가 권위 있는 역할을 수행하길 원했으나, 로마는 이를 실행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샤를마뉴는 전 제국에 통일된 전례를 원했고, 이를 위해 하드리아노 1세(772~95)에게 로마의 성사집(Sakramentar)을 요청했으나, 그가 받은 것은 낡은 책 한 권으로, 프랑크 제국 내에서만 이용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로마와 동일한 보조를 취하려고 했지만, 정작 계속해서 통일적인 지침을 내린 것은 프랑크족의 왕이었다. 결국 811년의 유언장에서 샤를마뉴는 로마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제국의 다른 대교구와 동일한 지위를 부여했다. 샤를마뉴를 제위에 올린 교황 레오 3세도 어쩔 수 없이 이를 감내해야만 했다."(123-4)


"니콜라오 1세(858~67)는 당대 교황 중에서 재임 기간 동안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한 유일한 교황이었다. 그레고리오 대교황 이후 12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교황도 니콜라오처럼 수많은 판결을 통해서 교회법의 지평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오토 카르텔리에리의 평가에 의하면, 물론 반세기의 시차가 있었지만 그는 '샤를마뉴의 진정한 대적자(對敵者)'였다. 그의 생각은 새로운 것은 아니었어도, 주장하는 바가 명확했고 이를 관철하려는 의지도 확고했다. 로마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유죄 선고를 받은 자를 제외한 모든 피고인은 로마에 항소할 수 있으며, 교황이 결의 사항을 인준한 공의회만이 인정된다. 모든 속인은 죄인이며, 최고의 속인인 황제조차도 교황의 재치권에 복속해야만 한다. 이런 것들이 그가 주장한 바였다." "왕은 최고의 세속 군주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가장 미천한 신하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신분으로 교회재판소에 굴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 사례는 후세까지 계속해서 기억되었다."(124-7)


# 중(中)프랑크 왕국의 왕 프리슬란트가 본처인 티트베르가와의 사이에서 후사가 없자 후처인 발트라다가 낳은 자식들을 적자로 인정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니콜라오는 티트베르가만을 유일한 정부인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교황 니콜라오 1세의 재임 기간에 급상승한 교황의 위상은 10세기와 11세기 초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가 예측할 수 없는 '잉태의' 시대였기에, 교황의 많은 권리들이 부지불식간에 확보되었고, 이는 수십 년 뒤에 법적 인준을 받게 된다. 991년의 시노드에서 '쓸모라고는 전혀 없는 괴물'로 불릴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던 요한 12세는 962년 독일의 왕을 로마의 황제로 즉위시켰다. 이 전통은 이후 1,000년 동안 지속되었다. 또한 교황들은 주교구를 설립하고 이를 교황청 직속 교구로 만들었으며, 지역 교회에 예속되지 않고 교황청에 직속되는 면속(免屬) 수도원들도 생겨났다. 무분별하게 이루어지는 시성(諡聖)에 대해서도 로마는 명확히 규정했고, 그 결과 993년에 있었던 아우크스부르크의 주교 울리히(923~73)의 시성식은 교황이 주재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이 모든 권리들이 한마디로 엉성하게 흩어져 있었으나, 이후의 교회법 제정과 더불어 로마의 재치권 속으로 들어온다."(127, 129)


교황, 세계 통치를 꿈꾸다


"독일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에 따르면, 교황 그레고리오 7세(1073~85)는 종교를 단순히 권력 행사의 도구쯤으로 생각했던 '정치의 대가'(Meister der Politik)로 분류되곤 하지만 최근에는 '종교적 천재'(religiöser Genie)로 평가받기도 한다. 신학자 이븐 콩가르는 그레고리오의 신념을 이렇게 기술한다. 〈신에 복종하는 것은 교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레고리오의 유명한 「교황령」 27개 항목에 그의 세계관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 있을 것이다. 이 항목들은 모두 선언조의 문구로 구성되었는데,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로마 교황만이 합법적으로 보편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라는 항목이다." "특히 〈교황은 황제를 폐위할 수 있다〉라는 등의 항목과 관련해서, 가톨릭을 신봉했던 절대군주들조차도 그레고리오의 이러한 숭배 의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레고리의 이름을 성무 일과서에서 삭제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139-40)


# 1077년 하인리히 4세와 카노사의 굴욕을 연출한 당사자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제 교회(Papstkirche)로 나아가는 길을 다져놓았다. 그 결과 교황이 구원의 조건과 교회에서 옳은 것을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지배권을 추구하려면 교황에게는 후원자와 조직이 필요했으나, 그레고리오 7세와 같은 혁명가는 그만한 위치에 있지도 못했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당시로서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서서히 구축하기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임기응변에 능한 전략가가 필요했다. 개혁적 성향의 교황권은 그레고리오의 두 대 후임 교황인 우르바노스 2세(1088~99)와 더불어 시작된다. 프랑스 귀족 출신인 그는 신앙을 수호하고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던 클뤼니 대수도원 공동체의 원장이었다." "우르바노 2세는 어떤 교황보다도 아우구스티노참사수도회(Augustinerchorherren)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적으로 교회 정책을 전개하기 위해서 참사회원들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조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선언(1095)이었다."(147-9)


"우르바노의 행정 조직은 안정적이었다. 임기 시작 직후인 1089년에 교황의 궁정 국가를 의미하는 '로마 교황청'(römischer Kurie)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문서성(文書省)의 업무가 자리를 잡았고, 재정 담당 부서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재무 및 수납 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관료화, 뇌물 수수, 강탈과 같은 문제들도 대두되었다." "교황이 제정한 법령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증가했고, '산더미 같은' 교황 교령과 서한에 대해서 비난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통계로 표현하면, 교황 알렉산데르 3세(1159~81)의 재임 기간인 22년 동안 작성된 문서가 1200년까지 작성된 서한과 문서의 5분의 1에 달한다. 12세기에만 약 1,000개 정도의 교령이 제정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1,000년 동안 제정된 전체 교령의 수와 비슷하다. 아마도 법률을 공부한 전문가만이 상황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12세기 중반 이후 대부분의 교황들이 이러한 조건을 갖추었고, 최근까지도 그러했다."(150-1)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는 초창기의 법률적 지식에 정통했던 '세계 통치를 꿈꾸던 교황'(Herrschaftspapst)의 전형적인 유형이었다." "인노첸시오는 베드로의 대리자(Vicarius Beati Petri)라는 칭호 대신에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는 칭호를 사용한 교황이었다. 그에게 베드로는 자신의 '직무상의 동료'(Amtskollege)였으며, 두 사람 모두 신의 대리권을 행사한다. 최후 심판의 날에 결산을 하는 사람은 세계 심판자가 아닌 바로 교황이다." "그는 또한 법률 정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지난 수십 년간 공포된 수많은 교령(敎令)들이 무질서의 극치에 달했던 상황에서, 인노첸시오는 법적으로 중요한 교령을 모은 교령집을 간행하고 이를 공식 책자로 배포했다. 교황청은 철저하게 경영 원리에 근거해 조직되어 갔다. 교회 사업과 수납 제도가 정립되면서, 일을 처리하는 대가로 '선물'을 요구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되었다. 그러나 '자발적인' 선물은 용인되기도 했다."(151, 154-5)


"1198년 이후 독일은 슈타우펜 가문과 벨프 가문에서 배출한 두 명의 왕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어느 왕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 교황이 심판관 역할을 자청하고 나섰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는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교령들을 반포한다. 논지는 다음과 같다. 교황이 독일의 왕을 황제로 등극시키고, 황제권이 본질적으로 독일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교황은 독일의 왕 선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후보자가 그로부터 '사도적 축복'(die apostolische Gunst)을 받는다. 선출 자체는 나중에 선제후(選帝侯, Kurfürsten)로 발전하는 '주요 선거인단'에 의해서 결정된다. 라인 강변에 위치한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대주교가 선거인단 중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두 가문 사이에서 심판관 역할을 수행했고, 마침내 제3자였던 풀리아(Apulia) 지역 태생의 소년인 프리드리히 2세를 권좌에 올려놓았다."(157-60)


# 1356년 카를 4세는 「금인칙서」(Goldene Bulle)를 반포하여 선제후들이 선출한 인물만이 독일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수 있게 하였다.


"가문의 조상들 중에서 배출된 교황의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보니파시오라 칭했던 새 교황에게는 교황권과 자기 가문의 물질적 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시급했다. 보니파시오 8세(1294~1303)는 이 두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후대에 이른바 경험법칙(Faustregel)으로 불렸던 것이 당시에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은 부유해지려면 교황을 배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메디치, 바르베리니, 델라 로베레, 카라파, 보르게제 가문 등이 모두 그러했다. 물론 이 규칙이 늘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인노첸시오 3세가 대표적이었고, 보니파시오 8세는 이를 더 확실하게 입증했다." "이 교황은 1300년에 성년을 선포하고 특별 성년대사(聖年大赦)를 반포하면서, 매고 푸는 권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보니파시오는 구약성서에 근거해서 성년을 100년 주기로 받아들였으나, 이후 성년의 주기는 50년에서 30년, 마지막으로는 25년으로 줄어들었다."(172-3)


"약간의 전초전이 있은 뒤에 1296년부터 로마 교황권과 프랑스 왕권의 관계는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였다. 프랑스의 왕 필리프 4세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전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프랑스 교회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십일조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보니파시오는 교령을 통해서 이 과세의 시행을 금지토록 했으나, 필리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세에 아마도 가장 유명했을 교령은 격렬한 성명전(聲明戰) 속에서 등장한다. 교령 「거룩한 하나의 교회」(Unam sanctam)가 여기서 등장하는데, 이는 교황의 보편적 지배권을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이론적 글로,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신앙의 힘에 의해서 우리는 거룩한 하나의 교회만이 있으며, 이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임을 고백하고 믿는다.〉 하지만 이 문서의 절정은 다음의 문장이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하고, 말하고, 확신하고, 천명한다.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으려면 로마 교황에게 복종해야 한다.〉"(175-7)


"1303년 9월 7일, 보니파시오 8세를 겨냥한 아나니 암살 계획은 교황권의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었다. 이제 교황은 프랑스에 종속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겼다(1309년). 로마 교회와 보편 교회를 동시에 상징하는 교황이 반드시 로마에 자신의 거처를 두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교황은 프랑스 같은 다른 지역에서도 얼마든지 거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전에도 교황들이 로마에서 자주 출타했기 때문에, 교황과 교황청이 있는 곳이 바로 로마라는 인식이 싹터 있었다. 수사에서 태어난 위대한 법학자 헨리쿠스(1271년 사망)─일명 호스티엔시스─는 '교황이 있는 곳이 로마'(Ubi papa, ibi Roma)라는 격언을 만들어내었다. 교황권을 아비뇽에 영구 정착시키려는 구상이 진행되자, 로마법과 교회법에 통달한 발두스 데 우발디스(1400년 사망)는 '교황이 있는 곳이 바로 로마, 예루살렘, 시온이며, 모든 사람의 고향'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180)


종교개혁, 가톨릭 개혁, 적응 시기의 교황들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증오해 마지않았던 콜론나 가문의 마르티노 5세가 공의회 교황(Konzilspapst)으로 선출되면서 서유럽 교회의 분열은 종식된다. 그 뒤로는 보르자 가문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와 같은 특이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스페인 사람인 그는 예술적 감각이 뛰어나 예술을 장려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의 부도덕성 역시 이에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던 해에 그와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율리오 2세(1503~13)가 뒤를 이었다. 보르자 일가의 박해를 받던 델라 로베레 집안 사람인 그는 흔히 콘스탄티누스의 옛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피에트로 성당의 공사를 시작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그는 라파엘로, 브라만테, 미켈란젤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율리오의 뒤를 이은 레오 10세(1513~21)는 흔히 루터 교황(Lutherpapst)으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었다."(187-8)


"로마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하고, 가톨릭 교회에 각성의 종소리를 울리며,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가톨릭적 개혁으로 맞서려는 시도가 다음 세대 교황들의 몫이 되었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성 비오 5세(1566~72)는 신중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트렌토(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개혁안들을 실행에 옮겼다(그 결과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으로 철저한 금욕주의자이자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은 종교재판관이었던 그에게 신분과 교양이 높았던 인물들은 표적이 되었다. 그는 1517년에 「금서 목록」을 제정했고, 그 결과 수백 명의 인쇄업자들이 독일과 스위스로 도망을 가야만 했다. 세속 문제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국가에게도 복종을 강요하면서, '스스로 여왕임을 자처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고 폐위시켰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던 교회의 이러한 조치는 교황이 통치자나 국가원수에게 내린 처벌의 마지막 사례가 되고 말았다."(192-4)


"당시의 교황들 중에서 크게 부각되는 또 한명의 인물은 정열적인 식스토 5세(1585~90)였다." "식스토 5세와 같은 교황이 기념비 건축에 몰두했다는 사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식스토의 업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9만 명의 거주자들 가운데 5만 명이 살해당한 1527년의 악명 높은 '로마의 약탈'과 여러 차례 창궐한 페스트 뒤, 로마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물 부족 현상이 발생했고, 식스토는 50킬로미터의 거리를 잇는 거대한 수로를 건설해 물을 끌어들였다." "라테라노 궁전은 토대부터 새롭게 건축되었고, 과거 판테온의 위용을 능가하는 피에트로 대성당의 거대한 돔이 마무리되었다." "이집트에서 온 오벨리스크를 네로의 정원에서 피에트로 대성당의 광장으로 옮기는 작업 역시 대단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불과 5년 사이에 그가 보여준 엄청난 열정과 성공은 초인간적인 힘과 결탁해야만 가능했다. 그는 교황의 모습을 한 파우스트 박사였던 것이다."(192, 204-7)


