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29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강명관의 <침묵의 공장>(천년의상상, 2013)을 읽고 적은 것이다. 문제제기에 공감하면서도 해법은 아쉬운 책이었다. 국문학 비판과 관련해서도 저자의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소명출판, 2007)에서 더 나아간 것 같지 않다. 좀더 묵직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

 

 

 

시사IN(13. 05. 11) 인문학의 대학 탈출법

 

한문학자 강명관의 <침묵의 공장>을 읽으며 먼저 떠올린 건 지난 2010년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대자보를 써 붙이고 고려대를 자퇴한 김예슬이다. 자퇴의 변을 담은 <김예슬 선언>(느린걸음)에서 저자는 오늘날 대학이 ‘큰배움’이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됐으며 더 이상 ‘배움도 물음도 없는 곳’이라고 비판했다. 대학에 대한 절망을 담은 이 당찬 ‘대학 포기 선언’에 공감과 냉소가 교차했지만 어느덧 ‘과거지사’가 됐다. 한국은 침묵에 익숙한 사회다.

 

강명관은 그런 침묵에 다시 묵직한 일성을 던진다. 그가 ‘침묵하는 공장’이란 말로 가리키는 건 ‘대학’이다. 대학은 소위 학문을 하는 곳이고 교육을 하는 곳이지만, 오늘의 대한민국 대학은 “한 개인의 사회적 서열을 매기는 곳이고, 차등화된 노동자를 배출하는 곳이 된 지 오래”라는 것이 저자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것이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트라이앵글이고 대학과 인문학 역시 이 트라이앵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국가가 연구비를 무기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대학의 인문학이 본연의 인문학일 수 있느냐고 그는 묻는다. 그것은 ‘관학(官學)’이 아니냐고 일갈한다. 

 

목소리는 사뭇 높지만 생경한 비판은 아니다. 문제는 어떤 방도가 있느냐는 것이다. 문제 제기의 강도에 비하면 저자의 행동지침은 예상보다 과격하지 않다. 너무 점잖다 싶을 정도다. “가능한 한 학진(학술진흥재단)과 외부 기관을 우습게 알면서 그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한 낮추고, 등재지를 경멸하면서 최소한의 논문을 내고, 어떻게 하든지 대학의 행정적 간섭에서 최대한 벗어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권력과 지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탈출할 것!”이라는 게 그의 권유이기 때문이다. 과연 연구지원기관을 우습게 알고 국가관리 학술지를 경멸하는 것 정도로 자본과 국가, 테크놀로지로부터의 독립과 인문학 갱생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냉소적인 거리를 독립으로 간주하는 것은 혹 인문학자의 ‘정신승리법’에 불과한 게 아닐까.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해법에 의문을 갖다 보니 “인문학의 유일한 생존로는 인문학자가 다시 수공업의 장인이 되는 데 있다.”라는 저자의 선언적 주장도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국사학과 국문학의 지배적인 연구 경향에 대해 비판하는 대목에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저자는 국문학 연구가 서구 근대문학이라는 틀로 한문학을 재단하고 배제한 행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러한 배제의 결과 “양적으로 풍부한, 그리고 국문문학에 훨씬 고급한 내용을 담고 있는 한문학”이 여전히 ‘방외(方外)’에 있고, “한문학의 풍요로운 성취”는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하지만 한문학이란 무엇이던가. 저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가 물려받은 문학 유산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문학은 지배층인 남성-사대부의 것”이고, “곧 사대부 계급의 이익을 위한 문학”이다. 저자는 전근대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생활의 교직이 특징적인 면모였으며 그렇게 창작과 감상, 작가와 독자가 일치했던 ‘행복한 시절’을 우리가 망실하게 됐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그때 서로 일치했던 작가와 독자는 대부분 남성-사대부였을 것이다. ‘풍요로운 성취’와 ‘행복한 시절’에 대한 회고적 감상에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다.

 

13. 05.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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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오랜만에 옮겨놓는다(전문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30503165522§ion=04 참조). 어린이날에 맞춰 고른 책이 <그림 형제 민담집: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현암사, 2012)이고, 같이 읽은 책이 오이겐 드레버만의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 읽기>(교양인, 2013)이었다. 드레버만의 네 편의 동화를 아주 자세히 읽어낸다. 국내 저자의 해설서로는 이혜정의 <그림형제 독일민담>(뮤진트리, 2010)가 있는데, 74편에 대한 해설을 담고 있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많은 작품을 다루는 대신에 아무래도 밀도는 약할 듯싶다. '어린이날 특집' 수다라고는 했지만, 어른이 돼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무의식을 다룬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기에 <그림 형제 민담집> 역시 '다시 읽기' 거리다.

