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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한국인의 탄생 -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 개정증보판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4년 10월
평점 :
들어가는 글: 한국인이라는 미스터리
한국인은 불운한 운명의 자식이자 혁명의 후손이다. 누가 이 한국인들, 달리 말해 남한인과 북한인, 재일교포, 조선족(재중동포), 카레이스키(고려인), 재미교포에 이르는 이들 모두를 만들었는가? 첫 번째로 지목할 우리 한국인의 공통 조상은 신화적 영역에 있는 단군 할아버지다. 역사적인, 실체를 가진 조상은 두 분이 더 계신다. 먼저 고려 임금 현종이다. 현종은 거란과의 전면전쟁을 통해 한반도 주민을 처음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틀 안에 그러모았다. 다음은 유학자이자 신국가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한국인의 구체적인 특질을 창조해냈다. 역사는 우연과 필연이 나선처럼 교차를 거듭하며 이어진 줄기다. 수많은 이들과 사건, 투쟁의 성취와 좌절이 거듭된 결과다. 그러므로 단 세 명을 중심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말하려는 시도는 심한 압축이며 비약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한국사의 모든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이해’다. 이해에는 지름길이 있으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8)
1부 한반도에 사로잡히다
1장 창세기
한반도의 자연은 거칠고 척박하며 위험하고, 많은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다. 유럽 역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순수한 폭력과 완전한 정복은 한반도에서 불가능했다. 일본과도 다르다. 일본 문명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야마토(大和)인이 원주민인 에조(蝦夷)인을 ‘인종 청소’하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일본 열도에서는 외부세력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원주민과 결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 문명에서 외부와 토착세력의 타협은 단군뿐 아니라 고구려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皺牟王)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이렇게 묘사된다.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내 어머니는 하백(河伯, 강물의 신)의 딸이시다.〉 단군처럼 부모의 혈통 중 하나는 외부세력(하늘)이며, 다른 하나는 토착세력(하천)이다. 만약 원래의 주인과 허락받지 않은 방문자 둘 중 어느 한쪽이 확실한 우세를 점했다면 혈통이 공평하게 섞인 것이 통치의 근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12-3)
# 추모왕(皺牟王). 보통 주몽(朱蒙)과 혼용되는 이름이자 고구려의 제1대 왕. 재위는 기원전 37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다. 다른 익숙한 호칭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고조선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 역시 원주민과 이방인의 평화적 결합체다. 분명히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결과적' 평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융합이 이루어진 후부터는 강한 결속력을 발휘하는 운명공동체가 되어 외세에 맞섰다는 점이 한반도 문명의 특수성이다. 처음에 예맥과 한은 달랐다. 한반도 남부에서 농경 문명을 세운 고대 한인들의 세 나라를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라고 한다. 이를 합치면 삼한(三韓)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三國)은 원래 삼한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고구려는 예맥인이 지배층과 중간층을 구성한 나라이며, 백제와 신라 그리고 신라에 흡수 통합된 가야는 예맥인과 한인이 혼합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지배층은 삼국을 삼한이라고 일컬었다. 즉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를 한반도의 토착민인 한(韓)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는 정복민과 피정복민이 철저히 불평등한 관계로 나뉜 세계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14)
2장 평화는 생존의 지옥이다
한반도인에게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는 생존투쟁이다. 한반도인은 무엇이든 잘 먹고, 어떤 식으로든 먹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그래야만 할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했다는 의미가 된다. 모든 먹거리 중에서도 인구부양력이 가장 높은 쌀에 대한 집착은 한국인의 유전자와도 같다. 식문화는 환경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한식은 밥을 보다 수월하고 많이 먹을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밥 자체엔 별다른 자극이 없다. 반찬은 그대로 먹으면 너무 짜고 자극적이다. 밥과 함께 먹었을 때 간이 맞아떨어지도록 계산되어 있다. 그래서 두부와 부침처럼 짜지 않은 반찬은 간장 양념에 찍어 굳이 짜게 만든 후 입에 넣는다. 반찬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밥의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신 김치는 입에 침이 고이게 해 밥이 목구멍에 잘 넘어가게끔 돕는다. 국물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의 식사는 밥, 국물, 찬으로 이루어진다. ‘밥과 밥을 돕는 나머지’는 한식의 기본 구성이다. 19)
쌀농사에 억지로 성공한 한국인에게 콩은 그 억지스러움을 유지하는 최고의 파트너다. 콩은 척박한 환경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면서, 논두렁에 콩을 심으면 병충해를 막아 벼를 보호해준다. 더욱이 땅의 영양소를 빨아들이기는커녕 뿌리에 공생하는 박테리아가 천연 비료 역할을 하면서 땅의 지력(地力), 즉 땅의 생산력을 회복시킨다. 그러므로 콩으로 장을 담그는 기술의 원류가 한국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더 깊이 원조를 따지면 고구려 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에서 콩장이 유래되기 전까지 동남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생선을 삭힌 간장(피시 소스, Fish sauce)을 사용했다. 에도 시대의 정치가이자 유학자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1719년 경 전 20권에 이르는 일본어 사전 《동아(東雅)》를 집필했는데 거기 고려장(高麗醬)에 관한 사실이 명확히 기술되어 있다. 〈고려의 장인 말장(末醬)이 일본에 건너와서 그 나라 방언 그대로 미소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글은 고려장이라고 표기하였다.〉 23)