"식스토 5세는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후계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모델로 삼고자 하지 않았다." "식스토 5세 이후, 교황권은 유럽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 휘말려 들어갔고, 로마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절대군주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더욱더 갈등을 빚었다. 절대군주들이 자신들의 지배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종교적 우위권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콘클라베에서도 다른 국가를 가장 덜 자극하는 후보를 선출하곤 했다. 추기경들은 '이 시기에 독실하면서도 경력이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을'(슈바이거) 교황으로 추대했다. 비록 비굴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내적인 불화가 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압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속화의 가속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이성종교'(Vernunftreligion)인 계몽주의의 충격도 교황권에 불어닥쳤다. 볼테르(1694~1778)는 교황권이 구시대의 유산이라며 독설을 퍼부었다."(208, 212)


"교황권도 시대정신을 따르려 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는 예수회를 해산시켰다는 사실이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1556년 사망)가 16세기에 설립한 교단인 예수회는 특히 '교황에 대한 복종'(Papstgehorsam)을 서약했고, '교황에 대한 복종'이 '교단에 대한 복종'보다 우선시될 정도였다. 제후들의 궁정 고해 신부이자 조언자로서, 학교와 대학의 교사로서, 종교 문화의 전달자로서 예수회 회원들은 가톨릭 신앙과 로마에 대한 복종심을 헌신적으로 설파했다. 1760년 이래로 이 교단은 스페인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절대주의 국가들에 의해서 상습적인 질서 파괴자로 인식되고,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프란치스코 교단의 수도사 출신으로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4세(1769~74)는 세속 권력에 위축된 나머지 예수회의 해산 작업을 서둘러야 했다. 마침내 1773년 7월 21일에 교황의 소칙서(breve)가 반포되면서, 예수회는 해산되었다. 이후에는 어느 교황도 클레멘스라는 교황명을 사용하지 않았다."(216-8)


"'필요성'(Nutzen), 이것은 계몽 절대주의에서 교황권을 포함한 종교 단체들에 대한 평가 기준이었다. 합리적인 국가 철학을 추종했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 요제프 2세는 교회 재산의 국유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과정은 절망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고, 교황 비오 6세(1775~99)가 요제프 2세에게 교회 관련 법령들을 철회해 달라고 설득하기 위해 1782년 빈을 방문했을 때는 카노사의 역전극이 벌어졌다. 요란한 환영을 받기는 했으나, 정작 비오 6세가 얻은 것은 없었다." "교황 비오 7세(1800~23)는 나폴레옹과 정교 조약을 체결(1801)해 유럽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프랑스 교회에 대한 나폴레옹의 통제가 강화되고, 무력적인 유럽 팽창 정책이 가속화되자 교황과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이 로마와 교황령을 점령하려고 들자, 비오 7세는 파문으로 맞섰다(1809). 이후 납치 감금된 비오 7세는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쫓겨나고서야 로마로 귀환할 수 있었다."(218-21)


바티칸의 시대 혹은 교황령의 종말과 새로운 교리


"새로운 교황 비오 9세(1846~78)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은 컸다. 사람들은 그의 사교성에 매료되어 갔다. '천사'(È un’ angelo)로 불렸던 그는 노쇠하고 병약했던 전임자와는 달리 일주일에 한 번씩 일반 알현을 했고, 정치적 박해자들에 대한 사찰을 중단시키고, 사면을 발표하기도 했다. 교황은 자유주의자로 인식되었고, 통일 자유 이탈리아의 건설을 원했던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대가 날로 커지면서 그것은 교황에게 압박이 되었다. 언론 자유, 세속인의 관료 등용, 성직자 출신의 장관 임용 금지, 시민군의 무장, 이탈리아 동맹의 가입 등등의 문제가 그러했다. 오스트리아가 점령한 롬바르드 지역에서 1848년 3월에 혁명이 발생하자, 사람들은 교황 군대가 점령군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기대했다. 1850년 로마로 돌아온 그는 모든 자유주의적 이념을 배척하고, 시민의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는 모든 제도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는 이제 반동(反動)의 상징이 되었다."(225, 229)


"'위-이시도르'는 이시도르 메르카토르라는 저자가 9세기에 편찬한 교령집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고대와 초대 교회 교황들의 위조된 교황 서한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날조된 일련의 조문들은 교황의 수위권과 관련된 것들로, 바티칸 공의회는 1870년 7월에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을 교의로 결정했다." "보편적 사교직은 교황이 모든 교회에 대해 직접적이고 정상적인 권력을 소유함을 의미한다. 무류성은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오류가 없는 교리적 결정을 내린다는 뜻이다. 즉, 교황의 교리 결정은 〈교회의 동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영원불멸하다.〉"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의 교리들은 교회 구조의 토대를 다지는 과정의 종착점이었다. 마지막에 병적으로 권력 지향적인 인물(비오 9세)의 등장이 화룡점정이었지만, 전통적인 교회관에서 볼 때 교황의 보편적 사교직과 무류성 교리는 지속적으로 담금질되어 온 것이었다."(236-9)


새로운 힘의 충전


"교황령이 소멸된 1870년 이래로 교황들의 활동 반경은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바티칸, 라테라노, 카스텔간돌포만을 왕래했고, 대면하기에 너무 어려운 존재처럼 여겨졌다. 그렇지만 요한 23세(1958~63)는 공장 노동자, 복지시설 거주자, 교도소 재소자 등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사귀고 대화하기를 좋아했고, 대부분의 경우 걸어서 이들을 찾아갔기 때문에 '조니 워커'(Johnnie Walker)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요한은 1959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구상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역사적인 재판도 진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밝히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모여서 분열을 종식시키려 합니다〉라고 했다. 문호를 다른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개방했다. 이들은 더 이상 교회 밖에 있는 개별적인 그리스도교 신자, 이단, 분파주의자로 분류되지 않았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자들로 간주되었다. 요한 23세는 타 종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기도를 함께했던 첫 교황이기도 하다."(259-61)


"알비노 루치아니, 일명 '33일의 교황'(1978년 8월 26일~9월 28일)은 처음으로 요한 바오로 1세라는 두 개의 교황명을 택함으로써, 다가올 미래를 암시했다. 비록 교황명 선택의 이유를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로부터 각각 주교와 추기경으로 임명받았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고마움으로 돌리고 있지만, 직무 수행에 대한 그의 의도를 쉽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요한 23세의 개방성과 자유로움, 바오로 6세의 교리적 엄격함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적 유연함은 노회함과 더불어 '미소의' 교황이라 불렸던 그의 개성이었다. 하지만 그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교황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을 소문들을 만들어내었다. 크라쿠프(Krakau)의 대주교였던 카롤 보이티아가 교황으로 선출된 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비오라는 교황명을 쓴 세 교황들이 토대를 마련해 놓은 덕이 컸다. 하드리아노 6세(1522~23)를 예외로 한다면, 요한 바오로 2세(1978~2005)는 1378년 이래로 이탈리아 사람이 아닌 첫 번째 교황이었다."(266-7)


"교황 재임 초기에 폴란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성스러운 아버지께서는 폴란드에서 진행된 모든 연설문을 무릎을 꿇고서 작성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대변혁 이후 오늘날에는 그의 열정이 과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신의 크라쿠프 주교좌 성당의 수호성인인 스타니스와프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택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눈에는, 폴란드인들이 그리스도교, 국가, 문화 사이의 행복한 융화에 대한 모범이 되어야만 했다. 폴란드는 물질주의와 서구 사회가 직면한 '욕망과 향락 문화'에 대항하는 '선봉'에 서야 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제작된 렌즈는 로마라는 눈에 씌우기에는 너무 강했던 것 같다. 라디오 바티칸은 폴란드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대해서 날카로운 논조의 사설을 방송했고, 동시에 평화, 빈곤, 신앙과 같은 유럽과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고, 피임약을 거부하며, 성직자 독신제를 옹호하는 데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272-3)


불확실한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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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의 역사 - 천년의 제국, 동서양이 충돌하는 문명의 용광로에 세운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 더숲히스토리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 지음, 최하늘 옮김 / 더숲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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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비잔티움’이란 무엇인가? 


"이름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이 문제이다. 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은 아테네 인근 도시 국가 메가라의 식민지였던 고대 도시를 가리킨다. 비잔티움은 기원전 7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이다) 즉 지금의 이스탄불에 세워졌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나라의 이름인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16세기의 일이다. 따라서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 중에서 비잔티움이라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더욱 적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프랑스를 '파리 국가', 대영 제국을 '런던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가 비잔티움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로마인으로 여겼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아우구스투스의 고대 로마 제국과 그들의 제국 사이에는 어떤 정치적 단절도 없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제국의 통치자들은 스스로 고대 로마 제국의 대를 이은 황제로 자처했다."(30-1)


"동방의 이웃이자 적이던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 역시 이 제국과 지역을 룸(Rūm, 로마)이라고 불렀다. 현대 그리스, 최소한 20세기 말까지 로미오스Rhōmios라는 정체성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발칸 반도와 많은 국가들은 이 제국을 그리스라고 불렀다. 그들의 입장에소 보면 이해할 만하다. 800년 프랑크의 왕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로 알려져 있다)가 교황에 의해 '로마인의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자, 다른 제국들을 더 이상 로마라 부를 수 없었기에 그리스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을 콘스탄티노폴리스라고 부르는 것은 퍽 노골적이었다. 이는 제국의 권위와 영향력이 미치는 영역을 잠재적으로 그 수도로 한정하고 '로마 제국'이라는 표현에 담긴 보편성을 부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는 훨씬 문제가 많다. 동방에서 그리스어가 지배적인 언어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부정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스는 언젠가부터 이교도를 의미했기 때문이다."(31-2)


"비잔티움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서기 300년 이후에는 '로마'라는 말을 쓰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하기 위해 형용사가 도입되었다. 예를 들어 동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동지중해 세계와 레반트에 중점을 둔 명칭으로, 자연히 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 제국이 오랜 기간 보여 준 존재감을 지워 버린다. 최근에는 '로마 정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중점을 둔 인상을 준다. 이 용어는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올바른 믿음을 의미하는 '정교'는 모든 그리스도교 교회가 주장하는 속성이었다. 정교가 동유럽과 중동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인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사용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이므로 중세 시대에 적용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비잔티움이라는 관례적인 용어를 사용하지만, 독자는 이 용어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유념하기 바란다."(32-3)


제1장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이 탄생하다(330~491년) 


"그리스도론 논쟁은 박해가 끝난 순간부터 그리스도교 교회의 주된 문제였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음에도 아리우스파는 콘스탄티우스 2세와 발렌스의 지원 아래 복권되었다. 수많은 그리스도교 성직자가 니케아 정교를 따른다는 이유로 유배당했다. 이 사태의 또 다른 부작용은 아리우스파 주교 울필라스가 고트인에게 선교한 일이다. 울필라스가 《성경》을 고트어로 번역한 일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데, 게르만계 종족 대부분이 울필라스를 따라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열정적인 그리스도교이자 정통 교회를 지원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신학자 나지안조스(지금의 튀르키예 네니지)의 그레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로 선택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를 개최하고 아리우스의 주장이 이단이라고 다시 한번 선언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아리우스 분쟁을 멈추기는커녕 문제를 키웠다."(67-8)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성모 마리아의 지위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449년 에페수스에서 다시 한번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나, 이번에는 안티오키아학파의 세력이 압도적이었다. 제2차 에페수스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독립적인 두 본성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학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제2차 에페수스 공의회를 부정하여 그리스도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했다. 칼케돈 신경은 실질적으로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단성론보다는 안티오키아학파의 양성론에 가까웠다. 그 결과 각 교회 사이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여기서 단성론파Monophysites라는 말은 '단일'을 뜻하는 그리스어 모노스Monos와 '본성'을 뜻하는 피시스Physis의 합성어로, '그리스도는 단 하나의 본성만을 지닌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는 문제가 있다. 그 때문에 최근의 학자들은 합성론파Miaphysites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69-70)


# 양성론은 하나의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한다는 입장[그러나 분리할 수는 없다]이고, 합성론은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입장이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 시리아 그리스도교 교파 대부분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가 이 해석을 지지한다. 오늘날까지 네스토리우스파와 합성론파는 그리스 정교회나 슬라브 정교회, 로마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교회들과 달리 칼케돈 신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관련된 모든 원칙을 결정하기 위해 기획되어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 로마·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카아의 4대 총대주교 관구에 예루살렘 추가)를 규정했지만, 결국 보편 교회가 영구히 분열하기 전의 마지막 공의회로 남은 것은 퍽 역설적인 이야기다." "제노는 칼케돈 공의회로 인한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482년 〈통합령Enōtikon〉을 발행했다. 하지만 동방의 교회들은 제노의 명령에 반감을 가졌고, 로마 교회는 5대 총대주교 관구의 수장으로서 지니는 수위권과 자신들의 가르침이 도전받았다고 여기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이교로 선언했다. 이 조치는 518년까지 지속되었다."(70-3)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황제가 다른 어떤 지위보다 고귀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에게 신은 오직 단 하나이므로 오래된 황제의 신적 지위는 축소되었다. 또한 궁정 의례는 지상에 존재하는 신의 대리인인 황제와 신민 사이를 가르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이 시기 엘리트층을 구성하는 새로운 요소는 주교들이었다. 콘스탄티누스 재위 초기부터 이들은 단순한 영적인 지도자를 넘어 교회의 다양한 자산을 운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 대다수는 지주 계층 출신이었는데, 교회에서의 경력은 궁정 관직의 대안으로 여겨졌음이 분명하다. 황실과 개인들의 기부금 덕분에 교회는 제국의 최대 지주 가운데 하나로 발돋움했다. 5세기에 이들은 차츰 칼케돈 신경을 지지하고 지키고자 하는 입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는 단순히 신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합성론파 지역에서 성직자들은 사회적·경제적으로 하위층을 박해하고 과도한 세금을 지우는 국가에 대항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74-5)


