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샘 2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2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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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탄화수소 시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이 사용한 석유의 90%를 생산해야 했지만, 이것은 곧 미국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출국으로 남아 있을 날들은 얼마 남지 않았다." "페르시아만의 석유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유정 상당수를 폐쇄하는 동안, 이 지역의 잠재성을 아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 생산될 석유가 향후 시장에 미치게 될 영향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전후 페르시아 만에서 값싼 석유가 유입되면 1930년대 초 텍사스 동부의 석유 분출만큼이나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동시에 많은 미국인들은 미국 내 석유의 고갈을 우려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쟁 전의 규제를 타파하고, 특히 사우디를 위시한 중동에서 최대한 생산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런 방식은 공급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유럽은 미국을 포함한 서반구가 아니라 중동에서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고, 미국의 매장량은 미국 자체의 수요와 안보용으로 보전된다는 의미다."(22-3, 32)


# 미국(&영국) 석유회사들의 행보

1. 소칼, 텍사코, 뉴저지, 소코니로 구성된 100% 미국계(영국의 영향력을 우려한 이븐 사우드 국왕의 의사도 반영된) 회사들로 아람코 합병 완결(1948. 12) → 적선협정 폐지

2. 걸프사(쿠웨이트 석유회사의 지분 절반 소유)는 유럽을 위시한 동반구 지역의 판매망 확보를 위해 로열더치 쉘(사실상 미국의 석유 이권 파트너가 된)과 장기 구매 협정 체결

3. 이란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와 석유 이권 확보를 함께 추진하는 소련에 맞서 미국과 영국 정부가 협력. 앵글로-이란과 뉴저지, 소코니 간에 장기 공급계약 체결(1947. 9)


"중동의 석유는 전후 황폐화된 유럽을 복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 중 하나는 유럽의 에너지 위기였다. 석탄 생산량이 부족할 뿐 아니라 생산성도 저조했고 노동 인력마저 와해되었다." "가격 또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유가가 1948년 전후 최고치를 기록하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마침내 중동산 석유는 미국의 걸프 만 표준가격 이하로 인하되었다. 이는 20년 전 아크나캐리 성의 가격 회의가 종말을 고하는 것이고, 전쟁 전 '현상유지' 체계의 마지막 흔적이 사라진 것이다." "비록 그때까지는 유럽 경제가 석탄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에너지 수요 증가에 따라 석유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되었다. 바로 이 때문에 중동의 석유 생산량이 더욱 크게 느껴진 것이다. 1946년에는 유럽에 공급된 석유의 77%가 서반구에서 수입되었으나, 1951년에는 80%가 중동에서 수입될 것으로 에상되었다. 유럽의 수요와 중동 석유의 개발이 시기적으로 일치함으로써 강력하고도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졌다."(66-70)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에 걸쳐 석유회사의 산유국 정부는 결제 조건을 둘러싸고 수차례 교섭했고 그 결과 전후 석유 질서가 만들어졌다. 문제의 핵심은 자원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용어, 즉 '렌트Rent'(지대)를 배분하는 데 있었다. 교섭의 성격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그 동기는 동일했다. 석유회사와 석유회사에 세금을 부과하는 소비국 정부들만 이익을 독점해서는 안 되고, 산유국에도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산유국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전부는 아니었다. 지배권도 똑같은 문제였다." "1950년 12월 30일, 아람코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새로운 협정에 조인했다. 핵심은 베네수엘라와 같은 '이익반분(50:50)'의 원칙이었다. 이후 걸프 석유는 쿠웨이트 석유의 동업자인 앵글로-이란의 회장 프레이저 경의 완강한 반대를 무마하고, 쿠웨이트에도 이익의 절반을 주는 협정을 체결했다. 이라크에서도 1952년 이익 반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란에서는 사태가 만족스럽게 해결되지 않았다."(80, 106-7)


"1940년대 말, 이란은 경제 파탄으로 심한 빈곤과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이런 가운데 전 국민이 화합할 수 있는 대상은 외국인들, 특히 영국인에 대한 증오였다. 영국은 이란의 국토를 지배·착취하는 초자연적인 악마로 규정되었다. 이란 정치가들은 파벌에 관계없이 정적이나 반대자들을 비난할 때 영국의 첩자라고 매도했다. 집중적인 증오의 대상은 현대화 된 외국 세력 침투의 상징인 앵글로-이란 석유회사였다." "1951년 4월 28일, 의회는 국유화법을 시행하라는 민중들의 압도적 지지에 힘입어 앵글로-이란의 최고 반대 세력인 모사데그를 새로운 수상으로 선출했다. 국유화 법안은 국왕의 서명을 받아 5월 1일부로 효력이 발생했다." "1951년 9월 25일, 모사데그는 아바단 섬에 남아 있는 영국인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다." "아바단 철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년간 대영제국의 기반 쇠퇴 중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로써 중동 지역 최초의 석유 이권이 최초로 무효화되었다."(112, 118-9, 131-2)


"1952년 말, 영국 정부는 이란 정부를 변화시키기 위해 공동 행동을 취할 가능성을 미국에 타진했다. 방법은 쿠데타였다." "1953년 8월 말, 모하메드 팔레비 국왕은 다시 왕위에 오르고, 모사데그는 체포되었다." "이란에서 운영될 컨소시엄 설립은 의미가 큰 전환점이었다. 외국인이 소유한 석유 이권이 교섭과 상호 합의에 의해 산유국으로 되돌려진 최초의 사례였다. 멕시코의 경우가 일방적인 국유화 조치였다면, 이란에서는 관게자 모두가 석유자원은 원칙적으로 이란 소유라는 것을 인정했다. 새로운 계약은 이란 국영 석유회사가 이란 내의 석유자원과 시설을 소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컨소시엄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지시를 내릴 수 없었다. 이란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생산된 석유를 구입하는 일은 계약대로 컨소시엄이 맡았다." "한편 국왕은 석유 수입이 늘어나자 확고부동한 이란 국왕으로 자리 잡았고, 나아가 세계를 향한 야심을 가진 독선적인 군주로 변신했다."(138, 142, 152-5)


"영국에게 수에즈 운하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답은 석유다. 1956년 7월, 나세르의 운하 점거로, 석유 부족 사태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10월 29일 이스라엘이 세브레에서 합의한 대로 시나이 반도를 공격했고, 10월 30일 런던과 파리는 최후통첩을 내리고 운하 지대의 점거를 발표했다. 그리고 같은 날, 소련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했다. 다음날인 10월 31일, 영국 공군이 이집트 공군기지를 폭격했고, 이집트군은 황급히 시나이 반도를 거쳐 철수하기 시작했다. 수에즈 작전은 미국을 깜짝 놀라게 했다. 선거 캠페인 때문에 남부 지역을 순회하던 중 이 소식을 들은 아이젠하워는 격노했다. 이든이 그를 배신하고, 동맹국들은 그를 교묘하게 속인 것이다. 그들의 경솔한 행동이 소련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포함한 광범한 국제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이 코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로 들끓고 있는 중에 그런 행동을 취했다."(166, 174-5)


"나세르가 운하를 봉쇄할 경우 발생할 석유 공급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공동 계획을 수립하던 수개월 동안, 영국은 미국이 석유를 공급해줌으로써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모든 긴급 석유 지원책을 단호히 거부했다. 석유는 워싱턴이 서유럽 동맹국을 단죄하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무기였다." "수에즈 위기가 영국의 쇠퇴를 예고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영국은 더 이상 열강이 아니었다. 두 차례의 전쟁에 따른 상처와 국내의 분열이 재정을 악화시켰고 신뢰감과 정치적 의지력을 잃게 만들었다. 이든은 수에즈 위기에 제대로 대처했다고 믿었다. 수년 후 「런던 타임스」는 앤서니 이든에 대해 '그는 영국이 강대국이라고 믿은 마지막 수상이자, 영국이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님이 드러나는 위기에 대처한 최초의 수상이었다'라고 썼다. 이것은 한 사람의 묘비명인 동시에 대영제국의 묘비명이기도 했다."(175-6, 184-5)


"석유는 떠오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최고 관심사였다. 1950년대 초반 이래 중동에서는 '아랍 석유 전문가'의 모임이나 접촉이 수없이 시도되었다. 초창기 주요 의제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제 제재였다. 신생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석유 봉쇄부터 블랙리스트 공개, 협박 및 이권 몰수의 위협에 의한 국제 기업들에 대한 제재가 그 내용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의제의 범위는 넓어졌다. 이집트는 석유 수출국이 아니었지만 나세르는 그 모임을 석유 정책 수립과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데 활용했다. 그는 주권 문제와 식민주의에 대한 투쟁을 무기로 여론을 결집했고 석유와 페르시아 만 연안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1957년 봄, 이집트에서 열린 아랍석유전문가회의에서 대표들은 국내 정제 능력의 증강과 지중해로 가는 아랍 유조선단 및 파이프라인의 설치를 제안했다. 또한 중동 석유 생산을 관리해 수입을 증가시키고, 해외 석유 기업들에 맞설 수 있는 아랍 '국제기구' 혹은 '국제 컨소시엄'의 창설을 논의했다."(205)


"소련이 가격 인하 및 구상 거래 등으로 서방에 대한 석유 판매에 박차를 가하며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한 결과, 석유의 과잉 공급 사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소련은 농산품과 산업용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달러와 다른 서방국의 화폐가 필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석유 수출품은 그들이 서방에 판매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품목 중 하나였다. 단순한 경제적 조건만으로 소련의 석유 가격을 쉽게 제한할 수 없었다." "1959년처럼 기업들이 전체 공급 과잉과 소련의 위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격 인하라는 경쟁적 대응이었다. 그런데 무슨 가격이냐가 문제였다. 만약 시장가격만 인하한다면 석유업체들이 전체 손실을 흡수해야 한다. 그렇다고 공시가격을 다시 인하하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힘들었다. 처음 공시가격을 인하했던 1959년 2월, 아랍석유회의는 분기탱천했고 이에 따라 신사협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제 다시 그렇게 대응한다면 어떤 사태가 발생할지 아무도 몰랐다."(221-2)


"1960년 8월 9일, 뉴저지는 수출국에 통고도 없이 중동산 원유의 공시가격을 배럴당 14센트까지, 약 7% 인하한다고 발표했다." "산유국의 반응은 '유감'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 갑자기 자신들의 수입을 줄여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의 재정 상태와 국가 위신을 상당히 손상시키는 결정을 아무런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버렸다." "분노와 격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라크는 정치적 기회를 포착했다. 압둘 카림 카셈 혁명정부는 이라크가 중동 내에서 나세르의 질서에 종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공시가격 인하는 나세르가 여러 아랍위원회 및 아랍리그를 지배함으로써 석유 정책을 좌지우지해온 영향력에 정면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라크는 이번 사태를 비아랍 국가인 이란과 베네수엘라를 포함한 석유 수출국만의 새로운 조직을 설립하는 촉매제로 이용하고자 했다." "9월 14일, 마침내 국제 석유회사들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직, 바로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설립되었다."(225-7)


"석유가 석탄을 압도한 이유 중 하나는 환경 문제였다. 런던은 석탄에 의한 환경오염, 특히 가정의 개방식 연소에 의해 발생한 '살인적 안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안개가 너무 짙은 나머지, 집으로 가는 길조차 찾을 수 없었던 운전자들은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잔디밭으로 차를 몰기도 했다. 안개가 수그러질 때면 런던의 병원들은 급성 호흡기 질환에 걸린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이로 인해 가정 난방용으로 석탄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무연 지역'이 지정되었고, 의회에서는 석유 사용을 고무하는 '청정 대기법'이 입법되었다. 하지만 석유로 전환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가격이었다. 석유 가격은 계속 하락했으나 석탄 가격은 꿈쩍하지 않았다. 1958년 후로는 산업용 연료로 석유를 사용하는 것이 석탄보다 저렴했다. 각 가정은 석유에서 전력으로, 그 후에는 천연가스로 연료를 바꾸었다. 석탄산업은 '생활의 불'이라는 콘셉트의 대대적 광고 전략으로 대응했지만, 석탄의 불씨는 식어가고 있었다."(260)


"1967년 6월 5일, 제3차 중동 전쟁인 '6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랍 국가들 간에는 석유를 무기로 활용하자는 논의가 10년 이상이나 진행되어왔다. 이제 그 기회가 왔다. 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6월 6일, 아랍국의 석유장관들은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나왔다. 이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리비아 및 알제리가 미국, 영국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고, 서독에 대해서도 수출 제한 조치가 취해졌다." "엄청난 걱정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6일전쟁이 끝나고 한 달 뒤인 1967년 7월, '아랍의 석유 무기화'와 '적대국가에 대한 석유 공급'이 원활해졌다.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쪽은 금수조치를 내린 국가들이었다. 그들은 막대한 석유 수익을 포기했지만 아무 효과도 얻지 못했다." "석유 부족 위험은 다소 쉽게 해결되었지만, 미 국무부는 위기관리를 주제로 한 보고서에서 공급원 다양화와 수송 능력 확충을 지적했다."(294, 297-8)


5장 주도권 쟁탈전


"1960년대 영국은 경제 불황에 빠졌다. 전후 영국의 최대 과제는 '대영제국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였다." "페르시아 만에서 영국의 위상을 지켜주었던 것은 6,000여 명의 지상군과 공군 지원 부대였다. 이를 유지하는 데는 연간 1,200만 파운드가 들었다. 영국의 석유회사들이 그 지역에 해놓은 엄청난 투자를 생각해보면 얼마 안 되는 액수의 보험료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방부 장관 힐리를 움직인 것은 경제적 필요성만이 아니었다. 중동의 민족주의가 성장하는 것을 보고 중동에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것이다. 영국은 아랍에미리트 연방의 설립을 지원했는데, 이는 작은 나라들 몇 개를 하나로 묶음으로써 그들에게 방위수단을 제공하려는 의도였다. 그 과업이 끝나자, 영국은 1971년 완전히 짐을 싸서 페르시아 만을 떠났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르시아 만의 가장 근본적 변화이자, 1세기 이상 지속되어온 안보 체계의 종식을 의미했다."(309-10)


"1969년 9월 1일, 쿠데타에 성공한 카다피는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한 후 마침내 석유산업에 손을 뻗쳤다." "리비아는 리비아 외에는 대안이 없는 옥시덴탈을 공략했다. 그들은 그 회사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옥시덴탈은 모든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긴 협의 끝에 리비아인들은 로열티와 세금 20% 증액이란 성과를 얻어냈고, 옥시덴탈은 계속 리비아에 남아 사업할 수 있게 되었다. 주저하던 다른 회사들도 9월 말까지는 모두 승복했다. 그러나 공시가격의 30% 인상과 리비아가 챙기는 이윤이 50%에서 55%로 증액되었다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발생했다. 리비아의 계약은 산유국 정부와 석유회사 사이의 역학 관계를 결정적으로 역전시켜버렸다. 석유 수출국에는 리비아가 거둔 승리가 아주 고무적이었다. 석유의 실질적 가격 하락을 순식간에 반전시켰으며, 동시에 석유 수출국들이 주권과 주도권 장악을 위한 행동을 다시 추진하도록 자극한 것이다."(331-4)


# 산유국과 석유회사 간의 새로운 협의

1. 테헤란 협의(1971. 2. 14) : 산유국 정부의 최소 몫을 55%로 정하고, 석유 1배럴의 가격을 35센트 인상한다.

2. 트리폴리 협의(1971. 4. 2) : 석유 1배럴의 가격을 90센트 인상한다.


"곧이어 산유국들의 '소유권 참여' 문제가 불거졌다. 1972년 10월, 페르시아 만 국가들과 석유회사들 간에 '소유권 참여 협약'이 마침내 체결되었다. 현재 25%의 참여 비율에서 1983년까지 51%에 이르도록 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소유권 참여를 통해서든 전면적 국유화에 의해서든, 석유회사를 강력하게 통제하게 되면서 수출국들은 가격보다 더 큰 힘을 얻었다. 회사들은 새로운 공동전선을 구축할 능력이 없었다. 각 회사의 모국 정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영국과 미국에게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기보다 협조를 구하고, 그 나라들이 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아야 할 동기가 있었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는 급진적 반역 세력의 제압을 지원해달라는 오만의 요청에 주의를 기울인 채 지역 경찰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의 군비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었고, 이는 상승하는 석유 가격과 페르시아 만의 새로운 안보 체계라는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342-4)


"1973년 10월 6일은 유태교 최고의 신성한 축제일인 속죄일이었다. 시계가 오후 2시를 가리킬 무렵, 이집트군 제트기 222대가 일제히 발진했다. 공격 목표는 수에즈 운하 동안東岸과 시나이 반도에 위치한 이스라엘 군사령부와 군사기지였다. 수분 후 국경 전역에 걸쳐 3,000문이 넘는 야포가 불을 뿜었다. 같은 시각, 시리아군 전투기가 이스라엘 북부 국경 지대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이어 대포 700문이 포문을 열어 포탄을 퍼부었다. 제4차 중동전쟁, 소위 '10월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전쟁은 중동 전쟁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격전이었고 엄청나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양 진영의 무기는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이 공급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중동만의 특성인 '석유'였다. 석유는 생산 삭감과 금소조치라는 형태로 무기화되었다." "당시 석유는 세계 산업 경제의 활력소가 되었고, 채굴되는 즉시 남김없이 송출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약간의 추가적인 수요 압박만 있어도 세계적인 위기가 닥칠 상황이었다."(348-9)


"10월 16일, 걸프 지역 국가(아랍 국가 5개와 이란)의 대표들은 쿠웨이트 시에서 만나, 비엔나의 야마니 숙소에서 끝내지 못한 논의를 이어갔다. 그들은 석유회사의 답변을 더 이상 기다릴 태세가 아니었다. 그들은 조치를 취했다. 공식가격을 배럴당 70센트 인상된 5.11달러로 높여, 광분하고 있는 현물시장의 가격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했다. 하나는 가격 인상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가격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수출국이 석유회사와 협상하는 것은 이제 옛일이 되었다. 이제 수출국이 석유 가격을 결정했다. 석유회사가 일방적으로 가격을 결정하고 수출국은 기껏해야 거부권을 가지던 체제에서 수출국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지니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이 완료된 것이다. 가격 결정 후, 야마니는 쿠웨이트 시에 있던 다른 대표단의 한 사람에게 〈내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의 상품에 대한 주인이 되었다〉라고 말했다."(378)


"10월 19일, 닉슨은 이스라엘에 대한 22억 달러의 군사 원조를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 발표는 사전에 몇몇 아랍 국가들에게 전해졌기에 그들은 별다른 놀라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어느 쪽도 우위를 유지하면서 전쟁을 끝낼 수 없으므로,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앉을 명분을 제공한다는 전략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날, 리비아는 미국으로 가는 모든 석유 공급선을 차단했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 원조에 대한 보복으로 점진적 삭감안을 철회했다. 이는 미국에 대한 전면적 공급 중단을 의미했다. 다른 아랍 국가들은 이미 했거나 하고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석유가 하나의 무기로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몇몇 아랍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경우 길거리의 폭도들에 의해 통치 기반이 붕괴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스라엘 지원이 공개됨으로써, 강경파 아랍 국가들이 미국에 행동을 취할 충분한 구실이 생긴 것이다."(383-4)


"1973년 12월 말, 테헤란에 모인 석유장관들은 격론을 벌인 끝에 이란 국왕의 (가격 인상) 입장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가격은 11.65달러가 될 것이고, 이 가격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공식가격은 1970년 1.85달러에서 1971년 2.18달러, 1973년 중순에 2.90달러, 1973년 10월에 5.12달러, 그리고 이제 11.65달러로 인상되었다. 따라서 전쟁이 시작된 이래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친 인상으로 가격은 4배가 되었다." "아랍 산유국의 석유 금수조치가 촉발한 석유 가격의 급등과, 석유 가격을 자신들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산유국들의 인식은 세계 경제의 구석구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석유 수출국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1972년에 230억 달러이던 것이 1977년에는 1,400억 달러로 늘어났다." "서방 공업국들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가 최우선 관심사였다. 그들은 석유 공급의 안정성을 높이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으로 무기 판매에 적극 공세를 펼쳤다."(410, 425)


"1970년대 초, 닉슨과 키신저는 '백지수표' 정책을 통해 이란 국왕이 원하는 대로 미국산 무기를 마음껏 살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다. 핵무기가 아니라면 최신형 무기도 구매 대상에 포함되었다. 영국이 걸프에서 철수한 이후, 그 지역의 안전 보장을 위해 만들어진 '두 개의 지주支柱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지주에 해당했다. 미국 관리의 말대로라면, 두 국가 중 이란이 최대 지주였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해외 무기 판매의 절반을 이란이 차지했다." "닉슨과 포드 행정부에는 하나의 통일된 기조가 있었다. 이란은 중동에서 주요한 안보 역할을 하는 동맹국이므로 국왕의 명예와 영향력을 손상시키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닉스, 포드, 키신저는 전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국왕을 편애했다. 1973년 국왕이 미국에는 석유 금수를 하지 않았고, 이란이 지정학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도 했다."(441-2)


