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팔아 빌딩 짓는다는 시절 있었는데..."] 오마이뉴스, 2017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140306

 

 

 

어제 발견한 좋은 기사입니다. 헌책방을 소개한 글을 볼 때마다 반갑고,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2014년 처음으로 뿌리서점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뿌리서점을 상징하는 간판이 된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 문구는 여전했습니다. 만일 저 간판 하나 없어지면 헌책방에 들어설 때 낯설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뿌리서점 사장님의 말씀 속에 한국 현대사 격동의 물결이 남기고 간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헌책방 하나만 믿고 치열하게 헤쳐나간 사장님이 존경스럽습니다. 사장님 말씀대로 여기서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입니다.

 

 

 

 

 

 

 

 

 

 

 

 

 

 

 

 

 

 

 

헌책방은 책의 역사가 잠들어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헌책방 주인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역사를 목격했고, 혼자서 묵묵히 지키고 있는 정령입니다. 오늘도 헌책방 주인은 여전히 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책을 만들고 진열합니다. 그리고 무한히 자신과 세계를 향해 책을 접었다가 다시 펴기를 반복합니다. -뤽 낭시는 이러한 서점상의 일을 삼중의 명령이라고 했습니다.[1] 헌책방 주인은 매일 수많은 책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변화무쌍한 세계 속에 가치가 있을 만한 책들을 건져내고, 새 주인을 만나기를 고대하면서 책장에 꽂아 소중히 보관합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곳은 독자들의 접촉 횟수가 아주 적습니다. 헌책방 주인의 손길을 많이 거친 책들은 새로운 주인, 즉 독자들이 자신을 활짝 펼쳐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헌책방의 책들 대부분은 출판연도가 상당히 오래됐습니다. 저보다 먼저 태어난 책도 있고요, 제가 태어난 해에 나온 책도 있습니다. 그래도 출간된 지 20년 훌쩍 넘긴 책은 나이가 많은 노인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헌책방은 양로원인 셈이죠. 책들은 여전히 소통에 가담하고 싶어 합니다. “, 안 늙었어. 아직은 팔팔하다네.”라고 말하는 노인의 고집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나이 든 책들보다 한참 늦게 태어난 젊은 독자들은 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는 스마트폰으로 향해 있으니까요. 사실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스마트폰입니다. 헌책방 밖에는 책보다 더 재미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오는 책들의 등장에 나이 든 책들의 입지가 점점 좁아집니다. 가끔 2010년대에 나온 젊은 책들이 간혹 헌책방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먼지가 쌓이기 전에 잠깐 머무릅니다. 오래 머물러봤자 최소 일 년입니다. 젊은 책들은 나이 든 책들보다 새 주인을 만날 확률이 높습니다.

 

아무리 헌책방을 예찬해봤자 헌책방을 갑자기 찾는 손님은 없을 겁니다. 헌책방은 직접 가봐야 합니다. 그러면 헌책방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책방 내부에는 먼지가 많고, 눅눅한 냄새가 코를 건드립니다. 게다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춥습니다. 손님이 찾기에 아주 열악하고, 불편한 공간입니다. 요즘 거대하고, 아늑하고, 음악이 흐르고,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오프라인 중고서점의 등장으로 헌책방을 찾는 발길이 더 뜸해졌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헌책방에 드나들면서 2, 30대 손님이 한 시간 이상 책을 고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 예외의 경험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젊은 남녀 커플이 헌책방에 와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한 권을 찾느라 3, 40분 머무른 적 있었습니다. 헌책방에 오래 머무르는 손님들의 평균 연령층은 5, 60대입니다. 그런데 이분들 대부분은 책을 사는 목적 때문에 헌책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헌책방 주인과 친분이 있어서 찾습니다. 이분들은 몇 시간 동안 헌책방 주인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렇다고 이분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곰팡내 나는 헌책방에 이런 분들이 많이 와야 사람 냄새가 나는 헌책방이 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나이가 나이인지라 몸이 불편하면 헌책방에 방문하기 어렵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나이 먹어가는 헌책방 주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책방 주인의 하루는 노쇠한 체력 하나만 믿고, 헌책방의 문이 닫히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있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보려고, 그리고 정말 몇 안 되는 단골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헌책방을 홀로 지킵니다.

