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를 반절 읽다

요하나 옥살라,『HOW TO READ 푸코』를 조금 읽고 감탄하다

C. S. 루이스,『오독』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하다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을 조금이나마 읽고 자기만족하다

폴 비티,『배반』을 20페이지 읽고 설레다

임현,『그 개와 같은 말』가운데 세 작품을 읽고 임현에 대한 선입견을 교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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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도서관이 쉬는 날이라 모처럼 syo도 쉬었다" 라고 당당하게 쓸 수 있으면 좋았겠으나 실상은 "모처럼 도서관이 쉬는 날이고 평소처럼 syo도 쉬었다"에 가깝다. 이제 저 공부하니까 알라딘에서 자주 못 볼 거예요, 라는 요지의 글을 올리고 이웃들에게 그 많은 화이팅을 받아먹은 부끄러운 추억이 아직 채 건조도 되지 않아 축축한데...... 마치, 꺼져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총동원해 삐뚤빼뚤 다잉 메시지를 남기고는 의식을 놓았는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차가 다가오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퍼뜩 정신이 들어 버린 피해자처럼 민망한 상황이다.




2


오즈 야스지로의『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를 읽으며 뭐가 돼도 될 사람을 선별하는 기준의 하나로서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경이로운 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양반은 '포탄이 떨어져 누구누구가 죽었다, 지금도 참호 속에 숨어 담배를 맛있게 태우면서 적이 쏘는 총소리를 듣고 있다.' 라는 일기의 말미에 'XXX의『YYY』를 읽다' 라고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딱 세 줄을 쓰고 마는 일이 있더라도 그런 일기를 매일매일 남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우리가 모두 아는 오즈 야스지로가 되었다, 라는 식의 비약적인 결론까지야 가능하겠느냐만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syo의 방은 총소리도 없이 고요한 가운데 가끔 syo가 코 삼키는 소리 크게 들릴 뿐이고, 엄마는 자꾸 치즈케익을 먹인다. 이런 달착지근한 평화 속에서도 하루 한 쪽의 일기를 남기지 못하다니, 그래서 syo는 자라봤자 syo가 될 뿐이었고, 도리 없이 syo로 살다가 그저 세상의 한 줌 부식토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런 sy.....syo. 라는 식의 비약적인 결론까지야 가능하겠느냐만은,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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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니까, 며칠 안 남은 2017년의 날들을 꾸준히 올 한해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데 써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가장 핫한, 솔제니친의『수용소군도』를 구매했다. 돈도 없는 백수가 읽을 시간도 없는 6권 2800페이지짜리 세트를 구매하여 교양의 사다리 꼭대기라도 올라선 것처럼 의기가 양양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알라딘과 여러 이웃분들의 덕이다.


뜨내기였던 syo가 알라딘 세상에 정착한 것은 2015년경이었다. 로쟈님의 서재를 RSS로 구독하다가 다른 훌륭한 회원님들의 글을 접하고는 아예 입주를 하였다. 그때도 읽는 양은 꽤 되었는데 쓰는 건 또 보릿고개 쥐똥마냥 쓰면서, 그저 여기저기 다른 서재들을 기웃거리며 감탄하고 이웃을 늘려가기 바빴다. 그러다 탄핵과 대선이 끝나고 syo의 서재를 한 번 뒤집어 보니까, 아니 뭐 책 이야기는 읽을 만한 게 하나 없고 온통 특정 정치인 까는 글, 특정 정치인 지지자 까는 글, 특정 정치인 지지자 까는 글 까는 글, 특정 정치인 지지자 까는 글 지지자 까는 글 까는 글 지지자 까는 글 까는 지지자 까는 글...... 


그래서 마음을 바꾸어 먹고 그간 읽었던 모든 책 목록을 초기화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0권부터 서재를 채워나가기로 결심했던 것이 5월 어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멍청했던 게, 아니 syo야, 생각을 해 봐라, 글이 빙구라 빡쳤으면 글을 초기화하고 글을 다시 써야지, 읽은 목록을 초기화하고 다시 읽기 시작한다고 글변비가 뚫리겠냐고. 그러니 내가 syo지. syo는 자라봤자 syo가 될 뿐이었고, 도리 없이 syo로 살다가 이런 sy...... 하여간 새 마음 새 뜻으로 책은 실컷 읽었으나 5월 역시 꼴랑 3개의 글, 분량과 품질 양면에서 누가 봐도 하자인 글 3개를 남기고 폭침하였다. 결국 뭐 하나 달라지는 것 없이 쳐먹기만 하고 싸지를 못하는 인생이 이어지려는 그 5월 말, 저 높은 곳에서 내 일상을 망치려 살랑살랑 내려온 구원의 손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알라딘 세상의 흥망성쇠를 누구보다 똑똑히 지켜봐 온 사람, 알라딘 마을의 유지, 의식의 흐름 기법 리뷰의 장인, 썩 좋은 책 두 권을 상재한 작가 ㄷ님의 등장이었다.


참 우연찮게 syo는 그 ㄷㄹㅂ님과 책 두어 권을 같이 읽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이래저래 상당한 양의 격려와 뽐뿌를 받았다. 과연 알라딘 마을의 유지라는 표현에 전혀 손색이 없는 다ㄹㅂ님,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나 카리스마가 있던지, 쓰세요, 많이 쓰세요, 우리 열심히 쓰고 읽자구요! 하시면, 이 바닥에 발 붙이고 살려면 이건 거스르면 안될 것 같다는 희한한 압박감이 생기는 것이다. 다락ㅂ님은 애프터 서비스도 확실하셔, syo가 모자란 글을 올려놓고 쭈뼛거리고 있다 싶으면 막 과한 칭한을, 와~ 재밌다, 와~ 잘 썼다, 어찌나 둥가둥가를 해주시는지, syo도 가끔은 정말 오, 내가 잘 썼나 본데? 하면서 괜히 막 배 내밀고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배 내밀고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확실히 다락방님의 칭찬과 격려의 당근당근 대작전은 가시적인 성과를 낳았다. 7월부터는 뭐라도 써서 올린 날이 아닌 날보다 많아지기 시작했고, 이웃이 늘고, 여기저기서 당근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당근, 저기서 당근, 여러분 전 토끼가 아니예요, 당근이 과해요, 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참 좋았다. 살며 별로 칭찬을 받아본 일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당근은 실물로 손에 들어오기도 했다. 7월부터 11월까지, 알라딘은 syo에게 매달 4만원에 달하는 적립금을 쏘았다. 사실 그건 이웃분들이 쏜 것이다. 이웃분들 덕분에 syo는 올해 『자본론』을 사고(읽지는 못했고), 『제2의 성』을 사고(얘도 역시 읽지는 못했고), 이번에는『수용소군도』까지 살 수 있었다(잠깐, 그럼 얘도 설마......)  


여전히 syo의 글은 후지다. 문장 자체가 후지고 나달나달하며 비문 천지다. 글의 재미로 치자면 다락방님이나 곰발님의 글에 한참 멀었고, 형식이나 함량으로 보자면 이런 글들을 리뷰나 페이퍼랍시고 올리기에 사이러스님, 겨울호랑이님, 레삭매냐님을 비롯해 꾸준하고 묵직한 글을 쓰는 분들께 민망할 지경이다. 단발머리님이나 서니데이님처럼 따뜻하게 읽히는 글도 역량 밖이고, 아갈마님이나 야무님의 깊이에는 항상 고개를 숙일 뿐이며, 벤투의스케치북님이나 몰리님의 글은 그저 입을 떡 벌리고 읽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나질 않는다. 요즘은, 프리즘메이커님 저 양반이 마침내는 어디까지 도달할까 경탄 중이고..... 이외에도 일일이 언급하면 스크롤의 압박을 시전해야 할 정도로 많은 이웃분들의 글을 통해 정말 열심히 감탄하고 열심히 배우고 있다. 


4만원 별 거 아닐 수 있고, 이웃분들은 그런 거 신경도 안쓰시겠지만, 그래도 가끔 syo가 누군가로부터 뭔가를 빼앗아먹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오늘도 수용소군도 주문하면서 좀 오래 망설였다. 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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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항상 모자란 syo의 글을 읽어주시고, 칭찬해주시는 이웃분들께. 


여러분은 에티켓 차원에서 칭찬하시고, 아무 뜻없이 좋아요를 누르고 가셨는지 모르지만, 모니터 너머에서 그 칭찬의 댓글과 좋아요를 보고 있는 syo는 사실 좋아서 아주 춤을 추는 중이었습니다. 춤을 하도 춰서 다리에 근육이 잡혔습니다. 그래서 상하체 균형이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책임지세요. 균형을 잡기 위해서 2018년의 칭찬에는 상체 위주의 브레이크 댄스로 대응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알아두시라구요. ㅎ.


아직 스무 밤이나 남아서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여러분 2017년 한 해 정말 감사했습니다. 읽어 주는 사람,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큰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syo에게 알려주셨어요. 감사합니다. 남은 한 해 따뜻하게 엮으시고 내년에도 우리 모두 힘껏 읽고 힘껏 쓰는 한 해 만들어요.


