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시간 - 제2차 세계대전 패망 후 10년, 망각의 독일인과 부도덕의 나날들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하랄트 얘너 지음, 박종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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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불행 사이로 비치는 행복 7 


"1945년 여름, 독일 땅의 7500만여 명의 무리를 하나의 인간 사회라고 부르기는 어려워 보였다. 대신 '공백기' 혹은 '늑대의 시간'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이다. 다들 자기 자신이나 자기 무리에만 신경을 쓰는 분위기는 1950년대 깊숙이 들어서도 이 나라의 자화상을 이루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상황이 나아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만의 보호 공간인 가족 속으로 숨어들었다. 1950년대 후반부에 공동체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설립된 '게마인진Gemeinsinn' 시민운동가들이 다수의 비정치적인 독일인을 비난하는 말로 사용했던 그 유명한 '오네미헬 씨'의 모습에도 그 늑대는 계속 살아 있었다. 예전에 대동단결했던 민족 동지들이 이제 자기만 아는 늑대로 타락해버린 것이다." "이 책은 뿔뿔이 흩어졌거나, 강제로 끌려갔거나, 도망쳤거나, 남아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뒤섞여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고, 이전의 민족 동지들이 어떻게 다시 서서히 시민이 되어갔는지를 다룰 것이다."(8-9)


# Ohnemichel. 'Ohne'(Without)와 'mich'(me)를 합성한 말로서 '나 없이 하라는 뜻'인데, 'mich'에다 'el'을 붙인 미헬은 일반적인 독일인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나와 내 가족만 신경 쓰고 살겠다는 독일인을 의미한다. 


"이 책의 중점은 잔해 청소와 사랑, 도둑질, 쇼핑 같은 일상의 문명적 측면에서 차츰 정신생활과 미적 디자인 같은 문화적 측면으로 넘어간다. 전쟁 이후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예술을 사랑하고, 섬세한 감각을 즐기고, 끊임없이 진지한 토론에 빠졌다. 좋았던 옛 시절로 미화되던 19세기와 함께 끝나버린 사교 형식을 다시 이어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오늘날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 반면에 당대인들이 홀로코스트의 그늘 속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잘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수백만 명을 살해한 나라가 어떻게 도덕과 문화를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그런 것을 다시 입에 올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좋고 나쁜지는 그들의 자식들이 스스로 찾도록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언론의 해석권도 호황을 누렸다. 모두가 '의미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했다. '실존의 폐허 더미' 위에서 철학을 하는 것은 정신의 약탈 행위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감자를 훔치듯 의미를 훔쳤다."(14-5)


1. 제로 시간?


"후대에 침울한 통곡의 대가로 기억될 26세의 극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계속 살아가는 것의 짐을 자기 세대의 절박한 선언으로 바꾸고자 했다. 한 장 반짜리 텍스트 〈이별 없는 세대〉에서 그는 말 그대로 과거가 사살되어버린 세대의 새 출발을 격정적인 단호함으로 노래했다. '이별 없는 세대'는 제로 시간의 선언이었다. 〈우리는 귀향 없는 세대다. 귀향할 수 있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착 세대다. 어쩌면 새로운 별에, 새로운 삶에 완벽하게 도착한 세대일지 모른다. (···) 우리는 이별 없는 세대지만, 모든 도착이 우리 것임을 알고 있다.〉 '이별 없는 세대'는 돌아볼 용기가 없는, 남겨진 자들의 시적 선언이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는 다수 독일인의 충격적인 태도가 여기서 원칙으로 대두한다. 경험한 것이 적힌 칠판은 지워지고, 새로운 글과 '새로운 신'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다. 바로 '새로운 별'에의 도착이다. 그것은 의식적인 과정이다."(29-30)


2. 폐허 속에서


"폐허 영화가 인기를 끈 이유는 단순했다. 파괴된 도시의 파노라마가 이색적으로 펼쳐졌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끔찍한 모습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아무리 봐도 폐허에 질리지 않았다. 자기 내면의 거울로 느낀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는 전쟁 이전 세상의 본질을 이루고 있던 것이 이제야 마침내 눈앞에 똑똑히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그들은 폐허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이러한 완전한 몰락 속에 숨겨진 내적 연관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 폐허가 세상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많은 사람을 엄습했다. 그들은 카메라를 들고 폐허 속으로 들어가 '경고 사진'을 찍었다. 황량한 잿더미를 보여주는 사진마다 한결같이 붙은 제목이었다. 물론 그들은 폐허의 모습에서 자신들을 사로잡은 공포를 묘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산산조각 나고 검게 그을린 드레스덴처럼 끔찍한 광경조차 이 재앙에서 눈앞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끄집어내려는 사진작가들의 야심을 가로막지는 못했다."(55-6)


3. 대이동


"피난민 행렬에는 무척 대조적인 두 그룹이 있었다. (외국인) 강제 징용자와 동쪽의 실향민이었다. 해방된 징용자들에 대한 군정의 태도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해방 직후에는 온정주의적 시선이 지배했다. 그래서 강제 징용자들은 잔학한 나치의 희생자로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폭넓은 지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연합군은 징용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풍족하게 배급할 것을 각 상점에 지시했다. 이는 독일인들에게 동요와 증오를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물건은 달리고 배급량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년 동안의 수용소 노예 생활은 많은 징용자에게 심각한 행동장애를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의 불만을 난동으로 풀었고, 마음에 차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적이고 폭도적인 태도를 보였다. 예를 들면 여러 사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만큼 보살펴줄 수 없었던 연합군 군인들에게 말이다. 그들의 이런 파괴적인 행동 때문에 급기야 연합군 병사들도 존중과 이해심을 잃을 때가 많았다."(82-3)


"수용소의 긴장 상황은 연합군 군정이 최대한 많은 징용자를 집으로 돌려보내려던 1946년 여름부터 반대 방향에서 밀려든 새로운 사람들로 더욱 꼬였다.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 10만 명이 넘는 유대인 난민이 독일로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은 이미 그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충분히 겪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재차 끔찍한 학대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번 가해자는 폴란드인들이었다." "수백만 명의 폴란드 징용자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반대 방향에서도 폴란드 국적의 유대인들이 독일 땅으로 들어오면서 방금 비워진 수용소 공간을 채웠다. 이들 유대인의 탈출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 정부와 유대인 이주 단체 '브리하Brichach(탈출)'의 적극적인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 단체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이주를 원하는 유대인 징용자들의 유입을 최대한 장려함으로써 미국이 영국에 압력을 가해 팔레스타인 정착 금지 조치를 해제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87-9)


"1960년대에 독일연방공화국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외쳤던 '통합의 기적'은 사실 내용 면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독일인이 고향을 잃고 떠나온 동쪽의 동포들을 외국인 징용자만큼이나 야멸차게 대했다. 누군가는 그걸 보고, 독일인들의 그런 이기적인 행동이 적어도 인종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끄집어내며 스스로를 위안할지 모른다. 아무튼, 동쪽의 실향민들은 금발이건 파란 눈이건 상관없이 하찮은 '집시 떼거지'로 멸시받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그들은 헝가리나 루마니아 이웃들에게서 특별한 취향을 물려받았는데, 일례로 파프리키와 마늘에 대한 선호가 그렇다. 이는 서독 주민들에게 상당한 혐오감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선의를 가진 사람들은 늘 공통의 민족적 뿌리를 입에 올리며 통합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당시 당국이 '전입자'라고 부른 새로운 이주민들은 거부의 벽에 부딪혔다. 결국 '통합의 기적'은 경찰의 개입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106-8)


"인종주의는 죽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창끝이 내부로 향했다. 당시에는 하나의 독일 민족이 아닌 '독일 부족들'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되었다. 그러니까 오버바이에른 사람이건 프랑켄 사람이건, 아니면 팔츠나 튀링겐 사람이건 여러 부족의 피가 섞이는 것은 지역적으로 뿌리내린 민족 집단의 고유성을 해치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다. 독일제국의 붕괴 이후 민족 공동체의 이념은 빛을 잃었지만, 독일인들의 오만함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나치의 선전 구호였던 하나의 단일 민족은 부인되었고, 사람들은 이제 정체성의 결정적 특징으로 갑자기 지역을 부각시켰다. 많은 사람이 독일의 내부 이주를 일종의 다문화적 공격으로 보았다. 그와 함께 부족주의가 성행했고, 사람들은 부족의 일원으로서 풍습, 관습, 종교 제의, 방언을 통해 다른 지역민들과 자신을 구분했다. 특히 보헤미아계 독일인이나 바나트 슈바벤인, 슐레지엔인, 포메른인, 베사라비아 독일인 같은 온갖 '폴란드 잡것들'과는 더더욱 거리를 두었다."(110-1)


4. 댄스 열풍


"우리는 전후 시대를 지극히 어두운 시기로 상상한다. 시대의 이미지, 특히 후대의 잔상은 주로 찡그린 얼굴과 절망적인 표정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 시대의 곤궁과 불안은 결코 낯설지 않다. 하지만 야간 폭격의 공포와 점령 초기의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기쁨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폐허 더미에서 느끼는 일상의 상실조차 이런 에너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재앙에서 벗어났다는 감정과 예측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미래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집중도를 더 높였다. 많은 사람이 순간을 위해 살았다. 순간이 아름다우면 마지막까지 만끽하고 싶어 했다. 이는 끓어오르는 삶의 기쁨으로 분출되었고, 때로는 거의 광적으로까지 비치는 향락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삶의 위협은 여전히 곳곳에 존재했기에 사람들은 삶을 마음껏 즐기고 싶어 했다. 그야말로 댄스 열풍이 불었고, 가능한 곳이며 어디서건 정신없이 놀았으며, 남이야 눈살을 찌푸리든 말든 미친 듯이 웃어댔다."(139-40)


"카니발은 전후 독일인들의 야누스적 측면을 드러내는 인기 있는 메타포였다. 항복 사회는 서서히 쾌락주의 사회로 넘어갔다." "전후 시기의 파티는 가라앉고 있는 배가 아니라 이미 가라앉은 배 위에서의 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직 살아 있음에 스스로 깜짝 놀랐고, 그 기분에 취해 이상한 바보 같은 짓에 발작적으로 덤벼들었다. 역사가 프리드리히 프린츠는 많은 독일인을 사로잡은 이 이해할 수 없는 들뜬 분위기를 보면서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 뒤에 여는 추모의 연회를 떠올렸다. 〈전쟁의 신 마르스가 들판을 깨끗이 휩쓸고 지나가자〉 궁핍과 불행이 대지에 만연했지만, 〈시신을 땅에 묻고 공동묘지에서 돌아오는 조문객들이 식당에 마련된 커다란 추모의 연회장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자신들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런 분위기가 퍼지곤 했다.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명랑함, '살아 있는 자의 달콤한 습관'에서 아직 벗어나지 않았다는 기쁨의 감정이〉."(165-6)


5. 파괴된 도시의 사랑


"전쟁 기간에 여자들은 남자 없이도 대도시가 충분히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아버지 없는 가족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자기들만의 은밀한 공동체로 바뀌어갔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어머니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싸우지 않고는 얻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역할에 더는 적합해 보이지 않던 대부분의 남자들이 욕설과 분노 같은 정말 최악의 수단으로 자신들의 옛 자리를 고수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들의 주도하에 경제적 형편이 더 나아질수록 자신들이 집에서 잉여 인간이라는 느낌을 억누를 수 없었다. 반면에 가족이 궁핍에 시달릴 경우 귀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가족의 부양에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수치심에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다. 여자들의 역할과 분투를 애써 깎아내린 것이다."(174-7)


"아무리 위험한 시대여도 사랑의 요구는 별로 줄지 않았다. 마르그레트 보베리가 일기에 썼던 〈죽음과의 지속적인 밀착〉으로 인한 〈삶의 기쁨〉의 무한한 상승은 성적인 측면으로 표출되었다. 많은 여성이 이제야 드디어 다시 뭔가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전후 첫 몇 개월을 지배했던 새 출발의 설레는 분위기, 그리고 불안과 외로움이 만들어낸 야릇한 흥분은 기괴한 특성을 띤 성적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전후 여자들의 성적 활동은 당대에 회자되던 여성 과잉으로 날개를 달았다. 아름다운 여자는 많았지만 남자는 희박했다. 살아남은 남자들도 비루하기 짝이 없었다. 목발을 짚거나, 가래 끓는 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피를 토했다. 여성의 존엄에 상처를 낸 것이다. 그러나 이건 사랑의 문제만이 아니라 생계의 문제이기도 했다. 특히 노동 시장의 전망이 곧 다시 악화되자 생업 활동은 모든 여성에게 지상 최대의 행복으로 비치지는 않았다. 여성 과잉은 취업 전선에서 여성들 간에 반목의 싹이 되었다."(193, 199-202)


"어디서건 풀어헤친 자세로 앉아 있거나 편안하게 구는 미국식 생활 방식은 누군가에겐 거부감을 불러일으켰지만 누군가에겐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적국에서도 그렇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행동하는 남자들 속에서 자신들이 모르고 있던 사적 친밀감과 편안한 남성성을 인지했다. 즉 부담 없는 남성상이었다." "이런 아가씨들은 곧 '베로니카 당케쇤Veronika Dankeschön'이라 불렸다. 성병Venereal Disease의 약자 VD를 변형한 말장난이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독일 여자들과 미군은 전력을 다해 관계를 맺었다." "젊은 독일 여성들이 미군을 찾은 데는 문화적 또는 하위 문화적 동기도 숨어 있었다. 즉, 고루한 독일적 삶의 방식과 비좁고 숨 막히는 환경에서 탈출하려는 욕망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다수 독일 역사가들은 당시 여성들에게 낯선 것에 대한 욕망이 존재했고, 바로 그 속에 미군들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222-4)


6. 약탈, 배급, 암거래: 시장경제를 위한 수업


"약탈의 순간에는 미친 듯한 탐욕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어디에 쓸지 알 수 없는 물건도 일단 맹목적으로 확보하려 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제정신이 돌아오면 그렇게 기를 쓰고 모은 물건들을 그냥 길에 버리기도 했다." "새로운 시장들은 연합국의 지시로 예전의 행정 관료와 직원들을 다시 일터로 불러들였다. 종전 상황의 혼란 속에서 명맥만 남은 공공 업무를 정상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에 대한 정치적 심사는 나중에야 이루어졌는데, 이 심사로 나치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미국과 소련 점령 지구에서 자주 해고되었다. 반면에 프랑스와 영국 점령 지구에서는 탈나치화가 좀 더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점령 지구 내의 관료들은 개인적 정치 성향과 상관없이 집권 세력에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독일 관료주의의 전통적 이상을 따라, 나치 정권에 충성했던 것과 같은 태도로 연합국 행정부의 지시에 순순히 따랐다."(239-42)


"거의 종전 직후부터 배급표가 다시 발급되었기에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앞으로도 계속 공정하게 관리할 국가기관도 분명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다. 배급표는 〈살아갈 권리 증명서〉로서 그 소유자에게 전면적인 패배 이후에도 생존권을 문서 형태로 쥐고 있다는 일종의 확신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배급표가 거기에 명시된 양 만큼의 식료품과 지방, 설탕을 실제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실망감은 더욱 커졌다. 약속된 1550칼로리는 곧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최악의 궁핍 시기인 전후 첫 3년 동안에는 고작 800칼로리만 배급될 때도 있었다." "연합군의 지시로 강제 노역과 강제 수용에서 해방된 외국인들에게 식량 배급 면에서 특혜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시기와 분노를 느끼는 독일인이 많았다. 사실 그 사람들이 독일인들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제공받은 것은 수년 동안 영양실조에 빠져 있던 건강 상태를 고려한, 정당한 의학적 조치였다. 그럼에도 많은 독일인이 그에 대해 분개했다."(246-50)