 

-뤽 낭시는 책을 진지하면서도 덧없는 사유라고 했습니다.[2] 아주 멋지면서도 맞는 말입니다. 한편으로 헌책방의 생존기를 생각하면 그 말이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물론, 낭시는 그 말 다음에 우리가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라고 덧붙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헌책방 안에서 이러한 사유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일이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리 헌책방을 자주 찾는다고 해도 이 진지한 사유의 거래가 얼마나 오래 갈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작년 10, 제일서점의 예고 없는 폐점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 사유의 거래를 했던 그동안의 세월이 덧없음을 느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 20161018일 작성)

 

그래도 저는 대구의 모든 헌책방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에서 끈질기게 공유하는 사유의 거래를 추구하고 싶습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헌책방에서 좋은 책을 찾고, 읽는 것이 그저 즐겁기만 합니다.

 

 

 

[1] -뤽 낭시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43

[2] 같은 책, 6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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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0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 재미있게 읽었어요
엄청 돈 버셨더군요ㅎ
좁은 공간에 복도까지 쌓여진 책을 보니
과연 손님이 있을까 싶은게 절로 삶의 무게가 느껴지던데 격세지감입니다.
인터넷의 발달이 누군가를 이렇게도 죽여왔구나 싶어요~

cyrus 2017-02-06 22:09   좋아요 1 | URL
세월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좋은 것들이 사라지거나 잊히는 상황이 아쉬워요.

해피북 2017-02-06 2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사도 잘 읽고 글도 재밌게 잘 읽었어요. 종종 헌책방 탐방기를 올려주셨던 덕분에 헌책방에 대한 남모를 동경도 생기고 ㅎ 물론 곰팡이냄새는 조금 맡더라도 하루쯤 발품 팔아가며 책들 사이를 누벼보고 싶은 충동도 들게합니다. 작년에 알라딘 중고샵 방문 횟수가 1회라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참이었는데 글을 읽고나니 막 달려가보고 싶네요 ㅋㅂㅋ

cyrus 2017-02-06 22:11   좋아요 1 | URL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 있는 헌책방에 한 번씩 방문해서 연재 형식으로 글을 써볼 생각도 한 적 있었어요. 1년 서재 활동 프로젝트인 거죠. 그런데 현실은.. ㅎㅎㅎ

대학생 때 이런 목적의 여행을 하지 못해서 후회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7-02-06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저에게 헌책방은 참고서팔러간 기억밖에 없어요.. 알라딘 중고서점은 헌책방으로 안쳐 주니까요 ㅋㅋ

cyrus 2017-02-06 22:13   좋아요 0 | URL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헌책방의 이미지가 참고서 구하거나 팔 수 있는 곳이죠. 저 어렸을 때 교과서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아버지가 직접 헌책방에 가서 똑같은 교재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

아무 2017-02-0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사는 곳엔 헌책방이 한 곳뿐인데, 책이 워낙 많아 둘러보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오랜만에 다시 찾아가봐야 될 것 같네요 ㅎㅎ

cyrus 2017-02-07 16:48   좋아요 0 | URL
혼자서 책을 찾기 힘든 헌책방일수록 좋습니다. 그러면 오기가 생겨서 다음에 또 한 번 가고 싶어져요. ^^

stella.K 2017-02-0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 장사도 무시할 게 아니구나.
난 그거해서 밥은 먹나 싶었거든.
이름난 서점들이 중고샵을 하는 것도 이유는 있겠어.ㅋ