"그리스도교와 제국의 결합은 어느 곳보다 제국의 수도에서 또렷하게 드러났다. 일곱 개 언덕까지 차용할 만큼 로마를 모범으로 삼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곧 '제2의 로마' 또는 '새로운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종교적 지위는 차츰 성장했다. 교회 사이의 위계도 그러했지만, 주요한 성지에 보관된 성물들이 옮겨진 것이 중대하게 작용했다. 425년 국가가 제공하는 고등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워 문법, 수사학, 철학 그리고 법학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교육했다. 429~438년에 걸쳐 실시한 콘스탄티누스 1세부터 테오도시우스 2세까지 재위 시기에 발행된 모든 법령을 수집하는 작업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이 작업을 감당할 자원이 충분했음을 의미한다. 5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명실상부한 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황제들은 이 도시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반 시설과 건축물은 의례와 함께 사람들이 천상의 질서가 지상에 강림한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다."(83-4, 88-9)


제2장 지중해의 주인이 되다(491~602년) 


"아나스타시우스의 대외 정책은 동맹 관계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로고트의 테오도리크는 493년 오도아케르를 살해한 후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테오도리크는 서방 황제의 지위에 오르지 않는 대신 서방의 주요한 패권국들(프랑크 왕국·비시고트 왕국·반달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고, 로마의 옛 원로원 귀족들과 협상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에 대응하여 칼케돈 신경을 따르는 프랑크 왕국(이 시점에서 알프스 이북의 최대 세력이었다)과 외교적 친선을 추구함으로써 아리우스파를 따르는 고트인과의 사이에 적대감을 부추겼다. 아프리카 수복이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반달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또한 502~506년 페르시아와의 전쟁 과정에서 아나스타시우스는 아랍계 부락 연맹인 킨다 및 가산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방면의 국경을 지키고 비잔티움 제국과 함께 싸운 대가로 특권을 누렸다."(92-3)


"유스티누스는 아나스타시우스의 대외 정책을 이어 갔다. 그는 서방에서는 아리우스파인 오스트로고트를 고립시키고, 동방에서는 페르시아 방면의 방어를 강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력은 새로운 동맹을 통해 확대되었다. 제국은 캅카스 지방에서 라지카(조지아어로는 에그리시)와 이베리아의 충성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을 거두어 통치자들을 복속시켰다. 한편 남쪽에서는 그리스도교 악숨 왕국(지금의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이 유대화된 유일신교를 추종하며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힘야르 왕국(예멘에 있었다)에 대항해 일으킨 전쟁을 지원했다. 유스티누스 1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위 시기는 조카이자 후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년)에 완전히 가려진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는 527년에 시작되었으나, 학자들은 유스티누스 1세에 재위 기간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작성된 사료가 꽤 많고 다양하다는 점이 작용한다."(94-5)


"(황실 강화를 두고 대립하던) 유스티니아누스와 원로원이 의견의 일치를 본 것도 있었는데, 정교회에 대한 태도가 그중 하나이다. 칼케돈 이후 보편 교회를 회복하고자 한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황제와 원로원 모두가 때로는 논쟁을 통해, 때로는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을 강요하려 들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정체성과 직결되었음을 보여 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원로원 엘리트는 칼케돈 신경을 수용했음이 틀림없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같은 황제들은 이 흐름에 동조했으므로 그의 정책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원로원 엘리트층의 기득권을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분명 이단이었다. 여기저기 간섭하기 좋아하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그의 후계자들은 원로원 귀족들과 대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통치 엘리트와 제국의 관리 모두가 정교회를 수호하는 데 집중한 것은 비잔티움 이념의 중요한 특성이 되었다."(111-2)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사실 종교 정책 덕분에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제노의 〈통합령〉을 지지하고 합성론파에 유화 정책을 취했다." "유스티누스 1세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의 종교 정책을 부정하고 로마 교회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합성론파에게는 놀라우리만큼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는 아마 합성론자가 너무 많아서 절멸시킬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료는 그의 아내 테오도라가 합성론파 지지자였음을 전해 주고 있으며, 그녀는 공개적으로 합성론파를 보호하고 후원했다. 프로코피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가 의도적으로 입장을 달리했따고 지적했다. 황제 자신은 칼케돈 신경의 수호자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황후를 통해 간접적으로 동부 지역의 인구를 소외시키지 않음으로써 말 그대로 황제 부부가 '나누어서 지배했다'는 것이다. 합성론파에 대한 황실의 지지 또는 관용으로 인해 합성론파에 대한 위협은 더욱 커졌다."(115-7)


제3장 생존을 걸고 투쟁하다(602~717년)


"포카스의 짧은 집권(602~610)은 재앙으로 끝났다. 동쪽에서 페르시아의 엘리트층에 자신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는 후스라우는 마우리키우스[포카스 전임 황제(582~602)]에게 복수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이후 20년간 지속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 페르시아 군대는 테오도시오폴리스와 다라, 아미다, 에데사를 잇달아 점령했다. 이 지역들의 상실은 재정 위기와 위신 상실을 의미했다." "특히 페르시아인들이 예루살렘을 함락(614년)한 직후 주민을 학살하고 성십자가를 수도 티스푼으로 가져가 버린 일은 칼케돈파 그리스도교도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렸다. 615년에는 페르시아 군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건너편 해안까지 약탈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듬해에는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가 페르시아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이집트로 가는 길이 열렸고, 619년에는 이집트마저 넘어갔다. 이집트의 상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빵을 더 이상 무료로 배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했다."(125-8)


"외교와 전쟁 양면에 기울인 이라클리오스(601~614)의 노력은 성과를 내서 원정이 시작된지 6년이 지난 628년 페르시아 측은 591년 마우리키우스와의 협상에서 결정된 영토 분할안에 따라 평화 조약을 수용했다. 630년 이라클리오스가 성십자가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가져오면서 20년에 걸친 대전쟁은 승리로 끝이 났다. 하지만 곧 승리를 환상이었음이 드러났다. 같은 해에 무함마드가 이끄는 종교 집단이 그의 고향이자 622년 무함마드를 추방한 메카를 점령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634년부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공격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시리아에서 저항했지만 636년 야르무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물러났으며, 638년 예루살렘이 아랍인 손에 떨어졌다." "아랍인들로 인해 국가로서의 페르시아는 16세기까지 출현하지 못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은 살아 남았으나 영토의 3분의 2를 상실했다. 게다가 빼앗긴 영토에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부유하고 생산력이 높은 지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130-2)


"640년대부터 650년대 중반까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아랍인의 공세는 멈출 줄을 몰랐다. 아랍인들은 소아시아 지역을 공격하고 비록 더디게나마 북아프리카로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랍인들이 함대를 편성해 로도스와 코스, 키프로스, 크레타 등을 공격하면서 우세하던 해상 장악력마저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655년 리키아 해안(지금의 튀르키예 안탈리아·무글라)에서 벌어진, 소위 '돛대 해전'이라 부르는 싸움에서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비잔티움 함대는 아랍 함대에게 대패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이 직후인 656~661년 아랍 제국에서 칼리프 직위를 두고 최초의 이슬람 내전(피트나)이 발생하는 바람에 유예 기간을 얻었다. 선지자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 칼리프 알리가 살해당하자 무아위야 1세의 칼리프 즉위를 방해하는 존재는 남지 않았다. 무아위야는 다마스쿠스로 수도를 옮겨 우마이야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133-4)


"일반적으로 전근대에는 재해로 인구 감소가 발생하면 몇 세대에 걸쳐 회복되는 경향이 있지만, 이 시기에는 이슬람 제국의 정복에 의한 대격변 때문에 그 같은 경향이 사라졌다. 일단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그리고 나중에는 북아프리카까지 주요 지역들을 잃은 데다가 아랍인들이 계속해서 소아시아를 약탈하는 등 불안한 상황으로 제국의 나머지 지역들도 결혼과 인구 재생산율이 크게 떨어졌다. 여러 방면에서의 '상실'은 농업 생산성의 감소는 물론 군대에 충원할 인력과 세수의 감소를 야기했다. 그리하여 이전에도 취한 적이 있지만, 7세기 말부터 9세기까지 특정 종족 집단을 인구가 부족한 지역이나 변경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활발하게 펼쳐 확실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비잔티움 군대는 회전會戰은 되도록 지양하고 국지화된 방어에 주력했는데, 이 전략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잘 먹혀들었다. 이 때문에 이슬람 군대는 수많은 성채가 촘촘히 배치된 소아시아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143-5)


제4장 부활의 날개를 펴다(717~867년) 


"비잔티움 제국을 대상으로 한 아랍인들의 공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레온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디노스 5세는 740년에 함께 원정에 나서 소아시아 중부의 아크로이논에서 아랍 군대를 대파했다." "이사우리아인들이 새로 배출한 이 두 황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하락세를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악명 높고 그만큼 큰 오해가 있는 성상 파괴운동 때문에 비잔티움 사료 대부분은 두 황제를 혐오하고 조롱했다. 성상 분쟁은 신성한 존재를 묘사하는 방법과 그 가치를 두고 벌어졌다. 성상을 둘러싼 이 분쟁은 복잡하고 논란이 많은 역사적 주제이지만, 크게 4단계로 구분하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우선 754년의 히에리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성상 파괴주의가 채택되었다. 787년의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이 조치를 취소했고, 815년의 아야 소피아 공의회는 성상 파괴주의를 다시 채택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843년에 일어난 일명 '정교회의 승리'로 성상 공경주의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59, 162)


"한편 바닥부터 올라온 새로운 인물들도 궁정에서 활동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실리오스이다. 바실리오스는 거친 매력이 있는 미남이자 말을 잘 다루는 레슬러였다. 바실리오스를 총애하여 측근으로 받아들인 젊은 미하일은 862년 바실리오스를 고위 관직인 파라키모메노스Parakoimōmenos(시종장)로 임명했다. 파라키모메노스는 황제가 가장 공격받기 쉽고 가장 위험한 때인 잠든 동안 황제의 곁에 머물러야 하므로 환관들에게만 주어지는 대단히 중요한 직책이다." "867년은 비잔티움 제국에게 중요한 해이다.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지만, 이 권력은 전적으로 황제의 총애에 기댄 것이었다. 866년 바르다스를 숙청하고 처형한 바실리오스는 미하일의 총애가 식어 간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미하일마저 살해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바실리오스 1세). 이는 비천한 출신에도 민첩하고 수완이 뛰어난 자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다."(175-6)


"7세기 비잔티움 제국은 아랍인과 불가르인의 공세에 맞서 살아남아야만 했다는 점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대 후기 로마 제국과 달랐다." "비잔티움 제국은 크게 두 요인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 하나는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그 자원을 보존하여 그를 기반으로 제국의 남은 영토를 중앙 집권화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군대 조직에 변화를 가해 변경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외침을 저지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스트라티이아는 소아시아 곳곳에 설치되며 제국의 변경을 안정시켰다. 생존투쟁 시대에 제국은 중요한 자원을 관리했고, 수도의 통제에서 벗어날 만큼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몇몇 개인, 즉 5대 군 지휘관(아나톨리콘·옵시키온·아르메니아콘·트라키시온 그리고 소아시아 남부에 새로 설치된 해군 스트라티이아 키비레오톤의 사령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주었다. 콘스탄디노스 5세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추진하여 옵시키온을 더 작은 단위로 나누었다."(178-9)


"비잔티움 제국은 모든 영역에서 군사화되었다. 따라서 사회적·문화적 가치도 이전과 크게 달라졌다. 8세기 초 옛 원로원 엘리트들이 사라지면서 사회 계층에 몇 가지 중대 변화가 있었고, 그들 중 남은 이들은 궁정과 교회라는 두 개의 안정적인 조직에 흡수되었다. 이 중에서 교회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부터 막대한 재산에 대해 면세의 혜택을 받아 왔으므로 경제적인 면에서 덜 약화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레온 3세와 니키포로스 1세를 비롯한 일부 황제는 교회의 독특한 지위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이제 교회 재산이나 교회에 소속된 농민들도 과세 대상이 되었다. 군부에서 일부 지휘관은 귀족층이었지만 대다수는 신참자였다. 스트라티고스들을 비롯한 장교들의 지위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차츰 상승하더니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를 결정하는 존재가 되었다. 관직은 세습되지 않았지만 장교들을 중심으로 성씨姓氏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혈통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181)


제5장 제국의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다(867~1056년)


"바실리오스 1세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문을 열었다. 마케도니아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통치 왕가이고, 그들이 통치하는 동안 제국은 눈부실 정도로 군사적 확장, 경제 호황 그리고 문예 부흥을 누렸다." "인구와 경제가 호황기를 맞이했고, 과거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하던 강력한 국가들이 이 시기에 쇠약해져 비잔티움 제국 확장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예를 들어 프랑크 제국에서 카롤루스 왕조가 단절되면서 혼란기에 빠진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또한 9세기 이래 동쪽에서는 아바스 제국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명목상 아바스 왕조 칼리프좌에 충성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국이나 다름없는 지역 국가들이 등장하여 비잔티움 제국은 이전과 같이 방대한 자원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국가와 싸우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 핵심 문제는 새로운 위협을 무력화하고 영토를 보호하는 한편 상업적·외교적·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것이었다."(191, 197-8)


"안보 상황이 안정되자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인구는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2세기경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이전과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다." "이 시기는 전염병과 정치적 불안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도피한 결과 너무 넓은 토지에 너무 적은 인구가 살던 과거와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인력은 전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 관리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군대, 사회 기반 시설, 관리의 급료 그리고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외교 정책을 위해 세금을 거두었다. 즉 인구의 대부분인 농촌 지역 소작농이 내는 세금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둔 세금의 잉여를 앞다투어 사용私用하려고 했고, 비잔티움 제국의 엘리트층은 국가를 적대시했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10세기에는 중대한 국면을 맞았다.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 황제들이 발행한 신법 모음집에서 그들의 공통 목표는 디나티Dynatoi(권세가)였음을 알 수 있다."(209-11)


