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한국근대문학 번역총서인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출간된다고 한다. 1차분으로 세 권은 이미 나왔고, 전 16권이 2009년말 완간예정이라고. 우리의 경우에도 사실 일본근대문학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소개된 것 아니기에 이웃나라의 '뒤늦은' 관심을 그렇게 타박할 필요는 없겠다. 기획자들의 지적대로, 한국어 정본 확정 작업도 다 마무리하지 못한 형국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이 참에 우리 근대문학에 대한 텍스트비평 작업도 활발히 진행시키면서, 외국에서의 한국문학 소개현황에 대한 관심도 좀 가질 필요가 있겠다. 가장 가까운 나라의 형편이 이러하므로 다른 나라들의 사정은 안봐도 훤한 것 아닐까. 더불어, 국외의 한국문학 연구자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책도 마련했으면 좋겠다. 문학도 그렇지만 문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한겨레(07. 02. 13) “한국어 배우는 학생 많은데… 제대로 번역된 소설 없어 나섰어요”

한국 근대문학의 대표작들을 일본어로 옮기는 체계적인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오무라 마쓰오 와세다대 명예교수와 호테이 도시히로 와세다대 교수(국제교양학부)가 기획·편집을 맡은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가 그것이다. 오무라 교수는 중국 연변의 윤동주 묘를 처음으로 확인한 이로, 일본 내 한국문학 연구의 대부로 일컬어진다. 호테이 교수는 김윤식 교수의 방대한 저작 목록을 최초로 완벽하게 정리함으로써 국내 학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화로 유명한 이다. 이달 하순 서울대 졸업식에서 <초기 북한 문단 성립 과정에 대한 연구 ­ 김사량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이다.

지난 2002년 호테이 교수의 제안으로 시작된 조선근대문학선집 시리즈에는 두 사람의 기획자를 포함해 일본 내 한국 현대문학 전공자 대다수가 참여한데다 일본 굴지의 출판사인 헤이본샤를 출판 파트너로 삼음으로써 명실공히 일어판 한국 문학 선집의 결정판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05년 11월 이광수의 <무정>(하타노 세츠코 니가타단기대학 교수 옮김)이 첫권으로 나온 데 이어 강경애의 <인간문제>(오무라 마쓰오 옮김)가 지난해 5월에, 그리고 합동 소설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시라가와 유타카 규슈산업대 교수 등 옮김)이 9월에 나왔다. 호테이 교수가 번역을 맡은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올해 5월에 나올 예정이며, 염상섭의 <삼대>, 이기영의 <고향>, 두 권으로 축약한 홍명희의 <임꺽정>, 그리고 김동인 단편집과 시선집 등을 포함해 모두 16권으로 2009년 말 완간될 예정이다.

“그동안 일본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은 주로 단편소설들이었습니다. 그나마 비전공자들이거나 일본어에 서툰 한국인들이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고 중역도 많았죠. 이광수의 <무정>조차 제대로 번역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희는 장편소설들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문학의 일본어판 결정본을 만든다는 각오로 번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도쿄에서 만난 두 기획자의 말에서는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아울러 자부심도 넘쳐났다. “꼭 한국문학 전공자는 아니더라도 한국학을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 한국과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데 소설 읽기는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제대로 된 일본어 텍스트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지요. 이번 선집 발간은 학교에서 쓸 교재를 저희 스스로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즈음 한국에서 일본 소설들이 이상 열기를 띠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일본 내에서 한국문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해방 이전 작품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 사정을 반영하듯 이번 선집 출간은 번역자들 쪽에서 한 권당 200만엔씩의 제작비를 출판사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리는,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어느 일본 여성이 상당액을 희사해서 우선은 작업에 착수했지만, 16권이 모두 차질 없이 발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쪽의 지원이 절실한 형편이다. 두 사람은 이에 따라 다음달께 한국문학번역원에 지원 신청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제가 근무하는 와세다대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모두 1700명이 넘는데 전임 교수는 달랑 저 한 사람입니다. 2년 임기인 한국인 객원교수가 두 사람 있고, 나머지는 시간강사들이죠. 한국 정부나 기업 쪽에서 교수 충원이나 한국문학과 개설을 위한 지원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와 함께 이들은 한국 쪽 연구자들과 출판사들이 한국문학의 정본 확정에 조금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가령 윤동주의 시집이 그동안 수십 수백 종이 나왔을 텐데 그 가운데 윤동주 자신이 남긴 육필 원고와 일일이 대조를 하고 낸 게 몇 권이나 될지 의심스럽습니다. 윤동주만이 아니죠. 번역을 걱정하기에 앞서 한국어로 된 정본을 확정하는 게 우선돼야 하지 않겠습니까.”(도쿄/글·사진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7. 02. 12-13.

 

 

 

 

P.S. 말미에 한국문학 '정전' 확정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사실 그간에 우리의 연구 역량에 비해서 관심이 소홀했던 게 아닌가도 싶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 나온 게 불과 몇 년전, 또 원전 비평에 근거한 <윤동주 전집>(문학과지성사, 2004)이 나온 게 또 불과 몇년 전이기 때문이다. '조선근대문학 시리즈'가 어떤 텍스트들을 번역대본으로 작업하는지 모르겠지만 '텍스트 확정' 문제마저 외국의 연구자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연구용이 아닌 보다 대중적인 차원의 정본 확정도 중요하다. 문학과지성사의 한국문학전집 같은 게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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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3 0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한국문학 전공자로서, 기분이 과히 좋지는 않네요. 현실적으로 '우리'가 돈을 대야지 번역이나 국문과 '자리'가 생긴다는 것이 그렇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한국에 대해 별반 관심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민족주의적인 감상이라기 보다는, 파워 차이와 약소국이라는 권력관계가 문화관계에도 정확히 반영된다는 것.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의 가해자 중 하나인 우리 작가들이 베트남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심이 증폭되고 반성되기를 바랍니다.

로쟈 2007-02-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분이 나쁘더라도 당연한 현실이죠. 문학도 국력에 비례하니까요. 지난 연말에 한 학회에 가보니까 (재일교포나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한국문학사는 한권도 없다더군요. 거기에 비하면 러시아에서는 지난 60년대말에 이미 <한국문학사>가 나오고 2004년에 개정판이 나왔었습니다.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이 맞는 거 같습니다...

기인 2007-02-14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력과 같은 파워 문제가 아니라,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국문학에 대한 관심 또는 윤리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대한 관심으로 제 생각이 나아간 것이고요 ^^; 일종의 '인간'이라면 그래야 한다, 혹은 '인문학'의 의무 같은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일본의 인문학도가, 조선 식민지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면, 한국문학 전공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너무' 피해가는 것이 '인류' 차원에서 답답하다는 의미입니다.