cyrus 2017-02-07 16:51   좋아요 0 | URL
헌책방 사장님이랑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라서 하루에 받는 수입이 얼마인지 여쭈어보지 못했어요. 가게 임대료 때문에 푹 쉬지 못하고, 가게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 안쓰러워요.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 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책은 다른 세계와 통하는 하나의 창이다. 색다른 경험을 간접적으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현상을 타파하고 사유의 영역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이다. 읽는 행위가 단순히 보는 행위와는 다르다. 책은 우리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시켜 준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면 그의 일생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기도 한다. 사고하는 능력, 인생을 만드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책 속에 기록해 둔 진리의 흔적을 따라가서 읽어내는 것,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잠시 여유를 갖고 길을 거닐며 사색하는 산책과 유사하다. 좀 깊이 생각하면 독서는 글을 매개체로 글쓴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장-뤽 낭시는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자기 생각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을 ‘거래(commerce, 교류)’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독서를 통한 ‘만남’은 우리 사유의 폭을 넓히고, 유연한 사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타인(다른 독자)을 좀 더 포용할 수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자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호하는 책만 골라 읽는 편식성 독서의 문제점은 다른 책들이 독자에게 말 거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결국, 이는 좁은 영역에 스스로 갇히는 우둔함을 자초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도취해 본인은 불행하게도 전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사유의 거래를 거부하거나 피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철옹성을 구축해 사유의 폭을 더 이상 넓히지 못하는 완고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쯤에서 누구라도 ‘자신만의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껏해야 자기가 속한 지리적 · 공간적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읽고 이를 토대로 느끼고 판단하고 상상하는 범주가 전부다. 지극히 제한적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과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지식의 전파와 깊은 사유의 생성 모두 서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서점에서는 여전히 책이 넘쳐나고 도서 전문 강좌나 자발적 독서 모임도 많아졌다. 이 현상만 가지고, 우리나라 독서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우리 사회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며 소통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끄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암울하게도 독자들을 유혹하는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독자의 눈길을 받지 못한 책은 ‘닫힌 책’이다. 즉 읽히지 않은 책이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책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독자가 ‘닫힌 책’을 열어야 한다. ‘열려라, 참깨!’ 당연히 안 열린다. 이 주문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패스워드다. 책 자체가 펼쳐질 뿐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독자를 향해 펼쳐지지 않는다. 우리가 암만 ‘독서는 넘나 좋은 것, 책을 읽읍시다!’라는 진부한 주문을 강요하듯이 외쳐 봐도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펼쳐지겠나. 알리바바는 동굴 속에 숨겨진 보물이 궁금해서 패스워드를 정확히 기억해내 동굴을 여는 데 성공했다. 알리바바처럼 호기심이 많고, 어떤 것이라도 궁금해 알아보려고 하는 독자가 많아야 한다. 그런 독자에게 책은 항상 펼쳐져 있다. ‘열린 책’은 시공을 초월해 자유롭게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연결해 준다. 알리바바형 독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지식이라는 보물을 건져내기 위해 갖가지 세계와의 경험을 쌓으면서 사유의 거래를 시도한다. 사유의 거래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독자들이 모여서 활발하게 거래를 시도하는 곳이 ‘알라딘 북플’이다. 이곳에 독자들이 매일 리뷰를 쓰며 자신과의 대화 또는 다른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양파를 까듯 끝이 없는 즐거운 사유 거래의 연속이다. 이게 꽁꽁 언 채 있는 답답한 세상을 여는 하나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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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 저만 그런가요? 어제까지는 중고도서 표지가 보였는데, 오늘은 램프 마크만 보입니다. 일시적인 버그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보관함’에 중고도서가 있는데, 표지가 보이지 않으니까 책 제목을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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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7-02-0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근래 계속 알라딘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 같아요. 저도 얼마 전에 <사회주의, 생동하는 유토피아>를 보관함에 넣으려고 했는데, 책이 검색이 되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네이버를 경유해서 보관함에 넣었던.. 설 이후로 시스템 문제가 자꾸 생겨서 불만이 조금씩 쌓이네요ㅠ

cyrus 2017-02-05 15:09   좋아요 0 | URL
설 연휴 이후로 서버 개선 작업을 했는데도 여전히 버그가 뜨는군요. 이번에는 책 검색하면 저자 이름이 안 보여요.
 

