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빵과 서커스 - 2,000년을 견뎌낸 로마 유산의 증언
나카가와 요시타카 지음, 임해성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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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로마제국이 남긴 유산들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신체에 깃든다(Anima Sana In Corpore Sano)”라는 어록으로 유명한 로마의 시인 유웨날리스(Decimus Iunius Iuvenalis, 60~130)는 이렇게 탄식했다. “시민들은 로마가 제정이 되면서 투표권이 사라지자 국정에 대한 관심을 잃었다. 과거에는 정치와 군사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의 원천이었던 시민들이 이제는 오매불망 오직 두 가지만 기다린다. 빵과 서커스를.” 그는 포식과 오락만을 추구하는 로마의 쇠퇴가 멀지 않았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작성된 시점을 기원후 100년경으로 산정하더라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까지 무려 376년간이나 대제국은 유지됐다. 그러나 확실히 포식과 오락에 빠진 사람들은 힘들고 귀찮은 일을 싫어하게 된다. 로마는 이런 문제들에 나름대로 대처하면서 370여 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종류의 문제를 고대 로마제국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 책을 쓴 목적 중 하나다. 15)


제2장 도시의 완성, 장벽과 상하수도


로마인들에게는 상수원에 대한 일종의 ‘샘 신앙’이 있었다. 상수원은 아무리 멀더라도 반드시 샘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물을 햇볕과 비에 노출되지 않고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터널과 다리로 도시 성벽까지 끌어온 뒤 도시 안에서는 연관 등을 이용해 지하로 물을 흘려보내 최종적으로 저수조나 음수대까지 공급했다. 로마에는 기원전 312년 아피아(Appia) 수도를 비롯한 11개의 간선 수도가 226년까지 순차적으로 계속 만들어졌다. 합치면 길이만 504킬로미터였다. 기원전 140년 완공됐고 가장 길었던 마르키아(Marcia) 수도는 91킬로미터나 된다. 2,100년 전의 91킬로미터는 굉장히 먼 거리다. 그런데 그중에 터널이 80킬로미터였고 교량은 10킬로미터였다. 그 엄청난 난공사를 불과 5년 만에 해냈다. 시멘트 발명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 대단한 것은 카르타고의 수도인데,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수도교 등으로 132킬로미터나 끌어왔다. 고도의 건설 기술이 없으면 실현시킬 수 없는 일이었다. 30-1)


고대 로마의 상수도 시스템은 상수원인 샘이나 댐에서 취수한 깨끗한 물을 산에는 터널을 뚫고 얕은 계곡에는 수도교를 놓고 깊은 계곡에는 역(逆) 사이펀(siphon, 연통관)을 설치해 도시의 성벽까지 옮겼다. 펌프를 사용할 수 없었으므로 수원지에서 도시의 간선 수도 말단까지는 내리막 기울기로 시공하지 않으면 안 됐다. 클라우디아(Claudia) 수도교처럼 길이가 14킬로미터나 되는 수도교가 건설된 것도 이 때문이다. 로마 시의 간선 수도는 기원전 312년부터 기원후 226년 사이에 지어졌다. 11개의 수도 중 율리아(Julia) 수도는 아그리파(Agrippa) 욕장에, 알시에티나 수도는 아우구스투스 모의 해전장에, 트라야나(Traiana) 수도는 트라야누스 모의 해전장과 욕장에, 안토니니아나(Antoniniana) 수도는 카라칼라(Caracalla) 욕장에 물을 공급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1개 중 4개의 수도가 오락과 휴식 시설에 사용됐으며, 이 목적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던 것이다. 또한 11개 수도 중 8개 수도의 상수원이 샘물이다. 33)


급수관로는 기원전 1세기경 위트루위우스(Vitruvius, 비트루비우스, 기원전 80?~?)의 《건축십서(De Achitectura)》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납관은 납중독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위험시됐으나, 기원후 1세기 말 프론티누스의 《로마 수도론》이 출간된 시기에는 납관이 많이 사용됐다. 납중독 문제를 방출구를 통해 물을 흘려보내는 유수방식으로 해결한 것이었다. 납관은 납을 녹여 납작하게 한 뒤 둥그렇게 구부린 납판자를 접합해 사용했다. 수도관을 목재로 만들면 훨씬 편했겠지만 내구성 때문에 배제됐다. 그런데 납관을 사용한 이유가 비단 내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용접한 납관을 사용하면 내부 유수에 압력을 가해서 높은 곳에 급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우물에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그래서 고대 로마인들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납관을 선택한 것이다. 납관보다 뛰어난 주철관이 출현한 때는 주철이 대포에 사용된 14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41-2)


그렇다면 성곽 도시 로마의 하수도는 위생적인 관점에서 어땠을까? 고대 로마에서는 그보다 앞선 시기의 에게(Aege) 문명에서처럼 수세식 변기를 사용했다. 풍부한 상수도의 잉여수를 활용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로마에서 수세식 변기나 하수도를 이용하지 않고 분뇨를 말 등에 실어 성벽 밖의 밭에 내다 버리는 방식이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인간이 배출하는 하루 분뇨량은 1킬로그램 정도로 알려져 있다. 100만의 로마 시민들의 분뇨를 말 등에 실어 짐(100킬로그램으로 가정)으로 운반한다면 1일 1만 마리의 운반용 말이 필요하다. 결코 위생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광경이다. 수세식 변기에서 지하의 암거(暗渠)를 통해 한 번에 티베리스 강으로 방출해버리면 위생적이기도 하고 혼잡한 로마 시내의 교통 완화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다만 티베리스 강의 오염 수준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하수도 시스템은 중세 유럽에 비해 콜레라의 발생 빈도가 현저히 낮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32)


클로아카는 돌과 벽돌을 아치 형태로 쌓은 하수용 암거를 말한다. 정화의 여신 클로아카가 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클로아카 막시마는 대하수도, 거대한 하수도라는 뜻이다. 로마의 하수도는 수많은 지선을 갖고 있으며 공공 욕장, 공공 화장실, 기타 공용 시설, 개인 주택 등의 폐수와 빗물을 티베리스 강으로 방류했다. 개인 주택의 폐수는 도로를 따라 건설된 지하 배수로에 투입돼 클로아카로 흘러들었다. 이 시대에는 상·하수도 모두 자연 유하 방식이었으므로 2층 이상에는 수도가 연결되지 않았고, 식수 등은 단지 등의 용기를 이용해 담아 옮겼다. 위층에서 사용한 폐수와 분뇨는 항아리 등을 이용해 지하 배수로에 투입했다. 따라서 고층 집합 주택 인술라(insula)는 1층이 조건이 좋아 임대료가 높았다. 반대로 고층으로 올라가면 상·하수도도 없고 방화도 여의치 않아 임대료가 저렴했다. 하지만 법으로 금지했는데도 불구하고 고층 주택에서는 사용한 폐수와 분뇨 등을 창밖으로 투기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49-50)


제3장 모든 길을 통하게 만든 로마 가도


엄밀히 말하면 도로 시스템이 고대 로마인들의 발명품은 아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Darius I, 재위 기원전 522~486)와 중국의 진시황(始皇帝), 즉 진나라 시황제(秦始皇, 재위 기원전 246~210)는 이미 훌륭한 도로 시스템을 구축한 바 있다. 기원전 550년~330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es) 제국 최전성기의 왕 다리우스 1세는 수도 수사(Susa)에서 에게 해와 가까운 사르디스(Sardis)를 연결하는 총길이 2,500킬로미터에 폭 약 6미터의 이른바 ‘왕의 길’을 만들었다. 이 왕의 길이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 즉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와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을 가능케 했다. 이와 비슷하게 진시황도 도로 시스템을 만든 바 있다. 진·한 시대의 황제 전용 도로 치도(馳道) 정비와 수레 및 마차 바퀴 폭을 통일한 동궤(同軌)가 그것이다. 진시황이 정비한 도로망은 총길이 1만 2,000킬로미터에 이른다. 치도의 주된 목적은 통일 과정에서 멸망시킨 여섯 나라 귀족층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58-9)


고대 로마의 도로 시스템은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에서 시작된다. 로마 제1호 수도인 아피아 수도가 만들어진 때와 같은 해에 아피아 가도도 완공됐다. 로마 시와 브린디시움(Brundisium, 브린디시)을 연결하는 도로였고 오늘날의 이탈리아 7번 국도다. 참고로 1번 국도는 로마 시와 제노바를 연결하는 아우렐리아(Aurelia) 가도가 근간이 됐다. 아피아 가도의 건설 목적은 군사 병참 보급로의 복선화였다. 견고한 로마 가도를 만들기 위한 설계 지침이 위트루위우스의 《건축십서》에 기록돼 있다. 표층을 석판 등으로 마무리한 5층의 적층 구조로 두께는 약 1.5미터였다. 이는 현대의 도로 국제 규격과 거의 다르지 않다. 더욱이 기원전 451년~450년에 제정된 ‘십이표법(lex duodecim tabularum)’에 따르면 도로 폭도 2.4미터(곡선 구간은 4.8미터)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도로 양측의 토지 소유자가 해당 구간의 도로를 관리하라는 조항도 있었다. 이렇게 제국의 곳곳에 연결된 로마 가도는 통일되고 규격화돼 있었다. 66-8)


15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로마 가도는 신속한 군사 행동과 정보 전달을 가능케 하고, 넓은 영토를 소수의 군단병으로 지켜내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다시 말해 보다 적은 세금으로도 효율적인 영토 방위가 가능했다. 나아가 교역과 여행도 활발하게 만들었다. 이는 제국 내에 산재된 도시(군단 기지 및 식민 도시)가 중앙의 뜻을 받들어 도로 시스템을 완비한 덕분이다. 그러나 제국 말기 중앙 권위가 속주에 미치지 못하게 되자 게르만족과 같은 이민족 침략과 이동이 빈번해졌다. 침략이든 이동이든 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경무장이 아니라 중병기로 무장한 채 식솔들을 이끌고 가재도구까지 챙겨서 벌이는 이동이었다. 그러자면 짐마차 등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차 등으로 이동할 때는 정비되지 않은 비포장도로에서는 고생이 막심하다. 그래서 잘 정비된 포장 도로망이 게르만족의 이동에 이용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로마 가도는 로마제국의 번영을 가속화한 동시에 쇠망도 가속화시킨 양면성을 띠었다. 74)


제4장 빵과 서커스 ①: 식량과 바닷길


당연한 말이지만 군단병이 건재하지 않으면 로마의 패권은 성립할 수 없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영토를 대폭 확대했고 지중해를 내해로 삼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승리가 군단병의 생활에 큰 문제를 일으켰다. 로마군의 주력 전력은 소수의 대토지 소유자인 귀족이 아니라 절대 다수의 자작농이었다. 포에니 전쟁은 결과적으로 자작농들에게 가혹한 운명을 초래했다. 첫째,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오랫동안 싸워야 했다. 그 결과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진 농지가 황폐화됐다. 둘째,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획득한 시킬리아(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값싼 곡물이 대량으로 유입됐다. 셋째, 정복전에서 얻은 노예를 이용한 귀족들의 대농장이 확대됐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밀 가격은 폭락했다. 가격 폭락에 대응할 수 없는 중소 자작농들은 계속해서 몰락했다. 결국 이들은 토지를 버리고 로마 시로 몰려들었다. 이는 로마군의 질적 저하를 야기했다. 76)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33년 호민관(tribunus)이 되어 대토지 소유제 라티푼디움(Latifundium)을 제한하고 몰락한 자작농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하고자 했다. 그가 주창한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의 주요 내용은 국유지 점유를 인당 500유게라(125헥타르 이하), 전체 점유지 면적을 1,000유게라 이하로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임차지의 상속권은 인정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권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23년 호민관에 당선돼 곡물법을 시행하면서 빈민 구제를 꾀했다. 그라쿠스가 제출한 법안은 국가가 일정 물량의 밀을 사들여 시가의 약 절반, 즉 로마 시민에게는 한 달에 5모디우스(modius, 1모디우스는 약 7킬로그램)까지 1모디우스당 동화 6아스(as)에 배급한다는 것이었다. 대상은 모든 로마 시민이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정책은 훗날 포퓰리즘의 효시가 된다. 이들은 곡물의 안정적인 수급이 국가 발전의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77)


이 곡물법은 가이우스의 사후에도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폐기되지 않고 이어졌다. 이른바 '빵과 서커스'의 시작이었다. 고대 로마의 위정자들은 로마군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고 식량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무척 열심이었다. 215년경 로마의 군사비 비중은 74퍼센트로 매우 높다. 참고로 2016년 기준 한국의 국방비는 38.8조 원인데, 세출이 356.2조 원이므로 국방비 비중은 10.9퍼센트다. 이와 비교해보면 고대 로마의 군사비 비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속주의 시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10퍼센트의 저율이라서 세수가 적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식량 부족에 따른 반란이 일어나면 ‘군대 출동―군사비 증대―증세―불평불만에 의한 반란’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위정자들은 이런 악순환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래서 시민들에게 식량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데 온 신경을 쓴 것이다. 항만 시설 건설과 유지 관리, 선박 확보, 해적 소탕 등의 모든 노력을 다했다. 81)


로마 시의 외항 오스티아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티베리스 강 하구에 건설됐다. 그때까지는 네아폴리스 근교의 푸테올리가 주항이었고, 푸테올리로부터 로마까지는 연안 항로를 이용해 운반했다. 그러다가 제국이 커지고 수도 로마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직접 로마 시로 물품을 반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 시대에는 계절풍을 이용한 범선을 이용했으므로 수확이 끝난 밀을 실은 배가 초여름에 아프리카의 남풍을 타고 이탈리아 반도로 향했다. 그런 뒤 7월~8월에 북풍을 타고 아프리카 등지로 귀항했다. 11월부터 3월의 겨울 동안 지중해는 바람과 비의 계절이다. 나침반도 없던 시대에 비가 시야를 가리면 항해는 매우 위험해진다. 이런 이유로 선주는 연안의 단거리 항해는 몰라도 장거리는 원치 않았다. 어느 경우든 간에 원양 항해가 힘들던 시대였다. 따라서 오스티아, 푸테올리, 카르타고 등의 주요 항구는 외항선이 배를 댈 수 있는 대수심 암벽 그리고 많은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정박지가 필요했다. 82)


오스티아 항은 하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티베리스 강의 퇴적토로 메워지고 있었다. 41년 심각한 기근이 로마 시를 덮치고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시민들에게 위협을 받는 사태에 이른 뒤 그는 신항 건설을 결의한다. 오스티아에서 북서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해안을 조성하고 항구를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이곳이 클라우디우스 항구다. 클라우디우스는 우선 바다 쪽으로는 제방을 쌓고 티베리스 강의 오른쪽 연안을 깎아서 새로운 항구와 연결되도록 운하를 건설했다. 80헥타르의 정박 수역을 굴착한 다음 길이 2,300미터에 너비 1,100미터로 300척의 화물선이 한 줄로 정박할 수 있는 규모의 부두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이집트로부터 오벨리스크(obelisk)를 운반하던 대형 선박에 콘크리트를 채워 바다에 가라앉힌 뒤 그 위에 높이 60미터의 등대용 방파제를 만들었다. 이 운하는 50년 뒤인 106년 트라야누스 황제가 개조해 트라야누스 운하로 불리게 된다. 83)


제5장 빵과 서커스 ②: 오락과 휴식


고대 로마인들은 유독 목욕을 좋아했다. 수도 로마에는 대형 종합 레저 센터 격인 대형 공공 욕장이 11곳, 소형 공공 욕장이 900곳 있었다. 대형 욕장이 수도에만 있었느냐 하면 브리탄니아의 공공 숙소와 같은 로마 가도상의 숙박 시설에조차도 80제곱미터 규모의 대형 욕장을 갖추고 있었다. 질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모두가 수도 로마와 같은 수준이었다. 공공 욕장의 목욕 요금은 25아스(현재 한화 기준 약 250원)로 매우 저렴했다. 서민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관리비도 안 되는 수준으로 요금을 책정한 것이다. 황제나 귀족은 물론이고 시민들 나아가 노예들도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욕장의 영업 개시 시간은 오전 일과가 모두 끝난 오후 2시경이었다. 저녁 7시 또는 8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단돈 25아스로 하루의 마무리를 즐길 수 있었다는 얘기다. 25아스로 공공 욕장의 유지·관리비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부족분은 국가가 부담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시민들의 불평불만을 막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본 것이다. 89-90)


욕장의 부속 시설로는 우선 운동 시설로 ‘그시스툼(xystum)’이라 부른 150미터×30미터 정도 규모의 경기장이 있었다. 100미터 경주를 할 수 있을 만큼의 크기다. 또한 90미터×20미터 규모의 구기장 ‘스파이리스테리움(sphaeristerium)’과 체조나 레슬링 등을 즐길 수 있는 50미터×25미터 크기의 체육관 ‘팔레스트라(palestra)’도 두 곳씩 마련돼 있어 목욕 전에 운동을 통해 땀을 낼 수 있었다. 강당이나 교실로 추정되는 시설도 각각 두 군데에 있어서 교육 문화 활동도 이뤄졌다. 38미터×22미터 공간의 도서관도 있었는데 2개의 방으로 나뉘어 그리스어와 라틴어 서적이 소장돼 있었다. 목욕 후 산책 및 담소 공간으로 외측 구조물과 내부 욕장 사이 100미터×300미터 크기의 대광장에 포르티쿠스(porticus, 주랑)와 조경수를 심고 곳곳에 벤치가 설치됐다. 이런 시설이 가까이 있다면 매일이라도 가고 싶을 것이다. 더군다나 무료에 가까운 요금이지 않은가. 공공 욕장은 로마 시민들이 향락에 빠지게 된 원흉으로 자주 거론된다. 91-2)


로마에 현존하는 마르켈루스 극장의 수용 인원은 1만 5,000명이다. 역대 최대급인 에페수스의 원형 극장은 수용 인원 2만 4,000명으로 엄청나게 크다. 위트루위우스의 《건축십서》에서 당시의 음향에 관해 설명한 대목이 나온다. “목소리도 이처럼 원 모양으로 움직이는데, 물에서 원은 수평으로만 움직이는 데 비해 목소리는 옆으로 퍼져나가는 동시에 높은 쪽으로도 계단식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물결 모양의 객석으로 건설하면 같은 목소리라도 제1파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을 경우 제2파나 그 후속파도 흩어짐 없이 맨 아래 사람의 귀와 맨 위 사람의 귀에 도달한다.” 공명 원리를 응용해 좌석 밑에 무대를 향해 청동제 항아리를 설치했다. 소형 극장에서는 화음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 관람석인 ‘카베아(cavea)’ 중앙에 한 줄로 13개의 항아리를 묻었다. 대형 극장에서는 관람석을 상하 3단으로 나눠 각각 13개의 항아리를 묻었다. 이것들이 공명기의 역할을 수행했다. 마르켈루스 극장에는 40개 이상의 공명기가 있었다. 98-9)


콜로세움의 구조는 반원 2개가 마주보는 듯한 타원형이다. 그리스의 극장에서 보듯이 경사진 지형을 이용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지에 건설됐고 아치나 반원통 모양의 벽으로 관객석을 지탱했다. 1층은 도리스 양식, 2층은 이오니아 양식이며, 콜로세움의 3층은 코린트 양식이다. 수용할 수 있는 관중은 5만 명~7만 5,000명으로 추정된다. 1층~3층은 각각 80개의 아치가 있고 그중 장식문이 4개다. ‘포트 프리움팔리스(Port Triumphalis)’라고 부른 북서쪽 문은 검투사들이 입장하는 문이다. 남동쪽 문은 죽은 자가 나가는 ‘포트 리비티넨시스(Port Libitinensis)’다. 죽음의 여신의 문이다. 패자가 이 문으로 실려 나갔다. 동북 방향은 황제 및 가족용 통로, 남서쪽은 원로원 의원 등 귀빈 통로였다. 4개의 장식문 외에 76개의 아치는 1~76의 번호가 새겨져 있다. 5만 여명의 관중이 입장할 때 혼잡을 피하려고 입장권에 적힌 번호의 아치로부터 안으로 들어갔고, 그에 맞추어 좌석으로 연결되는 승강 계단도 배치됐다. 124)


