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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936 - 오늘의 중동분쟁을 만든 결정적 순간 ㅣ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오렌 케슬러 지음, 정영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5월
평점 :
들어가는 글:역사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대봉기 11
"이 책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약 10년 전, 3년에 걸쳐 진행되며 이후 이어질 유대-아랍 관계의 틀을 만들어낸 팔레스타인의 첫 아랍인 봉기를 다룬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진행된 이 '대봉기Great Revolt'라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하나로 빚어졌다. 경쟁관계에 있던 가문들, 도시와 농촌, 부유층과 빈곤층은 공동의 적에 맞서기 위해 하나로 뭉쳤다." "그러나 봉기는 결국 내부를 향하며 약해졌다. 내분과 보복은 아랍인 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실용주의자는 극단주의자에 의해 밀려났고, 첫 번째 대규모 난민 행렬이 팔레스타인을 빠져나갔다. 영국군의 진압으로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다쳤다." "시온주의 종식을 목표로 시작된 대봉기는 오히려 아랍 팔레스타인을 망가뜨렸고, 아랍인은 10년 후 실제 진행된 유대 국가 건설에 맞설 수 없는 상태가 됐다. 그러나 대봉기는 팔레스타인인이 승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순간이었고, 많은 사람이 아직 그 순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12-3)
"한편 대봉기는 유대인에게 아랍인과는 아주 다른 유산을 남겼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대봉기를 계기로 아랍인이 유대 국가 건설 사업을 묵인해줄 거라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 주권국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무력에 기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대봉기를 계기로 수천 명의 유대인이 당대 최고의 군사 강국 영국에게 훈련을 받고 무기를 지급받았다. 어설펐던 경비대는 특수부대와 장교단까지 갖춘 유대인 군대의 씨앗으로 거듭났다. 유럽의 파시즘과 팔레스타인의 유혈사태에 직면한 가운데 소극적 방어는 민족적 자살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이 등장한 것도, 유대인의 테러 공격이 처음 등장한 것도 대봉기 시대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랍과 유대, 두 민족주의를 말하는 책이자 그 둘 사이에서 일어난 최초의 거대한 폭발을 다룬 책이다. 이 변화는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이 되기까지의 연대기에서 핵심 역할을 했지만 많은 경우 간과되어 왔다."(13-4)
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21
"러시아 태생의 바이츠만은 영국에서 화학자로 활동했다. 그의 아세톤 생산 공정은 연합군의 폭발물 산업에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역할이 있었다. 바로 세계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1919년 1월, 바이츠만은 아랍 봉기의 영웅 파이살을 만나기 위해 그의 사막 주둔지로 갔다. 여기서 둘은 T. E. 로렌스의 중재로 협정을 맺었다. 파이살은 협정에서 유대인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를 장려하는 밸푸어 선언을 사실상 지지하고 추후 레반트 나머지 지역에 건설될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별도로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파이살과 바이츠만은 공동 성명에서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적 연대감과 오랜 유대감을 염두에 둘 때, 각자의 자연적인 열망을 달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의 발전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파이살은 다가오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더 넓은 독립에 대한 아랍의 꿈을 실현시켜줄 것을 협정의 조건으로 걸었다."(33, 35-6)
"유대인은 빠르게 움직였다. 1920년 네비 무사Nebi Musa(선지자 모세) 축제 때 유대인을 겨냥해 일어난 폭동 이후 노동계 시온주의자들은 정착촌을 지키기 위해 무장단체 하가나(Haganah, '방어'라는 의미)를 창설했다. 공식적으로는 불법 단체였지만, 활동을 방어에만 국한한다는 조건으로 영국은 이를 눈감아줬다. 영국은 여전히 파이살을 도왔다. 영국의 중동 지역 관료들은 1921년 카이로에 모여 짧은 기간 시리아를 통치했던 파이살을 이라크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한편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느슨하게 연결된 '트랜스요르단'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설립해 파이살의 형 압둘라는 에미르Emir로 앉혔다. 시온주의자, 그중에서도 특히 자보틴스키의 강경파 추종자들은 유대인 몫의 땅을 빼앗긴 것으로 보고 영국에 분노했다.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은 이라크와 요르단 동쪽을 아랍인에게 보장함으로써 유대 민족 고향 건설에 대한 아랍인의 분노가 잦아들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는 통하지 않았다."(41-2)
