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두번째 소설 <스페이드의 여왕>은 푸시킨의 동명 소설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했다. 좀 더 잘 읽어보겠다고 설화같은 구조에 강렬한 마무리를 가진 푸시킨의 소설을 읽고 울리츠카야의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별로 좋은 독법은 아닌듯 하다. 푸시킨을 읽었더니 자꾸 인물들을 대입시키게 된다. 그리고 파국으로 내닫는다는 생각에 중간에 벌어지는 일에 덜 집중하게 되었다. 마음만 급해지고. 이 소설의 시작이 어디였건 그냥 울리츠카야의 소설 세계만 바라보아도 충분하고 완벽한 독서가 될 수 있다. 


깐깐한 (더해서 매우 지배적인) 노모를 모시고 사는 이혼녀 안나 표도로브나는 딸과 손주 둘 까지 한집에 거두며 매일 바쁘게 산다. 폴란드 출신 전남편은 남아공에 사는데 오랜만에 만나러 온단다. 전남편의 인생여정에서 러시아/소련의 역사와 격변의 정세를 가늠할 수 있다. 그가 온다니 신경이 쓰이는 안나. 그녀의 노모 무르는 스페이드의 여왕처럼 파괴의 화신으로 식구들을 억압하고 있다. 그야말로 옛 시대의 유물이며 이기적인 존재, 자신의 친자식들 조차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레 자신의 편안함만 고집하며 승질을 부려댄다. (태ㄱㄱ 부대나 노친네들이 떠오른다) 기운차게 자라나는 손자와 딸에게 넓은 세상과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싶은 안나는 이래저래 두 세대 사이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전남편은 멀끔하고 부티도 난다. 그는 딸과 손자들에게 여름 휴가 여행을 약속한다. 안나는 조금 설레고 쓰라린 심정이 된다. 고여있던 네 여자들의 생활을 흔들어놓고 간 전남편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여름의 그리스섬 휴가라니. 어떻게 해서든 이 여행은 성사시키리라 결심한다. 3, 7, 에이스, 외우고 또 외운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마지막 카드가 스페이드의 여왕이라는 것을.  


내 나이 탓인지, 그 징글맞게 고약한 할망구 무르가 이젠 정말 죽겠구나 하는 순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강도에 놀라 쓰러진 푸시킨의 할망구 만큼이나 이들에겐 악다구니를 뱉어내는 주름잡힌 입 말고는 남은 것이 없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몸을 틀거나 눕기만 해도 몸에선 이상 신호가 잡힌다. 내 핸드폰에는 하루에도 서너 건씩 여든 살 이상의 노인 실종 알리미가 뜬다. 시댁에 갈 때면 이분들의 세상은 아직 90년대에 멈춰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실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90년대, 내가 아직 이십대였을 때, 결혼 하기 전의 그 시절. 도망쳐! 


각설하고 

<스페이드의 여왕>은 이기적인 친정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중년 여성의 고달픈 나날이며 (푸시킨의 경우에는 노인공경과 도박근절을 외치는 흥미로운 권선징악 해피엔딩 교훈 설화로도 볼 수 있다) 순식간에 바뀌는 세상에서 어지럼을 느끼는 중년 아줌마, 나의 독서였다. 올해의 책일지도 몰라. 푸시킨 말고 울리츠카야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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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0-28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이코프스키도 푸쉬킨 원작의 <스페이드의 여왕>을 각색해서 정말 멋있는 오페라를 만들었습니다.
울리츠카야의 책에는 노모 무르로 나오는 거 같은데, 차이코프스키에서 비슷한 배역의 백작부인은 정말 그로테스크한 연기를 합니다. 오페라 좋아하시면 한 번 보시면 좋을 텐데요.

유부만두 2023-10-28 23:40   좋아요 1 | URL
학교 숙제로 오페라를 소설보더 먼저 알았어요. (시험 대비해 들었으니 좋아할 순 없었죠) 팔스타프님 추천에 힘 입어 공연 영상을 찾아 보겠습니다. 유툽에 2019 공연 영상 있네요!!!

