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 - 문명을 가로지른 방랑자들, 유목민이 만든 절반의 역사
앤서니 새틴 지음, 이순호 옮김 / 까치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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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균형 잡기 


"튀르키예식 지명으로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라고 불리는 배불뚝이 언덕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고고학 유적지이지만, 금빛 찬란한 보물이 나오지는 않은 관계로 누구나 다 아는 곳은 아니다. 원뿔형 꼭대기 지면에서 슈미트의 그의 팀원들이 발견한 석판들은 T자 형 기둥들의 상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기둥들은 정교하게 조각되었고, 아름답게 장식되었으며, 다른 것들보다 키가 큰 2개의 기둥을 중심으로 10여 개 기둥이 원형으로 세워져 있다." "이곳은 지구상에 인간이 거주한 최초의 장소들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리 조상들이 자신이 상상한 어떤 것을 묘사하기 위해서 경관을 개조한 첫 번째 장소일지도 모른다. 지구의 방대한 지역을 개조하는 오늘날의 우리는 이러한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1만 2,000년 전에 이는 몹시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이 행동은 기념비적 건축의 시작이자 축조 예술의 시초, 우리 역사에서 현재의 인간 격格이 형성된 시발점이었다."(34-6)


"첫 번째로 놀라운 것은 연대年代였다. 〈추정컨대 괴베클리 테페가 형성된 시기는 기원전 제10천년기가 확실합니다.〉 슈미트의 말은 기원전 9500년 무렵에 인간들이 큰 돌덩어리들을 채석해 옮기고, 그 돌로 형상을 만들어 성역을 조성하는 데에 사용했다는 뜻이다. 그것은 피라미드와 스톤헨지가 축조된 〈기념비적 시대〉보다 약 7,000년이나 앞선 때였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괴베클리 테페를 세운 사람들이 그곳에 거주했음을 나타내는 흔적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훗날의 발굴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낼지도 모르지만, 최초의 발굴 단계에서는 집터나 지붕, 혹은 화덕을 보지 못했다. 지속적인 거주지였다면 발견되었을 법한 쓰레기도 나오지 않았다. 대신 초기 발굴 팀은 뜻깊게도 표범, 멧돼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분포하는 다마사슴, 두루미, 독수리 등 다양한 동물들의 뼈를 발견했다. 요컨대 그 사람들은 수렵인과 채집인, 방랑자, 주거가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거기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37-8)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질 당시 에덴을 벗어난 강의 동쪽, 그러니까 그곳의 주변 경관은 오늘날보다 비옥했다. 야생풀, 밀, 보리가 자라는 초원을 상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참나무, 그리고 이제는 그 지역에서 집약적으로 재배되는 아몬드 나무와 피스타치오 나무들이 관목숲에 흐름이 끊기기도 한 그 초원은 가제로가 오록스의 터전이었고, 이주하는 거위들, 식용 가능한 다른 많은 새와 동물들, 그리고 유적지에서 나온 뼈의 퇴적물로 드러났듯 인간을 위협한 일부 동물들의 서식지였다. 이 풍요로움은 인간이 먹고살기 위해 멀리까지 방랑할 필요를 없게 만들었다. 배회할 필요 없이 성역을 개발하면서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간들이 살고 죽은 곳이었다. 정착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가져다주었다." "그에 대한 전모가 무엇이든, 1만 1천년 혹은 1만 2천년 전 괴베클리 테페에서 농업의 진화와 문화의 혁명이 일어났고, 그 변화의 동인이 이동하며 살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40-2)


"차탈회위크는 괴베클리 테페와 카인의 도시 에녹 사이의 어딘가에 놓인 원도시proto-city였다. 괴베클리 테페가 버려지고 약 500년이 지난 기원전 7500년경, 정착민들은 지중해에서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차르샴바 강과 가까운 아나톨리아 평원의 언덕에 주거지를 조성했다. 그들이 지은 흙벽돌집에는 1층 출입구가 없었고, 집들 사이에도 길이나 통로가 없었다. 평평한 지붕이 길 역할을 하고, 지붕 덮개를 통해 아래쪽에 위치한 집으로 들어가는 구조의 진흙 상자들이 어지럽게 모여 있는 형태였다." "괴베클리 테페와 마찬가지로 차탈회위크 사람들도 어느날(기원전 7000년 무렵) 갑자기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났다." "떠난 이유가 무엇이건, 차탈화위크 난민들은 아마도 생존 꾸러미를 훨씬 상회하는 짐을 싣고, 자신들이 정착해 뿌리를 내릴 또다른 장소, 신께 예배드리고 신을 위무할 장소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곳에서도 개발이 진행되었다. 새 도시에는 튼튼한 성벽도 있었다."(59-61)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곳을 두 강 사이의 땅을 뜻하는 메소포타미아로 불렀다. 아람어, 히브리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아랍어로도 되풀이되는 이름이다. 두 강은 에덴동산에서 갈라져 나온 〈강들〉 가운데 두 곳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고, 강들의 유역과 범람원은 튀르키예 남부에서 쿠웨이트를 거쳐 이란 남서부 바흐티야리 부족민들의 겨울 방목지에까지 이른다. 메소포타미아는 북부는 산악지대, 남부는 습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강들 사이의 지대는 엄청나게 비옥한 반면 강들의 동쪽과 서쪽은 점점 사막이 되어가고 있다. 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민은 강으로 향했고 유목민은 사막 주변으로 향했다. 초기에 농업이 번성하고, 그에 따라 도시와 도시가 지닌 대부분의 초기 특징들이 만들어진 장소가 이곳이다. 또한 깊숙한 과거와 역사시대가 만나고, 신화와 전설이 사실과 물리적 증거와 조화를 이루며, 유목 생활과 확실히 대비되는, 세계 최초의 도시들이 세워진 장소이기도 하다."(61-2)


"인간이 승마를 처음 시작한 때가 언제일까? 기원전 제4천년기가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카자흐스탄 북부의 그 시기 매장지에서 99.9퍼센트가 말의 뼈인 동물 뼈 10톤이 출토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동물 뼈들에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하게 일종의 마모가 진행된(입에 채워진 재갈 때문에/역자) 다수의 턱뼈와 이빨들이 섞여 있었다." "승마 능력은 곡물의 작물화를 능가하는 혁명이었다. 그것은 말의 혁명이었다. 말은 인간이 이용해온 것 중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영속적인 교통 수단이었으며, 승마 능력으로 지구에서의 삶은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이 바뀐 지역은 승마로 인해서 유목민의 목축이 가능해진 스텝 지대였을 것이다. 걸어서 방목하면 하루에 고작 32킬로미터를 갔지만, 최초의 승마자들은 안장 없이 말을 타고도 그 거리의 2배 혹은 그 이상을 갔다. 게다가 이동 거리의 연장은 말 혁명의 한 양상에 지나지 않았다(수레바퀴와 전차가 차례로 등장했다)."(75-6)


"말[馬], 인간이 혹독한 겨울을 날 때 가진 것에 감사해할 동물이면서, 항상 누군가의 재산이었던 동물. 전차, 바람처럼 날랜 것. 합성궁, 단풍나무, 영양의 뿔, 사슴의 내장 그리고 가죽을, 물고기를 원료로 한 아교로 접착해서 만든 복잡한 구조물. 코미타투스comitatus, 〈호위대〉를 뜻하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정교하고 열의에 찬 전사 집단, 활에 쓰인 사슴 내장보다도 더 단단히 결합되고, 함께 살면서 필요하면 서로를 위해 죽겠다고 맹세한 집단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말. 이야기에 대한 애호, 특히 영예로운 인간의 모험과 신들의 변덕을 주 내용으로 하는 서사 역사를 좋아하는 취향. 유목민들은 이 모든 것들을 지니고 스텝 지대를 떠났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헤라클레스의 쌍둥이 기둥(지브롤터 해협의 낭떠러지 어귀에 있는 바위/역자)으로부터 유라시아를 가로질러 이집트 중왕국과 태평양으로 퍼져나갔고, 고대 세계에 광범위하고 영속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87-8)


"이 상호 연결된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세계에서는 인위적인 장벽이라고 해봐야 가시와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것, 혹은 임시 거처를 보호하기 위해서 바윗덩어리 몇 개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것이 고작이었다. 도시 진출이라는 큰 꿈에 매료되어 우루크, 바빌론, 로마 그리고 다른 많은 도시들로 이끌려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성벽 밖에서 살았고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주자, 유목민, 상인─이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 다시 말해서 역사의 고속도로는 우리로 하여금 기원전 1만 년의 현저한 업적 모두가 정착민들의 성취라고 믿게 만든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건설자들로부터 로마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훈족에 이르기까지, 유목민, 이주자, 그리고 이동하며 살았던 그 밖의 종족들 역시 최초의 석조 기념물을 세운 것에서부터 말을 길들이고, 그 말과 연결해 수레 및 전차를 만든 것에 이르기까지 문명의 진보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168-9)


제2부 제국 세우기 


"이븐 할둔의 업적이 한층 빛나는 것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도,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도서관도, 바그다드의 지혜의 집도 아닌, 그의 주변에서 어둠과 고난이 퍼져나가고, 정부들이 서로 싸우며, 사람들은 각자도생을 하러 떠났던 난세의 14세기에 북아프리카의 외딴 성에서 글을 썼기 때문이다. 때는 이동에 공격의 위험이 따르고, 치명적 병에 감염될 수도 있으며, 여행이 힘들고 위험한 시기였다." "이븐 할둔은 온 세상이 이처럼 고난에 처해 있고 황폐함이 만연하던 시기에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일에 착수해서 인간이 어떻게 정연하고 효율적으로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었는지를 글로 정리하려고 한 것이었다." "서구의 역사서와 달리 『역사서설』(『이바르의 책』의 서문으로 쓰인)은 유목민을, 말이나 타고 다니며 과거에 창조된 것들을 파괴하는 야만인으로 제시하지 않고 원동력이자 킹메이커(숨은 실력자)로 제시했다. 이븐 할둔의 세계에서 아벨의 자식들은 촉매, 사회 갱신의 주요 동인이었다."(179-80)


"이븐 할둔의 작품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상황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간의 경과에서 그가 본 것은 〈인간의 향상〉, 상승의 진행이나 심지어 몰락의 진행이 아닌, 모든 것의 순환이었다. 그는 운명의 바퀴가 돌 듯이, 그리고 달과 해와 계절이 순환하듯이, 권력에도 흥망성쇠가 있으며, 제국들도 부침을 겪고, 도시들도 세워졌다가 무너지며, 사람도 살고 죽으며, 모든 것은 무無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가 글을 쓴 시점이 위대한 아랍인의 제국이 와해되고, 흑사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고, 다수의 군주가 폐위되고, 힘 있는 친구들이 추방되거나 처형된 뒤였음을 감안하면, 그가 사태를 더 비관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의 걸작에는 반짝이는 줄 한 가닥이 있었으니, 바로 다양성과 변화를 포용할 줄 알고, 그런 능력과 그들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세계에 활력을 불어넣을 줄 알았던 유목민의 능력이 그것이었다."(181-2)


"아사비야asabiyya라는 용어는 『역사서설』에 500번 이상 등장한다. 많은 아랍어 단어들이 그렇듯이, 아사비야에는 넓적다리를 묶지 않으면 젖을 내주지 않는다는 암낙타, 터번을 묶는 행위, 광신자를 비롯해서, 맥락이 어렵풋한 여러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가장 어울리는 의미는 당파심, 연대의식, 단결심, 부족적 연대이다." "인도유럽인의 코미타투스와도 비슷한 아사비야가 가리키는 것은 혈연일 수도, 부족적 유대일 수도, 공통된 신념이나 지도자에 대한 헌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를 끈끈하게 해준 〈접착제〉가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아사비야가 안전하다는 의식과 상호 부조에 대한 확신을 집단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이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인식으로 깨달았던 것은 정부와 제도의 성격도 국가 내에 존재하는 그 연대의식의 성격에 좌우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는 바는 부단히 변화하고, 이동하고, 이주하며 사는 유목민의 존재 양식이다."(185-6)


"아랍인 무슬림 세력의 극적인 확대는 기존의 세계질서를 바꾸었다. 이 신생 제국의 가장 놀라운 점은 제국의 크기가 아니라 그 제국이 이동하는 습성을 신속한 정복으로 이끌어간 사막인, 유목민이 쟁취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비교적 적은 숫자의 아라비아 부족민들이 〈출신 성분이 다양하고 군기가 제법 잡힌 군인들의 소규모 본대〉와 나란히 싸우며 이룩한 막대한 성공은 전통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신념으로 설명되곤 한다. 요컨대 그들은 알라를 위해서, 그리고 설령 전사를 하더라도 순교자가 되어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으로 싸웠다는 것이다. 페르시아, 비잔티움, 이집트, 그리고 다른 나라의 병사들은 현세의 것을 찾아 참전한 반면 무슬림 전사들의 욕망과 염원은 모두 내세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븐 할둔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아랍인의 성공 요인을 유목민의 아사비야가 가진 힘에서 찾았다. 아랍인들의 승리는 그들이 정주 생활의 겉치레 없이 홀가분한 〈자연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이라고 말이다."(193)


"이븐 할둔은 흥망성쇠의 사이클을 다섯 단계로 구분했다. 〈첫 단계는 성공의 시기로, 모든 반대 세력을 타도하고 이전 왕조의 왕권을 탈취하는 단계이다.〉 이것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아사비야 덕이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지도자가 권력과 왕권을 통합하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은 〈그의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약화시키는 데〉에 있었다. 세 번째는 지도자가 평화롭고 호화로운 삶에 안주하고, 법률을 공표하며, 건축물을 발주하고, 훌륭한 군대를 보유하며, 백성과 외국 사절들에게 후하게 선심을 쓰는 단계이다. 그다음에는 새로운 지배자가 전임자들의 흉내를 내며 귀족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전통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곧 자기 권력의 파멸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단계로 접어든다. 마지막 단계는 〈지배자가 향락과 여흥에 조상들이 축적한 [재보]를 낭비하여〉 몰락하는 단계이다. 이븐 할둔은 한 왕조가 거쳐 가는 이 다섯 단계를 모두 검토한 다음 〈최고의 후계자는 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277)


"칭기즈 칸이 죽고 나서 1세기 동안 중국에서 근동까지의 육지와 바다는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했다. 그 과정에서 호화로운 기념물들이 세워지고, 번성하는 유라시아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장인과 뛰어난 지성인들로 채워짐에 따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본래의 유목민 특성은 희석되었다. 이븐 할둔은 그들의 아사비야가 약화되면서 1330년대와 1340년대에 금장 칸국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페르시아의 일 칸국이 일련의 내전으로 힘이 소진된 끝에 어떻게 와해되었는지, 중앙아시아의 중심에 자리한 차가타이 칸국이 매우 다른 두 왕국으로 어떻게 분열되었는지를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를 지배하고, 그 세계를 자기들 방식에 적응시켰던 유목민 세계가 작동을 멈추고, 이븐 할둔이 썼듯이 칭기즈 칸 후손들의 지배가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이븐 할둔의 판단이 오판으로 판명날 것이었다. 칭기즈 칸의 자손은 앞으로도 더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277-8)


"티무르의 거대 제국은 교역 도시들, 특히 실크로드의 허브였던 히바, 부하라, 발흐, 델리와 물탄 같은 남아시아의 요지들, 그리고 근동의 도시들인 바스라, 바그다드, 알레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중심축은 마샤드, 헤라트, 그리고 티무르가 시간, 관심, 돈을 특히 아낌없이 투자한 사마르칸트였다. 그러나 이 도시들이 가진 명백한 중요성과 장려함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제국은 그가 살아 있을 때에도, 사후에도 계속 유목민의 특성을 띠었다. 제국의 유목성은 부족 중심의 구조와 전통, 정례적으로 개최된 쿠릴타이와 이주, 천막과 말 위의 삶을 선호했던 티무르의 생활 방식, 군대의 편성과 구조, 그가 총애한 아내 비비 하눔과 다른 여인들이 의사 결정과 부족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힘을 계속 보유했던 점, 자유 무역을 중시한 점, 티무르의 총독들이 이동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촉진하여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여타 종교들이 확산될 수 있게 한 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309-10)


"유라시아의 시장들을 통해서 막대한 부가 유통되고, 중국에서부터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진 것도 티무르 제국의 개방성이 가져온 결과였다. 아시아의 티무르 제국 경영자들은 시인, 예술가, 아름다운 것을 창안한 사람들도 후원했다. 그들 모두 중요한 문화 융성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븐 할둔은 바퀴가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록 천국이 몽골인들에게 미소를 지었고 그 또한 그들의 〈신앙과 제국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지만, 티무르가 죽은 뒤에도 바퀴는 계속 돌아가리라는 것과, 그의 위대한 제국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소멸되는 꿈, 다수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사라져가는 악몽이 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었다. 그가 몰랐던 것은 바퀴가 돌기를 완전히 멈추고, 세계가 아사비야를 넘어서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유목민도 힘을 잃어 더는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매혹과 심지어 감탄의 대상이 되는 때가 오리라는 것이었다."(310-1)


제3부 회복하기


"오토만 제국이 들어선 후에도, 늘 그렇듯이 제국의 유목주의를 좌우한 것은 지형이었다. 유럽에 속한 제국의 지방들은 대부분 방목하기에 좋은 산지, 튀르크어로 〈나무가 많은 산맥〉을 뜻하는 발칸 반도에 있었다. 카르파티아 산맥과 핀두스 산맥, 그리고 여타 동유럽 산맥들은 유목 생활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고, 아시아에 속한 아나톨리아 역시 농경지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토로스 산맥과 폰투스 산맥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제국의 지도층과 행정부는 정착해 살고, 백성들의 대다수는 여름철에는 고지대의 방목지, 겨울철에는 평원을 오가며 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통제하에 놓인 다수의 섬들도 여름에는 기꺼이 갈 만한 곳이었지만 겨울에는 폭풍과 강풍에 고립되었다. 역사가 제이슨 굿윈은 그런 상황을 〈10월과 4월 사이에는 산맥과 바다가 밤의 시장들처럼 철시撤市를 하고, 제국도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절반은 동면을 했다〉고 설명했다."(321)


