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의 역사 - 변방의 민족에서 청 제국의 건설자가 되다
패멀라 카일 크로슬리 지음, 양휘웅 옮김 / 돌베개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만주족의 역사적 평가를 둘러싼 모순 


"주지하듯이 청조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가진 존재이자 세계적인 문화적 역량을 갖춘 국가였다. 청조를 ('왕조'가 아니라) 제국으로 이해하는 것은 청조의 문화적 다양성과 정치적인 복잡성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만주족을 민족적인 호칭으로서 정의하기 어렵다는 점을 충분히 고려한다 하더라도, 통치계층의 혈통은 만주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복자 엘리트들은 많은 기원을 가진 민족들로 섞여 있었다. 한인과 조선인, 몽골인, 튀르크인, 만주 일대의 퉁구스인, 그리고 후대에는 중앙아시아인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일찍이 중국 북부 일대를 정복한 1640년대 당시의 침략군인 청군의 구성을 보면, 극소수의 만주족과 날로 늘어가는 한족 출신 또는 한족 태생의 사람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 제국과 그 정책을 '만주족'의 것으로만 뭉뚱그려 묘사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또 19세기에 중국이 겪은 어려움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억지 해석을 내리려는 것이다."(34-6)


2장. 샤먼과 ‘씨족’: 만주족의 기원


"엄격하게 말해서 1635년 이전에는 어떠한 만주족도 없었다. 1635년은 건국 준비 단계의 청 제국에서 추종자들의 상당수가 앞으로는 새로운 이름으로 알려지게 될 것임을 반포한 해였다. 그해에 만주족으로 분류된 사람의 대부분은 과거에 만주에 살았던 사람들, 특히 당대唐代(618~907) 이래 중국을 기반으로 한 제국들에게는 여진족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그 조상이었다." "청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수 세기 동안 만주에 살았던 여진족과 '만주족'을 구분하려는 청조의 분명한 계획에 따라, '만주족'은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정치적인 고려는 제쳐놓더라도 새로운 민족적 감정의 형성에는 약간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이때까지 여진이란 명칭은 지리상의 용어로 널리 퍼져 있었을 뿐, 문화적으로는 매우 이질적이었으므로 옛 이름에는 더 이상 어떠한 실제적 의미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시대에 나타나 계속해서 그 면모를 보인 만주족의 문화는 동북아시아의 전통적인 생활과 근본적인 연속성을 드러냈다."(46-7)


"금 제국의 관료체제는 거란의 관료체제와는 거의 유사성이 없었는데, 유목사회와 정주사회의 기본적인 사회·경제적 차이에서 그 부분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거란과 몽골은 적어도 관료정책에서는 자기 민족 사이에서 나타나는 유목생활의 원칙에 대한 강한 애착을 두었고, 전통적으로 분할된 정치구조에 대해 용인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관료적·문학적 성취와 사회적 신분이나 업적을 연결시킴으로써 경제적·사회적 삶에서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현상을 탐탁찮게 생각한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거란족은 요조 아래에서 거행되는 시험에 참여하는 것이 조서로 금지되었고, 원 제국의 대부분 사람들에게 시험 응시의 기회가 유보되었다. 그러나 여진족의 경우, 2개의 언어로 된 시험을 확립하고 해당 민족들에게 시험의 참여를 장려하려고 공식적으로 시도했다. 이것은 매우 다른 국가적 대처법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관례는 모두 청 제국 관료체제의 전신이었다."(57-8)


"금 제국의 여진족이 만주 지역과 중국 북부를 통치한 때인 12세기에는 이미 근대 만주어의 단어 '무쿤mukūn'의 원형이 되는 단어가 사회적 협력체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사회적 협력체는 확장된 형태의 종족과 매우 흡사했던 것 같다." "누르하치의 통일전쟁에서 무쿤은 다시 기본적인 조직단위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누르하치가 동북쪽으로 팽창하며 마을을 합병하고 마을의 족장을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잘 작동되었다." "정복이 확대되고 팔기에 대한 행정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무쿤의 지배력이 느슨해졌다. 이것은 대략 백여 년에 걸친 과정이었다. 결국 만주족의 대다수가 불완전하나마 봉급을 받는 주둔군으로 중국에 정착했을 때 무쿤 본래의 결속력은 더욱 약화되었고, 만주족은 무쿤의 유대의식을 주로 조상의 제휴관계라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서 가리키는 조상은 대체로 누르하치 시대보다 더 앞선 시기의 사람들은 아니며, 많은 경우 중국을 점령한 시기 이전의 사람들도 아니다."(62, 66-7)


"샤먼shaman은 정신적인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여, 결과적으로 초자연적인 공간을 여행하고 그곳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샤먼은 병, 가뭄, 또는 동물의 이주를 일으키는 초자연적 힘을 인식하고 이에 개입할 수 있었다. 사냥이나 호전파 일당의 성공을 보장하는 샤먼의 능력 때문에 향촌과 종족의 지도자들은 필수적으로 샤먼과 친밀하게 지내야 했다." "무쿤은 수호신을 가졌으며, 샤먼은 집단의 구성원들을 위해 그러한 수호신과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무쿤과 영적인 수호신 사이의 관계는 모든 구성원에게 강력했지만, 족장에게 특히 강했다. 족장의 지위는 샤먼의 승인에 달려 있었기에 족장과 샤먼은 협력하여 일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여진족의 건국신화는 자기들의 전형적인 초기의 전쟁지도자 자체가 샤먼이었다고 주장한다." "청조 내내 황실의 황족은 샤머니즘적인 일련의 의례를 발전시켰다. 18세기에는 조정에서 주술적인 의례를 다룬 일련의 총서 편찬을 명령할 정도였다."(70-1)


3장. 누르하치의 수수께끼


"1618년 누르하치가 공식적으로 명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는 하늘에 무속적인 맹세를 하면서 우선 부친과 조부의 죽음을 언급했다. 그러나 이러한 언급은 명조 당국의 국경 침범에 대한 비난이라는 배경에서 발생했고, 여섯 가지의 다른 큰 비난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이 일곱 가지의 비난은 '칠대한'七大恨으로 뭉뚱그려져 알려져 있다. 칠대한의 일곱 조목은 모두 여진족의 영토에 뚜렷한 경계가 존재하고, 그 경계 안에서 여진족은 명군의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야 하며, 자치를 확보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1582년부터 1616년까지 누르하치가 여진족 및 그 주변의 여러 민족과 벌인 전쟁은 그 당시 그의 삶을 지배했다. 그 전쟁의 주요 원인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누르하치가 무조건 가차 없이 부친과 조부의 원수를 갚겠다고 마음먹고 특히 그 과정에 일조한 여진족 첩자들을 색출하여 없애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오로지 후대의 서술에서 나타난 것이다."(106-7)


"누르하치의 권력이 늘어남에 따라 그는 수도를 계속해서 이동시켰고, 그 이동방향은 끊임없이 서쪽을 향했다. 누르하치가 명조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분배할 수 있는 부가 극적으로 증가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기보다는, 현재의 수준이 제약될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칠대한七大恨을 표명한 원래 의도는 분명 누르하치의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 그 지역의 독립적인 추장들과 25년 이상 전쟁과 협상을 거친 이후 그가 결집시킨 거대한 여진족 연맹은 어느 정도 흐트러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적 침체의 압박, 명조 침략자의 경작 방해행위, 누르하치가 강제로 동맹관계를 맺은 동부 여진연맹에 남아 있는 분노를 잘 활용하는 한족 관료들의 약삭빠른 용병술 등이 이런 위험에 해당했다. 얼마간 누르하치는 북경으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관직과 거래의 독점권을 구걸하는 행위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1609년 이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완전히 멈춘 것 같다."(131-2)


"누르하치는 요동에서 새롭게 벌이는 전쟁 활동과 보조를 맞추고, 명조가 반박할 수 없을 만한 조건으로 자신의 선전·선동을 밀어붙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단언한 대로 후금은 12세기 여진족이 세운 금 제국의 합법적인 계승자였다. 그들은 같은 지역에서 살던 같은 민족이었다. 또한 같은 언어와 같은 전통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같은 씨족이기도 했다. 누르하치는 이제 명조를 '남조'南朝라고 불렀다. 이는 여진족이 세운 금조가 1127년에 송조를 중국 북부에서 몰아낸 후, 그들을 남송南宋이라고 언급한 사레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비유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역사적인 타당성 외에도 누르하치의 야망을 잘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명조가 누르하치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언급한 구도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명조는 후금의 여진족과 금 제국을 세운 여진족 간의 역사적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 점을 기념하기 위해' 북경 근거의 방산房山에 있는 금조의 황릉을 훼손했다."(132-3)


"누르하치는 자신의 휘하에 1만 명의 남성을 모았다고 알려졌으며, 말과 무기도 비교적 잘 갖추었다. 첫 번째 공격지점은 무순이었다. 이 공격을 통해 누르하치는 자신의 도전을 뒷받침할 힘을 극적으로 증가시키기에 충분한 인력과 무기를 확보했다. 확보된 무기 중에는 그곳의 명군이 보유하고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작한 대포도 포함되어 있었다. 누르하치를 진압하려는 명 제국의 시도는 효과가 없었다. 누르하치는 1619년 여름에 무순의 동쪽인 사르후Sarhū에서 첫 번째 명조의 원정군을 격퇴했고, 9월에는 자신의 동쪽에 있는 훌룬 집단 중 여허의 정치적 독립을 궤멸시켰다. 1621년 5월에 누르하치군은 명조 요동의 행정수도인 심양瀋陽을 차지했다. 그는 그 도시의 이름을 묵던Mukden으로 고쳤다. 그는 요동의 동쪽에 자신을 위해 새로운 처소와 행정 중심지를 건설했지만, 1625년에 묵던으로 영구히 이주했다. 묵던은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이끌게 될 국가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135)


"요동 정벌은 청 제국의 건설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므로, 우리는 종종 그것을 '탄생'이 암시하는 무한한 에너지, 희망, 야망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르하치에게는 그런 것들이 다소 다르게 보였음이 틀림없다. 1621년에 요동 대부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을 때 누르하치는 거의 62세였다. 그는 초년을 제외한 인생의 3분의 2가량을 끊임없는 전투 속에서 보냈고, 때로는 자신의 가족구성원들과도 전투를 벌였다. 자신의 통치를 소규모 촌락 집단에서 명조의 변경인 광활한 요동 지역을 포함한, 만주 전역으로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건설한 국가는 독점적인 경제권의 집행과 그 때문에 생겨나는 부의 통제를 기반으로 설립된 지역 정권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르하치는 요동을 장악하고, 중국과 조선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적 패권에 대한 인정을 어떻게든 받아내야 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했지만, 그가 더 많은 일을 하려고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140)


4장. 청 제국의 팽창 


"몽골족이 중국에서 세운 원 제국처럼 청조는 청 제국의 지배층과 정복당한 백성을 구분했다. 조정과의 친밀성 면에서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이 만주 지역에 있던 정복국가의 핵심집단을 형성했고, 중국 정복의 선두에 섰다. 종종 '러시아인'으로 불린 비교적 소수의 '알바진인'阿爾巴津人(Albazinians) 출신 기인과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키스탄 출신의 기인도 여기에 참여했다." "기인을 점령군으로 세운 데 대한 정치적·경제적 결과는 빠르게 느껴졌다. 정복 전에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기인들은 농산물의 생산자였으며, 그들이 불하받은 토지에는 세금이 매겨졌다. 요동에서도 홍타이지의 정책은 기인들이 자신의 전투에 동원될 때에만 그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에 그들은 자활하기 위해 농지·강·숲에서 일해야만 했다. 만주 지역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관습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기인들은 더는 생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봉급을 받았고, 불하받은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생활했다."(151-3)


"1700년대 기인의 상황에 대한 제국의 고민거리는 만능 정복자 엘리트를 창조하려고 한 한때의 원대한 계획이 강희제 치하에서 비참한 종말로 끝났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래에서 오스만리osmanli 계층이 겪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만주족, 몽골족, 한군기인은 모두 다부지고 지략 있는 병사이자 충분히 교육받은 박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새롭게 정복한 영토를 통치하고 안정시켰고, 필요에 따라 무관과 문관의 직책을 넘나들었으며, 기인 백성이 자기 절제와 수양의 길을 따르도록 권면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홍타이지는 정복한 한족 관리들을 불신했고, 그래서 정부의 민정 사무를 집행할 수 있도록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기인 계층을 양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인들에게는 많은 시간이 걸리는 위험한 공부에 투자할 시간도, 돈도 없었다. 그들은 출세로 나아갈 매력적인 방안을 더 많이 갖고 있었다. 전장에서 복무하는 것은 더욱 빠르고 좋은 보상을 가져다주었다."(154-5)


# 오스만리osmanli : 오스만 제국의 근간이 되는 민족


"18세기까지 청 제국은 정복왕조의 체제였으며, 그들의 자원은 침략과 점령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희제와 옹정제 치하에서 이 과정은 거의 완성되었다. 그들은 도로와 급수시설을 보수하고 통행세를 완화하며 비교적 낮은 임차료와 금리를 명령하고 명말의 농민반란으로 황폐해진 지역의 재정착을 위해 경제적 우대책을 만들어주는 등, 중국 경제 및 인구의 회복을 가져왔다. 17세기가 끝난 이후 한때 명조에 위협을 준 서몽골은 군사적·정치적 타격을 받아 제압되었고, 18세기 중반에는 서몽골, 중앙아시아, 티베트가 모두 청조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동부 유라시아 대륙의 통합이 재건되어 사마르칸트에서 조선까지 이어지는 육로교통이 부활했다. 물론 그들의 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은 13세기 몽골 치하에서 이룩한 성과의 희미한 흔적이었다. 청조는 '유교적' 표현방식이라고 평가받는 것들로 자기들을 표현하는 법을 신속히 배웠고, 18세기 중반까지 관료 엘리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을 끌어들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188-9)


"청조는 황제의 권력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제국의 국격을 향상시킬 수 있는 여러 문화를 자기표현의 방식에 포함시켰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세계 제국의 유산을 상속했다는 권리와 자기들의 정통성을 지탱시켜주는 많은 종교적 근거를 끌어냈다. 또한 만주기인으로부터 정복을 수행할 군사적 힘과 기술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청조 조정은 만주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정치적 전통에 접근할 권리를 유지했다. 한족으로부터는 관료적 기술을 끌어냈고, 중국의 지배와 조선과 베트남에 대한 도덕적 지도력을 정당화하는 유가의 도덕률도 이끌어냈다. 티베트인들로부터는 보편적인 불교의 지도자들만큼이나 초월적인 권력의 이양을 이끌어냈다. 이슬람교도들로부터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지배할, 추가적인 군사적 힘을 이끌어냈다.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는 수학과 의학에 대한 관념적인 통찰력은 물론이고, '화약 제국'의 실용적 기초 기술을 배웠다. 이를 통해 유목민인 몽골과 투르키스탄의 군대를 지배할 수 있었다."(189-90)

 

"제국의 초기에 팽창과 안정이 비상하게 결합하는 대목에서 강희제의 개인적 성품은 중요했고, 그 점이 그러한 제국의 확고한 기초를 다진 것에 대한 가장 큰 설명이 될 수도 있다. 중국 국내·외 모두에서 매력과 강압이 결합한 그의 태도는 만주족 귀족, 한족 관료, 한족 백성, 몽골족 사이에서 그를 핵심적인 자리에 자리매김하게 했고, 이는 그의 제국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했다. 그가 성공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근거는 없다. 그의 습관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고, 쓸데없이 국가에 가혹함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조부인 홍타이지처럼 역사를 이해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배우지 않는 사람은 남들한테도 역사를 돌아보지 않게 함으로써 지탄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갈단 치하의 몽골 지역에 대해서도, 오삼계가 다스리는 운남에 대해서도, 그는 누르하치가 명조 제국의 구조를 무너뜨린 원동력이었던 지역적 열의의 조직화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192)


5장. 건륭제의 황금시대


"자신을 만물의 군주이자 끝없이 도덕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로 설정한 건륭제의 신념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런 신념의 요소라든가 그런 신념을 표현한 어휘 대부분은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바르틴čakravartin)이라는 불교적 이상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전륜성왕은 부처의 이름으로 거행된 정복을 통해 만물의 구원이라는 다음 단계를 향해 세상을 움직이는 지상의 군주이다." "불교에 대한 건륭제의 보편적인 관심은 티베트와 몽골 지역을 결속시킨 종교적·정치적 이상의 집합체에 근거했다. 누르하치 시대 이래로 몽골인을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길이 티베트 출신의 라마승을 후원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은 분명해졌다. 알탄 칸Altan Khan이 이들 라마승을 몽골인의 정신적 지도자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청초의 황제들은 칭기즈 칸의 세속적 계승자로 나타나는 것에 대체로 만족했다. 그러나 건륭제는 제국의 수도인 북경을 라마교 왕국의 정신적 수도로 만들려고 했다."(199-201)


"차크라바르티니즘čakravartinism(전륜성왕을 신봉하는 신앙체계)의 토대 위에 건륭제는 모든 문화를 아우르는 자신의 도덕적 권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는 한족 군주들에게 적용되는 구절대로 '북신'北辰(북극성)이었다. 그 밖의 모든 별들은 북신의 주위에서 움직이고, 북신 자체의 부동성은 모든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한다. 실제로 모든 문화를 후원하기 위해 홍력(건륭제)은 각각의 문화에 규격화, 즉 더욱 정확하고 정형화할 것을 권면해야 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의 문화적 광휘의 진수이다. 문화적 우상에 대한 모방, 양식화, 복제는 말 그대로 문화에 대한 그의 보편적 표현을 이룩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실행의 이면에 있는 목적은 민족들 자체에 대한 객관적이고 묘사적인 지식을 발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논의되고 있는 여러 문화에 대한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의 세계주의cosmopolitanism에 대한 과시는 언제나 모든 문화가 집중하는 중심지로 황제 자신의 자리를 지목했다."(205-6)


"건륭조 조정은 몽골과 티베트뿐만 아니라 만주 지역과 만주족에 대해서도 특별한 이념적·전략적 관심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만주족은 청조로부터 새로운 이상에 문화적으로 순응하라는 기이한 압력의 부담을 받았다. 엄격하고 진부한 문화 유형에 대한 건륭제의 열정은 만주족에게 강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1765년 이후 건륭제는 기인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지 않는 한, 과거시험에서 거둔 일족의 성과를 보고함으로써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강희제는 자신을 위대한 기인의 모범으로 내세우고 기인의 발전을 위해 그들 앞에 자주 자신의 문학적·군사적 재주를 입증했지만, 건륭제는 기인에게 매우 다른 방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며, 모든 문화를 사랑하는 예술의 애호가이자, 만능의 황제로서 귀감이 되었다. 하지만 기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종교, 말타기와 활쏘기에 전념해야 했다."(214, 222-3)


"새로운 군사적 임무에 초점을 맞춘 기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국가는 그들의 경제적 고민을 완화해주고자 했다. 건륭연간 초기에는 한족에게 팔렸던 기인의 토지 상환을 위해, 약 1백만 량에 해당하는 은자銀子를 지급하라는 명령이 네 차례 내려졌다. 몇 년 안에 기인 군관들은 그렇게 받은 토지를 모두 다시 팔았다. 국가에서 최고 가격으로 상환해준 후에, 그 땅들은 새로 생긴 빚을 청산하기 위해 투매가격으로 다시 팔렸다. 이러한 정책은 18세기 중반 이후 폐기되었고, 홍력은 북경에 거주하는 많은 수의 기인을 만주 지역으로 이주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북경 또는 그 주변 지역으로 돌아왔고, 그들은 부득불 그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채 살았다. 1763년 군사행정 조직은 기인의 생존에서 가장 큰 장애가 그들을 다른 사회와 분리시킨 장벽이었음을 인식했다. 그해에 기인들은 정체성을 계속 유지했지만, 개인적으로 일자리를 찾고 주방 밖에서 생활하기 위한 허가를 자유롭게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225-6)


"1784년 이후 '광동 체제'(Canton system)로 알려진 관례가 확정되었다. 광동 체제란 유럽의 상인들이 광주廣州(즉 광동Canton)에서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 그들은 광주에서 중국 상인을 통해 보장과 보호 및 혜택을 받았으며, 모든 세수는 광주에 상주하는 대표를 통해 황실 가문에 직접 제출되었다. 이 행방총관은 유럽인들에게는 '호포'hoppo로 알려져 있었다. 이 체제가 독특하며 해상을 기반으로 한 자기들 제국과는 전혀 다른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 유럽인들에게 광동 체제는 비이성적으로 보였다. 미국이라는 식민지를 상실한 이후, 영국은 특히 자기들의 시장이 감소할까 두려워했다. 영국과 일부 미국 상인들은 중국이 개척되지 않은 거대한 시장이라고 믿었다. 고래의 지방으로 만든 등유, 인도 또는 미국 남부에서 생산된 면화, 런던 또는 코네티컷에서 제조한 총기류의 잠재적인 소비자가 중국에는 수억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오로지 광동 체제뿐이었다."(241-2)