"한편 열광과 도취, 오일 달러의 홍수, 석유 붐은 이란의 경제와 사회 체계를 파멸시키고 있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명백했다. 혼돈, 낭비, 인플레이션, 타락, 정치적·사회적 긴장의 심화, 그리고 이들로 인한 반체제 분위기의 확산이었다." "1976년 말, 국왕은 비통한 심정으로 문제를 직시했다. 이제 그는 돈이 구제책이 아니라 그의 제국이 안고 있는 많은 병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가격 온건 노선을 취했다. 1974년에서 1978년까지 OPEC은 소폭의 가격 인상을 두 차례 단행했다. 1973년 10.84달러에서 1975년 11.46달러로 올랐고, 1977년 말 12.7달러로 다시 올랐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으므로 실질 가격은 하락했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했을 때, 1978년의 석유 가격은 수출 금지 직후인 1974년에 비해 10% 하락했다. 석유는 더 이상 가격이 가격이 낮아질 수도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만큼 치솟지도 않았다."(443-5)


"처음에 석유회사들은 공급 계약에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베네수엘라, 쿠웨이트에 있던 그들의 과거 이권과 어느 정도 연계되었지만, 수출국과 수입국 정부의 다각화 정책으로 시간이 갈수록 그 고리는 약화되었다." "석유회사들은 이제 더 이상 지하 석유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이권 소유자'가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발견한 석유를 생산 출하하는 과정 중 일부의 권리를 받는 '생산 분배' 계약을 통해 단순한 '계약자'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계약은 1960년대 말 인도네시아와 칼텍스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석유 탐광, 생산, 판매에 대한 '기술 및 인력 제공'은 이전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변화를 반영해 관련 기술용어들은 영어에서 산유국 언어로 바뀌었다. 산유국의 주권은 각국의 국내 정치가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인정되었다. 과거 식민지 시대의 유물은 사라졌고, 석유회사들은 단순히 고용된 인부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러한 생산 분배 계약이 세계 도처에서 일반화되었다."(454-5)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OPEC은 1970년대에도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했다. 1973년에는 자유세계 석유 생산의 65%를 점유했고, 1978년에는 62%를 차지했다. 그러나 확실치는 않지만 OPEC의 결속력이 약해졌음을 알려주는 신호들이 감지되고 있었다. 가격 인센티브와 안보에 대한 동기 부여가 OPEC 이외의 지역에서 석유 개발을 촉진하고 있었고, 새로운 지역들이 세계 석유 공급 체계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물가 상승 불안, 엄청나게 확대된 통화량, 투자가들의 열망 등이 한데 어우러져 세계적 석유 확보 사냥에 열광적으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전 세계로 확산되어가는 데에는 신규 석유 생산지 3곳이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알래스카, 멕시코, 북해였다. 역설적이게도 이 지역은 모두 1973년 석유 파동 이전에 발견되었다. 하지만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반대와 기술적 장애, 시간이라는 단순한 요인, 에너지 프로젝트에 요구되는 긴 준비 기간 등의 이유로 개발되지 못했던 곳들이다."(476-7)


"1970년대 중반, 이란은 석유 수입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일 달러는 터무니없는 현대화 계획에 남용되면서 낭비와 타락을 조성했고 경제 혼란과 사회적·정치적 긴장을 불러왔다. 지방에서 도시로 인구 유입이 계속되어 농업 생산은 저하되고 식료품 수입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물가 상승으로 국민의 불만이 갈수록 커졌다. 테헤란에 거주하는 중간 관리나 공무원은 월급의 70%를 주택 임차료로 지출해야 했다. 이란의 주요 기간시설들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처하지 못했다. 개발이 지연된 철도는 마비 상태에 빠졌고, 도로는 교통 체증에 시달렸다. 국가 송전망은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데다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테헤란 일부와 몇 개 도시는 정기적으로 단전되기도 했다. 단전은 산업 생산과 일상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국민들의 분노와 불안의 원인이 되었다. 이란 국민들은 국왕 체제와 성급한 현대화에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힘을 얻은 주인공은 호메이니였다."(490)


# 1979년 1월 6일, 국왕의 해외 망명으로 팔레비 왕조 마감


"새로운 석유 파동의 1단계는 이란이 석유 수출을 중단한 1978년 12월 말 시작되어 1979년 가을에 끝났다. 이란의 생산 감소분은 다른 지역의 증산에 의해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 "세계 석유 수요를 일일 5,000만 배럴로 계산해도 부족분은 4~5%에 불과했다. 그런데 4~5%의 부족분이 어떻게 150%의 가격 상승을 초래했을까?" "이는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였다. 의심, 불안, 혼란, 공포, 비관 등의 감정이 혼란기의 행동을 지배했다. 사태가 완료된 후, 과거의 수치들을 정리해 수급 균형을 분석해보니 그러한 감정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명백한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세계 석유 체계 전체가 붕괴된 것처럼 인식되었다. 실제로 제어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지만 열정적 민족주의와 결부된 이슬람 원리주의는 서구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란 혁명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중 하나가 서구와 현대 세계에 대한 거부였음은 명백했다."(506-9)


# 2단계는 이란의 미대사관 점령 사태와 인질극(1979. 11. 4)이 야기한 석유 공급망 혼란 사태, 3단계는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1) 발발에 따른 석유 수출 급감이다.


"이제 석유시장에서는 두 가지 경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생산자들끼리 가격을 서로 올리는 '추월' 경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수요자들 간에 공급 확보를 위한 '쟁탈' 경쟁이었다. 공급을 중단당한 회사들, 즉 석유 구매자, 정제업자, 정부, 새로운 부류의 무역상, 메이저 회사들은 수출국들의 환심을 사려는 경쟁 속에서 서로를 해롭게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도 새로운 공급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경쟁 심화로 가격만 상승할 뿐이었다." "서구 제국은 수요를 절감해 가격 상승을 막으려고 했지만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각국 정부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본 목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저가의 석유 확보였고, 다른 하나는 가격에 관계없이 안정적인 공급 확보였다. 한때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두 가지 목표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했다. 각국 정부는 저가격 확보를 정책 방향으로 삼다가, 국내 수요가 증가하면 안정 공급으로 선회했다."(514-7)


"드디어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다. OPEC은 1977년 말까지 자유세계 석유의 3분의 2 이상을 생산해왔다. 1982년 처음으로 비OPEC 국가가 OPEC의 산유량을 따라잡았다. 실제로 일일 100만 배럴 이상 앞섰고 이런 추세는 계속 증가했다. 심지어는 소련까지 유가 상승을 이용해 국내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탈피하기 위해 서방 국가에 대한 석유 수출을 계속 증가시켰다. 새로 개발된 석유, 특히 북해산 석유가 현물시장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체 석유시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OPEC은 그들의 가격 구조 붕괴와 그에 따르는 더 큰 경제적·정치적 손실, 즉 권력과 영향력의 감소를 우려해서 가격을 낮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현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가격을 지키려면 생산 수준을 감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수요는 회복되지 않았고, 비OPEC 생산량은 계속 증가했고, 현물시장 가격은 또다시 곤두박질하고 있었다. 생산량 쿼터에도 불구하고 OPEC은 여전히 과잉 생산 상태였으며, 게다가 가격은 높았다."(562-4)


"1985년 독일의 본에서 열린 경제 정상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은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각국 정상의 최고 관심사는 선진국들 간의 통상에서 문제가 되는 보호무역주의, 달러화의 가치, 일본의 경제 도전에 대한 대응 등이었다. 한마디로 '서-서西-西' 문제였다. 석유와 에너지 문제, 남북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1960년대처럼 석유와 에너지는 더 이상 세계 경제 성장의 제약 요인이 되지 못했다. 전 세계의 석유 공급은 일일 1,000만 배럴 초과 상태로, 이는 자유세계 총소비의 20%에 해당하는 물량이었다. 게다가 미국, 독일, 일본은 상당한 양의 전략 석유를 비축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안정 공급분'이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정상회담에서 석유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난제였다. 그러나 이제는 중동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 지도자들은 에너지 문제를 정상회담의 주요 주제에 포함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603-4)


"1986년 12월, 제네바에서 회합을 가진 OPEC 회원국들은 마침내 '진땀' 나는 상황에서 해방되었다. 석유 수출국들은 몇 개 유종의 복합 가격에 근거해 설정된 '기준 가격' 18달러에 동의했다." "비록 시장으로부터 반복적이면서 때때로 강도 높은 압력이 있었지만, 상당한 조정을 통해 합의된 내용은 1987년부터 89년까지 놀라울 정도로 잘 지켜졌다. OPEC의 가격은 정확하게 18달러는 아니었으나, 대체로 15달러에서 18달러 사이에 머물러 있었다. 가격은 불안정해서 때로는 다시 급락할 듯 보이기도 했으며, 몇 번에 걸쳐 쿼터량 준수가 파기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기로에 직면할 때마다 산유국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OPEC 회원국들은 '진땀'의 고통을 잊지 않았고, 그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낮은 수준으로 구성된 새로운 석유 가격은 4년 전 시작된 선진국들의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고 동시에 물가 수준을 낮춰주었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오랜 위기는 확실히 종식되었다."(637-8)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경제 제재 조치로 인해 세계 석유시장에서 400만 배럴의 원유 부족 사태가 발생했는데, 1873년과 1879년 석유 위기 시에 발생했던 부족분과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석유 가격의 급등은 공급 감소 때문만이 아니라 분쟁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었다. 후세인이 사우디의 석유 공급 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던 1990년 9월 말, 석유의 선물거래 가격은 배럴당 40달러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는 위기 발생 이전 가격의 두 배가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석유 위기와는 달리, 미국은 석유시장을 규제하지 않았고 공급 상의 왜곡도 나타나지 않았다. 산유국에 대해 증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90년 12월경에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생산 감소분만큼 증산이 이루어져 석유시장의 수급은 다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경기 침체로 석유 소비가 감소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654-5)


에필로그


"1990년대를 통해 석유는 대형 전략적 이슈로서의 의미가 약화되었다. 공급은 넘쳐났고, 가격은 떨어졌다. '동아시아의 경제 기적'으로 관심이 집중되었고, 세계 경제에서 중국의 역할이 서서히 부상했다. 그러나 1997~98년, 통화의 흐름과 부동산 투기로 확대된 아시아 경제는 과열로 이어지더니 태국에서 발화한 경제 위기로 폭발했다. 결국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국가 대부분에 치명적인 결과를 전염시켰다." "국내총생산의 붕괴는 석유 수요의 급락으로 이어졌다. 석유 저장 탱크는 석유를 추가로 더 보관할 곳이 없을 때까지 가득 채워졌다. 1986년처럼 다시 한 번 석유 가격은 배럴당 10달러를 향해 추락했고 일부는 더 낮은 가격으로 곤두박질쳤다. 석유 수출국들은 1986년과 같은 혼란 상태에 다시 한 번 내던져졌다. 석유 가격의 붕괴는 독립국이 된 지 겨우 7년째 되는 러시아를 채무 불이행과 파산 상태로 이끌었다. 또한 외국과의 관계에서 고통스러운 재평가 과정을 거치도록 몰아갔다."(669-70)


"신경제와 인터넷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석유를 다시 중요하게 만들었다. 2003년에서 2007년 사이의 기간은 매우 의미 깊은데, 한 세대에서 최대의 경제 성장이 목격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 인도, 중동 및 기타 신흥국의 높은 경제 성장과 괄목할 만한 소득 증가는 산업에 동력을 제공했고, 전기를 생산하고, 자동차와 트럭 등 급격하게 증가하는 운송수단에 연료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석유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급격한 석유 수요의 증가는 소비국들뿐 아니라 세계 석유산업 자체에도 놀라움을 선사했다. 앞서 수십 년간 석유 수요가 더디게 증가하자 석유산업은 새로운 석유와 가스 공급 시설에 대한 투자 수준을 상대적으로 낮추었다. 1990년대 후반과 21세기 초반 수 년 동안, 월스트리트는 석유산업에 대해 '제어되어야' 하고, 투자에는 매우 조심스럽거나 자제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갑자기 석유산업은 늘어난 수요에 맞추어 새로운 생산 시설에 투자할 필요가 발생한 것이다."(674-5)


"효율성 문제는 석유와 기타 에너지원을 사용하는 전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중요하고도 공통적인 정책 목표다. 20세기를 이끈 산업사회는 현재 1970년대보다 두 배나 높은 에너지 효율을 자랑하고 있다. 미래 효율성 증대의 잠재력은 여전히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세계 경제의 성장, 소득 증가, 인구 증가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 더 많은 석유가 필요할 것이다. 아마도 다음 사반세기 동안에는 40% 혹은 그 이상의 석유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기술혁신이 그 숫자를 감소시킬 수 있는데, 그 답은 연구 개발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이를 지원하는 정책과 기술 거래 시장에 달려 있다(기술 혁신이 에너지 사용량을 증가시키기도 한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의 기술로 인하여 2040년에는 2015년 대비 1백만 배 이상의 정보량을 처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가격이 높거나 낮거나 중간 어디쯤에 있거나에 관계없이, 석유는 앞으로도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국제 정치와 세계 경제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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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샘 1 - 석유가 탄생시킨 부와 권력 그리고 분쟁의 세계사, 최신증보판 황금의 샘 1
대니얼 예긴 지음, 김태유.허은녕 옮김 / 라의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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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석유의 창세기


"본격적인 석유 비즈니스의 기원은 석유산업 탄생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조지 비셀이라는 사람의 우연한 결단에서 비롯되었다." "비셀은 석유가 두통, 치통, 귀머거리의 치료부터 위경련, 기생충, 류머티즘, 수종증의 치료에 이르기까지 의약품 및 민간요법용으로 널리 사용되고, 말과 노새의 등에 난 상처를 치료하는 데도 사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약은 '세네카 오일'이라고 불렸는데, 그 치료법을 백인들에게 전파했다고 알려진 레드 자켓이라는 세네카 인디언족의 추장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비셀은 이 검고 끈끈한 액체가 가연성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트머스 대학에서 석유 샘플을 보는 순간, 그는 이것이 의약품이 아니라 광원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상품화함으로써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비셀은 다른 투자가들을 설득해 투자 그룹을 만들었고, 1854년 말에 예일 대학의 실리만 교수에 석유를 광원이나 윤활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 분석해달라고 의뢰했다."(30-2)


"실리만은 석유 분석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연구가 당신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것이라 약속할 수 있습니다〉라고 밝힘으로써, 투자가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보고서를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3개월 후 연구가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석유 증류 제품을 광원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예기치 못했던 성공적 결과'를 보고서에 담았다." "어느 역사가가 평가했듯이, 실리만의 연구는 석유산업의 태동기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으며, 석유의 새로운 용도에 대한 모든 의구심을 일소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석유는 서로 다른 끓는점에서 탄소와 수소로 구성된 다양한 물질로 분류分溜될 수 있고, 이 분류 물질 중에는 램프에 사용할 수 있는 양질의 기름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당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간단하고 값싼 공정을 거쳐 아주 가치 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원료 물질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해주는 많은 발견했다〉고 언급했다. 이제 다음 단계의 과제는 과연 석유가 충분히 존재하는지의 문제였다."(33-4)


"서부 펜실베이니아의 석유 생산량은 급격하게 늘어나 1860년 45만 배럴에서 1862년에는 300만 배럴에 이르렀다. 그러나 판로는 빨리 개발되지 않아, 1861년 1월에 배럴당 10달러였던 석유 가격이, 1861년 말에는 10센트로 폭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펜실베이니아산 석유는 싼값 덕분에 램프용 연료 시장에서 석탄유와 다른 램프용 연료를 몰아내고 단기간에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에도 불구하고 석유 붐은 멈출 줄 몰랐고, 오히려 석유산업을 발전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남부 지방의 송진 공급이 중단되자 송진에서 추출하는 값싼 램프용 연료인 캄펜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산 석유로 만든 등유는 재빨리 그 자리를 대체했고, 북부의 석유시장은 훨씬 더 빨리 발전했다. 전쟁은 이보다 훨씬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남부가 분리되자 북부는 더 이상 면화 수출로 외화를 벌 수 없었는데, 유럽으로의 석유 수출이 늘어나 손실을 보전하게 된 것이다."(47)


"미국에서 초창기 석유산업의 골격을 형성하고 석유 생산에 관한 법규를 제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영국 관습법에 기초를 둔 '포획법규'였다. 사냥 중 사냥감이 타인 소유지로 옮겨 갔을 때, 그 땅의 소유자만이 잡을 권리가 있다는 규정이다. 같은 논리로 땅의 소유자는 그 땅 아래에 있는 무엇이라도 파낼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동일한 유전지대에 있는 땅 소유자들은 석유를 많이 생산해서 인근 유정의 생산을 감소시킨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의해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양을 단시간에 퍼 올리려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생산량과 가격이 불안정해졌다. 석유는 사냥감이 아니었다. 포획법규는 유전의 궁극적 생산량을 감소시키는 엄청난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그 규칙의 이면에는 다른 효과가 있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석유산업에 참여하고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게 한 것이다. 또 생산 속도가 증가함에 따라 더 넓은 판로가 개척되었다."(50-1)


"'새로운 불빛'인 등유를 구입하려는 외국의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었지만, 석유를 유럽 지역으로 수송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원들은 수송 도중에 등유가 폭발하거나 화재가 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두려워했다. 1861년 마침내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선주가 간신히 선원을 모집해 석유를 선적한 배를 출항시켰다. 그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함으로써 석유의 국제교역 시대가 시작되었고, 미국의 석유는 빠른 속도로 세계 시장을 장악해나갔다. 석유산업은 초기부터 국제적 비즈니스로 자리 잡았다. 해외시장을 개척하지 못했다면 미국의 석유시장은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유럽은 공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연료로 사용하던 동물성 유지나 식물성 기름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한 세대 이상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산 석유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미국의 등유 수출량은 전체 석유 생산량의 절반 이상에 달했고 전체 수출품 중 4위를 차지했다."(88-9)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은 전기 조명 개발에 착수했고, 2년 만에 내열 백열전구를 발명했다. 전기는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전력산업의 급속한 발전은 석유산업을 위협했고 특히 '올드 하우스'(스탠더드 오일의 별칭)에 매우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생산, 정제, 파이프라인, 저장 시설 등에 엄청나게 투자했던 스탠더드오일은 석유의 주요 시장이던 조명 시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조명 시장이 석유 수요원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해갈 무렵, 석유의 새로운 시장이 나타났다. 일명 '말 없이 달리는 마차'라 불린 자동차의 출현이었다." "1905년, 휘발유로 움직이는 자동차는 증기기관차와 전기기관차와의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했다." "석유산업은 휘발유 시장뿐 아니라 공장, 기차, 선박 등에서 사용되는 보일러용 연료 소비 증가로 또 하나의 시장을 갖게 되었다. 석유의 미래를 우려했던 문제점들은 매우 빠르게 해결되었다. 오히려 '늘어나는 석유 수요를 공급이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126-9)


"한편, 걸프 연안과 미국 중부에서 유전들이 속속 발견됨에 따라,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스탠더드오일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연료유와 휘발유의 지속적인 소비 증가와 속속 발견되는 유전 덕분에, 윌리엄 멜론처럼 어떤 다른 회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사업할 수 있는 경쟁자들이 생겨났다. 물론 스탠더드오일의 판매량도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탠더드오일의 시장점유율은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1880년에는 미국 전체 정제 능력의 90% 이상을 차지했지만 1911년에는 60~65% 수준으로 축소됐다. 멕시코 만 연안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미국 원유 시장에 대한 스탠더드오일의 지배력과 가격 결정자로서의 역할도 대폭 축소되었다. 그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전이 발견됨에 따라 국제시장의 지배력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 전역에서 스탠더드오일과 그의 무자비한 사업 관행에 반대하는 정치적·사법적 공세가 진행되고 있었다. 스탠더드오일은 사면초가에 처했다."(151-3)


"1911년 7월 말, 드디어 스탠더드오일은 몇 개의 사업 주체로 분할되었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지주회사였던 뉴저지 스탠더드오일로, 총 순자산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나중에 엑슨Exxon이 되어 계속 주도권을 행사했다. 두 번째로 큰 것이 순자산의 9%를 보유한 뉴욕 스탠더드오일로, 나중에 모빌Mobil이 되었다. 캘리포니아 스탠더드오일은 쉐브론Chevron이 되었고, 오하이오 스탠더드오일은 소하이오Sohio가 되었다가 나중에는 영국 석유BP의 미국 판매회사가 되었다. 또한 인디애나 스탠더드는 아모코Amoco가 되었고, 콘티넨털오일은 코노코Conoco가 되었으며, 애틀랜틱은 아르코ARCO의 일불가 되었다가 훗날 선Sun사에 흡수되었다."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진 회사들은 분리 독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서로의 상권을 존중했고 옛날의 영업 관계를 지속했다. 그런 와중에도 일선에서 뛰던 사람들은 회사 분할로 인해 자신의 뜻에 따라 운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177-8)


