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삼위일체론 - 살림지식총서 384 살림지식총서 384
유해무 지음 / 살림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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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기독교의 정체성인 삼위일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행복관을 제시한다. 첫째, 바깥에 있는 물질적 대상을 조작한 결과와 업적으로 얻는 행복이 있다. 두 번째로, 도시 공동체 안에서 지혜로써 정의, 용기, 절제 등의 미덕을 추구하여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삶, 곧 ‘실천적 삶’이 주는 행복이다. 세 번째로, 철학자는 외적 대상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하지 않고, 도시 공동체를 통한 일시적 쾌락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정신적 대상을 관찰하고 바라보는 ‘관조적 삶’의 양식을 찾아 은거함으로 신적 자족에서 행복을 실현한다. 이 책에서는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 또는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의 양 구도를 기독교적으로 원용하고 통합하는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관조하는 삶이 믿음이며 동시에 기독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원초적인 삶인데, 그리스적 배경에서와는 달리, 이 삶은 세상에서 물질적 대상을 잘 다루고 공동체에서 미덕을 추구하여 인정받음으로써 기독교회의 독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3-4)


관조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외적 대상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다. 이런 관조는 예전(禮典)적 예배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원용하여 사용하려는 관조는 ‘관상’과는 다르다. 관상은 물질이나 육체 등 외적인 모든 것을 경시하는 이원론을 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실천적 삶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관조하는 예배로 이루어지는 교회 공동체는 동시에 실천의 장이 된다. 즉,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제하는 예배자는 이차적으로 예배 중에 다른 예배자와 교제한다. 이렇게 교회 공동체는 일차적인 ‘실천적 삶’의 현장으로 거듭난다. 그렇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가 삼위 하나님을 드러내고 대리하는 실천의 현장은 세상이다. 관조적 삶은 관조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으며, 성도는 관조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세상이라는 실천의 현장에서 보여 주어야 한다. 믿음은 세상에서 행하는 실천이며, 실천의 현장은 동시에 지속적인 관조의 현장이다. 4)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기초: 성경


예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 예수는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고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다(요 5:18). 성부는 성자를 고난과 십자가로 내몰았다. 그것은 곧 자기 아버지를 증거하는 일의 절정이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요 17:4).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살리심으로 영화롭게 한다(요 17:24). 그런데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님이라 할 수 없다(고전 12:3).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성자를 성육하게 하신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다(눅 1:35). 이처럼 성령은 성자를 세상에 임하게 하고 예수를 다시 살리신 능력의 영이시면서도, 부활한 예수께서 보내시는 영이시기도 하다. 이처럼 예수 사건이 중심에 있다. 성부께서는 아드님을 나사렛 예수로 보내셨고, 아드님은 아버지께 성령을 받아 성도에게 부어 주셨고(행 2:33), 성령은 아드님을 증거한다(행 5:32). 6-7)


구약은 그리스도의 전(前)역사이며,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계시의 목표점이고 성취이다. 따라서 계시의 시작조차도 완성된 계시의 관점에서만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신약은 (구약의) 기존 의미가 아니라 성취 사실에서 시작하며, 그런 다음에 필요한 내용을 구약에서 찾는다. 구약은 신약에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않는다. 성취의 빛 아래서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진술에서 예언을 찾아낸다. 구약은 창세기 3장 15절부터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다. 이 본문은 전통적으로 ‘원시 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으로 지칭되었다. 야웨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에 대한 약속(창 12:1~3), 다윗에게 주신 왕위에 관한 약속(삼하 7:11~16, 23:1~7), 여러 시편들(2편, 16편, 110편 등)과 여러 예언서의 약속들(사 7:14, 9:6, 11:1~10, 52:13~53:12 등)은 모두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을 예언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 관점에서 구약을 읽어야 구약을 구약 그대로 읽을 수 있다. 9)


삼위일체론의 내적 현장: 예배


세례는 신비적 연합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일이며 그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는 일이다. 이전의 삶을 등지고 이제부터는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서약이다. 이 연합과 더불어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되며, 그분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다. 세례의식에는 이른바 종교적 요소뿐만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삶에 대한 관심도 컸다. 곧, 교회 안과 밖에 있는 이웃을 향한 봉사의 임무도 동반한다. 이제부터 수세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신 성전(고전 3:16)이다. 세례는 완전한 교인됨을 인정하고 선언하는 의식이다. 세례 받기 전에 학습자는 오직 설교 말씀만 들을 수 있었다. 학습자는 세례교인만이 참석할 수 있는 성찬이 시작되기 전에 교회당을 떠나야 했다. 고대 교회에서 예배는 두 부분, 즉 말씀과 성찬으로 구성되었고, 성찬이 예배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비록 세례는 예배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는 완전한 예배자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연계적으로 중요시되었다. 14-5)


성찬에서는 그리스도와의 현재적 교제와 그분의 과거 사역에 대한 기억과 재림의 미래에 대한 대망이 중심을 이룬다.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은 떡과 포도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한다. 이 교제가 기초가 되어 함께 참여한 교인들과도 교제한다.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한다. 나아가 그분의 부활을 고백하고 우리의 부활을 소망한다. 성찬에는 예수께서 행한 모든 사역, 곧 성육신과 3년의 지상 사역, 고난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을 기억하고,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일이 포함된다. 성찬은 과거의 사건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 가운데 현재 임재하신 그분을 만나 교제하고, 나아가 다시 오실 그분을 기다리는 것, 곧 종말론적 신앙의 고백이기도 하다.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령과 함께 성자 예수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를 둔 성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현장이다. 16)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발전: 교회사


삼위일체론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첫째로,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가 있다. 니케아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에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했는데,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 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그리스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였기 때문이다. 즉,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해이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내용과 표현 용어에서 복음의 그리스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그리스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이것들은 단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의 교제 중에 고백했다. 21)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주(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일체성)과 예수와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종속설이 당시의 일반적 경향이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폈다(마르키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가 정착되자 그리스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그리스 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1-2)


하나님과 함께 선재(先在)하던 로고스는 세계 ‘이성’이나 우주 원리이며, 작은 씨앗으로서 만인에게 임재하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는 하나님의 전능한 본질에는 속성인 ‘이성적 능력’이 세상 창조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에게서 나와 독자적 존재가 된다. 두 입장 다 로고스는 하나님보다 열등하다고 보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에 대한 반발로 양태설이 등장한다. 하나님은 구속역사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등장하나 한 본질의 세 외현(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원성을 강조하는 단원론의 반격을 촉발했다. 단원론(군주론 또는 주권론은 합당한 번역어가 아님)은 성부의 단원성, 곧 성부를 신성의 단일한 원인으로 고수하기 위하여 성자의 신성을 성부의 신성에서 파생되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성부의 외현(外現) 방식이라고 보았다. 22)


라틴어를 사용한 서방교회의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일체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일체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substantia)’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원역사를 위하여 일체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일체성을 강조했지만, 동시에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에겐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그는 ‘위격(hypostasis)’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리고 ‘본질동등(homoousios)’으로는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일체성을 표현했다. 즉,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본 것이다. 22-3)


아리우스(256~336년경)는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성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일체성과 성자의 종속성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게다가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다만 완전한 피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에 불과하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된 것일 뿐이다. 23)


3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일체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비공유적 속성)을 각각 사용했다. 안카라의 감독 대(大)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했다.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태어나심을 각각 성부와 성자의 고유성으로 보았고,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으며,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두 사람의 친구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329~390)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나아가 그들은 ‘본질동등성’을 ‘본질유사성’으로 해석하는 것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25)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본질의 일체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세 명의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유개념(類槪念)으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하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비교는 일체성보다는 구별을 부각시킨다. 이를 빌미로 삼아 아리우스파들은 카파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란 삼신(三神)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일체성은 소멸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으며 본질은 곧 속성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26)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하나님의 본질이나 존재를 직접 알 수 없다는 입장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 등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는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원형인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식은 경험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 신 인식을 신 체험에서 출발시켜서 그 원인자를 찾아 나선다. 최초의 원인자인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신 인식과 신 언설은 유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유비론은 신과 세상의 관계를 원인성과 완전성의 관점에서 표현한다. 세계의 피조성에서 나오는 인식은 하나님이 제1 원인자임과 그분의 본질의 일체성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육신이나 삼위일체론은 본성적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다만 창조는 자연적 필연이 아니라 자유와 사랑의 산물이다. 즉,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있어야 성육한 성자와 성령의 선물로 완성되는 구원을 올바르게 사유할 수 있다. 29)


종교개혁은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고 변호하는 데서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계시를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님을 말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론을 학당이 아니라 교회의 소관사로 삼았다. 루터(1483~1546)는 삼위일체론에서 정착된 용어들을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삼위일체론’도 용어로서는 만족하지 않았다. ‘관계’는 신성이 우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했고, ‘본질동등성’도 원래 성경 바깥에서 온 용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어들, 이를테면 삼위일체론이라는 용어도 이단을 경계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칼뱅(1509~1564)도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성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성부가 아니며, 성령도 성자가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별된다는 사실만을 공유한다면, 모든 용어들은 사라져도 좋다고 말한다. 30)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 교회와 세상


삼위일체론의 외적 현장인 교회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배로 이루어지며, 예배는 일차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를 이룩한다. 이 하나님은 내적으로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으로서 서로 관계하고 교제하시며, 외적으로는 예배자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교제로 예배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귀며 참여한다. 예배자는 이 원초적 교제에 기초하여 형제자매로 결합하고 서로서로 교제한다. 예배자가 나누는 인간적인 교제는 이 신적인 교제 위에서야 가능하다. 구원의 경륜과 배포(配布)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했다. 구원을 삼위 하나님의 협의와 사역에 근거한 하나님의 삶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구원이 오로지 구원론적으로만 제한되고 급기야는 인간론적인 개인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참여는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통하여 그의 본질에 참여함에 있다(벧후 1:4). 그리고 이것은 근본적으로 성도의 교제도 포함한다. 35-6)


나오며: 예배와 삶의 세계의 통합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삶이다. 삼위일체론은 이론적이며 동시에 실천적이다. 예배에서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뵐 수 있고, 그분과 누리는 교제에서 그분을 받는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배자의 위격을 주고받는 교제이다. 예배자는 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엄밀히 말해서 예배자는 예배에서 받을 뿐이다. 물론 기도와 찬송으로 예배자 자신을 드린다. 그렇지만 예배자가 자신을 드리는 곳은 교회와 세상이다. 예배자는 예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받아 교회와 세상에서 그분들을 드러내고 높이고 영광을 돌린다. 예배가 이론(관조)에 해당한다면, 교회와 세상은 실천에 해당한다. 예배가 튼튼하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 수가 없다. 교회가 예배가 아닌 일에 열중하거나, 무신론, 다신론과 유일신론의 종교형태와 구별될 수 없다면, 그것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딤후 3:5)과 다를 바가 없다.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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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다정한 물리학 - 거대한 우주와 물질의 기원을 탐구하고 싶을 때
해리 클리프 지음, 박병철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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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기본 조리법


18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학자들은 목탄 같은 가연성 물체에 불을 붙이면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물질이 방출되면서 타들어 간다고 생각했다. 즉, 목탄에는 다량의 플로지스톤이 함유되어 있어서 한번 불을 붙이면 오랫동안 탈 수 있으며, 플로지스톤이 완전히 고갈되거나 주변의 공기가 플로지스톤을 더 이상 흡수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연소가 끝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물체가 탈 때 플로지스톤이 방출된다면 연소가 끝난 후에는 무게가 가벼워져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금속이 불에 타면 타기 전보다 무거워진다. 라부아지에는 정반대의 설명을 제시했다. 연소과정에서 플로지스톤이 방출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기가 물체에 흡수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에 탄 물체가 무거워지는 것은 연소 과정 중에 공기와 결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것이 탈플로지스톤 공기가 아니라 ‘연료와 결합하여 연소를 일으키는 기체’임을 깨닫고, 이것을 “산소oxygen”로 명명했다. 21-3)


2장 · 가장 작은 조각


돌턴은 이슬비가 내리는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잉글랜드 북서부의 호수가 많은 지역: 옮긴이)로 종종 산책하러 나갔는데, 습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이런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이 축축한 공기 속에 습기가 더 흡수될 여지가 남아 있을까?” 그렇다. 돌턴을 원자론으로 이끈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다. 돌턴의 실험은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용기 안에 욱여넣은 공기의 양에 상관없이, 흡수되는 수증기의 양이 항상 일정했던 것이다. 마치 공기와 수증기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한 채(즉,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면서) 항상 동일한 공간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두 개의 공기 원자나 두 개의 수증기 원자는 서로 상호작용을 교환하지만, 공기 원자와 수증기 원자는 상대방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는 원자가 물에 녹는 정도를 좌우하는 요인이 “원자의 무게”라고 주장했다. 즉, 무거운 원자가 가벼운 원자보다 물에 잘 녹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가설을 증명하려면 원자들 사이의 상대적인 무게를 알아야 한다. 29-30)


19세기 초에는 탄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두 종류의 기체가 알려져 있었는데, 하나는 탄화산소carbonic oxide(무색의 독성기체)이고 다른 하나는 탄산carbonic acid(조지프 블랙이 발견한 ‘고정공기.’ 실험실에서 수많은 쥐들이 과학실험이라는 명목하에 이 기체를 마시고 질식했음)이었다. 돌턴은 고정된 양의 탄소와 결합하여 위의 두 기체를 만드는 산소의 양을 측정함으로써, 탄산에 함유된 산소가 탄화산소에 함유된 산소보다 두 배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기에 그의 원자 이론을 적용하면 탄화산소는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한 가장 단순한 화합물이며(현대식 용어로는 일산화탄소이다), 탄산은 탄소 원자 한 개와 산소 원자 두 개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화합물이다(현대식 용어로는 이산화탄소이다). 이로써 돌턴은 탄소 원자와 산소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얻은 탄소와 산소의 질량 비율은 약 1.30:1이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알려진 1.33:1과 거의 비슷하다. 31)


3장 · 원자의 구성성분


당시 과학계는 음극선의 정체를 놓고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한쪽 진영은 음극선이 라디오파나 빛, 또는 X-선 같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진영은 이온ion처럼 음전하를 띤 입자의 흐름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실험데이터에 기초하여 일련의 계산을 수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음극선의 질량을 전하로 나눈 값이 수소이온을 전하로 나눈 값보다 약 1,000배쯤 작게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음극선의 전하량이 수소이온의 전하량보다 훨씬 크거나 (2) 음극선의 질량이 수소이온의 질량보다 훨씬(아마도 수천 배 이상) 작다는 뜻이다. 1897년 10월 톰슨은 새로운 논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양전하의 바닷속에 동심원을 따라 미립자가 배열되어 있는” 원자모형atomic model을 최초로 제시했다. “음극선의 구성 입자이자, 음전하를 띠고 있으면서 모든 원자에 들어 있는 엄청나게 가벼운 입자”는 오늘날 ‘전자electron’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44-6)


지난 10년 동안 방사선에 대하여 많은 사실이 새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사방에 널려 있었다. 일부 원자는 왜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다른 원자로 변신하는가? 그리고 방사선에 담긴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러더퍼드의 계산에 의하면 방사성 붕괴가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는 가장 격렬한 화학반응에서 방출되는 에너지보다 무려 수백만 배나 강력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원자의 내부 어딘가에 방대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1911년 러더퍼드는 원자핵의 발견을 훨씬 뛰어넘어 아원자세계의 그림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원자핵은 원자보다 수만 배 작으면서 원자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주변을 가벼운 전자구름이 선회하고 있다. 원자를 축구장 크기만큼 확대하면 원자핵은 센터서클 중앙에 놓인 작은 구슬쯤 되고, 전자는 관중석 어딘가에서 열심히 돌고 있을 것이다. 48, 51)


그러나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은 태생적으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맥스웰의 고전 전자기학에 의하면 가속운동을 하는 하전입자(전하를 띤 입자)는 전자기파(빛)를 방출한다. 원운동(궤도운동)도 엄연한 가속운동이므로, 원자핵 주변을 도는 전자는 전자기파를 방출하면서 에너지를 잃을 것이고, 에너지가 작아지면 궤도반지름도 작아진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 전자는 나선을 그리면서 서서히 원자핵에 가까워지다가 결국은 원자핵 속으로 빨려 들어가야 한다. 다시 말해서, 원자의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문제는 닐스 보어Niels Bohr가 “양자quantum”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면서 극적으로 해결되었다. 보어는 전자가 특정한 궤도만 돌 수 있으며,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점프할 때마다 광양자를 방출한다고 주장했다. 보어의 원자모형에 의하면 전자는 원형 철로를 달리는 기차처럼 자신에게 할당된 궤도만 돌 수 있기 때문에, 원자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51-2)


4장 · 원자핵 분해하기


당구 게임에서는 한 공이 다른 공을 때리면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그 공이 또 다른 공을 때리고…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폴로늄에서 자연적으로 방출된 알파입자가 베릴륨의 핵을 때리면 투과력이 높은 방사선이 방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렌과 프레데리크가 관측했던 감마선이다. 이 감마선이 다량의 수소 원자를 포함한 파라핀 왁스를 때리면 수소 원자의 핵, 즉 양성자가 빠른 속도로 방출된다. 놀라운 것은 파라핀 속의 양성자(수소 원자핵)가 감마선과 충돌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에너지를 갖고 튀어나온다는 점이다.  양성자가 이렌 퀴리의 실험에서 측정된 값만큼 빠르게 가속되려면 양성자를 때린 감마선은 약 5,000만 eV(또는 50MeV)의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폴로늄에서 방출된 감마선의 에너지는 아무리 커도 5.3MeV를 넘지 않는다. 어떻게 자신이 흡수한 에너지보다 10배나 큰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베릴륨 원자핵 안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63)