6장. 스러져가는 제국의 최후 


"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남경조약(1842)은 그야말로 1840년대 내내 이어진 일련의 조약 중 첫 번째에 해당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조약으로 청나라 해안의 통치권과 그 내부의 통제력 대부분은 결국 상실되었다. 광주의 지방 관료들은 조약 이행을 지연시킨 반면, 조정은 희생양을 찾아내려고 애썼고 영국군과 맞닥뜨렸던 중국 남부와 중부의 각 성 기인들에게서 쉬운 목표를 찾았다. 군관들은 반역죄와 비겁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며, 종종 최고 형벌을 받았다. 기인들은 총체적인 무능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기인들의 죽은 시신을 묻어주고 그 시신을 기념하기 위해 걷던 특별기금도 거부되었다. 주방駐防에 할당된 토지는 종종 조정에 의해 팔렸다. 중원 정복 이후 언제나 침묵으로 고난을 견디지만은 않던 기인들은 공공연히 이의를 제기했다. 1850년대에는 폭동이 빈번하게 증가했다. 처음에는 만주 지역에서, 다시 중국 남부에서, 그리고 마지막에는 근근이 점령하고 있던 신강의 주방에서 폭동이 일어났다."(267)


"처음에 태평군은 하카Hakka(객가客家, 중국 북부에서 넘어온 이주자들)의 배타주의와 신도를 끌어들이는 태평천국 교리의 카리스마 넘치는 매력에 의지한 것 같다. 그러나 신도 수와 힘이 증가하자, 그들은 설교와 운영방법을 바꾸었다. 그들은 하카를 모집하여 다수인 한족과 상대하는 방식을 멈추고, 한족을 포섭하여 만주족과 맞서기 시작했다. 태평군의 우주론으로 볼 때 만주족은 악마와 같은 힘이 일찍이 발현된 존재였다. 태평군과 청군이 벌일 내전의 결과는 하느님이 중국을 통치하느냐, 악마가 중국을 통치하느냐를 결정하는 전투였다. 태평천국운동이 성장함에 따라 그 여파는 중국 동부와 북부까지 확산되었다. 극심한 공포감이 태평군의 공격보다 더 먼저 들이닥쳤다. 일반 주민들은 태평군의 노동조직과 군사조직에 징집될까 두려워했고, 엘리트층은 이질적인 신이 말하는 기이한 관념, 전체주의적 통치, 신체가 튼튼한 여성 등에 대한 공포감으로 움츠러들었다. 지역의 관료와 지주들은 자기방어 작업을 주도했다."(272)


"1856년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아편전쟁 종결 이후 체결한 조약의 조항들을 중국 측이 이행하지 않자, 유럽의 인내심은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동료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 남경을 방문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보낸 보고서는 충격적이었고, 신앙심이 깊은 신도들을 낙담하게 했다. 태평군이 무엇을 실천하고 있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었고,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유럽 측은 매우 신속하고 잔혹한 일련의 해안 공격을 결정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애로호 사건'이라고 불리는 2차 아편전쟁이다. 1860년에 그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여러 지역에서 온 용병들과 함께 태평군과 전투를 벌이는 청군에 합세했다. 다국적 군대를 조직하려는 시도는 때때로 시끌벅적했고 때로는 애처로웠지만, 유럽의 무기와 자본의 투입은 1860년대에 태평군과 염군의 반란 모두를 진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276-7)


"태평천국전쟁 이후의 회복 기간에는 청 제국에 근본적인 구조상의 변화가 있었다. 군사집단과 그에 협조하는 문관들이 지배하던 정복적 성격의 정권 대신에, 이제 개혁적인 귀족과 무관, 독립적인 권력을 가진 지방의 총독과 순무, 몇몇 외국인 고문관으로 구성된 컨소시엄 형태에 의해 지배되었다. 분권화된 통치형태는 내전 이후 시대의 특징이 된 지방 상황의 극심한 변화와, 지방의 개선을 가져올 수 있도록 지방 재정을 확보할 필요성에 잘 맞았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관계의 상황 속에서 청조는 강하고 중심적이고 통일된 지도력이 부족했다. 청조 정부는 가중되는 외국의 도전(특히 일본)과 늘어나는 배상금, 영토 손실, 불가피하게 그에 잇따르는 국경의 붕괴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이었다. 1860년대부터 청 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권력지대로 발전했고, 이 권력지대 내에서 지휘권은 지방의 총독과 순무에서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이양되었다. 청조 정부는 결국 의례상으로만 이들을 승인할 수 있었다."(296)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서 그랬던 것처럼, 유럽인이나 미국인들은 혜택받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청조를 식민지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땅도, 청 제국의 땅도 식민통치국의 힘에 의한 발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착취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재력을 가졌고, 따라서 착취는 식민화처럼 대가가 크고 위험한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략적인 동맹이나 외교적인 수단을 통해서 잘 이루어졌다. 두 제국이 자신들의 영토를 보전해주겠다고 마음먹은 유럽세력(중국의 경우에는 미국)으로부터 결국 유라시아의 '병자들'이라는 조롱을 받고, 자기들을 지켜주겠다는 국가에 맞서 자신들을 지킬 수도 없었으며, 자기들보다 훨씬 작지만 더 역동적인 국가에 시장과 원료, 전략적 이익을 제공함으로써 낮은 단계의 생존을 유지하는 국가로 남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청조 및 오스만 왕조의 존재 자체와 외국세력들의 간섭은 두 제국과 외국세력에 대해 늘어가는 대중들의 거부감에 불을 지폈다."(310-1)


7장. 에필로그: 20세기의 만주족


"〈태평천국전쟁 없이 만주족에게 어떤 근대적인 정체성이 있었겠느냐?〉라는 의문은 역사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만주족 본인들에게도 남아 있는 문제이다. 처음으로 태평군은 민족적인 어휘를 도입했다. 그들은 민족적으로 중국인에게 '한족'이란 단어를, '만주족'에게는 '만족'을, 몽골족에는 '몽족'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제시했다. 그들은 민족을 구별했을 뿐 아니라, 그런 구별을 행동으로 옮겨 만주족이나 만주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도살했다. 이러한 압박 아래에서 만주족 기인들은 신속히 자기들을 우선은 만주족으로, 그다음은 기인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제국을 파괴하고 처음으로 근대적인 중화민국을 수립한 민족주의 혁명에서도 반복되었다. 만주족에 대한 민족적인 저주는 1903년 사법 개정 이전에도 청조의 백성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제국을 비난할 수 있었던 개항장(치외법권 지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1895년 일본에게 패배한 여파로, 만주족의 결함은 크게 비난받았다."(316)


"민족주의 운동이 주창한 의도적인 민족차별의 정치적 타당성이 무엇이든 간에, 만주족이 치르는 희생은 엄청났다. 1911년에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됨에 따라, 민족주의자들과 지방의 비밀결사 출신인 그들의 지지자들은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민족적 증오심을 입증했다." "1912년 2월 전쟁의 최종 합의에서 만주족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안전을 보장했다. 그러나 (1924년에 폐지된) 그 조항이 준수될 것이라고 기대한 만주족은 거의 없었다. 소수의 만주족은 만주 지역으로 돌아갔다. 만주 지역의 충성스러운 보황파保皇派 군벌들은 그들이 안전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만주족은 자기들에게 낯선 지역으로 도주할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그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가족사에 관한 질문에는 거의 대답하지 않았으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등 좀 더 쉬운 전략을 택했다. 현재 만주족의 인구 비율은 전체 중국 인구 중에서 100명 중 1명에 약간 못 미치는 실정이다."(32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시간의 기원 - 스티븐 호킹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이론
토마스 헤르토흐 지음, 박병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장 역설


우주의 팽창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로, “물리법칙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오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는 곧 물리법칙의 일부는 수학적 필연성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나타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우주가 빅뱅의 열기에서 태어난 후 식는 과정에 관여했던 법칙도 마찬가지다. 입자의 종류와 힘의 세기에서 암흑 에너지의 양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생명친화적 특성은 출생증명서처럼 기본 구조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빅뱅의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태초 진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여기에 잔뜩 고무된 끈이론학자들은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우주마다 다른 물리법칙을 따른다는 다중우주 가설을 떠올렸다. 다중우주 지지자들은 궁극의 이론의 장례식을 치르는 대신, 우주론을 일종의 환경과학으로 전환하여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려고 했다.(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긴 하지만, 어쨌거나 환경은 환경이다!) 42-3)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숨어 있다. 이것은 나중에 언급될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 문제란 “다중우주조차 플라톤식 논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다중우주론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우주에 적용되는 ‘메타법칙metalaw’을 가정하고 있다. 그러나 메타법칙으로는 수많은 우주 중 우리가 어떤 우주에서 살고 있는지 알아낼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다중우주의 메타법칙과 우리 우주의 법칙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는 한, 다중우주론은 검증 가능한 결과를 단 하나도 내놓지 못한 채 역설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고 만다. 다중우주론은 근본적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이론이어서 우리 우주가 어디쯤 있는지 알 길이 없고, 앞으로 무엇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다. 우주가 여러 개라면 우리 우주의 역할은 무엇이며, 그 방대한 공간에서 우리의 위치가 어디인지 당연히 궁금해지는데, 다중우주 가설은 여전히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45)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가 우주론에 등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인 1973년의 일이었다. 그해에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코페르니쿠스 기념학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 참석한 브랜든 카터Brandon Carter(그는 호킹과 케임브리지대학교 동문이다)는 쟁쟁한 물리학자들과 우주론학자들 앞에서 인류 원리를 처음으로 발표했다. 지동설이 알려지고 400년이 흐른 후, 카터는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새삼스럽게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전혀 특별하지 않다면, 자신이 관측한 우주를 잘못 해석할 여지가 있다. 우리가 생명친화적인 우주를 관측하게 된 진짜 이유는 자신이 ‘그런 우주’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서, 생명을 위한 최적의 조건은 다중우주 전체에 걸쳐 인간과 무관하게 적용되는 인류 원리에 이미 포함되어 있으며, 이로부터 수많은 다중우주 중 생명친화적 조건을 구현할 우주가 선택된다는 것이다. 45-6)


다중우주의 열혈 지지자들은 ‘설계된 우주’의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두 번째 답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답은 존재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수학적 원리가 “아주 운 좋게” 생명체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었는데, 인류 원리로부터 제시된 두 번째 답은 “우주가 미리 설계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중우주의 지역적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무수히 흩어져 있는 우주 중에서 우리 우주가 인류 원리에 의해 생명친화적인 환경을 갖춘 우주로 선택되었고, 이 선택의 필연적 결과로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인류 원리에 기반한 세계관은 오래전부터 과학계에 회자되어온 ‘이원론dualism’을 연상시킨다. 물리법칙이나 메타법칙은 인간에 의해 발견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하여 물리계와 물리법칙(또는 메타법칙)을 연결하는 신비한 연결고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인류 원리라는 주장이다. 47-8)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생명친화적 특성을 탐구하는 것이 자신의 연구 영역을 넘어선 문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호킹은 추상적인 수학법칙이나 메타법칙만으로는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없다고 믿었다. 호킹이 추구하는 새로운 우주론에서 수학은 주인이 아니라 번잡한 일을 거드는 하인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호킹은 생명친화적 우주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물리학과 우주를 연구하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말 많고 탈 많은 인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류 원리가 “우주론에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올 주인공”이라는 주장에는 다소 회의적이었다. 호킹은 인류 원리를 하나의 연구 수단으로 도입했을 뿐, 그 질적質的인 부분까지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생물학처럼 “과거를 들여다보는 과학”은 질적인 예측을 다량으로 내놓는다. 그러나 인류 원리는 ‘예측 능력’과 ‘반증 가능성’을 철길로 삼아 잘 달려온 과학 열차를 사정없이 탈선시킨다. 48-9)


사고실험은 물리학 레스토랑에서 호킹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호킹이 이룩한 세 가지 획기적 업적은 정교하게 설계된 사고실험의 결과물이었다. 첫째는 고전 중력이론을 이용하여 빅뱅의 특이점singularity을 찾은 것, 둘째는 중력을 준고전적 관점에서 분석하여 블랙홀의 복사를 예견한 것, 셋째는 우주의 기원에 또다시 준고전적 중력이론을 적용하여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을 제안한 것이다. 블랙홀 역설은 ‘단순한 학술적 관심사’에 머물 수도 있지만(호킹 복사는 영원히 관측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중우주 역설은 천문 관측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다. 이 역설의 중심에는 생명계와 관찰자, 물리적 우주의 복잡다단한 관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호킹은 양자우주론을 통해 이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고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다중우주 역설은 그의 길을 안내하는 등대 역할을 했다. 우주론의 지도를 바꾼 그의 마지막 양자우주론은 그가 물리학계에 남긴 네 번째 선물이었다. 52-3)


2장 어제 없는 오늘


르메트르는 우주의 팽창이 일반적인 ‘폭발’과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폭발에는 ‘시작점’이라는 곳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주 공간에서 수명을 다한 별이 폭발했을 때, 그 지점을 향해 다가가는 관측자에게 보이는 광경과 도망가는 관측자에게 보이는 광경은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나 팽창하는 우주는 그렇지 않다. 팽창하는 우주에는 중심도, 가장자리도 없다.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즉, 팽창하는 우주에서 폭발하는 것은 공간 자체다. 르메트르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성운이나 은하는 풍선의 표면에 붙어 있는 미생물과 비슷하다. 풍선이 팽창하면 모든 미생물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미생물들이 일제히 자기를 중심으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즉, 모든 미생물은 자신이 팽창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슬라이퍼와 허블이 관측했던 적색편이는 공간 자체가 팽창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71)


아이러니한 것은 우주팽창설을 주장했던 르메트르가 아인슈타인의 상수 λ에 각별한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는 우주상수가 정적인 우주를 보장하는 항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에너지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에딩턴도 르메트르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우주상수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뉴턴의 고전이론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르메트르가 우주상수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정적인 우주를 만들기 위해 도입했다가 철회한 λ가 1장에서 언급했던 “생명체의 거주 가능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λ의 값을 잘 조절하면 별과 은하, 행성이 탄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충분히 길어지도록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르메트르의 그래프에서 거의 수평선을 따라 변하는 우주에 해당한다(르메트르가 계산을 끝까지 수행했다면, 이런 우주도 결국은 가속 팽창을 겪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73-5)


상대론적 우주론은 우주에 시작이 존재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시간이 0인 순간(르메트르의 “어제 없는 오늘”)은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인 특이점을 낳는다. 아인슈타인의 장 방정식도 이 지점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빅뱅은 상대론적 우주론의 초석이면서 아킬레스건이기도 하다. 우주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있다. 빅뱅이 일어나던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면, 그 전에 일어난 일을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빅뱅을 일으킨 원인을 추적할 수도 없다. 상식적인 우주에서는 원인이 결과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기 때문이다. 시간의 시작점에서는 인과율조차 적용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아인슈타인(그리고 에딩턴)과 르메트르가 벌인 논쟁의 핵심이었다.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은 “우주의 시작이라는 말 자체가 초자연적 존재를 연상시킨다”며 그와 관련된 논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77)


우주의 시작에 대한 아인슈타인과 에딩턴의 관점은 결정론적 우주관이 진하게 배어 있는 뉴턴의 고전물리학을 연상케 한다. 우주가 결정론을 따른다면 처음 탄생했을 때 향후 모든 진화 과정을 결정할 초기 조건이 존재해야 하며, 이 조건은 다사다난했던 진화 못지않게 복잡해야 한다. 특히 우주는 생명체의 등장을 허용했으므로, 동일한 수준의 생명친화적 조건이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모든 변수가 처음부터 생명의 탄생에 유리한 쪽으로 세팅되었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신의 행위”가 개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르메트르는 우주의 기원에 양자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인과율로 대변되는 결정론의 사슬을 끊었다. 르메트르는 (내가 아는 한) 최초로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연결지었다. 우주의 시작은 물리법칙을 따라야 하지만, 이 법칙에는 양자이론과 중력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중력은 빅뱅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는데, 그 빅뱅은 양자이론으로 서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77-8)


3장 우주기원론


펜로즈의 논리에서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면 붕괴가 팽창으로 바뀐다. 호킹은 여기에 착안하여 팽창하는 우주는 과거에 특이점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호킹과 펜로즈는 “팽창하는 우주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려서 최초의 별과 은하, 우주배경복사가 탄생하기 전으로 거슬러 가면 시공간이 휘어지다 못해 하나의 점으로 수축되는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우주 초기에 특이점이 존재했다면 아인슈타인 방정식의 양변이 무한대가 되면서(시공간의 곡률이 무한대이면 물질의 밀도도 무한대라는 뜻이다) 이론의 기능을 상실한다. 물리학 이론이 제아무리 기이하다 해도, 무언가를 0으로 나누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계산기에서 임의의 숫자를 0으로 나누면 에러가 나는 것처럼, 임의의 물리량을 0으로 나누는 순간부터 모든 논리는 난센스가 된다. 그러므로 특이점은 일반상대성 이론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한계점에 해당한다. 특이점에서는 어떤 사건도 일어날 수 없다. 88-9)


펜로즈는 상대성 이론에 기초하여 시간이 블랙홀에서 끝난다는 것을 증명했고, 호킹은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되돌려서 ‘시간의 시작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빅뱅이란 먼 옛날에 우주의 “씨앗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부화되기를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싹을 틔웠다는 뜻이 아니라, 대폭발이 일어난 순간부터 비로소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특이점은 시간의 탄생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탄인 셈이다. 호킹은 프리드만과 르메트르가 제안했던 완벽한 구형 우주가 단순한 이론적 모형이 아니라, 상대론적 우주론의 결과로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형태임을 입증했다. 지구에서 가장 단순한 형태의 박테리아는 약 35억 년 전에 출현했고, 지구의 나이는 이보다 조금 많은 46억 년 정도다. 빅뱅 특이점 정리에 의하면 136억 년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우주의 나이가 지구 나이의 세 배에 불과하다니, 이 정도면 생각보다 꽤 젊은 편이다. 89)


오직 “실험으로 검증 가능한 자연의 법칙”을 찾고자 했던 파인만은 1940년대 말에 양자적 입자의 파동함수를 훨씬 직관적이고 실용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양자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기본 아이디어는 고전물리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입자를 파동이 아닌 알갱이로 간주하되, 그 입자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때 “두 지점 사이를 연결하는 모든 가능한 경로를 동시에 지나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물론 고전역학에서 입자는 시공간에서 단 하나의 경로만 지나갈 수 있다. 즉, 고전적 물리계의 과거는 단 하나뿐이며, 아무런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정의된다. 그러나 파인먼에 의하면 양자적 입자는 훨씬 포괄적이어서 다양한 과거를 갖고 있으며, 시공간의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할 때 “모든 가능한 경로”를 동시에 지나간다. 단, 각 경로는 할당된 확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입자가 A에서 B로 이동할 확률을 구할 때에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가능한 경로의 확률을 더해야 한다. 103-4)


호킹은 양자역학에 대한 파인먼의 접근 방식에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아원자 세계에서 놀던 물리학자들은 파인먼의 새로운 이론 체계가 알려진 후 고향 땅을 벗어나 양자역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의 접근 방식은 외관상 매우 낯설었지만,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 존재했던 근본적 모순은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왜 그럴까? 파인먼의 경로합은 작은 물체와 큰 물체에 모두 적용된다. 그런데 큰 물체에 적용하면 다른 경로들보다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하나의 경로가 부각되고, 바로 이 경로가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얻은 경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인먼식 접근법을 수용하면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 다만 거시적 물체에서는 미시적 요동이 서로 상쇄된 후 끝까지 살아남은 단 하나의 경로가 고전적인 경로와 일치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로 가면 극적인 상쇄가 일어나지 않아서 많은 경로가 최종 결과에 기여하게 된다. 105-6)


