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IN(321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보통 3-4권의 후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막판에 한권을 골라 쓰게 되는데, 지난주에 낙착을 본 책이 데이비드 베인브리지의 <중년의 발견>(청림출판, 2013)이었다. 면밀하게 읽어보려고 원서도 주문해 놓은 책이다. 바버라 스트로치의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해나무, 2011)와 나란히 읽으면 더 효과적일 듯싶다...

 

 

 

시사IN(13. 11. 09) 변하니까 중년이다

 

인생의 사계절이라면 흔한 비유에 맞추면 가을은 중년의 계절이다. 여름과 겨울 사이, 한풀 꺾였지만 그렇다고 아직 한물간 건 아니다. 그렇다고 노년으로 가는 과도기이기만 한 걸까. 중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이런저런 생각에 손에 잡은 책이 데이비드 베인브리지의 <중년의 발견>(청림출판)이다. 생물학자인 저자도 딱 중년에 접어들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놀라워하며 쓴 책이다


청년기나 노년기에는 없는 측면들 때문에 중년은 독특하며, 중년기의 변화는 갑작스럽다. 게다가 중년은 다른 생물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간 고유의 현상이다. 수명이 늘어나 노년의 삶이 길어진 건 인류사에서 극히 최근에 일어난 이례적인 일이지만 중년은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 살아온 인간은 유아기의 고비를 넘긴다면 대부분 마흔 살 넘게까지 살았고, 이것은 자연선택의 결과다. 곧 용도가 다해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또다른 한 국면이라는 얘기다.

 

 


물론 ‘새로운 용도’는 예측 가능하다. 다른 생물종과 달리 인간은 유난히 미숙한 아기로 태어나 오랜 성장기를 겪는다. 따라서 다른 영장류에 비해 훨씬 많은 자원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며 이를 생물학에서는 ‘부양투자’라고 부른다. “자식이 너무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자연선택의 영향으로 우리가 번식을 멈추는 대신 자식에게 집중할 시간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번식 대신에 부양’이 중년이 떠안은 과제이자 존재 이유다.


그렇게 중차대한 과제를 수행해야 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중년에 접어들면 흰머리가 생기고 주름살이 늘며 피부는 탄력을 잃게 되는가. 새 과제에만 집중하라는 의미란다. 진화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애자 커플의 출산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자식을 낳을 가능성은 줄어들며 따라서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외모의 매력도 필요가 줄어든다. 불필요한 투자를 하지 않는 우리의 몸은 외모에 그만큼 덜 신경을 쓰게 된다. 게다가 생식활동이 줄어듦에 따라 더 적은 에너지를 소모하게끔 몸을 재구성하기 때문에 중년이 되면 기초대사량이 줄어든다. 살이 찌는 것은 그 때문이며, 이를 막으려면 나이를 한 살씩 먹을 때마다 하루기준 10칼로리씩 줄여서 섭취해야 한다.


좋은 소식도 있다. 보통의 상식과는 달리 중년의 뇌가 인지력이 가장 뛰어나다. 외부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는 점차 느려지지만, 전반적으로 중년의 뇌는 좋은 기능을 유지한다. 중년의 뇌는 구술능력, 공간인식, 계산, 추리, 계획 세우기 등 다양한 영역에서 청년기의 뇌를 앞선다. 저자는 그 이유를 더 많이, 더 열심히 생각해서가 아니라 ‘다르게’ 생각해서인 듯하다고 말한다. 즉 중년이 된다고 해서 더 영리해지거나 더 어리석어지는 건 아닐 테지만, 동일한 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신적 수단을 다양하게 바꿔본다는 데 강점이 있다. 그런 ‘다른 생각’은 중년이란 나이가 갖는 이중성 혹은 양면성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진화적 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의 충고는 우리가 거기에 속박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게 된 이후에도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젊은 외모를 유지하려 애쓰고, 늦둥이를 낳는 시도도 하고, 젊었을 때 못해봐서 아쉬운 짓도 한번 저질러보라.”