콜로세움은 평면적으로 바깥지름 188미터×156미터, 안지름 76미터× 44미터의 타원형이며, 높이는 48.5미터다. 내부의 76미터× 44미터 공간은 검투사가 경기를 한 장소로, 경기장 바닥에는 모래가 깔렸고 피로 더러워지면 교체됐다. 이 모래밭을 ‘아레나(arena)’라고 불렀는데 이후 원형 경기장을 일컫는 단어가 된다. 1층 부분의 폭은 56미터다. 맹수 등의 공격을 막기 위해 아레나보다 3.6미터 높은 위치에서부터 관중석이 시작되며 약 37도의 경사로 배치됐다. 콜로세움 외벽은 수직이 아니라 약간 안쪽으로 기울여 원기둥 방향으로 압축력이 걸리도록 설계됐다. 현명한 설계다. 또한 외벽의 연속성을 높이기 위해 트래버틴과 트래버틴을 300톤에 달하는 철제 클램프(clamp, 고정 쇠)로 결합했다. 볼트의 콘크리트는 골재 중에서 비중이 가벼운 응회암을 사용해 경량화를 꾀했다. 설계도 놀랍지만 시공 기술은 더욱 놀랍다. 이 덕분에 지진국 이탈리아에서 2,000년 동안이나 쓰러지지 않고 버텨온 것이다. 124-5)


제6장 만신전에서 유일신전으로


현대인들에 비해 고대 로마인들은 신앙심이 매우 두터웠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이전에는 다신교라서 여러 신들이 각지에 있고 그들을 섬기는 신전을 세웠다. 기독교 국교화가 이뤄지자 기존의 신전들은 파괴됐고 가톨릭 성당이 많이 건설됐다. 또한 신앙심이 두터운 로마인들은 조상에 대한 존숭 때문에 무덤이나 분묘도 많이 만들었다. 4세기 초 로마제국 내 기독교 포교와 이교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중해 연안과 이탈리아, 발칸 반도, 소아시아를 제외하고는 기독교 포교는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밖의 지역은 토착 이교 신앙이 많았다. 이교 신앙이란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 켈트족의 드루이드(Druid), 인도의 쿠베라(Kubera), 페르시아의 미트라, 이집트의 이시스(Isis)와 같은 토착 신앙을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믿는 신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만신전인 판테온을 세워 모든 신들을 달랬다. 150)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아타나시우스파 교리가 로마 가톨릭 정통 교리가 된다. 사실상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셈이다. 이때 가정의 수호신을 포함한 종래의 다신교는 이교라고 규정된다. 1년 뒤인 381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개최해 아타나시우스파의 정통성을 강화시킨다. 아울러 비기독교 신에게 바치는 희생을 금지하고 이교의 조각상들도 우상으로 여겨 숭배를 금지했다. 또한 이교도 신전 파괴와 해당 건축 자재를 교회 건축에 전용하도록 허락하고 장려했다. 로마 건국 때부터 이어져온 웨스타의 성화가 꺼졌으며, 황제권보다 주교권이 점점 중시됐다. 391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미 380년 사실상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삼았던 것을 완전히 결정짓는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은 명실상부한 기독교 국가로 변모한다. 393년에는 올림피아 체육 제전, 즉 올림픽이 중지된다. 기원전 776년부터 이어져온 고대 올림픽이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151-2)


판테온은 만신전으로서 신들에게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25년 아그리파가 건설한 신전이었지만, 소실됐다가 120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재건됐다. 정면 기둥 위에는 아그리파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라틴어 대문자 M. AGRIPPA L. F. COS TERTIUM FECIT(“루키우스의 아들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 번째 집정관 임기에 짓다”)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다. 무근(無根, plain) 콘크리트제 돔으로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 규모의 신전이다. 연약 지반에 대한 대책으로 6미터 깊이까지 원통형 기초를 설치했다. 돔은 벽 두께를 6미터에서 1.5미터로 변화시키고 경량 콘크리트를 사용했다. 천정에는 지름 6미터의 구멍(오라클)을 설치하는 등 설계부터가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다. 그 거룩함에 매료돼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자신의 무덤을 이곳에 만들어달라 당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산타 마리아 아드 마르티레스(Santa Maria ad Martyres) 대성당으로 전용돼 약 2,000년 동안 우뚝 솟아 있다. 153-4)


제7장 시민의 교양


로마에서는 읽고 쓸 줄 아는 노예를 시켜 원본을 소리 높여 낭독하게 한 뒤 필사생들이 이를 일제히 받아쓰는 방식으로 책을 대량 복제했다. 이런 덕분에 마르쿠스 마르티알리스의 《에피그라마타(Epigrammata)》나 웨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도 몇 데나리온만 주면 구해서 읽을 수 있었다. 시민들의 독서 열기가 갈수록 뜨거워지자 필사생들의 조합도 조직됐다. 이들은 일정 노임을 받고 책을 베껴줬다. 노예 노동이 임금 노동으로 바뀌면서 책값이 다소 오르긴 했지만 기하급수적인 지식의 확대 재생산이 이뤄졌다. 2세기 말 로마 시에는 25개소의 공공 도서관이 있었고 4세기에 이르러서는 28개로 늘었다. 각 도서관에는 사서 업무를 총괄하는 도서관장으로서 국가가 임명하는 장관급 관리자를 뒀다. 지식을 정책적으로까지 육성하려는 로마인들의 ‘앎’을 향한 의지가 엿보인다. 그러나 380년 이교 배척으로 신전 파괴가 이뤄지면서 도서관도 함께 파괴된다. 기독교 이외의 것들에 대한 배척 때문이었다. 166-7)


제8장 영원할 것만 같던 제국


로마 제국 멸망의 기미가 나타난 지점부터 간략히 정리해보면, 나는 그 시발점을 313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밀라노 칙령을 반포한 시점이라고 본다. 이때 아리우스파의 추방이 결정했다. 아리우스파 신도들은 이민족의 땅으로 몸을 피해 그곳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이때부터 로마제국(아타나시우스파)과 이민족(아리우스파) 사이에 종교적 대립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후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했고 이교와 이민족 멸시 정책을 펼쳤다. 391년에는 아타나시우스파 외의 신앙을 금지시켰다. 불관용이 더욱 심화됐다. 그리고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와 평행을 이루면서 로마는 로마대로 계속해서 타락했다. 사치와 방탕이 속주 도시에까지 팽배해졌다. 로마 군단의 정규군은 어느덧 이민족 출신들이 주력이 됐다. 로마군으로 편입된 이민족들이 제국 방위의 주축 세력이 되면서 종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게르만족은 아리우스파가 대다수였다. 로마군 내의 규율 확보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 179)


호노리우스는 402년 서고트족이 침입해오자 수도를 라웬나로 천도하고 이후 그곳에만 틀어박혀 국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던 황제였다.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본토를 유린하는 동안에도 황궁이 있는 라웬나는 철저히 방어되고 있었다. 선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유지를 받들어 서로마제국 황제 호노리우스의 후견을 맡은 스틸리코는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군을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뒀다. 그가 두려워서 차마 진격을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던 알라리크군이었다. 그런데 그 스틸리코를 죽였다. 스틸리코의 처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비로마 출신 장교와 병사 대부분이 알라리크의 휘하로 들어갔다. 유능한 장군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충격적인데 그를 대신해 능력 없는 로마 장군이 군대를 이끌게 됐다. 패전은 불을 보듯 빤했다. 동요한 장교와 병사들이 너도나도 백기를 들고 투항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408년까지 브리탄니아는 서로마제국 영토였지만 스틸리코가 처형된 후 409년 알라리크군에 함락된다.  179-80)


그 뒤 마찬가지로 게르만족 출신의 장군 플라위우스 아에티우스가 426년부터 두각을 나타내면서 서고트족과 프랑크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했다. 이런 위업으로 서로마제국의 군사령관과 집정관이 된다. 그의 가장 큰 위업은 451년 훈족의 아틸라군을 상대로 카탈라우눔(Catalaunum) 전투에서 승리한 일이다. 게르만족 대이동의 원인이기도 한 훈족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당시 아틸라(Atilla, 재위 443~453) 왕 휘하 훈족의 대군은 전유럽을 유린할 수 있을 정도로 강성했지만, 이 전투의 패배로 그 기세가 꺾이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공적을 두려워한 왈렌티아누스(Valentianus, 재위 424~455)에 의해 454년 아에티우스는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때 원로원 의원 시도니우스 아폴리나리스(Sidonius Apollinaris, 430~489)가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저는 폐하의 의사나 분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폐하께서 당신의 왼손으로 당신의 오른손을 잘라낸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180)


이제 로마 군단에서 대부분의 이민족 출신들은 더 이상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됐다. 그렇게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로마 용병 오도아케르가 어린 황제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다.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단 한 번의 전투도 겪지 않고 로마군은 소멸했으며 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문화를 배우고 싶었지만 이교 탄압 등에 의해 로마 지식인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지식의 쇠퇴도 급속히 일어났다. 그 간극을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빵과 서커스’의 소비 시대가 끝나고 초기 기독교의 청빈 사상이 부각되면서 ‘소비는 악’이라는 정서가 만연했다. 소비가 없으면 공급도 없다. 제국이 몰락하자 통일된 영토는 소국(小國) 난립 상태로 변화했다. 계속되는 전란으로 삶 역시 피폐해졌다. 로마제국을 이어주던 공급망과 인프라가 기능을 멈췄다. 대항해 시대 그리고 르네상스로 피렌체나 베네치아 등의 도시 국가가 융성해질 때까지 유럽은 무려 1,000년을 기다려야 했다.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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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탄생 - 로마 공화정의 몰락
에드워드 와츠 지음, 신기섭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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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8 


1장 독재 내 자유 24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살해하여 권력을 쥔 원로원 의원들로부터 로마 세계를 구했고, 나아가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연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제기하는 위험 곧 외국에 통제될 위험을 제거함으로써 로마 세계를 구해내고 (정치적) 자유libertas를 회복했다고 여겼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지지자들 관점에서 자유란, 아우구스가 제공하는 정치적 안정이 있을 때만 이룰 수 있는, 내부적 불안정과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난 자유 상태를 뜻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자유는 또한 로마의 재산권이 여전히 유효함을 뜻했다. 이를 통해 일부 로마 주민에게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열어줬다. 그리고 날로 부패하고 국정 관리 실패에다 내전까지 유발한 원로원 엘리트들은 도시와 제국의 통제력을 빼앗겼다. 기원전 20년대의 많은 로마인들은 불안이 지속되는 한 자유는 있을 수 없다는 아우구스투스의 관점에 동의했다. 그들은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는 일인이 통제하는 정치 형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됐다."(26)


2장 새로운 세계 질서 32 


"공화국은 로마인들이 가장 갈망하는 보상을 실질적으로 독점했다. 로마 이전이나 이후 사회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재력이 중요했지만, 로마 공화정 체제에서 재력은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기원전 3세기의 로마인들은 개인의 가치를 재력보다는 개인이 맡은 관직, 쌓아온 명성 그리고 자기 선조가 이룬 성과에 필적하는지 여부 등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한 개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로마 군대와 정치 생활에서 이룬 활동의 산물이었다. 공공에 대한 봉사는 명예로 보상을 받았고, 기원전 28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화국이 이런 교환 관계의 양 측면을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공화국은 개인이 어떤 봉사를 할지 지시했고 그가 어떤 종류의 보상을 받을지도 결정했으며, 공화국이 홀로 통제하는 사회적 화폐 형태로 보상했다." "그리고 파브리키우스가 피로스에게 상기시켰듯이, 로마의 이런 독특한 형태의 화폐는 금이나 은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로마에 봉사함으로써 얻는 것이었다."(41)


"공화국이 정치적 합의 도출을 고취시키고 로마 시민이 중시하는 보상을 독점할 수 있었던 기저에는, 공화정이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속하는 정치 체제라는 공통의 이해가 있었다. 로마 공화국의 결정과 보상은 주인 한 명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로마 공동체의 정서와 결정을 반영했다. 이런 관점은 기원전 280년대에는 비교적 새로운 것이었다. 로마는 한 세기에 걸친 정치적 변천의 마지막에 막 도착한 상태였고, 역사가들은 이를 '계급 갈등'으로 부르게 된다. 계급 갈등은 파트리키particii(이하 귀족)과 플레브스plebs(이하 평민)가 정부 체제에 합의하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들이 합의한 정부 체제는 귀족들의 사회·정치적 특권을 일부 유지하면서 평민들도 최고위직에 오를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원전 280년대에 확립된 이 체제는 정치적 타협을 촉진하고 지속 가능한 합의를 구축하고 공화정의 공동 지배 체제를 유지함으로써 로마인들이 함께 누린 자유의 수호를 목표로 설계되었다."(41-2)


"평민회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급격한 개혁을 강제할 잠재력이 있었던 반면, 원로원은 로마 공화국이 취한 대부분의 정책과 법률의 출발점이었다. 대중의 권력과 원로원의 기대치는 공직자들 사이에 타협과 협력의 문화가 생기게 했고, 이는 기원전 3세기 내내 로마를 지배했다. 집정관과 호민관들은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취임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원하는 것 모두를 (또는 대다수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재임 기간의 성공 비결은 동료가 원하는 것들, 민회가 기꺼이 승인할 것들, 원로원이 재가할 것들을 재빨리 이해하는 데 달려 있었다. 그 뒤로는 제각기 제기된 의제들과 자신의 생각 사이의 균형을 맞춰 최대한 많은 집단을 만족시킬 정책과 행동 과제를 제시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모두가 어느 정도 얻는 것이 최선이었다. 정치적 갈등은 없었고 〈법률 제정으로 해소시킬 의견 차이와 대결만 있었고 법률은 상호 존중과 모두의 양보를 통해 제정됐다.〉"(46-7)


"한니발과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로마 공화국은 한해에 4개 군단만 전투에 투입했고 경제는 저개발 상태였으며 농업은 소규모 경작에 크게 의존했었다. 그리고 공화국은 스페인, 그리스, 아프리카의 정치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했다. 2차 포에니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바꿔 놨다. 이 전쟁은 로마 군인들이 지중해 전역에서 전투를 벌이게 만들었고, 이렇게 넓은 지역에서 벌인 전쟁은 로마로 하여금 다른 정치 체제와의 관계와 로마의 정부 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몰아갔다. 로마 군대는 아드리아해 동부 해변, 갈리아, 스페인, 시칠리아, 아프리카에서 작전을 전개했다. 로마 지휘관들과 원로원 의원들은 스페인 내 부족들, 그리스의 도시국가 연맹,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과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 군대 지휘 권한을 지닌 정무관의 수가 늘면서, 무장한 군단 숫자도 급격하게 증가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로마는 전쟁 승리를 위해 만들어 낸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하거나 제거할 수 없었다."(63-4)


3장 제국과 불평등 68 


"로마의 도덕이 어떤 변천을 거쳤건, 분명한 것은 2세기 전반기에 지중해를 간접 통제한 로마 체제의 실패가 공화정을 크게 변화시켰다는 사실이다. 거의 끝없이 이어진 전쟁 기간은 인구와 경제 측면에서 심대한 결과를 초래했고, 이 둘이 결합하면서 로마 정치 생활을 오래 지비해온 협력과 합의의 정치를 산산이 부수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직후의 출생 증가는 한니발과의 전쟁에서 숨진 20만 명 정도를 단순히 대체하는 정도였다. 이 때 태어난 이탈리아인들은 성인이 되자 많은 경제적 기회와 농업에서의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탈리아 인구 증가를 공화국이 보유한 땅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농촌 인구가 계속 늘면서 많은 로마 젊은이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해 새로운 출발을 결심했던 듯하다. 로마의 인구는 한니발과의 전쟁이 끝났을 때 20만 명에서 기원전 130년대 중반에는 약 50만 명 수준까지 늘었다. 늘어난 로마 인구 대부분은 이주민들이었다."(78-81)


"한니발 침공 초기에는 전쟁이 로마 공화국을 사실상 파산으로 몰아갔지만, 두 가지 사건 전개 덕분에 기원전 180년대에 이르면 로마가 거의 상시적인 전쟁 상태에 있는데도 중기적인 국가 재정이 예측 가능해졌다. 카르타고와 많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 그리고 (셀레우코스 왕국의) 안티오코스 3세가 약속한 로마에 대한 전쟁 배상금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을 무찌르고 가져온 노획물에 맞먹는 규모의 재정 수입을 일정 기간 꾸준히 제공했다. 로마가 스페인, 마케도니아, 아프리카를 잇따라 속주로 삼은 뒤 이들 지역에서 거둔 세금은, (카르타고 등에서 받기로) 정한 전쟁 배상금 총액을 대체하고도 남는 규모였다." "기원전 2세기 중반에 이르자, 군사 정복과 금융의 꾸준한 고도화가 결합한 효과로 초갑부층 계급이 로마인 사이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는 엘리트 사이의 정치적 경쟁의 성격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자질과 명예, 가문의 혈통이 재산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파브리키우스 시대가 저물어 갔다."(82, 86)


"고대 작가들은 셀레우코스의 안티오코스 3세를 정복한 장군들이나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를 무찌른 장군들이 이런 사치를 로마에 들어왔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사실은, 로마 경제의 급속한 고도화가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이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큰 부자가 되게 해줬다. 예를 들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동시대 최고의 부자인 동시에 기원전 188년 로마가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승리할 당시에 생존할 로마인 가운데서도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조금 더 지난 시점에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던 크라수스는 한때 스키피오의 재산보다 거의 40배나 많은 재산을 보유했다. 두 사람의 재산은 상대적인 규모만큼이나 그 성격도 달랐다. 스키피오의 재산은 대부분 카르타고와 스페인에서 탈취한 귀중품 실물 자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 크라수스의 재산은 대부분 금고에 보관된 실물이 아니라 서류상으로 존재했고, 이 때문에 훨씬 빠르게 불릴 수 있었다."(88)


"이탈리아 인구 증가는 기원전 2세기 많은 로마인의 경제적 전망을 자신의 부모 세대보다 암울하게 만들었다. 작은 집에서 대가족과 함께 작은 땅을 경작해야 했던 많은 이탈리아 시골 사람들은 겨우 먹고 살았다. 이들은 수확기에 부유층의 올리브 농장과 포도밭에서 일하는 계절 노동자 신세였다. 이들은 또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으려고 로마와 기타 도시로 이주해 부두 노동자와 장인으로 일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부모 세대보다 더 열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당시 가장 부유한 로마인들이 누린, 전에 없는 부유함에 비해 그들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가난한지 실상을 목격했다. 새로운 경제는 소수의 승자들에게 큰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새로운 빈곤층의 좌절감과 일부 옛 지배 계층의 권력 상실에 대한 우려는 격렬한 포퓰리즘이 일어날 여건을 조성했다. 기원전 140년대 말에 활동한 정치인 세대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상에 주목했고, 기성세대와 달리 고위 공직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이 불안을 악용했다."(89-90)


4장 좌절의 정치 94 


"티베리우스는 로마 유력 정치인들의 경쟁 무대에서 평민 중에서는 가장 성공한 축에 드는 가문 출신이다. 기원전 137년에 그는 원로원 의원 자격이 부여되는 공직 중 가장 낮은 검찰관에 뽑혔다. 집정관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스페인의 북부 도시 누만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티베리우스는 보좌 역할을 맡으면서 자기 가문이 그 지역 지도자들과 맺은 인맥이 아프리카에서 거둔 성과에 버금가는 성공을 거두리라고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만키누스의 군사적 무능이 아프리카에서 그가 보좌한 처남 스키피오의 천재성만큼이나 엄청난 것으로 확인됐다." "양측이 합의한 조약에 따라 살아남은 로마군 수천 명은 철수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확보했던 모든 약탈물은 누만티아 손에 넘겨졌다. 로마로 돌아온 티베리우스는 처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포함한 몇몇 원로원 의원들이 자신이 맺은 조약을 로마의 '재앙이자 수치'라고 비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104)