분노의 포도알갱이 syo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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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2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12-11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사람좀 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2-11 22:2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17-12-11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1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2-11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도 열심히.책읽기도 열심히 글쓰기도 열심히 하세요! 기왕이면 연애도.

syo 2017-12-11 22:22   좋아요 1 | URL
연애는 열심히라기보다, 굴곡을 최소화하면서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번에도 sprenown님의 화이팅이 제일 힘이 되었었죠.

감사합니다^^

캔디캔디 2017-12-11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른 연말인사에 저도 웃으며 좋아요 합니다. 춤춤춤춤!

syo 2017-12-11 22:23   좋아요 0 | URL
올해까지는 하체 위주로 ㅋㅋㅋ

chaeg 2017-12-12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용소군도를 사셨군요. 1500권 한정인데, 하나 줄었네요.. 아..안돼..

syo 2017-12-12 06:51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망설이시다 곧....

스윗듀 2017-12-1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나름 알라딘 마을에 기웃기웃하면서 때론 철새처럼 때론 텃새처럼 어디 끼어들데 없나 비집고 들어가고싶어 안달난 사람 중 하난데 최근에 이웃된 syo님을 보고 하 이 사람 뭐지 고수에다가 글도 재밌게 쓰네 왜 그동안 몰랐지 내가 알라딘에서 그렇게 쩌리인가 하 자존심 상한다 이랫는데 그랬군요. 그랬던 거였군요 반가워요 syo님 글 재밌게 잘읽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하 그나저나 나도 ㄷㄹㅂ님한테 둥가둥가받고싶다!!!!! 막 과한 칭찬 나도 받고싶다ㅠㅠㅠㅠㅠㅠㅠ 오늘 할머니 제사 지냈는데 엄마가 오빠랑 차별하는 거 때문에 빡쳐서 혼자 다락방님 생각하면서 다락방님한테 위로받고싶다 윤김지영선생님 책 읽고 다락방님한테 뿌잉뿌잉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난 여기에 지금 이 말을....아무튼 syo님 재밌어욬ㅋㅋㅋㅋㅋ

syo 2017-12-12 06: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락방 아카데미 1기 수료생 syo입니다. 다락방님 둥가둥가 코스는 다락방님 서재에서 접수가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서재 방문하셔서 ˝여기가 그 유명한 다락방 아카데미인가요? 소문 듣고 왔습니다.˝라는 댓글로 접수하세요 ㅎ

syo는 스윗듀님 때문에 또 춤을 추러 가야 해서 이만 ㅎㅎㅎ

다락방 2017-12-12 11:26   좋아요 0 | URL
아이고야 스윗듀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 스윗듀님. 윤김쌤 책 읽으러 갑시다. 읽고 전투력 상승시킵시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합시다! 전진하는 그 길에 제가 옆에 있을 것이며, 그 와중에 둥가둥가는 틈나는대로 해드리겠습니다. 바꿔,바꿔, 세상을 다 바꿔!!

독서괭 2017-12-1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 내밀고.. ㅋㅋㅋㅋ 아 syo님 왜이리 귀여우신가요.. 귀여움만큼은 ㄷㄹㅂ님이나 다른 모든 분들보다 월등하십니다. 글의 매력도 결코 떨어지지 않고요. 너무 재밌어서 한두번 더 읽어보기도 한답니다.
자 이제 춤을 춰주세요!!ㅋㅋ

syo 2017-12-12 09:01   좋아요 1 | URL
syo는 원래 귀염 숭배자입니다.
좌우명은 ˝귀여움이 모두를 구원하리라˝

그리고 사실, 배는 내민 게 아니라 나온 거랍니다.... 가만히 있어도 지가 알아서 돌출이ㅠㅠ

슬픈 춤을 추겠어요ㅠㅠ

덩실덩실

cyrus 2017-12-1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대구를 떠납니까? 떠나기 전에 유레카님과 함께 주말에 만났으면 좋겠어요. ^^

syo 2017-12-12 13:46   좋아요 0 | URL
연초에 두어 날 지나면 갑니다 ㅎ
만나는 일이야 좋지요~ 같은 고장에 살고 있다는 걸 안 지도 한참 되었는데 우리가 그간 한 번을 못봤군요.

수이 2017-12-12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용소군도!!!!!!!! 저 지르러 가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syo님! :)

syo 2017-12-12 16:08   좋아요 0 | URL
야나님도 1500명 중의 1인이 되셨군요! 제 건 오늘 당도한다는 소식입니다!!

내년에도 야나님의 좋은 글을 열심히 읽겠습니다!^^

2017-12-12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2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2-14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직 연말이 많이 남았기에 미리 새해 인사 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syo님 새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알기론 13세기 칭기스칸의 몽골 경기병이 묵직한 독일 기사단을 전멸시킨 것으로 알고 있어요. syo님의 글은 경쾌하면서도 잘 읽혀 많이 부럽답니다. 새해에도 하시는 일 이루시면서, 경쾌한 글 잘 부탁드립니다^^:

syo 2017-12-14 15:06   좋아요 2 | URL
2018년에는 저도 겨울호랑이님처럼 꾸준하고도 묵직한 글을 지향하면서 (사실 계속 그러고 있었는데 그게 안 됐을 뿐이지요ㅠㅠ) 읽고 쓰려고 합니다! 그러려면 또 겨울호랑이님 서재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열심히 읽어야 되겠지요. 새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카알벨루치 2018-12-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쇼님 ^^잘 봤습니다 ~

syo 2018-12-25 19:12   좋아요 1 | URL
이런 마음 비슷한 마음이신거죠? ㅎㅎㅎㅎ

카알벨루치 2018-12-25 19:19   좋아요 0 | URL
젊은 선배님, 동감 공감^^
 


서울에는 눈이 내렸다고 하는데 대구는 어제 오늘 참 따뜻했다. 어떤 참 괜찮은 책을 쓴 ㄷ작가님께서, 눈이 오는 도시에서 어젯밤 즐거웁게 시전한 폭풍음주의 결과, 그렇게 참석하길 원하였으나 결국 그럴 수 없었던 어떤 강연자리에 syo를 파견하였다. 



사명감에 불타는 syo는 친구 '三'(3명이 아니라 이름입니다)과 함께 강연자리에 잠입,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왔다. 


최초에 이 잠입작전을 기획하였을 때, 우리는 과연 이 자리에 몇 명의 남성이 참여할 것인가를 놓고 내기를 벌였다. ㄷ작가님이 재빨리 syo와 三을 포함해서 2명이 참여할 거라고 배팅하였다. 한발 늦은 syo는 syo와 三을 제외하고 0명이 참여할 거라고 배팅하였다. 뭔 내기가 이래. 의미 없는 승패공동체가 탄생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우리의 패배였다. 총 5명의 남성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보수의 심장 대구에서, 최근 핫하게 부상한 '그' 감별사님의 고향인 대구에서. 그리고 올해 하반기가 그 감별사님의 시간이었다면, 상반기 이 땅을 점령한 최고 힙한 남자 서석구 변호사님께서 오늘도 동대구역 앞에서 "박근혜대통령 인권유린 규탄 및 무죄석방 촉구 천만인 서명운동"이라는 행사판을 벌이고 있다가 syo의 여자친구에게 촬영되어 카톡방의 우스개로 소비되고 마는 여기, 바로 이 대구에서 열린 페미니즘 강연에, 심지어 『헬페미니스트 선언』의 저자가 여는 강연에 남자 5명이 참여하다니! 그간 syo가 이 땅을 너무 척박하게만 여겼던 것일까. syo와 三을 제외한 다른 세 명의 남성 중 둘은 각자의 여자친구와 동석했고, 범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한 분은 혼자 자리를 빛낸 듯했다. 멋있엉.


한 시간 삼십 분의 폭풍같은 강연이 이어지는 동안, syo는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그러다 입이 마르면 커피를 쪽 빨거나,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 분들의 아광속 필기에 감탄하여 또 입을 떡 벌리거나, 그러다 입이 말라서 다시 커피를 쪼옥 빨거나 하다가, 아, 맞다, 숨, 숨 쉬어야지, 후하후하, 이러고 있었다. 三은 주로 작게, 가끔은 크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긴 그럴 대목이 아닌데 싶어 자꾸 쳐다보았지만, 안경 다리에 가린 이놈의 눈이 떠져 있는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강연장을 나와 커피를 마시며, 너 아까 졸았지, 추궁해 보았는데 뻔뻔하게도 자긴 강의를 다 들었다고,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윤김지영 선생님은 지가 다 안다고 주장하는 남자를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다.


