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책&(423호)에 실은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얼마전 개봉됐던 신작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관련서들을 둘러본 글이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의 책들을 알게 된 개인적인 소득이다.
책&(13년 10월호) 저패니메이션의 거장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벼랑 위의 포뇨>(2008) 이후 5년만에 신작 <바람이 분다>(2013)를 내놓고 은퇴를 선언했다. 1963년 다카하타 이사오와 도에이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계에 발을 내디뎠으니 50년 경력이다. 과거에도 은퇴를 번복한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73세의 나이를 은퇴 이유로 들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번복이 어려울 전망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작업을 더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그건 ‘나이 든 노인의 욕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 평균적으로 5년에서 7년의 시간이 소요되기에 더 이상은 무리라는 것이다. 이로써 한 시대를 풍미한 세계적 거장의 창작활동이 마무리되는 듯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애니메이션은 무엇이고, 그는 무엇을 이룬 것일까. 몇 권의 책을 길잡이 삼아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 보자.
일단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요하겠다. 애니메이션 비평가 김준양의 『이미지의 제국』은 부제대로 ‘일본 열도 위의 애니메이션’의 위상과 역사, 대표 작가들을 소개한 책이다. 입문서를 겸할 수 있지만 서술은 상당히 깊이 있으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태동과 성장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함께 대표작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제시한다. 동시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1960-70년대가 중요한데,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신화적인 세 작품으로 저자는 <우주 소년 아톰>과 <우주 전함 야마토>, 그리고 <기동 전사 건담>을 든다.
1963년에 처음 전파를 타서 약 4년간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우주 소년 아톰>은 일본의 국민적 서사를 제공한 작품이다. 고도 경제 성장기였던 1960년대 일본에서 텔레비전은 국민적 미디어였고,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은 월트 디즈니의 미키 마우스와 같은 상징성을 얻었다. 70년대 중반 TV시리즈로 방영됐지만 <알프스 소년 하이디>(1974)에 밀려 중도 하차했던 마츠모토 레이지의 <우주 전함 야마토>는 마스다 도시오의 극장판으로 1977년에 개봉돼 침체에 빠져 있던 일본 영화의 붐을 가져온 작품이다. 1945년 태평양 전쟁에서 미 공군의 공격으로 침몰한 전함 야마토는 2199년 미래 시점에서 부활해 초토화된 지구를 배경으로 인류의 장래를 책임지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우주전함이 고도성장의 엔진을 단 일본의 비유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우주 전함 야마토>에 의해 촉발된 애니메이션 붐은 1979년 도미노 요시유키의 TV시리즈 <기동 전사 건담>에 의해 더 확대되는데, 이 작품은 <마징가 Z>(1972)로 대표되는 거대 로봇 장르가 <우주 전함 야마토>의 하드보일드한 우주 전쟁 서사와 결합한 형태였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을 일본의 승리로 고쳐 쓰려고 시도한 <우주 전함 야마토>와는 다르게 <기동 전사 건담>에서의 진정한 전쟁은 두 국가 사이에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사이에서 벌어진다. 국가와 개인의 이 분열은 저패니메이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독 데뷔작 <미래 소년 코난>(1978)은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의 SF작가 알렉산더 케이의 소설 『놀라운 홍수』를 각색하여 TV시리즈로 만든 이 작품은 전쟁에 의한 문명세계의 멸망을 서사의 바탕에 깔고 있어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와 함께 ‘포스트묵시록 3연작’으로 불린다. 이들 작품을 통해 명성을 얻은 미야자키는 1985년 지브리 스튜디오를 세우고 <이웃집 토토로>(1988),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등의 화제작을 발표하면서 세계적 거장으로 떠올랐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그에게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영화상 등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대한 소개와 함께 개별 작품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는 책으론 시미즈 마사시의 『미야자키 하야오 세계로의 초대』와 무라세 마나부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숨은 그림 찾기』가 있다. 전자는 개성 있는 시각의 작품 해석을 제공하며, 후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에 나타난 유기체적 세계관을 분석한다. 국내서로는 김윤아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현대 일본 신화 3부작’으로 묶으면서 이들 작품에 내재된 일본의 정치신화와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판적인 조명을 한다.
바깥의 평가와 비교해볼 수 있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의 생각이다. 그의 인터뷰와 기고문들을 모은 『미야자키 하야오: 출발점 1979-1996(이하 출발점)』과 『미야자키 하야오: 반환점 1997-2008(이하 반환점)』은 거장의 육성으로 직접 듣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하다(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그의 『미야자키 하야오: 도착점』이 더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출발점』이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에서부터 좋아하는 책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망라하고 있다면, 『반환점』은 네 편의 대표작에 대한 인터뷰가 중심이다.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한마디로 ‘잃어버린 세계로의 동경’이라고 말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다른 세계에서 태어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사람들이 공상에 세계에서 놀고자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잃어버린 가능성에 대한 동경’이 바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거장의 생각이다.
13.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