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읽고 들춰본 <새로 쓴 일본사>(창비, 2003)의 내용을 정리해본 것이다. 일본의 선사시대에 관한 마땅한 자료가 더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다이아몬드의 일본인 기원론은 보급판(1999)에는 실려 있지 않고 하드카바판(2005)에만 들어 있다. 문학사상사의 개정증보판에 따르면 이 원서 증보판은 2003년에 처음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어쨌든 내가 갖고 있는 보급판에는 빠져 있어서 아쉽다...  

 

 

 

한겨레(12. 11. 10) 한일 과거사 해법, 뿌리부터 캐볼까

 

‘서울대 대출도서 1위’란 타이틀 덕에 새삼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개정증보판에는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란 논문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일본인 조상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다룰뿐더러 “한국인과 일본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는 결론 또한 주목할 만하다. 고대사에 관한 한 양국의 시각이 많이 엇갈리는 터여서 3자적 입장에 놓인 지은이의 객관적 논증은 좋은 참조가 된다.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견해가 궁금해서 펼쳐본 책이 현역 연구자들이 공동집필한 개설서 <새로 쓴 일본사>(창비, 2003)이다.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단권으로 일본사 전체를 서술하고 있기에 ‘일본인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분량이 할애돼 있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기본시각은 확인해볼 수 있다.

 

 

 

일본 선사시대와 관련하여 쟁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를 사용했지만 수렵채집 단계에 머물렀던 조몬인과 벼농사를 시작한 야요이인의 관계다. 책에는 “오랫동안 식료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조몬 문화가 계속되다가 2000여년 전에 마침내 농경사회가 성립한다”고 개략적으로 서술돼 있다. 하지만 조몬 문화와 야요이 문화의 경쟁·이행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벼농사는 일본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 양쯔강 하류에서 처음 벼농사가 시작됐으며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야요이 도작의 직접 루트는 한반도 남부였다”고 일본 학자들도 기술한다. 문제는 어떻게 전해졌는가이다.

 

다이아몬드는 일본사의 결정적인 두가지 변화로 1만2000년 전께 토기를 발명하면서 조몬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과 기원전 400년께 한반도 남부로부터 새로운 생활양식(농경)이 들어오면서 두번째 인구폭발이 일어난 것을 든다. 조몬인이 한반도 이주민으로 대체된 것인지, 단지 그들로부터 기술만 습득한 것인지가 관건이다. 대략 세가지 학설이 나뉜다. 첫번째 학설은 조몬인이 점차 현대 일본인으로 진화했다고 보며, 두번째 학설은 야요이 문화가 농업 기술을 가진 한반도 도래인들이 대량 이주한 결과 생겨났다고 본다. 그리고 세번째 학설은 적은 수의 식량생산 이주자들이 건너갔지만 인구가 조몬인들보다 훨씬 빨리 불어나서 곧 그들을 압도했을 거라고 본다. 비슷한 양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세계 다른 지역 역사를 고려하면 두번째나 세번째 학설이 더 타당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새로 쓴 일본사> 지은이들은 벼농사 문화를 전한 이들을 ‘도래계 야요이인’이라고 부르면서 “본토에서는 도래계인과 조몬계인의 혼혈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현대의 본토인을 형성했다”고 정리한다. 하지만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야요이인 두개골이 현대 일본인과 가장 닮았으며 도래계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혼혈은 현대 아이누인과 유사하다. 형질인류학적으로 현재 본토인은 1억2000만명 이상이고 아이누인은 2만4000명이 남아 있는 정도다. 다이아몬드가 한국인과 일본인이 ‘쌍둥이 형제’와 같다고 한 이유다. 이런 시각은 한일간 과거사의 상처와 영토 분쟁을 좀 다르게 바라보도록 해주지 않을까.

 

12.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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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2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문화대혁명 관련서들을 다루려고 했는데, 자연스레 '그 이후'까지 언급하게 됐다. 안 그래도 중국에서는 오늘 18차 당대회가 개막해서 오는 14일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문화대혁명을 전후로 한 중국현대사에 눈길을 주어봄직하다. 위화의 책이 좋은 출발점이다.

