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에 가기 전에, 지금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잠이 깨기나 했는지 상황 정리가 필요하다. 낮에 읽던 책의 주인공과 싸우거나 친구가 되었더라도, 일단 현실로 내팽겨쳐졌다면 지금이 한밤중인지 새벽녘인지 알아야 한다. 침대 옆에 핸드폰 어딨더라. 현실 귀환 직전 그 짧은 순간에 (내가 경험 했던, 혹은 전설 이야기의) 과거의 시공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그 찰나를 아름답고 계속 이어지는 문장으로 몇백쪽에 걸쳐 이야기를, 그것도 시리즈로 남겼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71년생, 올해가 탄생 150주년이고 내년이 그의 소천 100주기다. 펭귄 판 (이형식 역)은 12권 (페이퍼백)으로 완역되었고 민음사 판(김희영 역)은 10권까지 나왔는데 아마 올해 내년에는 완역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 읽어보려고요. 이게 아마 서너 번째 시도인데 내 나이도 꽉 찼으니 (넘쳤;;;) 이제 읽어도 뭔 말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마가렛 미쳴의 난리 부르스 소설도 읽었는데 그 동시대 유러피언 백인 유산계급 한량의 글이라고 무서워할 건 없지.

 

그 몽롱하고 나긋나긋 우아한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나는 너무 무딘 사람인지라 읽은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곱씹어야 (물론, 우리말 번역본) 겨우겨우 의미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프루스트가, 아니 화자가 어디에 (20세기 초, 백년전의 파리 혹은 19세기 말 콩브레 숙모님댁 혹은 몽주뱅 피아노 선생님 댁 뒷 언덕) 있는지 누구를 바라보고 생각하는지 고민했다.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를 읽었다. 펭귄판으로 2부 스완의 사랑, 까지 재작년에 겨우 읽었고 이번에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1부 콩브레는 세 번을 읽었다. 펭귄 판 번역은 어휘나 문장 투가 매우 고풍스러워서 고전문학 수업 교재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쉼표와 하이픈으로 겹쳐지고 더해지는 묘사와 비유에 길을 잃고 미궁에 빠지기도 부지기수. 뭔지 몰라도 그래도 아름다워서 고풍스러움과 우아함에 취해버리는 .... 상상을 하다보면 졸고 있었다. 펭귄 판은 직역을 주로하며 원서의 언어, 비유의 레퍼런스를 꼼꼼하게 - 때론 과하게 - 주석으로 길게 달았고 (거의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들 정도) 민음사 판은 중심 내용 (주어 누구? 동사 뭐? 장소 어디?)에 집중해서 매끈하게 정리해 번역했다. 펭귄에선 엄마가 아빠를 '나의 벗님'이라고 부르고 민음사에선 '당신' 이라고 칭한다. 친인척 호칭도 펭귄은 불란서 식으로 민음사는 책 초반에 중심인물 관계 설명을 하며 간단하게 이 시리즈의 밑그림을 그려두어 독자들을 준비시킨다. 다만 스포가 노골적이다. 물론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결말이라고 (그러니까 해피 엔딩인가요?) 알고는 있지만 어쩐지 김이 새버린다. 펭귄 판의 주석이 스포의 늪이라면 민음사는 깔끔하게 스포 정리 카드를 달아준 셈. 민음사 판은 주석이 본문 아래에 있어서 (그 양이 펭귄의 반의 반도 안 됨) 훨씬 본문에 집중하게 된다.

 

어른인 화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 유명한 홍차와 마들렌의 맛에서 되살린다. 그러면서 환하게 번지듯 펼쳐지는 레오니 숙모님 댁, 그 뒷 골목, 콩브레 소도시 전체, 특히 스완네 댁 쪽 방향과 게르망뜨 방향의 두 산책길을 다시 걷는다. 희열을 불러오는, 하지만 뭔지 의미를 모르지만 집중해서 파고들기에는 피곤했던 사물들이 주는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이 겹치고 잊혀지다 어느 날, 어린 시절 마차에 앉아서 써내려간 글, 단어들로 바뀌어 펼쳐지던 이미지들이 주는 행복을 경험한다. 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펭귄 판은 '시절'이라고 다른 단어를 쓴다) 시리즈는 작가가 맘껏 맛 본 그 행복감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미 인물관계도와 주석에서 스포는 당할대로 당해서 스완씨가 화류계 여자랑 결혼을 해서 딸을 하나 두었고 화자가 그 딸을 짝사랑하지만 연애가 쉽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큰 줄거리'라는 게 이 시리즈의 전부가 아니다. 산책길의 꽃나무들을 껴안고 이별의 눈물을 흘리는 아이, 아름다운 엄마를 만사 기분파인 아빠에게서 뺏어온 밤, 감정이 북받쳐서 울어버리는 아이가 그 감수성을 많이 덜어내지 않고 - 상상 속의 귀부인과 망상 속의 시골 처녀, 그리고 궁금한 스완씨 딸에 대한 온갖 열정도 키우면서 고개 돌려 저녁 하늘 멀리 서 있는 교회 종탑에 희열을 느끼는 글을 쓰는 이야기니까.

