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책&(417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인권이다. 관련서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에 한정했다. 물론 그래도 다 카바할 수는 없지만(안경환 교수의 <좌우지간 인권이다>(살림터, 2013)도 언급했지만 분량상 지면에서는 빠졌다)... 

 

 

 

책&(13년 4월호) 인권, 인간이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인권에 대한 정의다. 당연한 권리이기에 인권만큼 자명한 것도 없는 듯싶지만, ‘인간’과 ‘권리’의 결합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권리라곤 하지만 인권은 저절로 획득된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자각과 오랜 투쟁의 산물이다. 인권에 관한 책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겠다. 이달에는 적잖은 인권 관련서들 가운데 주로 최근에 나온 책들을 일람해보도록 한다. 인권에 관한 책 읽기가 인권지수를 바로 올려주는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권문제에 대한 인지수준은 높여줄 것이다.


먼저 인권에 관한 이론서로는 벨덴 필즈의 <인권, 인간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모티브북, 2013)를 손에 들 만하다. 정치학자이면서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 보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해온 저자가 인권 관념의 탄생 과정과 그 다양한 쟁점, 그리고 미래의 인권에 이르기까지 인권에 관한 이모저모를 짚었다. 그에 따르면 인권이라는 관념은 17-18세기 서양에서 최초로 다듬어졌고, 이 관념에 철학적 형태를 부여한 최초의 철학자는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머스 홉스였다. 홉스는 모든 인간이 자기 생명에 대해 절대적이면서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삶이 “불쾌하고 잔혹하며 짧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인권의 역사도 아주 짧다.


벨덴 필즈의 인권론에서 독특한 것은 인권에 대한 전체론적 접근을 제안한다는 점인데, 대전제는 모든 인간이 발전의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 잠재력은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구조 안에서 촉진되기도 하고 억제되기도 한다. 각자가 갖고 있는 잠재력을 억제하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그런 경우 억압적인 지배에 맞서는 저항 또는 반란은 필연적이며 이는 새로운 구조와 제도, 관행을 지향하는 투쟁의 형태를 띠게 된다. 인권의 핵심 가치는 그래서 투쟁 자체에서 나온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혁명의 구호를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인권을 위한 투쟁은 사회적 인정을 요구하는 권리투쟁이며, 이 권리의 주체는 개인일 수도 있지만 집단이나 기구일 수도 있다. 저자는 인권이론의 윤곽이 문화간 차이를 넘어서, 심지어는 ‘인권’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 문화권에서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인권에 대한 이론학습에 이어서 읽어볼 만한 책은 독일의 르포기자 귄터 발라프의 잠입 취재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것없이>(알마, 2012)다. 그는 사십대 나이에 아주 짙은 색상의 콘택트렌즈를 끼고 검은색 부분 가발을 쓰고서 서른 살 가량의 터키 노동자로 변장하고서 이주 노동자의 용역노동 현장에 잠입한다. 간단한 변장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는 단번에 ‘소외되고 천대받는 소수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체험한다. 그가 겪은 멸시와 적대감, 그리고 증오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저자의 르포는 출간되자마자 독일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인신매매나 다름없는 용역노동의 실상이 폭로되자 수천 건의 형사소송이 진행되었고 현장의 노동조건은 대대적으로 개선되었다. 더불어 독일인과 터키인들 사이에서 서로를 이해해보려는 다양한 접촉이 시도되었다. 한권의 책이 어떻게 사회를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국내서로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책들이 눈에 띈다. ‘영화 속 인권 이야기’를 다룬 <별별차별>(씨네21북스, 2012)은 지난 10년간 국가인권위원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인권영화들을 같이 보고 나눈 이야기들을 담았다. 아홉 가지의 인권주제가 토론감이 됐는데, 소수자 인권, 이주노동자와 비정규직 문제, 장애인 인권, 인종차별, 여성 인권, 탈북자 인권, 어린이 인권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한다. 일례로 <신비한 영어나라>에서는 영어유치원에 다니는 여섯 살짜리 종우가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는 명목으로 부모의 강요에 따라 혀 밑을 절개하는 수술을 받는다. 종우는 부모에게 수술이 싫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아이의 의사에 반한 성형수술은 인권 침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권 감수성이 키워질 수 있겠다.

 

 

 

물론 영화만 인권 감수성 신장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만화가 10인의 인권만화 <어깨동무>(창비, 2013)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책인데, 인권의 개념과 역사, 세계인권선언의 탄생과정을 그린 만화부터 노동 현장과 학교 안팎의 인권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권 이슈들을 만화가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는 그림에 담았다.  