하틀과 호킹은 “초기 우주가 팽창하던 시기에는 시간 차원이 양자적 불확정성에 녹아든 상태였기 때문에 특이점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호킹은 “빅뱅 이전의 상황을 묻는 것은 남극의 남쪽에 무엇이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면서 자신이 제안한 양자우주론을 ‘무경계 가설no-boundary proposal’이라 불렀다. 호킹의 무경계 가설에는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우주의 과거가 유한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즉 우주의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이 우주의 시작점을 찾겠다며  깔때기 표면을 개미처럼 아무리 기어 다녀도 절대로 찾을 수 없다. 깔때기의 둥그런 바닥은 과거가 끝나는 한계점일 뿐, 창조의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경계 가설에서 우주의 시작을 찾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접는 게 좋다. 그런 것은 양자적 불확정성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108)


4장 재와 연기


우주는 완벽하게 균일하지 않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물질을 ‘인플라톤장inflaton field’이라 하는데, 인플라톤장은 양자장quantum field의 일종이다.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인플라톤장에도 양자적 모호함이 존재해야 한다. 즉, 특정 위치에서 장의 값을 정확하게 결정할수록 그 위치에서 장의 변화율은 불확실해지고, 장의 변화율이 불확실하면 미래의 장의 값도 불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양자장은 다양한 변화율과 값이 혼재된 상태다. 이것은 입자의 다양한 경로가 더해져서 파동함수를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은 양자적 요동은 일반적으로 아주 작은 규모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느닷없이 일어나는 우주의 인플레이션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인플레이션 전문가들은 우주 초기에 일어났던 엄청난 팽창이 미세한 양자 요동을 증폭시켜서, 거시적 규모의 파동과 같은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123)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플레이션이 끝난 후 인플라톤의 에너지가 열에너지로 바뀌었을 때, 뜨거운 가스로 가득 찬 우주에 인플라톤장의 요동이 발자국처럼 남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탄생했다면, 복사 에너지의 온도와 물질의 분포에 작은 불규칙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 후 우주가 서서히 팽창함에 따라 초기에 생겼던 잔물결이 우주 지평선 안으로 들어오면서 인간이 만든 관측 장비에 포착되었다. 멀리서 일어난 파도가 해변가에 도달하여 피서객의 시야에 들어온 것과 비슷하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에 나타난 작은 변화가 인플레이션 이론의 예측과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를 여러 방향으로 추적해보면 뜨거운 지점과 차가운 지점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위치에 따른 물질의 밀도 변화도 중요한데, 이로부터 ‘은하의 씨앗’이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4)


인플레이션을 촉발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초기에 인플라톤장은 어떻게 에너지 언덕의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호킹의 무경계 가설이 해결사로 등장한다. 놀랍게도 무경계 가설은 우주가 인플레이션에서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창조의 순간에 시공간의 밑바닥이 완만한 곡면이었다는 것은 인플레이션 이론의 주장대로 신비한 스칼라 물질이 음압을 발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수 시간에 기초한 고전 우주론에서 음압을 발휘하는 물질은 초고속 팽창(인플레이션)을 유발하고, 허수 시간에 기초한 양자우주론에서 음압을 발휘하는 물질은 시공간의 바닥을 구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닫아놓는다. 따라서 창조의 순간에 적용되는 무경계 가설과 창조 직후의 상태를 설명하는 인플레이션 이론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쌍둥이 프로세스’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으며, 인플레이션을 양자적으로 완성한 버전이 바로 무경계 가설이다. 130)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인플레이션은 가능한 한 작은 규모로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초기 강도는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에 의해 결정된다.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이 언덕 꼭대기에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이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로 진행되어 공간은 엄청나게 커지고, 물질의 양도 풍부해져서 수십억 개의 은하가 탄생할 수 있다. 우리의 우주가 바로 이런 경우다. 이와 반대로 인플라톤장의 초기값이 에너지 곡선의 깊게 팬 골짜기 근처에 있었다면, 인플레이션이 아주 얌전하게 시작되어 우주 공간은 은하가 생성되지 못한 채 거의 텅 비었을 것이고, 자체 중력으로 다시 수축되어 빅 크런치big crunch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우주는 우리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무경계 가설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면 우리의 우주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길을 걸어왔어야 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자가 무경계 가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약점 때문이었다. 131)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시간 화살arrow of time’(시간이 과거로 역행하지 않고 오직 미래로만 흐르는 특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라는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적인 경험들은 명확한 방향을 향해 진행된다. 달걀은 깨질 수 있지만 깨진 달걀은 다시 붙지 않고,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늙지만 다시 젊어지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리고 별은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어 블랙홀이 될 수 있지만, 블랙홀이 다시 별로 환생하는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은 있어도,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 확고한 방향성, 즉 시간 화살은 물리적 세계의 배후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강력한 원리 중 하나다. 고대인들은 시간의 방향성을 목적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시간이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열역학 제2법칙2nd law of thermodynamics이다. 131-2)


지금으로부터 약 140억 년 전에 우주는 엔트로피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상태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후로 엔트로피가 커지는 쪽을 향해 꾸준히 변해왔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를 구별하는 시간 화살의 기원은 엔트로피가 극도로 낮았던 원시우주에서 찾아야 한다. 아마도 이것은 우주가 생물친화적 특성을 갖게 된 이유 중 가장 미스터리한 수수께끼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무경계 가설은 우주의 파동함수를 다루는 이론이므로, 인플레이션이 반드시 최소한의 규모로 일어날 필요는 없다. 양자우주의 기원은 하나의 값으로 떨어지지 않고 모호한 상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전자 한 개의 파동함수가 각기 다른 확률을 가진 여러 궤적의 합으로 표현되듯이, 무경계 가설에서 말하는 우주의 파동함수는 각기 다른 인플라톤장에서 시작된 다양한 인플레이션 우주의 혼합으로 표현된다. 즉, 양자우주는 단 하나의 팽창하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개의 팽창 역사가 중첩되어 있다. 133-4)


5장 다중우주에서 길을 잃다


지금부터 양자중력 이론의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끈이론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고대 그리스어로 “보이지 않고, 쪼갤 수 없는 물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원자atom는 종류가 90여 가지나 되지만, 끈이론에서 말하는 끈은 단 하나뿐이다. 입자의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끈은 물리적으로 완전히 동일하다. 모든 종류의 입자에 똑같은 끈이 숨어 있는 것이다. 종류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관점은 통일의 철학에 잘 부합되는 것 같다. 그런데 똑같은 끈이 어떻게 질량과 스핀, 전하 등이 제각각인 입자 무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답은 끈은 진동하는 모드에 따라 각기 다른 입자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전자와 쿼크는 물론이고 심지어 광자와 같은 매개입자(보손)도 끈이 고유한 모드로 진동한 결과다. 첼로의 줄이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을 내는 것처럼, 끈은 다양한 모드로 진동하면서 입자 동물원에 입주한 모든 종류의 입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155-6)


끈이론의 가장 큰 단점은 이론 전체를 아우르는 운동 방정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에는 장 방정식이 있고 양자역학에는 슈뢰딩거 방정식, 상대론적 양자역학에는 디랙 방정식이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끈이론 방정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끈이론으로 자연의 법칙을 통일하려면 꽤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옛날부터 3차원이라고 하늘같이 믿어왔던 공간을 무려 9차원으로 확장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언뜻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끈이론의 배경 수학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 황당한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공간이 4차원 이상이었다면, 인간의 공간 감각은 초과된 차원을 아득한 과거에 이미 인지하지 않았을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9차원 중 우주적 규모로 길게 뻗어 있는 3차원을 제외한 나머지 6차원이 초미세 영역에 돌돌 말린 채 숨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차원의 규모가 인간의 인지 가능 한계보다 작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158)


처음에 끈이론의 창시자들은 강력한 수학 원리를 이용하여 여분 차원의 기하학적 형태를 결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야무진 꿈은 얼마 가지 않아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다. 여분 차원이 취할 수 있는 기하학적 구조의 종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끈이론학자들이 이론의 다양한 요소를 결합하여 찾아낸 “숨은 차원이 취할 수 있는 기하학적 형태의 개수”는 관측 가능한 우주에 존재하는 원자의 수보다 훨씬 많다. 그리고 개개의 형태는 각자 나름의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하나의 우주에 해당한다. 이것은 여분 차원의 가능한 형태를 분석하다가 “수학적으로 가능한 우주”로 가득 찬 다중우주 전망도landscape가 완성되면서 알려진 사실이다. 표준 모형과 달리 끈이론에는 이론으로 결정되지 않는 매개변수(자연의 상수)가 없다. 상수를 인위적으로 집어넣을 일이 없으니, 이만큼 순수한 이론도 드물다. 그러나 바로 이 순수함 때문에 끈이론에는 무수히 많은 유효법칙이 숨어 있다. 159-61)


끈이론은 우주의 역사에서 엄청나게 많은 분기점을 발견해냈다. 하나의 섬우주에 거주하는 생명체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물리법칙이 우주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된다며 경이감에 빠질 수도 있고, 그 법칙이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세팅된 이유를 궁금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끈이론이 지배하는 변화무쌍한 다중우주에서 이런 생각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물리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우주에서만 통용되는 국지적 특징이며, 우리 우주가 빅뱅을 겪은 후 특별한 길을 따라 냉각되면서 남긴 독특한 흔적에 불과하다. 핀치새의 뾰족한 부리나 오른쪽으로 감긴 DNA처럼, 입자와 힘의 속성은 거대한 설계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우주에서만 발견되는 국지적 특징일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의 유효법칙도 우리 우주가 탄생 초기에 다윈의 진화와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나타난 결과이며, 그 진화적 특성은 이미 오래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162)


메타법칙과 무관하게, 또는 그보다 높은 수준에서 무작위 선택을 도입하는 것은 분명히 비인류학적인 발상이며,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신과 같은 위치에서 조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무작위 선택이란 우리가 다중우주를 느긋하게 내려다보면서, 비슷한 관찰자 중 ‘우리’를 선택한다는 뜻이다. 우리, 또는 다른 어떤 형이상학적 조직이 이 일을 수행하여 그 결과를 알고 있다면 여기서 내린 선택을 정당한 절차로 인정할 수 있겠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하나의 우주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임을 자각하는 것”과 “무작위 선택이라는 우주적 행위”를 동일시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유효법칙과 별과 은하, 일부 지역에 생명체가 서식하는 우주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우주의 전부이건, 아니면 방대한 다중우주의 일부이건, 우리 눈에 보이는 우주는 생명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한 물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 168)


6장 질문이 없으면 과거도 없다!


양자이론에서 무언가를 관측하는 행위는 우주의 역사가 두 갈래 이상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단, 관찰자는 자신이 속한 갈림길만 볼 수 있다. 즉, 개개의 갈림길을 따라가는 모든 관찰자(복사본)에게는 자신의 길만 살아남은 것처럼 보인다. 특정 관측자에게 할당되지 않은 다른 갈림길들은 그와 완전히 무관한 우주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진행되어 거대한 “우주 나무”의 일부가 된다. 모든 가능성이 존재하는 무한한 공간을 표류하게 되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서로 간섭할 수 없는 두 갈림길의 관계를 표현할 때 “분리되어 있다decouple”거나 “결어긋난 상태에 있다decohere”고 말한다. 그러나 개개의 경로(역사)가 모두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예인 이중 슬릿 실험에서 하나의 슬릿을 통과한 전자의 경로는 다른 슬릿을 통과한 전자의 경로와 얽히면서 스크린에 간섭무늬를 만들어낸다. 이는 곧 스크린에 형성된 무늬만으로는 전자가 둘 중 어떤 슬릿을 통과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188)


이제 실험을 조금 바꿔서, 전자와 상호작용하는 기체로 슬릿 근처를 에워쌌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태에서 전자가 슬릿을 통과하면 비록 기체 입자가 전자의 경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해도, 각 슬릿에서 발생한 두 개의 파동이 기체와 상호작용하면서 빠르게 약해지기 때문에, 서로 간섭을 일으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스크린에는 간섭무늬 대신 두 슬릿과 거의 비슷한 방향으로 정렬된 두 개의 밝은 줄무늬가 나타날 것이다. 이 상황을 에버렛의 논리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슬릿을 에워싼 기체는 파동 조각이 두 개의 분리된 역사(두 개의 갈림길)를 갖도록 만드는 관찰자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명확하게 분리된 두 파동은 더는 간섭을 일으키지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갔고, 그 결과 스크린에는 원래 슬릿과 비슷한 두 개의 줄무늬가 형성되었다.” 또는 슬릿을 에워싼 기체가 “전자가 둘 중 어느 쪽 슬릿을 통과했는지 확인하는 도구”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188-9)


거시적 세계에는 결어긋남을 초래하는 요인이 거의 모든 곳에 존재한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매 순간 수많은 관찰 행위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양자적 간섭이 모두 사라지고 무한한 가능성 중 단 몇 개만이 현실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우리 주변 환경은 미시 세계의 유령 같은 중첩과 거시 세계의 명확한 경험을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결어긋남 과정은 미시 세계의 끊임없는 양자 요동에도 불구하고 매우 견고한 고전적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구에 존재하는 개개의 사물은 수십 억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결과를 기록하고 쌓아오면서 우리 역사(무수히 많은 갈림길 중 하나)에 약간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에워싼 세상이 자신만의 특수성을 획득해온 방식이다. “우주를 양자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시간을 거슬러 가는 하향식 요소가 우주론에 추가될 것”이라는 호킹의 예측에는 바로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189)


물리학자들이 에버렛의 가설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 이유는 양자이론치고 지나칠 정도로 거창하고 황당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에버렛의 가설이 양자역학의 ‘다중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사람들은 ‘다중세계’라는 말을 들으면 똑같은 우주 여러 개가 똑같은 현실감을 갖고 공존하는 상황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버렛이 제안한 범용 파동함수universal wave function의 개념은 우주 전체를 양자적으로 생각하는 양자우주론의 초석이 되었다. 그가 생각한 우주는 복제되거나 더 큰 상자에 들어가는 우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계였다. 이로부터 탄생한 양자우주론의 전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주발생론 모형(무경계 가설 등)과 진화의 개념(끈이론이 낳은 우주 풍경에 적용된 파인먼의 경로합 등),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핵심 요소인 관찰자가 모여서 트립티크triptych(교회 제단에 걸려 있는 세 폭짜리 그림) 모양의 구조가 완성된다. 191)


이 그림에서 관찰자의 역할이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단순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양자우주론에서 관측은 더욱 깊은 수준의 양자적 행위를 의미한다. 즉, 관측이란 역사가 갈라지는 분기점에서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를 현실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항상 모종의 상호작용이 개입되어 있지만 인간이 수행하는 관측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실 세계에 구현된 결과는 생명체와 무관할 수도 있다. 관찰자, 즉 관측을 행하는 주체는 정밀한 기계나 슈뢰딩거의 고양이, 또는 석영 조각일 수도 있고, 우주 초기에 붕괴된 대칭일 수도 있으며, 마이크로파 우주배경복사에서 방출된 광자일 수도 있다. 우주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톰 리들의 백지 일기장과 비슷하다. 가능성의 영역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의 답이 존재하지만, 질문을 통해서만 답을 알 수 있다. 양자우주(우리 우주)에서 유형有形의 물리적 실체는 끊임없는 질문과 관측을 통해 드넓은 가능성의 지평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192)


이 얽힘은 양자우주론에 “과거로 진행하는” 미묘한 요소를 불어넣는다. 양자우주론에는 객관적 관찰자와 무관한 우주의 역사(명확한 시작점과 진화)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상향식 접근법(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가는 접근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깊은 수준에서 우주의 역사가 시간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반직관적인 아이디어가 담겨 있다. 마치 양자적 관측 행위가 시간을 거슬러 연속적으로 진행되면서 빅뱅의 결과(대형 차원의 수, 힘과 입자의 특성 등)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관과 반대로 과거가 현재에 의존하게 되고,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인과적 연결고리는 보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약해진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은 과거의 한순간에 각인되어 있으므로,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회고적인 요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위 수준의 법칙에서는 그와 같은 정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정보는 오직 미래에 실행되는 실험과 관측을 통해 복원된다. 193)


생물학적 진화의 역사에서 모든 생명체의 공통 조상이 루카LUCA인 것처럼, 우주론의 기원은 무경계 가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루카의 생화학적 구성성분을 아무리 철저하게 분석해도 그로부터 자라날 계통수의 형태를 미리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루카가 없으면 계통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경계 기원은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로부터 파생될 물리법칙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 우주의 계보와 법칙은 하향식 관측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빅뱅의 잔해인 우주배경복사의 온도가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양상은 강력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을 때 예상되는 온도 분포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여기에 하향식 논리를 적용하면 지금의 우주가 “생성될 확률이 가장 높은” 우주다. 그러므로 하향식 이론은 망원경으로 확인된 우주배경복사의 온도 분포와 강력한 인플레이션에서 예측된 (온도 이외의) 다른 데이터 사이에도 강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04-5)


7장 시간 없는 시간


플라톤은 이 세상을 동굴 벽에 드리운 그림자에 비유하면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완벽한 실체를 어설프게 투영한 그림자일 뿐이며, 수학적 형태의 완벽한 (그리고 우월한) 실체는 바깥세상(이데아)에 우리와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2400년이 지난 지금, 플라톤이 상상했던 이데아는 홀로그램 혁명을 겪으면서 엄청나게 달라졌다. 가장 최근에 제기된 홀로그램 세계관에 따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시공간의 얇은 조각에 숨겨진 현실이 4차원 시공간에 투영된 결과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원형原形이 이 세상에 투영되어 휘어진 시공간과 중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을 서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는 뜻이며, 양자적 입자와 장으로 이루어진 3차원 그림자 세계에 우주의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홀로그램 물리학은 “어딘가에 숨겨진 홀로그램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물리적 실체의 가장 깊은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213)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은 그야말로 “단순함의 전형”이다. 상대론적 블랙홀은 속내를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이 별로 만들어졌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졌건, 또는 반물질로 이루어졌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블랙홀이 가질 수 있는 물리적 특성은 단 두 가지, ‘질량’과 ‘각운동량’뿐이다. 모든 블랙홀은 오직 질량과 각운동량이라는 두 가지 물리량에 의해 구별된다. 일반상대성 이론에 등장하는 블랙홀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무한정 빨아들여서 사정없이 파괴하는 궁극의 쓰레기통이다. 그러나 베켄슈타인과 호킹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준고전적 엔트로피 공식에 의하면 블랙홀은 자연에서 가장 복잡한 물체로서, 고전적인 이미지와 완전히 정반대다. 왜 그럴까?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은 양자역학과 불확정성 원리를 고려하지 않은 고전적 이론이어서, 블랙홀 내부의 미세구조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217)


그렇다면 블랙홀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 그 안에 저장된 정보는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정보가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블랙홀을 “궁극의 지우개”라 할 만하다. 원래 블랙홀은 무엇이건 집어삼키는 천체였으니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는데, 문제는 양자역학이 이런 시나리오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기본 법칙에 의하면 모든 물리계의 파동함수는 정보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진화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파동함수가 양자역학의 법칙에 따라 진화하면서 정보를 인식 불가능한 영역으로 옮겨놓을 수는 있지만, 정보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다. 이것은 파동함수의 모든 가능한 확률을 더했을 때 반드시 1(100퍼센트)이 되어야 한다는 필수 조건과 관련되어 있다. 양자역학의 법칙에 의하면 백과사전을 통째로 불에 태워도, 남은 재를 양자적 수준에서 분석하면 모든 정보를 복원할 수 있다. 218-9)


이제 두 번째 시나리오를 살펴보자. 혹시 블랙홀의 정보가 호킹 복사에 암호로 저장되어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는 것은 아닐까?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는 거의 영겁의 시간이 소요되므로, 이것도 일견 그럴듯하게 들린다. 게다가 딱히 양자역학에 위배되는 구석도 없다. 그러나 이것은 호킹의 계산과 일치하지 않는다. 호킹 복사에는 블랙홀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홀이 호킹 복사의 형태로 자신의 질량을 방출할 때, 복사 스펙트럼에는 블랙홀의 미세구조나 역사에 관한 정보가 단 한 조각도 들어 있지 않다. 호킹의 복사 이론에 의하면 블랙홀이 최후의 질량을 방출하고 사라진 후에 남는 것은 무작위로 흩어진 열복사의 구름뿐이며, 이로부터 블랙홀의 정보는커녕, 과거에 블랙홀이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물리학자들은 블랙홀의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일반상대성 이론과 양자이론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19-20)