 

 

 

 

 

연금술은 과학에 완전히 밀려 '사이비 학문'으로 전락했다. 신비주의적 색채가 짙은 연금술은 오컬트(Occult)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이제는 비금속을 금과 같은 금속으로 전환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연금술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혹시 어딘가에 은둔 생활을 하면서 옛날 연금술 지식을 토대로 연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금술사의 목표가 금을 만드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엘릭서(elixir), 즉 만병통치약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연금술사들은 끝내 금과 엘릭서를 만들어내는 과업에 실패했다. 그래도 오늘날의 연금술사들은 점성술과 최면술 등 동원하여 영적 탐색을 도모한다.

 

 

 

 

 

 

 

 

 

 

 

 

 

 

 

 

 

 

 

 

 

 

 

 

 

 

 

 

 

 

 

앨리슨 쿠더트의 《연금술 이야기》(민음사, 1995)'민음의 과학'이라는 시리즈 명으로 출간됐다. 과학적 논리에 한참 벗어난 연금술이 '과학'의 범주에 포함되어 소개한 점이 이채롭다. 연금술을 '과학'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서 호불호의 반응으로 나뉜다. 회의주의자들은 연금술이 근대 과학의 발전에 공헌했어도 마법과 미신이 반영된 오류의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연금술이 근대과학이 확립된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인류사에 숱한 흔적을 남긴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합리주의의 대명사격인 데카르트는 젊은 시절에 연금술을 탐닉했고, 근대 물리학의 대부인 뉴턴도 말년에는 연금술에 심취했었다.

 

 

 

 

 

 

 

 

 

 

 

 

 

 

 

 

 

 

역사학자 브루스 T. 모런은 연금술이 과학혁명을 결정적으로 이끈 중요한 학문으로 본다. 그의 주장은 '미신' 혹은 '신비주의'로 알려진 연금술의 일반적 관념을 거부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혁명을 연금술과 같은 마법 혹은 신비주의와의 단절로 보는 기존 인식과 배치된다. 연금술사들은 금과 엘릭서를 얻는 목표를 이루어지지 못해 연이어 실패하더라도 자신들만의 정밀한 관찰과 실험 방식으로 세계의 신비를 풀려고 했다. 연금술사들이 엘릭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무병장수를 누릴 수 있는 비결을 찾으려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비슷하다.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켈수스(Paracelsus)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의 의학은 신비주의적 연금술과 과학이 결합하여 있다. 파라켈수스는 대우주와 소우주로 이루어진 천계의 조화가 무너지면 질병이 생긴다고 믿었다. 그리고 질병 치료를 위한 궁극의 비약을 만들고자 했다. 파라켈수스의 업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과학이 합리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은 이성이 압도적으로 이끌어서 이룩한 역사적 결과가 아니라 미신과 이성이 상호작용하면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금술사들은 열심히 노력하는 데도 매번 실패하는 '노력형 바보'이다. 비록 연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되었어도 그들이 연금술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는 공부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요즘, 귀감이 된다. 연금술사들은 현자의 돌 제조법 같은 아주 중요한 연금술 지식을 알아듣기 어렵게 기록했다. 연금술의 기초도 모르는 일반인이라면 그들이 기록한 지식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 지식을 기호와 상징, 암호 등 다양한 표현 방법으로 복잡하게 기록하여 다음에 태어날 연금술사들을 괴롭혔다. 그래도 난해하면서도 사변적인 연금술이 오랫동안 학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 세계를 알고 싶은 본능적인 앎의 호기심과 공부에 대한 진지한 태도 덕분이었다. 연금술사들은 연금술을 공부할 때 항상 이 격언을 기억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라.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여라.

그리고 얻게 되리라."