 

 

 

책&(12년 11월호)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중국 작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경제뿐 아니라 중국의 문학 또한 세계적 주목거리가 됐다. 중국문학의 힘은 무엇일까. 모옌, 쑤퉁과 함께 동시대 중국문학 3대 작가로도 꼽히는 위화의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는 그 힘이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해준다. 그 역사는 크게 구분하자면 마오쩌둥의 정치혁명(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경제혁명(개혁개방)으로 나눠지는 역사다. 중요한 것은 이 두 혁명 사이의 단절 못지않은 연속성이다.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중국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으로 문화대혁명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국민당의 오랜 투쟁 끝에 승리하여 중국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오의 혁명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무장투쟁을 동반하지 않을 뿐 혁명은 항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마오는 믿었다. 대약진운동(1958-1960)과 문화대혁명(1966-1976)이 바로 그러한 혁명의 정점이었다. 그렇지만 1976년 마오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혁명의 시대는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경제기적에서도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환골탈태하여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는 게 위화의 주장이다. 아니 그렇게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그는 전한다. 


일례를 들어보자. 개혁개방 첫해인 1978년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3천만 톤 남짓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에 3천 7백만 톤을 넘겨 세계 5위를 기록하더니 1996년 이후에는 부동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2008년에는 철강생산량이 5억 톤을 넘어 전 세계 생산량의 32퍼센트까지 차지하게 됐다. 이는 세계 2위에서 8위까지 국가들의 생산량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놀라운 고속성장이다. 이러한 성장 이면에는 대약진운동 시기의 경험이 깔려 있다. 당시 중국 전역 도시 마당과 농촌 들판에는 소형 용광로가 설치되어 인민 모두가 철강을 제련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추월해야 한다는 열기가 충천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에 한 번 더 벌어진다. 농민들이 철강노동자로 변신하여 간이 용광로에서 제작한 쇳물을 레미콘차량에 싣고 철강공장에 갖다나름으로써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과거와 다른 것은 농민들이 정치적 구호가 아닌 돈을 위해서 철강제련에 나섰다는 점이다. 위화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중국 인민, 혹은 ‘풀뿌리’ 계층에게 두 차례 기회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문화대혁명이 정치권력의 새로운 분배였다면 개혁개방은 바로 경제권력의 재분배였다.


이 ‘두 중국’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미국의 중국사학자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이산, 2004)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1986년에 펴낸 책의 2판에서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을 평가하면서 중국의 관료집단체제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길, 모두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거라고 보았으나 1998년에 펴낸 3판에서는 공산주의 국가가 오히려 중국 자본주의를 촉진하는 핵심요체였다고 견해를 수정한다. 저자의 비교분석에 따르면 애초에 마오는 레닌과 달리 자본주의 문화가 사회주의 건설의 전단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 부르주아 문화와 자본주의 방식이 중국의 유교적 봉건문화만큼이나 유해하다고 판단했고 문화대혁명은 이 두 가지 악영향을 모두 제거하기 위한 시도였다. 물론 이 시도의 밑바탕에는 노년에도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마오의 권력욕도 깔려 있었다. 

 

 


1966년 마오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톄안먼 광장에서 수십만의 홍위병을 사열하면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을 광풍으로 뒤덮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간다>가 이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위화의 문화대혁명 체험담이라면 천이난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그린비, 2008)과 션판의 <홍위병>(황소자리, 2004)은 홍위병들의 체험적 회고록이다. 거기에 학술적인 조명까지 얹자면, 백승욱의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 2012)는 문혁을 주도했던 조반파의 이론적 배후 천보다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보다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문화대혁명이 제시하는 이론적 아포리아를 탐구하는 책이다. 그에 따르면 대중, 혹은 인민이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난점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 문화대혁명이 머금고 있는 이론적 아포리아다.

