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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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대중운동의 매력


"거대한 변화에 달려드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에게 어떤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다고 느낀다. 프랑스 혁명을 이루어낸 세대에는 인간의 이성이 전능하며 인간의 지적 능력이 무한하다는 과장된 의식이 있었다. 새로운 세계의 창조라는 혼돈 속으로 무모하게 뛰어든 레닌과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의 전능함을 맹신했다." "어떤 거대한 변화 임무에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사람들은 극렬한 불만을 느끼지만 극빈 상태는 아니어야 하며, 어떤 강력한 강령이나 절대적인 지도자 혹은 어떤 신기술을 얻을 때 압도적인 힘의 원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나 자기네가 떠맡은 그 거대한 임무에 수반되는 어려움은 전혀 알지 못해야 한다. 이들에게 경험은 장애가 된다. 프랑스혁명을 시작한 사람들은 정치적 경험이 전무했다. 볼셰비키와 나치,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혁명들도 마찬가지다. 경험자들은 늦게 개입한다. 잉글랜드인들이 대중운동에 소심한 것도 어쩌면 앞선 정치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23, 27-8)


"대중운동의 호소력과 실제적 조직의 호소력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실제적인 조직은 자기향상의 기회가 되며, 그 필요성은 주로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나온다. 반면에 대중운동은 특히나 부흥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단계에서는 소중한 자신을 뒷받침하고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을 몰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대중운동이 추종자들을 끌어들이고 붙들어둘 수 있는 것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 열망을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장 깊숙한 열망은 어떤 숭고한 대의와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삶─갱생─을 사는 것이며, 혹은 이것에 실패하더라도 자부심, 자신감, 희망, 목적의식,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 등 새로운 본령을 획득할 기회를 좇는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29-30)


"사람들이 어떤 대중운동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강령이나 사업에 준비된 것이 아니라 어떤 효과적인 운동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히틀러 이전 독일의 불안한 젊은이들은 흔히 동전 던지기로 공산당에 가입할 것이냐 나치에 가입할 것이냐를 정했다. 제정 러시아의 인구 과밀 지구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유대 집단은 혁명과 시온주의, 어느 쪽으로든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가족 안에서 한 사람이 혁명파에 가담하면 또 한 사람은 시온파에 가담했다." "전향을 권유하는 우리 시대의 대중운동은 라이벌 집단의 가장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잠재적 전향자로 주목하는 듯하다. 모든 대중운동이 같은 인간의 속성에서 추종자를 끌어내며 같은 심리에 호소하므로 ① 모든 대중운동이 경쟁을 벌이며, 한 운동이 세를 얻을 때 나머지 다른 운동들은 세를 잃는다. ② 모든 대중운동은 호환된다. 하나의 대중운동은 언제든 다른 대중운동으로 변형될 수 있다."(36-8)


2 잠재적 전향자


"가난한 사람이라고 전부 불만을 품는 것은 아니다. 도시 빈민가에 갇힌 채 자신의 쇠락을 뽐내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익숙한 구렁텅이에서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서리친다. 건실한 사람들조차 가난이 길어지면 타성에 젖는다. 그들은 변치 않는 세계의 질서에 위압된다. 어떤 격변─침략이나 전염병 혹은 다른 어떤 공동체의 재앙─이나 일어나야 그 '부동의 질서'도 일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에 눈뜬다.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좋았던 시절의 기억으로 피가 끓는다. 물려받은 것, 가진 것을 다 빼앗긴 그들은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반응한다. 17세기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에 성공을 안긴 것은 신빈곤층이었다." "오늘날(1951년) 서구 세계의 노동자들은 실직을 강등으로 느낀다. 그들은 부당한 세계 질서가 자기네를 박탈하고 상처 입혔다고 느끼며, 그렇기에 언제든 거대한 변혁의 외침에 귀 기울인다."(48-50)


"불만은 비참함을 견딜 만할 때, 상황이 개선되어 어떤 이상적인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는 시점에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불평불만은 문제가 시정될 수 있을 것 같을 때 가장 신랄하다." "기세등등한 대중운동은 희망이 눈앞에 있음을 설교한다. 이는 지지자들에게 행동을 고무하기 위한 것으로, 이 '모퉁이 바로 뒤에 있는' 희망이 대중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는 세계의 종말과 천국이 임박했음을 설교하며, 무함마드는 신도의 눈앞에 전리품을 흔들었고, 자코뱅당은 자유와 평등의 즉각 실현을 약속했으며, 초기 볼셰비키는 빵과 토지를 약속했고,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속박을 즉각 종식하기 위해 노력하고 행동할 것을 만인 앞에 약속했다. 이 운동이 세력을 얻으면 역점은 미래의 희망으로 바뀐다. '성공한' 대중운동은 현재의 보존에 몰두하며, 즉발적 행동보다는 복종과 인내를 치하하며 말한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51-4)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나치 평당원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모든 극악 범죄에 대해 무고하다고 선언한 것도 순전한 허위 주장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명령 복종의 의무를 짊어진 것은 중상당하고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광신자들은 학대보다 자유를 더 두려워한다. 신흥운동의 지지자들은 교조와 명령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공기 속에 살며 숨쉴지라도 강한 자유 의식을 갖고 있다. 이 자유 의식은 용인할 수 없는 개인 실존에 대한 책임과 공포, 절망감에서 도피한 결과다. 이 도피를 그들은 구원과 해방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 변화가 엄격한 규율의 틀 속에서 성취한 것일지라도, 거대한 변화를 경험하는 것 또한 자유를 느끼게 해준다."(55-6)


"한 사회에서 대중운동의 기회가 무르익었는지 보여주는 척도로, 해소되지 못한 권태의 만연보다 신뢰할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떤 대중운동이 되었건 발생하기 전 단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권태가 만연한 분위기가 감돌며, 대중운동 발생 초기에는 권태로운 사람들이 수탈과 압제에 고통 받는 사람들보다 운동에 더 공감하고 더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곤 한다. 대중 봉기를 꾀하는 선동자에게는 사람들이 좀이 쑤실 정도로 지루해한다는 보고가 적어도 경제적 수탈이나 정치적 학대로 대중이 고통 받고 있다는 보고만큼이나 고무적인 신호다.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권태를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시시하고 의미 없는 존재라는 자각은 권태의 주된 원천이다." "자율적인 삶을 누리며 형편이 나쁘지 않지만 창조적 작업이나 유익할 활동을 할 능력 또는 기회가 없는 사람들이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기 위하여 어떤 무모하고 기상천외한 수단에 의지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83-4)


3 단결과 자기희생


"사람이 자기를 희생할 수 있으려면 개인의 정체성과 개성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는 더 이상 조지나 한스, 이반 또는 다다오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개인에게서 독립성을 제거하는 일은 철저해야 한다. 개인은 아무리 사소한 행동 하나라도 일련의 의례를 통하여 집단이나 부족, 당 따위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개인의 기쁨과 슬픔, 자부심과 자신감은 자기 자신의 전망과 능력이 아닌 집단의 운과 역량에서 샘솟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인은 절대로 혼자라고 느끼면 안 된다. 무인도에 홀로 떨어지더라도 여전히 집단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느껴야만 한다. 집단에게 버려진다는 것은 생명이 잘려나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확실히 존재의 원시적 단계이며, 가장 완벽한 표본은 원시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운동은 이 완벽한 원시적 상태에 가까워지기 위해 애쓰며, 당대 대중운동의 반개인주의적 경향에서 우리가 원시시대로 역행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고 해도 망상이 아니다."(96-8)


"죽음과 죽임이 어떤 의례나 의식, 연극 공연이나 놀이의 일부일 때는 쉽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상의 장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꿔도 될 것은 없다. 오직 자신을 무대 위의 (따라서 실제가 아닌 가상의) 배우로 여길 때 죽음은 공포와 최후라는 의미를 잃고 가상의 행위, 하나의 연극적 몸짓이 된다. 추종자들에게 죽음과 죽임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어떤 숭고한 장면, 엄숙한 혹은 유쾌한 연극 공연에 참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 대중운동의 지도자가 해야 할 주요 임무 중 하나다." "대중운동의 행렬과 행진, 의식, 전례 등의 행사는 의심할 바 없이 대중의 가슴에 어떤 공명을 일으킨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잃게 마련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웅적 행위로써 타인의 견해와 상상 속에서 불멸의 존재로 남기 위해 실제하고 유한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한다."(102-5)


"자신의 경험과 사고에서 스스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대개 순교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 자가희생은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면밀한 탐구와 숙고의 결과물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실천적인 대중운동은 추종자들과 현실 세계 사이에 사실이 뚫고 들어오지 못할 망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위하여 대중운동은 궁극의 절대 진리가 강령 안에 포함돼 있으며 강령 이외에는 어떤 진리도 확실성도 없음을 주장한다." "의식과 이성의 근거에 의존하는 것은 이단이요 대역죄다. 맹신은 무수한 불신을 통해 검증된다." "보거나 들을 가치가 없는 사실에 '눈 감고 귀 막는' 능력이야말로 맹신자들이 지닌 불굴의 결단력과 충성심의 원천이다. 그들은 위험이 닥쳐도 겁내지 않고 장애에 기죽지 않으며 반박에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은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산을 옮기는 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119-20)


"강령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이해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굳게 믿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머리로 이해한 강령은 그 위력이 삭감되게 마련이다. 무언가를 이해하면, 그것은 마치 우리 안에서 시작된 것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받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서 시작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영구불변의 확신을 갖기가 힘들다. 무언가를 이해하게 되면 어김없이 그것의 효력과 확실성은 약해진다. 믿음이 두터운 자들은 절대적 진리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대중운동이 강령에 대한 설명을 붙이면서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고 노력한다면, 그 운도으이 활기찬 시기는 끝나고 안정을 중시하는 시기에 돌입했다는 뜻이다. 체제가 안정되려면 지식인들의 충성이 필요한데, 강령을 이해시키는 일은 대중의 자기희생을 촉구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지식인들의 동조를 얻기 위해 하는 것이다."(121-2)


"광신자는 두말할 여지 없이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영원히 그 하나뿐─만세반석─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그의 자신감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행위에서 나온다. 그가 어떤 대의를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신성하며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자기가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로 광신자는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까닭에 자신이 받아들이는 모든 대의가 전부 숭고한 대의가 되어버리곤 한다. 광신자는 그의 논리나 도덕 의식을 자극해봐야 그 대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숭고한 대의의 중요성과 정당함을 입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갈등 없이 갑자기 열광적으로 다른 대의로 갈아타기도 한다. 그에게 설득이란 없으며, 가능한 것은 오로지 전향 혹은 개종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신봉하는 대의가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다."(127-8)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나쁘기만 적보다는 장점이 많은 적을 증오하는 편이 쉽다. 경멸스러운 상대를 증오하기는 어렵다." "증오심 속에 숨어 있는 부러움은 우리가 증오하는 대상을 따라하는 경향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모든 대중운동은 그 운동이 적으로 삼은 바로 그 악마의 형상을 따라가게 된다. 정점의 기독교는 적그리스도의 형상을 구체화시켰다. 자코뱅당은 자신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대상인 전제군주의 모든 악덕을 스스로 행했다. 소련은 독점자본주의의 가장 순수하고 거대한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히틀러는 증오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부러움을 알아차리고서 놀라운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국가사회당이 맹렬한 증오를 받을 만한 적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한 증오는 국가사회당의 신념이 우월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기에, 〈국가사회당이 견지하는 태도의 가치, 신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의지력을 잴 수 있는 최상의 잣대는 그가 적······으로부터 받는 적개심의 정도다.〉"(143-5)


"지도자가 무에서 운동을 끄집어내는 것은 아니다. 추종하고 복종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하고, 현재의 상황에 대한 강렬한 불만이 있어야 비로소 운동과 지도자가 나타날 수 있다. 조건이 성숙하지 못했을 때는, 잠재적 지도자에게 아무리 재능이 있고 그가 주창하는 대의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추종하는 무리가 생겨나지 않는다." "만반의 태세가 갖춰지고 나면 걸출한 지도자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한 요건이 된다. 그런 지도자 없이는 어떠한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저절로 대중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의 흐름을 볼셰비키 혁명으로 몰아가게 만든 것은 레닌이었다. 그가 스위스나 1917년 러시아로 들어가는 길에 죽었더라면 다른 탁월한 볼셰비키들이 연정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 결과는 부르주아들이 운영하는 자유주의 공화국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경우에는 징후가 더더욱 결정적이다. 즉, 그들 없이는 파시즘도 나치즘도 없었을 것이다."(164-6)


4 시작과 끝


"대중운동은 대개 지배 체제가 불신받기 전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불신은 권력자의 실책이나 학정의 자동적인 결과가 아니라 불만 있는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다. 불만이 명료하게 표현되지 않거나 불만이 없을 때는 저절로 쓰러져 무너지지 않는 한 아무리 무능하고 타락한 지배 체제라도 권력을 유지한다." "대중의 눈에 광신적 극단주의자는 아무리 뛰어난 언변으로 사람을 사로잡아봤자 위험하고 음모적이며 현실을 모르는 사람일 뿐이다." "지식인은 사정이 다르다. 대중이 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그의 말이 아무리 긴박한 사안이라 하더라도 곧장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를 무시하든가 극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의 입을 막든가 한다. 이렇듯 지식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기존 체제의 토대를 잠식해 들어가며 권좌에 있는 자들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믿음과 충성심을 무너뜨려 대중운동이 일어나기 위한 기반을 닦는다."(191-3)


"어떤 유형이 되었든 거의 모든 지식인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뿌리 깊은 갈망이 있는데, 이것이 지배 질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결정한다. 그것은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사회적으로 보통 사람보다 높은, 두드러진 지위에 대한 갈망이다." "사회비판적인 지식인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일생에 한 번쯤은 권력자가 보내는 경의나 회유의 제스처에 넘어가 그들 편에 서는 순간이 있다. 어떤 단계에서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시류에 기꺼이 영합하는 아첨꾼이 된다." "저항하는 지식인이 아무리 자신은 짓밟히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믿어도 그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분노는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다. 그의 연민은 대개 군림하는 권력을 향한 증오심에서 나온다. 그러다가도 약자를 버리고 강자 편에 설 때에는 온갖 고상한 이유가 다 떠오른다. 〈자신과 관계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일반 대중의 불행과 고통을 차마 견디지 못하는 인류애를 지닌 사람은 극히 예외적인 소수의 사람들뿐이다.〉"(194-6)


"진정한 지식인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신념 없이도 잘 지낼 수 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를 진리 자체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 그는 생각의 충돌과 주고받는 논쟁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지식인이 하나의 철학과 행동 강령을 창안했다면, 그것은 행동 방침과 신조라기보다는 빼어난 논리 능력을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허영심으로 인해 가혹한 언어를 구사하며 심지어는 독설을 쏟아붓기도 한다. 그는 대개 믿어달라고 호소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은 그의 주장에 성서와 같은 확신을 부여할 것이며, 그것을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빈정대는 지식인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을 때,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었고, 악한 자들은 강렬한 열정으로 충만하다. 틀림없이 어떤 계시가 임박했다. 틀림없이 재림이 임박했다.〉 이제 광신자들은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204-5)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를 실현할 자유가 아니라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공포스러운 부담〉으로부터의 자유, 무능한 자기를 실현하며 그 결과가 잘못되었을 경우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곤란한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확신─맹목적인, 권위에 대한 확신─이다." "대중운동의 산파였던 지식인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비극적 운명을 맞는 이유는 아무리 단결된 노력을 역설하고 찬미한들 본질적으로 그들이 개인주의자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206-7)


"행동가는 대중운동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나 행동가의 등장은 대개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동가의 목표는 세계 개혁이 아니라 소유다." "그는 주로 훈련과 강압에 의존한다. 그는 사람은 다 멍청이라는 말보다는 다 겁쟁이라는 말을 더 신뢰하며, 존 메이너드의 말을 빌리자면 새 질서를 사람들의 가슴이 아니라 목 위에 수립하려 든다." "그는 주로 힘의 설득력에 의지하더라도 새 체제 안에 신념이 주는 감동의 요소를 보존하며 격정적인 선전선동의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의 명령은 경건한 어휘로 이루어지며, 그의 입술에서는 옛 신조와 선전 문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온다." "강압의 철권이 전방위적으로 전개되고 기계적 훈련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충성스런 분위기와 격정적인 선전선동은 강압을 설득처럼 받아들이게 만들며, 자발성과 유사한 습성을 정착시킨다."(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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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의 신 - 역사적 개관 신의 역사
에티엔 질송 지음, 김진혁 옮김 / 도서출판100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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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 신과 그리스 철학


"'신'이라는 단어의 그리스적 의미에서 첫 번째로 놀랄 만한 사실은 그 단어의 기원이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사변하기 시작했을 때, 신들은 이미 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성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자 시인Theologian Poets이라 불렸던 사람들에게서 신들을 물려받았을 뿐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한정하자면, '신'이라는 단어는 믿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대상에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의 신은 제우스, 헤라, 아폴론, 팔라스 아테나 등의 올림포스의 신처럼 우리가 사람이라고 부를 법한 것으로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또한 위대한 바다, 땅, 하늘 신과 같이 어떤 물리적 실재일 수도 있습니다." "『일리아스』에서는 유한한 생명 모두를 관할하는 위대한 자연적 운명들도 수많은 신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공포와 궤멸, 갈등 등이 있습니다. 죽음과 잠도 있는데, 잠은 죽음의 형제로서 신들과 인간들의 주인입니다."(34-6)


"이러한 것들이 지시하는 바의 참 본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러한 신들의 이름은 모두 자기 자신의 의지를 지닌 살아 있는 능력 혹은 힘을 가리킵니다. 이 신적인 능력이나 힘은 인간의 삶 속에서 작동하며, 위에서 인간의 운명을 쥐고 흔듭니다." "이러한 신적 힘들의 첫 번째 특징은 생명입니다. 어떤 식으로 나타나든 간에 그리스의 신은 결코 생명이 없는 무언가가 아닙니다. 마치 인간이 살아있는 것처럼, 신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은 어느 날 끝난다면, 그리스의 신은 절대 죽지 않는 것이 유일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신들의 다른 이름은 '불멸자'입니다. 이러한 죽지 않는 존재들의 두 번째 특징은 그들 모두가 세계보다는 인간과 관계를 더 맺는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에다 세 번째를 더해 봅시다. 신적인 힘은 자신이 질서 내에서는 최고 권위로 다스립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신들은 각자의 질서에서는 최고 권위입니다. 그래서 특정 지점에서는 어떤 신이 다른 신에게 복종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36-8)


"따라서 그리스 신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식하는 또 다른 살아 있는 존재가 바로 신입니다. 생명이 부여된 어떤 존재에게 일어난 일은 생명이 있는 또 다른 존재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논의할 필요도 없이 분명했습니다. 종교적 심성을 가진 그리스인은 신들의 힘이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자주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인 자신은 신들이 서로 싸우는 수동적인 전쟁터라고 느꼈습니다. 핀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필멸자의 업적을 이루는 모든 수단이 신에게서 나옵니다. 신들 덕분에 인간은 현명하고 용감하며 유창합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덕목과 악덕, 감정과 열정과는 무관하게 찾아오는 세계, 이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의 종교적 세계입니다. 인간이 당면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호불호를 따라 일어나게 하는 불멸의 존재, 이것이 바로 그리스의 신들입니다."(40-2)


"인간은 단지 무언가만이 아니라 누군가이기에, 그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은 단지 무언가만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 신들은 이러한 절대적 확신을 표현해 주는 원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흙투성이 둑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인 스카만드로스는 강, 즉 사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발 빠른 아킬레우스의 의지에 과감히 맞서는 트로이의 강으로서 그것은 단지 하나의 사물일 수 없습니다. 신화는 진정한 철학으로 가는 도정의 첫 발자국이 아닙니다. 사실 신화는 전혀 철학이 아닙니다. 신화는 참 종교로 가는 도정의 첫 발자국입니다. 신화 그 자체는 종교적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 신화에서 어떤 점진적 이성화 과정을 거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이 세계를 사물들의 세계로 이해하려는 이성적인 시도라면, 그리스 신화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물들의 세계 속의 유일한 인격인 인간이 홀로 남겨지지 않겠다는 굳센 결의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51-2)


