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bboom.naver.com/board/get.nhn?boardNo=9&postNo=2336870&entrance=

 

 


누군가가 나를 쫓아오는 꿈을 꾸면 이상하게 내 몸이 무겁게 느껴진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안 되는 분은 링크의 GIF 파일을 보면 된다. 파일 속 주인공이 어떻게 달리는지 보시라. 양다리를 흐느적거리면서 걸어간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꿈속에서 빠르게 달리는 일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힘껏 달리고 싶어도 양다리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꿈도 악몽에 속한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는 꿈, 특히 자신이 생각하는 악몽에서 영감을 받아 공포소설을 썼다. 그 작품들 중 하나가 <데이곤(Dagon)>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진흙 개펄 한가운데에 누워 있다. 두려움에 빠진 주인공은 진흙 개펄에 빠져나오기 위해 젖 먹던 힘을 다해 필사적으로 기어간다. 그렇게 해서 주인공이 발견한 것은 좌초된 보트이다.

 

 

 

 

 

 

 

 

 

 

 

 

 

 

 

 

 

 

 

 

일반적으로 소설이나 영화 배경으로 나오는 진흙 수렁은 인간의 목숨을 위협하거나 무시무시한 곳 혹은 괴생명체가 사는 것으로 전해지는 장소로 설정된다. 코난 도일의 장편소설《바스커빌 가의 개》는 음침한 황무지가 펼쳐진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마을 주민들은 황무지의 진흙 늪지대를 금단의 장소로 여긴다. 이곳에 한 번 빠지면 살아남기 힘들고, 진흙 늪지대 부근에 정체불명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어떤 독자가 진흙 개펄에 빠진 <데이곤>의 주인공이 보트로 향하는 과정이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흙 수렁에 빠지면 이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동하는 과정에서 체력이 고갈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수렁에 헤어 나오지 못하면 아사(餓死)에 이를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데이곤을 옹호하며>라는 글을 써서 독자가 의문을 제기한 묘사에 대해 해명했다.

 

“화자는 진흙 속에 반쯤 몸이 잠겨 있지만, 기어서 갈 수 있습니다! 기어가는 끔찍한 과정이 전부 생생한 꿈으로 남아 있어서 잘 압니다. 아직도 그 끈적끈적한 진흙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걸요!” (《러브크래프트 전집 1》 발췌 인용)

 

러브크래프트는 악몽 같은 순간을 그대로 묘사했을 뿐이다. 그도 꿈속에서 자신의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불쾌한 경험이 겪었을 것이다. 악몽을 경험하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의 눈앞에 악몽과 같은 상황을 겪는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는다. 독자들이 우스갯소리로 ‘무서우면 도망치지 왜 그걸 끝까지 지켜보고 있느냐?’고 지적할 정도다. 이러한 클리셰가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한계로 보고 있지만, 러브크래프트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힘든 끔찍한 공포에 지배당한 인간의 감정을 실감 나게 표현한 것으로 옹호하고 싶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무작정 달리는 꿈 다음으로 가장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갑자기 아래로 추락하는 꿈이다.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본 적이 없는데도 그 꿈을 꾸고 나면 진짜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 든다.

 

 

 

 

 

 

 

 

 

 

 

 

 

 

 

 

 

토끼를 쫓던 앨리스가 아주 깊숙한 우물 바닥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는 모습은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일이다.

 

토끼 굴은 똑바로 뻗어 있는 게 꼭 수평 갱도 같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푹 하고 길이 꺼졌다. 하도 불시에 닥친 일이라 앨리스는 뭐라도 붙잡거나 저항해 추락하지 않도록 해볼 틈이 없었다. 이윽고 앨리스는 자신이 아주 깊은 우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석과 함께 읽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7쪽)

 

 

인간은 현실의 진흙 구덩이 속에서 뒹굴고 다투면서 살아간다. 그렇지만 소설가는 좀 특별하면서도 다르다. 소설가는 이 세계 너머에, 또는 그 안쪽 깊이에 이 세계와 다른, 혹은 똑같을 수도 있는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것은 꿈꾸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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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2-21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몰되는 일..보통 중독성이 심한 것들.도박..도벽...음주...지독한 섹스..마약...다 진흙에 한번 빠지면 자력으로 나오기가 무척 어려운 것들이죠....

cyrus 2016-12-22 08:58   좋아요 2 | URL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마약, 음주, 섹스에 탐닉하기 쉬운데 오히려 마 음에 공허감을 유발할 뿐입니다. 그래서 중독 증세에 시달리면 정신적으로 더 피폐해집니다.
 