채드윅은 베릴륨에서 방출된 방사선을 중성자로 간주하면 에너지 문제가 말끔하게 해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감마선은 질량이 없기 때문에, 파라핀 왁스에서 무거운 양성자가 튀어나오도록 만들려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상황은 탁구공을 던져서 볼링공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중성자는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하기 때문에, 양성자를 중성자로 때리는 것은 볼링공을 또 다른 볼링공으로 때리는 것과 비슷하다. 양성자를 방출시키는 데 필요한 감마선의 에너지는 50MeV나 되지만, 중성자라면 4.5MeV로 충분하다. 그리고 이 값은 베릴륨 핵에 흡수된 알파입자의 에너지 5.3MeV보다 작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집합이었다. 원자핵 안에서 베타붕괴beta decay로 알려진 붕괴 현상이 일어나면 중성자가 양전하를 띤 양성자로 변하면서 음전하를 띤 전자를 외부로 방출한다. 이로써 중성자는 양성자, 전자와 함께 원자핵을 이루는 구성성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64-5)


5장 · 열핵 오븐


수소 원자핵(양성자)에 알파입자를 발사하면 대부분이 튕겨 나오지만, 알파입자와 수소 원자핵 사이의 거리가 1천×1조분의 1m 이내로 가까워지면 갑자기 두 입자 사이에 인력이 작용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강한 핵력strong nuclear force(강력)이라는 새로운 힘이 발견된 첫 번째 사례였다. “강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이 힘이 지극히 가까운 거리에서 전기력을 이길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원자핵을 에워싸고 있는 “밀어내는 전기장”은 성을 에워싼 가파른 성벽과 비슷하다. 양성자가 이런 성에 침투하려면 성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빠르게 점프해야 한다. 일단 벽을 넘기만 하면 강력이 작용하여 외부에서 침투한 양성자를 원자핵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일은 양성자의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경우에만 일어날 수 있으며, 속도가 그 정도로 빨라지려면 온도가 수천만 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우주에는 자연적으로 초고온 상태를 유지하는 곳이 있다. 그것도 한두 곳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 69-70)


가모프는 우라늄핵에서 방출되는 알파입자에 파동역학을 적용하면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아도 원자핵에서 탈출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가모프는 알파입자가 핵을 탈출하기 전에 성벽 안에서 이리저리 튕기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고전물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작은 공처럼 생긴 알파입자는 누군가가 별도의 에너지를 공급하지 않는 한 절대로 성벽을 탈출할 수 없다. 그러나 알파입자를 파동으로 간주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물통의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새어 나오듯이, 알파입자의 파동이 성벽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그 결과 알파입자는 성벽 밖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 물론 확률이 아주 작지만 분명히 0은 아니다. 그러므로 파동함수가 붕괴되었을 때, 알파입자는 마치 장애물을 뛰어넘은 것처럼 우라늄 원자핵의 바깥에서 발견될 수도 있다(이것을 양자터널효과quantum tunneling effect라 한다: 옮긴이). 가모프의 양자핵이론은 알파입자가 우라늄핵에서 탈출하는 비결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했다. 74-5)


후테르만스와 엣킨슨 두 사람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입자가 장벽을 통과하여 원자핵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면, 밖에 있던 입자가 원자핵 안으로 침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모프의 이론을 태양 중심부와 비슷한 온도에 적용해 보니, 정말로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 중심부에서 양성자가 양자터널을 통해 ‘전기적 척력’이라는 벽을 뚫고 원자핵 안으로 진입한다면, 낮은 온도에서도 핵융합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에딩턴의 계산에 따르면 태양에 있는 양성자는 성벽 꼭대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핵 주변을 에워싼 장벽은 높을수록 얇아지기 때문에, 태양 중심부의 양성자들이 장벽의 얇은 부분에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빠르게 움직이면, 굳이 장벽 꼭대기에 도달하지 않아도 양자터널효과에 의해 원자핵의 내부로 침입할 수 있다. 마침내 태양의 핵융합 반응은 에딩턴이 계산했던 중심부의 온도(약 4,000만 ℃)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다. 75-6)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에딩턴은 태양 중심부의 온도를 4,000만 ℃로 추정했는데, 이 온도에서는 양성자-양성자 연쇄반응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기 때문에 태양이 지금보다 훨씬 밝아야 한다. 에딩턴이 계산한 4,000만 ℃는 태양의 성분이 지구와 거의 같다는 가정하에 얻은 값이었다. 그러나 1925년에 영국의 여성 천문학자 세실리아 페인Cecilia Payne은 태양과 별의 주성분이 수소와 헬륨이며, 무거운 원소는 소량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태양의 73%가 수소이고 25%가 헬륨이라는 가정하에 에딩턴의 계산을 다시 해보면, 태양 중심부의 온도는 1,900만 ℃까지 떨어진다. 베테가 이 온도에서 양성자 -양성자 연쇄반응이 일어날 때 방출되는 에너지를 계산해 보니, 실제 관측된 태양에너지와 거의 비슷한 값이 얻어졌다. 이로써 태양이 열을 방출하는 이유가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태양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이런 식으로 수소를 원료로 삼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헬륨을 만들어왔다. 79)


6장 · 별


초신성이 폭발하면 은하에 있는 모든 별(수천억 개)을 합한 것보다 훨씬 강렬한 에너지가 방출된다(초신성은 적색거성赤色巨星, red giant이나 백색왜성白色矮星, white dwarf처럼 특정한 상태로 유지되는 별이 아니라, “마지막 진화단계를 거친 후 최종적으로 폭발하는 별”을 의미한다. 지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별은 폭발해야 비로소 별처럼 보이기 때문에 ‘∼성星’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옮긴이). 별의 에너지원은 수소이므로, 세월이 흘러 중심부가 모두 헬륨으로 바뀌면 같은 방법으로는 더 이상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별이 이 단계에 이르면 팽창력의 근원인 열이 공급되지 않아서 자체 중력에 의해 안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엄청난 중력에너지에 의해 중심부가 대책 없이 뜨거워지다가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을 일으킨다 ― 이것이 바로 초신성이다. 이 사실을 알아낸 호일은 관련 계산을 수행한 끝에 “자체 중력으로 붕괴되는 별의 내부 온도는 원리적으로 40억 ℃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91-2)


별의 온도와 밀도가 적절하면 헬륨끼리 충돌하는 횟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탄소-12로 자랄 수 있는 베릴륨-8의 개수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될 수도 있다. 즉, 베릴륨-8의 생성과 붕괴가 적정 수준에서 균형을 이루면, (개개의 핵의 수명이 엄청나게 짧다 해도)매 순간 일정한 개수의 베릴륨-8 핵이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별의 내부에서 탄소-12가 생성되기만 하면, 곧바로 다른 헬륨핵과 충돌하여 산소-16이 만들어진다. 이것 자체로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지만(산소는 우주의 중요한 구성성분이다), 반응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서 생명체의 형성에 반드시 필요한 탄소가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우주에는 호일 같은 탄소기반 생명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므로, 탄소가 모두 소모되는 것을 막아주는 다른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이 순간만을 학수고대해 왔던 호일은 기발하면서도 환상적인 답을 떠올렸다. “탄소-12가 별의 내부에서 생성되려면 아주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가정한 것이다. 92-3)


호일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 호일은 실험결과를 같다 ―“탄소-12 원자핵이 놓일 수 있는 들뜬상태 중에 베릴륨-8과 헬륨핵이 충돌할 때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에너지와 같은 에너지준위가 존재한다면 탄소-12의 생성 속도가 아주 빨라져서, 이들 중 상당수가 산소-16으로 바뀌어도 우주에는 충분히 많는 탄소-12가 남을 수 있다.” 분석하다가 자칫하면 우주에 생명체가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음을 깨닫고 깊은 경외감에 빠졌다. 생명의 기반인 탄소-12 외에 산소-16에도 이와 비슷한 에너지준위(7.19MeV)가 존재한다면, 별의 내부에서 어렵게 만들어진 탄소-12는 순식간에 산소로 변했을 것이다.[ 5 ] 그런데 산소-16 핵의 특성을 분석해 보니, 천만다행으로 그 값은 7.19MeV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7.12MeV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릴륨-8이 두 개의 헬륨핵으로 분해되지 않고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다면, 별이 헬륨을 너무 빠르게 소모하여 탄소를 비롯한 무거운 원소가 만들어지기 전에 폭발했을 것이다. 93-5)


# 원자핵 속의 양성자와 중성자는 핵 주변을 선회하는 전자처럼 몇 개의 특정한 에너지를 갖는 상태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에너지준위energy level’라 한다. 


7장 · 궁극의 우주요리사


현재 우리의 우주는 물질(기체, 먼지, 별, 암흑물질 등)이 지배하고 있지만, 탄생 직후 몇 분 동안 우주를 지배한 것은 물질이 아닌 빛이었다. 이 시기의 우주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물질입자(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격동하는 광자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거품에 불과했다. 이 “태초의 빛”은 처음 몇 분 동안 광자 한 개가 원자핵을 산산이 분해할 정도로 강력했기 때문에, 원자핵이 형성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하여 중수소핵이 되었다 해도, 순식간에 고에너지 광자에게 얻어맞아 분해되었다. 그러나 처음 몇 분 동안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했고, 부피가 증가함에 따라 온도는 빠르게 식어갔다. 약 3분이 지난 후에는 우주 오븐의 온도가 수십억 도까지 내려가서 광자는 더 이상 중수소핵을 분해할 수 없게 되었으며, 바로 이때부터 중수소의 양이 급증하면서 우주 조리실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117-8)


빅뱅 후 처음 1초 동안 원시 불덩이 속 입자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었으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고에너지 입자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서로 상대방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는 사건과 중성자가 양성자로 바뀌는 사건이 거의 같은 빈도로 일어났다. 즉, 초창기의 우주는 평등한 세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우주가 식어가면서 양성자와 중성자의 미세한 질량 차이 때문에(중성자 › 양성자)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벼운 양성자가 무거운 중성자로 변하려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양성자 → 중성자 변환은 중성자 → 양성자 변환보다 드물게 일어났고, 이로 인해 우주에는 양성자가 중성자보다 많아졌다. 처음 1초가 지났을 무렵, 양성자가 중성자로 바뀌기에는 우주의 온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중성자의 수가 동결되었는데, 이때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은 약 6:1이었다. 이제 핵융합이 일어날 정도로 온도가 내려가려면 몇 분 더 기다려야 한다. 118)


그러나 이 시간 동안 홀로 고립된 중성자는 안정한 입자가 아니어서 평균 15분 만에 양성자와 전자, 그리고 반뉴트리노로 붕괴된다. 그 결과 빅뱅 후 2분이 지났을 때 중성자의 일부가 스스로 양성자로 변환되어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1까지 벌어졌고, 바로 이런 상태에서 핵융합 용광로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 후 1분 남짓한 시간 동안 모든 중성자는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이루어진 헬륨-4로 융합되었다. 그렇다면 양성자는 얼마나 남았을까? 처음에 양성자와 중성자의 비율이 7: 1이었으므로, 만일 양성자 14개와 중성자 2개에서 출발했다면 헬륨 1개가 만들어지고 양성자 12개가 남을 것이다. 즉, 헬륨핵과 양성자의 비율은 1: 12이다. 그런데 헬륨은 양성자보다 4배 무거우므로, 질량 비율로 따지면 헬륨 : 양성자 = 4 : 12가 된다. 다시 말해서, 빅뱅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25%의 헬륨과 75%의 수소(융합에 참여하지 않은 양성자)로 출발했다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관측된 원소의 양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118-9)


8장 · 양성자 조리법


1960년대에 자신의 이론에 ‘팔정도八正道, Eightfold Way(열반에 이르는 8가지 수행법)’라는 이름을 붙인 겔만은 몇 년 전부터 영감 어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겉모습이 완전히 다른 생물을 과科와 종種 등으로 분류하는 생물학자처럼, 겔만은 이미 알려진 강입자를 스핀 = 0인 중간자와 스핀 = 1/2인 바리온으로 나누고, 더 깊은 곳에서 각 입자들 사이의 연관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이 같으면서 전하가 다른 ‘쌍’처럼 보였고, 둘 다 스핀이 1/2이므로 바리온에 속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다음으로 전하가 +, 0, -인 파이온(π- 중간자)이 있고, 스핀 = 0이면서 두 가지 전하(+, -)로 존재하는 중간자 케이온이 있다. 겔만은 입자분류게임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난 목록의 깊은 저변에 심오한 대칭이 존재한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겔만은 몇 년 전부터 “강입자가 더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내가 발견한 대칭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다. 130, 132)


겔만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소설 『피네간의 경야Finnegans Wake』를 읽다가 “머스터 마크에게 세 개의 쿼크를!Three quarks for Muster Mark!”이라는 문장에 눈길이 꽂혀, 그 감지되지 않은 입자를 '쿼크quark'라고 명명했다. 겔만은 쿼크가 ‘위up’와 ‘아래down’, 그리고 ‘야릇한strange’이라는 세 종류로 존재하면 강입자의 대칭을 설명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단, 위쿼크up quark의 전하는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의 전하는 –1/3이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쿼크(그리고 이들의 반입자)를 잘 조합하면, 실험실에서 발견된 모든 강입자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다. 파이온이나 케이온 같은 중간자는 쿼크와 반쿼크antiquark가 결합한 입자이고, 바리온은 세 개의 쿼크로 되어 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양성자와 중성자이다. 양성자는 2개의 위쿼크와 1개의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고(uud), 중성자는 두 개의 아래쿼크와 한 개의 위쿼크로 이루어져 있다(udd). 133)


1973년, CERN의 초대형 거품상자 가가멜Gargamelle이 드디어 결정적인 증거를 잡았다. 양성자 안에 있는 “점 같은 물체”에 튕겨서 빠르게 날아가는 뉴트리노가 포착된 것이다. 게다가 이 입자는 겔만과 츠바이크의 예측대로 분수전하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었다. 쿼크를 직접 봤다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강력한 입자가속기를 동원해도 강입자 감옥에서 쿼크를 해방시키기 못했으며, 쿼크가 존재한다는 증거라곤 강입자와 부딪힌 후 튕겨 나온 입자들뿐이었다. 아무래도 쿼크는 강입자 내부에 영원히 갇혀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강입자 안에서 쿼크를 결합시키는 힘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졌다. 흔히 강력强力, strong force으로 알려진 이 힘은 항상 인력引力으로 작용하며, 지금까지 발견된 힘 중에서 가장 강하다.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단단히 묶어 놓는 강한 핵력은 그보다 훨씬 강한 강력의 메아리였다(사실 '강력'과 '강한 핵력'은 같은 뜻이다). 136)


# 지금까지 알려진 쿼크는 모두 6가지이다. 위쿼크up quark와 맵시쿼크charm quark, 그리고 꼭대기쿼크top quark의 전하는 (전자의 전하를 –1이라고 했을 때) +2/3이고, 아래쿼크down quark와 야릇한 쿼크strange quark, 바닥쿼크bottom quark의 전하는 –1/3이다.


1973년에 이론물리학자 데이비드 그로스David Gross와 프랭크 윌첵Frank Wilczek, 그리고 데이비드 폴리처David Politzer는 강력과 관련하여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강입자가 아주 강한 에너지로 충돌하면, 강력의 바이스vise(죔쇠) 역할을 하는 부분이 느슨해진다는 사실을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알아낸 것이다. 이는 곧 에너지가 아주 크면 강력의 세기가 약해져서 강입자가 “자유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루어진 과열된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쿼크-글루온 플라즈마quark-gluon plasma’라 한다. 과열된 쿼크-글루온 플라즈마 속에서는 초고온, 초고밀도 상태에서 쿼크와 글루온이 강입자의 경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다. 사실 우주의 역사를 통틀어 쿼크-글루온 플라즈마가 존재할 정도로 극단적 환경이 조성되었던 시기는 “빅뱅 후 100만분의 1초 이내” 뿐이었다. 약 100만분의 1초가 지난 후에는 우주가 충분히 식어서 쿼크와 글루온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141)


9장 · 입자란 진정 무엇인가?