"만약 이것이 참이라면,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신의 원리들을 자신의 신들과, 또는 자신의 신들을 자신의 원리들과 어떻게 동일시할지 몰라 헤매는 것을 보더라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둘 다 필요했습니다. 플라톤이 무언가가 참으로 존재 내지 실존한다고 했을 때, 그는 늘 그 본성이 필연적이며 또한 지성으로 알 수 있다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신에 관한 플라톤 고유의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감각 경험으로 알고 있는 것과 유사한 살아 있는 개별적 존재를 상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변적이고 우연적이며, 사라져 없어질 것으로 상상하지 말고, 지성으로 알 수 있고, 불변하며, 필연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머릿속에 그려야 합니다. 이것이 플라톤에게 신입니다. 요약하자면, 플라톤의 신은 이데아의 모든 근본적 속성이 부여된 살아 있는 개별자입니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데아는 신god이라기보다는 신적divine이지만, 여전히 신god이 아닌 이유입니다."(52, 57)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자연신학의 역사에 새 시대를 여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연되었던 철학의 제1원인과 신 개념의 결합이 그의 형이상학 속에서 마침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서 원도자the prime mover는 또한 우주의 최고 신the supreme god이기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에서 정점에 있는 것은 이데아가 아니라 자립적이고 영원한 (신적인) 사유 활동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유하는 순수 활동pure Act은 영원히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최고 신은 우리의 세계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 신은 자신과 다른 세계를 모릅니다. 결과적으로 그 신은 세계 안에 있는 어떤 존재나 사물들을 보살피지도 못합니다." "신은 자신의 하늘에 있습니다. 세상을 돌보는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명백히 이성적인 신학을 얻었지만, 그들의 종교는 잃었습니다."(62-4)


2 신과 그리스도교 철학


"그리스 철학자들은 철학적 가지可知 세계 내에서 신에게 어떤 자리를 줄지 궁리했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이미 철학 고유의 물음에 답을 제공한 신을 발견했습니다." "유대인의 신의 첫 특성은 유일성unicity이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신은 주님이시다. 주님 한 분뿐이시다.〉 이보다 더 적은 단어나 더 단순한 방식으로 이보다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혁명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진술은 원래 본질상 종교적이었지만 중대한 철학적 혁명의 씨를 품고 있었습니다." "(제1원리에 대해 숙고한) 그리스 철학자들은 실재가 하나라고 생각했기에, 다수의 신들을 하나의 실재에 맞추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반면 유대인의 신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실재 자체의 본성이 무엇이든 간에, 실재의 종교적 원리가 실재의 철학적 원리와 필연적으로 일치한다는 점을 즉각 알았을 겁니다. 철학적 원리와 종교적 원리는 하나이기에, 둘은 같아야만 하고 세계에 관한 하나의 동일한 설명을 제공해야 합니다."(69-70)


"엄밀히 말하자면, 일자the One는 기술될 수 없기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일자를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어떠한 판단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판단은 여러 단어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일자의 단일성Unity을 다수성 같은 것으로 바꾸지 않고는, 즉 일자의 단일성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일자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일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일자는 다른 수들로 구성된 것에 포함될 수 있는 하나의 수도 아니고, 다른 수들의 종합도 아닙니다. 일자는 모든 다수성이 거기로부터 나오는 자립적 단일성입니다. 다수성은 이 단일성에서 나오지만, 일자의 절대적 단순성simplicity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일자의 생산성으로부터 제1원리보다는 열등한 제2원리가 태어납니다. 하지만 일자와 같이 제2원리도 영원히 존속하며, 일자와 마찬가지로 뒤따라 나올 모든 것의 원인이 됩니다. 이것의 이름은 지성Intellect입니다."(77)


"지성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영원히 지속하는 인지라는 점에서, 정의상 플로티노스에게 지성은 모든 이데아가 있는 장소입니다. 이데아들은 다수의 알 수 있는 것들의 단일성인 지성 안에 있습니다. 이데아들은 일자의 생산성에서 나온 지성의 생산성에 참여합니다. 요악하자면, 지성은 영원히 자기로부터 흘러나오는 개별적이고 구분된 모든 존재의 다수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거대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성은 신이자 모든 다른 신의 아버지입니다." "다음 속성은 포착하기 더 어렵습니다. 뭔가가 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때는 언제일까요? 이해 행위로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구분된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입니다. 달리 말하면, 실제로 아무것도 이해된 게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존재가 플로티노스 철학에서 제2원리인 지성 안에서, 지성에 의해서, 지성과 함께 처음 나타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것들이 플로티노스식 우주에서 두 가지 최고 원인입니다."(78)


"플로티노스의 철학적 사유는 그리스도교와 완전히 이질적이었습니다. 그 세계는 본질에 따라 엄밀하게 운행이 결정된 자연들로 구성됩니다. 우리가 '그'a He라고 지칭하기가 어려운 플로티노스의 일자만 하더라도 그것a It의 방식에 따라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일자 내지 선은 전적으로 자유롭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은 그에게 의존함으로써 존재하지만, 제1원리인 자신은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기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 안에 충만히 머무는 일자는 자기의 고유한 본성에 의해 엄격히 결정됩니다. 일자는 자기가 존재해야 하는 대로 있을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기가 존재해야 할 바에 따라 활동합니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의 우주는 일자에 의해 모든 것이 자연적이고 영원하고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고, 이는 전형적으로 그리스적입니다. 모든 것이 영원히 일자에게서 일자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파장처럼 흘러나옵니다. 일자는 사유 위에, 존재 위에, 존재와 사고의 이중성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80-1)


"그러나 그리스도교 형이상학에서 신은 그 자체로 있습니다. 아무것도 그에게 더해질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그에게서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가 아닌 이상 그의 존재에 관여할 수 없기에, '있는 나'는 영원히 자기의 완전성과 자기의 복을 충만하게 향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아닌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은 그러한 절대적 실존이라는 영원한 활동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이 존재 내지 실존한다는 것은 신이 존재 내지 실존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이들은 어떤 열등한 종류의 신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전혀 신이 아닌 것으로 있습니다. 이러한 유한하고 우연적인 존재들이 있음을 설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있는 나He who is'로부터 실존을 자유롭게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유한하고 우연한 존재자들은 '있는 나'에 대한 유한하고 부분적인 모방으로서 존재를 부여받습니다. 이 활동을 그리스도교 철학에서는 '창조'라고 부릅니다."(84-5)


"플로티노스의 경계는 일자와 일자로부터 난 것 사이를 나눕니다. 반면, 그리스도교는 신 및 신이 낳은 말씀과 신에 의해 창조된 모든 것을 나누는 경계를 그립니다. '있는 나'와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형이상학적 골이 놓여 있습니다. 본유적으로 필연성이 결핍된 우리의 실존과 달리 신의 실존은 완전한 자기 충족이기에, 그 골은 신과 우리의 실존을 떼어 놓습니다. 신적 의지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것도 이러한 골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오늘날까지 인간의 이성이 초월적인 신에 도달하려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업에 당면한 이유입니다. 신의 순수 실존 활동과 신에게서 얻는 우리의 실존을 철저히 다릅니다. 인간도 자기로부터는 있을 수 없고, 그가 사는 세계도 자기로부터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인간이 어떻게 오직 이성으로만 '있는 나'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자연신학의 근본 문제입니다."(85-6)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Qui est'있는자 (혹은 '있는 나')가 신에게 주어질 수 있는 모든 이름 중 가장 적절한 이름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름이 '존재함'to be, 즉 ipsum esse존재함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라 답했습니다. 그런데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모든 형이상학적 질문 중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에 답하면서, 서로 다르지만 긴밀하게 연결된 두 단어의 의미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만 합니다. 첫 단어는 ens 혹은 존재자being이고, 다른 단어는 esse 혹은 '존재함'to be입니다. '존재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변은 '존재자란 존재 내지 실존하는 것이다'입니다. 예를 들어, 신과 관련해서도 우리가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올바른 답변은 '신이라는 존재자는 영원하고 경계가 없는 실체의 망망대해다'일 겁니다. 그러나 esse 혹은 '존재함'은 이와는 다른 것으로, 실재의 형이상학적 구조에 더 깊숙이 숨어 있기에 파악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95)


"명사로서 '존재자'는 어떤 실체를 지칭합니다. '존재함' 혹은 esse는 활동을 지칭하기에 동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본질essence의 단계를 넘어 실존existence이라는 더 깊은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체substance로 있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본질과 실존 모두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어떤 존재자를 생각하고, 그다음 그 존재자의 본질을 정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판단을 통해 그 존재자의 실존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실재의 형이상학적 순서는 인간의 지식의 순서와 정확히 반대입니다. 여기서는 개별 실존 활동이 먼저입니다. 이는 개별 실존 활동이므로 특정한 본질로 한정하는 활동이며, 동시에 특정한 실체가 있게 하는 활동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 볼 때, '존재함'은 어떤 특정한 존재자가 실제로 존재 내지 실존하게 하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활동입니다. 성 토마스 본인의 표현을 쓰자면, dictur esse ipse actus essentiae, 즉 '존재함'이란 바로 본질이 있게 하는 활동입니다."(95-6)


"'존재함'이 가장 탁월한 활동, 즉 모든 활동 중의 활동인 세계에서, 실존은 존재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든 것이 흘러나오는 근원적 에너지입니다. 그러한 실존 세계는 최고로 실존하는 신 외에 다른 어떤 원인으로도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빛 아래서 이뤄진 형이상학의 결정적인 진보는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인 제1존재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 중의 위대한 이들은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를 사유하는 '사유'를 최고 존재로 상정했을 때, 그는 분명히 그것을 순수 '활동'이자 무한한 힘이 충만한 에너지로 이해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신은 순수 사유 활동이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섭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세계를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사유에 관한 사유였기에 자신이 만들 수 없었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또한 그의 지식에는 '있는 나'라는 자기 인식도 없었습니다."(97-8)


"그리스의 정신은 자연 개념, 혹은 본질 개념을 궁극적 설명으로 간주하고 왜 거기서 자연스럽게 멈췄을까요? 우리 인간의 경험에서 실존은 언제나 개별 본질의 실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개별적이고 감각 가능하게 실존하는 사물들만 직접적으로 압니다." "이러한 사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토록 명확히 그어 놓았던 '존재'being와 '본질'what is의 근원적 구분으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이 다르듯이 본질과 실존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실존은 어떤 사물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 있게 하고 그 사물이게끔 하는 활동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단지 우리 인간의 경험에서 한 사물의 본질이 '있음'인 경우는 없으며 그 본질이 '어떤 특정 사물임'이 아닌 경우도 없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경험에 주어진 사물은 어떤 것도 그 정의가 실존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본질은 실존이 아니고, 실존은 반드시 본질과 구분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102-3)


"주변 어디에나 '있음'이 있고 모든 본성이 다른 본성들을 설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공통적인 실존을 설명하지는 못하는 세계 그 너머에는, '있음'을 자기 본질로 하는 어떤 원인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본질이 순수 실존 '활동'인 존재자, 즉 본질이 이러저러하지 않고 오로지 '있음'인 존재자를 내세우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신을 우주의 최고 원인으로 내세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신인 '있는 나'는 가장 분명히 드러난 신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은 자기 안에 자기 실존을 설명할 길이 없음을 형이상학자에게 계시함으로써, 본질과 실존이 일치하는 궁극의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마침내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가 궁극적으로 만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실존의 형이상학이 실재의 외피에 불과한 본질이라는 껍질을 뚫고 나가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음을 보듯이 순수 실존 '활동'을 볼 수 있었습니다."(104)


3 신과 근대철학


"중세에는 모든 철학자가 사실상 수사나 사제, 혹은 최소한 일반 성직자였습니다. 근대철학은 성직자가 아니라 일반인에 의해, 신의 초자연적 도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적 도시들을 목표로 창조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지혜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한 개인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철학자로서 그는 전혀 다른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 즉, 자연적 이성만으로 얻을 수 있으며 실제적인 현세적 모적을 지향하는, 제1원인들에 의거한 진리 인식입니다. 데카르트는 신학을 억누르면서도 사실 매우 조심스럽게 신학을 보존했습니다. 데카르트가 철학과 신학을 공식적으로 구분하였지만,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 세기 전에 이미 그러한 구분을 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새로운 점은 철학적 지혜와 신학적 지혜를 실제로, 실질적으로 나눴다는 데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둘을 통합하고자 구분했다면, 데카르트는 둘을 떼어놓고자 나눴습니다."(107-10)


"데카르트의 철학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신학에 통제되지 않았기에, 그가 둘의 결론이 궁극적으로 일치하리라고 가정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논리적인 측면에서, 데카르트가 그런 태도를 취해야만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스 철학자의 경우 순수하게 이성적인 방식으로 자연신학의 문제에 접근해야 했을 때 오직 그리스 신화의 종교적 신들만 마주하고서 문제에 접근했습니다. 그리스 종교의 신들은 자신의 이름, 지위, 역할이 무엇인건,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의 유일한 최고 '존재' 혹은 세계의 창조자, 제1원리, 모든 사물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데카르트는 그리스도교의 신과 마주하지 않은 채 똑같은 철학적 문제에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근대의 자연신학의 모든 문제는 한 마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의 역설적 본성을 깨닫는 것이 근대 자연신학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첫 조건입니다."(111-2)


"모두가 데카르트식 과학의 세계가 무엇인지 압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계론적 우주입니다." "데카르트의 신의 궁극적인 철학적 기능은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식 신은 데카르트식 세계의 창조자가 되는 데 요구되는 속성을 모두 소유해야만 합니다. 공간에서 무제한 확장되는 세계인 만큼 창조자는 무한해야 합니다. 그 세계는 순전히 기계적이고, 목적인final causes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 참되고 선한 것이 참되고 선한 까닭은 신이 자기 의지의 자유로운 작정으로 세계를 그렇게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데카르트식 신의 본질은 자신의 철학적 기능에 의해 대부분 결정됩니다. 그 기능이란 데카르트가 그런 기계론적 과학의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일입니다. '창조자'가 현저히 그리스도교의 신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자신의 본질 자체가 창조자인 신은 그리스도교의 신이 전혀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신의 본질은 창조가 아니라 존재입니다."(119-21)


"데카르트식 자연철학은 철학적 이해 가능성의 제1원리인 신으로부터 종교적 예배의 대상인 신을 다시 분리한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한 신은 철학적 원리의 조건으로 환원된 그리스도교의 신이기에 생존할 가망이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종교적 신앙과 합리적 사고의 불행한 혼종입니다. 그러한 신의 가장 놀라운 특성은 그의 창조 기능이 자신의 본질을 완전하게 흡수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후로 붙게 된 이름이 그의 진정한 이름이 됩니다. 이제 신의 이름은 '있는 나'가 아닙니다. 그는 〈자연을 만든 이〉The Author of Nature입니다. 틀림없이 그리스도교의 신은 언제나 '자연을 만든 이'이기도 했지만, 또한 언제나 그보다 무한히 더 큰 신이었습니다. 반면 데카르트 이후 점진적으로 신은 '자연을 만든 이' 외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것이 되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데카르트가 도달한 원리들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형이상학적 결론들은 곧이어 18세기 그의 추종자들의 최종적인 결론들이 되었습니다."(122-3)


"데카르트의 후계자 중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는 스피노자입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하고 말했던 바로 그 신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철학자로서 말한 첫 사람이 스피노자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혹은 실체입니다. 그 신은 〈본질이 실존을 포함〉하기에 자기 원인입니다. 여기서 본질의 우선성이 강렬히 강조되어 있어서, 아무도 그 형이상학적 중요성을 놓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 혹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는 〈실존의 무한한 힘이 자신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존재 내지 실존합니다. 하지만 〈단지 자기 본성nature의 필연성에 의해 실존하고 행동하는〉 신은 자연nature과 다를 바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은 자연 자체입니다. Deus sive Natura신은 곧 자연. 신은 절대적 본질이며 그 본유적 필연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만듭니다. … 종교적 무신론자로서 스피노자는 자신의 철학적 신에 진정으로 취해 있었습니다."(132-5)


"이신론자들Deists 소위 계시된 신의 우화적인 특징을 놓고서는 스피노자와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반면, 그들의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이신론자들에게는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이 자연적으로 알려지는 신이라는 사실에 방점이 있지만, 그들이 철학자들처럼 신을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종교적 예배의 대상으로서, 이신론자의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살아 있는 신의 유령이었을 뿐입니다. 순수한 철학적 사변의 대상으로서, 그 신은 스피노자가 최종적으로 내렸던 사형 선고를 받은 신화에 불과했습니다. 퐁트넬과 볼테르, 루소,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많은 이가 '있는 나'와 더불어 실존의 문제가 가진 참 의미를 망각했습니다. 이로써 목적인의 문제에 관한 가장 얄팍한 해석에 자연스럽게 의존했습니다. 그리고 신은 퐁트넬과 볼테르의 '시계 제작공', 혹은 이 세계라는 거대 기계를 다루는 최고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처럼, 이신론자들의 신은 철학적 신화입니다."(137, 140)


4 신과 현대사상


"오늘날의 신 문제는 칸트의 비판철학과 콩트의 실증주의로 사태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신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선험적 형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신은 인과 관계라는 범주에 따라 어떤 것과 연관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결론짓기를, 신은 이성의 순수 이념, 즉 우리 인식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일반 원리일 수 있으나 인지 대상은 아닙니다. 혹은 우리는 실천 이성의 필요에 따라 요청된 신의 실존을 상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신의 실존은 상정되는 것이기에 여전히 인식된 것은 아닙니다. 콩트는 자신만의 훨씬 더 급진적인 방식을 취했습니다. 즉, 과학에는 원인 개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사태가 '왜' 일어나는가를 묻지 않고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묻습니다. 형이상학의 원인 개념을 실증주의의 관계 개념으로 대체하면, 곧바로 여러분은 사물들이 왜 있으며 사물들이 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가에 대해 경이로워할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됩니다."(145-6)


"파스칼에게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고, 신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를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저 신이 실존한다는 데 내기를 걸 겁니다." "인간 마음은 본성상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데, 반대로 〈지성적 개념을 인격화하려는 마음 깊숙이에 자리 잡은 본능을 피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자연스러운 이성의 판단 결과라고 하든지, 데카르트처럼 본유관념이라 하든지, 말브랑슈처럼 지성적 직관이라 하든지, 칸트처럼 인간 이성의 통합 능력에서 나온 이념이라 하든지, 토마스 헨리 헉슬리처럼 인간의 상상력이 빚은 환영이라 하든지 간에, 신이라는 공통의 관념은 거의 보편적인 사실로 있습니다. 이 관념의 사변적 가치speulative value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실존은 부정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문제는 이 관념의 진리치truth value를 결정하는 것뿐입니다."(151-2)


"그리스도교의 신을 잃어버린 세계는 아직 그리스도교의 신을 찾지 못한 세계를 닮았을 뿐입니다. 탈레스와 플라톤의 세계처럼 우리의 현대 세계도 〈신들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맹목적인 '진화', 명석한 '계통 발생설', 인자한 '진보', 그리고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바람직한 다른 신들입니다. 이 유사 과학적 혹은 사회학적 이념의 신들이 서로 싸울 때 죽는 것은 인간입니다." "우리의 동시대인 중 많은 사람에게 발견되는 곤란함은 그들이 불가지론자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도된 신학자라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불가지론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자기 자신 외에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불가지론자들에게 신이 없는 것처럼, 이러한 것에는 신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불가지론자보다 유사 불가지론자가 훨씬 흔합니다. 이들은 완전히 모자란 철학적 소양에 과학적 지식과 사회적 관대함을 결합하였기에, 자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연신학을 위험한 신화들로 대체했습니다."(170-1)