로쟈 2007-02-14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민주의'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호하며 어려운 문제 같습니다(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식민주의'의 연장선으로 보시는 건가요?). 이게 관심을 '가져준다' 같은 시혜적 차원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요. 더구나 그게 비단 베트남 문제에 국한되는 게 아니며, 소위 '내부 식민지'로서의 전라도 문제부터 성차화된 식민지로서의 '여성' 등 안 걸리는 게 없는 문제인 듯싶어요...

기인 2007-02-1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안 걸리는게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져주는'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언명령에 의해서!)
 

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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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tournelle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자입니다. 리라이틸 -> 리라이팅

로쟈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인 2007-02-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저도 진은영 시인 이 시집 잘 읽었는데, 어느새 박사학위도 받았다니! 역시 공부하느라 창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명이군요.
 

지난 2일 세상을 떠난 오규원 시인의 장례식이 엊그제 강화도 정족산에서 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를 옮겨놓는 것으로 추념을 대신한다.

중앙일보(07. 02. 06) 시인 오규원, 소나무 아래에 잠들다

소나무 가지가 흔들린다. 바람 한 줄기 불어온 모양이다. 시인 오규원이 갔다. 강화도 정족산 기슭의 소나무 아래에 묻혔다. 이름하여 수목장(樹木葬). 시인의 뼛가루는 송진이 되고 가지가 되었다가, 이윽고 솔방울로 매달릴 것이다.

5일 오후 2시쯤. 산비탈 소나무 숲에 고인의 옛 제자들이 두 손 모아쥐고 둘러섰다. 이창기.이경림.신경숙.황인숙.윤희상.장석남.박형준.양선희.최정례.이원.강영숙.천운영.윤성희.조용미 등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제자들이다. 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 들으며 시를 깨우친, 이제는 어엿한 시인과 소설가가 된 제자들이다.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들'('프란츠 카프카' 부분)이다.

평생의 절반을 알고 지낸 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병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추모시를 읽었다.

'문득 돌아보니,/규원이, 자네가 없네./둘러보아 찾아도/규원이, 자네가 없네./…/규원이, 자네/이제 무엇이 되려는가./여기로부터 자리 옮겨/어디로 가려는가./…/나무 한 가지의 정령이 되어/영원의 하늘로 솟아 날아오르려는가/그것이 허망한가/그것이 슬픈가, 한스러운가.'

시인은 1991년부터 아팠다. 흔히 폐기종으로 알려진, 만성폐쇄성폐질환이란 희귀병을 앓았다. 허파가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는 기능을 잃어 인간이 누리는 산소의 20%만으로 살아야 하는 병이다. 하여 강원도 인제.무릉, 경기도 양평 등 공기 맑은 곳에서 귀한 숨 아껴가며 시 쓰고 살아왔다. 지난달 숨이 가빠왔다. 병원에 입원했고, 병문안 온 시인 이원의 손바닥에 선생은 손톱으로 시를 썼다.

'한적한 오후다/불타는 오후다/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1월 21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2월 2일, 시인은 66세의 일기를 마감했다. 병문안 왔던 이경림.최정례.양선희는 졸지에 선생의 임종마저 보게 됐다. 추모사에서 신경숙은 "그렇게 편찮으신 대로, 그렇게 늘 곁에 계실 거라고만 생각했다"고 겨우 말했다.



고인은 한글세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한국 시사에서 오규원이란 이름은 자체로 하나의 계보였다. 수다한 제자 때문이 아니다. 그가 평생토록 쌓은 시업(詩業), '날이미지의 시론' 때문이다.

'주체중심, 인간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서 그 관념을 생산하는 수사법도 배제한, 그러한 상태의 살아 있는 이미지들을 시에 구현하는 것, 그것이 날[生]이미지 시이다.'('날이미지와 시'에서, 2005년)



인간의 관념이나 수사 따위로 오염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그는 추구했다. 그래서 시창작실습 시간, 제자들이 밤새 쓴 습작원고에 시뻘건 줄 죽죽 그으며 "시가 되지 않는 것은 버려라" 호통쳤던 것이다.

그렇다고 늘 무섭게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수업 끝나고나면 선생은 막역한 친구가 됐다. 맞담배를 폈고, 후루룩 함께 라면을 들이마셨다. 87년 제자들이 길거리로 나가겠다고 결의했을 때, 선생은 "막는 것은 옳지 않겠지, 다치지만 말아라…"고 말했다.

강화도 시인 함민복은 꾹꾹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집안이 어려워 공장에서 학비를 번 뒤 늦깎이로 선생의 제자가 된 시인이다. 굳이 서울예대를 선택한 까닭을 그는 "오규원 선생이 계시잖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오규원 선생이 하필이면 떠돌이 시인이 정착한 바로 그 섬에 묻히고 있었다. 선생의 제자 문인들은 그래서, 농반진반으로 그를 능참봉으로 명했다. "선생을 평생 곁에서 모시게 됐다" 했더니 "이제부터는 바람소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겠지요"라고 답한다.

소나무 가지, 또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손민호 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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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오규원 선생님 돌아가신 소식도 모르고 있었네요...

로쟈 2007-02-0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계 소식도 바로 올렸었는데...
 

제목은 좀 거창하지만 내용은 '문예지 휴간, 폐간 잇따라'란 부제에 그대로 들어 있다. 뜻밖인 건 지난 겨울 창간 5주년 기념호를 낸 <문학판>이 무기한 휴간을 결정했다는 소식인데, 그 기념호에 5주년을 기념하며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기대한다고 한 여러 편의 축사를 읽은 나로선 좀 황당하기까지 하다. 내부사정이 갑작스레 악화되었을 리는 없고 '기념호'란 게 마지막 불꽃놀이였나 보다. 물론 폐간은 아니지만 당분간도 아닌 '무기한' 휴간이라니. <비평과 전망>이 소식이 뜸한 지는 오래이고 <문학과 경계> 또한 인공적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는 게 문예지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문학잡지가 너무 많다. 더불어, 계속 창간된다. 그리고 폐간된다. 일설에는 작가/필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으로 (적자를 감수하고) 잡지들을 발간한다고 하는데, 그러한 단행본 출판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문예지가 시장에서 생존/자립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이러나저러나 여건이 그러하다. 변신하거나 전사하거나, 선택지는 많지 않은 듯하다.

 

컬처뉴스(07. 02. 06) 담론의 공간이 불안하다

도서출판 열림원에서 내고 있는 계간 문예지 『문학판』이 최근 재정적 어려움으로 무기한 휴간을 선언했다. 소장 평론가들이 주축이 돼 지난 1999년부터 의욕적으로 발행해왔던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 역시 사실상 폐간 상황에 처해있으며, 계간 『문학과경계』는 재정난으로 ‘2006년 겨울호’를 내지 못하다가 뒤늦게 편집인과 문인들이 십시일반 재원을 마련해 최근 겨울호를 발행했다. 