디랙은 패러데이의 전자기장과 아인슈타인의 광자를 교묘하게 조합하여 “양자장quantum field”이라는 새로운 물리적 객체를 만들어냈다. 여러 면에서 양자장은 패러데이의 고전 전자기장과 매우 비슷하다.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전기력과 자기력을 전달하고, 적절한 방식으로 흔들면 빛의 형태로 장을 가로지르는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양자장과 고전 전자기장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고전 전자기장에서는 파동을 임의의 크기로 만들 수 있지만, 양자장에서는 파동의 최소 크기가 정해져 있어서, 이보다 작은 파동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에너지는 작은 ‘덩어리’의 단위로 존재한다. 전자기장에서는 0개나 1개, 2개, 또는 1,000조 개의 광자가 잔물결을 일으킬 수 있지만, ‘1/2개의 광자’나 ‘10/3개의 광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항상 광자의 정수배로 존재하는 것이다. 좀 더 유식하게 표현하면 “전자기장은 양자화되어 있다quantized.” 151-2)


그러나 디랙의 이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했다. 광자가 전자기장에 생긴 잔물결이라면, 다른 물질입자는 어떻게 되는가? 전자와 양성자는 광자와 근본부터 다른 입자인가? 물론 이들도 파동-입자 이중성을 갖고 있지만 만들어낼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 수시로 탄생했다가 소멸되는 광자와 달리, 전자와 양성자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 같았다. 1920년대의 양자역학은 특수상대성이론에 부합되지 않았다. 상대방에 대해 움직이고 있는 두 관측자가 얻은 양자역학의 법칙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양자역학이 아직 불완전했다는 뜻이다. 마침내 디랙은 매우 그럴듯해 보이는 후보를 찾아냈다. 이 방정식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모두 반영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가 팽이처럼 자전하면서 갖게 된 특성까지 자연스럽게 설명해 주었다(이 특성을 스핀spin이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방정식은 “스핀이 위를 향하는 전자”와 “스핀이 아래로 향하는 전자”라는 두 개의 해를 갖고 있었다. 152-3)


# 전자를 포함한 모든 물질입자는 1/2의 스핀을 갖고 있으며 위( +1/2)와 아래(–1/2), 두 가지 값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디랙의 머릿속에는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유도한 방정식에 무언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방정식에는 총 4개의 해가 존재했는데, 처음 2개는 스핀이 업up(↑)인 전자와 다운down(↓)인 전자에 해당하여 별문제가 없었지만, 남은 두 개는 “음의 에너지negative energy를 가진 전자”라는 듣도 보도 못한 입자에 대응되어 디랙의 심기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렵게 유도한 방정식을 포기할 수 없었던 디랙은 모든 가능성을 철저하게 타진한 후, 물리학의 역사를 바꿀 과감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음에너지 상태로 떨어지는 전자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음에너지 상태가 이미 다른 전자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단, 이 전자는 전하의 부호가 일상적인 전자와 반대여야 한다. “양전하를 띤 전자”라는 뜻이다. 음에너지 상태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디랙은 1931년에 다음과 같은 폭탄선언을 날렸다 ―“자연에는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154-5)


디랙은 순수한 사고思考만으로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새로운 물질의 존재를 예견했다. 그리고 1932년 실제로 “양전하를 띤 전자”가 발견됐다.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물질의 거울에 비친 상象인 ‘반물질antimatter’의 세계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든 물질입자마다 “모든 물리적 특성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디랙이 예견했던 “양전하를 띤 전자”는 오늘날 ‘양전자positron’, 또는 ‘반전자antielectron’라고 불린다(임의의 입자와 모든 것이 같으면서 전하의 부호만 반대인 입자를 반입자antiparticle라 한다: 옮긴이). 반물질이 발견되면서 “물질은 영원하다”는 믿음도 허물어졌다. 입자-반입자 쌍이 생성될 정도의 강한 에너지로 두 입자를 충돌시키면 새로운 물질입자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입자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운수 사납게 자신의 반입자 짝을 만나면, 강렬한 섬광(복사)을 방출하면서 무無로 사라진다. 156)


지금까지 언급된 모든 입자들은 각기 자신만의 양자장에 대응된다. 광자는 전자기장electromagnetic field에 생긴 잔물결이고, 전자와 양전자는 ‘전자장electron field’에 생긴 잔물결이며, 위쿼크는 ‘위쿼크장up quark field’라는 양자장에 생긴 잔물결이다. 강입자충돌기LHC에서 두 개의 양성자가 정면으로 충돌하면 일련의 양자장에 ‘자연의 종’이 울리면서 잔물결의 홍수가 양자 교향곡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실험자는 감지기에 도달한 잔물결로부터 교향곡의 악보를 재구성하여 악기의 종류를 알아내는 식이다. 우리는 이 잔물결을 입자로 해석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본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양자장의 동요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입자가 아닌 양자장이다. 보이지 않고, 맛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유체 같은 물질이 가장 작은 원자에서 가장 먼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물질의 진정한 구성요소는 화학원소도, 원자도, 전자도, 쿼크도 아닌 양자장이다. 156-7)


10장 · 최후의 구성성분


이 세상 모든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음전하를 띤 전자와 양전하를 띤 원자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은 양전하를 띤 양성자와 전하가 없는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양성자와 중성자를 합쳐서 핵자nucleon라 한다: 옮긴이).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위쿼크와 아래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물질의 구성성분은 전자와 위쿼크, 그리고 아래쿼크라는 세 가지 입자로 귀결된다. 물론 구성성분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물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원자의 구조는 구성요소와 함께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중 전자와 원자핵을 결합시키는 전자기력과 원자핵 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결합시키는 강력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두 힘은 양자장(전자기장과 글루온장)을 통해 매개되며, 이 양자장에 불연속의 에너지 덩어리를 투입하면 양자화된 작은 파문(또는 입자라고도 함)이 생기는데, 전자기력의 경우에는 이것을 광자라 하고, 강력의 경우에는 글루온이라 한다. 168)


그러나 미시세계에는 아직 논하지 않는 또 하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힘들 중에서 가장 희한한 힘―그것은 바로 약력weak force이다. 약력이 특별한 이유는 한 종류의 입자를 다른 종류의 입자로 변환시키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하전입자와 전자기장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 QED은 과학사를 통틀어 가장 정확한 이론으로, 이론과 실험의 오차가 100억분의 1을 넘지 않는다. 이 놀라운 이론의 핵심에는 “국소게이지대칭local gauge symmetry”이라는 아름다운 원리가 자리 잡고 있다. 줄리언 슈윙거에 의해 처음으로 도입된 이 원리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전자기력, 강력, 약력 등 근본적인 힘은 자연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대칭으로부터 나타난 결과이다.” 여기서 말하는 대칭이란, 주어진 물리계(기체 상자, 또는 태양계, 혹은 우주 전체)에 어떤 조작을 가했는데 그 후에도 물리계가 변하지 않을 때, 그 물리계에는 대칭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168-70)


뇌터의 정리에 의하면 대칭이 존재하는 곳에 그에 해당하는 보존량(변하지 않는 양)이 존재한다. 회전대칭이 존재하는 경우, 그에 대응하는 보존량은 각운동량(계가 갖고 있는 회전능력)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동안 수많은 실험이 실행되었는데, 운동량이 보존되지 않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계의 운동량은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으며, 계의 각 요소에 재분포되는 것만 가능하다. 에너지와 운동량이 보존되는 이유도 대칭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에너지가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시간변환에 대하여 대칭이기 때문이고(즉, 시간이 과거나 미래로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간변환대칭이라 한다), 운동량이 보존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똑같기 때문이다(즉, 공간 전체를 임의의 방향으로 이동시켜도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병진대칭이라 한다). 그러나 대칭이 낳은 결과 중에는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힘 자체가 바로 대칭이 낳은 결과라는 것이다. 170)


여기서 물리학자들은 역설적 상황에 직면했다. 약력입자(약력을 매개하는 입자. W입자와 Z입자)는 큰 질량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력은 매우 강하면서 먼 곳까지 작용하는 장거리힘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입자가 무거우면 이론에서 무한대가 속출하고, 약력의 형태를 결정해 준 보석 같은 대칭까지 붕괴된다. 약력의 양자장 이론이 폐기될 위험에 처했다. 잠깐… 혹시 대칭이 붕괴된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숨어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약력을 매개하는 입자는 기본적으로 질량이 없지만, 무언가로부터 질량을 획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바로 여기서 ‘힉스장Higgs field’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힉스장은 지금까지 우리가 접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자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은 스핀 = 1/2인 전자에 대응되는 물질장物質場, matter field이거나, 스핀 = 1인 광자에 대응되는 역장이었다. 그러나 힉스장에 대응되는 입자의 스핀은 0이라는 특이한 값을 갖고 있다. 175)


이뿐만이 아니다. 힉스장은 공간의 모든 지점에서 0이 아닌 값을 가져야 한다. 전자기장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이다. 광자가 알뜰하게 제거된 공간에서는 전자기장에 잔주름이 전혀 생기지 않으므로, 양자적 불확정성에 의해 나타나는 약간의 요동을 제외하면 전자기장의 값은 모든 곳에서 0이다. 그러나 힉스장에서 모든 입자를 제거해도 장의 값은 0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즉, 모든 우주공간은 균일한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 있다. 우주가 처음 탄생하던 순간에 힉스장의 값은 0이었고 세 개의 약력입자 W+, W-, Z0는 질량을 갖고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SU(2)라는 대칭이 존재했다. 그러나 우주 탄생 후 1조분의 1초가 지났을 때 힉스장의 “스위치가 켜지면서” 0이 아닌 값을 갖게 되었고, 모든 공간은 힉스장의 수프로 가득 차게 되었으며, 약력입자는 갑자기 질량을 갖게 되었다. 초기에 존재했던 완벽한 대칭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으면서 “강한 장거리힘”이었던 약력이 “약한 단거리힘”으로 바뀐 것이다. 175)


우주 탄생 직후에는(탄생의 순간부터 1조분의 1초까지. 이토록 짧은 시간에는 ‘직후’라는 표현이 다소 부적절하게 느껴지지만, 더 좋은 단어가 없다: 옮긴이) 전자와 쿼크를 비롯하여 모든 물질입자들이 빛의 속도로 날아다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걸쭉해진” 힉스장 때문에 입자의 속도가 느려졌고, 이들이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교환하면서 없던 질량을 획득하게 되었다. 힉스장이 전자나 쿼크에 끈끈한 액체처럼 들러붙어서 속도를 늦추고 질량을 주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에 광자나 글루온 같은 입자는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힉스장 속에서도 질량이 없는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힉스장은 약력입자뿐만 아니라 물질을 구성하는 모든 물질입자에게도 질량을 부여한다. 힉스장이 없으면 전자 같은 입자가 광속으로 날아다니기 때문에 원자가 형성될 수 없고, 자연에 존재하는 기본 힘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힉스장이 없으면 이 세상도 존재할 수 없다. 175)


# 힉스장은 전자와 쿼크 같은 기본 물질입자에만 질량을 부여한다. 그러나 양성자와 중성자가 갖고 있는 질량의 대부분은 쿼크의 질량이 아니라 쿼크를 결합시키는 글루온장의 에너지이다. 즉, 원자 질량의 대부분은 힉스장이 아닌 강력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11장 · 만물의 조리법


만물의 창조 작업은 빅뱅 후 100만분의 1초가 지났을 때 거의 마무리되었다. 처음 100만분의 1초 동안 우주는 엄청나게 뜨거워서 입자와 반입자가 끊임없이 생성되고 파괴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팽창하면서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졌고, 100만분의 1초가 지난 시점에는 플라즈마에서 양성자와 반양성자 쌍이 만들어질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지면서 대량 멸종이 시작되었다. 입자와 반입자가 만나 무無로 소멸되고, 이 과정에서 생성된 무지막지한 복사에너지가 모든 물질을 쓸어버린 것이다. 모든 것이 우리 예상대로 진행되었다면 물질과 반물질은 완전히 사라지고, 우주에는 텅 빈 공간과 그 안을 외롭게 날아다니는 몇 개의 광자만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량 멸종의 와중에 입자의 100억분의 1이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어쨌거나 입자가 반입자보다 100억분의 1쯤 많았기에, 이 자투리 입자들이 진화하여 지금의 은하와 별, 행성, 인간, 그리고 사과파이가 되었다. 187)


# ‘사하로프 조건Sakharov conditions’(우주 초기에 물질이 생성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

1. 쿼크가 반쿼크보다 많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존재해야 한다.

2.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은 불완전해야 한다.

3. 물질 생성 과정이 진행될 때, 우주는 열적평형상태thermal equilibrium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이 좌우대칭이라는 것은 너무나 기본적인 가정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계 미국인 실험물리학자 우젠슝吳健雄의 놀라운 실험결과가 알려지면서 오래된 믿음은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1956년 미국 연방표준국의 지원을 받아 실행된 우젠슝의 실험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뒤흔들었다. 자연의 기본 힘 중 하나인 약력이 “오른손잡이 입자right-handed particle”보다 “왼손잡이 입자left-handed particle”를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입자에 두 손이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손잡이”는 입자의 자전효과와 유사한 양자적 스핀과 관련되어 있다. 약력은 분명히 거울 대칭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 후로 이 현상은 “반전성위배parity violation”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여기서 말하는 반전성parity은 ‘좌우대칭성’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옮긴이). 반전성이 위배된 궁극적 이유는 약력이 왼손잡이 전자에게 더 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189-90)


스팔레론은 전자기력과 약력, 그리고 힉스장의 기원을 설명하는 약전자기이론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 분명히 스팔레론은 입자가 아니다. 전자나 힉스보손 같은 입자는 기타 줄을 퉁길 때 생성되는 단일 음처럼 평균값 주변을 오락가락하는 단일 양자장의 진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에 스팔레론은 이보다 훨씬 미묘한 개념으로, 하나의 양자장이 아니라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바로크양식처럼 섞여서 한꺼번에 움직이는 “양자장의 오케스트라”에 해당한다. W장과 Z장, 그리고 힉스장이 집합적으로 움직이면 스팔레론이 생성되고, 스팔레론은 입자를 반입자로 바꾸거나 반입자를 입자로 바꾸는 기적 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스팔레론은 물질을 만드는 기계로서, 여기에 약간의 반물질을 투입하면 일상적인 물질입자가 생성된다. 이 기적 같은 능력 덕분에 스팔레론은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들 중 입자 -반입자의 균형을 깰 수 있는 유일한 후보이자,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는 핵심 요소로 부각되었다. 192)


일본 기후현岐阜縣 히다시飛騨市 근처의 이케노산池野山 지하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물 중 하나인 슈퍼 카미오칸데Super-Kamiokande, 슈퍼- K가 열심히 가동 중이다. 슈퍼- K는 세계 최대 규모의 뉴트리노 감지장치로서, 물질의 기원을 밝혀줄 후보로 부상하고 있다. 2020년 4월, 슈퍼-K에서 작업 중인 150명의 연구원들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뉴트리노가 깨뜨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앞으로 더욱 정밀한 측정을 통해 사실로 판명된다면 물리학계에는 일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물리학자들은 전하 -패리티 대칭이 오직 쿼크의 약한 상호작용(약력)을 통해서만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뉴트리노도 대칭을 깰 수 있다면 빅뱅 직후 물질이 생성되는 두 번째 길이 열리는 셈이다.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질입자인 뉴트리노가 물질-반물질과 관련된 대칭을 깨뜨릴 수도 있다는 것은(슈퍼-K에서 발견된 사실임) 곧 뉴트리노에 질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197-9)


뉴트리노는 분명히 질량을 갖고 있었다. 질량이 너무 작아서 관측이 안 되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뉴트리노의 질량은 0.5eV 이하로서, 전자의 100만분의 1도 안 된다. 왜 그럴까? 뉴트리노는 왜 그토록 작은 질량을 갖게 되었을까? 현재 제일 널리 수용된 답은 “시소 메커니즘see-saw mechanism”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질량이 매우 큰 뉴트리노 3종이 추가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기존의 가벼운 뉴트리노 3종(각각 전자뉴트리노, 뮤온뉴트리노, 타우 뉴트리노)과 균형을 되찾는 식이다. 초경량급 뉴트리노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면, 새로 도입한 슈퍼헤비급 뉴트리노는 질량이 정말로 커야 한다. 예상되는 질량은 양성자의 10억∼1,000조 배 사이로서(109∼1015GeV)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입자보다 무거울 뿐만 아니라, LHC의 최대 출력보다 10만 배 이상 크다. 그러나 초기우주에는 온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이런 입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199)


12장 · 누락된 구성요소


표준모형을 가장 크게 위협한 도전장은 입자물리학이 아닌 천문학 분야에서 날아왔다. 1930년대에 스위스의 천문학자 프리츠 츠비키Fritz Zwicky는 1,000개가 넘는 은하들로 구성된 코마은하단Coma Cluster의 운동속도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중력으로 은하단의 형태를 유지하기에는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츠비키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성단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물질이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암흑물질dunkle Materie, dark matter(영)”이라 불렀다. 암흑물질보다 더욱 신비한 것은 “밀어내는 중력”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암흑에너지이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팽창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이유를 암흑에너지에서 찾고 있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물론 질량도 포함된다)의 95%를 차지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은하를 모두 더해봐야 전체의 5%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방대한 미지의 바다를 표류하는 작은 거품일 뿐이다. 209-10)


모든 기본 입자의 질량은 힉스입자의 ‘246GeV’라는 질량으로부터 결정되었다. 집안에서 보일러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처럼, 우주의 온도를 조절하는 다이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다이얼을 왼쪽으로 돌리면 표준모형에 등장하는 모든 입자의 질량이 작아지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커진다. 여기서 질문 하나 ― 우주가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진화하여 훗날 지구에 생명체가 번성하려면 다이얼을 얼마나 정확하게 고정해야 할까? 답: 말도 안 되게, 어마무시하게,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정말 환상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이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혀온 유령이 숨어 있다. 찬반양론으로 갈려 숱한 논쟁을 야기했던 그 유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다중우주”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우주가 “각기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여러 개(또는 무한개)의 우주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황당한 가설을 받아들이면 힉스장이 기적 같은 값을 갖게 된 것은 더 이상 기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212, 214)


초대칭supersymmetry은 물리학이 직면한 여러 개의 심오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한 방에 해결해 주는 아주 유별난 개념이다. 기존의 이론에 이 개념을 도입하면 빅뱅 무렵에 물질이 반물질보다 많았던 이유와 암흑물질의 특성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주초기에 모든 힘들(전자기력, 약력, 강력, 중력)이 단 하나의 통일된 힘으로 존재했다는 엄청난 가설까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뭐니 뭐니해도 초대칭의 가장 큰 매력은 난폭한 진공에너지로부터 힉스장을 안전하게 보호하여, 힉스장이 지금처럼 적절한 값(원자가 생성될 수 있는 값)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대칭은 자연의 기본 구성요소에 부과된 또 하나의 새로운 대칭으로, 물질과 반물질을 연결하는 대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 초대칭을 통해 연결되는 두 부류는 입자와 반입자가 아니라 페르미온과 보손이다. 즉, 초대칭은 전자와 쿼크, 뉴트리노 같은 물질입자를 광자, 글루온, 힉스입자 같은 힘입자와 연결시키는 대칭이다. 216)


