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고, 다음주 수요일까지 온다고 하더니 오후 늦게 소나기만 내렸다. 계속 눅눅한 날씨. 어쩌란 말이냐, 나의 빨래는. 고성능 세탁기가 빨래는 아주 잘 하는데 건조는 그냥 뜨끈하게 짜주는 정도라 햇볕이 많이 아쉽다. (아, 아니에요. 취소. 더운 건 더이상 사절)

 

세탁기가 고장나고, 연인도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는데, 불면증 까지 겪는 여주인공의 이야기. 아빠도 떠났고, 엄마는 전에 돌아가셨고, 언니도 미국에서 사연 품은 가족을 꾸린다. 

 

제목이 왜 '옷의 시간들'인지 천천히 감이 왔다. 옷을 입고 벗고 빨고 말리고 다리고 다시 입는 그 모든 시간들의 여러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빨래방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라 단편집을, 연작소설로 읽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의 전작과 차기작들의 등장인물들도 친절한 주석과 함께 카메오 출연한다.

 

읽으면서 계속 '뭐, 이런...' 하며 헛웃음을 지었는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너무 당돌하달까, 꾸몄달까, 아니 드라마나 소설 같아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연, 사건이 툭툭 벌어지는 게 인생이잖아. 내친구 J가 그렇게 갑자기 갈지 아무도 몰랐듯이. 어떤 범죄 사고에 내가 아는 사람, 같이 밥 먹었던 사람이 연루되기도 하고, 그래서 가끔 혼자 그 얼굴이 떠올라서 무섭기도 하고. 리서치 하는 그 여자, 미치씨 (미친X으로 읽어서 미안해요), 술마시던 어머니, 아버지, 기타리스트 그 사람, 유치원 그 선생님, 225호 그 간호사, 콧수염 그 할아버지, 불문학도 그 남자, 다 사연이 있겠지....만 촌스럽고, 생생하지는 않아. 어쩔 수 없네요.

 

갑자기 세탁기가 고장나는 일 처럼. 사건은 툭 벌어지거나 끊어진다.

 

빨래방이라니 유학시절 생각이 난다.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찝찝함에 싸이클을 한 번 더 돌리곤 했다. 세제없이 그냥 강한 사이클로. 그래서 옷이 쉬이 상했지. 내 옷의 시간들은 바래고 닳고 짧았다. 이 소설 등장인물들은 찬물빨래/뜨거운물 빨래/흰빨래/색깔빨래 구별 없이 한 번에 돌리기에 아줌마가 속으론 걱정이 됐다. 이러면 옷이 엉망이 됩니다. 주인공의 새 세탁기의 건조기능은 (가스 연결 따로 안 해도) 보송하게 되는건가? 그럼 세탁기가 500만원 350만원은 넘을텐데. 그걸 (애인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친구가 선물로 준다? 와우. 디테일이 아쉽고요. 눅눅한 공기. 미국서 썼던 건조기에 넣던 바운스 얇은 종이랑 그 냄새가 생각난다. 따끈하고 뽀송하게 건조된 타월이 그립다. 빨래 빨래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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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8-18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0만원짜리 세탁기 갖고싶다요. ㅋㅋ

유부만두 2017-08-18 11:39   좋아요 0 | URL
가격을 잘못 올렸음. 350 넘는거.... ㅎㅎ 요즘 날씨엔 건조 기능이 너무 아쉽고요.

목나무 2017-08-18 11:40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나 지금 쌓인 빨래 보며 한숨만. . ㅋㅋ

유부만두 2017-08-18 22:16   좋아요 0 | URL
이 밤에 빨래 하고 있다우. 좀 덜 마른 건 다림질을 해보는데...그냥 걸어두고 잘까봐.... 소설 내용과 정말 딱! 맞는 밤이다.

psyche 2017-08-18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미국와서는 왜 이리 좋은 햇빛을 놓고 건조기에 돌리지 했었는데 이제는 건조기 없이는 못살거 같아.

유부만두 2017-08-18 22:14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따끈하게 잘 익은 타월로 닦는 즐거움은 얼마나 좋은건지요! ㅎㅎ
맑은 햇볕과 바람에 잘 말리는 게 서울선 쉽지 않아 더더욱 건조기가 그리워요.
 

일요일 아침,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좋다. 오메, 이러다 가을 되겄네.

 

처음 읽는 오현종 작가의 책. 작가가 남자인줄 알았는데 아니다. 작가 프로필의 사진을 보면 자동으로 이야기를 대하는 안경을 바꿔쓰게 된다. 깔끔하다. 얼마전 읽은 다른 작가의 책과는 달리 계산해서 꾸민 티가 덜 났다. 읽고 덮으면서 울거나 찜찜해 하지도 않았다. 그냥 깨끗하다. 시시하다는 말이 아니라 담백한 느낌. 작가 하나를 새로 만나는 건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일, 그 세계가 다른 작가들과 이리 저리 연결되어 내 안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몇 년 전 유행했다던 '방탈출 게임'이 또 등장한다. 김영하 소설에도 있었지. 갇힌 젊은 남녀들의 공포. 그리고 스릴인지 뭔지로 (지켜보는 정체모를 '사이코패스'의 시선 아래서) 막 죽을듯 할 때, 딱 고만큼의 결말이 난다.