지난 2001년 겨울호로 창간된 계간 문예지 『문학판』은 ‘문학의 상업화에 맞선다’는 기본 취지 아래 대중적 감각과 지성적 이해를 결합시키며 평단에서 소외된 신인작가의 전위적 작업을 부각시키겠다는 포부로 시작됐다. 지난해 겨울호까지 통권 21호를 출간했으나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무기한 휴간을 결정한 것이다.

반년간지 『비평과 전망』은 2000년 이후 문단을 달군 ‘문학권력 논쟁’의 복판에 섰던 문예지로, 이명원, 고명철, 홍기돈, 엄경희, 최강민, 오창은 등 소장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현장비평의 장을 열었지만 역시 재정적 어려움으로 통권 9호(2005년)에서 멈춰있다.

통권 23호까지 나온 『문학과경계』는 ‘진보 담론의 새 공간을 제공하자’는 모토 아래 이진영 시인이 지난 2001년 가을 사재를 털어 창간한 잡지다. 지난해 가을 이진영 사장의 건강이 나빠지고 잡지사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부득이 폐간신고를 내기도 했지만 잡지를 이어가지는 데 뜻을 모은 편집인들과 문인들의 도움으로 뒤늦게 겨울호를 낸 것이다(*알라딘에는 21호까지만 올라와 있다).

과거 ‘문예지’는 신인작가 등단의 장이자 문학논쟁의 전초기지로 문단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또 87체제 이후에는 군부에 의해 폐간되거나 휴간됐던 문예지들이 복간되면서 폭발적으로 ‘문예지’가 활성화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90년대 들면서 ‘한국문학의 위기’가 공공연해지고 외국문학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내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예지에 대한 관심은 급격히 낮아졌다. 또 출판의 상업화와 물리면서 규모 있는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있는 문예지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으나 독자층의 감소와 함께 재원 마련이 어려워진 독립적인 문예지들은 문예진흥기금에 의존하거나 자체조달 방식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앞서 언급한 문예지들처럼 휴간하거나 폐간에 이르게 된다.

『비평과전망』 편집주간인 이명원 평론가는 “문학매체 안에서도 문학권력과 같은 카르텔구조가 성립되면서 자본을 동력으로 작가를 포섭하고, 작가들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결국 마이너 매체들도 출판시장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메이저 매체들의 방식을 따라가게 되고, 마이너 매체들이 메이저와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독자적 시각을 펼치는 독립매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재원구조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하지만 어디서?). 하지만 현재의 출판시장에서 작품출판과 분리된 독자적 매체가 재원을 마련할 길이 막막한 것도 사실이다(*그런 의미에서 문예지 또한 지극히 기생적이다. 고상한 발언과 주장들을 앞세움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러한 배경에는 문예지와 대형 출판사 간의 ‘공조’로 창작과 비평의 폐쇄적인 순환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독립 문예지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진 측면도 있다.

기존 문예지와 ‘차별성’을 내세우며 등장한 독립 문예지들이 이 같은 출판시장의 거대 자본에 휩쓸리면서 방향을 잃고, 소멸되어가는 모습들이 오늘 우리 문학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고 안타깝다(위지혜 기자).

겸사겸사 기사에서도 거명된 <비평과 전망>의 편집주간 이명원 평론가의 인터뷰 기사를 덧붙인다(며칠전 'TV, 책을 말하다' 이문열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컬처뉴스의 신년인터뷰 연재 중 한 꼭지였는데, '담론의 공간'뿐만 아니라 직장(=밥통의 공간)마저 불안한 시대를 문학평론가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잠시 들여다 볼 수 있다.

지난해 서울디지털대 교수로 재직하다 학내 비리를 비판해 해직된 이명원 문학평론가

컬처뉴스(07. 01. 11) 집단적 '희망' 상실을 뛰어넘어야 한다

<컬처뉴스> 신년인터뷰 네 번째 손님은 이명원 전 서울디지털대 교수이면서 문학평론가다. 굳이 ‘전 디지털대 교수’의 직함을 사용한 것은 지난해 이 평론가가 재직했던 서울디지털대학교는 학내 비리를 비판해 온 이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킴으로 이 평론가에게 ‘해직교수’라는 영광의(?) 명찰을 달아줬기 때문이다.

대학 측은 이 평론가의 재임용 탈락 사유로 “이 교수가 학내 인터넷 게시판에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올렸고, 언론매체에 쓴 칼럼을 통해 학교의 명예를 훼손한 해교행위를 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불법행위를 한 학교가 그 시정을 요구한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은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물론 스스로 비판적 지성의 무덤임을 인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평론가는 현재 대학을 상대로 ‘소송’ 중에 있다. 그를 만나 이번 해직 문제에 대한 심경과 올 한해 계획들에 대해 들어봤다. 

<컬처뉴스> 독자들에게 신년 인사 한마디 부탁한다.
 
올 한 해에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 의미 있게 충전되는 날들이 지속되기를 기원한다.

지난해 서울디지털 교수 해직 문제로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사건이었는지 간단히 설명해 달라.

재직했던 대학에서 2006년 한 해 동안 대학 정상화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일련의 상황이 전개됐었다. 2005년 부총장에 의한 교비횡령 사태의 ‘후폭풍’이었던 셈이다. 대학운영의 투명성과 민주화를 요구한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의 총장 불신임 선언 이후, 대학에 대한 감사를 촉구했었고, 사이버대학의 근거법률을 일반대학과 마찬가지로 고등교육법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법률 개정 운동도 있었다. 대학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에 대한 재계약거부와 중징계를 단행했고, 현재도 징계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교수협의회 회원이었던 나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재임용에 탈락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은?

서울 서부지법에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이와는 별도로 지위확인 가처분 소송을 제기했다. 가처분 소송 1심에서는 패소했는데, 패소의 근거가 현행 법률상으로는 사이버대학 교수의 경우는, 고등교육법에 규정된 교원의 권리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가처분 소송의 경우는 고등법원에 항고해서 계류 중이고, 현재는 서울서부지법에서 본안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1월 26일에 공판이 예정되어 있으니 3월 안에는 판결이 날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착잡한 상태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서는 많은 대학교수들이 학내분규 과정에서 징계와 해임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의 대학사회가 민주적 언로를 차단당하는 시대착오적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지성의 위기가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체감을 하고 있는 중이다.

동감한다. 개인적으로 새신랑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일이 터져 걱정스러웠다. 혹 결혼생활에 지장은 없나?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재임용에 탈락했다는 이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그때는 잘못 도착한 속달우편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런 상황 자체가 나의 일상에 치명적인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반대로 나는 이런 상황을 거치면서, 사유하는 일과 경험하는 일의 차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실직을 하고 보니까, 또 계약제 교수의 현실을 몸소 체험해 보니까, 노동유연성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인지 또한 지성의 독립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예를 들면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관료제의 불합리성, 지식생산 구조의 허약성을 머리로 생각한 수준이었는데, 뭐랄까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체화된 고민을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불행한 상황이긴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문학에 대한 사유를 깊이 있게 하는 안식년이다’라고 낙천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 좋은 지식인들은 다들 ‘파문’의 주역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나의 ‘스스로 힘내기’의 방식이다.