"참 형이상학의 마지막 단어는 ens가 아니라 esse입니다. 즉 존재자being가 아니라 존재함is입니다. 참 형이상학의 궁극적 노력은 어떤 활동an act을 통해 활동an Act을 상정하는 것, 즉 본질 자체가 존재함이기에 인간의 이해를 넘는 최고의 실존 '활동'을 판단하는 활동입니다. 어떤 사람의 형이상학이 막바지에 이르는 곳에서 그의 종교가 시작됩니다." "과학의 이해 가능한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많은 사람이 형이상학과 종교에 대한 미각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최고 원인에 대한 관조에 몰두한 다른 소수의 사람은 형이상학과 종교가 궁극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지만, 그 방법과 장소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에서 종교를 분리하거나, 철학을 위해 종교를 버립니다. 또는 파스칼처럼 종교를 위해 철학을 버립니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고 오롯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자의 신인 그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신인 '있는 나'임을 깨닫는 사람만이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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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우리 시대의 고전 26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임경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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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목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이며, 내용은 단지 수많은 이미지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더니즘에는 '자연'이나 '존재', 혹은 오래된 것이나 더 오래된 것, 심지어 태고의 것을 위한 자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문화는 여전히 그러한 자연과 관계를 맺으며, 그 자연이라는 '지시대상체referent'를 변형시킬 수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화 과정이 완성되고, 자연이 영원히 사라지는 시점에 나타난다. 이전 시대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전적으로 인간의 세계이지만, 이곳에서는 '문화'가 진정한 '제2의 자연'이 된다. 실제로 문화가 지니는 위상의 변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추적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 문화는 그 영역(즉 상품 영역)이 엄청나게 팽창했고, 실재the real를 끊임없이 그리고 역사적으로 독창적인 방식으로 길들여왔으며, 벤야민이 리얼리티에 대한 〈미학화〉라고 칭했던 과정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일구어냈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문화 속에서 '문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8-9)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 새로운 개념의 근본적인 이데올로기적 과제는 새로운 형식의 관행과 사회적·정신적 습관 들을 최근 자본주의의 변화, 즉 새로운 전 지구적 노동분업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형식의 경제적 생산 및 조직과 연관시키는 작업이어야만 한다." "문화와 경제의 상호 관계는 일방통행로가 아닌 지속적인 상호작용과 피드백의 회로로 상정된다. (베버의 관점에서는) 새롭고 내면 지향적이며 보다 금욕적인 종교적 가치가 점차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냈으며 그 인간이 당시에 부상하던 '근대' 노동과정의 지연된 만족 구조 속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던'은 아주 독특한 사회경제적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포스트모던적 인간을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우리가 이 독특한 사회경제적 세계의 구조와 객관적 특징과 필요조건 들을 적당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현재 상황을 구성하는 틀이 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세계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18)


1장 문화: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빅토리아 시대와 그 이후의 부르주아지들에게 모더니즘의 형식과 도덕적 본질은 추잡하고 조화롭지 못하며 음란하고 수치스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이고 사회 전복적인 것으로, 한마디로 표현하면 '반사회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피카소와 조이스가 더 이상 추잡하다고 여겨지지 않을뿐더러, 전반적으로 그들은 오히려 '리얼리즘적'이라고 받아들여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것이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모더니즘 운동의 정전화 작업 및 학문적 제도화의 결과라는 건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에 대한 가장 그럴싸한 설명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적 성격에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제는 (그것이) 그 누구에게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족감을 통해 수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제도화되어 서구 사회의 공식적 문화 혹은 공공 문화와 한통속이 되어버렸다."(41)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절규」는 소외, 아노미anomie, 고독, 사회적 파편화, 고립 같은 위대한 모더니즘의 주제를 표현하는 정전적인 작품으로, 사실상 불안의 시대라고 명명되었던 시대의 상징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은 이런 종류의 정동을 체현하고 있는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본격 모더니즘 시대를 지배했으나 이제는 실천적인 이유나 이론적인 이유로 인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에서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표현 미학이 해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표현이라는 바로 그 개념은 사실 주체 내부의 분열과 더불어, 안과 밖의 형이상학 전체뿐만 아니라, 단자monad화된 개인의 내면에 서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그것의 '정서'가 카타르시스로서 외부로 투사되고 외화되는 순간의 형이상학을 전제하는데, 그 정서는 몸짓이나 절규로서, 즉 내적 감정에 대한 절망적 소통과 외적 극화를 통해 형상화된다."(54-5)


"그러나 메릴린 먼로나 에디 세즈윅 같은 위대한 워홀의 인물들이나, 저물어가는 1960년대의 악명 높았던 자기 파괴와 소진의 사례들, 그리고 마약과 정신분열이라는 당대의 지배적 경험은 프로이트 시대의 히스테리나 신경증과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또한 급진적 고립과 고독, 아노미와 사적인 반항, 그리고 반 고흐식 광기와도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한 것들은 본격 모더니즘 시대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문화 병리의 역학에서 이러한 급진적 변화는 주체의 소외가 주체의 파편화에 의해 대체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용어들은 어쩔 수 없이 현대 이론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주제 하나를 상기시킨다. 바로 주체의 '죽음'이다. 이는 자율적인 부르주아 단자 내지는 자아나 개인의 종언에 대한 선언인 동시에, 이전의 중심화된 주체와 정신이 '탈중심화'되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탈중심화는 새로운 도덕적 이상일 수도 있고 경험적 설명일 수도 있다."(59-60)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르주아적 자아 혹은 단자가 끝장났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자아의 정신병리학도 함께 사라졌다는 의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정동의 퇴조라 칭했던 것이다. 예컨대 그것은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문체의 종언이며, (기계 복제의 부상으로) 개별 화가의 독특한 붓질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다. 표현과 감정이나 정서의 차원에서 보자면, 현대 사회에서 중심화된 주체라는 오래된 아노미로부터의 해방은 그저 불안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감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자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산물들이 정서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리오타르를 따라 〈강렬함〉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해 보이는 이러한 감정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몰개성적인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희열euphoria에 의해 지배된다."(61)


"개인 주체의 실종과 그것의 형식적 결과로 나타난 개인적 문체의 점진적 소멸은 오늘날 거의 보편적인 관행이 된 혼성모방pastiche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발생시켰다. 어쨌든 이 개념은 보다 일반적인 개념인 패러디parody와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한때 패러디라는 것이 살았다. 그런데 혼성모방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놈이 나타나 그의 자리를 야금야금 빼앗아버렸다. 패러디와 마찬가지로 혼성모방은 특이하고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문체에 대한 모방이다. 그것은 언어적인 가면을 쓰고 죽은 언어로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중립적인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패러디처럼 이면에 숨겨진 동기를 가진 것도 아니고, 풍자적 충동을 가진 것도 아니며, 웃음조차도 결여된 단순한 흉내 내기인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잠시 빌려온 비정상적인 말과 더불어, 건강한 언어적 규범성이 여전히 존재하리라는 확신도 없다. 그런 까닭에 혼성모방은 공허한 패러디이며, 동태눈을 한 동상에 불과하다."(62-4)


"바로 이런 상황들에서 건축사가들에 의해 '역사주의'로 명명된 어떤 것이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역사주의란 과거의 모든 건축 양식들을 무작위로 조립하는 것, 과거 양식들에 대한 무작위적인 인유allusion의 유희로서, 일반적으로는 앙리 르페브르가 〈신neo〉이라는 말이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현상이라고 지칭했던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혼성모방의 이런 편재성이 특정한 종류의 유머와 양립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며, 열정이 완전히 결여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중독성과 양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단순 이미지로 변형된 세계를 향한, 그리고 의사-사건과 (상황주의자들의 용어를 쓴다면) 〈스펙터클〉을 향한, 역사적으로 유례 없는 소비자의 욕망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그것은 바로 플라톤의 용어인 〈시뮬라크럼simulacrum〉, 즉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 동일한 복제본을 향한 욕망이다. 기 드보르의 말로 표현하자면, 그러한 사회에서는 〈이미지가 상품 사물화의 최종 형식이 된다〉."(65-6)


# 인유引喩 : 비유의 형식을 취한 인용


"'지시 대상체'로서의 과거는 끝내 모두 소멸하고 오로지 텍스트만 남게 된다. 그러하기에 문화 생산은 이제 정신적 공간으로 쫓겨나는데, 이때 정신적 공간이란 오래된 단자화된 주체가 아닌 어떤 퇴락한 집단의 '객관적 정신'의 공간이다. 그것은 추정적 실제 세계를, 한때는 그 자체로 현재였던 과거 역사의 재구성물을 더 이상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다. 오히려 플라톤의 동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꽉 막힌 동굴 벽에 투사된 과거의 정신적 이미지만을 추적해야 한다. 여기에 혹여 약간의 리얼리즘이 남아 있다면, 이는 동굴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충격으로부터 파생되는 '리얼리즘'일 것이며, 또한 우리가 대문자 역사History를 우리 자신이 만든 대중적 이미지와 시뮬라크럼을 통해서 추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은 이 새롭고 유례없는 역사적 상황을 조금씩 인지함으로써 느끼는 충격으로부터 나오는 '리얼리즘'일 것이다. 역사는 이제 영원히 우리가 미칠 수 없는 곳에 위치하게 된다."(79)


2장 이데올로기: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


"미학 논쟁이라는 이름하에 진행되었던 대부분의 정치적 입장들은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에 대한 최후의 심판을 발전시키기 위한 도덕적 입장이었다. 다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타락한 것이냐 아니면 문화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건전하고 긍정적인 혁신의 한 방식이냐 하는 문제를 도덕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진정으로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으로 분석하려면,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존재하고 투쟁하고 있는 시간적 현재와 역사적 현재의 문제라면, 우리는 절대적인 도덕적 심판이라는 곤궁한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변증법은 손쉽게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다는 의미에서의 〈선과 악을 넘어서〉며, 그것의 역사적 비전은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정신에서 비롯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속에서' 살고 있기에, 그것을 손쉽게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손쉽게 찬양하는 것 역시 자기만족적인 타락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143-4)


"새로운 형식의 부상에는 예전의 민속folk 문화나 진정한 의미의 '민중popular' 문화와는 구별되는 상업 문화의 특징들이 점차 보편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특징들은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급문화와 소위 대중문화 사이의 고전적 구별이 소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유지하고 더불어 중간계급과 하층계급의 상업 문화라는 주변 환경에 대항하여 진정한 경험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기능을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그 구별 말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최근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예전 플로베르가 시작했던 방식으로 대중문화나 민중 문화의 질료와 단편 혹은 모티프를 '인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내용들을 자신의 작품 속에 스며들게 만들어 이전의 많은 비판적 범주나 평가 범주 들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게 만든다."(145-6)


3장 비디오: 무의식 없는 초현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만개한 오늘의 상황에서 (예술 작품이나 걸작과 같은 말에서 사용되는) '작품work'이라는 고전적인 언어는 모든 곳에서 거의 대부분 '텍스트' 혹은 텍스트들과 텍스트성이라는 상당히 다른 언어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유기적이고 기념비적인 형식의 성취라는 의미가 전략적으로 배제된 언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일상생활, 몸, 정치적 재현 등)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는 반면, 예전에 '작품'이라고 칭해졌던 대상은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들의 거대한 집결체나 체계로 재해석되며, 이 체계에서는 다양한 상호텍스트들과 파편의 연속 아니면 그저 (이후 텍스트 생산 혹은 텍스트화라 불리게 될) 순수 과정을 통하여 각각의 텍스트들이 서로 포개진다. 따라서 자율적 예술 작품은 예전의 자율적 주체나 자아와 더불어 사라졌거나 증발한 것처럼 보인다. '실험적 비디오텍스트'를 통해, 분석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모든 포스트모더니즘을 특징짓는 새롭고 특이한 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172-3)


"예전의 모더니즘적이고 기념비적인 형식들, 예컨대 세계의 책the Book of the World이나 건축 모더니즘의 '마의 산들magic mountains', 바이로이트에서 공연되는 신비한 오페라 연작, 모든 회화적 가능성의 중심지로서의 박물관 등과 같은 총체적 앙상블이 더 이상 분석과 해석을 위한 기본적 조직화의 틀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정전이나 '위대한' 책은 고사하고 걸작도 존재하지 않는다면(심지어 양서良書라는 개념마저도 문제시된다면), 그리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것이 고작 '텍스트'라고 한다면, 즉 역사적 시간의 조각난 파편 더미 속으로 곧장 사라져버릴 하루살이와도 같은 일회적 작품들이라고 한다면, 흩어져가는 파편들 중 하나를 잡아 이를 중심으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순적인 일이 되고 만다." "따라서 단 한 편의 (실험적) '비디오 작품' 자체만을 따로 떼어내어 바라보는 것은 정말 무의미하다. 그런 의미에서 비디오 걸작이나 비디오 정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173-4)


"비디오텍스트 자체의 거의 모든 순간이 이런 요소들(각종 문화적 기호·로고들) 간의 끊임없고 명백히 무작위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이는 다양한 요소의 지속적인 흐름 혹은 '총체적 흐름'을 이해해야 하는 문제로, 이 다양한 요소는 각각 하나의 구분되는 서사 유형이나 특정 서사 과정에 대한 속기 부호 같은 것이다." "그 어떤 비디오의 기호들도 의미 작용의 주체로서 우선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나의 기호가 다른 기호를 위한 해석체로 기능하는 사태 자체가 단지 임시적인 것을 넘어서며,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자리 교환이 일어날 수 있다. 이 끊임없는 순환 운동의 힘 속에서, 두 개의 기호─주어와 술어라는 논리적 관계가 주제topic와 논평comment 혹은 주지tenor와 매체의 관계vehicle로 재편된─는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혼란을 야기하며 거의 항구적으로 자리를 교환한다. 이는 벤야민적인 의미에서의 〈정신분산〉 같은 것으로, 벤야민은 이를 새롭고 역사적으로 독창적인 힘으로 격상시켰다."(187-90)


"여기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과란 다름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해석이라는 난처한 문제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인 미학적 가치와도 관련된 것으로, 이는 우리 논의의 출발점에서부터 잠정적으로 논의 대상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만약 해석을 주체적인 측면에서 어떤 근본적인 주제나 의미를 풀어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분명 포스트모더니즘 텍스트는 의미에 저항하는 구조 혹은 기호의 흐름으로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가지는 근본적인 내적 논리는 그런 의미에서의 주체의 발생을 배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통적인 해석을 향한 유혹을 체계적으로 단락短絡시키려 시도한다. 이 주장으로부터 예기치 못하게 미학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평가 기준이 부상하게 된다. 즉 비디오텍스트가 제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만일 그 텍스트가 해석 가능하다면, 또 혹여 그 텍스트가 그런 주제화의 장소와 영역을 느슨하게라도 열어놓는다면, 그 텍스트는 나쁘거나 흠결 있는 것이 된다. "(96-7)


4장 건축: 세계체제의 공간적 등가물


"모더니즘에는 낙체 법칙이 작용하며, 따라서 (프로이트의 에로스처럼) 끌어당기는 힘을 통해 요소들을 하나의 덩어리로 결합시키고자 했다면, 이와는 근본적으로 기조를 달리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은 해결책으로서 일종의 반중력성을 통해 건축의 각 요소와 성분 들을 공중에 붕 뜨게 만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내적 차이화가 포스트모던 공간의 근본적 징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와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원심력 운동보다는 긍정적인 관계의 원리를 암시하는 듯하며, 또한 유기체가 이물질에 반응하면서 일종의 격리 공간이나 완충지대로 끌어들여 그것을 둘러싸고 중화시키는 방식 같은 것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물질은 대개 그저 과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외래 물질 혹은 외계 물질로 취급받는다. 그러하기에 나는 건축가들의 용어를 빌려, 이 두 번째 절차를 '포장wrapping'이라 부르고자 한다."(214)


# 낙체 법칙 : 지표면 위의 같은 높이에서 자유 낙하하는 모든 물체는 질량과 무관하게 동시에 떨어진다는 법칙


"포장이란 헤겔이 〈토대ground〉라고 불렀던 보다 전통적인 개념의 와해에 대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토대는 '콘텍스트'의 형식으로 인문학적 사유에 들어오는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올바르지 못한 '외부적인 것' 혹은 '외연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일단의 사유와 절차라는 이중 잣대를 암시하는 듯 보이며, 더욱이 그것은 언제나 좀더 거창하면서도 훨씬 더 용인될 수 없는 사회적 총체성 개념의 도입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포장은 조금 더 하찮은 (따라서 즉각적으로 처분 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는 상호텍스트성과는 달리 (하나의 요소를 다른 하나에 기능적으로 종속시키는, 종종 '인과율'이라 칭해지는) '우선순위' 내지는 심지어 '위계질서'라는 본질적인 전제조건을 유지하면서도 이따금씩 그것을 전도시킬 수도 있다. 포장되는 것이 포장지로 사용될 수도 있고, 결국에는 포장지가 포장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214-5)


5장 문장: 글 읽기와 노동분업화


"누보로망은 우리가 평소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언어 기능의 예상치 못했던 붕괴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즉 말과 사물 사이의 특권화된 관계가 말의 일반성과 대상의 감각적 특수성 사이에 벌어진 간극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다." "가령, 언어의 1차적 기능에서 명사는 이름으로 기능하도록 요청된다. 고유한 이름은 분명히 특정 단어를 하나의 고유 대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보로망과 더불어, 거의 동시적으로 우리는 레비-스트로스로부터도 교훈을 얻을 수 있는데, 이는 〈고유한 이름〉이라는 것 자체가 부적절한 명칭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고유한 이름 역시도 (개, 경주마, 사람, 고양이 등과 같은) 종적 대상에 따라 변화해왔던 더 큰 언어 체계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당히 확고해 보였던 이런 언어적 가능성, 즉 말이 한낱 일반명사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특정 수준의 구체성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270-1)


"헤겔의 『정신현상학』 역시 언어 자체의 능력으로 보편과 특수, 일반과 구체 사이의 근본적인 철학적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의심을 다루고 있다. 헤겔의 변증법 개념은 다소 전前 언어적(혹은 적어도 시대착오적이거나 전前 구조주의적)인 것이며, 특히 그의 변증법은 논리적 혹은 개념적 이율배반과 모순이 마치 언어에 선행하고 또한 언어적 속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인 양 동원하고 있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된다. 그러한 판단은 의식(감각적 확신, 지각, 힘과 오성)을 다루고 있는 『정신현상학』의 서론의 의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이 서론의 의도는 처음부터 언어와의 거래를 청산하면서 보편과 특수를 설정함에 있어 언어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변증법적 필연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에 구조주의가 언어에 대해 그 어떤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할 수 있다고 느낄지라도, 중요한 것은 이런 전통도 그 출발점이 그런 언어의 실패에 대한 숙고라는 점을 알아내는 것이다."(272)


"누보로망에서 글 읽기는 상당한 전문화를 거쳤으며, 산업혁명 초기의 옛날 수공업 활동과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노동분업화의 원칙에 따라 다양한 구별되는 과정들로 분해되었다. 이런 내적 분화diffentiation와 예전의 통합된 생산과정 분야들에 적합해진 자율성은 테일러화, 즉 계획과 분석을 통해 다양한 생산 관계를 독립적 단위로 분리하는 과정을 통해 두번째 질적 도약을 하게 된다. 글 읽기라는 오래됐지만 딱히 전통적이라 할 수 없는 활동은 유사한 역사적 발전에 영향받기 쉬운 일종의 수공업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니클라스 루만은 이러한 분화에 대해 가장 발전되고 전문화된 이론적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분화는 원래 체계가 가지는 정체성을 다수의 내적 체계들과 그와 연관된 환경들로 쪼갬으로써, 원래 체계의 특화된 판본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체계 자체를 재생산한다. 이것은 단순히 조금 더 작은 덩어리들로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내적 분리를 통한 성장이다.〉"(274-5)