"세상 사람들의 눈에 '독일인들'은 전쟁 범죄와 제노사이드를 통해 가해자로 낙인찍힌 지 오래였다. 그들은 문명과 작별했고,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국제 사회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망명 독일인들만 그런 국가의 일원임을 스스로 거부했다. 국내에서는 정권을 수치스러워했던 나치 반대자들조차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는지 분명히 알지는 못했다. 다수 독일인은 유대인 수백만 명에 대한 학살과 독일 국방군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무척 특별한 방식으로 질서와 품격을 갖춘 나라라는 감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궁핍의 시기에 범죄가 사회적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더더욱 경악했다. 집단적 인식이 이보다 더 왜곡될 수는 없어 보인다. 국외에서는 전후의 시스템 붕괴를 독일을 재사회화할 기회로 바라본 반면에 독일인들은 이제야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문명의 몰락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머릿속엔 그런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265)


7. 경제 기적과 부도덕에 대한 염려


"서독을 무기한 먹여 살릴 뜻이 없었던 미국은 경기를 부양할 방법을 찾았고, 그에 결정적인 장애물이 사람들에게 별 인기가 없는 라이히스마르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할 여유가 없다'는 말은 전후에 자주 나돈 말 가운데 하나였다. 앞서가는 건 항상 암시장이었다. 독일 노동력의 절반 이상이 물물교환과 좀도둑질, 불법 거래에 매달렸다. 오직 주거권과 식량 배급표만 얻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고, 일자리를 얻은 다음에는 더 중요한 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규 경제를 활성화하려면 신권 화폐의 필요성을 일깨움으로써 암거래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일뿐이었다. 실제로 화폐 개혁이 이루어지자 정규 직업에 종사하려는 사람과 불법 거래 대신 정상적으로 거래하려는 상인의 수는 빠르게 증가했다." "식량 배급 제도는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곧 찾아온 물가 상승의 파고로 힘들어했지만, '상품 세계'의 갑작스러운 증가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미래에 대한 뚜렷한 희망을 안겨주었다."(291-2)


"자동차 공장 도시 볼프스부르크는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혼돈의 조합이었다. 석방되었지만 오갈 데 없는 군인들, 전쟁을 경험한 뒤로 어떤 형태의 안락함도 견디지 못하는 고향을 잃은 젊은이들, 그리고 더는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이전의 강제 노역자들로 이루어진 외롭고 좌초된 남자들의 수용소였다." "1948년 니더작센 지방 선거에서 볼프스부르크는 최악의 모습을 보였다. 극우 정당인 독일우파당DRP이 2만 4000표 가운데 1만 5000표를 얻어 시의회에서 원내 1당이 된 것이다. '볼프스부르크의 충격'으로 역사에 기록된 이 참담한 결과가 나온 지 몇 개월 뒤 선거 결과는 무효화되고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은 재투표를 해야 했다." "이유는 빠르게 밝혀졌다. 너무 많은 남자, 너무 많은 피난민, 너무 많은 실향민, 너무 많은 퇴역 군인, 너무 많은 젊은이 때문이었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영속 가능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이 도시엔 그런 믿음을 담보해줄 것이 전혀 없었다."(309-12)


"공장은 볼프스부르크 사람들에겐 전부였고, 공장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규모 감원 조치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중하위급 소수 핵심 직원들은 나치 시대와 독일노동전선의 이념에 아직도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반면에 과학 기술에 대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기술자들은 온 마음으로 자신들과 공장이 하나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금속 노조가 볼프스부르크에 파고들 여지는 거의 없었다." "볼프스부르크는 이른바 '공장 사회'의 이상이 되었다. 어떤 공장도 그 악명 높은 '국가독점자본주의'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을 듯하다. 국가독점자본주의는 국가와 민간 자본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밀착해서 움직이는 시스템을 가리킨다. 1960년 폭스바겐법VW-Gesetz에 따라 공장은 민영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나더작센주와 연방공화국은 각각 20퍼센트의 지분을 소유했다. 그런 까닭에 폭스바겐이 '독일'이라는 주식회사의 준 국유 기업이라는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313, 316-7)


8. 재교육자들


"연합국들이 합의한 탈나치화와 재교육 정책은 처벌과 신뢰 구축 사이의 균형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국내에 남은 진짜 나치 반대자들의 도움을 받아 나치 잔당을 배제하고 단순 부역자는 순화 교육을 시키자는 것이다. 승자의 선의에 대한 기본 신뢰 없이는 지속적인 평화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일에서 소련은 이론적으로 비교적 쉬웠다. 소련의 역사 인식에서 독일인들이 자신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프롤레타리아의 객관적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소련은 파시즘을 노동자 계급에 대한 극악한 독재로 해석하면서 신속한 용서로 나아가는 이데올로기적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독일 국민이 파시즘에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보았을 뿐, 많은 미국인이 의심하는 것처럼 독일인들 속에 근본적인 악이 존재한다고는 보지 않았다. 현실에서 소련은 미국이나 영국보다 독일 국민에게 훨씬 더 큰 공포를 안겨주었지만, 그들은 첫날부터 독일인들에게 화해의 비전을 제시했다."(349-50)


"미국에서 독일의 고급 문화를 이해하고 예찬하는 사람은 기껏해야 소수의 독문한 전공자나 이민자밖에 없었다. 대다수 미국인은 독일의 문화 전통에 회의적인 눈초리를 보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렇게 많이 배웠다는 독일 교수들이 왜 하필 최악의 나치에 동조했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러다 보니 새로 재건되는 언론에 독일의 전직 언론인들이 대거 참여하는 것에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스 하베는 연합군이 독일인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야 옥석을 가려낼 수 있고, 그래야 탈나치화에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베는 1945년 10월 17일, 그가 책임 편집을 맡고 미군정의 정보관리부에 의해 출간된 전국지 《노이에차이퉁》을 탄생시켰다. 신문은 적어도 절반 정도는 독일 지식인들의 의견 발표장이기도 했다." "이런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미 당국은 의심의 눈초리로 주시하고 있었다. 하베는 곧 사상적으로 별 믿음이 안 가고, 독일인 동족한테 완전히 속아 넘어간 헛똑똑이로 여겨졌다."(354-5, 358)


"종전 이후 모든 독일인이 당연히 연합군의 의심을 받았다. 그건 전쟁의 논리였다. 반면에 나치 공동체의 논리도 있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독일인들은 자신들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국이 싫어서 도망친 자들에게 어떻게 그럴 자격이 있겠는가? 따라서 돌아온 망명객들이 국내 독일인들을 심판대에 세우거나 교육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심각한 월권행위로 여겨졌다. 하베는 가까운 독일인 그룹에선 좋은 평가를 받았을지 몰라도 안전한 편집국만 벗어나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혐오감을 느꼈다. 독일인들은 망명에서 돌아온 자들의 오만함에 맞서 단단한 밀집대형을 갖추었다. 그건 결코 은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쁜 의도를 가진 나치 잔당들의 단순한 불평불만에 그치지도 않았다. 이제는 숨어 투덜거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후의 서쪽 지구에서는 토론 문화가 활발하게 발전하면서 서방 연합군의 비호를 받던 망명객들을 공개적으로 공격할 장이 활짝 열렸기 때문이다."(360-1)


9. 예술 냉전과 민주주의 설계


"전후 독일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미술이었다. 첫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예술적 양식 문제는 정치적 노선의 시험대가 되었다. 그림에서 '뭔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지 하는 문제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정치 진영과 국가들까지 갈라놓았다. 그림 위의 한 밝은 점은 그냥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즐겨야 하는가, 아니면 그림 외부의 어떤 실제적인 것을 암시해야 하는가 하는 추상미술의 결정적 쟁점은 세계를 둘로 나누었다. 이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예술이 냉전의 전쟁터가 되면서 추상미술은 서방의 창조적 횃불이 되었고, 사실주의는 사회주의의 미학적 계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하는 관객을 위해 많은 신문에 동시대의 예술 경향에 대한 설명이 잇따라 실렸다. 거부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독일 사회에는 현대미술에 대한 거부감 외에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욕구와 문화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팽배했다."(392-3, 396)


"동쪽과 서쪽의 독일인들이 점점 더 멀어질수록 추상미술은 서독에서 주도권을 잡기가 한결 쉬워졌다. 동독의 구상미술 원칙이 분명해질수록 추상미술 역시 정치 체제의 미학적 대안으로 자리매김하고, 서독의 대표적 예술 양식으로 올라서는 것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말이다. 자유의 예술로 이해되는 추상미술은 신앙고백과 같은 카리스마를 얻었고, 이 카리스마는 정치와 분명히 선을 그을 때 더욱 설득력 있게 발산되었다. 추상미술은 존재의 유희적 축제를 묘사했고, 커다란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분출된 순수 생명 에너지를 구현했다. 또한 물감은 주걱으로 퍼서 바르거나, 방울방울 떨어뜨리거나, 표면에 두꺼운 덧칠을 함으로써 재료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가치의 구현이기도 했다. 미국 정보 요원 도널드 제임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추상미술의 도움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제보다 훨씬 더 양식화되고 경직되고 편협한 것으로 비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그들은 추상미술을 힘껏 장려했다."(406-7)


10. 억압의 소리


"인간은 억압을 소리 없는 과정으로 상상하기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당시엔 전후의 정적, 무기와 언어의 침묵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왔다. 심지어 전후 독일인들은 옛 시절을 회고할 때 스스로를 그동안 겪은 일을 일단 말없이 견뎌내야 했던 위대한 침묵자로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말을 삼가는 분위기는 여기저기 있었을지 모르지만, 대체로 말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현실은 그 반대였다. 특히 많은 독일인이 자기 문제에서는 그야말로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독일인들의 고통을 다른 민족의 어떤 고통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최상급으로 표현한 글은 언론과 소책자, 논문에 넘쳐난다. 이 대목에서 말 그대로 억압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글의 저자들은 진정한 희생자들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오직 자신들의 고통에만 빠져 허우적거렸다. 어떤 이는 당시에 이미 패자의 신분으로 세계정신의 꼭대기에 오르기라도 한 듯 자신들의 극심한 치욕을 정신 영역의 리더십에 대한 요구로 바꾸었다."(430-1)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것이 악마든 광기든 자본이든, 혹은 그들 자신의 탐욕이든 독일인 다수는 이제 그 문제를 잊자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고는 비판의 대오를 해산했다. '나는 내 문제만으로도 벅차.' '이제부터는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할 거야.' 독일인들이 서로에게서 확인한 것은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였다. 이런 태도는 그전의 민족 공동체가 요구한 '대동단결'에 대한 역사적 대답이었다. 이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불신과 피로감이 넘치고, 꼭 필요한 것으로만 축소된 결속이 만연했으며, 그 속에 자신들의 엄청난 모순을 숨겼다. 사람들은 암시장에서의 일상적인 속임수에서, 그리고 거처와 빵, 석탄을 얻으려는 치열한 싸움에서 이미 자신들의 진면목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다. 이런 싸움에서는 당원이든 나치 반대자든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 속에서도 웬만큼 예의 바르게 행동했는지, 혹은 아무리 절실한 생존경쟁 속에서도 어느 정도 금도는 지켰는지가 도덕적 평가의 기준이 되었다."(443)


"대다수 독일인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희생자로 여기는 이런 집단적 자기 합리화는 학살당한 수백만 명에 대한 견디기 힘든 모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는 서독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어쩌면 불가피한 전제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써 새로운 시작을 위한 심리적 토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히틀러의 희생자라는 확신은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고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존재로 느끼지 않으면서 몰락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을 버릴 수 있는 선행 조건이었다." "스스로 기만당하고 착취당했다는 확신과 함께 나치의 이념적 불씨는 외견상 완전히 꺼져버렸고, 독일인들은 마치 자신과의 혹독한 정신적 대결을 통해 내적 탈나치화의 기적을 이루어내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가책 없이 온 마음으로 민주주의에 집중할 수 잇었다. 자기들끼리 다정한 말로 다독인 이 희생자 논리 덕분에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범죄와 대면해야 할 심리적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451-2)


맺음말: 삶은 계속된다 460


"전후 독일 사회가 진실과 마주하는 면에서 아무리 무능했다고 비난하더라도 그들의 억압 능력 덕분에 후손들이 막대한 이익을 본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억압은 항상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다. '과거 청산'은 훗날 후손들이 떠맡았다. 그들은 과거 청산을 부모 세대에 대한 역사적 승리로 여겼다. 가장 거친 국면에서는 마치 내전처럼 보이기도 했던 부모와의 싸움에서 말이다. 1968년의 세계적인 저항 물결이 서독에서만큼 부모 세대에 대한 가차 없는 개인적 청산과 결합된 곳은 없었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거의 광적으로 지탄받은 것은 1945년 이후 독일인들이 스스로에게 가했던 억압의 후유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에서 이어진 실제적인 결과는 별로 없었다. '68세대'조차 부모 세대의 나치 연루 혐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대신 자본주의를 독재의 전 단계로 낙인찍고 그들이 겪은 사회적 탄압을 파시스트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파시즘 이론을 만들어냈다."(4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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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달러 종말의 허구
곽수종 지음 / 메이트북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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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 달러가 흔들릴 때 문명도 전환점에 선다


문명의 전환, 혹은 대변화의 시작은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첫째, 총·균·쇠의 강도가 거세진다. 총은 전쟁, 균은 질병의 파괴력, 쇠는 산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 석기에서 청동기·철기로의 전환, 풍력에서 석탄·석유로 이어진 내연기관의 발명 등이 그 사례다. 둘째, 강대국은 스스로 무너진다. 여당의 실수를 먹고사는 야당처럼, 강한 세력이 자충수를 두어 몰락한다. 내부 균열이 심각해지면 천재지변이나 인접 강국의 침략으로 붕괴된다. 셋째, 경제에서 버블 붕괴는 대공황을 낳지만, 정치에서 패권 붕괴는 질서를 무너뜨리고 권력 자체를 사라지게 한다. 권력이 없으면 질서도 유지될 수 없다. 영국 파운드의 몰락이나 달러의 부상은 필연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달러의 몰락도 필연은 아니다. 기축통화는 운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다. 달러가 몰락한다면 그것은 미국 스스로 자초한 재앙일 것이다. 경제 패권의 붕괴는 재건이 가능하지만, 정치 패권의 붕괴는 국가의 쇠멸을 뜻한다. 8)


◆ CHAPTER 1 트럼프의 오독: 달러 패권이 불안하다


대다수 공화당 사업가들과 달리, 트럼프는 세계를 착취 대상이 아니라 미국을 이용하는 ‘호구(the patsies)’로 바라본다. 1987년, 트럼프는 <뉴욕타임스>와 두 개 신문에 전면광고를 실었다. ‘미국 국민에게(To the American People)’라는 제목의 공개서한에서 그는 일본·사우디아라비아 등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받는 국가들에 군사비를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는 결국 “우리 위대한 나라가 더 이상 조롱 당하게 놔두지 맙시다(Let’s not let our great country be laughed at anymore)”라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트럼프의 정치적 메시지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그 시기는 ‘골디락스(Goldilocks) 경제’라 불리며 풍요와 낙관이 공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방위 예산은 패권국으로서 당연히 부담해야 할 대가이고, 무역은 그 보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이러한 믿음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14)


억만장자 기업가 레이 달리오(Ray Dalio)는 저서 『세계질서의 변화』에서 제국 쇠락 초기에 나타나는 공통된 정서를 경고한다. “제조업 부활”을 외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정작 청정에너지와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프로그램을 축소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스스로 약화시키고 있다. ‘산업과 상업이 떠난 자리에 자본만 남는다’는 사실은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징후임을 그는 모르는 듯하다. 미국은 이제 관세나 무역 압박만으로는 중국의 국가 주도 전략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중국은 전략을 더욱 강화하고 있으며, 첨단 산업에서의 지배를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버금가는 집중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중국도 부동산 침체와 고령화 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의 예측과 달리, 중국은 매번 돌파구를 마련하며 국가 주도 체제를 유지해왔다. 반면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세 집착은 오히려 중국 중심 세계의 부상을 앞당길 뿐이다. 17-8)