# 초대칭짝에 해당하는 입자를 통틀어서 스파티클sparticle(초대칭입자)이라 한다. 


13장 · 우주 만들기


현대물리학은 두 개의 거대한 주춧돌 위에 구축되었다. 미시세계(원자의 입자의 세계)를 서술하는 양자장이론과 거시적 규모에서 우주(은하, 별, 행성 등)의 거동을 서술하는 중력이론이 바로 그것이다. 두 이론은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지만(지금까지 실행된 그 어떤 실험도 두 이론에 반하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없다), 빅뱅의 순간으로 다가가면 오작동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양자장이론은 중력을 고려하지 않았고, 중력이론은 양자역학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빅뱅의 순간에는 우주 전체가 아원자규모로 존재했다. 우주 만물(에너지와 장, 시간과 공간)이 원자보다 훨씬 작은 점 안에 밀집되어 있었으므로, 이 극단적인 환경에서는 중력과 양자역학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우주 탄생의 순간을 물리학으로 서술하려면 입자물리학과 우주론, 양자장이론,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을 하나로 합친 “양자중력이론quantum theory of gravity”이 필요하다. 231)


끈이론은 1970년대에 쿼크를 묶어두는 강력을 서술하기 위해 도입되었다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여 거의 사장된 후 ‘양자중력’이라는 더욱 야심 찬 목표를 내걸고 화려하게 부활한 이론이다. 끈이론은 1984년에 그린과 슈바르츠가 “끈이론에는 수학적 변칙anomaly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증명하면서 하루아침에 이론물리학의 총아로 떠오르게 된다. 끈이론의 핵심은 전자를 비롯한 기본 입자들이 야구공 같은 입자가 아니라 “진동하는 끈”이라는 것이다. 만물의 기본 구성요소는 끈이며, 끈이 진동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입자로 나타난다. 이것은 기타 줄의 진동수에 따라 각기 다른 음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하다. 특정 모드로 진동하면 전자가 되고,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쿼크가 되고, 또 다른 진동모드에서는 중력자가 되는 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끈이론은 우주에 초대칭이 존재해야 의미를 갖기 때문에 초대칭 버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이다. 234-5)


인플레이션은 대표적인 우주 이론으로 입지를 굳혔지만, 실제로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이다. 물론 광학망원경으로 빅뱅 후 1조×1조×1 조분의 1초까지 들여다보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탐색 수단을 빛에서 중력파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플레이션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시공간이 휘둘리면서 거친 파동이 생성되었을 것이고, 그 여파는 지금도 우주 곳곳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들은 파장이 엄청나게 길어지고 강도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지만, 미래형 관측소가 계획대로 완성된다면 우주창조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험실에서 장비를 다루건, 노트에 방정식을 끄적이건, 또는 우주에서 날아온 신호를 분석하건 간에, 모든 과학의 기본은 ‘탐험’이다. 그리고 일단 탐험 길에 올라 새로운 현상과 미스터리를 쫓아가다 보면 출발점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이 여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끝날 것인가? 244-5)


14장 · 이것으로 끝인가?


과연 우리는 무無에서 사과파이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낼 수 있을까? 양자역학과 중력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가 탄생한 순간(중력, 시간, 공간, 양자장 등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던 순간)에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실망스러운가? 그럴 필요 없다. 사실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물질과 우주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플랑크 규모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궁극의 이론을 논할 때가 아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가 사방에 널려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자연은 인간을 놀라게 하는 데 거의 무한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해왔다. 지금보다 더 먼 곳을 관측하고 더 작은 영역을 들여다보았을 때 무엇이 나타나서 우리를 놀라게 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꽤 먼 길을 걸어왔지만, 이야기는 지금도 만들어지는 중이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탐험을 계속한다면, 우주의 조리법을 발견하는 날이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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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미국의 배신과 흔들리는 세계 교양 100그램 7
김준형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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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격변의 시대


탈냉전과 팍스 아메리카나


두번의 위기와 슈퍼맨의 약점


미국 패권은 자신의 장점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주로 ‘나쁜 쪽, 나쁜 국가’들의 존재를 통해 반사적 정당성을 얻었습니다. 2001년 발생한 9·11 테러는 미국의 대외 정책 결정자들에게 다시금 세계를 아군과 적군으로 나눌 수 있는 빌미를 주었습니다. 문제는 막강한 미국의 상대로 몇십명의 테러리스트가 빌런이라는 구도는 모양도 빠질 뿐만 아니라 정당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대상이 바로 배후국가들입니다. 테러리스트들의 배후를 색출하면서 만들어낸 적이 바로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이란, 이라크, 그리고 북한 세 국가입니다. 거기에 시리아, 리비아, 쿠바, 아프가니스탄을 합쳐서 일곱개의 ‘불량국가 또는 깡패국가’(Rogue states)를 국제사회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미국은 이 깡패국가들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독재자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세계평화가 온다는 전제하에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어난 전쟁이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13-4)


균열을 보이던 미국 패권체제를 거세게 흔드는 중요한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납니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입니다.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일어나면서 월스트리트가 폭삭 내려앉습니다. 첫번째 전환점이었던 9·11 테러가 미국에 심리적인 타격을 입히고 대외 정책을 변화시켰다면, 2008년의 금융위기는 소련을 붕괴시킨 자본주의가 드디어 그 모순의 폐해를 실제로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을 모색하며 만들어진 것이 지금 우리나라도 참여하고 있는 G20(미국 중국 등 19개의 주요 국가와 2개의 국가연합을 더한 20개의 국가 및 지역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사실상 중국이 세계 금융위기의 충격을 흡수해준 덕분에 자본주의가 다시 살아난 셈입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다시 냉전 직후의 질서를 어느정도 회복합니다. 그럼 미국은 중국에 고마워할 법도 한데, 그보다는 중국이 이렇게 강해졌다는 데 큰 충격을 받습니다. 14-5)


신냉전이 아니다, 파편화다


금융위기가 발생한 지 8년이 지난 2016년에는 우리가 말하는 서구, 선진국이었던 유럽과 미국에서 사건이 하나씩 발생합니다. 유럽에서는 브렉시트(Brexit), 즉 영국이 EU(유럽연합)에서 떨어져나가는 일이 벌어졌고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이 두가지 사건은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실제로 구호도 ‘미국/영국을 다시 위대하게’로 같았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각종 국제기구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미국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기구와 질서로 인해 오히려 불리해졌으니 거기서 빠져나오거나 무력화시켜버리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미국 경제에 손해만 끼친다며 WTO(세계무역기구)에 기금도 내지 않고 자유무역체제를 부정하고, 멋대로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이 대표적입니다. 트럼프 1기에서는 중국 같은 특정 국가와 상품에 선별적으로 관세를 부과했지만, 2기에 와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관세 부과에 나섬으로써 보호무역주의를 한층 강화합니다. 16)


지금까지 미국에 이익을 줬던 국제 협력체제 혹은 세계화 구조가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미국은 이제 자의적으로 규칙을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변화의 엔진인 동시에 결과물이 트럼프이고, 트럼피즘입니다. 트럼피즘은 세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번째는 앞에서 말한 미국 우선주의로 국제협력을 지향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차원입니다. 두번째는 백인 우선주의를 포함합니다. 세번째는 트럼프 개인 차원의 우선주의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트럼프의 선거 구호)의 실천 방식이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심지어 독재적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하고 트럼프라는 한 권력자가 대내외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의회를 통하지 않고 행정명령을 남발합니다. 대통령에 취임하고 하루 동안은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도 말했습니다. 헌법적으로 불가능한 3선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17)


‘신냉전’은 미중 패권 경쟁을 일컫는 자극적인 용어이긴 하지만, 오히려 지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용어는 이것일 겁니다. ‘파편화’(fragmentation). 이 말의 기원은 정치철학자 홉스(T. Hobbes)로 홉스가 당시의 영국 정치를 설명했던 단어가 ‘적자생존’입니다. 협력이 아닌 공포의 세계 속에서 가장 힘센 자가 가장 많이 갖게 되는 적자생존,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오늘날 일국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에서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폐해로 양극화가 극심해지고 이를 제어하는 제도들이 다 무너지면서,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생겨난 현상들 중 하나가 안보 포퓰리즘입니다. 이런 불안을 이용하는 자들이 나타나는데, 그런 사람들을 ‘(극우적) 스트롱맨’이라고 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이민자나 난민, 소수자들에게 덮어씌우고, 대외적으로는 불안을 조장하고 민족주의 감정을 호소하면서 외부 세력을 혐오하게끔 만듭니다. 18-9)


분열된 나라: 똑 닮은 미국과 한국


트럼프의 외교 전략: 각개격파와 삥 뜯기


트럼프의 세계관에서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미국의 기존 우방국들은 미국에 이른바 ‘빨대를 꽂아’ 피를 빠는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트럼프는 이들 국가를 ‘거머리’라고 표현한 적도 있습니다. 과거 소련, 현재는 중국의 위협과 대응으로부터 미국이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공짜로 이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불공정한 무역으로 막대한 이득을 챙긴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적자를 보고 있는 상위 10개국 중, 중국은 1위, 우리나라는 8위입니다. 그래서 트럼프가 외치는 것이 ‘페이백 타임’(Payback time), 지금까지 미국을 상대로 이득을 보았던 것을 다 정산할 때라는 겁니다. 이 정산을 위한 수단이 바로 관세 부과입니다. 자유무역(free trade)이 아니라 공정무역(fair trade)을 하자면서요. 물론 그 공정 여부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동의할 수 없죠. 그러나 트럼프는 상황을 아주 단순화해서 미국이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했고, 특히 우방국한테 당한 것을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24)


미국의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또 하나의 관점은 네오콘(Neo 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의 세계관입니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로 대표되는 네오콘은 철저하게 선악의 세계관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미국이 공공선이라는 예외주의(exceptionalism)에 입각해서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악을 소멸시켜야 평화의 세계가 도래한다고 주장합니다. 네오콘에게 중국은 악이자 굴복시켜야 할 상대인 거지요. 존 볼턴(John Bolton)이나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 등 네오콘 인사들이 트럼프 1기 정부의 외교와 안보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들 네오콘과도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1기 때 대외정책이 네오콘의 방해를 받았다며 이들 없이 재선에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트럼프는 이익이 되면 하고, 손해가 되면 빠진다는 철저한 거래주의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트럼프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트럼프에게는 평화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습니다. 26)


그렇다면 트럼프는 미중 경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트럼프에게도 중국은 미국의 위상에 도전하기에 꺾어야 할 대상이며, 미국이 만든 질서에서 불공정한 반칙행위를 통해 이익을 챙기며 미국에 손해를 끼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트럼프는 중국을 미국의 자원을 총 투입해 사생결단의 승부를 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압박할 수도 타협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트럼프는 미국에 이득만 된다면 유럽은 러시아가, 아시아는 중국이 관장해도 된다는 생각에까지 이릅니다. 이미 러우 전쟁에서 러시아 편에 서고 ‘유럽의 방위는 유럽이 알아서 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세계를 미중러의 세 영향권으로 나누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 전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新) 얄타체제’로 이름 붙이기도 하는데요.  그런 질서가 실현 가능할지 가늠하기도 쉽지 않지만, 트럼프의 MAGA가 품고 있는 실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26-7)


한국의 트럼프 대망론이 가리키는 것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나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같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핵을 많이 보급할수록 평화가 온다는 역설적인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합니다. 핵 때문에 오히려 전쟁을 못할 거라는 논리인데, 핵무기로 인해 전면전이 일어날 것 같지 않으니까 인도와 파키스탄처럼 오히려 국지적인 전쟁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게 현실입니다. 지속가능한 평화를 이루려면 군사력 강화를 통해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억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적과의 외교를 통해 적대감을 해소시키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물론 전쟁을 막을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제동장치와 평화를 향한 가속페달은 다양하게 있습니다. 가능한 많은 도구를 확보해야 하지요. 그것이 UN일 수도 있고, 자유무역 질서일 수도 있습니다. 전쟁은 더 일어나기 쉬워졌고 전쟁이 났을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은 사라진 상황입니다. 하루빨리 재건해야 합니다. 29-30)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한미동맹과 평화체제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동맹은 전쟁 상태에서 가장 강합니다. 즉 공동의 적대국이 확실할 때 동맹관계는 굳건해집니다. 한미동맹에 적용하면, 남북관계가 악화할수록 한미동맹의 역할과 중요성은 커지죠. 그러니 우리가 계속 분단된 상태에서 북한과 적대관계로 남아 있으면 한미동맹이 더 안정적이 될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평화체제로 넘어가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은 약화되는 게 자연스럽지요. 심하게 얘기하면 분단이 계속되고 남북한과 북미 간에 긴장이 고조될수록 한미동맹은 강해지고, 교류와 협력이 높아지면 역설적으로 동맹은 약해지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한미동맹이 평화의 상징으로 너무나도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이뤄질 때마다 오히려 동맹 약화를 걱정하는 역설이 벌어집니다. 역대 진보 정부들이 남북협력을 이루려고 하면 어김없이 한미동맹을 흔든다는 비판이 나오고 이는 국민에게 강한 소구력을 가져왔습니다. 31)


남북한의 미래, 평화와 통일 등에 있어서 남북이 같은 민족이냐 아니면 구별된 두 국가냐 하는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요. 사실 분단구조에서는 둘 다 맞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두개를 억지로 합치려고 합니다. ‘두 국가’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니 필연적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열심히 주장한다고 해서 엄연한 분단현실과 두 국가체제를 부정할 수 없지요. 한 민족과 두 국가라는 이 두 정체성은 매우 불편하지만 같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를 외면하거나, 또는 억지로 둘을 통합하려는 시도 모두 무리수입니다. 두 국가이기 때문에 그만큼 통일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되,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사실도 놓치지 않아야겠죠. 두개의 정체성이 갖는 모순은, 먼 미래에 통일이라든지 분단체제가 해소되어야 해결되기 때문에 지금의 분단구조 안에서는 두 정체성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32)


트럼프 태풍에 맞서는 일은 가능할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국제적으로 연대가 필요합니다. 특히 트럼프에게 당한 피해국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트럼프는 지금 ‘일 대 일’로 상대하려 합니다. 많은 국가가 안보와 경제를 미국에 기대고 있기에 쉽사리 반트럼프 연대에 나서지 못할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제질서가 현재 훨씬 더 다극화되고 평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극화 흐름이 러시아가 추구하는 것처럼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지만, 가령 한국과 일본, 그리고 EU 등이 주도해서 새로운 형태의 자유무역 질서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중일 3국의 역내 협력도 주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3국이 전세계 제조업에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도 중요하지만, 합치면 절대적입니다. 3국이 함께 적극적으로 개방된 공급망과 자유무역을 지탱해준다면 트럼프의 보호주의 태풍을 견뎌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33)


바로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라는 가능성


사실 한국은 역사적으로 계급사회가 뒤집힌 적이 없습니다.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기득권이 뒤집힌 적도 없지요. 동학농민운동을 비롯해 다수의 혁명이 있었지만, 신분제를 타파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친일파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리고 분단의 대결구조에서 군대의 힘이 막강해졌습니다. 연속적 독재정권의 등장으로 경찰과 검찰도 강해졌습니다. 게다가 유교적인 집단주의 문화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국가라면 사실 시장이나 시민사회가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동학농민운동부터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민주화항쟁, 2024년 남태령대첩까지, 국가가 선을 넘을 때마다 시민이 봉기했지요. 저는 이것이 대한민국이 가진 엄청난 저력이고 진정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이 잘못되고 불평등이 생길 때는 공적 국가를 키워서 고쳐내고, 국가가 반민주·반헌법을 자행할 때는 시민과 시장이 제어하는 겁니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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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 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마쓰바라 다카히코 지음, 이인호 옮김 / 행성B(행성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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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물리학은 아름답다


물리학은 이 세계가 어떤 규칙으로 돌아가는지 탐구하는 학문이다. 이를 위해 물리학 연구에서는 되도록 단순한 상황을 가정하고, 이 상황을 정확히 표현할 방법을 찾아낸다. 물리학에서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현실의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할 수 있는 강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요소로 분해하고 관찰한 다음에 그 현상의 배후에 있는 질서를 밝혀낸다. 과학은 이런 방식으로 발전해 왔다. 가령 공기저항을 무시하고 중력만 작용하는 상황을 연구하면 중력의 성질을 알아낼 수 있다. 한편으로 중력을 무시하고 공기저항만 작용하는 상황을 연구하면 공기저항의 성질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 힘의 성질을 각각 알아낸 다음 이를 합치면 중력과 공기저항이 둘 다 작용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상적인 상태에서 각 요소를 개별적으로 알아낸 다음 이를 조합함으로써 현실적인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11-2)