6장 공간: 유토피아의 종언 이후 유토피아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어떤 체계적인 설명도 그것이 성공을 거두는 순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역사성의 소멸과 같은 이 새로운 문화적 지배종의 반反정치적 특성을 강조하고 구별해낼수록, 그만큼 더 우리는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되고 그러한 문화의 재정치화는 선험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총체화된 설명은 언제나 다양한 형식의 대항문화를 위한 공간을 포함하게 마련이다. 여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잔여적인 혹은 새로이 부상하는 문화 언어를 위한 공간도 존재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단지' 문화적 지배종에 불과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문화적 '헤게모니'의 차원에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장에서의 거대하고 단일한 문화적 동질성을 암시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제압하고 포섭해야 하는 다른 지향적이고 이질적인 세력들이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할 뿐이다."(309-10)


"그런데 유토피아라는 말은 어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과 어떤 시대 구분에 대해서도 자신만의 구체적인 문제를 상정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대니얼 벨이나 세이무어 마틴 립셋 같은) 1950년대 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후기산업사회〉와 더불어) 발전시켜 공표했던 최종적인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그 궤를 같이 하는데, 이 주장은 1960년대에는 극적이게도 '오류로 판명'되었다가, 1970~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현실화'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를 의미했으며, 그것의 '종언'은 유토피아의 종언을 동반했다." "벤투리의 〈아이러니〉부터 아킬레 보니토-올리바의 〈탈이데올로기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중요한 포스트모더니즘 선언문은 그와 유사한 발전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신념'의 퇴색과 더불어, 본격 모더니즘과 '정치'(즉 마르크스주의)라는 두 절대자의 쇠퇴를 의미하게 되었다."(311)


"포스트모더니즘 회화가 최근의 신新구상화를 통해 회화의 예전 (모더니즘의) 유토피아적 소명을 포기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점은 처음부터 분명하다. 포스틈던 회화는 더 이상 (위대한 모더니즘의 초미학적 핵심을 포함하여) 자신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상실한 채, 그리고 일종의 목적telos으로서의 회화적 형식의 역사로부터 해방됨으로써, 회화는 이제 자유롭게 〈모든 과거 언어의 가역성을 옹호하는 노마드적 태도〉를 따를 수 있다." "이 주장 속에 내포되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건의 다른 특징은 당연히 우리에게 친숙한 '주제의 죽음', 개성의 종말, 새로운 익명성 속에서의 주체성의 약화이다. 그런데 이는 청교도적 의미에서의 소멸이나 억압은 아니다. 아마도 그것은 정신분열적 흐름flux이나 노마드적 해방으로 찬양되어왔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정신분열증이 없는 정신분열적 예술이고, 선언문이나 전위성을 상실한 '초현실주의'이다."(334-6)


7장 이론: 포스트모던 이론적 담론에서 내재성과 유명론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내가 지닌 '특수한' 상황이라는 핵심적 요소는 언제나 타인들에게는 내가 처해 있는 '일반적' 범주로 여겨진다." "이것은 사실상 개인의 내재성이 특정한 초월성과 긴장 관계에 있다는 의미이며, 이 초월성은 외관상 외부적이며 집단적인 이름표와 정체성이라는 형식을 띤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론적 형식의 '부정'은, 무엇보다도 초월적 차원이 경험적 소여가 아니며 진정한 존재론적 혹은 개념적 지위도 갖지 않기 때문에, 그런 [초월적]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누구도 그러한 집단을 본 적도 직접 경험한 적도 없는 반면에, 그들에게 붙여진 ~주의란 고작해야 너무나 낡은 전형이나 아주 불분명한 일반화의 사고와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사회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혹은 문학사에서 '모더니즘' 같은 개념은 개별 텍스트에 대한 매우 상이하고 질적으로 차별적인 독서 경험을 표현하는 조악한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356-7)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사상과 문화는 심각하게 '유명론적nominalist'이며,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이전의 어떤 것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그러하다. 그러나 시대정신이 어떤 식으로건 통제한다고 하더라도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오히려 너무나 편재해 있어서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후기자본주의의 엄청난 체계화와 획일화의 힘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텍스트성은 다른 학문 분과의 연구 대상을 재구성하고, 골칫거리인 '객관성' 개념을 유예시키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 연구 대상을 취급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정치권력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가 되었다. 일상생활도 산책이나 쇼핑을 통해 활성화되고 해독되어야 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소비 상품도 상상 가능한 여러 다른 '체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텍스트 체계로서 탈신비화되었다. 결국에는 몸 자체가 심층의 충동과 감각기관 들과 더불어 여타의 텍스트처럼 완전히 읽힐 수 있게 되었다."(357-8)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회사상을 예견하고 있었던 레비-스트로스는 대문자 사회Society와 같은 허구적인 총체적 실체를 설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한 총체적 실체하에서는 가족, 계급, 일상생활, 시각적인 것, 내러티브 등 각종 유형의 보다 지엽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이 유기적이고 위계적인 방식으로 정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다른 종류의 허구적인 (혹은 초월적인) 실체를 창안해냈기 때문인데, 이를 통해 그는 친족 관계, 마을 구성, 시각 형식 등 여러 독립적인 '텍스트들'을 어느 정도 '동일한' 것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그 허구적인 실체가 바로 '상동성homology'의 방법이다. 다양한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텍스트들'이 서로 뚜렷이 구별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런 모든 텍스트에 작동하고 있는 추상적 '구조'로부터 분리될 수만 있다면, 각각의 구체적인 내적 역동성에 따라 각각의 텍스트들을 상동적인 것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된다."(359-60)


"원리적으로 보면 구조 '이론'은 상동성을 방법론으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면서,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는 개념의 설정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렇다면 친족 구조는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마을의 공간적 구성보다 더 근본적이거나 인과적으로 우선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다양한 하위 체계들 간의 무관계성이나 비위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외부 범주가 요구되는데, 이는 바로 '구조' 그 자체이다. 내 생각에 '구조주의'의 영향력(그리고 그것이 열어놓은 새로운 분석 방법의 엄청난 풍요로움)은 구조 개념이라는 기능적 핑계거리를 만든 것보다는, 상동적인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는 데에 있다. 사실 구조는 구조주의의 철학적 전제였으며 또한 기능적 허구(혹은 이데올로기)였다. … 즉 상동성은 지나치게 애매한 종류의 일반적 공식을 위한 핑계였으며, 전적으로 다른 규모와 속성들을 지닌 실체들 사이에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떤 깨달음도 주지 못했다."(360)


"푸코처럼 '총체적 체제'를 만들어내는 이론가들에게는 언제나 저항이 체제 내에 포섭되기 마련이다. 즉 푸코가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체제가 총체화하려는 경향을 갖는다면, 그 체제 내에는 〈혁명적인〉 충동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국지적인 저항들이 포섭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 체제의 내재적 역동성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는 여전히 체제에 저항하는 일종의 국지적인 게릴라전을 실천하고 지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누군가는 푸코가 '욕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시장의 '유혹'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딜레마에 대해 가장 극적이고 '편집증적인 비판'을 표한 사람은 보드리야르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반역과 혁명 그리고 심지어 부정적 비판이라는 의식적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체제에 의해 〈포섭〉되지 않고, 오히려 체제의 내적 전략에 필수적인 기능적 일부가 된다. 이 중 1980년대 미국에서 살아남은 것은 소비와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이다."(386-7)


8장 경제: 포스트모더니즘과 시장


"담론 분석의 개념적 틀은 오늘 비록 포스트모던 시대에 이데올로기 분석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고도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해주지만, 그것은 프루동주의자들의 공상만큼이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개념/의 차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선 그것을 '담론'이라고 부르면, 이 차원은 잠재적으로 리얼리티와 무관한 상태에서 그 자체로 부유하면서 자신만의 하위 학문 분과를 만들고 그에 대한 전문가를 양성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시장/을 있는 그대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소ideologeme라 부르고, 우리가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해 전제해야만 하는 것을 그에 대해서도 전제하고 싶다. 즉 불운하게도 우리는 개념뿐만 아니라 리얼리티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야기해야만 한다. 시장 담론은 단지 레토릭에 불과한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제대로 하려면 우리는 형이상학, 심리학, 광고, 문화, 재현과 리비도적 장치만큼이나 실제 시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490)


# 언어학에서는 빗금(/)과 괄호(《》)를 사용하여 주어진 말을 '단어'나 '관념'으로 표시한다.


9장 영화: 현재에 대한 향수


"사실 역사성은 과거에 대한 재현도, 미래에 대한 재현도 아니다(비록 역사성의 다양한 형식이 그런 재현을 '사용'하지만 말이다). 역사성은 우선적으로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한 인식으로 정의된다. 즉 그것은 현재와의 관계로서, 이는 어떤 식으로든 현재를 낯설게 하고 우리에게 직접성으로부터의 거리를 허락하는데, 그 거리가 결국 역사적 관점이라 규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특정 사회와 생산양식 내에서 우리가 역사성을 상상하는 방식, 바로 이런 작업의 역사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물화 과정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몰되어 있는 (아직 '현재'로 구별되지 않는) 지금 여기로부터 뒤로 물러나 그것을 일종의 사물처럼, 즉 단지 '현재'일 뿐만 아니라 1980년대 내지는 1950년대라고 시대를 명시하고 부를 수 있는 현재로서 파악한다는 것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사물화는 이를테면 실천praxis의 한 형식으로 완화되고 재생된다."(524-5)


10장 결론: 이차 가공


"모더니즘의 '고전들'은 '텍스트성의 선구자가 될 수 없을지 몰라도 (다시 쓰기를 통해) 분명 포스트모던화되거나 '텍스트'로 변형될 수는 있다." "레몽 루셀, 거트루드 스타인, 마르셀 뒤샹 같은 선구자들은 어색할지언정 항상 모더니즘의 정전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들은 어떤 경우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동일성을 드러내는 범례이자 목격자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약간의 수정을 가함으로써, 즉 의자를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약간의 도착적인 숨결을 덧붙임으로써, 가장 고전적인 본격 모더니즘의 미학적 가치를 불편하고 거리감 있는 (하지만 우리와는 좀더 가까운!) 어떤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대립 내에 또 다른 대립, 즉 미학적인 부정의 부정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더니즘 예술은 이미 반反헤게모니적이고 소수자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모더니즘에 대항하여 자신들만의 보다 심화된 소수자적 태도로 사적인 반항을 무대화한다."(558)


"다양한 모더니즘은 새로움, 혁신, 오래된 형식의 변형, 치료법적인 성상 파괴, 그리고 새롭고 (미학적이며) 경이로운 기술 공정에 대한 그것들 특유의 형식적 고집을 통해 근대화의 가치와 경향 들을 복제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종 근대화에 대한 격렬한 반작용을 구성한다. 예를 들어 만약 근대화가 산업의 진보, 합리화, 보다 효율적인 작업 공정에 따른 생산과 경영의 재조직화, 전기, 조립라인, 의회 민주주의, 그리고 값싼 신문과 관련이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예술적 모더니즘의 한 갈래는 반反근대적이며, 오늘날 가장 넓은 의미에서 기술의 발전이라고 파악될 수 있는 근대화에 대항하여 때로는 요란하고 때로는 숨죽인 항의의 한 형태로 등장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할 것이다." "다양한 모더니즘 이상으로 다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몹시 다르지만, 적어도 한 가지만은 공유한다. 바로 시장 자체에 대한 노골적인 찬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대해 공명하며 긍정하는 것이다."(562)


"덧붙이자면 포스트모던으로부터 상실된 것은 또한 '모더니티' 자체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더니티라는 단어는 모더니즘이나 근대화와는 구별되는 특수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사실 여기에서 우리의 오랜 친구인 토대와 상부구조가 운명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듯하다. 만일 근대화가 토대에 발생한 무언가라면, 그리고 모더니즘이 그러한 양가적 발전에 대한 반작용으로 상부구조가 취한 형식이라면, 아마도 모더니티는 그들의 관계로부터 일관성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의 특징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그런 경우에 모더니티는 '근대'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꼈던 방식을 설명해줄 것이다." "이러한 근대적 감정은 이제 우리 자신이 어느 정도 새롭다는 확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확신, 그리고 모든 것이 가능하며 그 어떤 것도 다시는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확신 속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어떤 것도 예전과 같지 않길 바라며, '새롭게 하길make it new' 바란다."(571-2)


"일단은 모더니즘 시대의 대문자 새로움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은 오직 그 시대의 뒤엉켜 있고 불균등하며 전환기적인 성격, 다시 말해서 옛것이 이제 막 태어난 새것과 공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결론을 내려보자. 아폴리네르의 파리에는 중세의 더러워진 기념비와 르네상스 시대의 비좁은 공동주택과 더불어, 자동차와 비행기와 전화와 전기뿐만 아니라 의류와 문화에서의 최신 유행이 공존하고 있었다. 후자를 새롭고 근대적인 것으로 알고 경험하는 이유는 오직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 또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이행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 가지 방식은, 근대화가 결국 어떻게 승리했고 옛것을 완벽하게 지워버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은 전통적인 시골과 전통적인 농업과 함께 폐기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새로움이라는 범주는 이제 자신의 의미를 상실하고 그 자체로 모더니즘의 유물이 되었다."(573-4)


"우리가 형이상학적으로 일종의 국지적 정치라 부를 수 있는 시의적절한 개혁이나 일상의 투쟁으로 눈을 낮출 경우, 이는 핵심 쟁점을 포스트모던 정치학에 위치시키는 일이다. 예전의 정치는 국지적인 투쟁과 전 지구적인 투쟁의 조화를 추구했다. 즉 국지적인 투쟁이 전체적인 투쟁 자체를 대표하고, 그에 따라 변형된 전체적인 투쟁이 지금-여기에 현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는 이러한 두 층위가 조화를 이루어야만 작동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편으로는 각 층위가 구체성을 벗어나 손쉽게 국가를 위한 혹은 국가를 둘러싼 관료화되고 추상화된 투쟁으로 분리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근접한 쟁점들의 무한한 연속체 속으로 밀려 들어가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런 '나쁜 무한성bad infinity'이 나타나며, 여기에서는 이것이 유일한 정치 형식으로 남아 니체적인 사회진화론 같은 무언가와 더불어 형이상학적 영구혁명이라는 의도된 행복감을 부여받는다."(604)


"내가 보기에 그러한 행복감은 보상의 구성체이며, 이런 상황에서는 당분간 진정한 (혹은 '총체적인') 정치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아울러 정치의 부재 속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 지구적 차원인데, 이는 정확하게는 경제 자체의 차원 혹은 체제의 차원이다. 즉 국지적인 수준에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사기업과 이윤 추구의 차원이다. 또한 나는 전 지구적 차원의 가시성visibility의 약화 같은 징후와, 총체성 개념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저항, 그리고 포스트모던적 유명론의 인식론적 칼날에 대해 바짝 경계하며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정치적으로 생산적이면서도 그 자체로 진정한 정치의 소박한 형식이 될 것이라 믿는다. 특히 유명론의 인식론적 칼날은 경제적 체제와 사회적 총체성 같은 명백한 추상들을 잘라버리고, 결국에는 '구체자concrete'에 대한 예기를 '단순 특수자mere particular'로 대체하여, (생산양식 자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일반자general'를 가려버리기 때문이다."(604-5)


"소집단과 차이의 이데올로기는 철학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독재를 향해 제대로 된 한 방을 날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진짜 공격 목표가 다소 다른 것일 수도 있다. (토크빌이라면 여전히 '독재'라고 규정지었을 법한) 그것은 바로 합의consensus다." "계급은 몇 되지 않는다. 이들은 생산양식의 점진적 변화 속에서 등장한다. 심지어 계급이 부상할 때조차도, 그것은 언제나 본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그것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면에 소집단은 심리적 정체성이라는 만족감을 제공해주는 듯하다. 이제는 이미지가 되어버린 소집단은 자신들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와 박해와 불가촉천민의 기억을 상실하고, 현재에는 소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미디어와 맺는 관계를 특징짓는다. 말하자면 정치적 의미에서건 기호학적인 의미에서건, 미디어는 완전히 그들의 의회이자 그들을 '재현/대표'하는 공간이다."(621, 632)


"합의에 대한 정치적 공포는 한때 '총체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해받았으나, 이제는 단순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정한 자부심을 갖게 된 소집단들이 타 집단에 불과한 사람들에게 명령받는 것을 정당하게 거부하는 정도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의 사회 현실 속의 모든 것이 특정 집단 구성원을 표시하는 이름표이며, 특정 무리의 사람들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는데, 미디어와 시장이 그것이다. 여러 제도 중에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시장만이 어느 정도 보편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다른 방식으로 독특하게 특권적인 것이 되었다." "따라서 그 소집단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인물과 재현은 정의상 더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물론 이것은 부르주아나 사회주의 혁명의 역사에 대한 비전이나 (리오타르가 설명했던) 〈주인서사〉를 문제시하는 것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인서사는 '역사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는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6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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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지구 생성부터 기후 재앙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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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구세계와 신세계의 융합(1500년 무렵~1700년 무렵)


"'구세계'가 '신세계'를 차지하는 과정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생태계를 바꾸고 인간의 정착 형태를 변화시킨 자원을 이용하고 개발하고 소비하는 과정이었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고 추출하고 식품, 광물, 자재, 상품을 돈을 지불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수송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을 배치한 결과다. 그것은 다시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의 동력을 제공했다." "그 결과는 세계 제국(유럽에 중심을 둔)의 창설이었다. 그것은 상품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는 것이었다. 지리적 경계를 확장해 더 많은 천연자원(광물의 형태든 농작물의 형태든)을 차지하고 개발하는 것이었다." "물건을 구하기 쉽고 가격까지 떨어지니 그 자체로서 좋은 점이 있었다. 접근성이 확대되면서 그것이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데 이바지하고 유럽 주민들의 '근면혁명'에 매우 적합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 주민들은 갈수록 많은 양의 상품을 갈수록 싼 값에 살 수 있게 되어서 가처분 재산이 늘고 소유권 잔치에 더 많이 참여하는 순환을 가져왔다."(472-3)


"생물 혁명의 충격은 너무도 광범위해서 일부 역사가들은 여기에 일종의 '생태 제국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토착 생물군이 새로운 습관, 생활방식, 요구를 가진 새로운 사람들의 도래로 인해, 그리고 그들이 데려온 가축으로 인해 자리를 빼앗기고 변형됐다. 그 가축들의 〈식습관, 짓밟는 발굽, 배설물, 그리고 그들이 가져온 잡초성 초목의 씨앗들〉이 식민화된 지역의 〈토양과 식물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유럽인들은 '큰 가방 생물상'을 가지고 왔다. 재배 농작물과 가축(그것들이 퍼져 토종 동식물과 함께 자랐다)에 더해 잡초, 씨앗, 해충 역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병원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부 유럽인들은 토착민들이 그들의 신앙 체계 때문에 신에 의해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대응책은 현지 주민들에게 강경한 종교 생활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한 개별 선교 사제들에게 신도를 보살필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원을 호소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480-2)


"'신세계'의 생태적 이점은 초기 대서양 횡단 무역의 핵심 요인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설탕이었고, 이어 담배가 뒤를 따랐다. 담배는 거의 기적적인 약효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정착과 식민화는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양자는 새로운 환경의 개발,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러나 핵심은 심고 기르고 거두고 땅의 과실을 가공할 수 있는 노동력의 확보 가능성이었다. 이는 특히 환금작물에 중요했다. 노동집약적이고 연중 계속되는 과정이었다. 유럽에서 새로 온 사람들은 처음부터 설탕 생산의 분명한 해법은 강제노동과 노예 사용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인 정착자들은 질병과 기타 요인에 의한 인구 재난의 첫 번째 파도가 닥치기 전에도 노동력을 늘리는 일에 집착했다. 여기에 중요했던 것이 '농장 복합체'의 개발이었다. 이런 곳들의 경제적·생태적 이용에서는 서아프리카 노예 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487-9)