에드워드 위튼은 끈이론을 바라보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는데, 그의 논리에 의하면 다섯 개의 끈이론에 초중력을 포함한 여섯 개의 이론은 사실은 별개의 이론이 아니라 동일한 수학적 구조의 다른 얼굴일 뿐이었다. 위튼은 여러 개의 이론을 하나로 연결하는 복잡한 수학적 네트워크를 ‘M 이론’으로 명명했다. 물리학자들은 “외관상 다르게 보이는 이론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학적 관계”를 칭할 때 “이중성duality”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중성(또는 이중적) 관계에 있는 두 이론은 어떤 면에서 보면 동일한 이론일 수도 있다. 두 이론이 이중적 관계라는 것은 “동일한 물리적 현상을 두 이론이 각기 다른 수학적 언어로 서술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의 태동기에 극심한 혼란을 야기했던 파동설과 입자설도 서로 이중적인 관계에 있다. M 이론의 이중성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하나의 이론에서 엄청나게 어려웠던 문제가 다른 이론으로 전환했을 때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222)


1997년, 하버드대학교의 젊은 조교수였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는 두 개의 끈이론이나 두 개의 입자이론을 연결하지 않는 새로운 이중성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이것은 “중력을 포함한 끈이론”과 “중력이 없는 입자이론”을 연결하는 이중성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말다세나의 이중성으로 연결되는 두 이론이 각기 다른 차원에서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그의 눈에는 입자이론이 중력이론의 홀로그램처럼 보였다. 말다세나의 이중성을 ‘홀로그램 이중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입자 부분에 속한 양자장이 반-드지터 공간의 스노볼을 침투하지 않고 그 경계면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것은 말다세나의 이중성에 등장하는 입자 이론이 지난 20세기 중반부터 물리학자들이 사력을 다해 개발해온 양자장 이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점이다. 완벽하게 작동하는 “물질과 중력의 양자이론”이 홀로그램 이중성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223-4)


호킹은 2004년 더블린 강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블랙홀이 슈바르츠실트의 기하학으로 서술된다고 믿는 바로 그 순간부터 정보 유실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블랙홀의 정확한 상태에 대한 정보는 다른 기하학에 저장되어 있다. 아직도 혼란과 역설이 난무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 문제를 ‘단 하나의 객관적 시공간’이라는 고전적 관점에서 다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인먼의 ‘기하학 합sum over geometry’을 도입하면 두 개의 기하학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호킹의 새로운 하향식 연설이었다. 호킹은 자신의 논리가 지나치게 고전적이었음을 깨닫고 입장을 바꾸었다. 블랙홀이 탄생한 후 충분히 긴 시간이 지나면, 블랙홀의 과거와 현재 상태에 관한 정보는 블랙홀의 기하학적 구조에 저장되지 않고 새로운 시공간에 저장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향식으로 전향한 호킹은 자신이 젊었을 때 시공간을 이미 주어진 양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계산을 해보기도 전에 실수를 저질렀다고 인정했다. 231)


호킹 복사는 사건 지평선 근처에서 일어나는 양자적 요동으로부터 발생한다. 진공 중에서 양자적 요동에 의해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되고, 반입자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때마다 파트너 입자가 우주 저편으로 도망가는데, 이 현상을 멀리서 보면 마치 블랙홀에서 입자가 방출되는 것처럼 보인다.(이것이 바로 호킹 복사였다!) 그러나 한 번 쌍으로 태어난 입자와 반입자는 둘 사이의 거리가 아무리 멀어져도 양자적으로 얽힌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물리학 용어로 표현하면 두 입자는 서로 “얽힌 관계entangled”에 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우주로 도망가는 입자는 블랙홀에서 방출된 열복사처럼 보이지만, 두 입자를 모두 고려하면 둘을 연결하는 상호 관계 속에 어떤 형태로든 정보가 저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페닝턴과 현악사중주단은 블랙홀에서 증발하는 입자와 내부로 빨려 들어간 입자 사이의 얽힌 관계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쌓이다 보면 사건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웜홀로 발전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232-3)


8장 우주의 안식처


양자우주론에서 과거와 미래는 끊임없는 질문과 관찰을 통해 가능성의 안개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양자이론의 중심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이미 일어난 일”로 변화시키는 관찰 행위(관측자와 관측 대상의 상호작용)는 우주를 점점 더 확고한 실체로 만들어가고 있다. (양자적 의미의) 관찰자는 우주에 주관적이고 섬세한 요소를 불어넣는 창조적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관찰자는 지금 실행한 관측이 빅뱅의 결과를 바꾸는 것처럼, 우주론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미묘한 요소를 도입한다. 호킹이 자신의 최종 이론을 하향식 이론이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향식 우주론은 “설계된 우주”의 수수께끼를 뒤집는 이론이라고 할 수도 있다. 생명친화적 특성이 양자 수준에서 설계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생명과 우주가 궁합이 잘 맞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원래 깊은 수준에서 공존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249-50)


우주의 기원에 대한 호킹의 무경계 모형은 물리학과 우주론에 대한 역사적 관점(법칙의 기원을 포함하는 관점)을 구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무경계 가설에 의하면 창조의 순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구조적 특성이 점차 변하거나 사라지다가 결국에는 시간까지 사라진다. 태초에 시간은 공간과 융합되어 더 높은 차원의 구球를 형성하고, 이런 상태에서 우주는 완전한 무無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래서 호킹은 인과율에 입각한 상향식 접근법을 추구하던 시절에 “우주는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최종 이론을 구축하면서 빅뱅 무렵의 시공간에 대해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태초의 무는 우주가 탄생할 수도,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텅 빈 진공이 아니라, 시공간과 무관하고 심지어 물리법칙과도 무관한 인식론적 지평선에 가깝다”고 주장한 것이다. 호킹의 최종 이론에서 ‘시간의 기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점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과거의 한계점이다. 252)


연구 초기 단계에 호킹의 목적은 시간이 시작되던 순간에 주어진 물리적 조건으로부터 ‘설계된 우주’의 비밀을 푸는 것이었다. 그는 빅뱅 깊은 곳에 숨겨진 수학이 “우주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인과적으로 설명해준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호킹은 우주론을 거꾸로 뒤집은 후,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선택한 하향식 관점이 물리적 실체와 법칙 사이의 계층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하향식 철학에 의하면 우주는 법칙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기조직적self-organizing 실체이며, 그 안에서 온갖 패턴이 모습을 드러낸다(즉 ‘창발’한다). 이들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을 우리는 ‘물리법칙’이라 부르고 있다. 하향식 우주론에서는 법칙이 우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법칙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존재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답이 존재한다면, 그 답은 바깥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찾아야 한다. 2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아틀라스 역사 시리즈 5
김호동 지음 / 사계절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10 프롤로그


"유목은 목축의 특수한 형태이다. 목축은 가축을 사육하여 필요한 식량을 획득하는 경제 행위이며, 그런 점에서 농경과 마찬가지로 '식량생산경제'에 속한다. 다만 농경은 식물을 순화시키고 목축은 동물을 순화시켜 이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류의 경제생활이 수렵→목축→농경이라는 3단계로 발전해왔다는 주장은 이제 더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유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고정된 거주지나 축사 없이, 그 사회의 성원 대다수가 광역적·계절적 이동을 통해 가축을 사육하고, 목축 생산물을 통해 생존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량생산경제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목의 특징은 이미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이 간파한 바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 도시나 성채를 갖지 않고〉, 〈가축과 함께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하며〉, 〈모두 말 위에서 활을 쏠 줄 알았다〉고 하였다. 이는 유목민이 농경민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즉 이동생활, 목축경제, 기마술을 지적한 것이다."(15)


1) 고대 유목 국가


"스키타이Scythai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름이 알려진 유목민 집단으로 인도-이란계에 속하는 민족이었다.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여기에는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 왕 에사르핫돈(재위 기원전 680~669년)과의 전투에서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고 본다." "서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던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도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고, 겁먹은 이집트의 파라오는 스키타이 왕 마디에스에게 직접 선물을 바치고 화평을 청했다. 스키타이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에게서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 왕국의 공격을 받아 패한 뒤 캅카스 산맥을 넘어서 다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26)


"스키타이가 역사상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한 집단이라면, 흉노는 유라시아 동부 초원에서 처음으로 유목국가를 세운 이들이다. '흉노'라는 이름은 기원전 318년 전국 시대의 5개국과 연합하여 진秦을 공격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그렇다면 스키타이에 비해 3세기 반 정도 늦은 셈이다." "융戎, 적狄 등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정주생활을 하며 보병 위주의 전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중국측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유목민, 즉 계절적 이동을 하며 기마전을 수행하는 본격적인 유목민은 '호胡'라고 불린 사람들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로 넘어갈 무렵 전국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나타나는 이 '호'라는 명칭은 특별한 종족이나 국가를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농경생활을 하며 '화하華夏' 혹은 '제하諸夏'를 자처했던 중원 사람들이 자기들과는 다른 방식의 생활과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 동호, 임호, 누번, 흉노 등은 모두 '호'의 범주에 속하는 집단이었다."(34-5)


"중앙아시아의 여러 도시와 그 주민들의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중국 측 문헌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은 흉노가 발흥하여 몽골 초원과 서역을 장악하고 한 제국이 이에 대응하여 외교·군사적인 작전을 전개할 때였다." "흉노의 서역 지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다. 그러나 흉노에게 복속된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은 경제적으로 일종의 세금을 수취당한 것으로 보인다. 『한서』 「서역전」에는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있는 일축왕은 동복도위를 두어 서역을 통령토록 했는데, 항상 언기, 위수, 위려 사이의 지역에 거주했으며, 여러 나라에 세금을 부과하여 재화를 취하고 물자를 확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복도위는 현재 카라샤르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타림 분지 연변의 도시들에게서 '부세'를 거두었다. 이러한 '부세'는 각 도시가 갖고 있던 경제력, 즉 호구의 규모에 비례했을 것이다. 한나라도 서역을 장악하고 서역도호부를 설치한 뒤 수행했던 중요한 일이 바로 호구 조사였다."(48-9)


"흉노는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뒤 격렬한 내분에 휩싸였다. 우현왕이었던 악연구제가 선우위를 계승한 직후 자신의 즉위에 반대한 좌익 귀족들을 탄압하자, 좌익 귀족들은 호한이라는 인물을 선우로 옹립하여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흉노의 내분은 호한야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그의 형인 질지가 그를 축출함으로써 상황은 다시 급변했다. 몽골 초원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된 호한야는 기원전 52년 추종자들을 이끌고 고비 사막을 건너 한의 황제에게 스스로 신하를 칭했다. 호한야는 입조와 칭신을 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질자를 들이고 공물을 헌납함으로써 중국의 황제와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한과 흉노의 관계도 '화친관계'가 아니라 '조공관계'로 바뀌었다." "흉노는 한에 대해 명분에 불과한 정치적 복속을 표방하는 대신 막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아냈고, 이는 하나의 전략이었다. 중국은 막대한 재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약탈→위기→물자 지급이라는 종래의 방식보다는 훨씬 나았다."(54-5)


"기원후 48년 흉노는 또다시 내부의 격변을 겪으며 남북으로 분열되었으니, 이를 기원전 50년 전후의 분열과 구별하여 흉노의 2차 분열이라고 부른다. 2차 분열의 원인은 1차 분열과 마찬가지로 선우위를 놓고 벌어진 계승분쟁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흉노는 후한 양국은 과거 화친이나 조공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중요한 특징은 ① 흉노인들이 한나라 국경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 ② 칭신하고 공물과 질자를 보내는 것은 같으나 한 조정으로부터 사흉노중랑장이라는 관리가 파견되어 그의 감호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흉노중랑장은 후일 12명으로 늘었지만, 흉노 내부의 행정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남흉노는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한 제국 내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기보다는, 그 보호 아래 하나의 국가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각자 본국의 습속을 유지하며 한나라에 복속하던〉 후한의 '속국'이라 할 수 있다."(56-7)


2) 투르크 민족의 활동


"돌궐突厥(튀르크Türk)의 건국 집단은 원래 투르판 부근에 살았는데, 유연을 격파한 뒤 중심지를 몽골 서부의 외튀켄 산지(오늘날의 항가이 지방)로 옮겼다. 카간은 한 지점에서 광대한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를 분할하여 지배하는 방식을 취했다. 무한 카간은 제국을 셋으로 나누어 자신은 외튀켄에 자리잡고, 동방과 서방은 가까운 일족에게 통치를 맡겼다. 타스파르 카간도 이러한 방식을 답습했다. 과거 흉노가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동시에 좌우현왕을 두었던 것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통치자의 칭호도 모두 '카간'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그런 의미에서 돌궐의 이러한 지배 방식은 '분국分國 체제'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권력의 약화와 분권화 현상을 초래하여 마침내 제국이 분열되기에 이른다. 지배집단 내부에서 벌어진 격렬한 대립과 반목은 제국의 안정적 발전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76-7)


"아랍 세력이 본격적으로 중앙유라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661년 새로운 세습적 칼리프 체제인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고 수도를 다마스쿠스로 옮긴 뒤부터였다." "738년 후라산의 신임 태수로 임명된 나스르 빈 사야르는 종래 정복 일변도의 진출 방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새로운 정책을 표방했다. 서투르키스탄 지배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력적 강제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는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적극 추진하고 개종자에게는 세금 혜택을 주었다. 바로 그때 후라산에서는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는 세력이 이븐 무슬림을 중심으로 결집하고 있었다. 그는 '아바스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나스르 빈 사야르가 사망한 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많은 서투르키스탄 주민들이 그와 연합함으로써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아랍 세력이 서투르키스탄에서 확고한 기반을 다져나가는 사이, 때마침 당 제국은 이 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92-3)


"751년 여름 당과 아랍의 군대가 탈라스 강가에서 만나 전투를 벌였다.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당군의 지휘관이 고구려 유민 고선지였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과 지야드 이븐 살리흐의 아랍군은 751년 7월 탈라스 하반의 아틀라흐에서 전투를 벌였다. 닷새간 대치하던 중 당군의 일부를 구성하던 카를룩 유목민들이 배반하여 아랍 측으로 넘어갔고, 그 겨로가 당군은 좌우로 협공을 당하여 참패하고 말았다."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755~63년)이 터지면서 당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해서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이슬람 세력이 서방을, 티베트가 동방을, 투르크 유목민들이 북방을 차지하며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접어들어 티베트와 투르크가 약화되기 시작하자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아랍의 정치적 우위는 확고해졌고, 종교적으로 이슬람화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 되었다."(94-5)


"안사의 난은 당 현종 시대에 화북 변경지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그드 출신 안녹산과 사사명이 755년에 일으킨 반란이다. 반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745년 돌궐 제국이 붕괴하자 그 영내에 있던 수많은 소그드인들이 안녹산 휘하에 편입되었고, 이들이 그 뒤 반란의 주된 군사력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위구르의 지원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난 당의 황제와 장군들은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주었지만 그들의 약탈을 멈추지는 못했다. 762년 다시 반란이 일어나자 당은 위구르에게 또 한 번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4000명의 기병이 남하하여 당군과 연합하여 낙양을 탈환했다. 당나라가 이처럼 극도로 무력해진 상황에서도 위구르는 당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정복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변방에 시장을 열어서 말과 비단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만 했다. 이는 중국을 영토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는 화친이나 교역을 통해서 필요한 물자를 확보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100-1)


"위구르 제국 시대에 몽골 초원에는 과거에는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현상들, 특히 정주문명의 요소들이 현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규모 성곽도시의 출현이 좋은 예이다." "위구르인들의 성곽도시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3대 뵈귀 카간이 세운 오르두발릭(오늘날 카라발가순)이다. 이곳은 중국, 중앙아시아, 서부 유라시아 초원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돌궐·위구르·몽골이 모두 이곳에 제국의 중심을 두었다." "오르두발릭의 모습은 821년경 그곳을 방문한 아랍인 타밈 이븐 바흐르가 남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는 위구르의 카간이 제공한 역참을 이용하여 초원을 횡단할 수 있었다. 성벽에는 거대한 철문 12개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성 안에는 많은 시장들에서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다. 위구르 시대에 이러한 대형 성곽도시의 출현은 돌궐 제국 이래 독자적인 문자의 창제와 사용, 보편 종교의 확산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가히 유목사회의 '문명화'라고 부를 만하다."(102-3)


3) 정복왕조와 몽골 제국


"'카라 키타이Qara Kitai'는 여진의 공격으로 거란 제국이 망한 뒤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 거란인 및 그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나라는 역사상 '서요西遼'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125년 거란 제국 멸망 후 서방으로 이주한 거란인들의 지도자는 야율대석이었다. 그는 1137년부터 서투르키스탄을 경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에는 서부 카라한 왕조가 있었지만 이미 쇠약해져 신흥세력 셀주크에 복속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셀주크의 군주 산자르는 서부 카라한의 마흐무드와 연합하여 1141년 가을 카트완 평원에서 카라 키타이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전투는 셀주크의 참패로 끝났고, 야율대석은 그길로 사마르칸드에 입성했다. 카라 키타이는 카라한 왕조, 천산 위구르 왕국 등을 부용국으로 삼고 샤흐나(샤우캄)이라는 관리를 보내서 감독했다. 이 왕국은 13세기 초 칭기스 칸에게 쫓겨 망명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룩에게 권력을 빼앗길 때까지 반세기 이상 존속했다."(122-3)


"9세기 중반 키르기즈의 침공으로 위구르 제국이 붕괴하고 다수의 위구르 유목민들이 초원을 떠나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했지만, 정작 키르기즈인들은 초원에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살던 예니세이 강 유역으로 돌아가버렸다. 이로 인해 몽골 초원에 힘의 공백이 생겨나자 새로운 주민들이 대거 몽골 초원으로 유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구르 제국의 동북부 변경지역에 살던 타타르 부족을 비롯한 몽골계 집단들은 다양한 시차를 두고 풍부한 초원을 찾아 이주해 들어왔다. 이 몽골계 집단들은 당대의 한문 기록에 '실위室韋'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고 그 가운데 '몽올실위蒙兀室韋'라 불린 집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사례인데, 이처럼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단에 불과하던 몽골에서 칭기스 칸이 출현했고, 그 후 그곳의 유목민들은 모두 스스로를 '몽골'이라 불렀다. 『몽골비사』와 『집사』에도 이들의 이주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흥미로운 설화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126-7)


"12세기 중반 몽골 고원의 유목민들은 '울루스ulus'라 불리는 집단으로 나뉘어 살고 있었다. 울루스라는 말은 원래 '사람', '백성'을 뜻하지만, '부족', '나라'와 같은 뜻으로도 쓰였다. 대표적인 울루스로는 나이만, 케레이트, 타타르, 메르키트, 오이라트, 몽골 등이 있었다." "울루스라는 사회조직은 '오복oboq'이라는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를 들어 몽골이라는 울루스 안에는 칭기스 칸이 속한 보르지긴을 위시하여 바룰라스, 우루우트, 망구트 등 많은 오복들이 존재했다. 이 오복은 동일한 '뼈(yasun)'를 갖는 부계 친족집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동일한 혈족 집단이 아니라 어떤 한 가문의 정치적 지배를 받아들인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이라는 주장도 최근 제기되었다. 사실 12세기 유목민 사회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 분화가 확인된다. 정치적 종속 관계에 따라 '노얀noyan'이라는 지배층, '카라추qarachu'라는 평민, '보골boghol'이라는 예속 집단이 존재했다. 울루스는 최종적으로 '칸khan'의 지배를 받았다."(128-9)


"1260년경 쿠빌라이의 집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몽골 제국의 지배체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이제까지는 하나의 통일제국이 4개의 지역 정권, 즉 '칸국khanate'으로 분열되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 방식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올바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몽골 제국, 즉 '대몽골 올루스'라는 거대한 정치체는 칭기스 칸 일족들이 보유하는 다수의 울루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몽골 제국이 울루스들의 연합체라는 구성적 원리인 '울루스 체제'는 14세기 중후반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울루스 상호 간의 역관계가 변화하면서 몇몇 대형 울루스들이 사실상 제국을 분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대형 울루스의 지배자들이나 거기에 속한 몽골인들은 여전히 자기가 몽골 제국이라는 더 큰 정치체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몽골 제국이 4개의 독립적인 국가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다."(142)


"따라서 쿠빌라이가 집권과 함께 중국적인 왕조인 '원元'을 창건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 물론 그는 제국의 수도를 당시 '키타이'라 불리던 내몽골·북중국으로 옮기고 중국식 연호와 제도를 채택했다. 1271년에는 『주역』에 나오는 '대재건원大哉乾元'이라는 구절에서 '대원大元'이라는 글자를 택하여 국호로 반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이 곧 독립된 왕조의 탄생을 말해주는 증거는 아니다. 비록 한문 자료에는 그런 오해를 유발시키는 기록들이 많이 보이지만 실제로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당시 몽골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14세기 전·중반의 비문들을 보면 〈대원이라 불리는 대몽골 울루스〉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원'이 몽골 제국의 한자식 명칭에 불과한 것이며 쿠빌라이가 새로운 왕조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쿠빌라이는 자신이 대몽골 울루스의 최고 지배자 카안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142-3)