장내는 시종일관 열기로 가득했다. 특히 질문 시간에는 syo는 생각도 한 번 못 해봤을 정도로 다양한 질문, 그러나 그것은 syo가 남자라 그럴 뿐, 여성 입장에서는 너무도 생활세계밀착형인 질문, 그러니까 상처나 흉터를 보여주는 질문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최초로 질문한 분은 늦은 나이에 제도권 교육기관에서 이론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말잔치 용어잔치의 홍수 잠겨 지내다 보니 전투성이 상실되고 있음을 토로했다. 아닌데. 그 눈빛, 아무것도 상실하지 않으셨던데요. 잘 하고 계시던데요. 어느 젊은이는 남자 친구들의 "난 아닌데, 나한테 왜 이래." 화법에 질려 있었다. 선생님은 '무지의 특권'을 지적하셨고, 모두 빵 터졌다. 三은 그 와중에도 한 타이밍 늦게 웃고 말았다. 어휴. 이런 사랑스런 모질이를 봤나. 심각하고 심오한 질문들도 많았다. 어떤 참석자는 여성운동과 성소수자 운동 양쪽에 조금씩 끈이 있는데, 그 사이에서 방향성을 정확하게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토로했다. 어떤 참석자는 성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조금씩 페미니즘에 눈을 뜨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경제적 입장이 가부장제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바, 과연 스스로 페미니즘 담론에 목소리를 내도 괜찮을까를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남자인 syo가 할 수 있는 질문이 얼마나 있겠으며 그 질문의 무게가 되면 얼마나 되겠는가 싶어 망설이고 있는 사이, 혼자 온 남자 참석자에게 질문을 스틸당하고 말았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아, 저거 내 건데. 할 게 저거 말고는 없는데. 까비. 의외로 선생님께서는 남성 페미니스트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대답하셨다. 중요한 것은 경청의 자세. 그리고 내부 고발자의 스탠스라고 조언하셨다. 그렇구나. 그렇긴 한데, 이제 난 뭘 물어보지? 머리를 싸맨 끝에 나온 syo의 질문은 쓸데없이 구구절절했으나 요약하자면 뭐 이딴 것이었다.


"유모와 박모는 운동에 얼마나 큰 똥을 싼 건가요. 제 친구놈이『82년생 김지영』을 권해 온 여자친구와 대판하고 돌아와서 툴툴 거리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뭐 전형적이고 고전적이며 상투적인 남자들의 반응에서 1도 벗어나지 않았는데, 아무리 말을 해도 이건 내 가치관이니까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답만 하는데, 그렇다면 얘는 버리고 가야 하나요, 버리고 갈 밖에 답이 없는 자가 있다면 그 기준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syo가 입을 떼니까, 순간 시선이 이쪽으로 와르르 꽂히는데, 그게 뭐라고 또 와르르 쫄렸다. 선생님이랑 눈 맞추는 척 했지만, 곁눈으로 다 보이잖아. syo의 시야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광활한가. syo의 배짱은 또 뭐 이렇게 협소한가. 아 쫄깃쫄깃. 말 절고 난리. 그러나 선생님은 syo의 개똥 같은 질문에도 아주 침착하게, 그들은 빅똥을 싸놨으며, 버리고 가야 할 사람을 지정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판별이 되는 셈이라 대답이 적합하지 않지만, 도대체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가 페미니즘에 대해 더 많이 말하는 데만 혈안이 된 자들은 같이 가기 힘들 거라고 대답해주셨다. 선생님은 참 말씀을 잘 하셨다. syo는 꼴랑 저 질문 하는데도 말이 꼬이고, 생각했던 것에서 한 문단 빼먹고, 질문하다 제 풀에 빡쳐서 평소 일기에나 쓰던 "똥", "양아치" 같은 혐오의 단어를 입에 올리고 말았으니, 아이쿠, 갈 길이 멀다 하겠다.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


그리고 강연이 끝나고 저서에 사인을 받았다. 선생님, 이 볼펜이 겉은 검은색으로 보이나 실은 속이 빨강색입니다. 혹시 불편하시면 선생님 성함은 안 쓰셔도.....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빨강색으로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제가 이 근방에서 알아주는 빨갱이거든요. 아, 네......



덧.

강연 시작 전에 대구 지역에서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하신다는 분들이 모임 명함을 돌리셨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 그 분들이 읽어온 책 2종과, 앞으로 읽을 예정인 책 10종이 기록되어 있었다. syo는 그걸 보고 오금이 저려왔다. 이 12종 가운데 하나인『제2의 성』1권을 지금 한 달이 훨씬 넘도록 제끼지를 못하고 있는데, 나머지 11종의 책 중에『제2의 성』보다 만만해 보이는 거라곤 딱 하나 밖에 없는 것이다. 급히 고개를 쳐들어 명함을 주신 분을 보았으나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고 있는 등판만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 뒷모습이, 막 세상 거룩해 보였다. 와, 재야의 고수들. 


나대지 말자.




그리고 그분들 공포의 그 목록을 공개합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성의 변증법』

마거릭 애트우드,『시녀 이야기』

실비아 페데리치,『혁명의 영점』

실비아 페데리치,『캘리번과 마녀』



케이트 본스타인,『젠더 무법자』

주디스 버틀러,『젠더 트러블』

마리아 미즈,『가부장제와 자본주의』

퍼트리샤 힐 콜린스,『흑인 페미니즘 사상』



주디스 핼버스탬,『여성의 남성성』

바바라 크리드,『여성괴물, 억압과 위반사이』

뤼스 이리가라이,『하나이지 않은 성』




시몬 드 보부아르,『제2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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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17-12-11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ㄷ 작가님이라 하면...

syo 2017-12-11 00:07   좋아요 1 | URL
짐작하시는 그 분이 맞습니다, 비연님. 두 권의 좋은 책을 상재하신 ㄷ 작가님ㅎㅎㅎㅎ

비연 2017-12-11 14:31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맞군요 ㅎㅎㅎ

다다 2017-12-1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모와 박모라 하심은 ㅇㅁㅅ씨와 ㅂㄱㅂ씨 말씀이신가요? 그들은 어떤 ‘큰 똥‘을 쌌나요?

syo 2017-12-11 00:16   좋아요 0 | URL
그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선생님께서 말씀을 정말 상세하게 해 주셨거든요? 근데 질문을 마치고 나서 제가 울렁증을 진정시키느라 방심한 사이에 설명은 훅훅 넘어가고, 큰 똥을 쌌다는 결론의 말씀부터 겨우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유 모가 싼 똥은 그야말로 이 강연 자체의 주제와 완전 일치하므로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다다 2017-12-11 00:29   좋아요 0 | URL
syo님,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유 모가 그 분들이 아니었는데, 유 모가 싼 똥은 그야말로 이 강연 자체의 주제와 완전 일치한다고 하셔서요....유 모가 싼 똥이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syo 2017-12-11 00:40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소금꽃님이 제시하신 이니셜의 그 두 사람이 제 질문 속의 유 모와 박 모랑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초성이 다르네요.

그리고 제 질문 속의 유 모가 싼 똥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강연의 제목인 ˝페미니즘 감별사의 탄생˝인 것 같습니다.

다다 2017-12-11 01:00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 읽었군요. 페미니즘 내부에도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존재하는데, 특히, 지정성별 남성이 다른 정치적 지향과 입장일 때, ˝페미니즘 감별사˝ 딱지를 마구 붙이는 못난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정작 섞으면 안되는 지점에서 도매금으로 난도질하는 경우 말이죠.

syo 2017-12-11 01:05   좋아요 0 | URL
제가 오해의 여지가 있게 글을 쓴 탓이지요. 한참 멀었네요. 늦은 밤이라 하루를 잘 마무리하시라고 해야 할지 잘 시작하시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소금꽃님 좋은 밤 되세요.ㅎㅎ

다다 2017-12-11 01:16   좋아요 0 | URL
아, 네, 저는 야간근무중입니다. 리뷰 잘 보고 있습니다. 소개하신 책들 참 좋은 책들이네요. 두루두루 살피시길요. 저도 꾸준히 공부하겠습니다. syo님도 굿밤이요!

다락방 2017-12-1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쌤은 쌤이군요. 버릴 걸 결정하는 게 판별이 되는 셈이라니. 역시나 한 수 배웁니다. 전 그냥 ‘버리고 가야한다’고 내뱉었는데, 그 전에 판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하는거네요. 이래서 더 공부하고 생각하고 들어야 하는가봐요. 강연 후기 잘 읽었어요. 트윗에서 다른 분의 후기도 봤는데 정말 제가 갔다면 좋았을 강연이네요 ㅜㅜ 놓친 거 너무 아쉬워요 ㅜㅜㅜ

syo 2017-12-11 00:42   좋아요 0 | URL
재밌었어요.
저야 뭐 개인적인 견해를 가질만한 역량이 없어서 그저 듣고만 온 셈이지만요. ㅎㅎ

다락방 2017-12-11 00:50   좋아요 0 | URL
안자고 여기서 뭐해요! 물론 여긴 쇼님 서재지만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7-12-11 00:50   좋아요 0 | URL
아 맞다. 저 내일부터 다시 제2의성 읽어야겠다고 이 페이퍼 읽으며 생각했어요. 불끈!! 💪

syo 2017-12-11 01:07   좋아요 0 | URL
저도 ㅋㅋㅋㅋㅋ 아아 전 정말 먼지더라구요. 입 닫고 열공이나 해야겠어요.

evergreen-0907 2017-12-11 0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도가 다 인 것 같습니다

hellas 2017-12-11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무겁기도 가볍기도 하네요:):):)

syo 2017-12-11 08:07   좋아요 0 | URL
흥미진진한 강연이었습니다. 제 마음도 무겁다 가볍다 헀구요^^

cyrus 2017-12-1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생한 강연 후기, 잘 읽었습니다. 남성 페미니스트가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반성해야겠어요. 페미니즘 독서모임에 syo님이 참석하신다면, 제가 syo님께 배워야 할 내용이 많아지겠어요. ^^

syo 2017-12-11 12:15   좋아요 0 | URL
ㅎㅎ 아쉽게도 전 참석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시일에 대구를 떠날 예정이라서요^^
사이러스님이야말로 얼른 철학서를 폭풍 독서하셔서 제게 배움을 주세요~

단발머리 2017-12-11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대구 페미니즘 독서모임 어쩜~~ 완전 멋지네요. 저도 읽은 것 1권과 대출이력 2권이네요.
알라딘 서울 페미니즘 독서모임의 회장님은 누구시죠~~
우리도 이렇게 읽어요~~~ 확 읽어버려요!!!! (라고 <제2의 성>을 다섯달째 들고 있는 단발머리가 말합니다.)