제2장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똑같다


천동설에서 벗어나 지동설로 넘어가려면 먼저 원운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선입관을 버려야만 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스승인 튀코 브라헤가 남긴 방대한 관측 자료에 태양 중심설을 적용함으로써 행성 궤도가 타원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케플러의 발견은 단순히 원을 타원으로 교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타원 운동을 하는 행성의 속도도 알아냈다. 비교적 태양과 거리가 가까운 행성은 속도가 빠르고, 반대로 거리가 먼 행성은 속도가 느리다. 또한, 행성 하나의 속도를 봐도 태양과 가까워질수록 빨라지고 멀어질수록 느려진다. 케플러는 이를 수치상으로 명확하게 밝혀냈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원운동의 조합에서 벗어난 일은 근대 물리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천동설은 완전함의 상징인 원에 집착한 결과 진실에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이 일은 자연계의 올바른 법칙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이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닐 것이다’라는 선입관에 사로잡힌 결과 잘못된 결론에 이른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7)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에 발명된 지 얼마 안 된 망원경을 직접 개량하여 천체를 관측하다가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 4개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목성 근처에 있는 별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목성 주위를 도는 천체였다. 천동설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 하지만 갈릴레오의 발견은 지구가 아닌 천체가 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음을 보인 것이었다. 즉 지구를 모든 것의 중심으로 설명하는 천동설에 반하는 사실이었다. 또한, 갈릴레오는 금성이 차고 이지러지는 동시에 크기가 변하는 것을 관찰했다. 금성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며, 지구보다 안쪽 궤도를 돌고 있다. 그래서 지구와 거리가 가까워지면 크게 보임과 동시에 그늘 부분이 커져서 초승달 모양이 된다. 반대로 지구와 멀어지면 크기가 작아지고 그늘 부분도 줄어서 보름달처럼 전체가 빛나 보인다. 천동설로는 무척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동설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뿐이다. 29)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갑작스럽게 바뀌었다. 천상과 지상의 구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서로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개별적인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천상과 지상이 모두 우주라는 커다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뉴턴 역학의 등장과 함께 몇 가지 기본 법칙으로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물리학의 기본 방침이 정착했다. 그러나 물체 사이에는 만유인력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힘도 작용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힘이 만유인력뿐이면 정말 큰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물체는 다른 물체를 지탱할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는 모두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물체가 한 덩어리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웃한 원자끼리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중력을 거스르며 의자 위에 앉아있을 수 있는 이유는 원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 덕분이라는 소리다. 왜냐하면 모든 물체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31, 34-5)


원자 사이에서 작용해 물체의 형태를 유지하는 힘의 정체는 만유인력이 아니다. 만유인력은 서로 끌어당기기만 하는 힘인데, 실제로는 물체를 이용해 다른 물체를 밀어낼 수도 있고 끌어당길 수도 있다. 즉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뿐만 아니라 밀어내는 힘인 척력도 작용한다는 뜻이다. 인력과 척력을 둘 다 지니는 힘이라고 하면 즉시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바로 전기력이다. 양전하와 음전하 사이에서는 인력이 작용하며, 양전하끼리와 음전하끼리는 척력이 작용한다. 원자는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기의 힘으로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원자와 원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도 전기력이며, 원자가 모여서 분자를 이루는 것도 전기력에 의한 현상이다. 전기력과 유사한 힘으로 자기력이 있다. 실은 전기와 자기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며,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전자기력이라고 부른다. 중력을 제외하면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힘은 모두 전자기력으로 설명할 수 있다. 36-7)


제3장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빛이란 파동의 한 종류다. 우리는 평소에 빛이 파동이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데, 이는 빛의 파장이 극단적으로 짧기 때문이다. 파동이란 어떤 규칙적인 변화가 퍼져 나가는 현상이다. 그 규칙적인 변화에는 기본 길이가 있으며, 이를 파장이라고 한다. 가령 바다에 이는 물결인 파도를 보면 물의 높이가 가장 높은 마루와 가장 낮은 골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된다. 이때 마루와 마루 사이의 거리, 혹은 골과 골 사이의 거리가 바로 파장이다. 빛의 파장은 극단적으로 짧다. 눈에 보이는 빛을 가시광선이라고 하는데, 가시광선의 파장은 거의 400nm에서 700nm 정도다(1nm는 0.000001mm이다). 파장이 길수록 빨갛게 보이고, 파장이 짧을수록 파랗게 보인다. 원자의 크기는 1nm보다 작은데, 이는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훨씬 짧다. 따라서 광학 현미경의 배율이 아무리 높다 해도 원자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떤 작은 물체라도 확대하면 잘 보일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경험을 확대 해석한 잘못된 추측일 뿐이다. 45-6)


화학 반응식을 배운 사람이라면 물질이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화학 반응식을 보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수소 분자 H2와 산소 분자 O2가 결합하면 물 분자 H2O가 생기는데, 이때 수소 분자와 산소 분자와 물 분자의 개수비는 반드시 2:1:2가 된다. 그래야만 수소 원자 H와 산소 원자 O의 개수가 반응 전후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원자론은 19세기 초에 제창되었다. 영국의 교사였던 존 돌턴은 화학 반응을 비교적 간단한 정수비로 나타낼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원자가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돌턴은 원자의 상대적인 무게인 원자량을 밝혀냈다. 돌턴은 수소와 산소 등의 기체가 원자가 아닌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그의 이론은 정확하지 않았다. 돌턴의 이론을 수정해 수소와 산소 등은 원자가 2개씩 결합한 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 기체의 반응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다. 47, 50)


기체 성질에 관한 연구에서도 간접적으로 원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단서가 나타났다. 기체 분자운동론이란 기체가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각 입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운동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기체의 기본 성질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기체의 압력은 기체가 들어 있는 용기 내벽에 입자가 충돌하면서 생기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기체에는 압력이 일정할 때 온도가 높을수록 부피가 커진다는 성질이 있는데, 이는 ‘샤를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열기구는 이 성질을 이용해서 하늘을 난다. 공기를 데워서 팽창시키면 열기구 안에 든 공기의 양이 줄어서 바깥 공기보다 가벼워지므로, 그 부력을 이용해 위로 뜨는 것이다. 이 샤를의 법칙은 기체 입자가 날아다니는 평균 속도에 따라 온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함으로써 설명할 수 있다. 입자의 속도가 빠를수록 기체가 담긴 용기 내부의 압력이 커진다. 이때 용기 외부의 압력이 일정하다면 내부 기체가 용기를 밀어내며 부피가 팽창하는 것이다. 51)


제4장 미시 세계로 들어가다


플랑크가 해명하려 한 열역학 문제는 물체가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복사 현상이었다. 물체는 온도에 따라 전자기파를 방출하는 성질이 있다. 뉴턴 역학에서는 에너지를 1개, 2개로 셀 수 없는 연속적인 값으로 본다. 하지만 플랑크의 이론에 따르면 미시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물질에 의한 복사가 작은 입자(오늘날 말하는 원자)의 진동 때문에 발생한다고 했을 때, 그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에는 진동수에 따른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에 최소 단위가 있다고 가정하면 플랑크의 수식이 유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플랑크의 수식은 모든 파장 영역에 걸친 실험 결과에 들어맞았다. 그러한 에너지의 최소 단위를 ‘양자’라고 부른다. 뉴턴 역학에 따르면 진동의 에너지는 연속적이므로, 진동을 통해 방출되는 에너지는 어떤 값이든 지닐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진동 에너지에는 최소 단위가 있다. 다시 말해 진동 에너지는 반드시 그 최소 단위의 정수배가 되어야 한다. 63-4)


플랑크의 발견은 미시 세계에서 뭔가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했다. 플랑크의 수식은 실험 결과를 잘 나타내는 유용한 공식이었지만, 수많은 물리학자가 ‘진동 에너지에 최소 단위가 있다’는 엉뚱한 가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플랑크 자신도 이를 임시로 도입한 기술적인 가정일 뿐이라 여겼으며, 그곳에 물리학의 근본에 관한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플랑크의 이론을 발전시킨 사람은 바로 천재 물리학자로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플랑크는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가 진동하면서 방출하는 에너지에 최솟값이 있다고 가정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아인슈타인은 방출되는 전자기파 그 자체의 에너지에 최솟값이 있다고 보았다. 아인슈타인은 전자기파 자체가 양자화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광양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광양자 이론에 따라 물체에서 방출되는 전자기파를 계산해도 플랑크의 수식이 유도됨을 보였다. 65)


아인슈타인은 이 가설을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응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광전효과라 불리는 금속에 빛을 비추었을 때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빛을 파동으로 본다면 이 현상은 파동의 에너지가 전자를 금속에서 떼어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빛의 세기가 셀수록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도 커질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센 빛을 비춰도 튀어나오는 전자의 개수가 늘어날 뿐이었다. 한편으로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가 커졌다. 광전효과의 이러한 현상은, ‘빛의 에너지는 연속적이지 않으며 광양자로 되어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광양자라고 부른 것은 오늘날 ‘광자’라고 불린다. 파장이 짧아질수록 광자의 에너지가 커지므로 튀어나오는 전자의 에너지도 커진다. 한편으로 파장은 똑같은데 빛의 세기만 강하게 하면, 광자의 수가 늘어나서 튀어나오는 전자 수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전자 하나하나의 에너지는 커지지 않는다. 65-6)


고전물리학에 따라 원자 모형을 설명하면 전자는 금세 원자핵과 만나고 만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자의 운동 에너지가 줄다가 결국 0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자 가설에 따르면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운동 에너지값은 연속적이지 않고 띄엄띄엄 떨어진 값이다. 또 전자의 운동 에너지에는 최솟값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원자핵과 만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 최솟값이 0이 아닐 것이며, 최소 에너지 상태에서 원자가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어는 이러한 가설에 따라 원자 모형을 고안했다. 원자는 종류에 따라 정해진 파장의 빛을 방출한다. 양자 가설에 따르면 빛의 파장은 광자 하나의 에너지와 대응하므로, 바꿔 말해 원자가 일정한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방출한다고 할 수 있다. 원자의 에너지가 양자화되어 띄엄띄엄 떨어진 값밖에 지닐 수 없다면, 그 띄엄띄엄 떨어진 차이만큼의 에너지가 바로 방출되는 광자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러한 에너지 계단을 결정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69)


드 브로이는 전자가 입자의 성질과 파동의 성질을 모두 지닌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광양자 가설의 반대 버전이다. 파동인 줄로만 알았던 빛이 사실은 입자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면, 반대로 입자인 줄 알았던 전자도 파동의 성질을 지니고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입자가 지니는 파동의 성질을 ‘드 브로이파(물질파)’라고 한다. 드 브로이파의 파장은 매우 짧다.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원자 내부처럼 매우 작은 세계에서는 전자가 지니는 파동의 성질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보어의 양자조건은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면서 드 브로이파에 따라 안정하게 진동하는 조건과 똑같다. 그 조건이란 전자 궤도 한 바퀴의 길이가 드 브로이파 파장의 정수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전자가 궤도를 한 바퀴 돌았을 때 드 브로이파의 진동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어의 양자조건을 만족했을 때 전자의 드 브로이파는 원자 안에서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70)


제5장 기묘한 양자의 세계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속에서 전자가 뭘 하고 있는지 알아내려 해 봤자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전자가 원자 속에서 어떤 궤도로 운동하느냐는 오직 머릿속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며, 실제로 관측해서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더는 관측할 수 없는 일에 관해 고민하지 말자. 실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관측 가능한 값에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관측 가능한 값이 어떤 수치가 될지 이론적으로 예언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처럼 하이젠베르크는 전자 궤도 등 관측할 방법이 없는 문제는 이론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실천에 옮기기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하이젠베르크는 실제로 그러한 이론을 구축해 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은 직관적인 상상을 완전히 배제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이론이 되었다. 오직 관측할 수 있는 값에 주목해 그 사이에서 성립하는 수학적 관계를 알아내려 했다. 72)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이 성립하려면 곱셈의 순서를 바꿨을 때 결과가 달라진다는 기묘한 규칙이 필요했다. 2×3이나 3×2나 둘 다 6이 되는 것처럼, 보통 곱셈을 할 때는 순서를 바꿔도 결과가 똑같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서는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달라지는 이상한 곱셈을 사용해야 했다. 당시 물리학자는 대부분 그런 이상한 곱셈에 관해 알지 못했다. 이는 하이젠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상한 곱셈을 써야만 하는 자신의 이론에 의미가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하이젠베르크는 새 이론에 관한 논문을 완성한 다음 자신의 스승이자 물리학자인 막스 보른에게 의견을 구했다. 얼마 후 보른은 그 이상한 곱셈이 수학자 사이에서 알려져 있던 행렬연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렬이란 말 그대로 숫자를 행과 열로 나열한 것이다. 두 행렬을 곱하면 새로운 행렬이 나온다. 이 행렬끼리의 곱셈은 순서를 바꾸면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는 성질이 있다. 73)


당시 물리학자가 행렬역학을 보고 당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행렬역학이 발견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전혀 다른 형태의 양자역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양자역학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발견했다. 슈뢰딩거는 하이젠베르크와 달리 더 직관적인 방법으로 원자 내부를 이해하려 했는데, 당시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드 브로이파를 이용했다. 슈뢰딩거는 처음으로 드 브로이파의 파동 방정식을 찾아냈다. 이를 ‘슈뢰딩거 방정식’이라고 한다. 즉 슈뢰딩거는 행렬역학과 다른 새로운 양자역학을 발견한 것이다. 슈뢰딩거의 양자역학을 ‘파동역학’이라고 한다. 행렬역학은 직관적인 이해를 배제한 채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하지만, 파동역학은 시각적인 이해가 가능한 데다 물리학자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둘 다 똑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론이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자연히 행렬역학을 버리고 파동역학을 이용하게 되었다. 75)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의 파동이 실재한다고 보았으며, 전자 등의 입자를 그 파동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전자 등은 사실 입자가 아니며, 오직 겉으로만 입자처럼 보일 뿐이다. 파동의 파장이 너무나 짧아서 마치 파동이 아닌 입자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해석에는 문제가 많았다. 아무리 파동을 작은 영역에 가두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넓게 퍼져 나가 버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면에서 파문이 시간에 따라 넓게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벽으로 가로막히지 않은 수면에서는 물결을 좁은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없다. 이래서는 전자가 언제나 입자처럼 관측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면 파동함수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그 해답을 내놓은 사람은 이론물리학자 막스 보른이었다. 보른이 내놓은 해석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파동함수가 나타내는 파동은 물결이나 음파처럼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존재할 확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78)


어떤 위치에 대한 파동함수가 크면 클수록 그곳에서 입자를 발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확률 해석이다. 파동함수는 시간과 공간으로 결정되는 함수이니, 바꿔 말하면 시간과 공간에 따라 입자를 발견할 확률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언제 어디서 입자가 발견되기 쉬운지 알려주는 셈이다. 이론의 근본 부분에 확률이 존재한다는 것은 전통적인 물리학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냐면 뉴턴 역학 이후의 물리학에서는 한 시점의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면, 그 후에 일어날 일을 완전히 예언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볼츠만의 통계역학에서 확률이 쓰이기는 했지만, 이는 단지 입자 개수가 너무 많아서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확률은 더 근원적인 것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설사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해도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확률적으로밖에 예언할 수 없다. 80)


가령 전자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에너지값 중 하나를 지니고 있다고 해보자. 전자의 에너지값은 지금보다 더 작은 다른 값으로 바뀔 수 있는데, 이때 원래 값과 나중 값의 차이만큼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를 방출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작은 값’의 후보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자의 에너지는 다양한 값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최초의 물리적인 상황을 완전히 알고 있다 해도, 다음에 전자의 에너지값이 어떤 값으로 바뀔지는 확률적으로만 예상할 수 있다. 이 에너지값으로 변할 확률은 얼마이며, 저 에너지값으로 변할 확률은 얼마라는 식이다. 따라서 방출되는 광자의 에너지도 확률적으로만 예언할 수 있다. 게다가 광자가 어느 방향으로 방출될지도 확률적으로만 알 수 있다. 에너지 단계가 높은 원자가 하나 있을 때, 그 원자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지닌 광자가 방출될지 정확하게 예상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가능성과 확률만을 예언할 수 있을 뿐이다. 81)


제6장 시간과 공간의 물리학


맥스웰 방정식은 전기장과 자기장에 관한 방정식이다. 맥스웰은 이 방정식을 통해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생겼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파동의 형태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게다가 이 파동은 물질이 전혀 없는 진공 속에서도 전달될 수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얽힌 채로 진행하는 이 파동을 ‘전자기파’라고 한다. 맥스웰 방정식을 이용하면 전자기파의 속도를 계산할 수 있다. 맥스웰이 그 속도를 계산한 결과 빛의 속도와 거의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던 빛의 정체가 바로 전자기파였음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전자기파가 진공 속을 나아간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참으로 기묘하다. 일반적으로 파동은 물질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즉 파동을 매개하는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자기파는 물질이 없는 진공 속에서도 전파된다. 전자기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존재인 전기장과 자기장을 흔들면서 나아간다. 110)


진공 속에서 전달되는 파동이 기묘한 이유는 파동의 속도가 대체 무엇에 대한 속도냐는 점이다. 물결의 속도는 물에 대한 속도이며, 음파의 속도는 공기에 대한 속도이다. 즉, 파동의 속도란 파동을 전달하는 물질에 대한 속도인 셈이다. 그런데 진공 속에서 퍼져 나가는 파동에는 이를 매개할 물질이 없다. 그렇다면 전자기파, 즉 빛의 속도는 대체 무엇에 대한 속도일까? 기준이 없다면 속도는 상대적으로만 정할 수 있다. 즉 누가 측정하느냐에 따라 속도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초속 30m로 움직이는 물체일지라도, 이를 초속 10m로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초속 20m로 보일 것이다. 기준으로 삼을 만한 물체가 없다면, 속도는 결국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맥스웰 방정식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라면, 빛이 진공 속을 나아가는 속도는 누가 측정해도 똑같아야 한다. 즉, 서로 움직이고 있는 관찰자 두 사람이 한 빛의 속도를 각각 측정했을 때 똑같은 속도가 나와야 한다. 110-2)