"당시 자보틴스키는 이미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상가였다. 그는 《하레츠Haaretz》 등의 매체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는 아마 러시아 문학계의 거물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학이 아닌 시온주의, 그중에서도 자기방어와 자기결정권이 하나님의 뜻이나 노동자의 형제애라는 개념보다 우선하는 강경한 시온주의에 투신했다. 반면 하지 아민은 평범한 신학적 소양만을 갖춘 크게 눈에 띄지 않는 학자였다. 새뮤얼 고등판무관의 사면이 아니었다면 하지 아민은 아마 역사에 별다른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 아민을 귀환시킨 새뮤얼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망한 지 얼마 안 되는 그의 형의 자리, 즉 대大무프티 자리를 하지 아민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렇게 종신직 대무프티 자리에 오른 하지 아민은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이는 밸푸어 선언에 이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은 영국의 또 다른 결정이었다."(44-5)
"1929년 8월 15일은 유대인이 히브리 달력에서 1년 가운데 가장 애통한 날로 꼽는 아브월 9일의 하루 전날이었다. 유대교 안식일이었던 다음 날 아침,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을 겨냥한 전례 없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어지는 며칠간, 폭동은 텔아비브와 하이파 사이의 해안 지역, 제즈릴 계곡, 갈릴리 등 팔레스타인의 20여 개 유대인 거주지역으로 번졌다. 끔찍했던 엿새 동안 133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아랍인 사망자의 수도 비슷했지만, 대부분 영국군에 의해 죽은 것이었다. 유대인에 의한 사망은 일곱 명으로 추정됐다. 300명이 넘는 유대인과 200명이 넘는 아랍인이 부상을 당했다. 폭동은 전 세계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뉴욕 타임스》는 첫 네 면을 거의 이 사건에 할애했다. 메디슨스퀘어가든에 2만 5000명의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 집회 사회자가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담화를 낭독했다. 후버 대통령은 시온주의 계획에 대해 미국 국민이 지닌 〈심심한 동정과 공감〉을 강조했다."(57-9)
"히틀러 취임 두 달째인 1933년 3월 31일, 대무프티 하지 아민은 독일 총영사와 만났다. 하지 아민과의 면담 후 총영사는 베를린에 다음과 같은 전보를 보냈다. 〈오늘 대무프티가 팔레스타인 안팎의 무슬림이 독일의 새 정권을 환영한다는 점과 파시스트적이고 반민주적인 국가 권력이 다른 땅으로도 전파되기를 희망한다는 점을 밝힘.〉" "몇 주 후 총영사는 대무프티를 비롯한 아랍 인사들과 네비 무사의 사막 사원에서 다시 만났다. 아랍 인사들은 새로운 독일을 환영하고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조치에 대한 지지와 공감을 밝혔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단 하나, 팔레스타인 유대인을 막기 위해 독일 정부가 최선을 다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히틀러의 부상이야말로 팔레스타인 이주 유대인이 기록적으로 증가하는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와 시온주의자 사이에도 한 가지 공통의 목표가 있었다. 바로 유럽이 더 이상 세계 유대인의 중심지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65-6)
2장 피로 물든 야파 83
"이 시기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민족 국가 건설 계획은 치명적인 위협을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은 1933년 3만 명 규모의 유대인 이민을 허가했고, 그 숫자는 1934년에 4만 2000명, 1935년에는 기록적 규모인 6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불법적인 경로로 입국하는 유대인 수만 명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이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40만 명에 가까웠다. 4년 만에 두 배 증가한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다. 텔아비브 인구 또한 같은 기간 세 배 증가했다." "중동에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32년 영국은 (자국의 군사적 특권은 유지한 채) 파이살을 국왕으로 세워 이라크의 독립을 승인했다. 1936년 초에는 시리아인들이 50일에 걸친 총파업 끝에 프랑스 철수를 논의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이집트 또한 영국과 비슷한 협상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팔레스타인에서만 아랍인의 독립 열망이 그저 좌절된 것으로 모자라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었다."(88, 93)