강연 후기는 너무 생생하고 훌륭한데요,
syo님 뒷모습이라도 살짝쿵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스크롤을 내려도 syo님 사진이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2017-12-11 12:41   좋아요 0 | URL
저는 앞모습 뒷모습보다 조감도로 찍은 모습이 잘생겼지요.

스카이뷰 방식으로는 촬영하지 않으시더라구요.

참 아쉽게 됐죠 뭐.



독서괭 2017-12-15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요즘 북플에 자주 못 들어와서 최근 글 위주로 보다보니 이런 좋은 글을 놓쳤었군요.. syo님 글 중에 내가 놓친 게 없나 스토킹하다가 발견했다는 건 비밀로 했어야 하나..
유모씨는 초성이 모두 같은 그분인 것 같은데 박모씨는 누군지 궁금하네요 ㅎ

syo 2017-12-15 06:34   좋아요 0 | URL
앗 스토커다. 자꾸 이러시면 고맙습니다ㅎㅎㅎㅎ

다락방 2021-02-05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내가 어떤 책을 찾다가 이 페이퍼를 다시 읽어보게 됐거든요? 아아 이런 시절이 있었지, 이런 시절이 있었다..하고 재미있게 읽었단 말야? 그러다 공포의 리스트를 똭 만났는데, 와, 맙소사. 그 후로 시간이 흐른건 자명한 사실인지라, 열두권 중에 8권을 읽었네요!! 우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멋지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이만.

syo 2021-02-05 14:48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맨날 어렵다고 머리를 쥐어뜯긴 해도 알게 모르게 대단한 사람들이 되고 있었어!
 


그제 아침에는 도서관 정문 앞에 도착해서야 책가방을 매지 않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애먼 에코백을 들고 있었다. 에코.


어제는 오랜만에 까슬까슬한 회색 니트를 꺼내 입었다. 맨살에 입었다. 아, 이래서 니트는 맨살에 입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 syo는 이미 춤을 추고 있었다. 어깨, 등, 배, 등, 어깨, 등, 배, 등, 등, 아, 젠장, 등!!!!!!!! 결국 오래 못 버티고 조기 귀가.


집 나간 syo의 정신머리를 공개 수배합니다.



171130-171208 32 + a권



1. 찰스 다윈 그래픽 평전

: 과학자들의 만화 평전 중 제대로 읽을 만한 놈은 손에 꼽는데, 얘는 꼽는다. 심지어 자서전보다 나은 것 같다......


2.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

: 페미니즘은 오묘하다. 지극히 사적인 문제가 곧 지극히 공적인 문제고, 그 지극히 공적인 것들을 모아 또 지극히 사적인 체계가 만들어진다. 누구의 사적인 문제도 금방 우리의 문제가 되기에 쉬이 외면할 수 없고, 아직 구체적인 사건으로 변하지 않은 공적인 관념도 언제 누군가의 사적 영토를 침범할지 모르므로 항상 주시해야 한다. 다른 글들도 다 좋지만, 오빛나리! 오빛나리라는 젊고 새로운 빛이 등장했다.


3.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진화

: 이건 별 다섯 개를 안 매길 수가 없는 걸작이다.


4. 99%를 위한 경제학

: 가볍게 툭툭 읽을 수 있는 경제학 책 중에서는 발군인 듯. 이걸 읽고 경제의 달인으로 뻐기고 다닐 수야 없겠으나, 당신이 고등학생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5. 처음 만나는 뇌과학 이야기

: 인간의 심리적/육체적 성향 몇 가지를 짚어, 니가 그랬던 것이었다, 다 뇌 때문인 것이었던 것이었다고 알려주는, 그러니까 대증요법적 입문서다. 막힘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장점 있으나, 다 읽고 나니 어쩐지 잡지식만 늘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는 거의 다 휘발되었다. 안녕.....


6. 그래픽 종의 기원

: 요약서라고 보면 좋은데, 솔직히 그림 후지다. 도움이 되긴 한데, 고마울 만큼은 아니다. 나도 텍스트형 인간이었나 봐.


7. 하버마스의『공론장의 구조변동』읽기

: 생각보다....? 물론 제대로 안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럴 리가. 난데. 어차피 syo가 뭐 제대로 아는 게 있긴 한가, 하는 자기반성적 시야로 보면, 확실히 유익한 입문서였고 읽을만 했다.


8. 나는 국가로부터 배당받을 권리가 있다

: 있네. 진짜 있었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지갑 털어 먹는 방식이 아니라, 지극히 합당하고 윤리적인 방식이 있었네. 안 하는 게 부도덕할 지경이네.




9.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 10월에 읽었었는데 그땐 푸코만 읽고 훌훌 넘긴 터였고, 이번엔 하버마스 부분도 꼼꼼히 읽었다. 자식, 잘했어.


10. 작가의 수지

: 소설가로 이렇게 벌 수 있다는 건, 뭐 그 자체로 완전 남일이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또 훨씬 열악할 것 같고, 끽해야 오호, 하는 정도의 미적지근한 반응이나 하다가 이래저래 허공에 붕 떠서 시간이나 삭제했다는 느낌.


11.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

: 오랜만에 펑펑 웃어보자고 빌 브라이슨을 손에 들었는데, 제일 얇은 거 읽는 꼼수를 부렸다가 당하고 말았다. 웃다가 울었다가 웃다가 화냈다가 웃다가 닫으면서 한숨 쉬는 책이다.


12. 더 브레인

: 뇌과학 책은 호기심에 흠뻑 젖어 읽기 시작하다가도 100쪽쯤 읽으면 그 호기심이 바람에 꾸덕꾸덕 잘 말린 명태처럼 건조해지고, 절반을 넘기면 그 명태는 바스락바스락 가루가 되어 바람 불 떄마다 먼지처럼 흩날려 사라져 버린다. 결국 책을 닫을 때는 항상 용두사미. 왜 그런지 누가 뇌과학적으로 설명 좀 해줘라. 그러나 이 책을 앞에 놓고는 그런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있다! 시종일관 촉촉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다 뽀송뽀송하게 닫을 수 있었다.




13. 에드문트 후설 : 엄밀한 학문성에 의한 철학의 개혁

: 설명은 알아 듣겠는데 듣고 보니 말도 안 되는 것 같다면, 설명을 못한 거라 해야 할지, 너무 잘 한 거라 해야할지..... 후설의 현상학은 그저 방법론일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4. 근대인의 탄생

: 이 책만 가지고는 이미 널리 알려져서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것 이상으로 베버에 대해 알기는 어렵다. 나는 그 '누구나'에 못들어갔다 싶은 사람만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몰래 들춰보면 된다. 제가 그 사람입니다.


15. 존재와 세계를 긍정한 철학자 리쾨르

16. 마르크스

: 앉은 자리에서 휙휙 다 읽을 수 있는 귀여운 만화책들. 리쾨르는 아이들 동화책 삽화처럼 그려졌고, 마르크스는 언제나 그렇듯이 만화로 그려지면 마냥 귀엽다.




17. 키르케고르 실존 극장

: 근 1년만에 다시 읽었는데, 그간 키르케고르에 관해 아무것도 더 읽은 게 없음에도 전보다 훨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신비롭군. 지금 시점에서 보면 입문서로 권할만하다는 생각이다. 작년에는 안 그랬는데. 것참 신비롭군.


18. HOW TO READ 마키아벨리

: 저자 비롤리는 마키아벨리를 공화주의자로 읽는 정치철학자인데, syo는 그런 관점이 오늘날까지 마키아벨리가 유효하고 유익하게 소비될 수 있는 근거라고 생각한다. 마키아벨리는 참 읽을수록 읽을 맛이 나는 진국이여.


19. 자크 랑시에르와 해방된 주체

: 작은 판형에 80쪽 남짓한 소책자지만 읽는 내내 랑시에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건 아마도 랑시에르가 쓴 책을 읽기 전까지만 유지되는 가냘픈 기대일 것이다......


20. 비트겐슈타인 철학으로의 초대

: 가라타니 고진의『탐구1』을 읽으려고 펼쳤는데 첫 줄에 '비트겐슈타인은' 하는 글귀가 보이는 순간 탁 덮고 이 책을 빌렸다. 이 책은 지금 겅중겅중 해를 건너 뛰면서 세 번째 읽는데, 읽을 때는 아 알겠다 알겠다 하다가도 덮으면 금방 까먹는다. syo이 멍충멍충한 놈아.