아인슈타인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애초에 속도(이동 거리를 걸린 시간으로 나눈 결과값)란 어떤 개념인지를 되짚어봤다. 빛이라면 1초에 30만km를 이동하므로 초속 30만km가 된다. 이때 빛을 초속 10만km로 쫓아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멈춰 있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 사람은 1초 후에 10만km 앞에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빛은 1초 후에 30만km 앞에 있을 것이므로, 움직이고 있는 사람과 빛의 거리 차이는 1초 후에 20만km가 될 것이다. 즉 빛과 이를 쫓아가는 사람의 거리가 1초 만에 20만km 벌어졌다. 속도가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인 이상,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빛을 쫓아가는 사람이 측정한 빛의 속도는 초속 20만km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이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어떤 사실이 있다. 바로 움직이는 사람과 멈춰 있는 사람이 똑같은 시간과 똑같은 거리를 측정하고 있다는 가정,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멈춰있는 사람에게도 움직이는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전제다. 115-6)


이렇게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보인다는 비상식적인 이론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특수상대성이론’이다.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인 것이 아니며,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즉 상대적인 것이라는 점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이론이 상대성이론이라 불린다. 특수란 말이 붙은 이유는 훗날 아인슈타인이 중력까지 포함하여 일반화한 일반상대성이론과 구분하기 위해서다. 초속 30만km로 멀어지는 빛을 초속 10만km로 쫓아가는 사람은 멈춰 있는 사람과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한다. 그래서 멈춰 있는 사람 눈에는 움직이는 사람이 빛과 초속 20만km로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도, 움직이는 사람은 그와 다른 시간과 거리를 경험하므로 빛의 속도가 똑같이 초속 30만km로 측정되는 것이다. 그 결과 발견된 수식은 비교적 단순했으며 ‘로런츠 변환’이라 불린다. 로런츠 변환에 따르면 서로 움직이고 있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은 서로 뒤섞여 있다. 116)


요점은 멈춰 있는 사람과 움직이는 사람 사이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있고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이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느 쪽 시간이 느린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모순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느 쪽이 느리고 어느 쪽이 빠르다는 생각 자체가 절대적인 시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삼을 만한 시간의 흐름이 있다면 이에 비해 빠른지 느린지를 논할 수 있겠지만, 그런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또한, 내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해서 자기 자신의 시간이 느려졌다는 자각은 할 수 없다. 상대가 보기에는 내 뇌를 포함한 내 주변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시간 감각에는 변화가 없다. 즉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다는 것뿐이지, 내가 느끼기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이 없어도 내 시간은 잘 흐르므로 다른 사람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느냐로 내 시간이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118)


제7장 시공간이 낳는 중력


일반상대성이론의 중요한 특징은 중력이라는 힘을 시간과 공간의 성질로 설명해 냈다는 점이다. 전철에 탔을 때를 떠올려 보자. 멈춰 있는 상태에서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이렇게 가속할 때는 진행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밀리는 느낌이 든다. 특히 서 있을 때는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넘어질 수도 있다. 이 힘은 ‘관성력’으로 알려져 있다.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해도 나 자신은 계속 멈춰 있으려고 한다. 즉 전철만 먼저 앞으로 나가 버리다 보니, 전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뒤로 미는 것처럼 보인다. 그 힘을 상쇄하기 위해 뒤에서 힘을 가하면 자신도 전철과 함께 움직이게 된다. 이처럼 관성력이란 가속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이다. 이 힘은 무게를 지닌 모든 물체에 작용한다. 그리고 무거울수록 관성력도 커진다. 이처럼 관성력과 중력은 성질이 비슷한데, 실제로 이 두 가지 힘은 구별할 수 없다. 122-3)


중력과 관성력이 똑같다면 중력은 이제 물체끼리 서로 직접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가속하고 있는 관측자가 똑바로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물체가 똑바로 움직이지 않고 휘어져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던 전철이 멈추려고 감속할 때는 모든 물체가 앞으로 힘을 받는다. 따라서 진행 방향과 수직으로 공을 굴리면 앞으로 휘어지는데, 이것이 관성력이다. 하지만 전철 밖에서 관찰하면 공은 똑바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관성력은 관측자의 가속 때문에 생긴다. 가속이란 속도의 변화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므로 시간 ·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속도가 서로 다른 관측자들 사이에서는 시간과 공간도 달라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속하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은 가속하지 않는 관측자의 시간과 공간과는 다르다. 따라서 가속하고 있는 관측자에게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력은 무언가에 끌리는 힘이 아니라 시공간이 휘어져서 생기는 힘이라는 것이다. 124-5)


# 등가 원리 : 관성력과 중력은 등가, 즉 똑같은 것이라는 개념


뉴턴이 제시한 만유인력의 법칙에서는 무게가 있는 물체에 직접 중력이 작용한다고 한다. 무게가 0인 물체에는 힘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물체는 중력 때문에 진로가 휘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령 멀리서 날아온 입자가 별 근처를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자. 이 입자의 무게가 0이라면 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냥 똑바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별 주변에 있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으므로 무게가 0이라 해도 똑바로 나아갈 수는 없으며, 진로가 다소 별 쪽으로 휘어진다. 이를 관측할 방법이 있다. 태양 주변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별빛을 관찰하는 것이다.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별빛은 태양 주변에서 약간 진로가 휘어진 다음 지구에 도착한다. 즉 태양 근처에서 빛이 굴절하므로, 별이 원래 보여야 할 위치보다 태양에서 약간 벗어난 위치에 보일 것이다.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태양 때문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아야 할 별빛도 태양 표면 아슬아슬한 곳에서 보일 수 있다. 128)


제8장 물리학이 나아갈 길


현대 물리학에 있는 수많은 이론은 양자론과 상대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초 물리학 분야에서는 양자론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기반으로 ‘양자장론’이 발전했다. 원래 양자장론은 전자기력을 양자론과 융합시키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양자역학은 본디 입자의 운동을 양자적으로 다루는 학문인데, 이를 전기장과 자기장 등 공간에 퍼져 있는 현상에도 적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양자론과 전자기학을 융합시킨 ‘양자 전기역학’이라는 이론이 만들어졌다. 이 이론은 특수상대성이론도 포함하며 실험 결과와도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성공적인 이론으로 볼 수 있다. 양자 전기역학은 ‘양자장론’이라 불리는 이론 형식의 한 가지 사례다. 또한, 양자장론을 통해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각 세 가지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그 쿼크가 어떠한 물리 법칙을 따르는지도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물리 법칙도 양자장론의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137)


우리가 양자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동시에 다뤄야 할 상황에 맞닥뜨릴 일은 없다. 양자론의 효과는 미시 세계에서 현저해지는 한편, 일반상대성이론의 효과는 거시 세계에서 현저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리적으로는 미시 세계에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효과가 현저하게 나타날 때가 있다. 바로 매우 큰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을 때다. 에너지는 질량과 같은 것이라서 그 자체가 시공간을 휘어지게 만든다. 미시 세계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집중되면 시공간이 심하게 휘어지므로 기본 입자의 세계에서도 일반상대성이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내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매우 작은 영역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우주가 태어난 직후의 상태이며, 그 상태를 이해하려면 우주 자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아야 한다. 즉, 우주의 기원을 밝혀내려면 양자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함께 기술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지만, 그런 이론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140-1)


모든 것의 이론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처럼 보이지만, 이는 모순을 품고 있는 말이다. 왜냐하면 정말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라면, 자기 자신이 옳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옳음을 스스로 증명할 수는 없다. 외부에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빗대면 알기 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해도, 증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처럼 어떤 이론이 옳다는 사실을 그 이론 내에서 증명할 수는 없다. 이는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라고 하는 수학적 사실이다. 모든 것의 이론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있더라도, 그 이론 안에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한 가지 기본 법칙이 있을 것이다. 정말 그런 이론이 있다면 모든 것의 이론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기본 법칙이 왜 성립하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즉 모든 근본적인 의문이 풀리고 더는 탐구할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이론은 존재할 수 없다.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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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출출할 땐, 주기율표 - 먹고사는 일에 닿아 있는 금속 열전
곽재식 지음 / 초사흘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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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스칸듐: 야구장 간식을 고르며 Sc


합금을 만들면 왜 성능이 좋아질까? 세상의 모든 물체처럼 금속 덩어리도 크게 확대해 보면 원자라는 아주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원자들은 왜 낱낱이 흩어지지 않고 그렇게 덩어리지어 붙어 있을까? 간단히 이야기하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자 속에 있는 전자는 ⊖전기를 띤다. 바로 그 전자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두 원자가 달라붙게 해 준다. 전자 하나가 두 원자를 휘감아 돌고 있으면 두 원자는 그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서로 붙어 있으려고 할 것이다. 원자의 중심부 핵에는 ⊕전기가 있으니 ⊖전기를 띤 전자에 잘 이끌릴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이와 반대로 원래 붙어 있던 원자들이 전자의 움직임 때문에 떨어질 수도 있다. 대체로 원자들이 잘 붙어 있느냐, 떨어지기도 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원자가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물질의 성질이 바뀌는데, 화학은 바로 그런 변화를 연구하는 일이다. 9-10)


원자의 종류가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의 원자 속에 있는 전자의 개수가 다르고, 전자가 들어 있는 모양도 다르다. 수소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개 있고, 헬륨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2개 있고, 알루미늄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가 13개 있으며, 스칸듐에는 원자 하나당 전자 21개가 있다. 또한, 그 전자들이 주로 원자의 겉면 쪽을 돌아다니는지, 아니면 원자의 중심부 쪽을 돌아다니는지도 원자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그러므로 서로 잘 맞는 성질을 가진 원자들을 적절히 섞어 놓으면 원자 사이를 밀고 당기며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원자들을 최대한 잘 묶어 놓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튼튼한 합금이 만들어진다. 필요하다면 원자들이 잘 들러붙지 않는 조합으로 합금을 만들어서 쉽게 녹이고 가공하기 편리한 재료를 얻을 수도 있다. 학자들은 알루미늄에 스칸듐을 약간 더해서 잘 섞어 주면 그냥 알루미늄 덩어리보다 더 성능이 뛰어난 재질이 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야구 방망이가 바로 스칸듐 합금 방망이다. 10)


22 타이타늄: 외계인 초코볼을 집어 들며 Ti


색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보통 흰색을 띠는 이산화타이타늄을 일컫는 경우가 많듯이, 금속 재료를 사용하는 분야에서 타이타늄이라고 하면 타이타늄 합금을 줄여서 말한 것일 때가 많다. 골프채 같은 운동기구에서 군사용 무기까지 타이타늄 합금 재료의 용도는 상상외로 넓다. 가볍고 튼튼하며 녹이 잘 슬지 않는 타이타늄은 사람 몸과 관련된 부품을 만드는 데도 많이 사용된다. 수술로 사람 몸에 장치하는 부품이 쉽게 상한다면 수리나 교체를 하느라 거듭 수술을 해야 할 것이므로 그런 일이 없도록 처음부터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너무 무거우면 사람이 움직이는 데 힘이 들므로 가벼울 필요도 있다. 아울러 사람 몸은 6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 물과 산소가 닿더라도 쉽게 녹슬지 않아야 한다. 다행히 타이타늄을 잘 이용하면 그런 소재를 만들 수 있다. 치아 임플란트에서도 가짜 이를 잇몸에 고정하는 뿌리 부분을 타이타늄을 이용해서 만들곤 한다. 19-21)


타이타늄은 땅에 있는 웬만한 금속 중에서도 양이 무척 풍부한 편이다. 우주 전체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는 수소인데, 지구의 땅에는 수소보다도 타이타늄이 더 풍부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학 분야에서 대단히 유명한 치글러-나타Ziegler-Natta 촉매가 타이타늄을 가공해서 만든 물질이라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치글러-나타 촉매가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플라스틱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석유를 가공해서 뽑아내는 에틸렌이라는 기체에 치글러-나타 촉매를 조금만 떨어뜨려 주면 에틸렌 기체가 마법처럼 서로 엮여 굳으면서 플라스틱으로 변한다. 이렇게 해서 만드는 물질이 비닐봉지부터 볼펜까지 흔하게 쓰이는 대표적인 플라스틱 폴리에틸렌polyethylene이다. 타이타늄의 가장 큰 단점은 가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타이타늄을 철처럼 다루면 깨지고 부서지기 쉽다. 어찌 보면 너무 튼튼하고 강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22-3)


23 바나듐: 생수 맛을 음미하며 V


원래 바나듐은 금속 제품의 재료를 만들 때 조금씩 섞어 넣는 물질로 유명했다. 금속 공업이 발달한 한국에서는 매년 8,000t 이상의 바나듐을 수입한다. 특히 널리 사용되는 금속인 철 제품을 만들 때 바나듐을 조금 섞으면 철이 더 튼튼해지고 충격을 잘 흡수하며 열에도 강해진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강철에 바나듐을 1% 정도만 섞어도 성질이 확 좋아진다고 하는데,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이현복 선생이 쓴 글에 따르면 고속도공구강high speed steel이라는 재료는 “바나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바나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고속도공구강은 다른 금속을 깎고 자르는 도구를 만들기 위한 강철 재료를 말한다. 즉, 바나듐을 섞은 강철 덕분에 좋은 공구를 만들 수 있고, 그런 공구로 금속 재료를 세밀하고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나듐이 있어야만 세밀하고 정교한 금속 부품을 만들 수 있고, 나아가 그런 부품이 들어가는 정교한 기계도 만들 수 있다. 26)


화학물질이 서로 반응을 하고 안 하고는 물질에 들어 있는 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바나듐은 금속인 만큼 잘 움직이는 전자를 꽤 많이 품고 있어서 잘만 사용하면 독특한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희귀한 물질도 아니어서 다방면에 활용할 수 있다. 자동차 매연이나 굴뚝 연기 성분 중에 이산화황이라는 해로운 물질이 있다. 이산화황은 몸에 좋지 않은 스모그의 원인이자 산성비의 주원인으로도 지목되는 물질이다. 공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시도했던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굴뚝을 통과하는 연기를 공기 중에 바로 내뿜지 않고 물에 한 번 적셔서 그 속의 오염 물질인 이산화황을 잡아채는 장치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이 많은 이산화황을 어쩌면 좋을까? 이럴 때, 모아 놓은 이산화황에 오산화바나듐을 넣어 화학반응을 일으키면 황산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만든 황산 또는 이산화황 계통의 성분을 빼내고 남은 물질은 그 물질이 필요한 곳에 돈을 받고 팔 수 있다. 29)


24 크로뮴: 쌀밥을 한술 뜨며 Cr


오랫동안 철로 만든 숟가락이 널리 쓰이지 않은 것은 바로 녹이 잘 슨다는 문제 때문이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최대한 물에 닿지 않도록 하거나 기름칠을 해서 녹스는 것을 피해 볼 수 있겠지만, 항상 음식물에 닿고 입에 넣고 빨아야 하는 숟가락, 젓가락은 그런 방법을 쓸 수가 없다. 이 때문에 철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는데도 식기를 만드는 데는 잘 쓰이지 않았다. 그런데 20세기 초쯤에 유럽의 과학기술인들이 철에 크로뮴chromium이라는 금속을 조금 섞어 철과 굉장히 비슷하면서 녹이 슬지 않는 합금을 만들었다. 그 기본 원리는 철에 녹이 슬기 직전에 크로뮴 성분이 먼저 녹슨 상태로 변하면서 미세하게 철을 뒤덮는 현상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아주 얇은 크로뮴 막이 철을 감싸서 철이 공기나 물과 닿아 녹스는 것을 막아 버린다. 녹이 스는 문제만 해결되면 철은 숟가락, 젓가락에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다. 그 덕택에, 한국의 금속 식기는 놋쇠에서 스테인리스강으로 빠르게 바뀌어 갔다. 34-5)


주변 원자와 달라붙는 데 특히 요긴하게 활용되어서 그 원자의 성질을 따질 때 잘 살펴봐야 하는 전자들을 원자가전자valence electron라고 부른다. 크로뮴 원자 하나가 다른 원자와 연결되어 덩어리를 이룰 때는 크로뮴 원자 속에 있는 전자 3개가 쓰이기도 하고, 6개가 쓰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크로뮴은 원자가전자가 3개일 때도 있고, 6개일 때도 있다. 전자 3개를 이용해서 주변의 다른 원자와 연결된 크로뮴을 “3가 크로뮴”이라고 하고, 전자 6개를 이용해서 연결된 크로뮴은 “6가 크로뮴”이라고 표현한다. Cr3+, Cr6+라고 쓰기도 한다. 여기서 Cr6+라는 말은 크로뮴 원자 하나가 ⊖전기를 띤 전자 6개를 소모해서 주변의 원자들과 달라붙었기 때문에, 원래 상태보다 ⊖전기가 6만큼 부족해졌고, 이에 따라 ⊕전기를 6만큼 띠게 되었다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Cr3+는 3가 크로뮴이라는 뜻이고, Cr6+는 6가 크로뮴이다. 둘 중에 몸에 병을 일으킬 수 있어서 나쁜 중금속 물질로 손꼽히는 것은 6가 크로뮴이다. 39-4)