처음에 이 평론가의 ‘해직’ 소식을 듣고 ‘고난의 지식인’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하고 축하했던 것으로 떠오른다. 여전히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문학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지난 2006년도 ‘문학의 위기’에 대한 논란이 뜨거웠다. 현장에 몸담고 있는 평론가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인의 입장에서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문학의 위기라기보다는 더 넓게는 문화예술의 전면적인 위기인 듯하다. 크게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문화의 게토화 현상 때문이겠지만, 시민들이 이른바 삶에 대한 느린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을 향유할 만한 여유를 상실해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 같다. ‘희망이 없는 가난’도 참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지금보다 절대적으로 가난했던 과거에 문학을 포함한 예술적 성찰에 시민들 자신이 치열하게 몰입했던 것을 보면, 현실에 대한 시민들의 집단적인 ‘희망’의 상실이야말로 문화예술 위기의 주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를 포함한 문인과 예술가 자신의 이완된 작가의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쓴다는 행위, 창조한다는 행위에 대한 자기화된 예술론을 어쩌면 우리 스스로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닌가. 또 공적 소통 체계 안에서의 문화예술의 존재근거에 대한 근원적인 고민이 약화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자동화된 글쓰기와 예술행위에 나르시시즘적으로 몰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들곤 하는 것이다.

문학의 위기를 넘어 문화예술 전면적인 위기를 말했는데, ‘위기’의 원천에 대해 ‘비평이 제 구실을 못하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아웃사이더 비평계의 주자로서 ‘비평’의 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비평 역시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다양한 해석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그것들이 독자들에게는 지식인들의 ‘은어체계’처럼 느껴지는 듯도 하다. 내 생각에는 한국 문학비평이 ‘육성의 언어’를 상실해가고 있는 것이 위기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제되고 발랄한 언어감각은 있는데, 그것이 비평가 개인의 삶과는 무관한 층위에서 개념어들의 홍수로 귀착되고 있는 듯한 감도 있다. 비평 역시 매력적인 읽기의 풍속이 가능해야 할 텐데, 그 점에서 읽히면서도 감동적인 비평적 형식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기' 속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올 한 해 문학계에 바라는 점이 있는가?

작은 글쓰기도 좋지만 큰 의제를 생산해내는 젊은 작가들이 출현해 주었으면 좋겠다. 1970년대에는 황석영이나 조세희, 최인훈, 이청준 같은 청년 작가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문인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오늘의 젊은 문학은 과연 성숙한가. 나는 이 점에서 약간 회의적이다. 작가들이 나의 회의를 불식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올해 계획하는 일이나 준비하고 있는 일이 있다면 말해달라.

2007년은 중요한 해가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을 좌우의 진영과 무관하게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볼 생각을 하고 있다. 한 언론사에서 그런 기획을 비공식적으로 제안한 바 있는데, 생각해 보니 흥미로운 기획처럼 느껴졌다. 물론 아직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국문학자로서 본연의 연구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2006년 한해는 이런저런 복잡한 삶의 형국 속에서 공부다운 공부를 못했다는 생각인데, 2007년은 좀 달라져야겠다. 내가 속해 있는 민족문학연구소나 포럼X와 같은 연구모임을 중심으로 좀더 성실한 연구자와 비평가의 자세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든다. <비평과전망>의 진로에 대해서도 사실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과감한 해체냐 아니면 후배세대로의 이월이냐 이런 고민이다. 또 한 가지는 과거에 몇 권의 책을 낸 바 있는데, 2007년에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책의 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방학 동안에 책을 한권 쓸 생각인데, 원고가 끝나봐야 알 것 같다.

2007년, 우리 사회에 대한 새해 희망이 있다면?

진보적 지식인 사회의 이완과 무력감이 커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나와 같은 세대인 30대 중후반의 젊은 지식인들이 한국사회의 진보적 대안을 만들기 위한 공동체를 구성해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에 비하자면 연대의 경험이 미약하고, 사회적 실천에서 다소 소극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또 과거처럼 한 시대의 의미 있는 지적 담론을 생산해내는 데 다소는 방관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포스트 386 어쩌구 하는 표현을 들을 때면, 사실 이게 무슨 세대개념이냐 하는 생각도 드는데, 그것이 문학이든 또 어떤 것이든 일단 장르나 실천의 장을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민해 보는 그런 장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정리 위지혜 기자) 

07. 02. 07.

P.S. 비슷한 연배인 탓에 생각하는 나로선 공감하는 바가 많다(칠공년 개띠면 동생뻘이긴 하지만). 차이라면 평론가가 훨씬 진지하다는 것 정도(나는 대개 반어적이다). 관심있으신 분은 문학평론가 이명원과 퍼슨웹과의 인터뷰 http://www.personweb.com/sub10/lee_mw/ymw1.html 도 읽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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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07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사실 시장에 의존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죠. 저 같은 전공자 또는 지망생도 계간지 2개 월간지 1개 겨우겨우 보는 것이 고작인데.. 나머지는 중요한 글 실리지 않으면 안 보고, 볼 수도 없는데. 도서관들이 많이 구입해주고 그러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많을 필요가 있나, 어떻게 각 문예지들은 구분되는지를 다시금 반성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비80 2007-02-07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배 위지혜 기자가 선배 이명원 평론가를 인터뷰 했군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의 이야길 보니까 더 헛헛한 느낌입니다. 얼마 전 이명원 선배 담배 피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이긴 했습니다. 그래도 저렇게 씩씩하게 생각하시니 다행입니다.
계간지가 너무 많다고 하나 둘만 남기자면 쉽게 <창비>나 <문지>정도만 떠올릴텐데 그것도 문제가 되겠지요. 소장 평론가들이 의욕적으로 책을 묶어도 1000부 밑으로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자본의 입장에서 그걸 연명시키는 것도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겁니다. 군소 계간지들이 기존의 담론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전초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근본적인 자구책이기도 할테고요. 기인 님이 말씀하신 구별짓기 전략도 염두에 두어야겠지요.

니브리티 2007-02-08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판의 내부사정은 3년전부터 안좋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열림원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데까지 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좀 우울한 소식이네요. 등단 후 1년반만에 첫 청탁을 받은 곳도 문학.판이었고, 첫 소설집을 낸 곳도 문학.판이었고, 계절마다 뒷풀이할 때는 꼬박꼬박 참석했던 곳도(물론 불러줬기 때문이지만) 문학.판이었는데 말이죠. 그래도 <한국문학>처럼 휴간과 재출간을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나오는 곳도 있으니 조만간 재출간되리라 기대합니다. <문학과경계>에도 제 후배가 편집위원으로 있어서 사정은 잘 아는데, 어쨌든 겨울호는 서점에서는 구하기 힘들지 싶습니다.... 이 상태면 문예지가 문학생산을 담당하던 때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네요. 장기적으로는 일본처럼 <장편/단행본 시장>과 <동인지>체제로 구분되지 않을까요. 전자는 일단 팔리는 쪽에 무게를 실을 것이고, 후자는 문학성(?) 위주로 말입니다...