 

뭐라고 나도 덩달아 할 말이 많았는데 그게 뭐였드라....

아, 만연체 화려체 문장도 전염이 되는구나.

 

책에는 마들렌 말고도 여러 음식 이야기가 나온다.

새해 첫날 스완씨가 가져오는 맛밤, 여성 편력이 화려한 아돌프 할아버지가 내주시는 아몬드과자 (massepain)와 귤, 콩브레에서 줄기차게 먹던 아스파라거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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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6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돌프 할배가 주는 아몬드 가루로 반죽한 과자보다‘맛‘밤이 쵝오죠 아스파라거스는 유부만두님 손에 어떤맛이 될지 궁금한데요≧◡≦

유부만두 2021-01-17 07:21   좋아요 3 | URL
아스파라거스는 그냥 굽거나 볶을 거 같아요. 스프를 만들려 했더니 귀찮아서요. 한국선 아스파라거스 저렇게 나오는데 프루스트네 하녀는 아스파라거스 다듬다가 천식에 걸려서 결국 일을 그만뒀다고 해서 놀랐어요.

맛밤을 물엿에 조려 볼까봐요. 그래야 진정한 ‘맛‘밤, 마롱 글라세 아니겠습니까...하지만 벌써 맛밤 다 먹어서 없어요. (음식 남기는 게 뭔지 모름요)

하나 2021-01-16 2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문체전염 너무 즐겁게 보고 있는 1인 ㅋㅋㅋ 야채호빵쇼크 이후로요! 👀

유부만두 2021-01-17 07:22   좋아요 3 | URL
쇼크를 드렸나요, 제가! 감히! 하나님께!

근데요 진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쩌면 잃어버린 주어와 마침표는 어딨냐, 심정이 될 때가 많았어요. ^^

수이 2021-01-17 02: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시작해요. 프랑스어는 상상도 못하고 민음사판으로 슬슬 조금씩, 맛밤이라니........이 야심한 시각에 아......

유부만두 2021-01-17 07:26   좋아요 3 | URL
읽기 진도표를 만들어 볼까, 했는데요,
민음사 기준 한달에 한권 정도면 좋을 거 같아요. 중간에 속도가 조금 붙기도 하는데 매일 매일 읽는 게 중요해요. 하루 쉬면 .... 내용이 기억이 안남;;;;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묘사와 비유가 넘치고 인물을 기가 맥히게 그려내는데 하루 지나면 어디까지 읽었는지 헤매기도 하고 그 ‘느낌‘ 그 ‘감성‘을 다시 살리는데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읽을때 설정 이랄까, 폼 잡으니까 도움이 되더라고요? 나 자신도 우아하게 (그러니까... 나 블라우스 꺼내 입고 읽었다?)

앞부분 (90쪽 즈음에)에 마들렌느 까지 읽고 덮은 게 열 번도 넘었을 거에요. 1부 콩브레까지 두어번, 이번에 네 번 읽었네! 와우!!! 수학 정석의 ‘집합‘ 같은거죠.

하루 20쪽쯤? 잡고 매일 읽으세요. 비타민 먹듯, 그렇게. 마들렌느도 드시고 맛밤도 드시면서. 우아하게, 우리, 응?