25 망가니즈: 깻잎나물을 무치며 Mn


과거에 망간이라고 불렸던 망가니즈는 금속인 만큼, 철 덩어리를 만드는 제철소에서 가장 중요하게 활용한다. 철의 성분을 조절한다는 말은 철의 성질을 원하는 정도로 맞추고, 철이 균일하게 나오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제일 기본으로 따져야 할 문제는 철에 탄소가 얼마나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탄소가 많을수록 철이 단단해지는데, 그렇다고 너무 많으면 너무 딱딱해서 오히려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탄소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탄소가 많이 들어 있어서 아주 딱딱한 철을 무쇠라고 하고, 탄소가 적당히 들어 있어서 튼튼하고 질긴 철을 강철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쇠는 강철과 비교하면 너무 잘 부서진다. 그러니까 무쇠 팔, 무쇠 다리보다는 강철 팔이 더 튼튼한 셈이다. 고로에서 녹아 나온 쇳물을 이용해 보통 철을 강철로 만드는 과정에 망가니즈를 사용한다. 망가니즈는 녹은 쇳물이 굳을 때 공기 거품을 제거해 주는 데도 도움이 되며, 철을 부서지게 하는 불순물인 황을 없애는 데도 도움을 준다. 44)


망가니즈가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곳은 바다 밑이다. 왜 바다 밑에 망가니즈 덩어리가 있을까? 바닷속에 사는 고래나 상어 같은 생물 또는 다른 몇몇 작은 생물들이 죽으면 그 뼈와 이빨, 껍질이 물속에 가라앉는다. 마침 그곳이 충분히 깊은 바다라면 그 이빨 조각, 껍질 조각이 바다 밑에 가라앉을 때까지 꽤 긴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 동안 바닷물에 드러난 이빨의 겉면 성분과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아주 약간의 여러 금속 성분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운이 좋으면 그중 일부는 바닷물에 들어 있는 아주 적은 양의 망가니즈 계통 성분을 서서히 끌어당기는 물질로 변하기도 한다. 이렇게 변한 상어 이빨 따위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으면, 그 상태로 아주 천천히 바닷물 속에 들어 있는 망가니즈를 겉면에 붙이고 또 붙이게 된다. 이렇게 망가니즈 성분을 많이 품고서 바다 밑에 가라앉아 있는 덩어리를 망간단괴라고 한다. 망간단괴 속에는 망가니즈뿐 아니라 니켈, 구리 등 다른 금속 원소도 포함되어 있다. 48)


26 철: 도다리쑥국을 기다리며 Fe


철은 핏속에서 붉은색을 내는 물질인 헤모글로빈hemoglobin에 들어 있다. 사람의 몸 구석구석에 꼭 필요한 산소를 운반하는 역할을 헤모글로빈이 맡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숨을 쉬면 허파 속에 퍼져 있는 혈관 속을 흐르는 핏속의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달라붙는다. 그리고 그 피가 온몸 구석구석에 퍼진다. 따라서 헤모글로빈이 산소를 붙여 왔다가 떼어 주는 일은 쉼 없이 일어나야 한다. 만약 헤모글로빈에 산소가 붙고 떨어지는 일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리 숨을 헐떡이더라도 들이마신 산소가 정작 필요한 부위로 퍼져 나가지 못할 것이다. 만약 몸속에서 헤모글로빈 대신에 다른 물질을 이용해 산소를 운반하는 생물이라면 사정이 좀 다를지도 모른다. 문어나 오징어의 경우, 철이 들어 있는 헤모글로빈 대신에 구리가 들어 있는 헤모시아닌hemocyanin이라는 물질을 활용해서 살아간다. 따라서 문어나 오징어의 피는 붉은 색이 아니다. 헤모시아닌 계통의 물질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경우가 많다. 51-2)


핵융합은 한 번 일어나면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다. 별 속에서는 이런 일이 수억 년, 수십억 년 동안 이어진다. 그러면서 한 원소가 다른 원소와 합쳐지면서 새로운 원소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단 한 가지 이상한 걸림돌 같은 현상이 있다. 그게 바로 철이다. 원소들이 뭉쳐서 새로운 원소들이 생겨나다가 철이 만들어지면, 그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철은 거기에 무슨 다른 원소를 억지로 갖다 붙여 핵융합을 일으키려 해도, 다른 원소들의 핵융합이 일어날 때만큼 열을 내뿜지 않는다. 도리어 주변을 더 차갑게 식힌다. 따라서 일단 철이 생겨나면, 핵융합으로 발생한 열이 연달아 핵융합을 일으키는 현상이 더는 이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철은 별이 핵융합으로 빛을 내면서 여러 원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만들어지며 열의 연결 고리를 끊는 물질이다. 그러니 우주에서 저렇게 많은 별이 빛나는 만큼, 별이 빛을 내고 남기는 잿더미인 철도 자연히 우주 곳곳에 많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53)


27 코발트: 김밥을 말며 Co


비타민은 몸에 많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전혀 섭취하지 않으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병이 들므로 항상 조금씩은 챙겨 먹어야 한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곡식이나 채소에서는 좀체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개 고기에 들어 있는 영양소로 간주한다. 원소로 따져 보면 우리 몸의 성분은 대체로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질소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다른 생물도 대개 비슷하다. 비타민 중에서도 비타민A, 비타민C 등은 산소, 수소, 탄소로 이루어져 있다. 다들 흔한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비타민B12는 너무나 독특하게도 코발트cobalt라는 금속 성분을 품고 있다. 그나마 한국인들은 고기를 별로 먹지 않아도 비타민B12 부족 증상을 덜 겪을 것으로 추정된다. 답은 해조류에 있었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김, 미역, 다시마 같은 해조류를 많이 먹는 편이다. 맛도 독특하고 비타민B12처럼 고기가 아니고서는 찾기 힘든 귀한 영양소도 들어 있는 김은 한국의 개성 있는 식재료다. 59-61)


코발트60은 자연 상태에서는 찾기 어려운 물질로, 보통 원자력을 이용해서 만들어 낸다. 코발트60은 보통 자연에서 캐내는 코발트보다 무게가 약간 더 나가는데, 59:60 정도로 무겁다. 이름이 코발트60인 것 역시 그런 성질 차이 때문이다. 코발트60의 가장 주목할 만한 성질은 방사선을 꽤 긴 시간 동안 강하게 내뿜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사선을 쏘아 파괴해야 하는 물질이 있을 때 코발트60을 그 곁에 갖다 놓으면 없앨 수 있다. 이 때문에 196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방사선 치료 방법을 이용해서 암을 치료하려고 할 때, 바로 코발트60을 활용했다. 코발트60을 최대한 암세포 가까이 두면 코발트60에서 나오는 방사선이 암세포를 파괴하도록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세균이나 바이러스를 파괴하는 소독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할 때도 소독하고 싶은 물건을 코발트60 근처에 놓아두면 거기서 나오는 방사선이 미생물을 파괴해 버린다. 코발트60은 이렇듯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질이다. 65)


28 니켈: 초콜릿을 조심하길 Ni


과거에 니켈은 철을 만들 때 성질을 좋게 하려고 조금 섞어 넣는 용도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철에 크로뮴을 섞으면 녹슬지 않는 강철이라는 뜻의 스테인리스강이 되는데, 스테인리스강을 만들 때 니켈도 약간 넣어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요즘 들어 니켈의 새로운 용도가 생기면서 산업계에 니켈이 한층 더 많이 필요해졌다. 바로 배터리를 만들기 위한 용도다. 특히 한국의 배터리 회사들은 리튬과 니켈, 코발트, 망가니즈를 함께 이용하면 가벼우면서도 오래가는 전지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로 NCM(Nickel-Cobalt-Manganese) 배터리다. NCM배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본래 코발트였다. 코발트를 많이 넣어 주면 성능을 끌어 올리기에 유리했다. 그런데 코발트는 가격이 너무 비싸서 고민거리였다. 그래서 한국 회사들은 배터리를 만들 때 코발트를 줄이고, 그보다 구하기 쉬운 니켈을 많이 넣는 방법을 다양하게 연구해 왔다. 이렇게 니켈 성분을 많이 넣은 배터리를 흔히 하이니켈배터리라고 부른다. 73)


니켈과 철을 적절히 섞어 만든 재료 중에는 열을 받아도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도 있다. 모든 물체는 온도가 높아지면 크기가 좀 불어나고 온도가 낮아지면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밀 가공을 해야 할 때 온도에 따라 크기가 자꾸 변하면 정확하게 작업하기가 어려워진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온도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은 니켈계 재료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바invar라고 하는 재료인데, 보통 철 64%에 니켈 36%를 섞어 만들기 때문에, 니켈 함량 36%를 강조하여 FeNi36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니크롬선nichrome wire을 만드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니켈의 소중한 용도다.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서 가느다란 선을 만들면 전기가 계속해서 쭉쭉 흐르기는 하는데, 어느 정도는 저항 때문에 전기가 잘 안 흘러서 열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이 선에 전기를 흘려 주면 주변을 뜨겁게 데울 수 있는 장치가 된다. 이것을 니켈과 크로뮴을 섞어 만든 선이라고 해서 니크롬선이라고 부른다. 74-5)


29 구리: 꽃게를 손질하며 Cu


구리는 문명이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금속이다. 철은 녹는 온도가 1,500℃가 넘는 데 비해, 구리는 1,080℃ 정도만 되면 녹아내린다. 그만큼 녹여서 가공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옛사람들에게는 구리가 사용하기 좋은 재료였을 것이다. 구리가 철보다 덜 녹슨다는 장점은 현대에도 요긴하게 활용될 때가 많다. 건물을 지을 때 물이 통과하는 파이프로는 구리로 만든 관, 즉 동파이프를 사용하면 좋다. 동파이프를 난방용으로 바닥에 묻어 두면 뜨거운 물이 돌 때마다 금속인 구리가 열을 잘 전달해서 바닥이 금방 따뜻해진다. 게다가 구리가 철보다 약하기 때문에 철로 된 공구로 자르거나 두들기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그 외에도 조선 시대에 금속활자를 사용해 책을 인쇄할 때가 있었는데, 이때도 구리로 금속활자를 만들곤 했다. 여기에 청동을 비롯해 구리와 다른 금속을 섞어 만드는 오동, 백동 등의 재료까지 합치면 용도는 더욱 많아진다. 79-80)


주기율표에서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끼리는 성질이 비슷하다. 같은 줄에 적혀 있는 원소들은 같은 족group에 속한다는 말도 자주 쓴다. 그런데 주기율표를 보면 구리 아래에 은이 있고 은 아래에 금이 있다. 구리와 금의 닮은 점으로 녹이 잘 슬지 않는 성질을 꼽는다면, 구리와 은의 닮은 점으로는 전기가 잘 통하는 성질을 꼽을 수 있다. 구리는 은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전기를 아주 잘 전달하는 재료다. 그러면서 가격은 구리가 은보다 훨씬 더 싸기 때문에 예부터 구리로 만든 가느다란 선이 전기를 전달하는 재료로 자주 쓰였다. 그 때문에 구리선이라고 하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전선의 대표로 꼽힐 정도였다. 철이나 석유도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치는 유용한 자원이기는 하지만, 철은 가격이 흔들리기에는 너무 흔하게 구할 수 있고, 석유는 반대로 너무 귀해서 몇몇 나라를 중심으로 가격을 조절할 수도 있다. 그래서 구리만큼 세계 경제를 잘 보여 주는 물질도 없다는 이야기가 생겼다. 80-1)


30 아연: 굴전을 부치며 Zn


아연은 전기적으로 다채롭고 특이한 성질을 내는 금속 원소다. 사람 몸속에서도 복잡하고 특이한 물질을 만드는 데 조금씩 활용된다. 특히 몇 가지 호르몬을 만드는 화학반응에 아연이 필요한 때가 있다고 한다. 사람의 몸은 음식으로 먹은 재료를 소화해서 분해하여 다양한 원자들을 얻고, 그 원자들을 재조립해서 몸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질을 만들어 낸다. 호르몬도 이런 방식으로 생겨난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해내려면 여러 가지 재료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역할을 하는 기계 장치 내지는 도구에 해당하는 물질도 몸속에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바로 그 준비 작업에 아연이 아주 약간 필요하다. 반대로 말하면 아연이 부족하면 몸에서 호르몬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도구를 제대로 만들 수 없게 되고, 결국 호르몬도 필요한 만큼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식 중에서도 고기나 조개류에 아연이 많다고 하며, 곡식 중에서는 통곡물에 아연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한다. 아연 성분이 많은 음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굴일 것이다. 85)


현대에는 구리와 아연을 주성분으로 한 합금 소재를 황동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 쓰던 놋쇠 중에는 황동이 아닌 것도 있지만 황동도 그 일종으로 포함된다고 보는 게 맞다. 황동을 영어로는 brass라고 하는데, 트럼펫이나 트롬본 같은 금관 악기를 많이 사용하는 악단을 브라스 밴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악기를 흔히 황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황동은 구릿빛을 띤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들 때 순수한 구리 못지않게 자주 쓰인다. 아연의 양을 잘 조절하면 구리만 사용할 때보다 훨씬 딱딱하고 튼튼한 재질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금속 재질 물건 중에 반짝이는 구릿빛이나 황금색 비슷한데 순수한 구리나 금은 아닌 것 같을 때, 구리와 아연이 섞인 황동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총알은 튼튼하면서도 녹슬지 않고 오래가야 하며, 열과 압력을 잘 견뎌야 한다. 그런데 총알의 겉면인 탄피 부분은 황색을 띤다. 이것은 탄피를 황동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7-8)


31 갈륨: 쌈 채소를 씻으며 Ga


LED는 반도체의 일종으로, 전기를 받으면 빛을 내는 성질이 있는 특별한 물질을 이용해 만든다. LED라는 부품이 개발된 초창기부터 빨간색 빛을 뿜는 제품은 만들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빨간색 빛을 내는 전자 제품이 그렇게 흔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LED로 흰색 빛을 내기는 너무나 어려웠다. 그런데 흰 빛은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빛이 섞인 결과가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여기서 파란색 빛을 내는 재료를 만들기가 몹시 어려웠다. 이 문제는 1990년대에 들어와 주로 일본 과학자들의 활약으로 해결되었다. 당시 갈륨gallium이라는 금속 물질과 질소의 원자를 규칙적으로 잘 엮어 만든 물질을 이용하면 파란색 LED의 재료로 쓸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려져 있었다. 문제는 갈륨과 질소를 잘 엮는 작업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일본의 화학 회사 연구원이었던 나카무라 슈지なかむらしゅうじ와 동료들이 질화갈륨 결정을 만드는 절묘한 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LED 시대가 열렸다. 92-4)


갈륨은 석탄이나 금처럼 덩어리로 뭉쳐 있는 것을 캐낼 수 있는 물질이 아니다. 갈륨은 다른 원소들과 반응한 상태로 이곳저곳에 조금씩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다른 금속을 돌 속에서 뽑아내고 점점 순수하게 정제하는 과정에서 불순물로 걸러낸 물질을 분리해 갈륨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광산에서 캔 돌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공장이 많은 곳에서 갈륨도 많이 생산된다. 사실 순수한 갈륨 덩어리는 좀 웃기고 재미난 물질이다. 갈륨은 금속치고는 매우 쉽게 녹아내리는 물질이어서 차가울 때는 꼭 철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30℃ 정도의 온도만 되어도 은색 페인트처럼 흐물흐물하게 변해 버린다. 그래서 갈륨 덩어리로 칼이나 바늘을 만들어서 누구에게 써 보라고 건네주면, 그것을 받은 사람이 막상 사용하려고 할 때 체온 때문에 녹아 버려서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러고 나서도 다시 모양을 잡아 준 뒤에 찬 바람만 좀 쐬어 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튼튼한 강철 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96-8)


32 저마늄: 도라지무침을 먹으며 Ge


게르마늄이라고도 부르는 저마늄은 최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의 주원료 물질이었다. 저마늄 덩어리는 전기가 통할 듯한 특성을 많이 갖춘 금속이기는 한데, 막상 전기를 흘려 보면 그다지 잘 통하지는 않아서 부도체에 가깝기도 한 애매한 물질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바로 이 어중간한 성질을 잘만 이용하면 훌륭한 전자 부품을 개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47년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진공관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더 좋은 부품을 개발했다. 전기가 잘 흐르지 않던 저마늄에 불순물을 조금 섞어 넣으면 평소에는 전기가 흐르지 않다가 조건이 맞을 때만 전기가 흐르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잘 활용하면 릴레이를 대신할 수 있고, 진공관을 대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트랜지스터라는 부품이다. 다시 말해 트랜지스터도 “스위칭” 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진공관보다 크기도 훨씬 작고, 고장도 잘 나지 않고, 전기도 훨씬 덜 들었다. 이렇게 개발된 저마늄 트랜지스터를 일반적으로 반도체 산업의 시작으로 본다. 102-4)


# 릴레이 : 전기신호가 약해지는 지점에 기계 장치를 설치해 본래의 전기 신호를 계속 연결하는 방식, 스위칭도 비슷한 개념이다. 


요즘은 트랜지스터 대신 저마늄이 사용되는 다른 분야가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는 규소로 만든 보통 유리보다 적외선을 잘 통과시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적외선을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카메라를 만들 때 저마늄 유리 렌즈를 자주 사용한다. 적외선을 감지하는 기능은 어두운 밤에도 물체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장비나, 열을 내뿜는 물체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관찰하는 열화상 카메라 등에 사용할 수 있다. 저마늄으로 만든 유리가 활용되는 또 다른 분야도 있다. 요즘 인터넷 통신을 이용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장비로 광케이블이 있는데, 광케이블은 광섬유라는 재료로 만든다. 그러니까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그 정보는 광섬유를 따라 흘러간다. 전선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기를 전달해 준다면, 광섬유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빛을 전달해 준다고 보면 된다. 과학자들은 광섬유를 만들 때 약간의 저마늄을 같이 조합하면 성능이 더 뛰어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104-5)


