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Ritournelle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자입니다. 리라이틸 -> 리라이팅

로쟈 2007-02-09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기인 2007-02-10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저도 진은영 시인 이 시집 잘 읽었는데, 어느새 박사학위도 받았다니! 역시 공부하느라 창작하기 힘들다는 것은 변명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