"야파에서 유혈사태가 있기 이틀 전(1936. 4. 17),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집에서 비밀리에 벤구리온을 만났다. 벤구리온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갑작스럽게 유대인과 아랍인의 협력에 대해 열정적인 웅변을 쏟아냈다. 안토니우스는 유대인 〈공동체〉의 이름으로 '에레츠 이스라엘(Eretz Israel, 이스라엘 땅)'을 제안했다.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가 될 것이고, 인구 대다수는 유대인으로 구성될 것이다. 에레츠 이스라엘의 영토는 남북으로는 가자에서 하이파까지, 동쪽으로는 제즈릴 계곡까지가 될 것이다. 그 옆으로는 헤브론산맥에서 네블루스까지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의 아랍 국가가 자리 잡는다. 안토니우스의 제안은 성지 팔레스타인을 반으로 쪼개는 것과 다름 없는, 그야말로 전례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이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시리아 연방으로의 편입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큰 양보였고, 《성경》 속 〈이스라엘 땅〉의 일부만을 수락하는 것 또한 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109-11)
"야파 유혈사태 이후 아랍인들의 단합에 대한 압박은 점점 강해졌다. 아랍고등위원회가 주도한 파업이 길어질수록 아랍인과 유대인은 서로를 분리하고 더 멀리했다. 벤구리온은 여기서 기회를 감지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값싼 아랍인 노동에 기대지 않고 자체적인 유대인 농업과 산업을 성장시켜 자급자족을 실현할 기회였다. 이미 몇 년째 자급자족의 필요성을 설파해온 벤구리온은 야파 항구의 아랍 인부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영국 정부에 텔아비브 북쪽 끝에 경쟁 항구 건설을 허가해달라고 청원했다. 영국 정부는 몇 주 망설인 끝에 한 가지 조건을 달아 허가했다. 새로운 항구 건설을 위한 자금은 유대인이 직접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항구 건설은 유대인에게 이중의 승리였다. 우선 신항구 건설로 팔레스타인이 자랑하는 최대 수출품 감귤류를 유럽으로 원활하게 수출할 수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새로운 항구가 지닌 상징성이었다. 이제 유대인도 외부 세계로 통하는 자신들만의 관문을 가지게 된 것이다."(114-5)
"여름이 되면서 대무프티도 폭력을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6월부터 대무프티의 본부는 전사들을 격려하고 금전적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인에 협조한 아랍인 또한 점점 더 많이 죽어나갔다." "한편 영제국은 신경 쓸 곳이 너무 많아 극도로 정신없는 상태였다. 3월에는 히틀러가 또다시 베르사유조약을 위반하고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에 접한 라인란트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5월에는 무솔리니가 아디스아바바 입성으로 에티오피아 점령을 완성하며 수에즈운하에 대한 영국의 불안을 더욱 자극했다. 궁지에 몰린 위임통치령 정부는 그때까지 거부해왔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유대인에게 무기를 지급하고 훈련시켜 스스로를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노트림(notrim, 파수꾼)'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임시경찰대를 창설했다. 노트림의 실제 운영은 유대인기구가 맡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하가나가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영국에 의해 유대인 무장 경관이 탄생했다."(122-4)
3장 두 국가 해법론 137
"1936년 여름, 윌리엄 필은 총 여섯 명으로 구성된 왕립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총 6주 동안 조사를 진행한 후 필 위원장은 위임통치령 개시 이후 유대인이 원하는 민족적 고향의 성격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전에는 일종의 문화적 중심지를 원했다면, 이제는 수백만 명의 피난처를 원하고 있었다. 부위원장인 럼볼드는 필의 말에 동의하며 미국의 이민 제한과 히틀러의 부상이 모든 것을 바꿔놓은 가운데 대의 정부에 대한 아랍인의 요구가 〈실로 매우 강하다〉고 언급했다. 자리에 참석한 모든 위원은 팔레스타인의 두 민족이 각자 지닌 열망은 양립이 불가능하며,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더 큰 자치권을 부여해야 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위원회는 현재 위임통치령의 범위 안에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이유를 설명한 후 이를 근거로 위원회에 제출된 제안 가운데 가장 과감한 제안을 추천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위원회는 이 제안을 〈깔끔한 분할clean cut〉이라고 불렀다."(164-5)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 방식은 원칙적으로 유대인 소유 토지가 집중된 지역은 유대인에게, 나머지 지역은 아랍인에게 주자는 것이었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의 7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 계획에 따르면 20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갈릴리의 경우 아랍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위원회는 인구 성장과 〈개척〉을 고려해 유대 국가 쪽으로 배분했다. 사페드, 티베리아스 등의 도시가 지닌 종교적·역사적 의미가 그 이유였다. 물론 인국가 혼합된 도시는 임시적으로 영국의 관리 구역으로 남기기로 했다. 관개전문가 해리스의 제안대로 가장 성스러운 두 도시, 즉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야파 북쪽 바다까지 이어지는 통로와 함께 영국 관리 지역으로 남기기로 했다. 또한 유대 국가와 영국은 아랍 국가에 정기적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팔레스타인 경제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가게 되면서 감소할 세수를 보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렇게 분할안이 제시됐다."(179-80)