"이에 앞선 1907년, 쉘과 로열더치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져 로열더치 쉘 그룹이 탄생했다. 4년 전에 설립한 최초의 공동판매 회사는 '브리티시'를 앞에 넣어 '브리티시 더치'라 불렸는데, 이제는 '로열더치'라는 이름이 앞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는 (로열더치의) 디터딩이 마침내 승자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1907년에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스탠더드오일이 지배해왔던 세계 석유시장의 판도가 바뀌었다. 로열더치 쉘이 거대한 회사로 부상해 스탠더드오일의 시장 지배력을 위협했다. 1910년 디터딩은 〈스탠더드오일이 3년 전에 우리를 쓰러뜨리려 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스탠더드오일은 가격 인하와 더불어 남부 수마트라에서 석유 이권을 따내기 위해 네덜란드 자회사를 설립했다. 로열더치 쉘이 스탠더드오일에 반격할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으로!'였다. 이는 1910년부터 1914년까지 로열더치 쉘의 슬로건이 되었다."(204-7)


"쉘과 로열더치의 통합으로 경영권을 잃은 마커스 새뮤얼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러나 곧 양사의 통합이 러시아 석유에 크게 의존했던 쉘에 매우 다행스러운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1903년 바쿠에서 석유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했는데, 이는 러시아 전체를 뒤흔들었고 결국 러시아의 첫 번째 총파업이 될 노동쟁의의 물결을 일으켰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정부는 위기에 직면했다. 러시아산 석유에 크게 의존하던 새뮤얼과 로스차일드사, 다른 기업들의 걱정은 당연했다. 러시아 정부는 민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를 느꼈고, 다른 많은 국가가 그랬던 것처럼 국외에서 기회를 찾으려 했다. 그들은 국론을 통일시키고 통치자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나라 밖에서 공동의 적을 설정했다. 그런데 다른 국가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그들도 적을 잘못 선택했다. 일본을 선택한 것이다." "러시아 군대는 참패를 거듭했고, 대마도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몰살당하면서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208-11)


"러시아 석유산업에 타격을 준 것은 정치적 혼란이나 인종 문제, 노동운동으로 인한 긴장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산 석유는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대규모 생산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질서하고 뒤떨어진 굴착 시설과 생산 설비는 생산 능력을 저하시키고 바쿠 주변의 유전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으며 결국 고갈을 재촉했다. 이는 급격한 가격 상승을 야기했고,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신규투자 축소로 이어졌다. 러시아 정부는 비어가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어리석게도 국내 수송 요금을 올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세계 시장에서 러시아산 석유의 가격이 더 올라갔고 그 결과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장점이 오히려 단점으로 바뀌면서, 러시아산 석유는 다른 나라의 석유 공급에 문제가 있을 때만 필요한 잉여 생산물로 전락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 석유산업의 구조를 전면적으로 바꾸어놓을 만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유럽에서 새로운 석유 공급원이 출현했으니 바로 루마니아였다."(214)


"러시아는 186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합병에 나섰다. 또한 중앙아시아의 인접국들을 정복해 부동항을 얻고자 했다.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의 영토 확장은 인도와 통하는 요로要路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영국의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페르시아가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갈 상황에 처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페르시아와의 관계에서 경제적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다른 열강들을 배제하고 페르시아 지배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다아시와 그의 석유탐사 계획은 영국의 정책을 돕는 역할을 했다. 영국이 석유 이권을 차지한다면 러시아와 세력 균형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영국은 이 사업을 지원했다." "1901년 5월 28일, (뇌물에 넘어간) 페르시아 국왕 무자파 알딘은 역사적인 계약에 서명했다. 다아시는 페르시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해 60년 동안 석유 이권을 확보하게 되었다."(221-3)


"영국 정부 내에서는 다아시가 외국 자본에 사업 전체를 팔아넘기거나 이권 전체를 상실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열강들 사이에서 자국의 위상과 같은 전체적 전략과 고도의 정치적 문제였다. 외무부가 가장 우려한 것은 러시아의 확장주의와 인도의 안전보장 문제였다." "해군부가 안고 있는 문제는 좀 더 구체적이다. 즉 영국 함대의 연료로 쓸 중유 공급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영국 해군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전함들은 당시 석탄을 사용했고, 석유는 작은 선박에만 사용되었다. 석유가 소량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유의 부존량이 영국 해군력 유지에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석유가 충분하게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당시 석유 연료를 선호한 해군부의 인사들조차 석유가 대규모로, 또 안정적으로 공급될 때까지는 보조 연료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런 면에서 다아시의 페르시아 사업은 지원 받을 가치가 있었다."(229)


"1907년 영·러 협정의 일환으로 영국과 러시아 양국은 페르시아를 분할해 각기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합의했다. 이런 합의는 양측 모두에게 이유가 있었다. 즉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와 1905년 혁명의 혼란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있어서 영국과 화해하기를 희망했다. 영국은 인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는 것을 우려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독일의 중동 진출을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 1907년 협약에 따라 페르시아 북부는 러시아 영향권 아래에, 남부는 영국의 영향권 아래에, 중부는 중립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중부 지역에 새로운 굴착 현장이 있었다. 테헤란 주재 신임 영국 공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페르시아를 양분한 이 협약은 '외국인에 대한 기존의 반감에 더욱 불을 댕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페르시아 분할은 영국, 러시아, 프랑스 간에 결성된 '3국 협상'으로 가는 과정이었다. 3국은 그로부터 7년 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터키제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237-8)


"피셔 제독의 제일 목표는 영국 해군을 현대화해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서운 기세로 산업화를 이루며 경쟁자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제국이 자신들의 적이 될 것임을 누구보다 먼저 확신했다. 그는 독일과의 충돌이 불가피할 경우, 석유 연료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석탄은 선원의 4분의 1이 동원되어 연료를 선적해야 하지만, 석유는 이런 인력의 투입 없이도 공해상에서 연료 재충전이 가능했다. 게다가 석유는 석탄 사용에 따른 피로감, 시간, 배출 가스, 불편성을 상당 부분 줄여주었고, 회부의 수를 절반 이상 줄여주었다. 석유의 장점은 가장 위험한 순간인 전투 중에 가장 잘 발휘되었다. 〈석탄 함정에서는 석탄이 소진되어가면 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심지어 함포 요원까지 투입되어 석탄을 창고에서 화로로 옮겨야 했다. 전투 중 가장 위험한 순간에 전투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라고 처칠은 회고했다. 석유는 모든 함정의 화력을 증강하고 속력을 높여 주었다."(247-8, 254)


"영국의 '운명을 건 돌진'은 당연히 로열더치 쉘과 앵글로-페르시안의 극심한 경쟁을 야기했다. 물론 앵글로-페르시안이 명백하게 불리했다. 재정 기반이 약한 앵글로-페르시안이 쉘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파트너는 영국 해군부였다. 그린웨이는 해군부에 20년간의 연료 공급 계약을 신청하고 재정적 위기에서 회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그린웨이가 피셔의 위원회와 영국 정부에 증언한 것은, 정부의 도움 없이는 앵글로-페르시안이 쉘에 흡수되어 소멸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되면 쉘은 독점적 위치에 설 것이고 영국 해군에게 독점가격을 요구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새뮤얼이 유태인이고 디터딩이 네덜란드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쉘이 로열더치에 의해 관리되고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의 압력을 받기 쉽다는 것이다." "여러 부처들이 그린웨이의 주장에 지지를 보냈다. 쉘의 위협과 앵글로-페르시안의 애국심에 대한 그린웨이의 반복적인 주장에, 외무부는 찬성 입장을 고수했다."(258-60)


"적당한 가격에 필요한 양을 확보하기 위해서, 해군부는 석유 공급원을 소유하거나, 혹은 어느 정도라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했다. 석유를 비축하면 가능한 일이고, 그렇게 되면 시장 관리 능력도 커질 것이다. 또한 해군부는 원유 정제 능력을 갖추고 잉여분을 처분할 수도 있어야 한다. 처칠은 〈석유의 품질, 정제, 도입선, 도입 경로 및 유전에 있어 어느 것 하나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석유 공급을 위한 관건은 사업의 다양화다〉라고 말했다." "1914년 6월 17일, 처칠이 하원에 제출한 의안은 두 가지 대목에서 중요했다. 하나는 정부가 앵글로-페르시안에 220만 파운드를 투자하고 대신 주식의 51%를 소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의 이사회에 이사 두 명을 파견한다는 것이었다." "민간 기업의 정부 소유를 주장한 처칠의 제안은,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를 매입했던 것을 제외하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석유 의안은 의회 내부의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차이로 통과되었다."(261-5)


2장 세계의 세계에 대한 투쟁


"1915년까지는 영국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받는 데 아무 문제도 없었지만 1916년 초에 변화가 생겼다." "영국에서 석유 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선박에 의한 수송이 점차 감소하는 것으로,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의해 영국 본토로 들어오는 모든 석유와 식량은 물론 기타 원자재의 공급이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석유 위기를 초래한 또 다른 원인은 석유 수요 급증이었다. 전시에는 전방이나 후방이나 석유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유 부족을 우려한 영국 정부는 일종의 배급제를 도입했으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석유 위기가 다가오자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들은 이미 석유 공급 체계를 긴밀하게 통합해놓았다. 1918년 2월에는 연합국 석유회의가 발족되고 공동출자를 통해 석유 공급과 유조선 운행을 일원화해서 관리했다. 회원국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이었다. 이로써 연합국과 그들의 군대에서만큼은 보급물자 배분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285-8)


"1918년 11월 11일,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지만, 이제 석유는 전후 국제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새로운 유전을 얻기 위한 경쟁은,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며 덤벼드는 기업가나 진취적인 사업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세계대전을 겪으며 석유는 국가전략의 핵심요소로 등장했다. 따라서 정치가들과 관리들도 지금까지 해왔던 것 이상으로 싸움의 중심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전후 세계는 경제적 번영과 국력 신장을 위해 방대한 석유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란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갈등의 초점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집중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석유 부존 가능성이 높다는 보고에 자극받아, 메소포타미아는 석유 이권을 따내려는 국가들과 석유 사업가들의 복잡한 외교적, 상업적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이며 새로운 수입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터키제국 때문에 싸움은 더욱 격해졌다."(299-300)


"중동에서 석유 이권을 기대했던 것은 유럽계 회사들만이 아니었다. 미국계 회사들도 전 세계에 걸쳐 새로운 유전 개발 작전에 돌입했다. 미국도 중동으로 눈을 돌려야 했던 것이다. 석유가 갑작스럽게 고갈될지 모른다는 우려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무렵 실질적인 강박관념으로 변해, 미국의 석유업계와 정부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1920년대 초까지도 계속되었다. '휘발유 없는 일요일', 전쟁 중에 부각된 석유의 엄청난 중요성 등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석유 고갈에 대한 두려움은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국제 무대에서 영국과의 충돌이 가시화되었다. 미국 정부와 석유업계는 미국이 재빨리 행동을 취하지 않으면 영국이 공격적 정책을 추진해 세계 도처의 석유자원을 선점할 것이라 믿었다. 정부는 서둘러서 미국 내 석유회사가 해외의 공급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지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 정부의 기본 원칙은 '문호 개방', 즉 미국의 자본과 기업에 대해 동등한 진입을 허용하라는 것이었다."(315-7)


# 적선협정赤線協定(1928. 7. 1)

페르시아와 쿠웨이트를 제외한 중동의 모든 유전 개발을 동업자들이 독점적으로 수행하기로 한 협정. 동업자로서 로열더치 쉘, 앵글로-페르시안, 프랑스(CFP), 미국(근동개발회사)가 각각 23.75%, 터키 석유회사의 굴벤키안이 5%의 지분을 부여받았다.


"자동차 시대의 초창기, 많은 미국인들은 휘발유라는 '새로운 연료'가 바닥나버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1917년부터 1920년 사이에 미국에서는 새로운 유전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권위 있는 지질학자들은 미국의 석유 생산이 머지않아 한계에 이를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을 했다. 석유 정제업자들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수요 증가로 공급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 예상했다." "공급 부족이 예상되면서 가격 상승의 압력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석유탐사 기술도 발전하고 있었다. 1920년 이전까지 석유산업에 적용되는 지질학은, 지표 상에 관측되는 지형의 지도를 작성해 유전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내는 '지표지질학'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0년 무렵에는 '지표지질학'으로 찾아낼 만한 유전이 거의 없었다. 즉 눈에 보이는 유전 후보지는 이미 모두 발견되었던 것이다. 유전 탐사자들은 지표 아래의 지질 구조를 통해 석유 부존 가능성을 알아내야 했다. 새로 등장한 학문인 '지구물리학'이 이를 가능케 해주었다."(355)


"20세기 초, 미국을 제외한 서반구의 석유탐사는 대부분 멕시코에 집중되었고, 멕시코는 곧 세계 석유시장에서 중요한 세력으로 등장했다. 멕시코에서 벌어진 갈등은, 후에 세계 각지의 정부와 석유회사 간에 벌어진 본질적이고도 장기적인 싸움의 한 표본이었다. 쟁점은 두 가지로, 합의의 안정성과 주권 및 소유권의 문제였다. 누가 석유의 이익을 차지할 것인가? 멕시코 측은 오랫동안 잊혔던 원칙을 재차 주장했다. 이 나라에서는 1884년까지 지하 부존자원은 모두 군주에 귀속되며, 군주가 없을 경우에는 국가가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혁명이 추구한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지하자원을 국가가 소유한다는 원칙을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1917년 헌법 27조에 명문화되었는데, 이것이 싸움의 발단이 되었다. 멕시코 측은 석유의 소유권을 되찾았지만 외국자본에 의존하지 않고 개발하고 판매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또한 투자자들은 안전한 계약과 수익 전망 없이는 개발 위험과 비용을 부담할 의사가 없었다."(395)


"한 석유회사는 멕시코 내에 있는 미국 소유의 석유 매장 지역을 보존하기 위해 본국 정부에 군사적 개입을 요구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멕시코가 외국 부채를 갚기 위해 수입을 올리려고 노력하는 중이어서, 문제는 한층 더 복잡해졌다. 미국의 주요 은행들은 멕시코의 석유 수입이 늘어나 자신들의 부채를 상환해주길 바랐다. 그래서 은행가들은 미국 석유회사에 대항하는 멕시코 측을 지원했고, 석유회사들이 요구하는 군사적 개입과 응징조치에 강력히 반대했다." "미국이 생각하는 멕시코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불안한 장소, 야만적으로 무질서한 계약을 꾸미는 나라, 전략적인 자원 유입에 위협을 주는 나라였다. 반면 멕시코가 미국과 미국의 석유회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외국 세력의 착취와 침략, 주권 침해의 고착화, 강한 힘을 가진 '양키제국주의'였다. 석유 회사들이 불안과 위기를 느끼면서 기업 활동이 빠른 속도로 후퇴했고, 멕시코는 곧 세계 석유 강국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다."(395-6)


"멕시코의 정치적 상황은 석유사업가들이 대거 베네수엘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멕시코와는 달리 베네수엘라는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었는데, 후안 비센테 고메스 장군 때문이었다. 잔인하고 교활하며 탐욕스러웠던 이 지배자는 27년 동안 베네수엘라를 통치하며 자신의 재산을 불려나갔다." "고메스 정권 아래의 베네수엘라는, 멕시코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정치적 예측 가능성, 행정적·재정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유전 개발은 맹렬한 속도로 추진되었다. 1920년 140만 배럴이었던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은 1929년에 이르러 1억 3,700만 배럴에 달했고, 총생산량 측면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해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76%에 달했으며, 정부 세수의 절반을 차지했다. 베네수엘라는 이미 로열더치 쉘의 가장 큰 단일 석유 공급원이었다. 또한 1932년에는 페르시아와 미국을 제치고, 영국의 단일 최대 공급원이 되었다."(396-7, 400-1)


"아크나캐리 회담이 열린 때는 1929년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대공황이 시작되기 1년 전이었고, 대드 조이너가 동부 텍사스에서 석유를 발견하기 2년 전이었다. 그러나 이미 세계 석유시장은 미국, 베네수엘라, 루마니아, 러시아에서 유입되는 석유로 넘치고 있어서 '파멸을 초래하는 경쟁'이 벌어질 징후가 보였다. 특히 러시아 석유가 범람하자 석유업자들은 즉시 아크나캐리로 몰려왔다." "아크나캐리는 시대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었다. 산업 합리화, 효율성, 중복 배제 등은 유럽과 미국에서 그 시대의 가치로 여겨지고 목표가 되었다." "존 록펠러와 헨리 플래글러 시대에는 '자유로운 경쟁'이 싸워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전 세계를 완전히 지배하고 독점함으로써 상업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이젠 다른 회사를 항복으로 몰고갈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회사도 없고, 정치 현실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따라서 아크나캐리에 모인 석유업자들의 목적은 정복보다는 협약이었다."(442-3)


"아크나캐리 문서의 핵심은 '현상유지As-Is' 협약이다. 이 협약에 가담한 석유업체들은 각 회사의 1928년도 시장점유율에 입각해, 총수요를 백분율로 나눈 값으로 시장별로 자신의 몫을 할당받았다. 총수요가 증가하면 업체들도 실제 생산량을 바로 증가시킬 수 있었지만, 백분율로 나눈 몫은 항상 똑같이 유지해야 했다. 이 외에도 각 업체는 비용 절감을 위한 설비 시설 공유에 동의하고, 새로 정유소와 그 외 시설들을 설립할 때에는 신중히 검토하기로 했다. 또한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업체가 시장에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판매 가격은 미국 걸프 연안의 가격에 수송비를 합산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기초해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런 공급 방식은 추가 이윤을 의미했다." "몇 달 후, 이 협약의 주체들은 석유 생산량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하는 데 동의했다. 협약 업체들이 배당된 시장 지분 이상으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경우는, 가외 생산량을 타 연합 업체에 팔 수 있을 때뿐이었다."(446-7)


"'현상유지' 협정은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석유 공급 과잉에 이어진 공황에 맞서기 위해서뿐 아니라 유럽과 그 밖의 지역(대표적으로 소련을 겨냥한)에서 출현하는 강력한 정치세력에 맞서자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 "1930년대 석유업계에 미치는 정치적 압력의 형태는 다양했다. 정부는 수입 할당을 매기고, 가격을 정하고, 외환 거래에 제한을 가했다. 또 업계가 잉여 농산물에서 뽑은 알코올을 자동차 연료에 혼합하도록, 또 기타 석유 대체품을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정부는 막대한 신규 조세를 부과했고, 상호 무역 협정과 보다 큰 정치적 목적을 연계하기 위해 석유 수출입 거래를 통제하는 데 개입했다. 정부는 경제적 타당성이 부족한 국내 시설에 투자하도록 강압하면서 이윤 송금을 봉쇄했고, 업계에 대해 일정한 재고분을 유지하라고 주장했다." "전 세계적으로 1930년 후반기는 공황시대의 끝인 최악의 시기였기에, 주요 석유업체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정부 개입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454-5)


"한편, 경기 침체의 수렁 속에서 '석유는 더 이상 황금이 아니다'란 사실을 깨달은 페르시아의 레자 팔레비는 격노했다. 앵글로-페르시안의 석유 로열티는 수출 소득의 3분의 2를 차지했으며 정부 수입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경기 침체로 인해 앵글로-페르시안이 내는 로열티가 1917년 이래 최저로 떨어졌다. 1932년 11월 6일의 각료회의에서 팔레비 왕은 돌연 앵글로-페르시안의 석유 이권을 일방적으로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1933년 4월 말, 마침내 영국 정부와 국왕 간에 협약이 이루어졌다. 석유 이권은 4분의 3으로 감소되었고, 페르시아가 유가 변동과 관계없이 톤당 4실링의 고정 로열티를 보장받았다. 동시에 페르시아는 이 회사의 주주들에게 실질적으로 지급되어 왔던 타 지역 이윤의 20%를 받게 되었고, 다른 사태와 무관하게 연간 최소한 75만 파운드의 보상을 약속받았다. 한편 석유 이권 인가 기간은 1961년에서 1993년으로 연장되었다. 결국 앵글로-페르시안의 본질적인 입지는 유지되었다."(455-9)


"1939년 9월, 유럽의 전쟁 발발 이후 몰수당한 미국의 석유회사 측과 미 정부 간의 이해는 심하게 엇갈렸다. 루스벨트 행정부에게는 뉴저지 스탠더드오일이나 기타 미국 회사들에 대한 자산 보상보다는 국가 안보가 중요했다." "당시 미국은 멕시코를 반구형 방어 체계에 묶어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이 멕시코산 석유 공급에만 관심을 가졌지, 실질적으로 누가 이곳의 공급권을 쥐고 있는지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멕시코의 석유 자산 몰수는 볼셰비키 혁명이나 1911년 스탠더드 트러스트 해체 이후 업계가 겪었던 고통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외국 회사와 멕시코 정부의 타협 과정은 협상의 정당성을 확인시켜주었다. 1938년 국유화는 혁명이 얻어낸 커다란 승리였다. 멕시코는 석유산업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게 되었고, 멕시코 석유회사는 국영 석유회사 중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 회사로 부각되었다. 멕시코가 미래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468-70)


"쿠웨이트에서의 석유탐사는 1935년에 시작되었고, 1936년 들어서야 비로소 지질 관측이 실시되었다. 쿠웨이트 동남부 버간은 가장 유망한 지역으로 관측되었고, 1938년 2월 23일 놀랄 만한 양의 석유가 발견되었다." "반면 이웃 사우디아라비아의 탐사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1938년 3월, 놀랄 만한 뉴스가 터졌다. 담맘 지역 7호 시추정의 지하 4,727피트 지점에서 대규모 석유가 발견된 것이다. 담맘에서 시추를 시작한 이래 거의 3년 만의 일이었다. 사우드 국왕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돈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이제 왕국의 존속은 순례자 수의 변동과는 무관해졌다." "1933년 협정의 부속 비밀문서에 따라 카속사는 1939년 5월 31일 우선권을 행사하여 44만 제곱마일에 달하는 절대적 이권 지역을 확보했다. 무려 미국 면적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물론 그만한 대가가 지불되었다. 사우디의 재정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소칼은 거듭해서 차관을 공여했는데, 총규모가 수백만 달러에 달했다."(504-5)


# 카속사(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mpany)는 미국 텍사코와 소칼의 합작 기업으로,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 기업인 아람코의 전신이다.