"하지만 이 조약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원로원 엘리트들의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후대의 한 저자는 〈시민의 다수를 이루는 병사들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티베리우스에게 몰려와서, 모든 책임은 장군(만키누스)에게 있으며 티베리우스의 노력 덕분에 수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라고 썼다." "스키피오가 기원전 134년 전쟁에 나설 시점이 되면, 그의 세계는 티베리우스를 친구와 가족을 구한 인물이라며 몰려온 보통 사람들의 세계와 더없이 간극이 큰 세계였다. 티베리우스는 더는 기득권층의 황태자가 아니라 스키피오와 그의 동맹 세력에게 부당하게 명성을 훼손당했다고 믿는 분열의 인물이 됐다." "하지만 그가 스키피오와 갈라졌으니 집정관이 될 체제 내 통로가 막혔다. 그가 엘리트 집단 안에서 명성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 시민들에게서 얻은 인기를 활용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스키피오가 134년 전쟁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 후, 티베리우스는 호민관 선거에 출마했다."(104-5)


자신의 제안을 가로막는 걸림돌에 분노한 티베리우스는, 국가가 보통의 로마인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을 막은 소수의 지배 집단을 향한 대중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그는 추종자들의 폭력을 적극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잠재적으로 도시의 모든 사람을 겨냥함으로써 로마 전체로 번진 물리적 폭력의 위험이 실제 폭동보다 더 큰 공포를 부르게 만들었다. 티베리우스 추종자들의 변덕은 예측할 수 없는 이유로 폭발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적 무기가 되었다." "그 후 운명이 극적으로 개입했다. 페르가뭄의 왕 아탈루스 3세가 숨지면서 왕국과 국고를 '로마 사람들'에게 남겼다. 티베리우스는 유언이 수혜자를 로마 사람들로 명시했기 때문에 원로원이 아닌 평민회가 유산 분배를 맡아 아탈루스가 로마에 남긴 영토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구상에는 대중의 목소리와 투표 행사가 원로원과 지배 계층의 왜곡된 힘을 극복할 때만 로마인의 진정한 자유가 달성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새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110-2)


"아피아노스는 티베리우스가 수행한 호민관직의 가장 파괴적인 측면을 예리하게 인식했다. 티베리우스는 토지 개혁이 필수적이라는 개인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은 정치 프로그램을 추진할 도구로 위협과 협박의 사용을 일상화했다. 아피아노스는 티베리우스의 제안이 훌륭하다는 데 동의했지만, 일반적인 정치 수단 대신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을 부르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공화정은 불공정할지언정 모든 지배 계층이 인정한, 일련의 정치적 규범들에 따라 타협하고 경쟁하는 원칙 위에 세워진 체제였다. 그들은 공화국이 제공하는 보상을 놓고 경쟁할 기회를 얻는 대가로 순순히 공화정의 규칙에 얽매였다. 아피아노스는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애도한 사람 중 일부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애도했다고 썼다. 또 그들은 티베리우스의 살해로 〈공화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무력과 폭력의 지배만 남았다〉라는 사실이 드러난 그 순간에 대해서도 애도했다고 덧붙였다."(116)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가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에 당선되고 그다음 해에 재선되자, 더욱 큰 불확실성이 로마와 이탈리아 동맹국들을 사로잡았다. 가이우스는 자신의 형이 시도한 토지 개혁 프로그램과 그의 폭력적인 죽음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에서 호민관직을 시작했다. 가이우스는 그라쿠스라는 성씨를 쓸 뿐 아니라 선거 출마 전에 10년 동안 그라쿠스의 토지위원회에서 일한 인물이었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가 꿈에 나타난 뒤 호민관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고인이 된 형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이 덕분에 그는 형을 지지했던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었지만, 한때 티베리우스에 반대했던 원로원 의원들로부터는 배척당했다. 호민관 당선 뒤 가이우스는 형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입법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국가가 감당할 역할의 미래상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생각은 상대적으로 온건했다. 그런데, 가이우스는 이 원칙을 훨씬 더 넓게 확장했다."(118)


"기원전 133년, 티베리우스가 나스키아가 이끄는 무리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함께 숨진 로마인은 약 300명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원로원이 한 명의 로마 시민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맞서는 데 집정관이 공화국의 자원을 쓰게 해주면서 수천 명이 가이우스와 함께 숨졌다. 정치적 폭력이 로마 정치의 변두리에서 원로원이 승인하는 도구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로써 어떤 로마인들의 눈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공화국의 폭력에 희생됨으로써 개혁가를 막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을 기꺼이 사용하는 정치 질서를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이제는 아무리 사소한 폭력 사건이라도 공화정을 위협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었다. 가이우스는 티베리우스처럼 협박을 이용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폭력과 협박이 정치 도구가 된 이상, 그 어떤 소동도 과잉 대응의 구실을 제공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티베리우스가 만든 이 새로운 세상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도 아닐 터였다."(121-2)


5장 국외자의 부상 126 


"마리우스는 조상 가운데 원로원 의원이 한 명도 없는 로마 기사 계급 출신자 곧 '노부스 호모'였다. 그는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피보호인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기원전 119년에 호민관으로 선출된 것도 그들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기원전 109년에 이르자 시대 분위기와 태도가 바뀌었다. 100년대 초 마리우스가 이제는 평판이 추락한 L.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와 공개적으로 맞서면서, 이 사태는 마리우스가 활용할 수 있는 뜻밖의 정치적 행운처럼 보였다. 로마는 반체제 열풍에 휩싸였고, 거의 15년 동안 집정관 다수를 차지했던 메텔루스 가문만큼 부패하고 무능한 로마 기득권층을 대표할 이들이라곤 없었다." "마리우스는 로마인들이 얼마 전까지 공공 생활을 지배하던 유서 깊은 가문들에 실망하고 이제 새로운 정치 방향을 갈망하는 가운데 치러진 선거에서 변화의 후보로 자리매김하는 행운을 누렸다. 마리우스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지지자들을 흥분시킨 만큼 반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렸다."(132-5)


"마리우스는 대규모 신병 모집 허가를 요청했고, 원로원은 기꺼이 승인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여기 참여할 의지가 있는 병사들을 찾지 못할 것으로 확신했다. 로마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한 세대 전에 제기했던 문제 곧 군 복무에 필요한 최소 재산 기준을 충족시키는 시민이 감소하는 데 대한 해법을 여전히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미리 문제를 감지한 마리우스는 전례를 깼다. 다른 지휘관들이 무시했던 로마인 계층에서 신병을 모집해 군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마리우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 중에는 로마 빈민층이 있었다. 그들은 마리우스에게서 군사 분야의 천재성을 봤고, 그 아래 들어가 복무하면 쉽게 승리하고 전리품도 상당히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한 세대 전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그랬듯이, 마리우스도 공화정의 규범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우선시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토지 없는 이들을 입대시키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지만, 로마의 최근 선례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135-6)


"정당성을 잃은 기득권층은 단기적으로는 마리우스에게 도움이 됐지만, 공화정에는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타협을 권하고 정치적 합의를 창출하던 정치 체제는 이제 그 체제를 이끌던 인물들과 함께 불신을 받았다. 사투르니누스와 같은 정치인들은 이런 구조적 약점을 이용했고, 마리우스는 보기 드문 공직 경력을 이미 확보한 데 만족하지 않고 이 새롭고 폭력적인 동맹 세력에 협력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기원전 130년대와 120년대에는 드물던 정치 폭력이 이제는 로마의 정치 과정에서 거의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도구가 됐다. 이 현상은 사투르니누스가 마리우스 휘하의 참전 군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법을 통과시키려 할 때 군인들이 로마에 머물면서 무언의 위협을 가하며 시작됐다. 기원전 110년대가 깊어가면서 협박이 노골적인 폭력으로 바뀌는 일이 주기적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특정 법안에 대한 투표에 폭력이 스며들었고, 기원전 101년에 이르면 정무관 선거에서 살인 공격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147-8)


6장 공화국 균열 152 


"술라는 떠오르는 별이었지만 아직 로마 정치의 상층부를 뚫지 못했다. 그가 집정관에 오를 시간은 부족했고, 이제 이탈리아가 전쟁에 휩싸이면서 로마는 얼마 전 로마를 구한 믿음직하고 경험 많은 지도자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으로 고위 지휘관들이 타격을 입으면서 술라에게 문이 열렸다." "기원전 89년 폼페이를 장기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술라가 통솔하는 군대가 전임 집정관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를 죽이는 일이 터졌다. 술라는 이 반란에 가담한 이들을 처벌하는 대신 진짜 적들과 더 열심히 싸워 속죄하라고 말했다. 동맹시 전쟁은 심각한 위기였고, 적군과의 교전이 임박해 있었으며, 술라 입장에서는 어떤 군대이든, 심지어 불충스런 군대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장기 전략도 작용했다. 술라는 법과 관습에 따르자면 엄하게 처벌해야 할 군대를 사면했다. 이 군인들은 술라에게 목숨을 빚졌으며, 언젠가는 이 빚을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음을 술라는 아주 잘 알았다."(162-3)


"원로원은 기원전 88년 담당 집정관 선거 전에 이미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새로 당선되는 집정관 중 한 명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 지휘권이 술라에게 넘어갔을 때, 그는 행운이 또다시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술라는 이미 부자이자 막강한 권력자였지만, 아시아 전쟁의 지휘권은 다른 로마인이 거의 가져본 적 없는 부와 권력을 약속했다. 그리고 술라의 병사들에게도 이 작전은 로마의 극심한 경제 위기를 견디게 해줄 수입원이 될 것이다. 술라의 정치적 경쟁자들도 이 점을 잘 알았다." "광분한 호민관 술피키우스의 사병 집단은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선사했다. 그 뒤 술라는 로마의 역사를 바꾸는 결정을 내린다." "그는 병사들에게 자신이 내리는 명령에 계속 따르겠다고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군사작전을 놓칠까〉 두려워한 병사들은 〈술라가 원하는 바를 대담하게 입에 담으면서 술라에게 자신들을 로마로 이끌라고 요구했다.〉"(166-8)


"술라가 무엇을 성취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로마를 점령한 뒤 술라는 집정관직을 유지했고, 원로원으로 하여금 그의 미트리다테스 전쟁 지휘권을 회복시키고 술피키우스가 제정한 법률을 무효화시키게 만든 뒤 원래 계획대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다. 하지만 로마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공화정이 이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알아봤다. 한때 로마 군대는 지휘관이 전쟁 승리로 명예와 관직을 얻기 위해 빌려 쓰는 공익 사업체와 비슷했지만, 술라는 이런 군대가 개별 지휘관의 내부 정치 투쟁을 위한 개인적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물론 선동가로부터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그의 이런 합리화도 로마 군인들이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지휘관의 자존심을 위해 다른 로마인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 교훈은 술라의 라이벌들에게도 주목 받았다. 술라가 동방으로 떠나자마자, 이탈리아는 다시 폭발했다."(170-1)


7장 잔해 속에서의 재건 182 


"동맹시 전쟁과 이를 잇는 기원전 80년대 내전의 엄청난 파괴와 폭력 이후 술라가 공화정을 변형 재건하기로 결심하면서 로마가 영구적인 독재 체제로 전락하는 사태는 피했다. 하지만 로마가 제대로 작동하던 과거의 공화정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확대된 원로원, 거세된 호민관, 원로원 배심원제를 도입한 술라의 공화정은 사실 그 이전의 정치 체제와 급격하게 결별한 체제였으며, 널리 퍼진 살인과 절도를 기반으로 한 체제였다." "술라는 자신의 죄책감을 공유할 의도로 사람들을 골랐다. 그는 이들에게 공적 명예를 부여하고 공적 진출을 후원했으며, 자신이 처벌 대상자로 공표한 이들로부터 몰수한 재산을 이용해 이익을 챙기도록 장려했다." "술라 밑에서 복무한 수만 명의 퇴역 군인을 몰수한 땅에 정착시켰고, 그들 중 다수를 재건된 로마 원로원에 진출시켰다. 술라는 죄를 지은 자들이 너무 많고 힘도 강력해서 청렴한 사람들은 감히 대결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정착시켰다."(182-3)


"이렇게 몰수한 재산으로 조성된 대규모 토지 중 일부에서 노예 노동이 활발해지면서 사회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술라가 내전에서 승리한 뒤 이탈리아에서 노예가 얼마나 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기원전 9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동맹시 전쟁이 끝난 시점에 로마 시민권을 얻었어야 할 자유 이탈리아인 일부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노예로 삼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기원전 70년대에 이르면, 많은 농업 부문 노예들이 캄파니아 등 남부 이탈리아 지역의 비옥한 땅에서 일했다. 많은 경우는 술라한테서 재산과 시민권을 박탈당한 이탈리아 가문 출신자들이 이들과 함께 일했다. 술라는 자신의 지지자들이 지배하는 새로운 이탈리아를 위해 이탈리아인과 로마인의 생명, 자유, 재산권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사회 협약을 파괴했다. 땅을 유지하게 된 이탈리아 농부들조차 이웃에 있는 술라 지지자들의 더 크고 효율적인 농장과 경제적으로 경쟁하느라 고생했다."(184-5)


8장 이류들의 공화국 208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호민관의 다른 고위직 출마 자격을 회복시켰기 때문에, 가장 진취적인 호민관들은 이제 술피키우스를 본받아서 더 힘 있는 인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여 영향력을 키웠다. 67년에 호민관들이 추진한 가장 중차대한 사업 중 하나는 지중해 전역에서 3년 동안 해적과 맞서 싸울 특별 부대를 창설하는 것이다. 가비니우스가 만든 관련 법률은 이 임무를 맡을 지휘관을 전직 집정관 중에서 선발한다고만 명시했지만, 이 자리가 폼페이우스를 위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새 지휘권 장악을 걱정했지만, 그가 지휘한 해적 소탕 작전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로마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폼페이우스의 특별 지휘권은 3년 동안 유지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했던 시간은 3개월 정도였다. 이로 인해 기원전 66년 초에 폼페이우스에게 또 다른 특별 지휘권을 주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미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추진하려고 했다."(210-2)


"이를 계기로 로마는 전례가 없는 정복 작전에 나섰다. 폼페이우스는 3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미트리다테스를 공격하며 아르메니아까지 쫓아갔다. 또 소아시아 상당 부분과 시리아 전역을 정복했고, 지중해 동부의 나머지 지역 대부분을 매년 조공을 바치는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들을 상대할 때 보여줬던 정치적 기술을 이번 정복에서도 발휘했다. 폼페이우스는 새로 로마에 속하게 된 지역의 지방 정치를 아주 능숙하게 통제해, 그가 제정한 지역 법령은 거의 300년이나 효력을 유지했다. 그는 군대 동원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두면 그 지역의 왕들과 도시에 호의적인 동맹 관계를 제안했다. 이는 그들이 특히 폼페이우스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대하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제 북쪽의 아르메니아에서 남쪽의 유대까지 이어지는 우호 군주의 세력군을 확보했다.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동부를 새로 구축하는 동안, 로마에 있던 이들은 그의 공백을 메우려고 서로 다퉜다."(214-5)


"여러 뛰어난 기량을 지닌 새 인물들도 등장했다. 그들 중 키케로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두 사람은 나름의 공적 인물상을 신중히 구축했다. 키케로는 장황하고 자화자찬을 일삼지만 종종 아주 설득력 있는 연설에 능한 기사 가문 출신자다." "카이사르는 많은 면에서 키케로와 정반대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오래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신화 속 영웅) 아이네아스의 아들이자 여신 베누스의 손자인 이울루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카이사르도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그의 짧고 힘 있는 문장과 정확한 단어 사용은 키케로가 선호한, 길고 복잡한 구성과는 확실히 대비됐다. 키케로는 한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조차 화를 내게 만드는 독특한 소질이 있었던 반면, 카이사르의 인간성은 동료들과 지속적인 우정을 쌓을 뿐 아니라 심하게 대립하는 경쟁자들까지도 의기투합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카이사르의 가장 큰 재능은 로마 대중의 인기를 얻고 유지하는 놀라운 능력에 있었다."(215-6)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젊은 카토)는 완전히 다른 대중적 이미지, 즉 자신의 조상처럼 견고한 미덕을 지닌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원칙을 지키는 것으로 비치는 행동을 기회주의적으로 드러내는 행태는, 카토가 군 호민관과 검찰관을 거쳐 기원전 64년 말에 원로원 의원 자리에 오를 때까지 그의 경력을 규정지었다." "카토는 원로원에 진출해서도 부패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순수한 공화정의 자유 수호자라는 공적 정체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그는 로마의 전통적 미덕 수호와 동의어나 다름 없는 가문 출신인 데다가, 소박함을 정기적으로 과시했고, 타락한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정직성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공공 행사를 신중하게 골랐다. 카토는 카이사르처럼 포퓰리스트가 아니었고 키케로처럼 화려한 웅변가도 아니었지만, 그가 주장하는 도덕적 권위는 키케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같은 인물들의 재능과 재주, 업적으로도 무력화하기 어려운 힘이 있었다."(219-22)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진압함으로써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정치적 승리를 얻었다. 키케로는 아주 강력한 연설을 이 사건 와중에 선보였고 로마에서 가장 권위 있는 칭호들 중 하나를 얻었다. 그러나 로마 시민 5명을 재판 없이 처형한 키케로의 결단은 곧바로 역풍을 맞았다. 그리고 미래의 영향력에 영원한 족쇄가 될 정치적 약점도 남겼다. 카토는 카닐리나의 음모 사건을 거치면서 키케로와는 또 다른 기화와 한계에 직면했다." "기원전 62년 1월에 이르면 그는 공화정을 훼손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책이라면 무엇이든 원칙에 입각해 반대하는 로마의 대표적 목소리로 스스로 규정했다. 실로 카토가 어떤 정책에 반대하면, 그 정책이 로마를 온전히 보전하는 데 위협이 된다고 비판하는 행동으로 해석될 정도였다. 카토의 비판은 매우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국가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진짜 문제들에 직면한 로마 시민들의 현실 세계에서 추상적인 원칙에 대한 카토의 확고한 헌신은 한계 또한 분명했다."(228-9)


9장 휘청거리며 독재를 향해 234 


"카이사르가 집정관으로서 처음 발의한 주요 법안은 혼잡한 수도 로마에서 일부 인구를 이주시키고,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던 퇴역 군인 일부에게 정착지를 제공하며, 이탈리아 특정 지역을 경작지로 되돌리는 걸 〈겨냥한〉 토지법이었다." "이 법은 다루기 아주 힘들어 보였던 정치 문제에 합당한 해법을 제시했다. 카이사르는 법 시행을 강제할 영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알았지만, 누구도 이 법에 대해 타당성 있는 반대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법을 설계했다. 게다가 이 법안이 원로원에서 최대한 투명하게 논의되도록 했다. 그는 법안 전문을 큰 소리로 읽은 뒤, 원로원 의원을 한 명씩 호명해 비판할 거리나 반대하는 조항이 있는지 물었다. 카토와 그의 동료들은 상당히 분해했지만, 누구도 법안에서 잘못을 찾지 못했다. 역사가 디오는,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강하게 압박하는 법인데도, 카이사르가 아주 정교하게 법안을 만들어 혹평할 거리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에 특히 분개했다〉라고 썼다."(245-6)