16장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다(1650년 무렵~1750년 무렵)


"당시의 마음가짐은 고전기 세계의 관념과 영향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유럽인들은 이제 자기네가 그 진정한 상속자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는 〈온화한 땅은 온화한 사람을 낳게 마련이다〉라고 생각했다." "몽테스키외는 1784년 〈법의 정신〉에서 그 견해를 비틀어 사람들은 〈추운 기후에서 더 활발〉하고 〈더 자신감을〉 드러내며, 더 〈용감〉하고 〈자신의 우월성〉을 더 잘 인식한다고 썼다. 따뜻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서다." "이런 단호한 언설은 북유럽의 추운 날씨가 어떻게 유럽의 세계 제국들을 건설했는가에 대한 정당화와 설명을 찾아내려는 노력에 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또한 인종에 대한 관념과 유럽인들이 먼 나라, 먼 대륙의 다른 민족과 문화를 지배할 권리에 대한 관념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과 달리 더운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명한 입법자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몽테스키외는 말했다."(504-5)


"열대열 말라리아는 노예무역과 연관된 독립적인 여러 경로로 들어와 카리브해와 남아메리카에 자리를 잡았다." "말라리아의 확산은 세 개의 변수에 의존한다. 즉 기생충 자체, 모기, 기후다. 모기 가운데 몇몇 종은 다른 어떤 척추동물보다 인간에게서 피를 빨기를 좋아한다. 기후 자체는 모기 서식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모기는 번식하고 살아남고 확산되는 데 충분한 물과 충분히 더운 온도를 필요로 한다. 1681년과 1683~1684년, 그리고 다시 1686~1688년에 대규모의 엘니뇨 현상이 일어났다. 이 상관관계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이 같은 기상 이변이 열대열 말라리아가 문턱을 넘어 북아메리카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는 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의문을 품게 되었다." "따라서 식민 정착자들에게 아프리카 인력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었다. 구매자들은 노예를 아무 곳에서나 사고 싶어 하지 않았고, 아프리카에서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의 출신을(그래서 이 병에 저항력을 갖춘) 선호했다."(510-2)


"(카리브해의 농장복합체에서) 유럽으로 수입되는 설탕의 양이 늘면서 당연히 가격은 급격히 떨어졌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설탕을 소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회의 상호작용에 대한 그 영향은 매우 컸다. 18세기의 한 파리 사람은 이렇게 썼다. 〈중산층 가정에서 손님에게 커피를 내놓지 않는 경우는 없다. 가게 주인이든 요리사든 하녀든 아침에 커피와 우유를 곁들여 식사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수도의 공공 시장과 특정 거리 및 골목에서는 여자들이 대중에게 자기네가 카페오레(우유커피)라 부르는 것을 판다고 내세운다.〉 이런 상호작용들은 단지 삶의 질 개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교환, 혁신, 협력에도 중요했다. 예를 들어 찻집과 커피점이 증권거래소의 발전, 보험산업의 발전, 정치적 토론의 발전과 계몽시대(이야기의 필수적인 부분인 파종하고 수확하고 채굴한 사람들의 공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쇄매체의 보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517-20)


17장 소빙기(1550년 무렵~1800년 무렵)


"일부 평가에 따르면 16세기 말부터 17세기 말까지의 100여 년은 역사상 알려진 것 가운데 유일하게 북반구와 남반구가 동시에 온도가 떨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전 세계적 현상으로서의 소빙기는 역사가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이것이 아주 놀랍지는 않다. 이 시기는 심각한 사회적·경제적·정치적·생태적 변화의 시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특히 1640년대에는 이후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어느 시기보다 세계에서 더 많은 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소빙기라는 개념이 문화와 행동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편이자 군사적 대결의 결과를 좌우하는 질병 변천의 맥락으로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거기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우선 온도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일정한 기간에 떨어진 것은 전혀 아니며, 틀림없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된 것도 아니다. 정부간기후변화협의체(IPCC)가 밝혔듯이 증거는 소빙기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진행됐다는 가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538, 541-2)


"기온 하강이 동향, 유행, 심지어 개별적 사건들에 정확히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를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조심스러운 판단이 필요하다. 지리적·시간적으로 상당한 편차가 있는 오랜 기간의 기후 변화를 평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몇몇 시기에는 통상적인 기후 패턴에 상당한 혼란이 생겼다는 증거가 있다. 대표적으로 1590년대, 1680년대, 1810년대 등이다. 이 시기에는 화산 활동, 특히 강한 엘니뇨 현상, 또는 그 두 가지가 상승 작용해 여러 지역에서 기온이 떨어졌다." "그러나 세계의 기후 재편의 규모가 크기는 했지만, 많은 경우 불안정하고 이례적인 기후 조건이 재난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보다는 기존의 취약성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했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숱한 식량 부족 사례에서 문제는 스스로 위험에 노출될 정도로 확대된 도시에서 기인했다. 다만 그 위험 자체는 안전한 곳(그리고 먹을 것)을 찾으려는 시골 주민들의 시도에 의해 악화됐다."(544, 559-60)


"명나라의 멸망은 흔히 일반적으로는 궂은 날씨, 특수하게는 기후 변화와 연결돼왔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1640년에 흉작과 함께 메뚜기 떼의 습격, 식량 부족, 천정부지의 물가, 질병 발생이 겹쳤다. 그리고 이후 3년(1641~1644) 동안 500년 만의 최악의 가뭄이 덮쳤다." "그러나 명 왕조의 붕괴에는 1644년까지 형성 중이었던 기후 위기보다 훨씬 깊숙이 뻗어 있고 훨씬 오래 영향이 지속된 뿌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명은 산적한 문제에 적응하거나 이를 처리하지 못하고 죽음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다." "반면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과 베네룩스는 중국에 그렇게 파멸적이었음이 입증된 아주 비슷한 기후 조건을 유행병, 기근, 지배층의 전복이라는 파멸적인 문제 없이 헤쳐 나올 수 있었다. 이 성공의 비밀은 평범한 데 있었다. 관리와 행정가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이 가져올 과제들을 예측해 미리 계획을 세우는 능력이었다. 다시 말해서 기후는 악화 요인일 뿐, 문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568, 572-3)


18장 대분기와 소분기(1600년 무렵~1800년 무렵)


"감자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기상 충격과 기후 변화로 인해 제기된 위험을 그 작물이 완화했기 때문이다." "안데스에서 수천 년 동안 재배된 감자는 서서히 받아들여져 1600년 무렵 에스파냐, 이탈리아, 잉글랜드, 독일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불리한 기상 조건의 위험을 완화함으로써 더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었다. 식량 부족을 줄이고 열량 섭취를 늘리며 건강과 기대수명을 개선한 것이다. 또한 감자는 고밀도의 인구를 지탱할 수 있게 했고, 17~18세기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규모를 더욱 키우는 동력이 되었다. 감자는 예를 들어 이 기간 인구 규모 증가의 25퍼센트 정도를 책임진 것으로 평가됐다. 그리고 도시화의 가속에서는 더 많은 부분을 담당했다. 즉 도시가 상거래를 발전시키고 수요를 활성화시키며 혁신을 자극하는 데에 일차적인 역할을 담당한(그리고 지금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591-4)


"1760년대와 1770년대에 대서양에서 이례적으로 빈번하고 격렬했던 일련의 폭풍우는 교역망을 조정하고 정치적 동맹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했다." "미국 남부와 카리브해 지역의 환경적·경제적 취약성이 식민지들의 상업적·정치적 기회이자 영국에는 약점이라는 인식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전후한 시기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영국 선박의 입출항 금지는 사실상 자메이카와 여타 영국 식민지들을 잘라내 물자 부족과 고통을 야기했다." "반면에 카리브해의 프랑스 섬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상인들은 협약을 맺고 미래의 계약을 예약하고 창고를 상품으로 꽉꽉 채웠다. 프랑스와 나중에 에스파냐가 1770년대 후반 독립파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뛰어든 데는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요인은 분명했다. 대서양 서부와 카리브해에서의 상업적 유대를 더욱 긴밀히 통합함으로써 모두가 이득을 얻었다는 것이다."(599-601)


"프랑스 혁명은 유럽과 그 너머 세계의 많은 지역에 불을 질렀다. 반항은 밖에서도 있었다. 1791년 생도맹그, 즉 아이티의 혁명 같은 것이다. 이 혁명 이후 독립이 이루어졌다." "이는 투생 루베르튀르의 지도력과 아이티 주민들의 결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황열병이 프랑스의 권위를 다시 확립하기 위해 파견한 군대를 궤멸시킨 덕분이었다." "프랑스의 혼란은 영국에 몇 가지 활력소를 제공했다. 혁명의 폭력과 뒤이어 유럽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격변은 나폴레옹의 등장 이전에 이미 일반적으로 영국, 더 구체적으로 런던을 사방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자석으로 만들었다. 재능, 자본, 연줄이 베네룩스, 독일, 그리고 물론 바로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이동했다. 한 역사가가 우아하게 말했듯이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벌처럼 꽃가루를 가져와서 새로운 꽃을 피우게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영국 공업의 이륙을 싹트게 했다. 그것이 정치, 사상, 기후 변동의 큰 변화가 일으킨 전례 없는 결과였다."(612-3)


19장 공업, 수탈, 자연계(1800년 무렵~1870년 무렵)


"1815년 4월의 탐보라산 화산 분출은 과거 1만 년 사이에 가장 큰 규모였다." "1820년의 한 보고는 1815년 이래 기상의 '이상' 상태라는 것에 대해 주장했는데, 그 결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산됐다. 기후 요인이 정말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듯하다." "기후가 콜레라 유행에 한몫하기는 했지만, 식생활, 하수 처리, 위생은 더욱 중요한 요인이었다. 콜레라는 무엇보다도 빈곤의 질병이었기 때문이다." "질병, 빈곤, 제한된 취업 전망은 모두 유럽에서 이민의 물결을 내보내는 동력 역할을 했다." "남·북아메리카에 새로 도착한 사람들은 새로운 노동력 공급원 노릇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관념, 지식, 문화, 유전자, 제도, 언어를 가지고 와서 급격한 사회경제적·정치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것은 유럽의 변화 역시 자극했다. 대량의 이탈 사태는 노동력의 크기를 줄였고, 이에 따라 임금을 끌어올리고 혁신·기계화·공업화에 더 큰 보상을 제공했다."(626-7)


"자원 수탈의 바탕에 있는 것은 자연에 관한, 땅에 관한, 환경을 어떤 방식이든 자기네가 원하고 최선이라고 믿는 대로 개조할 권리에 관한 급진적인 생각이었다. 자연계는 길들이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생각은 인간의 천재성, 근면, 새로운 도구가 이제 생태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낫고 더 빠르게 모습과 용도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에 의해 불이 지펴졌다." "모든 사람이 인간의 활동을 긍정적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고, 일부는 대신에 지속 가능성과 환경에 가해진 장기적인 충격에 대해 우려했다. 산림 파괴와 관개농업 증가가 토양의 건조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 우려를 제기하기는 했지만 현실은 삼림 파괴가 19세기와 그 이후에 깜짝 놀랄 정도의 속도로 계속됐다는 것이다. 185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대략 1억 5200만 헥타르의 세계 열대림이 초지로 전환됐다. 그 3분의 2 가까이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났다. 모두 식민지 팽창의 핵심 지역들이다."(634-8)


"세계의 어떤 지역은 별 혜택을 얻지 받지 못했다. 뒤쳐지거나, 물리적 기반시설(도로, 학교, 병원, 철도 같은) 측면에서도, 비물리적인 투자(제도, 교육, 지역의 능력 배양 등)에서도 별다르게 얻지 못했다. 명목상 식민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들(남아메리카에 있는 나라들 같은)은 전형적인 피착취 위성국 노릇을 했다. 원료를 수출하고 국내 소비품은 수입에 의존했다. 세계 경제의 변화는 인도와 남아시아에 일희일비를 가져왔다. 인도는 1810년에서 1860년 사이에 국내 직물 시장의 상당 부분을 영국에 빼앗겼다. 가격 하락으로 인한 것이었고 그것은 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같은 기간에 곡물 가격이 상대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풍부하고 값싼 음식으로 흥청거렸지만, 인도에서는 1875년에서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사이에 16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굶주려 죽었다." "이윤 추구, 환경의 지속 불가능한 이용, 한계 너머까지 밀어붙일 경우의 자연의 복수가 결합돼 일어난 결과들이었다."(646, 650)


20장 격동의 시대(1870년 무렵~1920년 무렵)


"19세기 후반 이후 세계 시장은 한층 통합되고 운송망은 개선됐으며 정보 공유가 가속화됐다. 면화 이야기가 두고 두고 반복되었다." "1930년대에는 수백만 헥타르에 이르는, 말레이반도의 세계에서 가장 울창한 우림이 고무나무로 대체됐다. 특히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기 시작해 타이어로 쓸 고무 수요가 더욱 치솟았기 때문이다. 선구자가 된다는 것, 그리고 따라오는 보상의 흥분은 분명한 것이었다. 남·북아메리카는 이미 벗겨먹었다. 이제 세계의 다른 지역을 벗겨먹을 차례였다." "자원 수탈은 농작물과 초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주석은 직물 생산, 기계공학, 군용 무기 같은 갖가지 산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주요 용도는 보존 식품을 담는 깡통이었다. 식품 보존은 시골의 잉여 식료품을 보존하고 그것을 도시로 수송하는 핵심적인 기능이었으며, 따라서 도시화·공업화·세계화에 필수적이었다. 유럽의 주석 생산은 금세 고갈돼 다른 곳에서 공급처를 찾게 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동남아시아였다."(651-4)


"인간이 위험하다(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연계에)는 가설은 19세기에 확산됐다. 그런 사고의 논리적 정점을 1960년대에 쓰인 한 유명한 에세이에서 볼 수 있다. 그 글에서 린 와이트는 유대-기독교 사회가 사람들로 하여금 환경을 덜 배려하게 만드는 세계관을 도입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인간을 자연보다 우월하고 자연과 별개의 것으로 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인간은 생태 위기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계몽시대 이래의 유럽중심적 관념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동방'의 신앙 체계를 보다 환경 친화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특히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생명, 영혼, 자연에 대해 고귀하고 거의 신비적인 태도에 물들어 있다고 본다. 이것은 그 자체로 일종의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 '오리엔탈리즘'이다. 사실 종교 전통은 문제도 아니고 문제의 근원도 아니었다. 문제는 탐욕과 개인의 이득이었다. 어느 학자가 지적했듯이 환경(의 급격한 변모)와 식민 지배는 함께 가는 것이었다."(680-1)


"한 저명한 역사가가 말했듯이 19세기의 대륙 간 연결의 심화는 〈질병에 의한 세계 통합〉을 초래했다. 교역로, 이주 통로, 군대의 이동이 세계를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한데 연결하는 〈간균의 공동시장〉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크고 작은 유행병은 치러야 할 대가의 일부였다." "질병의 확산, 정치적 취약성, 경제 파탄에 대한 우려는 국제적 협력을 향한 결집된 요구를 촉발했다. 감염병을 규명하고 그 확산을 막기 위한 관심은 부분적으로 지난 세기의 가장 유명한 대유행병인 1918~1920년의 '1918년 대유행 인플루엔자'에 대한 대응이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 유행병에 대한 시민의 대응이 투표 행태나 독일의 정치적 극단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대유행병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 그리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지방 당국의 1인당 지출이 적었던 곳은 1930년대 초 현저하게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에 투표했다."(690-5)


21장 새로운 이상향 만들기(1920년 무렵~1950년 무렵)


"'자원의 덫resource trap'은 석유, 가스, 광물 자원을 가진 나라들이 권위주의 국가가 되거나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런 나라들에서) 광범위한 대중에게 권리 분배와 평등은 제한적이었다. 상품 가격이 해마다 천양지차로 출렁이는 경향은 또한 수입을 예측할 수 없고 경기 순환이 널뛰기함을 의미한다." "한 가지 문제는 투자가 사회 발전보다는 자원 추출에 중요한 지역과 시설 주변에 집중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리와 우라늄이 매우 풍부하게 매장돼 있는(코발트, 주석, 금도 묻혀 있다) 콩고에는 1960년에 여덟 개의 국제공항, 30개의 큰 공항과 100개의 작은 공항이 있었다. 광업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에 걸맞은 병원, 학교, 지역 주민에게 도움이 되는 기반시설 건설은 없었다. 현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는 것은 최소한의 저항을 받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한 가장 낮은 비용으로 자원에 접근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708-9)


"소련에서는 많은 억압의 요소가 있었지만 한 가지 일관된 것은 자연계를 길들여야 할 어떤 것으로 대하는 관념이었다. 자연의 변형은 무산계급의 독창성과 근면성의 표현이었다. 자연은 혁명적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고 이바지해야 하는 도구를 제공했다. 도시 무산계급의 이익을 위해 도시를 개선하는 데 필요한 화강암, 대리석, 철, 강철은 모두 그들이 사는 곳에서 흔히 지리적으로 멀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여러 광년 떨어진 곳에서 베고 자르고 파내온 것이었다. 그것을 추출할 때 환경이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중앙 통제와 불가능할 만큼 짧은 기간 안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물량이 요구되자, 생산 수준에 대한 과장(그것은 비현실적인 결과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악순환을 낳았다)과 공해, 유해 폐기물 처리, 광부 및 건설노동자들(강제노동자든 아니든)의 건강과 관련된 편법이 나타났다. 어떻든 매년 수백만 헥타르의 땅이 다른 용도로 변경됐다."(717-8)


"20세기 중반의 기후 패턴 변화와 지구 온난화 정체停滯의 또 다른 핵심 요인은 일반적으로 핵 관련 활동의 증가였던 듯하다. 기후 변화를 핵무기 실험과 연관시키는 것은 1950년대에 이미 나온 이야기다. 방사성-생물학적 위험을 살핀 미국원자력위원회(AEC)와 미국 공군의 한 보고서는 방사성 잔해가 상층부 대기의 이온화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논의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대기에 입자 물질이 채워지면 (···) 지구의 날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최근 연구(부분적으로 핵전쟁이 초래할 수 있는 영향에 대한 이후의 연구에 의존했다)는 공중 폭발, 특히 대형 수소폭탄(그리고 그 결과로 방출된 미세먼지)이 20세기 중반 이후 일어난 지구 온난화 정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군사 기획자들의 머릿 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기후가 새로운 대량살상 무기에 의해 우연히 변화했는지 여부가 아니라 기후를 변화시키고 통제할 수 있는 무기의 개발이 가능한지 여부였다."(736-7)


22장 지구 환경의 재편(20세기 중반)


"1950년대에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기후 통제는 온갖 토론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주제였다. 그러나 기후 통제에 대한 낙관적인 주장들에도 불구하고 실험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으로 드러났다. 비구름 파종은 이론적으로는 물론이고 실제상으로도 들어맞았지만, 경제성을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비를 내리게 하기는 어려웠다(더 나아가 불가능했다). 전략 무기로서든 미국과 기타 지역의 농민들을 돕기 위해서든 말이다. 자금 지원은 계속됐다. 남들이 먼저 기상 변개 기술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그 한 이유였다." "이런 우려는 터무니없이 야심찬 지구공학(기후공학) 분야의 현재 및 장래의 연구에 자금을 제공하도록 의회를 설득하기 위해 꼼꼼하게 고려된 것이었다." "1960년대가 되면 여론은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실험에 대해 그저 회의적인 정도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핵전쟁이 일어날 경우의 영향에 대한 우려와 겹쳐졌다."(744-5, 749, 752)