라로 2021-01-17 0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스파라거스 저렇게 조금 들어 있다니 너무하네요. ^^;; 저거면 우리집에서는 한사람 접시에 올라갈 정도;;;
암튼, 올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 끝내시겠네요!! 미리 축하!!^^

유부만두 2021-01-17 07:28   좋아요 0 | URL
저만큼이 오천원이에요. 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질 않아서 (다행이죠) 저혼자 구워서 볶아서 먹어요. 올해 차분히 읽어서 완독하는게 목표에요. 큰 산 넘었으니 읽히겠죠? 번역 탓인지 펭귄 판은 정말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작가가 제 나이 때 쓴거라 뭔가 더 알겠는 (착각일지 몰라요) 느낌이 들었어요.

라로님 요새 독서에 불 붙으셔서, 우와 하고 감탄하고 멋지다 우리 언니, 를 육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라면 길가에 한들한들 꽃 밖에 모르지만 저도 우주로 날아가 볼까나, 하고 책 샀어요.

blanca 2021-01-17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모닝커피에 안성맞춤인 페이퍼네요. 민음사 속도 따라가는데 이 글 보니 빨리 완간해줬으면 좋겠어요. 아, 제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읽기 진도표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유부만두 2021-01-17 21:56   좋아요 0 | URL
네, 이야기 중간 중간 살짝 끊어지는 곳이 있으니까요. 먼저 많이 읽으신 블랑카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에서는 깨달은 자의 외양을 규정하며 아주 구체적인 서술을 하는데, 그 가운데는 ‘발바닥이 평평하여 지면에 골고루 닿는다足安平相, 발꿈치가 풍만하다足跟滿足相거나 ‘발바닥에 바퀴형 문양이 있고足千無輪相, ‘발등은 높고 두텁다足联高相‘는 것이 있다.

여기까지만 살펴보더라도 부처는 평발이고, 발바닥에 바퀴가 달렸으며 발등이 높아 스니커즈는 신기 힘들다. 손에 대한 서술을 살펴보면 ‘손이 무릎에 이를 만큼 길고過膝相, ‘손과 발가락에 물갈퀴 같은 막이 있으며手足指網相‘ 라는 서술로 평발에 바퀴가 달린 발에 이어, 수영 영웅 펠프스의 팔 길이를 거뜬히 넘는 팔 길이에 그 손에는 물갈퀴 또한 달려 있어 수영에 매우 능한 선수급 신체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비범한육체에 비범한 정신이 깃드는 모양이다. (148쪽)

—-
NB: 막둥이 평발에 남편 발등 태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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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1-0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이랑 거꾸로. 남편 평발에 아들 발등 태백산. ㅋ 그래서 엠군은 운동화가 막 터지잖아.

유부만두 2021-01-13 16:13   좋아요 0 | URL
우린 득도한 자들과 사는군요. 어쩌면 우리가 해탈한 존재들인지도....
 

메리 윌킨스 프리먼의 책을 찾았다. 책정보에는 편역자 이름만 나와있다. 저자 이름도 표기 하지 않고, 역자의 약력도 이 한 권이 전부이며 현란한 표지와 책 제목... 어쩐지 이 책 자체가 서점의 괴담 같다. 미국을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의 괴담을 묶어서 9권의 시리즈로 내 놓았다. 이 출판사의 도서는 주로 토정비결, 운세, 명리학, 전생 등. 



실린 이야기들은 ... 


하숙집 괴사건, Hall bedroom -- 미신의 공포, Black terror -- 죽음의 幻覺, In the midst of death -- 나무와 결혼한 여인, Tree's wife -- 사악한 눈, Eyes -- 집념을 쏟은 衣裳, Romance of certain old clothes -- 미소짓는 사람들, Smiling people -- 달을 그리는 畵家, Moon artist -- 핼핀 프레이저의 죽음, Death of Halpin Frayser -- 검은 베일의 비밀, Minister's black veil -- 기피당한 집, Shunned house -- 악마에게 목을 걸지 마라, Never best the devil your head -- 대아가 죽은 이유, Story of the death of the r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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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1-12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raven 이 왜 ‘대아’ 인가 했더니 까마귀 ‘아’ 鵶 ;;;;

잠자냥 2021-01-12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메리 윌킨스 프리먼 작품 읽고 나면 다른 작품 뭐 있나 더 찾아보게 된다니까요. ㅎㅎㅎㅎ 유부만두 님도 그 증상을 겪고 계시군요. 프리먼이 괴담 비슷한 글도 종종 썼나봐요. 국내 단편선에 실린 작품들 보면 좀 그런 듯.

