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손缺損


 

1

 

위안이 필요한 일이다, 산다는 것은.

 

인간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위로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있다. 숨 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는 스스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그렇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위안이 될 만큼 좋은 이들의 부재를 마주하는 날이 더욱 그렇다. 부재 전에 받았던 위안의 부피만큼, 부재 후에 남은 이들은 흔들려 우는 듯하다. 들리는(보이는) 울음과 그렇지는 않은 울음의 총량으로 미루어 부재 전 그 사람의 크기와 질량을 생각한다. 그 언젠가 몇 줄의 글로 주고 받은 짧은 대화, 결국 그저 이름만 주고받은 것과 마찬가지겠으나, 이미 슬픔의 거대한 그물망 안에 들어선 이의 마음에는 이름만으로도 구멍이 뚫렸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분이 떠나셨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며칠, 그 결손의 크기만큼 이 공간이 젖고 굽고 휘었음이 보인다. 얼마나 조용히 큰 분이셨던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인사가 잘 들리는 곳에, [그장소]님이 편안히 계실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은 지식과 지위가 부여한 인공적 자태보다환경과 행동이 만든 은근한 자태를 가진 이를 사랑하고도 두려워한다그가 가진 평정과 침묵,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얼굴에서 밝고 개방적이며생기 넘치는 기운이 느껴지고말에 의존하지 않고도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가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그런 침묵"(<침묵의 기술>)은 공간과 함께 빛이 난다이 침묵을 아는 이라면 건축과 환경의 획일화를 혐오하고물질의 외면에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어떤 진실을 이미 알고 있다각자 느낀 진실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말들이 바로 글과 공감의 힘이다그래서 글이 태어나고 음악은 흐르고 건축은 세워진다자신이 느낀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할 때그것이 무엇이든 우리의 마음은 일렁거린다.

김현진진심의 공간, 43 

 

 

 

2



문학작품을 읽을 때뿐 아니라 연구나 평론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연구나 평론을 위해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작품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입니다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읽은 것은 전부 '중심사상', '단락의 대의같은 것들이었습니다이런 방식으로는 작품을 훼손할 수밖에 없지요독서는 무엇보다도 뭔가를 느끼는 것이어야 합니다이러한 느낌이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즐거운지 안 즐거운지는 다음 문제지요작품을 읽고 나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고즐거움을 가져다주든 분노를 가져다주든 이런 느낌은 전부 중요합니다그 뒤에 우리는 왜 즐거운지왜 분노를 느끼게 되는지왜 마음에 안 드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연구는 반드시 2차적인 것이어야 하고 반드시 독서 이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162

 

요는 읽는다고 읽는 게 아니라는 말 같다.

 

굉장히 많이 읽는데도 굉장히 안 읽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많이 읽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그건 답도 뭣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뭐 딱히 다른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계화하면 생산량은 확실히 올라가지만 생산량이 올라가도 기계가 기쁠 일은 아닌지라, 빨간 꽃 노란 꽃이 책장 가득 피었는지, 하얀 나비 꽃나비가 책장 위로 나는지 마는지 나는 모르고 그저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갈 뿐인데......

 

작품을 읽고 나면 느낌이 있게 마련이고라는 대목은 뼈를 때린다. 마련이라는데, 마련일 때가 반이고 안 마련일 때가 반쯤 있었다.

 

느낌 없는 읽기는 읽기가 아니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해보면 너무 나이브해 보이기도 하고, 자신만의 읽기를 단단히 정립한 사람들이라면 반론의 여지도 있겠으나, 그냥 한 번 믿어보자. 한글을 갓 뗀 꼬꼬마 syo는 책을 읽으면 그 책에 실린 활자보다 더 많은 양의 이야기를 떠벌리는 말 많은 아이였다는 증언이다. 그 꼬맹이도 뭔가를 느꼈던 것 같다.

 

하나만 줘도 안 잡아먹겠다고 해 놓고 떡을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뺏어먹고 결국 엄마까지 잡아먹은 호랑이 놈은 당최 왜 다이렉트로 엄마를 잡아먹지 않았는지, 어차피 엄마를 잡아먹고 나면 주인 없는 떡은 그냥 호랑이 차지일 텐데 왜 굳이 희망고문을 한 건지, 일종의 엔터테인먼트인 건지, syo(8)이 사촌형(13)에게 물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 형이 한 대답을 정확히 기억한다. ‘원래 맛있는 거 맨 나중에 먹는 거 아이가?’ 이는 syo의 조숙했음과 형의 되바라졌음을 증거하는 사건으로서, 아직도 명절이면 되풀이되는 레퍼토리의 하나다. 하여간, syo는 예전에, 느낄 줄 아는 꼬맹이였음이 틀림없다. 걔가 자라서 내가 되었다면, 나라고 못할 게 뭐가 있겠어.

 

, 그리고 위화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신다. 이 말씀도 관절을 격하게 꺾는다......

 

  여러 해 전에 저는 어느 셰프와 긴 시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그가 제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나요?"

  제가 대답했지요.

  "좋은 작가가 되고 싶으면 먼저 훌륭한 독자가 되세요."

