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3)가 나온 지 한달 보름이 돼 간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책 소개도 하고 강의도 진행중인데, 가끔씩 긍정적인 독서 경험을 말씀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반갑다. 한 기업 사보에서는 이 책을 서평도서로 다뤄주기도 했는데, 직장인 서평단에서 이 책을 읽고 질문한 내용에 붙인 대답을 여기에 옮겨놓는다(지면에는 아마 조금 축약돼 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주로 고전과 독서에 관한 질문들이다.

 

 

 

1. 살면서 돌아보니 어느 순간 회사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만 읽게 됩니다. 회사의 허리를 책임지는 40대 직장인에게 좋은 책을 선택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세요.


-> ‘40대’ 인구가 많아지고 유력한 독자층으로 부상하면서 출판계에서는 아예 40대를 겨냥한 책들도 많이 내놓고 있습니다. 제목에 ‘마흔’을 달고 있는 책들이 부쩍 늘어났지요. 40대의 관심사와 고민을 염두에 둔 책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책만 읽을 필요는 없겠죠. 40대는 ‘회사의 허리를 책임지는’ 나이이지만 동시에 각자의 인생을 중간결산해보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뭔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에 아주 뒤늦은 나이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그러기도 쉽지 않은 나이. 좋은 책을 많이 찾아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어떤 책을 깊이 읽는 게 필요한 때 같습니다. 저의 지론이지만 우리가 인생을 두 번 살 수는 없어도 책은 두 번 읽을 수 있습니다. 좋은 책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읽은 책을 나에게 좋은 책으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지만 내가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다면 무의미하지요. 좋은 책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나가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2. 아이들과 함께 고전을 읽고 싶은데 너무 어려워합니다. 즐겁게 고전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아이들에게 어떤 고전을 추천해주는 게 좋을까요?

-> 고전을 억지로 읽는 일이 바람직한지는 의문입니다. 물론 높은 산을 오를 때 분명 힘이 들지만 정상을 오르고 나면 그만한 기쁨을 보상으로 받을 수는 있지요. 하지만 독서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에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는 것에서만 독서의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책이건 간에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책은 우리가 뭔가 발견하거나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우리를 똑똑하게 만들고 뭔가 성장했다는 느낌을 전해주는 책들이지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범위를 고전으로 확장해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가 고전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고, 그런 즐거움을 아는 아이라면 자연스레 고전으로도 손길이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3. 작가님은 이미 많은 지식을 바탕으로 독서를 하시기에 작가의 창작의도까지 꿰뚫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지식을 많이 갖추지 못할 수도 있는데요. 이런 대중이라면 어떤 기준으로 독서의 방향을 잡아야 할까요?

-> 독서는 매우 정직한 노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만큼 많이 읽고, 얼마만큼 즐겁게 읽었느냐가 그대로 ‘독서력’이 되니까요. 일차적으로는 기본 독서력을 갖추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략 150권 안팎의 책을 읽는 게 필요하다고 하네요. 그런 독서량은 우리의 뇌에 독서근육을 만들어줍니다. 어지간한 책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심어주는 것이죠. 그 이후엔 다시 읽기나 깊이 읽기가 독서력을 크게 향상시켜줍니다. 또 같은 책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는지 비교해보고 내가 놓친 것,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확인해보는 게 도움이 됩니다. 다시 읽으면 그만큼 자세히 읽게 되고 더 많은 걸 소화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 읽어나가면 독서력은 성장하게 되고, 우리에겐 독서를 즐길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4. 해외 고전의 경우, 번역본이기 때문에 이해도가 떨어져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서의 차이도 있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고전을 읽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까요?

-> 같은 이유에서 한국영화만 보는 분도 있고, 한국 가요만 듣는 분도 있지요. 혹 해외관광도 그런 이유에서 피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건 한 가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해외관광도 좋아하고 다른 나라 음식도 마다하지 않는다면, 해외 고전을 읽는 게 힘들기만 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다른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나라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왔을까 궁금하다면요. 번역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지만, 사실 우리 고전 역시 절대 다수가 번역본입니다. 한문 고전을 한글로 옮긴 것이니까요. 정서의 차이가 있다고 하지만, 그 차이 못지않게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떤 보편성입니다. 차이 속에서도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고 할까요. 게다가 실제적인 필요성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세계는 평평하고 ‘우리는 하나’이며 지구촌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조건을 무시할 수 없다면 우리 것에만 관심을 한정하는 것은 한 가지 선택이더라도 어려운 선택입니다.   