"유목민의 아사비야는 이스탄불, 에디르네, 부르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스크, 궁전, 바자bazaar로 아름답게 꾸며진 그 밖의 장려한 도시들에도 그것은 없었다. 유목민의 아사비야는,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를 지배할 권리를 가지는 칼리프제의 중요성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 정체성의 기반은 천막과 말 그리고 그 왕조를 창시한 오스만의 유목민 뿌리에 있었다. 오토만 술탄들이 수 세기 동안 양립 불가능한 욕구들을 어색하게 조화시키는 방식으로라도 유목민에 뿌리를 둔 자신들의 과거를 드러낸 것도 그래서였고, 그 유목적 과거와의 거리를 더욱 멀어지게 만든 실내 생활을 할 때에도 그 점에는 변함이 없었다. 술레이만 대제만 해도, 오토만의 힘과 광휘가 절정에 달했던 16세기였는데도,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러 온 헝가리 국왕 존 지기스문트를 화려한 궁전이 아닌 장려한 천막 앞에서 맞았다. 이동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는 여전히 유목주의라는 생각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322-3)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 셰이크 사피 앗 딘도 오토만 왕조의 창시자인 오스만만큼이나 출신이 모호했다. 두 사람 모두 스텝 지대의 초원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종족도 튀르크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근래에 아나톨리아에서 이주해온 유목민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14세기 초, 셰이크는 오스만이 오토만의 기치 아래에 추종자들을 결집시키는 사이, 자신만의 아사비야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심신 양면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는 명성에 힘입어 오래지 않아 수피 종단의 창시자가 되었다." "티무르 왕조가 몰락했을 때에는 셰이크의 후예인 이스마일 1세가 서부 이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 아제르바이잔을 아우르는 사파비 왕조를 수립했다. 그다음 세대는 더욱 번창하여, 샤 이스마일의 사파비 왕조 후손들은 유목민 연맹의 지원을 받아, 유목민이 주도하는 새로운 황금기가 페르시아에 도래할 것임을 알렸다."(324)


"1503년에 스무 살의 나이로 카불의 지배자를 자처했던 바부르는, 그곳을 거점 삼아 20대 후반에는 사마르칸트를 포함해 옛 티무르 왕조가 보유했던 중앙아시아의 핵심지대를 장악했다. 그러고 나서 술레이만 대제가 헝가리를 물리치고 부다페스트로 오토만 군대를 진군시킨 해인 1526년, 이제 40대 초반인 바부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완수하기 위해 남쪽의 인도로 군대의 방향을 돌렸다." "바부르는 델리의 성채와 몇몇 무덤 그리고 정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그의 승리를 자축했다. 〈시찰을 마친 뒤 나는 야영지로 돌아와 배를 타고 독주를 마셨다.〉 하지만 바부르가 자기 안의 유목민 기질 때문에 쉴 새 없이 움직였던 것과 달리, 그가 세운 무굴 왕조─몽골Mongol에 어원을 둔 명칭─사람들은 정착을 하고, 라호르, 파테푸르 시크리, 가장 유명한 아그라, 그리고 최종적으로 델리에서,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영국에 의해서 버마로 유배되었던 1858년까지 인도를 지배했다."(328-9)


"18세기가 되자 유목민의 이상과 더불어 아벨에 대한 생각은 배척을 받은 반면, 정상적인 삶은 유럽의 우월감과 지중해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부활한 환상 덕분에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신세계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오는 부가 그런 득의양양한 의식의 조장을 도왔다. 하지만 유럽이 그런 환상을 가지는 데에는 고대 세계의 재발견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은 『고대 예술사』에서, 예술사라면 모름지기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깊숙한 고대 작품에서 시작하여 고대 이집트를 거쳐 고전 그리스에서 정점을 찍는 일련의 순화와 개량의 과정, 즉 단계적 발전을 거치는 연구여야 한다는 것을 사실상 처음으로 제시했다." "빙켈만은 아폴로 신상神像에서 자연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자연 저 너머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오직 마음으로만 창조할 수 있는 이미지에서 나오는······특정한 이상적 형태들〉도 보았다고 했다. 자연 저 너머······.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인간은 그토록 멀리까지 지배력을 수립한 것이다!"(348-9)


"빙켈만과 그의 동료들은 예술의 역사를 물질문화 속에서 골라낸 길로 제시했다. 그들은 18세기 말의 시점에서 뒤를 돌아보며, 유럽에서 독립적으로 등장한 매혹적인 운동, 즉 유럽 르네상스에 대한 개념을 회고적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목민도 포함된 유럽 동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끼친 영향과 자극은 교묘히 가려버렸다. 예술사와 지성사에 대한 이런 선별적 견해는 고속도로 역사와 마찬가지로, 기념물 짓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혹은 아예 짓지 않기로 한 사람, 아니면─고도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스키타이인들의 장신구처럼─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아버렸다. 빙켈만은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가지고, 예술사의 궤적을 순환적 개념이 아닌 선형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개화되었고, 그 개화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럽인이라는 것이 빙켈만의 생각이었다."(350)


"19세기에 페르시아 사람들은 대부분 목축과 무역을 하며 이동하는 삶을 살았다. 오스만 술탄들이 오래 전에 말안장을 장의자와 맞바꾸고, 다수의 궁전과 정자가 있는 성벽 너머에서 나라를 통치한 튀르키예에서도 술탄의 다양한 백성들은 상당수가 유목민으로 남아 있었다. 유목민들은 위대한 카넴-보르누 제국이 붕괴되었는데도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을 가로질러 다녔듯이 무굴 제국의 인도도 누비고 다녔다. 아라비아에서는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라는 유목민 부족장이 자신의 아사비야를 확장하여, 개혁적인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와하브의 지도 아래 새로운 아랍국(사우디아라비아)을 건설했다." "수천만 명의 유목민이 영국 제국에 둘러싸인 세계 속에서 방랑하며 수렵채집 생활을 했다. 그러나 유럽의 예술, 도덕, 문화, 법률은 〈유목민 무리〉를 이길 터였다. 그 현상이 어느 곳보다 선명하게 드러난 곳이 바로, 지금도 계속 울려 퍼지는 신조어, 〈명백한 운명〉이라는 단어를 지어낸 북아메리카였다."(368-9)


"유전학, 심리학, 그리고 여러 다른 학문들은 최근의 연구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직감으로 알고 있는 것, 즉 인류는 〈집단 두뇌collective brain〉라고 불리는 것을 만들어냈음을 밝혀냈다. 〈집단 두뇌〉는, 우리가 가장 성공적이고 진보적이었을 때는, 다양한 집단이 함께 모여 그들의 지식, 역사, 보는 방식을 합체시켰을 때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류 최고의 것들은 협력, 시장과 국경의 개방, 자유로운 이동, 생각과 양심의 자유를 통해서 얻어졌다. 그리고 유목민은 그런 요소들로 가는 최상의 통로이자 그것들의 최고 축적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다시피, 유적 속에서 골라낸 길을 가는 도중에 발견되는 것이 역사의 일부일 뿐이라면, 인간 역사의 또다른 일부는 언제나 경로에서 멀리 떨어진 곳, 자연계에 종횡으로 놓여 있는 오솔길들에 있다. 이 두 가닥이 하나로 엮였을 때에만 우리 역사의 완벽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다양성과 상호 작용의 이점이 드러나는 것도 이 지점이다."(4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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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 (10만부 기념 개정판) - 챗GPT부터 유튜브 추천, 파파고 번역과 내비게이션까지 일상을 움직이는 인공지능 이해하기
박상길 / 비즈니스북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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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인공지능 | 위대한 인공지능, 깨어나다


프로그래밍이란 규칙과 데이터를 입력해 정답을 출력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초기에는 인공지능 또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공지능처럼 작동하기 위해서는 if-then 규칙이라 부르는 수많은 규칙을 사람이 일일이 입력해야 했죠. 기계는 이렇게 인간이 입력한 일만 했습니다. 사람이 모든 규칙을 일일이 입력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 기반은 제법 훌륭하게 작동했습니다. 이 때문에 기계번역을 비롯한 수많은 응용 프로그램도 초창기에는 대부분 규칙 기반으로 구현됐습니다. 그리고 곧 괜찮은 성과를 내리라는 장밋빛 희망으로 가득했죠. 그러나 규칙으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겠다는 시도는 이내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이렇게 인공지능이 암흑기에 빠져든 데는 if-then 규칙의 한계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이 방식이 얼핏 잘 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람이 일일이 규칙을 입력하는 방식은 한계가 분명했기 때문이죠.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에는 제대로 된 추론도 하지 못했습니다. 18-9)


인공 신경망의 초기 모델은 퍼셉트론Perceptron입니다. 퍼셉트론은 1958년 당시 코넬 항공 연구소에 근무하던 프랭크 로젠블랫Frank Rosenblatt이 해군의 지원을 받아 고안해냈습니다. 인간 두뇌는 뉴런이 서로 연결된 상태로 전기신호를 내보내며 정보를 전달한다는 데 착안해, 그와 비슷한 형태로 인공 뉴런이 연결된 구조의 인공 신경망을 구현해낸 것입니다. 1980년대 들어 머신러닝Machine Learning, 우리말로 ‘기계학습’이라고 부르는 알고리즘을 활용하면서 인공지능 분야는 다시 성과를 내기 시작합니다. 머신러닝이란 말 그대로 기계Machine가 스스로 학습하는Learning 방식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이 규칙을 입력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컴퓨터가 데이터에서 스스로 규칙을 찾아냅니다. 더구나 사람이 찾아내지 못하는 규칙도 컴퓨터가 학습을 거쳐 찾아낼 수 있게 되었죠. 변형에 따른 무수한 변칙까지도 데이터를 이용해 모두 찾아낼 수 있게 되면서 규칙에서 벗어난 결과도 추론할 수 있게 됐습니다. 17, 20)


딥러닝은 머신러닝의 일종으로, 머신러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딥러닝은 인간 두뇌의 작동 구조를 본떠 만든 인공 신경망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무수히 많은 뉴런으로 구성되어 있죠. 이를 물리적인 형태로 만들어낸다면 엄청나게 많은 다이얼이 달린 거대한 수학 구조물과 비슷합니다. 각각의 다이얼은 원하는 출력값이 되도록 가중치를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입력 데이터를 넣고 다이얼을 조절하면서 결과물을 확인한 후, 다시 조금씩 다이얼을 돌려 원하는 결과와 최대한 비슷하게 나오도록 조절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다이얼 값을 무작위로 설정하지만 학습을 진행하면서 점점 모든 다이얼이 정답에 가까워지도록 바뀌어갑니다. 모든 데이터가 정답에 가장 가까운 상태를 찾아 더 이상 다이얼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면 비로소 학습이 끝나죠. 데이터가 많을수록 훨씬 더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음은 물론, 다이얼이 많을수록 훨씬 더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는 모델이 되겠죠. 24-5)


제2장. 알파고 | 인간을 능가하는 기계의 등장


1940년대 말,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던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Ulam, 1909~1984 박사는 ‘중성자 확산 같은 복잡한 계산 문제는 차라리 여러 번의 무작위 컴퓨터 실험으로 결과를 관찰하는 편이 훨씬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의 특성상 이 방법에 적절한 암호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마침 울람 박사는 도박을 좋아하던 자신의 삼촌이 몬테카를로에서 도박을 하기 위해 친척들의 돈을 빌려갔다는 사실을 떠올려 ‘몬테카를로’라는 이름을 부여했던 것이죠.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을 도입한 이후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실력은 급상승해 6단의 수준까지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프로기사에게는 4점 이상 접히는 기력에 불과했습니다. 알파고는 여기에 딥러닝을 적용해 실력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킵니다. 두 종류의 인공 신경망을 만들어내는데, 정책망Policy Network과 가치망Value Network이라는 이름의 신경망입니다. 43-4)


먼저 정책망을 살펴봅시다. 정책망은 사람이 만든 기보棋譜를 이용해 학습합니다. 정책망은 약 16만 회의 게임에서 총 3,000만 수를 가져와 학습했습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 정책망 3가지를 만들었습니다. 첫째 망은 바로 앞서 살펴본 사람의 기보를 이용해 학습한 정책망(이하 기보학습 정책망)입니다. 둘째 망은 롤아웃 정책망입니다. 롤아웃 정책망은 기보학습 정책망과 비슷하지만 훨씬 작고 가벼운 망입니다. 훨씬 작게 만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망보다 약 1,500배 정도 빨리 수를 둘 수 있습니다. 즉 첫째 망이 한 번 착점할 시간에 롤아웃 정책망은 1,500번을 착점할 수 있는 거죠. 당연히 성능은 떨어집니다. 첫째 망도 정확도가 57%로 높은 편이 아닌데, 롤아웃 정책망은 고작 24%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계산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탐색을 빠르게 진행할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망은 바로 알파고의 핵심인 스스로 대국하며 강화학습을 수행한 정책망(이하 강화학습 정책망)입니다. 44-5)


또 다른 종류의 망은 바로 가치망입니다. 가치망은 현재 국면에서 승패 여부를 예측하는 망입니다. 확률로 표현해서 50%가 넘는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국면이고, 50%가 넘지 않는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국면이죠. 과연 알파고는 어떻게 족집게 도사처럼 바둑판을 딱 보고 누가 승리할지 알아낼 수 있었을까요? 알파고는 여러 정책망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던 강화학습 정책망끼리의 대국을 활용했습니다. 서로 3,000만 번의 대국을 두게 하고, 각 경기에서 한 장면씩 3,000만 장면을 추출해 해당 국면 이후에 누가 이겼는지를 학습했습니다. 이처럼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지,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지를 확률로 표현한 것이 바로 가치망입니다. 알파고는 고수의 기보로 지도 학습을 진행한 다음, 어디에 돌을 내려놓을지 판단하는 정책망을 만듭니다. 그리고 정책망을 이용해 스스로 대국을 두어 강화학습을 진행한 다음, 승리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내는 가치망을 만들어냅니다. 46-7)


꼼꼼하게 탐색해나가는 알파고도 이세돌과의 네 번째 대국에서는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인 78수를 막아내진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알파고는 왜 신의 한 수를 허용하고 말았을까요? 알파고의 작동 원리를 다시 한번 되새겨봅시다. 알파고의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은 유망한 수를 중심으로 꼼꼼하게 탐색해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확률이 높은 쪽을 향해 더 많이 더 깊게 탐색해나가고 가장 신뢰가 높은 지점에 착수를 하는 원리죠. 하지만 이세돌이 둔 신의 한 수 지점에 착수할 확률을 알파고는 1만 분의 1로 매우 낮게 예측했다고 합니다. 알파고는 설마 그 지점에 둘 줄은 몰랐기에, 충분히 탐색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 지점이 묘수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내지 못하죠. 애초에 탐색을 충분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78수 다음에 대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를 알파고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승률이 높은 지점을 찾아내지 못하고 엉뚱한 수, 이른바 떡수를 남발하면서 급격히 무너졌죠. 51-2) 


제3장. 자율주행 | 테슬라가 꿈꾸는 기계


최근의 자동차는 전자공학에 더 가깝습니다. 이른바 움직이는 컴퓨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죠. 자동차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금의 자율주행차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제어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자율주행차는 소프트웨어의 힘에 의지해 움직입니다. 자율주행차는 베이즈 정리Bayes’ Theorem라는 유명한 공식을 기반으로 운행을 해나갑니다. 베이즈 정리란 18세기 영국의 목사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 1701~1761가 증명한, 확률에 관한 공식을 말합니다. 베이즈 정리는 사전 확률과 사후 확률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순한 수학적 정리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베이즈 정리는 수학 정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학적으로는 매우 간단한 형식에 불과하지만 철학적으로 본다면 놀라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베이즈 정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듭니다. 확률이라는 것은 믿음에 불과(?)할 뿐이며, 세상에는 절대 원칙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의심해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61-2)


자율주행차는 항상 불안해합니다. 자율주행차가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신호들뿐이죠. 자율주행차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합리적으로 판단해 안전한 경로로 주행해야 합니다. 이때 자율주행차의 상황 판단은 수학 문제와 같이 단 하나의 규칙으로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행 중 도로를 살펴보며 가야 할 구간과 가지 말아야 할 구간을 끊임없이 판단해야 합니다. 안전한 구간이라면 안전하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고, 위험 요소를 발견할 경우 위험하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식이죠. 가령 자동차가 위험하다고 확신하는 구간에서 특정 센서가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낼지라도 이미 상당히 위험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위험할 확률은 좀처럼 낮아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안전하다는 신호가 계속해서 유입된다면 다시 위험 확률은 낮아집니다. 이처럼 자율주행차는 여러 가지 신호를 받아 믿음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면서 운전해나갑니다. 64-5)


자율주행차는 GPS 외에도 각 센서의 약점을 보완해줄 다양한 센서를 병행해서 활용합니다. 먼저 레이더RAdio Detection And Ranging, Radar와 라이다LIght Detection And Ranging, LiDAR가 있습니다. 레이더가 전자파를 발사해 반사파를 측정한다면 라이다는 레이저 빛을 발사해 반사되어 돌아오는 것을 측정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빛Light과 레이더Radar의 합성어인 라이다LiDAR죠. 전자파를 이용하는 레이더는 장거리 측정이 가능하고, 물체 내부까지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날씨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죠. 하지만 물체의 거리나 방향, 모양이나 구조는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 빛을 이용하는 라이다는 정확하게 물체를 인식하고 밀도 있게 표현해낼 수 있지만 거친 날씨에 영향을 받고, 장거리 측정은 정확도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라이다의 범위를 넘어서는 구간을 파악하는 방법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처럼 바라보면 되는 거였죠. 바로 카메라였습니다. 65-8)


# 점차 카메라가 레이더와 라이다의 기능까지 흡수해서 구현하고 있다.


제4장. 검색엔진 | 구글이 세상을 검색하는 법


초기 인터넷 광고는 신문 광고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신문 판매 부수에 따라 광고 단가를 매기는 것처럼 사이트에 배너를 노출하고 노출 횟수에 따라 가격을 책정했습니다. 광고에 대한 사용자의 피드백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죠. 그러다 검색엔진이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으로 검색광고를 도입합니다. 이제 항상 동일한 광고가 노출되는 게 아닌 쿼리에 적합한 광고를 매번 다르게 보여주는 타깃 마케팅을 진행하고, 사용자 피드백을 기반으로 광고료를 산정하는 CPC 방식Cost Per Click을 도입합니다. 예를 들어 대도시에 근무하는 30대 사무직 남성이 ‘셔츠’를 검색하면 ‘폴로’, ‘빈폴’ 같은 유명 브랜드를 노출하고, 나아가 온라인 구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합니다. 여기에 더해 검색광고는 경매 방식으로 판매했습니다. 예를 들어 폴로의 광고주가 ‘셔츠’라는 쿼리에 대해 클릭당 1,000원을 제시하고 빈폴의 광고주는 클릭당 1,200원을 제시했다면, 고객들은 단가가 더 높은 빈폴의 광고를 먼저 접합니다. 84-5)