로쟈 2007-02-08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었군요. 대개 또 위기가 기회이기도 하니까 좀 다른 방식의 '생존'이 모색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배를 뒤집는 건 중국어에서 '번신'이라고 하던데, 번신하거나 변신하거나...
 

오마이 뉴스에 실린 소설가 황석영의 기고문을 옮겨놓는다. 작가는 얼마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 총대 멜 생각있다”는 발언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었다. 개인적으론 6월쯤에 그의 <오래된 정원>에 대해 강의도 예정돼 있어서 관련자료들을 모아야 될 형편인데 유익한 참조물이 되겠다. 물론 작가의 '총대'는 올 12월에 가서야 보다 확연한 윤곽과 결말이 드러날 듯하지만...

오마이뉴스(07. 02. 05)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지난 1월 2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새 정치질서 만들기에 나라도 총대를 멜 생각이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습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1230809551&code=910100). 그는 왜 작가로서 얼룩이 튀는 것을 감수하고서까지 이런 선언을 했을까요? 현재 프랑스 파리에 체류중인 황석영씨가 그 배경을 밝히는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왔습니다. 그는 다섯 번의 변화를 겪은 자신의 사상 편력에 대해 말하면서, 현재 우리 상황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 논란이 된 '민족문학 작가회의'의 명칭 변경 논란에 대해서도 의견을 밝혔습니다.<편집자 주>

1. 나는 뭐냐

나의 글쓰기와 사상적 편력의 길을 세밀히 밝히는 일은 독자들에게도 지루한 것이 될 테지만 방향 전환의 모퉁이를 몇 대목 회상해보는 것은 어떨지.
나는 청소년 시절에 문단에 어정쩡하게 나오고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발표하게 될 때까지 그야말로 '문예반'으로서 내면을 파고드는 탐미적인 습작을 했다. 군에 입대하여 해병대로 베트남 전장을 다녀온 뒤에 사회라든가 역사라든가 하는 것들에 눈을 돌렸다. 이것이 첫 번째 변화였는데 의식이 들고 나서 작품을 쓴 내용은 그 전에 아무 생각 없이 남도를 떠돌며 겪었던 체험들을 스스로 자각해가는 과정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이 <객지>라는 나의 체험으로 각색되었고, 평자들은 여기서 민중문학이라는 개념을 발견해냈다. 내가 공장 취업과 농촌 하방을 하면서 유신시대를 향하여 격문을 쓰듯이 <장길산>을 썼던 것은 일제시대에 벽초가 <임꺽정>을 쓰던 경우와 비슷했다. 이 기간에 나는 뒤늦게 기층민중이라는 당시의 사회과학적 단어가 아닌 살고 먹고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전위냐, 현장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을 때에 당시의 많은 벗들은 각자의 길을 택하여 시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작가였으므로 당연히 가장 문제가 많다던 전라도로 하방했다. 그리고 김지하가 투옥되면서 나에게 떠넘겨준 현장 민중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피의 광주를 겪는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였던 셈이다. 당연히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 우편향이 강요되었으므로 좌편향이 시작되었다. 문예 각 장르의 헌신적인 선전 활동은 광주를 알리겠다는 뜨거운 전제가 있었지만 예술성은 스스로 포기해야만 되었다. 우리는 기꺼이 각자의 재능을 반납하고 한때의 시사적 문제들을 다루는 마당극 대본이나 노래 만들기나 성명서 작성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필름, 판화 등을 제작해냈다.

광주항쟁을 알리는 보고서를 편집·기록한 뒤에 구속되고 당국의 종용에 의하여 베를린에서 초청받은 '제3세계 문화제'에 참석했다가 유럽과 미주, 일본을 1년여 동안 유랑하게 된다. 이것이 세 번째 변화의 계기였다. 바깥에서 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또 다른 '자아'를 발견했던 것이다. 군사독재에 반대하며 오랫동안 반한 인사로 해외에 망명 중인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만났다. 그리고 북은 수만리 타국에서 오히려 지척이었다.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간신히 얻게 된 직접선거의 기회였지만 양김씨의 분열로 쓰라린 좌절을 겪은 뒤에 기력을 회복한 민주화 운동 진영인 노동자, 농민, 빈민, 교사, 학생, 재야 운동권은 드디어 '전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걸만큼 성장했고, 이들 '전씨5형제'의 연합적 집행부는 물밑에서 논의했다. 그동안 군사정부는 민중의 민주화 열기가 고조될 때마다 북을 빌미로 삼아 각종 간첩단 조직을 조작하여 탄압했다.

노태우의 7·7선언을 계기로 '자주적 민간교류'가 공공연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문익환 목사와 나의 방북이 결정되었고 나는 순순히 긍정했다. 순진하기도 하여라! 나는 그 길이 십여 년이나 걸릴 고행의 길이었다면 솔직히 스스로 조직했던 민예총을 탈퇴하고 입산수도의 길이라도 떠났을 것이다. 그저 귀싸대기 몇 대 맞고 끝날 줄 알았다고나 할까. 내가 북에 가서 경험한 것은 몇 번 밝혔지만 '감동과 절망'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일구어낸 우리 백성의 '생활력'에 감동을 받았고 한편으로는 그 물샐 틈 없는 '통제'에 절망했다.

베를린에 거처를 정하고 있던 무렵에 국내에서는 나의 방북을 결정하고 지지해주었던 벗들이 뒤늦게 제도 정치권에의 입문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다. 나는 마치 헹가래를 받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 경기장에 불이 꺼지고, 선수와 관객들도 모두 사라진 어둠 속에 홀로 누워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곧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날 장벽에서 쏟아져 나오던 동베를린 시민들과 환호하던 서베를린 시민들이 뒤섞인 축제의 광장에서 혼자 울었다. 뼈저린 외로움 속에서 나는 빛나는 개인을 발견한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변화였다.

그리고 뉴욕을 떠돌다가 들어와 투옥되어 5년을 보내면서 나는 감옥의 독방 속에서 뒤늦게 일상을 배운다. 그것이 다섯 번째 변화다. 나는 출옥 이후 지금까지 형식으로서의 '자아'와 현실과 내용으로서의 '세계'를 연결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추구해 오고 있다. 나는 저 떠들썩한 우여곡절 속에서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리기는 했다. 나는 이미 노인이지만 상상력은 아직도 푸르게 젊다고 자부하고 싶다. 그리고 내가 '직업작가'라는 프로 의식을 더욱 강력하게 유지하고자 한다.