 

해설(혹은 발문)에서도 언급되는 '호적을 읽다'가 제일 좋았다. 각 단편의 제목들이 서로 교차해서도 어울리겠다. 세대 간의 갈등으로 읽히는 여러 편이 연결되는 세계. 벗어날 수 없는 밀실. 깔끔한 문. 손잡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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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납량특집으로 쫌 무서운 책도 읽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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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살과 새소리 대신 매미소리와 끈적거리는 느낌에 잠을 깬다. 방학이니 더 자도 되는데, 더워서 일어나 선풍기를 켜고 화장실에 다녀온 다음 커피를 뽑는다. 얼음 많이많이.

 

아이들이 깨기 전에 책을 읽었다. 오래 붙들고 있던 책인데 이제야 완독. 예상 외로 건조하게 쓰인, 하지만 몰랐던 '여성'문인의 역사를 소개해 주고 (숨겨왔던) 전혜린 팬의 흑역사와 애정을 밝히는 책.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고등학생 시절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덥다. 냉커피 한 잔 더.

 

평범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외국의 풍광과 자유를 꿈꾸며, 밤새워 공부하고 새벽의 공기를 마셔본 기억. 하지만 몇 년 후 치워버린 전혜린 책...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어.

 

할 말이 많을듯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뭐랄까, 이미 다 쏟아낸 느낌. 그냥 커피를 마신다. 얼음이 다 녹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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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6 16: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8 0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부의 조증, 그러다 혼자만의 감정을 키워 울증으로 나아가는 베르테르, 그는 2부, 다른 도시로 가서 여인 B (로테를 닮은)을 사귄다. B는 베르테르의 로테 칭송에 함께 하지만, 과연 그 속마음은 어떨까. 하지만 귀족 모임에서 노골적인 천대를 받고 베르테르는 만사에 정내미를 떼버린다.

 

돌아와서 급격히, 괴로워하는 베르테르. 그 괴로움이 ... 가엽기도 하지만, 주인마님을 연모하는 머슴의 사연을 대하는 베르테르는 위태롭다. 그러다 그 머슴이 일을 저지르고, 더 큰 일을 저지르고, ...그래도 그 일의 시초는 '순수한 사랑' 이었노라고 항변하지만. ... 저기요, 베르테르 님... 이건 살인 사건이고요, 그 전의 짓거리도 강간미수입니다.

 

베르테르가 아닌 머슴이 저지른 범죄로 차라리 베르테르는 순수의 영역에 남는듯. 2부 후반, 로테도 자신의 사랑을 깨닫고 떠나려는 베르테르에게 아쉬움, 혹은 아픈 이별을 느낀다. (차라리 아는 동생이랑 연결시킬까, 하는 로테의 속마음....이건 너무 자기중심적이지만...얄밉게도 요즘에도 있는 이야기라고 하더라구요) 2부에서 중간중간 빌헬름의 개입이 있지만 점점 고조되는 베르테르의 격정, 사랑, 포기, 폭발하는 마음. 이별의 장면은 커피잔을 마주 두고 탁자에 물로 뭐라 적는 대신 (BGM 이문세, 고은희 '이별이야기') 웅장한 서사 낭만시를 낭송합니다. 주거니 받거니, 감정은 격해지고 뽀뽀. 포옹. 아, 우린 안되어요...ㅜ ㅜ

 

냉정한 자살 장면 묘사, 바로 죽지도 못하고 썰렁한 장례절차. 그리고 그냥 끝입니다. 무어가 남겠어요. 로테는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알베르트의 부인 자리로 돌아왔는데. 그녀가 베르테르에게 연인으로 힌트라도 준 건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뿐. 아 이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세상 사람들의 위세와 허영을 비판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려했던 젊은이가 갈 수 있는 길은 ... 결국 죽음 뿐이었을까. 1부 초반의 조증, 발랄라 까불이에서 시작해서 좌충우돌 하는 베르테르, 현실을 비판하고 순수한 사랑만을 바라보고 달려간다. 2부, 그를 투영하는 범죄자 머슴, 현실주의자 알베르트, 뽀뽀하며 빵 얻어먹는 애완새, 중에서 해법을 택하는 대신, 끝까지 밀어붙이는 청춘. 노란 조끼의 사나이.

 

나이가 지긋해서 읽어서인가 베르테르에게서 언뜻언뜻 위태로운 청춘이 보인다. 아줌마가 해줄 말은 뭐 없고....사랑이 뭐라고 ... ㅜ ㅜ

 

후일담 문학 같이 토마스 만이 쓴 로테의 이야기를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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