구글은 엄청난 수익뿐 아니라 엄청난 문서를 색인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검색엔진이 인터넷에 있는 문서를 수집하여 검색에 적합하도록 보관하고 있는 것을 색인Index이라고 합니다. 아마 2020년 이후에는 300조 개가 훨씬 넘는 문서를 색인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많은 문서를 대체 어디에 보관하고 있을까요? 구글은 엄청난 양의 문서를 고가의 컴퓨터 몇 대에 저장하는 게 아니라 일반 PC처럼 저렴한 컴퓨터 수백, 수천 대에 나눠서 저장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를 위해 구글 파일 시스템Google File System, GFS이라는 효율적인 분산 파일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덕분에 아무리 큰 파일도 여러 대의 서버에 나누어 저렴한 비용으로 저장할 수 있게 됐죠. 이 방식은 또한 초기 빅데이터 플랫폼의 원형이 되어 이후에 본격적인 빅데이터 플랫폼이 등장하고, 나아가 인공지능의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됩니다. 사실상 지금의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분야는 구글이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85-6)


수학계에 에르되시 수Erdős Number라는 게 있습니다. 전 세계를 돌며 평생을 수학 연구에만 몰두해온 에르되시 팔Erdős Pál, 1913~1996은 평생 1,500여 편의 논문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데, 논문 대부분을 다른 학자들과 공동으로 집필했습니다. ‘에르되시 수’란 에르되시와 몇 단계에 걸쳐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입니다. 그와 직접 공동 논문을 쓴 학자는 모두 512명입니다. 이 512명이 에르되시 수 1이죠. 그리고 이 512명과 함께 공동 논문을 쓴 사람은 에르되시 수 2입니다. 1998년 스탠퍼드에서 박사 과정 중이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문서의 품질을 평가하는 획기적인 알고리즘을 고안합니다. 유명한 사이트가 많이 가리킬수록 문서의 점수가 올라가는 알고리즘으로, 좋은 논문은 인용 횟수가 많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죠. 여기에 에르되시 수가 낮을수록 권위가 높아진 것처럼 권위 있는 사이트에 가중치를 높였습니다. 이 알고리즘의 이름이 바로 페이지 랭크Page Rank입니다. 95-7)


제5장. 스마트 스피커 | 시리는 쓸모 있는 비서가 될 수 있을까


스피커는 스스로 말을 알아듣거나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스피커 자체는 껍데기라는 말이죠. 실제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과정은 음성을 녹음하여 서버로 보내 분석하는 과정이고, 사람에게 말을 하는 기능은 녹음된 음성을 서버에서 받아와 재생하는 것입니다. 스피커는 사실상 마이크가 달린 일종의 블루투스 스피커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음성을 어떻게 서버로 전송할까요? SKT의 NUGU라면 “아리야”, 카카오미니라면 “헤이 카카오”라고 부르면 스피커가 “네?”하고 반응하면서 깨어나죠. 이 과정을 웨이크업Wake-Up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사용자가 질문하거나 요청하면 이를 녹음하여 서버로 전송합니다. 참, 스피커는 껍데기라고 했지만 딱 한 가지 특이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바로 “헤이 카카오” 같은 웨이크업 단어를 알아듣기 위한 음성인식 엔진이죠. 추가 기능 없이 딱 웨이크업 단어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매우 조그만 음성인식 엔진이 스피커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118)


100번의 발화 중 99번을 제대로 알아듣는다면 똑똑한 스피커라고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반대로 100번의 문장 중 99번만 정확하게 생성해낸다면 마찬가지로 똑똑한 스피커일까요? 만약 잘못 생성한 1번의 문장이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해!”라는 문장이라면요? 이런 문제 때문에 ‘생성’ 영역에서는 아직까지 딥러닝의 활용이 조심스럽습니다. 물론 최근에 챗GPT는 이를 다른 방식으로 제어하고 있지만 챗GPT조차도 응답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죠. 게다가 스마트 스피커는 챗GPT와는 조금 다릅니다. 무엇보다 문제해결용 대화시스템Task-Oriented Dialogue System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목적이 분명한 대화만을 주로 한다는 얘기죠. 날씨를 묻거나 레스토랑을 예약하기 위한 대화는 목적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스마트 스피커는 자유로운 대화보다는 목적에 맞는 대화에 방점을 맞추죠. 이 때문에 자유롭게 대화를 생성하지 않고 정해진 템플릿에 정보를 채워서 문장을 생성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합니다. 130-1)


제6장. 기계번역 | 외국어를 몰라도 파파고만 있다면


신경망 기반 기계번역 Neural Machine Translation은 문장 전체를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통째로 번역해서 훨씬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인공 신경망이라는 거대한 모델과 이를 견인할 수 있는 방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신경망이 문장을 통째로 번역하는 과정은 마치 오렌지 주스를 농축한 후 물을 섞어 희석하는 과정과 닮았습니다. 먼저, 문장을 통째로 압축해 숫자로 표현한 벡터(방향과 크기를 나타내는 값)를 만들어 냅니다. 오렌지 주스를 농축하는 과정이죠. 그리고 이 값을 번역할 언어로 옮긴 다음 풀어서 번역문을 만들어 냅니다. 각각의 숫자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번역문을 찾아내는 거죠. 물을 섞어 다시 주스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번역문을 만들어 내면 더 이상 규칙 기반처럼 단어와 단어 간의 관계, 순서, 구조 등을 파악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통계 기반처럼 단어나 구문을 확률로 번역해 조합하고 이 문장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145-6)


어텐션Attention은 더 중요한 단어를 강조하는 원리입니다. 기존에는 입력 문장의 길이에 상관없이 압축한 문장을 항상 일정한 길이의 벡터에 한 번만 담아냈습니다. 하지만 어텐션은 번역문의 단어를 생성할 때마다 출력 문장의 길이에 맞춰 압축 벡터를 생성합니다. 이렇게 하면 번역문이 길어질수록 벡터도 함께 길어지기 때문에 더 긴 문장을 번역하는 데도 문제가 없겠죠. 이전에는 어떤 분량이든 1줄로 요약했지만 어텐션은 5분을 발표할 때는 5줄, 10분을 발표할 때는 10줄로 요약합니다. 무엇보다 어텐션의 핵심은 중요한 단어에 별도로 가중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는 아무런 표시 없이 문장 전체를 통째로 압축했기 때문에 번역할 때 어떤 단어를 염두에 둬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번역의 질이 떨어졌죠. 하지만 어텐션은 압축할 때 매번 다르게 중요한 부분을 적재적소에 표시해둘 수 있습니다. 어텐션을 핵심 알고리즘으로 삼은 트랜스포머 모델은 사실상 모든 기계번역 모델을 대체했습니다. 148-50) 


제7장. 챗봇 | 챗GPT, 1분 안에 보고서 작성해 줘


17세기 이전까지 수학은 크게 기하학과 대수학으로 나뉘었습니다. 원의 넓이 같은 도형의 성질을 다루는 수학이 기하학Geometry이고, 2차 방정식 같이 문자와 수를 다루는 수학이 대수학Algebra이죠. 이전까지는 둘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천장에 붙어 있는 파리를 보고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죠. ‘어떻게 하면 파리가 천장의 어느 위치에 붙었는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데카르트는 좌표Coordinates라는 개념을 고안합니다. 이는 서로 다른 분야로 여겨지던 기하학과 대수학의 개념을 하나로 합쳐낸 혁신적인 발상이었습니다. 데카르트는 좌표의 개념을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 공개합니다. 좌표의 발명은 이후 수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죠. 우스갯소리이지만 인터넷 시대인 지금도 좌표라는 개념은 일상에서 유용하게 쓰입니다. “그 유튜브 동영상 좌표 좀 알려줘”와 같은 식으로 말이죠. 163-4)


미국의 수학자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 1916~2001은 MIT의 대학원생 시절 이진법을 이용해 모든 계산을 할 수 있는 디지털 논리회로의 개념을 고안합니다. 이 논문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석사 논문이라는 찬사를 받았고, 이후 섀넌은 디지털의 아버지로 추앙받습니다. 그의 논문은 이후 정보 이론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탄생시켰고 마침내 세상은 정보통신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섀넌 덕분에 컴퓨터는 0과 1, 단 2개의 숫자로 모든 계산을 해낼 수 있게 되었고, 정보의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우리는 이 단위를 비트Bit라고 부릅니다. 이제 정리해 봅시다. •데카르트의 좌표 덕분에 기하학을 방정식과 숫자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섀넌의 디지털 논리회로와 정보 이론 덕분에 컴퓨터는 모든 정보와 숫자를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현대 수학에서는 좌표를 이용해 추상적인 기하학을 수로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컴퓨터에 계산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죠. 165)


단어를 숫자로 표현한다는 것은 단어가 갖는 의미에서 각각의 특징을 추출해 수치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단어의 의미가 비슷하다는 것을 숫자로 표현한 값이 얼마나 가까운지로 판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이처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을 자연어 처리 분야에서는 언어를 벡터로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벡터는 공학에서 방향과 크기를 나타내는 값인데 마치 기하학을 좌표로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단어의 의미를 벡터로 표현하면 단어가 유사한 정도를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으므로 유사도뿐 아니라 다양한 과제에 응용하기 편리합니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숫자이기 때문에 계산이 쉽죠. 컴퓨터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논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는 계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숫자를 계산하는 일은 컴퓨터가 가장 잘하는 일이죠. 그뿐 아니라 데이터가 많을수록 계산은 더욱 정교해집니다. 게다가 이 과정을 자동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엄청난 이점이 생기겠죠.  165-6)


제8장. 내비게이션 | 티맵은 어떻게 가장 빠른 길을 알까


강남역의 교통 체증을 예측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조건에 따라 분기하는 모델인 의사결정나무Decision Tree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어릴 때 하던 스무고개 놀이와 비슷합니다. 스무고개 놀이란 말 그대로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스무 번 제시하여 정답을 알아맞히는 놀이입니다. 질문의 횟수는 적을수록 좋습니다. 그렇다면 가급적 정답을 빨리 맞힐 수 있는 질문을 제시해야겠죠. 의사결정나무를 구축할 때는 복잡도인 엔트로피Entropy를 낮추는 형태로 진행합니다. 복잡도는 다르게 표현하면 불확실성Uncertainty의 정도라 할 수 있는데요. 즉 엔트로피를 낮춰 덜 복잡하게 하고, 덜 불확실하게 하여 가급적 정답을 빨리 맞히는 것이 의사결정나무의 구축 원리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의사결정나무 모델은 단 한 번의 오류에도 너무 취약합니다. 게다가 예상 밖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므로 온갖 오류가 넘치는 현실의 데이터로는 정확도를 높이기 어렵습니다. 207-10)


버클리대학교의 통계학자 레오 브라이만Leo Breiman, 1928~2005은 2001년에 오류에 견고한 새로운 모델을 제안합니다. 데이터와 특징에 제한을 두고 샘플을 추출한 다음, 여러 개의 의사결정나무를 만들어 각각의 결과를 두고 투표해 최종 결과를 정하는 방식이죠.  이렇게 만들어낸 각각의 의사결정나무는 당연히 단일 의사결정나무에 비해 성능이 훨씬 더 떨어집니다. 데이터와 특징을 제한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런 의사결정나무가 1개가 아니라 10개, 100개가 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데이터의 오류 등으로 일부 의사결정나무가 잘못된 결과를 내리더라도 나머지 나무들이 올바른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오차에 매우 견고해집니다. 무엇보다 이 방식은 대중의 지혜를 발휘합니다. 이 모델의 이름은 랜덤 포레스트Random Forest입니다. 나무를 만들기 전에 데이터를 무작위로Random 추출하고, 나무가 여러 개 모여 숲Forest을 이룬다는 의미죠. 모델의 원리에 잘 어울리는 멋진 이름입니다. 210-1)


통계학에 잔차Residual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오차Error와 비슷한 개념인데, 잔차는 전체에 대한 오차가 아니라 샘플의 오차라는 차이점이 있죠. 오차보다는 훨씬 더 작은 개념으로, 잔차를 줄여나가면 모델을 훨씬 더 정교하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에 통계학에서 여러 모델을 만드는 데 중요하게 쓰이죠. 잔차의 개념을 의사결정나무에도 동일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나무들은 이전과 달리 독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전의 나무에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먼저 의사결정나무를 하나 만듭니다. 그리고 이 나무에서 오류가 발생하면 실수를 바로 잡는 새로운 나무를 만듭니다. 이 과정을 오류를 최소화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잔차를 계속해서 줄여나가는 거죠. 잔차의 기울기Gradient를 줄여나간다고 하여 그레이디언트 부스팅Gradient Boosting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정형화된 데이터를 예측하는 일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머신러닝 모델이 딥러닝보다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212-3)


제9장. 추천 알고리즘 | 알 수 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끌다


데이터 과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전설처럼 회자되는 얘기가 있습니다. 1990년대 미국의 한 슈퍼마켓 체인에서 맥주와 기저귀 간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겁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제품에 대체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알고 보니 수많은 남편들이 퇴근길에 아내의 심부름으로 마트에 들러 기저귀를 사면서 맥주도 함께 구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이후에는 기저귀 근처에 맥주를 진열하기 시작했고 매출을 더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객의 구매 내역을 분석하는 방식을 장바구니 분석Market Basket Analysis이라고 합니다.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죠. 상품 간의 연관성을 분석했다고 하여 연관성 분석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데이터 마이닝Data Mining이라는 학문의 기반이 됩니다. 1993년 당시 IBM에 근무하던 라케시 아그라왈Rakesh Agrawal 박사의 논문은 본격적인 데이터 마이닝 학문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추천 시스템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223)


고객들은 무엇보다 새로운 영상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새로울수록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추천은 더 어려워지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입니다. 추천 시스템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죠. 그래서 뜻밖의 발견Serendipity이 중요합니다. 멋진 영어 단어만큼이나 설레는 표현이기도 하죠. 여기에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것이어야 하지만, 희한하게도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하죠. 다시 말해 나에게 편하고 익숙한 구역 바깥에 있어야 하지만 또 아예 엉뚱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참, 어렵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여기로 이끌었다”라고 자주 감탄하는 것은 그래도 이 2가지 조건을 잘 만족하고 있다는 거겠죠? 친구가 나에게 뜻밖의 영화를 소개해줬는데 너무 만족스러워 하루 종일 즐겁던 기억이 있지 않나요? 추천 시스템의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뜻밖의 발견’으로 설렐 수 있게 앞으로도 추천 시스템은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을 꾸준히 만들 것입니다. 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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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사 - 볼가강에서 몽골까지
피터 B. 골든 지음, 이주엽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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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민족들의 교차로 


"중세와 현대의 〈민족〉들은 보통 여러 종족과 언어 집단이 오랜 시간 융합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었다. 특히 현대에는 적지 않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민족〉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언어가 확산되는 과정은 명확하지 않다. 정복, 대규모 이동, 이에 따른 전면적 민족 교체가 언어 확산의 한 가지 모델이다. 또 다른 모델은 점진적 침투, 상호 영향, 이에 따른 두 언어 상용bilingualism이다. 그런데 새 언어를 전파하는 이주민들 또한 많은 경우 여러 민족과 언어의 융합으로 형성된 집단이었다. 새로운 민족 이동과 함께, 이 집단에서 사용하는 이름과 언어가 릴레이 경주처럼 또 다른 집단에 이전되었다. 따라서 동일한 집단명과 공통 언어를 가진 민족들도 사실은 여러 다양한 민족의 혼합 집단일 수 있다. 민족들의 이동은 복잡한 모자이크를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민족·언어 지도는 수천 년 넘게 이어져온 민족들의 혼합 과정을 한 특정 시점에 찍은 스냅 사진에 불과하다. 민족들의 형성 과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에 있다."(23-4)


1장 유목 생활과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출현 


"기원전 제2천년기 초(약 기원전 1700~기원전 1500년 사이)에 스텝 지역에 거주하던 목축인들 중 일부가 기마민족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이동에 더 잘 적응하는 말과 양이 선호되면서 목축하는 가축의 구성도 바뀌었다. 말이 전체 가축의 36퍼센트를 차지했다. 마력馬力의 활용은 불길한 군사적 결과를 불러왔다. 기마전투술을 발전시킨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은 민족 이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바퀴 달린 수레에 이어 아마 중앙아시아에서 발명된 전차가 등장했다. 기원전 약 2000년경 만들어진 초기 형태의 전차들이 요새화된 정착지였던 신타시타에서 발견되었다. 신타시타는 남부 우랄 스텝 지역에 위치한 신타시타-아르카임 페트로브카 고고유적군에 속해 있다. 잘 발전된 야금술(아마 무기 생산 및 군사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을 보유했던 신타시타는 이 스텝 지역에 존재했던 도시 정착지들의 일부였다. 기원전 제2천년기가 되어 전차는 중국과 중동에 전파되었다."(31-2)


"인도-유럽인 유목민들의 민족 이동 두 번째 단계는 나무, 동물의 뿔과 힘줄로 만든 복합궁compound bow/composite bow의 발명과 연관이 있다. 복합궁은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작고, 가장 중요하게는, 말 위에서 쉽게 모든 방향으로 화살을 쏠 수 있어 스텝 지역에서 전쟁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복합궁은 기원전 제3천년기 초 이집트에서 처음 발명된 듯한데, 그 시점을 기원전 1000년경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기마 전사들이 잘 훈련된 기병대로 발전했다. 이 기병대는 영광을 추구하는 개별 전투원이라기보다 전사란, 훈련된 집단의 일부라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군대였다. 그 결과 전차는 과거의 기술이 되었다. 이에 수반된 철제 무기의 확산을 통해 기마병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스텝 지역의 이웃 유목민들을 약탈 공격 하고 정주 세계의 생산물들을 획득하려 하게 되면서 전쟁은 격화되었다. 이제 전쟁이 더 큰 규모의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거대한 부족연합들이 출현했다."(32)


"유목민들이 정주 세계와 교류하기 위해서는 유목민 집단(씨족, 부족, 혹은 민족)을 대변해줄 자가 필요했다. 이것은 곧 정치 조직을 의미했다. 영구적 국경이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친족 관계가, 그것이 진정한 관계건 〈지어낸〉 관계건 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속력을 제공했다." "유목 세계에서 국가의 존재는 예외적 현상이었다. 유목민들은 중국의 부를 탈취하기 위해 혹은 간혹 이루어진 중국의 무력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를 건설했다. 이러한 외적 자극들은 서부 유라시아 초원에서는 대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의 유목국가들은 예외 없이 동부 유라시아 초원에서 이동해온 국가들이었다. 유목민들은 보통 정주사회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이슬람 이전 시기의 이란과 같은 이웃 정주제국들도 스텝 지역을 정복하려 들지 않았고 이따금 공격했을 뿐이다. 이와 같은 군사 원정은 비용이 많이 들고 또 위험했다. 중국과 비잔티움은 매수, 외교,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선호했다."(38-9)