 

 

 

프레시안(13. 05. 04) 아빠가 딸의 손목 자른 이유? 핏빛 동화는 현재진행형!

 

(...)

 

이권우 : 오늘 우리가 얘기할 책에는 그림 형제 '동화책'이 아니라 <그림 형제 민담집>이라는 제목이 붙었지요. 역자 김경연 선생님은 독문학 전공자 중에서도 특이하게 아동‧청소년 분야를 전공하셨습니다. 이번에 완전판으로 번역을 하셨는데, 부제에서부터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고 못을 박았지요. 아동만 읽는 것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이야기책이라는 점에서도 저는 아주 반갑게 읽어봤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읽은 이야기와 원본의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다들 소감이 어떠셨는지 궁금하네요.

 

김용언 : '옮긴이의 말'에 핵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16쪽에 이런 구절이 있지요.

"우리는 흔히 독일어의 '메르헨(Märchen)'을 동화로 옮기는데, 메르헨은 어원상 '이야기'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 형제의 메르헨은 작가를 알 수 없이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 즉 폴크스메르헨(Volksmärchen)을 수집하여 다듬어 낸 것이다."

왜 '동화'가 아닌 '민담'이라고 쓰는 게 맞는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 형제의 이야기가 근대 독일 문학의 원류가 됐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게, 다른 작가는 차치하고서라도 E. T. A. 호프만의 소설을 읽고 나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호프만의 소설은 그림 형제 이야기에서 굉장히 많은 원형을 가져왔고, 그걸 좀 더 과장하고 괴기스럽게 변형한 버전이니까요. 게다가 어제 <그림 형제 민담집>을 읽은 다음 안데르센의 동화도 펼쳐 봤는데, 거의 비슷한 구도의 이야기들이 눈에 띄더라고요. 그림 형제가 채집한 민담이 독일만의 것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집단적인 이야기였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이현우 : 이번에 <그림 형제 민담집>을 읽으면서, 2012년이 그림 형제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 초판본 출간 200주년이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림 형제 민담집>은 1857년 최종판(7판)을 원본으로 하되, 최종판에 수록되지 않은 모든 이야기들까지 합해 완역본 개념으로 만들었더라고요. 동화에 특별한 관심이 없더라도, 이렇게 정본 역할을 할 만한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뿌듯하고요. 그 다음으로는 그림 형제 이야기가 이렇게 많았나 싶었는데…(웃음) 흔히 아는 주요 작품들이 이 완역본에선 1/4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미처 몰랐던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어요.

세 번째로는 이야기 자체가 만만치 않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아이들 용으로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고 심지어 가이드북이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권우 : 우리가 어릴 때 읽었던 그림 형제 동화가 얼마나 순화된 버전이었는지 새삼스럽더라고요. 그 많은 중요한 내용들을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바꾼 이유 역시 중요한 연구 대상 아닐까요. 어떤 문화적 환경 속에서 그림 형제의 원본을 훼손해서 들려줬을까 하는 지점들이 궁금해집니다. 게다가 200편이 넘는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비슷한 이야기들끼리의 관련성이 보이지요. 그 모티브가 어떻게 반복되고 있는지를 관찰하면, 융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림 형제로부터 보편적 무의식의 세계를 끄집어내고 싶어했던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전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죽 읽었는데요. 이현우 선생님도 앞서 얘기했다시피 가이드북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에 나온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오이겐 드레버만 지음, 김태희 옮김, 교양인 펴냄)이 좋은 예지요.

 

먼저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저자는 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에요. 내용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림 형제 이야기 중 '재투성이 아셴푸텔', '장미 공주', '라푼첼', '영리한 엘제' 네 편을 분석하면서 여성 심리 체계에 대해 아주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쳐요. 저자가 실제로 심리 상담을 진행한 예를 함께 얘기하는데, 민담과 현실의 예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결국 동화가 아닌 민담이란 말이 맞는 겁니다. 전래됐다는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의 동의를 얻었다는 뜻이므로, 그림 형제 이야기는 집단 무의식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를 읽으면서 거꾸로 <그림 형제 민담집>의 위대함을 알게 됐다고 할까요.