 

 


베스트셀러 순위는 독자의 책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출판사들은 자사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려고 자사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여 판매 부수를 높입니다. 그게 바로 ‘사재기’입니다. 베스트셀러를 조작하는 사재기 수법은 독자를 속이는 사기 행위입니다. 그러나 일부 출판사들이 아직도 사재기를 통한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 또 덜미…'무료 증정 이벤트'로 사재기]
뉴시스 (2016년 12월 2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7665534

 

 

오늘 네이버 메인 화면에 출판사 사재기 관련 소식이 떴습니다. 이번에 덜미가 잡힌 출판사 사재기 수법의 경우, 마케팅 업체가 가담한 신종 수법입니다.

 

사재기에 가담한 출판사와 마케팅 업체는 SK텔레콤의 대표 멤버십사이트 T월드에 무료도서 증정 이벤트를 진행했습니다. 무료 증정에 혹한 고객들은 이벤트에 응모하게 되고, 출판사와 마케팅 업체는 손쉽게 고객들의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객들의 개인정보로 온라인 서점 여러 곳에 비회원 주문을 했고, 주문한 책을 이벤트 당첨자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재기 주문으로 인해 인터넷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가 급상승했고, 출판사는 사재기 도서의 판매대금 60%를 다시 받을 수 있었습니다.

 

SK텔레콤을 포함한 이동통신사에 가입하려면 ‘개인정보를 마케팅에 활용한다’는 내용에 대해 동의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 사후처리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다 보니 개인정보가 고객이 모르는 사이에 다른 용도로 사용될 우려가 있습니다.

 

 

 

 

[마케팅업체 통해 책 사재기 신종수법…출판사 대표 등 입건]
뉴스원 (2016년 12월 2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21&aid=0002464624

 

 

뉴시스 보도문에는 책 사재기 혐의를 받은 문제 출판사와 출판사 대표 그리고 책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뉴스원(News 1) 보도문에 사재기 도서 이름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혹시나 보도문 내용 일부가 수정될 수 있으므로 관련 내용을 따로 캡처했습니다. 사재기 도서는 《졸업하고 뭐하지》입니다. 출판사는 ‘라임위시’입니다.

 

 

 

 

 

 

 

 

 

 

 

 

 

 

 

 

 

이 출판사의 정체가 뭘까요?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라임위시’를 입력해봤습니다.

 

 

[공익마케팅 컨설팅그룹 '라임위시' 론칭]
머니투데이 (2007년 11월 28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8&aid=0000857685

 

 

 

2007년 머니투데이 보도문에 따르면 ‘라임위시’는 사회공헌 전문컨설팅사 '라임글로브'가 런칭한 국내 최초의 공익마케팅 컨설팅그룹이었습니다. 라임글로브 대표는 최혁준 씨입니다. 이 사람이 《졸업하고 뭐하지》의 저자입니다. 좀 구린 냄새가 납니다. 책 사재기에 가담한 마케팅 업체가 ‘라임위시’일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뉴시스 보도문에 사재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마케팅 업자 최 모 씨’가 언급되던데, 라임글로브 대표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졸업하고 뭐하지》 이외에도 최혁준 씨가 라임위시에서 펴낸 책은 《일 안 해도 되는 직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2012년 ‘디프넷’이라는 회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즉 ‘디프넷’에서 펴낸 책은 구판이고, 2014년 라임위시에서 새로 나온 책이 개정판이죠. 두 권 다 안 읽어봐서 내용상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임위시 같은 정식 출판사인 것처럼 운영하는 회사는 출판 일을 단순한 돈벌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재기로 독자를 속이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독자들의 불신이 커져 결국 출판계 전체에 손해를 끼칩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응모자의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무료도서 증정 이벤트나 출판사 서평단 이벤트의 진행 실태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출판사들도 마음만 먹으면 고객의 개인정보를 이용해 사재기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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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1 14: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21 14:48   좋아요 1 | URL
저도 티월드입니다. ㅎㅎㅎ 저도 저런 이벤트가 있는 줄 몰랐어요. ^^;;

이번 사재기 사건이 심각한 게 개인정보를 이용했다는 것인데 가면 갈수록 사재기 수법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이러면 출판사가 법적 제재를 교묘히 피할 수 있어요.