한반도에 진정한 의미의 태평성대란 있어본 적이 없다. 평화 역시 개인들의 생존투쟁으로 꽉 채워져 있다. 다만 혼자서 생존투쟁을 할 순 없다. 집단노동으로 쌀을 수확하기 위해 한국인은 싫어도 좁은 거리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그리하여 쌀이 인구를 부양하고 사람들은 머릿수를 유지하기 위해 쌀농사에 매달리는, 악순환인지 선순환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나는 남들의 논에서 일해주어야 한다. 남들은 내 논에서 일해준다. 내 논에서 수확된 쌀은 나의 재산인데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들에게는 공공의 영역과 개인의 영역을 나누는 복잡 미묘한 감각이 발달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에게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정밀하게 뒤섞여 있었으며, 그러한 감각을 마을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감시하고 비교하게 된다. 간수가 죄수를 억압하듯 감시하는 것은 아니다. 느슨한 감시다. 다른 말로 하면 면밀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25-6)
‘한국인은 매우 무속적이다’는 말은 틀렸다. 한국인은 무속 그 자체다. 한국은 반도체와 전투기를 만드는 나라면서도 공식적으로 등록된 무당만 30여만 명이며, 실제로는 5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신기(神氣)가 아닌 도구와 점술법, 풍수와 같은 지식체계를 활용해 길흉을 점치는 역술인까지 합하면 약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본질적으로 모두가 무당인 한국인은 길몽을 꾸면 복권을 사고, 꿈자리가 사나우면 하던 일을 다시 생각해본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느낌이 좋거나 나쁘다거나, 촉이 왔다거나, 감을 잡았다거나 하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미심쩍은 장소에 대해서는 ‘음기(陰氣)가 느껴진다’는 말로 불운을 미리 피하려고 한다. 이런 말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 영적 능력을 나타내는 언어다. 한국의 무당은 ‘무당들의 무당’이다. 그만큼 개성도 강해서 이타적이고 동정적인 무당도 많지만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당도 흔한데, 한국에서 타락한 무당은 고객에게 매우 위험한 존재다. 36-7)
3장 전쟁은 산성이다
한반도 문명은 가까스로 죽음을 피해왔다. 중국은 태생적으로 통합적이며 팽창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진시황(秦始皇, 진나라의 시황제)은 최초로 중원을 통일하는 동시에 중국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한족 문명의 뿌리는 화하(華夏) 문명이며, 화하족은 한족의 원류다. 최초로 중국을 만든 진나라가 금방 멸망하고 한(漢)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면서 화하족은 한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족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다. 한족은 전쟁에서 졌을 때도 결과적으로는 이겼다. 중국은 분열하면 통합하고, 통합하면 팽창하며, 팽창에 실패하면 분열한다. 통일 중국은 팽창을 향해 달려갔다. 진나라는 현재의 베트남을, 한나라는 고조선을 쳤다. 한반도 문명은 여러 번 멸망할 뻔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에 의해 중국화 될 뻔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 치러진 나당전쟁(羅唐戰爭, 신라-당 전쟁)에서 자칫 패했더라면 꼼짝없이 사라질 뻔했다. 42-3)
산성(山城)은 말 그대로 산세를 따라 산에 지은 성이다. 한국에서는 꼭 첩첩산중이 아니더라도, 경사지에 지은 성을 산성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주지와 번화가 대부분은 지리학적으로 산이다. 한반도인은 흙을 조금만 파면 드러나는 암반 지대를 정복할 수 없었다. 한반도는 2/3 이상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화강암과 변성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변성암의 대부분은 역시 단단한 편마암으로 구성된다. 침공해온 이상 외적도 한반도 안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지형은 끝없이 이어지며 이지러진 단단한 산맥에 의해 침공해온 적이 행군에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다. 그래서 한반도인은 웬만해서는 적이 뒤에 남겨놓고 지나칠 수 없는 요지에 산성을 축조했다. 산성을 짓기 위해 기본적으로 꼭 필요한 정도만 산을 깎다가 멈춘다. 한반도에는 더 이상의 노동을 할 인력과 식량이 '없다'. 깎으며 나온 화강암으로 필요한 나머지를 만들어 화강암 산성을 완성한다. 49-51)
적에게 고통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산성 방어 체계의 첫 번째 단계는 청야(淸野, 들판을 깨끗이 비움)다. 청야는 성내에 결집하기 전에 적이 사용할 수 있는 일대의 식량과 물자를 모두 없애는 행위다. 성안에 채울 수 있을 만큼 채우고 남은 것은 불태운다. 주거공간까지 불태우는 경우도 허다하며, 우물에 독을 풀기도 한다. 그러나 침공군도 전쟁의 전문가인 이상 성안에서 버티는 시간이 대체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은 한국인이 산성 안에서 저항하는 시간에 충격을 받곤 했다. 인내력이야 당연하다. 한반도에 사는 이상 단군에게 강제로 배운 셈이다. 문제는 그 인내력을 다 함께 발휘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정직한 평지 위에 누가 봐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세운 성은 ‘정직한’ 한계를 갖고 있다. 적의 인구와 물량 앞에 정직하게 무너진다. 한국 성의 본질은 산성이다. 한국인의 선조는 외적이 침입하면 수없이 산성으로 이동했고, 거기서 함께 견디며 싸웠다. 52-3)
평양성(平壤城)은 성에 대한 한반도의 관념이 한 곳에 모두 담긴 걸작이자 그로테스크한 괴작이다. 먼저 평양성은 지형상 평지에서 산으로, 평지성에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순서대로 외성(外城)-중성(中城)-내성(內城)-북성(北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를 침탈한 적은 고구려의 성을 평지성으로 착각하고 진입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중성에서 갇히고, 중성을 돌파하면 내성에 다시 갇힌다. 이때는 미리, 아니 애초부터 고지를 점령한 상태인 고구려의 최후 수비군에게 격퇴당하는 구조다. 이때 격퇴당한 적은 거꾸로 내성에서 중성으로, 중성에서 내성으로 성벽을 뚫고 탈출해야 한다. 성벽을 완전히 탈출해도 병목현상에 걸린다. 평양성은 천연 해자(垓子)인 강물에 둘러싸여 있는데, 성 안팎을 통하는 각 문은 나가자마자 응당 있어야 할 교량 대신 곧바로 강물을 만나도록 설계되어 있다. 좁은 길을 따라 우회해야 교량을 만날 수 있다. 이때쯤에는 탈출행렬이 얽혀 이미 매복한 고구려 군사를 만나게 마련이다. 59-60)
# 평양성(平壤城). 고구려 시대에는 장안성(長安城)으로 불렸다.
4장 전쟁은 사격이다
한반도에서 생존공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군은 덜 죽고 적군은 더 죽여야 한다. 한반도가 ‘중국’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교환비가 아군에 극단적으로 유리해야 한다. 유리함은 '비로소' 승부를 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즉 압도적인 교환비는, 있으면 좋은 수준을 넘어 공기처럼 당연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한국인이 집착하는 무기의 형태를 규정했다. 그것은 원거리 발사 무기다. 화약 무기가 출현하기 이전에 한반도를 상징하는 무기는 활이다. 한국의 활은 북방 유목민 계통의 활로 합성궁(合性弓)이다. 합성궁이란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인 재료로 활대를 제작하는 활이다. 고대부터 이어진 한국의 합성궁은 초식동물의 뿔과 목재를 결합해 만든다. 그런데 활에 쓰는 초식동물의 뿔은 굵고 길며 형태가 단순해야 한다. 이 조건에 가장 잘 들어맞는 동물은 물소와 야크(Yak)다. 한반도에는 둘 다 없다. 그래서 조선 시대 내내 활을 만들기 위해 동남아시아산 물소 뿔을 수입한 기록이 자세히 남아 있다. 63)