21. 하이데거 읽기

: 입문서나 개론서만 읽고 있으며, 앞으로도 주욱 그럴 셈인 철학자라고 밝히는 것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하이데거. 이 양반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 그냥 다른 책 읽을 때 필요한 만큼만 알고 슥 지나갈 것이다.


22. 투사를 위한 철학

: 그래도 이건 쉽다고? 좋겠다!! 바디우, 우우..... 아아아아, 아감벤...... 알겠다 싶으면 니가 알긴 뭘 알아, 하며 치고 들어온다. 그 즉시 모르겠고, 완전 모르겠는 걸 싶어서 에라이 덮자 하면 또 좀만 더 읽고 가, 내가 더 잘 해줄게, 하는 식으로 나오니 또 좀 알 것도 같고...... 두고 보자, 이 농락자 놈들.


23. 시사인 533


24. 찰리의 철학 공장

: 큰 매력 없는 책. 겉돈다.




25.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 요즈음은 잘 만든 여행기가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자비계발서나 동기부여 장르의 얼마 안 되는 순기능마저 깔끔하게 대체하는 시절이다. 다른 곳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과 이곳에서의 내 삶을 돌아보는 일이 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겠다. 훨씬 아름다워졌다.


26. 독서광의 모험은 끝나지 않아!

: 이걸 우리가 어따 써.....


27. 어휘력이 교양이다

: 정말 이 양반은, syo의 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는 특효약 같은 사람이다. 이름만 떠도 일단 분개하는 syo. 머나먼 전생 어느 떄쯤에 syo는 개미였고, 저 사람은 개미핥기였던 게 아닐까.


28.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 아무래도 스피노자가 짱이다. 그리고 개별 저작이 아니라 통 스피노자에 입문하려는 이에게는 이 책이 짱이다. 일단 읽히거든. 읽히면 다른 책을 계속 읽어나가고 싶어지거든. 폭풍칭찬한다.





29. 하룻밤에 보는 일문법

: 까먹은 거 되돌리기에 정말 딱 좋은 책.


30. 시간의 모서리

: 잘은 쓰는데 또 엄청 잘 쓰는 것 같지는 않고, 좋은데 또 막 좋지는 않고, 이미 작가인데 또 여기서 더 큰 작가로 자랄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저냥,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아무 준비도 없이 자리에 앉더라도 시간만 주물럭거려서 써낼 수 있는 글들도 많고. 아마 syo의 글도 사람들에게 저런 모양으로 읽힐 것 같다. 좀 쓴다고 해줄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결코 뭐가 될 것 같지는 않은. 그냥 저냥한.


31. 개념어 사전

: 꼬꼬마 때 읽으면서 느끼지 못했떤 남경태 선생님의 색깔이 보인다. 빨강 빨강 만쉐!!


32.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

: 나의 페미니즘 공부'기'에 가깝겠다. 저자가 정말로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느낌 + 우에노 지즈코에 관한 증언록 느낌 = 뿅! 하고 이 책이 나왔다.



그리고 또 이런 짓을...



+a. 원펀맨 1~14

: 절대강자의 허망함이 뭔지 이렇게 설득력 있고 개그력 있게 보여줄 수 있다니. 솔직히 작가 천재. 그러니까 이 만화는 어떤 식으로 탄생했는가 하면, 명망이 없는 천재 비트겐슈타인이 귀찮다는 듯이 띡띡 써 놓은 글을 읽고 그의 가치를 알아본 버트런드 러셀이, 노벨 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본인의 수려한 문체로 그 글을 재단장 해 온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그런 형국같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지만.





syo, 야 이 미친자야, 작작 읽고 이제 공부한다며..... 

누가 얘한테 뭐라고 좀 해 줘요. 얘 내 말 진짜 안 들어처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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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2-09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사적인 페미니즘>은 오빛나리라는 이름을 다시 보게 만드네요. <자크 랑시에르와 해방된 주체>도 읽어보고 싶어요. 그래요, 80쪽 남짓 소책자라서 그런 거예요. 남경태 선생님 <개념어 사전>은 집에 잘 보이는 곳에 있는데, syo님 페이퍼 읽고 나서 사랑해줘야겠다 하는 생각이....

그나저나 마르크스에 프로이드에 또 마르크스에 갈길이 머네요.
그래도, syo님이 계속해서 읽고 이렇게 페이퍼 써주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책을 알고 또 새로운 작가에 대해서 알고 싶고요.
물론 베이스는 이렇게나 다양한 책들을 잘 고르는 syo님에 대한 감탄이죠~~
그러니까 저는<그 얘한테^^> 뭐라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17-12-09 12:41   좋아요 0 | URL
이래놓고 《제2의 성》은 왜 안 읽느냐 syo야 syo야...... 아이구 인마....

이하라 2017-12-09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거지만 정말 독서량이 어마무시 하시군요. 놀라울 뿐입니다^^;

syo 2017-12-09 13:49   좋아요 0 | URL
공부하기 싫어서 무작정 아무거나 읽는 느낌이지요^^

이하라 2017-12-09 14:04   좋아요 0 | URL
그렇지않더걸요. 독서량뿐만아니라 독서대상에서도 맥락이 있는게 거대한 의식이 태동할 독서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

syo 2017-12-09 14:12   좋아요 0 | URL
헉.... 아니예요. 다 까먹고 잊어먹고.... 그냥 막 읽다가 또 흥미 좀 생기면 읽고 그러는 겁니다. ㅎㅎㅎ

이하라 2017-12-09 14:21   좋아요 0 | URL
잊는만큼 남는 것이 사상의 깊이를 더해주지 않을까 싶네요. 겸손해 하시지만 언젠가 syo님의 독서와 사색의 결과가 꽃피우는 날이 기대됩니다^^

syo 2017-12-09 14:55   좋아요 0 | URL
하하; 입문서 몇 권에 만화책 몇 권 보고 큰 칭찬 받아서 부끄럽긴 한데 칭찬해주신 이하라님이나 저나 민망할 일 없게 열심히 읽겠습니다.^^

2017-12-09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9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prenown 2017-12-09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험공부하다 싫증나 머리 식힐겸 읽은 책이 이 정도예요?...

syo 2017-12-09 14:10   좋아요 0 | URL
아뇨, 제대로 시험공부하기가 너무 싫은데 그렇다고 마냥 놀면 쓰레기니까 그나마 명분있게 공부 안하려고 읽은 거지요. 머리 식히다니요. 저 책들 땜에 머리 다 빠질 뻔 했는걸요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7-12-09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와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인생 어렵단 상황은 같은 거 같습니다. ^^

syo 2017-12-09 19:13   좋아요 0 | URL
우리 힘낼까요 북다님ㅎㅎㅎ^^

짜라투스트라 2017-12-0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syo 2017-12-09 22:0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왜 웃으셨어요

짜라투스트라 2017-12-09 22:09   좋아요 0 | URL
글이 재미있어서요^^

syo 2017-12-09 23:17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비밀이^^

psyche 2017-12-10 0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 님 책 그만 읽고 공부하셔야죠!
근데 사실 책을 안 읽는다고 그시간에 공부하는건 딱히 아니라는 게 함정이죠. 그럼 어쩔 수 없이 계속 읽으셔야??ㅎㅎ

syo 2017-12-10 08: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딱히 공부 안 할 것 같아 ㅎㅎㅎ
망했다......인생 뭘까..

독서괭 2017-12-1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시험기간에는 철학책도 재미있는 거 아니었나요? 좀만 더 읽고 가 내가 잘해줄게 하고 책이 말하는데 어찌 안 읽겠어요..ㅋㅋ 이번엔 칭찬하신 책이 많아서 제 보관함 속 책도 슝슝 늘어만 갑니다...

syo 2017-12-10 12:25   좋아요 0 | URL
전 시험기간에 지뢰찾기로 내리 네 시간을 탕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ㅋㅋㅋㅋ

페크pek0501 2017-12-10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기자기한 페이퍼입니당~~ 저도 요렇게 써 보고 싶군요.

syo 2017-12-10 21:59   좋아요 0 | URL
하나 읽고 한줄 한줄 소중히 모아놨다가 좀 모인다 싶을 때 빵 하고 방출하는 방식입니다.

말해 놓고 보니까 별 거 아니네요 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8-02-04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 syo님 여전히 헤비 리더시군요. <찰스 다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진화>, <빌 브라이슨의 아프리카 다이어리> 저도 모두 재밌게 읽은 책들입니다^^

그리고... <원펀맨> 최고죠ㅋ 비트겐슈타인과 러셀의 비유도 적절했습니다!ㅋ

syo 2017-12-18 17:05   좋아요 1 | URL
사실 저 책들 중 가장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원펀맨이었지요......