유부만두 2021-01-12 09:49   좋아요 1 | URL
네. 얇은 단편집 한 권으론 목이 마르더군요. 그런데 저 책은 선뜻 읽고 싶지 않네요. ^^

cyrus 2021-01-12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 번역된 메리 윌킨스 프리먼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어요. <미국의 괴담>에 실린 프리먼의 작품명을 알려주실 수 있어요? ^^

유부만두 2021-01-12 10:52   좋아요 0 | URL
포스팅에 써 놓았습니다 ^^

cyrus 2021-01-12 10:59   좋아요 0 | URL
작품명으로 봐서는 누가 썼는지 잘 모르겠어요.. ^^;;

유부만두 2021-01-12 11:08   좋아요 0 | URL
도서관 서지로 찾은 책인데 저자는 프리먼만 표기되어 있고요, 책 안에 ‘원저자’에 대한 챕터가 있더군요. 아마 자세한 설명이 있겠지만 어느 단편이 프리먼의 것인지는 따로 검색 비교 해야 할 듯해요. 원서로 단편집은 꽤 많더군요.

잠자냥 2021-01-12 14:37   좋아요 2 | URL
하숙집 괴사건 (The Hall Bedroom)은 프리먼 작품이 확실한 것 같은데, 다른 작품은 모르겠어요. ㅎㅎ

참조 http://wilkinsfreeman.info/Short/HallBedroomSS.htm

cyrus 2021-01-12 15:12   좋아요 2 | URL
작품명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자냥님. <미국의 괴담>은 미국 출신 작가들의 공포 단편소설을 모은 선집이에요. 이 책에 프리먼이 쓴 소설이 두 편 이상 수록되었는지는 제가 이 책을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미국의 괴담>에 수록된 ‘핼핀 프레이저의 죽음’과 ‘악마에게 목을 걸지 마라’는 확실히 프리먼의 소설은 아니에요. ^^

단발머리 2021-01-12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자체가 서점의 괴담 같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이고 배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1-12 20:00   좋아요 0 | URL
이 괴담 시리즈는 표지도 베일에 싸인 원작자와 역자도 다 이상해요.

psyche 2021-01-12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70년대 나오던 책 같은 느낌이었는데 가서 보니 2000년에 나왔네?

유부만두 2021-01-12 20:0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더 기괴한 분위기에요.
 















완독했다. 상권과 하권은 전자책으로, 중권은 오디오 북으로 들었다. 오디오 북은 처음엔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 (특히 레트 버틀러의 느끼한 목소리나 교태 부리는 스칼렛의 대사) 이야기의 생생함을 전달하기에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듣기 보다는 눈으로 더 빨리 읽어나갈 수 있다. 집안일을 할 때 오디오북이 효율성을 높인다 싶다가도 그만큼 집중을 하지는 않으니 어쩐지 반칙을 하는 기분도 들었다. 


처음부터 불편하게 표현되는 인종 차별 표현/문장 등은 중권에서 극에 달하며 남군의 패배, 북군의 지배와 새 체제의 설립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정치적 선동이 되고 노골적인 흑인 멸시와 혐오 대사가 계속된다. 북부가 남부를 지배해서 선거권도 빼앗고 '자격없는' 흑인이 남부의 부와 재산, 전통과 정신을 파괴했다는 주장이 반복되며 KKK를 자구책으로 설명하는데 (지난주 미국의 수도에서 벌어진 일이 더 섬찟하게 느껴졌다) 차마 들을 수가 없어서 몇번이나 책의 문장을 확인해보니 더 심한 욕설과 비속어 문장은 건너뛰고 녹음했더라. 확실히 눈으로 읽는 것 보다 혐오 대사를 귀로 들을 때 그 충격과 불쾌감은 더 크다. 소설의 흑인들의 말은 어리숙하고 비문 투성이라 읽기에도 듣기에도 불편하다. (영화에서는 - 그러하다. 영화 까지 보고 말았다. - 흑인들이 그럭저럭 제대로 된 대사를 한다. 멍청한 행동을 해서 매를 맞기도 하고. '사람'이 아닌 비러비드가 어눌한 대사를 하지만 우아한 문장으로 번역된 모리슨의 소설은 또 다른 의미로 상황을 변질시키기도 했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반복되는 흑인의 '짐승 취급'은 역했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 이름이 아예 '돼지'(porc)인 노예도 있다. 그의 '충성심'을 치하하느라 금시계를 내리는 스칼렛은 북부에서 이주해온 양키들이 흑인 보모를 꺼려하자 자신들이 얼마나 흑인들을 잘 대접해왔는지 역설한다. (이 책이 왜 금서가 아닌거야???) 