(lege, lege, relege, ora, labora et invenies)[1]

 

 

연금술사들은 열심히 연금술 책을 읽고, 최선을 다해 인생의 지혜로움을 얻어 나간다면 궁극의 진리를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중세 기독교 수도사들의 공부법과 유사하다. 12세기 수도사 후고는 성경 읽기의 전범을 보여주었는데, 일차적으로 성경을 자구적으로 읽었으면 그 두 번째로 알레고리를 해석한다. 이 두 가지 과정을 거쳐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의 조각들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한다. 연금술사들은 수수께끼 같은 암호와 언어들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했고, 그렇게 연금술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즉, 연금술사의 공부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우리가 연금술사보다 똑똑하다고 해도 그들의 공부하는 자세를 따라가지 못한다. 사실 연금술사를 '노력형 바보'라고 놀릴 수 없다. 가끔 우리는 말도 안 되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힌다. 미신을 둘러싼 진실 여부를 검증하지 않는다. 그렇게 공부와 담쌓은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으로 포장한 채 똑똑한 척하면서 살아간다. 평생 죽을 때까지 공부하지 않을 자, 연금술사에게 돌을 던지지 마시라.

 

 

 

[1] 《도해 연금술》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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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2-0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모름지기 공부는 좀 고통스럽게 할 필요가 있는데 말야.
난 성경을 계속 조금씩 읽기는 하는데 구약은 정말
끝까지 읽는다는 게 쉽지가 않아.
어떤 사람 성경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읽었다는 사람 보면
부럽기도 하고 넘사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성령이 임한 거지.ㅠ

cyrus 2017-02-05 11:28   좋아요 0 | URL
군대에 생활했을 때 읽을 책이 없어서 성경을 읽은 적이 있어요. 물론 저도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어요. 제 군대 동기는 하루 일정 끝나고 쉴 때 성경 공부를 했어요. 제가 무교이지만, 그 친구 공부하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

낭만인생 2017-02-0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금사는 과학자였네요..

cyrus 2017-02-05 11:28   좋아요 0 | URL
연금술이 약간 과학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서니데이 2017-02-04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7-02-05 11:2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yureka01 2017-02-04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세시대 연금술사들이 화학과 금속의 발전 토대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연금술의 연구가 없었더라면 산업혁명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던....

cyrus 2017-02-05 11:30   좋아요 0 | URL
금속의 성질을 이해하고, 그걸 얻어내는 방법을 발견해내는 인류의 업적에 연금술사의 노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보수의 가치
로저 스크러튼 지음, 박수철 옮김 / 더퀘스트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전통주의, 분단, 지역주의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 지형도에서 보수주의를 명확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지키고자 하는 질서 · 가치가 분명치 않다. 반공 이념의 논리에 경도된 사회적 성향을 말하는가. 아니면 안정 추구의 논리를 그렇게 부르는가. 일단 사회의 기본 틀이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 온건한 변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을 주류인 보수주의자라고 무리하게라도 규정키로 하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중산층은 심하게 흔들리고, 재벌은 다수 국민의 원망과 불신을 받아왔다. 이들이 아니라면 서민들이 보수주의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를 단순히 반공주의로 간주해 자신들을 보수로 이해하고, 보수 야당 세력을 진보라고 비판해 온 군부 독재의 기준이 보수-진보 논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보수는 군부 독재에도 또 지역주의에도 근거하지 않지만, 한국의 보수는 친일 세력에 그 뿌리를 두고, 독재와 지역주의와 반공 이념에 의존했다. 비생산적인 우리나라 정치는 흑백논리의 불모다. 이분법에 찌든 보수주의자들에겐 조화와 절충이 용납되지 않는다. 양보나 타협은 곧 변절이나 패배로 치부될 뿐이다. 중도나 중용 역시 용인되지 않는다. 회색분자로 매도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 행태가 ‘내 편’은 무조건 따르고 ‘네 편’은 무조건 내치는 패거리 문화로 이어진다.