4) 계승국가의 시대


"티무르는 1360년부터 시작된 투글룩 테무르 칸의 침공과 그로 인해 빚어진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여 부족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1369년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유목집단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는 몽골 제국의 정치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칭기스 칸의 후예가 아니었던 티무르는 '칸'을 칭하지 못하고 '부마(güregen)'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들의 지도자를 뜻하는 '아미르amir'로 불리며 사실상 군주로 군림했다. 그는 1405년 중국 명조 원정길에서 사망할 때까지 유라시아 각지를 누빈 희대의 정복자였다." "당시는 몽골 제국과 칭기스 일족의 카리스마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대였다. 그의 끊임없는 원정도 실은 권력의 합법성이 취약한 그가 차가다이 부족민들의 내부적 불만과 반발을 밖으로 돌리려 한 것이다. 그는 이슬람의 수호자로서 수행하는 '성전', 그리고 대몽골 울루스의 재건이라는 명분과 목표를 내세워 통합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170-1)


"15세기 중반~16세기 전반에는 중앙유라시아에서 대규모 민족 집단들이 출현하거나 이동하는 현상이 눈에 띈다." "14세기 말~15세기 초 주치 울루스가 약화되어 분열하자 아불 하이르 칸이 울루스의 좌익에 속하는 유목민들을 통합했는데, 이들이 바로 '우즈벡 울루스'이다." "한편, 아불 하이르의 강력한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주치의 후손들 가운데 기레이와 자니 벡이 유목민들을 이끌고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톈산 북방의 모굴리스탄 초원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이들은 우즈벡 울루스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카자흐Qazaq'라 불렸다." "키르기즈는 고대 이래로 예니세이 강 상류 지역에 살면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집단이었다. 이들은 15세기 전반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러시아 역사학자 바르톨드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즈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176-7)


"1487년 칸으로 즉위한 다얀 칸(바투 뭉케)은 약화된 동몽골을 통합하여 일으켜 세운 뒤 모두 6개의 만호(tümen)로 나누어 자식들에게 분봉했다. 그 뒤 몽골을 지배한 칭기스 일족은 모두 다얀 칸의 6만호를 지배했던 그의 후손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칭기스 일족의 역사에서 중시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얀'이라는 명칭은 대원大元을 음역한 것이므로 몽골 제국(대원)의 정통을 계승하겠다는 정치적 선언도 내포하고 있다." "다얀 칸은 자신의 지배 아래 들어온 몽골인들을 모두 6만호로 재편하여, 좌익에 차하르·우량카이·할하의 3만호를, 우익에 투메드·오르도스·윙시에부의 3만호를 배치했다. 그는 이 6만호에 속하는 유목민들이 유목하는 지역적 범위를 정하고, 각 만호를 지배하는 칸에는 자기 아들들을 임명하여 세습하게 했다. 다얀 칸과 그의 후계자 보디 알락은 차하르부의 수령이자 좌우익 전체를 지배하는 칸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6만호 체제는 이후 몽골 유목민의 정치적 구성의 골간이 되었다."(182-3)


"중앙유라시아에 등장한 수피 교단들 가운데 낙쉬반디 교단은 서아시아 각지는 물론 중앙유라시아와 중국 서북부, 동남아, 인도, 동유럽, 아프리카 등 이슬람권 각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국제적' 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장로들은 '호자khwaja(和卓)'라는 존칭으로 불렸으며 그 복수형인 '호자간khwajagan'은 교단의 별칭이 되었다. 이들의 영향력은 종교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오아시스 지대의 일반 주민들뿐만 아니라 벡 계층에서도 광범위한 추종자들을 확보한 그들은 무장한 추종세력들을 배경으로 칸위 계승분쟁에도 간여하여 강력한 세속권력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마침내 1680년 호자 아팍크는 준가르 군대를 앞세워 카쉬가리아 지배권을 장악했고, 이로써 몽골 제국 이후 확고하게 유지되던 칭기스 일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 대신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영향력을 기반으로 등장한 '호자' 집단이 정주적 토착 수령인 '벡' 집단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의 새로운 지배세력으로 자리 잡았다."(188-9)


"몽골 제국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 특히 사카파 교단이 칭기스 일족의 보호를 받으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몽골 제국이 붕괴된 뒤 티베트 불교도 침체를 겪으며 몽골인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상실했으나, 16세기 후반 알탄 칸의 적극 후원에 힘입어 다시 흥륭했다. 다얀 칸의 적통인 차하르부 출신이 아닌 그는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1576년 티베트에서 겔룩파의 대표 소남 가초를 초청하여 청해의 차브치알에서 역사적인 회견을 가졌다. 소남 가초가 알탄 칸을 쿠빌라이의 전쟁轉生으로 인정하자 알탄 칸은 그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는 교단의 스승들에게 이 칭호를 추존하고 자신은 3대 달라이 라마가 되었다. '달라이'는 몽골어로 '바다'를 뜻하기 때문에 이 칭호는 '사해와 같이 넓은 지혜를 지닌 스승'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후 티베트 불교는 남북 몽골에 빠른 속도로 퍼지면서 몽골의 종교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몽골과 티베트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190-1)


5) 유목국가의 쇠퇴


"17세기 전반 청 제국의 출현은 중국과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중앙유라시아 세계 전체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청 제국을 건설한 만주인들은 처음에는 몽골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나 자신들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오히려 그들을 차례로 복속시켰다. 나아가 몽골과 정치·종교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던 티베트를 장악하고, 마지막으로 서몽골 준가르를 붕괴시킴으로써 톈산 남북의 동투르키스탄까지 정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청 제국의 흥기는 중앙유라시아 여러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일련의 역사적 사건의 시작이었다." "홍타이지는 '주션'과 '아이신 구룬'이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만주'와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선포하여 자신의 제국이 대원의 적통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사강 세첸의 『몽골원류』는 누르하치를 칭기스 칸의 정치적 계승자로 인정하고 홍타이지가 '정권(törö)'을 장악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몽골인들도 그러한 주장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194-5)


"1728년 러시아와 청 양국은 네르친스크 조약(1689)을 보완하여 캬흐타 조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러시아는 알바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을 청에 양보했지만, 사절단을 북경으로 파견하여 교역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르친스크와 캬흐타 등 변경 도시에 시장을 개설하여 상인들이 상대편과 물자를 매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청은 러시아에 교역상의 특권을 허가해준 대신 아무르 강 상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준가르에 대한 러시아의 지원을 사전에 차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갈단은 1690년 이르쿠츠크에 있던 골로빈에게 사신을 보내 할하 침공을 위해 러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를 중립화시킨 다음 갈단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준가르의 위협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은 장차 중앙유라시아의 세계를 중국과 러시아가 양분하는 역사적 과정의 시발점이었다."(198-9)


"1757년 아무르사나를 격파하고 준가르를 복속시킨 청군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위원魏源은 『성무기聖武記』에서 준가르인의 4할은 천연두로 사망하고 3할은 청군에 살해되었으며 2할은 카자흐로 도망하여, 1할만이 고향에 남았다고 적었다. 건륭제는 아예 '준가르準噶爾'라는 말의 사용을 금하고 얼러트額魯特(Ölöt) 혹은 오이라트厄魯特(Oyirat)라는 말로 대체하도록 했다. 청조는 준가르의 붕괴와 함께 그에 복속해 있던 카쉬가리아도 당연히 제국의 일부가 되리라고 예상했지만, '호자'라 불리던 수피 장로들의 지휘하에 토착 무슬림들은 의외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에 건륭제는 1758~60년 본격적인 정복전에 착수했다. 호자 형제는 바닥샨 산지로 도주했으나 그곳에서 유목하던 키르기즈인들에게 피살되어 그 수급이 청군에게 인도되었다. 이렇게 해서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고, 청 제국은 톈산 북방과 남방을 모두 장악하여 중앙유라시아 정복을 완료했다."(208-9)


"청 제국은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톈산 남북의 초원과 사막 지대를 정복한 뒤 그곳을 신강新疆이라 불렀는데 이는 '새로운 강역'을 뜻한다. 신강은 내지와는 달리 성省으로 편성되지 않았고, 몽골·티베트·만주 등지와 함께 일종의 특별 군사구역으로 설정되었다. 즉 청은 신강과 같이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고 민관이 아니라 군관을 배치했으며, 이들 외지인과 현지 토착민 사이에 행정적·공간적 거리를 두는 분리 통치의 원칙을 적용했다. 이를 위해 청은 신강을 세 개의 군사구역(준가리아, 천산동로, 천산남로)으로 나누었다." "청조는 현지인들을 통치하기 위해 벡beg(伯克)이라는 토착 지배층을 활용했다. 벡은 과거에는 유목집단의 수령을 지칭하는 칭호였으나 17세기 들어 그들이 정착하면서 정주 지배층에 대한 명칭으로 바뀌었다. 청이 정복한 이후 과거 여러 직능을 수행하던 관리들의 명칭 뒤에 일률적으로 '벡'이라는 칭호를 덧붙여 벡 관제를 시행한 것이다."(212-3)


222 에필로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력에 대한 거의 모든 것 - 가장 유명하지만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힘
마커스 초운 지음, 김소정 옮김 / 현암사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 당신이 모를 수도 있는 중력에 관한 여섯 가지 사실

1. 중력은 당신과 당신 주머니 속 동전이, 당신과 당신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다.

2. 중력은 아주 약하다. 지구의 전체 중력으로도 근육의 힘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손을 위로 뻗을 수 있다.

3. 중력은 약하지만 대규모로 작용하는 중력에는 저항할 수 없다. 중력은 전체 우주의 진화와 운명을 통제하는 힘이다.

4. 사람들은 중력이 빨아들이는 힘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주 대부분에서 중력은 날려보내는 힘이다.

5. 빅뱅 후에 중력 스위치가 켜지지 않았다면 시간은 방향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6. 중력을 명확히 이해해야만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답할 수 있다.


1부 뉴턴

1장 · 달은 떨어지고 있다


달은 원 운동을 하면서 계속 지구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사과와 달은 둘 다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두 물체의 운동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그저 사과는 지면과 평행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속력이 없기 때문에 지면을 향해 곧바로 떨어지지만, 달은 엄청난 속력으로 날아가는 포탄처럼 지면과 평행인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원을 그리며 떨어진다는 것뿐이다. 지구 중심에서 지표면까지의 거리는 6,370킬로미터이고, 지구 중심에서 달까지의 거리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38만 4,400킬로미터이다. 다시 말해 달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는 지표면에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의 60배이다. 60의 제곱은 3600이다. 즉 달에 미치는 지구의 중력이 지표면에 미치는 지구의 중력보다 정확히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약해진 것이다. 뉴턴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 약해지는 단일 힘이, 땅에 존재하는 사과와 하늘에 존재하는 달을 끌어당기고 있음을 입증했다. 정말로 중력은 보편 힘이었다. 26-7)


2장 · 마지막 마법사


똑바로 서 있는 원뿔을 상상해보자. 이 원뿔을 날카로운 칼로 깔끔하게 잘라보자. 칼로 원뿔의 한 옆면에서 다른 옆면을 완전히 통과하게 자르면 단면은 타원이 된다. 원뿔의 한 옆면으로 칼을 비스듬하게 집어넣고 밑면을 통과하게 자르면 한쪽 끝이 열린 ‘포물선’이 된다. 칼을 똑바로 세워 옆면과 밑면이 수직이 되게 자른 단면은 한쪽 끝이 열린 ‘쌍곡선’이 된다. 힘의 역제곱 법칙의 지배를 받는 천체의 이동 속력이 태양을 벗어날 만큼 충분히 빠르지 않으면(또는 에너지가 충분히 많지 않으면), 이 물체는 태양 주위를 타원 궤도를 그리며 돈다. 태양을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이동 속력이 아주 빠른 천체는 쌍곡선 궤도를 그리며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두 물리 상태의 중간에 위치한 포물선 궤도를 그리는 천체는 태양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붙잡히지도 않는다. 공전 궤도가 포물선인 천체는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가 무한히 멀 때만 태양의 중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37-8)


3장 · 3월에는 조수를 조심하라


지구는 부피가 있는 볼록한 천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달에 더 가까운 지역이 있다. 달은 가까운 지역을 먼 지역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긴다. 뉴턴은 달의 중력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력도 지역마다 다를 것임을 알았다. 물은 단단한 암석과 달리 자유롭게 움직이기 때문에 달의 중력은 암석보다는 물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대양의 한 점 바로 위에 달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 점에서 달이 대양의 해수면을 잡아당기는 힘은 좀 더 멀리 있는 대양의 바닥인 해저를 잡아당기는 힘보다 셀 것이다. 뉴턴은 중력의 이런 차이 때문에 해수면이 해저에서 멀어지고 대양은 달이 있는 방향으로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의 중력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결과는 또 있다. 달에서 보았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바다를 생각해보자. 이곳은 해저가 해수면보다 달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해수면보다 해저가 달의 중력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 결과 해저의 물이 해수면으로 끌어당겨져 바다가 위로 볼록해진다. 48)


조수란 단순히 물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중력을 가해 그 물체의 형태를 바꾸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실제로 중력은 바로 밑에 있는 대양의 물을 볼록하게 부풀리는 것처럼 바로 밑에 있는 암석도 볼록하게 부풀린다. 그러나 암석은 물보다 훨씬 단단하기 때문에 변형되는 정도가 크지 않다. 달 때문에 암석이 늘어났다가 줄어들기 때문에 지구를 구성하는 단단한 부분들도 25시간에 두 번씩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이제 물을 머금고 있는 다공성 암석이 우물을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우물을 둘러싸고 있는 암석은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라고 할 수 있다. 물을 빨아들인 스펀지가 그렇듯이 우물을 둘러싼 암석도 팽창하면 물을 빨아들이고 압축하면 물을 내보낼 것이다. 암석과 대양은 모두 만조 때는 팽창하고, 간조 때는 압축된다. 그 때문에 만조 때는 암석이 물을 빨아들여 우물 수면이 낮아지고 간조 때는 암석이 물을 내뱉어 우물 수면이 높아진다. 51)


달과 지구에 작용하는 조수는 단지 두 천체의 모양을 변형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구에서는 해수면을 높이거나 낮추고 달에서는 월진을 일으킨다. 달과 지구계의 전체 모습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에는 달이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자전했다. 그러나 지구와의 조수 상호작용 때문에 달의 자전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달의 자전 속도가 빠를 때는 지구의 중력으로 볼록해진 부분이 달의 자전 속도 때문에 옆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달의 볼록한 부분은 지구를 정면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구의 중력은 옆으로 돌아가려는 볼록한 부분을 계속 잡아당기며 달의 자전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어느 시점이 되자 달의 자전 속도는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과 똑같아질 만큼 느려지고 말았다.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같은 달은 ‘동주기 자전synchronous rotation’을 하기 때문에 지구 중력에 끌려 볼록해진 부분이 계속해서 지구를 향한다. 이제는 달의 자전 속도가 '변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55)


그런데 조수 상호작용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천체는 달만이 아니다. 지구의 자전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 지구는 달보다 훨씬 무거워서 힘에 대한 운동 저항력이 더 크기 때문에 자전 속도가 느려지는 정도는 훨씬 적다. 그 증거는 산호초에서 찾을 수 있다. 열대 바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다 해양 동물인 산호는 탄산칼슘을 분비해 단단한 골격을 만든다. 산호는 나무가 나이테를 만들듯 날마다 계절마다 두께가 다른 골격을 만든다. 산호가 만든 이 골격 층의 수를 세어보면 한 해가 몇 날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3억 5,000만 년 전에 살았던 산호 화석은 1년이 385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공전 주기는 다르지 않았을 테니 3억 5,000만 년 전에는 하루가 23시간이 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현재 우리는 하루의 길이가 100년 전에 비해 1.7밀리초 가량 늘었음을 알고 있다. 실제로 지난 2,500년 동안 하루의 길이는 100년에 1.7밀리초씩 늘어나고 있다. 55-6)


달의 중력 때문에 지구에서 일어나는 조수운동은 지구의 자전 속도를 늦추고, 그 때문에 지구의 ‘각운동량angular momentum’*은 줄어든다. 그런데 물리학에는 ‘고립되었거나 닫힌’ 계(고립계) 안에서는 절대로 각운동량이 변할 수 없다는 기본 강령이 있다(각운동량 보존법칙). 따라서 지구의 각운동량이 줄어들면 이를 보상하기 위해 다른 무언가의 각운동량이 늘어나야 한다. 그 다른 무언가가 바로 달이다. 달이 직선 궤도를 벗어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공전 궤도를 지금의 공전 속도로 움직이려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만큼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달의 공전 속도가 빨라지면 달이 조금 더 먼 거리를 이동해야 직선 궤도가 원 궤도로 구부러질 수 있기 때문에 달의 공전 궤도는 지금 궤도보다 조금 더 바깥쪽으로 이동한다. 지구에서 달로 쏘아 보내는 전파의 이동 거리는 해마다 3.8센티미터씩 늘어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달은 열두 달을 주기로 엄지손가락만큼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58)


# 각운동량 : 회전 운동하는 물체의 운동량


분점의 세차, 즉 지구가 흔들리는 운동을 하는 이유는 지구의 자전축이 움직이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뉴턴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뉴턴은 태양과 달의 중력뿐 아니라 지구의 자전 때문에도 지구의 형태가 변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지구의 적도 위에 있는 물체는 시속 1,670킬로미터의 속력으로 날아다녀야 한다. 지구의 중력은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를 붙잡아둘 강력한 구심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실제로 지구는 완벽한 원이 아니라 적도 부분이 23킬로미터 정도 볼록하게 부풀어 있다. 뉴턴은 지구의 ‘적도가 볼록하게 부풀어 있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중력을 받는 지구는 돌아가는 팽이처럼 흔들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지구의 자전축은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돈다. 뉴턴은 태양과 달의 중력이 적도 부근이 볼록한 지구에 작용하면 자전축은 2만 6,000년 만에 한 번씩 회전해야 한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는데, 이는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 67-8)


4장 · 보이지 않는 세상을 그리는 지도


중력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보편적인 힘이라는 점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티끌 한 점이라도 다른 모든 물질의 티끌 한 점에 중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가령, 목성(질량이 태양질량의 1000분의 1)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있을 때 지구에 미치는 중력은 태양 중력의 1만 6000분의 1이다.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이 다른 행성에게 미치는 중력은 태양이 미치는 중력에 비해 너무도 작기 때문에 뉴턴은 행성의 경로를 계산할 때 행성이 다른 행성에 작용하는 중력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지구 같은 행성은 수많은 천체의 영향을 받으며 움직인다. 그러기 때문에 태양 주위를 완벽한 타원 궤도로 공전할 수 없다. 케플러의 제1법칙은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가까울 뿐이다. 태양 말고도 다른 천체들이 잡아당기기 때문에 행성의 타원 궤도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점차 방향이 바뀌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궤도는 태양 가까이 가면 ‘변형’된다(세차가 생긴다). 73)


은하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항성에 작용하는 중력의 힘은 약해진다. 따라서 루빈과 포드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그렇듯이 은하의 항성들도 중심에서 멀어지면 공전 속도도 느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관측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은하 중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항성들을 관찰한 두 천문학자는 항성들의 공전 속도가 거리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은하 외곽에 있는 항성들도 아주 빠른 속도로 공전하고 있었다. 그 정도 속도라면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목마를 타다가 멀리 날아가는 아이들처럼 항성도 은하를 벗어나 우주 공간으로 멀리 날아가야 했다. 그렇게 빠르게 도는 항성을 붙잡을 수 있는 강력한 중력은 은하에 존재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항성들은 빠른 속도로 공전하면서도 멀리 날아가지 않았다. 놀랍겠지만 나선은하는 '암흑물질'이라는 광대하고도 둥근 구름에 파묻혀 있다. 암흑물질의 양은 관측 가능한 항성을 모두 합친 것보다 10배는 많다. 79)