2. '총대를 메겠다'는 뜻에 대하여

지난 1월, 3주 동안 서울에 체류하다가 31일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하루도 안 되는 동안에 획기적인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세상이다. 나는 세계체제 전환기의 작가로서 현재의 해외 체류가 나에게 주는 여러 가지 유익한 점들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나 자신과 한반도로부터의 거리는 더 냉정하게 자신의 문제를 돌아보게 했으며, 세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해준 기간이었다.

파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어떤 때에는 서울보다도 더 번거로운 사교장으로 변하기도 한다. 서울에서는 만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십여 년 만에 연락을 해오는 때도 종종 있다. 런던에 체류할 적부터 옛 벗들이 찾아와 많은 걱정거리를 쏟아 놓았다. 지난 삶을 돌아보는 회한과 시대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며 무력감 따위들이었을 것이다. 작년부터는 주위의 후배들도 여러 가지 걱정들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뭔가 해보자는 데로 결론이 났다.



늘 하던 얘기지만 84년인가 광주에 살던 무렵이었는데, 홍남순 변호사가 고희를 맞았고 양김씨도 가신들과 더불어 일제히 내려왔으며 전국 각지에 흩어져 와신상담하던 재야 각계 인사들도 모여들었다. 사실 고희 기념은 구실이요, 광주압살 이후 전국적인 민주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때에 모두 가난하던 시절이라 내가 그래도 <장길산> 연재로 밥술깨나 먹는다고 삼사십대는 모두 운암동의 우리 집으로 몰려왔는데 160여 명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마 맥주를 팔십짝 가까이 마셨을 것이다. 마당에, 거실에, 계단에, 이층에 방마다 꼬부리고 삼삼오오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모두 옥살이에, 고문에, 도망에 심신이 피폐했지만 기개는 살아 있었다. 그들 모두 어디로 갔는가?

지금 4개 당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제각각의 삶의 굴절을 거치며 세속적인 출세나 좌절을 맛보았다. 지금 내로라하는 정치인들 모두 거기 있었다. 그 시작은 87년 6월항쟁의 결과로 군부로부터 주어진 6·29 이후였다. 내가 현재를 '87년 체제의 종언'이라 부르자는 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 다함께 그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돌아가자 벗들이여, 그 때로! 그리고 생각해보자. '84년 저 피의 현장 광주에 모여서 미래를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그 때로 돌아가자!'라는 것은 이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낭만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아직도 하는 꿈같은 잠꼬대로 들리는가.



나는 정치하는 벗들이 가끔 상대의 궤변을 허위라고 공격할 때에 '소설 쓰지 말라'하고 얘기할 적마다 심한 모멸감을 느끼던 사람이다. 스스로 직업작가라고, '책장사'하는 처지라고 자학적으로 얘기하던 것도 그 이후부터는 삼가게 되었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대중과의 접점은 누구에게나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그 접점을 잃으면 대중과의 소통도 끝이 난다. 그러나 소설이란 세상 도처에 널려있는 삶의 진실을 그럴싸하게 재현해내는, 현실보다 더욱 현실적인 작업이어야 한다. 6·29는 군부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카드였고 기진맥진 그것을 받아들인 민주화 세력은 분열 이후에 스스로 3당합당이라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의 어정쩡한 귀결이 현재의 형식적 민주주의이며 여당과 야당의 가건물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대등한 가치 평가는 과연 가능한가? 그것이 어떻게 대등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가 가치일 수는 있어도 산업화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나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기 전에 행사장에서 애국가나 국기에 대한 예를 표한 적이 없다. 유명한 얘기로 5공시절 광화문의 그 살벌하던 국기 하강식 시간에 행인들이 모두 얼어붙어 중앙청의 태극기를 향하여 서있던 때에 나는 시인 김지하, 김정환과 셋이서 만취하여 얼어붙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갔다. 그것은 민주주의만이 존엄을 가지고 국기와 애국가에 대한 예의를 표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중의 땀과 피로 이루어진 민주화시대 이후에 나는 우리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정통성을 세웠다고 말한다. 산업화도, 민주주의도 이름 없는 민중들의 업적이다. 감히 아무나 나서지 말라. 그러므로 우리의 구호는 아직도 민주주의이며 다만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 선진적 민주주의다. 그 짧은 단어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모두 들어있다.

내가 광대처럼 또 이제 나서서 '사람이 살고 있었네' 식으로 분위기 일신의 바람을 잡는 것은 이를테면 작가로서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좌중의 분위기가 침체되면 그게 '내 탓이거니' 여기는 못난 자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총대'의 본뜻이다. 나의 총대는 그러므로 '이제 나서서 다 같이 처음부터 생각했던 민주화운동 하자'는 소리다. 판은 모두 끝났다. 그러므로 현재의 구도는 깨져야 한다. 그것은 밖에서부터 스스로 잘못 기획하고 구축한 체제를 깨는 일이다. 운동성의 회복이야말로 이제는 오래전 어느 6월에 탄생했던 '시민'들의 몫이다.



3. 바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나

2차 대전 이후 냉전 시대에 서구에서는 과거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개량하여 내부에 복지라든가 사회주의적인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그러나 아시아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는 냉전 구조를 확정하기 위하여 과거의 종속적인 민간정부를 스스로 훈련, 교육시킨 군사정부로 교체됐다. 군사 쿠데타는 개발도상국이라는 애매한 명칭의 지역에서 하나의 일상적 유행이 되었다.

소련에서 수정주의를 선언하고 일종의 안정적인 대치 상태가 유지되면서 미국과 서구는 레이거노믹스 또는 대처리즘이라는 정직하고 노골적인 자본주의를 내놓는데 그것이 점잖게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이며 그 행동 강령이 미국식 '세계화'이다. 이런 것들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것은 동구 붕괴 이후부터며 그로부터 지금까지를 이른바 '세계화 체제'라고 부른다.

웬일인지 소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 나올 무렵부터 제3세계의 군사정권은 차례로 민간정부로 바뀐다. 한국에 문민정부라는 이행기적 민간정부 체제가 생길 무렵부터 김영삼은 세계화를 입에 달고 다녔고 남한 자본주의는 풍요와 소비의 짧은 시대를 구가한다. 이때에는 미국이 동구를 재편성하느라고 여념이 없던 시기다. 그리고 아시아로 돌아섰을 때 IMF 사태가 터진다. 남한은 비로소 분단된 자본주의가 한계에 부딪친 것을 깨닫는다. 중국의 생필품 생산 공세와 일본의 첨단기술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미국 민주당 정권의 전향적인 대북정책과 남한의 생존 의지가 만나면서 '햇빛'이 탄생한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를 둘러싼 기류는 신냉전의 판도로 흘러가고 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은 그 세력 판도 사이에 한반도를 두고 다시 대치하려하는 중이다. 틈새를 조심스럽게 헤집어 나간다면 분명히 생존할 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별로 많지 않다.