33 비소: 곶감 사건을 생각하며 As


비상이 사람에게 독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비소砒素라는 원소 때문이다. 비소는 꼭 산소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사람 몸에 독이 될 가능성이 큰 물질이다. 이것은 꽤 특이한 성질이다. 탄소의 경우, 탄소와 산소 원자가 하나씩 연결된 물질은 일산화탄소이며, 이것은 연탄가스 중독의 원인이 되는 대표적인 위험 물질이다. 하지만 탄소와 산소, 수소 원자가 다른 형태로 일정하게 연결된 탄수화물은 달콤한 음식이 된다. 염소 역시 염소끼리만 모여서 염소 기체를 이루면 대표적인 독가스 무기가 되지만, 염소와 소듐이 1:1로 붙어 있으면 음식 맛을 내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소금이 된다. 그런데 비소는 다른 원소를 어떻게 활용해서 무슨 물질을 만들든 대부분 사람 몸에 해를 끼치는 위험한 물질이 된다. 더군다나 중금속 물질은 주로 사람 몸에 어느 정도 쌓였을 때 피해가 나타나지만, 비소는 적은 양으로도 사람 목숨을 빠르게 빼앗는 위험한 물질이 되는 경우가 많다. 109-10)


지금은 비소의 위험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시대다. 그러나 현대에도 우연한 비소 중독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미 비석이나 웅황을 구해서 사용했고 비상을 제조하기도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소 성분은 돌과 흙 속에서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렇기에 유독 비소가 많은 지역에서 지하수를 개발해 물을 마시거나 그런 땅에서 농작물을 길러 먹는다면, 물이나 작물에 녹아든 비소를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먹게 될 수 있다. 개중에 몇몇 농산물은 특히 비소가 잘 쌓이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하필 이런 농산물을 비소가 있는 땅에 심어 기르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끔은 수입하는 농산물 중에 검사 결과 비소가 나온 것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우물을 파고 지하수를 개발해서 쓸 때, 그 물속에 비소가 있는 것을 모르고 사용하다 피해를 보는 곳이 많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 등이 자주 언급되는 곳들이다. 113-4)


34 셀레늄: 조기를 구우며 Se


양자이론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물체가 가진 에너지를 변화시키려고 할 때 일정한 단계별로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시속 20km로 달리고 있는 자동차가 있다고 해 보자. 이 차를 운전하면서 가속 페달을 잘 밟으면 시속 22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고, 시속 25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으며, 시속 31km로 달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양자이론을 적용하면 그렇지 않다. 주변 조건에 따라 자동차의 속도를 바꿀 수 있는 단계가 정해져 있다. 시속 20km에서 더 빠르게 달리게 하면 그다음 단계인 시속 30km가 되어야만 한다. 그 사이의 단계는 없다. 반대로 더 느리게 달리게 하면 그 전 단계인 시속 10km가 되어야만 한다는 식이다. 양자점은 국내에서는 흔히 약자로 QD(quantum dot)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학자들이 양자점의 첫 번째 유용한 특성으로 꼽는 것은 에너지가 단계별로 정확히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이 특징을 잘 활용하면 정확하게 정해진 색깔의 빛만 내뿜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119)


양자점을 만들려면 고작 수십 나노미터, 그러니까 10만분의 1mm 정도밖에 안 되는 극히 고운 가루를 일단 만들어야 한다. 그런 물질을 대량 생산해서 사용하려면 그것을 끝도 없이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게 곱고 고운 가루를 오차 없이 항상 같은 크기로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양자점을 어떤 부품이나 장치에 넣어 활용하려면 양자점을 보호하기 위해 주위에 다른 물질을 살짝 발라서 씌워야 한다. 이런 작업을 핵core 주위에 껍질shell을 씌운다고 말한다. 이때 그 작디작은 가루 알갱이 하나하나마다 보호용 껍질이 제대로 씌워지지 않으면 실패다. 껍질을 씌운 뒤에는 이 알갱이들을 다른 물체에 고정하고 연결해서 쓰기 위한 일종의 갈고리나 접착제 역할을 하는 배위자ligand라고 하는 물질들을 껍질 위에 붙여 줘야 한다. 제대로 된 배위자를 만들어 고르게 붙이지 못하면 역시 실패다. 이렇게 빛을 내는 용도로 사용하는 양자점의 핵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사용되던 물질이 바로 셀레늄이다. 119-20)


35 브로민: 어묵탕을 끓이며 Br


다시마를 우린 국물이 맛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다시마 속에 들어 있는 글루타메이트glutamate 성분이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할 때 조금만 넣어도 감칠맛이 확 도는 화학조미료 중에 글루탐산나트륨monosodium glutamate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마 같은 해조류는 바닷속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몇 가지 특이한 물질이 끼어 있는 경우가 많다. 코발트나 아이오딘iodine, 요오드 같은 물질이 대표적인데, 과거에 브롬이라고 했던 브로민bromine도 해조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물질의 사례로 볼 수 있다. 완도금일수협의 특산물 안내 자료를 보면 다시마에는 브로민이 0.02~0.09% 정도 들어 있다고 한다. 매우 작은 수치인 것 같지만, 대다수 동물이나 지상 식물 몸속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양의 브로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니 고추의 매운맛이 캡사이신 덕분에 나는 것이라면, 다시마는 대략 그 정도만큼은 브로민 맛이 나는 음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24)


만약 브로민만 모은 덩어리가 담긴 병을 보게 된다면 꽤 신기할 것이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되어서 마치 핏방울 비슷하게 불그스름한 색깔을 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가지 원소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 상태가 되는 물질은 매우 드물다. 금속으로 분류되지 않는 원소 중에서는 오직 브로민밖에 없고, 금속 중에서는 수은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모든 원소 중에서 그것 한 가지만 모아 놓았을 때 저절로 액체가 되기 쉬운 물질은 브로민과 수은, 단 두 가지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특이함은 지구의 평범한 환경에서만 그렇게 여겨진다. 철이나 구리 같은 쇳덩이도 아주 높은 온도로 달구면 결국 흐물흐물 녹아서 액체가 되기 마련이고, 헬륨 같은 물질도 아주 낮은 온도 속에 집어넣으면 굳어서 액체가 될 수 있다. 즉, 어떤 물질이 액체냐, 고체냐, 기체냐 하는 것은 주변 조건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하필이면 액체 상태가 된 순수한 수은 덩어리와 순수한 브로민 덩어리는 둘 다 몸에 해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129)


36 크립톤: 포장마차 앞에 서서 Kr


빛은 전기의 힘과 자기의 힘이 서로 얽혀서 공간을 날아가고 있다. 전기장과 자기장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빛을 전자기파라고도 부른다. 빛이 가진 전기의 힘은 빛이 날아가는 동안 빛을 따라가며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이 변화는 아주 규칙적이다. 즉, 빛이 날아가는 동안 전기의 힘은 똑같은 정도로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렇게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한 번 커졌다가 작아지는 동안 빛이 날아간 거리를 파장이라고 한다. 크립톤에서 나오는 빛도 날아가는 동안에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규칙적으로 반복한다. 그리고 이 현상이 일어나는 정도, 그러니까 파장은 빛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이 현상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크립톤 원자에서 나온 그 빛이 날아갈 때 전기의 힘이 커졌다가 작아지는 반복이 한 번 일어나는 거리, 즉 파장이 얼마인지를 측정해서, 거기에 1,650,763.73을 곱하면 그게 바로 1m라는 길이가 된다. 133)


주기율표를 살펴보면 크립톤은 헬륨, 네온, 아르곤 같은 원소와 아래위로 같은 줄에 적혀 있다. 따라서 크립톤 역시 화학반응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런 원소를 비활성기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사람 주위에 있다고 해서 냄새가 나지도 않고 몸에 악영향을 미칠 일도 없다. 어떤 원소 하나만의 성질을 정확히 측정하는 실험을 할 때 순수한 크립톤을 구해 실험하면 편리하다. 특정 원자가 내뿜는 빛을 관찰하려면, 그 원자가 빛을 내뿜도록 전기를 걸거나 온도를 올려 주어야 한다. 만약 이런 실험에 화학반응을 잘 일으키는 수소 기체나 염소 기체를 이용한다면 원자가 전기나 열을 받아 빛을 내뿜기도 전에 화학반응을 일으켜 다른 물질에 들러붙으면서 엉뚱한 상태로 바뀌어 버릴 것이다. 이것이 1m를 정할 때 하필이면 크립톤이라는 낯선 물질로 실험하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크립톤은 빛이 선명하게 잘 보이고 정확하게 잘 나오는 특징까지 있다. 그래서 1m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것처럼 정밀한 실험을 하기에 좋다. 134)


# 지금은 빛이 날아가는 속력을 기준으로 1m의 길이를 정하고 있다.


37 루비듐: 곰취나물과 밥을 비비며 Rb


루비듐 중에는 방사성을 띠는 루비듐82라는 물질이 있다. 루비듐82는 보통 루비듐과는 다르게 반물질antimatter을 뿜어내는 놀라운 특성이 있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반물질은 양전자positron라는 것이다. 이 물질은 전자 제품 속을 돌아다니는 평범한 전자와 거의 모든 점에서 똑같아 보이지만, 전자가 ⊖전기를 가진 것과 반대로 ⊕전기를 가진다.  루비듐82가 뿜어내는 양전자와 정반대 전기를 띤 전자와 부딪혀 반응하게 만든다. 그러면 양전자와 전자가 서로 소멸하며 강력한 빛을 내뿜는다. 이 빛은 맨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지간한 물질을 다 뚫고 나온다. 그리고 정확히 반대인 방향으로 두 줄기 빛이 동시에 나오기 때문에 어느 위치에서 빛이 나오는지 관찰하기가 좋다. 그래서 양전자가 소멸하면서 나오는 강력한 빛을 관찰하면 그 양전자가 몸속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양전자를 내뿜는 물질을 몸에 주입하면 그 물질이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위치를 정밀하게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40)


루비듐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밝히는 데도 큰 도움을 준 물질이다. 루비듐이 금속이면서도 쉽게 녹고 잘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금속은 수천억 개의 원자들, 수천조 개의 원자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엄청나게 많은 원자의 덩어리이다. 이런 상태라면 원자 하나하나에 각각 영향을 주어야 하는 정밀한 조작을 하기가 어렵다. 원자를 하나하나 조작하려면 덩어리가 아니라 원자를 하나하나 떼어 놓은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물질을 기체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금속을 녹여서 액체로 만들려고만 해도 쇠가 녹을 정도로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하물며 그렇게 쇳물이 된 금속을 끓여서 기체로 만들기는 더욱더 어렵다. 그런데 루비듐은 쉽게 녹고 쉽게 끓는다. 그러니 어떤 작업을 금속으로 해야 하는데, 원자 하나하나를 움직여야 한다면 루비듐이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런 이유로 레이저를 이용해 원자 하나하나를 각기 붙잡고 따로 움직이는 실험을 할 때 루비듐은 단골 실험 대상이다. 144-5)


38 스트론튬: 솜사탕을 건네주며 Sr


옛날식 텔레비전의 기본 원리는 전자가 부딪히면 빛을 내는 물질을 유리판에 발라 놓고, 전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사하는 전자총을 이용해서, 유리판을 향해 전자를 이리저리 발사하는 것이다. 그 유리판을 멀리 떨어져서 보면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생긴 빛이 그림을 이루게 된다. 전자는 ⊖전기, 즉 음전기를 띠고 있다. 그래서 이런 장치를 음극관cathode ray tube, CR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옛날 텔레비전은 전자총으로 전자를 발사해서 CRT에 원하는 모양으로 빛이 나오게 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만들어 내는 장치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전자가 유리판에 부딪혀 영상을 만들어 낸 후에 문제가 생긴다. 이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전자가 충돌해서 갑자기 속력을 잃다 보면 엑스선 등의 방사선이 나온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생기는 엑스선을 흡수하거나 엑스선이 튀어나오지 못하게 방해하는 물질을 일종의 방어막처럼 텔레비전 화면에 얇게 발라야 했다. 여기에 적합한 물질이 바로 스트론튬이었다. 149)


스트론튬은 여러 방사성 물질 중에서도 특히 골칫거리로 자주 언급되는 물질이다. 정확히 말하면 보통 스트론튬보다 약간 더 무거운 스트론튬90이 문제다. 보통 스트론튬과 무게를 비교하면 88:90 정도로 약간 무겁다. 스트론튬90은 방사선을 오랫동안 꾸준히 내뿜는 점도 문제지만, 사람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커 보인다는 점에서도 걱정스러운 물질이다. 주기율표에서 스트론튬 바로 위에는 칼슘이 적혀 있다. 방사성 물질이라고 해도 몸속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몸 밖으로 나온다면 별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방사성 물질 중에는 그런 것도 여럿 있다. 그런데 스트론튬은 하필 칼슘과 성질이 비슷하고, 칼슘은 뼈에 많이 들어 있다. 그렇기에 스트론튬이 몸속에 들어오면 우리 몸은 스트론튬을 칼슘으로 착각해서 뼈를 만드는 데 칼슘 대신 스트론튬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보통 스트론튬이 아니라 방사성을 띤 스트론튬90이라면, 뼛속에 스트론튬90이 끼어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151)


39 이트륨: 양배추를 썰며 Y


스웨덴에서 광산 개발과 관련된 산업과 기술이 발전했던 역사는 주기율표에도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트륨yttrium이다. 스웨덴의 이테르뷔Ytterby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돌에서 나온 원소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현대에 희토류로 분류되는 광물들은 이테르뷔에서 발견된 이트륨과 비슷한 물질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들어맞는다. 주기율표에서 이트륨 바로 위에 적혀 있는 스칸듐과 이트륨 바로 아래 칸 근처에 있는 란타넘lanthanum이 대표적인 희토류이기 때문이다. 란타넘의 경우에는 주기율표 모양이 그 근처에서 확장되는 형태로 바뀌기 때문에 정확히 이트륨 바로 아래 칸에 적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트륨과 같이 엮기에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란타넘과 비슷한 점이 있어서 란타넘족 원소라고 분류하는 네오디뮴neodymium, 디스프로슘dysprosium 등 여러 원소까지 모두 합쳐 희토류라고 부른다. 그러니 화학 발전의 역사에서는 이트륨이 희토류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155-6)


흔히 야그 레이저라고도 하는 YAG 레이저는 Y, A, G 세 가지 물질을 주성분으로 하는 레이저 발생 장치를 말한다. 여기서 Y, A, G는 각각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garnet을 가리킨다. 레이저는 빛과 물질 속의 전자가 서로 독특한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을 이용해 특수한 빛을 내뿜는 것을 말한다. 자연 상태의 빛은 여러 성질이 섞여 있고, 진행하는 동안 사방팔방으로 퍼져 버린다. 이와 달리 레이저는 빛의 성질이 잘 가다듬어져 있으며, 잘 퍼지지 않고 일직선으로 곧게 뻗어 나간다. 이런 빛을 만들려면 물질 속에 들어 있는 전자를 잘 조정해야 한다. 원하는 색깔의 빛이 생기도록 전자가 특정한 속력으로 움직이고 적절한 힘을 받으며 돌아다니게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과학자들은 온갖 물질을 조합해 보다가 이트륨, 알루미늄, 가닛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놓으면 그 물질 속을 돌아다니는 전자들이 레이저로 쓰기에 좋은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YAG 레이저가 실용화되면서 다양한 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156-7)


40 지르코늄: 과자 봉지를 뜯으며 Zr


촉매 연구는 화학에서 가장 마법 같은 분야다. 원래는 안 일어날 화학반응을 촉매를 써서 일어나게 만들면 그야말로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설탕물을 많이 먹으면 살이 찐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화학의 눈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대단히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다. 설탕이라는 별것 아닌 재료가 어떻게 사람의 살이라는 귀중하고 복잡한 물질로 변하는 것일까? 설탕물 1kg을 주면서 그것으로 사람 살 1kg을 만들어 보라고 하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일으키라는 요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일어난다. 촉매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과학자들은 지르코늄이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화학반응을 어느 정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단, 주변을 뜨겁게 만들어야만 이런 반응이 일어난다. 이 말은 연료를 사용해 불길로 주변을 뜨겁게 덥혀 주어야 수소가 생긴다는 뜻이다. 지르코늄의 이 반응 때문에 후쿠시마에서 커다란 사고가 발생했다. 163-4)


지르코늄은 중성자와 반응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 때문에 중성자가 많이 돌아다니기 마련인 원자로 내부에 들어갈 재료로 지르코늄을 사용하는 일이 많다. 평상시라면 이것은 매우 좋은 생각이다. 원자로에서는 중성자를 잘 조절하여 원하는 만큼 핵반응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기에 지르코늄 재료를 이용하면 중성자 조절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므로 안전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고 후 온도가 1,200℃에 가까워지자 지르코늄이 물과 반응해 수소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지금은 물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반응을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높은 온도라는 조건이 갖춰지자 지르코늄은 아무도 바라지 않는 수소 생성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 안전을 위한 방어 판 같은 용도로 넣어 두었던 지르코늄이 이런 비상 상황에서 오히려 수소라는 불쏘시개를 잔뜩 만들어 낸 셈이다. 수소가 좋은 연료라는 말은 기본적으로 불이 잘 붙는 물질이라는 뜻이다. 결국, 수소는 불이 붙어 폭발을 일으켰다.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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