서니데이 2016-12-21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정이 복잡하네요.;;;

cyrus 2016-12-21 15:13   좋아요 1 | URL
사재기 과정을 표현한 그림이 조금 복잡하게 보이는 게 함정입니다. 보도문만 읽어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꼬마요정 2016-12-21 15: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터인가 이벤트 응모 안 하게 됩니다. 고객정보제공동의 체크해야 되면 말이죠. 온갖 곳에서 전화가... ㅠㅠ 참 사람들 잔머리가 장난 아니네요. 씁쓸합니다.

cyrus 2016-12-21 16:58   좋아요 0 | URL
저도요. 출판사가 제 전화번호, 이메일 주소를 아는 것 또한 조금 찝찝하게 느껴져요. ^^;;

stella.K 2016-12-2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가 얼마나 어려우면 이렇게 할까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cyrus 2016-12-21 16:59   좋아요 0 | URL
사재기 범죄에 가담한 출판사가 두 개 더 있는데, 실명이 밝히지 않는 이상 어느 회사인지 알 수 없어요. ㅠㅠ

곰곰생각하는발 2016-12-2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혁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네요... 흔한 이름이기는하지만...

cyrus 2016-12-21 17:04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최혁준으로 검색하면 사진도 나옵니다.

감은빛 2016-12-21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신사를 이용한 건 처음 보는 것이긴 하지만,
저렇게 업체를 끼고 이벤트를 통해 독자들에게 책을 뿌리는 수법은 꽤 오래된 흔한 방법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출판사는 책 배포하고 초기에,
직원들에게 가족이나 지인 명의로 주문하게 만드는 짓도 많이 한다고 들었어요.

cyrus 2016-12-22 09:03   좋아요 0 | URL
사재기에 대한 법적 처벌이 강화돼도 악습이 완전히 철폐되기 힘들어 보입니다. 법의 감시망을 피하려고 사재기 수법은 새롭게 진화할 것입니다.

코발트그린 2016-12-22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엊그제 이벤트 당첨 도서를 받고 좋아했는데... 신청도 안한 이벤트 였어요 쩝 이런..

cyrus 2016-12-22 09:08   좋아요 0 | URL
황당한 일을 겪어서 속상하셨겠군요. 예전에 저는 응모 안 한 이벤트에 당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라딘 신고센터에 연락해서 당첨 사실을 취소시켰습니다. ^^;;
 
깨달음의 거울 - 선가귀감
서산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선가귀감》은 서산대사 휴정 스님이 대장경의 핵심 내용을 추리면서 구절마다 주해를 달고 게송과 평설을 덧붙여 이해하기 쉽도록 꾸민 책이다. 법정 스님은 이 책을 한글로 번역할 때, 제목을 '깨달음의 거울’로 정했다.

 

 

 

 

 

 

 

법정 스님이 직접 쓰신 서문에 따르면 초판이 1962년 선학강행회 이름으로 법통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스님 저서 연보에는 선가귀감이 '1976년 홍법원'에서 출간된 것으로 적혀 있다. 사단법인의 저서 연보 내용이 수정되어야 한다. 법정 스님의 선가귀감 제2판은 1971년 홍법원에서 나왔고, 제3판이 1976년 정음문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스님은 1961년부터 선가귀감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2년에 나온 선가귀감 역서가 스님이 최초로 저술한 책이다.

 

 

누구든지 말에 팔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빙긋이 웃은 일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선가귀감》 50쪽)

 

 

불교에서 선(禪)은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문자를 활용하지도 않고 경전 문구에 의존하지도 않고, 오로지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과 마음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불교는 무엇을 깨닫기 위하여 수행하는가? 깨달음의 내용은 무엇일까? 불자들은 이것이 궁금하다. 이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없다. 참선 수행자 스스로 ‘이것이 무슨 뜻일까?’하고 의문을 가지고 끝없이 연구하는 공부법이다. 이처럼 유성(有聲)이 아닌 무성(無聲)으로 경지에 이르려는 예는 많다. 불가의 선종(禪宗)이 대표적이다. 문자가 아닌 체험에 방점을 찍은 수행법은 선종을 중국에 전한 달마가 시초이다.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의 이치인 도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인간의 인식 범주를 벗어난 불가사의한 세계는 언어문자로 나타내면 낼수록 본질과는 점점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언어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궁극의 경지가 있고, 침묵이 웅변보다도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렇지만 선종의 사유세계가 확장될수록 깨달음의 세계는 심오해져 중생의 삶과 현실에서 점점 멀어지는 면도 생겼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선가귀감》 42쪽)