"카이사르는 단 몇 달 만에 기원전 60년대 후반 로마 정치 생활을 지체시킨 원로원의 교착 상태를 돌파했다. 이를 통해 그는 많은 성과를 이뤘다. 그는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전쟁을 치른 군인들과 땅이 없는 로마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또 동방 전반에 걸친 로마의 피보호 왕국들의 정치적 재편과 함께 폼페이우스의 소아시아와 시리아 영토 병합을 합법화했다. 그는 크라수스의 동맹 세력인 기사 계급을 위해 아시아 조세 징수 계약 재협상도 성사시켰다. 가장 중요하게는,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상당한 재량권도 발휘할 갈리아 지역 지휘권을 챙김으로써 자신의 경력에서 화려한 다음 단계를 준비했다. 카이사르는 막강한 개인적 인맥, 능숙한 정치적 책략, 방해나 저지 시도를 폭력으로 대응하겠다는 위협을 적절히 섞어서 이 모두를 이뤘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떠날 무렵 로마에서 다시 정치적 혼란이 시작됐다. 이번 혼란은 카이사르가 보여준 전례와 그가 집정관 시절 저지른 몇 가지 오판 중 하나가 원인이었다."(250)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지휘권이라는 집단의 문제를 자기 개인 문제로 만든 것은 지난 몇 년 동안 로마 정치가 어떻게 변했는지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증거다. 광범한 정치적 합의 도출을 위해 협력하는 엘리트 집단이 통치하던 로마 공화정이 이제 강력한 개인 두 명이 정치 역할을 형성하는 체제로 바뀌었다고 인식한 이가 폼페이우스만은 아니었다." "기원전 50년의 마지막 원로원 회의는 공화국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개인적 갈등을 막을 능력이 없음을 보여줬다. 원로원은 세 가지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폼페이우스에게만 군대 해산을 요구하는 안은 부결됐다. 카이사르에게만 지휘권 포기를 요구하는 안은 가결됐다. 쿠리오가 그해에 앞서 제기한 요구를 반영해 두 사람 모두에게 군대 해산을 요구하는 안도 370 대 22로 승인됐다.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두 사람이 분쟁에서 물러나기를 바랐다.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이탈리아에 주둔하던 군대 통제에 나섬으로써 타협의 희망을 꺾었다."(259-61)


"원로원과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원치 않는 전쟁을 폼페이우스가 준비하는 동안 끌려 다녔다. 기원전 49년 담당 집정관 당선자들은 갈리아와 일리리쿰에서 카이사르의 후임자를 임명하라고 원로원을 압박했다. 카이사르에게 충성하는 호민관들이 카이사르의 군대 지휘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려 하자, 원로원은 긴급 포고령을 통과시켰다. 호민관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카이사르에게로 도망쳤다. 이렇듯, 공화정을 마비시킨 카토 주도의 정치적 교착 상태를 카이사르가 깨뜨리면서 시작된 10년은 두 지도자가 내전으로 치닫는 동안 공화국이 저항하지도 못할 만큼 허약해진 채 끝을 맺게 됐다. 이제 로마의 정치 생활은 로마의 자원을 완전히 장악해 명예와 권력을 다투는 개인들의 투쟁으로 점철됐다. 그리고 술라 이후 처음으로 이 투쟁은 한쪽이 죽을 때까지 이어질 싸움임이 분명했다. 패자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호할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화정에서 제국으로 향하는 마지막 행진이 시작됐다."(261)


10장 카이사르 공화국의 탄생과 멸망 264 


"폼페이우스는 죽고, 카토와의 대결을 준비하던 기원전 47년 카이사르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10년 넘게 싸워온 병사 등 최정예 병사들이 제대하겠다며 카이사르가 약속한 보너스 지급을 요구한 것이다. 카이사르는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을 직접 찾아가 창피를 줌으로써 반성하게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본인을 병사들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만들었다. 과거의 지휘관들은 공공 재산으로 병사에게 보상하느라 공화국에 의존했다. 술라가 몰수한 재산조차 실제로 추종자들에게 분배하기 전에 공적 통제를 거쳤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공공 재원과 자신의 사재를 활용해 땅을 분배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계획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양측 모두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군대는 이제 그가 살아 남아서 약속한 보상책을 시행할 권한을 유지해야 했다. 그들은 공화정과 공화정을 이끄는 개인을 동시에 섬기는 처지가 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로마를 책임질 때만 로마가 안정되는 여건을 조성했다."(276-7)


"기원전 44년이 되자, 공화정이 공로를 인정하고 명예를 높여주는 매개체였던 공직에 대한 카이사르의 통제가 거의 완성됐다. 그는 집정관을 임명할 뿐 아니라 다른 하위 공직 선거 결과를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한까지 장악함으로써 하급 공직자도 사실상 임명했다. 그 뒤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제국에 대한 군사 작전을 준비하면서 향후 몇 년 동안 정무관을 맡을 인물 명단을 만들었다. 이 명단에는 43년도 정무관 전원과 42년도 집정관과 호민관이 있었다. 물론 카이사르는 계속 독재관직을 유지했다. 또 자신의 부관으로 40년대 초에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나 44년 초부터 43년까지 부관이었던 레피두스를 임명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로마인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는 레피두스가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 통치를 위해 떠나자마자, 새로운 부관으로 가이우스 옥타비우스라는 열여덟 살 청년을 임명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이 청년이 자라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될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278-9)


11장 옥타비아누스의 공화국 290 


"기원전 44년 3월 15일의 사건은 카이사르가 죽는 순간까지 브루투스, 카시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료 공모자들의 계획대로 정확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그 뒤에 무엇을 할지 전혀 몰랐다. 원로원은 박수가 터져나온 게 아니라 공포로 텅 비었다. 홀로 살아남은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동맹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도 살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택으로 도망쳤다. 암살 공모자들은 되찾았다고 느낀 자유를 상징하기 위해 창을 들고 모자를 쓴 채 도시에 등장했지만, 로마가 자신들을 해방자로 축하하기는커녕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 순간 브루투스, 카시우스 그리고 그들의 동료 공모자들은 카이사르가 수도의 안정을 회복함으로써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 동료 시민들이 카이사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들이 전혀 몰랐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폭군으로 여겨 죽인 인물이 내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제국이 혼란에 다시 빠지는 걸 막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290)


"옥타비아누스가 4월 11일께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도시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어떻게 하면 입지를 가장 잘 다질지 이미 냉정한 계산을 끝낸 뒤였다. 그는 이탈리아 남부를 여행하면서 카이사르의 이름이 가진 힘을 봤고, 죽은 독재관의 유산에 흔들림 없이 헌신하면 어떤 반향을 얻을지도 확인했다. 안토니우스나 레피두스와 달리, 옥타비아누스는 암살자들과 타협했다는 오점이 없었다. 그리고 과격한 아마티우스와 달리, 카이사르의 유산을 주장할 정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를 살해한 자들을 너무 과격하게 뒤쫓거나 반대로 너무 타협적으로 용서해서는 안됐다. 옥타비아누스는 또한 나이 많고 경험 많은 로마 정치인들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데서 오는, 뚜렷한 이점도 잘 알았다. 노련한 정치인들 중 그 누구도 이 청년이 이례적으로 조숙한 정치 감각을 지녔기 때문에 카이사르가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299-300)


"삼두정치 체제는 기원전 33년 말에 만료됐지만, 현실적으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한 정상적인 공화정 질서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자신만이 클레오파트라로부터 로마의 자유와 제국 통제권을 지킬 수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안토니우스에 대한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삼두정치가 끝났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는 아무 직책도 없었고 이집트 여왕에 맞서는 전쟁을 이끌 법적 권한도 없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관련 작업에 들어갔고, 결국 〈이탈리아 전체가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나에게 지도자dux가 되기를 요구했다··· 아프리카, 시칠리아, 사르디니아와 함께 갈리아와 스페인의 속주도 똑같이 맹세했다〉라고 선언했다." "과거의 로마 공화정에서는 원로원이 로마의 적을 집단적으로 결정했고, 적들이 모두를 위협했기 때문에 적이 누구인지 모두가 공유했다. 이제 이탈리아 전체는 선택의 여지 없이 옥타비아누스를 따라야 했다."(318-21)


12장 아우구스투스의 자유를 선택함 326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제국은 한 세기가 넘게 지속된 공화정의 기능 장애에서 비롯됐다. 실로 옥타비아누스는 공화정 말기에 충족시켜 주지 못한 로마 시민의 많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공화정을 대체할 제국 체제를 신중히 설계했다. 로마인들은 옥타비아누스를 자신들의 독재자로 인식했을 때 암묵적인 거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옥타비아누스의 지도를 따르고, 옥타비아누스는 그 대가로 군대에 대한 안정적 급여 지급과 군 동원 해제 조치, 정치적 안정, 적으로부터의 보호, 정기적인 식량과 식수 공급, 아름다운 도시들, 상대적 번영을 제공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기 몇 년 전부터 로마인들이 이런 거래를 할 준비가 됐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충성 서약은 그들이 분쟁 시기에 옥타비아누스 개인에게 충성할 의지가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패하고 이집트를 합병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들과의 이 거래를 영구화할 로마 국가 재구성이라는 문제에 직면했다."(326-7)


"점차 신의 영감을 받은 통치자가 평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이념이 옥타비아누스 지배 체제의 근본으로 자리잡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인들이 안전, 평화, 번영, 오락을 누리게 해 줄 독재 체제 아래서 새로운 종류의 자유를 약속했다. 법치도 회복됐다. 옥타비아누스는 사면을 요청하는 모든 시민을 사면했고, 카리나스처럼 과거 정권 아래서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해 줬으며, 아그리파처럼 사회적 지위는 낮지만 재능을 인정받을 만한 이들을 도왔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과정 내내 새로운 제도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이 모든 혜택을 보장한 장본인은 바로 옥타비아누스였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특정 개인이 아니라 원로원과 국민들을 위해 바쳐온 희생과 기도, 제사를 그를 위해 거행함으로써, 그가 새로운 질서의 중심에 있다는 걸 의례로써 인정하기를 기대했다. 페르가뭄 같은 속주의 도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옥타비아누스를 신성한 인물로 숭배할 신성한 구역을 새로 헌정했다."(329-30)


"옥타비아누스는 엘리트 계층에게는 공직을 통해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 공직 취임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공식 권력 행사의 기본 원칙은 자신의 말처럼 〈공화정을 나 개인의 권력에서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지배로 바꾸는〉 것이었고, 이제 그 자신은 〈비록 과거의 정무직 동료들보다 공식 권력은 더 많지 않지만 영향력auctoritas만큼은 그들 모두를 앞서게〉 될 터였다." "이제 엘리트들이 탐하는 집정관, 법무관, 그리고 기타 원로원의 공직을 얻는 길이 다시 열렸고, 세계 최대 제국의 일상 통치 책임을 엘리트들에게 넘기는 것도 가능해졌다. 일이 제대로 진행되면, 원로원 또는 국민들이 선택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승인한 정무관들과 옥타비아누스가 그 공로를 공동으로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은 원로원의 무능한 행정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이와 함께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개입해 자신의 개인적 권위와 재산을 동원해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330-1)


"기원전 23년에 옥타비아누스가 두 자리의 집정관직 중 하나를 독점하는 게 분명히 문제가 되자 추가 조정이 이뤄졌다. 옥타비아누스는 7월에 집정관직을 사임하면서 다시는 집정관을 맡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이는 아마도 암살 음모에 대한 대응 또는 위중한 질병 때문일 것이다. 그 대신 그의 권력이 재정립됐다. 그는 원로원에서 동의안의 첫 번째 절차를 개시할 권한과 어떤 법률안도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또한 분쟁이 생겼을 때 모든 속주의 총독을 지휘하는, 강화된 최고사령관imperium maius도 받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호민관의 권력tribunicia potestas도 확보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호민관에게 부여되던 정치적 권한과 개인적 신성 불가침의 권리다. 호민관 권력 부여는, 옥타비아누스가 귀족의 실제 직책인 집정관을 포기하고 대신 선출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호민관의 상징적 지위를 받는 거래를 상징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됐다. 로마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것이다."(3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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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머니 - 화폐 이데올로기·역사·정치 전환 시리즈 1
제프리 잉햄 지음, 방현철.변제호 옮김 / 이콘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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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화폐란 무엇인가?


1장 화폐의 수수께끼 _018


우리는 화폐가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환율, 국가와 개인의 부채수준을 쉼 없이 모니터링하면서 혹시나 화폐가 불안정해질까 노심초사한다. 중앙은행은 대중들로부터 화폐의 건전성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번번이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경험과 달리 주류 경제학 이론은 역설적으로 화폐를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수리적 경제모델에서 화폐는 ‘중립적neutral’이거나 수동적인 구성요소일 뿐이다. 화폐는 ‘변수variable’가 아닌 ‘상수constant’이며, 적극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생산과 교환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에 그친다는 것이다. 주류 경제학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원료, 에너지, 노동, 기술같은 ‘실물적’ 생산요소에서 나온다고 보는데, 화폐는 이러한 가치를 측정하고 가치 사이의 교환을 가능하게 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실물적real' 분석이라 한다.) 18-9)


이와 달리 '화폐적monetary' 분석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현실의 비즈니스 세계에서 팽배한 화폐관을 따르고 있다(Hodgson, 2015). 여기서는 화폐를 화폐자본, 즉 독립적으로 역동성을 가진 경제력으로 본다. 화폐 그 자체는 가치를 창출할 수 없다. 그러나 투자, 생산, 소비에 필요한 화폐가 미리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본주의의 바퀴는 돌아갈 수 없고 생산을 해도 소비될 수 없었을 것이다(Smithin, 1918). 고전학파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실물경제는 실제로 화폐가 상품의 교환을 위한 매개물 역할만을 담당하는 순수한 교환경제거나 비현실적인 시장경제 모델에 불과하다. 즉, 상품-화폐-상품C-M-C의 흐름을 가정한 것이다. 여기서 화폐는 개개인이 상품에서 얻는 만족을 의미하는 효용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현실 세계’에서 화폐는 생산에 필요한 자본과 임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의 결정체다. 즉, 화폐(자본)-상품-화폐(이익)의 흐름M-C-M을 상정해야 한다. 14-5)


2장 양립 불가능: 상품이론과 신용이론 _038


19세기 후반까지 화폐의 중립성과 실물경제 개념을 기반으로 한 상품교환이론은 정설로 자리 잡았다.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정치경제학의 원리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1871)》에서 화폐의 존재는 “어떤 가치법칙의 작동도 방해하지 않는다”라고 했다(Ingham, 2004, 19). 또한 화폐는 화폐가 없었을 때 우리가 했던 일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말했다. 이 이론에서 가치는 생산요소의 효용이나 기여에서 나오는 것이지 화폐의 사용과는 무관하다고 본다. 화폐는 이미 존재하고 있던 실물적 가치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될 뿐이다. 실물적 가치는 실물적 생산요소들이 상대적 기여나 효용을 나타내는 비율에 따라 상호 교환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자본’은 기계, 토지, 건물, 유형자산 등이 생산에 기여한다는 측면에서 착안된 개념이다. 근대 주류 경제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본을 계속적 이윤을 창출할 것으로 기대되는 생산요소들의 ‘저량stock’이라고 보았다. 25)


고전학파의 정통 화폐이론과 결별한 케인스가 쓴 《화폐론(1930)》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채무, 가격 그리고 일반 구매력을 표시하는 계산화폐는 화폐이론에서 으뜸 개념이다”. 케인스는 화폐와 교환 매개물을 구분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왔다. 계산화폐는 실제 채무를 청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money proper’의 범위를 확정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계산화폐와 같은 단위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채무를 청산할 수 있게 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현장에서 교환 편의를 위해 매개물로 쓰이는 것과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아무리 화폐와 비슷하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아직 물물교환 단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용어의 본래 의미상으로, 화폐단위와 관계를 맺어야만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즉, 케인스는 화폐는 교환 가능한 상품이 아니라 화폐의 ‘서술description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명목주의적 화폐관을 제시한 것이다. 30)


상품이론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명목가치(계산화폐)는 교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공동체의 권위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다(Keynes, 1930, 3). 화폐가치가 의도적으로 부여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반대론은 화폐가치에 대한 두 가지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첫번째는 화폐가 교환 매개물로 사용되기 위해 내재가치를 가져야만 한다는 억측에서 발생한 것이다. 멩거가 지적한 쓸모없는 원판과 종이의 문제처럼 말이다. 두번째는 화폐가 실물경제에서 물질적 요소에 의해 생산된, 이미 존재하는 가치를 측정하고 대변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쓸모없는 원판과 종이는 명목적이지만 미래의 가치를 지닌 것이며, 명목적이면서 미래의 신용을 가진 자와 재화의 소유자가 이러한 가치를 가지고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인 가치인 가격이 형성된다. 즉, ‘구매력’은 화폐에 ‘내재된’ 것이 아니며, ‘상품과 신용을 교환하는 판매와 구매가 이루어지는’ 사회 및 경제적 관계 속에서 생기는 것이다. 31)


국정이론은 상품교환이론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못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국가는 명목적 계산단위를 창출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권위자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화폐가 변동하는 다수의 교환비율을 가진 상품과 구별될 수 있었다. 둘째, 국가를 등장시키자 화폐의 수용성은 높이 신뢰할 만한 근거를 가질 수 있었다. 국가가 화폐를 사용함으로써 화폐를 창출하고 세금으로 화폐를 환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던 멩거의 동어반복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화폐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발행자가 자신에 대한 채무를 상환하는 데 그 화폐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발행자의 그러한 약속을 통해 비인격적 신뢰와 잊어서는 안 될 요소로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형성되면서, 신뢰의 부담은 거래당사자로부터 발행자로 이전된다. 37)


결국 화폐이론들의 양립 불가능성은 그 이론들이 암묵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상이한 사회이론과 사회‘상’에서 나온 것이다. 스미스의 해석을 따르는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사회질서가 개인들의 사익추구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된다고 본다. 유사한 사회관을 가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국가의 화폐 독점을 대신하여 합리적 개인이 가장 안정된 화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무수한 자유경쟁 화폐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교환가치의 급변동으로 화폐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비트코인 같은 가상자산이 확산되면서 그의 가설은 심판대에 올랐고 부적합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화폐 거래를 신용-채무관계로 파악하는 신용이론은 화폐에 대한 신뢰가 사회질서를 공고하게 하는 관습과 믿음에서 유발된 것이라고 본다. 반면, 국정이론은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회피하기 위해 ‘레비아탄Leviathan’의 강제력에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생각나게 한다. 39)


3장 화폐 및 화폐제도에 대한 사회이론 _072


전형적인 화폐거래의 세 가지 형태인 후불, 선불payment in advance 그리고 ‘맞돈’거래payment on the spot는 모두 채무계약이다. 즉각적으로 현금을 지불하는 맞돈거래조차 초단기의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다(Hicks, 1989, 41). 화폐거래의 본질적 요소는 무엇과의 교환으로 다른 것을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구매나 차입으로 발생한 채무를 청산하는 것이다. 이단의 경제학자인 하이먼 민스키Hyman Minsky는 누구나 화폐를 발행할 수 있으나 그것이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이 문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Minsky, 2008 [1986]). 그는 화폐는 ‘신용’, 즉 채무증서라는 점을 강조했다. 누구나 신용을 발행할 수 있으나 그것이 화폐로서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더라면 더 정확했을 것이다. 모든 화폐는 신용이지만, 모든 신용이 화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화폐시스템과 화폐적 공간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와 제도는 신용을 화폐, 즉 보편적 수용성을 가진 최종적인 지급수단으로 변모시킨다. 42)


화폐를 사회적 표상으로 보면, 화폐는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갖게 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의 가치를 매기는 데 화폐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재화를 구입하고 보다 많은 화폐를 벌기 위한 수단으로서 합법적인 가치의 저장소인 화폐에 집착하게 된다. 경제학에서는 실물경제에서 물건의 유용성으로부터 가치의 근원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회학에서 경제적 가치는 화폐에 투영된 객관적인 사회적 관념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은 가치가 경제적 가치라는 것이다. 화폐는 양도 가능한 신뢰다. 극도로 불확실한 현실 세계에서도 사회적, 정치적 정당성에 근거한 자기충족적이고 장기적인 신뢰는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신뢰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방인도 복잡다단한 관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바로 국가의 임무였다. 요약하면, 화폐는 결국 화폐가 만들어진 그 사회시스템의 생명력viability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45-6)