 

이현우 : 저도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를 보면서 단 네 편만으로도 이토록 정밀하고 다양하게 분석해놓아서 좀 놀랐습니다. 대학원에서도, 특히 문학 전공자들에게 이런 민담이 좋은 분석 텍스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각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모티브는 주로 가정의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됩니다. 몇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모 자식 간의 갈등은 매우 보편적인 요소인데, 이 이야기들을 분석하면서 자기분석 또한 가능해진다는 장점이 있죠. 전래 동화를 대하는 시각이나 태도 자체도 좀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권우 : 그림 형제 이야기가 다양한 인문적 사유로 재해석이 가능하다는 데 동의합니다. 개인적으로 국내 저작으로는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신화에서 역사로>(주경철 지음, 산처럼 펴냄)도 추천합니다. 그럼 각자 흥미롭게 읽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얘기해볼까요.

 

 

살인 사건부터 남편과의 결별까지

김용언 :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이야기가 '노래하는 뼈다귀'입니다. 일반적인 동화 카테고리는 아니고, 일종의 도덕극이라고 해야 하나…. 질투심 많은 형이 동생을 물에 빠뜨려 죽인 다음 동생의 공로를 가로채지요. 하지만 몇 년 뒤 어떤 목동이 동생의 뼈다귀를 발견하자, 그 뼈가 형의 악행을 폭로하는 노래를 시작합니다. 물론 아이들이 읽기엔 끔찍한 내용입니다. 존속 살인에다가 유령이 나타서 보복하는 얘기니까요.

 

'노래하는 뼈다귀'를 읽고 딱 떠올랐던 게 에드거 앨런 포의 '고자질하는 심장(The Tell-Tale Heart)'였어요.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이 시체를 마루에 묻었는데, 경찰이 집 안에 들어오자 결국 시체의 심장 박동 소리에 시달리다 살인죄를 자백하고 맙니다. 이런 이야기의 원형이 '노래하는 뼈다귀'가 아니었나 싶은 겁니다. 재미있는 건 보통 아시아 쪽 전래동화에는 문자 그대로의 귀신이 등장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여기서는 신체의 일부가, '신체 없는 기관'이 전체로 기능하면서 보복한다는 차이점이 흥미로웠어요.

 

두 번째로는 '파란 등잔불'이라는 작품인데요. 어제 제가 <안데르센 동화집>(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빌헬름 페데르센 외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을 들춰봤을 때 '부시통'이라는 동화가 있었어요. '파란 등잔불'과 거의 유사한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도 그 동화 읽으면서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 재독하면서는 끔찍하기까지 했어요. 그림 형제 버전에서는 병사가 몽유 상태의 공주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서 하녀로 부리며 학대하고, 안데르센 버전에서는 매일밤 몽유 상태의 공주의 뺨에 키스하지요. 큰 틀 자체는 영리한 병사가 못된 왕을 이긴다는 줄거리지만, 그 영리함을 무기로 아무것도 모르는 공주를 성적으로 학대한다는 이 서브 내러티브가 제게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그림 형제 민담집>의 또 다른 이야기 '닳아빠진 구두'의 경우엔 자진해서 지하 세계로 내려가 남자들과 밤새도록, 구두가 닳아 없어질 만큼 춤을 추는 공주들이 나오는데요. 이럴 경우에도 결국 '영리한' 남자가 그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쾌락을 추구한 공주들이 벌을 받게 됩니다.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가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는 민담들은 정말 조심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웃음)

 

이권우 :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가 바로 그런 여성의 착취 문제를 다뤄요. 특히 '영리한 엘제' 이야기를 분석하는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영리한 엘제'라고 불리면서 성장한 엘제가 한스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곡식을 베러 들판에 나갔다가 일은 안하고 잠을 자버리죠. 그걸 본 한스가 엘제 주변에 종을 단 그물을 씌워버리고요. 저자 오이겐 드레버만에 따르면, '영리한 엘제'는 아버지의 통제라는 심리적 압박 속에서 영리한 척 굴며 자란 여성이 또다시 아버지와 닮은 남성과 결혼하고 결국 실패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와 남편에 의해 광인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심리적 파국의 드라마에요.

 

그림 형제 이야기에는 대부분 비약이 존재합니다. 어느 부분에 이르면 이야기가 탁탁 튀거든요. 그게 동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 심리의 트라우마가 작용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비약이나 도약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다른 민담과도 관련지어 살펴봐야지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립니다.