잠자냥 2023-10-28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울리츠카야 진쩌 좋죠. 저는 도서관에서 일단 최근 나온 <커다란 초록 천막> 빌려왔어요!

유부만두 2023-10-28 23:32   좋아요 0 | URL
정말 좋아요. 전 메데야의 아이들 읽으려고요.

반유행열반인 2023-10-29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망쳐!!! ㅋㅋㅋ고약하게 늙지 않기가 고난이도 같아서 저도 우리 애들한테 나 늙어서 곤조 부리면 도망쳐라…미리 말할라구요…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0-29 09:24   좋아요 1 | URL
ㅎㅎㅎ 도망은 진즉에 쳐야했는데, 이젠 애들에 늙은 남편에 … 오늘도 이 좋은 가을날, 시댁 가요~ 룰루~

단발머리 2023-10-30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는 댓글 수준이 후덜덜합니다. 오페라랑 천막이요? 우아....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36일차 접수했구요!!
 

책과 함께 한 여자의 일생 이야기, 문학과 책으로 단단하게 다져지고 뭉근하게 오래 그 불씨를 안고 살아가는 나름대로 충만한 한 여인의 인생 이야기이다. 


소네치카는 책을 읽는다. 어린 시절 부터 그녀는 책읽기를 중심으로 살았다. 그리고 인생에선 그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았다. 배신감에 무너지고 허망함에 휩싸일 때, 그럴 때 소네치카는 책을 읽는다. 결혼 생활을 시작한 후 살림과 육아에 치여서 책읽기에서 멀어질 때도 있었으나 그녀가 읽은 책들의 주인공들과 그 배경은 현실에서 소네치카의 겉옷 혹은 모피처럼 함께 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에 불안하고 자신이 부족해서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부처님도 못하신다는 "시앗보기"를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은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다 늙은 그 예술가 양반을 그런 식으로 떼어놓고 대신 자유 시간을 얻는 소네치카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니 그건 아니었겠지.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내 마음도 쓰릿했다. 마침 그때 정말 혼자가 되어버렸으니. 그때 그녀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이 모든 가정불란 장면이 덤덤하고 슴슴하게 진행된다. 


내가 그녀에게 격하게 감정 이입을 한 장면은 소네치카가 딸 아이 타냐에게 책 읽기를 권할 때다. 


"소네치카는 어떻게든 타냐에게 독서 습관을 붙여주려 노력했지만, 타냐는 소냐가 솜씨 좋게 책읽는 소리를 들으면 눈이 멍해져 소냐가 꿈에서도 본 적이 없는 곳으로 도망쳐 사라지곤 했다." 


책읽기는 억지로 시킬 수가 없다. 손에 책을 쥐여주고 숙제나 상품으로 다그쳐보아도 결국 책읽기는 타고난 "책벌레" 우리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에서 만난 기막힌 사랑과 실패, 엄청난 범죄나 배신, 희생과 인간 승리를 읽으며 겪고 현실에서 조금은 덤덤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내 팔자야, 퍼질러 앉아서 악을 쓰거나 너죽고 나죽자 드잡이 하는 장면은 소네치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독자양반들, 너무 흥분하지 마, 이런 거 문학작품들에선 천지삐까리여. 소네치카는 천천히 자신의 삶을 다져나간다. 


오늘 밤, 동지 소네치카 이야기에 맘이 벅차올라서 바로 이어서 두꺼운 러시아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과 그냥 소네치카가 생각 만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다. 마지막 문장 정말 멋지네요, 잠자냥님 나도 딱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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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0-28 0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쵸?! ㅎㅎ

유부만두 2023-10-28 15:56   좋아요 1 | URL
스페이드의 여왕도 재밌게 읽었어요. 능숙한 작가의 힘!이 이런거죠!