 

 


‘인민의 아버지’였던 마오 이후의 시대는 문화대혁명의 광기와 과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것이 펼쳐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위화의 표현에 따르면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시대로 접어들었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30년간 고속성장기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핵심 사건들에 대해서는 카롤린 퓌엘의 <중국을 읽다 1980-2010>(푸른숲, 2012)이 가장 잘 정리해준다.

 

12.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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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00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나자와 사토시의 <지능의 사생활>(웅진지식하우스, 2012)의 내용을 몇가지 간추렸다.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지능 문제가 흥미로워서 고른 책이었다. 저자의 책으론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이 더 소개돼 있다. 앨런 밀러와 공저한 책으로 요긴한 진화심리학 입문서. 대학 교재용으로 많이 읽히는 책은 물론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12)이다.

 

 

 

주간경향(12. 11. 13) 진보주의자가 지능이 높다?

 

20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진화심리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분야이며, 국내에도 적잖은 관련서가 출간돼 있다. <지능의 사생활>은 가나자와 사토시의 신작으로 지능 문제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흥미로운 책이다. 원제는 ‘지능의 역설’이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의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하고 지능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불식시킨 다음에 본격적으로 ‘지능의 역설’을 파헤친다. 어떤 역설인가. “지능이 높은 개인들은 진화가 우리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선호와 가치관을 갖고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역설이다.

 

 

먼저 지능에 대한 오해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IQ검사가 문화적으로 편향돼 있다거나 IQ가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교육을 통해서 높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IQ검사는 객관적이며 혈압이나 체중 측정 이상의 정확도를 갖는다. 혈압이나 체중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듯이 IQ 또한 그렇다. 또한 지능은 주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유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지능이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특성의 유전 가능성과 적응성은 일반적으로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지능은 장구한 기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한 우리 조상들에게는 진화적으로 새로운 아주 협소한 영역에서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화적으로 익숙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굳이 높은 지능이 필요하지 않으며, 지능이 높다고 해서 지능이 낮은 개인보다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지능이 높을수록 상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며 결혼과 번식이라는 진화적으로 익숙한 영역에서는 특별히 유리하지도 않다.

 

문제는 지난 1만년 동안 우리의 환경이 아주 급격하게 달라지면서 지능이 다른 심리기제들보다 중요하게 됐다는 점이다. 곧 지능이 낮은 개인은 지능이 높은 개인보다 진화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지능과 정치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소규모로 무리를 지어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진화의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 조상들이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이었다 하더라도 보통선거권이나 비례대표제 같은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장치들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세습군주제에 대한 욕구가 차라리 진화적으로 익숙하다. 즉 우리의 뇌는 대의민주주의에 맞게끔 진화하지 않았다. 지능의 역설에 따르면 이런 경우 지능이 높은 개인과 집단이 반대 경우보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와 수용력이 더 크다. 달리 말하면 인구의 평균지능이 높을수록 그 정부는 더 민주적이다.

 

정치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도 지능의 역설은 적용된다. “유전자적으로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들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진보주의를 정의한다면 이것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우리의 뇌는 완전히 낯선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 즉 진보주의는 진화한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이념을 받아들이려면 평균보다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 실제로 ‘아주 보수적’인 미국 청년과 ‘아주 진보적’인 미국 청년이라는 범주의 청소년기 IQ를 조사해보니 전자가 평균 94.82점이었던 데 비해 후자는 106.42였다. 여기서 11점은 작지 않은 차이며,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는 인간에게 부자연스러운 이념이지만 “평균지능이 높은 국민일수록 소득세를 더 많이 내고 소득분배가 더 평등하다”는 사실이 지능의 역설이다.

 

12.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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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서울대 대출도서 1위'라고 알려지면서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를 소개하면서 단상을 보탰다(저자의 이름 Jared는 합의된 표기방식이 없는지 제각각 표기되고 있다. 번역본에는 '재레드'로, 알라딘과 몇몇 언론에서는 '제레드'로 표기한다). 개인적으론 다이아몬드의 주요 저작 세 권을 원서와 함께 다시 구입해서 읽고 있다. 그의 신작도 곧 출간된다고 한다.