 

오이겐 드레버만은 그림 형제 이야기를 통해 분석한 여성들의 트라우마에 대한 해답도 줘요. 성숙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이해와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많은 민담들이 결혼으로 끝나는 이유가 바로 그런 진정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수많은 모험과 어려움을 겪고 나서 결혼에 이르는 주된 내러티브가, 심리적인 성숙을 위한 사랑의 반려자를 찾는 과정이라는 거지요.

 

이현우 : '영리한 엘제'의 마지막이 아주 재밌어요. 방울 달린 그물을 쓴 엘제가 "난 나일까, 아닐까?"라고 헛갈리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한스에게 "안에 엘제 있어요?"라고 물어보자 한스는 시침 뚝 떼고 "엘제는 안에 있소"라고 답하죠. 그러자 엘제는 "오 하느님, 그럼 난 내가 아니구나"라며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갑니다. 여느 동화에는 이런 파격적인 결말이 없죠. 보통은 문제가 해결되면서 해피엔딩이 찾아오지만, 여기선 엘제가 떠나 버립니다. 이것 역시 동화의 관례라고 가정한다면 엘제의 떠남 역시 해피엔딩으로 읽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묘해지죠. 엘제가 부모나 남편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찾았구나, '영리한 엘제'라는 정체성에서 해방됨으로써 그 자유를 찾았다고 해석해야 하는 겁니다. 오늘날 시각에서 봤을 때에도 아주 도발적인 결말입니다.

 

김용언 : 그 마지막 장면에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생각났습니다.(웃음) 자꾸 자신의 키가 줄었다 커졌다 하자 혼란에 빠진 앨리스가, "넌 누구냐?"라는 쐐기의 질문에 "글쎄요, 선생님. 지금 현재는 저도 모르겠군요. 오늘 아침 제가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제가 누구였는지 알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뭔가 여러 번 변했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는 그 장면이요. '나'라는 존재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되면서 시작되는 혼란이 어린 시절과의 작별이라고 한다면, 저 역시 '영리한 엘제'가 해피엔딩이라는 말씀에 동의합니다. 다시는 부모님이나 남편의 믿음에 그대로 부응하면서 살지 않아도 되니까요.

 

(...)

 

13. 05.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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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24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부산에 내려가기 전에 급하게 써보낸 원고인데,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어크로스, 2013)를 다뤘다. 언젠가 <뉴라이트 사용후기>(개마고원, 2009)도 다룬 적이 있기에 나로선 구면이다(<안티조선 운동사>(텍스트, 2010)는 읽지 않았지만 데뷔작인 <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텍스트, 2009)를 읽은지라 왠지 친숙하다). 20대 담론이 이슈가 되면서 호명된 논객/필자군(한윤형을 비롯해 노정태, 김현진, 김민하, 조연호, 박가분 등)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듯싶다.

 

 

 

주간경향(13. 05. 07) 잉여세대의 문제는 시대의 문제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자칭 ‘청년논객 한윤형의 잉여탐구생활’이다.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세대의 자화상과 세대의식, 사회적 열패감과 무기력을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의식과 사회비평을 두루 담았다. 저자는 “군대를 다소 늦게 다녀온 25살 청년이 31살이 되는 동안 사적인 공간과 담론의 영역에서 어떻게 분투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자평하면서 야심도 털어놓았다. “또래에게는 위안을 주고, 다른 세대에겐 이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읽어봐야 하는 책이 되면 좋겠다”는 야심이다. 어떤 위안을 건네고, 어떤 이해를 돕고자 하는가.

전체적인 골자는 세대 문제가 결국은 시대의 문제라는 점이다. 잉여세대 문제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시대를 반영하는 어떤 세대의 문제’일 뿐이다. 특정 세대가 뒤집어쓸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다. 우석훈·박권일의 <88만원 세대>(2007)가 세대간 착취문제를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켰지만, 한윤형이 보기에 “세대 담론은 계급문제가 철저하게 정치에서 배제된 결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담론이다. 게다가 <88만원 세대>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건 ‘원래부터 88만원 정도를 벌었던 젊은이들’의 관심이 아니라 그런 빈곤층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중간계급의 불안감이었다. 그래서 88만원 세대 담론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쪽은 명문대생들이었다(루저들의 정서를 잘 표현한 노래 ‘싸구려 커피’를 부른 가수 장기하가 명문대 출신인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계급 불평등의 세대 전이’가 ‘88만원 세대 담론’의 성공 요인이었다.