덧붙여, 인권기구에서 일한 분들의 경험담도 인권 문제의 현황을 이해하는데 유익한 참고가 되겠다. 초대 인권대사와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박경서의 <그들도 나처럼 소중하다>(북로그컴퍼니, 2012)는 수양딸과의 대화 형식을 통해서 세계 각지의 인권 현실과 우리가 인권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노력 등을 이야기한다. 

 

13. 0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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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29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프랭크 푸레디의 <공포정치>(이학사, 2013)를 서평거리로 삼았다. 전작 <우리는 왜 공포에 빠지는가>(이학사, 2011)에 이어지는 책인데, 다소 딱딱하긴 하지만 최근의 국내외 정세 때문에 '실감'을 얹어서 읽을 수 있었다...

 

 

 

시사IN(13. 04. 13) 겁주고 겁먹는 정치

 

영국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의 <공포 정치>(이학사)는 영화에 관한 책이어도 그럴 듯했겠다. 공포영화를 즐기지 않는 나도 몇 번 본 기억이 있지만, 1980년대 공포영화의 고전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아이콘이 흉측한 얼굴에 중절모를 쓰고 칼날이 달린 장갑을 휘두르는 프레디 크루거였잖은가. 그런 공포영화의 정치학을 다룬 책에 ‘공포정치’란 제목이 붙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정치>는 그런 스릴감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가 제시하려는 건 우리시대 정치 문화의 특징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다. “공포 정치가 서구 사회의 공적 생활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서로를 겁주고 또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데 매우 능숙해졌다.”는 진단이 책의 서두다. 요즘처럼 북한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당장에라도 핵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위협하는 정황에도 딱 들어맞지만, 저자가 염두에 둔 건 10년쯤 전 상황이다(원저는 2005년에 나왔다). 200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 것이 배경이다. 9.11 테러 이후에 공포 정치가 미국의 공적 생활을 규정하는 지배적인 특징이 됐고 이것이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부시의 재선을 가능하게 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공중의 안전에 대한 공포를 이용한 건 부시 진영만이 아니었다. 공포 서사는 케리의 선거운동에서도 중요한 전략적 수단이었다. 민주당원들은 부시를 두려워해야 할 인물로 변형시키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미국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호소했다. 공포 정치의 이용에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차이라면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이 테러의 위협을 단골 레퍼토리로 써먹은 데 비해서 민주당이나 급진주의자들은 조류독감 같은 걸 활용했다는 것 정도다. 한쪽에서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을 떠들어대고 다른 쪽에서는 신종 독감이 4000만에서 4억명에 이르는 미국인을 감염시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모두가 ‘겁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공포정치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의 부제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인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랭크 푸레디가 전작 <우리는 왜 공포에 빠지는가>(이학사)에서 주장한 대로 공포는 현재 공중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다. 공포 정치는 공포 문화를 내면화한 것이기에 그 극복은 간단치 않다. 공포 문화는 인본주의와는 달리 인간이 취약하다는 의식을 주입한다. 우리가 ‘성숙한 시민’이 아니라 ‘취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면 주어진 운명을 부정하는 본연의 정치란 가능하지 않다. 정치의 쇠퇴와 고갈이 이러한 취약성 패러다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이 패러다임에서 공중은 점점 유아화된다. 그리고 거기에 상응하여 등장하는 것이 보모 국가, 더 정확하게는 ‘치료요법 국가’다. 취약한 주체로서 국민은 집단과 국가의 관리 및 지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격하된다.


“지금 우리는 계몽주의 이전 시대의 미숙한 자아 상태로 퇴보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간주하는 인본주의적 패러다임의 복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진정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포 정치의 ‘악몽’에서 빨리 깨어날 필요가 있다.

 

13.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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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주말판에 실린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이 연재는 대략 5주에 한번씩 게재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적었다. 인용한 대목 번역은 내가 갖고 있는 예닐곱 권의 책을 모두 참고했는데, 대동소이한 걸 제외하고 몇 개만 나열한 것이다. 기사에서는 K를 '케이'라고 음역했는데, 독어식으로 하면 '카'라고 읽어주어야 한다. 아예 '요제프 카'라고 옮긴 번역본들도 있다... 

