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평생 노동의 보수를 모아서 단층집을 사고 여러 운이 겹쳐 이젠 4층 빌라 건물을 갖게 된 순례씨. 칠십 대 그녀에겐 이혼 후 사망한 전 남편과 캐나다로 이민 간 아들이 하나 있다. 가까이엔 시세에 훨씬 못 미치는 월세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이웃들이 있다.
얼마전 그 이웃 중 한 명이자 순례씨의 연인이었던 70대 박씨 할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빈 집에 박씨 할아버지의 외손녀 수민네 가족이 갑작스레 이사온다. 그리고 그들의 (정확하게는 수민 외 세 명의) 순례주택 적응기가 펼쳐진다.
세상에 이런 특별한 집주인이 없지는 않겠지만, 재개발 후 올라선 아파트와 근방 빌라촌의 대비, 차별과 오해, 사람 사는 '정'에 더해 돈에 휘둘리지 않는 해결사 '할머니'가 알고보니 알부자 (그런데 그 바닥엔 고리대금업과 부동산이 있다), 라는 점이 얼마전 본 만화 <안녕 커뮤니티>와 많이 닮았다. 건물주 할머니와 손녀는 <헌터걸>에도 나오고, 철없고 생활력 없는 고학력 아버지라면 <맹탐정 고민상담소>가 떠오른다. 유은실 작가의 전작들에서 봤던 익숙한 '착함'이 배어있고 가족/공동체의 모습이 선량하고 맑게, 더해서 환경문제를 고민하는 많은 여성 인물들을 중심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정세랑 소설도 생각났다.
이 소설이 너무 밝고 착해서, 그만큼 책 읽으면서 내 마음이 열리질 않는다. 이럴리가 없으니까. 순례주택 같은 곳이 몇 곳 있다해도 삶에서 만나는 생활은 텁텁하고 얄짤없으니까, 17년 전임 강사하는 수민이 아빠 처럼 꿈만 꾸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 그런 만큼 주위에 고생하는 (수민이처럼, 수민이 외할아버지처럼) 사람이 생기니까. 수민이가 이렇게 '생활지능'이 높게 된 연유에 마음이 아팠다. 이 아이가 상처 받은 걸 제대로 보듬는 사람은 순례씨 말고는 없다. 수민이가 너무 밝아서 더 짠하고 마음이 아프다. 그 엄마의 우울증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서 불안했고. 수민이 언니도 아슬아슬하다. 수민이네 철없는 가족은 계속해서 생활비를, 살 집을 마련해준 친지/귀인에 얹혀서 지금껏 살아왔는데, 이제라도 서로를 진짜 가족 성원으로 여길지 무척 신경쓰인다. 이들이 '독립'하고 서로를 안아주는 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암울한 코로나 시대, 희망이나 위안을 주는 것도 좋지만, 건물주 멋진 할머니 말고 다른 해법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