"마케도니아 시대 비잔티움 문화의 특징은 황실의 후원 아래 이루어진 방대한 양의 서적 편찬 사업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서적들은 과거 서적의 집성이었지만 공통점은 그뿐이다. 일부 책은 단순한 필사에 불과했지만,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이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들의 지적 유산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종합한 때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세기에 선보인 서적들 가운데 새로 작성된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진 고전 서적의 종합은 단순한 수집이 아니라 나름의 체계를 가진 것이므로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수준 낮은 작업으로 격하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 문헌의 상당 부분이 10세기에 복사된 필사본이라는 점은 이 부흥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이다. 비록 비잔티움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적·정치적 기준으로 고대 그리스의 고전을 선택하고 보존했지만, 그들이 없었더라면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작품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221-3)


"한편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라틴어가 곧 로마어라며 로마어를 쓰지도 않는 비잔티움 사람들이 로마를 자칭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 주장하자, 미하일 3세는 라틴어는 이방인의 언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일화는 어느 쪽이 로마 제국이냐 하는 문제가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도 미묘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같은 반목은 비잔티움 제국과 오토 왕조의 영향력이 선교 사업을 통해 확장됨에 따라 더욱 불타올랐다. 마케도니아 황제들은 마자르인과 루시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마자르인은 폴란드나 덴마크와 같이 독일의 구심력에 포섭되어 로마 교회를 영적인 중심지로 받아들였다. 반면 비잔티움 제국은 루시인을 개종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이것이 이른바 '비잔티움 공동체'의 시작이다. 이제 동유럽 국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치적·문화적 지향점으로 삼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그들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잔티움인의 입장에서는 실로 안타까운 사실이다."(224-5)


제6장 강인함 속에 나약함이 깃들다(1056~1204년)


"서방인 특히 노르만인이나 앵글로색슨인을 용병으로 고용하는 관행은 낯설지 않았다. 서방인 사이에서도 비잔티움 궁정에서 일하는 것이 꽤 수지 맞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유명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몇 세대 동안 이용해 온 방법을 구사하여 서방의 유력자들에게 서신과 사절을 보내 용병을 청했다. 그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사절단을 보내 이교도가 그리스도교를 얼마나 억압하는지, 성묘 교회와 성지를 순례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지를 강조하며 도움을 청한 것도 마찬가지 일이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으로서는 이 요청이 제1차 십자군으로 진화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는 알렉시오스가 요구한 바 이상이었고 감당하기에 벅찬 일이었다." "제1차 십자군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레반트 지역에 라틴계 식민 국가 다수가 수립되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살아남았다. 이 십자군 국가들과 비잔티움 제국은 이제 공존을 생각해야만 했다."(233-5)


"비잔티움 제국은 군사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았지만, 2, 3차 십자군이 실패하자, 비잔티움 제국이 십자군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다거나 애초에 지지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을 받았다."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불행하게도, 다음에는 유럽에서 해로로 이집트를 직접 타격하여 아이유브 왕조를 붕괴시키고 십자군 국가를 구원하겠다는 목표로 십자군이 준비되고 있었다. 베네치아는 엄청난 여비를 받기로 하고 십자군을 이송할 함대를 채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모인 군대는 기대보다 수가 적었고, 베네치아에 지불할 돈은 충분히 모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달아오른 십자군의 열기는 이집트 공격에서 비잔티움 제국 공격으로 옮겨가더니 결국 목표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전환'되었다." "한 차례 실패하기는 했지만 1204년 4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함락했다. 며칠에 걸쳐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하고 재화가 약탈당했다. 동정녀 성모 마리아가 지켜 주는 난공불락의 도시가 마침내 무너졌다."(239, 243-5)


"정력적인 세 황제 이사키우스 1세, 알렉시오스 1세, 이오아니스 2세 치하에서 콤니노스 체제는 잘 작동하는 듯 보였다. 토지는 증가하고 거대한 사유지가 형성되며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그러나 정치 체제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일련의 과정이 두 단계에 걸쳐 발생했다. 먼저 황실 인척과 외척에게 방대한 토지를 하사하는 관행이 시작이었다. 그 토지들은 행정적·재정적으로 독립성을 띠기 시작하더니 지역적 정체성을 강화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중심부가 가진 구심력을 저해했다. 12세기 들어 군사 행정 기구인 테마Thema(그리스어로 '장소, 배치') 체제가 붕괴하며 이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다. 종래에 각 테마의 스트라티고스나 행정관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부에게 임명받았기에 주변부는 중앙 정부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제거된 것이다. 그 역할은 수도와 연결된 권력과 후원의 네트워크 안에 있는 주교가 일부 수행했지만, 지방 도시에서는 지역 엘리트층인 아르혼테스가 출현하여 지방의 원심력은 강해졌다."(249-50)


"콤니노스 황제들, 그중에서도 마누일 1세 콤니노스가 추구한 강력한 중앙 권력은 오랜 기간 제국을 틀어쥘 자질과 카리스마를 갖추지 못한 황제가 들어서자 반발에 부딪혔다. 반발은 앞에서 언급한 원심력과 함께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몰고 갔다. 10세기 귀족 반란은 정치 체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중심부를 장악하려는 목적에서 발생했다. 반면 12세기 후반에 발생한 지방 반란들은 지방에 독립된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다. 1204년 시점에서 비잔티움 제국령 상당수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황제의 직접적인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반란은 비잔티움 제국의 속국들[예컨대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아르메니아인이 킬리키아로 이주해서 세운 국가)]에서 해방 운동이 폭발하고, 각지의 적국이 재기하면서 한층 거세졌다. 이 같은 움직임의 원인이 비잔티움 제국 내부의 반란과 달랐다 해도 결국 영토와 패권의 상실을 낳은 것은 마찬가지이다."(250-1)


제7장 분열의 유산이 수면 위로 떠오르다(1204~1341년) 


"1204년 4월에 일어난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과 약탈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결정지었다. 도시 자체는 1261년에 탈환되었지만, 함락에서 비롯된 정치적·경제적·인구적·문화적 여파는 중세 이후까지 비잔티움 세계에 남아 있었다. 1204년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영역을 그려 보기는 쉽지 않다. 제국은 수십 개의 파편으로 산산이 분열되었다. 이 소국들을 크게 분류하면, 하나는 라틴인 즉 제4차 십자군을 주도한 프랑스인과 이탈리아인이 이끄는 국가이고, 다른 하나는 비잔티움인들이 세우고 통치한 국가로 최소한 처음에는 옛 황가와의 연관성을 통치 근거로 삼았다. 이 국가들의 목표는 당연히 제각기 달랐다. 모두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단단히 굳히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되, 그리스계 후계국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탈환을 지상 과제로 삼았다. 결과론적인 시각이지만 그 가운데 니케아 제국이 단연 돋보인다. 결국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기 때문이다."(261-2)


# 주요 그리스계 후계국 : 니케아, 이피로스, 트라페준타 / 주요 라틴계 후계국 : 라틴 제국, 아하이아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 


"한때 중앙 집권화를 이루었던 비잔티움 제국은 이제 모자이크화처럼 군소 정치체로 나뉘었다. 이웃 국가들은 이 틈을 타 영토를 확장했다. 불가리아는 차르 이반 아센 2세 재위기에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일부를 정복했고 세르비아는 독립국이 되었다. 소아시아에서 룸 셀주크 왕국은 트라페준타 제국의 영토를 빼앗는 데 성공했으나, 잇따른 계승 분쟁으로 니케아 제국에는 위협이 되지 못했다. 몽골 제국은 1230년대 후반부터 루시 지역을 정복하고 헝가리를 침공했으며 불가리아와 룸 셀주크 왕국, 조지아 아르메니아 일부를 속국으로 삼았다. 비잔티움 세계에 출현한 다수의 국가는 어지러울 정도로 재빨리 동맹을 바꾸어 가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이들은 때로는 군사 또는 결혼 동맹을 맺고 때로는 영토를 두고 다투었다. 꼭 라틴계 국가와 그리스계 국가로 나누어 싸운 것도 아니어서 그리스계 국가 사이에도 갈등은 있었다. 이 상황 덕분에 약화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라틴 제국은 1261년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268)


"외부의 위협이 비잔티움 제국을 갉아먹는 동안 내부에서는 신학 논쟁이 비잔티움 제국을 둘로 쪼갰다. 그러나 이 분란은 비잔티움인의 영적 세계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큰 기여를 했으며, 이는 헤시카즘이라는 용어에 전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관행과 신념을 둘러싼 논쟁이다. '정적, 침묵'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이시히아Isychia에서 유래된 헤시카즘은 고대 후기에 묵상과 기도라는 수도원의 주된 측면을 특징짓기 위해 처음 등장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이 용어는 '예수 기도'("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죄인을")를 반복하며 신의 환영을 느끼기 위해 애쓰는 묵상법을 이르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신비주의적 실천의 옹호자들은 '예수 기도'를 신의 의지를 학구적이고 이성적인 수단으로 읽을 수 있다는 이들에 반대하는 논거로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학에 맞추어 체계화한 서방 교회의 스콜라 전통에 반대하는 방법이었음이 분명하다."(278)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촉발된 강력한 반라틴 정서는 비잔티움 세계 구성원들의 정체성 형성에 당연히 큰 영향을 주었다. 각 계승국 내에서 정교회는 그 중심에 있었고,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적이었다.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나 헬레니즘이라는 정체성이 싹튼 것은 주목할 만하다. 니케아 대륙 소아시아의 폐허가 된 고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의 업적을 향한 경이와 존경은, 미수복지 회복이라는 이상 그리고 전투적인 정교회와 융합하여 일종의 원시 민족주의를 유발했다." "막시모스 플라누디스(1260~1300년 활동)는 이 시기 문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할 것이다. 과거 비잔티움 제국이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절의 학자들은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권을 야만족이라며 그들의 업적을 하찮은 것으로 무시한 반면, 막시모스 플라누디스는 서방의 학문 수준이 발전 중에 있음을 인정했다. 다른 학자들은 이탈리아 북부의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사건에까지 관심을 가졌다."(287, 291-3)


제8장 몰락을 향해 나아가다(1341~1453년)


"1341년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가 죽자 곧 두 파당이 권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한 세력은 죽은 황제의 절친이자 정권의 척추이던 이오아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가 이끌었다. 반대 세력에는 남편을 잃은 황후 사보이아의 안나, 총대주교 이오아니스 14세 칼레카스 그리고 놀랍게도 칸타쿠지노스의 후원으로 출세하여 메사존의 지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아포카프코스가 속해 있었다." "칸타쿠지노스는 귀족, 군대, 고위 성직자 등 폭넓은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게다가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와의 우정 덕분에 아토스산의 수도사들도 그를 지지했다. 메시 계층을 포함한 도시민들은 아포카프코스를 지지했다. 유럽은 내전의 무대가 되었고 식량 생산은 심각하게 감소했다. 양 파당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왕조 같은 주변의 강국에서 용병을 고용했는데, 들여오기는 쉽지만 돌려보내기는 어려웠다. 어느 쪽을 지지하는 도시건 간에 무질서와 폭력이 들끓었다."(295-6)


"한편 오스만 왕조가 전략적 요충지 칼리폴리스를 점령한 사건은 발칸 정복의 첫걸음이었고, 한 세기도 되지 않아 발칸반도 전체가 그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수십 년간 오스만 왕조는 그리스, 라틴, 슬라브 등 동지중해 모든 세력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었다. 이제 지휘할 군대가 더 이상 없는 비잔티움 제국에게는 외교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기댈 언덕이라고는 서방으로부터의 도움밖에 없는 상황에서 교황이 그 역할을 해 주기 바랐기에 교회 통합 문제는 다시 한번 시급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이 정책들의 궁극적 목표는 오스만 왕조를 상대로 한 십자군이었다. 1362년 디디모티호와 아드리아노플이, 1363년에는 플로브디프가 함락되었는데 그제서야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이오아니스 5세의 외척인 사보이아의 아마데오 6세의 군대가 1366년 칼리폴리스를 점령했다. 점령군에는 헝가리군과 제노바령 레스보스의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성공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유일한 군사적 승리 사례이다."(299-300)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연장되었다. 강력한 몽골인 통치자 테뮈르(티무르)가 바예지드의 공세에 노출된 소아시아의 튀르크멘 공국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테뮈르는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 군대를 격파하고 바예지드를 사로잡았다. 이후 10여 년간 바예지드의 아들들은 오스만 왕조의 지배자 자리를 두고 싸움을 벌였다. 그동안 소아시아 각지의 옛 통치자들도 오스만 왕조로부터 영토를 탈환했다. 마누일 2세의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트라키아의 배후지 약간, 에게해 북부의 몇몇 섬 그리고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모레아 데스포티스령에 불과했고 그나마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제국'이라는 말은 공허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이 명백하다는 사실은 이웃과 동맹 모두가 자각하고 있었다. 바예지드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한 동안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가 정교회 신자들에게 교회는 있으나 황제는 없다고 주장할 정도였다."(305-6)


"자포자기라는 전염병이 퍼지며 극단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비잔티움인, 그중에서도 지식인들은 대체로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어떤 이들은 마법에서 위안을 찾았고 총대주교청은 마녀사냥으로 대응했다. 의식에 참여하거나 동조하는 자를 솎아 내자 엘리트층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사 들도 관여되었음이 드러났다. 이주를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 지식인들은 적들에게 포위되어 가망 없는 비잔티움 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어 교사로 취업했다. 그리스어를 배우고자 하는 수요는 14세기 중반 이래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최초로 이 길을 택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스승 칼라브리아의 바를라암이다." "1438년과 1439년에 걸쳐 진행된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많은 학자가 방문하자 이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이 학자들은 어디 하나 빠질 것 없는 학식을 지녔던 데다가 서방 세계가 수 세기 동안 갈망해 온 희귀한 사본을 잔뜩 들고 있었다."(318)