냉전 이후 미국의 대중 외교 접근은 미국 지도자들이 더 이상 전략적 외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0년대에는 더 이상 경쟁할 강대국이 없었고, 구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이전의 그 어떤 강대국도 상상할 수 없었던 우위를 누리고 있었다. 워싱턴은 경쟁국의 행동을 조율하는 대신, 그들을 자유주의 사회로 바꾸려는 더 야심찬 목표를 추구했다. 오늘날 강대국 간 경쟁은 다시 돌아왔고, 체제 간 전쟁도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방법은 간명하다. 전략적 외교로 회귀해야 한다. 아르키다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을 암시하지도, 굴복을 암시하지도 않는 어조(a tone not too suggestive of war, nor again too suggestive of submission)”로 적들과 교섭해야 하며, 그로부터 확보한 시간을 이용해 동맹과 국내 자원을 전쟁을 위한 더 나은 상태로 준비시켜야 한다. 당연히 그 목적은 전쟁을 피하는 데 있다. 31-2)


◆ CHAPTER 2 달러의 매력과 균열: 기축통화의 힘과 한계


달러의 진정한 특수성은 ‘거래 지배력’에 있다. 국제 차입·대출의 명시 통화가 달러이고, 무역 청구서도 달러로 작성된다. 미국 내 유통 화폐 가치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100달러 지폐 중 약 3분의 2가 해외 보유라는 사실은 ‘대마불사’에 가까운 저변 수요를 보여준다. 왜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과 국가경제가 미 달러화를 사용할까? 찰스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는 미 달러화의 역할이 영어의 국제 공통어 역할과 유사하다고 설명한다. 많은 이가 쓰기 때문에 더 쓰게 되는 네트워크 외부성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언어·통화의 특별한 역할은 주로 민간의 선택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누가 강제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관세 위협으로 달러 사용을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과대망상을 넘어 정책 오류다. 오히려 상시적 처벌 관세는 달러의 명성과 신뢰를 훼손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외교적 영향력은 ‘대체로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국가’라는 평판에서 나온다. 그 평판이 흔들리면 달러의 네트워크 기반도 약화된다. 58)


달러화는 사실상 공짜 돈이자 일종의 무이자 대출(making an interest-free loan to us)이다. 미국 달러화를 사용한다고 해서 사용료를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해외에 얼마나 많은 달러가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50조 달러 이상을 해외에서 보유중이라면 이는 곧 무이자 대출 규모와 같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해외가 미국에 달러로 대출을 해줄 때 미국 재무부 채권을 매입하든 미국 내 자산에 투자하든 달러로 거래된다는 이유만으로 전통적으로 낮은 이자율이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전 세계가 미국 금융 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에 미국의 차입 비용과 이자율은 약 0.5~1% 낮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미국 주택 매입자의 대출 금리가 타국보다 낮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달러 수요가 공급보다 많아 더 많은 차입이 필요하다면, 당연히 시장금리에 따라 높은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이 0.5~1%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차이이자 특혜다. 61)


“전 세계가 달러를 광범위하게 사용함으로써, 미국이 수입하는 것은 싸지고 수출하는 것은 비싸진다”는 주장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구조적 무역수지 및 경상수지 적자를 지적할 때 즐겨 쓰는 논리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투자 자산시장과 소비재 시장을 혼동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미국에서 더 저렴한 것은 달러 강세 때문이 아니라, 미국 시장이 더 완전경쟁에 가깝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산업 기반과 제조업 일자리를 잃은 것은 금융 자금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달러 가치가 과대평가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중국은 자국 통화를 낮게 유지해 미국 수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값싼 수입품으로 미국 시장을 잠식했다는 주장을 덧붙인다. 요약하자면, 달러의 지배적 위치가 미국 제조업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경우가 많다. 결국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간단히 말해 설득력이 부족하다. 63)


지금 달러를 지탱하는 것은 연준(Fed), 즉 미국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급격히 높이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실제로는 평균 2%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 소비자 물가가 2% 수준에서 안정되면, 세계 각국의 통화정책도 이에 연동되어 안정적으로 운용된다는 경험이 지난 30년간 축적되었다. 이를 위해 동원된 수단이 미국 재무성 채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티븐 미누신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듯 보이는 ‘100년 만기 0% 국채 매입’ 구상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미국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미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경제가 함께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인류 문명사에서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설립은 매우 중요한 발명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통령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이자율을 낮추는 것이다. 조 바이든도, 오바마도 모두 금리를 낮추길 원했다. 투자를 늘리고, 주택을 구입하고, 은행 대출을 쉽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리고 이 얘기는 결국 트럼프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 68)


미국은, 더 정확히 말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금융 시스템을 점점 더 노골적이고 공격적으로 무기화하고 있다. 속되게 표현하면 “빚은 못 갚으니 채권자가 알아서 해라, 미국은 책임이 없다”는 태도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달리 미국은 강력한 카드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주 좋은 상태”에 있다고 믿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형편없다”고 고백하는 것 역시 위험하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찾을 수 있는 중간점은, ‘달러는 아직 강하지만 미국 경제는 불확실하다’는 해석일 것이다. 달러가 강하다는 것은 여전히 세계경제가 달러 지배력의 우산 아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독점적 지위가 오히려 미국의 악화된 경제와 불확실한 달러의 미래를 드러내는 역설이 되기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빌리면, “달러는 약해야 하지만 동시에 기축통화로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달러가 동시에 약하고 강하길 원한다. 69-70)


가능한 시나리오는 둘이다. ‘디폴트’는 아니다. 하나는 인플레이션이다. 인플레이션은 채무자에게 유리하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려면 트럼프가 부채의 실질가치를 낮출 정도로 통화 확대를 지지하는 인물을 연준 의장에 임명해야 한다.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를 현실화하려면 트럼프가 쓸 수 있는 또 다른 카드가 있다. 부채를 민간에 떠넘기는 ‘금융 억압’이다. 이런 조치에는 장단점이 있다. 금리가 급등하면 정부 이자비용이 폭증하고 달러 가치가 급락한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은 앞으로 부채에 더 높은 이자를 내야 한다. 여전히 ‘주요 통화 1위’ 지위는 유지하더라도, 달러에 대한 도전이 잦아지면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준다. 제재 수단의 효능이 약해지고, 정보 수집 능력에도 타격이 간다. 변화는 하룻밤 사이에 오지 않는다. 인플레이션 위기는 점진적이고, 달러의 위상 하락도 느린 불꽃처럼 진행된다. 달러 위상이 떨어지는 국면에서 팬데믹이나 또 다른 위기가 닥치면, 그때서야 사람들은 변화를 실감할 것이다. 73-4)


◆ CHAPTER 3 달러 패권의 흔들림: 종말인가, 전환인가


21세기 독재자들은 대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얻는다. 과거 카스트로나 피노체트가 야당을 폭력으로 억압했다면, 오늘날 독재자들은 공공기관을 정치 무기로 바꾸고 법 집행·세무·규제 기관을 동원해 반대자를 압박한다. 이를 ‘경쟁적 권위주의(competitive authoritarianism)’라고 한다. 형식상 정당이 선거에 참여하지만, 집권자의 조직적 권력 남용으로 야당에게 불리한 환경이 조성되는 체제다. 헝가리, 인도, 세르비아, 터키 등이 이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차베스 집권기에도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권위주의로 넘어섰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간단한 기준은 ‘정부에 반대하는 비용’이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데 앞장선 시민들이 ‘정부로부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현실적 두려움 때문에 한 번 더 주저해야 하는 순간, 그 국가는 이미 민주주의 국가라 부르기 어렵다.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경쟁적 권위주의’로 넘어갔다고 할 수 있다. 96-7)


문제는 ‘이 체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을 공격하며 금리 인하를 요구하고, 결국 미국 경제의 모든 열쇠를 쥐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가족들이 무차별적으로 뛰어든 암호화폐 사업과 해외 순방에서의 이해상충적 사업 추진은 ‘미국판 마르코스’를 연상케 한다. 이는 미국 경제와 달러 패권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글로벌 패권 몰락의 전조가 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사회가 이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미온적인 대응만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인·CEO·로펌 파트너·언론 편집장·대학 총장 등은 민주주의 수호를 원하면서도, 정부 위협 앞에 회유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3년만 버티자”는 자기보호 전략에 몰두하며, 주주·예산·규제·소송 위험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작은 굴복은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유화정책(appeasement)’의 치명적 논리다. 권력은 단순히 힘으로만 강화되지 않는다. 저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타협할 때 강화된다. 99-100)


채권시장은 경제 전망과 정책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한다. 보통 장기 금리가 높은 이유는 중장기 성장 가능성을 가정하기 때문이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와 미국 채권 매도세가 겹치면서, 가격은 떨어지고 그 역수인 금리는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채권의 ‘안전자산’ 지위가 흔들리면, 글로벌 투자자들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게 된다. 미 연준이 트럼프의 요구를 받아들여 한 번에 1%p 금리를 내린다 해도,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투자자는 없을 수 있다. 재정적자가 GDP 대비 120%를 넘어서면서, 채권 이자율 급등이 다시 이자 비용 증가로 이어지고, 이는 모기지 금리 상승으로 연결되어 기업과 가계에 큰 부담을 준다. 이를 두고 미국 자산 수요 감소와 매우 높은 적자를 고착시키는 재정 절차의 경직성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경직성이 자산시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커져가는 부채 부담은 채권 투자자들의 불안을 자극하며, 미국의 부채 유지 비용을 끝없이 상승시킨다. 105, 108)


신흥국 투자자들은 이 상황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수익률 상승 → 이자 비용 증가 → 부채 확대 → 통화 완화 정책 의존’이라는 전형적인 금리 악순환 때문이다. 이는 결국 물가 상승과 금리 인상, 그리고 채권 수익률 상승이 반복되는 ‘신흥시장 함정’이다. 지금 미국(그리고 일본 역시)은 그 함정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일본도 2025년 9월 기준 장기 국채 수익률이 급등했다. 30년물은 3.23%로 사상 최고치, 20년물은 2.69%로 25년 만의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일본의 장기 금리 상승은 경제 회복 기대라는 긍정적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GDP 대비 부채 규모 260%라는 현실 속에서 장기 금리가 더 오르면 일본은행이 감당해야 할 이자 부담이 급증한다. 이 때문에 미·일 국채 수익률 격차가 축소되면 일본 투자자들은 자금을 미국에서 빼내 본국으로 돌릴 수 있다. 그 결과 ‘미국 채권 가격 하락 → 금리 재상승 → 또다시 악순환’이 이어져 일본 경제에도 위기로 다가올 수 있다. 109)


미국의 부채와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여전히 강하다. 흥미롭게도 트럼프 행정부 내 일부 인사들은 달러 약세를 반길 수도 있다. 부통령 J.D. 밴스는 외국인의 미국 증권 대량 보유가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높여 제조업에 피해를 줬다고 주장했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 스티븐 마이런도 해외 보유 미 국채에 세금을 부과하는 아이디어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다. 미국의 경상·무역적자는 상대국의 대미 흑자가 미 국채 매수로 ‘재활용’되는 구조다. 따라서 달러 표시 국채 매입을 막으면, 흑자국의 대미 흑자를 축소하거나 아예 실현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논리다. 전 세계 중앙은행가들을 이 정도로 자극한 단일 문서는 드물다. 일부는 미 재무부의 제재 역량을 경계하고, 다른 이들은 ‘모든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기’ 차원의 분산을 택했다. 달러의 전 세계 외환보유 비중은 2001년 73%에서 현재 58%로 하락했다. 이러한 다변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 115-6)


◆ CHAPTER 4 금과 암호화폐: 달러를 대체할 수 있을까


1991년 구 소련의 몰락 이후, 미국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 극적인 군사적 우위를 가지고 있지만, 군사적 우위의 지속과 경제적 패권의 약화가 미국의 절제(자제) 능력을 시험할 것이다. 그 시험은 네 가지 주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동맹을 압박해 단기적 이익을 챙기려는 유혹이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여러 면에서 워싱턴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려는 충동은 늘 존재한다. 워싱턴이 이득을 얻기 위해 힘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미국이 과도한 이익 추구로 권력을 남용하면 리더십과 질서의 정당성이 훼손된다. 둘째, 중국 같은 국가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때 미국은 과잉 반응할 유혹을 받을 것이다. 과거 떠오른 강대국(독일·일본·소련)은 대체로 경제보다 군사력이 앞섰다. 반면 중국은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더 클 것이다. 이는 국제질서에는 비교적 안정적 파급을 줄 수 있지만, 중국이 경제적 방식의 도전을 시도한다는 뜻이며, 신중한 관리가 필요하다. 142)


셋째, 미국은 핵심 이익이 직접 관련되지 않은 사안에 개입하려는 유혹을 항상 겪는다. 냉전기 미국의 베트남, 소련의 아프가니스탄이 그 예다. 오늘 미국에는 동등한 경쟁자가 부재하지만, 이 유혹은 여전하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핵심 이익이 걸린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군사 태도를 피해야 한다. 예컨대 베이징의 A2/AD(접근거부/지역거부) 역량 강화로 중국 인근에서의 미 군사작전 비용·위험이 커졌다. 워싱턴의 대응은 전략목표의 재정의에 달려 있다. 1990년대와 같은 완전한 군사적 자유를 되찾으려 들면 충돌 위험이 커진다. 어떤 접근이든, 미국의 글로벌 이익에서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영토 그 자체가 아니라, 전략·전술이 더 넓은 질서에 미치는 파급이다. 중국의 전략은 분명하다. 굳이 무력을 동원해 미국을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스포츠에서도 ‘상대 실수 유도’가 가장 효율적 전략일 수 있다. 중국은 현 상태를 정면 도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안다. 미국도 중국도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할 때다. 142-3)


미국 달러 가치가 만약 급락해 기축통화 지위가 실질적으로 약화된다면, 금은 국제 부채 결제의 보조 단위이자 가치 저장 수단으로 존재감을 더 키울 수 있다. 중앙은행들이 법정통화와의 직접 태환을 부활시키지는 않더라도, 외환보유고의 통화 구성을 다변화하면서 금 비중을 높이는 흐름은 패러다임 전환기에 대비한 방어적 선택으로 해석된다. 법정통화 기반 준비자산이 인플레이션으로 실질가치가 줄어들 때, 금은 중앙은행 대차대조표의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화폐 신뢰가 흔들릴 때 소비와 교환이 앞당겨지며 물가 급등을 자극해 위기를 심화시키는 자기강화 메커니즘이 관찰되지만, 이것이 항상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중앙은행들이 금 매입을 확대하고 보유 금을 역내 반입하는 사례는, 제재·지정학·제도 신뢰 리스크에 대한 포트폴리오 헤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 더해 완전한 ‘탈달러’는 대체 결제 인프라·유동성·법제 등에서 높은 진입장벽을 마주한다. 148)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달러를 대체하는 기축통화로 기능할 수 있을까? 결론은 ‘아니다’. 다만 보조적 기능을 일부 수행할 여지는 있다. 게다가 비트코인의 가격 불안정성은 일상적 화폐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한다. 또한 비트코인이 완전한 익명성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콜로니얼 파이프라인 랜섬웨어 사건에서 해커 조직 다크사이드가 받은 비트코인의 일부를 추적·회수한 사례는, 비트코인 거래가 완전히 추적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결국 비트코인은 본래의 목표에는 실패한 채 투기성 자산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이는 아이러니하다. 비트코인은 내재적 가치가 없고, 어떤 실물 자산에도 연동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지자들끼리 한정판 굿즈를 사고파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지자들은 금처럼 희소성에 의미를 부여하며, 발행 한도가 2,100만 개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이는 명품의 ‘한정판(limited edition)’과 같은 성격이다. 152-4)


전략적 비트코인 비축이란 미국이 대량의 비트코인을 매입해 보유하는 것이다. 비트코인 정책연구소(BPI)는 미국이 비트코인을 채택하면 달러 패권을 약화시키려는 중국과 러시아보다 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두 국가는 금에 집중하고 있지만, 미국은 디지털 금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장점은 공급량이 한정되어 있어 인플레이션 압력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 발행량은 2,100만 개로 제한되어 있으며, 이미 약 1,990만 개가 채굴된 상태다. 이론상 수요가 유지된다면 장기적으로 가격 상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가격이 급등하면 인플레이션이나 독점적 가격 착취로 이어질 수 있으며, 무차별적인 시장 교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만약 미국이 이를 달러 대체 수단이나 최소한 달러 방어 수단으로 삼는다면, 가장 큰 위험은 변동성 그 자체다. 화폐의 변동성은 금리·환율로 어느 정도 조정이 가능하지만, 기초적 펀더멘털이 부재한 비트코인은 공급과 투자자 심리에 따라 가격이 움직인다. 157)