"벤구리온은 셰르토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필 위원회 보고서〉를 읽은 첫 소감을 이렇게 썼다. 〈저는 이 계획의 실현이 완전한 구원의 시작을 위한 결정적인 단계이자 '이스라엘 땅' 전체를 점진적으로 정복하기 위한 독보적인 지렛대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서를 다시 한번 훑어보던 벤구리온의 눈에 처음에 놓쳤던 중요한 내용이 들어왔다. 마지막에 짧게 언급된 인구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벤구리온은 그 가능성에 열광했다. 인구 이동이 영토 확장보다 더 큰 가치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인구 이동은 우리가 주권국이었을 때도, 제1성전 시대와 제2성전 시대에도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가능케 해줄 수 있다. 바로 유대 국가로 분류된 계곡 지역에서 아랍인을 이동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분할안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이 마지못해 수락한 것으로 보여야 했다. 그런 연유로 벤구리온은 외부적으로는 영제국에 환멸을 느낀다며 분할안이나 영국의 계속된 통치나 위태롭기는 매한가지라고 한탄했다."(181-5)
"벤구리온은 대부분의 아랍 인사가 탐탁지는 않을지언정 분할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유수프 한나와 무사, 시리아의 주요 민족주의 단체인 민족진영 등 일부는 벤구리온의 예상대로 분할안을 수용했다. 분할이 진행될 시 정치적·재정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는 트랜스요르단의 에미르 압둘라는 영국에 지지 입장을 알렸다." "그 모든 지지자가 몇 주 만에 갑자기 돌아섰다. 에미르 압둘라는 애초에 분할을 지지한 적이 없다며 황급히 대무프티와 관계 회복을 꾀했다. 라게브는 분할안이 유대인의 극단적인 요구까지도 정당화했다고 비판하며, 작은 팔레스타인 땅을 세 개로 나누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갑작스러운 반전이었다. 압둘라도 라게브도 아랍 팔레스타인에서 대무프티가 가장 막강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하지만 인정해야 했다. 대무프티는 보고서가 발표되자 재빨리 분할안 거부 입장을 밝히고 분할을 지지하는 이물에게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었다."(185-6)
"1937년 8월 취리히에서 제20차 시온주의자총회가 개최됐다. 헤르츨이 바젤에서 제1차 총회를 개최한 지 정확히 40년이 되는 해였다. 바이츠만은 분할 원칙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후 2주 동안 50여 명의 연사가 분할안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의견을 냈다. 반대하는 연사의 비중이 절반을 조금 넘었다. 벤구리온이 이끄는 노동계 내에서도 대표단의 3분의 1이 반대했다. 보고서가 제안하는 유대 국가라는 것이 너무 급조된 데다 협상의 여지도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분할안에는 예루살렘도 빠져 있었고 혼합인구 도시의 문제도 있었다. 게다가 영국이 분할을 끝까지 실행에 옮길지 여부도 믿을 수 없었다." "바이츠만과 벤구리온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총회 차원에서는 필 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거부하지도 말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선은 거부하되 가장 큰 대가인 유대 국가는 챙기기로 하고, 시온주의 지도자들에게 영국과 협상을 계속할 권한을 주기로 했다."(188-90)
4장 검은 일요일 193
"1936년 8월 28일, 유대민족기금의 토지 구매 담당자는 최근 시장에 나온 매물에 대해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아랍인 주요 인사 세 명이 소유 중〉이라고 수첩에 기록하고는 무사와 나머지 공동소유자 두 명의 이름을 적었다. 무사는 무솔리니와 비밀 거래를 하며 온건파 아랍인으로서 지녔던 신망을 스스로 깎아먹었다. 그는 이제 영국과 유대인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온건파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시온주의자에게 땅을 내주는 치명적이지만 너무나도 흔한 죄를 저지름으로써 아랍민족주의자로서의 진실성을 훼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사실 상류층 팔레스타인 아랍인으로서는 전형적인 것이었다. 유력 가문 중에 유대인에게 땅을 팔지 않은 가문은 없었다. 아랍고등위원회의 구성원 여덟 명 가운데 적어도 절반이 토지를 직접 거래하거나 중개했다. 그 사이 시온주의자들은 이미 제즈릴 계곡과 갈릴리 지역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진행 중이었다."(197-8)