# 두 가지 이상의 다른 목재를 사용한다면 이는 합성궁이 아니라 복합궁(複合弓)이다.
한국인에게 화포란 ‘강한 활’이며, 쏜다는 점에서 같다. 산성과 발사는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다. 산성은 기어 올라오는 적을 쏘아 맞히기에 가장 이상적인 장소이며, 발사는 산성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행위다. 가장 천재적인 특별함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경우다. 13척의 배로 133척의 적 전선을 제압한 명량해전(鳴梁海戰)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적 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이 전투가 이순신이 정밀하게 설계한 산성 방어와 사격전의 조합이라는 사실은 무시되곤 한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일부러 먼저 역류(逆流)를 맞는 선택을 했다. 산성 방어에서는 적이 알아서 몰려들어야 전과를 얻을 수 있다. 물론 그가 불과 13척의 전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본 일본군은 한시라도 빨리 철천지원수를 없애버리고 싶어서 다가오지 말라고 해도 달려왔겠지만, 명량은 달려드는 순간 거센 물줄기를 타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격파되기 위해 기계적으로 떠밀려가는 곳이었다. 67-8)
이순신이 관망하던 아군 전함을 불러모아 전투에 참여시킨 시각은 물살의 방향이 바뀌기 직전이었다. 그는 약 세 시간을 배 한 척으로 혼자 싸웠다. 소집 명령을 내릴 시간은 많았다. 그러므로 왜 굳이 그 시점이었는가 하는 비밀은 물살에 있다. 물살이 바뀌면 일본군 전함은 역류를 맞아 자동적으로 밀려가고, 조선군이 순류(順流)를 타고 전진하게 된다. 즉 일본군은 산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 이순신이 원래는 육군 장교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한반도가 중국의 백만대군을 육지에서 상대해온 방식을 사용했다. 〈적의 공성을 좌절시킨다. 실패한 적이 물러갈 때 하나 혹은 여러 산성에서 나온 아군이 결집한다.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적의 뒤를 쳐 대량살상한다.〉 이순신은 적의 공성과 후퇴가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지도록 계산했다. 물살이 바뀌자 전투는 일방적인 학살로 바뀌었다. 이순신은 마지막 단계인 대량살상에서까지도 지상전의 이상적 결과를 해전으로 옮겨왔다. 70)
한반도 주민에게 자연과 농토는 애증의 대상이다. 저주하지만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는 없는 무언가이다. 이는 삶을 저주하는 동시에 사랑하는 한국인의 인생관과 직결되어 있다. 주어진 환경이 척박할수록 먹고살기 위해 부대끼고 씨름하고, 결국에는 깊게 이해하게 된다. 척박한 논밭에서 죽기 직전까지 노동해 수확한 곡물로 밥을 지으면 밥그릇에 달라붙은 곡식 한 톨도 버릴 수 없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지만, 이 순서는 바뀔 수도 있다. 반대로 고통을 감내한 결과 소중해지기도 한다. 깊은 이해는 사랑이다. 그 사랑은 찬양이나 감격과는 다르다. 인도인이나 프랑스인이 끝없이 펼쳐진 풍요로운 농경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숭고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인은 자연에 감사하지 않지만 숭고함보다 진하고 끈끈한 애착을 느낀다. 인간에게는 타인도 환경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한국의 자연과 인간이 한국인에게 가장 미움받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73-4)
5장 전쟁과 평화
산성 방어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전쟁만이 숙명은 아니기에 한국인은 재난 상황에서도 산성 방어를 수행한다.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자 재난 상황을 맞아 한국인들은 결집했다. 금 모으기 운동이 과연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었는지는 논란이 많다. 한 가지, IMF가 강제적으로 올린 금리를 인하하는 결과를 가져온 건 분명하다. 이는 한국 경제가 외국 자본에 완전히 잠식되는 사태를 막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과정 전체에서 금 모으기 운동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영 계측하기 어렵다. 그러나 금 모으기의 실질적 효과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주제는 한국인의 행동 양식이지 행동의 결과가 아니다. 약 227톤의 금이 모였는데, 참여자는 무려 351만여 명이었다. 전국적으로 4가구당 1가구가 자신의 손해를 감수했다. 세계적으로 이런 사건은 극히 드물지만, 한국인처럼 나라에 불만이 많은 국민이 반대편으로 돌변하는 경우로는 아예 유일할 것이다. 75-7)
한국인이 의인으로 변하는 작동 원리와 의인의 행동 양식은 외국과 다르다. 평소에 한국인은 세상은 돈과 지위가 최고일 뿐인 지저분한 정글이고, 자신 역시 철이 좀 든 대가로 돈만 아는 속물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재난 상황을 발견하면 자신만의 산성 전투에 임한다. 2001년 일본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 고 이수현 씨는 신오쿠보(新大久保) 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기 위해 선로에 뛰어들었다가 숨지고 말았다. 한국에는 이수현 씨와 비슷한 영웅이 정말로 흔하다. 2015년 의정부 오피스텔 건물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지나가던 간판업자인 이승선 씨는 옆 건물 옥상을 통해 불타는 건물로 진입했다. 그는 작업할 때 쓰는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화염과 연기가 타오르는 건물 벽에 매달려 열 명의 시민을 구조했다. 건물 주민들의 체중을 오직 팔 힘만으로 견디며 구해냈는데, 당연히 생사의 위기를 여러 번 오갔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관심을 피해 재빨리 도망갔다. 82)
한국인은 자신이 속물이라고 착각할 뿐 아니라, 착각이 진실임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평소에 한국인은 남들을 무시할 수 있는 잘난 ‘년놈’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렇듯 평시의 한국인은 평범함을 거부한다. 그러나 전시의 한국인은 특별함을 거부한다. 남들보다 희생적이면서 누구보다 조용한 존재가 되려고 한다. 외적에 맞서는 산성 안은 혼자만 주목받아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원치 않게 영웅으로 추대되기라도 할라치면 자신을 뭉툭하게 깎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한국인의 선조가 한반도에 사로잡힌 탓에 얻은 특질을 천박한 숭고함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어떤 인간집단인가? 한국인은 '숭고한 속물'이다. 숭고한 속물은 평시와 전시, 생존의 지옥과 멸망의 그림자 사이에서 태어난 별종이다. 그러나 한반도가 한국인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한반도는 민족성의 얼개가 잡힌 틀이지, 민족성 자체는 아니다. 민족성이 형성되려면 먼저 하나의 민족이 탄생해야 한다. 84-5)
2부 민족의 탄생
6장 고려는 고구려다
한국인들은 고구려가 통치했던 만주와 요동을 잃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아쉬워하는 나머지, 고구려의 영토뿐 아니라 고구려 자체가 사라졌다고 착각한다. 고구려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는 고구려다. 현대에는 고씨 왕가의 첫 번째 왕조와 왕씨 왕가의 두 번째 왕조를 시대적으로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그래서 고대 국가를 고구려로, 중세 국가를 고려로 구분해 부른다. 물론 나도 이 구분법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부터 고구려와 고려는 동의어였다. 고구려는 첫 번째 고려고, 고려는 두 번째 고구려다. 삼한/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흔들리자 군벌이 난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펼쳐졌고, 고구려계 유민들이 후삼국 시대에 고구려를 계승해 고려를 세워 삼한을 재통일했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교과서에서 본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려 건국 세력은 세간에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는 착각처럼 고구려 계승을 ‘정치적으로 표방’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고구려인이었다. 87)