 

한국에 ‘자칭’ 보수주의 세력은 있어도 보수주의의 정의가 없다. 보수 철학을 근간으로 하더라도 합리적 보수라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도 투명하고 공정해야 하고, 사회정의에 부합돼야 한다. 영국의 보수주의 사상가 로저 스크러튼의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는 보수주의에 대해 냉정한 성찰을 하는데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서양의 지적 전통 위에서 보수주의의 이념적 기원과 그 전개과정을 특유의 관점으로 서술하면서 보수주의의 복잡한 전개과정을 분석해 보여준다.

 

보수주의는 계몽주의를 내세운 근대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전통과의 가차 없는 단절을 바라는 계몽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적 · 정치적 반응의 결과로 나온 것이 보수주의다. 이처럼 근대성의 부정에서 나온 것이 보수주의였고 근대성의 대변자로 자임한 것이 자유주의였다. 고전적 보수주의를 단순히 수구나 반동(反動)으로 받아들인다면 잘못된 해석이다. 고전적 보수주의는 점진주의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옛것만을 수구하거나 새로운 사회변화에 역행하는 반동과 다르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점진적인 개혁에도 찬성한다. 이들이 개혁하는 목적은 나라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개혁이 진보주의자들의 전유물이 아닌 셈이다. 1970년 이후 보수주의는 변신을 시도한다. 당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항했던 보수주의는 하이에크의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수용한다.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포용한 보수주의를 신자유주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주의는 냉전 시대부터 시작해서 극우만이 보수인양 이야기된다. 서구처럼 근대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를 한 번도 제대로 경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 세력과의 공정한 대화와 논쟁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 간의 대화는 이념에 치우친 이익집단의 싸움판으로 변질했다. 보수주의가 살 길은 도덕성을 회복하고, 보수 이념에 맞는 개혁을 지지하면서 원칙을 지켜나가야 한다. 스크러튼이 내세우는 보수주의의 핵심 원칙은 ‘자유’와 ‘책임’이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주위의 의견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고집스럽게 세우는 보수 세력은 자기성찰의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여된 극우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다양성의 가치와 덕목을 거스르는 극우주의자는 법을 무시하고, 관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 무슨 자유와 도덕이 있으며, 어떻게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자는 현실 세계의 관행들이 자신의 철학과 다르다고 격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차분하게 개혁방안을 기획하고 설득을 통해 국민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다. 우리 사회의 역할에 합당한 보수주의자의 품격이 없다. 대통령의 대통령다움이 없고, 언론의 언론다움이 없고,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이 없다. 법과 도덕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집단적 광기가 작동되다 보니 배려도 관용도 따뜻함도 없다. 한 사회 전체가 성숙하려면 성찰과 배려가 행동 속에서 조화를 이뤄야 한다.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보수주의는 ‘이승만과 박정희 얼굴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보수주의’다. 전자는 ‘차이’와 ‘이견’을 낯설어하고 비정상으로 여기는 문화적 유전자가 있다. 미래의 후손에게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가르치려고 한다. 반면 후자는 인간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며 늘 책임을 자신에게 찾는다. 또 과거의 지혜를 미래의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한다. 보수는 희생과 책임의 상징이다. 보수는 그 사회의 책임 있는 중심 세력으로서 공동체를 위해 더욱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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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04 1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때론 보수주의자가 다수주의자로 보이곤 합니다. 자신들의 의견, 지지자가 더 많으니(자의적이면서, 통계도 자의적ㅎ) 옳다라고 말하는 억지주장들을 보면. 어떤 주의자라 할 때 그 합리성에는 늘 한계가 있죠.
케이시 <장소의 운명>에서 흥미로운 제시가 있습니다. 세계 대전 속에서 장소를 한꺼번에 잃은 사람들에겐 추구해야 될 가치가 달라졌다고. 그래서 핵무기는 모든 장소를 없앨 공공의 적. 이데올로기는 장소를 잃은 사람들에겐 잃지 않을 정신적 장소였을 겁니다. 즉 한국에서 6.25 이후 공고해진 반공주의가 단순히 어떤 세력의 공작이나 세뇌로만 뿌리를 내린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죠. 그렇더라도 한국의 보수주의는 대수술이 필요합니다.
보수주의든 진보주의든 집단 이기가 아닌 공동체주의로 작동할 한국이길 기원합니다