"1937년 여름, 루이스 옐런드 앤드루스는 갈릴리의 지구판무관으로 승진했다. 사실상의 주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런 앤드루스가 살해당한 다음 날 식민장관 고어에게서 전보가 도착했다. 영국 대표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대봉기 때 영국군과 경찰에서 20명 정도의 사망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정부 고위 관료가 사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랍고등위원회 구성원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5개월 후 야파 항구에 도착한 하지 아민은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시리아로 향했다. 시리아의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이 레바논 해안에서 대무프티를 체포했다. 대무프티는 나름 정치적 망명자였고 다른 아랍 국가에서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 뻔했다. 프랑스는 경찰의 보호를 받는다는 조건하에 대무프티의 체류를 허가하고 베이루트 북쪽 마을의 한 저택으로 그를 이동시켰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도부는 망명 상태가 되었고, 수십 년 동안 돌아가지 못했다."(205-7)
"사회주의자에서 수정시온주의자로 변모한 그린베르크가 1937년에 발표한 히브리어 시집 《성토聲討와 신앙의 서》는 영국과 〈아랍-아말렉 족속〉을 비판했다. 그러나 가장 강렬한 비난이 향한 곳은 하블라가, 즉 자제만을 끈질기게 고집하는 벤구리온의 좌파 시온주의 지도부였다. 그는 〈5696년(서기 1936년의 히브리력 표기)의 시신을 앞에 두고 자제만을 설교하는, 다윗의 왕좌를 위해 아라비아의 동맹을 구하는 이들〉을 비난했다.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그린베르크만이 아니었다. 6년 전 시온주의 지도부에 불만을 품은 하가나 단원들이 일부 수정주의 청년들과 민족군사기구, 즉 이르군 즈바이 레우미Irgun Zvai Leumi를 결성한 바 있었다. 이르군은 주로 자보틴스키에 대한 이념적 충성심으로 모인 느슨한 조직이었지만, 그 표식에는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의 지도 위로 소총을 굳게 든 팔이 그려져 있고, '락 카흐(Rak Kach, 오직 이를 통해서만)'라는 히브리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211-2)
"조지 렌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 속에 오스만에서 벌어진 그리스인 학살을 폭로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아나톨리아 지역 기독교인 수십만 명이 이주할 수 있게 한 주역 가운데 한 명이었다." "아나톨리아의 비극을 기억하는 렌델에게 필 위원회의 인구 이동 제안은 특히 위험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러한 대량 이주가 '깔끔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렌델의 호소는 마흔 살에 처음으로 입각한 외무장관 이든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렌델의 의견서는 곧 이든 장관의 의견서가 됐다." "〈필 위원회 보고서〉는 후속 대표단 파견을 권고한 바 있었다. 그렇게 기술위원회가 임명됐다. 이든의 주장으로 영국은 이들의 임명을 알리는 성명에서 〈국왕 폐하의 정부는 어떤 의미에서도 분할안을 지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영국이 분할안을 폐기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자 바이츠만은 1937년의 마지막 날 식민부에 서한을 보내고 분할안을 〈정중히 장사 지낼〉 준비를 시작했다."(225, 229-32)
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233
"1938년 첫 주, 벤구리온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토지 매입을 가속화해야 했지만, 단순히 사들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땅을 한 번에 정복해야 합니다. 정복 없이는 땅을 사들여도 가치가 없습니다.〉 정복은 유대인을 보내 정착시킨다는 의미였다. 목표는 레바논 국경 근처의 바위투성이 봉우리였다. 이 지역은 농업적인 잠재력이 거의 없고 다른 유대인 정착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착촌으로 가는 도로를 닦던 인부들이 총격을 받았다. 거의 2년에 걸친 아랍 봉기로 숱한 공격을 경험한 유대인에게는 크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브레너는 그 공격 이후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어디선가 두 무리의 유대인 경찰 부대가 나타나더니 국경 도로를 건너 산비탈을 뛰어올라가 공격자들의 양쪽 측면으로 돌진한 것이다. 이 노트림들도 겉보기에는 다른 유대인 경찰들과 비슷했지만, 사실 이들은 '야전분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창설된 하가나의 불법 조직이었다."(252, 255-6)
"1936년 이전까지 하가나는 이슈브 공동체에서 가장 덜 발전한 기관 가운데 하나였다. 초기에는 이민, 고용, 정착, 농업 등이 중요한 이슈였고, 시온주의자의 자금과 관심도 당연히 그에 관련한 활동에 집중됐다. 게다가 위임통치령 정부는 유대인을 훈련시키거나 그들에게 총기를 주는 것을 꺼려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분쟁에서 자칫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봉기가 장기화되면서 영국이 계산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의 치안 유지에 실패했지만, 유럽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본국의 병력과 자금을 더 동원할 수는 없었다. 시온주의 지도부가 고수해온 하블라가(havlagah, 자제) 정책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동안의 자제 정책을 지켜본 영국 정부가 유대인 수만 명에게 합법적인 무기를 쥐여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창설 초기 지역 야간 경비대의 느슨한 연합체였던 하가나는 점차 통합성과 기동성을 갖춘 전국 규모의 유대인 준군사조직으로 변모해갔다."(256-7)