고려 태조 왕건은 발해를 친척지국(親戚之國, 친척의 나라)이라고 불렀다. 고려인과 발해인은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을 공유했다. 실제로 발해는 외교문서에서 자국을 ‘고려’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두 나라 모두 왕성(王姓, 왕가의 성)은 고구려 왕가인 고(高)씨가 아니었다. 고려는 왕(王)씨의 나라이고 발해는 대(大)씨의 나라이니, 친척이라는 표현이 그림처럼 들어맞는다. 다만 이때 친척이라는 말은 현대인의 느낌보다 훨씬 강렬한 표현이다. 친척(親戚)에서 친(親)은 요즘의 ‘친구’, ‘친하다’에 함께 쓰이는 한자지만, 지금처럼 편하게 써도 되는 말은 아니었다. 親은 피로 맺어진 혈족이란 뜻이며, 한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의미다. 반면 혼인으로 맺어진 외척을 뜻하는 척(戚)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친척지국’을 현대적 느낌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한 배에서 나온 친형제자매지만 지금은 각자의 집에서 따로 사는 사이.〉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왕건은 고구려 종주권 논쟁을 공짜로 피할 수 있었다. 90-1)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을 때 당나라의 군주는 고종(高宗)이었다. 고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동(한반도)의 두 나라를 원정했지만, 고구려가 요수(遼水, 요하강)를 건너 쳐들어온 것도 아니었고, 백제가 바다(황해)를 건너 쳐들어온 적도 없다. 해마다 많은 병사를 보내느라 우리의 소모가 컸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후회된다.〉 지나치게 값비싼 실험을 한 후 한반도와 중국은 이후 암묵적 합의에 이르렀다고 확신한다. 중국은 한반도가 고개를 숙여주기만 하면 건드리지 않기로 결론을 굳히고 행동했다. 한반도 왕조는 중국이 책봉하는 제후국의 지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체면을 세워주는 대신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는 거부하기로 했다. 이러한 타협은 그 자체로 평화다. 하지만 유목 전사들은 한반도 왕조와 주민이 중국 보병과 나눈 교훈을 알지 못했다. 고려는 유목 제국에도 같은 교훈을 주입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 그 상대는 거란이었다. 92-3)
7장 추남과 사생아
강감찬은 고려의 개국공신 강궁진(姜弓珍)의 아들인 데다 신분과 상관없이 실력만으로 과거시험을 치러 장원급제를 거둔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러나 늦은 나이에 예부시랑(禮部侍郎, 외교부 겸 문화부 중급 공무원)으로 취직했다는 이야기를 빼면 오랫동안 그의 기록은 별 다른 게 없다. 있다면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채 지방 행정관 노릇을 전전했으리라는 암묵적 흔적뿐이다. 강감찬이 초특급의 배경과 재능으로도 평생에 걸쳐 소외된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네 글자다. 사료는 그의 생김새를 잔인하게도 ‘체모왜루(體貌矮陋, 몸은 조그맣고 생김새는 너저분함)’라고 기록한다. 한자로 쓰인 전근대 동아시아의 전통 역사기록은 외모에 대한 평가를 아끼는 특징이 있다. 정말로 특별한 외모만이 묘사된다. 고려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였다. 한국인은 외모를 떠나 인품과 실력만으로 인물을 평가해야 마땅하지 않냐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유교적 가치가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의 영향이다. 97)
거란의 1차 침공은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그 유명한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끝났다(993년, 성종 12년). 하지만 1010년 말 겨울, 2차 침공에 나선 거란군의 말발굽이 개경에 드리우자 조정은 정신적으로 붕괴했다. 모두가 현종을 에워싸고 항복을 부르짖었다. 유목 전사들은 농경민의 도시를 공격할 때 항복과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 후, 저항할 경우에는 함락한 도시의 주민 모두를 죽이는 습관이 있었다. 30만 야전군이 사라진 조정이 현종에게 항복을 요구한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종은 항복이 과연 옳은지 확신할 수 없어 버텼다. 유일하게 강감찬이 몽진을 주장했다. 그건 왕의 도시(개경) 대신 왕의 나라, 바로 고려의 전 국토를 걸고 끝까지 해보겠다는 뜻이었다. 애초에 현종은 개경에서부터 신하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배신당했다. 현종이 꼭두각시 사생아 임금이라는 사실이 두고두고 문제였을 것이다. 사생아 임금과 나이든 추남(강감찬)은 뜻을 합쳤다. 현종은 몽진을 결행했다. 104)
요 성종이 통주전투에서 승리하고 남하를 시작할 때, 양규는 흥화진에서 700명의 병사를 끌고 나와 자신만의 전쟁을 시작했다. 양규는 전투가 벌어진 통주로 간 후, 패잔병을 수습해 전력을 1700명으로 보강했다. 그의 별동 타격대는 이어서 거란군에게 넘어간 곽주성(郭州城)을 되찾았다. 곽주성을 지키는 거란군은 6천이었는데, 불과 1700의 병력으로 기습에 성공한 것이다. 이로써 양규는 흥화진-통주성-곽주성을 잇는 선을 확보했다. 거란 침공군과 거란 본토의 연결을 완전히 끊는 치명적인 선이었다. 양규는 현종을 잡기 위해 남하하는 거란군의 후방과 보급선을 쉬지 않고 타격했다. 양규는 유격전을 치르던 중에 귀주(龜州)를 지키던 별장(別將, 중하급 장교) 김숙흥(金叔興)과 연합해 작전을 함께하는 관계가 되었다. 김숙흥은 따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거란군 1만 명의 머리를 베는 전과를 올렸다. 두 사람이 요 성종이 남겨둔 후방을 타격해 진격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현종은 붙잡히고 말았을 것이다. 106)
쉴 새 없이 움직인 양규-김숙흥 연합 특수부대의 싸움은 1011년 3월 5일 끝났다. 애전(艾田)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둔 직후, 두 장수의 부대는 마침내 그들을 노리고 있던 요 성종의 본대(本隊)와 조우했다. 애전에서 죽은 1천 명의 거란군은 요 성종이 던진 미끼였다. 요 성종은 자신의 전쟁을 망친 주범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죽음이 예정된 마지막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최후의 결사대는 구출한 고려인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전면 돌격을 감행했다. 양규와 그의 군사들은 고려의 평민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출하기 위해 전원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는 국가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 충성했다. 하나는 왕조, 하나는 백성이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이다.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지만, 11세기의 중세 전사에게는 비범한 정신세계인 것이다. 고려왕조 역사에 영웅은 많지만, 그처럼 도덕적으로 완성된 영웅은 없다. 그러하기에 현종은 양규가 죽음으로 던진 질문에 정답을 제출해야 하는 숙명에 내던져졌다. 107)
8장 싸움터에 솟아오른 비명(碑銘)
현종은 재위 기간인 22년 전부를 극심한 가뭄, 메뚜기떼, 지진, 산사태, 거란의 2차 침공이 남긴 피폐함, 여진족과 해적의 약탈에 시달렸다. 그 상태에서 거란의 3차 침공에 대비할 비용과 인력을 마련해야만 했다. 1014년, 경군(京軍, 중앙군)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한 일로 고위장교 김훈(金訓)과 최질(崔質)이 벌인 난을 진압한 이후, 현종은 이때부터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사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위해 국가 예산을 집행했다. 높은 계급이나 군반씨족뿐 아니라 병졸, 즉 일반 백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국가는 백성과 계약의 관계라는 사실을 11세기에 받아들였다. 백성이 소유물이 아니라 계약당사자일 때 국가는 백성에게 책임을 진다. 책임이란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것이다. 다음 전쟁이 다가오는 중인데 현명한 행동이었을까? 전쟁이 다가오기에 현명했다. 자신과 가족이 존중받아야 충성하는 보람도 있는 법이다. 고려는 애국할 가치가 있는 나라여야만 했다. 112-4)
계약만으로 한반도 주민을 하나로 결집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다시 말하지만 고려는 고구려와 동의어다. 국명이 고려인 나라에서 신라계와 백제계 주민이 하나가 되려면 또 하나의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져야 했다. 현종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대 군주들의 능묘를 정비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삼국의 능묘를 지날 때는 의무적으로 말에서 내리고(하마, 下馬)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법을 제정했다. 그러므로 고구려인은 신라왕의 무덤에, 신라인은 백제왕의 무덤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이러면 원칙적으로 삼국의 역사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역사가 된다. 원칙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이 오면 의외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백제인인 내가 어째서 고려의 졸병이 되어 말 타는 오랑캐 놈들한테 돌격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법한 순간에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워놓고도 관념적인 건국의 원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짜내왔다. 114)