채권자와 화폐적 부를 보유한 자는 인플레이션에 따른 자신의 부와 채권의 가치하락을 막기 위해 화폐공급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요구했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가치가 고정된 금속본위제 형태의 ‘경화hard money’, 정부지출에 대한 엄격한 통제 그리고 높은 이자율을 선호했다. 반면, 생산자와 소비자는 채무자인 경우가 많아 ‘유연’하고 느슨한 화폐통제를 선호했다. 인플레이션은 그들이 부담하는 채무의 실질가치를 낮추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이 큰 방식의 통제를 선호했던 것이다. 여기서 화폐를 창출할 수 있는 주권을 가진 자는 채무를 회피할 힘을 가지게 된다. 중세 지주나 국채 매수자 같은 채권자들은 국가지출은 수입에 의해 조달되어야 하며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화폐조작을 통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화폐는 경제, 사회 및 정치적 권력 사이의 다툼의 대상이었으며, 그 투쟁의 결과로 화폐의 창출방법 및 규모가 어떻게 결정될지는 불확실하기 마련이다. 52)


2부 자본주의와 화폐


4장 자본주의 화폐의 진화 _104


현대 자본주의에서 화폐창출은 국가, 채권자와 납세자가 적대적 상호 의존 관계를 가지게 된 기념비적 동맹에서 유래한 재정준칙fiscal norms에 따라 이루어진다. 국가는 이제 자본가와 납세자 모두에게 의존하고 있다. 국가가 지속적인 차입을 위해서는 이자지급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조세수입이 있어야만 했다. 18세기에 효율적인 관료적 징세체계는 영국의 ‘힘의 근원sinews of power’이었다(Brewer, 1989). 하지만 세금은 인기가 없었다. 채권자들은 국가의 채무불이행이나 국가의 과다지출로 유발된 인플레이션에 따른 투자가치의 하락을 걱정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가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이러한 요구들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은행권과 금속통화는 상호 보완적이었다. 금속주화만 사용하는 것은 국가지출과 경제확장을 제약한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지만, 귀금속 본위가 없었다면 그 화폐에 대한 청구권인 은행권에 대한 신뢰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63-4)


20세기 초반에 이르자, 환어음과 지폐를 금으로 상환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점점 뚜렷해졌다. 실제로 금속본위제는 지폐가 태환을 위해 제시되지 않은 채로 계속 유통되어야만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국제적 차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났다. 국제 무역거래에서는 런던의 상인은행merchant bank이 발행한 신용 성격의 환어음과 지폐를 가지고 지불이 이루어졌다(de Cecco, 1974).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의 국제적 팽창에 따라 급증한 지불수요를 따라잡기에 충분한 금을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더욱이 금본위제가 가진 화폐공급을 제한하는 ‘황금족쇄golden fetters’를 정부가 그대로 유지했다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혼란과 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실시된 정부지출 확대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Eichengreen, 1995). 케인스의 시각에서 이 같은 금본위제라는 ‘야만적 유산’은 반드시 폐기되어야 했을 것이다(Keynes, 1971 [1923]. 172). 65)


케인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은 정부지출이 만들어낸 ‘유효수요’가 생산, 고용 및 소비의 선순환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면서 화폐의 효능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디어는 영국과 미국의 화폐창출과 통제에 영향을 미친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첫째, 경제 전체를 마치 하나의 기업을 대하듯 관리하는 기법이 발전했다. 케인스의 이론을 기반으로 정부가 원재료, 노동비용 그리고 무엇보다 화폐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정부는 단편적인 위기대응에서 벗어나 보다 선제적인 경제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으로 복지와 고용을 보장하는 정부지출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던 정치적, 경제적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많은 인구가 전투원이나 폭격대상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면서, 20세기 초반 머뭇거리며 추진되었던 사회민주주의 정책들이 강한 추동력을 얻게 된 것이다. 67)


완전고용과 사회복지 추구를 위해서 정부는 두 가지 화폐적 요인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자율과 환율이다. 이자율은 투자와 고용수준에 영향을 미치고, 환율은 수입원자재와 수출품의 가격에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고용으로 그 효과가 이어진다. 자본의 국제이동에 대한 통제는 국가 사이의 이자율과 인플레이션 전망의 변화와 차이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통화에 대한 투기거래를 금지하는 것이다. 자본통제로 인해 외환의 매수는 국제무역에서 교환 및 지불을 목적으로만 허용된다. 케인스의 말마따나 ‘중개물에 불과한’ 화폐가 되는 것이다(Keynes, 1971 [1923], 124). 국가는 전쟁 중에 은행으로부터 빼앗은 화폐통제력을 조금 더 가지고 있으면서 민간화폐와의 힘의 균형을 자기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재개되면 반드시 세계적 자본가인 은행과 기업이 힘을 되찾게 될 것이므로, 이는 지속할 수 없음이 분명했다. 68-9)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1950년대 평화시대의 완전고용에 대한 ‘상대적 만족감’은 ‘상대적 박탈감’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자기 계급이 처했던 과거의 빈곤이 중단된 것에 만족하기보다 자신들을 다른 계급과 비교하며 더 나아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대량소비 자본주의가 재개됨에 따라 노동자 계급이 ‘풍요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영국의 전통적 사회질서는 급속히 붕괴되었다. 할부구매가 도입되고 소비자 대출에 대한 제한이 철폐되자 ‘과시적 소비’에 기반한 새로운 신분질서가 나타났다. 3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과점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은 임금인상 요구를 기꺼이 수용하고 소비자에게 높은 가격을 부과함으로써 비용증가분을 쉽게 전가할 수 있었다. 임금-물가의 악순환이 작동된 것이다. 기업들과 노동자들 모두 자신들의 가격을 올렸고, 그것은 은행시스템의 대출로 창출된 화폐로 조달되었다. 71)


1970년대 국내 인플레이션 위기는 전후 서구 자본주의 경제에서 케인스학파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서 또 다른 정치적 협약이 무너진 것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 이는 브래튼 우즈 체제의 붕괴였다. 전후 세계 경제의 성장이 가속화되자, 자본이동과 외환거래를 통제하는 것이 점차 힘들어졌다. 수입품에 대한 외화지불을 허가하기 위해 무역송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대조하는 작업은 너무 수고스러웠다. 또한 다국적 기업과 글로벌 은행이 동시에 세력을 다시 확대하면서 자본이동에 대한 모니터링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이동의 최대 원천과 브래튼우즈체제의 최대 위협은 바로 그것들을 존재하게 했던 달러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가 흘러 들어갔던 곳에 엄청난 달러가 쌓이게 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국외달러의 존재로 인해 브래튼우즈체제에 필적할 만한 비공식적인 평행적 화폐시장과 자본시장이 형성되었다. 72)


화폐창출과 관리에 있어서 힘의 균형이 국가에서 민간자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급격한 변화도 있었다. 국제통화시장에서 국제무역과 투기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외환매매가 다시 한번 환율을 결정하게 되었다. 국가가 자기 채무의 자금조달을 위해 외국자본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얻게 되는 이익은 환율과 이자율에 대한 통제를 잃은 것에 대한 대가였다. 그 결과, 케인스가 예상한 대로 국내정책과 사회정책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환율이나 금리를 조정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트릴레마’의 난제에 빠지게 되었다. 다음 세 가지를 모두 동시에 달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① 고정 또는 안정적 국내통화의 환율, ② 국내 금리통제에 대한 중앙은행의 자율성 그리고 ③ 외환시장 자유화, 즉 국제자본이동의 자유화다. 변동환율제도floating exchange rate에서는 금리와 환율을 모두 통제할 수 없고, 그중 어느 하나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72-3)


5장 현대화폐Ⅰ: 국가, 중앙은행 그리고 은행시스템 _141


대부분의 중앙은행은 화폐수요에 영향을 미치는 벤치마크금리를 조정함으로써 인플레이션이 통상 2-4% 정도의 목표수준에서 유지되도록 관리한다.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지 않는 화폐공급 수준은 많은 지지를 받은 ‘새로운 거시경제 합의’모델에 따라 계산될 수 있다. 여기서 화폐는 실물경제를 전반적으로 조율하는 중립적 도구일 뿐이다. 실물경제는 고용, 이자율, 인플레이션 등의 변수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변수들은 경제균형의 성립에 기여한 정도가 객관적으로 반영된 어떤 ‘자연적’ 수준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이 모델은 낮은 수준에서 안정된 인플레이션과 병존할 수 있는 실업률 수준을 의미하는 ‘인플레이션을 가속화하지 않는 실업률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 NAIRU’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면, 이 모델은 적정 화폐공급량은 경제과학에 의해 객관적으로 산출될 수 있으므로 정치무대로부터 구제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81-2)


은행시스템은 복잡한 채무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참여 은행 중 하나라도 파산하는 경우에는 대차대조표의 양호한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은행이 어느 정도 영향을 받게 된다. 금융위기의 여파에 직면한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위험에 처했지만, 지급능력을 보유한 은행에 대해 최종대부자에서 더 나아가 ‘최종딜러dealer of last resort’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Mehrling, 2011).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모든 화폐시장과 증권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자산들을 떠안았다. 이는 국채시장의 지속성을 보장한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거의 모든 금융시장에서 모든 민간기업을 구제한 것이었다. 중앙은행은 위기대응을 위해 대출을 통해 공적기능을 수행한 것이지만, 이는 현행 화폐금융 시스템에서 민간소유의 자본주의 은행에 대한 구제를 동반한 것이기도 했다. 연방준비제도의 조치는 대부분의 미국 금융자본에 대해 시장규율의 적용을 면제하는 것이므로 더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83)


2008년 금융위기 당시 시행된 양적 완화가 일반적인 통화정책과 다른 점은 오직 그 규모가 컸다는 점뿐이다. 화폐창출 방법은 기존 절차를 그대로 준수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돈을 찍어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양적완화는 (정부) 재무부, 중앙은행과 은행시스템의 세 기관들이 각자의 자산을 가지고 상호작용한 것으로서 간접적이긴 하나 전통적인 화폐창출 방법이었다. 재무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은행 및 금융시스템에 국채를 발행, 매도했다. 나중에 이 국채는 중앙은행이 다시 매입했는데, 여기서 중앙은행은 키보드 작동을 통해 전자적으로 생성한 화폐를 지급했다. 이러한 중앙은행의 국채매입의 대가는 은행의 지급준비금에 추가되었고, 이는 은행의 화폐수요 증가로 초래될 수 있는 금리상승 가능성을 차단했던 것이다. 은행들은 새로운 화폐에 접근할 기회를 가졌고, 중앙은행으로부터 아주 낮은 금리로 차입할 수 있게 되면서 예금확보를 위해 금리를 높일 필요가 없어졌다. 84)


유로존을 제외한 대부분의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서 화폐창출은 두 개의 삼각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첫번째는 한 나라의 재무부, 중앙은행과 규제를 받는 은행 프랜차이즈 사이에 제도적으로 맺어진 관계다. 이러한 제도에는 헌법에서 규정한 관계, 관례와 회계규칙이 포함된다. 이들은 자신의 차입자들이 자신에게 지고 있는 채무의 형태로 화폐를 생산한다. 이러한 관계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협약은 정부가 주권을 활용해 자신의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직접 화폐를 발행해 조달(부채의 화폐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화폐창출 과정에서 민간자본은 국가의 화폐주권과 타협하면서 계속 주도권과 수익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메커니즘과 관례는 두번째 삼각관계에서 주요 라이벌 사이의 오랜 투쟁과 묵시적 합의를 거쳐 형성되었다. 그 삼각관계는 지출을 하는 국가, 그 국가가 발행한 국채를 매입하는 채권자 그리고 정부지출과 국채 이자지급을 위한 수입의 징수대상인 납세자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다. 90)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된 투쟁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큰 특징이 되었다. 한편으로 국가 채권자는 국채매입으로 이익을 거두긴 하지만, 동시에 국가부채가 늘어날수록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높여 그들의 투자위험으로 작용할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국가 채권자는 정부부채의 급격한 감소가 투자기회의 안전성과 수익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1990년대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 정부의 부채를 상환할 계획을 내비치자, 연방준비제도 의장 앨런 그린스펀은 안전한 투자기회의 감소를 우려하는 금융시장을 달래야만 했다. 정부가 부채상환을 위해 세금을 올린다면 유권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특히 더 큰 이해관계가 걸린 부유한 채권자 계급의 극심한 반발을 겪게 될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에도 금융시스템의 긴급구제로 급증한 정부채무를 제한하기 위해 증세보다는 사회복지 지출과 공공서비스를 ‘감축austerity’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90-1)


6장 현대화폐Ⅱ: 준화폐, 보조화폐, 대체화폐, 대용화폐 그리고 가상화폐 _169


자본주의의 민사적 재산법과 계약법은 금융네트워크에서 구성원들이 상호 간에 지급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합의한 사적인 차용증서가 계속 사용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준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실제로 대부분의 현대화폐는 은행시스템과 중앙은행이 민관합작으로 만들어낸다. 이렇게 해서 사적계약에 의한 채무가 공공화폐로 전환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모든 은행화폐는 발행 당시에는 ‘사적’화폐다. 교과서에서는 종종 이를 ‘내부화폐inside money’라고 부른다. 이를 ‘외부화폐outside money’라고 불리는 국가의 지폐와 주화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소개하고 있다. 주권화폐 및 규제를 받는 은행시스템의 프랜차이즈화 된 화폐로 이루어진 화폐적 공간 밖에서는, 사적으로 발행된 지불약속이나 차용증서가 금융네트워크에서 지급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업어음’ ‘예금증서’ ‘환어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준화폐는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오늘날 자본주의 화폐 및 금융시장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92-3)


지역의 보조화폐는 대개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는 화폐가 제한된 범위의 네트워크에서만 교환 매개물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경제적 거래의 지속과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행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비국가적 보조화폐는 전간기의 대공황 기간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 최초로 광범위하게 출현했다. 1931년에서 1935년까지 미국에서는 지역상점에서 재화구입에 사용할 수 있는 수백 종의 지역통화가 여러 단체에 의해 실험적으로 발행되었다. 대부분은 얼마 안 가서 사용이 중단되었고, 경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지방자치단체인 시 정부들이 발행한 ‘세금 선납증서tax anticipation scrip’는 1940년대 초반까지 일부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시 정부들이 근로자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하거나, 공공 서비스 제공에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고 나중에 사람들이 지방세를 납부하는 경우에 달러 대신 받아주기로 했던 것이다(Gatch, 2012). 95)


가상화폐Crypto-Currency는 명시적으로 국가화폐의 대안으로서 만들어졌다. 비트코인이 전통적인 화폐에 비해 우수한 점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암호로 짜인 공급의 유한성은 금의 자연적 희소성에 비견된다. 이는 국가의 명목화폐와 은행예금이 무한대로 공급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신용 버블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점이 비트코인뿐 아니라 급상승하는 가격과 투기에 편승하여 수없이 만들어진 ‘알트코인’의 타고난 숙명이었다. 둘째, 비트코인은 암호화 방식의 보안 때문에 주류 은행화폐와 전통적인 통화보다 안전하다. 하지만 해킹으로 인한 가상화폐 거래소의 몰락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셋째, 가상화폐는 소유자를 암호화하여 처리하기 때문에 국가가 발행한 현금과 마찬가지로 익명성을 가진다. 전통적인 인터넷 뱅킹에서 예금주의 실명이 기재된 예금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다크웹dark web’ 같은 범죄네트워크에서 불법 거래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98-9)


정보기술이 어떻게 돈과 사회를 변화시켜 우리를 현대국가의 중앙집권적인 지배로부터 구출할 것인지에 관한 거대담론이 존재한다. 폭넓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극단에 위치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이러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인터넷과 정보기술로 인해 비국가적 화폐가 번성할 것이라는 주장이 ‘시장’을 사회의 기본단위로 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시장이 없었다면 효용 극대화에 매진하는 개인들은 ‘분리된’ 채 존재했을 것이다(Orléan, 2014a). 다른 한 쪽에서는 같은 정보기술을 활용한 지역 보조화폐가 모든 공동체로 하여금 실업과 경제적 궁핍에 대응할 수 있는 재능을 마음껏 펼치도록 함으로써 잠재된 ‘사회적 자본’과 연대를 끌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세계에 대한 지역의 승리, 국가에 대한 공동체의 승리 그리고 독점 자본에 대한 협동조합의 승리를 꿈꾸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 역사에서는 ‘시장’화폐와 ‘공동체’ 화폐 모두가 한계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


화폐의 시장이론은 안정적 화폐가 무수한 경쟁 화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합리적 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상화폐의 교환가치 간 경쟁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시장이 해소해야 할 버블과 불안정성은 확대되고 있다. 지역화폐가 공동체의 신뢰와 경제적 활동을 촉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생존력이 높은 주류화폐의 ‘보완재’ 이상이 된다거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근거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견해 모두 화폐를 중앙집권적인 국가와 독립되어 각자의 ‘이상적’ 사회질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둘 다 화폐를 단지 경제교환에서 발생한 실물가치와 공동체의 결속에 내재된 실물적 사회의 힘을 나타내는 표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독점적 강제력을 보유하고 국가의 사회적 폭력이 점차 소멸되는 것은 대규모 사회와 지속가능한 화폐를 유지하기 위한 핵심요소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은 화폐가 단순한 교환 매개물이나 지급수단 이상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100-1)


7장 2008년 금융위기와 화폐의 문제 _188


1970년대 각국 정부가 케인스 처방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자, 총수요는 소비자 대출로 조달되었다. 이를 ‘민영화된 케인스 처방privatized Keynesianism’이라고 부른다(Crouch, 2009). 정부는 ‘재산 소유 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 시대를 열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이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구조를 만들어냈지만, 결국에는 2007년 서브프라임 위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Ingham, 2011). 주기적인 경제불안은 금융자산 시장에서도 계속되었으며, 결국 투기적 ‘버블’은 터져버리고 말았다. 두 가지 의문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제기되었다. 첫째, 위기에 기름을 붓는 은행시스템의 화폐창출 능력은 보다 엄격히 통제되거나 나아가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둘째, 비선출 중앙은행의 화폐창출 권한은 보다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하는 것일까? 두 가지 의문 모두 화폐창출, 통제 그리고 관리가 현대 민주주의 체제 내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103)


양적완화 시행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화폐의 ‘중립성’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커졌다. 양적완화의 목표 중 하나에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5장 참조). 금리인하 압력을 유지하기 위해 은행 준비금을 늘려주었던 조치는 정부의 채무부담을 완화했지만, 생산을 위한 투자와 고용을 자극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양적완화는 의도하지 않게 불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앙은행이 은행으로부터 국채를 재매입하기 위해 창출한 화폐는 국채의 수요를 증대시켜 국채가격을 끌어올리고 말았다. 국채 소지자들은 국채가격 상승으로 재산이 증가했고, 낮은 은행예금 금리를 피해 다른 자산에 투자를 확대했다. 결과적으로 주식시장에서 붐이 발생하고, 주택, 고급 승용차, 와인과 미술품 가격이 급등하고, 가상화폐 같은 위험자산 시장이 번성하게 되었다.  자본가들이 기피하는 생산적인 투자지출을 정부가 담당해야 한다고 했던 케인스의 주장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07)


베버는 자원의 객관적 가치를 효과적으로 평가하는 도구로서 화폐는 ‘경제적 생존투쟁’에 관한 규칙을 만드는 사회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역사에서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화폐를 인플레이션을 회피할 수 있을 수준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경쟁적이지만 상대적으로 동등한 이해관계자 사이의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20세기 후반 자본주의 국가에 집중된 권력으로 인해 조직화된 노동과 독점자본은 과도한 요구를 했고, 이는 ‘임금과 가격’의 연쇄적 상승을 초래했다. 브래튼우즈체제가 종식된 이후, 국제 자본시장과 외환시장에서의 투기는 가격의 급등락과 불안정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정부의 과도한 지출 조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정부를 침착하게 만든’ 측면도 있다. 그의 분석을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권한과 부의 불공평한 분배에 대한 면죄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본주의 통화시스템이 가진 결점을 치유하기 위한 제안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112-3)