"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은 전 세계에 걸쳐 중대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것은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의 빈곤이라는 조건을 안고 좌익의 주장을 홍보하며 각국의 혁명을 부추기는 소련의 망령은 미국 정책 담당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아시아의 농촌 주민은 〈사실상 끝이 없는 마을의 연속 속에서 복닥거리고〉 있다고, 1950년대 초 트루먼 대통령의 대외원조 보좌관 이지도어 루빈은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곳은 〈폭력혁명의 온상〉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안에 세계 수십 개국에 차관, 원조, 전문가가 제공됐다. 2천 명이 넘는 기술 전문가들이 35개 이상의 나라에서 일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업(그 상당수는 농업 생산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을 벌인 적어도 한 가지 이유는 과잉 인구, 자원 고갈, 굶주림이 정치 불안 및 공산주의자 봉기와 맞물려 있다고 진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업들은 냉전(즉 미국의 국가 안보)이라는 맥락 안에서 틀이 지어졌다."(761-2)


"소련의 사회경제 정책을 추동한 것은 단지 외부 세계와의 경쟁만이 아니었다. 개혁, 현대화, 적응 실패의 위험성에 대한 공포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수십만 명의 새로운 정착자들이 '미개척지'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져 기반시설에 압박을 가하고 사회적 마찰과 생태 재앙을 초래했다. 그것이 소련 역사에서 〈최악의 환경 파괴 사례〉라 불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아랄해로 흘러드는 강들을 관개수로로 개조한 것은 구상이 잘못돼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아랄해(한때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컸다)의 마른 바닥이 드러난 면적은 2010년 8만 7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했다. 바람은 매년 4500만 톤의 짜고 오염된 먼지를 확산시켜 길이 400킬로미터, 폭 40킬로미터의 지역까지 이르기도 하는 먼지 기둥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지금 500만 명의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로 여성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심각한 여성의학적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아랄해 연안의 개조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770-2)


23장 불안의 증폭(1960년 무렵~1990년 무렵)


"대규모 기아로 이어질 인구 급증에 직면한 세계의 위협은 지금 당장의 문제였다. 이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거듭 강력해진 이야기였다. 폴 에얼리크와 앤 에얼리크가 〈인구 폭탄〉(1968)에서 싸움은 이미 졌다고 경고했지만 말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온 인류를 먹일 식량을 확보할 가능성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수천 만의 사람이 굶어 죽고 있다〉고 했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지구에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전망은 핵전쟁으로 인한 파멸에 대한 불안과 자연계의 공업 중심지로의 변화(그것은 흙과 물과 인간을 중독시켰다)에 더해진 것이었다. 과잉 인구는 이제 또 하나의 재앙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그 답을 분명하게 밝혔다. 수전 손택은 1960년대 중반에 이렇게 썼다. 〈백인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 자주적인 문명들을 말살하고 지구의 생태 균형을 뒤엎고 이제 생명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백인이며 백인뿐이다. 그 이데올로기와 그 발명품들이다.〉"(796-7)


"이런 문제들(그리고 공포들) 가운데 상당수는 오늘날의 세계에도 매우 낯익어 보인다. 핵으로 인한 대규모 파괴, 경제 성장 추구로 인한 생태계 손상, 자원의 지속 불가능한 이유, 세계 인구 증가에 따른 기반시설과 식량에 대한 압박, 희망을 높이지만 동시에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새로운 착상과 기술에 대한 지나친 의존, 각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의 협력 강조와 이에 관한 실질적 진전의 결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뿌리 깊은 우려 같은 것들이다. 여기에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 역시 추가돼야 한다." "1940년대 말부터 상당한 정력과 자원이 극지極地 연구에 투입되었다. 그 중에서 미국이 600발의 탄도미사일 무기고로 삼기 위해 세운 그린란드 캠프센추리의 과학자들은 얼음 시료를 채취해 여러 가지 발견을 했다. 연구팀은 수천 년, 심지어 수만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기후 조건의 경험적 증거를 제공함으로써, 장기적인 기후 조건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802-4)


"1992년 합의되고 1997년 교토에서 조인된 새 의정서는 각국이 〈서로 다른 수준의 책임〉을 진다는 원칙(즉 먼저 공업화된 부유한 국가들이 더 무거운 짐을 져야 한다는)을 제시했는데, 이런 추가적인 협상들마저 결함 있는 결과를 냈다. 미국은 수정 없는 교토 협정의 비준을 거부했다. 상원은 95 대 0의 표결로 이를 부결시켰다." "기후에 관해 올바른 말을 하면 선거 승리에 도움이 되지만 그에 관한 무언가를 실천하면 선거에서 진다고 생각한 것은 부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빌 클린턴 역시 대통령이 되었을 때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더 청정한 에너지 보급에서부터 자동차 효율을 개선(그 결과로 배출을 줄이는 것)하기 위해 업계와 협력하는 것까지 말이다. 그러나 의회의 정치적 분할을 감안하면 기후 변화가 문제라는 〈광범위한 인식〉이 있다 하더라도 그에 대응하기 위해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정말로 바늘구멍만 했다."(829-30)


24장 생태 한계의 끄트머리에서(1990년 무렵~현재)


"냉전의 몰락은 상업적 유대와 경제 성장을 더욱 부추긴 촉매재였다. 소련 붕괴는,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세계 기후에는 좋은 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곧 풍부한 자원이 정치적 신조와 아무런 상관없이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은 채로 세계 시장에서 판매될 기회를 제공했으며, 서방 기업의 소련에 대한 투자는 효율을 개선하고, 생산을 늘리며, 새로운 회사와 분야와 광산과 송유관에 자금을 대고, 세계 상품 가격에 압박을 가하는 데 한몫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 편입되게 한 추동력을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과 뒤이은 카터 행정부 시기의 최혜국대우 지위 부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 변화에서 중요했던 것은 1990년대 초 중국 지도부의 외국인 투자에 대한 개방 결정이었다." "변화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지표를 하나만 들자면, 1985년 중국에는 민간 자동차가 2만 대로 추산됐지만 지금은 2억 4천만 대 이상이 있다."(834-6)


"가장 중요한 환경 변화는 최근 수십 년 사이 인간 집단이 더욱 가까이 모여 살게 된 방식에서 말미암았을 것이다. 도시와 도회 지역은 기후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원천이다. 가까이 모여 사는 것은 교환 속도를 높이게 되지만, 도시는 생산이 아니라 소비의 중심이다. 도시 주민은 음식, 물, 연료가 필요하며 그것은 먼 곳에서 가져와야 한다." "운송은 세계 에너지 관련 이산화탄소 배출의 약 4분의 1의 원인이다. 여러 선진국에서는 더하다. 미국 전체에서는 배출의 약 29퍼센트,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배출의 약 41퍼센트를 차지한다." "현재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서 살고 있다. 이 수치는 2050년까지 70퍼센트로 올라갈 전망이다. 현재의 인구 추세를 감안하면 이는 앞으로 30년 안에 도시에 사는 인구가 25억 명 더 증가한다는 얘기다. 이는 필시 온갖 종류의 자원 수요에, 자연적이고 비자연적인 기반시설에, 탄소와 온실가스와 열기의 배출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842-3)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2010~2020년은 1880년대에 근대적인 기록 관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따뜻한 10년이었다. 과거에 특히 춥거나 더운 시기를 포함한 시대가 여러 번 있었지만(소빙기, 중세 기후 최적기, 로마 온난기 같은), 이들 경우는 전 세계적인 것이 아니고 한 지역이나 일부 지역, 심지어 한 대륙이나 일부 대륙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난 150년은 전 세계가 거의 동질성을 보이고 있다. 지구의 98퍼센트 지역에서 20세기는 지난 2천 년 중에서 가장 기온이 높은 시기였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연한 일도 아니다." "인구 증가, 도시화의 진행, 새로운 생산 및 운송 기술과 함께 더 빈번해진 상거래는 최근 수십 년 사이 더 많은 에너지 수요를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영향력 있는 작가 데이비드 월리스웰스가 말했듯이 탄소 기반 연료 연소의 약 85퍼센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1989년 이후의 것이다."(854-6)


"지구 온난화를 2015년 파리기후협정의 목표인 섭씨 1.5도로 묶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쩌면 이미 놓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한 최근 연구는 현재의 전망치들에 근거해 세계의 평균 온도 상승을 파리협정의 목표대로 묶어둘 수 있는 가능성을 0.1퍼센트로 보았다." "세계 주민의 약 30퍼센트가 현재 이미 연간 20일 이상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기후 조건에 노출돼 있다. 온실가스 배출이 극적으로 감소하더라도 2100년에 그것은 50퍼센트 가까이로 올라가고, 배출이 계속 증가할 경우에는 75퍼센트 가까이로 치솟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지역은 대개 값싼 노동력과 느슨한 환경 규제에 이끌려 고소득 국가에서 옮겨온 제조업 때문에 높은 수준의 공해로 고통을 받은 나라들이다. 1970년에서 2017년 사이에 전 세계적으로 2조 5천억 톤 가까운 자재가 추출된 것으로 평가됐는데, 고소득국가가 그중 75퍼센트를 사용하고 중저소득 국가와 저소득 국가는 합쳐서 1퍼센트 미만을 사용했다."(869-71)


결론


"화석연료에서 다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여러 가지 자원과 물질에 대한 압박을 증가시킬 수 있는데, 이는 명목상 탄소중립 기술로 전환한다는 사실에 들떠 쉽게 간과될 수 있다. 따라서 풍력 같은 재생 가능 에너지로 옮겨간다는 천명된 의도는 가상하지만, 세계 에너지의 4분의 1을 이런 방식으로 생산하려면 적어도 4억 5천만 톤의 강철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다시 6억 톤 이상의 석탄에 해당하는 화석연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마찬가지로 많은 나라, 주, 도시에서 전기자동차(EV)로 전환하는 것은 충전과 재충전 때문에 전기 수요를 늘리는 결과를 가져오며 전기자동차가 높은 수준의 오염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사실 합성 차바퀴는 미세플라스틱의 주요 원천이다. 차바퀴와 자동차 제동기 같은 비연소非燃燒 근원에서 나온 700만 톤 가까운 입자들이 매년 방출된다. 실제로 자동차 바퀴는 오늘날 자동차의 배기가스보다도 훨씬 많은 입자 오염을 초래한다."(884)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도전은 여러 가지로 인류 초기의 우리 조상들이 마주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같은 것이 하나 있다. 우리 주위의 자연환경과 그것을 떠받치는 기후가 우리의 존재를 틀 짓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술이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준다고, 우리가 자연을 변형시키고 개조하면 모든 장애물과 장벽을 누그러뜨리거나 우회하거나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 자신감에는 희생이 따른다. 유엔에 따르면 전 세계 땅의 40퍼센트가 지금 지력이 떨어졌다. 현재의 속도대로라면 2050년까지 남아메리카만 한 크기의 지역의 지력이 떨어질 것이다. '생태용량 초과일'(매년 자원 소비가 지구의 재생 능력을 넘어서는 날을 표시하는 추상적인 기준점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지속 가능성 쪽으로 모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은 한 해 중에 계속해서 더 이른 시기로 당겨져, 1990년대에 10월 무렵이던 것이 2022년에는 7월 말이 되었다."(896-7)


"환경 요인(기후 포함)은 인류 이야기에서 행위자(때로 개입을 해서 제국을 멸망시키고 사회 붕괴를 일으키고 불시에 사람들을 붙잡아가는)가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의 존재가 펼쳐지는 무대 자체를 제공해 우리가 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누구인지와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를 규정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저 공연장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주인공이 행동하고 말하는 것만) 생각하기 일쑤다. 무대장치 자체의 구조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배우는 왔다가 간다. 그러나 극장이 문을 닫거나 무너지면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종말을 의미한다." "우리 가운데 연료를 태우고 삼림을 벌채하고 지각에서 광물을 떼어내는 사람이 줄어들면 인간의 발자국은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공상적인 과거의 지속 가능하고 푸른 낙원으로 한발 더 다가설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역사가는 이에 대해 내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897,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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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세계사 세트 - 전2권 - 지구 생성부터 기후 재앙 시대까지
피터 프랭코판 지음, 이재황 옮김 / 책과함께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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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1장 태초 이후의 세계(대략 45억 년~대략 700만 년)


# 태초에 벌어진 주요한 생명 탄생/소멸 과정

1. 약 30억 년 전(또는 그 이전) ~ 23억 년 전 무렵 산소대폭발(GOE)로 복합 생명체 등장을 위한 조건 형성

2. 약 5억 7천만 년 전에 시작된(화석 기록에 따르면) 복합 다세포 생물 출현(대표적으로 삼엽충)

3. 약 4억 4400만 년 전(오르도비스기Ordovices期) 갑작스러운 냉각으로 한 차례 멸종 파동

4. 약 2억 5200만 년 전(페름기-삼첩기三疊紀, 트라이아스기) 거대한 화산폭발로 대멸종

5. 6600만 년 전 유카탄반도를 타격한 소행성 또는 행성 충돌(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거대한 화산 분출과 함께)로 공룡 멸종


"대규모 변화를 초래한 가장 파멸적인 사건조차도 우리가 현대 지구촌 생태계의 기본적 특징이라고 생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6600만 년 전 유카탄반도를 타격한 칙술루브 충돌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열대우림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충돌 이전에 열대림의 나무들은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서 빛이 숲의 바닥에 닿았다. 충돌 이후에는 나무들이 좀 더 밀집해서 자랐다. 아마도 대형 초식동물들이 멸종한 결과였을 것이다. 햇빛도 더 차단되고, 박테리아와의 상호작용 덕분에 공기 중에서 질소를 얻는 콩과식물도 번성할 수 있었다. 충돌로 인해 생긴 강하회降下灰는 지구 생태계에 풍화가 쉬운 인광燐鑛을 보태주었다. 그것은 다시 토양의 비옥도와 숲의 생산성을 자극하는 데 필요했다. 이는 또한 침엽수 및 양치식물과 대비되는 꽃식물의 상대적 이점을 높여주었다. 이에 따라 생물 다양성의 급증을 위한 토대가 만들어졌고, 오늘날 탄소 순환의 매우 중요한 부분인 광대한 우림 지대를 위한 조건이 조성되었다."(67)


"대략 2억 5천만 년 전에 시작된 초대륙의 해체와 여러 대륙의 형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지도를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기후 조건 변화는 대략 560만 년 전의 '메시나기Messina期 염분 위기'를 초래했다. 그 결과로 지중해 물의 증발에 의한 건조가 일어나고 유럽-아프리카-서아시아 사이에 동식물 통로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30만 년 후 대서양의 물이 지브롤터해협을 통해 들어오고 지중해 해분海盆이 급속하게 물로 채워질 때까지 지속됐다. 이 사건이 '잔클레Zancle 홍수'로 알려졌다. 그러나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대륙의 균열 및 충돌, 그리고 큰 대양 해분의 변화가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탄화수소 광상 형성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전 세계 27개 핵심 지역에 무리지어 있는 877개의 거대 유전 및 가스전(매장량이 5억 배럴 이상인 곳들이다)의 거의 전부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인위적 요인에 의한 기후 변화, 지구 온난화, 공해는 모두 수억 년에 걸쳐 일어난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71)


"지질상의 행운이 현대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비슷한 여러 다른 일들에서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1억 4500만 년 전에서 6500만 년 전 사이의 백악기白堊紀 동안에 세계는 지금에 비해 훨씬 온난했고 해수면도 훨씬 높았다. 수많은 죽은 해양 미생물들이 퇴적층을 이루고 그것이 결국 유층油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다른 결과들도 낳았다. 미국 남부에서는 세계가 추워지고 해수면이 내려가면서 멸종된 플랑크톤과 기타 해양 생물들로부터 거대한 백악층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매우 비옥한 땅뙈기들로 이어졌다. 특히 비가 내려 영양분이 적은 탄산염 광물을 용해시킨 뒤에 말이다. 비옥하고 검은 흙으로 인해 블랙벨트Black Belt로 알려진 미국 동남부 주들의 활 모양의 지역은 집약 작물, 특히 면화 생산에 이상적임이 입증됐다.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고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은 아프리카인들의 집중 주거지가 되었다."(73)


2장 인류의 기원(대략 700만 년~서기전 12000년 무렵)


"인류의 확산과 정착은 무엇보다도 생태적으로 온화한 지역을 찾아내는 일에 의해 좌우됐다. 이는 따뜻하고 숲이 우거진 환경에서부터 사바나 초원과 해산물이 풍부한 해안 지역까지 여러 종류의 주거지를 포함했다. 물론 아주 탁 트인 환경은 고의적으로 회피한 듯하다. 특히 매력적인 장소 가운데 하나가 지중해 해안과 요르단 열곡裂谷 주변 사이의 좁다란 삼림지대였다. 물의 공급이 안정적이고 비교적 쉽게 야생 동물을 먹잇감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유라시아에서 남쪽으로 이동한 네안데르탈인도 같이 살았다는 증거가 있다. 무덤과 유골 및 치아 잔편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역시 그곳에 살았던 현생인류와 피를 섞었다는 흔적도 있다. 생존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었음은 다음 사례가 입증한다. 대략 7만 3천 년 전, 매우 건조하고 빙하로 뒤덮여 힘겨운 시기여서 레반트의 주민들은 살아남지 못하고 사라졌다. 원인은 아마도 지금의 인도네시아 토바산의 거대한 분출이었을 것이다."(86-7)


"1만 9천 년 전 무렵의 해빙은 새로운 일련의 환경 변화를 초래했다. 북아메리카 일대의 빙상이 녹기 시작해 대홍수로 이어졌다. 이는 세계 역사상 최대급의 홍수였으며, 그 경로는 지각의 뒤틀림과 기울어짐에 의해 정해졌다. 그 과정에서 땅의 고도를 수백 미터씩 변동시켰다. 수천 년 만에 북반구의 빙상과 빙하가 물러나자 그 결과로 막대한 양의 민물이 바다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전 세계의 해수면이 크게 올라갔다. 평균 80미터나 되었다. 육상 및 해양의 생태계도 큰 변화를 겪었으며,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방출돼 대기로 들어갔다." "환경 및 기후 조건의 뚜렷한 호전이 북아메리카와 카리브해는 물론이고 중·남아메리카 전역에 성공적으로 이주하고 영구 정착했다는 훨씬 많은 증거들과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집단들이 남쪽을 향해 나아갔던 한 가지 요인은 빙하시대 이후의 온난화가 남반구 지역에서 시작돼 그 지역이 더 쾌적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95-7)


"1만 2900년 전 무렵에 일어난 새로운 기후 충격은 장기간에 걸친 온난화 과정을 갑작스럽게 역전시켰다. '영거 드라이아스Younger Dryas'로 알려진 이 사건의 원인은 여전히 논란거리다." "당연하게도 동물상 및 식물상에 미친 영향은 심각했다. 이번에도 사냥과 기후의 압박, 또는 그 둘의 결합이 원인이었다." "레반트에서는 보다 엄혹한 여건에 대한 대응으로 상주 또는 반상주 주민이 사는 작은 정착지들이 건설됐다. 그런 변화는 자원과 기술의 공유를 가능하게 했을 테지만, 식량 부족과 압박이 심해지는 시기에 다른 집단들을 상대로 안전과 방어의 필요에 대한 공동의 해법 구실도 했을 것이다. 정주생활은 또한 야생 곡물이 나는 땅을 보호하고 가장 좋은 장소가 남들에게 탈취되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종말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1860년대에 프랑스의 고생물학자 폴 제르베가 이 시기에 대해 처음으로 전신세全新世(홀로세)라는 이름을 붙였다."(98-101)


3장 인간과 생태의 상호작용(서기전 12000년 무렵~서기전 3500년 무렵)