1018년 말, 이번에도 한반도의 겨울에 10만 명의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선봉은 우피실군과 천운군(天雲軍)이었다. 우피실군이 카간 개인이 소유한 군대라면 천운군은 요나라의 정규군 중 최강의 기병이었다. 요련장군(遙輦帳軍)도 포함되었다. 요련씨(遙輦氏)는 황가인 야율씨와 황후가인 술률씨를 제외하면 거란족 중 가장 고귀한 가문으로, 요련장군은 거란 모든 부족의 자체 군대 중 가장 고급이며 정예였다. 요나라는 향병(鄕兵)제도를 운영했는데, 향병이란 점령지 주민이나 피정복민을 민족 단위로 징병해 구성한 군대였다. 가장 강력한 향병 부대는 발해군(渤海軍)이었다. 이번 원정에는 발해군도 포함되었다. 총사령관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소배압(蕭排押)이었다. 이에 반해 현종이 임명한 총사령관(상원수, 上元帥)은 군대를 처음 지휘하게 된 60대의 강감찬이었다. 총 병력 20만 8천 3백 명으로, 통주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2/3 수준이었다. 현종과 강감찬은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전쟁을 결론짓기로 했다. 115)
귀주대첩 이후 현종은 사과의 뜻까지 전하며 거란에 입조했다. 거란군의 대패에 환호하던 송나라만큼이나 요나라도 황당해할 일이었다. 여기엔 비밀이 있다. 고려가 황제국이 되면 다른 두 황제국과 제국 경쟁을 벌여야 했다. 여기엔 조공보다 넉넉한 하사품으로 조공국을 모집하는 출혈 경쟁도 포함된다. 제국이냐 왕국이냐는 백성의 삶의 질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다. 동아시아 역사는 실패한 제국들의 무덤으로 가득하다. 현종은 송, 요에 뒤진 3등 제국 대신 1등 왕국이 되기로 했다. 1등 왕국이 어느 나라에 입조하는지에 따라 현재의 진정한 천자국이 결정된다. 이때부터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균형을 결정하는 조정자가 되었다. 요나라의 패전 직후였으므로 무게 추가 송나라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러므로 현종은 망설이지 않고 요나라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현종 이후 고려는 물론 조선까지 중원 제국이 가장 중요하게 대하는 1순위 왕국의 지위는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 123)
현종은 거란과의 모든 전쟁이 끝난 후 아직 살아있을 때부터 하늘이 내린 성군이라는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는 심지어 조선왕조에서도 한반도 역사가 낳은 특출난 성군으로 우대받았고, 조선왕조는 그에게 제사를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의 여러 기사를 보면 현종을 단순히 좋은 군주로 여기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선의 사관(史官, 역사를 기록하는 관료)뿐 아니라 왕들까지도 현종을 한반도 역사를 다시 세운 위인이자, 역사 자체가 현종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의식을 가졌다. 단군이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시조라면, 현종은 실존했던 진짜 단군인 셈이다. 현종은 1031년 38세의 나이에 쓰러졌다. 전쟁이 끝난 후 몇 년 연속 풍년이 들어도 국가를 복구하기 버거웠겠지만, 현종은 십 년이 넘도록 멈추지 않는 가뭄과 씨름했다. 그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다음 달 사망했다. 사인은 과로사로 추정된다. 이 해에 요 성종과 강감찬도 명을 달리했다. 124-5)
3부 민족성의 탄생
9장 천명과 혁명
현재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대략 ‘여말선초 신진사대부(고려말~조선 초의 신흥 유학자 집단)’일 것이다. 하지만 명칭은 본질이 아니다. 그들이 기본적으로 '철학자'라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들이 왕성(王姓, 왕의 성씨)을 왕씨에서 이씨로 바꾸고 새로운 체제를 만든 일은 혁명이다. 당시 말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다. 그들은 혁명으로 좋은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문제는 진리와 진리가 충돌한다는 데 있다. 혁명은 하늘을 배신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범죄다. 그런데 좋은 나라를 건국하는 일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혁명이란 명, 즉 천명을 갈아치운다는 뜻이다. 천명은 받는 것이고, 혁명은 하는 것이다. 천명이 수동이라면 혁명은 능동이다. ‘나를 위해’, ‘동지들을 위해’ 뒤집어엎는 행위는 역성혁명은 될 수 있어도 진정한 혁명은 아니다. ‘사회구성원 모두를 위해’ 체제를 전복하는 결단이야말로 혁명이다. 혁명의 목표는 신체제에 있다. 130-1)
자신이 섬기던 왕조를 배반하는 일은 정도전에게 커다란 좌절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혁명에 몸을 맡겼기에 돌이킬 수 없었다. 혁명, 즉 범죄를 정당화하는 방법은 분명했다. 반드시 결과가 좋아야만 했다. 조선 건국의 아버지들은 스스로 역사의 감옥에 걸어 들어갔다. 백성을 잘 먹고 잘살게 하는 일에 실패하면 죄를 짓는 셈이었다.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자들이 된다. 신진사대부들은 철학자였지만, 동아시아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동아시아에서 철학은 현실이며 정치철학이다. 간단히 말해 결과주의다. 성리학 이전의 전통 유교는 논리적이지 않다. 유교가 질서를 사랑하는 이유는 질서 잡힌 사회에서 사람이 덜 죽고 괜찮게 먹고 살기 때문이다. 공리주의(公理主義)란 간단히 말해 사회 전체에 되도록 행복은 많고 불행은 적게 하자는 말이다. 서양에서 공리주의는 치열한 철학적 증명을 거친 영국 경험론의 결론이다. 동아시아에서 공리주의는 기본 전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131-2)
자녀를 보살피는 일이 가장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국가를 사유물로 여기는 유럽 국가보다 동아시아의 유교 국가들이 공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처자식을 어떻게 대할지는 결국 가장인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장의 권위는 확실하지만 그의 의무는 모호하다. 이런 나라에서 백성은 임금에 대해서 착한 가장이길 바라는 기대만 가질 수 있다. 조선은 달랐다. 조선은 그때까지의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대부가 임금을 감시하고 끝없이 일을 시키는 체제를 만들었다. 조선에서 임금은 공공시설이자 한 명의 정치인, 그리고 한 명의 공무원이었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대한 재산을 국고에 귀속시키려고까지 했었다. 개인 재산 없이 궁궐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나라에 필요한 일만 하라는 거였다. 조선의 정궁(正宮, 최고 권위의 공식 궁궐)인 경복궁은 임금을 갑갑하게 옥죄고 감시하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경복궁에서 임금은 궁을 향유하는 사람이 아니다. 궁이라는 시설의 일부다. 134-5)
10장 임금의
한국인은 조선인일 때부터 관(官)의 존재 목적을 백성을 위한 도구로 인식했다. 도구에는 임금도 포함된다. 조선에서 군주는 쓸모가 있을 때만 인정받는다. 쓸모란, 현실에서 ‘사용 가능’한 ‘실재’여야 한다. 백성이 임금을 공무원으로 사용한 확연한 예는 신문고다. 신문고 앞에는 줄이 길게 서있었기에 조선인들은 격쟁(擊錚)을 더 선호했다. 격쟁이란 문자 그대로는 두들겨 쇳소리를 낸다는 뜻으로, 일반 백성이 궁궐에 침입하거나 왕의 행차 길에 난입해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억울한 일을 호소하는 행위였다. 격쟁이 소란스러움으로 이목을 끌고자 했다면 글로 조목조목 주장을 했던 상언(上言)도 있다. 상소(上疏)가 공적인 문제에 대해 공인의 자격으로 행하는 입장 표명과 요청이었다면, 상언은 사인(私人)으로서 주로 가문이나 친족, 스승이나 학우(學友) 등의 명예에 관련된 일을 진정하는 행위였다. 국가적 차원에서 민의 수렴과 민원 해결에 노력했던 정조 때에 상언과 격쟁이 가장 활발했다. 136-7)
상소는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 왕에게 전달하는 글이니 당연하지만, 비교적 대등한 관료와 사대부끼리 벌이는 말싸움도 있다. 정파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탄핵(彈劾, 상대의 죄를 책망함)이다. 한번 탄핵당하면 어떻게든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탄핵한 측은 상대를 유배 보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직으로 좌천시키는 일 정도는 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탄핵의 책임을 지고 자신이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 한국인에게 시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너무나 중요해서, 오죽하면 시비를 건다는 말의 뜻이 바뀌어버렸다. ‘시비를 건다’는 원래 말뜻 그대로 ‘논쟁을 제안한다’는 말이다. 현재는 싸움을 거는 모든 종류의 짓거리를 뜻한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힘없는 서민’이다. 논리력을 발휘할 때도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만큼 편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힘없는 서민’이라는 말이 즐겨 사용되는 이유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공격이기 때문이다. 144)