북의 붕괴가 중국과 미국의 적대적 공존관계를 노골화시키면서 대만과의 교환 카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누구나 눈치 채고 있는 상식이다. 북의 특정 지명을 거론하며 국토 영역 운운하는 중국이나 전작권 환수니, 주한미군 재편제니 하면서도 유엔사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주한미군사령관의 공언은 DMZ 관리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간접적 선언이다. 어쩐지 대선을 앞둔 이 시기가 매우 불안정하다. 더구나 북은 이미 핵실험이라는 비난받아 마땅한 절체절명의 강수를 두어버린 직후다. 앞으로 우리는 멀고 험한 길을 가야 할지도 모른다. 더욱 지혜롭게 모든 슬기를 모아 다함께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안과 밖을 향한 운동의 전략을 모두 까발릴 필요는 없다. 그러나 큰 선은 보수나 진보로 밑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 세력을 줄이고 통합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래서 중도라는 깃발을 들어보는 것이다. 마치 독일 녹색당의 깃발처럼, 그것은 진보의 적색도 보수의 청색도 아닌 그 둘이 혼합된 보라색이다. 중도는 그러므로 기회주의가 아니다.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라는 공의 핵심을 뚫는 것이 중도다. 그 프레임 안에 누가 들어오든 살아서 온다면 그에게 깃발을 쥐어 주리라. 그리하여 지금의 카오스를 통합하고 북과의 소통을 살려내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점쟁이가 아니더라도 그에게 최고의 책임이 주어질 거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4. 모든 굳어버린 원칙이나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장을 하는 혼자에게는 '근사하지만' 다중의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리라고 작정한 것은 어느 후배의 조그맣고 나직한 목소리와 또한 어느 '대가'의 큰 목소리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신문과 엉뚱한 인터뷰를 한 것은 이를테면 정갈하게 서 있는 현대식 빌딩에 흙덩이를 던져 말끔한 유리창에 얼룩을 만든 것과도 같았다. 고정된 판을 흔들어 보고 싶어서다. 뒤에 어느 후배 작가가 '하이킥'이라는, 나에게는 낯선 표현으로 내 가슴을 흔들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88019.html). 매우 시니컬하고 자조적이지만 낮고 올곧은 음성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6월항쟁의 그날 서울역과 굴레방 다리목에서 최루탄 연기에 눈물을 철철 흘리며 돌팔매질을 하던 지금은 칠순 노인이 된 선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채광석이가 그 선배의 돌팔매를 피하며 '우리 편 맞겠어요!'하며 핀잔을 주던 모습이 떠오른다. 조태일이도 이문구도 채광석이도 이 세상에 없다. 아, 그런데 지금 저 젊은이들을 품에 안을 선배는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언제부턴가 너무 아름다운 가치라든가, 점잖음, 선량함 등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지당도사'들의 지당한 말씀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역시 문학이란 세속의 길이기 때문에. 나는 큰 목소리를 내던 내 동년배의 작가를 지난 위기의 시대 어느 현장에서도, 어느 글귀의 서명란에서도, 심지어는 회비 목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광화문의 빌딩에서 그 바로 위층에 군사정권 당시 제도권의 문협 사무실이 있다는 이유로 김지하와 양성우 시인의 석방과 긴급조치 철폐를 부르짖으며 시위했을 적에, 모두 잡혀가고 계단에 있던 염무웅과 몇몇이 문협 사무실에 몰려 올라갔을 때에 난색을 표하던 사무국장이 누구였던가.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의 행위나, 먹고 살려고 허덕이며 써온 글줄을 신주단지 모시듯 내세운 적도 없다. 책을 사준 이름 없는 독자들에게 겸허해야 하므로. 우리는 먹고 살만큼만 쓰고 남는 시간에는 체험하고 독서하고 놀고 위기의 시간에는 항의하고 감옥 가고 그러면서 시시껄렁하게 산다. 그러므로 노대가들이 늙어가면서 글 쓰는 행위를 무슨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엄살을 떨고 과장하는 것에 구토를 느낀다.

우리는 자신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살아서 자기가 세우지 않으며 작품 이외의 흔적을 이승에 남기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그 누구도, 노벨상 캠페인 따위는 그야말로 아이들 말로 '쪽이 팔려서' 스스로 벌린 적 없다. 노벨상에는 몇 가지의 도그마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기가 딛고 있는 대지와 구체적인 현실에서 애매모호하게 멀어지게 하는 점이다. 그야말로 '먼 산에는 거짓이 많다'.

늘 말하지만 포즈로 세상이 유지되지는 않는다. 지금은 화면 영상의 시대라 외국인도 공식석상에 나서서 뭐라고 하면 그 말이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허공의 화면 속에서 캐릭터가 다 드러나고 만다. 자아, 모두들 자신의 성채를 부수고 광야로 나오라.

이제부터 나는 점잖지 않을 것이며 예전으로 돌아가련다. 온몸에 얼룩이 튀면 다시는 개량 한복 따위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거나 넥타이에 정장을 하지 않으면 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명천 이문구는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 무슨 문학상이니 기념비석이니 세우지 말라고 그랬고 자신의 껍데기를 화장하여 고향 뒷산 솔숲에 뿌려주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엄정한 가르침이다. 모두들 '개똥폼' 잡지 말고 현실의 저잣거리로 내려오라!

뭐라고, '민족'이 문제라고? 나는 근년에 '작가회의' 근처에는 가본 적이 없는데 '권태' 때문이다. 물건은 안 나오면서 '말'만 무성하다. 나는 진작 감옥에서 나오면서 시인 김사인과 농담으로 '저 간판 언제 떼어내냐'고 헛헛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일단 조직이든 집이든 사람이 만든 것은 시간을 이기지 못한다. 쇄락하기 마련이다. 친목회 정도의 기능만 남았다면 '해소'하는 것도 하나의 역사적 과업이다.

요즈음은 엉뚱한 객손님들이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과거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위원회가 되어 조직 안에 깃들었지만, 이제는 6·15 민족문학회에다 무슨 평화포럼인지까지 있다. 내가 '민족'자를 떼든지 '해소'를 하든지 하자고 안을 내었던 것이 이시영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았던 나의 출옥 직후였다. 탈퇴를 하겠다니까, 그러면 시끄러워지니 '평회원'으로 명단만 남으라고 하여 그냥 그대로 지금까지다.

총회 전날에야 '민족' 문제가 안건인 줄을 전해 들었고 백낙청 선배와 만났다가 그의 온유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민족'을 떼어내는 것은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안하고 끌고 간 것은 바로 남북작가회담을 성사시키고 단일 협의체를 이루어낸 젊은 문인들 자신이다. 그 뜻을 곰곰이 새겨보기 바란다.