 

 

 

경향신문(12. 11. 02) ‘도둑정치’와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

 

가을이 깊어가면서 올해의 달력도 마지막 두 장을 남겨놓았다. 하지만 출판계 기준으로는 이달이 마지막달이다. 보통 전년 12월부터 올 11월까지 출간된 책 가운데 올해의 책을 선정하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 12월에는 온 국민의 이목이 쏠리는 대선이 있기에 책은 대중의 관심사가 되기 어렵다. 화제를 모을 만한 책이라면 그런 ‘경합’을 피해 출간을 앞당기거나 대선 이후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특별한 주목거리가 된 책이 있다. 서울대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책으로 알려지면서 신간이 아님에도 종합베스트셀러에까지 오른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란 책이다. 1998년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국내에서도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굳힌 명저이지만 이만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된 적은 없다. 묵직한 인문서가 ‘서울대 대출도서 1위’라는 타이틀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는 셈이다.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인가. 생리학자로 출발했지만 조류학, 진화생물학, 생물지리학에도 정통한 저자는 조류의 진화를 연구하기 위해 뉴기니 섬에 체류하다가 한 원주민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들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들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쇠도끼와 성냥, 의약품에서 우산에 이르기까지 백인들이 들여온 온갖 새로운 물건을 뉴기니 사람들은 ‘화물’이라고 불렀다. 왜 한쪽에는 화물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없느냐는 원주민의 물음을 저자는 “인류의 발전은 어째서 대륙마다 다른 속도로 진행됐을까?”란 질문으로 바꾸고 25년 만에 그 해답을 내놓는다. 바로 <총, 균, 쇠>이다.

저자는 민족마다 다른 역사 진행의 차이가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환경적 차이 때문에 빚어졌다고 본다. 지리적 환경과 생태 환경의 차이가 궁극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역사학자들은 흔히 환경결정론이라고 무시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지식과 자료, 그리고 현장탐사의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입증한다. 그에 따르면 BC 1만1000년경에 시작된 농경(식량 생산)이 모든 변화의 시발점이었다.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은 사회의 지배적 형태를 바꿔놓는다. 다이아몬드는 사회형태를 무리, 부족, 추장사회, 국가로 구분하는데, 농경으로 인한 인구 증가는 점점 더 규모가 큰 사회로의 이행을 촉진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지면서 계급이 형성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나뉘는 비평등사회가 탄생한다. 추장사회와 국가를 특징짓는 비평등사회는 개인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도 해치우지만 한편으론 평민들에게서 빼앗은 것들로 상류층을 살찌우는 ‘도둑정치’의 기능도 갖는다. 대규모 사회는 복잡한 중앙집권적 조직을 갖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사회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거나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서 가장 유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앙집권화를 통해서 권력이 집중되면 권력자는 자신과 친척 및 주변사람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것은 현대사회의 여러 집단들을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장물 논란을 빚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도 그렇고, ‘은닉재산’으로 의혹을 받고 있는 시가 30억원 상당의 땅을 딸에게 증여한 전두환 전 대통령 일가나 내곡동 특검에 가족들이 줄줄이 소환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 일가를 보아도 그렇다.

국가와 같은 대규모 사회는 중앙집권화될 수밖에 없고 또 이 중앙집권화는 도둑정치로 귀결되기 쉽다면, 진정한 문명과 새정치의 척도는 ‘도둑정치’와 어떻게 단절할 것인가이다. 그런 혁신의 기회를 우리는 잡을 수 있을까.

 

12. 11. 02.

 

 

P.S. '도둑정치'와 관련한 내용은 책의 14장에서 가져왔는데, 우리말 번역에는 오류가 있다. 아래 대목이다.