 

 

법정 스님은 선(禪)이 종파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원래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 (《선가귀감》 45쪽 역주 참고)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면서 경전을 소홀히 할 수 없다. 경전은 부처의 말씀이다. 특정 종파의 독단적인 논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경전을 경시하는 것은 부처의 근본 목소리를 부정하는 일과 같다. 인간의 사유나 사상은 문자를 통해서 기록되고 계승 발전되고 있다. 우리가 존재와 세계를 사유하는 것도 문자언어를 통해서 하고 있다. 인간의 사유의 범주가 언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침묵이 능사만은 아니다. 언어와 침묵은 조화 중도를 이루어야 침묵도 빛나고 언어도 의미가 산다.
 
불가에서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던지는 문제가 있다. 이른바 화두(話頭)다. 선승들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묵언 수행을 하고 정진한다.

 

 

게을리 지내지 말라
풀 속에 거꾸러지리니.

 

(《선가귀감》 게송 44쪽)

 


부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생각을 버려야 화두에 대한 의심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탐욕을 줄이면 고통도 줄어든다. 올해 연말에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큰 사건이 일어났다. 생각해 보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물들어 있는 잘못된 의식과 행위의 근본 원인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애욕의 불꽃’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끓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선가귀감》 164쪽)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인간 스스로의 진리에 대한 무지와 탐욕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행과 불행이 절대자의 뜻이나 숙명, 혹은 우연에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연기(緣起)의 진리에 대한 무지의 결과이다. 이러한 연기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씨앗은 적게 뿌리면서 수확은 많이 거두려고 한다. 이것이 지나친 욕심, 곧 탐욕이다. 휴정 스님은 “애정이 한 번 얽히면 사람을 끌어다가 죄악의 문에 처넣는다”고 하였다. '나 혼자 잘살기 위해', '나 혼자 편하기 위해' 내가 법을 어기고 부정을 저지르면 그 대가는 곧바로 타인에게 전가되고 결국에는 그 업보가 돌고 돌아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지나친 욕심이 인생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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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2-20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만에 리뷰네요..^^..ㅎㅎㅎ 바빴나 봐요?

cyrus 2016-12-20 15:41   좋아요 1 | URL
사흘 동안 감기 증상에 시달려서 고생했습니다... 주말에 거의 누워만 지냈습니다. ㅎㅎㅎㅎ


yureka01 2016-12-20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고고,,왠지 몇일 동안 서재를 비우지 않을 텐데 뭔 일 있을 거란 예감..감기였군요..요즘 상당히 심하다고 하던데..얼른 쾌찬차 하시길,!~~~

cyrus 2016-12-20 15:49   좋아요 2 | URL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평소에 감기 잘 안 걸리고, 걸려봤자 이틀 정도면 치유되는데, 올해 독감은 정말 센 녀석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6-12-20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cyrus 2016-12-21 08:06   좋아요 1 | URL
네. 올해는 아픈 일이 많았어요. 건강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호랑이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

양철나무꾼 2016-12-20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번 독감은 잠복기가 5일입니다.
자택격리든 뭐든 격리, 감금되어야 합니다, ㅋ~.

고생하셨네요, 앞으로도 잘 드시고 조심하셔야 합니다.

법정 스님도 그렇고, 동쪽나라 출판사도 그렇고...귀한 거네요, 반갑습니다.
책도, 오래간만의 님도~^^

cyrus 2016-12-21 08:1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주말에 어디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만 지냈습니다. ㅎㅎㅎ

서니데이 2016-12-2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감 유행이라고 뉴스에 나오는데, cyrus님은 빨리 나으셨다니 그래도 다행이예요. cyrus님, 따뜻하고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16-12-21 08:11   좋아요 1 | URL
독감 걸린 이후로 잠을 일찍 청했습니다. 역시 잠이 보약입니다. ^^

표맥(漂麥) 2016-12-20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가귀감은 정말 괜찮은(주제 넘지만) 내용의 책입니다. 말 그대로 보물 같은 책...^^

cyrus 2016-12-21 08:12   좋아요 0 | URL
책에 좋은 구절이 많았습니다. 이제 다시 나올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애니메이션 4기 1화 에피소드는 '르누아르 대 세잔'이다. 이 에피소드에 인상파 화가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르누아르와 세잔이다. 카미유 피사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는 엑스트라 급으로 나온다.

