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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곧바로 개강을 앞두게 됐다(실상은 오늘 저녁부터 강의가 있지만). 내달에 예정돼 있는 한겨레교육문화센터의 강의일정을 소개한다. 9월 18일부터 화요일 저녁에 4회에 걸쳐서 세계문학 고전을 다시 읽을 예정이다. 주제는 '근대 개인주의 신화'로 잡았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8&tolclass=&searchword=&subj=F91243&gryear=2012&subjseq=0001&p_selmenu=01).

 

1. 9월 18일(화)_ 셰익스피어의 <햄릿>

 

 

2. 9월 25일(화)_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3. 10월 9일(화)_  괴테의 <파우스트>

 

 

4. 10월 16일(화)_  티르소 데 몰리나의 <돈후안> 외

 

 

12. 08. 24.

 

 

P.S. 강의의 주제는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문학동네, 2004)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만 와트가 다룬 <로빈슨 크루소> 대신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넣었다. 파우스트 신화와 관련해서는 괴테의 <파우스트> 외에 크리스토퍼 말로의 <파우스투스박사>(문학과지성사, 2002)와 투르게네프의 중편 <파우스트>(작가정신, 2012)를 곁들일 수 있다. 그리고 돈후안 신화와 관련해서는 몰리에르의 <동쥐앙>과 푸슈킨의 <석상손님>(<푸슈킨 선집>에 수록), 그리고 페터 한트케의 <돈후안>(베가북스, 2005)와 존 버거의 <지(G)>(열화당, 2008)까지도 더 다룰 수 있다. 여전히 다시 쓰이고 있는 신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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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990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이런저런 관련서를 뒤적이게 한 백승종의 <정감록 미스터리>(푸른역사, 2012)에 대해 적었다. 저자의 <정감록>를 마무리하는 책이어서 좀더 체계적인 독서를 원한다면 <한국의 예언문화사>(푸른역사, 2006)부터 읽거나 김탁의 해설서 <정감록>(살림, 2005)와 같이 읽는 것도 좋겠다(책이 절판돼 나는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예언문화사에 대한 논문집으로 저자의 문제의식의 기원을 엿볼 수 있다. 책에는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많이 포함돼 있지만 다른 리뷰들과의 중복을 피하다 보니 좀 맨숭맨숭해졌다...  

 

 

 

주간경향(12. 08. 28) 성리학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는 존재했나

 

조선시대 가장 대표적인 금서이면서 동시에 비공식 베스트셀러였던 책은? 그렇다, <정감록>이다. 하지만 우리의 상식은 그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조선왕조의 몰락을 예언한 책이라고 하지만 <정감록>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누가 쓴 것이고, ‘정도령’이나 계룡산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등등 우리가 상식선에서 답할 수 없는 물음이 수두룩하다. 이런 것이 <정감록>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한국의 예언문화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백승종의 <정감록 미스터리>는 제목 그대로 이 미스터리들에 대해 “미제사건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영화 속의 이름난 형사”처럼 파고들어간 책이다. 놀랍게도 그는 이 ‘미제사건’에 20년 이상 몰두해 왔다! 더불어 놀라운 것은 이 책이 그간의 예언서 연구를 일단락짓는 의미를 갖는다는 점. 그 후일담으로 내놓은 것이 <정감록 미스터리>라면 ‘정감록’은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우리가 무얼 알게 됐고 무얼 아직 모르는지 아는 것도 앎이고, 앎의 진전이니까.

 

 

 

애초에 발단은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성리학)를 상대로 한 ‘대항 이데올로기’가 과연 존재했던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조선후기 사회사를 전공한 저자는 지배문화와 맞선 다른 문화, 새로운 문화는 없었는지 탐색해보고자 했다. 그런 과정에서 발견한 주제가 조선의 예언문화였고 <정감록>이었다. 문자로 기록된 한국 예언서의 역사는 1350여년을 헤아린다지만, 한국 역사에서 예언문화의 전성기는 18∼20세기였고 <정감록>은 예언문화의 핵심이자 ‘태풍의 눈’과도 같은 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영조 15년이다. 1739년께 황해도, 함경도 및 평안도 지방에서 ‘정감의 참위한 글’로서 <정감록>이 유행하고 있다는 보고에 영조는 그런 ‘나쁜 기운’은 ‘좋은 기운’을 북돋우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고 훈시한다. 하지만 성리학이란 ‘좋은 기운’은 양난을 겪은 조선후기 민중들에게 더 이상 미치지 못했다. <정감록>의 주된 내용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진인(眞人)의 출현에 대한 예언과 함께 난을 피하게 해줄 명당 혹은 길지로서 십승지(十勝地)가 포함돼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조선후기 사회사적 맥락에서 <정감록>의 등장을 이해하는 저자는 이 시기에 지식의 생산과 소비가 더 이상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평민층에서도 독서인이 나오고 그들이 직접 저술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사회문화적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종이의 생산량이 늘어나 책이 흔해진 것도 <정감록>의 필사본 유행을 거들었다. 18세기의 <정감록> 초기본이 한글본이었다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중요한데, 현재 남아있지 않아서 한문본과 한글본 <정감록>이 어떤 관계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앞으로 규명해야 할 과제이자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다.