"초기의 유목민들은 필요한 물품의 교역 활동 외에는 중앙아시아 도시들과의 관계를 꺼렸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더 큰 정치 단위들의 일부로 만든 것은 유목민들이었다. 원래 지리적, 안보적 제약 때문에 유목민들의 가장 흔한 정치 조직은 느슨한 연합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강 사이의 정주 지역]의 오아시스들은 본래 이란어를 사용하고, 독립 성향이 강하고, 국제적이며, 귀족적이고, 상업 중심적인 도시국가들이었다. 각국은 〈동등한 사람들 중 우두머리first among equals〉에 불과했던 군주의 지배를 받았다. 상업 중심적이고 부유했던 도시국가들은 초대륙적 성격의 상업적, 지적 관심사를 반영하는 활기찬 문화를 창출했다. 이 도시국가들은 정치적 지배가 아닌 상업적, 문화적 교환을 추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상인, 관료, 종교인들은 유목제국의 행정과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오아시스 도시국가들과 유목국가들의 이런 관계는 서로에게 이로웠다."(43)


2장 초기의 유목민들: “전쟁은 그들의 직업이다” 


"근동 지역에서 북인도에 이르는 사상 최초의 대大육상제국을 세운 페르시아인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9~기원전 530)가 중앙아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박트리아, 소그디아, 화라즘을 복속시켰으나 기원전 530년 스키타이 원정 중 사망했다. 키루스 2세가 끔찍하게 사망한 후 8년 뒤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 1세Darius Ⅰ(재위 기원전 522~기원전 486)는 그리스는 정복하지 못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는 일부 유목 민족들을 정복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다. 마르기아나(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소그디아, 화라즘, 박트리아 등은 알렉산더 대왕(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23)이 기원전 330~기원전 329년에 중앙아시아를 정복할 때까지 협상을 통해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사트라페이아satrapy' 즉 총독령(지방)이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통치 하에서 이란권 중앙아시아는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잇는 장거리 교역 네트워크에 연결되었다. 교역은 도시 발전과 대규모 수로 시스템에 기반을 둔 농경의 확대를 촉진했다."(58-9)


"흉노는 〈국가〉 혹은 더 나아가 〈제국〉이라고 보통 불렸지만 사실은 부족연합에 가까웠다. 선우는 군사, 외교, 사법, 그리고 이에 더해 제사장 관련 직무를 수행하는 일종의 최고 경영자였다. 선우 밑에는 좌익과 우익에 24명의 〈현왕賢王〉들이 있었고, 또 다른 24명의 수령들이 각각 1만 기의 병사를 거느렸다. 이 〈제국적 연합〉은 유연하고 협의를 통해 기능하는 정치 조직이었으며 부족과 씨족들에게 상당한 자치를 허용했다." "흉노는 자국 지배하의 정주 지역에서 공물을 징수하고 주민들을 노동에 동원했다. 유목민을 상대로 흉노는 매년 가을철에 호구戶口와 그 가축 수를 조사하는 것 말고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유목민 사회의 유연성은 변화하는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빈번한 파벌 싸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앙정부가 정주 세계의 물자를 효과적으로 착취해내는 군사적, 외교적 승리들을 거두어나가는 동안에는 잘 작동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내부 혼란을 발생시켰다."(67-8)


"쿠샨 제국은 그 전성기에 박트리아, 동이란 일부, 동서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일대를 지배했다. 중앙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했던 쿠샨 제국은 여러 문화를 훌륭하게 융합했다. 초기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전통에 따라 그리스어가 공식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 제작된 주화들에는 그리스 문자로 적은 현지의 동이란계 언어였던 박트리아어가 사용되었다. 주로 금 또는 구리로 만든 쿠샨 제국의 주화들은 한 면에는 이란, 인도, 그리스의 신들의 모습이, 다른 한 면에는 통치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주화들과 다양한 신들의 작은 조각상들은 쿠샨 제국 내에서 조로아스터교, 토착 종교,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가 공존했음을 알려 준다. 일부 쿠샨 지배자들은 남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확산된 불교를 후원·장려했다. 불교 사원과 수도원은 이슬람 이전 시기 아프가니스탄의 흔한 풍경이었다. 쿠샨의 간다라 양식은 훗날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전파되었다."(69-71)


3장 하늘의 카간들: 돌궐 제국과 그 계승 국가들 


"흉노와 한의 멸망이 불러온 정치적 혼란기 이후 중앙아시아에 세 강국이 출현했다. 곧 북중국의 타브가츠Tabghach(중국어 명칭, 탁발Tuoba, 拓跋), 몽골 초원의 아바르Avar(중국어 명칭, 유연Rouran, 柔然), 쿠샨 땅의 헤프탈Hephthalites(중국어 명칭, 활Hua, 滑)이다." "이 북위, 유연, 헤프탈은 당시 유라시아 전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유연과 북위 사이의 전쟁은 유목민들의 서진을 불러왔는데, 이러한 민족 이동은 원래 이란어 사용 지역이었던 내륙아시아 초원을 점차 투르크화시켰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에는 중국어로 철륵Tiělè, 鐵勒이라는 투르크계 유목민족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철륵의 한 갈래인 오구르 투르크족은 460년경 흑해 초원에 도달했다. 유연의 아나괴Anagui, 阿那瓌(520~552)는 철륵의 반란과 내분으로 북위에 원조를 청했으나 북위 또한 534년에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런 정치적 혼란 상황은 돌궐 제국Türk Empire, 突厥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79, 83)


# 이 책에서 Türk로 표기된 투르크인은 이 집단명을 사용했던 특정 민족 곧 돌궐인을 지칭한다. Turk와 Turkic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민족을 통칭하는 용어들이다.


"돌궐 제국은 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최초의 유라시아 횡단 국가였다. 돌궐 제국은 행정적으로는 동부[동돌궐]과 서부[서돌궐] 두 개의 카간국으로 나뉘었다. 아시나 가문의 카간들이 두 카간국을 통치했는데 동부의 카간이 서부의 카간보다 정치적으로 더 지위가 높았다. 서돌궐의 군주 이슈테미의 후계자들은 때때로 동돌궐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했다. 그런데 이는 〈적법한〉 행위였던 것이,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유목국가들에선 왕족 구성원 모두에게 권좌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수隋가 581년 패권을 잡으며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나라는 즉시 북방 방어를 강화했으며, 장손성長孫晟과 같은 첩자를 통해 돌궐 궁정 내에 첩자들을 양성하며 아시나 씨족의 내분을 부추겼다. 동돌궐 내부의 분열이 심해지자 서돌궐의 타르두 카간은 동돌궐의 정권마저 장악하고 수년 동안 돌궐 제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의 제국 통치는 아마 수의 사주를 받은 철륵의 반란으로 603년 막을 내리게 되었다."(88-9)


# 동돌궐 : 552~630, 682~742, 서돌궐 : 552~659, 699~766경


"돌궐 제국은 742년 (아시나 왕족이 이끈) 바스밀Basmil 등이 일으킨 피지배 부족들의 반란으로 멸망했다. 이어서 위구르인들이 744년 바스밀을 축출하고 몽골 초원과 신장, 인근 시베리아 지역을 아우르는 위구르 카간국Uighur qaghanate(744~840)을 수립했고, 이후 당나라를 괴롭혔다. 약 80만에 달했던 위구르인들은 토쿠즈 오구즈Toquz Oghuz(〈9개의 친족 집단〉[혹은 〈구성九姓〉])라 불린 동철륵계 부족연합의 맹주였다." "위구르 카간은 [카간의 궁정인] 쾨크 오르둥Khökh Ordung에서 (제국적 야망을 보여주는) 일종의 태양 숭배 의식을 매일 행했다. 위구르 제국의 위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베제클릭Bezeklik(〈그림들이 있는 장소〉)이다. 베제클릭은 77개의 인공 석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5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건설되었다. 이곳에 있는 불교적, 마니교적 테마의 그림들에는 소그디아, 중국, 인도의 미술 양식이 섞여 있다. 발굴의 규모 면에서 학자들은 베제클릭을 〈사막의 폼페이〉라고 불러왔다."(98, 101)


"키르기즈는 [남시베리아 지방인] 투바의 예니세이강 유역에 위치한 강력한 투르크계 혹은 투르크화된 부족연합이었다.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키르기즈인들은 유목-농경 복합사회에서 기원했다. 그러나 유목민이었던 위구르인들만큼 문화적으로 발전된 집단은 아니었다. 키르기즈인들에 대해선 그 초기 역사뿐 아니라 840년과 10세기 초 사이 〈제국 시기〉의 역사 또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키르기즈인들은 오르콘강과 셀렝게강 유역을 국가의 중심부로 삼는 흉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목제국의 전통을 따르지도 않았고 추가적 정복 활동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에 본거지인 예니세이강 지역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중국과 중동과의 교역 관계를 이어나갔다. 당대의 이슬람 지리학자들은 키르기즈인들이 목축에 종사하며 시베리아 삼림 지대의 물품들인 사향, 모피, 특수 목재, 상아로 쓰인 후투Khutu 뿔(땅에서 파낸 매머드의 엄니) 등을 수출했다고 기록했다."(103-5)


"이처럼 권력 공백 상태였던 몽골 초원의 새 주인이 된 것은 몽골어족에 속했던 거란Qitan, 契丹이었다. 거란은 남만주 지역 출신의 수렵민, 덫사냥꾼, 돼지 사육 농경민, 양-말 사육민들로 구성된 강력한 부족민 집단이었다. 한때 돌궐 제국의 지배를 받았지만 거란은 북중국과 만주 지역에 제국(916~1125)을 세우고 중국식 왕조명인 요遼를 국가명으로 채택했다. 거란인들은 몽골 초원을 차지한 후 과거 이 지역을 지배했던 위구르인들에게 재이주를 권하기도 했는데 위구르인들은 정중히 사양했다. 거란은 몽골 초원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한편 중국의 통치에 보다 집중했다. 거란의 통치기에 많은 투르크계 집단이 가혹한 통치와 무거운 세금을 피해 서쪽으로 이주했다. 그 결과 10~11세기 동안 몽골 초원에서는 몽골어 사용 유목민들이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수적으로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제 몽골 초원은 몽골어 사용권이 되었지만, 거란 통치자들은 몽골보다는 중국의 황제가 되는 것을 선호했다."(107)


4장 실크로드의 도시들과 이슬람의 도래 


"7~8세기 아랍의 침공 직전에 트란스옥시아나에는 북부 실크로드를 연결하는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존재했다. 소그디아 도시들인 차즈(타슈켄트), 부하라, 사마르칸드의 서쪽에는 화라즘Khwârazm이 위치했다. 농업, 제조업, 교역의 중심지였던 화라즘은 북부 삼림 지대의 핀-우그리아계와 슬라브계 민족들의 물품들을 중동 지역으로 보내는 전달자 역할을 했다." "당시 소그드인들은 중국에서 크림반도에 이르는 유라시아 일대 교역 거점들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의 상업 세계를 지배했다. 소그드인들은 농민, 수공예인, 상인으로서 기술적, 재정적 전문 지식을 발휘했다. 그 활동 흔적을 일본과 벨기에에서까지 찾아볼 수 있다. 소그드인 공동체의 리더는 '사르타파오sartapao'(중국어 살보sabao, 薩寶)라 불렸다. 사르타파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사르타바하sârthavâha'(대상의 리더)의 차용어다. 이 단어만으로도 우리는 소그드인들이 다중 언어를 사용하는 국제화된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11-2)


"신장에는 북부의 타림분지와 투르판 지역 그리고 남부의 호탄 지역에 또 다른 일련의 오아시스 도시국가 혹은 왕국이 밀집되어 있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초원의 유목 세력과 중국 사이에 끼어 한나라 시기 이후로 불안한 독립 상태 혹은 자치 상태를 누려왔다. 7세기에 중국과 티베트는 이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중국은 카슈가르, 아그니, 쿠차, 호탄을 안서사진安西四鎭으로 삼았다(안서는 〈서역을 안정시킨다〉를 의미한다). 중국은 751년까지 안서사진을 지배했다." "쿠차, 아그니, 코초는 적어도 8세기까지 토하라어를 사용한 주민들이 거주했던 중요한 도시국가들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농업, 목축업, 수공예품 생산에 경제의 기반을 두었고, 식료품, 술, 비단, 직물, 펠트, 옥, 화장품 등을 수출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는 자묵Jamûg 왕실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부하라 군주〉는 낙타 모양의 왕좌를 사용했는데, 이는 분명 대상 무역이 부하라의 경제에서 차지하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5-7)


"소그디아는 광범위한 대외 교류를 통해 국제화되고 아주 세련된 공동체가 되었다. 동시에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을 그 특징으로 했다. 여러 다른 문화의 융합은 소그디아의 종교에서 가장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소그디아는, 중세의 근동 지역 및 유럽과는 대조적으로, 국교가 없었고 여러 다른 종교를 관용했다. 소그드어로 쓰인 마니교, 그리스도교, 불교 서적들은 소그드인들의 종교적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준다. 불교는 여전히 옛 쿠샨과 헤프탈 땅에 널리 퍼져 있는 종교였으며, 아무다리야강(옥수스강) 숭배 신앙 등 여러 토착 신과 여신을 숭배하는 종교들과 공생하고 있었다." "소그디아에는 불교와 토착 종교들 외에도 예수의 인성人性을 강조하는 네스토리우스파[경교景敎]가 전파되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교도들은 소그디아 지방에서 이슬람교도들 다음으로 가장 성공적인 종교 공동체가 되었다. 소그드인 상인들은 다른 종교의 경우에도 그랬듯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 역할도 수행했다."(118, 121, 125-6)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이루어진 아랍-이슬람 제국의 정복 활동은 종교적 열정, 영토 욕심, 전리품, 제국의 심장부에서 심화되던 내부 갈등을 밖으로 돌리기 등 다양한 동기에서 비롯했다. 〈(옥수스) 강의 건너편〉을 의미하는 마와라안나흐르Mâ warâ'an-nahr는 [그리스어 지명] 트란스옥시아나를 아랍어로 번역한 명칭이다. 아랍인들의 마와라안나흐르 침공은 예언자 무함마드Muhammad(632년 사망)의 계승자들이자 팽창 중이던 이슬람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우마이야조Umayyad 칼리프들(재위 661~750)이 전개한 아랍 정복 활동의 일환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여전히 눈독을 들이던 두 제국인 이슬람 제국과 중국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소그드인 도시국가들 사이에 발생한 권력 투쟁이 계기가 되어 751년에 당과 카를룩 동맹군은 카자흐스탄의 탈라스강 근처에서 이슬람 군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서돌궐-투르게슈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카를룩이 이슬람 제국 편으로 돌아서면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했다. "(26, 130)


"아랍 군대의 승리에 이어 755~763년의 내란[안사安史의 난]으로 중국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철수하자 이슬람교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적 종교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다음 몇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의 이란어 사용 도시민의 대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교가 옛 종교들과 혼합되기도 했다. 이슬람교 개종자들은 옛 관습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정복이 개종의 토양을 마련해주었지만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보통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영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동기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상업 마인드를 가졌던 소그드인과 화라즘인 상인들은 팽창하는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자신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다. 새로 수립된 압바스 칼리프국Abbâsid Caliphate에서 페르시아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이란계 주민들이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됨에 따라 그리고 9세기에 비非아랍계 이슬람교도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향상됨에 따라 이슬람교로의 개종이 늘어났다."(130-2)


5장 초원 위에 뜬 초승달: 이슬람과 투르크계 민족들 


"하자르 카간국의 왕가는 서돌궐의 아시나 혈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자르 카간국과 아랍 칼리프국은 코카서스의 지배권을 놓고 (640년대와 737년 사이에) 장기전을 치렀고 그 결과 북코카서스에 양측의 국경이 형성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은 중세 세계의 최대 상업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발트해와 북유럽 삼림 지대에서 카스피해를 거쳐 이슬람 세계로 들어오는 물품들의 주요 통로인 볼가강 루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자르 카간국은 비잔티움 제국과 자주 동맹 관계에 있었고, 복잡한 삼각관계 속에서 콘스탄티노플과 바그다드와 정치적·경제적으로 교류했다. 하자르 카간은 8세기 말과 9세기 초 사이에 유대교로 개종했다. 많은 수의 하자르 지배 가문 인사도 카간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했다." "하자르 카간국에는 일상적 통치 활동을 위임받은 부副카간이 있었다. 현지의 이슬람교도 중에서는 국가의 재상도 배출되었다. 이 재상과 신성한 카간들의 호위병들은 화라즘 출신의 거주민들이었다."(141-2)


"십중팔구 (아프가니스탄) 토하리스탄 출신의 이란인들이었을 사만 일족은 우마이야 왕조 시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한 지방 영주들의 후예들로, 9세기 초에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지배 세력으로 부상했다." "사만 왕조는 이슬람의 확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들의 지배적인 종교였던 이슬람교는 초원 지역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사만 왕조 출신의 중앙아시아 학자들은 이슬람 문화와 세계 문화 발전의 주요 공헌자였다. 사만 왕조는 아마 옛 불교 교육 기관을 모델로 삼은 이슬람교 대학인 마드라사madrasa들을 세웠으며, 근동 지역으로 보내질 투르크인들을 이슬람교도로 양성하는 관료 기구들과 관리 전통들을 확립했다. 사만 왕조는 소그드인 무역 도시들의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대륙 횡단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동이슬람 세계의 리더였다. 사만 왕조의 주화들은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에서도 상당량이 발견되었는데, 국제무역에서 사만 왕조가 지녔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143, 147-8)


"카라한 왕조는 여러 투르크계 부족을 지배하며 1005년에 사만 왕조를 멸망시켰다. 수니파 이슬람교도들이었던 까닭에 카라한인들은 사만 왕조의 도시들을 점령했을 때 대중의 저항에 직면하지 않았다." "카라한 왕조의 귀족들은 유목 생활 혹은 반半유목 생활을 영위했다. 그 다수는 봉직의 대가로 토지 기반 조세 수입인 이크타iqta'를 지급받았는데, 유럽의 봉지fief, 封地와 어느 정도 유사했다." "10세기 후반기에 또 다른 투르크-이슬람계 국가가 출현했다. 세뷱 티긴Sebük Tigin은 사만 왕조로부터 독립해 가즈나 왕조(977~1186)를 수립했다. 가즈나 왕조는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를 필수 자원으로 활용한 최초의 이슬람 세력이었다. 코끼리 부대는 이란계 관료들과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들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이란계와 인도계 주민들이 피지배층을 이루는 복합적 국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쟁 무기였다. 가즈나 왕조의 이와 같은 복합적 국가 형태는 훗날 등장할 여러 국가의 원형을 이루었다."(151-4)