이상적으로 제시된 기본 일과에 따르면 조선 임금은 밤 11시부터 6시간 취침한다. 기상 후 한 시간은 자신보다 항렬이 높은 왕실의 어르신에게 문안을 하고, 문안을 받는다. 이 한 시간은 유교 국가의 왕으로서 유교적 가치를 재확인하는 시간이다. 이후 오전 수업과 오전 업무를 소화한다. 점심 식사 후에도 역시 수업과 업무를 치른다. 오후 5시부터는 궁궐 내 야간 숙직자를 확인한다. 숙직자 확인은 사소해 보이지만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거나 암살의 위협에 대비하려면 필수적이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야간 근무와 암구호가 얼마나 필수적인지 잘 안다. 조정은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여야 하니, 궁궐의 가장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저녁 식사 후에는 또 공부하고 왕실 저녁 문안 행사를 완수한 후, 임금 앞으로 날아온 상소문을 읽어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여기까지가 이상적인 일과다. 현실은 더 복잡하고 고단했다. 조선의 모든 불만이 임금에게 배달되었기 때문이다. 149-50)
한국인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정도전과 그의 일파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라 독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현대 한국의 기준에서 그렇다. 태종은 동시대 외국의 군주들은 물론 현대의 독재자들보다도 훨씬 불편한 생활과 많은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역대 임금의 질병과 스트레스 증상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태종은 왕이 되는 데 성공하고 왕권(王權)이 신권(臣權)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결국 정도전이 세운 나라의 왕이라는 틀 밖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태종은 정도전의 조선 설계도면 거의 전부를 물려받았다. 정도전은 공식적으로만 역적이었을 뿐 조선왕조 내내 조선 사대부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무력은 철학자를 죽일 수 있지만, 철학을 이기지는 못한다. ‘왕의 나라’ 조선의 군주는 결국 ‘사대부에 의한 나라’에 갇힌 존귀한 포로였다. 동시에 사대부 역시도 그들 자신에게 부과한 도덕률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151)
11장 사대부에 의한
현대 한국인은 민주주의 국가에 살기에 조선의 건국 이념인 민본(民本)을 멋지게 생각한다. 백성을 위한 나라라니,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고려 시대에 혁명을 결심했다. 애초에 백성이 대체 무엇인데 신진사대부는 그들을 위해 그토록 목숨을 걸었는가? 전근대 엘리트에게 ‘민중의 삶의 질’이 목숨을 걸고 혁명을 저지를 만큼 중요했던 적은 없다. 아무리 고려왕조에 의해 민족이 탄생했다고 해도, 고려 체제는 바깥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성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지, 국가가 백성의 도구라는 사고방식은 그때껏 출현해본 적이 없다. 어엿한 국가가 탄생한 후 민중은 줄곧 국가의 재산이었다. 세금(곡물이라면 조세)은 날것으로 말하자면 착취였다. 그런데 신진사대부는 신기하게도 민중의 고통에 공감했다. 이것이 철학의 위대함이자 이념의 힘이다. 조선은 이념 국가다. 현재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국가 중 조선과 가장 비슷한 체제는 단언컨대 소련(소비에트 연방)이다. 154)
조선이 아무리 도덕적 이념 위에 세워진 국가라 한들, 사대부층이 백성의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생략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방적인 엘리트주의다. ‘혁명이 좋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으니 너희는 그저 믿고 따라오면 된다.’ 조선의 천재 중 한 명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대표작은 《목민심서(牧民心書)》다. 여기서 ‘목’은 목양, 목축, 유목의 목이다. 백성은 가축을 치듯 ‘이끄는’ 대상이다. 사(士, 사대부)와 민(民, 백성)의 서열은 분명하고, 아주 권위적이다. 사대부가 이 정도 권위를 가질 근거가 지식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오직 도덕성이다. 사대부의 도덕성은 백성보다 우월해야 하므로, 선량한 본바탕으로 태어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선량하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해야만 한다. 정도전과 그의 동지들이 후대의 사대부들에게 떠넘긴 숙제다. 조선의 사대부는 높은 학문적 식견을 가진 경우에도 예외 없이 뻔하디뻔한 도덕 주문을 자신에게 주입했다. 157-8)
사대부는 공부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이 아닌 다수의 타인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이다. 유학이라는 틀 안에서 인문과 기술은 분리되지 않는다. 열 살도 되기 전에 달달 외운 ‘소학’을 죽을 때까지 읽고 또 읽으며 수양하는 것도, 계단식 논에서 쌀 생산에 성공하는 일도 똑같이 사대부의 업이다. 20세기 한국 역사학자들은 유학이 서구의 실용적 기술에 패배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실학’이라는 없던 단어를 억지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고리타분한 유학’과 ‘현실적인 실학’을 인위적으로 분리해냈다. 그다음 유학자들 속에서 주장에 맞아떨어져 보이는 이들을 솎아내 ‘실학자’라고 이름 붙였다. 마침내 실학과 실학자의 존재를 정설로 만들어내 교과서에 싣기까지 했다. 실학(實學)이라는 말에는 기존의 유학이 뜬구름 잡는 허학(虛學)이라는 가히 폭력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실학자’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는 ‘유학자’로서 실용을 추구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유학은 한 번도 실학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160-1)
12장 백성을 위한
조선의 별명 중 하나는 대식국(大食國), ‘많이 먹는 나라’였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과 일본 양쪽의 기록은 모두 조선인의 식사량이 일본인의 3배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전쟁 초기에는 조선군과 일본군 모두 정탐에 실패했다. 식량 소비량을 탐지해 적의 군세를 판단하는 건 동아시아에서 전술의 기본이었다. 외국에서 온 동맹군도 놀랐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이렇게 많이 먹는데 나라가 운영되는 게 가능한가 진심으로 물었을 정도였다. 다만 이여송은 조선의 임금과 집권층이 얼마나 가난한 살림을 유지하는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조선인들은 충분히 먹었지만, 거의 곡물과 섬유질로 영양을 채웠기 때문에 균형 잡힌 영양식은 아니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이 이웃 나라보다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했지만, 먹을 수 있을 때 먹는 양과 자주 먹을 수 있는 사정은 다르다. 쌀을 포함한 곡물로 가장 중요한 영양성분인 단백질을 보충하려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되도록 많이 먹는 것이다. 170-1)
먹는 문제는 가장 중요한 욕망일 뿐, 욕망 전부는 아니다. ‘의식주’라는 기본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인간은 사회적 성공을 꿈꾼다. 인간은 비교의 동물이다. 남들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한다. 이 분야에서 한국인을 뛰어넘는 민족은 없다. 조선의 사대부는 관료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양민들은 눈에 불을 켜고 지주나 양반이 될 기회를 노렸다. 천민들은 양민으로 올라설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조선 시대는 매우 느슨한 신분제였다. 조선에서 신분이란 개인의 성공으로 얻을 수 있는 타이틀이기도 했다. 드물지만 노비 출신 재상이 배출되기도 했고, 가뭄과 자연재해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농민은 일단 살기 위해 스스로 노비계약을 하기도 했다. 조선은 모두가 잘 먹어야 한다는 관념에서는 공산주의적 면모를 지녔으면서도,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무척 자본주의적이었다. 한국에서 평등은 모두가 꼭대기를 향해 질주할 기회를 얻는 평등이다. 한국인은 결국 모두가 양반이 되는 데 성공했다. 176)