고양이라디오 2017-12-18 17:19   좋아요 0 | URL
저도 동의합니다ㅎ 요즘 책이 재미없는 것은 책이 문제가 아니라 제가 문제겠지요? 요새 책을 바도 영화를 봐도 예전처럼 재밌지가 않네요ㅠㅋ

syo 2017-12-18 17:41   좋아요 1 | URL
네. 그건 100퍼 고라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일 년에 몇 번씩 진짜 책이고 뭐고 꼴도 보기 싫은 상태에 들어서는데 지나고 나면 그게 다 제 마음의 문제, 제 여유의 문제고 그렇더라구요. 그러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돌아오지요. 고라님도 너무 신경쓰지 마시고 지내심이?

막시무스 2018-02-04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 만한 책을 고를때마다 syo님의 리뷰안내가 항상 있네요!ㅎ 감사합니다!
그리고 대단하세요!

syo 2018-02-05 01:00   좋아요 0 | URL
아니 뭐 대단까지 ㅎㅎㅎㅎ
한 줄이 우연히 막시무스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하이드 2018-03-23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하우 투 리드 시리즈 읽기 어떤가요?

syo 2018-03-23 20:10   좋아요 0 | URL
제목만 보면 쉬운 입문서 시리즈 같지만, 실제로 그렇게 만만한 책들이 아니었어요.

초보자들을 위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확고하고 기초적인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인물들에 대한 저자들의 독창적인 생각이 많이 녹아 있는 시리즈입니다.

저는 기초 지식이 꽤 있었던 마르크스나 프로이트, 마키아벨리는 썩 좋게 읽었고, 아는 게 조금이라도 있던 라캉이나 푸코는 어찌저찌 읽어냈는데, 아는 게 거의 없던 니체는 읽다가 울 뻔 했어요......

하이드 2018-03-23 22:53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 구매욕구를 마구 자극해 주시는군요. 전자책 대여 이벤트 있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큰 도움 되었습니다.
 
어휘력이 교양이다 - 말 한마디로 당신의 평가가 바뀐다
사이토 다카시 지음, 장은주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1


사이토 다카시는 syo에게 훌륭한 스승이다. syo는 그를 통해 인간관계에 관해 너무도 많은 지혜를 배웠다.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만 적어본다면,


법칙 1. 애정 총량 보존의 법칙 : 세상엔 뭘 해도 이쁜 사람이 있는만큼 뭘 해도 별로인 사람도 있더라.

법칙 2. 애정 불변의 법칙 : 비 올 때 별로인 사람은 대체로 비 안 올 때도 별로더라.

법칙 3. 애정 관성의 법칙 : 한 번 별로인 사람이 뭔가 하면 그게 또 그렇게 별로더라.

법칙 4. 애정 가속도의 법칙 : 한 번 별로인 사람은 점점 더 별로더라.

원리 1. 애정량-에너지 등가의 원리 : <E=mc^2> 즉, 인간은 누군가를 까겠다고 맘만 먹으면 그저 콧구멍이 두 개라는 이유만으로도 막대한 에너지를 동원해 깔 수 있더라.

원리 2. 방향성의 원리 : 한 번 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까고 까고 또 까다가 멈추지 못하고 계속 까더라


과연 사이토 다카시가 syo에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까지 하는지, 오늘날 이 시점에서는 추적이 불가능하다(법칙 1, 2). 왜 syo는 사이토 다카시의 책만 만나면 투견 챔피언마냥 어금니를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는지 도저히 모르겠으나(법칙 3, 4), 그래도 법칙은 법칙, syo가 무슨 용 빼는 재주 있어서 그의 책을 그냥 스쳐지나가겠는가. 어차피 내가 까도 그가 볼 것이 아니므로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리, 그렇게 이를 앙다물고 버텼건만은. 나중에 올리려고 한줄평을 메모하기 시작했는데,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마냥 한 줄이 두 줄이 되고 두 줄이 네 줄이 되고 네 줄이 여덟 줄이 되는(원리 2) 신묘한 체험을 하고야 말았는지라, 이럴 바에는 그냥 리뷰를 따로 쓰자 해서 이렇게 판이 커졌다.



2


책을 권하고, 글쓰기를 권하고, 철학을 권하고, 이제 어휘력까지 권하는 훌륭한 권학자 사이토 다카시의 책이 syo에게 시종일관 별로인 이유는 일단 이런 곳에 있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즐거운 트레이닝을 하고 있으면 어느 샌가 어휘력이 단련된다. 스스로도 만족하는 대화가 가능해져 부하 직원이나 상사, 거래처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7)


한편, 200색의 물감을 사용하는 사람은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여 상대를 움직일 수 있다. 부하 직원에게 지시를 내릴 때도 자신을 어필할 때도, 업무상 상담도, 사생활에서의 잡담도, 200색의 물감을 갖고 표현할 수 있다. 당연히 당신이 받는 평가도 크게 달라진다. (8)


비즈니스 현장에서 어휘가 부족하면 첫인상이 나빠져 '이 사람을 더 알고 싶다. 또 만나고 싶다, 함께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된다. 또한 부하 직원이나 후배로부터는 말에 깊이가 없다고 무시 당할 가능성도 있다. 어휘가 부족하면 어른으로서, 비즈니스맨으로서, 스스로 큰 핸디캡을 짊어지게 되는 셈이다. (19 20)


학생들에게도 좋은 소식이 있다. 세 가지 포인트는 취업 면접 자리에서도 활용할 수 있다. (52)


책 날개의 작가 소개에 따르면 이 사람이 일본 최고의 교육학자이자 'CEO들의 멘토'로 인정받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는 느낌이다. 어휘력이 늘면 일어날 수 있는 '유익한' 상황들을 묘사한 대목들이 죄다 무슨 회사에서,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거래 상대방을 만나서, 이런 식인데, 또 막상 읽어보면 정말 이 사람 회사 나가본 지 백만 년은 됐겠다 싶을 정도로 실체감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제목에 붙인 단어 '교양'을 소비하는 태도가 지극히 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syo는 CEO들의 멘토라는 칭호가 붙는 사람들을 믿지 않고, 그런 칭호를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3


어휘력에 격차가 있는 사람끼리의 커뮤니케이션은 원만히 흘러가지 않게 된다. (28)


최근 어휘력의 저하는 학생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같은 고민을 갖고 있는 대기업 간부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은 적도 많다.

"요즘 이삼십 대 부하 직원은 어휘가 빈약해서 제대로 기획을 못해요."

"열심인 건 알겠는데, 말을 하면 도통 통하지가 않아요." (29)


어휘가 빈약한 사람들끼리도 즐거운 대화는 가능하다. 난해한 말도 쉬운 말로 바꾸면 된다. 하지만 말의 배경에 있는 스토리를 공유하면 의사소통의 농도가 확연히 높아진다. 그것이 또한 즐겁다. 젊은 사람이 친구끼리만 쓰는 말로 "이거 꿀잼이겠다" 와, "와 , 핵꿀잼", "그러네, 꿀잼허니잼!"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범이 된 듯 동지의식마저 싹트게 된다. 우리들의 선배 중에는 놀랄 만큼 중국 역사에 관한 교양을 갖춘 분이 많다. 방심한 순간 "거래처 담당과는 수어지교水魚之交해야만 한다."는 말을 해올지도 모른다. (104 105)


이런 대목은 정말 한심하다 못해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놀랄 만큼 중국 역사에 관한 교양을 갖춘 분'이 쓴다는 말이 꼴랑 '수어지교'라는 대목은, 피아식별 없이 그냥 수류탄을 까서 던져 놓은 꼴이다. '우리들의 선배' 세대에서는 '수어지교'만 써도 놀랄만한 교양을 갖춘 인물로 대접받을 수 있나 보다. 물론 이런 자잘한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고,


저자는 자기 세대가 쓰는 용어를 모르는 젊은이를 두고 '어휘력의 저하'라는 일방적 진단을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휘'가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다. 그들도 나일리지 쌓인 티 내지 말고 낄끼빠빠하라는 말 앞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신조어를 '어휘'로 인정하지 않는다. '공범이 된 듯 동지의식마저 싹트게 된다'는 대목에서는 신조어를 범죄처럼 취급하고, 그 말들을 유통하는 젊은 사람들을 범죄자로 여기고 있음이 엿보인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단정한다. 설령 이런 '유행어'들이 언어 생태계를 교란하는 면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취급을 받고 사용자들이 자동으로 '어휘가 빈약한 사람' 대접을 받는 일이 온당한가.


결국 이것은 '어휘'를 인증할 수 있는 권력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일종의 투쟁이다. 우리는 종종 순진하게도 특정한 말을 많은 언중이 사용하면 바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만, 실제로 '어휘'의 체계가 갱신되는 속도는 생활세계의 변화를 신속하게 따라잡지 못한다. '짜장면'은 표준어가 되기 아주 오래 전부터 널리 쓰였지만, 된소리 현상이 언어 사용자의 정신을 건드린다고 하여 '자장면'을 지지하던 언어권력자들의 저지 탓에 한참 나중에야 가까스로 표준어의 자리에 올랐다. 특정한 어휘를 사용하는 언중의 투쟁력과 그에 반대하는 이들의 저항력 사이에서 길항하며 언어는 진화한다. 경제권력을 쥔 이들이 문화권력을 쥐고 있고, 문화권력을 쥔 이들이 언어권력을 가지고 있다. 인용문에서 드러나는 사이토 다카시의 면모는 그가 말하는 '교양'의 초점이 어느 계층의 입맛에 맞게 조율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와, 과연 'CEO의 멘토', 명불허전. 사이토 다카시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런 관점이 그의 거의 모든 책에 은근히 녹아들어 있음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 사람 입에서 나오는 '교양'이 하나의 계층을 부지불식간에 다른 계층의 문화식민지로 만드는 전략으로 전용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책을 읽어나가기를 권합니다. 


