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책 팔아 빌딩 짓는다는 시절 있었는데..."] 오마이뉴스, 2017년 2월 5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140306
어제 발견한 좋은 기사입니다. 헌책방을 소개한 글을 볼 때마다 반갑고,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2014년 처음으로 뿌리서점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뿌리서점을 상징하는 간판이 된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 문구는 여전했습니다. 만일 저 간판 하나 없어지면 헌책방에 들어설 때 낯설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뿌리서점 사장님의 말씀 속에 한국 현대사 격동의 물결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헌책방 하나만 믿고 치열하게 헤쳐나간 사장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여기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헌책방은 책의 역사가 잠들어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헌책방 주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를 목격했고, 혼자서 묵묵히 지키고 있는 정령입니다. 오늘도 헌책방 주인은 여전히 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책을 만들고 진열합니다. 그리고 무한히 자신과 세계를 향해 책을 접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합니다. 장-뤽 낭시는 이러한 서점상의 일을 ‘삼중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1] 헌책방 주인은 매일 수많은 책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가치가 있을 만한 책들을 건져내고, 새 주인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책장에 꽂아 소중히 보관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독자들의 접촉 횟수가 아주 적습니다. 헌책방 주인의 손길을 많이 거친 책들은 새로운 주인, 즉 독자들이 자신을 활짝 펼쳐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헌책방의 책들 대부분은 출판연도가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저보다 먼저 태어난 책도 있고요, 제가 태어난 해에 나온 책도 있습니다. 그래도 출간된 지 20년 훌쩍 넘긴 책은 ‘나이가 많은 노인’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헌책방은 ‘양로원’인 셈이죠. 책들은 여전히 소통에 가담하고 싶어 합니다. “나, 안 늙었어. 아직은 팔팔하다네.”라고 말하는 노인의 고집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나이 든 책들보다 한참 늦게 태어난 젊은 독자들은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스마트폰으로 향해 있으니까요. 사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헌책방 밖에는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오는 책들의 등장에 나이 든 책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집니다. 가끔 2010년대에 나온 젊은 책들이 간혹 헌책방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먼지가 쌓이기 전에 잠깐 머무릅니다. 오래 머물러봤자 최소 일 년입니다. 젊은 책들은 나이 든 책들보다 새 주인을 만날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리 헌책방을 예찬해봤자 헌책방을 갑자기 찾는 손님은 없을 겁니다. 헌책방은 직접 가봐야 합니다. 그러면 헌책방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책방 내부에는 먼지가 많고, 눅눅한 냄새가 코를 건드립니다. 게다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춥습니다. 손님이 찾기에 아주 열악하고, 불편한 공간입니다. 요즘 거대하고, 아늑하고, 음악이 흐르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오프라인 중고서점의 등장으로 헌책방을 찾는 발길이 더 뜸해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헌책방에 드나들면서 2, 30대 손님이 한 시간 이상 책을 고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 예외의 경험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젊은 남녀 커플이 헌책방에 와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한 권을 찾느라 3, 40분 머무른 적 있었습니다. 헌책방에 오래 머무르는 손님들의 평균 연령층은 5, 60대입니다. 그런데 이분들 대부분은 책을 사는 목적 때문에 헌책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헌책방 주인과 친분이 있어서 찾습니다. 이분들은 몇 시간 동안 헌책방 주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다고 이분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곰팡내 나는 헌책방에 이런 분들이 많이 와야 사람 냄새가 나는 헌책방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나이가 나이인지라 몸이 불편하면 헌책방에 방문하기 어렵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나이 먹어가는 헌책방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책방 주인의 하루는 노쇠한 체력 하나만 믿고, 헌책방의 문이 닫히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있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그리고 정말 몇 안 되는 단골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헌책방을 홀로 지킵니다.
장-뤽 낭시는 책을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라고 했습니다.[2] 아주 멋지면서도 맞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헌책방의 생존기를 생각하면 그 말이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물론, 낭시는 그 말 다음에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라고 덧붙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헌책방 안에서 이러한 사유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이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헌책방을 자주 찾는다고 해도 이 진지한 사유의 거래가 얼마나 오래 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작년 10월, 제일서점의 예고 없는 폐점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사유의 거래를 했던 그동안의 세월이 덧없음을 느꼈습니다. (※ [갑작스러운 이별] 2016년 10월 18일 작성)
그래도 저는 대구의 모든 헌책방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의 거래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찾고, 읽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1] 장-뤽 낭시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43쪽
[2] 같은 책, 6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