제9장 천년 제국의 멸망과 그 후


"1453년은 오스만 제국에게도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그 도시'를 손에 넣은 메흐메드는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교훈을 얻었고 비잔티움 제국을 뛰어넘고자 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오스만 제국은 중앙 집권화의 길을 걸었다. 이전에 오스만 영토의 확장을 견인했던 변경의 수령들은 권력에서 멀어져 갔고, 그 자리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이들로 채워졌다." "오스만 제국이 팽창하자 이탈리아 공화국들은 비잔티움 세계에서 누리던 상업적 특권을 상실하고 쇠퇴해 갔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탈리아인의 활동권은 금각만 너머 갈라타·페라 지역으로 이전되어 축소되었으며 점령 직후 맺은 협정, 다시 말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후 체결된 제노바 협정에 관계없이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위축되었다. 특히 흑해에서 주로 활동한 제노바의 역할은 15세기 말이 되면 거의 사라진다. 베네치아는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편이어서 17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상업적 동맹으로 활약한다."(331-4)


"인문주의자들이 가졌던 그리스어 문헌에 대한 오랜 애정은 변함 없었으나, 이 시기에는 두 가지 추가적인 동인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계속되는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발생한 튀르크 공포증 때문에 비잔티움 그리스도교도의 운명에 궁금증을 가진 것이다. 두 번째는 독일 지역에서 교회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린 지도자들이 정교회의 선택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설 잠재적 동맹자로 여긴 것이다. 마르틴 루터는 정교회 쪽이 고대 교회의 전례에 가까우리라 믿었기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은 아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와 직접 접촉하기를 희망했다. 양측은 사절을 교환했지만 곧 공통의 경쟁자를 가졌음에도 둘 사이에 용납하기 어려운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가장 곤란한 문제는 성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정교회 입장에서 성상 파괴의 시대는 다시 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이지만, 프로테스탄트들의 눈에는 성상 공경이 우상 숭배에 불과했다."(347-8)


"유럽이 계몽주의 시대로 접어듦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시각도 변화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 보이는 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 및 전제적 통치 방식은 인문주의자들이 가졌던 긍정적인 시각과 비잔티움 출신 스승들이 이룩한 업적에 그늘을 드리웠다.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같은 이 시기의 저명한 사상가들은 중세의 비잔티움 세계를 후진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간주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그토록 오래 존속된 것에 대해 타당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제국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각을 당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규정하고 있는 이는 에드워드 기번이다. 기념비적인 저작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그는 훌륭한 글솜씨와 학술적 권위를 이용해 비잔티움 문화를 '야만족의 승리와 종교의 승리'라고 정의하며 존재 의의를 철저히 깎아내렸다. 기번은 6세기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익살스럽게 축약하여 기술했지만, 그의 시각은 몇 세기 동안이나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지었다."(350)


"동방 제국은 지리와 역사의 측면에서 서방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 끼어, 자신을 계승해 줄 민족 국가 하나 남기지 못했다. 다시 말해 비잔티움 제국을 옹호해 줄 그 어떤 민족주의적 역사학도 존재하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은 단지 방대하지만 불편한 투사체로만 남았다. 누군가에게 비잔티움 제국은 전체주의와 신정주의 국가이며 낙후되고 정체된 존재이다. 이를 보완해 주는 미덕은 단지 고대 그리스의 지식을 보존하고 이웃에 퍼뜨렸다는 점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벽이 대포 등장 이전에만 난공불락이었듯이, 이 나라는 고대 세계에 뿌리를 두고 점진적으로 변화했지만 주변 세계의 변화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가 투표제를 퍼뜨리고 영국에서 배심 재판을 수용할 때,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모든 것이 황제 또는 총대주교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14세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테오도로스 메토히티스가 지적했듯이 모든 제국은 태어나고, 꽃을 피우고, 쇠퇴하고, 죽었다."(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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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의 로마 제국 특강
김대식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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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부 기원 - 어떻게 로마는 세상을 정복했는가


문명이란 홀로 성장할 수 없기에, 성장과 동시에 더 큰 문명에 의해 잠식당할 운명에 처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크레타는 그리스 문명은 받아들이면서도 이집트, 그리스, 디아도키로 이어지는 다른 문명들의 침략과 페르시아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있었다. 결국 미케네 문명에 의해 사라지기는 했으나 무역을 하기에 용이하면서도 전쟁을 하기에는 먼 위치 덕분에 수백 년 동안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비니Sabini, 움브리아Umbria, 에트루스카Eetrusca 등 주변에 라틴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그만큼 많았던 덕분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강한 문명은 에트루스카로, 그리스 문명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민족이었다. 남부에 있는 캄파니아Campania에는 그리스 식민지들이 있었다. 캄파니아의 나폴리는 당시 네아폴리스Neapolis로 불렸으며 그 자체가 신도시, 즉 그리스인들이 이탈리아에 지은 신도시를 의미했다. 시칠리아는 카르타고Carthago가 정복하고 있었다. 43)


로마는 이탈리아를 장악했으나 아직 슈퍼 파워는 아니다. 당시의 지중해 해상 무역은 카르타고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레반트와 아라비아 반도를 넘어 인도와 지하자원이 풍부한 이베리아, 지금의 스페인 지역까지 독점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물리치지 않으면 로마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의 정치가 카토Marcus Porcius Cato가 원로원에서 어떤 연설을 하든 마지막에는 항상 “카르타고는 사라져야 한다Carthago Delenda Est”는 경고를 덧붙였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질 정도다. 그렇게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이르는 포에니Poeni 전쟁을 치르게 되고,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 로마는 전 세계를 정복한 후 그들 자신의 승리 비결을 용맹함과 전투력에 있었다고 착각하지만 로마의 진정한 승리 비결은 시스템, 무기, 전술 이 세 가지에 있었다. 질서에는 무질서로, 무질서에는 질서로 대응하면서 상황에 맞게 무기를 적절하게 변형한 로마는 전 세계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45, 48)


로마가 전쟁을 통해 강대 문명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사회 인프라에 있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넘어갈수록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게르만족을 비롯한 다른 민족의 경우 식량 조달이 어려워 연이어 전쟁을 치르는 것이 불가능했고 부상을 입어도 병원에 갈 수 없었지만 로마는 달랐다. 로마는 정비된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무기와 식량을 조달했고 발달된 의료 환경을 통해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로마에는 ‘파브리케fabricae’라고 불리는 무기 공장이 따로 갖춰져 있어 대량의 무기 생산이 가능했는데, 이는 무기의 길이나 무게 등의 단일화를 의미했다. 누구나 특별한 연습 없이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울 수 있었다. 결국 처음에는 로마에 대항하던 민족들도 점차 로마인이 되어갔다. 단 한 민족만 빼고 말이다. 바로 문명의 기원, 고대 레반트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간직하던 유대인들만은 결코 로마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떠돌게 된다. 50)


그러나 광대한 로마 제국의 영토는 사실상 당시 기술로는 다스릴 수 없는 규모였다. 국경선 또한 너무 길었다. 선택과 집중이 절실했다. 결국 각 3000~5000명 병력으로 구성된 로마 제국의 총 30개 정도의 군단legion 중 반 정도는 게르만 야만족들로 득실거리는 독일 라인강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변을 지키고, 나머지 반은 레반트 지역에서 페르시아 제국과 대결하게 된다. ‘전방 지역 방어’라 불릴 수 있는 이 전략은 그러나 로마 제국 멸망의 단초가 된다. 야만족들과 문명을 구분 짓는 것은 오로지 잘 훈련된 로마 군단들이 지키는 국경선밖에 없기에, 일단 국경선 안으로만 들어오면 그 안에서는 누구든 잘 정비된 도로를 통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국경선이 뚫렸다는 소식이 로마까지 오는 데만 해도 몇 주가 걸렸다. 제압할 군인들이 가는 시간 동안 야만족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고, 때문에 그들을 잡는 데만 몇 년이 소요될 정도였다. 53-4)


2부 멸망 - 왜 위대한 로마 제국은 결국 무너졌는가


당시에 모든 전쟁은 가을 수확 전에는 반드시 끝나야 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전쟁에 나가 가을에 수확하기 전까지는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가 비슷한 사정이었기에 이는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합의된 불문율이었다. 그리고 이는 로마 공화정 초기까지는 잘 지켜졌다. 그런데 로마의 팽창이 가속화되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당시는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기에 영국까지 출정할 경우 같은 해에 이탈리아로 돌아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가령, 집안의 장성한 남성이 5~10년 동안 돌아오지 못할 경우 당장의 생계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기계 없이 온전히 인력으로 일해야 했기에 그 빈자리는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은 가족들은 상당한 이율로 세넥스에게 부채를 질 수밖에 없었다. 훗날 전쟁에서 돌아온 이들에게 남은 것은 가족들이 모두 노예가 되어 있는 현실뿐이다. 이렇게 로마 공화정의 핵심이었던 중산층이 무너지기 시작하고 빚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다. 60)


동시에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수백 만 명의 노예가 생기는데, 이들 또한 전쟁 시 세금을 가장 많이 냈던 세넥스의 차지가 된다. 문제는 중산층 누구도 노예보다 더 저렴하게 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이제 로마의 중산층은 직업조차 찾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공화정 마지막 시기에 로마의 실업률은 70~8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였다. 단순한 노동은 모두 노예의 차지고, 고차원적인 일은 교육을 훨씬 많이 받은 세넥스의 후손만이 할 수 있으니 중산층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들을 보호할 사회 보장 제도 또한 전혀 없었다. 로마 공화정에 상상을 초월할 수준의 불평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세넥스들의 삶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그들은 처음에만 해도 조금 부유한 수준이었지만 중산층으로부터 거둬들인 이자에 농가, 토지를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세넥스들의 토지 소유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수준이었다. 오늘날 도시 하나 정도의 토지를 몇몇 갑부 세넥스 가문들이 소유하기도 했다. 60-1)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재위 117~138)는 21년의 재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제국을 돌아다녔는데, 그 결과 로마가 도저히 통치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영원한 팍스 로마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제국의 팽창이 아닌 제국의 보존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상당히 현명한 결정 같지만 추후에 큰 문제가 된다. 로마 직업 군인들의 급여와 나라 전체의 생산력 저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직업 군인들의 급여 문제가 대두한다. 목숨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터에 나가면서 급여를 미룬다는 것은 군인들에게 반란의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애국심과 명예를 위해 싸우던 시민 군인과 달리, 직업 군인 유지에는 막강한 국가 예산이 필요했다. 이에 처음에 로마 황제들은 직업 군인으로서의 20년의 임기를 마친 후 퇴역할 때 퇴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군인들이 퇴직을 하게 되어 재정에 상당한 문제가 생기고 만다. 75)


결국 로마 황제들은 퇴직금을 토지로 주겠다는 묘책을 다시 짜낸다. 군인들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는 결정이었다. 당시는 모두 농사를 지었으니 40세 정도에 은퇴한 후 농부가 되는 것은 생활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게다가 콜로니아Colonia 도시를 만들어주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면 연금 문제와 노예들의 반란 문제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가 제국의 팽창을 중단하면서 은퇴한 군인들에게 지급할 새로운 땅이 더 이상 창출되지 않기 시작한다. 퇴역 군인들에게 줄 만한 새 토지가 모자라고, 퇴직금 대신에 농사가 불가능한 황무지나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급락할 화폐를 받은 군인들의 불만은 상상하기 쉽다. 새로운 자금이 필요해진 로마 제국의 직업 군인들. 그들은 추후 황제의 암살과 새 황제의 대관이 바로 그들의 재정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하드리아누스의 보호주의는 그렇게 퇴역 군인의 처우 문제와 맞물려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이끄는 요인이 된다. 75-6)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세기 황제들 중 최초로 로마 위기의 원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매우 파격적인 해결책 세 가지를 찾아낸다. 첫째, 로마 제국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할한다. 하드리아누스처럼 디오클레티아누스 또한 로마 제국의 방대한 영토가 정보 교환이나 야만족들과 관련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둘째, 후계자 선정 절차를 규정화한다. 로마는 왕정이 아니기에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할 수도 없고, 공화정도 아니었으므로 투표를 할 수도 없었다. 때문에 다시 로마 제국의 초창기처럼 양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되 이를 규정화하는 방식을 적용한다. 그전까지는 특별한 기준 없이 황제에 의해 결정되었다면 이제 황제를 네 명으로 나눠 이를 시스템화하자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명의 황제들이 통치하는 4두頭 정치, 즉 테트라키tetrarchy다. 셋째,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 가격을 통제한다. 그러나 이를 권력으로 통제하려고 한 결과는 뻔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재정 개혁은 결국 실패한다. 85-7)


3부 복원 - 무엇이 로마의 역사를 이어지게 하는가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로마인들은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제국 그 자체가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우울증과 숙명론은 과거에 대한 로망을 키운다. 4~5세기 로마의 현실은 패배와 재난의 반복이지만 그들에게는 찬란한 과거의 로마가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로마는 절망스러웠지만, 상상의 로마는 아름답고 영원했다. ‘로마’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제국이 아닌, 유럽인들이 여전히 꿈꾸고 갈망하는 ‘영원한 제국’으로 탈바꿈한 이유다. 황제도 세나투스도 사라지고, 이제 홀로 그들의 역할을 해야 하는 로마의 주교이자 폰티펙스 막시무스만 남은 제국에서 로마인들은 믿기 시작한다: 전쟁과 침략 때문에 후퇴하고 투박해진 단순함은 어쩔 수 없는, 지금 이 세상과의 타협이지만 진정한 화려함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아닌 가엾은 로마인들을 영원히 위로할 하나님의 세상에서만 가능하다고. 개인의 자유와 주도가 중심이었던 그리스 로마 문명이 사라지고, 신의 믿음이 중심인 된 중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09-10)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된 후 서유럽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인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세 가지 행운이 한꺼번에 찾아온 것이다. 행운은 먼저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기술자, 지식인, 부호들이 모두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그들의 이주는 단순히 영토 간 이동이 아닌,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유럽으로의 이전을 의미했다. 또한 8~15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이슬람 알 안달루스Al-Andalus가 스페인을 떠나고 가톨릭이 스페인 남부를 차지하자 무슬림들은 북아프리카로 이주한다. 이는 이슬람의 과학 문명에 그들이 흡수한 그리스 로마의 찬란한 문명까지 함께 전파하는 결과를 낳는다. 문명의 이식이 콘스탄티노플과 스페인 두 곳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행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대규모의 새로운 시장이 창출된 것에 더해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발명으로 종교개혁과 과학혁명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123)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미술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기후나 환경 덕분에 색감은 밝으나 여전히 생동감 없는 조각 같은 표현을 했다면, 독일은 생동감은 있으나 색감 자체가 매우 어둡고 다소 잔인한 표현을 했다. 그런데 이때 색감의 사용과 생동감의 표현,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잘 융합한 화가들이 등장한다. 바로 플랑드르, 네덜란드 화가들이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를 통해 그림의 주제는 성경을 벗어나 훨씬 다채로워진다. 네덜란드 화가들은 더 이상 종교나 신화가 아닌 조금 더 일상의 삶을 주제로 삼기 시작했다. 이는 화가 크벤틴 마시스Quentin Matsys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더 이상 하늘과 천국이 아닌,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기에 ‘저 세상’에 있었던 시선이 르네상스에 이르러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러한 표현은 피터르 브뤼헐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때부터 유럽, 특히 네덜란드는 점차 실용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127, 133-5)