책읽는나무 2023-10-28 0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구수한 입담의 리뷰입니다.
그리고 잠자냥 님과 통하셨군요.ㅋㅋㅋ

유부만두 2023-10-28 15:59   좋아요 2 | URL
육고냥댁 추천은 어렵지만 믿을만하잖아요! 어휴 어제 저 책 읽고 을매나 좋았게요. 오늘은 “스페이드의 여왕” 읽고 또 너무 좋아서 차이코프스키 오페라 틀어놨쟈나요, 나 이러케 교양있는 만두에요~

새파랑 2023-10-28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이 책 주문했습니다~!!!

유부만두 2023-10-28 20:14   좋아요 1 | URL
잘 하셨어요!!! 새파랑님의 감상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전 이번에 나온 <메데야와 그녀의 아이들>로 전진!!!
 

천하의 애거서 크리스티도 재미없는 소설을 썼다. 


사망 추정 시간과 알리바이를 맞추기 위해서 제 2의 피해자를 만든다는 점에서 일본 추리 소설 생각이 났다. 하지만 전개가 너무 너무 느리고 여러 인물들의 사정과 관계를 엮어놓으며 거의 대부분을 용의자로 만들어놨다. 하마터면 읽다 말고 맨 뒤로 가서 범인만 알아내고 포기할 뻔. 미스 마플이 부지런히 관찰하고 추리하지만 너무 간섭장이 동네 할머니 같이 그려놓아서 안타까웠다. 드라마로 좀 더 속도감 있도록, 인물들이 더 생생하도록 표현하고 결혼! 사랑!을 덜 외치는 버전을 봤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책에선 계속 "사람들은 너무 쉽게 믿어버려요"라고 경고한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물론 말로 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말을 너무 많이해요"라는 미스 마플의 말 처럼 그 말들이 오히려 경고를 울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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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여인이 이혼 후 아이 한 명을 키우다 운명처럼 한 남자 이유상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동거를 시작하고 반대를 무릅쓰며 결혼했다. 하지만 반년 후 남편이 사라진다. 사랑했던 그의 이름과 신분 심지어 성별까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고 여자는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받았다. 그래도 여자는 그를 간절히 그리워 하고 있다. <친밀한 이방인>은 사라진 그가 남긴 "책"의 원저자인 화자가 그 "남자"의 자취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그는 누구인가. 


"그 사람의 본명은 이유미, 서른여섯 살의 여자예요. 내게 알려준 이름은 이유상이었고, 그전에는 이안나였죠.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여자라는 사실까지 속였으니 이름이나 나이 따위야 우습게 지어낼 수 있었겠죠. 그는 평생 수십 개의 가면을 쓰고 살았어요. 내게 이 책과 일기장을 남기고 육 개월 전에 사라져버렸죠."

"저를 책망하고 싶으시겠죠. 어떻게 한집에서 지내다가 결혼을 할 때까지 그 사람이 여자인 것을 알아채지 못했느냐고요.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어요. 그럼 당신은 어떻게 당신 옆의 그 사람이 남자혹은 여자인 것을 확신하느냐고요."

"그 사람은 까다로운 저희 어머니나 제 아이에게도 무척 친절했어요. 호리호리한 체구에 웃는 얼굴이 참 예뻤죠. 어쩌면 그때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는지도 몰라요. 유난히 손가락이 하얗고긴 것, 대화에 능숙한 것, 늘 주변 사람들의 기분을 민감하게 알아차리던 것까지, 돌이켜보면 일반적인 남자들과는 너무 달랐죠."


하지만 이유미의 연극은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 그 방향을 튼다. 그가 주인공이 아니었어?


"이 사기극에서, 이유미의 배당금은 얼마나 되는 거죠?"
사기극이라는 말에 진의 몸이 움찔 떨렸다.
"꼭 돈 때문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먼저 그사람을 도왔고, 그다음에 그 사람이 나를 도왔죠. 저는 우리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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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30 2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30 2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판타지 소설로도 실력을 뽐내시는 쿠앙 작가.
Rebecca Kuang은 1996년 광저우에서 태어나 4살 때 미국으로 이민, 성장했다. 첫 작품은 대학생 때인 만 19세에 쓰기 시작해 22세에 출판. 젊고 재능있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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