"1938년 6월 29일, 팔레스타인 최초로 처형된 유대인 벤요세프의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 유대인은 충격에 빠졌다. 다음 날 팔레스타인의 이르군 지휘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한 분파는 영국인에 대한 보복 작전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분파는 이번 사건으로 마침내 하블라가 정책의 무용성이 드러났다며 아랍인을 상대로 무제한 전쟁을 시작할 시간이 왔다고 주장했다. 이날 호응을 얻은 것은 두 번째 주장이었다. 자보틴스키는 새로운 국면에 대비해 작전을 준비해둔 참이었다. 벤요세프의 사형 집행 몇 시간 전, 자보틴스키는 하이파에서 이르군 단원으로 활동 중인 조카에게 전보를 보냈다. 〈최종 결정 시 대거 투입할 것.〉 전보의 서명은 〈멘델슨〉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이르군 단원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보틴스키와 달리 보복에 아무런 내적 갈등을 느끼지 않았다. 자보틴스키는 오히려 그의 갈등을 감지한 단원들이 통제를 완전히 벗어나 멋대로 행동할 것을 두려워했다."(270-1)
# 수정시온주의 청년 조직 '베타르' 소속이던 벤요세프는 동료 두 명과 함께 아랍인들의 유월절 매복 공격에 대한 복수로 민간인 공격에 나섰다가 체포되었다.
"새롭게 펼쳐진 국면에 비하면 1년 전의 검은 일요일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938년 7월 전국에서 사망한 유대인 숫자는 60명이었다. 아랍 대봉기 시작 이래 가장 피비린내 나는 달이었다. 그러나 이달 사망한 아랍인의 숫자는 100명이 넘었다. 봉기 시작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에게 살해된 아랍인의 수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아진 것이다. 1936년부터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생겨난 틈은 이제 메울 수 없는 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슈브(유대인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이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유대인의 소행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폭력에 반대한 벤구리온 역시 벤요세프의 사형에 반대했었다.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와 부상자가 없었고, 벤요세프가 순교의 상징이 되면 다른 유대인 청년들이 〈광기 어린〉 행동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벤구리온은 팔레스타인에 또 다른 벤요세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 땅에는 지금 나치 정당이 있습니다.〉 벤구리온이 말했다."(273-6)
6장 유대의 로렌스 283
"한편 제네바 호수 인근 에비앙에서는 독일제국에서 박해받는 소수민족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0여 개국 대표단이 모였다. 프랑스는 이민자 인구가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라틴아메리카 4개국은 난민을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하며, 특히 〈상인이나 지식인〉은 더욱 불가능하다고 못 박았다. 영제국 또한 더 이상 수용 불가라고 말했다." "벤구리온은 다른 국가들이 유대인 대량 수용을 결정해 유대인 문제 해법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선택지가 아예 제외될 경우 시온주의 운동에 닥칠 수 있는 〈피해와 위험과 재앙〉에 대해 내부적으로 경고해온 바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불행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에비앙회의를 통해 유대인을 독일제국에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던 히틀러는 회의의 실패를 바라보면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유대인을 수용하겠다는 국가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대규모 강제 이주는 불가능했다. 이는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였다."(289-90)
"대무프티가 레바논의 저택에서 내린 지시는 다마스쿠스에서 망명 중인 측근과 팔레스타인 현지의 반군 지도자들에게 모두 구두로 전달됐다. 그의 메시지는 한결같았다. 낮은 수준의 폭력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약하게 끓는 냄비가 요리사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유대인과 영국인 그리고 민족에 방해가 되는 아랍인을 상대로 작전의 강도를 높일 것을 요구했다." "안토니우스는 팔레스타인에만 유대인 문제의 부담을 (전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문명 세계 전체의 의무에 대한 파렴치한 회피이며 도덕적으로도 부당한 행동〉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민족의 박해를 완화하기 위해 또 다른 민족을 박해하는 것은 그 어떤 도덕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는 자신의 책 《아랍의 각성》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을 쫓아내거나 멸종시키지 않는 한 제2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다.〉"(292, 297-9)