3장 전쟁과 석유


"1930년 후반 일본의 석유 생산은 국내 소비량의 불과 7% 정도를 충당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수입에 의존했는데 80%는 미국에서, 10%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서 수입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한 직후인 1930년대 초, 일본 정부는 국책 수행에 협조하도록 석유산업을 통제하기로 했다. 1934년 일본 군부는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했던 국내 업자들의 지지를 얻어 '석유산업법'을 통과시켰다. 외국 기업은 의무적으로 정상 영업에 필요한 재고 수준을 넘어서는 6개월분을 비축해야 했다. 목적은 분명했다. 국내 자본으로 석유 정제 사업을 육성하고, 외국 기업에 대한 의존을 줄이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새로운 식민지인 만주에서 석유사업을 독점할 회사를 설립하려고 했는데, 여기에서도 그 목적은 구미 기업의 배제였다." "워싱턴과 뉴욕, 런던에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전면적인 혹은 부분적인 대일 금수조치를 취하고 일본에 원유 공급을 억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514-6)


"진주만 공격을 계획한 야마모토는 러일전쟁 당시, 즉 1904년 뤼순 항 기습에서 공격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이 큰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진주만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일본이 전쟁을 결의한 최대의 동기는 석유였다. 그런데 하와이 작전에는 석유가 빠져 있었다. 야마모토와 참모들도 석유에 관한 한 미국이 압도적 우위에 있음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오하우 섬에 있는 석유 저장 기지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다. 석유 기지에 대한 공격은 작전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심각한 반격을 유발할 수 있는 전략적 실패였다. 하와이에 있는 석유는 전부 미국 본토에서 운반된 것이었다. 일본군이 미국 함대의 석유 비축 기지와 저장 탱크를 파괴했다면 미국 태평양 함대의 모든 선박은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는 진주만에서 격침된 군함에 그쳤다. 만약 석유 비축 기지가 파괴되었다면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 석유를 공수해야 했다."(545-6)


"1937년에서 1938년, 이 게 파르벤은 하나의 독립된 기업이라기보다는 독일 산업의 한쪽 팔이었다. 게다가 철저히 나치화 되어 있었다. 회사의 3인자를 포함해 모든 유태계 임직원들이 제거되었고, 반反나치의 칼 보쉬 회장도 물러났다. 반면 나치당에 속해 있지 않던 여타 이사들은 서둘러 입당원서에 서명했다. 4개년 계획의 야심찬 공약들은 매우 웅대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내실 있는 합성연료 산업을 완성하지 못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9월 1일까지, 수소첨가법 설비 14개가 완전 가동 중이었고 6개가 추가로 건설되고 있었다. 1940년 합성연료 생산량은 하루 7만 2,000배럴에 달하여 총석유 공급량의 46%를 차지했다. 합성연료는 군사적 필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더욱 의미심장했다. 베르기우스법이라고 불리는 수소첨가법으로 생산된 합성연료는 독일의 전체 항공 휘발유 수요의 95%를 점했다. 만약 합성연료가 없었다면 독일 공군은 비행기를 띄울 수 없었을 것이다."(556)


"파르벤은 소위 '자유노동자'와 '노예노동자'를 동시에 사용했다. 노예 노동자에 대해서는 성인에게는 기술에 따라 3~4마르크, 어린이에게는 그 절반을 지급했다. 물론 그 돈은 히틀러 친위대의 금고 속으로 들어갔다." "한 추정치에 따르면, 1944년 독일 합성연료 산업의 전체 노동력 중 3분의 1은 노예 노동력이었다. 파르벤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친위대와의 합작사업에 점점 깊이, 그리고 열성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양측은 여러 가지로 교류했다. 크리스마스 전날, 아우슈비츠에 상주하는 파르벤의 관계자는 지역 친위대 사람들과 휴일 사냥에 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토끼 203마리와 여우 1마리, 살쾡이 1마리를 잡았다. 파르벤의 산업단지 건설 책임자가 여우 1마리와 토끼 10마리를 잡아 사냥 챔피언이 되었다. 당시의 사냥 기록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모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 구역에서 올해 달성한 성과 중 가장 좋았다. 이 기록은 조만간 강제수용소에서 있을 사냥 기록만이 깰 수 있을 것이다.〉"(575-7)


"영국의 입장에서 전쟁에 필요한 석유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전쟁의 발발은 필요한 석유의 양이 비약적으로 증가함을 의미했다. 이제 의지할 곳이라고는 세계 석유 생산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미국뿐이었다. 영국 정부와 쉘-멕스 하우스에 있는 석유 관계자들에게는 두 개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석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외환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영국에 지불 능력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은 워싱턴에 있었다. 1940년 12월, 3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참고'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해 3월에는 무기대여법이 제정되어 영국에 물자 공급을 하는 데 장애가 되었던 자금 문제가 해소되었다. 루스벨트가 언급한 바와 같이 '멍청하고 우둔하고 낡은 달러 사인'은 불필요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상환 시기를 명기하지 않은 채 대출한 물자 중에는 석유도 있었다. 선박을 이용해 석유를 영국으로 수송하는 데 장애가 되던 중립법도 완화되었다."(614)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미군은 석유 공급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육군은 석유 소비량에 관한 기록조차 보유하지 않았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자가 참호전이었다면 후자는 기동전이었다(전쟁 중에 처칠과의 만찬회 자리에서 스탈린은 〈이번 전쟁은 엔진과 옥탄가의 싸움이다. 미국의 석유산업과 자동차 산업을 위해 건배하자〉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막대한 양의 석유를 소비했다. 유럽에 파견된 미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100배나 되는 휘발유를 사용했다. 미 육군 1개 사단의 기계력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4,000마력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8만 7,000마력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서 운송된 물자의 절반이 석유였다. 미군 병참부대의 추산에 따르면, 미군 병사 1명이 해외에 파견되는 경우 67파운드의 장비와 보급물자가 필요했는데, 그중 절반이 석유제품이었다."(6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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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단 - 이슬람의 암살 전통
버나드 루이스 지음, 주민아 옮김, 이희수 감수 / 살림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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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중세의 아사신파와 현대 이슬람 암살단 사이에 나타난 유사성은 아주 놀랄 만하다. 가령 시리아와 이란의 연관성, 미리 계산된 테러 자행, 비밀 암살단이 보이는 완전한 충성, 적극적이라고 할 만큼 자기를 희생하는 태도, 대의명분에 충실하고 천국의 보상을 기대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일각에선 중세 집단은 십자군을, 현대 집단은 미국과 이스라엘을 겨냥했으니 둘 다 공통적으로 외부의 적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 큰 유사성을 찾아냈다. 분명 그와 같은 유사성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유사성은 이 테러 공격의 실제라기보다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세 이후 서구 세계에 만연된 관점에 의하면, 아사신파의 분노와 무기는 주로 십자군을 겨냥했다.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아사신파에 희생된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십자군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이조차 무슬림의 문제로 인해 표적이 된 것이었다. 아사신파에 희생된 절대다수는 무슬림(특히 당대 이슬람 세계의 엘리트층)이었다."(19)


"아사신 요원이 목표물을 죽이고 나서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다는 면에서, 오로지 이런 면에서만 아사신파가 오늘날의 자살 폭탄 테러의 선조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점에서 그 자살 폭탄 테러집단은 선조들의 신념과 관습에서 급격하게 이탈했다. 이슬람은 줄곧 자살을 중대한 죄라고 여기면서 강하게 비판해 왔다. 자살은 그 장본인이 천국으로 갈 것이라고 아무리 강하게 주장해 봤자, 천국의 권리가 박탈되는 중죄였다. 한 가지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아사신파가 절대적으로 강력한 적의 수중에 자신을 그대로 던지는 쪽이라면, 현대 테러집단은 제 손으로 죽음을 자초하는 쪽이다. 전자의 경우, 어느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은 성전에서 실행하면 천국으로 가는 직행표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지옥 불에 떨어지는 지름길이다. 과거에 결정적으로 차별화되었던 둘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 것은 자살 폭탄을 관습으로 흡수, 새로운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던 20세기 무슬림 신학자들의 소행이다."(21)


1 아사신파의 발견


"맨 처음 십자군 연대기를 보면, '아사신'은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에 거주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슬람 종파로서 절대군주 '산중 노인'이 이끄는 집단으로 등장한다. 특히 선한 크리스천과 무슬림이 하나같이 그들의 신앙과 행위를 혐오한다고 적혀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 아사신파의 상황은 우선 중세 여행가들이 아사신파에 관해서 동방에서 듣고 퍼뜨린, 끔찍한 소문과 판타지와 너무 달랐다. 또한 19세기 동방학자들이 보수파 이슬람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원고 자료에서 인용했던, 적대적이며 왜곡된 이미지와도 매우 달랐다. 보수파 이슬람 신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주요 관심은 아사신파를 반박하고 비난하는 것이었지 결코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아사신파는 교활한 사기꾼들이 주도하던, 상습 마약꾼들이 모인 갱 집단이거나,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의 음모이거나, 전문 살인자 조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세인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27, 52-3)


2 이스마일파


"초기에 시아파는 권력을 잡을 후보자를 지지하는 집단으로서 특유의 종교적 교리도 없고, 이슬람 정권이 본질적으로 지닌 종교적 취지도 크게 내세우지 않은, 일종의 정치 파벌에 불과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시아파 내 추종자들의 성격과 시아파 교리의 본질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대다수 무슬림들이 볼  때, 당시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는 방향 전환을 잘못하고 있었다. 즉 선지자 무함마드와 맨 처음 그를 따르던 독실한 무리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사회와는 전혀 딴판으로, 탐욕스럽고 사악한 귀족 상류층이 지배하는 이슬람 제국이 형성되었다. 정의와 평등은 온데간데없이 불평등과 특권과 압제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본 많은 무슬림들은 선지자 무함마드 혈족에게 권력이 돌아간다면 이슬람이 꿈꾸던 본래의 진정한 메시지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시아파의 주장과 지지는 종교적일 뿐 아니라 메시아적인 인물을 구하기에 이르렀다."(58-9)


"본래 이슬람이 꿈꾸는 이상적인 국가는 신성한 법 아래에 수립, 유지되는 종교적 조직체이다. 이상적 국가의 주권은 신으로부터 나오며, 군주인 칼리프는 이슬람 사회를 떠받치고 무슬림들이 선한 무슬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의무를 맡은 사람이다. 이런 사회에서 법률, 사법권, 또는 권위의 측면에서 세속과 종교 간의 구별은 없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회와 국가는 칼리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하나이며 한 몸인 조직체이다. 사회 내부의 정체성과 결속력의 기반, 국가 내의 충성과 의무의 유대 관계는 전부 종교적 관점에서 이해되며 표현된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 볼 때, 종교·정치적 태도와 활동을 구분하면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는 서구의 관점은 무의미하며 비현실적인 생각일 뿐이다. 그래서 이슬람의 어느 집단이 국지적인 반대를 넘어 권력자들에게 주장을 펼쳤다면, 즉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조직을 세웠다면 그 행위는 하나의 신학이 되었으며 그 조직은 하나의 종파가 되었다."(59-60)


"초기의 실패와 이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극렬주의자들과 무장 종파들은 계속 등장했고, 심지어 이맘의 최측근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었다. 극렬파와 온건파 간의 결정적인 분리는 765년 알리 이후 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디크가 사망한 뒤에 이루어졌다. 자파르의 장남이 이스마일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추측건대 극렬주의 집단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이맘 자리를 상속받지 못했다. 그래서 시아파의 대다수가 이스마일의 동생 무사 알 카짐을 7대 이맘으로 인정했다 무사 가문은 12대 이맘까지 배출하고 873년에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시아파의 절대 다수가 인정하는 '준비된 이맘' 즉 마흐디이다. 12명의 이맘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스나 아샤리, 즉 12이맘파로 알려져 있으며, 시아파 중에서도 보다 온건한 분파에 속한다. 순니 이슬람 본체와 시아파의 차이는 교리 면에서 몇 가지 정도뿐이며 최근 몇 년 사이 이것마저 무의미해졌다. 16세기 이후 12이맘파 교리는 이란의 국교가 되었다."(67)


# 이맘 : 압제자를 물리치고 정의를 수립하는 올바른 지도자, 마흐디Mahdi라고도 한다.


# 다이 : 이맘의 메시지를 설교하고 신도들을 뽑으며 결국 그들을 승리나 순교로 이끄는 설교자


"이스마일과 그의 후손을 따르는 또 하나의 집단은 이스마일파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비밀리에 활동을 하던 중, 응집력과 조직 면에서 그리고 지적·감정적 친화력 면에서 모든 경쟁 집단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종파를 형성했다. 초기 종파들의 혼란스러운 사변과 원시적인 미신을 대신하여, 일련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높은 철학적 수준에 기초한 종교적 교리 체계를 정교하게 수립했으며 문학을 창조했다." "이스마일파는 독실한 무슬림들에게 꾸란과 전통, 순니파의 법에 뒤지지 않는 그들의 법에 경배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고대의 자료, 특히 신플라톤주의를 원용하여 철학적인 우주론을 제시했다." "끝으로 불만을 품은 자들에겐 제대로 조직화되고 널리 퍼진, 강력한 반대파 운동의 견인력을 알려 주었다. 이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그 자리에 전 인류의 올바른 지도자 이맘이 영도하는, 새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주는 듯했다."(67-8)


3 신종파


"이란의 거대 고원 지대 다일람Daylam에는 호전적이며 독립적인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8세기 말 알리 당파가 압바스조의 박해 때문에 피신하여 그곳에서 은신하고 지지를 받았을 때부터 다일람은 시아파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바그다드와 기타 순니파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독립성을 지키는 기염을 토했다. 10세기에 부이드 왕조 치하에서도 다일람족은 페르시아와 이라크 대부분의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패권을 차지하고 한동안 칼리프들의 후견인 노릇을 했을 정도였다. 이후 셀주크가 들어오면서 이슬람 제국 내에서 다일람족과 시아파의 통치가 끝이 났고 이후 다일람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다. 바로 이 북부 부족들, 즉 이미 시아파가 지배했었고 이스마일파 선전 운동이 강하게 스며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하산 이 사바가 중추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기존 정부에 불만을 품은 호전적인 이곳 다일람과 마잔다란 산악지대 부족들에게 하산의 투쟁적인 교리는 강력한 호소력을 지녔다."(91-2)


"하산 이 사바의 명에 따라 셀주크 왕조의 재상 니잠 알 물크(1018~1092)를 살해한 사건은 미리 계산된 테러 전쟁에서 발생한 공격으로 이스마일파 교리를 비난하고 이스마일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을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국왕, 군주, 장군, 총독과 심지어 성직자들을 비명횡사시킨, 기습 공격의 시초였다." "희생자들 측에서 보자면, 이스마일파의 암살단은 범죄자 광신도들이며 종교와 사회에 대항하는 살인적 음모에 가담한 자들이었다. 한편 이스마일파 측에서 보면, 그들은 이맘의 적에 대항하여 전쟁에 나간 정예 엘리트 부대였다. 그들은 압제자와 찬탈자를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의 신앙과 충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고 직접적인 축복과 영원한 축복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이스마일파측은 실제 암살 담당 교도를 가리켜 열성 신도라는 뜻을 지닌 피다이fidai라고 불렀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그들의 용기와 충성, 자신을 희생하는 헌신적 신앙심을 찬양하는 시가 남아 있다."(100-1)


"이스마일파의 위협이 점점 커지자 자기만족에 심하게 빠져 있는 그들에 대한 술탄 베르크야루크의 분노가 점점 쌓여 갔다. 마침내 술탄은 행동에 나섰다. 셀주크 군대는 타바스와 그 외에 이스마일 성을 정복하고 파괴했고, 이스마일 정착지를 약탈하고 일부 주민을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마일파에게 '절대로 다시는 축성하지 않고, 무기를 사지도 않을 것이며, 신앙을 포교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강요한 후에 철수했다. 이 조건이 지나치게 관대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용인한 산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마일파는 또다시 쿠히스탄에 견고하게 입지를 다졌다." "당시 이스마일파는 실패와 좌절에 몸부림치던 중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베르크야루크의 묵인에 의존할 수도 없었고, 한동안 피다이들은 상대적으로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성은 여전히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았으며, 비록 통제를 받긴 했으나 그들의 테러 권력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107-8)


"1118년 술탄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셀주크 제국끼리 또다시 대량 살육으로 번진 여러 분쟁이 줄을 이었다. 그러는 동안 아사신파는 그간 겪은 고통에서 회복하고 쿠히스탄과 북부에서 그들의 입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때가 되어 베르크야루크와 무함마드 타파르 형제 술탄 하에서 동부 지역을 통치하던 산자르가 셀주크 군주들 중에서 아슬아슬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 시기쯤 이스마일파와 순니파 제국 간의 관계가 변하기 시작한다. 이스마일파는 최종 목적을 포기한 건 아니지만 본토 중심 지역에서 파괴와 테러는 잠잠해진다. 대신에 그들이 지배하는 영토를 방어하고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하여 어느 정도 정치적 평판도 얻는다. 동시에 거대한 셀주크 정복으로 중단되었던 중동의 분열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이스마일파의 공국과 영지는 소규모 독립 국가의 형태로 바뀌고 심지어 지역 동맹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다. 술탄 산자르의 치세 동안 이스마일파는 수월하고 평온하게 지냈다."(117)


"하산 이 사바는 행동가이면서 동시에 사상가이자 작가였다. 순니파 저자들은 그의 저작에서 두 개의 인용문을 보존했는데, 각각 자서전과 신학 논문 초록의 일부분이었다. 후세 이스마일파 교도들에게 그는 다와 자디다(da'wa jadida, 신종파)의 최고 활동가로 존경받았다. 신종파는 카이로와 단절한 후에 공포된 개혁 이스마일파 교리로서, 니자리파 이스마일 교도들 사이에서 보전되고 정교화되었다." "하산은 결코 이맘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이맘의 대리자일 뿐이었다. 이맘이 사라진 후, 그는 당시 숨겨진 이맘에 대한 지식의 근원, 증거자, 후자hujja였다. 즉 과거와 미래의 명백한 이맘과 다와의 지도자 사이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고리였다. 이스마일파 교리는 기본적으로 독재주의를 표방한다. 신도들은 선택의 권리가 없다. 그러나 권위 있는 가르침, 탈림ta'lim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그 지도의 최종 근거는 바로 이맘이었고 직접적인 근거는 이맘이 인정한 대리자였다."(122-3)


"순니파와 마찬가지로 신도들은 이맘을 선택할 수 없으며 신학과 법률 사안을 두고 진리를 결정할 때에 판결을 행사할 수 없었다. 신께서 이맘을 지명하셨으므로 그 이맘이 진리의 보고였다. 그래서 오직 이맘만이 계시와 이치를 입증할 수 있었다. 즉 그 직위와 가르침의 본질상 오직 이스마일파 이맘만이 실제로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맘 홀로 진정한 이맘이었고, 그의 경쟁자들의 가르침은 거짓이었다. 충성과 순종을 강조하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거부하는 이런 교리는 비밀스럽고 혁명적인 반체제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자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이집트 내 파티마 칼리프 제국의 뼈아픈 현실은 이스마일파의 입장에서 볼 때 당혹스러운 골칫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카이로와 결별하고 신비에 싸인 이맘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자 이스마일파의 열정과 헌신적인 신앙의 억압된 힘이 분출했다. 그것이 바로 이스마일파를 일으켜 세우고 지휘했던 하산 이 사바의 업적이었다."(123)