흔히 일본의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꼽지만 그보다 앞선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에 발을 내디딘 인물이 있었다. 바로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다. 1613~1615년까지 이어진 그의 행로는 아메리카 대륙과 대서양을 넘어 스페인과 로마까지 이어진다. 이때 그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San Juan Bautista라는 배를 타고 갔는데, 포르투갈의 갈레온선galleon을 역공학해 직접 건조한 배였다. 지금은 그 모사품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기독교 신자였던 쓰네나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일본은 쇼군이 바뀌고 기독교 금교령이 내려져 있었다. 일본은 무역을 통해 얻은 배와 총까지도 모두 폐기하고 그렇게 고립을 자초한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모든 나라에 기회는 찾아온다는 것이다. 물론 15세기의 유럽처럼 그리스 로마 지식의 이식,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인쇄 기술의 발명이라는 세 가지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이는 분명 행운이었다. 138-9)


4부 유산 - 누가 로마 다음의 역사를 쓸 것인가


국가의 기원에 관해 현재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론이다. 베버에 의하면 국가의 역할은 폭력성의 독점화다. 쉽게 말해 인간이란 원래 폭력적인 존재이기에 가만히 두면 서로가 서로를 죽이므로, 이를 국가가 독점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개인 간의 갈등을 무력 없이 해결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국가만이 유일하게 폭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했을 때 단순한 싸움으로 끝났을 문제가 독점이 무너지면 전 사회의 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국가 정당성의 문제가 생긴다. 도대체 국가가 무엇인데 폭력을 독점하느냐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국가를 세운 후에 권력을 부여받은 왕이 이를 멋대로 휘두르는 과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따라서 국가가 독점한 폭력성이 개인들의 폭력성을 모두 합한 것보다 낮을 때에야 국가는 정당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가 폭력성을 독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51-2)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 Joseph Proudhon은 이상적인 사회가 되기 위한 문제를 권력과 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권력은 부에서 나오기에 부의 확률분포가 다르면 권력이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루동은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 위해 부의 소유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부가 특정한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소유는 도둑질이다Property is Theft!』에서 처음으로 공유 경제를 제안하기도 한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신과 국가에서God and the State』를 통해 소유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국가가 개인의 소유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에 유토피아가 되기 위해서는 국가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사라지면 유토피아가 된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관점은 앞서 개인의 폭력성 제거에서 국가의 정당성을 찾았던 것의 반대편에 자리한 시각이다. 156-7)


지금까지 인류가 설계했던 다양한 국가 시스템 중에서 여전히 잘 지탱되고 있는 것은 오로지 민주주의 하나뿐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완벽하다고 여겨지면 그것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닌 종교가 돼버린다. 이데올로기를 숭배하게 되면 그 절대성을 두고 결국 반목과 분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는 현실적인 가설에서 시작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에서 보장되는 사회적인 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확장되는 모양새를 띤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성, 아이, 성소수자LGBT들에게는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universal human right가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확장성은 자유민주주의의 특징으로, 권리가 더 이상 확장되지 않고 축소되는 순간 자유민주주의는 파괴되고 만다. 162-4)


현재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경쟁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문제가 아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가장 큰 핵심은 애니웨어 피플anywhere people과 섬웨어 피플somewhere people의 싸움이다. 세계화란 전 세계를 시장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므로, 그만큼 세계화에 적합한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영어에 능통하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여행을 다니며 더 많은 경험을 쌓을 수도 있다. 즉 지식이나 경험,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세계화에서 훨씬 큰 혜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세계화 덕분에 어디에서도 살 수 있고 사업할 수 있는 사람들을 애니웨어 피플이라 한다. 반면 오히려 세계화로 경쟁이 많아지는 사람들, 본인의 경험과 지식과 돈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딱 한 곳인 사람들을 섬웨어 피플이라 한다. 이들은 자신의 민족, 국가, 도시를 떠나는 순간 경쟁력을 잃고 만다. 170-1)


『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에서 노터데임대학교 교수인 미국 정치학자 패트릭 드닌Patrick Deneen은 조금 더 거시적인 질문을 한다. 제목에서부터 이미 실패했다고 쓰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 2.0에는 아주 본질적인 오류가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위험한 것은 실패해서가 아니라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민주주의를 자유, 불평등, 지니계수를 중심으로 보면 민주주의 2.0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가 늘어날수록 불평등이 늘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사람은 더 똑똑한 사람과 덜 똑똑한 사람, 더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덜 열심히 일하는 사람 등으로 나뉘는 것처럼, 그 자체로 서로 다르다. 만약 이를 막는다면 자유롭지 않은 것이기에, 자유가 늘어나면 불평등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자유는 커지면서 불평등은 막을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가능할까에 대한 답이다. 애석하게도 드닌은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그 답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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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운명 : 기후, 질병, 그리고 제국의 종말
카일 하퍼 지음, 부희령 옮김 / 더봄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프롤로그 : 자연의 승리 11 


"제국이 승리의 의례를 거행하는 바로 그 순간 본질적으로는 거대한 자기기만의 행위가 있었다. 로마인들은 자연이라는 야생의 힘을 길들였다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피비린내 나는 동물 사냥을 무대 위에 올렸다. 우리는 로마인 스스로는 이해하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눈금의 척도로, 미시적 차원에서부터 지구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곧 인간의 야심에 대한 자연의 승리였다. 로마의 운명은 황제들과 야만인들, 원로들과 장군들, 병사들과 노예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그러나 또한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화산과 태양 주기의 영향도 컸다. 이제야 우리는 생태 환경의 변화라는 거대한 드라마에 로마인들이 자신도 모르게 배역을 맡고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과학적 도구를 갖게 되었다." "진화의 깊은 힘은 찰나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로마의 운명》은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문명이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허망한 꿈을 꾸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17-8)


1장 | 환경과 제국 19 


"로마의 성취를 평가하고 고대 제국주의의 역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사회의 삶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삶은 느리고 유기적이었으며, 무너지기 쉽고 제한적이었다. 시간은 인간의 발과 동물의 발굽이 만드는 둔중한 리듬에 따라 흘러갔다. 수로는 제국의 진정한 순환 시스템이었으나, 폭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닫히는 추운 계절에는 모든 마을이 섬으로 변했다. 에너지는 당연히 부족했다. 힘은 인간과 동물의 근육에서 나왔으며, 연료는 통나무와 덤불이었다. 육지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삶이었다." "생존은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제때 내리는 비에 좌우되었다. 대다수에게 먹을 것은 곡물뿐이었다.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시옵고〉는 진지한 청원이었다. 죽음은 늘 곁에 있었다. 이런저런 전염병들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서 평균 수명은 20대, 20대 중반 정도였다. 이러한 보이지 않는 제약들은 중력과 같이 현실적이었고, 로마인들이 알고 있는 세상을 규정하는 운동 법칙이었다."(24)


# 시기별 로마의 기후

1. 로마 기후최적기 : 약 기원전 200~기원후 150

2. 로마 과도기 : 약 기원후 150~450

3. 고대 후기 소빙하기 : 약 기원후 450~700


"기후 변화는 항상 외부에 원인이 있는 요소였고, 게임의 다른 모든 규칙을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한 와일드카드였다. 외부적 요소에 의해 삶의 인구통계학적, 농업적 토대가 재편성되었다. 사회와 국가의 훨씬 정교해진 구조를 기후 변화가 좌우했다. 고대인들이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를 두려워하며 숭배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속적 군주의 권력도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결과였다. 자연은 어둠을 틈타 기습하는 군대처럼 인간 사회를 붕괴시키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장치를 가동했다. 그것은 바로 감염병이었다. 로마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는 생물학적 변화가 물리적 기후 변화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물론 기후 변화와 감염병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연관되어 서로 겹쳐서 일어나지만 동일한 현상은 아니다. 다만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로마의 질병은 제국의 원활한 연결성에서 비롯되었다. 감염병들은 로마의 연결성이라는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타 전광석화처럼 퍼져나갔다."(37, 40-1)


"환경과 사회 질서 사이의 관계는 결코 말끔하거나 직선적이지 않았다. 가장 험난한 도전에 마주했을 때조차, 로마인들이 역경에 대처한 수준은 놀라웠다. 스트레스를 흡수하고 적응하는 능력은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그러나 로마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이야기가 하나부터 열까지 환경과 관련된 드라마임을 일깨워준다. 제국이 번영을 누렸던 2세기의 황금시대, 로마 세계 너머 저 멀리에서 새로운 종류의 바이러스가 유입되어 팬데믹이 돌고 난 뒤 제국의 위대한 타협의 파탄, 3세기 무렵 기후와 전염병이라는 재앙의 협공 속에서 제국의 붕괴, 새로운 유형의 황제에 의한 제국의 부활, 4세기에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민중운동 발발, 고대 후기에 일어난 동양 사회의 부흥, 부보닉 페스트라는 핵폭탄, 은밀히 시작된 새로운 빙하기, 로마 제국으로 인식되던 실체가 최종적으로 무너지면서 성전jihad에 임하는 이슬람 군대에 의해 재빨리 정복되는 과정들 모두가 그러하다."(45, 48)


2장 | 가장 행복했던 시대 51 


"166년 갈레노스가 로마에 온 지 4년째 되던 해에 동쪽으로부터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도시로 침입해 왔다. 역작 《의학의 방법》에서 갈레노스는 이 병에 걸린 청년에게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치료한 방식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약했던 기침이 점점 격렬해지고, 환자는 후두부에 생긴 궤양에서 짙은 색의 딱지를 뱉어냈다. 곧 그 병의 명백한 징후가 나타났다. 환자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검은색 발진으로 뒤덮였다. 갈레노스는 그 병을 완화하는 처방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산에서 키운 소의 젖, 아르메니아의 흙, 소년의 소변 같은 목록들은 절망적일 뿐이었다. 그가 겪은 대규모 사망 사건은 인류 역사 최초의 팬데믹이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이 파탄에 이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폴로 신이 새롭고 암울한 벌을 내리는 것이라 여겼으나, 과학자 갈레노스에게 그 병은 단지 '대역병'이었다. 이 시기는 기번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번영한 시기'라고 규정했던 때이다."(56)


"교역과 기술의 발달은 로마인들에게 인구 위기를 앞지르게 했다. 그래도 로마인들이 현대에서 당연히 여기는 성장 속도를 파격적으로 높이려는 시도를 했던 흔적은 없다. 급격한 도약은 단지 과학이 경제적 생산성을 끌어올렸을 때, 그리고 석탄과 같은 화석 에너지원이 대규모로 활용되었을 때만 일어났다. 따라서 로마인들이 전근대 경제의 기본 역할을 초월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게 불명예는 아니다. 로마는 때 이르게 진보했으나 동시에 철저히 산업화 전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로마 경제를 상상할 때 최저 생계의 황량하고 평탄한 선을 이어가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나서야 성장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던 전근대 경제를 떠올리면 안 된다. 문명을 경험하는 것은 흥망성쇠, 통합과 해체의 결과로 일어나는 물결과 마주하는 일이다. 로마 제국이라는 문명은 이러한 파도 중에서 아마도 가장 폭넓고 강력한 것이었으며, 끊임없이 상승하는 근대성의 물마루보다 앞선 것이었다."(79)


"로마 기후최적기에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강우량이 많았고 더 넓은 지역에 비가 내렸다. 농업에서 최악의 위험성이 줄어든 것이다. 전체 로마 제국의 세계 어디에나 있는 관개 기술 유적이 증명하듯이, 물 관리는 내내 농부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중요한 문제였다. 가장 위험한 조짐은 한 해의 강우량이 식물의 생육 가능 임계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보리의 경우는 약 200~250밀리미터, 밀의 경우는 약 300밀리미터였다. 어떤 해에는 농사를 완전히 망칠 위험이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피터 간시는 그리스의 일부 지역에서 밀농사를 망칠 확률은 4년에 한 번, 보리농사의 경우는 20년에 한 번이었다고 추정했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화, 통합, 그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한 여러 형태의 전략들이 지중해 전 지역에 토착화되었다. 그러나 로미 기후 최적기 동안에는 정기적으로 비가 내렸으므로, 날씨로 인한 식량 위기의 위험을 줄여주는 강력한 동맹군 역할을 해주었다."(105)