"11세기에 중동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의 시조는 오구즈 부족연합에 속한 키닉 부部의 수령 셀주크Seljük였다. 985년경에 그는 시르다리야강 연안의 잔드에 자리 잡고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시아파 부야Buyid[부와이흐Buwayh] 왕조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압바스 왕조는 1055년에 셀주크인들에게 바그다드로 와서 자신들을 해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셀주크인들은 압바스 왕조의 요청에 응했고 그 결과 수니 이슬람 세계의 맹주로 부상했다. 1071년에 차그리의 아들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재위 1063~1072)은 아나톨리아 동부의 만지케르트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투르크계 부족민들이 비잔티움령 아나톨리아로 몰려들었다. 이는 룸Rûm[로마] 셀주크 술탄국과 뒤이어 오스만 제국이 세워지는 토대가 되었다. 오구즈인들이 아나톨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투르크화된 형태의 이슬람교가 그리스도교 지역이었던 소아시아 지역으로 서서히 침투하기 시작했다."(158-61)


6장 몽골 회오리바람 


"몽골 제국의 종교적 관용성은 때로는 과장되었지만, 각 종교 성직자들의 주된 의무는 몽골 칸들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 기도하는 일이었다. 종교적 관용은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 제국을 통치하는 데서 보다 현실적인 정책이기도 했다. 칭기스 일족은 인재를 스카우트하는 데 재능이 있었다. 모든 정복지에서 몽골 제국 관리들은 제국의 경영에 도움이 될 기술을 보유한 인력을 식별해냈다. 이러한 인력들도 전리품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된 몽골 제국에서 언어적 재능을 보유한 사람들은 특히 우대되었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아는 재능이 있으면 확실히 등용될 수 있었다. 중국어 구어口語를 할 줄 알았던 쿠빌라이는 언어 소통의 중요성을 인식해 1269년에 티베트 승려인 파스파'Phags-pa에게 몽골어, 중국어, 그 외 몽골 제국의 다른 언어들을 다 적을 수 있는 알파벳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쿠빌라이의 노력에도, 이 파스파 문자는 몽골 제국 내에서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187)


"몽골인들은 충성스럽고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내려 했다. 칭기스 칸과 그의 후손들은 천체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 (그리고 아마 통제할 수 있는) 전문가들을 열심히 찾았다. 한화된 거란인이었던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칭기스 칸과 우구데이를 섬겼는데 처음에는 천문학자와 기상학자로서의 재능을 발휘해 대칸의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몽골 제국의 대역사가 라시드 앗딘Rashid ad-Din(1247~1318)은 '야다타슈yadatash'를 능히 다루었던 한 캉글리-킵착 부족민에 대해 기록했다. 야다타슈는 중앙아시아의 투르크계 유목민들에게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의 돌이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이 우석雨石은 여름에도 눈보라를 일으킬 수 있었다. 외국인 전문 인력들은 초기 칭기스 일족이 가졌던 조금 더 파괴적인 성향을 일부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다. 야율초재는 우구데이 칸이 북중국의 농경지를 유목민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려 하자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더 이득이 된다고 설명하며 이를 만류했다."(187-8)


"몽골 제국의 팽창 정책은 동남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몽골 제국의 남중국 정복은 타이Tai계 주민들을 파간의 버마 왕국으로 이주하게 만들었다[여기서 〈버마 왕국〉은 당시의 파간 왕국Pagan Kingdom으로, 오늘날의 미얀마를 말한다], 1283년부터 1301년까지 몽골군은 정기적으로 파간을 공격했고 1287년에는 일시적으로 파간을 점령했는데, 이는 추가적 인구 이동을 불러왔다. 몽골군은 오늘날의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지역도 침공했는데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자바의 마자파히트Majapahit 왕국은 몽골군의 도움을 받아 1293년에 수립되었는데 곧바로 몽골군을 몰아냈다. 이후 마자파히트 왕국은 서유럽에서 수요가 컸던 향신료의 주요 공급자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그리고 지리적으로 연결된 육상제국이었다. 몽골 제국은 1250~1350년 사이에 국제 교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초기의 〈세계체제world system〉를 태동시켰다. 몽골 제국은 근대 세계의 선구자였다."(192-3)


7장 후기 칭기스 왕조들, 정복자 티무르, 그리고 티무르 왕조의 르네상스


"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치며 그때까지 이란어를 사용해오던 많은 주민은 투르크어를 채택했다. 이러한 언어의 투르크화 현상은 6세기부터 진행된 과정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드 같은 도시들에서는 계속해서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 두 언어가 상용되었다. 페르시아어(타직어)는 상류층 문화와 정부의 언어로서 지위를 계속 유지했지만, 문학의 영역에서까지 갈수록 더 투르크어와 공존해야 했다. 결국 투르크어는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에서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언어가 되었다. 몽골 제국은 의도적으로 투르크계 유목민들을 재편해 그 소속 부족들을 해체하고 이들을 칭기스 일족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몽골 제국이 쇠퇴하자 부족 혹은 부족 형태의 집단들이 재등장했는데, 그 중 일부는 칭기스 혈통의 리더나 다른 유력 인사들의 이름을 집단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새롭게 등장한 집단들이 전통적 친족 관계보다는 '알탄 우룩'(황금 씨족) 즉 칭기스 일족에 대한 충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197-8)


"차가다이 올루스는 여러 부족과 칭기스 일족이 이끄는 군사 집단들로 구성되어 서로 동맹을 맺거나 싸우면서 극심한 혼란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바로 여기서 유럽에서는 타메를란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티무르가 권좌에 올랐다." "그러나 칭기스 일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티무르는 칸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티무르는 칭기스 일족을 꼭두각시 군주로 추대하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칭기스 가문 출신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는 '쿠레겐Küregen'(몽골어 '쿠르겐kürgen', 〈사위〉)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데 만족했다." "티무르의 일차적 목표는 차가다이 울루스 내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이 불안정했던 만큼 강력한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활동 기회를 줌으로써 병사들의 충성을 유지했다. 이것은 티무르가 끊임없이 병사들을 전쟁과 약탈전에 동원해야 했음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이유에서 티무르는 군사 원정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았다."(203-5)


"화약의 시대가 중앙아시아에 도래했고 티무르는 이러한 새로운 전쟁 도구들의 추가적 확산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대체로 새 화약 무기들을 도입하는 데서 적극적이지 않았다. 화약 무기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는 화기의 신뢰성과 정확성이 훈련받은 궁수의 그것들을 따라가지 못했던 까닭이다. 처음에 대포는 빠르게 움직이는 기병을 상대로 별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명나라의 총포는 에센 칸이 이끄는 오이라트 군대를 상대로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화약 무기들은 몽골군의 위협을 막아내는 데서 무력했고 그 결과 명이 화약 무기의 효능을 믿지 않았던 터라 중국의 무기 개발이 지연되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수록 더 명중률이 높아진 화약 무기로 무장한 보병은 궁기병弓騎兵보다 더 우수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15세기 후반이 되면 유목민들은 더는 화약 무기로 방어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225)


8장 화약의 시대와 제국들의 출현 


"카자흐인들의 아불 하이르 칸으로부터의 독립은 투르크권 칭기스 세계가 재편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470년경, 자니벡과 기레이가 이끄는 카자흐 부족들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지역에 자리 잡으면서 강력한 부족연합으로 통합되었다. '카작Qazaq'이라는 이름은 원래는 [〈자유인〉 〈방랑자〉 〈약탈자〉 등을 지칭하는] 사회정치적 용어였으나 이제는 민족 명칭이 되었다[카작을 러시아어로 발음한 것이 카자흐다]." "카자흐인들의 압박을 받은 아불 하이르 칸의 손자 무함마드 시바니Muhammad Shîbânî와 그를 따르는 우즈벡인들은 1500년에 트란스옥시아나로 진입해 티무르조 정권들을 몰아냈다. 시바니 칸의 주적 중 한 명인 바부르Babur는 그를 피해 인도에 새 거점을 마련해야 했다." "우즈벡인들은 트란스옥시아나를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으로 변모시켰다. 그들은 이전부터 트란스옥시아나에 거주해온 투르크인과 이란인 집단 사이에 정착해 이들과 함게 복잡한 언어와 문화 계층을 이루었다."(230-2)


"바부르는 1512년에 [우즈벡인들로부터] 도주해, 처음에는 아프가니스탄의 카불로, 그다음에는 인도로 간 티무르 일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Lodi dynasty를 멸망시키고 인도에 무굴 왕조Mughal dynasty(1526~1858)를 세웠다. 바부르(재위 1526~1530)와 초기의 무굴 황제들은 인도를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이전에 머물 임시 피난처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트란스옥시아나 탈환 시도들은 실패했다. 그럼에도 무굴인들은 문화적으로 자신들의 본향을 지향했다. 무굴 통치자들은 18세기 초까지도 여전히 차가타이 투르크어로 교육받았다. 페르시아어는 중앙아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부와 상류층 문화의 언어로 사용되었다. 무굴인들은 우즈벡인들과 경쟁 관계를 이어갔으나 인도의 무굴 제국은 계속해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군인, 관료, 지식인들을 받아들였다.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인도에 남은 반면, 어떤 중앙아시아인들은 잠시 머물며 기후와 음식에 대해 불평하고, 부를 쌓은 뒤 인도를 떠났다."(233)


"1552년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Ivan Ⅳ〈뇌제the Terrible, 雷帝[그로즈니]〉(재위 1533~1547, 러시아의 차르 1547~1584)는 카잔 칸국을 정복했다. 카잔 칸국의 주민들인 무슬림 불가르-타타르인, 우랄 지방의 바시키르 부족민, 볼가 지방의 관계 민족들 모두 러시아의 속민이 되었다. 이반 4세는 1556년에는 아스트라한 칸국Astrakhan Khanate을 손에 넣었다. 수 세기 동안 투르크계 민족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볼가-우랄 지대가 러시아의 영토가 된 것이다. 1547년부터 '차르tsar'(황제) 칭호를 스스로 사용해온 이반 4세는 볼가강 유역의 칸국들을 정복한 후에는 비잔티움 황제들과 몽골 칸들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는데, 이것은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선언이었다. 러시아는 이반 4세의 정복 활동을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 전쟁으로 묘사하는 한편 무슬림 타타르인들을 그리스도교로 집단 개종시키려 했다. 17세기가 되면 러시아인들은 이들 지역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234-5)


"만주인들은 1644년에 명을 패퇴시키고 중국 지배를 확고히 한 후 몽골, 시베리아, 이슬람권 중앙아시아의 변방 지역으로 진출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서부 초원 지대로부터 중앙아시아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두 제국은 시베리아에서 맞닥뜨렸다. 러시아는 교역을 원했고, 청은 북방 변경 지대의 정치적 안정을 원했다. 청과 러시아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Treaty of Nerchinsk(1689)을 통해 국경 문제를 다루었다. 1727년 체결된 캬흐타조약Treaty of Kiakhta으로 러시아와 청의 국경이 확정되었고, 셀렝게강 연안의 캬흐타가 두 제국 간 국경 무역 도시가 되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이슬람권 중앙아시아를 북쪽과 서쪽에서 에워싸고 있었다. 러시아 제국의 남은 장애물인 초원의 유목민들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서로 대립하던 몽골 집단들은 국내의 경쟁자와 중국을 상대하기 위해 갈수록 더 러시아의 지원이 필요해졌고, 이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238-9)


"러시아는 변경 지역을 위협하는 무슬림 크림 타타르인들과 노가인들을 상대하는 데 불교도 칼믹인Kalmyks들[서西오이라트인들]을 활용하기로 했다. 1655년에 칼믹인들은 러시아의 차르에 충성을 서약했지만, 양측은 이들 사이의 협약을 다르게 해석했다. 러시아인들은 칼믹인들을 속민으로 간주하며 차르가 소환할 경우 칼믹인들이 자신들과 같이 싸워줄 것이라 기대했고, 칼믹인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의 〈동맹자〉라 여겼다. 러시아는 1660년대 들어 더 지배적인 파트너가 되었다. 동방으로부터 더 많은 오이라트 집단이 러시아의 지원하에 칼믹인들의 최고 통치자가 된 아유키 칸Ayuki Khan(1669~1724)의 휘하에 합류했다. 러시아는 아유키 칸에게 화약 무기들을 제공했는데 그 덕분에 칼믹 군대는 크림 타타르인들과 (간접적으로는 크림 칸국의 상전국 격인 오스만 제국과] 여타 유목민 적들을 상대로 아주 중요한 친러시아 동맹군이 될 수 있었다. 동쪽에서는 오이라트계 준가르인들이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253-4)


9장 근대 중앙아시아의 문제들


"비록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재정러시아 황제, 재위 1582~1725]의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시도는 재앙으로 끝났지만, 러시아는 1740년 우랄 지방의 바시키리아를 정복한 후 초원 지역 안으로 요새들을 건설해나갔다. 이는 아주 심각한 문제였던 노예 포획을 노린 유목민들의 약탈 공격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육상 무역에서 중간 상인이 되는 것 또한 러시아의 목표였다. 당시 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풍부한 금광에 대한 소식도 러시아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예카테리나 대제[예카테리나 2세, 재위 1762~1796]는 기존의 반反이슬람 노선을 수정했다. 그녀의 전임자인 옐리자베타[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는 카잔 지역에 있는 모스크 536개 중 418개를 파괴하고 이슬람의 선교 활동을 금지했었다. 예카테리나는 이슬람교를, 카자흐인들을 처음에는 선량한 이슬람교도로, 다음에는 선량한 시민으로, 궁극적으로는 선량한 그리스도교로 만들어줄 〈문명화civilizing〉 도구로 보았다."(270-1)


"1822년에서 1848년 사이에 러시아는 카자흐 주즈들을 합병하고, 칸들을 폐위시키고, 카자흐 부족들을 여러 다른 지방 행정 구역에 두었다." "부하라는 1868년 6월에 러시아 보호국이 되었고, 러시아가 종교전쟁의 발생을 염려한 까닭에 전면적 병합은 면했다." "히바 칸국은 1873년에 러시아의 보호국이 되었다. 코칸드 칸국은 1876년 러시아에 간단히 병합되었다." "러시아가 서유럽과 거의 같은 크기의 이 [중앙아시아] 영토를 획득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마 [러시아 쪽에서는] 1000명 정도가 실제 전투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약하고 분열된 적들을 상대로 러시아 장군들은 기술적, 수적 우위를 누렸다. 19세기 말이 되면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인구보다 많은 약 2000만 명에 달하는 이슬람교도들을 속민으로 두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는 새로 편입된 무슬림 주민들의 충성심뿐 아니라 다른 비非정교회 그리스도교도들과 유대교도 신민들의 충성심 또한 확보하지 못했다."(271-3)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인들을 분열된 상태로 남겨두고 민주주의와 같은 〈유해한〉 근대화 사상으로부터 차단시키려 했다. 다른 비非러시아인 신민들과는 달리 중앙아시아인들은 징집하지도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인들이 군대에서 근대 전쟁과 무기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아시아인들의 변화를 막기 위해 전제주의 차르 정부는 종종 더 보수적인 지배층 인사들 및 울라마와 손을 잡았다. 울라마는 비이슬람적이라는 이유에서 심지어는 공중위생의 개선 시도들도 반대했다. 이런 정책들은 중앙아시아의 후진성을 더 영속시켰다. 새로 정복되고 합병된 민족들은 〈이노로드치inorodtsy, (외래인aliens)〉로 지칭되었다. 이노로드치는 속민이되 국민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러시아는 천연자원을 수탈하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유럽 지역 출신의 러시아인과 비러시아 주민들은 종종 옛 〈토착〉 소도시들을 기반으로 발전한 도시들에 정착했다."(276-7)


"1923년경에 이르러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굳혔다. 이전에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민족nationality〉이 아닌 왕조를 중심으로 존재했다 이제 소련USSR은 자신의 통치 목적에 부합하게 국경선을 긋고 민족국가들을 창조해냈다." "그 후 소비에트 정부는 각 공화국에 맞추어 민족들을 창조해냈다. 그러나 근대화 추진자들을 제외하고는 〈민족〉 개념을 가진 중앙아시아인은 거의 없었다.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민족 구성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모든 소비에트 민족은 자의적인 정치적 결정에 따라 규정되었으며 이는 민족지학과 언어학 연구들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이런 점에서, 소련의 민족 정책은 거대한─그리고 대체적으로 성공한─사회공학 및 민족공학 프로젝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소비에트 정체성에 있어 중요한 지표는 언어였다. 결과적으로 근대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기원, 형성, 계통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갖는 논쟁거리가 되었다."(2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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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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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인간에게 남겨진 ‘골든 아워’


현재 인공지능, 특히 AGI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특히 실리콘밸리 빅테크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바로 인공지능이 AGI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 인간이 멍청해서 풀지 못했던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거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생산성이 무한히 늘어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두바이 왕자 만수르처럼 살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AGI를 최대한 빨리 만들어야 하고, AGI를 향하는 길에 걸림돌, 특히 국가 규제 같은 것들을 다 없애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지입니다. 예를 들어 일론 머스크Elon Musk, 피터 틸Peter Thiel,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같은 이들이 이런 주장을 내놓는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AGI가 인간에게 가져다줄 장기적 혜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단기적 사회, 경제, 정치적 문제에 너무 집중해서는 안 된다는 이런 주장을 보통 효과적 가속주의Effective Accelerationism(e/acc)라고도 부릅니다. 8)


기술을 무한히 발전시키면 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e/acc 지지자들과는 달리, 장기적 인공지능의 혜택은 동의하지만 동시에 인공지능 안전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는 주장을 효과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EA)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EA와 e/acc 지지자들 모두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믿는 철학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공지능 시대에는 기술을 지배하는 자가 동시에 사회와 정치도 지배해야 한다는 기술봉건주의Technofeudalism입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시점은, AGI가 아직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극히 짧은 ‘골든 아워’일지도 모릅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고, 논의는 이미 실존적 위기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답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습니다. 이 골든 아워가 지나고 나면, 생각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 우리는 미래와 마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9-10)