4 페르시아에서 수행한 임무


"암살시도가 줄어든 것이 이스마일 공국의 성격에 생긴 유일한 변화는 아니다. 이방인이었던 하산 이 사바와 달리 그의 후계자인 부주르구미드는 루드바르 출신이었다. 그는 하산과 함께 비밀 정치 운동가로서 경력을 쌓은 게 아니라 대부분 군주와 행정관으로서 조직 활동을 했다." "1138년 2월 9일 부주르구미드가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무함마드가 후계자 자리를 계승했다." "이제 이스마일파 신앙에서 열정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스마일파 공국과 순니파 제국 사이에 사실상 상호 교착 상태와 암묵적인 상호 인정이 전개됨으로써, 숨겨진 이맘의 이름으로 구질서를 전복시키고 새 천년을 건설하려는 거대한 몸부림은 사소한 국경 싸움과 가축이나 공습하는 모양새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애초에 순니파 제국에 가하는 맹렬한 공격의 선봉으로 활용할 작정이었던 성의 본부가 지역의 종파별 왕조의 중심지가 되어 버렸는데, 이는 이슬람 역사상 흔히 발생한 왕조의 형태였다."(132-7)


"하산이 보여주었던 헌신적이며 모험적인 초기 투쟁들, 전 교도들을 감동시켰던 종교적 신앙을 그리워하던 이들은 무함마드의 아들인 하산에게서 지도력을 발견했다." "1162년 자리를 물려받은 하산은, 알라무트 안마당에서 했던 설교를 통해 스스로 이맘의 대리자이며 살아 있는 증거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부활(키야마)의 인도자로서, 그는 이스마일파 종말론에서 중추적 인물인 카임Qa'im이 된다. 라시드 알 딘에 의하면, 하산은 공적 선포를 한 뒤에 표면적으로 자신은 부주르구미드의 손자로 알려져 있지만 종말론 실체로 보자면 당대의 이맘이자 전 이맘, 즉 니자르 가문의 아들이라는 내용의 문서를 배포했다.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아마도 하산은 니자르의 후계 혈통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의 시대에 혈통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일종의 영적 계보만이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세의 이스마일파 전통에 따르면, 하산과 그의 후손들이 니자르의 진정한 계보였다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137, 141-2)


"알라무트의 이맘들은 당대 다른 이슬람 군주들처럼 이교도 몽골이 이슬람을 침략한 것에 저항한다는 일념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의 새 맹주는 이 위험천만한 이슬람 무장 집단이 점점 독립적으로 커지는 사태를 용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몽골이 행한 페르시아 내 이스마일파의 근절과 멸망은 그리 철저하지 못했다. 이스마일파 열성 신도들이 볼 때는 루큰 알딘이 죽은 후에 그의 어린 아들이 이맘의 자리를 계승했으며 이맘의 계보를 이을 자식을 낳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가 되어 19세기에 아가 칸 가문이 등장하게 되었다. 한동안 이스마일파는 계속 활발히 움직여 1257년에 아주 잠시 알라무트를 재점령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의명분은 사라졌고 이때부터 쭉 그들은 페르시아어권에서 비주류 소수 종파로만 생존하여 동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지금의 구소련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루드바르 지역에서 그들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165-6, 172)


5 산중 노인


"시리아에서 최초로 시아파를 자처한 인물은 8세기에 등장했다. 이후 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이스마일파의 숨겨진 이맘들은 시리아를 자파의 비밀 본부이자 권력을 얻기 위한 최초의 무대로 삼기 위한 작전을 펼칠 때, 그 지역의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10세기 말과 11세기에 이집트 내 파티마 왕조 수립과 그들의 아시아 확장으로 인해 시리아는 간헐적으로 이스마일파의 지배를 받았고 이스마일파의 선전과 선교에 나라를 개방하였다. 공식적인 이스마일파 외에 교리와 관점 면에서 이스마일파와 매우 유사한 기타 종파들이 존재했는데, 그들은 알라무트의 밀사들을 위한 잠재적 기반이 되었다. 마운트 레바논과 인접 지역에 거주했던 드루즈파가 대표적이다. 이 반체제 이스마일 교파는 당시에는 후세의 경직된 배타성을 아직 드러내지 않았던 때였다. 또 다른 잠재적 지지자들은 누사이리Nusayri파, 일명 알라위Alawi파가 있었다. 그들은 본래 12이맘파에서 유래했지만 과격파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178)


"1095년 술탄 말리크샤의 아우 투투시는 최고 술탄 자리를 놓고 다툰 형제간의 싸움 도중에 페르시아 전투에서 사망했다. 원래 존재했던 시리아의 지역적 분열 양상에다가 셀주크의 왕조 분쟁 전통이 한데 결합하여 시리아 왕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다." "혼란과 갈등이 고조되던 이 무렵, 새로운 세력이 시리아에 들어왔으니 바로 십자군이었다. 그들은 북쪽 안티오키아를 거쳐 빠른 속도로 시리아의 해안을 따라 진군했고 해안 근처엔 그들에게 대항할 만한 강국이 없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은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을 기반으로 하여 라틴 국가를 수립했다. 셀주크 권력이 시리아로 확대되자 동방에 익숙한 시리아 내에 여러가지 사회적 변혁과 불안을 조장하는 문제들이 불거졌다. 게다가 라틴 국가의 침략과 정복으로 인한 충격이 시리아인들이 고통과 절망에 더해짐으로써, 그들은 더욱더 메시아적 희망의 메시지를 간직한 인물을 기다리게 만들었다."(179-80)


"12세기에 아사신파는 투르크족 외에 또 하나의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볼 때, 카이로를 지배하던 파티마 칼리프는 찬탈자였다. 다시 말해 그를 축출하고 니자리파 계보의 이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였다. 12세기 초반부 50년간 이집트에서 니자리파를 지지하는 폭동이 한 건 이상 발생하여 진압되었으며, 카이로의 파티마 정부는 백성들 사이에서 니자리파 포교를 금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프랑크족과 아사신파의 관계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거의 없다. 이스마일파와 적군의 협력에 대해 후세 이슬람의 자료에 나타난 이야기들은 아마도 근동 무슬림(Near Eastern Muslims, 근동은 지중해 연안의 서아시아 지역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마음이 이슬람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 사로잡혀 있던, 후대의 심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아사신파 피다이들의 단검에 죽은 프랑크족 희생자 기록은 없으며, 다만 최소한 두 번 아사신파 군대와 십자군의 충돌로 인한 희생은 있었다."(192-3)


"이 무렵 아사신파의 전반적인 정책에 대해서는 아주 광범위한 윤곽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아사신파는 모술의 군주 장기와 그의 내각에 적대감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모술의 군주들은 항상 투르크족 군주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리아와 페르시아 간의 교통 경로를 장악하고 동방의 셀주크 군주들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면서 아사신파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위협했다. 당시 그들은 틈만 나면 주기적으로 시리아로 확장하려고 시도했다." "1148년 누르 알 딘 이븐 장기는 그때까지 이용된 시아파 방식의 '예배 알림(아난)'을 알레포 내에서 완전히 폐지했다. 이 조치는 알레포 내 이스마일파와 여타 시아파들 사이에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결국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사신파의 대표가 안티오키아의 레몽과 함께 싸웠던 사실은 별로 놀랍지 않다. 당시 시리아 내에서 모술 군주에게 효과적으로 대항할 만한 힘을 지닌 군주는 레몽뿐이었기 때문이다."(195-6)


# 시아파 방식의 아난에는 선지자 무함마드와 함께 알리를 칭송하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이슬람 통합과 정통성의 설계자이자 성전의 승자로서 살라딘이 급부상하면서 그는 아사신파의 주적으로 떠올랐고, 아사신파는 어쩔 수 없이 모술과 알레포의 장기 군주들에게 좀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라딘의 중대한 적이 되었다. 1181~1182년에 바그다드의 칼리프에게 보낸 서신에서, 살라딘은 모술의 군주들이 이단 아사신파와 동조하고 있으며 아사신파의 알선으로 신앙이 없는 프랑크족들과도 결탁하는 분위기라고 비난한다. 또 그들이 알레포 내 아사신파의 성, 영토, 포교원을 보장하고 있으며 시난과 십자군 양측에 밀사를 보낸다고 언급한다. 동시에 자신이 무신앙 프랑크족, 이단 아사신파, 모술 군주의 반역이라는 삼중 위협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시난의 전기를 쓴 이스마일파 작가도 후세에 성전이 지닌 이상적 목표에 감흥을 받아, 시난을 십자군에 대항하여 투쟁을 벌이는 살라딘의 협력자로 묘사한다."(200-1)


"아사신파 권력은 몽골 제국과 이집트의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로부터 동시에 이중 공격을 받는 바람에 끝이 났다. 시리아에서 아사신파는 몽골 제국을 쫓아내느라 다른 이슬람 종파와 합세했다. 그리고 바이바르스의 호의를 얻으려고 특사와 선물을 보냈다. 애초에 바이바르스는 아사신파에게 대놓고 적대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1266년 구호 기사단과 휴전 협정을 조인하면서, 당시 아사신파의 성을 비롯해 여러 이슬람 도시와 구역에서 받고 있던 세금을 포기하겠다는 조건을 명시했다." "그러나 바이바르스의 지상 과업은 기독교 프랑크족과 이방인 몽골의 위협으로부터 근동 이슬람을 해방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시리아 한복판에서 이단과 암살이라는 위험한 짓을 저지르는 집단이 계속 독립적으로 나가는 모습을 용인하지 못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머지않아 알라무트의 군주를 대신하여 바이바르스가 아사신파를 지명하고 해고하는 등 전권을 행사했다."(213-4)


# 바이바르스 :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한 맘루크 왕조의 5대 술탄


6 수단과 목적


"이슬람 전통은 어느 선까지는 정당한 반란이라면 그 원칙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 규정에 의하면 군주에게 전제 권력을 용인하지만, 군주의 명령이 죄에 해당한다면 백성들의 복종 의무는 중단된다. 그리고 '창조주에 대항하는 인간에 대해선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군주의 명령이 정당한가를 시험하는 절차, 또는 사악한 명령에 불복종할 권리를 행사하는 절차 규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 있는 백성에게 유일하게 효율적인 수단은 군주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무력으로 그를 제압하거나 하야시키는 것이다. 이보다 신속한 절차는 암살로 군주를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마일파가 부정한 군주들과 그 신하들을 살해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할 때, 결국 (공동체의 해방이라는) 오랜 이슬람 전통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지배적인 전통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었고, 그것이 존재를 드러낼 즈음 특히 반체제 과격 종파 세계에서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224-5)


"하산 이 사바는 굳게 확립된 정통 순니파 이슬람에 대항하여자신의 설교가 아무런 효과가 없고, 그의 추종자들이 셀주크 제국의 무장 세력과 대적하여 그들을 물리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그보다 앞선 다른 수장들도 무계획한 폭력, 무력한 반란, 혹은 어쩔 수 없는 복종과 인내를 보면서 절망을 터뜨렸다. 그래서 하산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즉 제대로 훈련받고 매우 헌신적인 작은 세력들을 키운다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에 대항하여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리 극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정치적 암살은 개인의 활동이었으며 기껏해야 목적과 결과 모두 제한적인, 작은 집단의 음모자들이 꾸민 일에 불과했다. 살인과 음모의 기술 측면에서 아사신파에겐 무수한 선배들이 있다. 심지어 살인을 하나의 예술, 종교 의식, 의무로 발전시켰다는 측면에서 보아도 그들에겐 선배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최초의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228-9)


"단 하나의 간단한 이론만으로 중세 이슬람 사회 속에서 이스마일주의의 복잡한 현상을 명확히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중대한 역사적 교리와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마일주의도 많은 자료들을 끌어다 붙였고 여러 정권에 의존했으며, 여러 가지 요구사항과 의무를 수행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이스마일주의는 구체제의 복원이든 신체제의 구축이든 그 목적에 상관없이, 증오하는 지배체제에 타격을 가하는 일종의 수단이었다. 또 다른 이들에게 이스마일주의는 이 세상에서 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여러 군주들에게 이스마일주의는 외래 간섭에 대항하여 지역의 자주성을 안전하게 지키고 유지하는 방안이었으며, 전 세계에 군림하는 제국으로 가는 방편이었다. 메마르고 쓰라린 삶에 존엄성과 의미를 안겨 주는 열정이자 성취감이었으며, 해방과 파괴의 복음이었다. 또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진리로의 회귀였으며 동시에 미래의 빛을 예지하는 일종의 약속이었다."(242)


"이슬람 역사에서 아사신파의 위치에 관해서 적절한 확신을 담아 네 가지 사항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아사신파의 추동력이 무엇이었든 그들의 운동은 기성 질서, 정치, 사회, 종교에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둘째, 아사신파는 세상과 동떨어져 고립된 현상이 아니라 오래도록 계속 이어진 메시아 운동 가운데 하나이다." "셋째, 하산 이 사바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공적으로 모호한 욕망을 재구성하고 방향을 수정하였으며 불만이 쌓인 민중들의 조야한 신앙과 표적 없는 분노를 하나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으로 바꾸는 것에 성공했다." "넷째, 아무래도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점인데 바로 그들이 최종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기존 질서를 전복시키지 못했다. 즉 수많은 이슬람 분파들 중에서 소수, 비주류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아사신파의 메시아적 소망과 혁명적 폭동의 저류低流와 그들의 이상적 목표, 방식은 후대에도 지속적으로 많은 모방 집단을 양산했다."(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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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테러리즘 - 중동의 새로운 질서와 IS의 탄생
홍준범 지음 / 청아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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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 민족의 대응


"1881년 3월 1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가두에서 한 젊은이가 던진 폭탄으로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사망했다. 러시아 정부는 폭탄을 던진 사람이 유대계라는 이유로 러시아 거주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남부 러시아 칼호프 지방과 우크라이나까지 유대인 학살이 확산되었고, 차르 제정은 1882년에 소위 '5월 법'을 제정하여 유대인을 박해했다. 1882년 알렉산드르 3세 치하에서는 유대교도를 비밀리에 셋으로 분류해, 3분의 1은 물리적 제거, 3분의 1은 국외 추방의 대상으로 정하고, 나머지 3분의 1은 차르 제정에 순응시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조직적인 유대인 대학살은 포그롬(pogrom, 러시아어로 파괴, 학살)이라 불린다. 이를 계기로 러시아에서 BILU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19세기 말 포그롬은 폴란드로도 파급되었으며 이들 지역에서 제1차 유대인의 귀향(제1차 알리야)이 있었다. 1891년 설립된 유대인 식민협회(ICA)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토지를 매입해서 이민자들에게 배당하고 자본도 융통해 주었다."(24)


# BILU : 이사야서 2장 5절 '야곱의 가문이여 야훼의 빛을 받으러 가자(Beit Yaakov Lekhu Ve-nel kha)'의 약성어(略成語)이다.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위임통치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다. 연합국으로 참전한 영국군이 1917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 지역인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의 군사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서 1920년 4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은 산레모 조약을 통해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이라크), 트랜스요르단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영국에 부여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에서는 같은 해 7월 1일부로 영국 군정(軍政)이 민정(民政)으로 이양되었다. 또한 1922년 7월 2일에는 새로 창설된 국제연맹이 영국의 위임통치 결의안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30여 년간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 끝에 결국 한계와 실패를 자인한 영국은, 1947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신생 국제연합(UN)으로 이관하고 1948년 5월 14일 팔레스타인에서 자진 철수했다. UN이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를 설립하고자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내놓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32-3)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중동 지역에는 각기 다른 4개의 민족주의가 발생했다. 유대 민족주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튀르크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캠페인을 공유하면서 발생했으며, 민족적, 종교적으로 대립하면서 성장했다. 유대 민족과 아랍 민족은 영토, 종교, 공동체 등 모든 면에서 분쟁으로 격돌했고, 아랍 민족과 페르시아 민족은 이슬람교를 공유하면서도 시아와 수니의 종파적으로 대립하였으며, 튀르크와 아랍은 이슬람교 수니파라는 종교적 이념을 공유하면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세력다툼으로 분열을 가져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아랍 국가들이 독립하자 아랍 민족주의는 신생 국가의 통합 기폭제이자 이스라엘 건국에 맞서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아랍 국가 간 연합과 통일국가 구성 등에서 실패를 거듭했고, 이스라엘과의 4차례 전쟁에서 연속된 패배와 영토 상실을 겪으면서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다."(38, 43-4)


# 4차례의 중동 전쟁

1. 제1차 중동 전쟁(1948. 5. 16~1949. 3)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식을 계기로 발발한 전쟁.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감되었으나, 아랍 참전국 일부도 전과를 챙겼다. 이스라엘은 UN이 할당한 56%를 넘어 갈릴리 북쪽과 네게브 남쪽, 서예루살렘까지 팔레스타인 땅의 77%를 차지했다. 이집트는 가자 지구 주변 해안 평야를, 요르단은 동예루살렘과 서안 지역을 얻었다.

2. 제2차 중동 전쟁(1956. 10~1957. 5)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개입하면서 발발한 전쟁. 3국은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으나,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철수해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패배했다. 반면 나세르는 아랍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부상했고, 이집트는 소련의 중동 정책에서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제3차 중동 전쟁(1967. 6. 5~6. 10)

골란 고원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이스라엘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 전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단 6일 만에 정전협정이 이루어졌다. 요르단은 요르단강 서안 지역과 예루살렘 및 베들레헴을, 시리아는 다마스쿠스를 사정권에 두는 군사 요충지 골란 고원을,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를 잃었다.

4. 제4차 중동 전쟁(1973. 10. 6~10. 25)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이 유대교 축제일인 속죄일(Yom Kippur, 욤 키프르)에 선제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 소련과 미국의 대리전 양상으로 격화되면서, UN 안보리가 즉각 휴전을 촉구했고, 결국 승패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결되었다. 이스라엘에 맞선 OPEC 국가들의 석유 감산 조치는 제1차 석유 파동으로 이어졌다.


제2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팔레스타인 건국


"1964년, 이집트에서 개최된 아랍 연맹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게릴라전을 동반한 무장투쟁으로 이스라엘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정규 전쟁으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대이스라엘 투쟁의 방법으로 테러를 선택한 것이다.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하였다." "PLO는 이전에 비밀 저항운동을 전개하던 다양한 팔레스타인 방계 조직의 지도부를 통일했다. 그리고 파타,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 검은 구월단 등 PLO 내에서 활동하거나 PLO와 관련을 맺고 있는 단체들을 산하 조직으로 두었다." "제3차 중동 전쟁의 패배로 아랍 사회에서는 정규전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더욱 고착되었고, 이를 계기로 1968년 3월 카라메 전투에서 승리하여 '불패의 군대'라는 이스라엘군의 이미지를 불식시킨 타파가 PLO의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다. 1969년에는 파타의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가 PLO 의장에 임명되었다."(69-71)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을 거치면서 PLO의 정치적 위상도 크게 향상되었다. 1973년 11얼 알제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담에서는 'PLO를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도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하고, 1976년 PLO가 아랍연맹에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함으로써 아랍 세계에서 PLO의 정체성은 팔레스타인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기관으로 정착되었다. PLO는 대이스라엘 정책에서도 모든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킨다는 목표를 버리고 서안과 가자 지구를 포함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창설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었다."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자국 영토를 공격하는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군대의 본거지를 무력화하고자 레바논을 공격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리비아로 본부를 옮긴 이후 PLO의 대이스라엘 투쟁 양상도 바뀌었다. 해외 이스라엘 시설물 공격을 이스라엘 점령지 내로 변경하고, 투쟁 방식에서도 테러보다는 '인티파다(Intifada, 봉기)'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저항과 반란이 대두된 것이다."(72-3)


"1980년대 들어 PLO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등 무장투쟁 노선을 완화하고 평화 협상에 참여하자 이에 반발하는 강경파들을 규합하여 조직된 무장 조직이 하마스이다. 1987년 12월,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었던 아메드 야신이 창설하였으며, 그 등장에는 1987년 가자 지구에서 발생한 제1차 인티파다가 촉매제가 되었다." "하마스의 목표는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즉각적이고 완전한 해방 및 이슬람 교리를 원리원칙대로 받드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하마스는 대이스라엘 무장투쟁과 병행하여 빈민가에 학교와 병원을 지어 팔레스타인 빈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확보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2006년 1월 25일 치러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총선에서 132석 가운데 73석을 차지하며 40년 동안 집권해 온 파타당을 누르고 집권당이 되었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집권당인 파타당의 연정 제의를 거부하고, 가자 지구를 무력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다."(75-7)


# 중동 평화 회담

1. 마드리드 평화 회담(다자 회의 1991. 10. 30~11. 1, 양자 회의 1991. 12~1992. 1)

다수의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인정한 최초의 회담. 협정의 핵심은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반대급부로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1991년 2월 걸프전 이후 미국이 팔레스타인에게는 땅, 이스라엘에게는 평화를 보장한다는 원칙을 내세워 주도했지만,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2. 오슬로 협정(초안 1993. 9. 13, 자치 협정 1994. 5)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협상 모토가 결실을 맺은 최초의 중동 평화 협정. 주요 합의 내용은 첫째, 이스라엘이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 기구로 인정, 둘째,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 시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치 보장, 셋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자치권 인정(외교, 국방 제외), 넷째, 점령지에 대한 영구 지위 협상 지속, 다섯째, 이스라엘군 철수 이후 자치 실행 등이다.