 

5. <아주 사적인 독서>에 소개된 고전문학 중 원본으로 읽어볼만 한 책을 하나 골라주신다면 어떤 것이며 이유는 무엇인가요?

-> <마담 보바리>는 불어, <파우스트>는 독어, <돈키호테>는 스페인어, <석상손님>은 러시아어로 쓰인 작품이기에 원본으로 읽기에 좀 만만한(?) 작품은 영어로 쓰인 <햄릿>이나 <주홍글자>, <채털리부인의 연인> 등입니다. 분량을 고려하면 가장 얇은 <햄릿>을 권해드려야겠습니다. 다만 두어 종 이상의 번역본과 원문을 대조해가며 읽으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 대목씩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다면 고전의 맛과 힘을 경험할 수 있고, 어디 가서 자랑하기에도 좋습니다. “<햄릿>을 읽어보니까 말이야-”

 

6. <아주 사적인 독서>에 소개된 고전 문학 외에 추천해 주실만한 고전 문학을 꼽으신다면? 그리고 이유는 무엇인가요?

-> 책에서 다룬 고전은 극히 일부이고 사실 읽을 만한 고전은 차고 넘칩니다. 따라서 마음에 드는 작가나 작품에서 관심을 확장해나가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가령 <햄릿>이 흥미롭다면 셰익스피어의 비극 가운데 나머지 작품들을 마저 읽어볼 수 있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독파했다면 같은 독일 작가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에도 도전해볼 수 있습니다. 푸슈킨의 <석상손님>이 인상적이었다면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에도 손길이 갈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강의차 카프카의 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변신> 같은 카프카의 단편들과 <소송> 같은 소설도 필독 고전에 속하는데, 직장생활과 창작을 병행했던 작가의 고뇌가 직장인들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전과 나 사이의 사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입니다.

 

7. 책을 읽을 때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책만 읽어도 될까요? 기본 소양을 키울 수 있는 필독서는 반드시 읽고 난 후에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 각자가 좋아하는 책과 각자에게 좋은 책이 일치하다면 100%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조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만 먹으면 대개 편식하게 되고 영양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거꾸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어느 정도 읽어나가되 여러 분야의 책들로 관심과 독서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합니다. 세계는 넓고 읽을 책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읽다 보면 취향도 변화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독서를 통한 자기발견이 아닐까요.   

 

13. 0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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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18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제목에 이끌려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열린책들, 2013)를 읽고 쓴 것이다. 교육 관련서로는 리처드 거버의 <오늘 만드는 내일의 학교>(열린책들, 2013)과 함께 같이 읽어볼 만하다. 특히 교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지 않을까 싶다. 참고로 리뷰 말미에 언급된 하버드 대학의 교육학자 셰플러의 책으론 <하버드 대학의 학자들>(민음사, 2009)이 번역돼 있다.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에서는 '이즈리얼 셰플러'로, <하버드 대학의 학자들>에서는 '이스라엘 셰플러'로 표기돼 그냥 '셰플러'라고만 적었다.

 

 

 

주간경향(13. 03. 26) 예술을 통한 실패의 경험은 황홀하다

 