 

 

 

한겨레(13. 04. 06) 인간이란 사실이 죄가 될 수 없다면 나도 무죄다

 

“누군가 케이(K)를 중상모략한 게 분명했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날 아침 느닷없이 그가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계 문학사의 유명한 서두 가운데 하나일 <소송>의 서두이다. 어느 날 느닷없이 체포되는 ‘케이’(K)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 독자도 작품을 손에 드는 순간 케이의 부조리한 ‘소송 이야기’에 휘말리게 된다. 흥미로운 건 미완성 소설임에도 카프카가 마지막 장 ‘종말’을 ‘체포’라고 제목을 붙인 첫 장과 함께 써두었다는 점. 서른한번째 생일 전날 밤에 찾아온 두 남자에 의해 채석장으로 이끌려간 케이는 순순히 칼에 찔려 죽는다. “개 같군!”이란 말을 내뱉지만 그가 죽어도 치욕은 남을 것만 같았다는 게 마지막 문장이다.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은 케이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 중상모략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숙부의 권유에 따라 변호사도 선임해보지만 소송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된다. 그러다 도움을 얻기 위해 만난 화가는 케이가 법원에 대해 잘 모른다고 꼬집으면서 석방의 세 가지 가능성을 설명해준다. 실제적 무죄 판결, 외견상의 무죄 판결, 그리고 판결 지연이 그것이다. 이 중 실제적 무죄 판결은 유례가 없기에 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남은 건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받거나 판결을 지연시키는 것뿐인데, 이를 위해서는 피고인이나 그 조력자가 법원과 끊임없이 사적으로 접촉해야만 한다.

 

판사나 법원 관계자들과의 사적인 연줄이 중요하기에 변호사는 의뢰인보다도 우월하게 행세한다. 케이는 지지부진한 소송 진행에 책임을 물어 변호사를 해임하러 간 자리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상인이 변호사의 환심을 사려고 구차하게 행동하는 걸 본다. ‘변호사의 개’나 다를 바 없었다. 영문을 모르더라도 일단 체포된 상황이라면 결국 두 갈래 선택지만 남는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나 판결 지연을 위해 힘을 써주겠다는 변호사의 ‘개’가 되거나, 그런 변호를 포기하고 개 같은 죽음을 죽거나. 분명 부조리해 보이지만 이 부조리가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데 이 작품의 문제성이 있다. 부조리의 보편성이라고 할까.

 

 

 

<소송>의 클라이맥스는 ‘법 앞에서’라는 우화가 포함된 ‘대성당에서’ 장이다. 교도소 전속 신부는 케이와 자리를 마련하고 소송의 경과가 좋지 않다고 일러준다. 사람들은 케이의 죄가 이미 입증된 걸로 생각하기에 상급 법원으로 넘어가지도 않을 거라면서. 케이는 한번 더 자신이 죄가 없다고 항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무죄일 수 있을까요?”(홍성광 옮김·펭귄클래식) 이 대목은 보통 다르게 번역된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권혁준 옮김·문학동네)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겠습니까?”(김재혁 옮김·열린책들) “도대체 인간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이주동 옮김·솔)

 

무죄를 주장하는 케이의 논거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며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죄가 될 수 없다면 자신도 무죄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케이가 유죄라면 인간도 유죄라는 뜻도 된다. 그런 점에서 케이는 ‘단독적 보편성’을 체현하는 인물이다. <소송>을 읽으며 아무래도 좋지 않은 소송에 말려든 느낌이다.

 

13. 04.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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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2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영장류 학자 다이로 마에스트리피에리의 <영장류 게임>(책읽는수요일, 2013)을 읽고 적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잘 쓰인, 흥미로운 책이라는 게 독후감이다. 저자의 또다른 책으로 <마카키아벨리의 지능>도 번역되면 좋겠다...

 

 

주간경향(13. 04. 09) 엘리베이터에 낯선 두 사람이 거리를 두는 까닭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던질 수 있는 근본물음은 무엇일까? ‘생명이란 무엇인가’도 가능한 후보이지만, 보통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일 것이다. 동물도 아니고 신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게 우리의 통상적인 이해, 혹은 지극히 ‘인간적인’ 자기 이해다. 하지만 영장류 학자들의 생각은 다른 듯하다. 영장류 및 인간행동에 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진화생물학자 다리오 마에스트리피에리의 <영장류 게임>(책읽는수요일)에서 초점은 ‘우리 안의 영장류 본성’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영장류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기에 영장류 본성의 특수한 변형일 따름이다. 우리의 사회적 게임이 영장류 게임인 이유이고, 영장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자기 이해인 이유다.


물론 인간의 사회적 행동, 곧 사회적 게임이 벌어지는 ‘경기장’은 바뀌었다. 영장류가 진화해온 과거의 환경조건과는 너무도 판이하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장류 본성에 대해서 간과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바뀐 조건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영장류 게임의 플레이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가령 엘리베이터에서 낯선 사람과 함께 타게 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는가. 엘리베이터는 분명 근래에 발명된 것이지만, 좁은 공간에서 타인과 매우 가까이 있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다. 과거에 서로 모르는 두 원시인이 좁은 동굴에서 조우하는 것은 흔하게 일어날 법한 일이다. 그때 보통은 한 명이 다른 한 명의 머리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것으로 상황은 종료된다.