 

<정감록>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를 통해서 저자는 조선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생산·보급한 <정감록>이 동학과 증산교, 원불교 등 대표적인 신종교들의 산파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신종교가 기성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대체하기 전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불행인데,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초반 보천교라는 신종교의 신도 수가 600만명을 헤아렸다고 하니까 그 교세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알 수 있다. “때가 되면 진인이 나와서 계룡산에 도읍한다”는 <정감록> 신앙이 그토록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민중의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증거다. “<정감록>은 난세를 만난 민중의 나침반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정감록>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가.

 

12. 08. 22.

 

 

P.S. <정감록 미스터리>를 읽으며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는 당시 지배층 양반들이 읽은 <주역>과의 관계다.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용도라는 점에서는 <정감록>이나 <주역>이나 비슷하니까. 둘 사이의 접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읽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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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시사인(257호)의 '여름의 책꽂이'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책꽂이'는 분기별 서평 코너로 일년에 한 차례 정도 이 코너에 쓰는 듯싶다. 몇 권의 후보 가운데 내가 고른 책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부키, 2012)이다. 무더위가 겹쳐서 생각보다 힘들게 읽은 책이다. 하긴 저임금 노동의 힘겨운 실상을 다룬 책이기도 하다. <노동의 배신>은 <빈곤의 경제>(청림출판, 2002)라고 출간된 적이 있는데 원저의 2001년 초판을 옮긴 것이다. <노동의 배신>은 그 10년 뒤에 나온 2011년판을 옮긴 것으로 저자의 후기가 덧붙어 있다... 

 

 

 

시사IN(12. 08. 18) 열심히 일해도 지킬 수 없는 삶

 

국내에서는 ‘행복전도사’들을 통렬하게 비판한 <긍정의 배신>을 통해 처음 주목받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부키, 2012)은 2001년에 출간된 저자의 대표작이다. ‘워킹 푸어 생존기’란 문구가 책의 ‘장르’를 잘 말해준다. 생물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가 50대 후반의 나이에 저임금 노동의 실상을 직접 겪고 쓴 일종의 ‘체험 삶의 현장’이다. 시간당 6-7달러의 임금을 받고서 생활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고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그러듯이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목표였다. 이를 위해 1998-2000년에 3개 도시에서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할인마트 매장 직원 등 6가지 일을 경험한다.


사실 직접 겪어보지 않아도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1998년 전국노숙자연합에서는 시간당 8달러 89센트는 받아야 미국에서 평균적으로 침실이 하나 딸린 아파트에 살 수 있다고 발표했고, 한 공공정책 연구센터에서는 복지혜택을 받던 사람이 최저 생활비를 보장해주는 ‘생활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구할 확률이 97분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종합하면 당연히 최저임금 수준의 노동자가 수지를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과학자적 호기심으로 전체 노동인구의 30퍼센트에 달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혹 남모르는 생존 비법이라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 ‘무모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다


저자의 생존기 혹은 생존 투쟁기를 읽어나가면서 독자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일단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직업이라도 ‘아무 기술도 필요 없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각 직장은 나름대로 사회를 구성하며 고유의 분위기와 위계질서, 관습, 기준 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 고된 일이었다. 수년 동안 역기와 에어로빅으로 단련한 건강한 체질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직장에서 돌아와 집안일까지 맡아야 했다면 포기하고 말았을 거라고 말한다.