3. 이스라엘-요르단 평화 협정(1994. 10)

요르단이 이집트(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이어 두 번째로 이스라엘과 국교 정상화를 맺은 회담. 요르단은 이스라엘이 점령해 온 국경 지대 영토를 반환받았고(대신 이스라엘 정착민에게 보상 지급), 이슬람 성지인 동예루살렘에 대한 정치적 발언권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요르단의 동예루살렘 관리권 보장은 이곳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삼으려는 PLO와 여타 팔레스타인 강경 세력의 반발을 초래했다.

4. 오슬로 협정2(1995. 9. 28)

1993년 오슬로 협정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 자치를 확대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속 조약. 그러나 양쪽 모두 내부 강경파의 반대에 부딪혀 합의 사항을 이행할 수 없었다. 특히,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유대인 극우파 청년에게 암살당하고, 1996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극우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되면서, 양측의 관계는 급속도로 경색되었다.

5. 와이리버 협정(1998. 10. 23)과 와이리버 협정2(1999. 9)

미국의 주도로 '땅을 주고 평화를 얻는' 합의를 재진척시킨 협정. 1996년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의 40%를 자치영역으로 확보하는 대신, 〈PLO 헌장〉에서 '이스라엘 파괴' 조항을 폐기했다. 그러나 내부 강경파의 반대(암살, 폭탄 테러)로 협정 이행이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1999년 9월5일에 협정2를 타결시켰지만 2000년 9월 최종 협상이 결렬되었다.


제3장 중동의 새로운 질서 모색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에 평화 조약(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었고, 양국 간 교전이 중지되었으며, 외교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1982년 4월에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했고, 이스라엘 선박은 수에즈 운하와 아카바 항구를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아랍 동맹국으로 참전했던 시리아, 요르단 등의 실지 회복 문제가 방치되었고, 중동 평화의 본질인 팔레스타인 영토 문제는 전혀 협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특히 요르단 강 서안, 가자 지구,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 문제 및 팔레스타인 국가의 자치 문제는 추후 교섭하자는 규정만 있고, 교섭 자체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9년 5월부터 이집트, 이스라엘, 미국 등 3국이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 협의를 시작했으나, 협정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팔레스타인 점령지 주민들이 참여를 거부하였고, 1980년대 중반까지 10여 차례 더 시도된 자치 협의는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다."(121)


"일찍이 1905년에 발생한 이란의 입헌 혁명은 정치 체제를 절대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등 근대화 추진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입헌군주제하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 수상은 1951년 국왕이 영국, 미국 등의 석유 이권을 보호하는 데 반발하여 5월 1일 모든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다." "1953년, 팔레비 왕이 (석유 산업 국유화 조치에 불만을 품은) 미국의 지원으로 샤(Shah, 왕)에 등극한 뒤 모사데크 수상을 축출하였다. 팔레비 국왕은 1963년에는 농지 개혁, 국영 공장의 민영화, 참정권 등의 목표를 내세운 이른바 '백색 혁명'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은 서구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이슬람 사회의 변질을 우려하던 종교지도자들의 반정부 운동을 부추겼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주의와 팔레비의 전체주의 정책을 반대하는 성직자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반정부 세력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팔레비 왕정의 급격하 서구화가 이란 혁명의 배경이 된 것이다."(126-7)


"이란 혁명의 슬로건은 이슬람적이었다. 이슬람 혁명은 가담한 이들에게 분명한 목표를 제시했고, 그들이 맞서야 할 적이 누군지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었다. 이 적들은 역사와 법과 전통을 통해서 매우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으니, 대외적으로는 이교도들이며, 국내에서는 배교자들이었다. 물론 혁명에 있어서 배교자란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해석을 공유하려고 하지 않고, 이교도적인 방식을 들여와서 이슬람 공동체에 살고 있는 신앙과 법을 전복시키려는 세력들을 의미했다. 원칙적으로 이슬람 혁명의 목적은 외세의 지배와 영향을 받던 시기에 이슬람 영토와 국민들에게 강요되었던 모든 이질적이고 이교도적인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알라가 만든 진정한 이슬람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란 혁명에서 유래되고, 영감을 얻고, 맥락을 같이하는 이슬람 혁명운동들은 다른 아랍 국가들에도 전파되었고, 그곳에서 혁명론자들은 권력 쟁취를 위해서 싸우는 경쟁자가 되기도 했다."(128-30)


"이집트 사다트가 1979년 3월 데이스라엘 평화 회담을 조인함에 따라 전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와의 단교를 선언했고, 이로써 이집트의 아랍 내 패권은 사라졌다. 이집트의 추락과 이란의 배신으로 기존의 미국 주도 안보 벨트인 테헤란-리야드-카이로의 축이 붕괴됨으로써 중동에서 미국 등 서방 국가의 위상이 불안해지는 상황에 직면했다. 또한 보수 왕정 국가들에서는 이란의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 붕괴가 도미노처럼 발생할 것을 우려했고, 특히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 연안 국가들은 자국으로 혁명이 확산될 것을 경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국민 60%가 시아파인 이라크에도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 1979년 7월 이후 정권을 잡은 사담 후세인은 혁명으로 인한 이란의 군사력 약화와 사다트의 대이스라엘 평화 회담이 남긴 아랍 지도력의 공백이야말로 중동 지역에서 이라크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8년간 지속될 이란-이라크 전쟁(1980. 9. 22~1988. 8. 20)의 출발점이었다."(135)


"걸프 협력회의(GCC)는 1981년 5월 25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에미리트연합 등 걸프 연안 6개 왕정국이 설립한 지역 안보기구이다. 걸프 연안의 산유국들이 정치, 경제, 군사 등 분야에서 협력하여 역내 경제 통합 및 안전보장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 6개국은 석유를 생산, 수출하며, 아랍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다. 또한 세습 왕정 체제를 유지하며, 아랍 민족국가이고, 지리적으로 인접했다는 공통점이 있어 최상의 결속력을 자랑한다." "사우디는 미국 및 서방과의 안보 협력하에 GCC 회원국 간 집단안전보장 체제를 구축해 아랍, 중동 국가 안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14년 9월 본격화된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 소탕에 아랍연합을 이끌고 참전한 것이나, 이슬람 수니파의 맹주로서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과 예멘에서 벌이는 세력다툼에 대규모 공습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등은 중동에서 사우디의 역할과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예다."(142-5)


제4장 9.11 테러와 미국의 대테러 전쟁


"오사마 빈 라덴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간 무력 침공 후 파키스탄으로 건너가, 아프간 인접 국경도시 페샤와르에 거주하며, 소련군에 대항하는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1988년, 소련의 철수가 논의되고 아프간 전쟁이 끝나갈 무렵, 무자헤딘은 자신들의 전투 경험을 살려 이슬람 지하드를 전 세계로 확장하기를 희망했다. 빈 라덴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1988년 9월 10일,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은 아랍어로 '알 카에다(Al-Qaeda, 근거지, 본부)'라는 명칭의 조직을 공식 창설하기로 결의했다." "알 카에다는 지상(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 대사관 폭파), 해상(2000년 예맨 미 해군 군함 폭파), 공중(2001년 미국 뉴욕 9.11 테러) 등 육해공 3곳 모두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한 최초의 조직이다. 테러 활동이 통상 계획, 준비, 실행, 탈출 등 4단계로 구성된다고 볼 때, 자살 테러는 4단계 중 가장 어려운 탈출 단계를 생략해 주는 이점이 있기 때문에 현대 테러리즘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대두되었다."(172-4)


"빈 라덴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두 명이 있었다. 바로 사우디 킹 압둘 아지즈 대학 재학 시절 수학한 압둘라 아잠 교수이다. 그는 빈 라덴의 막대한 재산을 아프간 무자헤딘에게 지원하도록 유도한 사람이며, 지하드의 개념을 폭력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슬람을 배신한 정권과 이교도인 외국의 적에 대해 폭력을 동반한 지하드가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 사상가는 알 카에다의 2인자 이집트인 자와히리이다. 그는 빈 라덴으로 하여금 '유대인과 십자군과의 지하드를 위한 세계 이슬람 전선'이라는 새로운 연합 조직을 결성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었다." "알 카에다는 빈 라덴의 파트와(Fatwa, 교시)를 받들어, 1991년 걸프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사우디의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에 반발해 반미 조직의 성격을 굳혔다. 따라서 알 카에다의 지하디스트들은 각자가 속한 지역에서 미국을 목표로 공격을 가하도록 훈련받았고, 이것이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9.11 테러이다."(175-6)


"미국은 대아프간 군사 작전을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으로 명명하고, 2001년 10월 7일 밤, 아프가니스탄 전 영토를 대상으로 OEF를 시작했다." "미국의 개입으로 아프가니스탄에는 탈레반 정부군과 북부동맹 반군 간의 내전과 미국-탈레반 전쟁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무력 분쟁이 병존하는 전장이 형성되었다." "개전 3개월 만인 2002년 초에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탈레반 정권이 항복함으로써 세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잔존 세력은 산악지대로 은신해 들어가 간신히 연명하는 수준이 되었다. 주요 도시 및 교통망은 미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탈레반 정권이 사실상 와해되고, 전쟁은 탈레반 잔당 소탕작전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2년 6월, 미국은 파슈툰족 출신 하미드 카르자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아프간의 전통적인 토착 세력인 부족회의의 지지를 받지 못한 꼭두각시 정부에 불과했다."(179-81)


"2003년 3월, 아프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이 제2의 테러 전쟁으로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다. 2개의 태러 전쟁을 동시에 치르게 된 미국은 아프간 전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상당수의 주력 전투 병력을 이라크로 이동 배치했다." "괴멸 직전이었던 탈레반은 미군 전력의 약화를 기회로 다시 재정비에 돌입했다. 전 아프간 총리를 지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이끄는 무장 조직 '헤즈비 이슬라미'와 연대함으로써 전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2009년 1월, 아프간 전쟁을 시작한 공화당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고,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했다. 아프간 전쟁이 과연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논란의 중심에 서서 오바마 대통령은 2곳의 전장 중 이라크를 종전하고,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소탕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5월, 전쟁의 목적인 빈 라덴을 처단하는 데 성공한 미국은 탈레반과 2013년 6월부터 전쟁 발발 12년 만에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181-2)


"제2차 걸프 전쟁은 2003년 3월 20일 새벽, 미군과 영국군이 합동으로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5월 1일, 미국은 개전 40일 만에 사담 후세인 정권의 붕괴와 종전을 선언하고, 후세인까지 처형했다(2006년 12월 30일). 그러나 기대했던 것처럼 이라크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폭탄 테러와 게릴라전이 난무하는 등 치안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정세 불안은 미군을 8년간이나 더 이라크에 묶어 두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라크 내의 고질적인 종파 간, 종족 간 무장 대립을 안정화시키는 데 한계를 절감하였다. 이라크의 치안 불안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쉽게 종결될 수 없었던 이유는 이 내분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과 이라크 간의 분쟁이 아니라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 아랍인과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 수니파, 15%를 차지하는 수니파 아랍인 간의 분쟁이었다."(191)


제5장 재스민 혁명과 민주화 열풍


"2011년 봄, 중동에서 시민들에 의해 시작된 민주화 시위는 권위주의 체제 및 군주제에 항거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시민 봉기는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고, 2~3개월 사이에 중동 전역으로 확산되는 놀라운 속도를 보였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26세의 청년 노점상 모함마드 부아지지가 단속 경찰의 폭력에 저항하여 분신자살한 사건이 촉매제가 되었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은 23년간 장기 집권한 벤 알리 대통령을 몰아냄으로써 중동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2011년 1월에는 이집트로 전파되어 코샤리 혁명을 통해 30년 집권의 무바라크 대통령을 하야시켰으며, 동시에 예멘으로도 확산되어 33년간 집권한 살레 대통령은 국외로 도망가야 했다. 2월에는 리비아로 확대되어 42년을 집권한 카다피를 사살하는 등 그칠 것 없이 번져 갔다. 바레안, 요르단 등 왕정 국가에서도 역사상 최초의 반정부 민중 봉기를 경험했고, 시리아에서는 2011년 3월부터 현재까지 무정부 상태의 내전이 진행 중이다."(199-200)


# Jasmine, 재스민은 '신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진 튀니지의 국화로 중동 혁명의 상징으로 불린다. 구체적으로는 실업 상태의 20대 젊은이가 길거리에서 물 담배(후카)와 재스민 차를 마시면서 소일하다가 정치적 격변을 주도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혁명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


# Koshary, 코샤리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곡물 가격 인상과 생활수준 저하로 인한 불만을 상징하는 차원에서 사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22개 아랍 국가 중 단 한 나라도 자유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 중동 정치의 실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의 봄 혁명은 아랍인의 새로운 도전으로, 21세기 이슬람 세계의 민주주의를 향한 의미 있는 출발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중동 정치의 현실은 서구 민주주의를 그렇게 쉽게 용인하지 않았다. 2015년 12월 현재, 이집트는 모르시의 민간 정부를 대신해 군부가 쿠데타로 재집권했다. 예멘은 내전으로 다시 남북이 분리될 상황에 놓였으며, 리비아는 500여 개 1,700여 무장단체들이 난립하는 무정부 상태로 변했다. 그나마 혁명의 출발지였던 튀니지만이 유일하게 민간 정부를 구성한 후 모범적으로 정권 교체를 이룩하고 있다. 문제는 또 다른 갈등 요인인 부족 간, 종파 간 대립으로 무정부 상태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IS)와 같은 극단주의 테러 세력들은 이러한 불안한 정세를 이용하여 발호하고 있다."(200-1)


"아랍의 봄은 다양한 성격으로 분류된다. 이집트와 튀니지는 시민혁명, 리비아는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동부 키레나이카를 각각 거점으로 하는 종족 분쟁, 예멘은 수니파와 시아파 사이의 종파 분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시리아의 경우 초기에는 시민혁명적 성격이었으나, 점차 부족 간 갈등에 따른 내전 양상을 보였고, IS가 등장하면서 전형적인 종파 분쟁 성격이 발현되었다(미국과 러시아의 대결이라는 국제정치 측면도 포함)." "시리아 반군이 사분오열되어 있고, 반군 내 주도 세력이 점차 자유 시리안군에서 이슬람 전선, 더 나아가 알 누스라 전선이나 ISIL로 전이되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서방 국가들은 우려를 금치 못한다. 자칫 알 아사드 퇴진 이후 이슬람 극단 세력 혹은 알 카에다 방계 세력이 시리아 권력을 획득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서방 국가 사이에 확산 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알 아사드 퇴진 가용 수단의 부재 및 향후 불확실성이 맞물려 미국으로서는 뚜렷한 전략을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230, 238)


제6장 중동 테러리즘의 변천사


# 중동 테러리즘의 환경적 분류

1. 종교 테러리즘 : 보편적으로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유일 신앙을 방어하려고 수행한다.

2. 국가 테러리즘 : 정부가 개입하여 수행하는 위로부터의 테러리즘이다.

3. 반체제 테러리즘 : 비국가적 운동이나 집단이 수행하는 아래로부터의 테러리즘이다.

4. 국제 테러리즘 : 국가 경계를 넘어 국제적 이해관계의 상징이라는 가치 때문에 선택된다.


"중동에서 아사신(Order of Assassins)이라는 테러 조직이 있었다. 암살 형제단(Brotherhood of Assasins)이라고도 하며, 11세기 페르시아 왕조 당시 이슬람 이스마일파의 칼리파 알 사바가 조직했다." "설립 초기에 암살단은 페르시아의 도시들, 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및 기독교 십자군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으로 흩어졌다. 아사신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고 상대적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십자군에게 정규전 방식으로 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장기적으로 테러 전술을 택했다. 암살단은 기만, 비밀 활동, 기습 살해에 능숙했고, 암살(Assassina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냈다. 자살 공격 임무도 흔했다. 암살단은 자신들의 대의와 방법론이 정당하다고 믿었다. 살해하는 것과 살해당하는 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죽음 뒤에는 천국이 보장되기 때문에 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믿음은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적 테러리스트들에게도 전수되고 있다."(256-7)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랍 무슬림 세계의 행동주의는 다양한 지적 국면을 거치면서 발전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학습 현상이 나타났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유럽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식민 민족주의, 나세르 사상에 기초한 범아랍 민족주의(나세르주의),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통치 원칙을 채택하고, 종종 자국 정부에 저항하는 세속적인 급진 좌파주의 등이 등장하고 확산되는 추세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새로운 운동이 이전 세대의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이슬람주의자들이 아랍 공화정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다. 탈냉전 정치 환경에서 해방의 도구로 이슬람을 택하는 것은 필연의 결과였다. 그와 동시에 수니파와 시아파의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도 존재하였다. 특히 이스라엘과 서방에 대한 저항에서 별 성과를 이루지 못하자, 이슬람 극단주의가 테러에 의존하는 경향은 더욱 확산되었다."(257-8)


"현대에서 대표적인 이슬람 혁명 조직은 사우디 출신인 오사마 빈 라덴의 세포조직인 알 카에다이다. 알 카에다는 성전(聖戰)을 통하여 전 세계 무슬림을 통합하려 한다. 또한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가진 혁명 조직이 아니며, 추종자들에게 신앙의 이름으로 폭력적 테러에 참여하는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알 카에다를 잘 표현한 것은 '동질적인 이슬람 혁명주의자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라는 것이다. 알 카에다는 다음 6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영토를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후원을 받지 않는다. 조직의 상하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인종-민족 단체의 대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모호한 정치적 요구를 공표한다. 완성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진다.〉 알 카에다의 종교적 성향은 빈 라덴의 분파적 이데올로기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뉴테러리즘(New Terrorism)의 중심적 특징이다. 종교적 극단주의자들은 이러한 전략을 구사한다면 자신들의 의제와 불만이 광범위한 주목을 받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261-3)


"국제 테러리즘은 비대칭전(Asymmetrical Warfare)의 가장 대표적 사례로, 비전통적이고 예기치 못한, 거의 예측이 불가능한 정치적 폭력 행위이다. 테러 자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비대칭전은 뉴테러리즘의 주요 특징이다. 이론상 비대칭전을 통해 테러리스트들은 새로운 고성능 무기로 예상치 못한 목표를 타격하여 대량살상을 야기하거나 독특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테러 희생자나 대테러 정책 당국의 딜레마는 테러리스트들이 이런 전술을 통해 전통적인 방어나 억지 정책을 무력화하여 주도권을 장악하고, 국제 안보 환경을 재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각적인 미디어의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들도 전 세계적인 주목을 끄는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정치적 동기에서 벌인 항공기 납치, 폭탄 테러, 암살, 유괴, 고문, 기타 범죄 행위 등이 국제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경우 상당한 주목을 끌고 더 큰 기회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283)


"아랍의 봄으로 각국에서 무정부 상태, 내전 등 정세 불안이 지속되는 틈을 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들이 발호하고 나섰다. 특히 2014년 6월 이라크에서 이슬람 국가(IS)라는 극단주의 테러 세력이 등장했다." "IS는 요르단 출신의 아부 무사브 알 자르카위가 이라크에서 조직한 유일신과 성전(Jamaat al-Tawhid al-Jihad, JTJ)이 모태이며, 이라크 내전 국면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이 조직은 2004년 알 카에다의 지도자 빈 라덴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2006년 자르카위가 미군 공습으로 사망하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여러 이슬람주의 단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알 카에다의 자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우선 시리아, 이라크 땅에 이슬람 수니파를 중심으로 신정 체제 칼리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문제는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등지의 자생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이 IS에 충성을 맹세하고 테러에 동참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이다."(297-8)


제7장 이슬람 국가 출현


"IS의 모태조직인 '유일신과 성전'을 통해 지명도를 높이고 조직을 키운 알 자르카위는 이후 이라크 알 카에다(Al-Qaeda in Iraq, AQI)로 조직 이름을 바꾸고, 과거 사담 후세인의 잔당 중 불만 세력을 규합하여 시아파가 이끄는 이라크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이라크 내 최대 반정부 조직으로 송장시켰다. 2006년 6월 7일, 자르카위가 피살 된 후 AQI는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규모 반정부 투쟁을 지속했다. 그러던 중 2011년에 미군이 철수하자 시아파 누리 알 말리키 정권에 대한 수니파의 불만이 거세진 틈을 이용하여 이라크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of Iraq, ISI)로 이름을 바꾸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2012년부터 알 카에다의 일원으로 월경(越境)하여 알 누스라 전선 휘하로 시리아 반군 진영에 가담하여 반아사드 저항운동을 펼쳤다. 시라아 반군 진영에 가담한 ISI는 영역을 확장하여 이라크 시리아(샴 또는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S 또는 ISIL)로 재편했다."(316-7)