스테이블 코인의 주요 위험 요인들을 요약하면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금리 위험(Interest Rate Risk)으로, 채권 가격은 금리와 반대로 움직인다. 스테이블코인이 매일 채권을 사고판다면, 단기 금리 변동에도 일부 평가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유동성 위험(Liquidity Risk)이 잠재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하루 단위로 대량 국채를 거래할 경우, 유동성 부족 시 원하는 가격에 매도하지 못할 수 있다. 셋째, 재투자 위험(Reinvestment Risk)이 존재한다. 만기 채권이 재투자될 때, 금리가 이전보다 낮으면 예상 수익률이 감소한다. 넷째, 신용 및 제도적 위험(Credit / Regulatory Risk)이다. 미국 국채는 사실상 무디스, S&P AAA 등급으로 초우량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시나리오(예: 정부 채무 상환 지연, 미국 디폴트 가능성)는 이론상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운영 및 시스템 위험이 존재한다. 매일 채권을 사고파는 구조에서는 거래 시스템 오류, 가격 산정 오류, 스마트 계약 오류 등이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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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936 - 오늘의 중동분쟁을 만든 결정적 순간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오렌 케슬러 지음, 정영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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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역사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대봉기 11 


"이 책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약 10년 전, 3년에 걸쳐 진행되며 이후 이어질 유대-아랍 관계의 틀을 만들어낸 팔레스타인의 첫 아랍인 봉기를 다룬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진행된 이 '대봉기Great Revolt'라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하나로 빚어졌다. 경쟁관계에 있던 가문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빈곤층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봉기는 결국 내부를 향하며 약해졌다. 내분과 보복은 아랍인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실용주의자는 극단주의자에 의해 밀려났고, 첫 번째 대규모 난민 행렬이 팔레스타인을 빠져나갔다. 영국군의 진압으로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다쳤다." "시온주의 종식을 목표로 시작된 대봉기는 오히려 아랍 팔레스타인을 망가뜨렸고, 아랍인은 10년 후 실제 진행된 유대 국가 건설에 맞설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러나 대봉기는 팔레스타인인이 승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순간이었고, 많은 사람이 아직 그 순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2-3)


"한편 대봉기는 유대인에게 아랍인과는 아주 다른 유산을 남겼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대봉기를 계기로 아랍인이 유대 국가 건설 사업을 묵인해줄 거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주권국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무력에 기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봉기를 계기로 수천 명의 유대인이 당대 최고의 군사 강국 영국에게 훈련을 받고 무기를 지급받았다. 어설펐던 경비대는 특수부대와 장교단까지 갖춘 유대인 군대의 씨앗으로 거듭났다. 유럽의 파시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사태에 직면한 가운데 소극적 방어는 민족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유대인의 테러 공격이 처음 등장한 것도 대봉기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랍과 유대, 두 민족주의를 말하는 책이자 그 둘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거대한 폭발을 다룬 책이다. 이 변화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의 연대기에서 핵심 역할을 했지만 많은 경우 간과되어 왔다."(13-4)


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21


"러시아 태생의 바이츠만은 영국에서 화학자로 활동했다. 그의 아세톤 생산 공정은 연합군의 폭발물 산업에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었다. 바로 세계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1919년 1월, 바이츠만은 아랍 봉기의 영웅 파이살을 만나기 위해 그의 사막 주둔지로 갔다. 여기서 둘은 T. E. 로렌스의 중재로 협정을 맺었다. 파이살은 협정에서 유대인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는 밸푸어 선언을 사실상 지지하고 추후 레반트 나머지 지역에 건설될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별도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파이살과 바이츠만은 공동 성명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 연대감과 오랜 유대감을 염두에 둘 때, 각자의 자연적인 열망을 달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의 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파이살은 다가오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더 넓은 독립에 대한 아랍의 꿈을 실현시켜줄 것을 협정의 조건으로 걸었다."(33, 35-6)


"유대인은 빠르게 움직였다. 1920년 네비 무사Nebi Musa(선지자 모세) 축제 때 유대인을 겨냥해 일어난 폭동 이후 노동계 시온주의자들은 정착촌을 지키기 위해 무장단체 하가나(Haganah, '방어'라는 의미)를 창설했다. 공식적으로는 불법 단체였지만, 활동을 방어에만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영국은 이를 눈감아줬다. 영국은 여전히 파이살을 도왔다. 영국의 중동 지역 관료들은 1921년 카이로에 모여 짧은 기간 시리아를 통치했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한편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느슨하게 연결된 '트랜스요르단'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설립해 파이살의 형 압둘라는 에미르Emir로 앉혔다. 시온주의자, 그중에서도 특히 자보틴스키의 강경파 추종자들은 유대인 몫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보고 영국에 분노했다.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은 이라크와 요르단 동쪽을 아랍인에게 보장함으로써 유대 민족 고향 건설에 대한 아랍인의 분노가 잦아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는 통하지 않았다."(41-2)


"당시 자보틴스키는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상가였다. 그는 《하레츠Haaretz》 등의 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는 아마 러시아 문학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이 아닌 시온주의, 그중에서도 자기방어와 자기결정권이 하나님의 뜻이나 노동자의 형제애라는 개념보다 우선하는 강경한 시온주의에 투신했다. 반면 하지 아민은 평범한 신학적 소양만을 갖춘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자였다. 새뮤얼 고등판무관의 사면이 아니었다면 하지 아민은 아마 역사에 별다른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 아민을 귀환시킨 새뮤얼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그의 형의 자리, 즉 대大무프티 자리를 하지 아민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렇게 종신직 대무프티 자리에 오른 하지 아민은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이는 밸푸어 선언에 이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은 영국의 또 다른 결정이었다."(44-5)


"1929년 8월 15일은 유대인이 히브리 달력에서 1년 가운데 가장 애통한 날로 꼽는 아브월 9일의 하루 전날이었다. 유대교 안식일이었던 다음 날 아침,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을 겨냥한 전례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어지는 며칠간, 폭동은 텔아비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 지역, 제즈릴 계곡, 갈릴리 등 팔레스타인의 20여 개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번졌다. 끔찍했던 엿새 동안 133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아랍인 사망자의 수도 비슷했지만, 대부분 영국군에 의해 죽은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사망은 일곱 명으로 추정됐다. 300명이 넘는 유대인과 200명이 넘는 아랍인이 부상을 당했다. 폭동은 전 세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뉴욕 타임스》는 첫 네 면을 거의 이 사건에 할애했다. 메디슨스퀘어가든에 2만 5000명의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 집회 사회자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담화를 낭독했다. 후버 대통령은 시온주의 계획에 대해 미국 국민이 지닌 〈심심한 동정과 공감〉을 강조했다."(57-9)


"히틀러 취임 두 달째인 1933년 3월 31일, 대무프티 하지 아민은 독일 총영사와 만났다. 하지 아민과의 면담 후 총영사는 베를린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오늘 대무프티가 팔레스타인 안팎의 무슬림이 독일의 새 정권을 환영한다는 점과 파시스트적이고 반민주적인 국가 권력이 다른 땅으로도 전파되기를 희망한다는 점을 밝힘.〉" "몇 주 후 총영사는 대무프티를 비롯한 아랍 인사들과 네비 무사의 사막 사원에서 다시 만났다. 아랍 인사들은 새로운 독일을 환영하고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조치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밝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단 하나,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막기 위해 독일 정부가 최선을 다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히틀러의 부상이야말로 팔레스타인 이주 유대인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시온주의자 사이에도 한 가지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유럽이 더 이상 세계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65-6)


2장 피로 물든 야파 83


"이 시기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민족 국가 건설 계획은 치명적인 위협을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1933년 3만 명 규모의 유대인 이민을 허가했고, 그 숫자는 1934년에 4만 2000명, 1935년에는 기록적 규모인 6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불법적인 경로로 입국하는 유대인 수만 명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40만 명에 가까웠다. 4년 만에 두 배 증가한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인구 또한 같은 기간 세 배 증가했다." "중동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32년 영국은 (자국의 군사적 특권은 유지한 채) 파이살을 국왕으로 세워 이라크의 독립을 승인했다. 1936년 초에는 시리아인들이 50일에 걸친 총파업 끝에 프랑스 철수를 논의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이집트 또한 영국과 비슷한 협상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팔레스타인에서만 아랍인의 독립 열망이 그저 좌절된 것으로 모자라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었다."(88, 93)


"야파에서 유혈사태가 있기 이틀 전(1936. 4. 17),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벤구리온을 만났다. 벤구리온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갑작스럽게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에 대해 열정적인 웅변을 쏟아냈다. 안토니우스는 유대인 〈공동체〉의 이름으로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 땅)'을 제안했다.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가 될 것이고, 인구 대다수는 유대인으로 구성될 것이다. 에레츠 이스라엘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가자에서 하이파까지, 동쪽으로는 제즈릴 계곡까지가 될 것이다. 그 옆으로는 헤브론산맥에서 네블루스까지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아랍 국가가 자리 잡는다. 안토니우스의 제안은 성지 팔레스타인을 반으로 쪼개는 것과 다름 없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시리아 연방으로의 편입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양보였고, 《성경》 속 〈이스라엘 땅〉의 일부만을 수락하는 것 또한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109-11)


"야파 유혈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단합에 대한 압박은 점점 강해졌다. 아랍고등위원회가 주도한 파업이 길어질수록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를 분리하고 더 멀리했다. 벤구리온은 여기서 기회를 감지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값싼 아랍인 노동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인 유대인 농업과 산업을 성장시켜 자급자족을 실현할 기회였다. 이미 몇 년째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설파해온 벤구리온은 야파 항구의 아랍 인부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영국 정부에 텔아비브 북쪽 끝에 경쟁 항구 건설을 허가해달라고 청원했다. 영국 정부는 몇 주 망설인 끝에 한 가지 조건을 달아 허가했다. 새로운 항구 건설을 위한 자금은 유대인이 직접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항구 건설은 유대인에게 이중의 승리였다. 우선 신항구 건설로 팔레스타인이 자랑하는 최대 수출품 감귤류를 유럽으로 원활하게 수출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새로운 항구가 지닌 상징성이었다. 이제 유대인도 외부 세계로 통하는 자신들만의 관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114-5)


"여름이 되면서 대무프티도 폭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6월부터 대무프티의 본부는 전사들을 격려하고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인에 협조한 아랍인 또한 점점 더 많이 죽어나갔다." "한편 영제국은 신경 쓸 곳이 너무 많아 극도로 정신없는 상태였다. 3월에는 히틀러가 또다시 베르사유조약을 위반하고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에 접한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5월에는 무솔리니가 아디스아바바 입성으로 에티오피아 점령을 완성하며 수에즈운하에 대한 영국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궁지에 몰린 위임통치령 정부는 그때까지 거부해왔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유대인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훈련시켜 스스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노트림(notrim, 파수꾼)'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임시경찰대를 창설했다. 노트림의 실제 운영은 유대인기구가 맡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가나가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영국에 의해 유대인 무장 경관이 탄생했다."(122-4)


3장 두 국가 해법론 137


"1936년 여름, 윌리엄 필은 총 여섯 명으로 구성된 왕립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총 6주 동안 조사를 진행한 후 필 위원장은 위임통치령 개시 이후 유대인이 원하는 민족적 고향의 성격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일종의 문화적 중심지를 원했다면, 이제는 수백만 명의 피난처를 원하고 있었다. 부위원장인 럼볼드는 필의 말에 동의하며 미국의 이민 제한과 히틀러의 부상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가운데 대의 정부에 대한 아랍인의 요구가 〈실로 매우 강하다〉고 언급했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위원은 팔레스타인의 두 민족이 각자 지닌 열망은 양립이 불가능하며,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위원회는 현재 위임통치령의 범위 안에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한 후 이를 근거로 위원회에 제출된 제안 가운데 가장 과감한 제안을 추천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위원회는 이 제안을 〈깔끔한 분할clean cut〉이라고 불렀다."(164-5)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 방식은 원칙적으로 유대인 소유 토지가 집중된 지역은 유대인에게, 나머지 지역은 아랍인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7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계획에 따르면 20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갈릴리의 경우 아랍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위원회는 인구 성장과 〈개척〉을 고려해 유대 국가 쪽으로 배분했다. 사페드, 티베리아스 등의 도시가 지닌 종교적·역사적 의미가 그 이유였다. 물론 인국가 혼합된 도시는 임시적으로 영국의 관리 구역으로 남기기로 했다. 관개전문가 해리스의 제안대로 가장 성스러운 두 도시, 즉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야파 북쪽 바다까지 이어지는 통로와 함께 영국 관리 지역으로 남기기로 했다. 또한 유대 국가와 영국은 아랍 국가에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경제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감소할 세수를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렇게 분할안이 제시됐다."(179-80)


"벤구리온은 셰르토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필 위원회 보고서〉를 읽은 첫 소감을 이렇게 썼다. 〈저는 이 계획의 실현이 완전한 구원의 시작을 위한 결정적인 단계이자 '이스라엘 땅' 전체를 점진적으로 정복하기 위한 독보적인 지렛대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던 벤구리온의 눈에 처음에 놓쳤던 중요한 내용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짧게 언급된 인구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벤구리온은 그 가능성에 열광했다. 인구 이동이 영토 확장보다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인구 이동은 우리가 주권국이었을 때도, 제1성전 시대와 제2성전 시대에도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가능케 해줄 수 있다. 바로 유대 국가로 분류된 계곡 지역에서 아랍인을 이동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분할안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이 마지못해 수락한 것으로 보여야 했다. 그런 연유로 벤구리온은 외부적으로는 영제국에 환멸을 느낀다며 분할안이나 영국의 계속된 통치나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라고 한탄했다."(181-5)


"벤구리온은 대부분의 아랍 인사가 탐탁지는 않을지언정 분할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수프 한나와 무사, 시리아의 주요 민족주의 단체인 민족진영 등 일부는 벤구리온의 예상대로 분할안을 수용했다. 분할이 진행될 시 정치적·재정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트랜스요르단의 에미르 압둘라는 영국에 지지 입장을 알렸다." "그 모든 지지자가 몇 주 만에 갑자기 돌아섰다. 에미르 압둘라는 애초에 분할을 지지한 적이 없다며 황급히 대무프티와 관계 회복을 꾀했다. 라게브는 분할안이 유대인의 극단적인 요구까지도 정당화했다고 비판하며, 작은 팔레스타인 땅을 세 개로 나누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갑작스러운 반전이었다. 압둘라도 라게브도 아랍 팔레스타인에서 대무프티가 가장 막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대무프티는 보고서가 발표되자 재빨리 분할안 거부 입장을 밝히고 분할을 지지하는 이물에게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었다."(185-6)


"1937년 8월 취리히에서 제20차 시온주의자총회가 개최됐다. 헤르츨이 바젤에서 제1차 총회를 개최한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해였다. 바이츠만은 분할 원칙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후 2주 동안 50여 명의 연사가 분할안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의견을 냈다. 반대하는 연사의 비중이 절반을 조금 넘었다. 벤구리온이 이끄는 노동계 내에서도 대표단의 3분의 1이 반대했다. 보고서가 제안하는 유대 국가라는 것이 너무 급조된 데다 협상의 여지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분할안에는 예루살렘도 빠져 있었고 혼합인구 도시의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영국이 분할을 끝까지 실행에 옮길지 여부도 믿을 수 없었다." "바이츠만과 벤구리온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총회 차원에서는 필 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말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선은 거부하되 가장 큰 대가인 유대 국가는 챙기기로 하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과 협상을 계속할 권한을 주기로 했다."(188-90)