 


문제는 생활이었다. 흔히 가난한 사람들을 돈에 쪼들리게 만드는 어떠한 사치나 낭비도 하지 않았지만 어렵게 번 임금으로는 기본적인 숙식을 해결하기에도 벅찼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저자처럼 딸린 가족이 없는 홀몸에 건강하고 차까지 가진 형편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었다. 즉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액수에 훨씬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이 노동의 현실이다. 풀타임으로 일하더라도 가족을 빈곤으로부터 지킬 수 없다면 ‘열심히 일하는 것’의 의미가 무색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은 미국만의 현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한국의 워킹 푸어를 다룬 책도 없지는 않다. 현직 기자들이 발로 쓴 <4천원 인생>(한겨레출판, 2010)도 한국판 <노동의 배신>이라 부름직한 책이다. 하지만 차이는 책이 아니라 독자에 있다. 2011년판에 부친 후기에서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의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이 제일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책이 화제가 되면서 미국 연방정부가 최저임금을 인상하기도 했다니 책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워킹 푸어에게도 가장 필요한 건 독서다.

 

12. 0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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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 올림픽축구 한일전을 보고 다시 자는 바람에 늦은 아침을 먹었다. 책상에 다시 잔뜩 쌓여 있는 책들처럼 원고 일정이 빼곡한 주말이지만 포스팅도 밀려 있어서 하나라도 올려놓는다.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이달부터 '로쟈, 고전과 만나다'를 연재하는데, 그 첫 회분이다. 두 달 전에 강의한 일도 있어서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다뤘다. 서두는 연재의 프롤로그이기도 하다. 글의 제목과 소제목은 편집부에서 붙인 것이다.

 

 

사람과 책(12년 8월호) 사랑에 대한 '혁명적인 책'

 

고전이 ‘다시 읽기’의 대상이라면 고전과의 만남은 언제나 ‘두 번째 만남’이다. 고전이 다시 읽을 만한 책, 다시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책을 가리킨다면, 고전과의 만남 또한 두 번째 조우를 통해서 제값의 의미를 갖는다. 설령 무심코 지나쳤던 첫 번째 만남에서 서로 아무것도 주고받지 못했을지라도 첫 번째 만남은 두 번째 만남의 조건이자 절차로서 충분하다. “그래, 예전에 한번 읽었더랬지”라는 감상적 기억과 함께 다시금 책을 손에 들기, ‘로쟈, 고전과 만나다’는 그런 기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고전과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한 제안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 맨 먼저 다시 읽어보기로 한 저자는 에리히 프롬(1900-1980)이다. 현대사상가들 가운데 드물게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였으며 국내에서도 한때 가장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던 사회심리학자. 그런 만큼 그의 저작 대부분이 소개됐고, <자유로부터의 도피>나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같은 대표작은 오랫동안 스테디셀러로 읽혔다. 학부시절 대학가 서점에서 그의 책들은 흔하게 접할 수 있었고, 내가 처음 읽어본 것도 삼중당문고판 <사랑의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런 인지도와 대중성이 프롬에겐 함정이기도 했다. 너무 많이, 너무 쉽게 읽히는 사상가란 인식 때문에 ‘통속 사상가’로 폄하됐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나도 그의 책을 대부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진지하게 읽어보진 않았다. 일종의 ‘내리막 사상가’라고 할 수 있을까. 참고로 <103인의 현대사상>(민음사, 1996)에도, 우리시대 지성인 218인을 다룬 최성일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11)에도 ‘에리히 프롬’은 빠져 있다.

 

 