남군의 패배 후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한 스칼렛은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이고 강단 있게 활동 범위를 넓히지만 원칙과 신념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저 '돈'에 한이 맺힌 사람이 전쟁후 두팔 걷어부치고 온갖일을 다 해내는 억척 ...(1953년 한반도 아님) ... 이지만 팜므 파탈인지라 누구라도 자신의 매력으로 사로잡을 수 있다. 미국 조지아 주의 1860-70년대를 그리기 위해서 소재를 다 끌어오기 때문에 스칼렛의 성격이 오락가락한다. 그녀는 책이나 문화를 즐기지 않고 귀한집에서 컸지만 아버지의 상대적으로 덜 우아한 핏줄로 고집이 세고 거친 면이 있으며 닥치면 굳은 일도 해내고 책임감이 강하(지만 자기 애들은 내팽겨침)고 첫사랑 애슐리에게 집착한다. 그녀의 뼈가 묻힐 '타라'가 특별하지만, 그 붉은 흙 덕에 야반도주를 하지 않았고, 그 땅문서 때문에 동생과 (더욱 더) 웬수가 되었더랬지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타라는 그저 설정으로 남는다. 소설에서 결국 타라 농장을 관리하게 될 사람들은 동생과 윌 부부가 될것 같다. 그리고 그 남자, 레트. 


스칼렛이 열여섯 살, 애슐리에게 거절당하는 그 바베큐 파티에서 처음 만나는 거무튀튀한 레트는 이미 서른네 살의 남자다. (스칼렛의 엄마와 아빠 나이 차이가 삼십쯤 되는 데 비하면 약과인가?) 그가 스칼렛을 사랑한다고 '단언' 하는 일은 소설에선 거의 후반부에 이루어지는데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빙글빙글 웃는 이 늙은 남자는 대놓고 '얘, 아가야, 너 내거 하자' 라며 덤비고 있다. 발랄랄라한 영화 속 스칼렛은 (비비안 리의 화려한 표정 연기) 온몸으로 영화를 지배하고 있다. 영화는 그녀의 톡톡 튀는 대사와 걸음 덕에 전달 내용이 넘치도록 많아 정신없는 희비극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속았지! 어릴 적 본 미쿡 영화의 이쁜 주인공 이야기가 이리 위험한 것이다! 


소설의 스칼렛은 더 복잡하고 다면적이다. 인물이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는 게 아니라 겉과 속이 다르고 자기 편한대로 구는 사람이 스칼렛이다. 그녀가 주체적으로 행동을 한다기보다 그 시대의 소재들이 그녀를 이용해서 얽고 있다. 영화에선 레트와의 사이에 딸 하나 보니만을 두지만 소설에선 첫 남편 찰스와 아들 웨이드를, 둘째 남편 프랭크와 딸 엘라를 둔다. 결혼=임신 이라는 공식이라 유산=사고 이며 아이의 죽음=최고 비극이다. 그만큼 비혼여성은 (키티 고모와 인디아)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스칼렛은 처음 두 남편에게 사랑은 커녕 정도 없어서 그 두 아이들은 냉대를 당한다. 애들이 없어졌나? 싶게 이야기에서 존재감 없게 전개시키다 갑자기 애들이 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식이다. 엘라는 자폐 증상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데 스칼렛은 그래서 엘라를 더욱 미워한다. 프랭크가 이용 당하다 ㄱ죽음을 당하는 만큼 엘라의 처지도 딱하다. 보니가 낙마해서 죽자 '하느님은 차라리 엘라를 데려가시지'라는 독백마저 스칼렛이 내뱉는다. 그렇다고 그녀가 보니를 향해서 지극한 모성애를 가진 것도 아니다. 반면 레트가 보니에게 쏟는 애정은 징그러운 집착이다. 그는 대놓고 '이제야 나 만의 사람' 이라며 소유욕을 드러내고 스칼렛에게서 못 얻은 확실성을 어린 딸에게 찾고있다. 부인 대신 딸이라니. 부인에게 화가 난 레트는 스칼렛에게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고 강제로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그런 밤을 열정의 밤으로 묘사하고 임신 사실을 알게된 레트는 갑자기 사랑을 외친다. 중학교 때 읽었던 로맨스 소설 속 구릿빛 피부의 츤데레 남주 원형이 레트 버틀러일지도 모르겠다. (절레절레) 