중산층의 불안심리 내지는 중간계급의 욕망과 결부돼 있는 세대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 문제와 직결된다. 저자가 간추린 바에 따르면,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서 자산을 축적했고, 그와 함께 정치적으로 보수화됐다. 기업 활동에 투자돼야 할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자연스레 기업 경쟁력은 떨어졌고, 이를 보충하기 위한 손쉬운 방법이 노동시장에 신규로 진입한 젊은 세대의 임금을 낮추는 것이었다.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춘 것이 한국식 자본주의의 운용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 중산층 자신의 자녀가 월급으론 독립을 꿈꿀 수 없는 사회다. 이 ‘멋진 신세계’에선 부모가 몇억원 보태주지 않으면 전셋집 하나 장만하기도 어려워 어지간한 청춘들은 취업,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3포세대’로 전락한다.

이러한 구조적 현실을 외면한 멘토 담론은 아무리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어낸다 하더라도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 공허는 잉여세대를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386세대의 위선과도 맞닿아 있다. 가령 교육문제를 보더라도 386세대에게선 한국의 교육 현실에 대한 급진적 비판과 자기 아이를 외국이나 대안학교에 보내는 일이 양립 가능하다. 우파가 자식을 미국으로 보낼 때 소위 좌파는 독일이나 핀란드로 보내는 것 정도의 차이다. ‘결국 다 똑같다’는 냉소는 그래서 나온다.

물론 냉소가 우리를 구제해주지는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창의성을 말살하는 값싸고 질 나쁜 공교육’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이 오히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일은 아닐까라는 저자의 반문에서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제안은 진보담론이나 개혁정책이 실효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한국 사회의 제도와 문화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지에 대한 매우 세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상황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대학생의 85%가 비정규직이 되는 세상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동류의식을 가능하게 한다. 이건 계급간 연대의 문제가 아니라 당사자 문제다. ‘루저’와 ‘잉여’를 양산해내는 사회체제와 경제구조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가능할까?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우리’를 발견하고 눈짓을 교환할 때 균열은 시작된다.

 

13.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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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금요일 저녁에는 부산 인디고서원의 청년 인문학 동아리 '인빅터스'의 초청을 받아 인디고 청소년들과의 만남 행사를 갖는다(모임공지는 http://www.indigoground.net/jBoard/view.html?bcode=indigo_23&no=854&page=1 참조).

 

 

시간: 4월 26일 금요일 저녁 6시~8시

장소: 에코토피아 옆 건물 3층 '아람샘-b612' 교실

행사는 30분간의 강연과 1시간 30분 동안의 질의웅답으로 이루어질 예정인데, 주로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등의 책이 화제가 될 예정이다. 부산에 계시는 분들 가운데 혹 관심이 있으시다면 참고하시길. 개인적으로는 인디고서원에 처음 방문하게 돼 기대가 크다...

 

13. 04. 25.

 

 

P.S. 인디고서원 얘기가 나온 김에 인디고 청소년들이 만드는 잡지 계간 <인디고잉>의 최근호들도 링크해놓는다. 어느새 38호까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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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고전 강좌를 계속해오고 있는데, 5월에는 플라톤의 <국가>를 읽기로 했다. 재작년에 박종현 선생의 번역본 <국가>(서광사, 2005)를 교재로 읽은 적이 있고, 이번에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본 <국가>(숲, 2013)으로 읽으려고 한다. 강의 소개와 일정은 아래와 같다(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91).  

 

 

국가와 권력을 만들어온 인간사회는 그에 대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책들의 원조이자 ‘이상국가’ 문헌의 원조인 플라톤의 <국가>를 로쟈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함께 읽습니다. 이 책은 주로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정의에 관하여’란 부제가 붙여지기도 합니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동굴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동굴의 비유’와 <반지의 제왕>이 영감을 얻은 ‘귀게스의 반지’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기도 하죠. 플라톤의 국가론은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정치체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시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 많은 신청 부탁드립니다.

5월 3일 ~ 5월 31일 (4주)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30분 ~ 9시 30분(17일은 공휴일)
교재: 플라톤 <국가>, 천병희 옮김, 숲, 2013.

 

13. 0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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