중력은 단순히 이 우주에는 암흑물질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분포하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아주 먼 은하에서 지구로 오는 빛은 지나가는 경로에 존재하는 암흑물질의 중력 때문에 ‘굴절’된다(중력 렌즈 효과). 먼 은하에서 오는 빛이 이동하면서 약한 중력 렌즈 때문에 상이 굴절되는 정도를 측정하면 암흑물질이 어떤 식으로 분포되어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현재 칠레 고산지대(루빈 천문대)에는 중력 효과를 관측할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 암흑물질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나선은하 외에도 또 다른 중요한 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우주는 138억 2,000만 년 전에 엄청난 폭발(빅뱅)과 함께 탄생한 후 지금까지 팽창하면서 점점 식어왔다. 차갑게 식은 잔해들은 우리은하를 비롯해 1,000억 개에 달하는 은하로 응축되었다. 그런데 이 가설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 가설로는 우주의 매우 중요한 특성을 예측할 수 없다. 이 가설이 예측하는 우주에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다. 80)


은하는 빅뱅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덩이 중 다른 지역보다 아주 조금 더 조밀했던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아주 조금 더 조밀해진 지역은 아주 조금 더 중력이 세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질을 끌어당길 수 있고, 한번 끌어당기기 시작하면 중력은 더욱 커져서 다른 곳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주변 물질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 과정이 너무도 천천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주가 탄생한 시간부터 우리은하 같은 거대한 은하들이 탄생하기까지의 시간으로 138억 2,000만 년은 너무 짧다. 은하가 형성되려면 우리가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중력을 가해 은하의 생성 속도를 높여줄 물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의 질량-에너지는 4.9퍼센트를 원자가, 26.8퍼센트를 암흑물질이 가지고 있다(나머지 68.3퍼센트는 1998년에 발견한, 역시 보이지 않는 ‘암흑 에너지’가 가지고 있다. 암흑 에너지는 우주를 가득 메운 반동 중력이다). 80-1)


2부 아인슈타인

5장 ·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시간 지연 현상은 ‘뮤온muon’이라는 우주선cosmic ray을 관측할 때 훨씬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뮤온은 지표면에서 12.5킬로미터 상공의 대기에서 생성된 뒤에 아원자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뮤온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생성된 뒤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고 만다는 것이다. 뮤온의 소멸 시간은 150만분의 1초 정도 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뮤온은 생성된 뒤 500미터도 이동하지 못하고 소멸해야 한다. 상층부 대기에서 생성된 뮤온 가운데 12.5킬로미터 아래의 지표면에 도달하는 입자는 단 한 개도 없어야 한다. 하지만 뮤온은 지표면에 도달한다. 생성되자마자 소멸하는 뮤온이 지표면에 도달할 수 있는 이유는 뮤온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의 99.92퍼센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뮤온은 슬로모션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실제로 뮤온의 시간은 우리 시간보다 25배나 느리게 흐른다. 뮤온이 소멸되리라고 깨닫는 시간이 실제보다 25배 길어진다는 뜻이다. 98-9)


# 우주선 :  우주에서 끊임없이 지구로 내려오는 매우 높은 에너지의 입자선을 통틀어 이르는 말


빛의 속도가 우주의 주춧돌이라면 한 사람의 공간은 다른 사람의 공간과 시간이며, 한 사람의 시간은 다른 사람의 시간과 공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흐르는 일상의 우주에서 이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는 없다. 그러나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는 세상에서는 분명히 느낄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은 탄력이 있어서 한계 없이 무한히 늘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바뀔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은 시공간이라는 한 실재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과 북, 동과 서, 위와 아래로 뻗어 있는 3차원 공간과 과거와 미래를 나타내는 시간이라는 1차원으로 이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간 차원과 시간 차원이 한데 뒤엉켜 시공간이라는 4차원 세계를 만든다. 우리는 4차원 실재가 우리 3차원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시간은 4차원의 한 그림자이며, 공간은 4차원의 다른 세 가지 그림자이다. 103)


이 세상에 시공간이 존재하는 것은, 즉 시간이 공간의 특성을 일부 공유한다는 것은, 평범한 2차원 지도 위에 지형을 그려 넣을 수 있듯 4차원 지도 위에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려 넣을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관점으로는 4차원 지도 위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4차원 지도를 볼 수 있는 아인슈타인이 볼때 시간은 흘러가지 않는다. 4차원 시공간 지도 위에는 우주가 탄생한 빅뱅에서부터 우주의 소멸에 이르는 동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동시에 펼쳐져 있다. 4차원 시공간의 지도 위에는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사슬처럼 펼쳐져 있다. 뱀처럼 지도 위를 가로지르며 펼쳐진 이 사건의 사슬을 물리학자들은 ‘세계선world line’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시간을 흐르는 것으로 경험하는 우리의 감각은 물리학이 아니라 생물학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며, 사람의 뇌가 실재reality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시간을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108)


시간과 공간은 물리학의 거의 모든 개념을 떠받드는 초석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단단한 바위가 아니라 움직이는 모래라면 다른 개념들도 역시 움직이는 모래일 수밖에 없다. 전기장과 자기장을 생각해보자. 공간과 시간이 시공간의 두 측면일 뿐이듯, 전기장과 자기장도 전자기장의 두 측면에 불과하다. 맥스웰은 관찰자가 전하를 띤 전자 같은 물체와 나란히 움직이면 전자는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관찰자는 전기장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전하를 띤 물체가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하면 관찰자는 전기장과 자기장을 동시에 느낀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석과 나란히 움직이면 관찰자는 자기장을 느낀다. 그러나 자석이 관찰자에 대해 상대적인 운동을 한다면 관찰자는 자기장과 전기장을 느낀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전기장과 자기장, 공간과 시간이 각각 한 동전의 양면임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질량과 에너지도 같은 존재의 두 가지 다른 측면임을 깨달았다. 104-5)


아인슈타인의 E=mc2은 두 가지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질량은 에너지의 한 형태일 뿐 아니라 에너지에는 유효질량이 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소리 에너지, 열 에너지, 화학 에너지, 무엇보다도 운동 에너지는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물체에는 내재된 질량(보편적으로는 ‘정지 질량’이라고 부른다)도 있지만 운동을 통해서도 질량이 생긴다. 즉 물체가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면 그 물체의 질량이 늘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질량 증가를 분명히 인지하려면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야 한다. 어쨌거나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고 그 결과로 질량이 증가하면 그 물체는 쉽게 밀어 옮길 수가 없게 된다. 실제로 물체의 이동 속도가 빛의 속도에 도달하면 질량은 무한히 커진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우주에는 한 물체의 질량을 무한히 크게 바꿀 수 있을 만큼 많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광선을 잡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106)


다음으로 아인슈타인은 동일한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다양하게 속도가 변하는(‘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시간을 측정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물리 법칙은 언제나 같아야 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은 가속도 운동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문제 외에도 훨씬 더 심각한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뉴턴의 중력 이론과 본질적으로 부딪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중력 법칙은 태양처럼 거대한 물체에서 나오는 중력의 힘이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든 영향을 미친다고 전제한다. 그것은 어느 장소에 머물든 거대한 물체의 중력은 그 즉시 느낄 수 있다는 뜻이며, 중력의 효과가 무한 속도로 퍼져 나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는 이 세상 그 무엇도, 심지어 중력조차도 우주의 한계 속도인 빛의 속도를 능가해 퍼져 나갈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빛이 정한 우주 한계 속도와 중력 이론을 통합하는 방법은 ‘장field’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107)


역장force field과 역선line of force이 있는 중력장을 참고해 아인슈타인은 질량(물체)이 중력장을 만들고, 이 중력장이 다른 질량(물체)에 중력을 가한다는 이론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중력도 장이 있어야 특정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빛이 우주의 한계 속도라는 설정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수 상대성 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중력장 이론을 구축하는 일은 아인슈타인에게 두 번째 문제일 뿐이었다. 그에게는 세 번째 문제도 있었다. 뉴턴의 중력 이론에서 중력을 생성하는 ‘근원’이 질량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였다. 아인슈타인은 형태에 상관없이 에너지라면 모두 유효질량이 있기 때문에 중력을 발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말해서 중력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질량이 될 수 없었다. 중력을 만드는 것은 에너지였다. 아인슈타인은 특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한 1905년에도 이런 문제들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거의 분명하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려면 그로부터 8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108)


6장 · 떨어지는 사람을 위한 시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1907년, 아인슈타인에게 찾아온 이 깨달음이야말로 새롭고 혁명적인 중력 이론 체계의 초석이 되어주었다. 한 남자가 승강기 안에 있다. 갑자기 승강기 줄이 끊어진다. 승강기 줄이 끊어지기 전에 남자는 승강기 바닥에 놓여 있던 저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승강기 줄이 끊어지는 순간, 70킬로그램을 가리키던 저울의 눈금은 0킬로그램을 가리켰다. 이것이 바로 떨어질 때는 몸무게를 느낄 수 없다는 말의 의미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법칙에서는 아주 쉽게 중력이 없는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저 자유낙하만 하면 된다. 자유낙하를 하는 순간 중력도 몸무게도 사라져버린다. 중력을 느끼지 못한 채 자유낙하하는 상황은 어떤 행성의 중력도 느끼지 못한 채 텅 빈 우주에 떠 있는 상황과 구별할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이 중력 법칙과 특수 상대성 이론에 다리를 놓아준다. 두 상황 모두 특수 상대성 이론의 법칙들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112-4)


중력을 받은 물체는 질량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냉장고처럼 무거운 물체와 나무 의자처럼 가벼운 물체가 동시에 같은 힘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하는 모든 실험에서는 냉장고처럼 무거운 물체의 속도를 높이려면(즉 가속도를 높이려면) 작은 물체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거운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이 크기 때문이다. 관성이라는 저항력이야말로 물체가 ‘질량’을 갖게 하는 근본 원인이다. 그런데 물체에 가하는 힘이 중력일 때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질량이 클수록 같은 속도로 움직이게 하려면 더 큰 힘이 필요한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중력은 마치 질량이 큰 물체에게는 더 큰 힘을 발휘하도록 자기 힘을 조절하는 것처럼 보인다. 관성 질량이 두 배 큰 물체는 움직이지 않으려는 저항력도 두 배 크다. 그러나 낙하할 때는 두 배 더 큰 중력을 받기 때문에 질량이 작은 물체와 똑같은 속력으로 떨어진다. 114-5)


갈릴레오 이후로 사람들은 움직임에 대한 물체의 저항력(관성 질량)과 중력 때문에 경험하는 힘(중력 질량)은 전적으로 다른 힘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런 모든 사람의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어지는 사람은 몸무게를 느끼지 못한다. 즉 중력을 받으며 떨어지는 모든 물체의 가속도는 동일하다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은 동일하다는 것, 다시 말해서 중력은 가속도라는 사실 말이다. 1907년에 아인슈타인은 서로에 대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 가속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도 세상을 묘사하려면 상대성 원리를 일반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뉴턴의 중력 법칙이 자신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중력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상대성 이론을 일반화하자 그 자체로 새로운 중력 이론이 되었다. 115)


지구 같은 행성의 중력에서 멀리 벗어난 우주선에서 한 우주비행사가 잠에서 깨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우주선은 중력가속도 1g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주비행사는 지구 표면 위에서처럼 발을 선실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우주선 창문이 온통 깜깜해서 밖을 볼 수 없다면 이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지구에 있는 어느 방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우주비행사로서는 자신이 지구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님을 입증할 방법이 전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중력을 가속도와 구분할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망치와 깃털을 가져온 우주비행사는 두 물체를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가 동시에 놓았다. 두 물체는 같은 속도로 떨어져 선실 바닥에 동시에 닿았다. 자신이 우주선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구 표면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주비행사는 두 물체가 동시에 바닥에 닿은 이유는 모든 물체를 같은 속도로 떨어지게 하는 중력 때문이라고 믿었다. 116)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주비행사가 지구 표면이 아니라 그 어떤 행성의 중력도 닿지 않는 우주 공간에 떠 있음을 알고 있다. 우주비행사가 망치와 깃털을 동시에 놓았을 때 이동한 것은 두 물체가 아니라 우주선의 선실 바닥이었다. 우주선의 선실 바닥이 중력가속도 1g의 속도로 위로 올라가 망치와 깃털에 동시에 부딪힌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인슈타인은 중력이 다른 힘과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중력은 환상이다. 중력은 가속도 운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가속도와 구별할 수 없다’는 말로 등가원리Principle of Equivalence를 규정했다. 바로 이 등가원리가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을 떠받치는 초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가속도를 중력으로 착각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깨달은 것처럼 사람의 인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16-7)


밖을 볼 수 없는 우주선의 그 우주비행사는 다른 실험을 이번에는 레이저를 이용했다. 레이저를 가져와 바닥에서 1미터 높이에 있는 선반 위에 레이저를 올려놓았다. 우주비행사가 레이저를 켜자 레이저 빔이 선실을 수평으로 가로질렀고 선실 벽에 밝은 파란 점이 생겼다. 벽으로 걸어간 우주비행사는 파란 점이 선실 바닥에서 1미터 높이보다 낮은 곳에 맺혔음을 확인했다.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레이저 광선은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것만 같았다. 우리는 우주선이 중력가속도 1g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광선이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바닥은 위쪽으로 가속도 운동을 했다. 그러니 우리는 광선이 선실 바닥에서 1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곳에 닿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지구의 표면에서 중력을 받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력이 있으면 빛은 경로가 휘어진다고 생각했다. 즉 중력이 빛을 휘어지게 만든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117)


그렇다면 중력은 왜 빛을 휘게 하는 걸까? 빛이 갖는 뚜렷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두 점 사이를 통과할 때면 언제나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짧은 경로는 직선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아인슈타인은 깨달았다. 언덕과 같은 지형에서는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이 직선이 아니다.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은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곡선이다.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경로가 직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은 레이저 광선이 선실을 가로지르는 동안 아래쪽으로 구부러진 모습을 확인한 우주비행사에게도 의미가 있다. 도보 여행자가 지나는 언덕 지형처럼 우주선의 선실이 구부러진 공간이라면 두 지점을 잇는 가장 짧은 길은 곡선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력이 빛을 구부리는 이유는 중력이 뒤틀린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력은 뒤틀린 공간이다. 뉴턴의 세계관으로는 이토록 크게 바뀌는 중력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117-8)


중력은 뒤틀린 시공간이기 때문에 공간을 가지고 놀 뿐 아니라(빛의 경로를 구부린다) 시간도 엉망으로 만든다. 마주 놓인 두 거울 사이로 레이저 광선이 수평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시간을 알려주는 가상의 ‘시계’가 있다고 해보자. 한 시계는 지표면에, 한 시계는 지표면에서 훨씬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는 높이 있는 시계보다 육중한 지구에 더 가깝기 때문에 조금 더 강한 중력을 느낄 것이다. 그 말은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의 거울 사이를 움직이는 광선이 높은 곳의 광선보다 좀 더 구부러진 곡선 경로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좀 더 구부러진 경로로 이동한다는 것은 좀 더 먼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의 광선이 두 거울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시간은 높은 곳에서 왔다갔다하는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즉 지표면 가까이 있는 시계가 위쪽 시계보다 느리게 간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시간의 흐름은 중력이 강할수록 더 느려진다. 119)


7장 · 신은 0으로 나누었다!


놀랍게도 슈바르츠실트는 충분한 질량이 충분히 작은 부피로 응축되면 시공간은 바닥이 없는 우물처럼 아주 기이한 형태로 뒤틀린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시공간의 내벽은 너무도 가팔라서 광선조차도 시공간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가진 에너지를 모두 소비한 뒤에 소멸하고 만다. 이런 시공간은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밤보다 훨씬 어둡다. 슈바르츠실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어떤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그런 뒤틀린 시공간에 이름을 붙인 것은 1967년, 미국 물리학자 존 휠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공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슈바르츠실트의 해는 ‘블랙홀’을 기술하고 있었다. 슈바르츠실트의 블랙홀은 ‘사건 지평선’에 둘러싸여 있다. 이 사건 지평선을 넘어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면 빛도 물질도 절대로 다시 나올 수 없다. 사건 지평선을 측정하면 블랙홀의 ‘크기’를 알 수 있다. 태양이 블랙홀이 되려면 태양의 전체 질량이 반지름 3킬로미터인 구로 압축되어야 한다. 141-2)


백색 왜성의 질량이 클수록 중력은 내부 전자를 더욱 단단하게 압축하고, 전자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전자가 움직일 수 있는 최대 속도를 빛의 속도로 제한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사실이었다. 전자의 속도가 우주의 한계 속도에 가까워지면 전자는 훨씬 무거워지고 속력은 증가하기 어려워진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항성을 응축하려는 중력의 힘을 막는 것은 결국 양철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계속 부딪쳐 바깥쪽으로 힘을 가하는 전자들이었다. 이 전자들이 더욱 가까운 거리로 응축되면 속력 변화율이 작아지기 때문에 중력을 이기는 힘은 점차 소멸되고 말 것이다. 찬드라세카르는 거듭해서 계산하고 거듭해서 검토했다. 수명이 다할 때 항성의 질량이 태양 질량의 1.4배가 넘는다면 전자 축퇴압도 항성을 살리지 못한다. 중력은 무자비하게 항성을 으깨버릴 것이다. 우주에서 그토록 맹렬한 중력을 막을 힘은 없다. 145)


# 찬드라세카르 한계 : 태양보다 1.4배 큰 항성


수명이 다한 큰 질량의 항성은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져서 가차없는 중력에 붙잡혀 점점 더 조그맣게 축소된다. 이제 극도로 압축된 항성 내부에서는 전자가 원자핵 안으로 들어가 양성자와 반응하면서 중성자를 만들어낸다. 중성자도 전자처럼 페르미온이다. 중성자 가스도 전자 가스처럼 항성을 단단하게 만들어 항성이 중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중성자는 원자보다 훨씬 작다. 그 때문에 거대한 항성은 지구만 한 백색 왜성이 되지 않고 에베레스트산만 한 중성자 덩어리가 된다. 이런 ‘중성자별’은 각설탕만 한 부피라고 해도 인류 전체의 무게를 합친 것만큼 무겁다. ‘중성자 축퇴압’이 항성의 중력 붕괴를 막아 더는 붕괴하지 않게 해주지만 백색 왜성의 경우처럼 그런 항성에게도 아킬레스건은 있다. 중성자별을 이루는 구성 입자들은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는 ‘상대론적’ 입자들이다. 따라서 특정 질량 한계를 넘어가면 중성자별조차도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해진다. 146)


자연의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으로 묶여 있는 중성자의 물리학은 전자기력으로 상호작용하는 전자의 물리학보다 복잡하다. 그 때문에 찬드라세카르 한계와 달리 중성자별의 한계 질량이 어디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중성자별의 한계 질량은 1932년에 러시아 물리학자 레프 란다우Lev Landau가 처음 계산했고, 보통 태양 질량의 세 배 정도라고 믿고 있다.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항성은 특이점으로 수축하는 것을 막을 힘이 전혀 없다. 이 세상에 태양 질량의 세 배가 넘는 무거운 항성이 없다면 중성자별의 질량 한계는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별은 틀림없이 있다. 드물기는 해도 태양 질량의 100배가 넘는 항성도 있다. 이런 항성들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해서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질량을 소비하면서 격렬하게 타오른다. 하지만 많은 질량을 외부로 방출한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마침내 죽을 때조차도 태양의 질량보다 세 배 이상 크다. 이런 항성은 결국 블랙홀로 압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146-7)


1930년대 말에 매우 엉뚱한 이유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물리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가 팽창하는 우주가 의미하는 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팽창하는 우주를 고민하게 된 이유는 자연의 원소들을 만드는 용광로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가장 가벼운 수소를 시작으로 가장 무거운 우라늄까지 92개의 원소가 존재한다. 가모브는 우주는 수소부터 시작한다고 믿었다. 수소가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레고 블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원소들은 수소를 기반으로 차례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모브는 항성은 그런 용광로가 될 수 없다고 믿었다(잘못된 믿음이었다). 그래서 다른 용광로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팽창하는 우주가 영화의 거꾸로 돌리기처럼 다시 수축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수십억 년(우리는 지금 그 시간이 138억 2,000만 년임을 알고 있다)을 뒤로 돌리면 우주를 이루는 모든 물질은 아주 작은 부피로 압축된다. 바로 그때가 우주의 탄생 순간, 빅뱅이다. 150)