하지만 언제나 상황이 만만한 것은 아니며 상대를 공격하는 중에 자신이 입을 수 있는 상해도 고려해야만 한다. 좁은 공간에서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싸울 것인가, 싸우지 말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우리는 매우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영장류가 싸움을 피하는 동물은 아니지만 갇힌 공간에서의 싸움에서는 양쪽 모두 큰 손해를 볼 확률이 높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면 보통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저자의 실험에 따르면 이런 행동은 원숭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두 마리의 붉은털원숭이가 작은 우리 안에 갇히게 되면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싸움을 피하려고 한다. 상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은 위협 신호이기 때문에 이들은 허공이나 땅을 쳐다보기도 하고 우리 밖 가상의 지점을 응시하기도 한다. 그렇게 무관심한 척하는 것으로도 긴장이 누그러지지 않으면 이빨을 드러냄으로써 친하게 지내자는 의사를 전달하고 서로의 몸을 손질해준다. 그렇다고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두 사람이 서로 몸을 손질해주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인간은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몸손질을 대신한다.


엘리베이터 문제에서도 시사를 얻을 수 있지만 영장류의 행동은 언제나 비용이 덜 드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저자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 또한 그러한 적응의 산물로 본다.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할 때 이를 해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둘이 싸우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협상을 통해 타협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전략 모두 비효율적일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에 서로 지배-복종 관계가 형성되면 의견이 불일치할 때마다 싸우거나 협상할 필요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지배관계가 분명한 경우에는 분쟁의 소지가 없어지는 것이다.


연인이나 부부 간의 다툼을 이런 시각에서 보게 되면, 가장 안정적인 커플은 비대칭적인 지배관계가 형성된 커플이다. 즉 둘 중 한 사람이 양보하게 되면 저녁 메뉴나 리모컨을 두고 파국적인 분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이나 영장류 동물에게서 지배 욕망은 매우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지배가 개입되지 않은 인간관계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모든 지배에는 책임이 따르며 또한 지배는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밖에도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장류 본성에 대해 되짚어보도록 해주는 유익한 책이다.

 

13. 04. 02.

 

 

P.S.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저자는 이탈리아 출신인데 로마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시카고대학에서 진화생물학과 행동신경과학 등을 강의한다. 매 장이 흥미로운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만 저자는 3장 '마파아 본능'에서 자신이 왜 이탈리아를 떠나 미국 대학에서 일자리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는지를 털어놓는다. 이탈리아 족벌주의의 생생한 사례와 체험담이 마피아 영화 뺨친다.

 

 

책은 내용뿐만 아니라 번역도 만족스러운데, 옥에 티가 있다면 같은 책명이 다르게 번역돼 있다는 점이다. 로버트 프랭크의 같은 책이 <이성 내의 열정 Passions Within Reason>(221쪽), <이성 속의 열정 Passions Within Reason>(229쪽)이라고 두 가지로 옮겨진 것인데, 제목도 통일하는 게 낫겠고 병기된 원서명도 한 번 제시하는 것으로 족하다. 편집자가 체크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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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사적인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3)가 나온 지 한달 보름이 돼 간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책 소개도 하고 강의도 진행중인데, 가끔씩 긍정적인 독서 경험을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반갑다. 한 기업 사보에서는 이 책을 서평도서로 다뤄주기도 했는데, 직장인 서평단에서 이 책을 읽고 질문한 내용에 붙인 대답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지면에는 아마 조금 축약돼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주로 고전과 독서에 관한 질문들이다.

 

 

 

1. 살면서 돌아보니 어느 순간 회사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만 읽게 됩니다. 회사의 허리를 책임지는 40대 직장인에게 좋은 책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세요.


-> ‘40대’ 인구가 많아지고 유력한 독자층으로 부상하면서 출판계에서는 아예 40대를 겨냥한 책들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제목에 ‘마흔’을 달고 있는 책들이 부쩍 늘어났지요. 40대의 관심사와 고민을 염두에 둔 책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책만 읽을 필요는 없겠죠. 40대는 ‘회사의 허리를 책임지는’ 나이이지만 동시에 각자의 인생을 중간결산해보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뭔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에 아주 뒤늦은 나이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그러기도 쉽지 않은 나이. 좋은 책을 많이 찾아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어떤 책을 깊이 읽는 게 필요한 때 같습니다. 저의 지론이지만 우리가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어도 책은 두 번 읽을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읽은 책을 나에게 좋은 책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면 무의미하지요. 좋은 책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2. 아이들과 함께 고전을 읽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합니다. 즐겁게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어떤 고전을 추천해주는 게 좋을까요?

