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291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프랭크 푸레디의 <공포정치>(이학사, 2013)를 서평거리로 삼았다. 전작 <우리는 왜 공포에 빠지는가>(이학사, 2011)에 이어지는 책인데, 다소 딱딱하긴 하지만 최근의 국내외 정세 때문에 '실감'을 얹어서 읽을 수 있었다...

 

 

 

시사IN(13. 04. 13) 겁주고 겁먹는 정치

 

영국 사회학자 프랭크 푸레디의 <공포 정치>(이학사)는 영화에 관한 책이어도 그럴 듯했겠다. 공포영화를 즐기지 않는 나도 몇 번 본 기억이 있지만, 1980년대 공포영화의 고전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아이콘이 흉측한 얼굴에 중절모를 쓰고 칼날이 달린 장갑을 휘두르는 프레디 크루거였잖은가. 그런 공포영화의 정치학을 다룬 책에 ‘공포정치’란 제목이 붙었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정치>는 그런 스릴감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가 제시하려는 건 우리시대 정치 문화의 특징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다. “공포 정치가 서구 사회의 공적 생활을 지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서로를 겁주고 또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데 매우 능숙해졌다.”는 진단이 책의 서두다. 요즘처럼 북한이 남한과 미국을 상대로 당장에라도 핵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위협하는 정황에도 딱 들어맞지만, 저자가 염두에 둔 건 10년쯤 전 상황이다(원저는 2005년에 나왔다). 2004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한 것이 배경이다. 9.11 테러 이후에 공포 정치가 미국의 공적 생활을 규정하는 지배적인 특징이 됐고 이것이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부시의 재선을 가능하게 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좀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공중의 안전에 대한 공포를 이용한 건 부시 진영만이 아니었다. 공포 서사는 케리의 선거운동에서도 중요한 전략적 수단이었다. 민주당원들은 부시를 두려워해야 할 인물로 변형시키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미국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고 호소했다. 공포 정치의 이용에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가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차이라면 공화당의 보수주의자들이 테러의 위협을 단골 레퍼토리로 써먹은 데 비해서 민주당이나 급진주의자들은 조류독감 같은 걸 활용했다는 것 정도다. 한쪽에서는 전쟁과 테러의 위협을 떠들어대고 다른 쪽에서는 신종 독감이 4000만에서 4억명에 이르는 미국인을 감염시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모두가 ‘겁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한 공포정치 패러다임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의 부제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인 것은 그 때문이다.


프랭크 푸레디가 전작 <우리는 왜 공포에 빠지는가>(이학사)에서 주장한 대로 공포는 현재 공중의 상상력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이다. 공포 정치는 공포 문화를 내면화한 것이기에 그 극복은 간단치 않다. 공포 문화는 인본주의와는 달리 인간이 취약하다는 의식을 주입한다. 우리가 ‘성숙한 시민’이 아니라 ‘취약한 개인’에 불과하다면 주어진 운명을 부정하는 본연의 정치란 가능하지 않다. 정치의 쇠퇴와 고갈이 이러한 취약성 패러다임에 근거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이 패러다임에서 공중은 점점 유아화된다. 그리고 거기에 상응하여 등장하는 것이 보모 국가, 더 정확하게는 ‘치료요법 국가’다. 취약한 주체로서 국민은 집단과 국가의 관리 및 지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격하된다.


“지금 우리는 계몽주의 이전 시대의 미숙한 자아 상태로 퇴보되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주체로 간주하는 인본주의적 패러다임의 복원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진정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이기도 하다. 공포 정치의 ‘악몽’에서 빨리 깨어날 필요가 있다.

 

13.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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