"IS의 부상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이슬람 정치 세력의 부침과 성격 변화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의 정권 상실을 들 수 있다. 1960년대 아랍 통합을 주창했던 아랍 민족주의(Nasserism)와 바티즘(Ba'athism)이 쇠락한 뒤 중동 지역의 지배 이념은 공동화 현상을 겪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함께 새로운 정치 이념으로 이슬람이 부상했다. 이들 이슬람 정파는 크게 지하 투쟁 세력과 제도권 진입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이슬람 계열의 여러 정파는 아랍의 봄 혁명으로 인한 정치 변동 국면과 맞물려 대거 수면 위로 부상했다. 선거를 통한 제도권 진입을 시도했으며, 중동 전역에서 이들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이슬람의 봉기' 현상이 발현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집권 사례가 바로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출신 모하메드 모르시의 대통령 당선이었으며, 튀니지에서도 이슬람주의 정당 엔 나흐다(En-Nahda)가 부상하는 등 이슬람계 정당들이 도처에서 약진하였다."(319)


"사실상 중동 각처에 잠재해 있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을 초법적 탄압 수단을 통해 봉쇄하고 있던 주체가 바로 각국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이들 독재 체제의 동시다발적인 붕괴는 곧 권력의 진공상태로 이어졌고, 다양한 이슬람 세력들이 분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가장 극적인 이슬람 집권 사례였던 모르시 정부가 또다시 국방장관 압둘 파타 엘 시시에 의해 붕괴되고 2014년 군부 정권이 재집권하자, 이슬람 정파들 사이에서 분노와 박탈감이 만연했다. 이로써 제도권을 떠나 새로운 투쟁의 전기를 모색했다. 권력을 획득하고자 절차적 정당성, 즉 선거 및 정치 프로세스를 거쳐야 할 이유가 굳이 없으며, 준비되었을 때는 지하드, 즉 무장 투쟁을 통해 이슬람의 이름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폭력 강경론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IS는 무장 투쟁의 자원과 역량을 획득했다는 판단 아래 칼리파 국가 건설을 선언하고, IS가 신의 통치에 기반을 둔 주권국가임을 천명했다."(319-20)


"IS의 이념은 이슬람의 극단적 수니 근본주의(Takfirism, 탁피리즘)를 신봉한다고 할 수 있다. 수니파의 4대 법학 사조 중 가장 보수적이고 전통적 입장을 견지하는 한발리파의 주류보다 더욱 고루한 중세 전통주의를 추종한다. 단순히 종교적 계율과 실행에 있어 전통적, 보수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IS는 투쟁, 곧 지하드 과정에서 일반적인 이슬람의 통념과 전통을 넘어서는 극도의 잔인성과 공포를 통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슬람 주류는 이러한 비주류 극단주의자들을 탁피리스트라 칭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그랜드 무프티(Grand Mufti, 보수적인 이슬람 신학의 최고 권위자에 대한 호칭)조차 이들을 비이슬람으로 간주하고, 금기(Haram)로 규정했다. IS의 잔인성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자 심지어 파키스탄 소재 알 카에다 본부까지 이들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들의 극단주의 노선은 일종의 선명성 확보를 통한 국제사회에서의 존재감 부각 의지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322-3)


# 이슬람 법학에는 하나피파, 한발리파, 말리키파, 샤피이파 등 정통 4대 법학파가 존재하며, 수니파는 이들 모두를 인정한다 .한발리파의 창시자 한발리는 가장 철저한 원리주의자로서, 모든 법리는 신적인 것에 철저히 의존할 것을 주장하며, 꾸란과 하디스의 어구에 따른 해석에만 의존한다. 14세기까지 이라크, 시리아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현재는 사우디와 카타르의 공인 법학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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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 정착민 식민주의와 저항의 역사, 1917-2017
라시드 할리디 지음, 유강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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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팔레스타인 토착 사회의 해체는 새로 만들어진 영국 위임통치 당국(유대인 정착민들의 자치 구조 구성을 도운)이 지지하는 가운데 대규모로 유입된 유럽계 유대인 정착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영국의 지배에 맞선 1936~1939년 아랍 대반란이 철저히 탄압을 받으면서 원주민 인구는 한층 더 감소했다. 영국이 10만 명 규모의 병력과 공군을 동원해서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진압하는 가운데 당시 성인 남성 인구의 10퍼센트가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당했다. 한편 독일 나치 정권의 박해에 따라 유대인 이민자가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가 1932년 총 18퍼센트에서 1939년 31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했다. 그리하여 1948년 팔레스타인 종족 청소에 필요한 인구학적 임계점과 군 병력이 마련되었다. 이후 시온주의 민병대에 이어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의 절반 이상을 쫓아냄으로써 시온주의의 군사적·정치적 승리가 완성되었다."(24-5)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아시아, 오스트랄라시아 (또는 아일랜드) 등 어디서든 원주민을 몰아내거나 지배하려 한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특유의 언어로 언제나 원주민을 경멸적으로 묘사했다. 또한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 통치한 결과로 토착민들이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식민주의의 이론적 근거와 나란히, 유럽의 시온주의 식민화가 도래하기 전에 팔레스타인은 황량하고 아무도 살지 않으며 후진적인 땅이었음을 입증하는 데 골몰하는 수많은 문헌이 존재한다." "여기서 도출되는 결론은 오직 새로운 유대인 이민자들이 앞장서서 땀 흘려 일한 덕분에 이 나라가 오늘날과 같은 꽃피는 정원으로 바뀌었고, 오로지 그들만이 이 땅에 일체감과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즈라엘 쟁윌 같은 초기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을 지지한 기독교인들까지 소리 모아 외친 구호로 요약된다. 「사람 없는 땅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주자.」"(26-8)


1 첫 번째 선전포고, 1917~1939


"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게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이나 이츠하크 벤츠비(훗날에 각각 이스라엘 총리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40)


"벨푸어 선언은 부드럽고 기만적인 외교의 언어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데 찬성한다는 모호한 구절을 담았다. 이 선언으로 영국은 사실상 팔레스타인 전체에 유대 국가를 세워 주권을 확보하고 이민을 통제한다는 테오도어 헤르츨의 목표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것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벨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벨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46-7)


# 벨푸어 선언(1917. 11. 2) :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대중적 신화는 팔레스타인인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집단적 의식이 부재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민족 자결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대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 팽배해 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정체성은 시온주의와 마찬가지로 여러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등장했으며, 근대의 정치적 시온주의와 거의 정확히 동시에 나타났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에 기름을 부은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처럼, 시온주의의 위협 역시 이런 자극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여러 민족 정체성은 근대적이고 우연한 현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의 상황에서 생겨난 소산이다.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시온주의가 원주민에게 이득을 준다는 헤르츨의 식민주의적 견해와 일맥상통하며, 벨푸어 선언과 그 후속 조치들로 그들의 민족적 권리와 민족의식을 삭제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55-6)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발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 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벨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 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 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위임통치령 세 번째 문단에는,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60)


"1937년 7월, 필 경의 지휘 아래 팔레스타인 소요 사태─1936년에 6개월간 진행된 총파업─를 조사하는 책임을 맡은 왕립위원회가 나라를 분리해서 영토의 약 17퍼센트에 작은 유대 국가를 형성하고 이 지역에서 200만이 넘는 아랍인을 추방할 것(추방expulsion 대신에 〈이동transfer〉이라는 완곡한 단어가 사용되었다)을 제안하자, 이런 개입의 실망스러운 결과가 드러났다. 이 계획에 따르면, 나라의 나머지는 계속 영국이 통치하거나 영국에 예속된 트랜스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아무 변화도 없는 셈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은 민족적 실체나 집단적 권리가 전혀 없는 것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록 팔레스타인 전체는 아니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을 제거한다는 시온주의의 기본 목표가 충족되고, 팔레스타인 쪽이 열렬하게 바라는 자결권이라는 목표가 부정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봉기를 한층 더 전투적인 단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73)


"숱한 희생이 벌어지고 반란이 잠깐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만 남았다. 영국의 야만적인 탄압과 수많은 지도자의 죽음과 유형, 내부에서 벌어진 갈등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방향을 잃고 분열되었고, 1939년 여름에 반란이 진압될 무렵에는 경제도 허약해졌다." "하지만 1939년 유럽에서 전운이 확대되는 가운데 영제국에 새롭게 제기된 중대한 전 지구적 도전이 아랍의 반란과 결합되어 런던 당국의 정책에 대대적인 변화가 생겼다. 앞서 시온주의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던 입장이 바뀐 것이다." "제국의 핵심적인 전략적 이해의 측면에서 보자면, 영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한편 대반란Great Revolt을 강제로 진압하는 것에 대한 아랍 각국과 이슬람 세계의 분노를 다독이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잔학 행위에 대해 추축국이 중동 지역에 선전 공세를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78-9)


"1939년 봄, 네빌 체임벌린 정부는 팔레스타인과 아랍, 인도 무슬림의 분노한 여론을 달래려는 시도로 백서를 발표했다. 이 문서는 시온주의 운동에 대한 영국의 전폭적 지지를 대폭 삭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유대인 이민 유입과 토지 판매를 엄격하게 제한할 것(아랍의 주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을 제안하였고, 5년 안에 대의 기관을 마련하고 10년 안에 자결권을 주겠다(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구였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백서를 발표했을 당시 체임벌린 정부는 임기가 몇 달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체임벌린 후임으로 총리가 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정게에서 아마 가장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을 것이다. 더욱 중요하게도,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고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미국이 참전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진정한 세계대전으로 비화하는 가운데 바야흐로 새로운 세계가 탄생할 참이었다. 이제 이 세계에서 영국은 기껏해야 이류 강대국일 뿐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이제 영국의 수중을 벗어날 터였다."(79-81)


2 두 번째 선전포고, 1947~1948


"전쟁 이후 연달아 일어난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은 팔레스타인인들 앞에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여러 아랍 정권들과의 관계는 이미 불안했다." "영국의 후원으로 아랍 6개국이 아랍연맹을 결성한 1945년 3월에는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회원국들이 아랍연맹의 창립 성명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언급을 삭제하고 팔레스타인 대표자에 대한 선택권을 계속 자신들이 갖기로 결정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쓰라린 실망감을 느꼈다." "더욱 원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1946년 구성된 영국-미국 조사위원회였다. 영국과 미국 정부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검토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유럽의 난민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미국과 시온주의가 선호하는 방안은 이 불운한 사람들이 곧바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는데(미국이나 영국이나 그들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사실상 1939년 백서의 취지를 부정하는 방안이었다."(96-7)


"주로 이라크의 누리 알사이드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그의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은 아랍청은 결국 다른 아랍 국가들을 소외시켰다. 특히 범아랍권의 지도부를 자처하는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소외시켰다. 양국 지도자, 그리고 시리아와 레바논의 지도자는 아랍청 창설이 이라크가 지역 차원에서 야심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아마도 정확하게─의심했다." "한편 트랜스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은 최대한 넓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이 나라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놓고 시온주의자들 및 영국의 지지자들과 타협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유엔이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는 쪽으로 옮겨 가자 국왕은 협정 체결에 대한 기대를 품고 비밀리에 유대인기구 지도자들과 거듭 회동했다." "따라서 이라크의 누리와 달리, 압둘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팔레스타인의 독립 지도부가 필요 없었고, 팔레스타인의 외교 부서 역할을 할 아랍청 같은 기구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106-7)


"1947년 애틀리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SCOP를 만들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유엔을 지배하는 미국과 소련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인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의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111)


"나크바─1947년 말부터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인을 강제 이주, 추방하고 심지어 말살하려는 목적에서 행한 집단 학살 행위를 가리킨다─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 번째 단계에서 하가나Haganah와 이르군Irgun을 비롯한 시온주의 준군사 집단은 무장과 조직력이 형편없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그들을 도우러 온 아랍 지원병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이 첫 단계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전투는 1948년 봄 플랜 달렛Plan Dalet이라고 명명된 전국 차원의 시온주의의 공세에서 정점에 달했다. 플랜 달렛은 4월과 5월 전반에 아랍의 양대 도시인 야파와 하이파, 그리고 서예루살렘의 아랍인 구역뿐만 아니라 수많은 아랍 도시와 소읍, 마을을 정복하고 주민들을 쫓아내는 결과를 낳았다."(112-3)


"추방을 피해 이스라엘로 바뀐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을 수 있었던 16만 명 정도의 소수 팔레스타인인은 이제 그 국가의 국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롭게 다수가 된 유대인을 위해 전력을 다한 이스라엘 정부는 이 남아 있는 팔레스타인인을 의심이 가득한 눈길로 잠재적 제5열로 바라보았다. 1966년까지 대다수 팔레스타인인은 엄격한 계엄령 아래서 살았고, 가진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이스라엘 국가가 합법으로 간주한 수용을 거쳐 가로챈 이 땅은 경작 가능 지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유대인 정착촌이나 이스라엘토지공사에 양도되거나 유대민족기금에 통제권이 넘어갔다. 유대민족기금의 차별적 헌장에 따르면, 이런 토지는 유대인을 위해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자기 나라와 종교에서 상당한 다수의 지위에 익숙해져 있던 그들은 갑자기 적대적 환경에서 멸시받는 소수로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스스로를 절대 전체 국민의 국가로 정의하지 않은 유대 정치체의 피지배자가 되어야 했다."(126-7)


"아랍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1948년의 재앙적 결과를 뒤집으려는 의지나 능력을 보이지 않자, 나크바 이후의 황량한 상황 속에서 팔레스타인의 행동주의가 여러 형태로 되살아났다. 소규모 집단들이 이스라엘에 맞서 무기를 집어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현재 상태를 바로잡으려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시도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대에 대처하는 것 외에도 아랍의 난민 수용 국가, 특히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등의 정부와 대결해야 했다. 유대 국가에 비해 군사력이 크게 뒤지는 상황에서 이 나라들은 이웃에 대한 공격을 묵인하기를 대단히 꺼렸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운동이 새롭게 만들어질 때에도 그들은 일부 아랍 국가가 이런 운동을 자기들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활용하려는 시도를 물리쳐야 했다. 1964년 이집트의 요청에 따라 아랍연맹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설한 것은 이처럼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 팔레스타인 행동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아랍 국가들이 이 운동을 통제하려는 가장 중요한 시도였다."(136-7)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쟁 때문에 종종 이스라엘이 가자를 어떻게 표적으로 삼았는지가 가려졌다. 강대국이 직접 참여하는 국가 간 충돌이 더 많은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가자 지구는 1948년 이후 자기 땅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저항의 용광로였다. 파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창립한 지도자 대부분이 이 기다란 해안 지대의 비좁은 동네에서 등장했다. 또한 전투적인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은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그곳에서 끌어모았고, 나중에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에 맞서 가장 끈질기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이슬람지하드와 하마스의 탄생지이자 요새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크바로 겪은 충격과 굴욕에도 불구하고, 자기 땅을 빼앗긴 것을 묵인하지 않고 저항하자, 자국 문제에 정신이 팔린 채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의지나 각오가 전혀 없었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대결로 이끌려 들어갔고, 이 대결은 걷잡을 수 없이 고조되었다."(143-4)


3 세 번째 선전포고, 1967


"벨푸어 선언과 위임통치가 한 강대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인을 상대로 발표한 첫 번째 선전포고였고, 1947년 팔레스타인 분할에 관한 유엔 결의안이 두 번째 선전포고였다면, 1967년 전쟁의 결과는 세 번째 선전포고─안보리 결의안 SC 242의 형태로─를 낳았다." "유엔 안보리 결의안 제242조는 이스라엘의 영토 획득을 용인하고 있다. 결의안 문안은 대부분 영국 상임 대표 캐러돈 경이 작성했지만, 사실상 미국과 이스라엘의 견해를 압축한 내용으로 6월의 압도적인 패배 이후 아랍 각국과 그들의 후견인인 소련의 입지가 약화된 사정이 반영되었다. 결의안 제242호에는 〈전쟁을 통한 영토 획득을 용인할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도 이스라엘이 철수하기만 하면 아랍 국가들과 강화 조약을 맺고 안전한 국경을 확립할 수 있음이 언급되어 있었다.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직접 교섭하는 것을 꺼리는 상황에서 사실상 이 말은 이스라엘의 철군은 어떤 것이든 조건이 붙고 지연될 것임을 의미했다."(152, 156-7)


"게다가 결의안 제242호에는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를 공인된 안전한 국경의 창설과 연계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정하는 대로 안보 기준 충족을 위해 국경을 확장할 가능성을 허용한다는 조항이 실렸다. 핵무장을 갖춘 이 지역 강대국은 그 후 이 조항을 이례적으로 폭넓고 유연하게 해석해 왔다. 마지막으로, 결의안 제242호의 모호한 언어는 이스라엘이 방금 전에 점령한 영토를 계속 보유할 수 있는 또 다른 허점을 열어 주었다. 결의안의 영어 원문은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그 영토from 'the' territories occupied〉가 아니라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해야 한다withdrawal from territories occupied〉고 규정한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미국이 지원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를 식민화할 수 있게 만든 이런 언어상의 허점을 한껏 활용했다. 실제로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골란고원의 경우에 수십 년간 간헐적으로 직간접적 교섭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면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157)


"아마 가장 중요한 것은 결의안 제242호가 사실상 1949년의 휴전선(그 후 1967년 국경이나 그린라인이라고 불렸다)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국경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로써 1948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대부분 지역을 정복한 것을 간접적으로 승인한 셈이다. 194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핵심적 쟁점들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보상을 받을 권리가 무시되는 결과로 이어져 그들의 열망은 다시 타격을 받았다." "결의안 제242호는 이런 탁월한 날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점령당하고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2년이 지난 1969년에야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건 없었고,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전에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유명한 선언을 했다. 그리하여 총리는 정착민-식민주의 기획에 특징적인 존재 부정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원주민이라는 건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었다."(159)


"1950년대에 실지회복주의를 주창하며 생겨난 소규모 전투적 집단들을 창설한 것은 중간계급과 하층 중간계급의 젊은 급진주의자들로서 대부분은 셰이크 이즈 알딘 알카삼의 후예를 자처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사망해 1936년 반란을 촉발함으로써 여전히 영웅적인 무장투쟁의 상징으로 기려지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1956년 이후에도 팔레스타인의 권리와 이해를 대변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이런 시도는 두 가지 주요한 추세 속에서 정점에 다다랐다. 하나는 주로 팔레스타인인들이 창설한 범아랍 조직으로 1967년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을 창설한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 이끌었다. 나머지 하나는 1959년 쿠웨이트에서 공식 설립되어 1965년에 공개적으로 파타Fatah라는 이름을 밝힌 집단이 주도했다. 두 집단은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까지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는데, 당시 최초의 지도자들은 대학생이나 최근에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었다."(166-7)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가까워서 학생과 식자층, 중간계급, 특히 좌파 정치에 이끌리는 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또한 난민촌에서 헌신적인 추종자들이 있었다. 인민전선의 급진적 메시지가 가장 고통을 받는 팔레스타인인들과 강하게 공명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파타는 공공연하게 팔레스타인 좌파를 표방하는 그룹과 비교할 때 정치적 입장에서 확실히 이데올로기와 무관했다. 창립 당시 파타는 아랍민족주의자운동이나 바트당 같은 아랍 민족주의 성향의 단체들과, 공산주의, 좌파, 팔레스타인 같은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에 앞서 우선 사회 변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슬림형제단 같은 이슬람주의 단체 양쪽 모두에 대한 반발을 상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직접, 즉각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파타의 호소,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폭넓은 입장이야말로 파타가 순식간에 최대의 정치 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170)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1967년 이후 외교와 선전에서 (제한적이나마) 잇따라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런 성공이 논란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매번 여러 적수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70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여러 차례 항공기를 납치하고 요르단에서 팔레스타인 세력이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하심 가문 정권과 파국적인 대결이 벌어졌다. 저항 운동 쪽에 승산이 없는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무력에 직면하고 대중적 공감도 일부 상실한 저항 운동은 그해에 검은구월단 사건 속에서 암만에서 밀려났고, 1971년 봄에 요르단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요르단 와해 사태를 거치면서 저항 운동의 일부 요소들, 특히 팔레스타해방인민전선이 그 시점까지 유지하던 성공적인 역동성의 아우라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무모하게 적들을 도발하고, 의지처가 되는 나라들을 소외시키며, 결국 쫓겨나게 되는 저항 운동의 이런 양상은 11년 뒤 베이루트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되었다."(180-1)


"1970년대 초를 시작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성원들은 이런 압력─아랍 국가들이 점차 이스라엘과의 분쟁을 존재론적 차원이 아니라 국경을 놓고 국가들끼리 벌이는 대결이라고 받아들이게 된 제한적 관점─에, 특히 소련의 촉구에 부응하여 이스라엘과 나란히 팔레스타인 국가를 만든다는 구상, 사실상 두 국가 해법을 내놓았다. 이 방식은 특히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1969년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에서 떨어져 나온 조직이다)이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단체들과 함께 주창한 것으로, 파타 지도부도 조심스럽게 권장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파타의 일부 간부들은 일찍부터 두 국가 해법에 저항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아라파트를 필두로 한 지도자들이 이 방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민주국가라는 최대주의적 목표와 여기에 담긴 혁명적 함의에서 벗어나 이스라엘과 나란히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좀 더 실용적인 목표로 나아가는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의 시작이었다."(187)


