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에 가기 전에, 지금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잠이 깨기나 했는지 상황 정리가 필요하다. 낮에 읽던 책의 주인공과 싸우거나 친구가 되었더라도, 일단 현실로 내팽겨쳐졌다면 지금이 한밤중인지 새벽녘인지 알아야 한다. 침대 옆에 핸드폰 어딨더라. 현실 귀환 직전 그 짧은 순간에 (내가 경험 했던, 혹은 전설 이야기의) 과거의 시공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그 찰나를 아름답고 계속 이어지는 문장으로 몇백쪽에 걸쳐 이야기를, 그것도 시리즈로 남겼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71년생, 올해가 탄생 150주년이고 내년이 그의 소천 100주기다. 펭귄 판 (이형식 역)은 12권 (페이퍼백)으로 완역되었고 민음사 판(김희영 역)은 10권까지 나왔는데 아마 올해 내년에는 완역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 읽어보려고요. 이게 아마 서너 번째 시도인데 내 나이도 꽉 찼으니 (넘쳤;;;) 이제 읽어도 뭔 말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마가렛 미쳴의 난리 부르스 소설도 읽었는데 그 동시대 유러피언 백인 유산계급 한량의 글이라고 무서워할 건 없지.

 

그 몽롱하고 나긋나긋 우아한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나는 너무 무딘 사람인지라 읽은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곱씹어야 (물론, 우리말 번역본) 겨우겨우 의미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프루스트가, 아니 화자가 어디에 (20세기 초, 백년전의 파리 혹은 19세기 말 콩브레 숙모님댁 혹은 몽주뱅 피아노 선생님 댁 뒷 언덕) 있는지 누구를 바라보고 생각하는지 고민했다.

 

1권 스완네 집 쪽으로의 1부 콩브레를 읽었다. 펭귄판으로 2부 스완의 사랑, 까지 재작년에 겨우 읽었고 이번에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1부 콩브레는 세 번을 읽었다. 펭귄 판 번역은 어휘나 문장 투가 매우 고풍스러워서 고전문학 수업 교재를 읽는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쉼표와 하이픈으로 겹쳐지고 더해지는 묘사와 비유에 길을 잃고 미궁에 빠지기도 부지기수. 뭔지 몰라도 그래도 아름다워서 고풍스러움과 우아함에 취해버리는 .... 상상을 하다보면 졸고 있었다. 펭귄 판은 직역을 주로하며 원서의 언어, 비유의 레퍼런스를 꼼꼼하게 - 때론 과하게 - 주석으로 길게 달았고 (거의 강의를 듣는 기분이 들 정도) 민음사 판은 중심 내용 (주어 누구? 동사 뭐? 장소 어디?)에 집중해서 매끈하게 정리해 번역했다. 펭귄에선 엄마가 아빠를 '나의 벗님'이라고 부르고 민음사에선 '당신' 이라고 칭한다. 친인척 호칭도 펭귄은 불란서 식으로 민음사는 책 초반에 중심인물 관계 설명을 하며 간단하게 이 시리즈의 밑그림을 그려두어 독자들을 준비시킨다. 다만 스포가 노골적이다. 물론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결말이라고 (그러니까 해피 엔딩인가요?) 알고는 있지만 어쩐지 김이 새버린다. 펭귄 판의 주석이 스포의 늪이라면 민음사는 깔끔하게 스포 정리 카드를 달아준 셈. 민음사 판은 주석이 본문 아래에 있어서 (그 양이 펭귄의 반의 반도 안 됨) 훨씬 본문에 집중하게 된다.

 

어른인 화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그 유명한 홍차와 마들렌의 맛에서 되살린다. 그러면서 환하게 번지듯 펼쳐지는 레오니 숙모님 댁, 그 뒷 골목, 콩브레 소도시 전체, 특히 스완네 댁 쪽 방향과 게르망뜨 방향의 두 산책길을 다시 걷는다. 희열을 불러오는, 하지만 뭔지 의미를 모르지만 집중해서 파고들기에는 피곤했던 사물들이 주는 이미지들, 그 이미지들이 겹치고 잊혀지다 어느 날, 어린 시절 마차에 앉아서 써내려간 글, 단어들로 바뀌어 펼쳐지던 이미지들이 주는 행복을 경험한다. 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펭귄 판은 '시절'이라고 다른 단어를 쓴다) 시리즈는 작가가 맘껏 맛 본 그 행복감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미 인물관계도와 주석에서 스포는 당할대로 당해서 스완씨가 화류계 여자랑 결혼을 해서 딸을 하나 두었고 화자가 그 딸을 짝사랑하지만 연애가 쉽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큰 줄거리'라는 게 이 시리즈의 전부가 아니다. 산책길의 꽃나무들을 껴안고 이별의 눈물을 흘리는 아이, 아름다운 엄마를 만사 기분파인 아빠에게서 뺏어온 밤, 감정이 북받쳐서 울어버리는 아이가 그 감수성을 많이 덜어내지 않고 - 상상 속의 귀부인과 망상 속의 시골 처녀, 그리고 궁금한 스완씨 딸에 대한 온갖 열정도 키우면서 고개 돌려 저녁 하늘 멀리 서 있는 교회 종탑에 희열을 느끼는 글을 쓰는 이야기니까.