cyrus 2017-02-04 16: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말로만 ‘보수 개혁’만 외치지 말고, 국민들이 수긍할 수 있는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보수 개혁’을 지향하는 바른정당 소속 정치인들은 어떻게든 표심을 얻어 보려고 새누리당과 선을 긋는데, 그런 단기적인 행보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샤벳 2017-02-04 21:07   좋아요 0 | URL
동감

yureka01 2017-02-04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흔히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보수는 상당히 왜곡되었죠. 지켜야할 가치로운 것이란 보편적이고 타당성을 담보로 해야하거든요.정의.믿음.신뢰.정직.이런가치가 역사성을 가진 보수거든요.그런데 작금의 보수는 안보라는 구실로 권력에 빌붙어서 꼴통이 되었죠.

cyrus 2017-02-04 16:54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이 ‘안보’만 찾는 바람에 정작 ‘자유’와 ‘정의’, ‘신뢰’의 가치 전부 잃어버렸습니다.

qualia 2017-02-04 20:10   좋아요 0 | URL
새누리당 무리들의 안보는 그들만의 안보죠. 기득권을 위한 안보, 친일/외세의존세력을 위한 안보, 사적 정권 유지를 위한 안보일 뿐입니다. 그것을 나라와 민족, 국민을 위한 안보로 위장한 것일 뿐입니다.

공정한 탄핵 심판에 전념해야 할 헌재 위원 중에 특정 종교인인 한 위원이 극우 세력 언론과의 (기획) 인터뷰에서 좌빨,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나라와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개솔(bullshit)을 운운하더군요. 다는 아닙니다만, 지금 한국의 50~60대 이상 세대 중 대부분이 저런 개솔스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탄핵은 물 건너간 것이 아니냐 이런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제발 제가 틀리길 바랍니다만.)

이 지독히도 노예스런 국민들과 그 나라, 한국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충격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을 거듭해서 겪어도, 나라가 절단나고 다시 망해도 궁극적으로는 결코 깨닫지 못할 국민이고 민족이고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과격하게 보일 텐데요. 저도 그건 압니다만, 한국/한민족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역사가 미래를 예견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미래에 인구폭발, 기후격변, 전세계적 식량부족, 자원고갈 등등의 사태가 벌어질 것이 확실시되고, 핵무기 따위 가공할 대량파괴 무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강대국 간의 충돌 위험성도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로 볼 때, 인류사에서 3차대전이나 그에 준하는 전쟁 발발은 필연이라고 봅니다. 헌데 역사 속에서 우리 한국/한국인들이 어떻게 각종 대규모 전쟁에 임해왔는가를 살펴보면 답은 이미 나와 있다고 봅니다. 2차대전 말기 패망해가는 일제한테 선전포고 하나 못한 한국/한국인들이었죠. 너무나 비굴하고 너무나 수동적인 노예들의 필연적 행동 양태였던 것입니다. 독립은 남들이 가져다준 것이었지 우리가 자력으로 쟁취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이 21세기라서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외세 의존 성향과 동족끼리의 대결의식은 더 강화됐고, 한반도가 남북, 전라/경상으로 사분오열됐으니 훨씬 더 악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쭝궈, 닛뽕, 러시아, 미국, 등등의 자국 이기주의, 제국주의적 성향도 현대적 방식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강대국끼리의 적대적 공존을 위해 그들끼리 밀약하고 그들 마음대로 약소국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할 수 있는 국제정치역학적 환경도 더욱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던 구한말에 견줘볼 때 지금이 결코 더 나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 정반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결론은 한국은 망할 것이고 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세와 대결하기는커녕 자기 민족끼리 피를 흘리며 극렬한 대결에 광분하는 어리석은 민족은 필연적으로 멸망에 이를 것이고 또한 반드시 멸망해 없어져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법칙이고 인류의 당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