 

 

 

 

 

'르누아르 대 세잔'은 서양미술에 관한 지식이 없어도 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이 만화의 주요 설정이 개그라서 역사적 인물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드가는 사람 형태가 아닌 회전초로 그려졌다.

 

 

 

 

 

 

르누아르는 여자 알몸이 그리고 싶다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르누아르의 라이벌인 세잔이 이를 엿듣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부 다 얘기하겠다고 협박한다.

 

 

 

 

 

 

 

 

 

화가 난 르누아르는 세잔에게 '르누아르 로켓'을 날려 공격하고, 자존심 상한 두 사람은 그림 시합을 펼치기로 한다.

 

 

 

 

 

 

그림 시합의 심사위원은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르누아르와 세잔은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유치하게 티격태격 싸운다. 르누아르는 세잔에게 자신의 파란색 물감을 빌려줬는데, 세잔은 그 물감을 남김없이 다 써버린다. 단단히 화가 난 르누아르는 드가를 집어던져 세잔에게 맞추려고 했으나 드가는 세잔의 그림에 부딪혀 죽는다. 드가가 흘린 체액은 세잔의 그림을 망치게 했다. 르누아르와 세잔은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몸싸움으로 대응하자 피사로는 시합을 중단시킨다. 피사로가 르누아르와 세잔에게 시합용 그림(이라 부르고 낙서라 한다)을 전시회에 출품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만화 에피소드처럼 실제로 르누아르와 세잔이 그림 시합을 한 적이 없다. 이 만화를 본 사람들은 르누아르와 세잔이 인상파의 라이벌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잔은 르누아르의 풍경화를 '솜뭉치'로 비유하면서 반감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 증언이 존 리월드의 세잔 전기에 나온다. 그러나 이 증언만으로 세잔이 르누아르를 싫어했다고 볼 수 없다. 세잔은 르누아르를 존경했다.

 

 

나는 모든 생존 화가들을 경멸하지만 모네와 르누아르는 예외이다.


(세잔, 《르누아르 : 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150쪽)

 

 

피사로가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르누아르는 세잔의 그림을 좋아했다.

 

 

드가와 르누아르는 세잔 작품을 매우 좋아한다. 볼라르(인상파 화가들과 친하게 지낸 화상-글쓴이 주)가 세잔의 과일 스케치를 보여 주었는데, 그들은 누가 그 그림을 소유할 것인가를 놓고 동전을 던졌지.

 

(카미유 피사로가 아들 루시앙에게 보낸 편지, 미셸 오 《세잔 : 사과 하나로 시작된 현대 미술》 153쪽)

 

 

세잔은 시골에서 자란 탓에 도회적 분위기의 동료 화가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동료 화가들은 세잔의 그림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들을 구입하기도 했다. 피사로는 10점, 르누아르는 4점, 드가는 7점을 구입했다.

 

르누아르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그림 수집가 빅토르 쇼케(1821~1891)에게 세잔의 그림을 소개하기도 했다. 르누아르의 주선에 의한 세잔과 쇼케의 만남은 세잔의 일생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화가가 아닌 일반 수집가가 세잔의 그림을 사는 일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쇼케는 세잔의 그림을 흡족해했고, 세잔의 후원자가 되었다. 쇼케가 수집한 세잔의 그림은 총 34점이다.

 

 

 

 

 

 

 

 

 

세잔과 르누아르는 쇼케의 초상화를 여러 점 그리기도 했는데, 두 사람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 확실히 스타일에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잔의 인물화는 모델의 외양을 자세히 그리는 것보다 모델 내면의 감성을 표현하는 데 치중했다면, 르누아르는 인물을 최대한 아름답게 그리려고 했다. 세잔을 인정해주던 동료 화가들은 새롭게 변화를 준 세잔의 화풍에 당황했다. 세잔 못지않게 자존심 세고, 독설가로 알려진 드가는 '미친 사람이 그린 미친 사람의 초상화'라고 평가했다.