그리고 우아한 멜라니 .... 는 더 무섭고 더 지독한 사람인데 오늘 이 책을 다 읽고 영화 까지 보느라 내 심신이 지쳐서 다른 인물들을 언급하기가 싫다. (누가 위스키 좀?) 문득 문득 말할 거리가 생각 나긴 한다. 커튼으로 드레스 만드는 스칼렛이 '사운드 오브 뮤직' 같다던가, 시절이 바뀌는 바람에 옛 대농장 아가씨가 농장 책임자랑 결혼하는 게 서희와 길상이 같다던가 ... 하지만 작년 늦가을에 시작해서 올해 초까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나서 ... 많이 지친다. 옛날 책, 유명한 책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안 읽을 땐 이유가 있는 거라고 깨달았다. 그런데 나 프루스트 읽고 있잖아? 하아 .... 한숨 나온다. 실은 이 책도 꽤 빻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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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01-11 2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 축하드려요!
사실 너 내꺼하자!는 아직도 드라마 남주의 주요 대사인 관계로 레트 같은 남자는 아직도 활발히 활동 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시간을 찾게 되시면 제게 연락 좀.... 제가 시간이 좀 부족합니다 ㅎㅎ

유부만두 2021-01-11 22:13   좋아요 1 | URL
아... 지쳤어요.
레트는 정말 남자주인공의 전형 같아요. 스칼렛과의 관계도 익숙한 밀당이 많이 나오고요. 실은 그 부분이 이야기에 재미를 주고 있어요. 그래도 스칼렛 정말 이상한 인물이에요. 정치적으로도 오락가락하고 끝까지 애슐리에게 집착하다가 갑자기 깨고. 레트랑 헤어지는 건 결국 시간 문제였다고 봐요.
프루스트는 매일 조금씩 나눠서 읽으니까 이야기가 진도는 나가네요. 그런데 우와, 이 책에서도 화자랑 이웃 사람들 성격 증말 이상해요.

파이버 2021-01-12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년 늦가을에서 올해 초까지라니 완독 정말 축하드립니다 프루스트도 읽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유부만두 2021-01-12 20:01   좋아요 1 | URL
프루스트는 벌써 몇 번 째 시도인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앞부분만 자꾸 읽으니 정이 드는 기분이네요?;;;;
 
엄마의 반란 - 갈라 드레스/ 뉴잉글랜드 수녀/ 엇나간 선행 얼리퍼플오키드 3
메리 E. 윌킨스 프리먼 지음,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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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최고, 자매님들 최고, 수녀님 최고,
알뜰하고 바지런한 언니들 만세
여자끼리 잘 살아요, 동정 따윈 던져버려.

고매한 인격은 척박한 환경에서 진가가 드러난다. 오늘 사라 펜은 얇은 페스트리 반죽에 인격을드러냈다. - P15

일하는 동안 펜 부인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곤혹스러워 보이던 이마가 펴지고, 불안해 보이던 눈빛이 안정되었으며, 입매에는 결기가 스몄다. 부인은 자신이 없어질까봐 생각나는 대로 문구를 하나 만들어서 마음에 되새겼다. ‘자발적으로 만들어내는 기회는 새 인생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펜부인은 그 문구를 소리 내어 몇 번 반복한 다음, 행동에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 P27

펜 부인은 완두콩을 총알처럼 거칠게 다뤘다. 마침내 고개를 든 사라 펜의 눈에는 평소의 온화함 대신 기백이 넘쳤다. - P33

밖으로 나온 조 대깃은 한숨을 쉬며 부드러운 저녁 공기를 들이마셨다. 마치 순하게 길들여진 곰이 도자기 가게에서 막 빠져나온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루이자는, 그 곰이 나간 다음 마음씨 곱고 인내심 강한 도자기 가게 주인이 느꼈음직한 감정을 느꼈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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