3부 아인슈타인을 넘어서

8장 · 예측 불가능한 것을 예측하다


뜨거운 원자 가스 속에서는 빛 파장이 반복해서 방출되고 흡수되기 때문에, 충분한 시간이 흐르면 가능한 모든 빛 파장이 생성된다. 이런 ‘열적 평형thermal equilibrium’ 상태에서는 모든 가능한 파장을 가진 파동들이 에너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갖는다. 그런데 빛 파동의 최대 파장은 크기에 한계가 있지만(빛이 담겨 있는 용기 크기만큼만 커질 수 있다), 빛 파동의 최소 파장은 한계가 없다. 즉 어떤 파장을 택하든 한 파장을 택하면 장파장의 수는 언제나 유한하지만, 단파장의 수는 무한이 된다는 뜻이다. 장파장보다 단파장을 가진 파동이 훨씬 많기 때문에 에너지는 대부분 단파장들이 운반한다. 그 때문에 필연적으로 뜨거운 원자 가스가 지닌 에너지는 가장 에너지가 큰 X선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1895년에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기 전까지 가장 에너지가 높은 빛은 자외선이었다. 고에너지 X선에 에너지가 몰리는 현상을 ‘자외선 파탄ultraviolet catastroph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158)


19세기 말에 전자 기술 분야의 킬러앱은 단연코 전구였다. 따라서 ‘전구의 가열된 필라멘트에서 최대한 많은 양의 가시광선을 방출하게 하는 방법’이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뜨거워진 필라멘트가 뜨거운 기체로 이루어진 태양처럼 그 즉시 X선을 방출하는 것이 빛을 설명하는 최상의 이론이라면 그 방법을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대로라면 전자 같은 전하를 띤 진동 입자는 자신의 진동 ‘주파수’에 맞는 빛을 방출한다. 맥스웰의 이론은 가속한 전하가 전자기 복사를 방출한다고 기술하지만, 실제로 진동하는 전하는 그저 반복적으로 가속되고 있을 뿐이다. 플랑크는 진동하는 용수철이 마음대로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하는 대신 정해진 기본량의 배수로만 에너지를 방출하고 흡수할 수 있다면 이런 재앙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플랑크는 용수철이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는 에너지 기본량을 h에 진동수 f를 곱한 값이라고 했다. 158-9)


플랑크가 생각한 원자-용수철 가설에서 에너지가 hf의 배수로만 방출되거나 흡수되어야 하는 타당한 이유는 없었다. 그가 이런 상상을 한 이유는 오직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플랑크는 진동하는 입자(진동자)는 살짝 높은 에너지에서는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없다고 했다. 빛을 방출하거나 흡수할 수 있게 허용된 다음 단계의 에너지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즉 모 아니면 도 전략을 쓴다는 것이다. 진동자가 빛을 만들 수 있는 충분한 에너지가 없다면 빛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빛 파동들이 에너지를 나누어 가질 때, 진동수가 가장 높은 파동은 에너지의 많은 몫을 차지하기는커녕 아예 갖지 못할 수도 있다. 에너지를 갖기에는 너무 비싼 입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에너지가 가장 많은 빛을 길들이면 자외선 파탄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를 속도의 한계로 정하자 무한infinite이 해결되었듯, 플랑크가 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하자 무한소infinitesimal가 해결되었다. 160)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방정식과 플랑크의 방정식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빛도 행동하는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플랑크가 그저 수학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양자는 실제로 존재했다. 훗날 이 덩어리에는 ‘광자photon, 光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제 우리는 에너지, 물질, 전하, 그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덩어리(양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 자연의 가장 작은 단계는 고전물리학이 예상했던 것처럼 연속적이지 않다. 신문에 실린 사진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작은 점들이 보이는 것처럼, 자연의 가장 작은 단계도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리 상수’ h는 플랑크 상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플랑크 상수가 극단적으로 작기 때문에 광자 한 개가 운반하는 에너지도 엄청나게 작다. 그 때문에 전구에서 나오는 빛이 사실은 급류처럼 쏟아지는 작은 총알들임을 절대 눈치채지 못한다. 쏟아져 나오는 작은 총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연속적으로 보인다. 160-1)


두 전자나 두 산소 원자 같은 완벽하게 동일한 양자 물체들이 볼링공처럼 수백 번 부딪친다고 생각해보자. 양자 물체들은 수백 번을 부딪쳐도 절대로 가지 않는 방향이 생긴다. 왜일까? 그 이유는 한 입자의 확률 파동의 마루가 다른 입자의 확률 파동의 골과 만나 서로 간섭을 일으키면서 상쇄되어 입자를 찾을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즉 ‘간섭’은 양자 입자를 관측하기 전에 중첩된 두 양자 파동이 상호작용하게 해준다.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가 원자핵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돌 수 있는 이유도 간섭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전자가 원자핵을 향해 갈 수 있는 경로는 아주 많다. 전자는 나선을 그리며 원자핵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직선 경로나 파동처럼 요동치는 경로를 그리며 원자핵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당연히 이 모든 경로는 양자 파동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이 양자 파동들은 원자핵 가까이 다가가면 모두 간섭을 일으켜 상쇄되기 때문에 원자핵 가까이에서 전자를 찾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165-6)


만약 중력을 양자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중력을 운반하는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중력을 매개하는 가상 입자를 이론물리학자들은 ‘중력자graviton’라고 부른다. 중력자와 관련해서는 이론적으로 곤란한 문제가 아주 많으며, 그런 입자는 없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그 힘을 전달하는 입자와 그 힘을 ‘느끼는’ 입자가 얼마나 많이 상호작용하는지가 힘의 세기를 결정한다. 그런데 중력의 세기는 다른 세 힘의 세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 수소 원자를 이루는 전자와 양성자 사이의 중력은 전자기력보다 1만×10억×10억×10억×10억 배만큼 약하다. 그 말은 중력은 물질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력자 문제는 별개로 치더라도,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과 양자 이론은 본질적으로 양립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에 두 이론을 합치는 일은 아주 어려울 것 같다. 무엇보다 중력을 제외한 자연의 다른 힘들은 시공간 안에서 작동하지만 중력은 시공간 자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171)


9장 · 미지의 세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진공 속에서는 입자와 반입자 쌍이 생성될 수 있다. 이런 ‘가상’ 입자들은 눈 깜짝할 순간보다도 더 짧은 순간에 생성되었다가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호킹은 블랙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양자 과정을 숙고하다 사건 지평선 외곽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사건 지평선 부근에서 이제 막 생성된 입자와 반입자 쌍 가운데 한 입자는 블랙홀의 중력을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지만 다른 입자는 블랙홀의 중력에 잡혀 안으로 끌려 들어갈 수 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간 입자는 다시 블랙홀 밖으로 나와 함께 태어난 쌍입자를 소멸시킬 수 없다. 달아난 입자는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가상 입자가 아니라 실제 입자가 되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호킹은 이런 과정이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 주위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블랙홀 밖으로 끊임없이 튀어나오면서 빛을 내는 입자의 흐름을 ‘호킹 복사Hawking radiation’라고 한다. 188)


블랙홀을 규정하는 특징은 내부에서 그 무엇도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호킹 복사를 이루는 입자들은 블랙홀 내부로 들어간 적이 없으니, 호킹 복사는 블랙홀 내부에서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지평선 가장자리 바로 너머에 있는 진공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호킹 복사를 하려면 어디선가 에너지가 와야 한다. 사건 지평선 부근에서 가져올 수 있는 에너지는 블랙홀의 중력 에너지뿐이다. 호킹 복사가 끊임없이 블랙홀의 중력 에너지를 가져오면, 블랙홀의 중력은 약해져서 블랙홀은 점차 수축할(증발할) 수밖에 없다. 블랙홀의 크기가 작을수록 호킹 복사는 더욱 격렬하게 일어난다. 따라서 아주 작은 블랙홀의 경우에는 아주 밝은 호킹 복사를 방출한다. 블랙홀은 쓸쓸하게 조용히 사라지지 않는다. 빛나는 존재는 당연히 열이 있다. 호킹 복사 때문에 빛이 나는 블랙홀도 마찬가지다. 그 열은 블랙홀이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블랙홀을 둘러싸고 있는 진공 속에서 일어나는 양자 과정 때문에 발생한다. 188-9)


블랙홀을 증발시켜 결국에는 사라지게 하는 호킹 복사는 물리학에 심각한 역설을 불러온다. 정보는 새로 생성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 물리학의 기본 법칙이다. 달을 생각해보자. 뉴턴의 법칙을 적용하면 오늘 달의 위치를 가지고 내일 달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오늘 달의 위치는 내일 달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달이 하늘길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에도 정보는 새로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보존’된다. 하지만 블랙홀이 증발하면 정보는 사라진다. 이 같은 상황을 간단히 말해 ‘블랙홀 정보 역설black hole information paradox’이라고 한다. 블랙홀에서 사라진 정보를 저장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호킹 복사다. 이런 ‘블랙홀 정보 역설’을 풀 수 있는 단서는 이스라엘 물리학자 야코브 베켄슈타인Jacob Bekenstein이 찾았다. 1972년, 그는 사건 지평선의 ‘표면적’이 블랙홀의 ‘엔트로피entropy’와 관계가 있다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189-90)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 엔트로피가 있다는 것은 블랙홀의 지평선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특색이 없는 매끈한 경계가 아니라 미시 구조를 갖춘 곳이라는 의미일 수 있다. 1993년, 노벨상 수상자인 유트레히트 대학교 헤라르뒤스 엇호프트Gerardus 't Hooft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은 특색이 없는 매끈한 구조가 아니라 거칠고 불규칙한 미시 구조를 하고 있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이 작은 미시 세계에 존재하는 울퉁불퉁한 덩어리들이 블랙홀을 만든 항성의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고 했다. 엇호프트가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이 블랙홀의 사라진 정보를 저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발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드Leonard Susskind가 끈 이론으로 그 생각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을 가만히 있지 않고 계속 진동하는 끈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결국 정보는 사라지지 않았다.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법칙 가운데 하나가 지켜진 것이다. 190-1)


우주도 블랙홀처럼 지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우주의 ‘빛 지평선light horizon’은 우주의 가장자리가 아니다. 우주는 아마도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우주의 빛 지평선은 ‘관측 가능한 우주’의 가장자리를 의미한다. 이 빛 지평선 안에 있는 항성과 은하의 빛은 모두 우주가 탄생한 138억 2,000만 년 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닿을 시간이 있었다. 빛 지평선 너머에 있는 항성과 은하의 빛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부족하다. 그 빛들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엇호프트와 서스킨드는 3차원인 항성의 정보가 2차원인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에 각인된 것처럼 3차원인 우주의 정보도 2차원인 우주의 지평선에 있는 홀로그램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이런 식으로 비유를 사용해 추론하는 것은 엄격한 물리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1998년, 아르헨티나 물리학자 후안 말다세나Juan Maldacena는 우리가 ‘홀로그램 우주’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강화하는 논문 한 편을 발표했다. 191-2)


양자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을 양립하려고 시도하는 이론들을 ‘등각장론Conformal field theory’이라고 한다(표준 모형도 등각장론 가운데 하나다). 말다세나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에 맞춰 춤을 추는 기본 입자들이 내부bulk에 가득한 5차원 우주를 상상했다. 그러고는 2차원인 풍선의 표면이 3차원인 공기 부피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4차원인 우주의 경계가 5차원인 우주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 4차원 우주의 경계 안에는 등각장론에 맞춰 춤을 추는 입자들이 들어 있다. 말다세나는 놀랍게도 4차원 우주 경계에 관한 방정식들은 내부를 기술하는 훨씬 복잡한 방정식과 동일한 정보를 담고 있고, 동일한 물리학을 설명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다시 말해서 5차원 우주의 내부에 작용하는 중력 효과가 4차원 우주 경계에 작용하는 양자 이론과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아르카니-하메드는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은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있다.”라고 했다. 19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 - 거대한 땅의 지배자, 유목민에 의해 세계사가 완성되다!
스기야마 마사아키 지음, 이경덕 옮김 / 시루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1장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은 《중국본토》에서 '자이덴스트라세Seidenstraße'라는 말을 썼다. '비단길'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동과 서가 예부터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연결되었다는 표현이었고, 그런 생각(실제로는 소망에 가까운)이 담겨 있었다. 리히트호펜은 아마 별다른 생각 없이 《중국본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 알베르트 헤르만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자이덴스트라세'를 멋지게 포장했다. 《누란樓蘭》 등을 쓴 그의 영어본 《실크로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대단히 환영 받았다. 그러자 실제로 그런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그 길은 당연히 있는 길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행과 출판 등에서 뛰어난 산업 아이템이 되었다. '실크로드'는 이렇듯 태어날 때부터 낭만적이었고, 지금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이 되었다. 이 두 가지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문명'은 동·서에만 있고, 그 사이에 놓인 광활한 땅은 점點과 선線의 통과 지역에 불과했다."(37-8)


"유목민은 정처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민족이다.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거의 모든 유목민은 유랑에 고통스러워한다. '유遊'라는 글자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한자는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출유出遊나 유학遊學에서의 의미, 즉 '나간다'라는 의미다. 유목에서 '유遊'는 이동, '목牧'은 목축을 가리킨다. 즉 '이동 유목민'이라는 뜻이다." "유목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유목민의 세계는 실로 거칠고 능력주의·실력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습득해야 하는 능력은 말을 잘 타는 것이다. 또 기상이나 자연환경 전반에 민감해야 한다. 가족이나 가축에 대한 주의 깊은 시선과 배려는 물론 계획성과 인내력, 순간적인 판단력과 과감성이 필요하다. 이렇게 유목민 집단에 대한 귀속성과 강한 개인의식, 얼핏 모순처럼 느껴지는 두 가지 면이 개인의 인격 안에 공존한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52)


2장 중앙유라시아의 구도


"더 큰 유라시아 세계사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적어도 10세기부터 시작된 거대한 '투르크 이슬람 시대'라는 조류 속에 유라시아가 있다. 그 조류 가운데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종착지가 티무르왕조와 제2차 티무르왕조인 무굴왕조였다. 그리고 '공간'이라는 면에서 말하면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걸친 '종적 구조'가 오랜 역사를 통해 존재하고 역사와 인간에 엄청난 역동성을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최고의 사례가 역시 두 개의 티무르왕조다. 이 동서 유라시아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중층 구조는 바다와도 연결된다. 여기에는 더 거대한 구도가 숨겨져 있다. 그 근거로 16세기 중반 무렵부터 활발해진 포르투갈의 인도 해역으로의 진출을 들 수 있다. 내륙에서 티무르왕조의 남하, 바다에서 포르투갈의 출몰은 연이어 발생했다. 이 '종적 관계의 구조' 속에서 '땅과 활의 시대'와 '바다와 총포의 시대'가 동시에 존재한 셈이다.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이 무굴왕조를 둘러싼 중층 지역 속에서 발생했다."(83)


"'이란'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현재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란'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과 러시아 열강에 의한 외압 속에서 계속 축소된 '근대국가'를 말한다. 따라서 보통 사용되고 있는 이란의 의미로는 자연환경의 이란고원조차 생각할 수 없다. 한편 거대한 '이란'이 있다. 예부터 외압을 견디어온 이란고원을 포함해 넓게 사용하고 있는 역사상의 개념이다. '이란 자민(이란의 땅)'이라는 오래된 기원을 가진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아무에서 미스르까지'의 땅, 즉 아무 강에서 이집트까지를 말한다. 이 드넓은 땅은 고대 페르시아제국의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영역과 필적할 정도로 상당히 넓다. 아케메네스왕조가 지배했던 '문명 세계'를 '이란'이라고 불렀다. 아무 강 건너편의 '야만족의 땅'은 '투란'이라고 불렀다. 문명관에 따른 구분이었다. 거기에는 일종의 가치관이 부여되어 있다. 고대 이후 중국 '문명'을 기준으로 한 화이사상, 또는 고대 그리스의 '헬렌'과 '바르바로이'의 관념과 비슷하다."(85-6)


"서북유라시아의 대초원에는 카자흐 스텝이 펼쳐져 있다. 끝없는 대초원이 볼가 강까지 이어진다. 이곳은 오히려 몽골 초원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이 거대한 초원 지대는 볼가 강을 넘어 돈 강, 드네프르 강, 도나우 강 입구까지 계속된다. 남쪽은 카프가즈 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흑해 북쪽 연안 일대를 모두 덮고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쪽 기슭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대초원이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유목민 군단과 그 국가를 길러냈다. 몽골 고원에 이어 유목 국가의 '제2의 요람'이다. 몽골 세계제국 시대에는 페르시아어로 '다쉬트 이 킵차크'라고 총칭했으며, 이는 '킵차크의 초원'이라는 의미이다. 페르시아어는 몽골 시대에 국제어로 사용되었다.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를 비롯한 그 가문과 그들의 영지를 조치 울루스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킵차크 한국'이라고 부르는 곳은 '다쉬트 이 킵차크'라는 당시의 국제용어에서 유래했다. 이 서북유라시아 대초원이 조치 울루스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88-9)


3장 유목 국가의 원형을 찾아서


"헤로도토스가 저술한 《역사》 전편의 클라이맥스인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이 막 시작하기 직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전개한 북진 작전의 상대는 스키타이다. 때는 기원전 514년 또는 513년경이다." "그 당시 그리스인의 관념으로 유럽은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라는 두 해협을 경계로 북쪽에 펼쳐진 땅 전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그 남쪽 가운데 동쪽으로 펼쳐져 있는 곳을 '아시아', 서쪽은 '리디아'(이른바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아시아와 유럽을 지금처럼 동쪽과 서쪽이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온난하거나 뜨거운 날씨, 풍요의 땅에서 사치스러울 정도의 문화의 꽃이 핀 것은 아시아 쪽이었다. 유럽은 한랭하고 소박한, 무례함의 땅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스키타이나 그리스 또한 위의 관념에 따르면 모두 '북쪽의 땅', 유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키타이-페르시아 전쟁'을 아시아와 유럽 최초의 대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106-8)


"스키타이 국가는 동방에서 진출한 사르마타이 집단에게 밀려 슬금슬금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기원전 3세기 중반 무렵에는 완전히 해체되고 만 듯하다." "그러나 그 사르마타이 또한 4세기 동방의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밀려온 파도에 휩쓸렸다. '사르마타이 연합'은 와해되었고 훈족의 패권 아래 흡수되었다." "이런 경위를 일괄해서 말하면 서북유라시아 방면에서는 유목 군사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연합체가 계속 형성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그사이 동방에서 새로 나타난 무리에 의해 중심 집단의 교대와 연합체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는 것도 이곳의 '정치 전통'이 되었다." "13·14세기 몽골의 서북유라시아의 도착과 장기적인 지배가 그 마지막 파도였다. 조치 울루스를 정점으로 하는 300년에 걸친 느슨한 정치 시스템 속에서 태어난 러시아는 이 전통의 파도(초원 세력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확장하는)를 뒤집는 형태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전진했고, 러시아라는 '유라시아제국'을 전前근대의 마지막에 출현시켰다."(120-2)


"한편 스키타이와 병립했던 아케메네스왕조 또한 다양한 지역 사회를 포함한 '거대 국가' 패턴의 원류를 이룬다. 즉 스키타이와 아케메네스라는 남북 양국은 그 후 유라시아 역사의 이중 국가 패턴(그것도 광역 국가의)의 원류인 것이다." "'세계제국' 아케메네스왕조를 실제적으로 건설한 다리우스 1세는 장대한 구상을 토대로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여러 갈래의 국가·사회의 건설 사업을 펼쳤다. 중앙과 속령이라는 양면을 기본으로 배려하며 재조직했던 다리우스의 여러 시책은 총체적으로 국가·사회·경제·문화 건설의 요점을 거의 망라하고 있다. 그 후 인류사에서 '국가'라는 점의 원형, 특히 '제국 지배의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은 형태의 대부분은 모두 다리우스의 국가 건설 사업 중에 나오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의 도시 문명의 의미만을 오로지 높이 내걸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나 언설의 대부분은, 물론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얼마나 편협하고 독선적인 것이지 부정하기 힘들다."(124, 127-8)


"동반부에서는 유목 국가의 형성이 서반부보다 훨씬 늦었다. 사실 '중화 본토'도 아케메네스왕조를 기준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크게 늦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중국 본토의 전국시대 이전 동방의 유목민들은 말을 키우고는 있었지만 뛰어난 기마 기술과 그를 뒷받침할 각종 마구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동 목축의 범위 또한 지극히 제한된 공간 안에서 이루어졌다. 유목민이라고는 하지만 걸어 다니는 유목민이었고, 따라서 유목 생활의 내용이나 집단의 규모도 작았으며 군단이라는 의미 또한 매우 미약했다. 그런데 그것이 크게 변한 것이다. 도시 주민과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또 하나의 의미를 전한다. 유라시아 서반부에서 발달한 기마 기술과 그것을 전제로 운영되는 넓은 범위의 활용이라는 말 그대로 유목 사회 시스템이 동방의 유목민들에게 거의 완전하게 전해졌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로 희미한 존재였던 유목민들은 기동성과 집단 전술을 몸에 익히면서 급속도로 군사화되었다."(137-8)