모두가 양반이 된 현상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근대 조선인-한국인이 전근대 신분제를 부정하고 극복하는 대신, 반대로 신분제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는 논리다. 실상은 매우 단순하다. 좋은 건 손에 쥐고 봐야 하는 게 한국인의 속성이다. 신분제를 강력히 거부하는 모범적인 현대인이 되더라도, ‘양반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멋진 사람이 되어 손해볼 것은 없다. 한국인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먹고 살게 해주는 은혜를 원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사다리 걷어차기’다. 사다리를 오르다가 떨어져 죽어도 상관없다. 단, 사다리는 있어야만 한다. 한국의 좌파와 진보정당은 이 사실을 습관적으로 망각하기 때문에 불리함을 자초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욕망의 동물인 한국인은 ‘자신이 동의할 수 있는 정글’을 원한다.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바꾸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 앞에 나서고, 가끔은 무리수를 두다가 자빠져 의기소침해하는 펭수는 한국인의 사회적 욕망을 대변한다. 177-8)
백성이 욕망 추구에 자유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조선의 백성인 이상, 아무리 공권력에 떼를 쓰는 행위가 허용되어도 봐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조선은 이념 국가답게 수직적이고 획일화된 사회를 추구했다. 조선의 설계자들은 하나의 원칙으로 전국을 통일하고자 했다. 조선에는 요즘으로 치면 ‘국민 공통 교과서’가 존재했다. 바로 《소학(小學)》이다. 사대부와 백성은 학문과 교양에서 차이가 날지라도 소학에서 만났다. 원래 10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한 교재인 소학은 모든 조선인의 교집합이라 할 수 있다. 소학을 읽거나 외우지 않은 백성이라도 소학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았다. 조선은 고도의 중앙집권을 성취했는데, 소학은 정신적 중앙집권이었다. 소학이 가장 강조하는 도덕은 효(孝)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장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바로 부모와 스승과 군주의 은혜는 같다는 명제다. 조선 질서의 토대는 효(孝)다. 효란 부모가 사랑을 주었기에 갚아야 하는 의무다. 182-3)
효의 원리를 철학적 차원에서 비정하게 파고 들어가면, 사실 장사의 논리다. 본질이 도덕적 부채이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받은 게 있으니 갚아야 한다는 게 한국적 효다. 대승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제목은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무거운지 가르치는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불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종교다. 진리로 향하는 길에 부모의 은혜와 같은 인간관계를 거추장스럽게 여긴다. 많은 대승불교 경전이 위경(僞經, 가짜 경전)이라지만, 부모은중경은 제목부터 대놓고 위경이다. 〈부모은중경〉은 부모가 ‘독자인 당신 따위는 상상도 못 할 고생을 치르며’ 어떻게 자식을 낳고 키웠는지 구구절절 노래한다. 자식에게 마음의 빚을 확실히 지어주기 위해 의학적으로 몹시 정확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임신부터 출산, 산후까지 산모의 신체 변화와 각종 후유증이 망라되어 있다. 조선은 공식적으로 불교를 배척한 나라이지만 부모은중경만큼은 소학의 파트너로 권장했다. 183)
13장 조선의 몰락
한국에는 조선 사회가 한계에 부딪힌 이유를 감성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낳은 정신적 후유증을 예상하는 것이다. 양란(兩亂)에서 조정은 훌륭하게 백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한 번은 임금이 자신의 국토 안에서 적국의 군주에게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르기까지 했다. 그래서 조선의 남성 지배층은 피지배층 앞에 면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그들은 무조건 자신에게 복종하라는 수직적이고 성차별적인 윤리를 강요하게 되었으며, 조선은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서서히 몰락해갔다는 이야기다. 실상 임진왜란은 심각한 물질적 피해를 입혔지만 정신적인 절망을 주지는 않았다. 과정이야 어쨌든 침공군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면 승전이다. 거꾸로 병자호란은 대단한 충격이었지만, 대체로는 심리적 충격이었다. 조선은 그 충격을 잘난 척으로 메워버렸다. 조선과 명나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단 두 개의 문명국이었는데, 둘 사이의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셈이 된다. 187-8)
양란은 국가체제 몰락의 단초가 되지 않았다. 두 전쟁을 합쳐도 경신대기근이라는 대재앙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경신(庚辛)은 경술년과 신해년을 합친 말로, 1670년과 1671년을 가리킨다. 이 시기 세계 주요 문명은 소빙하기의 도래로 굶주림과 질병이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만큼 끔찍했던 곳은 없다. 우박과 서리가 작물을 짓밟았다.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었는데, 비는 곡식이 충분히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내리지 않고 기다렸다가 단번에 내려 홍수를 만들었다. 메뚜기떼가 창궐했다가 사라지자 극악한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여름에 서리와 눈이 내렸다. 먹지 못한 데다가 추위에 시달리니 면역력이 떨어져 역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전염병에 걸리기는 가축도 마찬가지였다. 농사일에 필수적인 소가 집단 폐사했다는 보고가 전국에서 조정으로 올라왔다. 말라죽은 작물 중에는 솜의 원료인 목화도 있었다. 그러잖아도 추위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솜을 얻지 못해 더 얼어 죽었다. 190)
기상이변과 자연재해는 1671년에도 계속되었다. 조선인들은 가족을 죽이거나 버리고, 심지어 가족끼리 잡아먹기까지 했다. 조선의 가족윤리는 양란이 아니라 경신대기근에 추락해 바닥을 쳤다. 조선에서 도굴(盜掘, 무덤 도둑질)은 문화적인 금기였다. 하지만 이때에는 도굴이 판을 쳤다. 추위를 피하려고 죽은 사람의 수의를 벗겨 입기 위해서였다. 이때쯤 조선에는 창궐할 수 있는 모든 해충이 창궐해 쌀은 물론 보리, 기장, 수수, 좁쌀, 조선에서는 희귀한 작물이었던 밀까지 파먹었다. 심지어 한국인의 반찬거리인 산나물의 잎과 뿌리까지 죄다 말라 죽었다. 경신대기근 이전까지 조선 지배층은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이기심을 절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험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대기근 이후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족과 자신을 위한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가뭄이 들 때마다 부자가 굶주린 백성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원금에 더해 이자까지 돌려받는 ‘고리대’가 성행했다. 190-1)
지주들은 대농장을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한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먼저 사정이 안 좋아 고리대를 갚지 못하는 채무자의 땅을 차지한다. 채무자는 한때 자신의 것이었던 논밭에서 일하는 소작농이 된다. 지주는 가만 내버려두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알아서 땀 흘려 일하는 소작농에게서 소작료를 걷어가면 그만이다. 자연재해가 닥쳐도 가뭄이 와도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흉년이 들면 고리대에 담보로 잡힌 땅을 차지해서 좋고, 풍년이 들면 수입이 늘어서 좋다. 책임질 것 하나 없이 외주를 주고, 위험요소는 하나도 없는 속 편한 방식이다. 대기근이 불러온 양극화는 잉여자산을 소유한 이들을 상품의 판매자이자 소비자로 만들었다. 곧 상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은 열악한 곡물 생산력으로 천만 명 이상의 인구를 부양해야 했다. 자본경제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조선과 맞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다. 조선 말기에는 현재의 재벌에 해당하는 국제적인 거상(巨商)이 등장할 만큼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192-3)