이처럼 갈등 해결, 의사 결정, 경제, 공간 등의 문제를 모두 고려했을 때 대규모 사회가 결국 중앙 집권화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권력이 집중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권력을 가진 사람들(즉 정보를 독점하고 결정을 내리고 물자를 재분배하는 사람들)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과 친척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의 여러 집단을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다.(417쪽) 

강조한 대목이 정반대로 옮겨졌는데(그러니 거꾸로 혁신정치의 기대치이다!), 원문은 이렇다. "But centralization of power inevitably opens the door - for those who hold the power, are privy to information, make the desions, and redistribute the goods - to exploit the resulting opportunities to reward themselves and their relatives. To anyone familiar with any modern grouping of people, that's obvious."(288쪽) 곧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과 친인척의 배를 불릴 기회를 갖게 되며, 알다시피 그들은 그걸 마다할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내곡동 특검이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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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세종캠퍼스의 소식지 쿠스진(KUSZINE)의 청탁을 받아 쓴 글을 오탈자를 바로잡아 옮겨놓는다(http://blog.naver.com/ks_enter?Redirect=Log&logNo=110150248950). '독서의 가치'가 제안받은 주제였다. 독서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글을 쓴 적이 있어서 중복되는 내용도 많지만 '종합'한다는 의미로 적었다. 언젠가는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교보문고, 2012) 정도의 규모로 써보고 싶다...

 

 

 

쿠스진(12. 10. 24) 독서의 가치

 

“네가 무얼 먹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있다. 독서의 경우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네가 무얼 읽는지 알려주면, 네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내가 먹는 것이 나인 것처럼 내가 읽는 것이 바로 나이다. 우리는 에누리 없이 각자가 읽는 만큼의 ‘나’가 된다. 나는 독서의 가치가 길게 말할 것 없이 딱 그만큼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책을 읽는 인간, 독서하는 인간으로서 ‘호모 부커스’로 정의될 수 있다면 말이다.


‘독서하는 인간’이 우리의 본질적 규정은 아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 보면 독서는 아주 최근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일단 문자의 발명 자체가 5천년의 역사밖에 갖고 있지 않다. 문자로 무얼 기록하기 시작한 역사시대는 그 이전의 선사시대와 비교하더라도 극히 짧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이 ‘짧은 기간’은 우리의 뇌가 책을 읽기에 적합한 구조와 능력을 갖게끔 진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 능력이며, 다른 용도로 진화된 뇌의 부위들이 서로 협조한 결과이다.


독서 능력 자체가 일반화돼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실상 그것은 매우 놀라운 능력이다. 우리는 대부분 처음 글자를 익히며 더듬더듬 읽어가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런 재주를 발휘하여 부모나 주변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안기기도 했으리라. 그렇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우리는 저마다 기적을 만들어낸 능력자라고 말해도 좋다. 아침마다 태양이 뜨는 것처럼 일상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 경탄에 값할 만한 기적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기적이 두 번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구분하자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문해력’의 기적과 책을 읽을 수 있는 기적, 곧 ‘독서력’의 기적이다. 겉보기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문해력과 독서력은 일치하지 않는다. 똑같이 책을 읽는 능력이지만 문해력이 초급에 해당한다면 독서력은 그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고급능력이다. 가령 초등학생의 독서능력과 대학생의 독서능력을 비교해보아도 좋겠다. 책을 읽고 소화하는 수준에서 문해력과 독서력은 차이가 있다. 이유식을 먹던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충분한 영양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듯이 문해력이 독서력으로 질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선 일정량 이상의 독서 경험이 필요하다. 즉 독서력은 자연스레 체득되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능력이다. 