"전신세는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 훨씬 좋은 기후 조건의 시작을 의미했다. 우선 대략 1만 년 전 무렵부터 변화가 일어나 장기간에 걸친 안정적 기후 패턴의 시기가 시작돼 충격의 횟수와 빈도가 줄었다. 물론 대륙 사이 및 대륙 내부에서 지역에 따라 큰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기온은 상승했고, 강우량도 늘었다. 결정적으로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 또한 마지막 극대빙기에 비해 급증했다. 그때는 농도가 너무 낮아 광합성이 제한적이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초목을 식재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지속성, 신뢰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했다. 한 영향력 있는 연구 보고에서 말했듯이 전신세 이전에 농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작 이후 완전히 그에 적합한 조건이 되었다." "학자들은 또한 사냥과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인해 대형 동물의 수가 즐어든 것이 보다 고정된 곳에 있는 식량의 원천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고 주장한다."(107, 110)


"곡물을 갈고 가공하기 위한 더 무거운 도구를 사용하는 작업은 인간 신체에 더 큰 부담을 주어, 농작물 경작이 더욱 확산되면서 골관절염 환자 증가로 이어졌다. 또 곡물 탄수화물의 당분은 치아 법랑질을 손상시켜 충치 발생률 증가로 이어졌다. 치아 건강의 악화는 여성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아마도 다산과 그로 인한 호르몬 분비의 불규칙성, 임신 중의 면역력, 임신 중 및 그 이후의 타액 성분 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서기전 6000년 무렵의 황소 이용(처음에는 탈곡에 이용했다)은 중요했다. 시간과 에너지가 늘어난 셈이어서 인간 노동력에 대한 압박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고, 식량 소비를 크게 늘리는 바탕을 제공하는 데 이바지했던 것이다. 대형 동물을 농업에 이용한 것은 수레와 쟁기 같은 혁신을 자극했고, 그것이 생산을 더욱 늘리는 데 이바지해 더 많은 땅을 빨리 경작할 수 있게 해서 더 많은 인구를 부양했다. 이로 인해 사회 불평등(성 불평등을 포함한)의 씨앗이 뿌려졌다."(116)


"인구 밀도 상승에는 반대 급부가 있었다. 가까이 모여 사는 것은 더 큰 생물학적 대가를 지불하게 했다. 세균병을 일으킬 수 있는 배설물 오염과 열악한 위생시설 같은 것들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바이러스와 기생충이 확산되기 쉬운 상황도 마찬가지다. 저장된 식량 자원은 설치류를 불러들였다. 그것은 동물원성 질병(즉 동물에서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질병)의 중요한 매개자였다. 소, 염소, 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의미에서 인구 증가는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인구 재생산이 질병으로 인한 유병과 사망의 감소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증가했기 때문이다. 전염병균이 번성하는 공동체에는 희망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것들은 흔히 단기적으로 맹위를 떨치지만 반복적인 발병은 결국 주민들을 '질병 유경험자'로 만들고 잦은 노출 덕분에 부분적인 면역이 생기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는 기후 조건이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수 있게 하거나 인구 규모가 외부 이주를 필요로 할 때 장기적인 이점을 제공했다."(117)


4장 초기 도시와 교역망(서기전 3500년 무렵~서기전 2500년 무렵)


"영구 정착지 건설에는 개인 소유에 대한 관념의 형성이 필요했다. 동산 및 부동산, 땅과 거기서 나는 자원에 대한 접근권 및 통제권 같은 것들이다. 고대와 현대 세계의 사회적 위계의 발전과 존재는 흔히 도시라는 무대와 관련이 있고, 무엇보다도 재산 소유권(경지든 작물이든 가축이든 물건이든)과 관련이 있었다. 그 적절성은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높아졌다. 부의 축적과 양도는 사회 지배층을 형성할 수 있게 했고, 이에 따라 정치 구조와 의사 결정을 규정지었다. 부의 불균형은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도시화된 주민이라는 표시였다." "일부 학자들은 높은 지위와 부를 차지한 사람들의 역할이 도시가 더 크고 더 효율적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결정적이었다고 본다. 토지 소유권을 장악하고 가축을 소유하고 생산을 통제한 지배 계층은 자기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장려책을 제공함과 아울러 강압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도시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하고 사회정치 구조를 좌우했다."(135-7)


"환경과 천재지변은 특히 '교화의 신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그들은 화가 나서일 수도 있고 그저 심심해서일 수도 있지만 일탈과 명백한 존경심 결여에 대한 벌을 내렸다. 눈에 띄는 (그러나 놀랍지는 않은) 사실은 기상 조건의 변화(가뭄이 가장 중요하지만 홍수나 폭풍우도 마찬가지다)에 취약한 지역들에서 '교화의 신들'에 바탕을 둔 우주론 체계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 신들은 그런 사건들을, 벌을 주고 자기네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교훈을 주는 데 사용했다. 화를 잘 내고 인간에게 재앙을 잘 내리는 신들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문학 및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문학과 종교 행위에서 나타나듯이 여기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파괴와 처벌이 아니었고, 좀 더 추상적이고 평화적이었다. 한 학자는 초기 중국인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처럼 신들과 다투지 않았던 이유가 아마도 〈생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다툴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39-40)


"통제를 유지하는 한 가지 방법은 도시 주위에 성벽을 쌓는 것이었다. 초기 도시 성벽은 적어도 일부 경우에는 환경적 요인(특히 물과 홍수)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건설됐다는 주장이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방어용 요새 구실을 하는 기능을 떠맡았지만 말이다. 최근 지적된 바 있듯이 우르크 같은 곳의 도시 성벽 규모는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군사적 요구에 비해서도 훨씬 컸다. 그래서 공격을 막기 위한 요새가 아니라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건설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집트에도 그 자연스러운 짝이 있다. 이곳에서는 군사력에 대한 투자와 지출이 왕의 위신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주장(서로 모순되지는 않을 것이다)은 성벽이 노동력 공급을 일정하기 유지하기 위해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곡물 공급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사람이 존재하도록 보장하고 그럼으로써 도시 자체의 장기적인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한 방법이었다."(142-3)


5장 분수에 넘치는 삶의 위험성(서기전 2500년 무렵~서기전 2200년 무렵)


"기후 자료는 〈아카드의 저주〉로 알려진 '증발 사건' 가설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제공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홍해 북부의 퇴적물은 북대서양진동(NAO)이나 태양의 변동성과 관련된(아마도 그 둘 모두와 관련된) 서기전 2200년 무렵의 환경 변화를 보여준다. 오만 앞바다의 화석화된 산호는 모래폭풍이 불었던 오래 끈 겨울철을 보여준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나타난 듯한 흉작과 연결돼 있었다." "이 순간은 심지어 메갈라야기Mehalaya期의 시작으로 명명되었다. 산소 원자동위원소의 변화가 특히 계절풍 강우의 감소를 드러낸 인도 동북부의 한 동굴이 있는 주의 이름을 딴 것이다. 국제층서위원회(ICS)에 따르면 서기전 2200년 무렵의 기후 변화는 대가뭄을 촉발했고, 그것이 메소포타미아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곳에서도 문명 붕괴를 일으켰다.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 팔레스타인, 인더스강 유역, 창장 유역 같은 곳들이다. 따라서 서기전 2200년은 지질학사뿐만 아니라 역사 자체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이었다."(157-8)


"그러나 기후 패턴 변화는 수십, 수백 년에 걸쳐서 일어나며, 고고학 자료는 결정적이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사실 메소포타미아를 연구하는 현대 역사가들은 나람신이 이끈 군사·행정 개혁이 아카드를 성공적인 왕국에서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아카드의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은 붕괴의 원흉이라기보다는 제국 중앙의 강화를 지휘한 사람이었다. 재난을 아람신의 탓으로 돌린 것과 〈아카드의 저주〉를 구상한 동기는 환경의 압박과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에 대해서보다는 왕권의 본질과 무엇보다도 지배자와 신들의 관계에서 교훈을 이끌어내고자 한 후대 수메르인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후대에 이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들에게 불경스러우면 후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람신은 니푸르의 에쿠르 신전에서 신을 모독했으며 스스로를 살아 있는 신으로 선언했다고 한다. 신들은 자애로울 수 있지만, 그들의 기분을 맞춰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생겼다."(165)


"기근과 질병은 거대한 자연재해에 비해 더 흔하기도 하고 더 파괴적이기도 하며, 대개 인간의 오판이 빚은 결과다(현대의 믿음과는 반대다). 아카드 제국의 경우 문제는 상당 부분 확장하고 앗아가는 제국 영역의 현실과 끊임없는 중앙집권화가 정치적 분열과 균열, 심각한 공급 문제로 이어진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위태로운 균형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근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란과 사회적 격동이 발생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점은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상당한 기후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가 아니라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졌느냐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은 통치자, 지배층, 사제, 관료, 노동자가 적응(특히 커지는 환경 압박에 대해)을 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그 선택과 조치가 적절하고 효과적이었느냐다. 결론적으로 기후가 아카드 제국을 무너뜨렸다기보다는 아카드 제국이 스스로 무너져 새로운 도시국가 무리 속으로 쪼개져 들어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167-8)


6장 첫 연결의 시대(서기전 2200년 무렵~서기전 800년 무렵)


"흥미롭게도 역사가들은 흔히 제국, 왕국, 국가의 붕괴나 쇠락에서는 기후의 역할에 대한 논의에 곧바로 뛰어들면서도 통합, 팽창, 개화의 패턴에서는 그것을 주저한다. 서기전 2200년 무렵의 위기 이후의 긴 기간 같은 경우 말이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는 놀라울 것이 없다. 대규모 영구 정착지가 있는 주요 지역은 환경적·생태적으로 인구를 부양하기에 적합한 곳이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성장을 용이하게 하기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다. 질병에 취약하지 않은 환경은 또한 인구 증가를 초래하는 중요한 요인이며, 역으로 왜 다른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나일강 유역, 중국의 일부 지역, 남아메리카 서북 변경 등이 서기전 2200년 이후 1천 년 동안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는가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하다. 동남아시아와 서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말라리아가 인구 규모를 늘리는 데서 제동 장치 역할을 했다. 다른 곳에서 매우 중요했던 종자, 곡물, 식품을 얻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184-5)


"대규모 화산 분출 같은 일회성 사건들이 극적이고 예기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넓게 보아 진짜 문제는 홍수나 수십 년 동안 지속되는 장기간의 가뭄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이다.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인구 하중荷重이었다. 계속해서 흉년이 들 때 먹여야 할 입이 많으면 문제가 된다." "물론 약점은 주로 개개 도시의 규모에 있었다. 궁핍할 때 가장 취약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도시 정착지는 또한 잠재적 위기의 핵심이었다. 불만에 차고 굶주리고 열악한 상황에 처한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 봉기가 시작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새로 또는 얼마 전에 편입된 민족들이 봉기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특히 군사적으로 정복된 경우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변경에 위치한 지역은 멀리 떨어진 중앙의 지배에 의해 잃을 것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새로운 전망과 해법을 제시하는 독자 세력이 가장 큰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186-7)


"긴밀한 연결은 갑자기 해법의 일부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뒤집힐 수 있다. 상호의존은 취약성이 쉽게 극대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빠르게 확산되고 통제를 벗어난 듯 보일 수 있다." "따라서 여러 붕괴의 단일한 주요 원인을 규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염의 원리다. 관계망의 한 부분의 문제(흉작 때문이든 지진 피해 때문이든 혈족 사이의 내분 때문이든)는 장애와 혼란, 심지어 관계망 전체의 체계 와해로 급전직하할 수 있다. 고도의 장거리 교역망 또한 상호의존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계망이 붕괴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사회 구조, 국가, 제국이 흔들리고 심지어 붕괴할 수 있었다. 이는 여러 지역과 역사의 여러 시기에 두루 찾아볼 수 있었다. 그 한 사례는 수백 년 후 서유럽의 로마 제국 멸망이다. 대단치 않은 압박이 하락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역사가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암흑시대'가 되었다. 20세기 말 소련 진영도 거의 하룻밤 사이에 해체됐다."(187, 190)


7장 자연과 신에 대한 관심(서기전 1700년 무렵~서기전 300년 무렵)


"환경 악화, 자원 과소비, 지속 불가능한 인구 유지 부담의 위험은 수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도 인식하고 있었다. 일례로 〈아트라하시스 서사시〉(가장 이른 점토판인 고古바빌로니아 시대의 것은 서기전 170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생태 경계를 그 한계 너머로 밀고 나아가는 데서 오는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인구 과잉은 엔릴 신을 짜증나게 했다. 그는 〈그들이 내는 소움을 들어야〉 했고, 곧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불평했다. 불평이 지속되자 신들은 그 문제를 직접 처리하기로 하고 사람들 대다수를 없애버리기로 결정했다. 어느 정도 평화와 정숙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극심한 가뭄을 내려보냈고 그것이 기근을 초래했다. 그 밖에도 과도한 소음과 과도한 사람 수에 대한 다른 '해법'들도 있었다. 일반 질병과 전염병 같은 것들이었다. 가장 극적인 시도는 대홍수였다. 고고학 증거로 입증됐고, 아마도 후대의 이집트 기록의 바탕이 되고 성서에도 나오는 사건이었다."(195-6)


"수백 년(혹은 수천 년)에 걸쳐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농업이나 건축이나 정치 구조나 경제 등에서 연속성도 있었다. 그런 연속성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에 있다. 각 사회는 개별 신에 대한 숭배, 그들의 호의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조언과 경고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개입하려고(특히 기후 및 그 변덕과 관련해서) 노력하는 데서는 접근법이 매우 비슷했다. 천문 일지는 지식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상 현상을 식별한 뒤 그것을 이해하려는 틀을 만들기 위해 천문 현상을 기록했다. 해석하는 일은 메소포타미아 세계의 선지자와 사제들이 담당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신들의 변덕과 의지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징후와 조짐을 설명할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황제 요堯 역시 〈천문 담당관에게 일출과 일몰, 항성과 행성을 관찰하고 366일 태양태음력을 만들며 윤달을 계산〉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202, 207)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전 3세기까지 황허강과 창장 유역, 지중해 동부, 레반트, 갠지스강 유역의 철학, 종교, 행동이 정립되고 재정립된 정도와 그 파장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언급했다. 카를 야스퍼스는 이 시기를 '추축시대Achsenzeir'로 묘사했다." "다른 학자들도 이 시대를 '문화적 결정화結晶化'의 시대, '초월시대'였다고 주장했다. 〈물러나서 앞을 내다보는〉 것으로 묘사된 새로운 능력이 특징이었다." "중요한 것은 문헌의 급증이었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보존·전파·복제였다. 목록, 설화, 경전과 기타 기록물들이 정보 뭉치를 형성해, 그것을 배우고 토론하고 추가하고 해석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요인은 도시화와 풍요의 수준이 높아진 일이었던 듯하다. 물질적 보상이 자기수양과 이타심이라는 변화를 자극했다. 이는 서기전 6세기 무렵 꽃을 피운 여러 신앙 체계를 통틀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남아시아의 불교와 자이나교,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동아시아의 공자와 노자 등의 가르침이 그랬다."(226-7)


8장 스텝 변경과 제국들의 형성(서기전 1700년 무렵~서기전 300년 무렵)


"서기 1200년 무렵, 말을 다루고 조련하고 기르는 기술이 갈수록 정교해지면서 식용으로의 의존도와 경제적 이용이 모두 증대했던 듯하다." "말 사육이 흑해에서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러 몽골까지 뻗어 있는 개방된 스텝 지역이 특히 건조했던 시기에 시작되고 극적으로 확산됐다는 사실은 학자들에 의해 지적돼왔다. 그들은 목축을 통한 생계유지와 음식, 단백질, 우유의 공급원이자 노동력 보충을 위해 말에 의존한 것은 기후조건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말이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목초지가 필요해졌다. 정착 형태도 반半정주적인 것에서 보다 분산 수준이 높은 형태로 크게 바뀌고 이동의 빈도도 높아졌다. 동위원소 자료는 반추동물이 정착지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풀을 뜯은 것과 달리, 말은 스텝을 가로질러 넓은 지역을 돌아다녔음을 시사한다. 이런 변화들은 사상, 신앙, 의례의 확산과 상품 및 기술의 교류를 촉진해 장거리 접촉망을 형성하는 데 중요했다."(238-9)


"물론 정주 사회와 유목 사회의 관계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들의 상호의존성이었다. 동물을 기르는 사람들은 산물을 필요로 하거나 원하는 소비자들과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이런 필요는 단일하지 않았고, 그것 자체도 현지의 요구와 취향과 기후를 반영했다. 예를 들어 우유와 채소는 중앙아시아에 비해 서아시아 일대에서 식료품으로 더 중요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고기 소비가 눈에 띄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환의 패턴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했다. 목축민들은 식료, 자재, 상품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사치품과 사회 위계 및 부족 지도자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데 유용한 핵심 요소가 되는 물건의 원천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지위를 과신하는 데 사용하고, 자기 가족이나 친족 집단, 더 넓게 관계망을 상대로 사여했다. 초지는 집단의 공동 소유였지만, 동물은 개인의 소유였다. 그 결과로 위신은 가축의 구성이나 규모를 통해서 과시할 수 있었다."(243-4)


"인도는 일찍이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가 '제국이 없는 곳'으로 묘사한 지역이다. 특정 시기의 분명하지만 단명한 예외가 있기는 했다. 서기전 3세기 아쇼카 대제 치하 또는 500년 후 굽타 왕조 치하 같은 경우다. 그러나 대체로 말해서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에서 그렇게 중요했던, 그리고 말 사육과 정치적 경쟁에 의해 가속화된 합병, 팽창, 중앙집권화의 동력원은 인도아대륙에서는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생태적 요인이 여기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변동이 심한 기후 패턴에 따른 강의 불안정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강들은 자주 토사가 쌓이고, 수심이 깊은 수로가 막히며, 강의 삼각주가 예측할 수 없게 형성된다. 메콩강과 이라외다강은 하구에서 매년 50미터씩 육지를 넘어 확장된다. 자바섬과 솔로강은 라인강의 여섯 배나 되는 퇴적물을 나른다. 이 때문에 도시 생활은 위태로웠다. 동남아시아 일대의 주요 도시 정착지들은 자주 붕괴하고 버려졌다. 근세에 이르러서도 말이다."(251)


9장 로마의 온난기(서기전 300년 무렵~서기 500년 무렵)


"많은 사람들이 로마의 성취를 사회, 경제, 군사, 문화의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수많은 상이한 언어가 사용되고, 다양한 종교가 신봉되며, 다양한 관습이 받아들여지는 느슨한 정체성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로마와 그 시민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한 가지에 뛰어났다는 점이다. 그들은 적들에 비해 더 잘 조직되고 곤경에서 신속하게 빠져나올 줄 알았다. 그들은 남들에 비해 우호적인 상황을 잘 이용했다. 기회를 잡아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뛰어났다. 요컨대 로마는 그 모든 경쟁자들과 잠재적 경쟁자들을 압도했기에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또한 운이 좋았다. 우선 지중해가 다른 주요 바다나 수계에 비해 고요하고 건너는 데 덜 위험했다는 사실은 전체 연안의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이 다른 지역들에 비해 돈이 덜 들고 덜 위험했다는 애기다. 더욱이 연결망이 확장되거나 추가될 기회가 제공돼 교역이 증가하고 지적 지평이 넓어지며 공통의 문화적 가치가 확산됐다."(271-2)