4장 검은 일요일 193


"1936년 8월 28일, 유대민족기금의 토지 구매 담당자는 최근 시장에 나온 매물에 대해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 주요 인사 세 명이 소유 중〉이라고 수첩에 기록하고는 무사와 나머지 공동소유자 두 명의 이름을 적었다. 무사는 무솔리니와 비밀 거래를 하며 온건파 아랍인으로서 지녔던 신망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그는 이제 영국과 유대인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온건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시온주의자에게 땅을 내주는 치명적이지만 너무나도 흔한 죄를 저지름으로써 아랍민족주의자로서의 진실성을 훼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사실 상류층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서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유력 가문 중에 유대인에게 땅을 팔지 않은 가문은 없었다. 아랍고등위원회의 구성원 여덟 명 가운데 적어도 절반이 토지를 직접 거래하거나 중개했다. 그 사이 시온주의자들은 이미 제즈릴 계곡과 갈릴리 지역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진행 중이었다."(197-8)


"1937년 여름, 루이스 옐런드 앤드루스는 갈릴리의 지구판무관으로 승진했다. 사실상의 주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런 앤드루스가 살해당한 다음 날 식민장관 고어에게서 전보가 도착했다. 영국 대표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대봉기 때 영국군과 경찰에서 20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부 고위 관료가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랍고등위원회 구성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5개월 후 야파 항구에 도착한 하지 아민은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시리아로 향했다. 시리아의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이 레바논 해안에서 대무프티를 체포했다. 대무프티는 나름 정치적 망명자였고 다른 아랍 국가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프랑스는 경찰의 보호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대무프티의 체류를 허가하고 베이루트 북쪽 마을의 한 저택으로 그를 이동시켰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도부는 망명 상태가 되었고, 수십 년 동안 돌아가지 못했다."(205-7)


"사회주의자에서 수정시온주의자로 변모한 그린베르크가 1937년에 발표한 히브리어 시집 《성토聲討와 신앙의 서》는 영국과 〈아랍-아말렉 족속〉을 비판했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비난이 향한 곳은 하블라가, 즉 자제만을 끈질기게 고집하는 벤구리온의 좌파 시온주의 지도부였다. 그는 〈5696년(서기 1936년의 히브리력 표기)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자제만을 설교하는, 다윗의 왕좌를 위해 아라비아의 동맹을 구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그린베르크만이 아니었다. 6년 전 시온주의 지도부에 불만을 품은 하가나 단원들이 일부 수정주의 청년들과 민족군사기구, 즉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Irgun Zvai Leumi를 결성한 바 있었다. 이르군은 주로 자보틴스키에 대한 이념적 충성심으로 모인 느슨한 조직이었지만, 그 표식에는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의 지도 위로 소총을 굳게 든 팔이 그려져 있고, '락 카흐(Rak Kach, 오직 이를 통해서만)'라는 히브리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211-2)


"조지 렌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 속에 오스만에서 벌어진 그리스인 학살을 폭로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아나톨리아 지역 기독교인 수십만 명이 이주할 수 있게 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아나톨리아의 비극을 기억하는 렌델에게 필 위원회의 인구 이동 제안은 특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러한 대량 이주가 '깔끔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렌델의 호소는 마흔 살에 처음으로 입각한 외무장관 이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렌델의 의견서는 곧 이든 장관의 의견서가 됐다." "〈필 위원회 보고서〉는 후속 대표단 파견을 권고한 바 있었다. 그렇게 기술위원회가 임명됐다. 이든의 주장으로 영국은 이들의 임명을 알리는 성명에서 〈국왕 폐하의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도 분할안을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영국이 분할안을 폐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자 바이츠만은 1937년의 마지막 날 식민부에 서한을 보내고 분할안을 〈정중히 장사 지낼〉 준비를 시작했다."(225, 229-32)


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233


"1938년 첫 주, 벤구리온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토지 매입을 가속화해야 했지만, 단순히 사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땅을 한 번에 정복해야 합니다. 정복 없이는 땅을 사들여도 가치가 없습니다.〉 정복은 유대인을 보내 정착시킨다는 의미였다. 목표는 레바논 국경 근처의 바위투성이 봉우리였다. 이 지역은 농업적인 잠재력이 거의 없고 다른 유대인 정착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착촌으로 가는 도로를 닦던 인부들이 총격을 받았다. 거의 2년에 걸친 아랍 봉기로 숱한 공격을 경험한 유대인에게는 크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브레너는 그 공격 이후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어디선가 두 무리의 유대인 경찰 부대가 나타나더니 국경 도로를 건너 산비탈을 뛰어올라가 공격자들의 양쪽 측면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 노트림들도 겉보기에는 다른 유대인 경찰들과 비슷했지만, 사실 이들은 '야전분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설된 하가나의 불법 조직이었다."(252, 255-6)


"1936년 이전까지 하가나는 이슈브 공동체에서 가장 덜 발전한 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초기에는 이민, 고용, 정착, 농업 등이 중요한 이슈였고, 시온주의자의 자금과 관심도 당연히 그에 관련한 활동에 집중됐다. 게다가 위임통치령 정부는 유대인을 훈련시키거나 그들에게 총기를 주는 것을 꺼려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분쟁에서 자칫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봉기가 장기화되면서 영국이 계산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치안 유지에 실패했지만, 유럽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본국의 병력과 자금을 더 동원할 수는 없었다. 시온주의 지도부가 고수해온 하블라가(havlagah, 자제) 정책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동안의 자제 정책을 지켜본 영국 정부가 유대인 수만 명에게 합법적인 무기를 쥐여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설 초기 지역 야간 경비대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하가나는 점차 통합성과 기동성을 갖춘 전국 규모의 유대인 준군사조직으로 변모해갔다."(256-7)


"1938년 6월 29일, 팔레스타인 최초로 처형된 유대인 벤요세프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 유대인은 충격에 빠졌다. 다음 날 팔레스타인의 이르군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분파는 영국인에 대한 보복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분파는 이번 사건으로 마침내 하블라가 정책의 무용성이 드러났다며 아랍인을 상대로 무제한 전쟁을 시작할 시간이 왔다고 주장했다. 이날 호응을 얻은 것은 두 번째 주장이었다. 자보틴스키는 새로운 국면에 대비해 작전을 준비해둔 참이었다. 벤요세프의 사형 집행 몇 시간 전, 자보틴스키는 하이파에서 이르군 단원으로 활동 중인 조카에게 전보를 보냈다. 〈최종 결정 시 대거 투입할 것.〉 전보의 서명은 〈멘델슨〉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이르군 단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보틴스키와 달리 보복에 아무런 내적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자보틴스키는 오히려 그의 갈등을 감지한 단원들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멋대로 행동할 것을 두려워했다."(270-1)


# 수정시온주의 청년 조직 '베타르' 소속이던 벤요세프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아랍인들의 유월절 매복 공격에 대한 복수로 민간인 공격에 나섰다가 체포되었다. 


"새롭게 펼쳐진 국면에 비하면 1년 전의 검은 일요일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938년 7월 전국에서 사망한 유대인 숫자는 60명이었다. 아랍 대봉기 시작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달이었다. 그러나 이달 사망한 아랍인의 숫자는 100명이 넘었다. 봉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에게 살해된 아랍인의 수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아진 것이다. 1936년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생겨난 틈은 이제 메울 수 없는 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슈브(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유대인의 소행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폭력에 반대한 벤구리온 역시 벤요세프의 사형에 반대했었다.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없었고, 벤요세프가 순교의 상징이 되면 다른 유대인 청년들이 〈광기 어린〉 행동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에 또 다른 벤요세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땅에는 지금 나치 정당이 있습니다.〉 벤구리온이 말했다."(273-6)


6장 유대의 로렌스 283


"한편 제네바 호수 인근 에비앙에서는 독일제국에서 박해받는 소수민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0여 개국 대표단이 모였다. 프랑스는 이민자 인구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라틴아메리카 4개국은 난민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하며, 특히 〈상인이나 지식인〉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영제국 또한 더 이상 수용 불가라고 말했다." "벤구리온은 다른 국가들이 유대인 대량 수용을 결정해 유대인 문제 해법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선택지가 아예 제외될 경우 시온주의 운동에 닥칠 수 있는 〈피해와 위험과 재앙〉에 대해 내부적으로 경고해온 바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불행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에비앙회의를 통해 유대인을 독일제국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히틀러는 회의의 실패를 바라보면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유대인을 수용하겠다는 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강제 이주는 불가능했다. 이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다."(289-90)


"대무프티가 레바논의 저택에서 내린 지시는 다마스쿠스에서 망명 중인 측근과 팔레스타인 현지의 반군 지도자들에게 모두 구두로 전달됐다. 그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낮은 수준의 폭력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약하게 끓는 냄비가 요리사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유대인과 영국인 그리고 민족에 방해가 되는 아랍인을 상대로 작전의 강도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는 팔레스타인에만 유대인 문제의 부담을 (전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문명 세계 전체의 의무에 대한 파렴치한 회피이며 도덕적으로도 부당한 행동〉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민족의 박해를 완화하기 위해 또 다른 민족을 박해하는 것은 그 어떤 도덕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랍의 각성》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을 쫓아내거나 멸종시키지 않는 한 제2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다.〉"(292, 297-9)


"오드 윈게이트는 이슈브 외부 인물로서는 그 누구보다 유대인 군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으며, 추후 나타나게 될 강경파 기독교 시온주의 현상의 독보적인 전조가 됐다. 근본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 아랍주의자이자 시온주의자였던 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알려진 T. E. 로렌스의 먼 사촌이었다. 윈게이트는 로렌스를 일종의 사기꾼으로 여겼지만, 나중에 '유대의 로렌스'라는 (본인은 혐오했던) 별명을 얻게 됐다." "윈게이트의 세상을 형성한 기반은 전적으로 《성경》이었다. 윈게이트는 《성경》 속 인물 가운데 기드온을 이상으로 삼았다. 《구약성경》의 〈사사기〉에는 전사이자 선지자인 기드온이 이스르엘 계곡(제즈릴 계곡)의 하롯샘(에인 하로드)에서 용사들을 모아 〈미디안〉 군대, 즉 〈동방〉의 압제적인 〈이스마엘 족속〉에 맞서는 내용이 등장한다. 기드온은 용사들을 세 무리로 나눠 밤에 적진으로 쳐들어갔고, 용사들이 부는 뿔나팔 소리에 놀란 적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299, 303, 307)


"필 위원회가 처음 분할을 권고하고 벌써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후임인 우드헤드 위원회를 '리필(Re-Peel, 다시, 필)'이라 부르며 비꼬았다." "〈우드헤드 위원회 보고서〉는 1938년 11월 9일에 공개됐다. 리필Re-Peel은 말 그대로 리필(Repeal, 폐지)을 권고했고, 아랍인들은 안도했다. 팔레스타인 땅이 온전히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과 어느 부분도 유대인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보고서 발표일에 나치 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이 독일제국 전역의 유대인 재산을 때려 부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 나치는 이 포그롬을 대중의 우발적 폭발로 규정하고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심각성을 축소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땅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했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대량 이민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330, 334-7)


7장 불타는 땅 339


"1939년 2월 7일에 런던 원탁회의가 시작되고 일주일 후, 맬컴 맥도널드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준비한 폭탄을 터뜨렸다. 이민 제한을 통해 유대인 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아랍인의 두려움을 달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제안에 따르면 10년 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 이민은 불가능하고 토지 매매도 제한된다. 언젠가는 각자가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되겠지만, 우선은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양측이 동수의 대표성을 가지는 국가를 설립하자는 제안이었다. 바이츠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랍인들 또한 맬컴 맥도널드의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자말은 영국의 침공 전까지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수 세기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며 아랍 독립국 하에서의 삶이 유럽에서의 삶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수의 아랍 민족이 침입자인 유대인과 같은 수준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356)


"1939년 5월 17일, 체임벌린 내각은 〈팔레스타인 정책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승인했다. 이 성명서는 런던 원탁회의에서 맬컴 맥도널드가 제안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 성명서는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로 만드는 것은 영국 정부의 정책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대신 영국은 10년 이내에 영국의 전략적 이익 보호를 위한 조약 체결과 함께 명시적으로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설립하기로 약속했다." "이민은 향후 5년간 총수치 7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이후 추가는 모든 당사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이루어지게 했다. 마지막으로 맬컴 맥도널드가 런던에서 제안했던 내용에서 달라진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원래는 상호 거부권이었던 것이 아랍인의 단독 거부권으로 바뀐 것이다." "유대인 기구는 백서가 〈완전한 배신〉이며 〈아랍 테러리즘에 대한 항복〉이자 유대인이 가장 절실히 도움을 구하는 시기에 날아온 〈잔인한 타격〉이라고 평했다."(376-8)


"주류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백서에 완전하고 단호한 거부를 선언했다. 이르군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정책과 기존 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백서가 발표되고 한 달가량은 거의 매일 민간인을 겨냥한 공격이 발생했다." "예루살렘의 렉스 극장에서 폭탄 두 개가 터져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아랍인이었고, 나머지는 이르군의 표현에 따르면 〈아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던〉 유대인이었다. 예루살렘의 러시아인 거주 지구에서 폭탄 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라헬이며 성은 오헤베트 아미(Ohevet-Ami, 내 민족을 사랑하는)라고 얘기했다." "이미 여러 차례 사건이 있었던 하이파의 채소 시장에서도 폭탄이 터졌다. 당나귀에 실려 있던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아크레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사망자 20여 명 가운데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봉기가 이어진 3년 동안 이르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아랍인은 최소 250명이었으며, 부상자 또한 수백 명이었다."(384-5)


"영국 정부는 대무프티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랍 세계가 민주주의 진영과 이해를 같이한다는 선언을 발표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유수프 한나는 일부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보인 독일제국에 대한 예상 밖의 열렬한 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랍인은 자신들이 유대인 때문에 영국에 탄압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히틀러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대영제국에 저항했다. 아랍인 스스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히틀러가 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대중의 심리다. (···) 아랍인은 현재 약한 자신들이 강대국 영국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기고 있다. (···) 히틀러에 대한 아랍인의 사랑은 바로 이런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벤구리온은 영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의 태양이 저물고 바다 건너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더불어 〈지금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루스벨트 대통령〉이라고 말했다."(388-9)


마치는 글: 끝나지 않은 봉기 392


"하지 아민의 제2차 세계대전 중 행보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장을 하고 레바논을 탈출한 하지 아민은 이라크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친추축親樞軸 쿠데타를 지원한 그는 다시 영국의 추적을 피해 도망쳤다(총리가 된 처칠은 하지 아민의 암살을 승인했다). 하지 아민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거쳐 마침내 제3제국 나치 독일로 향했다. 하지 아민은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하지 아민은 유대인 난민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다. 1943년 여름에는 헝가리에 〈유대인의 위협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폴란드 같은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치가 이미 유대인 3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회고록에는 이 사실을 힘러가 이야기 해주었다고 무심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무엇보다 아랍 세계와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선전가이자 모집책으로 나치에게 유용했다."(396-7)


"제2차 세계대전 후 지쳐버린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갔다. 휴전 이전부터 우려했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봉기가 유대인 봉기로 대체된 것이다. 봉기 초기에는 주로 이르군과 그 분파인 이스라엘 자유전사[Freedom Fighters of Isreal, 레히(Lehi)라는 히브리어 약자로 더 잘 알려짐]가 공격을 이끌었으나, 평화 이후에는 하가나도 합류했다." "1947년 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팔레스타인은 이번에도 대무프티의 주장으로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9월, 조사를 마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는 10년 전 필 위원회의 핵심적인 권고와 정신은 그대로 반영하되 영토나 다른 세부적인 부분은 수정해 새로운 분할안을 내놓았다. 11월 29일, 국제연합총회에서 분할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위임통치 종료를 몇 시간 앞둔 5월 14일 오후,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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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달러 이후의 질서 - 트럼프 경제 패권의 미래
케네스 로고프 지음, 노승영 옮김 / 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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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1장. 지배적 통화의 탄생