"카터 시절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권리와 교섭 참여를 거의 지지했지만, 양쪽 사이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욱 멀어졌다. 캠프 데이비드와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은 미국이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가장 극단적인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신호였고, 이 제휴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베긴과 리쿠드당의 후임자들인 이츠하크 샤미르, 아리엘 샤론, 베냐민 네타냐후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나 주권 확보, 점령지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지배권 회복에 철저히 반대했다. 제에브 자보틴스키의 이데올로기적 상속자인 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가 오직 유대인의 땅이라고 믿었다. 〈현지 아랍인들〉에게 주어진 자치권은 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을 뿐이다." "향후 이뤄지는 교섭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는 과도기를 위한 자치 조건에 제한되었고, 주권, 국가 수립, 예루살렘, 난민의 운명, 팔레스타인의 토지와 물과 대기에 대한 관할권 등에 관한 논의는 죄다 배제되었다."(202-3)


4 네 번째 선전포고, 1982


"1982년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분수령이 되었다. 1948년 5월 15일 이래 아랍 각국 군대가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관여해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었다. 팔레스타인 페다인은 1960년대 중반부터 줄곧 요르단의 카라메에서,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레바논 남부, 특히 1978년 리타니 작전에서, 그리고 1981년 여름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등에서 이스라엘 군대와 대결했다. 하지만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정치적·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해 놓은 까닭에 비교적 제한된 성격의 군사 작전으로는 최소한의 영향만 미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대레바논 침공을 이끈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시리아 무장 세력을 레바논에서 축출하고 베이루트에 말 잘 듣는 동맹 정부를 만들어 그 나라의 상황을 바꾸기를 원했지만, 주요한 목표는 팔레스타인 자체였다."(209)


"원래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벌이는 활동은 공식적인 틀─1969년 채택된 카이로 협정─안에 제한되어 있었다. 이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 남부의 많은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통제하고 행동의 자유를 누렸다. 하지만 중무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레바논의 여러 지역에서 점차 지배권을 쥐고 권력을 휘두르는 세력이 되었다. 레바논의 보통 사람들은 내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이렇게 억압적인 팔레스타인 세력이 더욱 강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에 세운 일종의 미니 국가는 궁극적으로 지속 가능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군사 행동에 자극받은 이스라엘이 레바논 민간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이스라엘을 겨냥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공격은 종종 민간 목표물을 대상으로 삼았고,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대의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지라도 진척시키는 데 가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222)


"1982년 전쟁이 낳은 가장 중요한 지속적인 결과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가 부상한 것과 레바논 내전이 격화되고 장기화된 것이었다. 이 내전은 훨씬 더 복잡한 지역적 분쟁으로 비화했다. 1982년 침공은 여러 가지로 최초의 사건이었다. 1958년 미군이 잠깐 레바논에 파병된 이래 미국이 최초로 중동에 군사 개입한 사례였고,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제로 정권 교체를 시도한 사례였다. 이 사건들 때문에 많은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 아랍인 사이에서 다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해 훨씬 격렬한 반감이 생겨나면서 아랍-이스라엘 분쟁이 한층 악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 결정권자들이 1982년 전쟁을 개시하면서 내린 선택에서 직접적으로 나온 결과였다."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정교한 선전에도 불구하고, 베이루트에서 고통에 시달리는 민간인들의 끔찍한 이미지가 널리 퍼져 나갔고, 그 결과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지위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38-9)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철수하자 팔레스타인의 대의는 심각하게 약해진 듯 보였고, 샤론은 핵심 목표─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축출하는─를 전부 달성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사태가 낳은 역설적인 결과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다시 시작된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무게중심이 이웃 아랍 나라들로부터 점차 팔레스타인 내부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가 발발한 곳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과 세계의 여론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수십 년 전에 나크바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뼈아픈 패배를 계기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겨냥한 다면적인 전쟁에 맞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일으켰다. 샤론과 베긴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이스라엘이 자유롭게 점령지를 흡수하기 위해 침공에 착수했지만,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이 저항을 자극하고 팔레스타인 내부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40)


"미국 입장에서 보면, 중동 외교를 독점하려 하고 이스라엘의 야심을 부추긴 것은 자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레바논의 혼란 상태에서 자라난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적이 되었다. 헤즈볼라의 부상을 검토하면서, 이 운동을 창설하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표적을 겨냥해 치명적인 공격을 가한 많은 젊은이들이 1982년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나란히 싸운 이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젊은이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투사들이 떠난 뒤에 남아서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나란히 자신들과 같은 시아파 수백 명이 학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국 대사관 폭발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 병영에서 목숨을 잃은 해병대원들, 그리고 베이루트에 납치되거나 암살당한 많은 미국인들은 대개 나중에 헤즈볼라가 된 그룹들의 공격에 희생되었는데, 미국과 이스라엘 점령자들이 공모한 대가를 그들이 치른 셈이다."(241-2)


5 다섯 번째 선전포고, 1987~1995


"이른바 1차 인티파다는 점령지 전역에서 자생적으로 폭발했다.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 지구의 자발랴 난민촌에서 트럭과 충돌해서 팔레스타인인 4명이 사망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봉기는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가자 지구가 용광로였고 이후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데 가장 애를 먹은 지역으로 남았다. 인티파다를 거치면서 마을과 소읍, 도시와 난민촌에서 광범위한 지역 조직이 생겨났고, 비공개 조직인 통일민족지도부가 이끌게 되었다. 인티파다 시기에 결성된 유연하고 비밀스러운 풀뿌리 네트워크들은 군사 점령 당국이 진압을 하기가 불가능했다." "인티파다 시기 내내 팔레스타인의 젊은 시위대가 병력 수송 장갑차와 탱크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로 시가전을 벌이는 광경이 세계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텔레비전 시청자들은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장면에 주목했다. 영원한 피해자라는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팔레스타인의 다윗과 싸우는 골리앗으로 바뀌었다."(246-7)


"인티파다는 누적된 좌절감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난 저항 운동이었고, 처음에는 팔레스타인의 공식적 정치 지도부와 아무런 연계가 없었다. 1936~1939년 반란과 마찬가지로, 인티파다가 장기간 광범위하게 지속된 것은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누렸다는 증거다. 봉기는 또한 유연하고 혁신적이었다. 활동가들도 남성과 여성, 엘리트 전문직과 사업가, 농민, 마을 사람, 도시 빈민, 학생, 자영업자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집단을 아울렀다." "1936~1939년 반란과 달리, 인티파다는 폭넓은 전략적 전망과 통일된 지도부에 따라 진행되었고,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악화시키지 않았다. 인티파다가─1960년대와 1970년대의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과 대조적으로─팔레스타인을 단합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고 대체로 총기와 폭발물을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국제사회에서도 많은 이들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여서 결국 이스라엘과 세계 여론에 심대하고 오래가는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252-3)


"1982년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패배한 뒤, 이 조직은 튀니스를 비롯한 아랍 각국 수도에서 별 성과 없는 망명 활동에 갇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풀뿌리가 주도하는 봉기가 발발하자 깜짝 놀라면서 곧바로 이 봉기를 조직으로 흡수하고 이익을 챙기려고 했다." "문제는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자들이 근시안적 시각과 제한된 전략적 전망에 갇혀 있다는 것이었다. 지도자들 대다수는 이스라엘의 지배가 20년이 흐른 뒤 점령 체제의 본성이나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처한 복잡한 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점차 인티파다를 튀니스에서 원격 통제 방식으로 관리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침을 발표하고 상황을 관리하면서 애초에 봉기를 시작해서 성공적으로 이끈 이들의 견해와 우선순위를 종종 무시했다."(254-5)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고압적인 시리아 정권에 오래전부터 격한 반감을 품고 있었고, 반사적으로 균형추를 모색했다. 이집트가 한때 아사드 정권이 행사하는 압력에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지만, 사다트가 독자적으로 이스라엘과 평화를 이룬 뒤에는 이제 그런 역할이 가능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가능한 다른 균형추는 필연적으로 시리아의 경쟁자인 이라크였다." "이렇게 의존하게 되자 아라파트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라크의 정책에 순응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라크 정권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다잡아 두기 위해 걸핏하면 응징했다." "무지몽매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서 정보부장 아부 이야드만이 예외였다. 그는 걸프전을 앞두고 이라크를 지지한다는 아라파트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아부 이야드가 내다본 대로 상황이 펼쳐졌지만,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공세가 시작되기 3일 전인 1991년 1월 14일 튀니스에서 암살당했다."(265-8)


"아라파트가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린 결과가 나오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웨이트가 해방된 뒤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쫓겨나는 비극이 시발점이었다. 페르시아만 국가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한 모든 재정 지원을 중단했고, 1982년 베이루트에서 철수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를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던 나라들까지 일부 포함해서 많은 아랍 나라가 이 기구를 추방했다. 그리하여 1990~1991년 걸프전 이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아라파트와 그의 동지들이 올라탄 빙산은 빠르게 녹아내리고 있었고, 그들은 단단한 땅에 뛰어내리고자 필사적으로 애썼다. 공교롭게도 이런 위기 상황과 동시에 미국은 이라크에서 승리를 거두고 소련이 종언을 고하면서 의기양양한 순간을 누리고 있었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평화회담이 차질을 빚은 것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애초에 쿠웨이트에 대해 심각하게 오산을 한 탓이 컸다."(268-9)


"샤미르 정부 대신 노동당이 주도하는 연정이 들어선 뒤, 총리가 된 라빈은 시리아 경로와 팔레스타인 경로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할지 망설였다. 언제나 전략가였던 그는 시리아와 먼저 협상을 타결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지를 약화시켜서 그들과의 교섭이 용이해지는 이점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양쪽은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갈릴리호 동쪽 연안에 있는 몇 평방마일의 전략적 땅의 처분을 둘러싸고 불거진 견해차가 주된 요인이었다. 골란고원에서 조금이라도 철수를 하는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몇몇 집단(과 미국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스라엘에서 정권이 교체되어도 실질적인 입장 변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팔레스타인 대표단 내부와 튀니스에서는 실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1995년 10월, 크네셋에서 라빈은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조직체〉가 만들어지더라도 〈국가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이 되지 않아 그는 암살당했다."(279-81)


"1993년 6월, 오슬로에서 양측이 서명한 내용은 점령지의 한쪽 땅에서 아주 제한된 형태로 자치를 하고 땅과 물, 경계선, 그 밖에도 많은 부분에 대해 통제권이 없는 것이었다. 이 협정과 이후 여기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협정들은 오늘날까지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 시행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와 같은 온갖 특권을 유지하면서 사실상 땅과 사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셈이다. 주권의 속성들도 대부분 이스라엘 손에 있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오슬로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인들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당국PA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 협력〉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289-90)


"1995년 양쪽이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 협정, 일명 오슬로 협정Ⅱ에 합의하면서 오슬로 협정Ⅰ의 파괴적인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협정으로 두 곳이 악명 높은 누더기 지역들(A, B, C)로 쪼개졌고, 전체의 60퍼센트가 넘는 C지역이 완전하고 직접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은 18퍼센트에 해당하는 A지역의 행정·치안권, 22퍼센트인 B지역의 행정권을 부여받은 한편, B지역의 치안권은 여전히 이스라엘 손에 있었다. A지역과 B지역을 합치면 면적으로는 40퍼센트였지만 팔레스타인 인구로 따지면 87퍼센트 정도였다. C지역은 한 곳을 제외하면 모두 유대인 정착촌이었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의 진입과 출입에 대해 계속 전면적인 권한을 가졌고 인구 등록의 배타적인 권리도 갖고 있었다." "마침내 요르단강 서안은 수십 곳의 군사 검문소와 수백 마일에 해당하는 장벽과 전기 울타리 때문에 점점이 박힌 섬들처럼 고립되었다."(292-3)


"오슬로 협정 이후 사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상황은 흔히 거의 동등한 세력, 즉 이스라엘 국가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이라는 준국가의 충돌이라고 그릇되게 묘사되어 왔다. 이런 묘사는 변함없이 불평등한 식민지적 현실을 가린다." "오슬로 협정Ⅰ은 또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점령의 하청업자로 끌어들이는 결정을 수반했다. 라빈이 아라파트와 끌어낸 안보 합의의 실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고, 1993년 6월 나와 동료들은 미국 외교관들에게 이 합의에 관해 발표했다. 핵심은 언제나 이스라엘, 즉 점령과 정착민을 위한 안보였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복종시키는 비용과 책임은 팔레스타인 쪽에 떠넘겨졌다." "오슬로 협정은 사실 100년 묵은 시온주의 운동의 기획을 진척시키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국제적 승인 아래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발표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47년이나 1967년과 달리,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들과 공모하는 쪽을 선택했다."(295-7)


6 여섯 번째 선전포고, 2000~2014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새롭게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인 하마스 입장에서 보면, 오슬로가 팔레스타인 쪽 지지자들이 기대한 바에 미치지 못한다는 증거는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 1987년 12월 1차 인티파다 초기에 창설된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가 발전한 조직이었다. 점령 당국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을 분열시키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하마스를 너그럽게 방치했고 이들은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인티파다 시기에 하마스는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고집하면서 통합민족사령부에 합류하지 않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보다 전투적인 이슬람주의 대안 세력으로 자신을 홍보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평의회가 1988년 독립 선언에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외교로 전환한 것을 비난했다. 그리고 무력 사용을 통해서만 팔레스타인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권리를 다시 주장했다."(302-3)


"오슬로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상황이 악화되고, 국가 수립의 가능성이 점점 멀어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의 경쟁이 격화되어 가다가 결국 2000년 9월 2차 인티파다로 분출했다. 인티파다가 불붙는 데는 성냥불 하나면 충분했다. 아리엘 샤론이 보안 요원 수백 명에 둘러싸여 하람알샤리프를 도발적으로 방문한 것이 성냥불 역할을 했다. 하람─유대인들이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부르는 곳─은 최소한 1929년의 유혈 사태 이래로 양쪽 모두에 민족주의적·종교적 열정이 집중되는 장소였다. 당시 수정주의적 시온주의 극단론자들이 이웃한 서쪽 벽Western Wall에서 깃발을 흔들며 떠들썩한 시위를 벌이자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폭력 사태가 일어나 양쪽에서 수백 명씩 사상자가 발생했다." "2차 인티파다 시기에 사망한 이스라엘인의 대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내에서 벌인 자살 폭탄 공격의 민간인 피해자였으며, 전체 사망자의 3분의 1에 약간 못 미치는 332명은 이스라엘 군경이었다."(306-8)


"2차 인티파다의 끔찍한 폭력 때문에 1982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1차 인티파다와 평화교섭을 통해 쌓아 온 긍정적인 이미지가 지워졌다. 연이어 벌어지는 자살 폭탄 공격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세계 각지로 전송되자 (그리고 이런 보도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지는 훨씬 더 거대한 폭력이 가려지자), 이스라엘은 이제 압제자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으로 괴롭히는 세력의 희생자라는 익숙한 역할로 돌아갔다." "민간인을 겨냥한 이런 공격이 치명타가 되어 이스라엘 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다는 사고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론은 이스라엘이 뿌리부터 분열되어 있는 〈인위적인〉 정치 체제라는, 널리 퍼져 있지만 치명적 결함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 이 분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명명백백한 성공을 거둔 시온주의의 민족국가 건설 노력뿐만 아니라 많은 내적 분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회가 가진 응집력을 무시한 것이다."(310-2)


"하마스와 파타의 분열은 팔레스타인의 대의에 잠재적인 재앙이었고, 이런 우려의 정서는 여론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2006년 5월에 파타, 하마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이슬람지하드 등 이스라엘 교도소에 갇혀 있는 주요 조직의 지도자 다섯 명이 〈수감자 문서〉를 발표했다. 두 국가 해법을 토대로 삼은 새로운 강령에 기반해서 정파 분열을 끝내자고 호소하는 문서였다." "연립정부를 구성하려는 이런 노력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두 나라는 하마스가 자치당국 정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했다." "서구와 아랍의 재정 지원자들이 파타에게 하마스를 멀리하라고 가한 압력은 팔레스타인 자치당국에 속한 파타의 베테랑들에게 톡톡히 효과를 발휘했다. 애당초 그들은 라말라의 금박 거품 속에서 누리는 물질적 혜택이나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훨씬 강력한 적에 맞서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험에 내맡기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정치 체제가 분열로 무너지는 쪽을 선호했다."(316-8)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장악하자 이스라엘은 전면적인 포위에 나섰다. 가자 지구에 들어오는 물자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었고, 정기적인 수출은 완전히 중단되었으며, 연료 공급이 차단되었고, 가자 출입은 극히 드물게 허용되었다. 가자는 사실상 지붕 뚫린 감옥이 되었다. 2018년에 이르면 200만 팔레스타인인 가운데 최소한 53퍼센트가 빈곤 상태에서 살았고, 실업률은 무려 52퍼센트로, 청년과 여성은 훨씬 높은 수치였다. 국제사회가 하마스의 선거 승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사태는 팔레스타인의 파국적인 분열과 가자 봉쇄로 이어졌다. 이런 사태의 연속은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새로운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앞으로 벌어질 공공연한 전쟁을 국제적으로 은폐하는 가림막을 제공했다." "세 차례의 대규모 공격(2008, 2012, 2014년)에서 나타난 43:1이라는 일방적인 사상자 비율과, 이스라엘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인인 반면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대다수가 민간인이라는 사실 역시 의미심장하다."(319)


"팔레스타인 문제, 그리고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이 양보할 수밖에 없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화해에 관한 한, 미국의 주요한 전략적·경제적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고, 또한 이스라엘과 그 지지자들의 지속적인 반대를 상쇄할 아무런 수단이 없는 듯하다. 트루먼부터 도널드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은 이런 반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를 원치 않았고, 따라서 대체로 이스라엘이 진행 속도를 정하고 심지어 팔레스타인과 팔레스타인인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미국의 입장까지 결정하도록 놔두었다." "게다가 중동은 오랫동안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집중된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아 왔다. 이런 비민주적 정권들은 역사적으로 방위, 항공, 석유, 금융, 부동산 산업을 지원하는 미국을 비롯한 소중한 후원자들에게 영합했다. 그들은 대체로 자국의 친팔레스타인 여론을 무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식민화를 지원하는 미국이 어떤 역풍도 맞지 않도록 도와주었다."(332)


결론


"수십 년간 시온주의자들은 종종 국가의 독립 선언을 언급해 가며 이스라엘은 〈유대 국가이면서 민주국가〉일 수 있고 실제로 그렇다고 주장했다. 이 정식화에 내재한 모순들이 한층 더 분명해지자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만약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유대 국가가 우선이라고 인정했다(실제로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2018년 7월, 크네셋은 헌법에 그런 선택을 명문화하면서 〈유대 민족국가에 관한 기본법〉을 채택했다.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민족 자결권을 부여하고 아랍어의 지위를 격하하며, 유대인 정착촌을 다른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민족적 가치〉로 선언함으로써 이스라엘 시민들 사이에 법적 불평등을 제도화한 법이다. 유대인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면서 이 법의 발의한 전 법무장과 아옐레트 샤케드는 법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몇 달 전에 솔직하게 이런 주장을 펼쳤다. 「유대 국가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확고히 유지해야 하는 장소들이 있는데, 때로는 이를 위해 평등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350)


"상황이나 시대가 달랐다면, 18세기나 19세기라면, 원주민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데 대해 오랫동안 저항한 사실을 보면,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말처럼 시온주의 운동은 〈너무 늦게 도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말 특유의 분리주의 기획을 이미 앞서 나가고 있는 세계에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세워지면서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력한 민족운동과 번성하는 새로운 민족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원주민을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시온주의는 최종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정착민-식민주의와 원주민의 대결은 세 가지 결과 가운데 하나로 끝났을 뿐이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토착민이 제거되거나 완전히 정복되는 경우, 극히 드물지만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주의가 패배하고 쫓겨나는 경우, 남아프리카, 짐바브웨, 아일랜드에서처럼 타협과 화해의 맥락에서 식민주의의 패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그것이다."(343-4)


"이스라엘이 자신의 기획을 지속하면서 누려 온 이점은 대다수 미국인과 많은 유럽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대결이 기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띤다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그들 눈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과 똑같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민족국가로 보인다. 비타협적이고 종종 반유대적인 무슬림들(많은 이들은 기독교인이 있든 말든 팔레스타인인을 무슬림으로 뭉뚱그린다)의 비이성적인 적대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이런 이미지가 확산된 것이야말로 시온주의가 거둔 위대한 업적이며 시온주의가 살아남은 비결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시온주의가 성공을 거둔 한 가지 이유는 〈관념과 재현, 언어와 이미지가 문제가 되는 국제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탈식민적 미래는 이런 잘못된 생각을 무너뜨리고 분쟁의 진정한 성격을 분명히 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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