물론 순수하게 언어의 오염과 수준 하락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걱정이 온당하다고 syo도 생각한다. 실제로 거의 경쟁적으로 일어나다시피하는 조어활동이 우리말을 급하게 변질시키는 측면이 있다. 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경계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그러나 조정은 여러 언어 계층 사이의 이해와 인정, 토론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생각해보지도 않고 단지 상대방 계층이 사용한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변질이나 정체로 몰아붙이는 일은 폭력이다. 


만약 '꿀잼허니잼'과 '수어지교' 중 어느 한 쪽만 고르고 나머지 하나를 사장시켜야 한다면 syo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꿀잼허니잼'을 살리고 싶다. '잼'이 '재미'라는 사실만 알고 읽으면, 이 단어는 언어유희를 기본 장착한데다, 꿀, 허니, 잼 같은 달콤한 미각 단어들이 의미 속으로 녹아들어 재미를 공감각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기가 막힌 단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단어의 생김새나 만듦새가 모난 데가 없진 않으나 그런 단점을 뛰어넘는 가치가 있다고 보아서다. 반면 '수어지교'라는 말 속에서 물은 고기에 비해 일방적으로 불리하다. 고기는 물 없이 못 살지만, 물은 고기가 있든 없든 상관없기 때문이겠다. 유비가 실제로 저 말을 했을 때, 본인이 고기고 제갈량이 물임을 명백히 밝혔다. 과연 제갈량은 유비와 그의 아들에게 열심히 착취당하다 딱히 뭐 하나 이뤄놓은 것 없이 오장원에서 쓸쓸히 별이 되었다. 결국 이 말은 호혜적인 의미에서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아름다운 관계를 드러내기보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의지하거나 이용 또는 기생하는 양상을 드러내는 어휘로 읽어낼 여지도 있는 것이다.


'말의 배경에 있는 스토리를 공유하면 의사소통의 농도가 확연이 높아진다'라니. 진짜 '교양'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다면, 그냥 있는 고사성어를 외워서 갖다 쓰는 방식으로 공유하기보다는 좀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정말 거래처 담당을 물로 보고 자신은 고기가 되어 열심히 빨아올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교양있게' 고백한 것인데 '어휘가 빈약한' syo가 몰라뵈었거나. 물론, '꿀잼허니잼'은 아마 번역 과정에서 적당히 비슷한 용어를 가져온 것이겠으니 전적으로 사이토 다카시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4


사이토 다카시의 새 책이 기존에 내놓은 책에서 50% 정도를 자가복제하여 큰 품 들이지 않고 만들어지듯이, 그를 향한 syo의 비판 역시 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이런 짓은 밤새도록 할 수 있다. 




5


밤 샐까봐 관둔다. 이제 이런 관계를 좀 청산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이렇게 꼬박꼬박 까려면, 꼬박꼬박 읽어야 한다. 유시민 작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티는 진짜 내 책을 열심히 읽은 독자라고. syo는 인생의 멘토 유시민 선생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일이 거의 없지만, 이번만큼은 예외겠다. 진짜 열심히 읽지는 않았다. 유시민 선생님을 까려면 그의 책을 열심히 읽어야 했겠으나, 사이토 다카시의 안티가 되는데는 열심이 불필요하다. 그냥 보면 보인다. 우린 그런 관계다. 척 하면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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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7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7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07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양반은 어휘력이 교양이며 소통의 근간이라고 하지만 대중소셜계의 최대 거봉이신 조르조 심농은 소통을 위해 작가가 사용하는 단어의 수를 최대한 줄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6000단어 안에서 소설을 쓰려고 했던 분이셨죠. 쉬운 언어로 소설을 쓰겠다는 야심.. 그리고 킹 옹께서도 어려운 언어를 버리고 대도록이면 중2 수준이면 모두 알아먹을 수 있는 단어로 글을 써써 대박난 분이죠. 저 양반의 논리라면 심능과 킹은 모자란 사람이죠.. 다양한 어휘가 아니라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게 중요한 거죠.. 멍청한 새끼.... 같으느리구.

syo 2017-12-07 20:34   좋아요 0 | URL
교양있는 단어랍시고 예시로 내 놓은 것들이 거진 다 사서삼경이나 사기 같은 곳에서 나오는 고사성어예요. 결국은 자기가 맨날 하던 ‘책 읽어라‘라는 말을 새로운 버전으로 한 것 뿐이예요. 정말 책 파는 방식의 신기원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2-0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책소개 글 보니 한국어는 어휘가 매우 풍부한 언어(단어가 44만 개 ) 라며 자랑하던데
공교롭게도 욕의 종류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도 한국어입니다. 사실 일본만 해도 욕 표현이 몇 개 없어요.
빠가야로.. 뭐 이 정도 몇 개... 한국어는 정말 어마어마하죠.. 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악랄하게 착취했다는 증거입니다.

syo 2017-12-07 20:41   좋아요 0 | URL
언제 꼭 풍부한 우리 욕에 관한 신랄한 글을 써 주세요.
어쩐지 그건 이 알라딘 바닥에서 곰발님이 독보적으로 하실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은 강한 예감이.....

yamoo 2017-12-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가 알라딘 서재에 많아야 하는데 말이죠. 사이토 다카시도 그렇고 이기주의 책도 그렇고 뭔 사람들이 다 좋다구 하는데, 도무지 이 찬사들이 거시기 해서 참을수 없다는...아닌 거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까줘야 하는데, 알라딘 서재에는 그런 분들이 많지 않아 좀 안타깝다는...

그런 면에서 쑈 님의 이 리뷰는 사이다라는!^^

시간이 되시면 이기주의 책들도 좀 까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로 회자되는 게 진짜 열받아요!

syo 2017-12-07 21:40   좋아요 0 | URL
이기주는 많은 사람들이 읽는 만큼 곰발님을 비롯해 다른 분들이 잘 까주셨어요. 반면 사이토 다카시는 죽어라 책을 내는데 매번 읽는 사람만 읽는 꼴이라, 누가 시킨 바 없지만 알라딘에서는 syo가 자체적으로 맡아 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기주의 책이라고 쓰신 걸 보니 어쩐지 이기주 씨 초등학교 때 별명이 선명하게 짐작되네요....

sprenown 2017-12-07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 알라딘에서도 리뷰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좋아요‘의 품앗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내글에 대해 ‘좋아요‘ 하니까 별로 내키지도 않는데, 내 글 ‘좋아요‘ 해 준 친구니까 ‘좋아요‘ 해주는 거.. 과연 이게 계승해야할 미풍양속인지 싶습니다. 애정욕구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최소한 리뷰를 꼼꼼히 끝까지 읽고, 비판할 것은 과감히 비판해야 북플이 더 활성화가 될 것 같습니다!

syo 2017-12-07 21:44   좋아요 0 | URL
저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좋아요‘ 누르는 일이 있어서 찔리네요...

좋아요 품앗이라는 표현이 신랄하고 좋습니다. 말씀도 정론이구요. syo도 북플의 활성화를 위해 앞으로 꼼꼼히 끝까지 읽고 행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12-08 0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 말씀처럼 많은 어휘를 사용해서 대접받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보다, 나와 다른 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그릇으로 삼아야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syo 2017-12-08 00:27   좋아요 1 | URL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저는 그저 사이토 다카시 까기 바빠서 결국 어떤 의미있는 결론을 내지를 못했네요.... 반쪽짜리 글이로군요.

프리즘메이커 2017-12-08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애들 책은 중간이 없는 거 같아요. 퀄리티가 대박아니면 쪽박..

syo 2017-12-08 07:33   좋아요 0 | URL
세상 어디에나 책팔이는 있다....

cyrus 2017-12-0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제자는 스승의 단점을 알고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스승을 뛰어넘을 수 있어요. 그래서 저도 독서의 중요성을 알려준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을 비판적으로 보려고 합니다. 그가 문학을 저평가한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꼰대 느낌이 나요.

syo 2017-12-08 12:55   좋아요 0 | URL
전 저냥반을 스승으로 안 쳐서 뛰어넘고 뭐고 할 필요가 없지만, cyrus님은 얼른 다치바나 다카시를 뛰어넘으시기를. 그 양반은 문학을 저평가한 것보다 지독한 성차별주의자라는 것이 더 문제지요.