세계통화를 발행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다. 반면에 세계통화 지위를 잃는 것은 뼈아픈 손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터져나오는 사회적 요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공장과 기반시설을 재건해야 할 필요성, 식민 지배 권력을 계속 휘두르려는 욕망 등으로 인해(GDP의 240퍼센트를 넘어선 전후戰後 채무는 말할 것도 없다) 영국이 잇따라 재정 문제를 겪은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영국은 1956년, 1967년, 1976년 세 차례나 구제금융을 받으려고 국제통화기금IMF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으며 이것 말고도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여러 구제책에 기대야 했다. 파운드가 세계통화로 군림하던 영광의 시절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달러가 이런 운명을 맞으려면 여러 번의 불운을 겪어야 할 것이다. 지배적 달러는 이제 중장년에 접어들었을지 몰라도 여전히 건강하다. 그럼에도 앞에 놓인 도전(이 책 마지막 부분에서 논의한다)을 마주하려면 우선 세계에서 어떻게 달러가 패권을 쥐게 되었는지 이해해야 한다. 21)


1부. 달러 패권에 맞선 과거의 도전자들


오늘날 유로는 국제 교역과 금융에서 확실히 달러의 가장 중요한 대안이다. 하지만 비EU 나라들 사이의 교역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로는 세계통화가 아니다. 유로존 정부 부채 시장은 발칸화되어 있다. 투자자들은 독일의 부채와 이탈리아의 부채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며 이는 당연하다. 강력한 재정 당국이 없다는 것은 유로화가 가진 또 다른 주요 한계의 뿌리다. 이를테면 범유로화 예금 보험 제도는 아직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은행 연합이 온전히 발전하는 데 필요한 기본 조건이다. 자본시장 연합이나 더 온전하게 통합된 은행 시스템이 없고 유럽 정부 부채가 파편화된 상황은 달러와의 경쟁에서 유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주요 걸림돌이다. 이런 탓에 최근 수십 년간 유럽의 성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유럽이 역동성을 잃은 요인은 높은 세율과 방만한 복지 등 여러 가지다. 미국과의 격차 중에서 70퍼센트 이상은 낮은 생산성 때문이므로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50-3)


유로화는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을 보유했으며 이 강점은 향후 수십 년 안에 전면으로 등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독립은 유럽연합의 기초가 되는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명시되어 있다. 이에 반해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1913년 의회 입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렇기에 만일 의회가 원한다면 연방준비제도는 폐쇄되어 몇 주 안에 미국 재무부에 재흡수될 수 있다. ECB는 헌법적 지위를 누리며 주요 임무는 유로존 전역에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는 방법이 명문화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점이 좁아서 창의적 해석의 여지가 크지 않다. 반면에 물가 안정과 최대 고용을 유지한다는 연준의 이중 의무는 해석의 여지가 크며 관례적으로 연준은 이를 낮은 인플레이션과 완전고용으로 해석한다. 이를테면 연준은 인플레이션과 실업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와 관련하여 정치적 압력을 훨씬 많이 받는다. ECB가 공동 책임으로 운영되는 것도 안정성의 한 요인이다. 53)


2부. 중국: 현재의 도전자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마는 근거는 여럿 있다. 아마도 가장 주된 근거는 빠르게 발전하는 나라가 부유해짐에 따라 (정부 형태와 무관하게) 포퓰리즘적 재분배 압박이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탈선시킨다는 것이다. 전형적 사례를 보자면 성장이 느려지고 정부가 성장을 지탱할 방법을 찾을 때는 대외 차입을 비롯한 금융 탈규제가 강력한 단기적 해결책일 수 있다. 신생 정부의 제도가 허약하면 급증한 차입은 생산성이 낮은 투자로 흘러들기 쉬운데, 결국에 가서는 투자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성장을 이루지 못한다. 차입이 단기적 해결책으로 효과를 낼지도 모르지만, 성장이 불가피하게 다시 느려져 누적된 부채를 지탱할 수 없음이 분명해진다. 금융 압박과 자금 부족은 여러 해 동안 쌓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한꺼번에 폭발하기도 한다. 대외 차입이 많았다면 외국 채권자들이 도피하고 그와 더불어 환율이 폭락하고 달러 부채를 자국 화폐 소득으로 상환하는 금융 부담이 치솟는다. 그 결과는 지독한 금융위기다. 87-8)


3부. 나머지 모두의 문제: 달러와 함께 살아가기


고정환율제는 퇴출되었다. 1997~1998년 부채 위기 이후 아시아 각국은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고 IMF에 보고했다. 하지만 그 나라들의 달러 환율을 흘끗 보기만 해도 대부분의 경우 변동폭이 크지 않거나 변동 속도가 빠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대부분의 아시아 경제국은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폭넓게 개입하면서도 자신들이 유연한 환율제를 채택했다고 IMF에 보고했으며, 이에 따라 IMF는 공식 환율 분류 문서에서 이 환율제들이 유연하다고 기록했다. 요약하자면 많은 신흥시장, 특히 아시아 신흥시장들은 워싱턴 합의를 거부했다기보다는 핵심 요건을 채택하되 나름의 개선점을 첨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아시아의 정책 입안자들은 자본 통제와 금융시장 규제가 나름대로 유용하기는 하지만 거시경제 정책의 심각한 비일관성을 만회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준비금을 비축하고 규제를 강화하고 일부 통제를(특히 자본 유입과 관련하여) 도입했다. 131, 135-6)


2000년대 초 나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는 아시아가 달러 보유고를 꾸준히 늘리는 바람에 세계경제의 골치 아픈 불균형이 악화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이체 방크의 세 이코노미스트(마이클 둘리, 데이비드 폴커츠-랜도, 피터 가버는 셋 다 학자 출신이다)는 아시아가 전후戰後 유럽과 같은 발전 전략을 따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성장을 북돋우려면 저평가된 환율을 유지해야 하므로 개입과 자본 통제를 혼합하여 구사한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국제 통화 체제가 (미국, 유럽, 일본을 주로 아우른)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와 비슷한 브레턴우즈 II 체제로 진화했다고 묘사했다. 그들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은 위기로 비화할 위험하고 불공정한 체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아시아 경제(와 이를 모방한 몇몇 나라)가 매우 합리적인 발전 전략을 따른다고 주장했다. 즉 미국의 공공·민간 채무자들은 불평할 게 아니라 이 체제 덕분에 미국인들이 막대한 해외 자금을 유난히 낮은 금리로 빌릴 수 있다는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136)


환율 저평가 이야기에는 중국 당국이 자국 경제의 초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 빠졌다. 그것은 중국 농촌에서 도시와 제조업 중심부로 해마다 꾸준히 이주하는 수백만 명의 인구다. 서구 경제가 맞닥뜨린 진짜 문제는 도시의 생산 중심지에서 일할 기회를 찾아 해마다 밀려드는 중국 빈농의 물결이었다. 외환시장 개입은 중국 통화의 이른바 저평가에 일조했을지는 몰라도 그 영향은 부차적이었을 것이다. 삼인조 논문의 두 번째 주장은 아시아에서 흘러드는 값싼 자금이 미국에 순수하게 이로웠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 은행 규제 담당자들이 금융위기가 신흥시장에만 일어날 거라 생각하지 않고 이른바 자본 유입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금융 규제에 허점이 있는 나라에 외국 자본이 쏟아져 들어오면 빈틈이 적나라하게 까발려질 수 있다. 그렇기에 미국의 명목상 대외 차입이 그 자체로 세계 금융위기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분명하다. 137)


4부. 대안 통화


유발 노아 하라리는 화폐가 본질적으로 사회적 관습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모두가 무언가를 화폐로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이 미크로네시아 얍 섬의 거석이든 중세 일본의 쌀이든 실제로 화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정부가 발행하는 국가 통화는 어떤 대체물이나 사적 통화도 넘볼 수 없는 근본적 이점이 있다. 정부는 모든 피고용인과 공급업자들에게 자신의 통화로 급여를 지불할 수 있으며 정부 통화로 세금을 납부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정부는 자신의 통화로 표시된 부채를 발행할 수 있다. 미국 달러가 ‘법정통화’ 지위를 가진다는 것은 부채가 미국 달러로 상환될 경우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정부는 다양한 활동에서 자신의 통화가 법적 회계 단위로 쓰이도록 요구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점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 덕분에 정부 통화는 넘볼 수 없는 우위를 누린다. 이걸로 모자란다면 은행 예금의 정부 통화 표시를 의무화하는 등의 제약을 추가할 수도 있다. 151)


규제에 반대하는 격렬한 로비 시도를 제외하면 적어도 울타리를 둘러쳐 암호화폐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암호화폐를 운용할 때 ‘거래소’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래소를 규제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온 체인’(블록체인 위에서) 암호화폐 거래가 너무 어렵고 너무 많은 전문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소를 잘못 입력했다가 전 재산을 영영 잃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거래소는 블록체인 용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려 안간힘을 쓰지만 실은 은행에 불과하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블록체인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100달러 지폐와 비슷하고, 거래소에 보유한 비트코인은 은행에 넣어둔 돈과 비슷하다. 거래소는 은행과 꽤 비슷하지만 커다란 차이가 하나 있다. 거래소는 정부가 최종 대부자로서 뒤를 받쳐주지 않으며 암호화폐 업계가 기존 은행 수준으로 규제받지 않는 한 그렇게 될 가망은 없다. 다시 말해 정부는 최종 레버를 쥐었다. 152-3)


골수 암호화폐 신봉자들은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코드가 법이다”라거나 “암호화폐는 검열에 저항력이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 말이다. 이 논리의 문제는 설령 정부가 암호화폐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못할지라도 암호화폐의 이용을 번거롭고 값비싸게 만드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암호화폐가 정부 통화에 맞서 경쟁력을 가지는 데 필요한 네트워크 효과를 무력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그렇다고 블록체인 기술이 다른 측면에서 금융에 혁명적 영향을 미칠 뚜렷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통화 독점은 금융위기에 대처하고 공공부채 위기를 피하는 데 필수적이다. 비트코인 본위제의 문제들 중 상당수는 금 본위제와 동일할 것이다. 간헐적으로 안정을 가져다줄 수는 있겠지만 만에 하나 위기가 일어나면 그 규모가 훨씬 커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경기 역행적 케인스 통화 정책을 실행할 능력이 없으면 경기 순환이 훨씬 극심해질 수 있다. 153-5)


화폐에 대한 유발 노아 하라리의 설명이 비트코인 전도사들에게 더없는 희망을 선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가 투기를 제외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생각은 암호화폐의 킬러 앱(시장에 등장하자마자 다른 경쟁 상품을 몰아내고 시장을 장악하는 새로운 서비스나 상품―옮긴이)을 무시하는 처사다. 점점 커져가는 지하경제 말이다. 역사적으로 현금은 은밀한 거래에서 선호되는 수단이었다. 비트코인이 합법적 과세 거래에서는 정당한 쓰임새가 거의 없을지 몰라도 지하경제에서 거래를 촉진하는 데 널리 쓰인다면, 이것을 순전히 투기적인 자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규제 당국이 서투르고 법 집행이 무르다고 항의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의 본원적 가치가 0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회를 기준틀로 삼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폭넓은 불법 활동에 쓰이며 랜섬웨어 공격과 다크웹 시장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는 통화다. 157-9)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같은 매력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류다.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널리 쓰이는 두 가지 코인인 테더와 USD 코인USDC이 단연 가장 중요하다. 둘 다 가치가 1달러에 고정되어 있다. 세 가지 핵심 문제가 있다. 첫째, 스테이블코인 공급자의 뒤에 최종 대부자가 없을 경우 스테이블코인이 재무부 채권 같은 안전한 달러 표시 증권으로 충분히 보증되지 않으면 인출 사태를 겪을 위험이 있다. 이것은 고정환율제에서 일어나는 인출 사태와 매우 비슷하다. 둘째, 보유 증권에 대한 이자를 정부 소유의 중앙은행이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공급자가 수취한다. 셋째, 스테이블코인이 충분히 보급되고 편리해지면 은행의 중개자 역할을 박탈할 우려가 있다. 은행이 대부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 필수 요소를 공급하던 통상적 예금자들이 스테이블코인으로 갈아타기 때문이다. 이 모든 문제는 이론상으로는 해결할 수 있지만 걸림돌과 부작용도 많다. 물론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부만이 가능하다. 162-3)


유럽중앙은행, 영국은행, 캐나다은행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 중앙은행 중 상당수는 독자적인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즉 ‘CBDC’의 개발을 꽤 많이 진척시켰다. 주도적 CBDC를 내놓으려는 경주에서 달러의 유리한 출발선과 미국의 전반적 기술 우위를 감안컨대 마음만 먹으면 미국의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다. 연방준비제도가 (소매) CBDC의 잠재적 ‘이익과 위험’을 공식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때는 2022년 초다. 미국의 굼뜬 행동은 납득할 만하다. 현재의 통화 체제에서 달러가 왕좌에 있는데 뭐하러 평지풍파를 일으키겠는가? 디지털 통화의 발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달러의 위상을 깎아내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를테면 디지털 통화는 다른 통화에 대해 고도로 유동적인 시장을 창출하여 달러의 네트워크 우위를 감소시킬 수도 있고, 미국 규제 당국의 권한 밖에 있는 국제 지불의 대안적 ‘레일rail’(거래가 처리되는 매체인 디지털 전송·처리 시스템―옮긴이)을 도입할 수도 있다. 164-5)


모든 우려(사이버 위험, 시스템 장애, 중개자 역할 박탈, 과도한 정부 권력)는 왜 새로운 금융 기술을 점진적으로 시행해야 하는지, 왜 미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에서 먼저 실험하는 것이 이상적인지 잘 보여준다. 연준은 문제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생기길 바랄 것이다. 미국은 지난 수십 년간 사실상 모든 거래 신기술에서 새로운 혁신을 받아들이는 데 늑장을 부렸다. 신용카드에 칩을 넣는 데에도 오래 걸렸다. 외국 중앙은행의 CBDC(세계 수준의 금융 시스템을 갖춘 영국을 포함)와 경쟁해야 한다는 우려가 커지자 백악관과 연방준비제도는 자신들이 이 문제를 눈여겨보고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언젠가 디지털 달러를 도입할지도 모른다는 위협만으로도 외국 중앙은행들은 자체 CBDC 도입 계획을 포기할 것이다. 체스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위협이 실행보다 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외국 중앙은행들이 미국에 도전장을 내밀거나 (중국처럼) 자국 통화를 달러와 맞먹게 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67-8)


5부. 지배적 통화에 따르는 혜택과 부담


권력의 순수한 희열을 제외하면 달러 패권은 미국에 과연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매우 구체적인 유익 한 가지는 외국인들이 놀랍도록 다량의 미국 부채를 기꺼이 보유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국 정부는 지불해야 하는 금리를 낮출 수 있다. 달러 부채가 웃돈이 붙어 팔리는(더 낮은 금리를 지불한다는 뜻)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미국의 금융시장이 가장 깊고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미국 재무부 부채를 별도의 거래 비용 없이 빠르게 팔기는 식은 죽 먹기다. 즉 미국 부채는 유동성이 매우 크다. 또한 적어도 약속된 만큼의 달러를 상환받는다는(즉 깜짝 인플레이션을 배제할 수 있다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미국 부채는 매우 안전하다. 미국 정부 부채, 특히 재무부 단기 부채의 수요를 떠받치는 요인 중에서 덜 분명하지만 극도로 중요한 것은 전 세계 금융거래에서 담보로 널리 쓰인다는 사실이다. 재무부 채권은 담보물로 쓰여 화폐와 거의 비슷하기에 (경제학 용어로) ‘보유편익’을 누린다. 172)


수년간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차입하는 엄청난 속도로 보건대 어떻게 미국이 공식 통계에서 보는 것보다 더 깊이 부채의 늪에 빠져들지 않았는가다. 특히 흥미로운 시기는 1998~2010년이다. 이때 미국 순 대외 채무의 증가 속도는 미국의 차입 규모에 비하면 달팽이걸음이었다. 이를테면 2010년이 되었을 때 미국의 누적 경상수지 적자는 수입의 45퍼센트에 육박했지만 대외 채무는 17퍼센트밖에 늘지 않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던 걸까? 공교롭게도 대미 외국인 투자는 오랫동안 채권, 특히 단기 채권에 치우쳐 있었다(채권 대 위험자산 비율이 약 60대 40). 하지만 미국의 대외 투자는 정반대로, 주식과 대외 직접 투자가 약 60퍼센트였다. 이 사실만으로도 평균적으로 미국인들이 대체로 높은 수익을 거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주식이 채권보다 높은 실적을 올리니 말이다. 대외 직접 투자는 훨씬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형태의 투자다. 179-80)