-> 고전을 억지로 읽는 일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높은 산을 오를 때 분명 힘이 들지만 정상을 오르고 나면 그만한 기쁨을 보상으로 받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독서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는 것에서만 독서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책이건 간에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책은 우리가 뭔가 발견하거나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고 뭔가 성장했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책들이지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범위를 고전으로 확장해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가 고전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고, 그런 즐거움을 아는 아이라면 자연스레 고전으로도 손길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3. 작가님은 이미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독서를 하시기에 작가의 창작의도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지식을 많이 갖추지 못할 수도 있는데요. 이런 대중이라면 어떤 기준으로 독서의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

-> 독서는 매우 정직한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만큼 많이 읽고, 얼마만큼 즐겁게 읽었느냐가 그대로 ‘독서력’이 되니까요. 일차적으로는 기본 독서력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략 150권 안팎의 책을 읽는 게 필요하다고 하네요. 그런 독서량은 우리의 뇌에 독서근육을 만들어줍니다. 어지간한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죠. 그 이후엔 다시 읽기나 깊이 읽기가 독서력을 크게 향상시켜줍니다. 또 같은 책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는지 비교해보고 내가 놓친 것,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확인해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다시 읽으면 그만큼 자세히 읽게 되고 더 많은 걸 소화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 읽어나가면 독서력은 성장하게 되고, 우리에겐 독서를 즐길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4. 해외 고전의 경우, 번역본이기 때문에 이해도가 떨어져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서의 차이도 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고전을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 같은 이유에서 한국영화만 보는 분도 있고, 한국 가요만 듣는 분도 있지요. 혹 해외관광도 그런 이유에서 피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한 가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외관광도 좋아하고 다른 나라 음식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해외 고전을 읽는 게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궁금하다면요. 번역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지만, 사실 우리 고전 역시 절대 다수가 번역본입니다. 한문 고전을 한글로 옮긴 것이니까요. 정서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그 차이 못지않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떤 보편성입니다. 차이 속에서도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할까요. 게다가 실제적인 필요성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평평하고 ‘우리는 하나’이며 지구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면 우리 것에만 관심을 한정하는 것은 한 가지 선택이더라도 어려운 선택입니다.   

 

5. <아주 사적인 독서>에 소개된 고전문학 중 원본으로 읽어볼만 한 책을 하나 골라주신다면 어떤 것이며 이유는 무엇인가요?

-> <마담 보바리>는 불어, <파우스트>는 독어, <돈키호테>는 스페인어, <석상손님>은 러시아어로 쓰인 작품이기에 원본으로 읽기에 좀 만만한(?) 작품은 영어로 쓰인 <햄릿>이나 <주홍글자>, <채털리부인의 연인> 등입니다. 분량을 고려하면 가장 얇은 <햄릿>을 권해드려야겠습니다. 다만 두어 종 이상의 번역본과 원문을 대조해가며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 대목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다면 고전의 맛과 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디 가서 자랑하기에도 좋습니다. “<햄릿>을 읽어보니까 말이야-”

 

6. <아주 사적인 독서>에 소개된 고전 문학 외에 추천해 주실만한 고전 문학을 꼽으신다면? 그리고 이유는 무엇인가요?

-> 책에서 다룬 고전은 극히 일부이고 사실 읽을 만한 고전은 차고 넘칩니다. 따라서 마음에 드는 작가나 작품에서 관심을 확장해나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가령 <햄릿>이 흥미롭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 가운데 나머지 작품들을 마저 읽어볼 수 있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독파했다면 같은 독일 작가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에도 도전해볼 수 있습니다. 푸슈킨의 <석상손님>이 인상적이었다면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에도 손길이 갈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강의차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변신> 같은 카프카의 단편들과 <소송> 같은 소설도 필독 고전에 속하는데, 직장생활과 창작을 병행했던 작가의 고뇌가 직장인들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전과 나 사이의 사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7. 책을 읽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책만 읽어도 될까요? 기본 소양을 키울 수 있는 필독서는 반드시 읽고 난 후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 각자가 좋아하는 책과 각자에게 좋은 책이 일치하다면 100%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조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만 먹으면 대개 편식하게 되고 영양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거꾸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어느 정도 읽어나가되 여러 분야의 책들로 관심과 독서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세계는 넓고 읽을 책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읽다 보면 취향도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독서를 통한 자기발견이 아닐까요.   

 

13. 0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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