"서기 120년대에 아프리카를 압박한 광범위한 가뭄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그 지역을 괴롭힌 기후의 건조화라는 위기의 맥락에서 일어난 최초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화 역시 제국의 황금시대가 결코 흔들림 없는 평온한 시대가 아니었음을 상기시켜주는 요긴한 증거다. 지중해 지역이 급격하게 기후가 변동하는 곳이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로마 기후최적기는 기껏해야 지나치게 예측 불가능한 연간 기후의 변동성이 완화된 시기였을 뿐이다. 적어도 현지 지역 사이에서 전파되는 대규모의 급성 전염병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본국에서의 불안정한 왕권 다툼, 그리고 국경선을 따라 벌어지는 지정학적 마찰은 로마 제국의 고질적 특징이었다." "회복 탄력성은 한 사회가 충격을 흡수하고 손상으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자금을 축적하는 능력을 재는 척도이다. 가뭄이라고 해서 모두 기아를 유발하는 게 아니며, 전염병이 항상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러하다."(108-9)


"로마인들에게 전염병의 위협을 완화하거나 손실을 줄여서 신속하게 회복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고대의 약품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롭기만 했다. 기본적인 간호라는 게 아프고 병든 사람들에게 조금도 유익하지 않은 것이었다. 온탕이나 냉탕에 입수하라는 처방이나 환자에게서 무지막지하게 피를 뽑아내는 처치는 사망자 수를 늘리기만 할 뿐이었다. 평민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마법에 의존했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세 후반에 발달하기 시작한 일종의 격리 같은 처방이 로마에도 있었던 게 확실하지만, 대중은 질병에 대해 종교적 방식으로 대응하는 게 지배적이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대규모 사망을 피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희생으로 전염병을 간주하여, 아폴로 신의 액막이 조각상을 세우는 정도로 대응했다. 로마 제국에는 공공보건의 기초조차 없었다. 폭발적 사망률이 처음으로 지역에 국한된 재앙을 넘어서게 되자, 제국은 전례 없는 충격으로 휘청거렸다."(115-6)


3장 | 아폴로의 복수 127 


"로마 제국은 서기 160년대에 신종 감염병의 진화와 마주쳤다. 그것은 운명적인 만남이었으나,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역병은 성장이 과도할 경우에 예측할 수 있는 역효과는 아니다. 우리는 로마 제국을 맬서스 학파의 주장처럼 자원의 근본적 역량보다 인구 팽창이 앞서서 일어난 붕괴의 희생양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염병의 발생이 순전한 우연도 아니었다. 제국에 내재하는 '생태적' 조건으로 인해 이런 사건이 잘 일어날 만한 주사위의 눈금이 나온 것이다. 로마 세계에서 질병의 역할을 이해하려면, 제국이 눈에 보이지 않는 서식자에게 적합한 환경을 갖추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밀집된 도시 거주자, 지형의 끊임없는 변화, 제국 내부와 외부로 강력하게 연결된 교역망, 그 모든 것이 특정한 미생물이 번식하기 좋은 생태계 형성에 기여했다." "궁극적으로 아폴로 신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는 종교적 두려움이 있었다. 아폴로 신은 모든 경계를 넘나드는, 제국 자체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132-4)


"본질적으로 로마 문명은 전염병이 잠재하는 지형에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농업이 확장되면서 문명이 모기에게 유리한 서식지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삼림벌채로 인해 물웅덩이가 생겼고, 울창한 숲이 들판으로 변하면서 모기들이 쉽게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폰티네 습지를 가로질러 건설한 아피아 가도와 같은 로마의 도로들은, 〈(말라리아를 전파하는) 학질모기가 선호하는 새로운 번식지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의 정원들과 상수도로 인해서도 모기와 인간은 엄청 가까워졌다. 〈누구든지 대중을 위한 물과 목욕탕에서, 수영장에서, 운하에서, 도시의 집들에서, 정원에서, 교외의 빌라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을 세밀하게 계산해 보면, 그리고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진 아치, 깎인 산과 평평해진 계곡을 여행하게 되면, 그는 세상에 더는 놀랄 게 없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편리한 환경을 건설한 탓에 로마 제국은 모기의 번식을 실험하는 장이 되었다."(167)


"로마 제국은 '사람이 사는 세계를 향한 모든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스의 연설가 디오는 로마령 알렉산드리아가 〈말하자면, 전 세계와 멀리 있는 나라들 사이의 접합점이다. 마치 모든 사람을 한 자리에 모으는 도시 속 시장〉 같다고 했다." "아프리카 해변에 바짝 붙어서 우기의 바람을 타고 항해하는 상인들은 보이지 않는 교류의 중개상이었다. 인도양 체제의 진정한 생물학적 의의는 '유라시아의 문명화된 질병 집단들'을 융합시킨 것이 아니라, 장애물 없이 신종 전염병을 통과시킬 수 있는 통로를 형성했다는 데 있었다. 중앙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척추동물과 다양한 미생물이 서식하는 곳이다. 결과적으로 그곳은 인간에게 유해할 정도로 득실거리는 병원균의 요람이기도 한, 진화 실험의 위험한 생산지였고, 지금도 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질병사의 드라마는 병원체의 진화와 인간의 연결성이 끊임없이 충돌하는 데 있다. 로마 제국에서는 그 두 가지 힘이 특별히 중대한 방식으로 함께 어우러졌다."(185-7)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종교적이었다. 역병은 언제나 무기력하거나 원초적인 공포의 감정을 불러일으켰으며, 안토니누스 페스트는 깊은 종교적 두려움을 건드렸다. 시간의 안개 속에서, 아폴로 신은 역병과 연관되어 있었다. 호머의 서사시에서 아폴로 신은 전염병의 화살을 쏘아 보낸 궁수이기도 했다. 역병이 창궐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돌았다. 머리카락이 긴 아폴로 신을 모시는 셀레우키아의 사원에서 역병을 일으키는 증기가 배출되었다는 것이었다.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된 신의 분노를 달래려는 절박한 시도의 흔적들이 제국의 전역에서 발견되는 것도 역병의 규모를 말해주는 두드러진 증거이다."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촉발한 아폴로 신에 대한 폭발적 신앙은 고대의 금석문에 남아 있는 다른 기록들과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액막이용 주문이 새겨진 비문은 역병 자체보다는 두려움의 증거이지만, 안토니누스 페스트가 얼마나 넓은 범위로 퍼져나갔는지에 대한 지표를 제공해준다."(191, 194)


"군대는 역병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연대기 기록을 보면, 서기 172년 무렵에 군대는 거의 소멸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전기에는 노예와 검투사들을 긴급 징병하고, 이례적으로 노상강도세를 추가 징수했다고 적혀 있다." "역병이 돌고 있을 때, 제국의 은광 산업이 갑자기 붕괴하여 단기적인 통화 위기가 촉발되었다. 파르티아 원정에 나서면서 군대의 이동과 전쟁 무기의 비용으로 제국의 재정 시스템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러나 역병은 그것을 치명적인 위험 수준까지 몰아넣었다. 그 반동으로 160년대 후반부터 170년대 전반에 걸쳐서 통화와 사회기반 시설의 재정이 휘청거렸다." "높은 사망률 충격에서 비롯된 고임금이라는 혜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상업의 위축과 기술자본이 적어지면서 생산성이 줄어든 경제적 손실 탓에 보통의 노동자들이 이득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도 소작인들이 지불해야 하는 경작지 임대료는 하향 조정되어 수십 년 동안 새로운 평형상태를 유지했다."(212-5)


4장 | 세계의 노년기 225 


"역경의 시기를 살아가면서 기독교인들은 '세계의 노년기'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냈다. 사상의 전쟁을 치르면서 그들이 정교화한 은유였다. 위기의 와중에 엉뚱하게도 신의 본성에 대한 공적인 논쟁이 일어났다. 황제들은 위기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이 (다신교의) 신들을 제대로 숭배하지 않은 탓으로 돌렸다.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지구가 노년기로 접어들고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러한 반론을 나름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은 수사학자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핵심을 잘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테르툴리아누스가 로마령 아프리카의 활력 넘치는 문명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뒤 한 세대가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카르타고 사람인 키프리아누스는 〈세상이 점점 늙어가면서 과거에 세상을 지탱하던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으며, 한때 그 속에 깃들었던 힘과 활력이 이제는 남아 있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세계는 무덤을 향해 다가가는 창백한 노인이었다."(247-9)


"인간의 목격담에 신빙성이 있음을 자연의 기록보관소들이 증명해준다. 로마 기후최적기 동안 미소 짓던 나날들이 2세기 후반에는 신속하게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급하게 걸린 것은 아니었다. 로마 기후최적기는 조용히 사라졌고, 그 뒤를 이은 것은 후기 로마 과도기였다. 뚜렷한 해답이 없는 분열과 급격한 변화의 시기가 약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변화는 전지구적 규모였다. 태양의 변동성이 외부 강제력의 주된 메커니즘이었다. 로마인들 머리 위에서 태양은 점점 약해져갔다. 베릴륨 동위원소 기록을 보면, 서기 240년대에는 일조량이 급격하게 감소한다.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단기적으로 서기 240년대에는 지중해 지역의 남쪽 끝부분에서 심각한 가뭄이 있었음이 관찰된다. 키프리아누스가 살던 북아프리카도 가뭄으로 시들어갔다. 기독교 주교이기도 했던 그는 고통스러운 가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회에서 기독교를 방어하려고 애썼다. 전반적 위기는 사실상 복음을 전파하기에 적기였다."(249-50)


세베루스 왕조와 그 이후의 황제들은 폭이 좁기는 해도 일종의 평형을 이루었으나, 지정학적 충격과 환경으로부터의 충격이 연속되자 새로운 질서는 위협을 받았다. 불운에 대한 완충 작용이 가장 필요할 때, 나일강이 그들을 매정하게 저버렸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서기 244년에는 강물의 수위가 올라가지 않았다. 서기 245년 혹은 246년에는 다시 미미한 수량으로 범람했다. 240년대에 일어난 연이은 가뭄만으로도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제국의 시스템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자연은 로마인들에게 또 다른 불행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구 기후 체계가 돌발적으로 격변하면 생소한 감염병의 발발이 이어지는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새로운 팬데믹의 전면적 폭력은 궁극적으로 제국의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를 넘어섰다. 로마의 영원함을 기원하는 환희에 찬 기념식을 치르고 나서 불과 몇 년 뒤 제국의 존재가 지속될 수 있을지 완전히 불투명해지고 말았다."(255, 258)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역사적으로 기본적인 사실이 거의, 혹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발생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료들 모두가 동시에 가리키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은 대규모 역병이 그 시대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병이 휩쓴 지리적 범위는 광대했다. 〈로마의 어느 지역, 어느 도시, 어느 집도, 어디에나 퍼져 있는 이 역병의 공격을 받아 텅 비어버리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자료에서 언급된다. 역병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 같은 가장 큰 도시들을 덮쳤다. '그리스의 도시들'도 공격했을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폰투스의 네오케사리아나 이집트의 옥시링쿠스 같은 도시들도 타격을 받았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도시와 시골을 동시에 돌았다. 그것은 〈도시와 마을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고, 사람이 남아 있는 곳은 어디든 파괴했다.〉 키프리아누스 페스트는 제국 단위의 사건이었다."(260-2)


"제국의 운명은 260년대에 저조기를 맞이했다. 인구도 바닥을 쳤다. 복구 작업은 훨씬 느려졌다. 키프리아누스 역병과 광범위한 위기로 방향을 잃었다. 평화에 익숙하던 내륙 지역은 잔인하게 침범당했다. 오래 이어져 내려온 사회의 지배계층이 무너졌다. 서로마 제국 전체에서 농촌의 거주지 유형에 균열이 생겼다. 생활이 돌아왔으나 서서히, 더 조심스럽고 다른 리듬으로 돌아왔다. 도시는 결코 예전과 같아지지 않았다. 가장 건강했던 고대 후기의 도시들조차 이전보다 규모가 더 작아졌고, 복구된 후에도 전체적으로 주요 도시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병사들을 쉽게 모집할 수 있던 옛날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고대 후기의 국정 운영 기술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복구 작업은 또 다른 반세기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국의 통합과 경제 부흥을 위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균형을 찾은 내부 어딘가에는 각기 제국의 절반을 이루는 동방과 서방을 분열시킬 씨앗이 숨어 있었다."(297-8)


5장 | 운명의 수레바퀴 299 


"제국이 겪어온 팬데믹과 요동치는 기후 변동에 비하면 4세기의 기간은 막간의 평화였다. 환경의 역할은 미묘했으나 사소하지는 않았다. 기후는 더 따뜻해졌다. 많은 지역에서 새로운 성장이 싹튼 것은 따뜻한 기후의 햇살 덕분이었다. 그러나 로마 기후최적기의 나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기후는 이제 전혀 신뢰할 수 없는 협력자였다." "4세기에 환경의 변화가 일으킨 진정한 충격은 동방에서 감지되었다. 이 시기에 제국의 기후를 좌우하던 대서양 체제로 인해 유라시아 스텝 지대에 극심한 건조기후가 도래했다. 중앙아시아로부터 대규모 이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 결정적 시기에 유독 국가와 사회 내부에서 일어난 드라마에 대해서 알고 싶지만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새롭게 주목할 부분은 로마 제국의 사건들에서 갑자기 스텝 지대의 민족들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훈족들이 스텝 지대의 서쪽 경계선에 도착하면서 1세기 이상 고트족이 유지하던 질서를 뒤엎어 버렸다."(305-6)


"제국이 부흥하는 동안 물리적 기후는 온난했으나 변동이 심했다. 이러한 양상은 4세기의 생물학적 역사에 반영되었다. 후기 로마 사회는 팬데믹이 잠잠한 시기에도 여전히 높은 사망률의 압박으로 신음했다. 제국 초기의 질병 생태계는 지속되었다. 제국은 여전히 도시화로 밀집된 상태였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결과 고대 후기의 보건 상태는 암담했다. 로마인들은 여전히 수명이 짧았다." "그러나 길었던 4세기의 특징은 큰 재앙과도 같은 사망 사건이 부재했다는 것이다. 디오니시오스 스타타코풀로스는 철저한 출처를 근거로 한 목록에서, 4세기에는 열네 건의 전염병을, 5세기에는 열여덟 건의 전염병 발병을 확인했다. 총 횟수는 초기 제국에서 인식할 수 있는 건수보다 오히려 더 많다. 그러나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역병의 사망률에 대한 일반적 배경보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정보가 조금 더 많을 뿐이다. 정말로 놀라운 사실은 여러 지역으로 연결되는 사망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323-4)