"오드 윈게이트는 이슈브 외부 인물로서는 그 누구보다 유대인 군대 창설에 크게 기여했으며, 추후 나타나게 될 강경파 기독교 시온주의 현상의 독보적인 전조가 됐다. 근본주의자이자 개인주의자, 아랍주의자이자 시온주의자였던 그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알려진 T. E. 로렌스의 먼 사촌이었다. 윈게이트는 로렌스를 일종의 사기꾼으로 여겼지만, 나중에 '유대의 로렌스'라는 (본인은 혐오했던) 별명을 얻게 됐다." "윈게이트의 세상을 형성한 기반은 전적으로 《성경》이었다. 윈게이트는 《성경》 속 인물 가운데 기드온을 이상으로 삼았다. 《구약성경》의 〈사사기〉에는 전사이자 선지자인 기드온이 이스르엘 계곡(제즈릴 계곡)의 하롯샘(에인 하로드)에서 용사들을 모아 〈미디안〉 군대, 즉 〈동방〉의 압제적인 〈이스마엘 족속〉에 맞서는 내용이 등장한다. 기드온은 용사들을 세 무리로 나눠 밤에 적진으로 쳐들어갔고, 용사들이 부는 뿔나팔 소리에 놀란 적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졌다."(299, 303, 307)
"필 위원회가 처음 분할을 권고하고 벌써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후임인 우드헤드 위원회를 '리필(Re-Peel, 다시, 필)'이라 부르며 비꼬았다." "〈우드헤드 위원회 보고서〉는 1938년 11월 9일에 공개됐다. 리필Re-Peel은 말 그대로 리필(Repeal, 폐지)을 권고했고, 아랍인들은 안도했다. 팔레스타인 땅이 온전히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과 어느 부분도 유대인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보고서 발표일에 나치 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이 독일제국 전역의 유대인 재산을 때려 부수고 약탈하고 불태웠다. 나치는 이 포그롬을 대중의 우발적 폭발로 규정하고 크리스탈나흐트Kristallnacht, 즉 '깨진 유리의 밤'이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 심각성을 축소했다."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스라엘 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땅 밖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도 확신했다.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대량 이민만이 유일한 살 길이었다."(330, 334-7)
7장 불타는 땅 339
"1939년 2월 7일에 런던 원탁회의가 시작되고 일주일 후, 맬컴 맥도널드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준비한 폭탄을 터뜨렸다. 이민 제한을 통해 유대인 비율을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하는 방식으로 아랍인의 두려움을 달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제안에 따르면 10년 후에는 아랍인의 동의 없이 이민은 불가능하고 토지 매매도 제한된다. 언젠가는 각자가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되겠지만, 우선은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양측이 동수의 대표성을 가지는 국가를 설립하자는 제안이었다. 바이츠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랍인들 또한 맬컴 맥도널드의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자말은 영국의 침공 전까지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수 세기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다며 아랍 독립국 하에서의 삶이 유럽에서의 삶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수의 아랍 민족이 침입자인 유대인과 같은 수준으로 강등되는 굴욕을 흔쾌히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356)
"1939년 5월 17일, 체임벌린 내각은 〈팔레스타인 정책 성명서〉를 발표하도록 승인했다. 이 성명서는 런던 원탁회의에서 맬컴 맥도널드가 제안한 내용을 거의 그대로 반영했다. 성명서는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로 만드는 것은 영국 정부의 정책이 아님을 분명히 밝혔다. 대신 영국은 10년 이내에 영국의 전략적 이익 보호를 위한 조약 체결과 함께 명시적으로 아랍 국가도 유대 국가도 아닌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를 설립하기로 약속했다." "이민은 향후 5년간 총수치 7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이후 추가는 모든 당사자의 동의가 있을 때만 이루어지게 했다. 마지막으로 맬컴 맥도널드가 런던에서 제안했던 내용에서 달라진 한 가지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원래는 상호 거부권이었던 것이 아랍인의 단독 거부권으로 바뀐 것이다." "유대인 기구는 백서가 〈완전한 배신〉이며 〈아랍 테러리즘에 대한 항복〉이자 유대인이 가장 절실히 도움을 구하는 시기에 날아온 〈잔인한 타격〉이라고 평했다."(376-8)