그런 흐름은 여전한 듯 보이지만, 반전의 계기가 없지는 않았다. 세기가 바뀌면서 적어도 개인적으론 그런 분위기를 재고하게끔 만든 책이 몇 권 출간됐다.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에리히 프롬과의 대화>(철학과현실사, 2001)와 르네상스적 지식인 박홍규 교수의 <우리는 사랑하는가 - 에리히 프롬의 생애와 사상>(필맥, 2004)가 국내서로는 대표적이고, 프롬이 제자이자 마지막 조수였던 라이너 풍크의 <에리히 프롬과 현대성>(영림카디널, 2003), <내가 에리히 프롬에게 배운 것들>(갤리온, 2008) 등도 내가 수집한 책들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도 우리가 에리히 프롬을 여전히 읽을 필요가 있고, 그에게서 아직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랑에 대한 상식을 부순 책
그럼 프롬 읽기의 현재적 의의란 무엇인가. 가령 우리말로 20종 이상의 번역서가 나와 있는 <사랑의 기술>(문예출판사, 2006)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제목으로는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과 같은 부류의 책으로 묶이기 쉬우나 알다시피 ‘연애의 기술’이나 ‘유혹의 기술’과는 전혀 거리가 먼 책이다. 박홍규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의 기술>이 ‘혁명적인 책’이라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상식을 철저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어떤 상식인가? 사랑이란 ‘즐거운 감정’이라고 보는 상식, 그렇게 믿는 상식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사랑은 기술이기에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주장만큼 낯선 것도 드물 것이다.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이 사랑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프롬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세 가지 전제에서 비롯한다. 첫째, 사랑을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둘째, 사랑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셋째, 사랑을 ‘하게 되는’ 최초의 경험과 사랑하고 ‘있는’ 지속적 상태를 혼동하는 것. 사람들은 보통 서로에 대해 ‘미쳐버리는’ 것을 열정적인 사랑의 증거로 간주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라고 프롬은 꼬집는다.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고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는 일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열정적 감정만을 사랑과 동일시하는 태도는 사랑의 실패로 향하는 지름길로 이끈다. 때문에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랑 또한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실존 문제와 관련한 사랑의 의의
여느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 습득 과정도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론의 습득과 실천의 습득이 그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물론 주로 이론적 검토에 바쳐진다(‘실습’까지 감당하려면 ‘워크북’이라도 붙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프롬의 이론은 인간 실존론에서 시작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곧 사랑은 동물에게는 없고 오직 인간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다. 동물의 경우 사랑과 비슷한 것으로서 애착이 있지만 그것은 본능적 기구의 일부일 뿐이다. 반면에 인간은 비록 자연의 일부이긴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다. 일단 ‘낙원’에서 쫓겨난 이상, 곧 자연과의 본래적 합일에서 벗어난 이상 인간은 새로운 조화를 찾아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이성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고독과 분리다. 이 분리에 대한 인식은 격렬한 불안의 원천이다.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욕구는 이러한 분리 상태를 극복해서 고독이라는 감옥을 떠나려는 욕구”라고 프롬은 말한다. 이 분리 상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프롬은 모든 시대, 모든 문화에서 바로 이 동일한 문제, 곧 “어떻게 자신의 개체적 생명을 초월해서 합일을 찾아내는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여 대답을 찾고자 했다고 본다. 그 대답의 기록이 곧 인간의 역사이기도 한데, 그것은 몇 가지로 간추려질 수 있다. 


가장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건 ‘도취’다. 자연과의 일체감을 회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진탕 마시고 떠드는 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잠시라도 외부 세계와의 분리감을 잊게 된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 성적 오르가슴 추구 등이 이러한 도취 추구의 방식이고 결과다. 하지만 도취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절망적 노력임에도 불구하고 일시적으로만 가능하기에 결과적으로는 분리감을 더욱 증대시킨다.


도취와는 다른 방식이 집단과의 ‘일치’에 바탕을 둔 합일이다. 자신을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내가 남들과 같고, 나 자신을 유별나게 하는 사상이나 감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관습이나 옷이나 생각을 집단의 유형에 일치시킨다면” 나는 분리감으로부터 구제된다. 이러한 일치화 경향은 인간을 표준화하며 이는 개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게다가 일치에 의한 합일은 도취만큼 강렬하거나 난폭하지 않기에 분리로 인한 불안을 진정시키기에는 불충분하다. 예술가나 직공의 ‘창조적 활동’ 역시 합일을 이루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경우의 합일은 일반적인 모델이 되기 어렵고 인간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문제점이 있다.


도취적 융합으로 이루어지는 합일, 일치에 의한 합일, 생산적 작업을 통한 합일이 모두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한 부분적인 대답에 불과하다면 가장 완전한 대답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과의 융합의 달성으로서 ‘사랑’이다. 사랑은 “가장 기본적인 열정이고 인류를, 집단을, 가족을, 사회를 결합시키는 힘”이다. 그리하여 인간 실존의 문제와 관련하여 사랑의 의의를 프롬은 이렇게 규정한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킨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
프롬에게서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은 그것이 보호와 책임, 존경, 지식 등을 기본적인 요소로 포함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사랑은 보호하고 배려한다. 사랑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응답할 준비가 갖춰져 있다는 뜻이고, 존경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의 개성을 존중하며 그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리고 보호와 책임, 존경은 지식에 의해 인도돼야 한다는 것이 프롬의 생각이다.