 

13. 11. 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다뤘다. 알다시피 다수의 번역본이 나와 있는데(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6-7종이다), 작중에 나오는 'nice'의 번역을 중심으로 세 가지 번역본을 골랐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위대한 건, 혹은 대단한 건 개츠비, 아니 그의 본명인 개츠의 환상이라는 게 감상의 요지다. 이 환상은 곧 아메리칸 드림 자체이기도 하다.

 

 

 

한겨레(13. 11. 04) 위대한 건 개츠비의 ‘환상’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를 읽고 나면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어째서 ‘위대한’ 개츠비인가. 주인공의 이름대로 ‘제이 개츠비’라고 하거나 ‘개츠비와 데이지’라고 했어도 무방했을 작품이다. 정작 피츠제럴드는 아내와 편집자가 고른 ‘위대한 개츠비’란 제목을 막판까지도 꺼렸다는데, 그래도 그가 마음에 두었다는 ‘황금모자를 쓴 개츠비’나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보다는 훨씬 더 그럴듯한 제목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대신할 뻔했던 제목 ‘웨스트에그의 트리말키오’에서 웨스트에그는 개츠비의 저택이 있는 지명이고, 트리말키오는 로마시대의 소설 <사티리콘>에 등장하는 벼락부자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화려한 볼거리가 되지만, 소설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건 벼락부자 개츠비의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사치스런 파티다. 5인조 편성이 아닌 완벽한 오케스트라가 동원될 정도다.

 

단지 부를 과시하거나 기분을 내보려는 파티가 아니다. 개츠비는 만(灣) 건너편 이스트에그에 사는 첫사랑 데이지가 파티 소문을 듣고 찾아와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데이지와의 재회는 옆집 이웃이자 소설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데이지와 친척뻘인 닉에게 부탁해 마련한 자리였다. 개츠비는 꿈에도 그리던 만남을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당혹스러워한다. “5년에 가까운 세월! 그날 오후에도 데이지가 그의 꿈에 미치지 못한 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데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그의 환상 때문이었다. 그의 환상은 그녀를 넘어섰고 모든 것을 넘어섰다.”(열림원)

 

데이지밖에 모르는 남자가 개츠비이건만 그의 환상은 놀랍게도 데이지를 넘어선다! 여기에 개츠비의 비밀이 있는 건 아닐까. 닉에게 들려준 바에 따르면 개츠비의 부모는 실패한 농사꾼이었다. 그는 한번도 그들을 부모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열일곱 살에 ‘제임스 개츠’라는 원래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개명한다. 말하자면 개츠비는 개츠의 ‘이상적 자아’다. 놀라운 것은 그가 자기 이상 혹은 환상을 현실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록 우연히 만난 벼락부자와 암흑가 거물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그가 어릴 때부터 출세하기로 작정하고 철저하게 자기 계발에 애쓴 결과다. 개츠비판 아메리칸드림인 것이다.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 아메리칸드림의 대미여야 했다. 그녀는 5년 전 그가 아직 출세하기 전에 처음 만난 ‘멋진’ 여자였다. ‘멋진’은 ‘나이스’(nice)의 번역인데, ‘우아한’(민음사)이나 ‘상류층’(문학동네)으로도 번역된다. 개츠비가 빈털터리라는 이유로 실연당한 걸 고려하면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다. 이제 자신 또한 상류층의 멋진 남자가 돼 돌아온 개츠비는 5년간의 공백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한다. 데이지에게는 톰 뷰캐넌과의 5년간의 결혼생활이다. 톰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해 달라는 개츠비의 요구에 데이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당신은 너무 많은 걸 바라는군요! 나는 지금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는 두 가지 환상에 도전한다. 처음엔 개츠비가 되는 것, 그리고 데이지의 완벽한 사랑을 얻는 것. 그 환상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고 또 파국으로 몰아넣는다. 진심이건 반어이건 위대한 건 개츠비가 아니라 그의 환상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13. 11. 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좌 공지다. 푸른역사아카데미의 11-12월 강좌에서 '세계문학 다시 읽기'를 진행하기로 했다(신청은 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123).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오월의봄, 2012)에 견주어 제목은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2.0'이라고 붙여졌다(<이방인>과 <고도를 기다리며>는 <로쟈의 세계문학 다시 읽기>에서 한번 다뤘던 작품이다). 내가 붙인 제목은 아니지만 적절하게 여겨진다. 매주 한 작품씩 모두 8편을 다루게 되는데(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에 진행된다), 이 리스트는 내가 정했다. 언젠가 한번 읽은 작품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분들은 참고하시길. 일정은 아래와 같다(수강은 월별로 하실 수 있다).