"주류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백서에 완전하고 단호한 거부를 선언했다. 이르군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정책과 기존 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백서가 발표되고 한 달가량은 거의 매일 민간인을 겨냥한 공격이 발생했다." "예루살렘의 렉스 극장에서 폭탄 두 개가 터져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부분 아랍인이었고, 나머지는 이르군의 표현에 따르면 〈아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던〉 유대인이었다. 예루살렘의 러시아인 거주 지구에서 폭탄 테러를 시도하다 체포된 젊은 여성은 자신의 이름이 라헬이며 성은 오헤베트 아미(Ohevet-Ami, 내 민족을 사랑하는)라고 얘기했다." "이미 여러 차례 사건이 있었던 하이파의 채소 시장에서도 폭탄이 터졌다. 당나귀에 실려 있던 폭탄이 터지는 소리는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아크레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사망자 20여 명 가운데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였다. 봉기가 이어진 3년 동안 이르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아랍인은 최소 250명이었으며, 부상자 또한 수백 명이었다."(384-5)
"영국 정부는 대무프티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아랍 세계가 민주주의 진영과 이해를 같이한다는 선언을 발표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는 채워지지 않았다. 유수프 한나는 일부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보인 독일제국에 대한 예상 밖의 열렬한 지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아랍인은 자신들이 유대인 때문에 영국에 탄압받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히틀러는 유대인을 박해하고 대영제국에 저항했다. 아랍인 스스로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히틀러가 해주고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대중의 심리다. (···) 아랍인은 현재 약한 자신들이 강대국 영국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기고 있다. (···) 히틀러에 대한 아랍인의 사랑은 바로 이런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벤구리온은 영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의 태양이 저물고 바다 건너에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았다. 더불어 〈지금 우리를 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은 루스벨트 대통령〉이라고 말했다."(388-9)
마치는 글: 끝나지 않은 봉기 392
"하지 아민의 제2차 세계대전 중 행보에 대해서는 꽤나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여장을 하고 레바논을 탈출한 하지 아민은 이라크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친추축親樞軸 쿠데타를 지원한 그는 다시 영국의 추적을 피해 도망쳤다(총리가 된 처칠은 하지 아민의 암살을 승인했다). 하지 아민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거쳐 마침내 제3제국 나치 독일로 향했다. 하지 아민은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하지 아민은 유대인 난민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다. 1943년 여름에는 헝가리에 〈유대인의 위협에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통제가 이루어질 수 있는 폴란드 같은 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촉구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나치가 이미 유대인 300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의 회고록에는 이 사실을 힘러가 이야기 해주었다고 무심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무엇보다 아랍 세계와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선전가이자 모집책으로 나치에게 유용했다."(396-7)
"제2차 세계대전 후 지쳐버린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제력을 점차 잃어갔다. 휴전 이전부터 우려했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봉기가 유대인 봉기로 대체된 것이다. 봉기 초기에는 주로 이르군과 그 분파인 이스라엘 자유전사[Freedom Fighters of Isreal, 레히(Lehi)라는 히브리어 약자로 더 잘 알려짐]가 공격을 이끌었으나, 평화 이후에는 하가나도 합류했다." "1947년 봄, 국제연합은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를 소집했다. 팔레스타인은 이번에도 대무프티의 주장으로 참여 거부를 선언했다." "9월, 조사를 마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는 10년 전 필 위원회의 핵심적인 권고와 정신은 그대로 반영하되 영토나 다른 세부적인 부분은 수정해 새로운 분할안을 내놓았다. 11월 29일, 국제연합총회에서 분할안이 통과됐다. 그리고 다음 날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했다. 위임통치 종료를 몇 시간 앞둔 5월 14일 오후,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했다."(4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