사랑의 대한 프롬의 이론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사랑의 유형학인데, 그는 가장 기본적인 사랑이 ‘형제애’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라고 말할 때의 사랑, 곧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 형제애이다. 형제애 다음에 놓이는 것이 ‘모성애’이며, 사랑이란 말이 가장 일반적으로 떠올려주는 ‘성애’는 세 번째 유형이다. 그리고 ‘자기애’와 ‘신에 대한 사랑’이 사랑의 나머지 유형들이다. 프롬은 “성애는 배타적이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전 인류를, 모든 살아 있는 자를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랑의 기술> 대신에 아예 '형제애의 기술'이란 제목이 붙었더라면 책에 대한 많은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12. 0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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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지난달에 공포문학 강의에서 다룬 작품이기도 한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한 대목에 관해 적었다. 인용은 문학동네판에서 가져왔다.

 

 

 

한겨레(12. 08. 11) 히스클리프,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폭염에는 제목만으로도 끌리는 책이 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그렇다. 고유명사로서 제목이 가리키는 것이 ‘언덕’이 아니라 ‘집’이기 때문에 음역하여 <워더링 하이츠>로 옮긴 번역본도 있지만, 죽음도 넘어선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자연스레 ‘폭풍’을 연상시킨다. 작품에서 ‘폭풍’(워더링)은 “비바람이 몰아칠 때 이런 높은 곳이 감당해야 하는 대기의 격동”을 가리킨다. 거기에 빗대 말하자면 <폭풍의 언덕> 독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두 주인공의 ‘감정의 격동’이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폭풍의 언덕>이 “모든 수준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고전이라고 평했지만, 우리 독서 수준이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한다는 걸 고려하면 “모든 시기의 독자들을 만족시켜주는” 작품이라고 일컬어도 무방하겠다.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중학교 때 읽은 가장 강렬한 작품 중 하나였던 <폭풍의 언덕>은 이제 40대에 다시 읽으니 가장 섬뜩한 작품이라고도 여겨진다.

 

발단은 ‘폭풍의 언덕’의 주인 언쇼가 리버풀에 갔다가 고아 소년을 하나 데리고 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히스클리프’라고 이름 붙인 이 아이를 두 자녀 힌들리와 캐서린보다 더 편애한다.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에 대한 원한을 쌓아가지만, 딸 캐서린은 그를 끔찍이도 좋아한다. 그를 못살게 굴기도 했지만, 캐서린에게 가장 큰 벌은 히스클리프와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상황은 아버지 언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반전된다. 집안 주인이 된 힌들리가 히스클리프를 하인으로 내친 것이다. 그럼에도 캐서린과 히스클리프는 굴하지 않고 한 몸처럼 붙어 다닌다.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린턴 가에 캐서린이 발을 들여놓게 되기 전까지는.

 

이웃 린턴 가의 사람들을 몰래 엿보다가 불도그에게 물려 그 집에서 몇 주간 치료를 받은 캐서린은 ‘아주 기품 있는 숙녀’가 돼 언쇼 가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다시 만난 히스클리프에게 너무 더럽다며 타박을 준다. 그러자 히스클리프는 “더러운 건 내 맘이야. 나는 더러운 게 좋아”라고 대꾸한다. 하나였던 둘이 조신함(문명)과 야만(더러움)으로 분리되는 순간이다. 캐서린은 에드거 린턴의 청혼을 받고 승낙하면서 그 이유를 하녀 넬리에게 설명한다. “지금 같아서는 히스클리프와 결혼하면 나도 천해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가 알아서는 안 돼. 넬리, 내가 그 애를 사랑하는 건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야. 그 애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기 때문이야.”

 

 

결정적인 이 고백을 히스클리프도 엿듣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결혼하면 천해질 거라는 얘기까지만 듣고서 폭풍우가 치는 밤 언쇼 가를 떠난다. 캐서린의 나머지 절반의 진실, 곧 그녀가 히스클리프를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진실이 결국 그에겐 비밀로 남는다. 그는 ‘생김새는 거무튀튀한 집시’이지만 ‘옷차림과 행동거지는 신사’가 돼 폭풍의 언덕으로 다시 돌아와 모진 복수를 시작한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오해의 산물일까? 그가 캐서린의 말을 끝까지 들었더라도 집을 떠났을까? <폭풍의 언덕>의 섬뜩한 교훈 하나는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12. 0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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