 

 

 

 

 

 

 

 

 

 

 

 

 

 

 

 

 

 

사실 세잔과 드가가 서로를 경멸하는 불편한 관계였다고 한다. 한때 무명이었던 르누아르, 드가, 세잔 등의 그림을 판매한 앙부르아즈 볼라르(1868~1939)는 세잔과 드가를 자기 그림에 대한 긍지가 강하고,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로 봤다. 두 사람 다 무뚝뚝하고, 부끄럼을 타는 편이라서 동료 화가들에 대한 칭찬에 인색했을 것이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끼리 자주 만나면 정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 드가는 세잔의 첫 개인 전시회에 참관하여 세잔의 그림을 인정했다.

 

르누아르, 세잔, 드가. 이 세 사람의 일생을 소개한 관련 도서 여러 권을 참고해도 이 세 사람이 어떠한 관계인지 명확히 파악하기 불가능하다. 세잔을 싫어한 드가가 그의 그림을 7점이나 구입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드가는 츤데레(ツンデレ, 겉으로는 상대방을 퉁명스럽게 대해도 점점 애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좋게 대해주는 성격) 유형에 가깝다.

 

 

드가 : 흥! 딱... 딱히 널 위해 그림을 구입한 건 아니야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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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12-16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면서 괴롭히는 그런 심리ㅜ 아닐까요?

cyrus 2016-12-16 16:18   좋아요 0 | URL
그럴 수도 있겠어요. ㅎㅎㅎ

2016-12-16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16 16:44   좋아요 1 | URL
만화 에피소드가 제 관심사와 연관이 있어서 관련 도서를 찾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

양철나무꾼 2016-12-16 17: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르누아르가 그린 빅토르 쇼케가 훨씬 좋습니다~ㅅ!
그림이 좋아 완전 한참을 서성이고 머물다가 갑니다~^^

AgalmA 2016-12-16 18:44   좋아요 1 | URL
저도 르누아르 쇼케. 르누아르 그렇게 좋아하는 편 아닌데, 저 그림에선 쇼케 손이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보게 돼요^^
세잔은 인물이 아니라 붓터치와 덩어리 질감을 계속 보게 됩니다. 결국 그림이 아니라 세잔을 보게 만든다는 것. 대단한 세잔.

cyrus 2016-12-16 21:52   좋아요 0 | URL
To. 양철나무꾼님 / 르누아르 그림의 매력이 밝고 화사한 분위기죠. 그리고 르누아르가 묘사한 남성도 여성성이 느껴져요.

cyrus 2016-12-16 21:54   좋아요 0 | URL
To. Agalma님 / 세잔의 화풍을 잘 보셨습니다. 세잔은 모든 대상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자신만의 붓터치와 질감을 통해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stella.K 2016-12-17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만화가 있었네. 급땡김이다.
요즘엔 드라마와 영화 찔금 보는 정도라 만화는
여력이...ㅠㅠ

cyrus 2016-12-17 16:53   좋아요 0 | URL
이 만화 소재와 개그 코드가 일본풍이라서 재미없을 수 있어요. ^^;;
 
불평할 의무 - 우리 시대의 언어와 기술 그리고 교육에 대한 도발
닐 포스트먼 지음, 손화철 옮김 / CIR(씨아이알)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40여 년 전에 초등학생은 '국민학생'이었다. 그 국민학생들이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국민학생들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국민교육헌장이 시작되는 첫 문장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기초로 박정희 정권은 이른바 '국민의식개혁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 바가 있지만, 과연 이 헌장이 우리 국민의 의식에 얼마나 파고들어 무엇을 남겼는지 한 번 곱씹어 보아야 한다.
 
국민교육헌장 가운데 "교육의 종국적 목적은 국가의 목적을 자각하는 일이다"라는 문장은 일제 국민교육의 목적인 황국신민이 연상된다. 비교할 때 양쪽 모두 도구주의적 교육관을 견지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 국민교육헌장은 문민정부 들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국민교육헌장이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일까. 국민교육헌장이 사라졌다고 해도 국민을 '교육'하는 제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체제와 권력에 순종하도록 하는 교육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주입하는 질서와 규칙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교무실에 불려 다니다 어느새 가까이하면 안 될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사회구성원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야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면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반세기 동안 관철된 국가주의 교육은 대부분의 사회구성원에게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작용했다. 반공교육과 체제 순응 교육, 훈화, 애국 조회 등으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했지만, 비판적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교육은 철저히 배제했다. 사회화과정 중 가장 중요한 게 교육과정이다. 비판적 의식을 가진 학생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 혹은 편견을 의심할 수 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전통과 권위를 배반하는 의식을 갖게 된다. 
 