"《사기》 〈흉노열전〉에서 권력을 장악한 묵돌은 냉정하고 과감한 타고난 군사 지휘관으로서(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일정 부분 이상화되어 묘사되고 있다. 거기에는 사마천의 명확한 의도와 메시지가 담겨 있다. 즉 자기가 속한 한왕조를 개국한 유방에 대한 묘사는 묵돌의 경우와 전혀 다르다. 사마천이 말하는 묵돌과 유방의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우열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씩씩하고 용감한 영웅은 다름 아닌 묵돌이다. 어딘가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칠칠치 못한 유방의 멍청한 모습을 《사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천은 사태를 주시하며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읽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기록했다. 그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후세의 독자들이었다. 그것은 당시 현실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중화'라는 가상적인 의식의 세계가 사전에 시야를 한정시키고 그 좁은 시야로 《사기》를 읽고 그 속에 담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힌 역사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148-9)


4장 초원과 중화를 관통한 변동의 파도


"한나라와 흉노 간의 총력을 기울인 장기전은 결국 두 제국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공격을 받은 흉노는 연합 주권의 형태 그 자체가 크게 흔들렸고 몇 가닥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편 공격을 한 한나라는 국가·사회의 내부에서 혼란이 발생했다. 직접적으로는 거액의 군사비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이 파탄 나고 말았다. 무제를 중심으로 한나라 정부는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철·술을 전매로 바꾸었으며 '균륜', '평준' 등의 물가 조절 정책 같은 다양한 정책을 통해 위기를 타개하려고 시도했다. 무제 시대에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일련의 전매제도는 이후 중화왕조에서 계승했고 세수의 절반 가까운 부분을 차지했다." "전쟁 비용 염출을 위한 당연한 결과로서 경제의 왜곡까지 더해져 사회에 짙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결국 한무제 사후 그의 후계자가 된 소제昭帝는 곧바로 흉노와 강화를 맺는다. 한나라의 약속 파기에서 시작된 '흉노-한 전쟁'은 다시 한나라의 요청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180-2)


"유연은 예의 묵돌의 후예로 선우 왕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계보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성을 중국풍으로 유劉라고 쓴 것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인 유방이 종실의 딸을 묵돌에게 시집보낸 이후 한나라의 공주와 통혼에 의해 한왕조 유씨의 피가 선우 왕실에도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한 왕실의 신성한 혈맥인 유씨 자체가 후한의 현제 이후 촉한의 황제였던 유비 일문 이후 정치적인 존재로는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 흉노 왕족이 함께 쓰는 유씨야말로 제대로 된 유씨였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유연은 몸속에 과거의 두 제국인 흉노와 한의 피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원과 중화의 틀이 무너지고 서로 난입해서 공방을 벌이는 난세였던 당시 유연이야말로 귀한 존재 가운데서도 귀한 존재였고 왕자 중의 왕자였다. 두 왕권의 혼혈이라고 해도 좋을 존재, 그 자체가 당시 아시아 동쪽에서 뛰어나게 우수하고 신성한 상징이었던 것이다."(203-4)


"한의 황제가 된 유연은 불과 2년 뒤인 영가 4년(310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진왕조 타도 작전이 한창일 때였다. 유연은 상징적인 혈통과 재능에 더해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운명을 지닌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이른 죽음은 흉노왕조를 단명하게 만든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더 나아가 정치 상황을 다시 혼란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연이 없는 흉노족의 한왕조는 이미 초라해진 진왕조를 몰아냈다. 영가 5년(311년) 진의 수도 낙양은 한왕조의 흉노 군대에게 함락되었다. 이 전후의 동란을 일반적으로 영가의 난이라고 부른다. 난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권 교체였다. 이 사건을 진왕조에 대한 흉포한 '이민족의 반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중화사상의 산물이다." "애초에 이 시대에 있어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시대는 현실적으로 '이민족'과 '한민족'을 확실하게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근대주의의 편협한 '민족'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곳에서 역사가 진행되고 있었다."(222)


"이번에는 시대를 건너뛰어 선비 탁발부가 결성한 대국은 북위라는 화북의 통일 정권으로 성장한 다음 동위와 서위로 분열하고 각각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라는 이름으로 바꾼 다음 그 북제가 수隋에서 당으로 바뀐다. 즉 이들 정권은 모두 선비 탁발부 집단이 중심이 되어 세워진 일련의 국가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라고 또렷하게 선을 긋기 어렵다. 대국에서 북위를 거쳐 마침내 당에 이른 국가는 중화풍의 왕조 이름을 바꾼 연속된 국가였다. 권력의 실제 그 자체의 연속성, 공통성에 착목하면 현실적으로는 '탁발拓跋 국가'라고 일괄해서 취급하는 것이 적절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5호 16국 시대'라고 하면 이 시기만이 '주변의 야만족'들이 중화에 도발한 시대라고 별다른 의심 없이 그 오해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중국사에서 순수한 한족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잘해야 한漢·송宋·명明 정도밖에 안 된다. 북위나 당나라는 중화왕조로 보고 5호 16국은 이민족의 왕조로 보는 것은 사기에 가깝다."(224-5)


5장 세계를 움직인 투르크-몽골족


"5세기를 전후하여 초원 세계는 동쪽에서 차례로 투르크·몽골계 연합체인 유연, 투르크 색깔이 짙은 고거, 이란계가 정권 중심인 에프탈이라는 세 부류의 유목 국가가 나란히 있는 상황이었다. 이 삼국의 동서에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 있었다. 동쪽은 탁발 국가에서 유래한 북위가, 서쪽은 이란고원을 중심으로 한 사산조페르시아가 그것이다. 이들 삼국과 두 나라, 모두 5개의 국가가 서로 착종한 정치 관계를 맺고 항쟁했다." "또한 이런 사태를 좀더 시야를 넓혀 바라보면 남중국의 남조와 동지중해 지역의 동로마 또한 다분히 깊은 관계와 이해로 얽혀 있었다. 즉 유라시아 동서에서 7개국이 진주처럼 꿰어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역사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7개국의 갈등은 '유라시아 시대'의 방문을 알리는 최초의 종소리였다. 그러나 그 각축 상황은 겨우 반세기로 끝났다. 6세기 중반 무렵 중앙유라시아의 한쪽 구석에서 보다 격렬한 시대와 정국을 주도할 강력한 유목 국가가 갑자기 출현했다. 그것은 돌궐이었다."(248-9)


"그러나 돌궐이 유라시아 동서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하나로 통합한 것은 불과 30년 정도였다. 583년 돌궐은 동서로 분열했다. 동돌궐은 몽골고원을 본거지로 삼아 그 주변을 지배했고 서돌궐은 천산 산중을 근거지로 중앙아시아와 서북유라시아를 지배했다. 그런데 이러한 돌궐의 동서 양분은 돌궐 국가의 급격한 확대가 이루어진 초기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동쪽과 서쪽 두 개로 담당 지역이 양분되어 있었는데 결국 그대로 분할되고 만 것이다.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투르크계 주민을 기반으로 하는 한편 크고 작은 분권 세력이 할거했던 돌궐은 극히 이완된 연합체였다. 게다가 '국가' 전체를 통합시킬 수 있는 중앙권력은 거대한 판도와 비교할 때 너무나도 미약했다. '세계제국'을 지속시킬 수 있는 정치기구가 아직 발달하지 못했던 것이다. 거대한 돌궐의 동서 분열은 탁발 국가에 행운을 안겨주었다." "581년 양견은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대대로 물려받았던 작위인 수국공隋國公에서 따서 수왕조를 열었다."(253-5)


"아마 성립 초기의 당왕조는 다시 강력해진 동돌궐의 속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관계가 곧바로 역전되었다. 동돌궐의 지배 아래에 있던 철륵鐵勒을 비롯한 설연타薛延陀 등 투르크계 여러 부部가 독립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막 당나라의 제2대 황제가 된 태종 이세민은 630년 이를 기회로 삼아 일거에 힐리 카간을 밀어붙였고, 동돌궐의 옛 속국과 독립을 지향했던 여러 부를 회유하며 자신을 카간으로 섬길 것을 요구했다. 또한 청해 지방의 토욕혼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급속하게 국가를 형성한 감숙회랑이 이끄는 토번과 화친을 맺은 당왕조의 세력권은 단숨에 아시아 동방 전체를 덮을 만큼 넓어졌다. 태종 이세민이 내륙 아시아의 군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투르크-몽골어로 '텡그리 카간'이었다." "계보로 보면 선비 탁발부 출신으로 부계나 모계 모두 분명 흉노로 거슬러 올라가는 당나라의 태종은 유목민들이 보기에 적합한 투르크 몽골의 왕이었다."(256-7)


"동돌궐은 744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토쿠즈오구즈Toquz-Oghuz 연합에 의해 무너졌다. 토쿠즈오구즈 또한 투르크 계통이었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 이후 급속도로 무력해진) 당왕조와 안전 보장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거액의 경제 지원을 받는 화친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당왕조 중앙정부의 재정을 극도로 약화시켰고, 마침내 당은 탁발 국가의 전통이었던 조용조租庸調를 근간으로 하는 세금 체계에서 양세법兩稅法에 의한 세금 징수 시스템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역대 중화왕조에서 소금 전매가 중앙 재정의 근간이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위구르의 주도는 정치·군사 면에 그치지 않았다. 돌궐 이후 투르크 국가와의 인연을 강화한 소그드 상업 세력과 결탁한 위구르는 소그드인의 대상들을 활용해서 자기들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당왕조 중국에 말을 주고 비단을 받는 '견마絹馬 무역'을 확대했다. 물론 국제 상품인 비단은 소그드 상인의 상업망을 통해 중앙아시아와 그 너머로 전매되었다."(267-70)


"키타이(거란) 국가는 그 속에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를 품고 있었고 그 점에 대해 말하면 '유농遊農 복합 국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위구르 유목제국에서 명확해진 유목과 도시의 관계는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다. 즉 단순히 유목 국가, 농경 국가로 구분하는 도식을 적용할 수 없는 시대로 이미 접어들었다. 유목 국가는 뭉치기도 쉽지만 깨지기도 쉬웠다. 그것이 장점이기도 하고 약점이기도 했다. 붕괴되기 쉬운 것은 연합체가 갖고 있는 숙명이었는데, 다르게 표현하면 중앙권력과 그것을 지탱하는 기구·조직이 국가 전체의 총량과 비교해서 극히 작았다는 점으로 압축된다. 그런데 키타이 국가에 이르러서는 그 결점이 상당히 수정되었다. 키타이 국가는 유목 국가의 구조에 농경 국가의 시스템을 수용해서 당시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함과 지속력을 손에 넣었다. 즉 유목 국가는 키타이 국가 이후 국가 시스템이 변했다. 즉 국가의 형태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287-9)


6장 몽골의 전쟁과 평화


"주로 혈연 또는 의리를 통해 유사 혈연으로 맺어진 소규모 집단을 편의상 '씨족'이라고 부르고 그런 '씨족' 집단이 지연地緣이나 정치적인 이유(이 경우도 '피'로 맺어진 친소 관계가 강조된다)로 하나로 모인 것을 편의적으로 '부족'이라고 부른다. 고원에 할거하는 여러 세력 가운데 동부의 흥안령 일대를 타타르Tatar, 콘기라트Qonggirat, 중부의 오르콘 토라 일대의 케레이트Kereyit, 북부의 셀렝게 유역의 메르키트Merkit, 그리고 서부의 알타이 일대의 나이만Naiman 등이 유력했다." "그러나 몽골('맹골萌骨', '몽올蒙兀')이라고 불리는 집단은 오랫동안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던 듯하다. 약소 집단인 몽골부가 부상한 것은 12세기 무렵으로 테무진 등장의 전야라고 해도 좋다. 이때만 해도 몽골은 신흥 세력이었다. 12세기 끝 무렵 테무진은 몽골 집단의 리더로 부상했다." "여기에 용모와 언어가 제각각인 유목민들이 테무진이라는 일개 권위자 아래로 모여드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를 정치 연합체 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320-1)


"1206년 칭기즈칸을 칭한 테무진이 휘하의 유목 연합을 '대몽골국'이라고 명명하면서 몽골은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인종과 민족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것이 몽골 확대의 열쇠다. 이때 '몽골'에는 '민족'이라는 용어로 부를 수 있는 동일성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모여든 몽골이 '몽골 공동체'가 된 것은 칭기즈 체제에 의한 유목 집단의 재편성이 일단 종료되고 대외 원정에 나서는 1211년부터다. 전후 6년에 걸친 금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은 거국일치擧國一致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몽골과 금의 전쟁' 동안 신흥 '대몽골국'의 성년 남자 대부분은 고비사막의 북쪽에 있는 본거지(막북漠北)를 떠나 막남漠南의 땅에 병참기지를 구축하고 화북 전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가 건립 후 곧 이어진 이 대작전에 의해 '대몽골국'의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몽골군'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속으로는 다양한 부족과 씨족에 속해 있었지만 겉으로는 '몽골'이라는 하나의 덩어리라는 것을 막대한 전리품과 함께 자각했다."(322)


"동부 천산의 남북에 나라를 세운 불교·통상 국가인 '천산 위구르'와 그 서쪽인 천산 산중, 이리 강의 계곡에 나라를 세운 무슬림왕국인 '천산 카를루크'(카라한왕조와도 관계된)는 모두 투르크계 지배자를 섬긴 작은 국가였다. 두 국가 모두 일찍부터 몽골로의 귀속을 결정했다. 그리고 두 국가가 참가해서 역시 투르크계 이슬람 대세력인 호라즘샤왕국을 붕괴시킨 결과로 중앙아시아에서 서북유라시아, 서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던 투르크계 여러 집단이 차례로 몽골에 편입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특히 서북유라시아 초원의 킵차크족은 이보다 10년 후 '바투의 서쪽 원정'에 의해 조치 울루스에 편입되었다. 그 결과로 불과 4개의 천인대를 갖고 있었던 조치 집안은 일거에 30배가 넘는 대병력을 획득했고 몽골제국 전체에서도 굴지의 군사력을 지니게 되었다." "몽골은 대부분 '동료'를 늘려 그것을 '몽골'이라는 이름 아래로 차례차례 편입했다. 편입·재편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진 조직화야말로 몽골의 확장에 큰 디딤돌이었다."(330-1)


"1260년을 정점으로 하는 제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무력에 의해 제5대 몽골 대칸의 지위를 손에 넣은 쿠빌라이는 방대한 인구와 드넓은 판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놓고 근본부터 재검토해야 했다." "몽골제국은 이후 쿠빌라이 집안이 독점하게 된 대칸의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서방의 세 영역을 포함한 '세계 연방'의 색채를 짙게 드러냈다. 이른바 이중 구조로 이루어진 몽골제국을 쿠빌라이가 받아들였다고 말해도 좋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경제와 유통의 조절을 통해 유라시아 규모로 통상을 유도해서 분유分有 체제가 강화된 몽골제국 전역에서, 유라시아,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세계'를 연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그 전제로 남중국의 남송을 접수하고 마침내 중국 전토를 판도에 넣었으며 남쪽의 습윤 아시아와 뜨거운 바다를 시야에 넣었다. 몽골제국이 확대되어가는 역사 속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바다 진출을 이루었다."(336-7)


"남송의 '유산'은 쿠빌라이 정권이라는 이용자의 도움으로 활짝 꽃을 피웠다. 몽골제국 전체에서 생각하면 쿠빌라이의 우방 훌레구 울루스는 중동의 동쪽 절반을 지배했다. 즉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무슬림 해상 세력은 모두 몽골의 손에 장악되었다. 쿠빌라이의 대칸 정권인 '대원 울루스'를 중심으로 동서가 호응하는 형태로 몽골의 해상 진출과 동서 해양 무역의 장악이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여기에 8세기 이후 무슬림 해양 상인의 동진이라는 시대를 관통하는 현상과 당나라 말기 이후 남송을 거쳐 해양에 대한 지향성을 높여갔던 강남이라는 풍요로운 산업사회가 쿠빌라이의 '대원 울루스'라는 강력한 추진력에 의해 하나로 묶여 확실한 모습으로 시스템화되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내륙과 해양이 참된 시스템으로 결합된 시대의 개막이었다. '유라시아 대교역권'이라고 불러야 할 초대형 통상·교류의 소용돌이가 13세기 말기인 1280녀대 끝자락에 명확해졌다."(343-4)


"몽골의 확대와 그 후의 통치를 통해 군사·정치조직의 몽골과 상업·경제 조직의 무슬림 및 위그르와의 공동화 또는 일체화가 두드러졌다. 이런 면에서 이들을 각각 몽골 지배의 '겉'과 '속' 얼굴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시 이들 상업 세력은 자기 이외의 누군가를 선택해서 '파트너'로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그것이 발전하면 자금을 모아서 대형 자본을 만들어 그것을 토대로 공동 또는 단체로 각종 경제 활동을 영위했다. 그것을 투르크어로 '오르톡Ortoq'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동료', '동업자'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변해서 '조합'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는 이전부터 몽골과 표리일체의 관계였던 오르톡 무리를 더 강력하게 정권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 가운데 유력자를 정부 고관, 그것도 경제·실무 부문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서 오르톡이라는 조직과 다양한 영리 활동을 통째로 국가 관리 아래에 두었다. 오르톡들은 쿠빌라이와 그 브레인들이 고안한 새로운 '세계 전략'의 첨병이었다고 보아도 좋다."(351-4)


7장 근현대사의 틀에 대해


"전근대의 유라시아 세계사는 군사력이 뒷받침된 정치권력이 사람들과 지역을 하나로 묶어 '국가'를 만들었다. 전근대의 유라시아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세계에서도 '민족'은 (그 이후에) 만들어졌다. 분명히 '민족'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한 경우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확실한 유래와 전통을 가진 '민족'뿐만 아니라 막 만들어진 '민족'도 있다. '민족'이라는 생각 자체가 작위성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근현대에 '소수민족'이 마구잡이로 만들어졌다. 아마 국민국가가 '소수민족'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국가라는 환상 속에서 국가의 '주체'가 되는 '다수 민족'이 설정되고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소수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사를 돌이켜 볼 때나 현재를 바라볼 때 '민족'이라는 말 속에 다양한 변화가 있고, 현실에서는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하나로 묶어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도에서 단색으로 칠할 수 있는 '민족'은 오히려 소수이며 때로는 부자연스럽기도 하다."(400-4)


"지구상에 있는 각각의 지역과 문명권에는 고유의 가치와 역사가 있고 각각 순위를 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 결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문명권, 중동, 중앙아시아, 러시아, 유럽, 남·북아메리카, 오세아니아 등이 각각 병렬되고 만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오히려 일종의 '문명주의'가 숨겨져 있다. 현대의 눈을 들이대고 과거에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역사와 지역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역사시대에 그런 지역 분리가 적당한지 여부는 고려하고 있지 않다. 또 거론되는 여러 지역 사이의 연쇄나 역사 전개에 대한 통찰 또한 없다. 이들 모두 현대 본위의 접근 방식이다. 아니 그보다 과거의 유럽 중심주의와 비교해 각 지역을 '평등하게 다룬다'는 미명으로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분위기조차 존재한다. 그러나 과도한 분리는 오히려 역사의 현실을 숨기는 일이 되고 만다. 그렇게 본래의 역사에서 분리된 연구는 '지역사'나 '문명권사'로 한정되어 인류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다."(404-5)


"유라시아라는 용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입힐 필요가 없다. 유라시아라는 틀이 있기 때문에 드러나는 부분도 많다. 역사시대에도 그러했고 현대에도 유라시아라는 시각이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화의 역사를 열어젖힌 근대 서구는 극단적으로 무장한 군사 국가였다. 요컨대 세계사는 유목민이라는 땀냄새를 풍기는 군사 권력이 통합하는 시대에서 인력을 초월하는 육·해·공의 거대 전투력을 가진 시대로 이행한 것이다. 그 근대 서구형 문명이 몽골을 정점으로 하는 유목 국가를 '야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딘가 몹시 어리석고 웃기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역사상像·문명상像의 왜곡을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고 할 때 아마 중앙유라시아와 유목민의 역사는 유력한 하나의 시점이 될지도 모른다. 근대 세계에서는 원래 '국가'라는 것에 배치되는 주변적인 존재로 여겼던 유목민이 사실은 과거 인류사를 유지하고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도 최대의 담당자였다. 바로 여기에 세계사라고 불리는 큰 패러독스가 있다."(405-6, 4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