"기후 조건도 로마가 이웃, 한 칸 건넌 이웃, 더 먼 이웃들과 대결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이례적으로 좋았다. 여기에는 서기전 200년 무렵부터 시작된 습도가 높았던 긴 기간이 포함된다. 이 시기는 그리스 및 페니키아 식민지의 확대, 그리고 로마 및 카르타고의 등장과 때를 같이한다. 이 시기는 '로마 온난기'(또는 '로마 기후 최적기')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는 350여 년 동안 지속됐다. 정확히 로마가 지중해, 유럽, 북아프리카, 지중해 동안에서 최강자로 떠올랐던 시기다. 이 시기는 지난 4천 년 중에서 단연 가장 습한 시기(꽃가루 및 바다와 호수 생물에서 나온 유기물 증거로 알 수 있다)였을 뿐만 아니라 지난 4천 년의 지중해 역사에서 단연 가장 생산성이 높은 시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것이 남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는 데 이바지했고, 그것은 다시 인구 증가, 정복을 위한 인력, 안정성을 개선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치권력자들이 자기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했다."(272)


"이 시기는 서로 연결되지 않은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제국의 시대였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제국은 흔히 이웃하는 세력권들이 서로 경쟁하고 모방하고 위협받는 상황을 이루는 것과 동시에 출현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팽창 과정이 일반적으로 기후 조건이 유리한 시기에,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는 긴 안정기에 일어난다는 것은 시사적이다. 서로 다른 성격의 제국 출현을 기후 때문으로 돌리고 싶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각 정치체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과 물류상의 기술을 개발했다는 사실이다. 각 제국은 그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반응에 직면했다. 중국의 한나라에서는 단일 문자 체계와 제한된 언어의 다양성이 화합과 제국 핵심의 강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 로마 영토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많은 언어가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사용됐다. 로마의 경우 서로 다른 민족들을 하나의 정치체로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이 더욱 인상적이었다."(275)


"로마는 하나의 유용한 사례 연구를 제공한다. 모든 제국, 국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성공이(그리고 도시화도) 막대한 환경 훼손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상품, 사람, 관념이 중심부로 몰려들면서 천연자원에 부담이 가해졌다. 그것들을 원거리에서 가져다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소비자와 산업에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추산은 쉽지 않으나 수십만 명에 이르는 로마 같은 대도시의 주민들에게 난방과 음식과 물자 등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는 데는 분명히 실제상으로나 물류상으로나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벽돌, 주화, 기와, 유리 제품, 철제 도구〉는 장작의 산물로 간주할 수 있다. 로마 전성기의 에너지 생산 규모는 그렇게 컸기 때문에 그린란드의 얼음에 들어 있는 납 미립자가 공업혁명 시작 이전의 어느 시대에 비해서도 많았다. 모든 제국은 생태발자국을 남긴다. 로마의 그것은 엄청났다."(277, 281)


10장 고대 말의 위기(500년 무렵~600년 무렵)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이렇게 썼다. 〈홍수, 전염병, 흉작, 또는 그 유사한 원인에 의해 때때로 인류에게 엄청난 재난이 닥쳤으며, 이에 따라 예술과 사회 제도에 대한 모든 지식이 사라졌다.〉 이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전승에 따르면 그런 재난은 인류에게 종종 닥쳤으며, 다시 일어나리라고 예상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아무리 암울해 보일지라도 인간 집단은 회복하고 〈마치 처음부터 시작하듯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은 훌륭하며, 공정하게 말해서 대체로 옳다. 그러나 어떤 재난은 다른 것들에 비해 더 심하며, 때로 그것이 가한 파괴의 규모가 파멸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6세기 전반에 잇단 기후 관련 현상들이 세계 곳곳에서 심각한 규모의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에 치명적이었던 것이 530년대와 540년대에 일어난 여러 차례의 대규모 분출이었다." "한 학자는 이렇게 주장했다. 〈530년대와 그저 추웠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이 시기는 전신세에서 가장 추운 때였다.〉"(308-9)


"학자들은 이 화산 폭발들 및 그와 연관된 기후 충격이 연쇄적인 사건들의 시작이라고 흔히 생각했다. 〈동로마 제국의 변화, 사산 제국의 붕괴, 아시아 스텝과 아라비아반도 바깥으로의 이동, 슬라브계 민족들의 확산, 중국의 정치적 격변〉 같은 사건들이다. 이것들은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남아시아 일대의 주요 변화와도 관련이 있고 또한 선지자 무함마드의 죽음 이후 이슬람 세력이 일어나고 광대한 아라비아 제국을 건설하는 길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화산 활동과 그 영향에 대해, 거대한 일련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혁명의 원인으로서가 아니라 기존의 문제를 악화시키고 당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던 파열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예를 들어 식량 부족은 수확량 감소와 함께 인구 압박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격변기의 수혜자가 더 잘 적응하거나 기회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사회·민족·문화였던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311-3)


"이례적으로 추운 날씨는 쥐의 생존과 벼룩 번식에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함에 따라 전염병 발생을 야기했다. 흉작을 메울 필요 때문에 지중해를 건너는 식량 수송이 늘었고, 그렇게 늘어난 접촉은 다시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을 초래한 연결망의 강화로 이어졌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햇빛 감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인간의 면역 체계와 특히 세균 감염에 대응하는 데 중요한 비타민 D 결핍을 초래한 것이다. 이런 요인들이 이제 대규모 전염병이 유행하는 데 완벽한 조건을 조성했다."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 주민들에 대한 유전자 연구는 그들이 자가염증성 질환에 민감하게 하는(그 결과 페스트균에 저항력이 강한) 돌연변이를 보여주었다. 재구된 그 유전체는 유스티니아누스 전염병, 1340년대의 흑사병, 그리고 그 후에 계속 나타난 전염병들과 일치했다. 6세기의 발병이 유전체에 새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유행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감염에 널리 노출된 결과로 주어졌음을 시사한다."(318-20)


11장 제국의 전성기(600년 무렵~900년 무렵)


"아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의 나이테와 남·북극의 얼음 시료 증거에 대한 새로운 연구는 626년에 대규모 화산 분출이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남극 자료에 징후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 화산이 북반구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북부 그린란드에서 기록된 이 분출의 황산염 변이가 지난 2천 년 동안의 최대치(18세기 말의 라키 화산은 제외하고)였다는 사실은 그것이 이후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다른 곳도 마찬가지다)의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의 원인이었음을 시사한다. 재구에 따르면 한창때에 섭씨 3.4도가 내려갔다." "압력과 위험을 늘려가는 일련의 환경에 직면해 취약함을 드러내는 곳은 정주 사회 국가들만이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이례적으로 추운 시기에는 수백만 마리의 가축이 금세 죽어나간다. 그런 재난은 종종 경기 부진에 기인한 사회적 영향을 촉발했다. 빈곤 증대와 대량 이주 같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체제 붕괴는 급속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331-2)


"이런 엄청난 변화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무함마드라는 젊은 상인이었다. 무함마드와 그의 운동 및 추종자들은 전쟁과 질병으로, 경제 위축으로, 그리고 붕괴하는 정주민 국가들과 유목민 연합(전자는 탈진했고, 후자는 끈이 풀어지고 있었다)의 세계 질서에 의해 생채기가 난 세계에 등장했다." "선지자 무함마드와 그 동반자들은 절묘한 정치적 합의로 메카의 지배층과 협정을 맺었다. 그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과거 이교도 사당이었덤 카바가 이 도시의 핵심으로 지정됐다. 이것이 아라비아반도의 여러 파벌들 사이의 화해를 위한 길을 열었고, 공통의 정체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그 정체성이 제공하는 우산 아래 지역의 서로 다른 모든 민족들이 모일 수 있었다. '후다이비야 화약和約'으로 잘 간직된 이 합의는 메카, 그 주변 지역, 그리고 무함마드 자신에게 전환점이 되었고, 세계사에서도 전환점 가운데 하나였다."(335-6)


"중앙아시아 알타이산맥의 나이테 기록, 아랄해의 염도 수준, 북대서양진동이 매우 활발해진 쪽으로 변화했음이 관찰된 것 등으로 판단해볼 때, 800년 무렵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더 춥고 더 습한 조건에서 더 따뜻하고 더 건조한 조건으로의 추세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제기한 문제는 오아시스 정착지 수의 감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착지는 이후 수십 년 사이에 거의 70퍼센트가 줄었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독특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란 서부와 유프라테스강 범람원에서 도시와 마을, 농경지가 버려진 사실을 보면 분명한 듯하다. 기후 변화에 더해진 것은 토양 염분의 급속한 증가로 인한 생태계 압박이었다." "이 문제는 800년 무렵 부유한 지배층이 자위, 연줄, 정치적 압력을 동원해 토지 소유를 성공적으로 늘려가기 시작하면서 더욱 악화됐다. 그들은 조세 체계와 수자원 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을 희생시켜 단기적인 이득을 가져왔다."(351-2)


12장 중세 온난기(900년 무렵~1250년 무렵)


"역사가 휴버트 램은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기후가 눈에 띄게 따뜻했던 서기 1000~1200년 무렵을 '중세 온난 시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후 수정을 거쳐 지금은 학자들이 보통 '중세 기후 이변' 또는 '중세 온난기'로 부르고 있다." "9세기에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북대서양을 건너 페로제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로 진출한 것은 또한 극지 빙모의 퇴각(이제 얼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종의 북방 이동, 육상에서의 초목 재배에 적합한 조건의 출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북대서양으로 진출한 것은 지역 교역망 및 지식 연결망뿐만 아니라 장거리 교역 역시 강화하는 더 넓은 활동의 일부였다. 동쪽과 남쪽에서 가장 두드러졌고, 그 결과 막대한 양의 은화가 우선은 노르드인의 땅과 발트해 지역에서, 이어 다른 곳들에서 유통되었다. 이런 활동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개입과 어우러져 생태계를 변화시켰다. 식용 동물 사냥과 교역도 마찬가지였다."(363, 369-71)


"서기 800년 무렵부터 서태평양 난수역暖水域의 해수면 온도가 갑작스럽게 낮아지고 강우대降雨帶가 북쪽으로 밀쳐졌다. 바누아투, 사모아, 통가, 피지가 있는 다도해의 습도가 떨어지기 시작해 과거 2천년 중 가장 건조한 시기가 되었다. 그보다 거의 1500년 전에 그곳에 정착한 이들 섬의 주민들은 그 이전에는 더 북쪽의 섬들을 탐험하려 하지 않았다. 설령 탐험했더라도 영구적으로 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착의 흔적이 거의(또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기상 패턴의 근본적인 변화를 거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바람은 폴리네시아 변경으로 가서 탐험하는 일을 쉽게 만들었다." "방사성탄소 분석은 이주의 물결이 먼저 쿡제도로, 그 후에 동폴리네시아로 넘어갔음을 보여준다. 하와이, 라파누이, 뉴질랜드 사이의 넓은 구역이다. 여러 섬들이 잇달아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도 식민화됐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데려간 돼지 등의 가축이나, 아마도 의도하지 않았을 쥐 등의 동물이다."(373-4)


"사회 및 환경의 변화는 900년 무렵 이후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분명했다." "비가 많이 내리면서 농작물 잉여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군도들 사이, 그리고 섬들과 남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교류가 증가했다. 이는 앤틸리스제도에서와 같은 도기 양식의 큰 변화로 입증될 수 있다. 그것은 흔히 섬들 사이의 교류가 급격하게 증가한 징표로 해석됐으며, 또한 전통적인 신들(그들이 이전에 건조한 상태를 유지해준 것이 이제는 좋지 않거나 심지어 잔인한 것으로 여겨졌다)에 대한 신뢰 상실에 따른 반응으로도 해석됐다. 그 맨 꼭대기에 있는 것이 다양한 동식물 종을 카리브해 여러 지역에 들여온 것이다. 그것이 변화의 촉매 역할을 했다. 이제 현지 주민들은 물고기, 게, 조류에 덜 의존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이들의 개체수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 섬의 삼림이 벌채됐다. 섬에 처음 들어온 동식물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후 변화가 교류와 신앙 체계와 심지어 식습관의 변화까지 초래한 것이다."(375-6)


"중세 초에 한 무리의 제국들이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에 생겨났다. 그 적절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송宋 왕조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왕조가 등장해 성공을 반복했고, 그들은 서로 모방하고 영향을 미치고 경쟁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무리를 지어 등장해 직간접적으로 서로를 자극했다. 인도 촐라 왕조, 지금이 미얀마의 파간, 캄보디아의 앙코르, 인도네시아 열도의 스리위자야, 지금이 베트남의 다이비엣이 거둔 성공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인도양과 아시아 상당 지역 일대에서 지리적·상업적·문화적 지평이 급속하게 넓어진 것의 일면이었다." "서로 뒤얽힌 인도양 세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고대에도 아시아 여러 지역의 해안과 내륙을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유럽과 연결하는 긴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활동의 규모였다. 시야와 야망이 거창한 국가와 왕국의 등장은 규모와 물량 모두에서 눈에 띄는 상업적·문화적 교환의 속도를 과시했다."(384-5, 388)


13장 질병과 신세계의 형성(1250년 무렵~1450년 무렵)


"칭기즈칸의 성공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통제와 협박을 위한 도구로서의 극단적인 폭력의 선택적 사용, 새로운 목표물을 찾아내는 기동력 있는 정찰대의 조직력, 정보 수집에서의 뛰어난 집행력, 새로운 기술과 전술 채택(예를 들어 대포의 사용), 전쟁터에서의 최대한의 혁신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성공의 연료는 1211년에서 1225년 사이의 이례적으로 많은 비가 내린 시기가 제공했던 듯하다. 몽골에서 이 시기는 무려 1110년 이상 만에 가장 비가 많이 내린 시기였다. 이런 기후 조건은 환경의 수용력을 크게 증가시켜 풀이 더 많이 자라게 하고 가용 초지를 극적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가축 떼의 규모를 크게 늘리는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말이었다. 칭기즈칸과 그 추종자 및 계승자들은 전술적으로 뛰어났겠지만, 몽골은 행운을 만난 덕분에 방대한 자원을 이용해 적들을 물리치고 제국을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주 제때에 할 수 있었다."(406-7)


"동아시아에서 1260년대 이후의 100년 동안에는 평균 기온이 자주 떨어졌다. 1270년대, 1310년대, 1350년대는 엄혹한 기후 조건이었음이 한국, 일본, 중국의 여러 문헌 및 기후 자료들로 입증됐다." "흉년이 들면 수입이 줄고, 그것은 식량 배급과 재난 구제로 인해 더욱 힘겨워졌다. 이는 결국 황제가 귀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떨어뜨렸다." "늘 그렇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런 점에서, 사회 불안이 이 시기의 일상적인 특징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영향은 14세기 초에 특히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 시대의 시인이자 작가이자 철학자였던 단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을 따서 '단테 이상 기후'로 알려지게 된 급속한 기후 변화 국면이다." "이 충격은 북유럽 일대 여러 지역에서 사회 불안을 초래했다. 남자, 여자, 아이들이 군중을 이루어 프랑스 곳곳에서 광란을 벌였다. 그들은 성채, 왕국 관리, 사제, 나환자를 공격하고 1320년 랑그도크 일대에서 특히 유대인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415-7)


"1336년에서 1339년 사이의 극심한 가뭄 현상은 일련의 연쇄 반응을 일으켰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나이테연대학 기록으로 입증된 강우 부족 현상은 초목 면적의 급격한 감소로 이어졌을 것이고, 이는 설치류 개체 수에 대한 압박(먹을 것과 물 공급 부족으로 사망률이 증가했다)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병원균을 옮기는 벼룩에 대한 민감성을 높였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전염병 전파자는 인간이었다. 몽골이 팽창에 의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가 만들어짐에 따라 경제적·문화적 교류가 촉진되고 교역로를 따라 빠른 정보 교환이 이루어졌다. 이 연결은 융단이나 옷 같은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적합했고, 그것은 벼룩, 진드기, 이가 확산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것이 감염을 촉진했다. 벼룩 등이 달라붙어 있는 사람과 동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식량, 구체적으로는 잡곡의 장거리 이동은 마찬가지로 '꼽사리' 설치류, 그들과 동반하는 기생충, 그리고 세균 자체를 위한 완벽한 조건을 제공했다."(421-3)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득이 있었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카드, 수레, 말, 황소, 노새, 배, 헛간, 곡물 창고〉가 더 많다는 얘기였다. 말하자면 '전염병 덤'이었다. 역설적으로 기후의 출렁임, 흉작, 장거리 교역에 대한 의존, 격렬한 전쟁, 질병 환경의 변화가 세 대륙에 걸쳐 공동체들을 초토화시킨 조건들을 낳았지만, 종종 장기적인 성장의 촉매제 역할도 했다." "몽골 제국의 건설, 아시아·유럽·아프리카를 가로지르는 상업적·문화적 연결의 강화, 매우 파괴적인 것으로 드러난 광범위한 대유행병 이후의 시기는 길고도 완만한 통합의 시기의 서막이었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확립된 정치적 중심지와 그곳들을 한데 묶은 연결망의 지리적 주변부에 있던 국가와 민족들이 팽창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열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거의 글자 그대로 말이다."(437-9)


14장 생태 지평의 확대(1400년 무렵~1500년 무렵)


"흑사병 이후에 여러 새로운 국가, 새로운 세계,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다. 그 중에서도 오스만이 유럽으로 팽창한 것은 다른 종류의 보상을 제공했다. 대륙 일대에서 기독교 국가들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단합이 이루어졌다. 유럽 왕국들 사이의 치열한 교전이 줄었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초부터 최소한 1600년까지는 갈등이 50퍼센트 이상 줄었다. 이는 오스만이 유럽으로 밀고 들어간 것이 종교개혁 및 개신교-가톨릭 공동체의 분열과 시기가 겹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오스만의 군사적 능력과 이슬람교 및 튀르크인의 팽창을 뒷받침할 동력은 교회의 역할과 지도자들의 도덕성에 관한 생각에 의문을 제기했고 추가적인 정복 위협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다. 따라서 오스만은 역설적으로, 개신교가 이전의 개혁 운동이 실팼던 방식으로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한 단결을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 이 과정은 유럽의 종교, 정치,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441-3)


"정복, 팽창, 왕조 교체가 언제나 구심력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들은 충격파를 던져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398년 티무르의 잔혹한 델리 약탈이 그랬다. 그것은 인도아대륙 상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했던 술탄국 분열의 촉매제 노릇을 했다. 그 붕괴는 도시국가들의 개화를 촉발했고, 이전에 북쪽의 수도로 흘러가던 조세 수입이 이제 지역에서 재분배되면서 지역 간 상호작용의 범위도 확대됐다. 델리의 손실은 구자라트와 오리사의 소득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원 왕조가 멸망한 뒤 몽골인들이 움츠러들면서 다른 이들에게 기회가 열렸다. 1390년대 한반도에서는 이성계 장군이 권력을 잡은 뒤 대규모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땅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려는 시도가 중심이었다." "1428년 다이비엣의 레 왕조는 〈평오대고平吳大誥〉를 발표해 명나라에 대한 승리를 축하했고, 여기서 〈이제 우리 다이비엣이 진정으로 문명화된 국가〉이며 독자적인 풍습과 풍광과 민족의 나라라고 선언했다."(457-8)


"유럽인들은 왜 애초에 본향 근처[서아프리카]에 머무는 대신 대서양 건너로 확장하고자 했을까?" "열대 아프리카의 질병 환경에 초점을 맞춰온 역사가들은 유럽인들이 역학적으로 중대한 약점이 있었음을 지적했다. 현지 주민들이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해온 말라리아와 황열병에 대한 면역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신세계'에서는 생물학적 승산이 그들에게 크게 유리했다." "이는 모두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서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 조직이 매우 발달해 식민화를 고려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수백 년 동안은 말이다. 사실 19세기까지 유럽인들은 〈해안에서 쏘는 대포 너머로〉 뚫고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콩고, 베닌, 오요와 기타 왕국들은 습격을 완벽하게 물리칠 수 있었고, 고국으로부터 아주 멀리까지 나온 소수의 사람들이 가하는 군사적 압박에 그다지 위협받지 않았다. 그들의 정착지는 해안의 몇몇 요새에 불과했고, 그들의 상업 활동은 협상에 의존했다."(46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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