 

 

11월

 

1. 11월 04일_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2. 11월11일_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3. 11월 18일_ 카프카의 <변신>

 

 

4. 11월 25일_ 카뮈의 <이방인>

 

 

12월

 

1. 12월 02일_ 오웰의 <1984>

 

 

2. 12월 09일_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3. 12월 16일_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12월 23일_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13. 10. 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달 책&(423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얼마전 개봉됐던 신작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관련서들을 둘러본 글이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의 책들을 알게 된 개인적인 소득이다.

 

 

책&(13년 10월호) 저패니메이션의 거장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벼랑 위의 포뇨>(2008) 이후 5년만에 신작 <바람이 분다>(2013)를 내놓고 은퇴를 선언했다. 1963년 다카하타 이사오와 도에이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내디뎠으니 50년 경력이다. 과거에도 은퇴를 번복한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73세의 나이를 은퇴 이유로 들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번복이 어려울 전망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건 ‘나이 든 노인의 욕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평균적으로 5년에서 7년의 시간이 소요되기에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 거장의 창작활동이 마무리되는 듯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애니메이션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을 이룬 것일까. 몇 권의 책을 길잡이 삼아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단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겠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의 『이미지의 제국』은 부제대로 ‘일본 열도 위의 애니메이션’의 위상과 역사, 대표 작가들을 소개한 책이다. 입문서를 겸할 수 있지만 서술은 상당히 깊이 있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태동과 성장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함께 대표작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제시한다. 동시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1960-70년대가 중요한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신화적인 세 작품으로 저자는 <우주 소년 아톰>과 <우주 전함 야마토>, 그리고 <기동 전사 건담>을 든다.

1963년에 처음 전파를 타서 약 4년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우주 소년 아톰>은 일본의 국민적 서사를 제공한 작품이다. 고도 경제 성장기였던 1960년대 일본에서 텔레비전은 국민적 미디어였고,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은 월트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 같은 상징성을 얻었다. 70년대 중반 TV시리즈로 방영됐지만 <알프스 소년 하이디>(1974)에 밀려 중도 하차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우주 전함 야마토>는 마스다 도시오의 극장판으로 1977년에 개봉돼 침체에 빠져 있던 일본 영화의 붐을 가져온 작품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 공군의 공격으로 침몰한 전함 야마토는 2199년 미래 시점에서 부활해 초토화된 지구를 배경으로 인류의 장래를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우주전함이 고도성장의 엔진을 단 일본의 비유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우주 전함 야마토>에 의해 촉발된 애니메이션 붐은 1979년 도미노 요시유키의 TV시리즈 <기동 전사 건담>에 의해 더 확대되는데, 이 작품은 <마징가 Z>(1972)로 대표되는 거대 로봇 장르가 <우주 전함 야마토>의 하드보일드한 우주 전쟁 서사와 결합한 형태였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고쳐 쓰려고 시도한 <우주 전함 야마토>와는 다르게 <기동 전사 건담>에서의 진정한 전쟁은 두 국가 사이에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다. 국가와 개인의 이 분열은 저패니메이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 데뷔작 <미래 소년 코난>(1978)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의 SF작가 알렉산더 케이의 소설 『놀라운 홍수』를 각색하여 TV시리즈로 만든 이 작품은 전쟁에 의한 문명세계의 멸망을 서사의 바탕에 깔고 있어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와 함께 ‘포스트묵시록 3연작’으로 불린다. 이들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은 미야자키는 1985년 지브리 스튜디오를 세우고 <이웃집 토토로>(1988),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의 화제작을 발표하면서 세계적 거장으로 떠올랐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에게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영화상 등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한 소개와 함께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는 책으론 시미즈 마사시의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와 무라세 마나부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숨은 그림 찾기』가 있다. 전자는 개성 있는 시각의 작품 해석을 제공하며, 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유기체적 세계관을 분석한다. 국내서로는 김윤아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현대 일본 신화 3부작’으로 묶으면서 이들 작품에 내재된 일본의 정치신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조명을 한다.