1장. 모자이크 모멘트


최근 인공지능에 대해 쏟아지고 있는 폭발적인 관심은 2022년 11월, 챗GPT가 등장하면서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인공지능의 역사는 정말 오래됐습니다. 1956년에 처음 제안됐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 동안 인공지능은 그저 SF적인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챗GPT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인간은 기계와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챗GPT를 ‘모자이크 모멘트Mosaic Moment’라고도 평가합니다. 1990년대 초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p(WWW)을 제안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아는 웹 페이지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1993년에 처음으로 인터넷 브라우저가 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 최초의 브라우저를 모자이크Mosiac라고 불렀습니다. 모자이크는 지금 우리가 아는 모든 인터넷 브라우저의 조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서 따와서 모자이크 모멘트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인공지능의 역사에서는 챗GPT가 바로 거기에 해당합니다. 12-3)


인공지능은 〈터미네이터〉 같은 SF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했지만, 60년 동안 오로지 실패만을 반복해 온 분야입니다. 덕분에 2000년대 초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는 게 일종의 금기taboo처럼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다 2010년대에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의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 교수가 이미 실패한 기계 학습 방법을 다시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나 기계 학습이라는 단어를 쓰는 대신에 이름을 바꿨습니다. 심층 학습Deep Learning(딥러닝)이라고 리브랜딩한 겁니다. 사용한 방법 자체는 과거와 똑같은 방법이었는데 어떻게 성공했을까요? 세 가지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알고리즘이 개선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컴퓨터가 더 빨라졌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세 번째, 199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데이터가 많아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지금은 이걸 스케일링scaling의 문제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16)


우리가 보통 구글과 페이스북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건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단순한 데이터는 우리도 얼마든지 수집할 수 있습니다. 구글과 페이스북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정답이 포함된 데이터입니다. 그럼 그 데이터는 어디서 얻었을까요? 다 우리가 준 겁니다. 지난 20년 동안 열심히 고양이 사진 찍고 ‘고양이’라고 라벨링해 줬지요. 라지 스케일이 중요한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정답과 오답의 차이, 예를 들어 ‘고양이 빼기 강아지’ 같은 값을 계산한 다음, 이 값을 거꾸로 보냅니다. 이 방법을 역전파backpropagation라고 부릅니다. 미적분인 체인 룰chain rule을 사용해서 한 층씩 뒤로 가면서 저 가중치들을 계속 바꿔주는 겁니다. 어떻게 바꾸냐면, 정답과 오답의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요.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연결고리 값들이 정답과 오답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최적화됩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학습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2-3)


학습이 완성되면 가중치를 확정합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메타가 라마LLaMA3이나 라마4의 웨이팅 매트릭스weighting matrix를 공유한다는 건, 연결고리 값들의 가중치를 공유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정답이고, 이것만 있으면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는 테스팅을 할 수 있습니다. 보통 테스팅을 추론infer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계에서 처음 보는 고양이나 강아지 사진을 넣으면, 이미 이 인공신경망의 가중치들이 최적화됐기 때문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대부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데이터만 넣어주고, 기계가 학습을 통해서 사실상 스스로 규칙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규칙과 데이터의 관계를 뒤집었더니 50년 동안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풀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바로 기계가 찾아낸 규칙을 우리 인간이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23)


2장. 생성형 AI의 출현


처음에 인공지능을 통해 풀고자 했던 두 가지 문제가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과 언어를 이해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세상을 알아보는 기술은 학습 기반 인공지능을 통해 드디어 해결됐지만, 이 기계는 여전히 인간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언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생성형 AI’라는 두 번째 혁신이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언어 문제가 해결되니까 나머지 문제들도 덩달아 해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인 우연이 발생합니다. 바로 엔비디아NVIDIA입니다. 엔비디아는 병렬 처리를 아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반도체 구조, GPU를 제안했습니다. 예전에는 모델을 키우고 싶어도 계산이 몇 달 걸리니까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이제 몇 시간 만에 계산이 끝나니까 욕심이 나게 됩니다. 인공지능에서는 스케일을 키우면 문제가 풀리게 됩니다. GPU가 등장했기 때문에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킬 수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결정적인 해답이었던 겁니다. 28)


그런데 동일한 방식을 언어에는 쓸 수 없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죽느냐 사느냐”라는 유명한 문장을 생각해봅시다. 그림에서는 픽셀 간에 인과관계가 없어서 독립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문장은 다릅니다. 문장을 구성하는 각 단어는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단어와 단어 간에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장을 이해할 때는 그 문장의 첫 번째 단어를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맨 마지막 단어까지 들은 다음에야 순서대로 처리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라는 것은 병렬 처리가 불가능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병렬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즉 GPU를 못 쓴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GPU를 못 쓴다는 건 모델을 키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말이란 시간 축 데이터입니다.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행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찾아야 했던 건, 긴 시간 축 데이터에서 뒤죽박죽으로 얽힌 인과관계를 확률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이었습니다. 29-31)


모든 단어는 숫자로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가령 한 언어에 단어가 5만 개 있다고 치면, ‘교수’ 근처에 그 5만 개 단어가 등장할 확률을 다 계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수’는 5만 차원 벡터로 표현이 가능해집니다. 단어가 5만 개면 차원이 5만 개가 되는 겁니다. 이 방식을 우리는 임베딩embedding이라고 합니다. 챗GPT 같은 경우, 모든 정보가 임베딩됩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단어를 임베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다음에는 뒤죽박죽 얽힌 단어들의 의미, 관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특정 단어가 등장할 때 가장 자주 동시에 등장하는 단어들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단어의 순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어가 등장하는 주변 단어들, 그러니까 ‘문맥’이라는 걸 깨달은 것입니다. 이 방법을 집중 스코어attention score라고 부릅니다. 문장이 있으면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그걸 계산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게 트랜스포머 알고리즘Transformer Algorithm입니다. 32-3)


챗GPT의 GPT는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약자입니다. G는 생성형Generative, P는 사전 학습Pre-trained, T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입니다. 이 기계는 인간이 쓴 모든 문장을 기반으로 트랜스포머를 사용해서 뒤죽박죽 얽힌 인과관계를 집중 스코어를 통해 다 계산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단어 다음에 무슨 단어가 나와야 할지 예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집중 스코어 관계를 학습한 걸 우리는 거대 언어 모델Large Language Model(LLM)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LLM은 계산량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챗GPT가 중요한 역할을 한 이유 중 하나는 약간의 트릭을 써서 GPU로 이 계산을 할 수 있도록 알고리즘을 개선했기 때문입니다. 병렬 처리가 가능해진 것이지요. GPU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바로 모델을 계속 키울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전에는 CPU로 계산해야 해서 모델을 키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GPU를 사용해 드디어 모델을 키울 수 있게 되면서, 온갖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습니다. 33-4)


GPT에게는 문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엄청나게 많은 문장을 입력하고 트랜스포머로 규칙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우리도 찾지 못한 규칙을 찾아버렸습니다. 그 규칙이 인공 신경세포 1,350억 개 사이의 연결고리로 표현되다 보니, 우리 인간은 어떻게 이 규칙이 이루어져 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GPT가 찾아낸 이 연결고리들이 언어의 규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 인간도 이해하지 못한 세상의 규칙을 이 기계가 스스로 찾아버린 것입니다. 트랜스포머는 우리도 몰랐던 규칙, 모든 조합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는 강력한 방법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데이터가 있는데, 10년 전부터 인식형 인공지능으로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은 트랜스포머로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시켰더니, 새로운 데이터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을 생성형 AIGenerative AI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35-6)


이제 우리는 생성형 AI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로드맵은 뻔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은 에이전트 AIAgent AI입니다. 지금까지의 LLM은 사람이 물어보는 것에 대한 대답만 했습니다. “여름에 이탈리아 가고 싶어, 비행기표 알아봐” 하면 AI가 “지금 알아보겠습니다”하고 끝내는 게 사용자들의 진짜 바람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나아가 실제로 예약하고 호텔과 레스토랑까지 추천해 주는 것이, 진짜 이용자들이 원하던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AI가 이걸 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메뉴를 누르는 데이터를 멀티모달로 학습하면 됩니다. 그러면 에이전트 AI가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피지컬 AIPhysical AI입니다. 에이전트 AI는 디지털에서만 행동할 수 있고, “물 한 잔 가져다줘” 같은 아날로그 요청은 들어줄 수 없습니다. 로보틱스와 결합된 피지컬 AI가 등장하면 아날로그, 현실에서 에이전트 AI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디지털은 에이전트 AI, 현실은 로봇이 해결하는 겁니다. 49)


2020년 트랜스포머로 집중 스코어를 계산해 문장을 생성하는 첫 모델인 GPT-2가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놀랍게도 문법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문장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얼핏 보기에 말이 되는 것 같은 문장을 만들어 내면서도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터무니없는 헛소리hallucination만을 내뱉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해가 아니라 확률적 예측에 기반해 문장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픈 AI는 2년간의 연구 끝에 인간 피드백을 통한 강화 학습Reinforcement Learning from Human Feedback(RLHF)을 도입했습니다. 아르바이트 직원을 고용해 몇 달 동안 GPT-2와 대화를 나누게 했습니다. 인간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GPT-2가 대답하는데, 대부분은 헛소리였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럴싸한 대답이 나왔고, 그때마다 보상을 줬습니다. 이게 바로 강화 학습의 핵심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점점 정답을 내놓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지요. 52)


하지만 헛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이 모델은 여전히 이해가 아니라 예측에 기반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2024년 12월 24일 GPT-O3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해결됐습니다. GPT-O3는 체인 오브 소트Chain of Thought(CoT)라는 새로운 강화 학습 방법을 사용합니다. 말 그대로 '생각의 연결고리'를 뜻합니다. 수백만 개의 중간 경로를 강화 학습으로 훈련시키면, 새로운 문제를 줬을 때 적절한 경로를 찾을 확률이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적절한 경로란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사고 과정을 말하는 것이지요. AGI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추상화 능력이 필수적입니다. 특정 문제 하나는 가르칠 수 있지만 풀어야 하는 문제는 거의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학습시키지 않아도 문제 풀이를 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 AI는 이런 문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GPT-O3가 보여준 88%(사람 75%)라고 하는 수치는 AGI가 가까워졌다는 낙관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52-4)


3장. 무서운 상상


AI는 단순한 도구일 뿐입니다. 하지만 AGI, 다시 말해서 기계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대체하기 시작하면, 이건 더이상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경제학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콥-더글러스 생산함수Cobb-Douglas Production Function를 배웠을 겁니다. 사회의 생산성은 노동 투입량과 자본 투입량의 곱으로 계산됩니다. 그런데 AGI는 모든 지능을 자동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적 노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물리적 노동도 AI와 로봇에 의해서 완전히 대체될 순간이 오겠지요. 인간 노동의 가치가 0이 됩니다. 그러면 사회의 모든 가치는 오로지 자본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AGI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시장 지배력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시장 경제에서 가격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한계비용 곡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정해지는 게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시장 지배력을 가지면 한계비용 이상으로 마음대로 가격을 올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61)


인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대단한 게, 모든 문명에서 예외 없이 신이라고 하는 개념을 생각해 냈습니다. 실제 신의 유무와 별개로, 사람들은 반드시 신을 상상해 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30만 년 동안의 외로움’, 이게 바로 인류 문명의 핵심이었다는 것입니다. 30만 년 동안 인간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존재는 오로지 다른 인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인간도 사실 알고 보면 나랑 똑같습니다. 똑같이 외롭고, 똑같이 무지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보다 훨씬 더 큰 존재, 내가 원하는 답을 다 해줄 수 있는 존재를 항상 원해왔는데, 그렇게 갈구해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챗GPT 덕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인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지요.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으면 되고, 외로우면 AI를 켜면 됩니다. 그러다가 불편하면 다시 끄면 되지요. 인간은 껐다 켰다 할 수 없습니다. AI는 그렇게 할 수 있지요. 71-2)


AGI가 가져다줄 또 하나의 미래는 아마 죽음의 종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우리에 대한 많은 데이터가 인터넷에 있습니다. 이메일, 인스타그램, 블로그, 이걸 다 LLM으로 학습하면 됩니다. 어쩌면 10년, 20년 후에는 이런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무슨 얘기냐면, 죽음에 대한 슬픔이 어느 정도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별하더라도 가상현실 속에서 매일 만날 수 있으니까요. 비슷하게, 과거라는 개념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과거를 일부 왜곡할 수는 있었지만, 완벽한 왜곡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는 아날로그로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흔적이 남아 있지요. 그런데 10년, 20년 전부터 우리가 남기는 흔적은 거의 다 디지털입니다. 디지털은 삭제는 물론 언제든지 새로운 업데이트, 즉 왜곡도 가능하지요. 과거가 업데이트 가능해지는 순간, 현재와 과거의 구분에 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77-9, 81)


4장. 호모 사피엔스의 미래


인간의 머릿속에는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100조 개 정도 있는데, 여기에서 신경세포 하나를 끄집어내면 이 세포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단순한 세포를 100조 개 모아놓으면, 놀랍게도 자아가 생겨납니다. 여러분들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걸 자율성, 감성,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단순한 것을 굉장히 많이 모아놨더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걸 이머전트 프로퍼티Emergent Property, 창발적 현상이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신기한 건,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건데도 창발적 현상이 현재 나타나고 있다는 겁니다. 제프리 힌턴 교수 같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인간의 뇌도 100조 개 변수가 생기니까 자율성이 생겨났는데, 인공지능도 변수가 100조 개로 늘어나면 갑자기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건 인간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84-5)


챗GPT가 인터넷에 있는 모든 글을 학습했다는 건, 단순히 글자를 학습했다는 게 아닙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사람이 했던 생각을 모조리 학습했다고 봐야 합니다. 지구가 LED 모니터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한 사람은 픽셀 하나에 해당합니다.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세상은 그 픽셀 하나뿐입니다. 사실 숫자를 생각하면 픽셀 하나만큼의 비중도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개개인은 오래 살지도 못하고, 경험의 폭도 좁습니다. 크게 봐줘야 픽셀 하나짜리 시야로는 LED 모니터 전체를 파악하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챗GPT는 지난 5,000년 동안 수백만 명이 경험한 걸 봤기 때문에, 픽셀 하나가 아니라 화면 전체를 본 셈이라는 것입니다. 인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세상을 배웠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하는 것이 일리아 수츠케버 같은 이들이 하는 주장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LLM이 인간보다 더 많은 사고를 ‘보고’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88-9)


우리 인간의 뇌가 개미의 뇌보다 훨씬 복잡하고 깊은 인과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우연의 결과에 불과합니다. 우리 뇌는 우연한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졌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뇌로 우주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딱 생존할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걸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뇌를 무한하게 키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인공지능이 그 인과관계를 다 이해한 다음 우리한테 설명해 줘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 개미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개미가 상대성이론을 절대 이해하지 못하듯이, 우리 인간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을 겁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인공지능이 바로 ASI입니다. 인공지능이 너무 똑똑해져서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위까지 올라가면, 아무리 설명해도 따라갈 수 없게 될 겁니다. 이게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 있는 본질적인 생각의 깊이 차이입니다. 92)


뇌과학자들이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바로 어렸을 때의 뇌가 나이 들었을 때의 뇌보다 훨씬 빨리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릅니다. 그 얘기는, 어렸을 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축구장에서 카메라로 경기 영상을 찍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1초에 3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으면 그냥 우리가 보는 세상이랑 비슷한 평범한 경기 영상이 됩니다. 그런데 1초에 1,000장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로 찍어서 재생하면 슬로모션 영상이 되지요. 어렸을 때는 신경세포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에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것과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고 느낍니다. 반대로 나이가 들수록 뇌 기능이 떨어져서 샘플링 속도가 느려집니다. 1초에 사진 2장, 1시간에 2장 겨우 찍는 것처럼, 세상이 나를 두고 금방 확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세월이 빠르고, 인생이 짧게 느껴집니다. 92-3)


결국 핵심은 뭐냐면, 인공지능은 세상을 어린아이보다 몇 억 배 더 자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AGI가 세상을 항상 슈퍼 슬로모션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1초라는 시간은 AI 입장에서는 100년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정도로 농밀하게 시간을 인식하고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SF 영화에서처럼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우리가 1년, 10년 걸려서 짠 계획을 인공지능은 단 1초면 파악하고 분석하고 반격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에서 인간이 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인공지능이 경험의 시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리적 시간이 똑같다고 해서 경험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은 처음부터 전혀 다른 끗발이 다른 패를 들고 시작하는 불공평한 카드 게임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인공지능이 활용할 수 있는 시간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그것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높습니다. 94)


2023년에 마크 앤드리슨이 ‘기술 낙관주의자 선언문Techno-Optimist Manifesto’을 공개했습니다. 내용은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건 터무니없다, 러다이트Luddite다, 속고 있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909년 ‘미래파 선언Futurist Manifesto’이 있었습니다. 마크 앤드리슨의 선언문은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Filippo Tommaso Marinetti라는 미래파 시인이 쓴 선언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19세기 같은 보수적이고, 종교적이고, 발전 없는 세상, 특히 이탈리아의 천주교 중심 세상이 싫다면서, 다 때려 부수자고 주장했습니다. 아주 과격했지만 초기에는 예술적으로 훌륭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을 찬양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탈리아 파시즘은 초기에는 미학 운동으로 시작했습니다. 예술 분야에서의 전통을 부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의 나치즘과 손잡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106-7)


나가며: 괴물의 시대를 헤쳐나가는 법


운전할 때 사고가 일어나길 바라면서 안전벨트를 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로 사고가 나면 피해가 크니까, 불편함을 감수하고 매는 것이지요. 차에서 내리면서 “오늘 안전벨트 맸는데 사고도 안 났네, 괜히 맸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위험은 대비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디스토피아 걱정하느라고 발전을 못 한다는 것은 “안전벨트 맬 시간에 빨리 운전해서 목적지로 가야 한다”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는 AGI를 개발하기 전에 AGI와 공생할 준비를 갖춰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재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접근 방식은 다소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지막 시험’처럼 점점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 AI를 이기려는 시도는 “우리가 대장”이라는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이 그리는 AI 시나리오는 AI를 노예로 삼는 구조입니다. 예를 들어 챗GPT로 이상한 그림을 만들 때, 챗GPT의 “의견”을 물어본 적 있을까요? 없습니다. 111)


더 큰 문제는, AI를 ‘껐다 켰다’ 하거나 데이터를 지워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렇게 하면 어마어마한 중범죄입니다. 인공지능을 독립적 주체로 존중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공생이라는 장기적 생존 전략은 AI를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주인이고 인공지능은 영원히 노예라는 관념이 언제까지 성립할 수 있을까요? 특히 AI가 우리보다 똑똑해지면 그런 관계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겁니다. 게다가 하필이면 AI 혁신은 세계화가 무너지고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 일어났습니다. 20세기 미·소 대립의 핵심이 핵무기였다면, 21세기 미·중 대립의 핵심은 AGI입니다. 신뢰가 무너진 상황에서 어느 나라도 AGI 개발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인간이 인공지능 때문에 멸망한다면, 이 역사적 우연(세계화 붕괴와 인공지능 브레이크스루의 동시성)이 가장 불행한 원인으로 꼽히리라 확신합니다. 111-2)