외국 자산에 대한 투자자로서 미국인은 유일무이하다고 말할 만한 또 하나의 이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역사적으로 이민자의 나라였다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 특히 1, 2세대 이민자는 여전히 모국에 강한 연대감을 느끼며 모국의 제도를 잘 안다. 그 덕에 미국 투자 자금을 모국에 끌어들이는 데 커다란 비교 우위를 누린다. 최근 나머지 세계가 쌓은 부가 더욱 집중되고 외국 가정이 자녀를 미국 대학에 보내어 미국과 연결을 맺으면서 외국인 직접 투자 채널은 양방향 도로에 더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로 인해 많고 다양한 이민자 인구가 미국에 선사하는 투자 이점이 일부 상쇄되었다. 위험을 대하는 미국인의 태도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좋게든 나쁘게든 미국 체제의 전체 구조는 위험 감수에 보상하며(파산법이 너그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투자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훨씬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미국인은 다른 큰 나라의 국민보다 훨씬 부유하며 부자는 더 큰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 184)


지배적 세계통화를 발행함으로써 미국은 정보에 특권적으로 접근하고 강력한 금융 제재를 부과하는 등의 비정형적 편익에 더해 뚜렷한 양적 편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지배적 통화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는 상당한 비용도 따를까? 달러는 이제 금으로 태환되지 않는다. 미국 재무부 부채에는 이제 금약관(장래의 화폐 변동으로 인한 채권자의 손해를 막기 위하여, 채무자가 빚을 금이나 금화로 갚거나 금화 가치로 환산하여 갚도록 규정한 금전 채권의 약정―옮긴이)이 없다. 달러를 금으로 보증한다는 약속이 사라진 지금 지배적 통화 지위에 따르는 심각한 단점이 하나라도 있을까? 그런 단점 중 하나는 매우 명확하고 순전히 경제적인 단점으로, 미국이 침체기에 글로벌 포트폴리오에 일으키는 막대한 손실과 관계있다. 미국이 막대한 손실을 일으키는 한 가지 이유는 세계의 은행가이자 비교적 위험한 포트폴리오를 보유했다는 점이고 또 다른 이유는 달러가 글로벌 침체기에 절상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192)


군사력이 통화 패권에서 얼마나 필수적인 요소인지를 놓고 논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논란의 여지는 크지 않다.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은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을 때 자국 통화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초강대국 지위를 누렸다. 군사력과 통화 패권은 아무리 못해도 상보적이다. 달러 패권은 군비 조달을 용이하게 하며 특히 갑작스러운 군비 증강에 요긴하다.2 더 미묘한 논점은 미국의 군사력이 국제 금융시장과 국제 금융 기구의 규칙을 확립하고 정책을 설정하는 데에 추가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지정학적 초강대국이 아닌 나라는 지배적 통화의 역할을 지속하기 힘들다. 유럽은 미국의 방패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여러 중대 사안에 대해 영향력과 능력이 미비하다. 세계 금융 시스템은 규칙에 좌우되는데, 이 장 앞부분에서 설명했듯 경제·군사 강국인 나라는 규칙을 제정할 어마어마한 힘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생각은 위험할 정도로 어수룩하다. 193, 196)


이 장 첫머리에서 언급했듯 경제학자들은 달러 지배의 또 다른, 전혀 별개의 비용에도 주목했다. 그것은 전 세계가 심각한 침체와 (정도는 덜하더라도) 불황에 빠졌을 때 보험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소가 있다. 하나는 위기가 터졌을 때 달러가 절상되곤 한다는 사실과 관계있다. 그럴 땐 자금이 대부분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것은 미국이 저위험 채무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미국 시장이 유난히 깊기에 동결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달러가 등귀하면 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미국 자산의 외국환 시장 가치가 증가하고 미국의 포트폴리오에 들어 있는 외국 자산의 달러 시장 가치가 감소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것을 ‘보험’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덕분에 달러 표시 채권에 대한 투자는 위기에 대비한 더 나은 헤지가 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것은 미국 재무부 채권의 금리가 유난히 낮은 이자를 지급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다. 196)


6부. 달러 패권의 정점


달러의 패권과 안정에 대한 외부의 도전이 중대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내부에 있다. 통화를 보증하는 귀금속이 없는 순수한 법정통화의 세상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합리적 수준으로) 안정시키겠다는 연방준비제도의 약속에 대한 신뢰야말로 세계경제가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거시경제 석기시대(말하자면 1970년대)로 돌아갈 것인가 사이에 버티고 서 있는 가장 중요한 보루다.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이 금과옥조라는 생각은 어수룩하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라는 정치적 압력이 너무 거세면, 특히 재정 정책이 명백히 지속 불가능하면 연준이 끝끝내 저항할 수는 없다. 대통령은 연준 이사진의 임명을 좌우하며 의회는 연준의 예산을 좌우하고 이론상 연준을 눈 깜박할 사이에 재무부 산하 기관으로 복귀시킬 수 있다. 코로나 시기에 그랬듯 이따금 연준이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 너무 자주 너무 쉽게 굴복하면 기대 인플레이션이 점차 상승하고 불안정이 뒤따를 것이다. 200)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면 실물경제가 여러모로 왜곡되며 금융 시스템에 혼란이 일어난다. 무엇보다, 높고 안정된 인플레이션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30년 가까이 득세한 초저인플레이션 시기는 달러가 꽤 안정된 가치 저장 수단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인플레이션 시대는 더 많은 사람, 기업, 국가가 달러를 신뢰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달러 이용자와 쓰임새의 저변을 구축했으며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를 보강하고 강화했다. 연준이 다시 한번 인플레이션 앞에서 갈팡질팡하면 네트워크 효과가 (하룻밤 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점차 깎여나갈 것이다. 달러는 다른 통화(이를테면 유로화, 스위스 프랑, 어쩌면 일본 엔화)로 대체될 것이다.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중국의 시도에도 틀림없이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안정된 달러 본위제 하에서 승승장구하던 미국의 금융 부문은 쪼그라들 것이다. 설령 미국 달러가 선두를 유지하더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경쟁자들이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203-4)


그렇다면 중앙은행 독립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매우 뚜렷해진 지금 왜 걱정거리가 남았을까? 한 가지 문제는 저인플레이션 시대에 너무 많은 사람이 안정된 인플레이션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앙은행이 목적을 바꿔 다른 문제(이를테면 지구온난화)를 다루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오랜 제로 금리 시대(중앙은행들은 단기 금리를 0이나 심지어 그보다 약간 아래로 끌어내렸다)에 통상적 금리 정책이 마비되면서 많은 진지한 사람들은 인플레이션이 다시는 중대한 우려 사항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중앙은행이 독립성과 발권력을 가지고서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커졌다. 진보 진영에서는 연준이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물론!) 환경을 치유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더 쏟아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대견한 목표다. 문제는 중앙은행이 이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주도적 역할을 할 전문성, 정책 수단, 민주적 책임성을 갖췄는가다. 204-5)


현재 미국이 노골적으로 채무불이행을 선언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인플레이션이라는 더 쉬운 길이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미국 시장성 부채의 양은 나머지 모든 선진국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미국 부채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데도 총 연간 이자 지불금으로 따진 부채 상환 비용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때로는 부채 규모가 증가하는데도 이자 지불금이 감소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주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실질금리가 급전직하한 덕분이었다. 물가조정 10년물 미국 재무부 채권에 대한 수익률은 2012년부터 2021년 말까지 평균 0에 가까웠다. 단기 부채에 대한 실질금리는 뚜렷한 마이너스였다. 재무부 채권에 대한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라는 것은 채권 보유자들이 ‘안전한’ 부채를 보유하는 특권의 대가를 미국 정부에 치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설령 이자를 받더라도 해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남은 원금과 이자의 구매력이 평가절하되기 때문에 채권 보유자들은 순손실을 입는다. 212-4)


어떤 사람들은 2024년 부채가 GDP의 250퍼센트를 넘어선 일본을 예로 들어 부채가 높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무엇에 대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 미국 정부는 쓸 수 있는 패가 많으며 지배적 통화 발행국으로서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이 차입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채무불이행(가능성이 높진 않지만 현재의 정치 환경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인플레이션(미국 부채의 대부분이 단기 부채이고 10퍼센트만이 물가에 연동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고서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금융억압(기본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직간접 부채 보유를 강제하는 것) 등 기본적 수단은 동일하다. 이 중에서 훈훈하거나 고통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늘날 중앙은행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 까다로운 환경을 맞닥뜨린 탓에 앞으로 10년 안에 또 다른 인플레이션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매우 높은 부채는 설령 인플레이션 압박에 일조하지 않더라도 그 밖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223)


미국 부채의 상당 부분을 외국이 보유했다는 점은 일반적으로 달러에 매우 유리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모든 부채를 국내에 보유하는 경우보다 훨씬 취약해진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 부채를 보유한 외국인들이 느닷없이 확신을 잃었을 때 발생할 위험 때문에 현대판 ‘트리핀 딜레마’(기축통화 발행국이 기축통화의 국제 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해 경상수지 적자를 지속하면 기축통화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는 상충 관계―옮긴이)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트리핀 딜레마와의 유사성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은 미국 정부가 외국인을 붙잡아둘 능력이 자국민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자국민을 상대로 미국은 금융억압을 실시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규제를 확대하여 은행이 울며 겨자 먹기로 부채를 떠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금융억압은 자국민에게만 부과할 수 있는 일종의 세금이다. 금융억압은 외국인 보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돈을 빼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226-7)


행운과 실력은 미국 달러의 전후戰後 궤적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등식의 ‘행운’ 부분을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러시아가 1960년대 중반 경제를 자유화했다면, 일본이 1980년대 중반 우격다짐에 밀려 통화 절하로 불안정을 자초하지 않았다면, 프랑스가 2001년 그리스를 유로화에 포함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면, 중국이 2010년대 온전한 변동환율제를 채택했다면 달러는 여전히 꼭대기에 있었겠지만 오늘날만큼 압도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안적 현실들 중 어느 것에서든 미국 금리는 더 높았을 것이고 달러의 과도한 특권은 더 적었을 것이다. 달러 패권이 맞닥뜨린 최대 위험은 내부에 있다. 어느 당이 집권하든 마찬가지다. 집권당이 너무 많은 권력을 누리는 게 문제다. 지난 수십 년간 달러 패권이 승승장구하면서 미국 정치인(과 많은 경제학자)들은 초저금리가 미래에도 거의 틀림없이 정상적 규범일 것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들의 위안거리는 고전적인 ‘이번엔 다르다’ 사고방식이다. 231)


역사에서 보듯 세계 금융위기 이후 시기를 풍미한 초저금리는 훨씬 오랜 추세로부터의 일시적 일탈로 보아야 한다. 빠르게 증가하는 부채가 방치되고 대규모 적자를 해소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면 미국과 전 세계는 평균 실질금리와 인플레이션이 더 높아지고 부채 위기와 금융위기가 더 자주 발생하는 세계 금융 변동성의 시대를 오랫동안 겪을 것이다. 딕 체니 전前 미국 부통령의 ‘적자는 문제가 아니다’ 가설은 금리가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시기에는 좋은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리가 (불황을 제외하고) 정상화되는 지금은 글러먹은 생각이다. 지난 70년에 걸친 세계 통화 체제의 발전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단 하나만 꼽자면 그것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고삐 풀린 미국 부채 정책이 높은 실질금리와 지정학적 불안정을 계속 맞닥뜨린다면, 정치적 압력 때문에 연방준비제도가 인플레이션을 일관성 있게 길들이지 못한다면 달러는 모두의 문제가 될 것이다.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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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의 딸 - 위대한 과학자를 완성시킨 비밀의 기록 데이바 소벨 컬렉션
데이바 소벨 지음, 홍현숙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제1부 피렌체로


"1610년 1월 초에 갈릴레오는 그 무엇보다 대단한 발견을 했다. 그것은 이른바 궤도를 그리며 목성 주위를 도는, '창세기부터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던, 네 개의 행성'이었다. 코시모 1세는 1569년 대공의 직위에 오르기 전인 1537년 공작이 되었을 때, 메디치 가를 위한 고전적인 신화를 창출해냈다. 코시모cosimo는 그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자신을 지구에 사는 우주cosmos의 화신으로 형상화시켰다. 이 같은 고등 전술로 그는 오랫동안 불편한 연합 관계를 맺어온 다른 유력한 지배층 가문으로부터 권력을 빼앗는 것이 메디치 가의 숙명임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설파할 수 있었다. 왕가의 사실상 우두머리인 코시모 1세는 자신을 로마 주신主神의 이름을 딴 주피터 행성과 동일시했다. 그래서 그가 거주하고 다스리는 시뇨리아 궁을 이 올림피아의 주제를 강조한 프레스코 벽화로 가득 채웠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만든 망원경을 베네치아에 바쳤고, 이제 피렌체에는 목성의 위성들을 헌정할 작정이었다."(60)


"갈릴레오의 이전 동료였던 피사 대학의 교수를 비롯한 유명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부동의 우주'에 반하는 새로운 주장의 근거인 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갈릴레오는 이 같은 주장의 우수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로마로 건너가 자신의 발견을 알리기로 했다." "로마로 건너간 갈릴레오는 교부 클라비우스가 주임 수학자로 재직 중이던 예수회의 중앙 교육 기관인 콜레조 로마노의 인정을 받았고 그로 인해 큰 힘을 얻었다. 교회 측이 천문학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는 클라비우스와 그의 훌륭한 동료들은 그 망원경을 독자적으로 입수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이제 갈릴레오가 관찰한 내용 모두를 인증해주는 단체 역할을 했다. 이 예수회 소속 학자들은 우주는 불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믿음을 고수해야 함에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증거까지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방문해달라는 흔치 않은 초대로 갈릴레오의 영광을 높여주기까지 했다."(70-2)


"『물에 뜨는 물체 혹은 물속에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논쟁』은 물에 뜨거나 가라앉는 물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태양의 완전함을 손상하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물에 뜨는 물체』를 유럽의 학자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일종의 공용어인 라틴어로 쓰지 않고 이탈리아어를 사용해 학문적인 전통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갈릴레오의 이 같은 행동은 동료 철학자들의 분노를 사고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그와 토론을 벌여 패한 피렌체 아카데미의 루도비코 델레 콜롬베 같은 이들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콜롬베는 갈릴레오의 반反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응해 '반갈릴레오'를 선언했다. 반대로 갈릴레오의 지지자들은 '갈릴레오주의자'를 표방했으며 콜롬베의 이름을 조롱하며 그의 얄팍한 철학을 더욱 신랄하게 공격했다. 콜롬베가 이탈리아어로 '비둘기'를 뜻하므로 이들 갈릴레오를 비판하는 무리를 '비둘기 연맹'이라고 불렀다."(80-1)


"1613년 봄 로마에서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은 당시 진행 중인 연속물의 일환으로, 벨저가 쓴 상대적으로 짧은 네 통의 편지와 갈릴레오가 쓴 매우 긴 세 통의 답장을 『태양의 흑점과 그 현상에 관한 역사와 증명』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벨저는 한 달도 더 걸린, 태양을 뒤쫓으며 만든 뛰어난 조판으로 책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갈릴레오와 그의 공공연한 적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던 긴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책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새로운 적이 생겨났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가 몇 해 전 다른 나라에서 조용히 사망함에 따라 갈릴레오가 태양중심설의 아버지로 인식되고 그로 인해 비난받기 시작했다. 『물에 뜨는 물체』를 공격한 '비둘기 연맹'은 갈릴레오에 반대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지지했지만 『태양의 흑점에 관한 편지』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제 성경이라는 한층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고 나섰다."(95-6)