바깥의 평가와 비교해볼 수 있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생각이다. 그의 인터뷰와 기고문들을 모은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이하 출발점)』과 『미야자키 하야오: 반환점 1997-2008(이하 반환점)』은 거장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다(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그의 『미야자키 하야오: 도착점』이 더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출발점』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에서부터 좋아하는 책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망라하고 있다면, 『반환점』은 네 편의 대표작에 대한 인터뷰가 중심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마디로 ‘잃어버린 세계로의 동경’이라고 말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이 공상에 세계에서 놀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 바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거장의 생각이다.

 

13. 10.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앙일보에 실린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크리스티아 프릴랜드의 <플루토크라트>(열린책들, 2013)를 다룬 것인데, '슈퍼 리치', 신흥 갑부들을 다룬 책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현단계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필수적인 책이다. 자본주의 이행기의 러시아를 다룬 저자의 전작, <세기의 세일: 러시아의 두번째 혁명 이야기>도 바로 주문했는데, 이 또한 소개되면 좋겠다.

 

 

 

중앙일보(13. 10. 12) 1대 99의 시대 ? 아니 0.1대 99.9의 시대

 

플루토크라트? 일단 제목부터 확인하자. 그리스어로 부(富)를 뜻하는 ‘플루토’와 권력을 의미하는 ‘크라토스’의 합성어로 ‘부와 권력을 다 가진 부유층’을 가리킨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승자로 부상한 0.1%의 신흥 갑부들이다.

이른바 ‘글로벌 수퍼리치’는 어떤 이들이고, 또 그들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움직이는가. 언론인이자 산업 전문가인 저자는 플루토크라트의 세계를 놀랄 만큼 생생하고 정밀하게 보여준다. 곧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계급투쟁이 아니라 구체적인 데이터이다”라는 주장에 충실하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간단한 데이터를 보자. 2005년을 기준으로 빌 게이츠의 재산은 465억 달러이고, 워런 버핏은 440억 달러다. 두 사람의 재산 합계는 미국 전체 인구의 하위 40%에 해당하는 1억 2,000만 명의 재산 총계 950억 달러에 육박한다. 예외적인 억만장자들이라고만 치부할 순 없다. 그들을 정점으로 한 새로운 수퍼엘리트 계급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플루토크라트와 그 나머지’로 양분됐다.

새로운 플루토크라트의 등장 배경은 무엇인가. 레이건과 대처 시대의 부자 감세다. 레이건 행정부는 최상위 한계세율을 70%에서 28%로 삭감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더 가속화했다. 기술혁명과 세계화, 그리고 워싱턴 컨센서스의 등장이 세계경제를 변화시켰다.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본격 편입되면서 이들 신흥 국가들이 첫 번째 도금시대(鍍金時代)를 겪는 동안 서구사회는 두 번째 도금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이 쌍둥이 도금시대의 수혜를 최상층이 독점한 결과가 플루토크라트의 시대를 만들었다. 미국의 중산층이 차이나 신드롬에 밀려 점점 일자리를 잃어가는 동안에도 수퍼엘리트들은 천문학적인 소득을 올리며 부를 축적했다.

과거 부자들이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기에 부자였다면 오늘날 플루토크라트들은 ‘일하는 부자’다. 그들은 부를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창조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수퍼엘리트가 되기 위한 중요한 자질이 시차 적응이라고 할 만큼 그들은 전세계를 누비고 다닌다. “우리는 아내보다 비행기 승무원들을 더 잘 아는 그런 사람들이죠.”라고 말하는 부류다.