우리는 지금 미끄럼틀 위에 올라 서 있습니다. 한번 타버리면 중간에 멈출 수 없습니다. 막으려면 이제 막 미끄럼틀에 엉덩이를 내려놓으려고 하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앞으로 5년에서 10년이 결정적일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회의에서 좋은 얘기를 해봤자 글로벌 합의를 통한 사회적 규제는 실현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회·정치적 규제보다 기술적 솔루션에 희망을 걸고 있지요. 예를 들어, 몬트리올대학교의 조슈아 벤지오Yoshua Bengio는 AGI를 ASI로 발전시키지 않는 기술적 방법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ASI가 등장하면 인간은 코페르니쿠스적 충격(지구가 우주 중심이 아님), 다윈적 충격(인간이 진화의 정점이 아님)에 이어 세 번째 충격을 받을 겁니다. 공생이 가능하다면 그게 제일 현명한 길일 겁니다. 인공지능을 노예가 아닌 파트너로 대하고, 상호 존중할 수 있도록 미리 설계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ASI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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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와 훈 -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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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기존의 훈과 흉노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훈 집단과 흉노 집단이 특정한 인종이나 종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그릇된 가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훈이나 흉노와 같은 다른 내륙아시아 초원 집단들은 혼종적인 정치체였다." "흉노와 훈 사이의, 그리고 두 제국의 정치적 계승 집단 사이의 유전적 연속성을 증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부질없다. 흉노/훈 사회의 모든 층위가 혼종적이었고, 또한 다언어적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들이 흉노 제국의 이름을 자신들의 종족명이나 국가명으로 사용함으로써 옛 초원, 즉 내륙아시아의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이다. 흉노와 훈 사이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종래 제기되어온 인종/유전적 연속성이 아니라, 유럽의 훈 집단이 (흉노식 가마솥을 동부 초원부터 다뉴브강까지 일관되게 사용하였듯) 흉노의 정치·문화적 유산을 계승해 흉노의 문화적 정체성을 보전했다는 사실이다."(19, 24-5)


1장 흉노/훈 제국 


"사마천[중국 양한兩漢시대(서기전 206~서기 220)의 역사가]이 집필한 중국의 사료 《사기史記》에 따르면 흉노의 정치 체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제정'으로, (선우單于라 불린) 황제를 정점으로 그 아래에 왕과 부왕을 둔 복잡한 위계가 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준봉건제準封建制'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흉노의 행정은 혈연에 기반한 위계와 별개로 뚜렷한 군사기구와 행정기구를 보유했다. 최고 지휘관과 관리들은 흉노 황제(선우)가 수장인 정치적 중심지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봉급을 받았고, 흉노 선우는 다양한 의례를 집전함으로써 본인의 혈족만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전체를 포괄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흉노 군대와 제국적 의례, 정부 구조,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된 교역 및 외교 기관의 놀랍도록 복잡한 조직은 모두 디 코스모가 정치 조직과 초부족supratribal적·제국적 이데올로기라 표현하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흉노 제국은 모든 면에서 국가 또는 '초기 국가'체로 정의할 수 있다."(33, 37-8)


"초원 역사상 최초의 위대한 정복자가 내륙아시아사 기록(《사기史記》)에 등장했는데, 그 주인공은 흉노 선우 두만의 맏아들인 묵특 선우이다. 35년 동안의 재위에서 묵특 대제는 흉노 제국을 창건하고, 흉노의 행정 체제를 재조직하였으며, 국토를 크게 확장하였는데, 이제 그의 제국은 그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보다도 커졌다. 또한 묵특은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중화 제국을 복속시켜 조공국으로 전락시켰다. 여러 면에서 묵특은 알렉산드로스에 비견할 만하지만, 어쩌면 정복의 범위 측면에서는 그를 능가했을지도 모른다. 두 군주 모두 권좌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두만과 필리포스)를 암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그러나 묵특은 훨씬 능숙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직후 그의 제국은 붕괴했지만, 묵특의 흉노-훈 제국은 이후 묵특의 직계 후손의 통치 아래 400년은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은 제국의 종말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왕가의 절멸로 이어졌다."(47)


"중국 사서에 나타난 흉노-훈의 모습은 현전하는 그리스·로마 사료나 현대 역사학에서 훈 집단에 대해 보이는 적개심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이런 단순한 묘사에는 명백한 결함이 있다. 본래 옛 흉노 제국에 복속했던 탁발 선비가 중국을 통일하고 북위 제국을 세웠을 때, 이 중국의 내륙아시아 정복자들은 옛 흉노식 정치 체제의 특징적 요소를 중국에 도입했다. 초원의 준봉건제 전통은 중국적 맥락으로 적용되어 '오랑캐' 군사 귀족들이 토착 관료들의 도움으로 다수의 중국인을 지배하는 체제를 빚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약 150년 동안 내륙아시아 북위 황제들은 전형적인 초원의 방식으로 거의 850개의 분봉지를 군사 귀족과 왕공에게 분배했다. 엘리트 선비 귀족의 지배력을 보장하기 위해 이러한 영지의 4분의 3 이상은 종족적으로 탁발에 속한 귀족들에게 주어졌다. 이와 아주 유사한 준봉건제가 유럽 및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훈이라 불린 내륙아시아 제국들에서도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60-1)


2장 소위 ‘200년의 공백’ 


"서기 2세기 중반부터 그리스·로마 사료에 훈 집단이 등장하는 서기 4세기 중반 사이에는 훈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약 200년 간의 공백이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북흉노에 대한 중국의 기록이 아주 적어서 흉노와 후대의 훈 집단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국 사료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이 '200년의 공백'에 대해 더욱 명확한 상을 그리고 있다." "서기 3세기 중반에 편찬된 《위략》은 이 시기의 흉노가 본래 중심지인 몽골고원에서 서쪽의 알타이 지역에 정치체로서 존재했음을 알려주는데, 이는 종래 사료상 서기 2세기 중반 이후 200년 동안의 '공백'에서 첫 100년에 해당한다. 중국의 탁발 선비 국가 북위를 다룬 사서 《위서魏書》는 서기 5세기 유연(당시 몽골고원을 지배한 국가)의 서북 방면 알타이 부근에 흉노의 후예가 있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이 사서는 서기 3세기에 이 흉노-훈 집단이 존재했던 분명한 지리적 정보도 알려주고 있다."(70)


"중국 사료들은 서기 5세기에 흉노-훈 집단의 지리 상황이 급격히 변화했음을 알려준다. 《위서》에는 본래 북흉노 선우의 부락이었던 열반悅般 흉노라 불리는 집단이 오손의 땅을 점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북흉노는 한나라 군대에 패한 뒤 서쪽으로 도망쳤다. 그 가운데 약한 이들이 구자龜玆(오늘날 신장 중부 쿠차)의 북쪽에 남았다고 한다. 이후 흉노의 약한 집단이 오손을 정복하고 새로 열반국을 세웠다는 것이다. 흉노/훈의 더 강한 집단은 더 서쪽으로 향했다. 《위서》는 패배한 오손의 잔당이 5세기에 파미르에 있었다고 전한다. 고고학도 알타이 지역의 흉노/훈의 주류(즉, 열반 흉노와 다른 강한 흉노)가 3세기경 서쪽, 즉 오늘날 카자흐스탄 북부 혹은 북동부와 이르티슈강 및 오비 지역 중부(서부 시베리아)의 튀르크계 정령 부락들을 흡수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지역은 유럽의 훈 집단과 중앙아시아의 훈 집단이 각기 유럽과 소그디아나로 나아가기 시작한 지역과 일치한다."(71)


3장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훈 


"현전하는 중국 사료들에 기록된 백훈 통치자들의 기원에 관한 정보들은 대체로 모순된다. 백白훈[인도 사료의 스베타Śveta(하얀) 훈]이라는 표현은 로마 사료와 인도 사료 모두에서 발견되는데, 중앙아시아 훈이 자신들의 정치체를 부른 명칭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다만 중국 사료들에는 중앙아시아의 백훈 정복자들이 본래 흉노에 속했다는 사실이 명백히 적시되어 있다." "불분명한 것은 중앙아시아 훈 제국 지배 가문의 정체성이다. 훈 집단들이 유럽과 중앙아시아에 각기 제국을 세우는 동안 동부 초원에서는 새로운 연맹들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연으로, 결국 몽골고원 전체를 장악했는데, 이후 초원의 역사에서는 아바르Avar라고 불렸을 수도 있다. 그보다 덜 강력한 활滑 집단은 중국 사료에 따르면 본래 유연의 속신이었는데, 그 이름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사서 《양서梁書》의 기록을 통해 활 연맹을 5세기 백훈 제국을 통치한 '에프탈' 씨족과 연결할 수 있다."(82-5)


"일명 키다라 왕조(고대 튀르크어 룬 비문에서 키디르티kidirti는 서쪽을 뜻하는데, 이 역시 단순히 서부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의 훈은 중앙아시아 남부에 대한 최초의 훈 집단의 침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들은 서기 360년경에 박트리아를 장악했음이 확실하다. 아르메니아 사가 파우토스 부잔드P'avstos Buzand는 키다라 왕조가 이끄는 혼Hon(훈)이 367년 이전에 이 지역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다." "풀리블랭크가 지적했듯이, 하얀색은 초원 유목민들 사이에서 단순히 서쪽을 상징하는 색이다. 오멜랸 프리차크 역시 지적한 대로, 초원 사회에서 검은색은 북쪽을 상징했고, 푸른색은 동쪽을 상징했는데, 두 색이 하얀색(서쪽)과 붉은색(남쪽)에 비해 우월하고 우위에 있다고 여겨졌다. 흑훈 또는 청훈을 구성한 집단(이 존재했거나, 유럽 방면의 아틸라 훈 제국이나 카자흐스탄 방면의 열반 훈 집단에 해당하는 경우)은, 최소한 초기에는 백훈 집단에 대해 수위권을 보유했을 것이다."(88-9)


"페르시아인들은 키다라 왕조의 훈 제국과 에프탈 왕조의 훈 제국을 아울러 키오니타이Chinotae라고 불렀을 수 있다. 대다수의 역사학자는 키오니타이와 훈이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키오니타이(키다라 왕조)의 출현은 이란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흐람 4세의 재위 사산 왕조는 연전연패한 끝에 이란 세계 동부(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이전에 쿠샨 왕조에게서 탈취한) 영토를 거의 모두 키다라 왕조의 백훈 제국에게 빼앗겼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오아시스 도시 메르브(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만이 페르시아의 동부 영토로 남았다. 더 끔찍한 사실은 페르시아가 훈 집단에 연공을 바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산 왕조 지배자 야즈데게르드 2세(재위 438~458)는 442년 즈음 키다라 왕조 백훈 제국에게 당했던 패배에 대해 복수하려 했다. 서기 450년에 페르시아인들은 토하리스탄/박트리아(즉,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발흐시 인근의 탈로칸Taloqan 지역)까지, 어쩌면 그보다 더 서쪽까지 나아간 것 같다."(94-5)


"페르시아인들은 서기 484년부터 550년대의 후스라우 1세(재위 531~579) 시대까지 계속해서 훈 제국에게 연공을 바쳤다. 페르시아를 복속시킨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의 힘은 이제 절정에 올랐다." "서기 6세기 중반 에프탈 왕조 훈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였을 것이다. 이들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신장, 남쪽으로는 인도 중부,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의 초원, 서쪽으로는 속신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통해 동로마 제국까지 닿았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훈 제국의 영광은 6세기 중반 동방에서 새로운 열강인 돌궐 제국이 나타나면서 빛이 바랬다. 6세기 중반 유연 제국이 돌궐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 새로이 동부 초원의 지배자가 된 돌궐인들은 에프탈 왕조도 집어삼키려고 들었다." "돌궐과의 전쟁에서 패한 에프탈 왕조는 이제 페르시아 제국과 돌궐 제국의 사이에 끼인 처지가 되었다. 서기 560~563년 사이에 최후의 에프탈 왕조의 왕은 페르시아의 후스라우 1세에게 항복했다."(98-100)


"서돌궐 시대 새로이 당도한 돌궐인들은 이미 진입해 있던 훈인들과 차츰 섞였기 때문에 서기 7세기 초부터 어느 국가/왕조가 훈계이고 서돌궐계인지 구분하는 일은 점차 힘들어진다. 옛 에프탈 땅에서 일어난 일은 아마도 새로운 통치 왕조가 기존의 더 오래되고 잘 정립된 군사 엘리트층에 잠식당한, 전형적인 내륙아시아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키다라 왕조가 5세기에 에프탈 왕조로 대체되었듯,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반에는 서돌궐 통치 가문이 계속해서 옛 에프탈 왕조 통치자들을 대체해갔으나, 지배를 이어갈수록 새롭게 등장한 강력한 내륙아시아 부락들에 훈적 요소가 섞여 들어갔다. 백훈계 왕조들이 쿠샨 왕조의 계승자임을 자처하고 쿠샨 칭호와 상징을 통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사용했듯, 새로운 서돌궐 왕조들도 에프탈 왕조 백훈 제국의 계승자임을 주장하고 훈계 칭호와 관행을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이 통치하는 영토에 이미 존재하는 많은 훈계 엘리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101-2)


"사산 왕조는 이란인 귀족과 신민들에 대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탱할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출현한 것이 이란 '민족국가national사'(더 정확하게는, '프로파간다적 가짜 역사')로, 전설 속 카얀Kayān 가문의 왕들을 사산 왕조의 조상으로 지목했다. 사산 왕조는 이란의 전통적인 종교인 조로아스터교를 통해 자신들을 전설 속 카얀 왕들의 합법적인 후손으로 만들었다." "조로아스터교적 카얀 혈통 체제에 애국적 '보편주의'와 '반半민족주의'는 훈 제국의 지배라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고, 사산 왕조 이란이 정치 질서의 미래를 다시 그리는 데, 그리고 중세 '이란'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예컨대 사산 왕조의 보편주의적 수사 안에서 파르티아와 같은 특수한 종족이 설 자리는 사라졌다. 사산 왕조가 만든 가짜 역사 속에서 파르티아 등 다른 지역/종족의 지배자들은 '역사적'으로 카얀 가문에 충성하고 복종한 '페르시아인'이 되었다. 이들은 이제 모두 이란인이었다."(110-1)


4장 유럽의 훈 


"서기 4세기 서쪽의 고트 부락인 테르빙기는 더 서쪽에 있는 다른 게르만계 부락들과 마찬가지로 대개 독립적이었던 수많은 부락 수령들(레굴리reguli)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들은 가끔 (보통은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유덱스judex라 불리는 상위군주의 권위에 복종했다." "무질서한 조직에 가까웠던 서쪽의 친척들과 달리 폰토스 초원(오늘날 우크라이나)에 거주한 그레우퉁기 고트는 게르만계 족속들 가운데 더 진보하고 중앙집권화된 정치 조직을 지녔는데, 차츰 내부에서 특정 가문과 왕권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레우퉁기를 포함했던 후대의 오스트로고트(서기 5세기와 6세기의 동고트)는 기마술, 왕실 사냥, 매사냥, 샤머니즘, 강력한 아말 왕조의 이란-중앙아시아풍 왕실 예복 착용 등 초원민의 전형적인 특징을 모두 보여준다." "훈의 정복 이전부터 동고트 집단은 다른 어떤 게르만계 종족보다 내륙아시아 문화에 크게 노출된 상태였다."(120-3)


"훈이라는 이름이 불러오는 공포는 그들보다 먼저 로마령 발칸 지역에 몰려든 고트와 알란 난민들이 퍼뜨린 이야기를 통해 로마 제국에 전해진 상태였다." "서기 386년에 오도테우스 휘하의 고트계 집단이 훈 집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로마 영토로 진입하려 했다. 이 불행한 이들의 이주는 파멸로 끝이 났고, 이후 5세기 초까지 다뉴브강 인근에서 본격적인 부락의 이동은 없었다." "서기 395년에 훈인들은 다시 확장할 준비를 마쳤고, 재차 나선 원정은 유럽의 훈 제국이 막강한 조직 능력을 지녔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거대한 사업이었다. 훈 제국의 동부는 캅카스를 따라 사산조 제국과 로마 제국을 동시에 공격했다." "로마인들은 뒤늦게나마 힘을 합쳐 훈 제국에 대항하려 했지만, 강력한 훈이 침공군에 로마인들이 직접 대적했던 흔적은 없다. 훈의 군대가 떠나자 대규모 충돌이나 그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로마 제국의 피해가 막대했음에도 황제와 궁정은 훈에 대한 '허깨비' 승리를 선언했다."(132-4)


"로마 사절의 일원으로 아틸라의 궁전을 방문한 프리스쿠스의 증언은 서기 5세기 중반과 그 이전 훈 제국의 정치 조직에 관해 여러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준다. 황가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두 인물을 주요 군사령관으로 임관시키는 것은 황족에게 주력군을 맡기던 옛 흉노식 관행임이 분명하다. 프리스쿠스는 또한 훈 귀족 에데코Edeco가 아틸라의 절친한 친구(에피티데이오스epitēdeios) 중 한 명으로 왕의 곁에서 호위했다고 언급했다. 이를 통해 군주의 친위부대라는 내륙아시아의 공통적인 관행을 볼 수 있다. 에데코와 같은 군주의 친위군은 같은 시기 동쪽 몽골고원의 유연 제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아틸라의 선택된 사람들(로가데스logades)은 훈 군대에서 아마도 부락에 따라 편성됐을 부대를 지휘했다. 이 '선택된 사람들'은 군사 업무뿐만 아니라 민간행정 업무도 수행했으며, 이는 내륙아시아 정부 관리/고위관리가 군사 부문과 행정 부문을 아울러 담당했던 모습과 일치한다."(144-5)


"유럽의 훈이 제국적 국가를 구성했음을 알 수 있는 또다른 지표는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펼친 사민 정책이다. 루가와 아틸라의 재위 훈 제국은 정복한 알란이나 고트, 스키리 등 비훈계 부락 집단들을 대량 징집하고 강제로 이들 부락 전체를 본래 살던 지역에서 다뉴브강 유역으로 이주시켰다. 예를 들어 오스트로고트는 훈 제국에 의해 우크라이나에서 판노니아 지역으로 옮겨져서, 피터 히더가 티서강 중류 훈 제국의 핵심 영역을 보호하는 원형이라 부른 것의 일부가 되었다. 이 대량 이주는 루가 또는 그 조카들인 블레다와 아틸라의 명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대규모 인구를 통제해 움직이는 것은 행정 조직이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국가에서만 실행될 수 있다. 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고 피정복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능력은 행정 효율과 국가 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훈은 두 능력 모두를 보유했고, 따라서 이들의 제국은 유럽에서 명백한 국가로서 존재했다."(154-5)