 

뭐라고 나도 덩달아 할 말이 많았는데 그게 뭐였드라....

아, 만연체 화려체 문장도 전염이 되는구나.

 

책에는 마들렌 말고도 여러 음식 이야기가 나온다.

새해 첫날 스완씨가 가져오는 맛밤, 여성 편력이 화려한 아돌프 할아버지가 내주시는 아몬드과자 (massepain)와 귤, 콩브레에서 줄기차게 먹던 아스파라거스 등.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cott 2021-01-16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아돌프 할배가 주는 아몬드 가루로 반죽한 과자보다‘맛‘밤이 쵝오죠 아스파라거스는 유부만두님 손에 어떤맛이 될지 궁금한데요≧◡≦

유부만두 2021-01-17 07:21   좋아요 3 | URL
아스파라거스는 그냥 굽거나 볶을 거 같아요. 스프를 만들려 했더니 귀찮아서요. 한국선 아스파라거스 저렇게 나오는데 프루스트네 하녀는 아스파라거스 다듬다가 천식에 걸려서 결국 일을 그만뒀다고 해서 놀랐어요.

맛밤을 물엿에 조려 볼까봐요. 그래야 진정한 ‘맛‘밤, 마롱 글라세 아니겠습니까...하지만 벌써 맛밤 다 먹어서 없어요. (음식 남기는 게 뭔지 모름요)

하나 2021-01-16 2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문체전염 너무 즐겁게 보고 있는 1인 ㅋㅋㅋ 야채호빵쇼크 이후로요! 👀

유부만두 2021-01-17 07:22   좋아요 3 | URL
쇼크를 드렸나요, 제가! 감히! 하나님께!

근데요 진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어쩌면 잃어버린 주어와 마침표는 어딨냐, 심정이 될 때가 많았어요. ^^

수이 2021-01-17 02: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제 시작해요. 프랑스어는 상상도 못하고 민음사판으로 슬슬 조금씩, 맛밤이라니........이 야심한 시각에 아......

유부만두 2021-01-17 07:26   좋아요 3 | URL
읽기 진도표를 만들어 볼까, 했는데요,
민음사 기준 한달에 한권 정도면 좋을 거 같아요. 중간에 속도가 조금 붙기도 하는데 매일 매일 읽는 게 중요해요. 하루 쉬면 .... 내용이 기억이 안남;;;;

정말 우아하고 아름다운 묘사와 비유가 넘치고 인물을 기가 맥히게 그려내는데 하루 지나면 어디까지 읽었는지 헤매기도 하고 그 ‘느낌‘ 그 ‘감성‘을 다시 살리는데 시간이 걸리더라고요. 읽을때 설정 이랄까, 폼 잡으니까 도움이 되더라고요? 나 자신도 우아하게 (그러니까... 나 블라우스 꺼내 입고 읽었다?)

앞부분 (90쪽 즈음에)에 마들렌느 까지 읽고 덮은 게 열 번도 넘었을 거에요. 1부 콩브레까지 두어번, 이번에 네 번 읽었네! 와우!!! 수학 정석의 ‘집합‘ 같은거죠.

하루 20쪽쯤? 잡고 매일 읽으세요. 비타민 먹듯, 그렇게. 마들렌느도 드시고 맛밤도 드시면서. 우아하게, 우리, 응?

라로 2021-01-17 07: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스파라거스 저렇게 조금 들어 있다니 너무하네요. ^^;; 저거면 우리집에서는 한사람 접시에 올라갈 정도;;;
암튼, 올해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다 끝내시겠네요!! 미리 축하!!^^

유부만두 2021-01-17 07:28   좋아요 0 | URL
저만큼이 오천원이에요. 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질 않아서 (다행이죠) 저혼자 구워서 볶아서 먹어요. 올해 차분히 읽어서 완독하는게 목표에요. 큰 산 넘었으니 읽히겠죠? 번역 탓인지 펭귄 판은 정말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작가가 제 나이 때 쓴거라 뭔가 더 알겠는 (착각일지 몰라요) 느낌이 들었어요.

라로님 요새 독서에 불 붙으셔서, 우와 하고 감탄하고 멋지다 우리 언니, 를 육성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라면 길가에 한들한들 꽃 밖에 모르지만 저도 우주로 날아가 볼까나, 하고 책 샀어요.

blanca 2021-01-17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모닝커피에 안성맞춤인 페이퍼네요. 민음사 속도 따라가는데 이 글 보니 빨리 완간해줬으면 좋겠어요. 아, 제가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읽기 진도표를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유부만두 2021-01-17 21:56   좋아요 0 | URL
네, 이야기 중간 중간 살짝 끊어지는 곳이 있으니까요. 먼저 많이 읽으신 블랑카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