조선을 멸망시킨 다른 주범은 탕평책이다. 조선에는 붕당정치가 있었다. 붕당을 정치세력으로 봐도 되고, 정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여기서 붕당의 긴 역사를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붕당정치의 특징만으로도 족하다. 성리학에는 통(通)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치와 통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과거시험 답안지가 받은 가장 높은 등급은 대통(大通, 크게 통함)이었다. 진리와 진리가 아닌 거짓이 명확히 나뉜 세계관이다. 진리는 하나인데, 붕당은 둘 이상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와 그쪽은 추구하는 게 다른 모양이오.”하고 끝날 수는 없다. 주장이 다르면 한쪽은 통이요, 다른 쪽은 불통이다. 논리 대결이 항상 그렇듯 점점 세부적인 부분의 시시비비에 목숨을 걸게 된다. 나쁜 말로 치졸해지고 현실과 동떨어진다. 아마도 대표적인 경우가 그 유명한 예송논쟁(禮訟論爭)이다. 붕당 투쟁은 말과 글로 벌이는 내전이다. 전투에 백성들이 동원되지 않는다. 조선의 정치투쟁은 백성의 삶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진행되었다. 194-5)
21대 임금 영조에게 붕당 투쟁은 비현실적인 국력 낭비로 보였다. 그는 관념 투쟁을 멈추고 임금을 중심으로 현실적 국익을 챙기자는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했다. 탕평책은 영조가 시작해 손자인 정조가 완성했다. 두 임금이 통치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영조의 광기 어린 카리스마와 정조의 천재적 두뇌는 탕평책의 포장지를 빛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하자 더 큰 폐단이 다가왔다. 강력한 임금과 붕당정치가 사라지자 노론(老論)세력의 일당독재가 시작되었다. 당내투쟁에서 안동김씨가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세도정치의 막이 올랐다. 이는 북한의 조선로동당 안에서 김일성파가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를 파멸시키고 마지막으로 동지였던 갑산파마저 숙청하며 나라를 차지한 과정과 비슷하다. 세도정치 역시 특정 가문의 혈통이 국가를 사유화하는 결말로 끝났다. 세도정치가 시작된 시점에 이미 조선은 사망 신고를 받았다. 유교 국가 조선은 유교적이지 못해서 멸망한 것이다. 195-6)
문명사적으로 조선의 멸망은 예정된 것이었다. 큰 그림에서 보면 경신대기근과 탕평책보다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한반도의 농업생산력은 더 이상의 인구증가를 감당할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안에서부터 붕괴할 운명이었다. 한국어에는 고리타분한 옛날을 뜻하는 ‘고리짝’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원래 사용자는 조선인들이다. 고리짝의 어원은 ‘고려였을 적’ 즉 고려 시대다. 현대인이 ‘전근대’, ‘봉건 시대’라는 표현을 쓰며 후진적인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처럼 조선인 역시 ‘고리짝’과 조선 시대를 구분했다. 조선이라는 무덤은 생각보다 단단한 토대다. 한국은 진흙 위에 세워지지 않았다. 조선은 문명의 물질적 한계 속에서 생명 연장을 위해 탄생했지만, 막대한 생산력을 가능케 한 2차 산업사회를 만나는 순간까지 민족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은 실패했으나 실패만 하지는 않았다. 조선은 한국인에게 혁명적 기질과 못된 성깔을 물려주었다. 조선인의 시신에서, 마침내 한국인이 태어났다. 201, 204)
결어 한국인의 탄생
원칙적으로 한국인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면서 탄생했다. 실질적으로는 한국전쟁 휴전이 성사된 1953년 7월 27일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날을 기점으로 조선인은 대한민국(남한) 국민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인민으로 갈라졌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된 한국인은 전쟁이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섰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한반도는 자연이 제공하는 생산력이 한계에 다다른 단계를 넘어 급속도로 고갈되어가는 상태였다. 독립 후 다른 모든 산업품목에 앞서 인공 비료부터 생산하려고 했던 건 당연하다. 현재의 한국인이라면 수없이 들어서 알고 있는 노년층의 고생담은 요즘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구하다. 그들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도 굶주렸다. 그러나 살아남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국인에게 삶은 곧 노력의 연속이다. 노력은 한국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적이며, 한국인 자체다. OECD 국가 중 근로자의 연평균 근로시간이 1위인 건 당연하다. 205)
중국에는 오랜 속담이 있다. “천하는 넓고 황제는 멀다.” 이 속담은 지금 이렇게 바뀌었다. “천하는 넓고 당(공산당)은 멀다.” 한국의 중앙은 멀지 않다. 한국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는 고려 4대 임금 광종(光宗)이 호족들을 핏물로 쓸어버리면서 시작되었다. 중국에 비하면 매우 손쉬운 과정이었다. 광종의 뒤를 이은 성종은 최승로(崔承老)를 발탁해 숭유억불 정책을 폈지만, 그는 불교를 무시한 적이 없다. 성종에게 유교와 불교는 각자 다른 가치를 지닌다. 문화적인 부분은 불교에 맡기면 되었다. 국정 운영과 행정체계는 유교를 따르면 된다. 성종에게 유교는 학문도 믿음도 아니었다. 일원화된 행정이었다. 한국은 중앙정부 조직은 물론 과거제, 농경에 대한 세금계산법까지 중국의 좋은 것을 거의 전부 도입해 꽤 그럴싸하게 현지화했다. 한국은 성공적인 현대국가의 필수 조건인 중앙집권과 관료제가 가장 잘 자리 잡은 나라 중 하나다. 그 이유에 원래부터도 오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이 빠질 순 없다. 207-8)
조선 성리학의 통(通)처럼 한 글자로 동학을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접(接, 만남)이다. 동학 신도들이 만나는 가장 작은 모임이 접(接)이며, 접의 지도자를 접주(接主)라고 한다. 통(通)의 세계엔 고정된 이치가 있고, 공부하고 수양한 결과 이치와 통하는 인간(사대부)이 정해져 있다. 나라가 뿌리까지 썩은 조선 말기, 수탈당하던 민중은 사대부와 하늘의 이치 사이의 통을 인정할 수 없었다. 접의 가치는 통과 반대다. 접은 부당한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의 연대, 공감, 협동이다. 통은 수직적이다. 하늘의 가르침이 사대부로, 사대부의 통치가 백성으로 이어진다. 접은 수평적이다. 그렇다면 동학은 하늘의 이치와 닿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동학의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이치다. 인간은 인간인 이유만으로 존귀하며, 태어나는 순간부터 도구가 아닌 목표다. 인내천 사상은 전통적인 인(人, 다스리는 소수)과 민(民, 통치받는 다수)의 구분을 지웠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210)
3.1운동은 전국의 조선인이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그리고 민주공화국 체제가 다수의 합의에 의해 도출되었다는 논리적 근거를 확보했다. 3.1운동이 일제의 무력에 진압당하고 끝났기에 실패한 독립운동이라는 관념은 현대 한국인의 착각이다. 이 운동은 민족국가의 미래 정치체제를 결정했다. 제헌헌법(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의 정당성이 3.1운동 위에 서있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의 진보진영에는 역사에 무지한 관념이 하나 있다. 서양의 완제품인 민주주의가 하늘에서 똑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이해하지도 체화하지도 못한 채 민주공화국 헌법을 덜컥 떠안게 되었다. 한국이 헌법상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민주공화국이 된 이유는 이승만을 몰아낸 4.19혁명과 전두환의 신군부에 대항한 80년대의 민주화 투쟁 덕이다. 대한민국은 1987년 군부독재를 끝장낸 6월 혁명을 통해 민주공화국으로 완성되었다. 212)
대한민국의 헌법은 강대한 위력을 발휘해왔다. 조선 성리학은 한국인을 언어로 정리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민족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 무력을 동반한 권력은 문자로 쓰인 제도에 패배했다. 4.19 혁명의 명분은 헌정 가치였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힘은 헌법에서 나왔다. 헌법은 결코 일부 진보 지식인들의 표현처럼 ‘장식’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계엄령과 발포 명령을 거부한 군 장성들 역시 군인은 헌정 가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으로 목숨을 걸었다. 한국인은 일상에서 다혈질의 기분파지만, 큰일을 위해 결집했을 땐 로고스(Logos, 옳은 말씀)의 민족이다. 6월 혁명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도를 재확인한 사건이다. 현재 한국의 성공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는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맹자에서 탄생한 정도전의 민본, 민본을 대체한 (동학의) 인내천, 현재의 서양식 민주주의까지 한국의 정치사상은 끊기지 않은 역사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213)
나가는 글: 한국인은 성격이 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