학교에서 예술 교육은 어떤 위상과 의미를 갖는가?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예술은 즐거운 교과활동이지만 필수 교육과정에는 속하지 않는다거나 재능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시간낭비일 뿐이라는 의견이 나올 법하다. 우리만의 특별한 반응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예술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다수의 견해는 그렇다고 하니까. 인지발달 심리학자이자 교육자인 제시카 호프만 데이비스의 <왜 학교는 예술이 필요한가>(열린책들, 2013)는 제목 그대로 예술 교육에 대한 강력한 옹호를 담은 일종의 ‘선언문’이다. 예술 교육을 소극적으로 옹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예술이 교육의 전면과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부모나 교사들도 대개는 예술의 가치를 인정하고 교육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교육일정을 짜면서 우선순위가 문제될 경우 가장 먼저 배제되기 십상인 과목이 바로 예술 교과다. 가치는 인정하지만 더 중요한 학과 공부는 따로 있지 않느냐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래서 예술 교육의 옹호자들조차도 예술 학습이 수학, 읽기와 쓰기 성적을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입증하려고 한다. 하지만 수학 공부가 목탄 드로잉을 하는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게 저자의 반문이다. 그의 입장으론 ‘교육 내 예술’의 가치는 더 잘, 그리고 더 강력하게 옹호되어야 한다. 과학이 중요하다면 예술도 그만큼 중요하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위에 세우고 상상하는 것, 그것은 과학이다. 그 주어진 것을 넘어서 상상하는 것, 세우는 것, 보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저자는 예술작품이 갖는 독특한 특성, 곧 구체적 생산물을 수반하며 감정에 주목하고 모호성의 세계를 보여주며 과정 지향적이고 예술 활동을 둘러싼 연관성을 발견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특별하기 때문에 예술 교과 역시 독특하고 다른 과목으로 대체될 수 없다고 본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실패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예술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부분이다. 예술이 여러 다른 영역에서 성공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성공할 기회를 준다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여러 다른 영역에서 성공한 아이들에게 실패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 예술의 의의다! 인간이 실수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우는 존재라면 예술이야말로 가장 탁월한 교육활동이다. 완전무결한 성공에 집착하는 아이들이 예술을 통해서는 “위험하고 신랄하고 생산적이고 중요한 실패와의 만남”을 가질 수 있다.


왜 실패가 중요한가? 그것은 물론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더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바로 그런 긍정적인 실패의 경험을 제공한다. 예술은 실패를 경험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다. 잘못 색칠한 그림을 통해서 아이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틀린 음정을 인지함으로써 아이는 다음에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배운다. 가능한 여러 동작을 시험해봄으로써 아이는 어떻게 춤을 향상시킬 수 있는지 체득한다. 예술은 아이가 ‘새로 시작할 지점’을 알려준다. 무수한 실패의 고비가 아이의 인생길에 놓여있다면, 그리고 그 실패에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면 예술이야말로 핵심 교과가 아닐 수 없다.


 

하버드대학의 교수였던 저명한 교육철학자 셰플러는 어릴 때 바이올린을 배웠고 자신이 꽤 잘하는 걸로 생각했다. 직업연주자도 꿈꾸었던 그였지만 열두 살 때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야사 하이페츠의 연주를 라디오에서 듣고 꿈을 접었다. 명연주자의 천재성에 압도돼서다. 하지만 그에게는 황홀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 순간에 내가 바이올린을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는 그렇게 해서 내가 야사 하이페츠의 연주를 진정으로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실패의 경험마저도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예술은 특별하다. 아이들은 실패할 권리가 있다.

 

13. 0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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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넷의 신작 <투게더>(현암사, 2013)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협력'이란 주제를 다룬다면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세넷은 협력이란 무엇인지 정의한 다음에 현대사회에서 그것이 어떻게 약화돼 왔으며 또 어떻게 강화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리뷰에서는 '약해진 협력'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는데, 아무래도 책의 풍부한 내용을 짧은 리뷰로는 다 카바하기 어렵다. 박식한 사회학자의 우아한 글쓰기란 어떤 것인지는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

 

 

 

중앙일보(13. 03. 16) 현대사회는 어떻게 사람을 갈라놓았나


책 주제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라면 예사롭게 넘길 수 있겠지만 저자가 리처드 세넷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개인적으로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함께 필독 목록에 올려놓고 있는 사회학자다. 바우만은 폴란드 태생으로 영국의 리즈대에 오래 몸담았다. 반면 세넷은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도 널리 읽히는 미국 사회학자로, 뉴욕대와 런던정경대에서 강의한다.

두 학자는 관심 분야는 다르지만 ‘근대’라는 공통 화두를 붙들고 있다. 깊이 있는 사유와 우아한 글쓰기로도 평판이 높다. 바우만이 ‘액체근대’ 혹은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에 오랫동안 천착하고 있다면, 노동 및 도시화 연구 권위자인 세넷의 최근 화두는 ‘호모 파베르’, 곧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다. 다른 표현으론 ‘구체적 실천을 통해 생명을 만드는 존재’다.

 

 


국내에도 소개된 『장인』이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 첫 권이라면 『투게더』는 그 두 번째 책이다. 세넷은 도시를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다룬 세 번째 책을 마저 집필할 예정이다. 이 3부작을 통해서 그는 무엇을 다루고자 하는가. 세넷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노력, 사회적 관계, 물리적 환경을 어떻게 형성하는지를 설명하려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명시한다. 특별히 그가 강조하는 것은 기술과 능력이다. ‘협력’의 문제를 다룬 『투게더』에서도 타인에 대한 우리의 반응 능력과 대화를 나눌 때 남의 말을 듣는 기술에 초점이 맞춰진다. 여느 사회학 저작에서는 보기 드문 주제이고 문제의식이다.