또한 자본주의를 일종의 해방신학으로 받아들여서 자유로운 시장이 곧 자유로운 인간의 조건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개별 국가의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구애받지 않는 세계시민이고자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들이 글로벌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플루토크라트는 공익활동에도 열성적이어서 ‘박애 자본주의’의 실천자이기도 하다. 자본가는 선행을 실천해야 하고 선행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진정한 자본가가 되어야 한다는 빌 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에 대한 신념은 이들의 생각을 대변한다.

사실 빈부격차라면 원래 있었던 거 아닌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현재의 격차는 유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새롭다. 또 사정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미국의 경우, 1940~70년대 사이에는 부유층과 나머지 사이의 소득 격차가 줄어들었다. 상위 1%의 소득비중이 1940년에 16%였던 것이 70년에는 7% 아래로 떨어졌다. 빅3 자동차 기업과 노조와의 대타협으로 중산층의 소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중산층의 소득은 정체된 반면 최상층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1980년 미국 CEO의 평균소득이 근로자 소득의 42배였지만 2012년에는 380배로 치솟았다. 트리클 다운(Trickle Down·낙수효과)은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2년밖에 지나지 않은 2010년에도 세계경제는 전체적으로 6%나 성장했지만, 이 기간 소득 증가분의 93%는 상위 1%가 차지했다. 파이는 커지더라도 많은 사람의 몫은 오히려 더 줄어드는, 말 그대로 승자독식사회다.

흥미로운 것은 그 상위 1%도 분화돼 있다는 점. 부의 독점과 빈부격차의 확대에 대한 문제제기가 월가 점령시위의 이슈이기도 했던 ‘1 대 99 사회’이지만, 저자는 그 1% 내에서도 0.1%의 갑부들과 그 아래 0.9%의 부자들은 차원이 다르다고 말한다. 83년과 2000년 사이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부자 목록에서도 상위 25%는 4.3배 더 부유해진 반면에 하위 75%는 2.1배 부유해지는 데 그쳤다. 5천만 달러 이상의 재산을 가진 ‘초고액 순자산 보유자’는 2011년 기준으로 전 세계에 8만4700명이 있는데, 그 중 2700명은 5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최상층과 중상층의 분리와 격차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백만장자들이 스스로 억만장자의 뒤를 따라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있어야, 슈퍼엘리트들이 민주주의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믿음이 무너진다면? 계급전쟁은 1% 대 99% 사이에서가 아니라 0.1%(억만장자) 대 0.9%(백만장자) 사이에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99%는 이 계급전쟁의 구경꾼에 불과한 것인가.

플루토크라트를 대놓고 비판하진 않지만, 부의 차이가 문화적 차이를 낳고 사회적 연대를 가로막는다는 저자의 지적은 온당하다. 사회적 분열과 적대 속에서도 과연 플루토크라트는 그들의 부와 힘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현단계 자본주의가 어디까지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우리 ‘나머지’들이 탐독할 이유가 분명해 보인다.

 

13. 10. 12.

 

 

 

P.S. <플루토크라트>의 번역은 막힘이 없지만, 적어도 한 곳은 오역 같다.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진 젊은이를 뜻하는 'young fogey'라는 표현도 <스펙테이터>가 1984년에 만들어낸 신조어다."(99쪽)에서 '1984년에 만들어낸 신조어'는 '<1984>식의 신어'가 아닐까. 소설 <1984>에 나오는 '뉴스피크(New Speak)' 말이다. 한편, 슈퍼리치를 다룬 책들은 이미 여럿 소개돼 있다. <플루토크라트>에다 더 얹어서 읽어볼 수 있겠다.

 

 

 

동시에 유례 없는 경제적 불평등이 지불해야 할 대가에 대한 책들도 필독해볼 만하다. 래리 바텔스의 <불평등 민주주의>(21세기북스, 2012), 원제가 '승자독식의 정치학'인  제이콥 해커와 폴 피어슨의 <부자들은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21세기북스, 2012), 그리고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열린채들, 2013) 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