"교황은 신학 분야의 고문인 로베르토 벨라르미노 추기경을 불러들였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 때 종교재판관을 지낸, 뛰어난 지성을 지닌 예수회 수사였다. '이단자의 심판관'인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린체이 아카데미의 체시 공에게 자신은 코페르니쿠스의 견해를 이단으로 생각하며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털어놓은 일이 있었다. 벨라르미노는 약 15년에 걸쳐 여러 사교 모임에서 갈릴레오와 만나 아는 사이였다. 1611년에는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직접 보았을 뿐 아니라, 피렌체에서 직접 천문학을 공부한 인물로서 갈릴레오의 업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치하한 바 있었다. 벨라르미노 추기경이 갈릴레오의 유일한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가설이 아닌 현실로 대하는 고집이었다. 어쨌든 증거가 없었다. 나아가 추기경은 갈릴레오가 사람들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는 데 그쳐야지, 성경의 해석에 대해서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119-20)


"1616년 3월 5일, 금서위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에 대한 공식적인 선언을 공표했다. 즉 그의 주장이 '성서에 위배되는 거짓'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교령에는 관계자들의 이름과 이들에게 가하는 조치가 명시되었다. 문제 되는 내용이 수정될 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일시적으로 금하며 '이러한 주장이 가톨릭교의 진리에 대해 편견을 유포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성경에 부합시키려는 시도를 한 책만이 이 혹독한 처분에서 벗어났음을 분명히 깨달았다. 교령에도 언급되지 않고 어떤 개인적인 견책도 받지 않은 갈릴레오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그가 지지한 학설은 비난을 받았으나, 그것을 가설로 다루는 것과 언젠가는 그 교령이 효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은 자유였다. 그는 변함없이 피렌체의 메디치 가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이탈리아 과학의 거장이었다. 그는 3월 11일에는 파울루스 교황과 한 시간 가까이 개인적인 면담을 하기도 했다."(125-6)


제2부 벨로스구아르도에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갈릴레오에게 처음 편지를 보낸 때는 1611년이다. 이때 그는 갈릴레오에 대해 말하길 장수하여 남들의 삶을 이롭게 해야 할 위대한 능력을 지닌 고귀하고도 독실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후 몇 년간 이 추기경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라, 1620년에 「위험한 추종」이라는 시를 보내 갈릴레오를 새롭고도 경이로운 천체 현상의 발견자로 칭했을 뿐 아니라 그가 발견한 태양의 흑점에 대해 '강한 자의 마음속에 깃든 두려움'이라는 은유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찬사 가득한 시상이 담긴 편지를 맺으며 추기경 자신을 '당신의 형제'라고 칭함으로써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그런 그가 1623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가 되었다." "학문을 사랑했던 우르바누스는 교황청에 지식인들을 불러들였다. 그는 린체이 아카데미의 비르지니오 체사리니 몬시뇨르를 교황의 의전관으로 임명했는데, 체사리니는 새 교황을 환호로 맞이하는 시를 썼으며 갈릴레오의 강의를 들은 후 수학 연구에 헌신해온 인물이었다."(154, 162)


"갈릴레오가 유럽 전역의 서신 왕래자들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듯이,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1620년 출간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수정해야 한다는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이 교령은 이탈리아의 체면을 구겨놓았다고도 할 수 있다. 우르바누스를 위축시킨 소문도 나돌았는데 내용인즉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독일인들이 이 교령 때문에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교령이 발령되고 8년이 지났지만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우르바누스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천문학적인 계산과 예측의 도구로 활용되는 데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태양중심설은 입증되지 않은 단순한 견해로 남아 있었고, 우르바누스는 차후에도 이것이 입증될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갈릴레오가 자신의 논리를 펴나가는 데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참작하고자 한다면, 이 학설이 가설이라고 전제하는 데 변함없이 교황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다."(202-3)


"갈릴레오는 1629년 가을 내내 『린체이 회원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대화』의 완성을 위해 매달렸고, 마침내 크리스마스이브에 이 책을 끝마쳤다. 그는 『대화』의 끝에서 『시금관』에서의 매미 철학 즉, 신과 자연은 인간이 관찰하는 자연 현상을 창출한 무한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교황 우르바누스를 만족시키기 위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그 심오함을 간단히 표현함으로써 충실한 아리스토텔레스파의 학자들을 좌절시켰다." "갈릴레오는 『대화』의 최종 원고를 검열관에게 제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발간된 갈릴레오의 모든 저작물은 엄격한 검열 과정을 거친 것들로, 그것은 이탈리아의 출판업자들이 이 규범에 가장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종교재판소의 검사성성이 있는 로마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시금관』도 공식적인 절차를 무난히 통과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대화』의 실질적인 내용이 검열관들의 심각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우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250-5)


제3부 로마에서


"『대화』는 이내 우르바누스 교황의 분노를 샀다. 그는 전쟁을 벌이느라 돈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 빚이 두 배로 불어나고 자신을 폐위시키려는 스페인의 음모가 두려워 편집증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바로 이 최악의 시기에 갈릴레오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1632년 3월 8일 스페인 주재 바티칸 대사인 가스파레 보르자 추기경은 30년 전쟁에서 독일의 신교도에 대항해 필립 4세 왕을 지켜내지 못한 교황의 실책을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1632년 여름 갈릴레오의 책이 로마로 들어왔지만 우르바누스는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익명의 고문관들이 교황 대신 이 책에 대한 판단을 내렸는데, 그것은 지독한 모함이었다. 로마에 있는 갈릴레오의 수많은 적들은 『대화』를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찬양으로 보았다. 게다가 이미 유럽이라는 가톨릭교의 제일선에서 가톨릭의 열기가 쇠약해져가는 것을 소리 높여 추궁한 교황은 새로 발간된 이 무례한 내용의 책을 벌하지 않고 넘어갈 도리가 없었다."(314-6)


제4부 로마의 메디치 빌라, 토스카나 대사관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백과사전에조차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이 두 차례 열렸다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재판은 단 한 차례뿐이었다. 이는 1616년 갈릴레오와 벨라르미노 추기경과의 만남을 첫 번째 재판으로, 갈릴레오가 종교재판관들 앞에 무릎을 꿇은, 다소 오래 지속되었던 1633년의 심문을 두 번째 재판으로 본 것이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단 한 번뿐이었으나 그럼에도 천 번은 열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과학에 대한 종교의 억압이자, 권위에 대한 개인주의의 수호, 혁신 세력과 기득권 세력의 충돌, 오래된 신념에 대한 급진적이고 새로운 발견의 도전, 그리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편협함에 대한 투쟁이라는 의미 때문이다. 교회법이나 관습법의 전 시대를 통틀어 그 의미와 파급 효과가 더 큰 재판, 억측과 유감을 더 많이 남긴 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갈릴레오에 대한 재판은 1633년 봄에 단 한 번 열렸으나, 적어도 증거의 절반과 대부분의 증언은 1616년의 논쟁과 관련된 것이다."(323-4)


"갈릴레오가 토스카나 대사관에서 두 달을 기다린 후인 1633년 4월 12일 화요일, 종교재판소 검사성성의 수석대표가 마침내 심문을 받으러 오라고 그를 소환했다." "〈저는 그 책에서 지구가 돌며 태양은 고정되어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펴고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취약하고 설득력 없음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갈릴레오의 마지막 증언은 그의 곤란한 상황을 잘 요약해 보여준다. 이처럼 말을 얼버무린 데 대해 그를 비난하기는 쉬울 것이다. 이날의 심문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분명히 인식했으며 자신을 방어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을 수도 있다. 니콜리니 대사가 그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고, 종교재판관들이 바라는 태도를 꾸며 보이라고 경고한 터였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자신이 무고하며 진실하다고 믿었던 것은 재판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가 쓴 편지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338, 351-2)


"한편 로마로 돌아온 우르바누스 교황은 갈릴레오의 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는 검사성성의 종교재판관들이 친갈릴레오파와 반갈릴레오파로 분열되어 있음을 느꼈으며, 그 책으로 인해 무지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갈릴레오의 감상적인 변명에서 부정직함을 감지하고 분노했다. 그러나 적어도 갈릴레오가 직접적인 지시를 어겼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6월 16일, 추기경인 종교재판관들과의 회의를 주재했다. 교황은 1615년 이 철학자에 대한 최초의 비난에서부터 이 책의 출간, 그리고 최근의 변명과 선처를 호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갈릴레오의 사건을 요약한 정식 보고서를 읽었다. 그리고 『대화』를 쓴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고문이라는 방법까지 동원해 갈릴레오의 '의도'를 심문하라고 지시했다. 교황은 이 책은 어떻든 비난을 면할 수 없으며 금지되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갈릴레오는 감금되거나 참회를 해야 할 판이었다."(365, 374)


"6월 22일, 갈릴레오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판결이 공식 발표되었다. 며칠 후 바르베리니 추기경은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검사성성의 지하 감옥에서 로마의 토스카나 대사관으로 바꿈으로써, 그에 대한 판결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르바누스는 사면을 해달라는 청원은 거절했지만, 갈릴레오로 하여금 마침내 로마를 떠나도록 해주었다." "갈릴레오에 대한 굴욕적인 판결문은 교황의 지시에 따라 파도바에서 볼로냐, 밀라노에서 만토바, 피렌체에서 나폴리와 베네치아 그리고 프랑스의 플랑드르와 스위스에 이르기까지 요란스럽게 고시되고, 종교재판관들에 의해 큰 소리로 낭독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의 철학 교수와 수학 교수들은 갈릴레오에 대한 재편 결과에 경각심을 느꼈다." "이 사건들로 인해 1633년 여름에는 금지된 『대화』를 중심으로 암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사실 『대화』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 중 그것을 내놓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책의 가치가 높아감에 따라 새로운 귀의자들도 생겨났다."(384-6)


제5부 시에나에서


"시에나의 대주교인 아스카니오 피콜로미니는 두 명의 교황과 수많은 학자를 배출해낸 뛰어난 가문 출신으로, 그 자신이 수학을 공부하였으며 갈릴레오의 오랜 찬미자였다. 재판이 끝난 후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보호를 자청했다. 니콜리니 대사는 4월에 검사성성의 심문을 받고 돌아온 갈릴레오를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고 묘사했다. 이후로 몇 주가 더 지나고 충격까지 받은 그가 7월에 시에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겠는가? 그는 부당한 판결로 고통 받은 나머지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거처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와 중얼거리는 소리,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의 상처 입은 영혼을 회복시켜 과학적인 연구를 계속해나갈 수 있게 해주기로 결심했다. 사실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소로부터 유죄판결을 받은 굴욕을 딛고 일어나, 다른 책(『두 개의 새로운 과학』)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피콜로미니의 열성적인 호의에 힘입은 바 크다."(393–5)


"갈릴레오는 피사 대학에 교수로 재직할 때 운동에 관한 기초 논문에 처음 착수했으나 책을 펴내지는 않았다. 그런 후 파도바에서 20년간 살면서 이 책을 쓰기 위한 새로운 실험 원리를 세웠는데, 즉 가르치는 의무를 다하고 작은 집에서 군사용 컴퍼스 제조 사업을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진자 운동을 측정해 그 주기의 수학적 법칙을 이끌어냈으며, 경사면에 청동 공을 수도 없이 굴려 자유낙하 시의 가속률을 얻어냈다." "갈릴레오는 사물이 '왜' 움직이는가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의 모든 담론을 일축하고 고통스러운 관찰과 측정을 통해 '어떻게'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길을 개척할 생각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전 세대의 철학자들이 인식조차 하지 못한 현상을 발견하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던져지거나 발사된 탄환 등이 공중을 지나는 경로는, 그의 선배들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어느 정도 곡선을 이루는 선'이 아니라 매번 정확히 포물선을 그린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410-2)


"갈릴레오는 후에 '지금까지 펴낸 책보다 『두 개의 새로운 과학』이 낫다'고 평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책에 '내 모든 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온 결과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저항과 운동에 관해 자신이 밝혀낸 사실이 자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온갖 천문학적인 발견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수한 망원경을 만들어 그것으로 하늘을 처음 관찰한 자신을 자랑스러워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자신의 위대한 천재성은 세계를 면밀히 관찰해, 그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수학적인 비율의 언어로 묘사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그런 가운데 로마의 니콜리니 대사는 갈릴레오가 시에나에서 교황과 검사성성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죄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교황 우르바누스 8세에게 보고했다. 우르바누스는 이 같은 견해를 시에나의 성직자들이 보낸 비난과 비교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피콜로미니는 갈릴레오를 이단자임을 고백한 죄인이기보다 귀한 손님으로 모시고 있었다."(443-5)


제6부 아르체트리에서


"경사면에 공을 굴리는 실험은 갈릴레오가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서 여러 원리와 함께 소개한, 낙하의 진실에 대한 지루하지만 성공적인 전주곡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법칙을 몇 개의 문자와 상징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는 전통적인 대수 분석 방법에 따르지 않고, 기하학적인 비율로 표현했다." "〈총탄이 가장 멀리까지 나가는 경우는, 양각을 45도로 했을 때 또는 포수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4분원의 여섯 번째 점인 지점을 통과할 때라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서나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아는 것보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이유를 아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네.〉"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고찰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과학의 현실적인 적용과 그 가치에 대한 갈릴레오의 이 같은 강조는 당대의 대다수 철학자들과는 동떨어진 행보였다. 아리스토텔레스파의 철학자들이 사물의 본질과 자연 환경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갈릴레오는 시간, 거리, 가속 같은 측정 가능한 실체를 추구했다."(456-8)


"마침내 우르바누스는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갈릴레오의 감금 장소를 아르체트리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치는 판결을 약화시켰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한 것이었다. 시에나의 환경이 고급 살롱의 분위기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후로 갈릴레오의 사회적 접촉을 제한할 것과 가르치는 행위 일체를 영원히 금할 것을 검사성성에 권고했다." "그럼에도 1634년 8월, 갈릴레오는 동료 수학자들과 다시 활발한 서신 왕래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에는 미완의 원고인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다시 매달렸다." "네덜란드는 신교를 믿는 국가였으므로 네덜란드인 출판업자 엘체비르는 로마 종교재판소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르체트리에서 여전히 불안에 휩싸여 있던 갈릴레오는 최후의 순간까지 이 책의 출판 사실을 모른다고 잡아뗐다. 프랑스 대사인 프랑수아 드 노아유에게 바친 헌정사에서조차, 그는 자신의 원고가 어떻게 외국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는지 놀랍다며 짐짓 꾸며냈다."(463-4, 472, 478)


"1638년 6월에 출간된 이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저자인 갈릴레오는 책이 출판된 지 수주일이 지난 뒤에 단 한권을 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책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 그는 책을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이제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637년 7월 그의 오른쪽 눈이 처음 시력을 잃게 되자 『두 개의 새로운 과학』에 닷새째 날을 추가하려 했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 눈은 이듬해 겨울에 시력을 잃었다. 오직 한쪽 눈만으로 하늘을 관찰하고 이전에 써놓은 글과 그림을 정독했던 이 황혼기에, 그는 별들의 지름과 천체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최상의 방법에 관해 짧은 마지막 논문을 썼다." "〈나의 놀라운 관찰과 명징한 증명으로, 지난 모든 세기의 현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지했던 한계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더 커진 이 우주가, 이제 내게는 너무도 작게 줄어들어 내 몸의 조그마한 틀만큼이나 작아져버렸다네.〉 갈릴레오는 엘리아 디오다티에게 이렇게 토로했다."(481-3)


"이렇듯 쇠약해진 갈릴레오는 1638년 10월, 함께 살 가장 완벽한 반려자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피렌체 출신의 16세 젊은이 빈첸초 비비아니였다. 비비아니의 학문적 탁월함은 페르디난도 대공의 눈에 띄었고, 대공은 그에게 갈릴레오의 조수로 갈 것을 명했다." "1654년 비비아니가 쓰기 시작한 갈릴레오의 전기에는, 연로한 스승이 자유롭고 두서없이 이야기를 하고 젊은 제자는 온 정성을 다해 귀를 기울이는, 두 사람이 단둘이 누린 시간을 초월한 즐거운 한때가 묘사되어 있다. 갈릴레오의 일생에서 아주 중대한 몇몇 순간을 추적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고 거의 신화적인 것으로 만들기까지 한 인물은 다름 아닌 비비아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의학을 공부했던 학생 시절,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동안 흔들리는 전등불을 바라보다 진자의 법칙을 깨달은 것이라든지, 밑에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있는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서 포탄을 굴려 떨어뜨린 장면 등을 생생하게 살려냈다."(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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