문제의식뿐 아니라 문제를 다루는 방식에서도 세넷 스타일은 눈에 띈다. 그는 런던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신의 손자 얘기로 말문을 연다. 손자의 친구 녀석이 학교 방송에서 “엿 먹어, 엿이나 실컷 처먹어, 왜냐하면 네가 진짜 싫으니까, 너네 패거리 전부가 진짜 싫거든!”이란 가사의 노래를 틀어서 학교 당국을 기겁하게 했다는 것이다.

가수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아이들은 ‘엿 먹어’란 가사를 통해서 종교·인종·계급적 차이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려고 했다. 실제로 런던은 그런 혐오와 갈등이 주기적으로 폭력과 폭동으로 치닫는 도시다. 런던보다 사정이 나을지 모르지만 우리도 그런 상황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비슷한 사람들만으로는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세넷의 강조대로 도시는 시민들에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충분히 숙고하고 상대할 것을 요구한다. 협력은 필수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협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원인은 무엇인가. 세넷은 물질적·제도적·문화적 이유 때문에 현대인이 협력의 기술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다고 진단한다. 일단 경제적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 미국 사회를 기준으로 하면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어 다수가 보유한 자산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상위 1%, 혹은 0.1%의 재산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났다. 오늘날 중간층 출신인 학생이 자기 부모들만큼 수입을 올릴 확률은 40%에 불과하지만 상위 5%의 학생들은 그 확률이 90% 이상이다. 이렇게 벌어진 격차는 자연스레 ‘사회적 거리’를 만들어내고 이 거리는 협력과 사회적 연대를 어렵게 한다.

제도적으로는 현대의 조직 구조가 협력을 금지한다. 단기적이거나 임시적인 일자리만 늘어나면서 ‘장기근속’이라는 말은 이미 듣기 어려워졌다. 2000년에 직장에 들어간 젊은이는 평생 12번에서 15번 가량 직장을 옮기게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러한 단기적 노동시간은 또 사회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고 정보를 다른 개인이나 부서와 공유하지 않는 ‘사일로 효과’를 강화한다. 당연히 조직에 대한 열의나 헌신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화적으로는 차이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을 줄이려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사람들은 스스로 움츠러들거나 문화적 획일화에 편승한다. 그러는 가운데 다른 사람과 대면하고 그들과 협력하려는 욕망은 힘을 잃는다.

그렇게 약화된 협력을 어떻게 다시 회복시킬 수 있을까. 세넷은 유럽 문화사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대화와 협력 방식을 끌어와 재조명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아시아인의 사례다. 중국은 ‘공격적인 자본주의 국가’이지만 강력한 사회적 단결 코드도 갖고 있다. 바로 관계나 연줄을 뜻하는 ‘꽌시(關係)’다. 이 비공식적인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중국인들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사회적 결속이 어떻게 경제적 삶을 형성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또 다른 사례는 미국의 한국 이민자들이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주로 정착하여 가게를 연 그들은 자기끼리는 잘 협력했지만 가난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고객을 상대할 때는 멸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1992년 LA폭동 때 많은 한국인 상점이 파괴당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친선이 구축되지는 않았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와 편견을 뒤로 제쳐놓고 서로 침묵하기로 했다. 서로가 못마땅한 부분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는 사회적 예절로서의 침묵 또한 사회적 협력의 중요한 바탕이다.

지역·인종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 다민족이라는 단어가 보통명사처럼 통용되는 시대, 이른바 사회적 협력을 통해서 어떻게 보다 더 튼튼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필독할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13. 0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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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IN(28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사카구치 교헤의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이음, 2013)를 골랐는데, 저자의 다른 책으론 <도시형 수렵채집생활>(쿠폰북, 2011)이 번역돼 있다.