8장 결론 _211


두 종류의 경제분석과 그 각각의 화폐이론 뒤에는 자본주의 지배구조에 관한 뜨거운 격론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으로 주류 경제학은 화폐공급은 경제의 장기적인 생산능력을 초과할 수도, 초과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기술이나 노동 같은 실물 생산요소만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므로, 화폐를 푼다고 생산요소의 투입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화폐가 이러한 실물요소에 앞서 팽창한다면 반드시 인플레이션이 뒤따를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광의의 케인스 학파와 이단적 전통을 따르는 경제학자들은 화폐를 가지고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화폐를 ‘양적으로’ 투입할 것이 아니라 쓰임새 있게 써야할 것이다. 또 민간기업이 실물경제에서 얻을 수 있는 노동력과 자원을 모두 사용할 수 없는 경우라면, 정부가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지출을 늘려야 한다. 115)


화폐를 자연세계나 적어도 사회영역 밖으로 몰아내려는 지칠 줄 모르는 이데올로기적 시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화폐가 처음 사용된 이래로 화폐는 생산의 ‘힘’으로서 경제활동을 자극하는 사회적 기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화폐공급의 급격한 증가,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정부지출에 필요한 자금조달의 급격한 증가가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완만한 인플레이션이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변하는 것은 십중팔구 정치적 불안과 정당성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구매력에 대한 신뢰를 짓밟고 만다. 문제의 핵심은 화폐의 창출과 지출이 사회가 필요한 유효수요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지 여부다. 이 유효수요의 수준은 모든 현존 자원을 사용하고 새로운 생산을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 정도다. 이를 달성하려면 우선 모델의 예측성을 높일 수 있는 제대로 된 경제이론과 화폐관념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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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소명으로서의 정치 정치+철학 총서 3
막스 베버 지음,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 / 후마니타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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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9

1장. 국가 11

1. 정치란 무엇인가 11

과거든 현재든 정치적 결사체들이 다루지 않는 업무란 거의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즉, 정치적 결사체들(오늘날의 표현으로는 국가이지만, 역사적으로 근대국가 이전의 조직체들까지 포함해)만이 언제나 늘 배타적으로 수행하는 고유 업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모든 정치적 결사체와 마찬가지로 근대국가란, 국가만이 하는 고유 업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만이 가진 특수한 수단을 준거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데, 그 수단이란 곧 물리적 폭력/강권력Gewaltsamkeit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정치’란 국가들 사이에서든 국가 내 집단들 사이에서든, 권력에 관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또는 권력 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분투노력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권력을 추구한다. 그가 추구하는 권력은 다른 어떤 목적(이상적일 수도 있고 혹은 이기적일 수도 있는)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um ihrer selbst willen일 수도 있다. 7-8)

# 베버가 말하는 ‘사회학적 관점’이란 이 책을 읽고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당시 국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강한 규범성을 가진 법학에서 주로 다루어졌는데, 그와는 달리 베버는 국가 현상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행위로 보았고 그것이 갖는 의미와 과정, 결과에 주목했다. 따라서 베버가 국가, 지배, 복종, 권력, 폭력, 데마고그, 카리스마 등의 개념을 사용할 때 대부분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정치적 실재를 가리키기 위한 것이지 좋고 나쁨의 규범적 판단을 전제한 것이 아니다.

2. 권위: 지배의 정당화 15

원론적으로 보면, 어떤 지배자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성화된 관습geheiligten Sitte의 권위다.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를 가로지르는 영속적 존재’ewig Gestrigen로 받아들여지는 권위를 뜻한다. 다음으로 비범한 개인의 천부적 자질Gnadengabe, 즉 카리스마Charisma에 의거한 권위를 들 수 있다. 이는 신의 계시나 영웅주의 혹은 그가 가진 특출한 지도력을 근거로 사람들이 한 개인 지도자에게 완전한 헌신과 신뢰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합법성’Legalität에 의거한 지배가 있다. 이는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에 대한 신뢰,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부여된 객관적 ‘권한’Kompetenz, 그리고 법규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는 신념에 따른 것으로, 근대적 ‘공무원’Staatdiener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갖게 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형태를 가리킨다.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Beruf이라는 개념은 바로 '카리스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9-10)

3. 행정: 지배의 조직화 19

어떤 경우이든 [지배의 관철을 위해서는] 행정Verwaltung의 지속적 역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정당한 권력을 갖게 된 통치권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둘째, 필요한 경우 통치자는 물리적 폭력/강권력 행사에 수반되는 인적・물질적 재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신분제적으로’ 조직된 정치 결사체에서 군주는 자립적 기반을 가진 ‘귀족’Aristokratie의 도움으로 통치하며, 따라서 귀족과 지배를 공유한다. 반면 행정 수단을 직접 통제하는 유형의 통치자는 가내 예속인들 아니면 평민들을 활용하는데, 이들은 무산 계층이며 아무런 사회적 명예도 없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도 완전히 통치자에게 예속되어 있으며 어떤 독자적 권력 기반도 없다. 이 유형에는 모든 형태의 가부장적이고 가산제적인 지배와 술탄적 전제정sultanistischer Despotie, 그리고 [근대의] 국가 관료제가 속한다. 고도로 합리화된 형태를 가진 근대국가의 관료제가 특히나 이 유형에 잘 맞는다. 10, 12)

4. 직업으로서의 정치 24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für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해’von [혹은 정치에 의존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이 결코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대개의 경우 물질적인 관심 때문에 일을 한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도 내적인innerlich 의미에서는 ‘정치에 의존하는 삶’sein Leben daraus을 산다. 그는 자기가 행사하는 권력을 소유하는 것 자체를 즐기거나 아니면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신의 삶에 의미Sinn를 부여함으로써 내적 균형과 자긍심을 함양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적 의미에서 볼 때 대의를 위해 사는 진지한 사람은 곧 이 대의에 ‘의존해’ 산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를 ‘위해’ 산다는 것과 정치에 ‘의존해’ 산다는 것 사이의 구별은 다른 것이 아닌 경제적 측면에 관계된 문제다. 누군가 정치를 ‘위해’ 살 수 있으려면, 일견 사소해 보이는 경제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15)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에 의존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들에 의해 국가나 정당이 운영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정치 지도층이 ‘금권정치적으로’plutokratische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사적 재산이 없는 정치가가 정치를 통해 자신의 경제적 생계 확보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뿐 ‘대의’에는 전혀 혹은 주된 관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산가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 생활의 경제적 ‘안정성’을 그의 인생 설계에서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을 안다. 거꾸로 재산이 없고 따라서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집단에 속하는 계층이야말로 ― 물론 이 계층만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 가장 철저하고 절대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의 주창자들일 수 있다. 비정상적인 시기, 즉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러하다. 따라서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정치적 지도층의 길을 열어 주고자 한다면 이들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 16)

5. 직업으로서의 관료 34

근대적 관료층은 장기간의 예비교육을 통해 전문적 훈련을 받은 고급 정신노동자로 발전했다. 이들은 정직성과 청렴성을 강조하는 직업 의식 내지 신분적 명예심ständischen Ehre을 가진 신흥 계급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 정신이나 신분적 명예심이 없었더라면 필연적으로 이들은 엄청난 부패와 저속한 속물근성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간 국가의 경제적 역할이 지속적으로 증대해 왔고, (특히 사회주의의 흥기와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증대할 것임을 고려하면 국가 관료의 부패와 속물근성은 국가 자체의 작동을 멈추게 할 정도로 위험하다. 종신직 직업 공무원이 없었던 미국의 경우 과거에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수십만 명의 관리들을 갈아치우는 약탈 정치가들의 아마추어 행정이 지배했다. 그러나 이런 아마추어 행정은 (1883년의) 공무원 제도 개혁에 의해 이미 오래전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는 순전히 행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의 기술적인 불가피성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18)

6. 정치 주변의 직업 집단들 43

정당이 출현한 이래 서양 정치에서 변호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당정치는 극히 단순화해 말하자면 이해 당사자에 의해 정치가 운영된다는 것을 뜻하는데, 이해 당사자인 고객에게 유리하도록 소송을 이끌어 가는 것, 이것이 곧 숙련된 변호사의 직업적 능력이다. 확실히 그들 변호사의 손에서 논리적으로 취약한 사건(이런 의미에서 ‘나쁜’schlechte 사건)도 결국에는 성공으로 이어진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좋게’gut 처리된다. 그러나 그는 또한 논리적으로 ‘강력한’ 근거를 만들어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좋은’ 사건을 ‘유능하게’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전문 관료는 데마고그가 아니며 데마고그의 기능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데마고그가 되려 한다면 대체로 그는 매우 나쁜 데마고그가 되고 만다. 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적 사명에 비춰 볼 때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도 비당파적 자세로) 단지 ‘행정’만 해야 한다. 24-5)

정치 지도자의 행동은 관료와는 전혀 다른, 아니 그와는 정반대되는 성격의 책임 원칙을 따른다. 관료의 명예는, 그가 보기엔 잘못된 명령을 그의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급자가 고수할 경우, 그 명령자의 책임을 떠맡아 이 명령이 마치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듯이 성심을 다해 정확히 수행할 능력에 기초하고 있다. 관료가 이런 규율을 따르지 않거나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한다면 전체 국가기구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에 반해 정치 지도자, 즉 지도적 역할을 하는 정치가의 명예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지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는 이 자기 책임을 거부할 수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할 수도 없으며 전가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타고난 관료인 사람,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관료적 품성을 타고난 사람이야말로 나쁜 정치가일 수밖에 없으며, (책임 개념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기준으로 볼 때는) 무책임한 사람이고 그런 의미에서 도덕적으로 저열한 정치가들이다. 25-6)

진정으로 훌륭한 저널리스트의 업적은 어떤 학문적 업적 못지않게 상당한 ‘지적 정신’Geist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특히나 학자와는 전혀 다른 조건, 즉 지시에 따라 즉시 작성되고 또 즉각적인 효과를 갖는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존경할 만한 저널리스트의 책임성 내지 책임감은 학자보다 훨씬 크며 사실 평균적으로 봐도 학자보다 좀 더 높다는 사실은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언론의 무책임한 행태―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가 사람들의 뇌리에 계속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에 수반되는, 다른 직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유혹들과, 오늘날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며 부딪치는 다른 여러 조건들 때문에, 일반 대중은 언론을 경멸스러움과 비겁한 소심함이 뒤범벅된 것으로 간주하기 쉽다. 아울러 현직 저널리스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줄어든 반면 자본주의적 언론 재벌의 정치적 영향력은 꾸준히 증대하고 있다. 26-7)

2장. 정당 59

1. 명사 정당 체제 59

처음에는 정당이라는 단어가 순전히 귀족들의 추종자 집단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영국이 좋은 예이다. 어느 귀족이 어떤 이유에서든 당을 바꾸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그와 함께 다른 당으로 넘어갔다. [1832년] 선거법 개정 이전까지만 해도 국왕뿐만 아니라 거대 귀족 가문들도 엄청난 수의 지지자들을 고객으로 삼고 있었다. 귀족 정당과 매우 밀접한 연계를 가졌던 이 유명한 시민들의 정당, 즉 명사 정당Honoratiorenparteien은 중간계급들의 영향력 신장과 함께 나란히 발전했다. ‘교양과 재산’Bildung und Besitz을 갖춘 집단의 출현 역시 서양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는데, 이들은 지적인 인물의 리더십하에서 여러 정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계급적 이해나 가문의 전통 혹은 순전히 이데올로기가 이들 정당을 이끌었다. 이 단계에서 정당은 아직 지역적 범위를 가로질러 조직된 상설 결사체가 아니었다. 단지 의회 의원들에 의해 정당으로서의 결속은 유지되었다. 의원 후보의 공천은 지방의 명사 엘리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31)

2. 지도자와 머신이 주도하는 정당 체제 65

명사들의 지배와 의원들의 주도적 역할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의회 밖에 있는 ‘전업’ 정치가들이 정당 조직을 손에 넣었다. 외형상 이 모든 것은 광범한 민주화의 효과라 할 수 있다. 당원들이 모여 출마할 공직 후보를 결정하고 (전당대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상급 대의기관에 보낼 대의원을 선출한다. 물론 권력은 조직 안에서 일상적으로 당무를 수행하는 자와, 조직 운영을 위해 재정적으로나 인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자들의 손에 있다. 부유한 후원자들이나 태머니홀Tammany Hall처럼 강력한 정치적 기득 이익을 가진 권력 집단의 지도자가 대표적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인적 기구human apparatus―흥미롭게도 영어권에서는 이를 ‘머신’Maschine이라고 부른다―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 이 기구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자들이, 의회 의원들을 제어할 수 있고 상당 정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정당의 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3)

당의 추종자, 특히 당직자와 당 사업가는 그들의 지도자가 승리하면 관직의 형태로든 아니면 다른 식으로든 보상이 돌아올 것을 기대한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은 진부한 것들로 구성된 한 정당의 추상적 정책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보다는 (확신을 갖고 그래서 헌신하고자 하는) 어떤 한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다. 그러나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가 없을 때마다 어김없이 역전의 시도가 나타난다. 지도자가 있어도 당 명사들의 허영심과 기득 이익 때문에 온갖 종류의 양보를 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많은 사회민주당 인사들은 사회민주당이 바로 그런 ‘관료제화’Bürokratisierung에 굴복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들 ‘관료’는 강력한 데마고그적 능력을 가진 인물에게는 비교적 쉽게 순응한다. 자신들의 물질적・이념적 이해관계가 결국엔 이 지도자를 통해 확보할 수 있을 당의 권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 자체가 내적으로 좀 더 큰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34)

3. 영국의 정당 체제: 코커스 시스템 69

영국의 정당 조직은 거의 순전히 지역의 명사들로 이루어졌는데, 1868년 이후 ‘코커스’Caucus 시스템이라는 것이 발전했다. 그 계기는 선거법의 민주화에 의해 촉발되었다. 즉,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민주적인 외양을 갖춘 거대한 기구를 창설해야만 했다. 동시에 각 구역마다 선거 조직을 만들고, 이런 조직을 중단 없이 가동해야 했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엄격하게 관료화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점차 유급 관료가 고용되기 시작했다. 당 정책의 대표자들은 지역의 선거위원회에서 선출되었다. 이 위원회는 유권자의 10퍼센트 정도를 동원할 수 있었다. 위원회를 움직이는 힘은 재정 기여의 책임을 맡은 지역 인사들에게서 나왔다. 이들은 어디서나 풍부한 이권 획득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방 정치에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새롭게 출현한 머신은 더는 의회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모든 권력은 소수의 손에, 궁극적으로는 당의 정상에 서있는 단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었다. 36)

# 1867년 영국은 오랫동안 논란만 거듭했던 2차 선거법 개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 선거에서 새롭게 투표권을 갖게 된 유권자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이때 조지프 체임벌린과 비국교회 목사인 프랜시스 슈나도스트Francis Schnadhorst는 버밍엄 자유당협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선거운동을 했다. 보수당의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이를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코커스라고 불렀다. 이때의 코커스라는 표현은 보스가 중심이 된 미국의 지방 정당 조직인 머신을 가리킨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실상의 대중 투표제적 독재자가 의회 위에 군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지도자는 어떻게 선발되는 것일까? 세계 어디서나 결정적인 기준으로 간주되는 의지력을 논외로 하면, 여기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히 데마고그적 웅변의 힘이다. 현재의 상황을 우리는 ‘대중적 정서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기초한 독재’Diktatur, beruhend auf der Ausnutzung der Emotionalität der Massen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영국 의회의 매우 잘 발달된 위원회 체제이다. 그것은 지도부에 가담할 의사가 있는 모든 정치가를 위원회 활동에 합류하도록 강제한다. 위원회 활동을 보고하고 공개적으로 논쟁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중요 각료들은 지난 수십 년간 매우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실무 훈련을 거쳤다. 이는 위원회가 실제로 유능한 지도자들을 선발하고 순전히 선동가이기만 한 사람을 배제하는 그런 교육기관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37-8)

4. 미국의 정당 체제: 엽관 체제와 보스 76

그러나 미국의 정당 조직과 비교하면 영국의 코커스 제도는 약과다. 미국에서 대중 투표제적 ‘머신’이 그렇게 일찍부터 발전했던 이유는,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만, 대중 직접 투표의 원리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그리고 이 점이 중요한데) 관직 임면권을 가진 최고 책임자이며, ‘삼권분립’에 따라 직무 수행이 의회로부터 독립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 승리의 보상은 관직에 따른 봉록의 형태를 갖기 쉬웠다. 그 결과는 ‘엽관제’spoils system로서, 그것은 앤드루 잭슨에 의해 체계적으로 활용되어 하나의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승리한 후보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연방 관직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엽관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당들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신념이나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다. 선거 시에는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꾼다. 38)

대중 투표제적 정당 머신에 기초한 이런 엽관 체제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당 ‘보스’이다. 보스는 자기 부담과 자기 책임 아래 지지 표를 만들어 내는 정치 영역의 자본주의 기업가이다. 당 조직의 운영 자금 대부분을 조달하는 것도 보스다. 보스는 재계의 거물들이 내는 기부금을 직접 수령해 오는 역할을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전형적인 보스는 지극히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사회적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다. ‘상류사회’에서 이 ‘프로페셔널’professional은 경멸의 대상이다. 그는 오로지 권력을 추구하는데, 그것은 권력의 재원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막후에서 활동하는데 이것이 영국의 리더와 다른 점이다. 사람들은 그가 공개 석상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보스는 어떤 확고한 정치적 [이념 내지] ‘원칙’Prinzipien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이념적] 원칙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무엇으로 표를 끌어 모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39-40)

5. 독일의 정당 체제: 관료 지배 83

지금까지 독일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적인 요인들 중 첫 번째 요인은 의회의 무기력함이다. 그 결과는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어떤 사람도 의회에 긴 시간을 몸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이 두 번째 요인은 첫 번째 요인에 영향을 끼쳤는데―훈련된 전문 관료층이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 데 있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관료를 가졌다. 그 결과는 전문 관료층이 단순히 전문 관료직뿐만 아니라 각료직까지도 추구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요인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정치적 신념을 가진 [이념] 정당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정당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정당―가톨릭중앙당과 사회민주당―은 소수당이었고, [중앙당은 신교 국가인 독일에서 소수인 가톨릭을 내걸었고, 사회민주당은 노동계급에만 의존하려 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수당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직업정치가들은 권력도 없고 책임도 없이 저급한 명사로서의 역할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41-2)

6. 전망: 어떻게 할 것인가 87

달리 선택은 없다. ‘머신’에 기반한 지도자 민주주의Führerdemokratie mit ‘Maschine’ 아니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führerlose Demokratie가 있을 뿐이다. 후자는 소명이 없는 ‘직업 정치가’, 지도자의 필수 요건인 내면의 카리스마적 자질이 없는 직업 정치가들의 지배를 뜻한다. 이들의 지배는 당내 반대파들이 보통 ‘도당’Klüngels의 지배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통령이 의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투표로 선출된다면 지도자에 대한 욕구를 배출할 유일한 안전밸브는 독일 대통령직이 될 것이다. 만약 대중 투표제적인 독재자plebiszitäre Stadtdiktator가 등장할 수만 있다면, 검증된 업무 수행 능력을 가진 지도자가 부각되고 선출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의 모든 정당―특히 사회민주당을 포함해―이 보여 주고 있는 지극히 소시민적인 태도로서 지도자에 대한 적대감kleinbürgerliche Führerfeindschaft이다. 이로 인해 향후 정당 조직이 어떻게 될지,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44)

3장. 정치가 92

1.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 92

정치가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 가지 자질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대의에 대한 헌신을 뜻하는] 열정Leidenschaft, [선의를 내세워 변명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의] 책임감Verantwortungsgefühl, 그리고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균형적 현실 감각Augenmaß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 및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Dämon에 대한 열정적 헌신을 가리킨다. 단지 열정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는―그것이 제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정치가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다. ‘대의’에 대한 헌신과 함께,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끄는 결정적인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적 현실 감각이다. 균형적 현실 감각이란 내적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사람에 대해 거리를 두는 능력을 말한다. 46)