미국의 미디어 전문가이자 교육평론가인 닐 포스트먼은 『옹호할 수 없는 것에 맞서기』라는 제목의 강연문에서 사회의 편견에 순응하도록 하는 학교의 역할이 오래된 전통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에도 그런 전통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옛말이 있었다. 스승은 제2의 부모로서 공경해야 하며, 그 은혜는 부모와도 같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문자 그대로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오늘날 그 말 속에 학생을 억압하는 권위주의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강조한 대안적 전통이 바로 편견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 교육이다.
 
실제로 편견을 맞서는 일은 무척 어렵다. 미디어는 근거 없는 편견을 만들고, 증오를 유발하는 역기능이 있다. 미디어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한 생각이 자신의 존재를 배반하는 허황한 의식임에도 우리는 일단 미디어로부터 받아들인 언어 또는 이미지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 점은 <미디어워치>를 구독하는 박사모 회원에게 구독을 중지하도록 요구해서 <한겨레>를 읽어보도록 설득해보면 알 것이다. 설득 작업은 실로 불편하고 어렵고 더디다. 포스트먼은 학생들이 미디어의 편향성에 취약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깊숙이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자리 잡는지 학교가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질서를 받쳐주는 서양의 근본정신은 장황한 법률규정이 아니라 남의 권리를 존중하여 주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권리가 보호받는 것이다.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는 예링의 말은 바로 이 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남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기의 이익을 챙기면 그만이고, 자기 생각을 떳떳하게 밝히는 냉철한 비판의식이 결여됐다. 포스트먼은 《불평할 의무》 머리말에서 작가로 제일 살기 좋은 나라 두 곳이 바로 미국과 러시아라고 했다. 그 이유가 흥미롭다. 이 두 나라가 실수를 저지를 정도로 역동적인 역량을 가진 제국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지도자만 봐도 포스트먼의 말에 수긍이 간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 발표한 '올해 가장 힘 있는 사람들'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2위에 올랐다. 아마도 트럼프의 미국이 러시아보다 전 세계에 역동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가 자신을 반대하는 미국인들을 포용하는 제스처를 취한다고 해도 트럼프의 리더십에 불평하는 미국인들의 입김이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작가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자 한 사람이 도덕성과 권위, 정당성을 모두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작가들이 비정상적인 세상에 향해 불평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가장 불평 거리가 많은 사회, 즉 제일 좋은 사회에 이르렀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사회'의 의미란 국민의 개별적 불평이 광장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공감대로 형성되어 권위의 비정상을 규탄하는 것이다. 통상 정치 철학상 보수는 개인의 자유와 도덕성을 강조하고, 법의 가치를 중시한다. 그런데 '자칭 보수'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박근혜의 안위만 걱정한다. 국정을 어지럽게 한 이 모든 잘못을 언제까지 최순실 그리고 실체가 불명확한 좌파 선동 세력에게만 돌릴 것인가. 어렸을 적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느라 고생했던 국민이 슬그머니 나타나고 있다. 자신의 이념적 선명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조금 불편하더라도 권위나 편견에 불평할 의무를 택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사회구성원들 의식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사회 발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가르침이라는 명목으로 시대와 가치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은 채 학생들의 자주적 의식에 시비 걸고, 순종을 강요하는 태도가 은연중에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 45쪽 
어떤 상황에서 그 말들이 쓰이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학생이 있다면, 그 학생이 바로 인식론 학자입니다. 교과서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하는 셈이니까요. 교과서가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를 아는 그 학생은 광고하는 사람들, 정치가, 목사들이 무엇을 숨기려 하는지도 알 것입니다. (‘교과서가 숨기려고 하는 것을 아는 셈이니까요’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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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2-15 1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민교육헌장을 만든 소은 박홍규 교수가 플라톤 전공자여서인지, 국민교육헌장에는 플라톤적인 국가주도의 교육관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다른 분 의견을 들은 것이지만 같은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6-12-16 15:4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닐 포스트먼은 플라톤과 공자의 교육에 사회체제를 순응하도록 만드는 (역)기능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역시 플라톤의 책을 열심히 정독한 독자답습니다. 좋은 의견입니다. ^^

2016-12-15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16 15:47   좋아요 0 | URL
국민교육헌장이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거 사라지기 정말 잘했습니다. 만약에 헌장이 지금도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정말 끔찍해요. 박정희 추종자들은 이거 못 외우는 사람에게 종북 취급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