 

 

 

시사IN(13. 03. 16) 돈 없으면 죽는 나라는 필요 없어

 

이런 질문은 품은 아이가 있었다. “사람은 왜 돈 없이 살 수 없다고 하는가. 그 말은 진실인가.” 그는 이것도 궁금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생존권을 보장한다면 노숙자가 없어야 하는데, 노숙자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이며 그들은 왜 심지어 작은 오두막을 지을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는가.” 너무 천진한 질문이다 싶으면 굳이 들춰볼 필요가 없는 책이 사카구치 교헤의 <나만의 독립국가 만들기>(이음)다. 어릴 적 품었던 이런 질문들에 아무도 답해주지 않아서 스스로 해답을 찾아간다는 저자의 생각을 담고 있다.


직함이 다양하다. 건축가이자 작가이이면서 화가이고, 뮤지션에다 만담가이며 게다가 신정부의 총리다. 총리라는 타이틀이 눈에 띄는데,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뒤에 정부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자 그는 아예 자신의 정부를 세운다. 도쿄의 대기에서도 방사성 물질이 검출되고 국회의원 가족이 해외로 대피하는 마당인데도 일본 정부는 국민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사카구치는 그런 정부라면 이미 정부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무정부상태나 다름없다는 생각에 그는 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구마모토에 직접 ‘신정부’를 수립하고 제로센터라는 청사를 개설해 후쿠시마 피난민을 위한 무료 피난처로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다. 비록 내란죄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신정부활동을 ‘예술’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행위도 ‘예술’이 아니냐는 생각이다. 사실 철학자 하이데거도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작품이라고 불렀으니 억지는 아니다.


사회운동과 예술적 실천을 동시에 밀고나가고 있는 저자의 성장담과 생각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의 방법론이다. 그는 사회를 바꾸는 것만이 혁명이 아니라 사회를 넓히는 것도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방식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존재방식을 바꿀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발상의 전환이다. 가령 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에게 영감을 던져준 것은 어느 노숙자의 집이다. 0.5편 정도의 작은 천막집이었지만 주인은 불편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공원이 거실과 화장실, 수돗가를 겸한 곳이고 도서관이 책장이고 슈퍼마켓이 냉장고인 만큼 집은 침실로 족하다는 설명이다. 요컨대 이 노숙자에겐 도시 전체가 자기 집이었다. 집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면 그렇게 새로운 공간과 함께 다른 삶의 방식이 열린다. ‘사적 공공성’의 탄생이라고 할까. 저자는 사유(私有)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유의 개념을 우리가 너무 좁게 이해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모든 걸 다시 생각하는 일에서도 노숙자들은 좋은 참고가 된다. 돈도 없고 집도 없는 상태인지라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을지 대책을 짜내야 한다. 안정된 시스템 바깥에 있기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돈이 없어도 살아가는 생활권을 만들고자 하는 저자의 사회적‧예술적 실험 역시 그러한 태도의 산물이다. 따지고 보면 과격한 것도 아니다. 저자가 인용한 일본 헌법 25조는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한다. 돈을 벌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국가 정책은 따라서 헌법에 위배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헌법에만 명시해놓고 실질적으론 보장하지 않는다면 어쩌겠는가. 따로 ‘독립국가’를 만드는 수밖에. 우리는 형편이 다른지 궁금하다.

 

13.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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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6호)에 실은 주제별 도서 소개를 옮겨놓는다. 주제는 '협동조합'으로 골랐다(지면에 소개된 책에 몇 권 더 얹었다). 관련서들이 많이 나와서 고른 것인데, 작년이 '세계 협동조합의 해'였다는 건 책을 펼쳐보고서야 알았다. 주변에서 성공사례도 많이 나오면 좋겠다. 책과 관련한 협동조합은 어떤 게 가능할까...

 

  

 

책&(13년 3월호) 사람 더하기 사람! 협동조합

 

2012년은 UN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였다. 그에 부응하여 국내에서도 작년 12월 1일부터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됐다. 이에 따라 금융‧보험업을 제외하면 5인 이상의 구성원으로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다. 협동조합이란 말을 주변에서 부쩍 자주 듣게 되는 배경인데, 협동조합이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평가까지 받는 것일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이 궁금한 자가 책을 펼치는 법이다. 이달에는 협동조합에 관한 책들을 몇 권 둘러보기로 한다. 