  그가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독자가 될 수 있나요?"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평범한 작품 말고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으세요오랫동안 위대한 작품을 많이 읽은 사람은 취향과 교양의 수준이 높아져서 글을 쓸 때 자연히 스스로 아주 높은 기준을 요구하게 되지만오랫동안 평범한 작품만 읽은 사람은 취향과 교양 수준도 평범해져 자기도 모르게 평범한 글을 쓰게 되지요남들의 결점은 나와 무관하지만 남들의 장점은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셰프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군요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좋은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거든요저는 종종 제 수하에 있는 요리사들을 다른 음식점에 보내 식사를 하게 해서 각자의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합니다항상 다른 음식점의 음식이 맛없다고 말하는 요리사는 발전이 없고항상 다른 음식점의 음식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셰프는 크게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위화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282-283 

 

 

3


 

빈틈을 메운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알지는 못하는 어떤 진실을 완전히 안다고 착각하는 어떤 거짓으로 바꾸는 일이다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른다완결된 지식을 가진 척하는 이런 태도는 어쩌면 실패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대담하게 단언하는 언어는 뉘앙스와 모호함과 성찰을 간직한 언어보다 더 간명하고 덜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125


남을 가르치려 드는 행위가 깔고 있는 전제는 두 가지다. ‘남은 모른다나는 안다’. 이 두 가지 전제 가운데 실제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전자 쪽이겠지만, 사실 자꾸 남을 가르치려 드는 짓 자체를 끊어내는 데는 후자 쪽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게 효과적이다.

 

그런데 관람석에서 지켜보면 링 위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는 명치에 첫 펀치를 세게 얻어맏고 남은 모른다를 수정, ‘너는 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추가타를 맞으면 마지못해 ‘A도 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라운드가 계속 이어지고, 폭풍처럼 쏟아지는 연속공격에 ‘B도 안다’, ‘C도 안다차츰차츰 시인하게 되는데, 그러다 ‘70억 지구인이 모두 안다까지 인정할 때쯤에는 이미 그는 그로기 상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한 방이 그의 턱을 강타하면,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서 내가 잘못 알았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다. ‘나는 모른다는 말은 청문회장이나 법정 밖에서는 좀처럼 듣기 어렵지만 들어도 믿기 어려운 말이 되었고, 우리는 그 말을 대신해서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이나 그와 유사하게 변형된 일종의 예비동작들이나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여성들은 결국 이런 말을 듣는 셈이다. 당신은 모른다. 당신조차 당신은 모른다. 당신은 내가 안다. 그런데 남자들이 여자들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종류의 학문영역에 (의미 있는 수의) 여성 참여가 시작된 것이 기껏해야 100년 안팎이다.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고 돌을 갈아 주먹도끼를 만들던 기술을 학문의 시작이라고 보면, 699900년 동안 학문은 남성이 독차지한 영역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거주지를 자신의 신체 구조와 동선에 맞게 편집하는 본성을 지닌 동물이다. 학문이라는 집이 세워진 이후 오늘까지의 연대표 상에서 99.9857%에 해당하는 긴 기간을 독점 거주했던 남성이, 몇 만 몇 천, 많이 양보해서 몇 백 년 뒤쯤에는 올 수도 있는(그렇게 예측했던 이는 거의 없었을 것 같지만) 여성의 입주를 기다리며 젠더편향 없는 구조로 집을 꾸몄다고 믿는 것이 699900배 비합리적이다. 때로는 편향된 인간이 편향을 만들었을 것이며(기원전의 공자,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오늘날 ()구글의 제임스 뭐뭐라는 엔지니어에게로 이어지는 끈질긴 계보), 또 때로는 편향이 인간을 편향되게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에 닭이었는지 달걀이었는지 모르겠지만(사실 닭입니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는 아주 쉽게 치킨을 시켜먹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학문 자체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편향성은 남자로 하여금 여자들은 모른다고 한 점 의심도 없이 잘못 믿는 일을 어쨌든 돕는다.

 

그래서 페미니즘의 얼굴이 그렇게 생겼다. 정치, 철학,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예술, 심지어 군사학까지. 다양함을 넘어서 잡다하다 싶을 만큼 많은 분야를 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것은, 모든 분야의 학문 속에 숨어 있는 부조리한 편향을 잡아채 뽑아내야 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일종의 군대다. 여성학자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개별 학문 안에서 각개전투를 펼치기에 699900년짜리 철옹성은 너무 견고하므로, 그 두터운 성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그들은 페미니즘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천막을 치고 연합군을 형성한 것이다. 남자들 주머니를 털어 먹으려고 만든 군대가 아니라.

 

쓰다 보니 분위기 타서 단언하는 말투가 되었지만, 당연히 제 개인 견해입니다. 제가 혼자 뚝딱 뚝딱 만든 견해는 당연히 아니겠지만요.

 

 

 

--- 읽은 ---

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 / 김민주 지음

철현쌤, 공무원 연봉 진짜 얼마예요? / 조철현 지음

밥보다 일기 / 서민 지음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 리베카 솔닛 지음 / 김명남 옮김

나는 왠지 떳떳하지 못합니다 / 마쓰무라 게이치로 지음 / 최재혁 옮김

 

 

--- 읽는 ---

인생 직업 / The School of Life 지음 / 이지연 옮김

딱 이만큼의 경제학 / 강준형 지음

글쓰기의 감옥에서 발견한 것 / 위화 지음 / 김태성 옮김

진심의 공간 / 김현진 지음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 페터 한트케 지음 / 윤용호 옮김

러시아 혁명사 강의 / 박노자 지음

프랑스어의 실종 / 아시아 제바르 지음 / 장진영 옮김

단 하나의 문장 / 구병모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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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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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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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0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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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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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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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10: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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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1-14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화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위대한 작품이란 결국 고전을 말하는 거겠지요.
저 역시 느낌을 잃어버린 채 독서를 해온 것 같아 제 독서행위를 되돌아보게 되네요.
덕분에 올해 독서를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어요. syo님~ ^^

syo 2019-01-14 10:36   좋아요 1 | URL
그런 것 같죠?? 결국 고전인건가.....
죽을 때까지 욜심히 읽어도 기껏 몇 만권이면 땡이잖아요.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막 읽었다가 후회하는 날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