"몬순은 아시아의 남쪽 절반을 적시지만, 티벳 고원의 북쪽 땅은 건조한 대륙성 기후였다. 중앙아시아 내륙의 기후는 대서양 기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중위도를 궤도로 부는 폭풍인 서풍에 좌우되었다. 북대서양 진동이 양의 값일 때는 제트기류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중앙아시아는 건조해진다. 북대서양 진동이 음의 값일 때, 폭풍의 궤도는 적도 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초원 전역에 비가 쏟아진다. 북대서양 진동이 양의 값이 지배적이던 중세 기후 이상(서기 1000~1350) 기간에 아시아의 내륙 지역은 지독하게 건조했다. 고기후의 대리증거물 가운데 해상도가 가장 높은 것은 티벳 고원의 둘란-울란에서 발견되는 노간주나무들이다. 이 나무들은 대륙성 기후와 몬순 기후의 영향이 섞이는 남쪽 끝에 서식한다. 그러나 4세기의 징후들이 포착되었다. 에드 쿡이 증명했듯이 그 무렵은 엄청난 가뭄의 시기였다. 서기 350년에서 370년까지는 지난 2천 년 동안 최악의 가뭄이 지속된 20년이었다."(355-6)


"훈족은 말을 타고 무장한 기후 난민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방식 덕분에 놀랄 만한 속도로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우리는 4세기에 훈족이 사회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내적 논리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 기후 변동이 하나의 민족이나 혹은 여러 민족의 연합체가 국가를 형성하는 결정적 시기와 맞물렸던 것이 분명하다. 오직 기후 하나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고, 대초원족이 위협의 방향을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바꾼 것도 한 요인이었다. 기후의 작용과 함께 유목민들의 공격적이고 복잡한 연합이 융성했고 새로워졌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4세기 중반에 대초원의 무게 중심이 알타이 지역(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국경)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서기 370년 무렵, 훈족은 볼가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서부 초원지대에 이들이 나타난 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376년, 훈족을 피해 다뉴브강 일대에서 탈출한 고트족 무리가 망명지를 찾아 로마의 국경선 안으로 들어왔다."(356-8)


"훈족 군대가 알프스 산맥을 넘어 헝가리 평야로 퇴각한 것은 역사 속에서 그 이유가 가장 궁금한 사건에 속한다. 아틸라는 매우 계산이 치밀한 사람이었다. 〈엄청난 흉포함 아래 교묘한 영리함이 숨어 있었다.〉 침략자들을 격퇴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재앙: 기근과 모종의 질병' 덕분이라는 관점이 있다. 퇴각은 사실상 침략자들과 토착 질병 생태계가 충돌했을 때 예측 가능한 생물학적 결과였다. 제국의 중심부는 세균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 경우에 이탈리아를 구하고도 찬양받지 못한 구원자는 아마도 말라리아였을 것이다. 모기가 번식하여 치명적인 원생동물을 전파하는 저지대 습지에서, 말들을 놓아먹이는 훈족은 말라리아의 손쉬운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대체로, 훈족의 왕이 자신의 기마부대를 다뉴브강 건너 고지대의 초원으로 후퇴하도록 결정한 것은 현명한 것이었다. 훈족은 대초원으로 돌아갔지만, 중앙행정부에서 뿌리가 뽑힌 제국의 고대 구조는 서방에서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364-5)


6장 | 분노의 포도 착즙기 369 


"페르시아와의 적대적 관계가 되살아나면서 제국의 힘이 분열되었다. 540년 봄에는 후스로 1세가 로마 제국을 기습했다. 샤푸르 1세가 3세기 중반의 위기에 감행한 공격 이후 가장 맹렬한 페르시아의 침공이었다." "서기 541년에 페스트가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인 펠루시움에서 발생했다 다음 해 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수도에 입성했다. 엄청난 파열이 시작된 분기점이었다. 대역병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다른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의 문을 열었다. 이때부터 23년 동안 그의 통치는 역병의 그늘 속에서 위태롭게 굴러갔다. 제국은 강건한 군대를 전투에 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세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랐다. 새로운 어둠이 황제에게 드리워졌다. 그 자신이 부보닉 페스트에 걸렸다가 살아났다. 충격적인 반전의 시대였다. 〈나는 신의 뜻이 왜 그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나 장소의 운명을 높이시고, 그러다가 그들을 내던져 파괴한다.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383-4)


"아시아의 고지대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괴물 같은 세균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국의 생태계는 팬데믹을 기다리는 사회적 기반을 구축했다. 실크 교역은 치명적인 꾸러미를 운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불꽃이 번진 마지막 접점은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였다. 536년은 '여름이 없던 해'로 알려져 있다. 이전의 3천 년 동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화산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첫 격변이었다. 540~541년에 다시 화산이 폭발하는 겨울이 왔다. 530년대와 540년대는 후기 홀로세에서 가장 추웠던 수십 년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 시절에는 수천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혹한에 지구 전역이 시달렸다." "530년대와 540년대의 급격한 추위는 예르시아 페스티스가 결코 생각지 못했던 지리적 가능성을 열어주었을 수도 있다. 덥지 않은 여름으로 인해 따뜻한 남쪽 통로로 건너갈 수 있는 문이 열렸을 것이다. 향신료 해안의 평균 기온은 페스트의 주기가 용인할 수 있는 역치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405-8)


"콘스탄티노플에서 발생한 첫 번째 페스트는 넉 달 동안 지속되었다. 50~60퍼센트에 달하는 사망률로 인해 사회 질서는 무너졌다. 모든 일이 멈췄다. 소매시장은 문을 닫았고, 기이한 형태의 식량 부족이 뒤따랐다. 〈모든 물자가 풍부한 가운데 도시에는 기근이 돌았다.〉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된 것처럼 멈춰 섰고, 따라서 식량 공급도 그쳤다. ······ 식량이 시장에서 사라졌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었다. 두려움이 거리를 뒤덮었다. 〈이름이 적혀 있는 꼬리표를 목이나 팔에 걸지 않고는 아무도 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궁정은 굴복했다. 대신들 무리도 단지 몇몇 하인만 남았을 뿐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자신도 페스트에 걸렸다. 그는 운 좋게도 감염에서 살아남은 1/5 중 하나였다. 국가 기구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인 경험을 요약하자면, [콘스탄티노플에서] 클리미스를 입은 사람을 전혀 볼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리미스는 제국 질서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한 의복이었다."(419-21)


"누구든 페스트의 마수에서 벗어나면 뉴스거리가 되었다. 사막에 거주하는 무어인, 터키인 그리고 아랍인들은 전 세계적 재앙에서 배제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번진 페스트를 묘사한 시에서는, 로마인들은 병에 걸려 전멸했으나 '원한에 찬 부족들은' 살아남았다고 강조한다. 터키인들은 〈처음부터 그 시기에 감염병이 유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며 자랑했다. 그리고 역병이 아라비아의 중심부를 그냥 지나간다는 통념이 늘 있었다. 〈메카도 메디나도 근동의 다른 곳에서 발생한 역병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7세기의 유명한 성 캐서린 수도원 원장인 시나이의 아나스타시우스는 신앙이 없는 이들이 거주하는 '건조한 사막' 지역은 '결코 페스트를 경험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다. 무어인들, 터키인들 그리고 아라비아의 중심부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유목 생활을 공유했다. 생태학적 설명은 자명하다. 정주하지 않는 사회 유형이 쥐-벼룩-페스트의 치명적 결합을 막는 방어 기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428-9)


7장 | 심판의 날 453 


"역사적 변화는 갑작스럽지도 않고 말끔하지도 않았다. 역병과 빙하기라는 두 재앙은 로마 제국을 한 방에 깨끗이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심지어 씁쓸한 최후의 순간까지 국가의 지렛대를 움켜잡고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정권 역시 붕괴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환경이 파괴되면서 제국은 활기를 잃었다. 결국 해체로 향하는 힘이 우세해졌다. 자선가 요한의 생애 중 몇 년에 걸쳐서,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의 어느 기간에 제국은 한계점을 넘어섰다. 제국의 여러 지역은 충격적인 대규모 사망과 기후 변화에 나름의 리듬으로 반응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지역도 있었고, 오랜 시간 변화의 바람을 견딘 지역도 있었다. 제국의 체제 자체가 생태적, 경제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 광범위하게 연결된 조직망 체제였기 때문에, 나머지 지역의 활기에 의지할 수 있었다. 마치 우뚝 솟은 참나무가 시들어가는 뿌리에서 마지막 영양분을 끌어모으듯이,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죽어갔다. 그러고 나서야 외부의 빠른 일격에 쓰러졌다."(479-80)


"갈리아에서는 로마 이후의 세계가 루아르강을 따라 남북으로 나뉘었다. 북쪽에서는 로마의 질서가 빠르게 변형되었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의 몇 세대 동안 경제에서 주화가 거의 사라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남쪽에서는 여전히 지중해를 중심으로 생활이 흘러갔다. 도시의 구조는 6세기에 들어서도 유지되었다. 비록 새로 지어지지는 않았으나, 빌라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거주했다. 동방의 무역상과 물건들이 갈리아의 해변을 드나들었다. 6세기 중반에, 역병의 첫 번째 파도가 지중해에서 대서양까지를 휩쓸었다. 로마 도시의 마지막 보루에 속했던 아를 같은 곳이 완전히 사라졌다. 연결망의 마지막 전초기지인 마르세유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존속되었다. 페스트가 반복해서 재발하면서 갈리아의 남쪽은 크게 영향을 받았고, 고립되어 있던 북쪽은 재발은 막을 수 있었다. 프랑크족이 통치하던 북쪽은 중세적 질서가 싹트고 있었다. 잠복해 있던 페스트에 시달리지 않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명이 자라기 시작했다."(482-3)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것은 단지 쇠퇴가 아니라 붕괴와 재조직이었다. 한때 어디에서나 통용되던 주화가 비잔티움의 전초기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사라져버렸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소박한 생활용품들이 서서히 눈에 띄지 않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치 형태였던 로마의 계층구조는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양극단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귀족들의 엄청난 부는 증발했고, 중간층은 재생되지 못했으며, 이제는 번창하지 않은 세상에서 의외로 기독교 교회가 가장 부유한 상속자로 남았다. 완전히 새로운 정착의 논리가 풍경을 지배했다. 환경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야만인들의 약탈에 노출된 비옥한 저지대가 버려졌다. 마을은 언덕 꼭대기로 물러났다. 전쟁, 역병, 그리고 기후 변화가 연합하여 꾸민 음모로 인해 천년의 물질적 진보가 뒤집혔고, 이탈리아를 경제적 혹은 정치적 기량보다 성자들의 뼈가 훨씬 더 중요한 중세 초기의 후미진 곳으로 바꿔놓았다."(485-6)


"인구통계학적 측면에서 인구가 많을수록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많은 인구의 압력은 한정된 시골 지역으로 사람들이 몰려가서 자원을 황폐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인구자원이 풍부해지면 거의 언제나 국가는 호황을 누린다. 국가는 일회용 신체들을 공급받으며 지탱한다. 6세기 초까지만 해도 로마 군대는 어렵지 않게 신병을 보충했다. 세습 입대와 자발적 입영만으로도 충분히 인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페스트 시대에 들어서면서 인구통계 상의 출혈은 로마의 국정 운영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은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혔다. 제국의 지리적 여건이 요구하는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고, 파견할 군대를 소집해도 비용을 지불할 수 없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부터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맞이한 마지막 재앙 사이의 기간에 이러한 드라마가 전개되는 동안, 사건들이 일어난 순서는 우발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구조의 역학이 결정했다."(500-1)


"6세기의 공포는 교회의 조직적 반응을 낳았다. 역병을 막기 위한 예배형식의 탄원, 대규모 공동 의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탄원은 광범위한 종교적 언어인 코이네(표준 그리스어)에서 그저 눈에 띄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고, 종말론적 두려움 속에서 공동체 행사인 대속 의례로 역병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임박한 심판은 회개를 요구했다. 역병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고대 후기의 정신에서 탐욕보다 더 무거운 죄는 없었다. 피터 브라운이 증명한 것처럼, 부에 대한 불안은 고대 후기의 기독교에서 도덕적 위기를 끊임없이 생성했다. 세속적 소유는 신앙에 대한 시험이었다. 여기서 역병은 연약한 신경을 공격했다. 에페수스의 요한이 기록한 역병의 역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산문은 탐욕 때문에 처벌을 받게 된 개인들을 지목하는 내용으로 길게 채워졌다. 어떤 각도에서 보면, 역병은 물질적인 것을 꽉 쥐고 있는 우리 손아귀의 힘을 빼고자 하는 신의 마지막 끔찍한 시도였다."(511-2)


에필로그 : 인류의 승리? 528


"역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명 중 하나를 만들고 해체하는 일에 환경이 일정 부분을 담당했음을 여러 방식으로 알 수 있다. 로마는 거의 필연적으로 거울이자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의 사례를 사라진 문명에서 얻는 교훈으로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로마의 경험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의 일부로서 중요하다. 돌이킬 수 없게 잃어버린 고대 세계의 마지막 장면으로 규정하기보다는, 로마인과 자연의 충돌을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새로운 드라마의 오프닝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잎이 나오기도 전에 개화한 지구는, 통제하고 있다는 지속적인 망상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복수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 낯설지 않은 느낌일 것이다. 이 문명의 운명을 좌우할 자연환경의 막강한 힘을 생각하면, 우리는 로마인들에게 공감하며 다가갈 수밖에 없다. 고대의 인상적 광경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펼쳐질 그 다음 장면에 환호하기 위해 모여 있는 그들에게."(5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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