문해력과 독서력의 간극을 잘 말해주는 것이 우리의 독서량이다. 한국의 문맹률은 세계 최저 수준이지만, 곧 문해율은 아주 높은 편이지만 평균 독서량은 ‘한 달에 한권’ 꼴로 OECD 가입국가 가운데 꼴찌 수준을 못 면하고 있다. 성인의 연간 독서량이 2008년 12.1권에서 2011년 9.9권으로 떨어졌으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한 달에 한권’이라는 수치도 그나마 올려 잡아서 그렇다. 게다가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이 10명 중 4명꼴이라고 하니, 지표만 보자면 우리의 독서현실은 매우 참담하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 수는 세계 최저 수준인데 반해서 독서 인구나 평균 독서량은 현저하게 적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문해력이 곧 독서력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대로 독서력은 문해력만 있다면 저절로 얻게 되는 능력이 아니다. 문해력만 갖고는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해력에서 독서력으로 건너뛰기 위해선 그 보폭을 가능하게 할 만한 독서량이 요구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책을 ‘안’ 읽는 것이 아니라 ‘못’ 읽는 것이다. 실제로는 독서력이 부족해서 책을 읽지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 수 있지만 단지 안 읽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독서력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어렵지 않다. 먹으면 살이 찌는 것처럼 읽으면 독서력이 붙는다. 다만 우리 뇌가 독서에 적합한 ‘독서근육’을 갖기 위해서는 비교적 단기간에 일정량 이상의 책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량의 운동을 어느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얼마만큼의 독서량이 필요한지는 개인차가 있을 수 있지만, <독서력>의 저자 사이토 다카시에 따르면 대략 150권 정도의 독서가 필요하다. 그 정도 책을 2-3년 동안 독파해나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뇌는 독서에 적합한 구조를 갖게 된다. 그것이 비유컨대 독서근육이다. 그리고 한번 형성된 독서근육은 너무 방치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독서를 한결 수월하고 생산적인 것으로 만들어준다. 단순히 ‘읽는 것’과 ‘읽어내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독서력이다. 


따라서 ‘독서하는 인간’을 달리 ‘독서력을 갖춘 인간’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겠다. 독서의 가치를 말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 스스로를 독서력을 갖춘 인간으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흔히 인간이 똑똑해서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똑똑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즉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우리 각자는 독서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독서를 해나가면서 비로소 독서의 가치를 알게 된다. 우리의 지식이 늘어남과 함께 정신이 성장하고 사고가 깊어지며 세계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 그것이 독서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와 ‘나의 세계’를 새롭게 변형하고 갱신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읽는 것이 나”라는 말은 그런 의미의 무게를 갖는다.


한편 독서의 가치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의 시야를 ‘독서하는 인간’에서 ‘독서하는 사회’로 확장해본다면 우리는 독서라는 프리즘으로 인간의 역사를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 역사는 ‘책을 읽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라는 범주에 의해 구획된 역사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책을 읽는 계급이 읽지 못하는 계급을 지배해온 역사다. 일제 강점기만 하더라도 우리의 문맹률은 70퍼센트에 달했다. 나머지 30퍼센트의 독서인구, 그리고 더 좁혀서 일본어 해독력까지 갖춘 10퍼센트의 조선인이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했다. 반대로 글자를 모르고 책을 읽지 못하는 무지한 대중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동시에 그것은 예속의 근거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보통교육이 시행되면서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해력을 갖춘 인구가 문맹 인구보다 더 많은 시대로 진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조건이기도 하다. 소위 민주공화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때, 그 국민은 형식적인 자격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격, 균등한 능력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아니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전제된다. 문해력은 그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이다.

 

 


하지만 1948년 최초로 총선거가 실시될 당시에는 이 기본 능력조차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투표방식으로 도입된 것이 후보자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써넣는 기재투표 방식이 아니라 작대기로 기호를 표시하는 기호투표 방식이었다. 문맹자가 다수였던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후에 이것은 후보자의 이름과 숫자가 나열된 공란에 붓 뚜껑으로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역시나 원시적인 방식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요즘은 초등학교 반장선거에서도 후보자의 이름을 적어내는 기재투표를 하는 것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의 저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모든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독서능력을 그 수준의 척도로 삼는다면 우리는 세 종류의 정부, 혹은 세 단계의 정부를 가질 수 있다. 곧 ‘문맹자가 다수인 국가의 정부’, ‘문해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 ‘독서력을 갖춘 국민의 정부’가 그것이다. 독서능력의 여부가 국민의 수준을 결정하고 그 국민의 수준이 다시 정부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독서의 사회적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책을 읽는 능력은 각자가 ‘나’를 만들어나가는 최상의 방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더 나은 정치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우리가 무얼 읽느냐에 따라서 한국의 미래가 달라진다. 독서는 우리 자신을 바꾸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힘이다.

 

12.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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