김기섭의 <깨어나라! 협동조합>(들녘, 2012)이 출발점으로 적당해 보이는 책이다. “21세기는 바야흐로 협동조합의 시대”라는 시대인식 하에 저자는 오늘날 협동조합이 왜 주목받고 있으며 어떤 전망을 갖고 있는지 안내한다. 이 협동조합의 기원은 무엇인가. 우리에게도 두레와 계 같은 전통이 있었듯이 사회적 협동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왔다. 협동조합의 역사를 살필 때는 영국의 로치데일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맨체스터 인근의 작은 마을인 로치데일에서 1844년 세계 최초로 ‘로치데일 공정 선구자 조합’이라는 이름의 협동조합이 설립됐기 때문이다.


당시 산업혁명의 절정기였던 영국에서는 소규모 작업장 대신에 대규모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생산력이 급속도로 발달했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하루 평균 17시간씩 일하고, 아이들과 여성은 새벽 3시부터 밤 10시까지 19시간을 일해야 했다.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멸시했고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로치데일의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의 자구책으로 만들어졌다. 1인당 1파운드씩의 출자금을 걷어서 조합의 점포 문을 열었지만 처음엔 너무 형편없어서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신뢰와 노력 덕분에 설립 10년 후에는 조합이 50배로 늘어났고 출자금도 400배로 불어났다. 그 이전에도 협동조합은 많이 있었지만 로치데일만큼 성공을 거둔 곳은 없었다. 로치데일 모델의 성공 비결을 저자는 “노동자들이 생산과 분배와 교육의 영역에서 스스로가 필요한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제공하는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사례가 있으니 협동조합의 정의에 대한 이해도 보다 용이하겠다. ICA(국제협동조합연맹)은 이렇게 정의한다.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통해, 그들 공통의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필요와 염원을 충족하고자 자발적으로 결합한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이다.” 저자는 이 정의에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 존엄한 인간의 상호자조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상호자조에 의해 형성되는 경제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에 그 철학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협동조합의 역사와 정의, 그리고 철학에 대해 일별했다면 바로 현장을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현직 언론인 3인이 쓴 <협동조합, 참 좋다>(푸른지식, 2012)가 가장 유익한 현장 안내서다. 이탈리아와 덴마크, 뉴질랜드 등 우리보다 앞서가고 있는 나라들의 협동조합 현장을 직접 찾아서 그들의 경험담과 성공비결을 전해 듣고, 한국의 협동조합 현주소를 점검해본 다음, 협동조합의 대가들과 가진 인터뷰도 보탰다. 게다가 협동조합기본법의 내용과 의미도 부록으로 실었으니 협동조합 가이드북으로는 최적이다. 저자들은 비영리기업임에도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는 이유를 조합원의 충성심과 공동 행동, 그리고 원가 경영에서 나온다고 짚었다.

 

 


흔히 세계 협동조합의 메카로 이탈리아의 볼로냐, 스페인의 몬드라곤 등을 꼽는데, 한국에도 내세울 만한 곳이 있을까. 저자들은 한국의 협동조합 메카로 강원도 원주를 지목한다. 원주에서는 2003년에 원주협동조합협의회가 조직됐고 2009년에는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로 진화했다. 이 네트워크에 소속된 회원이 무려 3만 5천여 명으로 원주 인구의 11퍼센트에 이른다. 협동조합원이 되면 먹을거리를 사고 아플 때 치료받고 필요한 돈을 빌리는 일을 모두 이 네트워크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 아직 그 규모가 지역 총생산의 0.36퍼센트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조합원들의 꿈은 원주를 언젠가는 한국의 몬드라곤으로 만드는 것이다. 스페인 바스크의 소도시 몬드라곤의 협동조합 복합체는 스페인에서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으로 성장해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협동조합의 성패는 조합원들의 열의와 실천에 달려 있는 만큼 협동조합 운영 지침과 실무에 관한 책들도 나와 있다. 에드가 파넬의 <협동조합, 그 아름다운 구상>(그물코, 2012)은 협동조합과 관계된 일을 일생 동안 해온 저자가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협동조합 운영의 여러 가지 문제점과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그리고 김용한, 하재은의 <새로운 대안경제, 협동조합 시대>(지식공감, 2012)는 협동조합 설립과 운영에 관한 실무를 담고 있는, 말 그대로 ‘실무서’다. 학술적인 성격의 책으로는 존스턴 버챌의 <사람중심 비즈니스, 협동조합>(한울, 2012)이 있는데, 성공회대 대학원 협동조합경영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우리말로 옮겼다. 대학 교재용 책으로, 협동조합을 ‘조합원소유 비즈니스’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3.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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