정치가의 인격이라 할 만한 ‘개성적 힘’Persönlichkeit의 ‘강함’Stärke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이상의 자질을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정치가는 자신의 내부로부터 스스로를 위협하는 사소하고도 지극히 인간적인 적과 싸워 이겨야만 하는데, 그것은 바로 허영심Eitelkeit이다. 허영심은 대의에 대한 그 모든 헌신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 모든 거리감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적이다. 허영심은 매우 널리 퍼져 있어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속성이다.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대학과 학자들의 세계에서 허영심은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러나 학자들의 경우 허영심 때문에 호감을 얻지 못한다 해도 그 때문에 지식을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폐해가 적다. 정치가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허영심은 정치가를 '객관성의 결여'와 (흔히 이것과 동일시되는) '책임성의 결여'라는 두 죄악 가운데 하나 또는 둘 다를 범하도록 유혹하는 아주 강력한 힘이다. 47)

권력을 향한 야심은 정치가가 일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정치가가 권력을 추구하고 또 권력을 활용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그 대의가 어떤 성격을 가져야 하는가는 신념의 문제이다. 그가 헌신할 수 있는 목표는 국가적 대의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인류애 전반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윤리적이거나 문화적인 대의일 수도 있고, 현세적이거나 종교적인 대의일 수도 있다. 그는 ‘진보’Fortschritt에 대한 강한 믿음에 의해 열의를 발휘할 수도 있고, 아니면 냉정하게 판단해 이런 종류의 믿음을 거부할 수도 있다. 어떤 ‘이념/이상’Idee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근본적으로 이념에 헌신한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거부하면서 일상의 구체적 목표에 헌신할 수도 있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항상 신념Glaube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적으로는 아무리 당당한 정치적 성공이라 하더라도 이 성공에는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울 것이다. 이는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8)

2. 대의와 신념 그리고 도덕 97

산상수훈이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전부 아니면 전무에 있다. [「마태복음」 19장 22절에 있는] 한 부유한 청년의 사례에서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서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명백하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내놓아라, 모든 것을 무조건’이라고 말한다. [이와 달리] 정치가라면, 만약 그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요구가 아닌 한 그 명령은 부당하고 사회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응수할 것이다. 과세, 징수, 몰수처럼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강제와 명령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한 윤리적 명령은 다른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 [이 세상을 영원한 것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현실도피적] 무우주론적akosmistischen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51)

3.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 105

[결과를 묻지 않는 것] 그것이 결정적인 점이다. 윤리적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두 원칙을 따른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gesinnungsethisch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verantwortungsethisch 원칙이다. 책임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인간이 가진 평균적 결함을 고려한다. 그는 인간의 선의와 완전함을 전제할 어떤 권리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이 ‘책임’을 느끼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질서에 항의하는 것과 같은 순수한 신념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대한 것뿐이다. 이 불꽃을 늘 새롭게 되살리는 것만이 그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이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의 관점에서 보면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본받을 만한 모범을 보인다는 가치밖에는 가질 수 없는 행동이다. 52-3)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 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적으로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적으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위험한 수단과 부정적 결과를 ‘정당화’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언제이며, 또 어느 정도 정당화해 줄 수 있는지를 분별해 주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즉 목적에 의한 수단의 정당화라는 이 문제에서 신념 윤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신념 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우연적으로 보이는 현세에도 신의 의지가 작용한다고 보는] 우주론적 윤리에 기초한 ‘합리주의자’Rationalist이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적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53-4)

4. 정치의 윤리적 문제가 갖는 독특함 110

[고통과 악, 죽음 등의 현상을 신의 존재에 의거해 정당화하려는] 신정론Theodizee이 안고 있었던 가장 오래된 문제는 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전지전능하면서 동시에 자비롭다고 믿어지는 [신의] 힘이 어떻게, 부당한 고통과 처벌받지 않는 불의 그리고 개선의 여지가 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찬 이 불합리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었는가? 아마도 그 힘이 전지전능하지도 자비롭지도 않을 수 있다. 아니면 전혀 다른 보상과 보복의 원칙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원칙들이란 형이상학적으로나 해석 가능한 것 혹은 영원히 해석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문제, 즉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에 대한 경험이 결국 모든 종교 발전을 추동한 힘이었다. 가톨릭 윤리는 [청빈, 청결, 순명 같은] 특별한 ‘복음적 권고’consilia evangelica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피를 흘려서도 안 되고 영리 행위를 해서도 안 되는 수도사 옆에는 믿음이 깊은 기사가 있다. 그리고 그 기사에게는 전쟁과 영리 행위가 허용된다. 55-6)

5. 혁명적 상황에서의 정치 윤리 115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계급투쟁이라는 맥락에서 내적 보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추종자들의 증오심을 만족시키는 것, 복수하고자 하는 추종자들의 열망을 충족하는 것, 특히나 그들의 분개를 정당화하는 것, 혹은 일종의 사이비 윤리라 할 만한 자신들의 옳음을 정당화하는 것, 적을 비난하고 그를 이단으로 몰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것이 그것이다. 외적 보상에는 모험, 승리, 전리품, 권력, 봉록이 있다. 지도자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자신의 인적 기구가 원활하게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의 성공 여부는 자신의 추종자와 그에게 필요한 적위대, 밀정들, 선동가들에게 앞서 지적한 보상을 지속적으로 제공할 가능성에 달려 있다. 그런 동기들―윤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저열하고 저속한―을 제어하는 오로지, 지도자 자신의 인물됨과 그가 가진 대의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믿음이 추종자 가운데 일부를 고무할 수 있는 동안만 가능하다. 그들 모두 혹은 대다수를 그렇게 만들 수는 결코 없겠지만 말이다. 57-8)

어떤 종류의 것이든 정치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 특히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치가 가진 윤리적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치가는 모든 폭력/강권력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무우주론적 박애와 자비의 위대한 대가들―이들이 [예수처럼] 나사렛에서 왔든, [성 프란체스코처럼] 아시시에서 왔든 또는 [석가처럼] 인도의 왕궁에서 왔든 상관없이―이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은 없다. 그들의 왕국은 ‘현세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현세에서 활동했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영혼 또는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는, 이를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정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과업을 갖고 있는데, 이는 폭력/강권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58)

신념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책임 윤리를 따르는 것이 옳은지 여부, 그리고 언제는 신념 윤리를 따라 행동해야 하고 또 언제는 책임 윤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분명히 가려서 지시할 수 없다. 그러나 결과에 대한 책임성을 진심으로 그리고 충심으로 느끼며 행동하던 한 성숙한 인간이 어떤 한 지점에 와서 [마르틴 루터가 1521년 보름스의회에 나와 황제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 뒤 최종적으로 말했듯이] “이것이 나의 신념이다. 나는 다른 내가 될 수 없다! [신의 가호를, 아멘!]”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인간적이며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내적으로 깨어 있다면 언젠가 우리 자신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는 서로 절대적 대립 관계가 아니다. 그 둘은 서로에 대해 보완관계에 있으며 이 두 윤리가 결합될 때에야 비로소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질 수 있는 참다운 인간존재가 만들어질 것이다. 59-60)

결론. 비관적 인간 현실 속의 정치가 122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0년 후에는 이미 반동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거라는 두려운 생각을, 나는 갖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표면적으로 어느 집단이 승리하든 상관없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여름의 만개가 아니라 얼음이 뒤덮이고 어둠과 고난이 가득 찬 극지의 밤이다.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살아남게 될까? 내적으로는 어떤 마음 상태가 되어 있을까? 비분강개해 있을까, 아니면 속물근성에 빠져 세상사와 자신의 직업을 그냥 그대로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들 자신은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고 있다고 믿었겠지만, 그 말의 가장 깊은 내적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갖지 못했다. 이런 사람들은 차라리 소박하고 순수하게 사람들 사이에서 우애나 도모하고 그저 자신의 일상적 임무에 열심히 몰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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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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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살아남고 진화하기 위해서


처음 동물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경쟁적 속성에만 집중한 나머지 의사소통 능력이나 친화력이 동물뿐 아니라 우리의 인지 발달에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대를 조종하는 기술, 속이는 기술의 향상이 동물계의 진화적 적응력을 설명해주는 근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발견한 것은 똑똑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의 감정은 보람차거나 고통스럽다거나 매력적이라거나 혐오스럽다고 느낄 때 아주 큰 역할을 수행한다.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를 선호하는 성향은 연산능력 같은 인지를 형성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의도나 욕망, 감정 등 인간에 대한 이해와 기억력, 전략능력이 아무리 고도로 발달하더라도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과 결합하지 않으면 혁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조건이 일정하다면 자기가축화가 타인과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도 향상시킨다는 점이다. 18)


# 자기가축화. 야생종이 사람에게 길드는 과정에서 외모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간에게도 사회화 과정에서 공격성 같은 동물적 본성이 억제되고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자기가축화 과정이 나타난다


사람(이 책에서 ‘사람’은 호모 사피엔스를 뜻한다)은 네안데르탈인처럼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다가 친화력이 높아지면서 100명이 넘는 큰 규모의 무리로 전환되었다. 타인에 대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 종은 갈수록 복잡한 방법으로 협력하고 소통했고 이로써 문화적 역량도 새로운 경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 종은 누구보다 빠르게 혁신할 수 있었고 또 그 혁신을 공유할 수 있었다. 다른 인류는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친화력에도 어두운 면은 존재한다. 우리 종에게는 우리가 아끼는 무리가 다른 무리에게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위협이 되는 무리를 우리의 정신 신경망에서 제거할 능력도 있다. 그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연민하고 공감하던 곳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공감하지 못하므로 위협적인 외부인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관용적인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종이다. 19)


1 생각에 대한 생각


우리에게는 '마음이론' 능력이 있어서 지구에서 가장 정교한 방식으로 타인과 협력하며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문제에서 마음이론이 중대하게 작용한다. 이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수백 년에서 수천 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언어는 중요한 능력이지만 듣는 이가 우리가 하는 말을 모른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능력은 또한 우리 존재의 정수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추론할 능력이 없다면 사랑도 그림책에서 오려낸 그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마음이론, 즉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은 고통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힌다는 확신이 들 때 증오는 더 뜨겁게 불타오른다. 모든 감정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렌즈를 통해서 더 크게 자라난다. 감정은 우리의 가슴에, 육감에, 손끝에 있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에 있으며 대개는 타인의 생각에 대한 나의 추측과 추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23-4)


사람 아기의 경우에는 백이면 백이 아주 초기에, 같은 월령에, 그리고 말을 배우거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기 전인 어느 순간 갑자기 손을 사용하는 능력에 번쩍 불이 붙는다. 한쪽 팔과 집게손가락을 뻗는 이 단순한 동작은 생후 9개월이면 시작되고, 사라진 장난감이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아름다운 새를 가리키는 엄마의 손끝을 따라가는 능력(침팬지는 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 협력적 의사소통이 사람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능력인데, 침팬지의 마음이론 별자리에는 이 능력이 없다. 사람 아기는 첫 단어를 말하거나 자기 이름을 배우기 전에 협력적 의사소통을 할 줄 안다. 우리가 기쁠 때 타인은 슬퍼할 수 있으며 역으로 타인이 기쁠 때 우리가 슬플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가 나쁜 행동을 하고 거짓말로 덮는 법을 배우기 전에, 혹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부터, 우리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습득한다. 25)


사람 아기의 특별한 점은 우리가 몸짓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틀림없이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어떤 동작이든 가능했다. 토마셀로는 사람 엄마와 아기를 대상으로 아기의 엄마에게 컵에 블록을 하나 넣으라고 했다. 아기들은 엄마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분명히 자기를 도와주려는 행동이라고 추측하고 블록이 담긴 컵을 선택했다. 같은 놀이를 개와 했을 때, 개도 똑같이 행동했다. 사람 아기와 똑같이 내가 그들을 도와주려 한다고 이해했으며, 어떤 새로운 동작이든 선의로 받아들였다. 개와 사람 아기 모두 눈을 마주치고 다정한 목소리를 낼 때 더 주의를 집중하는 듯했다. 심지어 둘 다 목소리의 방향까지 이용할 줄 알았다. 사람 아기는 첫돌 무렵이면 목소리의 방향을 인식하고, 낱말이 특정 물건과 행동을 가리킨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부 개가 새로운 낱말이 주어졌을 때 시행착오 없이 바로 그 의미를 유추해내는 이유일 수도 있다. 29)


2 다정함의 힘


내 지도교수인 리처드 랭엄은 개와 닮은 러시아 여우에 관한 내 이야기에서 훨씬 더 심오한 의미를 찾아냈다. 원래는 겁 많고 호전적이던 어떤 여우 개체군을 오로지 사람에게 친화적인 태도 하나를 기준으로 선택 번식시켰는데, 단 몇 세대 만에 다른 형질에도 우발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면, 인지기능의 변화도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야기한 것은 펄럭이는 귀나 동그랗게 말린 꼬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사를 읽어내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사람 아기가 가진 마음이론 능력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다. 협력적 의사소통에서 상대방의 의도를 잘 읽어내는 개가 이 기술을 새끼에게 물려주는 데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능력도 얼룩무늬 털처럼 후대에 유전되는 형질일까? 지금까지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실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직접 시베리아로 가서 여우를 대상으로 테스트해보라는 랭엄의 제안에 설득되었다. 38-9)


만약 사람이 개를 선택한 것이 그들의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 때문이었다면, 친화력만을 기준으로 선택된 이 여우들은 내 손짓에 응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우들에게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이 있었다. 강아지들 수준 정도가 아니었다. 한 수 위였다. 랭엄의 생각이 옳았다. 이런 유형의 놀이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친화력 좋은 여우들은 우리의 손짓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개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반면에 보통 여우들은 몇 달에 걸쳐 집중적으로 사회화 훈련을 받았는데도 우리의 손짓에 응한 확률이 겨우 절반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은 증진되었지만, 반면 인지기능에 관해 예상했던 가설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즉, 인지기능 같은 사회적 지능은 두려움이 친화력으로 대체될 때 우발적으로 발생한 또 다른 능력이었다. 여우 실험은 우리가 개에게서 관찰한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가축화의 산물임을 입증하는 강력한 근거가 되어주었다. 40-1)


우리는 또한 개에게서 발견했던 이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단순히 성견이 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사람과 상호작용해 생긴 결과물이 아니었음을 발견했다. 각기 다른 양육 환경과 각기 다른 월령의 강아지들을 테스트하면서 우리는 심지어 가장 어린 강아지가 손짓을 이해하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생후 6주에서 생후 9주 사이의 강아지들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기본 손짓은 물론, 전에는 본 적 없는 새로운 손짓과 몸짓 실험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 결과가 인상적인 이유는 생후 6주인 강아지는 아직 뇌가 완전히 발달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걷기를 배우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강아지들은 시각적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섰다. 강아지들은 사람의 목소리 방향을 이용해서 먹이를 찾을 줄도 알았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해 먹이를 찾는 능력은 심지어 성견보다 나았다. 즉, 개의 모든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은 강아지 때부터 이미 존재하며, 사람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욱 향상된다. 41)


3 오랫동안 잊고 있던 우리의 사촌


보노보 집단에서는, 야생에서건 사육소에서건, 수컷 우두머리가 없다. 그 결과 많은 과학자는 암컷이 보노보 무리의 대장이라고 생각했다. 아기 보노보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기 침팬지는 모르는 누군가가 주는 음식을 함부로 받아먹지 않으며, 덩치 큰 수컷은 특히 더 경계한다. 따라서 침팬지 무리 구성원들의 서열을 평가할 때는 아기 침팬지의 반응을 고려해봤자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한다. 하지만 보노보들은 행동과 상호작용 면에서 침팬지들과 달리 타고난 무언가가 있었다. 놀랍게도 아기 보노보가 근처에 앉아 있을 때 보노보 성체 수컷들이 먹이를 외면하고 달아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눈에 띄었다. 서열상 상위에 속하는 보노보 중에는 무리 안에 어미가 있는 아기들도 있었다. 롤라 야 보노보에서 어미 보노보가 키우는 아기 보노보들은 일부 수컷 성체보다 서열이 높았다. 또, 아기 보노보보다 서열이 높은 수컷 성체라도 아기가 주위에 있을 때는 항상 행동을 조심했다. 50)


랭엄은 보노보 집단이 친화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화한 이유를 이들이 서식하는 콩고강 남부가 자원이 풍부하여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연구는 보노보 서식지의 열매와 초본이 풍부함을 시사한다. 보노보 암컷은 서열과 상관없이 모두 일일 필요 열량을 충족할 수 있지만, 침팬지는 서열이 높은 암컷들에게만 매일 충분한 먹이가 보장된다. 보노보 암컷은 암컷 친구를 챙길 여력이 있지만 침팬지 암컷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을 수 없는 환경이다. 친화력 좋은 보노보 암컷들은 서로 돕고 살 수 있어 수컷의 공격성을 감수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또한 공격성이 가장 낮은 수컷과 짝짓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컷 보노보에게도 친화력은 승리의 전략이었다. 암컷의 승리가 어느 정도로 완전하냐면, 수컷이 암컷을 만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어머니를 통하는 것일 정도다. 이는 암컷의 다정한 수컷 선호가 다정한 사회의 진화를 야기하는 선택압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사례다. 51-2)


보노보에게는 자기가축화 징후에 속하는 일부 외형적 특징이 있다. 하지만 보노보가 정말로 자기가축화되었다면 다음의 특성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1. 보노보는 같은 무리의 구성원들에게 침팬지보다 더 큰 관용을 보여야 하며,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상황에서도 그래야 한다. 2. 보노보에게는 공격성을 방지하는 생리적 기제가 있어야 한다. 3.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더 유연한 협력적 의사소통 기술이 있어야 하며, 이는 관용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생리적 기제의 부산물이어야 한다. 우리의 실험에서 보노보는 낯선 이에게 공격적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들에게 더 끌린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훨씬 더 큰 포용력을 지닌 종인 셈이다. 동물 가축화 실험에서 친화력이 상승할 때 가장 초기에 변화를 보이는 것이 세로토닌의 농도다. 이것은 보노보에게 공격성을 방지하고 친화력을 증진시키는 생리적 기제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가축화된 모든 동물에게서 매우 흡사한 양상이 나타난다. 53-4)


4 가축화된 마음


우리나 호모 속 다른 사람 종의 식단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 50만 년 동안 살았던 모든 사람 종이 불을 다루고 조리한 음식을 먹고 장거리를 달리고 도구를 사용해 동물을 죽이고 도살했을 것이다. 뇌 크기나 신경세포 밀도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네안데르탈인 같은 다른 사람 종들에게도 우리의 범주에 속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어쩌면 우리와 비견되는 언어능력도 지녔을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우리의 기술 수준이 다른 사람 종보다 더 나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와 나머지 사람 종 사이에 중요한 한 가지 다른 점이 남는다. 약 5만 년보다 조금 더 전 쯤에 우리 종이 사회연결망의 급속한 확장을 경험했다는 점 말이다. 사회연결망은 무엇보다 기술 발전에 필수 요소다. 더 큰 사회연결망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구 집단은 그저 기술의 진보가 멈추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집단이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 영장류 학자 토마셀로는 무인도에 혼자 남겨진 어린이는 침팬지와 아주 흡사한 문화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63)


사회연결망이 확장되면 강력한 피드백 순환 고리가 시작된다. 사회적으로 연결될수록 우리는 더 나은 기술을 갖게 된다. 개선된 기술로 더 많은 양식을 구할 수 있어 우리는 더 많은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더 밀도 높은 집단을 이루어 살게 된다. 인구밀도가 높은 집단은 기술을 한층 더 발전시킬 것이며 이런 식으로 순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순환 고리의 도화선에 불을 당긴 건 무엇이었을까? 인구밀도가 높으면 혁신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만큼 희소해진 자원을 놓고 싸워야 하므로 폭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기술이 인간 사회의 욕구를 따라잡는 동안 이 모순에 제동을 건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현상이 어째서 우리 종과 비슷한 뇌 크기를 가지고 나름의 문화를 만들었던 다른 사람 종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플라이스토세 시기에 나타났던 친화력이 호모 사피엔스의 기술혁명에 불을 붙인 불꽃이라고 주장한다. 64)