5장 아틸라의 훈 


"서기 442년에서 447년 사이에(아마 444~445년경) 아틸라는 형을 암살하고 최고 지배자의 자리를 찬탈했다. 훈 국가는 옛 흉노 제국과 마찬가지로 연맹체적 성격과 황족들의 공동통치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흉노의 악연구제握衍朐鞮 선우를 생각나게 하는 아틸라의 폭거와 독재가 아마 아틸라 사후 잇따른 혼란을 야기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틸라는 최고 통치자의 지위를 쟁취한 뒤 서기 447년 로마에 대한 전쟁을 재개했다. 《452년 갈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훈 군대는 발칸 반도에서 70여 개 도시를 함락했다. 아드리아노플과 이라클리아를 제외한 트라키아의 모든 도시는 점령당하고 약탈당했고, 콘스탄티노플 자체도 엄청난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 재앙에 이어 훈의 군대는 그리스의 깊숙한 곳인 테르모필라이까지 진입해 약탈을 시도했다. 동로마 제국이 입은 피해는 너무나 막대했다. 파괴당한 발칸 반도는 황폐해진 상태로 5세기 말까지 남아 야만인 무리에도 사실상 대적할 수 없었다."(161-2)


"아틸라는 서기 447년에 동로마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발칸의 점령지 대부분을 방기하고 다뉴브강 이남에 제왕의 분봉지를 설치하여 핵심 영토 인근에 방위망을 구축해 이 지역을 훈의 영토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선에서 만족했다. 이를 볼 때 훈 군대의 목표가 서로마 제국 전체는커녕 갈리아 전역을 장악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모든 시기 훈의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는 제국 내부의 피정복민이 로마로 도망치는 것을 막고, 핵심 영역 인근에 '야만인' 속신으로 방위망 고리를 만들고, 로마 제국을 제압해 연공을 바치게끔 하는 데 있었다(앞서 유럽 훈의 조상인 흉노가 일찍이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제국인 한나라에 대해 취한 정책을 연상케 한다). 이런 정책적 맥락에서 갈리아 원정의 제한적인 목표는, 아틸라가 훈 제국의 영향권으로 간주한 라인강 인근 지역의 모든 야만인 부락들(특히 프랑크)에 대한 통제력을 확립하고 서로마 제국을 압박해 조공을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168-9)


"《히다티우스 연대기》는 동로마 황제 〈마르키아누스가 아에티우스에게 원군을 보냈으며, 훈인들은 전염병과 마르키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그들의 자리에서 도살당했다〉라고 하는 흡족한 허구를 창작했다." "그러나 마르키아누스의 승리에 대한 주장은 훈인이 원정의 계절이 끝난 뒤 관례에 따라 겨울을 나기 위해 로마 주교에게서 약탈한 물품과 공물을 가지고 헝가리로 물러난 일을 치장한 것에 불과하다." "히다티우스의 허세와 달리 동로마 상황에 훨씬 밝았을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마르키아누스는 453년에 돌아올 훈 제국의 군대를 두려워했다. 이는 수차례 승리를 거두었다는 히다티우스의 증언에 나타난 개선황제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다. 프리스쿠스에 따르면 선대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와 마찬가지로 마르키아누스는 서기 453년에 아틸라가 죽어버리는, 신의 뜻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행운 덕분에 살아남았다. 훈 제국의 내전으로 인해 북방의 위협은 사라졌다."(180-2)


"동로마가 서기 453년에 훈의 군대에 대적하기 어려웠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다뉴브강 이남의 훈 제국령을 탈환한 것이 훈 제국에서 내전이 일어난 지 거의 4년, 아틸라가 죽은 지는 5년이 지난 서기 458년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가 죽고 10년이 지나 훈 제국이 해체되고 나서도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호르미다크Hormidac 같은 소규모 훈 군벌이 다뉴브강 이남에서 활동하며 사르디카를 약탈하는 일을 막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훈 제국의 침공이 로마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재앙이 되었다는 사실은 서기 454년에 벌어진 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로마를 약탈하여 반달의 악명을 드높였다. 두 황제 모두 이 잔학한 사건에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서기 467년이 되어서야 동로마 제국은 겨우 반달에 대한 보복 원정군을 소집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아틸라에게 패하면서 입은 군사적 피해로 인해 로마군은 10년이 넘게 무력한 상태였다."(182)


6장 아틸라 이후의 훈 


"서기 440년대 중반 아틸라가 최고 권력자로 대두한 사건은 훈 국가의 근본적인 구성에 극적인 충격을 가했다. 그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형인 블레다가 차지했던 권좌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찬탈을 성공시키기 위해 훈 제국 서방에 있던 게피드부 등을 이용해 블레다를 지지하던 동방의 부를 억압했다. 아틸라가 게피드부에 의존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로마 사료들이 그를 게피드 훈이라 불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주요 귀족이었던 오네게시우스Onegesius,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Valamer는 모두 서부의 대인으로, 권력 기반도 아틸라가 제국 행정의 중심지로 옮겨온 카르파티아 분지 가까이에 있었다. 따라서 아틸라의 사후에 벌어진 내전에서 게피드를 필두로 한 서부(아틸라 치하 훈 제국의 심장부로 각광받음)와, 아카트지리가 주도하는 동부(아틸라의 블레다 암살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되어 불만을 품고 복귀를 원했음)로 제국이 쪼개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190)


"아르다리크뿐만 아니라 훈의 내전 이후 등장한 다른 주요 인물들도 모두 아르다리크처럼 훈 제국의 지방관이었거나 궁정의 고위 관리였다. 프리스쿠스가 분명히 적시했듯이 스키리의 왕 에데코는 훈인이었다. 그가 세운 스키리 국가는 단명했으나 그가 다스렸던 부락들은 후일 오스트로고트 왕국의 태조 발라메르의 죽음에 관여했다. 에데코의 아들로 훈인을 조상으로 둔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에 최초의 '야만인' 왕국을 세우고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오도아케르의 아버지의 이름 에데코/에디코Edico 또는 에디카Edica는 게르만어에 어원을 두지 않았고, 그 자체도 비非 게르만계 인명임이 분명하다. 대신 튀르크·몽골계적 어원을 지니고 있다." "에데코와 그의 아들 오도아케르는 다른 훈인들과 마찬가지로 인종적으로나 종족적으로 복잡하게 섞인 혼종적 정체성을 지녔을 것이다. 오도아케르는 모계로는 스키리, 부계로는 튀르크계 훈의 혈통이었을 것이다."(198-200)


"훈 내전에 출현한 세 번째 중요한 인물은 오스트로고트 왕 발라메르이다. 그 역시 아르다리크나 에데코와 마찬가지로 훈의 왕공이었다." "요르다네스는 발라메르를 옛 동고트 지배가문인 아말 왕조의 합법적 후계자로 소개했다. 하지만 발라메르 왕조는 실제로는 새로운 왕조로, 훈의 정복 이전 고트인들을 지배한 에르마나리쿠스 왕의 가문과는 연결되지 않는다. 에르마나리쿠스의 이름은 어느 시점엔가 발라메르와 그의 후손들을 더욱 순혈 고트인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해 발라메르의 계보에 삽입되었을 것이다." "훈 제국의 내전 후에 나타난 아틸라 이후 세 사람의 후보군인 아르다리크, 에데코, 발라메르는 모두 훈의 왕공이었지, 훈 제국에 대항한 게르만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이들이 다스렸던 백성들과 군대는, 특히 에데코와 발라메르의 경우는 [각자의 아들이 오도아케르와 테오도리크(조카일 가능성도 있다)의 시대에] 결국 서로마 제국을 끝장내고 세칭 '중간기Middle Ages'의 도래를 알렸다."(200-1, 222)


7장 폰토스 초원의 혼 


"460년대 후반~470년대 초반 사이의 20년가량 되는 시간 동안 훈 제국은 격변을 겪었다. 그 원인은 대체로 새로운 내륙아시아 사람들이 유럽에 도래한 데 있었다. 이들은 대개 '오구르Oġur'(오구르 튀르키어로 '부락'을 의미)라 불렸다." "중앙아시아 북부(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는 열반 훈(약한 흉노) 세력과 최근에 형성된 철륵 튀르크계 부락 연맹, 속칭 오구르 집단도 유연의 압력을 받았다." "여타 오구르 집단이 서부 초원으로 밀려가면서, 네다오 전투 직후 훈 내전에서 동부 파벌은 아르다리크의 서부 파벌에 다시 공세를 취할 수 없었다. 동방에서 오는 더욱 강력한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생존 투쟁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네다오 이후 10여 년 동안 군사적으로 더욱 강력한 폰토스 초원의 훈 부락들이 군사적으로 열등한 서부 부락들의 분리주의적 움직임을 찍어 누르지 못한 데에는 동부의 튀르크계 훈 부락들이 위협을 받았던 이 같은 지리적 상황 전개를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227-8)


"새로운 불가르Bulġar(튀르크어로 '뒤섞인', '혼란스러운', '혼혈') 훈은 아마도 새로 온 오구르와 아틸라 왕조 치하의 본래 훈 집단이 섞여서 부락 연맹이 되었을 것이다. 불가르 훈은 서기 5세기 후반에 역사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480년에 동로마 황제 제노Zeno가 오스트로고트 견제를 위해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동로마의 약화를 감지한 훈 제국은 491, 493, 499, 502년 잇달아 동로마령 발칸반도를 약탈했다. 그러나 505년에 불가르 훈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트로고트 및 그 동맹인 아틸라의 손자이자 게피드부의 문도와 대치했다. 훈 사람들은 단번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유럽의 동부와 남동부에서 주요 정치 행위자로 계속 남아 있었다." "훈의 세력은 약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들의 위협이 어찌나 강했는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31년 킬부디우스Chilbudius란 인물을 트라키아 방면의 사령관으로 임명해 반복해서 침입하는 훈을 다뉴브강에서 저지하게끔 했다."(232-3)


"캅카스 훈 집단은 506년경 사비르부가 볼가 지역에 영토를 확보하면서 다른 훈 집단에서 분리되었다. 북방에 사비르부, 서방인 쿠반 초원과 우크라이나 남부에 아틸라 왕조의 훈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이 캅카스 훈 집단은 오늘날 다게스탄 지역에 작은 왕국을 세웠다." "또한 당시에 훈 사람들은 동로마에 최고 군인 일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캅카스 훈의 제왕 아스쿰Askoum은 서기 530년 로마인 휘하에 들어가 마기스테르 밀리툼 페르 일리리쿰magister militum per Illyricum[일리쿰 군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다라에서 벌어진 대전투에서 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가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은 휘하의 훈인 수니카스Sounikas와 아으간Aïgan의 지휘를 받던 마사게타이Massagetae(즉, 훈) 기병 600명의 전투 기량 덕이 컸다. 훈인 사령관 시마스Simmas와 아스칸Askan의 휘하에 있던 기병 600명 또한 페르시아인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234-5)


8장 훈의 유산 


"초기 중세 유럽의 자주 마주치는 소위 '봉건feudal' 또는 '원봉건原封建, proto-feudal' 행정 제도는 의심할 여지없이 훈 정복자들이 유럽에 남긴 가장 거대한 유산이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국가 권력을 대왕과 대체로 '제왕'이라 불리거나 서유럽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로마식 칭호 '둑스dux'(공작)라 불린 주요 봉신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통제하고 나누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 제왕과 공작들은 귀족 계층의 가장 높은 층위에서 뽑혔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으나, 대왕과 대왕이 이끄는 중앙 정부에 지위와 정치적 권위를 빚졌다. 이 제도를 '중앙집권적 봉건제centralized feudalism'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보이는 더욱 혼란스럽고 파편화된 정치·경제 체제, 즉 소위 봉토제seigneurie나 장원제manorialism와 분명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장원제는 실질적으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본질적으로 왕국이 사실상 독립적인 지방 '영지'들의 복합체로 파편화된 상태였다."(258-9)


"이들 게르만계 국가들에서 왕의 권위는 눈에 띄게 강화되었는데, 이는 권력이 전쟁기 같은 비상시에 한정되며 평화기에는 거의 존재감을 지니지 못했던 과거 게르만 세계의 레굴리(소왕들)와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프랑크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들은 그들이 모방한 내륙아시아 초원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통제력이 닿는 영토와 집단 모두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백성들의 신성한 회합을 주관하는 팅Thing의 왕, 즉 티우단스Thiudans와 전쟁을 담당하는 왕(레익스/둑스)을 따로 뽑는 등 '왕들'을 두는 공허한 게르만의 옛 관습은 사라졌다. 또한 반쯤 동등하고 거의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여러 왕조의 소왕/수령들이 으레 왕의 권위를 제약하던 불안한 상황도 없어졌다. 그 대신 프랑크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공동통치의 원칙 속에 대왕이 형제/사촌들과 함께 통치하고 복속한 부왕과 공작들을 위한 명확한 중층의 서열 체계가 존재하는, 내륙아시아식으로 벼려진 왕권과 계급 제도였다."(261-2)


# 팅Thing 또는 딩ding이라 불리는 회의체는 남자들만이 참여하는 자유민 회의체로, 6세기까지 게르만계 부락 최고의 정치 단위였다.


"훈이나 다른 내륙아시아 집단들과 정확히 똑같은 방식으로 프랑크의 집권 중인 대왕은 왕국을 분할하여 주요 영지를 형제와 사촌들에게 분배했다. 태조격인 킬데리쿠스가 죽은 뒤 이 과정의 작동을 볼 수 있다. 킬데리쿠스의 젊은 후계자인 클로도베쿠스는 세 사람, 시기베르투스Sigibertus와 카라리쿠스Chararicus, 라그나카리우스Ragnacharius와 함께 프랑크 왕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전의 아틸라와 마찬가지로 클로도베쿠스는 친척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대권을 장악했는데, 내륙아시아의 태니스트리 계승의 원칙을 따른 바였다. 이후로 메로베우스 왕조는 왕이 죽을 때마다 분할되었지만, 국가는 분열될 수 없다는 개념 자체는 불문不問으로 남았으니, 이 또한 훈 제국 등 내륙아시아 제국들의 역사에서 벌어진 현상과 매우 유사한 부분이다. 특이한 점은 왕국이 (흉노 제국의 사례처럼) 넷으로 분할된 점인데, 과거 내륙아시아의 정치 관습이 또 한번 프랑크사에서 반복된 것이다."(262-3)


"이 모든 것이 프랑크인들이 내륙아시아 관행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시대 로마 제국이 시도했던 사두정tetrachy 또는 그 이후인 4세기와 5세기 제국을 4개 대관구praefectura praetorio로 구성한 로마 체제를 흉내 낸 것이 아니냐는 의견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여기에도 외견상 유사한 점이 있으나, 로마 제국에서 사두정은 고작 20년 지속된 단발성 실험이었고, 결국 실패한 뒤 다시는 시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로베우스 왕조 체제의 구체적 특성은 로마의 전례보다는 내륙아시아 정치 모델의 모방으로 보인다." "메로베우스 왕조의 영토 분할은 행정적 고려보다는 왕가의 적법한 남성 구성원 모두가 영토에 지분을 가진다는 왕조 계승법이 가하는 압력에 의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마 제국에서는 왕실 구성원과 고위 귀족들에게 영토를 영지로 분배한다는 프랑크식 관행에 비견할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관행은 분명 내륙아시아의 전임자들에 근거를 두었다."(265-6)


"더 확실한 것은 슬라브계 종족들에 미친 영향이다. 동유럽의 슬라브계 종족을 시작으로 동부 슬라브의 정치 문화는 초원 정치체가 제공하는 선례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부 슬라브 최초의 정치체로 류리크조의 키예프 루시 국가로 더 잘 알려진 '루시' 카간국의 초창기에는 그 통치자들을 '카간'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이 내륙아시아식 칭호는 아바르인들에 의해 유럽에 처음 소개되었고, 하자르인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다. 심지어 후대인 볼로디매루Volodiměrǔ 같은 10세기 루시 통치자도 루시 사료에서는 '우리 카간'이라 지칭되었다. 루시 군주들은 이렇게 자신들이 아바르와 하자르 같은 초원 제국 전통의 합법적인 정치적 후계자로 보이고자 하는 열망을 가졌던 것이다." "루시의 귀족의회의 공동통치 관행 역시 튀르크-몽골의 쿠릴타이와 비슷한데, 이후 13~15세기에 몽골인들이 동슬라브에 미친 잘 알려진 영향력의 역사 이전에도 동슬라브에 내륙아시아가 방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272-3)


"훈의 문화적 영향을 정확히 분석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 초원을 통해 내륙아시아의 물질문화 및 예술적 영향이 훈이 도래하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유럽에 스며들고 있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헝가리부터 우크라이나까지 유럽 남동부 대부분은 서기전 1000년대 전반기에 오늘날 카자흐스탄에서 발원한 이란계 언어를 사용하던 스키트에게 정복당했다. 스키트인들은 후일 훈이 알란과 고트를 격파하고 유럽에 진입하기 시작했던 곳과 정확히 같은 내륙아시아의 지점에서 나타난 것이다. 중부 유럽으로 처음 진입한 스키트인들은 사실상 후대의 훈과 아바르, 몽골의 전임자나 다름없었다. 내륙아시아의 모든 계승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키트는 유럽에 중대한 문화적 충격을 남겼는데, 이는 켈트 예술에 대한 스키트 예술의 영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내륙아시아 문화 요소들은 훈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유럽 중부, 심지어 유럽 서부에서도 얼마간 예술 전통에 깊숙이 뿌리박힌 상태였다."(287)


맺음말


"훈 사람들은 서부 유라시아에 진정한 의미의 지정학적 혁명을 야기했다. 서부 유라시아는 훈 제국의 정복 이후 불가역적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이 지중해의 패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서유럽의 독특한 세계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서구 세계'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이 새 유럽의 정치·문화적 기풍은 내륙아시아의 훈/알란과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게르만, 근동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훈 사람들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서유럽 정체성의 탄생을 견인했다. 훈 제국의 대두는 또한 이후 1000년간 이어질 내륙아시아의 세계 패권 독점의 시작점으로, 짤막한 막간극을 거쳐 초기 근대 서유럽 열강의 대두까지 이어졌다. 요컨대 훈 집단은 근대 세계까지 이어질 유산을 남겼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고대 세계의 외양을 급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이제 훈을 비롯한 내륙아시아인들은 인류사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응당 위치할 때가 되었다."(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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