2017-12-08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로필 이미지만 놓고 보았을 때 지옥불로 반신욕을 마치고 돌아온 분노의 불 뿜는 용 쯤으로 추정될 수 있는 syo는, 실제로 만나 보면 의외로 다정한 남자, 라는 식의 진부한 반전 따위 모르는 대쪽 같은 인물로서,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몇 건씩 걸리는 대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프로불편러로 활동 중이다. 중이었다. 주로 아, 치밀어 오르는 걸 어쩌란 말이냐, 하는 식인데, 모 야당 대표, 원내대표, 수석대변인 같은 경우는 얼굴만 시신경에 포착돼도 바로 벌컥, 한심한 발언, 빻은 발언, 물타기 발언, 우리가 남이가 발언, 인면수심자가당착 발언은 읽거나 듣고 나서 한동안 부글부글, 지는 뭐가 그리 정의롭다고 눈과 귀에 포착되는 세상의 이런저런 사건 사고들에 꼼꼼하게 분노하는 희한한 성정으로 자라난 syo는 그래서 친구가 별로 없다. 


분노는 좋은 거라 배웠다. 어른이나 학교나 사회는 분노가 좋지 않은 거라고 가르쳤는데, 그런 가르침이야말로 바로 분노가 좋은 거라는 가장 명백한 증거였다. syo가 읽은 책은 항상 분노를 주문했다. 분노하라. 따져 물어라. 참지 마라. 분노하지 않아야 할 때 분노하는 것보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인내는 마취약으로 만든 창살이고, 혹여 인내가 끝나는 순간 무엇인가를 쟁취할 수 있더라도 그 인내를 끝내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분노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주야장천 분노에 분노를 두텁게 바르며 살고 있었는데,


그 분노의 절반이 기만임을 알았다. 


모든 분노는 타자로부터 온다. 저건 아니지, 하는 마음에서 온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조차, 내가 믿어왔던 나의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발견했을 때 내 안의 타자로부터 온다. 즉, 분노는 타자의 만행과 나 사이에 선을 긋는 일이다. 내 분노가 크면 클수록, 나는 결백하고 선량해진다. 그래서 분노는 중독성이 있다. syo는 전 세계에서 13등쯤 분노를 잘하는 사람이었으니, 제 놈보다 고결한 사람이 12명쯤 있을거라 믿고 살았을 것이다. 분노의 랭킹을 올리는 일이 도덕의 랭킹을 올리는 일이 아닌데, 그 차이를 몰랐거나, 무의식중에 무시하면서 열심히 화를 냈을 것이다. 반자동 분노가 자동 분노가 되고, 손가락과 혀가 분노의 자판기가 되었을 것이다. 


분노의 대상을 올바르게 고르는 것은 중요하다. 분노를 행동으로 바꾸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내가(혹은 내 무의식이) 분노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분노해야 할 곳에 분노하고, 그 분노를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엔진이 된다면, 내가 분노를 통해 챙기려 했던 것의 실체가 추앙이나 인정, 도덕적 만족 같은 몹쓸 물건이 아닌지 항상 되짚어 보는 일은, 세상의 변화를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나침반이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자신이 겪었고, 겪고 있으며, 겪어야 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다주지만, 페미니즘을 모르는 여성도 자신이 겪는 것이 무엇인지는 살갗으로 안다. 그런 경험들은 남성에게 살갗으로 주어지지 않으므로, 남성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한다. 그게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하는 일이다. 똑같은 사건도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이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테면 남성도 성추행을 당할 수 있다. 그 경험이 여성이 당하는 것에 비해 덜 끔찍하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추행 사건을 둘러싼 전후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반응과 압박의 경험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르게 주어진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이성이 내 엉덩이에 손을 올리는 순간 느끼는 기분은 같을 수 있어도, 그 사건을 중심으로 파문처럼 일어날 추후의 전개들이 같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남성은 여성과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 볼 뿐이다.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남성으로서의 syo는, 내가 피해자가 아닌 일에 분노할 때, 내가 겪지 않은, 운 좋게 내가 겪지 않아도 되었던 일에 분노할 때, 분노하든 분노하지 않든 딱히 내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안에 분노할 때, 자신의 분노가 향하는 칼끝을 쳐다보는 것만큼이나 그 분노의 꼬리가 은근슬쩍 닿아 있는 곳이 어딘지 항상 검증해야 한다. 정신차리고 똑바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축적된 자동적 분노가 척척 쌓아 올려준 왕좌 위에 걸터앉아 스스로를 킹 오브 도덕이라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칼처럼 구분할 수 있는 교황이라도 된 것처럼 올바른 사람들과 폭도를 지명하려 들지도 모른다.


'저건 아니지'를 아무런 손실 없이 '이건 아닌데'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읽고 쓰며 묻는다. 몸으로 실감한 진실힌 표현인지, 설익은 개념으로 세상만사 재단하고 있지는 않는지. 남의 삶을 도구처럼 동원하고 있지는 않은지. 앞으로 삶에 덤비지 않도록, 글이 삶을 초과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_ 은유,『쓰기의 말들』 


우리가 노력을 기울이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약자와 빈자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착취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존재들이 느끼는 고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리고 최소한의 삶의 조건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주저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좌파가 아니다. 만일 세상이란 곳이 원래 그렇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든지, 혹은 우리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좌파일 수 없다. 좌파는 이러한 상황에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_ 피터 싱어,『다윈주의 좌파』


'내면의 얼굴 찾기'는 용기와 결단의 문제다.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만연한 것', '사회적 관습 거스르기'를 하지 않고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의 거울인 얼굴 찾기 역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짐멜의 말처럼 현상은 영혼을 감추면서 또한 드러낸다. 이 말은 곧 자기 얼굴의 상품화를 멈추는 순간, 얼굴에 영혼이 깃들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_ 이하준,『고전으로 철학하기』 


텔레비전에 출연하거나 칼럼을 쓰는 어떤 오피니언 리더에게는 자신의 말과 글 속에 세상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하고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앞에 마이크가 놓여 있고, 자신이 쓴 글이 신문에 인쇄되어 독자에게 배달된다는 사실 자체만 중요하다. 그의 말과 글은 여론의 힘으로 정치를 올바르게 바로잡겠다는 의지보다는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싶은 나르시시즘의 욕구와, 혹여 권력자의 눈에 들어 이른바 '한 자리'를 차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면 하는 심산에 의해 지배된다.

_ 노명우,『세상물정의 사회학』 




디테일들은 밖으로, 통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거나 더 추악하거나 때론 상상보다 더 절절해서 그걸 듣는 누군가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쉽게 가려지거나, 윤색돠거나 다른 질감으로 변질되곤 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전체 구조와 진실성은 그 디테일들이 그것들 자체로 온전히 작용하고 반목하면서 촘촘하게 형성되는 법이다. 소위, 깊이라는 건 그렇게 드러난다. 심층이 얕다는 건 고로, 그것을 구성하는 표면들의 질감이 밋밋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_ 강정,「돋보기」, 강정 외,『시인의 사물들』


갈수록,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모든 걸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차고 넘친다. 세상은 안개에 갖히고 체제는 콧노래 부르며 힘을 더해 간다.

_ 김규항,『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힘센 자 편에 서기가 쉬운 법이다. 그 행동이 결국은 세상의 악을 더 공고히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도 모른 척한다. 대부분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약하다. 

_ 공선옥,『내가 사랑한 여자』


고통받는 사람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어려운 연습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곁에 있을 수는 있다. 있으면서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특히 판단을 삼갈 수 있다. 고통당하는데 누가 있어준다는 것-아무리 있는 듯 없는 듯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걸 통제한다고 뻐기는 담론보다 훨씬 윗길이다. 눈길 한 번, 미소 한 번, 말 한마디, 이것이 내 몫의 행동이다. 사랑하는 존재가 파멸해가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채로 그저 곁에 있어준다는 것, 힘을 주는 몸짓을 찾아내려 애쓴다는 것, 이는 어려운 과제다. 그러는 동안 절망이 압도해버린다! 연약한 미소, 불분명한 말, 숱한 노력 끝에 얻어낸 지원, 이런 것들이 부질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이 없다면 핵심이 빠진 것이다.

_ 알렉상드르 졸리앵,『인간이라는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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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05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다독가의 포스를 유지하는 군요.. 대단해요!

syo 2017-12-05 21:40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스크랩 해놓은 것들 재활용하는거예요^^

2017-12-05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5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5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05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7-12-06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상 얘기하지만, 쇼님의 글에 성찰이 있어서 너무 좋아요. ‘이건 아닌데‘ 만큼이나 나를 스스로 돌아보는 것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쇼님의 글에는 그게 있어요. 열심히, 자꾸자꾸 써주세요!!

syo 2017-12-06 08:26   좋아요 1 | URL
그런 척 하는 걸수도 있어요..... 이게 다 자신의 도덕성을 움켜쥐기 위한 반성문일수도!!

단발머리 2017-12-0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댓글 좀 보세요~~
자신의 도덕성을 움켜쥐기 위한 반성문~~~
댓글도 명문이예요.
그러하니, 그러므로, 그래서!!!

열심히 자주자주 써주세요!!
읽는 재미를 위해서요~~~~~~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이 문단이요.
정말 좋네요.
이렇게 페미니즘을 읽는 사람이야말로 페미니즘을 제대로 관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성도 남성도요.

syo 2017-12-06 12:04   좋아요 1 | URL
설마 그렇게까지 괜찮은 놈이려구요 ㅎㅎㅎ

열심히 자주자주 쓰고는 싶은데,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17-12-07 14:11   URL
비밀 댓글입니다.