더러 백색증 같은 색소 이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사람은 대체로 고른 피부색을 띤다. 하지만 우리의 신체 가운데 단 한 부분의 변화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냈다. 사람과 가축화된 동물의 동공만 연령, 성별과 무관하게 일생에 걸쳐 다양한 색 변화가 나타난다. 우리의 다채로운 홍채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독특하게도 흰색 화포인 공막 위에 홍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막은 색소가 없어 하얗다.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롯한 모든 다른 영장류는 색소가 공막을 짙게 만들어 홍채와 뒤섞여 보인다. 이 경우 홍채와 공막의 색 대비가 낮아져 그들이 무엇을 보는지, 또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아채기 어려워진다. 우리의 눈은 협력적 의사소통에 이바지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람 아기는 부모의 의도와 기분과 생각을 처음 인식할 때 부모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눈빛은 무엇을 향해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생애 초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지닌 경험들은 이때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의지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68-9)


우리의 눈은 분명하고 유일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기도 하다. 사람은 피부, 머리, 심지어는 손톱까지 다양한 색을 띤다. 홍채도 초록색, 회색, 파란색, 갈색에 검은색까지 다채로운 색이 있다. 하지만 공막은 모두 똑같이 하얀색이다. 하나의 형질이 이렇게 절대적인 단일성을 보이는 건 아주 이례적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눈에서 하얀 공막이 보이면 사람이라고 혹은 사람 같다고 판단한다. 미키마우스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 시절에는 그냥 새까만 큰 점으로 그렸던 눈을, 〈마법사의 제자The Sorcerer’s Apprentice〉에서 검은 눈동자에 흰자위의 커다란 눈으로 바꾸고 나서였다. 흥미롭게도, 누군가의 인간성을 없애는 가장 빠른 방법은 눈을 까맣게 칠해버리는 것이다. 공포영화에서는 흰자위만 남은 눈이 거의 필수 요소다. 누군가의 눈동자 색이 살짝만 달라도 우리는 이미 불편해진다. 하얀 눈자위의 귀여운 모과이가 눈이 새빨간 그렘린으로 변했을 때처럼. 70)


5 영원히 어리게


신경능선세포는 모든 척추동물의 배아에 잠깐 나타난다. 이 세포들은 신경관 표피에서 떨어져나와 독립된 세포 집단을 형성하며, 여기에서 뇌와 척수가 형성된다. 신경능선세포는 줄기세포로, 이는 배아가 발생할 때 다양한 유형의 세포로 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신경능선세포는 이동 능력이 있어, 목적에 따라서 전신에 걸쳐 옮겨 다닐 수 있다. 줄기세포가 어떤 유형의 세포가 될지, 언제 어디로 이동할지 결정하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군의 사서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축화의 중심 특성은 두려움과 공격성 감소인데, 신경능선세포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부신수질 발달에 관여한다. 가축화된 동물의 부신은 야생의 친척 종들의 부신보다 작다. 부신이 더 작다는 것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적게 분비된다는 뜻이다. 신경능선세포는 또한 친화력 선택과 연관된 모든 세포 조직 발달에도 아주 큰 역할을 담당한다. 여기에는 이개연골, 피부 색소, 주둥이(또는 얼굴) 뼈와 치아가 포함된다. 77)


다른 동물들은 태어난 직후 뇌의 성장이 멈추지만 우리는 태아기의 뇌 성장 속도가 출생 후 2년까지 유지된다. 출생 후 뇌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특히 정수리 뒷부분에 영향을 주어 머리가 풍선 형태가 된다. 뇌 상단 뒤쪽인 두정부에는 마음이론 신경망이 모이는 두 중심점, 측두두정연접부와 설전부가 있다. 이곳이 아기가 타인의 시선과 제스처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다. 이 발달과정에서 시냅스 가지치기가 일어난다. 우리의 뇌는 성장할 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신경세포를 만든다. 문제를 해결하거나 다른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 더 많이 사용되는 신경망일수록 신경세포의 개수가 더 많아지고 정보처리도 더 능숙해지면서 신경세포 간의 신호를 전달하는 시냅스의 연결이 간소화된다. 우리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썼듯이 “나약하게 알몸으로 빽빽 울면서” 태어나 몇 해 동안 이 상태로 지낸다. 하지만 사회적 인지능력이 일찍 발현되는 덕분에 타인의 마음과 연결될 수 있다. 80-1) 


우리 종에게 일어난 친화력 선택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것은, 우리 종이 보노보처럼 전반적인 포용력만 강화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종은 집단 구성원의 정의를 확장시킨다. 침팬지와 보노보는 익숙함을 토대로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집단 구성원은 자신이 사는 영토 안에서 자신의 무리와 함께 사는 누군가다. 그 나머지는 전부 남이다. 침팬지는 이웃 무리의 침팬지를 보거나 그들에 관해 들은 적이 있더라도 그들과 마주쳤을 때 거의 항상 적대적 반응을 보이며 오래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편 보노보는 낯선 보노보에게 훨씬 더 우호적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그 사람이 우리 집단인지 아닌지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보노보나 침팬지와 달리 집단 구성원을 지리적 가까움이 아닌 더 넓은 범위의 정체성으로 정의한다. 동물과 달리 사람에게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도 나타났는데, 바로 집단 내 타인이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도 우리 집단 사람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82)


우리는 기본적으로 같은 집단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에게 끌리도록 태어났지만, 그 정체성에 대한 정의는 '사회장'의 영향을 받아 달라진다. 아기에게조차 집단 정체성은 친숙함 이상을 뜻한다. 어떤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지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바뀔 수 있다. 옷차림, 종교, 신체 특성, 정치 성향, 출신지, 응원하는 스포츠팀 등등. 사람은 생물학적 특성에 따라 집단 정체성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무엇이 이 정체성을 구성하는지는 사회적 인식에 따라서 탄력적으로 바뀔 수 있다. 인류학자 조지프 헨릭Joseph Henrich은 이 가소성이 사회규범의 출현에 결정적 인자라고 주장했다. 사회규범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규칙이다. 사회규범은 각종 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중추가 되며, 사람이 자기가축화된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규범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일가친척 이외의 사람들까지 포용하여 같은 집단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83) 


# 사회장social force. 사회심리학의 창시자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사회·문화의 복합적인 힘이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사회적 행동 또는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사회적 합의를 가리킨다.


친화력이 우리 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생각은 새롭지 않다. 하나의 종으로서의 우리가 더 똑똑해졌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두 생각 사이에 놓여 있는데, 사회적 관용이 높아지면서 인지능력, 특히 의사소통 및 협력과 관련한 기능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람을 길들이는 것은 새나 늑대를 길들이는 것과 같지 않았으며 유인원의 경우와도 달랐다. 신경세포로 빽빽하게 채워져 다양한 인지능력과 더불어, 유례없이 강한 자제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거대한 뇌를 지닌 것은 사람뿐이다. 이 친화력 선택을 거치면서 집단 내 타인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범주가 만들어졌다. 이 범주는 산모가 아기를 분만할 때 범람하는 그 옥시토신에 의해 촉발되고 유지되었다. 옥시토신이 충만하면,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도, 다가오는 낯선 사람에게서 친절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사람이 우리와 같은 편임을 알 수 있다. 행동이 가져올 결과까지 고려하여 판단하는 능력은 우리 종의 생존에 큰 이점이 되었다. 85-6)


6 사람이라고 하기엔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을 느낄 때 양쪽 집단 모두 어두운 면을 드러내게 된다. 힘이 더 센 쪽에서 공격을 가할 수 있고 공격당한 집단은 보복에 나설 수 있다. 자기가축화는 우리가 보일 수 있는 최악의 공격성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개와 보노보는 자기가축화를 통해서 친화력을 강화했지만, 두 종 모두 자신의 가족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에 대해서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을 발달시켰다. 개는 자기가 사는 사람의 집에 낯선 자가 다가오면 공격적으로 짖어댄다. 보노보 암컷의 경우에는 방어적 모성이나, 암컷 간의 유대로 오히려 보노보 수컷에게 공격적인 모습을 띠곤 하는데 이는 침팬지 암컷과 비교해보아도 더 공격적이다.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를 분만할 때 흘러넘치기도 하지만 누군가 자기 아기를 위협한다고 느낄 때 분노를 솟구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더 강렬하게 사랑하게 된 이들이 위협을 받을 때 사람은 더 큰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다. 92-3)


사회과학자들은 이 경향을 ‘편견’이라고 불러왔는데, 편견의 일반적 정의는 한 집단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만으로는 외부 집단을 향한 온갖 극악무도한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또한 우리가 진화과정에서 마음이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신경망의 활동을 둔화시키는 능력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 집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는 눈감는 것도 이 능력 때문이다. 이 맹목성은 편견보다 훨씬 더 어두운 힘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할 때 그들이 겪는 고통은 우리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 된다. 그런 자들은 공격해도 무방해진다. 규칙도, 규범도, 그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도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가설은 모든 사람의 뇌에는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94-5)


자신들이 누리던 자원이나 특권 혹은 어떤 경제적 이익에 위협이 되는 집단이 나왔다면, 그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이 상식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정치적 이념 대결이나 혹은 한 사회 내 다른 집단의 상대적 지위가 타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야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크테일리가 연구에서 얻은 결론은, 외집단에 대한 비인간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요소는 그들이 먼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인식이었다. 이것을 보복성 비인간화Reciprocal Dehumanization라고 한다. 예를 들어 미국인 참가자들에게 허구로 작성한 “이슬람 국가 대부분이 미국인을 짐승으로 여긴다”는 제목의 〈보스턴글로브〉 ‘기사’를 제시하자 무슬림에 대한 비인간화 정도가 2배 더 상승했다. 이 기사는 이 내용이 무슬림 주류의 관점임을 시사하고 있기도 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집단과 문화권에서는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집단을 비인간화하는, 동일한 패턴을 보였다. 100)


7 불쾌한 골짜기


로봇 연구가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인체형 로봇이 점점 더 사람의 모습과 흡사해질수록 우리는 로봇에게 더 호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거나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으스스한 느낌을 주면서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도 말했다. 모리는 이 현상을 ‘불쾌한 골짜기The uncanny valley’라고 불렀다.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대형 유인원을 보았을 때의 느낌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이 ‘불쾌한 골짜기’일 것이다. 그들은 대형 유인원에게 매료되는 동시에 유인원들이 공포를 자아내는 존재, 즉 타락한 인간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인 양 난폭한 성욕을 지니고 파괴를 즐기는 기괴한 존재로 기술했다. 사람을 유인원이나 원숭이에 비유하는 것은 흔한 비인간화 방식이다. 대형 유인원은 쥐나 돼지나 개 같은 다른 동물과 달리, 불편함과 심지어는 혐오스러운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불쾌한 골짜기’의 범주에 딱 들어맞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04-5) 


유럽의 과학자들은 애초부터 잘못 구성한 진화의 사다리에서 대형 유인원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백인을 최상단에 놓은 그들에게 사람과 대형 유인원이 현저하게 닮았다는 사실은 린네와 다윈의 주장대로 사람과 유인원을 같은 ‘호모’ 속으로 묶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귀결이라는 뜻이었다. 계급 구분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는 용인되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사람과 대형 유인원의 관계를 좀 더 받아들이기 쉽도록 19세기 인류학자들은 이 사다리에 또 하나의 가로장을 끼워 넣었다. 유인원이 사람과 동물의 중간 단계였다면, 흑인은 백인과 유인원의 중간 단계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노예무역에 대한 반감과 상류층 지식인들의 도덕적 딜레마까지 한 번에 해소할 수 있었다. 삶과 자유, 행복을 누릴 권리가 만인에게 적용되는 천부인권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흑인으로부터는 이 권리를 박탈하려는, 도덕적으로 모순을 정당화하는 데 유인원 비유만 한 처방이 없었던 것이다. 105-6)


심리학자 필립 고프Philip Goff가 “태도와 불평등의 부조화”라고 부르는 상황에서, 이른바 인종차별주의 이후 시대에서 살아가는 인종적 소수 집단은 여전히 고용, 교육, 주택, 소득, 건강 등 모든 면에서 엄청난 불평등을 겪고 있다. 이런 부조화를 학자들은 전통적 편견(제노사이드로 발전할 수 있는 유형의 편견)이 신종 편견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통적 형태의 인종 편견’을 더 현대적 형태의 편견이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학자들 간에 일치되는 의견”이다. 현재의 인종차별은 ‘교묘하고’ ‘산발적으로 퍼져 있으며’ ‘경로의존적’인 성격을 띤다. 현재의 인종차별은 인종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편견이 신념화된, ‘상징적’ 혹은 ‘일차원적’ 인종차별, 다른 인종 집단과 접촉을 피함으로써 혐오를 실행하는 형태의 ‘기피적’ 인종차별, ‘암묵적’ 인종차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처럼 무엇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끔찍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출범한 학문이 사회심리학이었다. 108-9)


# 현재의 인종 차별의 세 가지 중심 요인 : 편견, 순응 욕구, 권위에 대한 복종


8 지고한 자유


대안우파를 느슨하게 정의하자면, 주류 보수주의를 거부하는 극우 이데올로기 추종자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사회지배 성향'이나 '우파 권위주의 성향'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다.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적자생존’이라는 통념을 신봉한다. 그들은 “사회에는 다른 집단들보다 열등한 집단이 있다”고 믿으며 “이상적 사회라면 일부 집단이 상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집단들이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 둘 다 타인 혹은 타 집단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 극도의 편협함을 보이지만 두 집단의 이념은 상당히 다르다.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외부자를 위협으로 인식하지만,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외부자를 열등한 존재로 인식한다.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권위에 순응하지만, 사회지배 성향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주도권을 갖기를 원한다. 126)


# 사회지배 성향Social Dominance Orientation·SDO. 사회 체제 내 위계질서에 대한 개인의 선호도와 낮은 지위 집단에 대한 지배 성향를 나타내는 척도다.


# 우파 권위주의 성향Right Wing Authoritarianism·RWA. 천성적으로 권위자에게 순종하는 정도, 사고와 행동의 순응 정도를 나타내는 척도다.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의 성격에 대해 말해주는 가장 중요한 연구 결과는 교육이 그들에게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애슐리 자디나가 설문조사에 참여한 백인들에게 흑인들이 수감과 사형 집행에서 부당하게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해주었을 때, 이미 흑인을 인간 이하로 보던 사람들은 흑인을 더 비인간화하게 되고 흑인에 대한 징벌 정책을 더 지지하게 되었음을 기억하자. 앎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 것이다.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이미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문화 감수성 훈련이 본래 자리잡고 있던 불관용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128-9)


민주주의는 우리의 다정한 본성 속에 자리한 이 어두운 면을 견제하기 위해 설계된 제도다. 이 형태의 정부가 직면하는 난제에 관해서는 논의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천문학적 국가 채무, 도를 넘는 군사적 개입, 노쇠한 기간 시설, 만연한 유언비어, 고령화 사회 같은 문제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에 국한해서 보자면 시민담론의 부재, 편의주의적 선거구 개편 문제, 초당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호한 의회 규칙(예를 들면 하스터트 규칙), 유권자 통제, 규제 없는 사적 정치자금 모금을 통한 선거 비리가 주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이 가운데 많은 것이 한 가지 근본적 문제의 증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같은 편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이, 다른 편에게는 잔인해지는 인간 본성의 역설 말이다. 이제 병이 무엇인지 알아냈으니 치료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비인간화 백신이 실로 존재하며, 그 백신이 실로 효험이 있다는 사실이다. 131-2)


# 하스터트 규칙. 공화당 의원 과반수의 동의가 없으면 법안을 표결에 붙이지 않도록 하는 공화당 지도부의 불문율이다.


# 유권자 통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특정 인구 집단 유권자들의 투표를 좌절시키거나 막는 전략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교전 중인 국경 지대와 이웃한 민족 집단들 사이에 벌어지는 장기간의 분쟁을 연구하던 학자들은 다른 집단 간의 접촉이 갈등을 더욱 부추긴다고 보았다. 사람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음식을 같은 방식으로 먹는 이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 안에서 훨씬 안전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학자들은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접촉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갈등을 완화하는 최상의 방법은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불안이 낮은 상황에서 여러 집단이 함께할 수 있다면 학자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 불안을 감소시키는 것이야말로 집단 간 갈등을 감소시키는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위협받는다는 느낌이 우리 뇌에서 마음이론 신경망의 활동을 꺼버린다면, 위협 없는 접촉은 이 스위치를 다시 켤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132-3)


어떤 외부 집단에 대해서 인간적인 어휘를 사용하여 말하는 정도만으로도 그 사람들과 접하거나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다. 따라서 가상의 인물을 만나는 경험으로 사고가 변하는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해리엇 비처 스토의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노예제 폐지운동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르완다에서는 텔레비전 연속극 하나가 대학살 이후 종족 간에 굳어진 편견과 갈등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야기는 첨단기술이 아닐뿐더러 새로운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외집단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을 향한 공감을 향상시키는 효과적 방법으로 입증되어왔다. 무엇보다도, 가장 배타적인 사람들이 접촉의 효과를 가장 크게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Gordon Hodson은 사회지배 성향과 우파 권위주의 성향이 높을수록 동성애자, 흑인 재소자, 이민자, 노숙자,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고정관념에 의해 차별받는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크게 영향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34-5)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증오에 대해 명쾌한 예측을 제시한다.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외집단을 비인간화할 때, 즉 외집단 구성원을 인간 이하의 무언가로 말하는 것이 이를 듣는 상대방에게 최악의 폭력 행위를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또한 사람을 동물이나 기계에 비유하거나, ‘쓰레기’ ‘기생충’ ‘체액’ ‘오물’ 등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위험한 형태의 증오언설이라고 본다.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언어를 제재하는 강력한 문화적 규범을 조성할 수 있다. 텔레비전, 신문 같은 언론 매체나 사회적 소통 매체에서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나 집단을 인간 이하로 말한다면 우리 내부에서부터 경보기를 울려야 한다. 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절대로 증오언설을 표준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이탈리아의 시인 잠바티스타 바실레Giambattista Basile가 썼듯이, “뼈 없는 혀가 척추를 부러뜨리는 법”이다. 142)


9 단짝 친구들


동물에게 친절한 태도가 정말로 타인에 대한 친절함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학자들은 사람과 동물을 연관시키는 개념에는 꾸준히 저항해왔다. 그것은 우리 종이 특별하고 동물들과 다르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15개 항목 가운데에는 편견과 비인간화의 가장 주요한 동력이 무엇인지를 묻는 항목도 있었다. 다수는 무지, 닫힌 마음, 매스미디어, 부모의 영향, 문화적 차이를 원인으로 돌렸다. 반면에 동물에 대한 시각은 이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보았다.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과 크리스토프 돈트Kristof Dhont는 사람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람 중에서도 우월한 집단과 열등한 집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높게 나타나는지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사람을 동물과 다르다고 여기는 태도나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민자나 흑인이나 소수 민족 등 사람 외집단을 동물로 비유하는 비인간화에 주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49-50)


개에게서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라면 그 사랑이 다른 사랑만 못하다는 생각은 결코 들지 않았을 것이다. 우정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평등한 사상이다. 개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가 될지 예상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구석기시대를 지배하는 강력한 포식자이던 시기에 그들은 송곳니 매서운 육식동물에서 개로 진화했다. 개는 그들 종의 강력한 성공 무기였던 두려움과 공격성을 사용하는 대신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가 될 만한 충분한 공통 기반을 찾아냈다. 다리가 둘이건 넷이건, 검건 하얗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는 데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 적어도 나의 삶은 바뀌었다. 오레오와 나눈 우정과 사랑으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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