언젠가 일본의 오에 겐자부로 작가와 대담을 하면서 우리는 동아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을 걱정스러워하였다. 남북 분단이 민족 문제인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지만 이제 이 분단체제가 남북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 전체, 나아가 세계의 문제라는 것은 또 다시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니까 6자회담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가 동구 붕괴 이후로 이념적 방향의 한 축을 동아시아 진보, 평화, 연대로 삼은 것도 오래 전의 일이다. 우리는 무명의 '혈기방자한' 젊은 네티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세계인 작가다. 우리는 일본에서도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수많은 시민단체들과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알고 있다. 이는 중국, 대만과도 마찬가지며 오랫동안 젊은 문인들은 묵묵히 이러한 연대를 위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몽골, 카자흐스탄 심지어는 중동에까지 평화 시위대를 파견하기도 하면서 씨앗을 뿌려왔다.

그런데 '민족문학'을 꼭 붙여야 한다고? 그러면 그것을 떼자는 측의 가슴이나 작품에는 민족이 없는가? 뭐라고, '민족'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고인다고? 뭐라고, 작가의 고향은 '민족'이라고? 나는 작가란 국경이나 민족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라고 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조국은 있다. 그의 조국은 바로 '모국어'가 아닌가. 혼혈아를 아직도 멸시하는 사회, 외국인 노동자를 일하는 기계쯤으로 아는 사회, 재일동포의 차별은 목청 높이 외치면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교를 배척하고 밀어낸 사회가 아직도 '민족'이라고? 그것도 명색이 작가들이라는 사람들이.



몇 년 전에 가슴 아픈 일화를 겪었었다. 미국에 망명하고 있을 때의 일인데 어느 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내 작품 <무기의 그늘>을 번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딘가 말투가 서툴고 어눌해서 외국인인 줄 금방 알아차렸다. 내가 왜 그 책을 번역하려느냐고 물으니 그가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입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말에 모든 것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통화를 했는데 나는 뉴욕이고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어서 만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 사람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나중에야 자신이 한국과의 혼혈임을 밝혔다.

그리고 며칠 후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김수임을 아십니까?" 나는 6·25 전쟁 직전에 유명했던, 이강국과 박헌영을 주한미군 헌병사령관 차로 개성을 통과시킨 여간첩 김수임을 해방공간의 자료를 통하여 알고 있었다. 안다고 그랬더니 "제가 그이 아들입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구와? 미군 헌병사령관 사이의? 그는 자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를 기른 것은 저 유명한 김수임의 어머니, 삯바느질을 하여 딸을 대학 보내고 동경까지 보냈던 혼혈아의 할머니였다. 김수임의 이화여전 동창생인 시인 모윤숙의 회상기에 나온다. 딸이 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총살된 뒤에 시신을 수습한 것도 할머니, 미군 헌병사령관이 버리고 떠난 혼혈아를 고등학교 때까지 거두어 기른 것도 그 할머니였다. 그는 입양기관의 도움으로 십대 소년을 넘기고 나서 미국에 도착했다. 그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받았을 여러 어려움은 침묵 속에 다 들어 있었다.

피난지 학교에서도 적응이 어려워 할머니에게서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나는 곧 귀국하여 구속되게 되는데 미국을 떠나기 전에 로스앤젤레스에 망명하여 '한국청년연합'을 꾸려가던 광주사태 수배자 윤한봉에게 그와 연락하라고 전해 두었고, 뒤에 들으니 그는 평화시위나 연대활동에 적극적인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도 지금쯤은 늙었을 게다.



이러한 일화는 내가 너무나 많이 겪은 일이라 끝이 없다. 예를 한 가지만 더 들어보면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나 지나서 작가 방현석과 김남일의 소개로 알게 된 베트남 작가 바오 닌은 <전쟁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써서 유명한데, 그는 전쟁 당시에 17세의 소년병이었다. 시간대를 맞추어 보니 그는 플레이쿠와 호이안 전선에 있던 월맹 정규군이었고 바로 같은 시각 나의 맞은편에 있던 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평화를 얘기하는 친구다.

아아, 정말 끝이 없고 장황하다. 한 가지가 백 가지라고 요즈음의 <요코 이야기>에서 또 한 번 씁쓸한 회한의 느낌이 감돈다. 나는 당시에 만주를 거쳐 평양을 지나 서울까지 내려오면서 부모님, 누나들과 함께 개성까지 와서 피난민 수용소에 있던 기억도 남아있다. 당시 해방된 뒤인 48년에 남한에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가 <내가 넘은 38선>이라는, 지금 요코라는 아이의 어머니 세대의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아무런 편견 없이 '인간의 이름'으로 겪은 고초의 기록이 모든 이에게 감동적으로 읽혔다. 염상섭도 같은 소재로 당시에 단편소설 두 편인가를 썼다고 한다. 미국에서의 일은 당연히 그냥 책이 아니라 부교재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소동을 보면서 나는 어느 낯선 공항에 서있는 것처럼 타인의 '시선'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자의식에 빠진다. 우리의 이 복잡한 정체성과 단순하지 않은 표정을 어떻게 하리.

내가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듯 길게 공들여 쓰는 것은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이런 종류로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을과 골목에서 벌어지는 일은 바그다드나 이스탄불이나 파리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나는 모국어를 지고 다니니 어디로 튀랴.



'우리 민족끼리'가 중요하면 그건 식구들의 공간인 저 안쪽에 안방 쪽이라 할 '6·15 민족문화협의회'에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민족'의 헛것에서 놓여날 때에 통일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을 얻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미 유럽이나 아메리카와 대등한 '아시아 공동체'를 꿈꾼다. 이제 젊은 후배들은 '제3세계' 연대로 80년대의 한계와 범위를 시원스럽게 넘어가고 있다.

07. 02.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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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05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황구라 선생님의 생각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저는 <아시아>라는 계간지를 읽고 있는데 그게 좀 설익고 아직은 미흡해 충분히 만족스럽진 않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현재까지도 문학계에서 '민족'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고 있는 현실이겠지요. 백낙청 선생은 현재 온유한 입장으로 선회하셨다 하지만, 저는 선생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 필요하다고 봅니다.(현재의 문단권력구조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테지만) 그의 시민문학론, 민족문학론, 분단체제론 등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문단의 '민족'주의가 고착된 면도 없지 않은 것 같아서요.
저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몇 번 발을 걸친 적이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냥 <작가회의>라고 부릅니다.

로쟈 2007-02-0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부답님도 작가시란 말씀?!..

나비80 2007-02-0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까지는 아니고 그냥 언저리에서 쭈뼛대는 수준입니다.^^

짱꿀라 2007-02-06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석영 선생님 팬인데, 기사 잘 읽고 갑니다. 늘 도움만 받아서 감사해요.

기인 2007-02-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머리가 하얀 사진은 처음 보는데, 그래도 만년 청년이신 황선생님.

비로그인 2007-02-06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원시원하신 말씀...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